통합대장경

金剛三昧經論卷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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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_0060_a_01L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상권
045_0060_a_01L金剛三昧經論卷上


신라국(新羅國) 사문(沙門) 원효(元曉) 지음
이인혜 번역
045_0060_a_02L新羅國沙門 元曉 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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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이 경은 간략히 네 부문으로 나뉜다. 처음은 대의(大意)에 관한 서술이고, 다음은 경의 종지[宗]에 대한 설명이며, 셋째는 제목에 대한 해석이며, 넷째는 본문에 대한 풀이이다.

① 대의를 서술함[述大意]
일심(-心)의 근원은 유(有)ㆍ무(無)를 떠나 독자적으로 청정하며 3공(空)1)의 바다는 진(眞)ㆍ속(俗)을 융합하여 밝고 고요하다.
밝고 고요하다는 것은 둘을 융합했다고 해서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니요, 독자적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양 극[邊]을 여의었다해서 중간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중간도 아니며 양극도 여의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법[不有之法]이라 해서 무(無)에 머무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지 않다[不無之相]해서 유(有)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하였으니, 진(眞) 아닌 사(事)가 애당초 속(俗)이었던 적이 없으며, 속(俗) 아닌 이(理)가 처음부터 진(眞)이었던 적이 없다. 둘을 융합하였으되 하나도 아니니 진ㆍ속의 성품은 그것대로 다 성립하고, 염(染)ㆍ정(淨)의 모양은 그것대로 다 갖추어진다. 양 극[邊]을 여의었으나 중간이 아니므로 유ㆍ무의 법(法)이 제각각 다 이루어지고 시(是)ㆍ비(非)의 뜻이 제각각 다 완전하다.
그러므로 깨뜨림[破]이 없되 깨뜨리지 않음이 없으며, 세움[立]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가히 아무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無理之至理]이며,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장 그러한 것[不然之大然]2)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이 이 경에서 밝히려는 큰 의도[大意]이다. 참으로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장 그런 것이기 때문에 경의 말씀[能說]이 묘하게도 진리에 들어맞고, 없는 이치[無理]이면서도 지극한 이치이므로 경의 취지[所詮]가 시공(時空)의 제약을 넘어선 것이다.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금강삼매(金剛三昧)’라 이름하고, 세우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대승을 망라한 경[攝大乘經]’이라 이름하며, 모든 취지가 이 두 가지 의미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한량없는 뜻을 지닌 종[無量義宗]’이라고도 이름한다. 이러한 의미들 중에서 우선 하나를 들어 제목을 붙였으므로 『금강삼매경』이라고 말한다.

② 경의 종지를 설명함[辨經宗]
이 경의 종요(宗要)를 나누어서 말할 수도 있고 종합해서 말할 수도 있다. 종합해서 말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 요점이 되며, 나누어서 말하면 열 가지 중층적인 법문[十重法門]이 종취[宗言]가 된다.
관행(觀行)에서 관(觀)이란 횡적인 논리로서 대상[境]과 지혜[智]에 공통되는 것이고, 행(行)은 종적인 논리[竪望]로서 인과(因果)에 걸치는 것이다. 과(果)는 다섯 가지 법[五法]이3) 원만함을 말하고, 인(因)은 이른바 6행(行)4)이 다 갖추어짐을 말한다. 지(智)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말하고, 경(境)이란 즉, 진(眞)과 속(俗)이 다 없어짐을 말한다. 진과 속이 모두 없어진다 해서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본각과 시각이 있다 해서 생겨남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생겨남이 없는 행이라 관념이 없는 데[無相]에 그윽하게 합하게 되며, 관념이 없는 법이라 본래적인 이익을 순조롭게 이룬다. ‘이익[利]’에다가 기왕에 ‘본래적[本]’이라는 말을 붙였을 때는 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실제(實際)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제(際)’에다가 기왕에 ‘실답다[實]’는 말을 썼을 때는 그것이 자성을 떠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제(眞際) 또한 공(空)하다. 모든 부처님들도 여기에 들어 있으며 모든 보살도 따라서 여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간다’ 하며, 이것이 바로 6품(品)의 대의(大意)이다.
관찰해서 들어가는 문[觀門]에서, 믿고 이해하는 첫 단계로부터 등각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6행(行)을 세운다. 이 6행이 만족하게 성취될 때 9식(識)5)이 전환하여 때 없는 의식[無垢識]을 드러내어 깨끗한 진리의 세계[淨法界]를 이루며, 나머지 8식(識)6)을 전환시켜 4지(智)7)를 이룬다. 또한 5법(法)이 이미 원만해졌으므로 3신(身)8)을 구비한다.
이와 같은 원인과 결과는 대상과 지혜를 떠나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과 지혜는 둘이 아니고 오직 일미(一味)일 뿐이다. 그러므로 일미의 관행(觀行)을 이 경의 종취[宗]로 삼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대승의 법상(法相)이 없고, 한량없는 취지 중에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름이 헛되지 않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여기까지가 하나의 관(觀)에 대해 종합해서 논(論)한 것이다.
이를 다시 열 가지 문[十門]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종취로 삼는 것을 일문(一門)에서부터 하나씩 늘여 10문(門)까지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 ‘일문(一門)’이란 무엇인가? 일심(一心) 가운데 일념(一念)이 움직여 하나의 실다운 것[一實]에 순응하여, 하나의 행[一行]을 닦고 일승(一乘)에 들어가 하나의 도[一道]에 머무르며, 하나의 각[一覺]을 사용해서 일미(一味)임을 깨닫는 것이다.
‘2문(門)’이란 무엇인가? 두 언덕[二岸]9)에 머무르지 않고서, 두 무리[二衆]10)를 버리고 두 가지 아집[二我]11)에 집착하지 않고, 양 극단[二邊]을 떠나 2공(空)12)의 이치를 통달하여 2승(乘)13)에 떨어지지 않고 두 가지 진리[二諦]14)를 융화하여 두 가지 깨우쳐 들어가는 길[二入]15)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3문(門)’이란 스스로 3불(佛)16)에 귀의하여 3계(戒)17)를 받으며, 세 가지 큰 진리[三大諦]18)에 순응하여 3해탈(解脫)19)과 등각의 세 경지[等覺三地]20)와 묘각삼신(妙覺三身)21)을 얻고 3공취(空聚)22)에 들어가 3유심(有心)을 없애는 것이다.
‘4문(門)’이란 4정근(正勤)23)을 닦고 4신족(身足)24)에 들어가 네 가지 큰 연력[四大緣力]25)에 의지하여 4의(儀)26)로 항상 이롭게 하고 4선(禪)27)을 벗어나며 네 가지 오류[四謗]28)를 멀리 여의어서 네 가지 큰 서원[四弘地] 가운데서 네 가지 지혜[四智]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5문(門)’이란 5음(陰)이 생함에 따라 50악(惡)이 갖추어지기 때문에 다섯 가지 근[五根]29)을 심고 5력(力)30)을 길러 다섯 가지 공의 바다[五空海]31)를 건너고, 오등위(五等位)32)에 서서 다섯 가지 청정한 법[五淨法]을 얻고 다섯 갈래의 중생들[五道生]33)을 제도하는 것이다.
육ㆍ칠ㆍ팔ㆍ구 등의 문이란 무엇인가. 6바라밀[六度]을 두루 닦아 여섯 경계[六入]에 다시는 빠지지 않게 하며 7각분(覺分)34)을 행하여 일곱 가지 장애되는 마음[七義科]35)을 끊으면 8식(識)36)의 바다가 밝아져서 무구식[無垢識]인 9식(識)의 흐름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수행의 처음 단계인 10신위(信位)로부터 보살의 열 가지 경지[十地]에 이르도록 온갖 행(行)이 갖추어지고 모든 덕이 원만하게 성취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가지 문(門)이 이 경의 종지(宗旨)가 된다. 경문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해당 문구가 나올 때 설명하겠다.
그러나 이 뒤에서 말하는 아홉 가지 문이 모두 한 가지 문에 포섭되며 한 가지 문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하나의 관(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펼쳐 보여도 하나인 문을 더 보태는 것이 아니요, 종합해 보아도 열 가지 문에서 줄어들지 않는다. 따라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 이 경의 종요(宗要)가 된다.

③ 제목을 해석함[釋題目]
이 경의 제목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섭대승경(攝大乘經)』이라 하고, 둘은 금강삼매(金剛三昧), 셋은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 한다. 처음과 나중의 두 이름은 다음에 해석할 것이고, 우선 중간의 제목을 해석하겠는데, 그 까닭은 이 이름 하나만을 이 경의 첫머리 제목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금강이라는 말과 삼매라는 말의 두 가지가 있으므로, 먼저 금강의 뜻을 해석하고 다음에 삼매의 뜻을 해석하겠다. 금강이라는 말에 다시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먼저 말뜻을 해석하고[先釋] 다음에는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겠다[後簡].
금강이란 사물에 비유해서 말한 것인데, 견실(堅實)함으로 그 바탕을 삼고, 깨뜨릴 수 있는 힘으로 공용(功用)을 삼는다. 금강삼매(金剛三昧)라는 뜻도 이와 같아서 실제(實際)로 체(體)를 삼고, 뚫고 꿰뚫는 것으로 그 공능(功能)을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체를 삼는다 함은 이치를 증명하고 근원에 끝까지 다다른다[窮究]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에서 말하기를 ‘법을 증득하는 진실한 정(定)이다’ 라고 하였다.
뚫고 꿰뚫는 것으로 공능(功能)을 삼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모든 의혹을 깨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선정(禪定)을 꿰뚫는 것이다. 의혹을 깨뜨린다 함은 설명을 통하여 의심을 끊기 때문이니, 아래 본문에서 ‘결정코 의심과 후회를 끊는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정을 꿰뚫는다 함은 이 (금강의) 선정이 다른 삼매(三昧)들을 유용하게 하기 때문이니, 마치 값진 구슬들을 꿰뚫어서 유용하게 쓰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대품경(大品經)』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금강삼매라 하는가? 이 삼매에 머물면 모든 삼매를 깨뜨린다[破]” 했는데, 그 논(論)37)에서 해석하기를 “금강삼매는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 없는 금강석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삼매도 모든 법 가운 데 통달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모든 삼매들을 다 유용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자거[硨磲]ㆍ마노[碼𥓲]ㆍ유리(瑠璃)는 오직 금강석만이 뚫고 들어갈[穿入]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대품경』에서 모든 삼매를 깨뜨린다[破]고 했는데 이 말은 꿰뚫는다[穿]는 뜻이다. 그 논에서 뚫고 들어간다 함은 경에서 깨뜨린다 하는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즉, 모든 삼매가 다 자성(自性)이 없음을 통달하여 저들 여러 가지 삼매로 하여금 스스로의 집착에서 떠나게 할 수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걸림 없이 자재(自在)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금강삼매’라는 말뜻을 해석하였다.
다음으로,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는 부분[簡別]에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정(定)과 혜(慧)로 간별하겠다.
【문】 금강반야와 금강삼매를 모두 금강이라고 하는데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전자는 지혜요, 후자는 선정(定)이니 이것으로 차별이 된다. 또한 금강반야는 인지(因地)와 과지(果地)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데 반해, 금강삼매는 그 위상이 과지(果地)에만 해당한다. 또 반야금강(般若金剛)은 세 가지 뜻을 갖추고 있는데 그 체(體)의 견고함, 그 작용의 날카로움, 그리고 특성의 넓고 좁음이다. 그러나 삼매금강(三昧金剛)은 이 중에 견고함과 날카로움만 취한 것이므로 이렇게 차별이 된다.
다음은 그밖에 다른 선정과 구별하겠는데,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금강삼매(金剛三昧)요, 둘째는 금강륜삼매(金剛輪三昧)이며, 셋째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이다.
『대품경』38)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금강륜삼매란 어떤 것인가? 이 삼매에 머무를 때 모든 삼매를 부분적으로 간직할 수 있다. 여금강삼매란 어떤 것인가? 이 삼매에 머무를 때 모든 법을 꿰뚫어 통달했어도 스스로 통달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저 논(論)에서 문답의 형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문】 세 가지 삼매를 어째서 모두 다 금강이라 말하는가?
【답】 처음에는 금강이라고만 말했고, 중간에는 금강륜(金剛輪)이라고 말했으며, 뒤에는 여금강(如金剛)이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금강삼매라 함은 모든 법을 꿰뚫었어도 꿰뚫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고 하셨고, “금강삼매는 모든 삼매를 통달할 수 있다” 하셨으며, “금강륜삼매는 모든 삼매의 바퀴[三昧輪]를 지닐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이 모두가 부처님 스스로 하신 말씀이다.
논(대지도론)에서 이를 해석한 자의 의도는 이렇다.
“‘여금강삼매’는 모든 번뇌와 얽매임을 끊어 다시는 나머지가 없게 한다. 마치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손에 금강을 잡고 아수라의 군대를 부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학인(學人)이 공부해서 마지막에 얻는 마음과 같으니, 이 마음으로부터 점차 세 가지 깨달음인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菩提)를 얻게 되는 것이다. ‘금강삼매(金剛三昧)’는 모든 법을 깨뜨려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 것이니, 마치 진짜 금강이 모든 산을 깨뜨려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금강륜(金剛輪)’이란 “모든 불법(佛法)을 깨뜨려 막힐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음을 뜻한다.”
내 생각에는, 여기서 모든 불법을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마치 전륜성왕이 윤보(輸寶)로 모든 왕들을 쳐부수어 다 복종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앞에서 말한 다른 두 가지 금강과는 그 뜻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다섯 가지 차별이 있다. 첫째는 비유가 다르다[喩別]. 이른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는 군대를 쳐부순다는 비유를 사용했고 금강삼매는 산을 깨뜨린다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는 법이 다르다[法別]. 여금강은 번뇌를 깨뜨리고, 금강은 다른 모든 법을 깨뜨린다고 하였다.
셋째는 지위가 다르다[位別]. 전자(여금강)는 아직 배워 익히는 지위[學位]에 해당하고, 후자(금강)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지위[無學位]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름이 다르다[名別]. 전자의 이름은 여금강삼매이니 다른 곳에서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그저 금강삼매라고만 할 뿐, 여(如)나 유(喩)가 없다. 그 까닭은 인지(因地)와 과지(果地)에 있어서 두 가지 정(禪)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인지에는 힘들여 닦아나가는 일[功用]이 있지만 과지에는 공용이 필요치 않으니, 덜고 덜어서[損之又損之] 무위(無爲)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또한 여금강은 부분적으로 비슷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 번뇌만 깨뜨렸을 뿐 나머지 법은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예리하다는 측면에서 금강과 동일함을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금강은) 깨뜨리지 못할 사물이 없으니, 삼매의 쓰임도 이와 같아서 깨뜨리지 못할 법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교설이 다르다[敎別]. 이른바 유학위(有學位)의 금강삼매는 『금강삼매본성청정부증불감경(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에서 설하였고, 무학위(無學位)의 금강삼매는 바로 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에서 설하고 있다.
이제 이 경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정은 모든 법을 깨뜨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금강삼매라 한다. 여섯 가지 해석 가운데 이것은 지업석(持業釋)39)이요, 비유를 취해서 이름한 것은 인근석(隣近釋)40)이다. 이것으로 이 경의 제목을 삼은 것은 의주석(依主釋)41)이니 그것은 정(定)이 중심어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두 번째로42) 삼매라는 이름을 해석한 것인데,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석이요, 둘째는 간별이다.
옛 스승이 말씀하기를 “저기에서 쓰는 삼매라는 명칭은 여기 말로는 바른 생각[正思]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 설을 인용하는 이유는 본문의 이치[文義]와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定)에 들었을 때, 대상이 되는 경계를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바른 생각’이라고 이름한다. 『유가론(瑜伽論]』43)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삼마지(三摩地)란 인식하는 대상[所緣]에 대하여 자세히, 그리고 바르게 관찰하여 마음이 한 경계에 집중된 성품[心一境性]을 가리킨다.
【문】 정(定)이란 고요함[靜]이어야 하고, 고요하다 함은 한 경계[一境]에 머무름을 뜻하는 것인데, 어떻게 자세히 바르게 생각하고 관찰한다[審正思察]고 말할 수 있는가?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은 마땅히 심사(尋伺)44)인데, 어떻게 정(定)을 설하면서 생각하고 살핀다고 할 수 있는가?
【답】 만약 하나의 경계[一境]를 지키는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면 흐리멍덩[惛沈]한 채로 경계에 머무르는 것도 정(定)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바르게 생각하고 살피는 것을 가지고 심사(尋伺)라고 한다면, 삿된 지혜[邪慧]로 사물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심사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思察) 즉 생각하고 통찰한다는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삿되고 바른 것에 관계없이 말과 뜻으로 분별하는 것을 사찰(思察)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심사이므로 다만 분별일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올바르게 그리고 명료하게 대상[緣境]을 아는 것에 한해서 바른 생각과 통찰이라고 한다면, 이 경우는 바르다는 말이 정(定)의 작용[用]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심사는 아니다. 정(定)은 분별과 무분별에 두루 통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핀다는 것을 기준으로 저 심사를 가려내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경계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의 경계에 머물기는 하지만 마음이 혼미하고 어두워서 자세히 살필 수 없다면 이는 흐리멍덩한 것이다. 반대로 하나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이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은 채로 바르고 자세히 관찰한다면, 이를 정(定)이라 이름할 수 있다. 때문에 생각해서 통찰한다는 점에서 혼침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머물러 있거나 또는 옮겨가거나 하는 특성을 가지고 마음이 정(定)에 들었다거나 산란하다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빠른 변론은 비록 빠르게 바뀌어 가지만 그 가운데 정이 있고, 느린 생각은 비록 오랫동안 경계에 머물러 있지만 사실은 산만한 것이다.
여기서 금강삼매를 바른 생각과 통찰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다. 거기에는 바르다던가 바르지 못하다던가 하는 관념이 없고, 생각이라고도 할 수 없고 생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만 다만 그릇된 분별과 삿된 생각을 구분하기 위해, 또 아무 생각도 없는 허공과는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부득이 정사(正思)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상과 같이 삼매라는 이름을 간략히 해석하였다.
다음으로 간별(簡別)을 통해 삼매의 뜻을 밝히는 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여러 가지 이름의 뜻을 하나씩 구별해 보는 것이요, 다음은 여러 가지 이름의 넓은 의미와 제한된 의미를 간추려 보는 것이다.
정(定)에는 대략 여덟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첫 번째는 삼마혜다(三摩慧多)로서, 여기 말로는 등인(等引)이라 한다. 흐리멍덩한 것[惛沈]과 들떠 있는 것[掉擧]의 치우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났기 때문에 등(等)이라 하고, 신통 등의 여러 가지 공덕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인(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등인은 후회 없는 기쁨과 안락에서 끌어내 지기 때문에 등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욕계(欲界)의 정(定)과는 다르다.
두 번째는 삼마지(三摩地)로서, 여기 말로는 등지(等持)라 한다. 등의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마음을 제어하고 잘 지켜서[護持] 밖으로 치달려서 흩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이름한다. 또한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한다. 예전에는 삼마제(三摩提)라고 했는데, 이것 또한 등지를 뜻하는 말이다.
세 번째는 삼마발제(三摩鉢提)로서, 여기 말로는 등지(等至)라 한다. 등지(等持) 가운데서 뛰어난 지위[勝位]에 이르게[至] 되기 때문에 등지(等至)라 이름한다.
네 번째는 타연나(駄演那)로서, 여기 말로는 정려(靜慮)라 한다. 고요하게 깊이 생각하기 때문이며, 흐트러진 생각을 진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나(禪那), 혹은 지아나(持阿那)라고 했는데 이는 지방이나 습속에 따라 말이 다를 뿐 모두 정려를 가리킨 것이다.
다섯 번째는 사마타(奢摩他)로서, 여기 말로 지(止)라고 번역한다. 마음을 경계에 멈추게 하므로 지(止)라고 이름한다.
여섯 번째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니, 마음을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게 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심일경성이라 이름한다. 예전에는 일심(-心)이라 했는데 이는 심일경성을 줄여서 말한 것이다.
일곱 번째는 정(定)이니, 대상을 살펴서 정착하기 때문에 정이라고 이름한다.
여덟 번째는 정사(正思)이니, 그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논사는 “삼매(三昧)라는 이름과 삼마제(三摩提)라는 이름은 단지 등지를 뜻하는 것일 뿐 다른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어째서 그런가? 예컨대 『금고경(金鼓經)』에서 열 가지 선정을 설명한 가운데, 앞의 3지(地)에서는 삼마제라 이름하고 뒤의 칠지(七地)에서는 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이름이 만약 같은 등지(等持)의 뜻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름을 고쳐서 앞과 뒤에 각기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이름이 어째서 같지 않은가? 만약 지방이나 습속의 차이 때문이라면 한곳에서 두 가지 이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전을 전한 이의 시대적 전후 때문에 다르다고 한다해도, 하나의 경에 삼마제(三摩提)와 삼마지(三摩地)라는 말처럼, (하나의 개념에) 두 가지 이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전한 이의 시대적 전후 때문에 다른 것이지 실상은 같은 말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삼매라는 이름과 삼마제라는 이름은 같은 경[本] 속에 있으니 어떻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앞에서 분별한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삼매의 넓은 의미와 제한된 의미를 밝힌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간략하게 네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첫째, 정(定)과 등지(等持)의 두 가지 이름이 가장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에 두루 통하며, 또한 삼계에 통하며 더 나아가서는 욕계(欲界)의 산란한 마음에도 통한다. 6위(位)의 심소(心所)45) 가운데 다섯 가지 별경[五別境]46) 중에도 삼마지가 있으며, 이것 역시 정(定)이라고 이름한다.
둘째, 심일경성 (心一境性)과 삼매(三昧)라는 두 이름은 다음으로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욕계에는 통하지만 한결같이 산란한 마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주삼매(船舟三昧)와 욕계에 결박된 아홉 가지 마음가짐[心住]의 심일경성 역시 욕계의 방편심에만 통하기 때문이다.
셋째, 삼마혜다(三摩呬多)와 정려(靜慮)라는 두 이름은 좁은 의미가 있다. 욕계의 마음에는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직 가볍고 편안한 마음[輕安]에 들어가는 경지만을 취해서 지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넷째, 삼마발제(三摩跋提)와 사마타(奢摩他)라는 두 이름은 가장 협소한 의미를 가진다. 즉, 정(定)의 경지 안에도 구별이 있기 때문인데, 사마타는 네 가지 지혜로운 수행 가운데 심일경성에 통하지 않고, 삼마발제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세 삼마지에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넓고 좁은 이름에 대해 대강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세 번째로 제목해석을 마친다.
045_0060_a_03L此經略開四門分別初述大意次辨經宗三釋題名四消文義第一述大意者夫一心之源離有無而獨三空之海融眞俗而湛然湛然融二而不一獨淨離邊而非中非中而離邊故不有之法不卽住無無之相不卽住有不一而融二故非眞之事未始爲非俗之理未始爲眞也融二而不一故眞俗之性無所不立染淨之相莫不備焉離邊而非中故有無之法無所不作是非之義莫不周焉爾乃無破而無不破無立而無不立可謂無理之至理不然之大然是謂斯經之大意也良由不然之大然故能說之語妙契環中無理之至理故所詮之宗超出方外所不破故名金剛三昧無所不立故名攝大乘經切義宗無出是二是故亦名無量義宗且擧一目以題其首故言金剛三昧經也第二辨經宗者此經宗要有開有合合而言之一味觀行爲要開而說之十重法門爲宗言觀行者觀是橫論通於境智行是豎望亘其因果果謂五法圓滿因謂六行備足智卽本始兩覺境卽眞俗雙泯雙泯而不滅兩覺而無生無生之行冥會無相無相之法順成本利利旣是本利而無得故不動實際際旣是實際而離性故眞際亦空諸佛如來於焉而藏一切菩薩於中隨入如是名爲入如來藏是爲六品之大意也於此觀門從初信解乃至等覺立爲六行六行滿時九識轉顯顯無垢識爲淨法界轉餘八識而成四智五法旣圓三身斯備如是因果不離境智境智無二唯是一味如是一味觀行以爲此經宗也所以大乘法相無所不攝無量義宗莫不入之名不虛稱斯之謂歟合論一觀略述如之開說十門爲其宗者謂從一門增至十門一門云何一心中一念動順一修一行入一乘住一道用一覺覺一味二門云何不住二岸以遣二衆不著二我以離二邊通達二空不墮二乘俱融二諦不違二入三門者自歸三佛而受三戒順三大諦得三解脫等覺三地妙覺三身三空聚滅三有心四門者修四正勤入四神足四大緣力四儀常利超出四禪遠離四謗四弘地中四智流出五門者於五陰生具五十惡故植五根而養五涉五空海跋五等位得五淨法度五道生如是等云何六七八九等門具修六度永除六入行七覺滅七義科八識海澄九識流淨始從十信乃至十百行備足萬德圓滿如是諸門爲是經宗皆在經文處當說然此後九門皆入一門一門有九不出一所以開不增一合不減十不增不減爲其宗要也第三釋題目者此經之目有其三種一名攝大乘經二名金剛三昧三名無量義宗初後二名次門當釋今且先釋中閒一目唯此一名在首題故於中有二先釋金剛後釋三昧初中亦二先釋後簡言金剛者寄喩之稱堅實爲體穿破爲功金剛三昧當知亦爾實際爲體破穿爲能實際爲體者證理窮源故如下文言證法眞實定故破穿爲能者有其二義一破諸二穿諸定破諸疑者起說斷疑故如下文言決定斷疑悔故穿諸定者此定能令諸餘三昧皆得有用如穿寶珠得有用故如大品經言云何名金剛三昧住此三昧能破諸三昧彼論釋云金剛三昧者譬如金剛無物不陷此三昧亦如是於諸法中無不通達令諸三昧皆得有用如硨磲碼碯瑠璃唯金剛能穿案云經言破諸三昧者破之言穿論中穿入釋經破故達諸三昧皆無自性令彼三昧能離自著由是無㝵得自在故釋名如是次簡別者於中有二先簡定慧金剛般若金剛三昧皆名金剛有何差別彼慧此定是爲差別又金剛般若通於因果金剛三昧位在果地又般若金剛具有三義體堅用利形狀寬狹三昧金剛但取堅利如是差別次別餘定有三類一金剛三昧二金剛輪三昧三如金剛三昧大品經言云何金剛輪三昧住是三昧能持諸三昧云何如金剛三昧住是三昧能貫達諸法亦不見彼論釋言問曰三種三昧何以皆言金剛荅曰言金剛中言金剛後言如金剛如金剛三昧佛言能貫穿諸法亦不見是穿金剛三昧能通達諸三昧金剛輪三昧能持諸三昧輪是皆佛自說義論者言如金剛三昧者能破一切煩惱結使無有遺餘譬如釋提桓因手執金剛破阿修羅軍卽是學人末後之從是心次第得三種菩提聲聞辟支佛佛無上菩金剛三昧者能破一切諸法入無餘涅槃更不受譬如眞金剛能破諸山令滅盡無餘金剛輪者破一切諸佛法無遮無㝵案云此中破諸佛法者如轉輪聖王輪寶能破諸王無不伏故是故與前二金剛別前二金剛云何別者有五差別一者喩別如金剛破軍金剛破山故二者法別前破煩惱後破諸法故三者位別前在學位後在無學故四者名別前名如金剛三昧餘處名金剛喩定後者直名金剛三昧除如及喩所以然者爲顯因果二定異故因有功用果無功用損之又損之以至無爲故又如金剛取其少分相似之義但破煩惱不破餘法故言金剛顯其全同金剛之利一切色物無不貫破三昧之用當知亦爾一切諸法亦無不破故五者教別謂有學位金剛三昧則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中所說其無學位金剛三昧今此經中所說是也此經中佛所入定破一切法皆無所得是故名爲金剛三昧六種釋中是持業釋取譬名者是鄰近釋以是名目此經者是依主釋定爲主故次第二釋三昧名者於中有二先釋後簡古師說言彼名三昧云正思今述此說當文義故謂在定時於所緣境正思察故名正思如瑜伽言三摩地者謂於所緣審正觀察心一境性故定應是靜靜住一境云何乃言審正思察思察之用應是尋伺云何說定爲思察若守一境卽爲定者惛沈住境應卽是定若正思察是尋伺者邪慧推求應非尋伺當知思察有其二種若通邪正意言分別名思察者卽是尋伺直是分別若唯審正明了緣境名正思察正是定用而非尋伺定通分別及無分別故以審正簡彼尋伺又住一境亦有二種若住一境惛迷闇昧不能審察卽是惛沈若住一境不沈不浮審正思察是名爲定故以思察別彼惛沈是故當知不以住移簡別定散差別之相何以故捷疾之辯雖速移轉而有定故遲鈍之念雖久住境而是散故今此金剛三昧名爲正思察無正不正亡思非思但爲別於分別邪念又不同於虛空無思所以强號爲正思耳三昧之名略釋如次簡別者於中有二先別諸名後簡通局定名不同略有八一名三摩呬多此云等引遠離惛沈掉擧之偏故名爲等引發神通等諸功德故名爲引此等引無悔歡喜安樂所引故名等引由此不同欲界定故二名三摩地此云等持等義同前能制持心令不馳散故名等持又定慧平等令不相離故名等舊云三摩提亦卽等持三名三摩鉢提此云等至等持之中能至勝位故名等至四名馱演那此云靜寂靜思慮故又能靜散慮故舊云禪那或云持阿方俗異語同謂靜慮也五名奢 摩他此譯云止心止境故名爲止六名心一境性令心專一於境之故名心一境性舊云一心是略故也七名爲定定所緣故名爲定八名正思義如前說有師說言昧之名及三摩提只是等持非是異名是說不然以者何如金鼓經十種定中前三地中名三摩提七地中名爲三昧如是二名若同等持何由改名後異說#又此二名何由不同若由方俗異故不同者不應一處俱說二名若由傳者前後故異者不應一本有此二名如三摩提及三摩地此由前後傳者不同故其是同灼然可見三昧之名與三摩提同在一何由不異是故當知如前說也第二明通局者作四例一者定與等持二名最寬通#漏無漏亦通三界及通欲界散亂心中以六位心所別境五中有三摩地亦名定故二者心一境性及三昧名此二次寬雖通欲界不通一向散亂心中以般舟三昧或欲界繫九種心住心一境性亦通欲界方便心故三者三摩呬多及靜慮名此二是狹全不通於欲界心故取輕安所含潤故四者三摩跋提及奢摩他此二最於定地內有簡別故以奢摩他不通四種慧行之心一境性三摩跋提不通於空無相無願三三摩地故八名寬狹粗述如是第三釋題名訖

1. 경서품 (經序品)

④ 과문해석(科文解釋)
045_0063_a_09L自下第四科文解釋
045_0063_b_01L글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서분(序分)이고, 둘째는 제2품부터 이어지는 여섯 품까지의 글들이 정설분(正說分)이고, 셋째는 입총지품(入摠持品)으로서, ‘그 때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하로 두 장 남짓 되는 글이 유통분이다. 또한 서분에도 두 가지 서문[序]이 있으니 통서(通序:모든 경의 서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사항)와 별서(別序:해당 경의 서문에만 있는 사항)이다.

【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47)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에서 큰 비구승 만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도를 얻었는데, 그 이름은 사리불ㆍ대목건련ㆍ수보리이니 이들은 아라한이었다. 또 보살마하살 2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그 이름은 해탈보살ㆍ심왕보살ㆍ무주보살 등이었다. 또 장자(長者) 8만 명과 함께 있었는데, 그 이름은 범행(梵行)장자ㆍ대범행(大梵行)장자ㆍ수제(樹提)장자 등이요, 또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인비인 등 육십만억과 함께 있었다.
【論】 통서에는 여섯 가지 일이 들어 있다. 앞의 셋은 직접 들어서 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요, 뒤의 셋은 부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이와 같이[如是]이고, 둘은 내가 들었다[我聞]이며, 셋은 어느 때[一時]이다. 뒤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교주(敎主)요, 둘은 머문 곳이요, 셋은 대중들이다. 그 대중들 속에도 네 가지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성문 대중이요, 둘은 보살 대중이요, 셋은 장자 대중이요, 넷은 잡다한 무리이다. 그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통설과 같다.

【經】 그 때 존자[尊者:어떤 본에는 世尊으로 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에는 없으나 한국 불교 전서에 있는 원본주이므로 표시해 둔다. 이하 모두 같다]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모든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일미진실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리행(一味眞實無相無生決定實際本覺利行)이었다. 만약 이 경을 듣고서 네 구절로 된 게송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서 방편을 써서 중생을 교화할 수 있게 되며, 또한 모든 중생을 위하여 큰 선지식이 될 수 있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별서(別序)인데,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위의분(威儀分)이고, 둘째는 설경분(說經分)이고, 셋째는 입정분(入定分)이며, 넷째는 중송분(重頌分)이다. 위의분이란, 경에 ‘그 때 존자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라고 한 부분이고, 설경분이란, 경에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 경의 문세(文勢)는 “그 때 세존께서 사부대중에게 둘러싸여 대승경을 설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무량의(無量義)였다”라고 한 『법화경(法華經)』의 서론과 비슷하다. 그 경[법화경]을 해석한 논에서는 이 경의 이름을 두고 『법화경』의 다른 제목이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의도는 그 제목이 본격적인 설법에 앞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서분을 삼은 것이다. 이제 이 경[金剛三昧經]의 글의 형태를 보면 모두 경전을 서술하는 자의 일반적인 서문과 같다. 이에 준하여 볼 때 다른 경을 앞에서 자세히 설하고, 다음에 정(定)에 들고, 정에서 깨어나 다시 『금강삼매경』을 설했을 것이다. 경의 주된 요지를 설한 연후에 경의 이름을 설하였으니, ‘일미진실(一味眞實)…’이라는 이 경의 앞에 자세히 말씀하신 경의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경전의 대의가 비록 같다고 하지만 글 모양[文相]은 다르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법문을 자세히 설하여 당시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고, 뒤에서 설한 것은 법문을 요약하여 말세(末世)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앞에서 설한 자세한 경이 간략한 경의 바탕이 된다.
이 설경분(說經分)의 글 형태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경의 이름에 대한 서언이고 뒤에는 경의 덕에 대한 찬탄이니, ‘만약 이 경을 듣고[若聞]’ 이하가 뒷 부분에 해당한다.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신 다음 가부좌하여 앉으시고 곧 금강삼매에 드시어 몸과 마음에 흔들림이 없으셨다.
【論】 이는 세 번째, 입정분(入定分)이다. 경을 설하시기 전에 먼저 선정[定]에 드신 까닭은, 오직 적정(寂靜)한 자만이 법을 깨달을 수 있고 또 설할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또한 성현께서 때에 맞게 침묵과 설법을 사용하여 그 두 가지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經】 그 때 대중 가운데 아가타(阿伽陀)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이 뜻을 밝히기 위하여 게송을 설하였다.
【論】 이것은 넷째 중송분(重頌分)이다. 앞에서 설한 일미의 경[一味之經]과 뒤에서 설할 경의 대의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간략한 게송으로써 앞의 자세한 경을 송(頌)하여 뒤에 간략히 경을 일으킨 것이다. 문장의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앞은 서언(序言)이고 뒤는 게송이니, 이는 경전을 기술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서문으로써 뒤의 게송을 일으킨 것이다.
아가타(阿伽陀)란 여기 말로는 무거(無去), 혹은 멸거(滅去)라는 뜻이다. 이는 약(藥)의 이름으로서 모든 병을 남김없이 없앨 수 있기 때문에 ‘무거’라고 한다. 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의 모든 번뇌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약 이름을 가지고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여덟 수의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의 일곱 게송은 경을 설하심을 송한 것이고, 마지막 한 게송은 정에 드심을 송한 것이다. 앞의 일곱 수 게송에도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세 게송은 전체를 밝힌 것이고, 네 게송은 따로 드러낸 것이다.

【經】 큰 자비로 가득하신 세존이시여.
지혜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시도다.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려
한 가지 진실한 이치를 설하셨는데
모두 일미의 도(道)로써 하고
끝내 소승으로써 하지 않으셨네.

설하신 뜻[義]과 맛[味]과 곳[處]은
모두 다 부실(不實)함을 떠나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로운 경지에 들어가
결정코 참 실제(實際)에 들어갔네.

듣는 자가 모두 세간을 벗어나
해탈치 못함이 없으리.

【論】 총괄적으로 위의 세 게송을 밝혀보면 네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 두 구절은 말씀하신 이의 덕을 찬탄한 것이고, 둘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도구가 되는 교설[能詮敎]을 찬탄한 것이며, 셋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내용[所詮義]을 찬탄한 것이고, 넷째 두 구절은 가르침의 훌륭한 이익을 찬탄한 것이다.
두 번째 송 중에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한 것은 한마음[一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심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문이 오직 하나의 진실[一實]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하였다.
‘일미의 도[一味道]’란 유일한 승[一乘]을 말한다. 나머지 글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經】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들께서
모두 다 중생을 제도하려고
못 사람들을 위해 넓고 깊게 물어서
법의 적멸한 특성을 알게 하여
결정적인 곳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

【論】 이 아래로 네 게송은 문답을 따로 찬탄한 것이다. 위의 다섯 구절은 물음이 넓고 깊어서 적멸을 알아 실제(實際)에 들어가게 함을 찬탄한 것이다.

【經】 여래의 지혜 방편으로
실제에 들도록 설하시니
모두 다 일승만을 따르기에
다른 잡다한 맛이 없다네.

마치 한 차례 비가 적셔주어
온갖 풀이 다 무성해지듯이

각기 다른 성질에 따라서
한 맛[一味]의 법으로 적셔주어
두루 모든 것에 충만케 하니
저 한 차례 비가 적셔주듯이
보리(菩提)의 싹 모두 자라게 하네.”

【論】 이 둘째 부분은 부처님의 답에 훌륭한 이익이 있음을 찬탄한 것이다. 그 중에 법(法)ㆍ유(喩)ㆍ합(合)의 셋이 있으니 차례대로 보면 네 구절ㆍ두 구절 ㆍ다섯 구절이 그에 해당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금강의 맛[味:다른 본에는 昧로 되어 있다]에 들어갔으니
법과 진실한 선정을 증득한 것이라
결정코 의심과 뉘우침을 끊으니
한 법에서 도장 찍혀 나온 듯하네.

【論】 이는 둘째로 입정하심을 노래한 것이다.48) 위의 반은 앞에서 입정한 것을 노래하고, 뒤의 반은 뒤의 설법 일으킴을 노래한 것이다.
뒤에 설하신 교리에 두 가지 훌륭한 힘[勝能]이 있다. 하나는 마치 금강이 모든 것을 파괴하듯이, 결단코 의혹과 뉘우침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마치 금강이 파괴되지 않듯이, 일승(一乘)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아래 반의 두 구절은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냈다. 이상 서분의 글이 끝났다.

정설분(正說分)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앞 6품은 관행을 각각 나타낸 것[別顯觀行]이요, 끝의 총지 일품은 의심을 통틀어 없애는 것[總遣疑情]이다.
이 별현은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무상법품(無相法品)으로서 무상관(無相觀)을 밝힌 것이요, 둘째는 무생행품(無生行品)으로서 무생행을 나타낸 것이며, 셋째는 본각리품(本覺利品)으로서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는 입실제품(入寶際品)으로서 허(虛)에서 실(實)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진성공품(眞性空品)으로서 모든 행이 참된 성품인 공(空)에서 나왔음을 밝힌 것이며, 여섯째는 여래장품(如來藏品)으로서 무량한 문[無量門]으로 여래장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문(門)으로 관(觀)과 행(行)이 두루 다 포괄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망상이 무한한 과거로부터 유전(流轉)하게 된 것은 단지 형상에 집착하여 분별하는 병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흐름을 거슬러 근원에 돌아가고자 하면 먼저 모든 형상이 실체가 아님을 알게 하여 이를 없애야 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무상법(無相法)을 관해야 함을 밝힌 것이다.
비록 모든 형상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할지라도 관하는 마음을 남겨 두면 관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서 본각(本覺)에 계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없앨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둘째로 무생행(無生行)을 밝혔다.
이미 무생을 행하면 바야흐로 본각에 계합하게 되니, 이에 의지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로움을 얻게 하기 때문에 셋째로 본각리(本覺利)의 문(門)을 밝혔다.
본각에 의지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은 허망함으로부터 실제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넷째로 실제에 들어감[入實際]을 밝혔다.
안으로의 행은 형상도 없고 일어남도 없으며, 밖으로의 교화는 본각의 이로움을 써서 실제에 들어가게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로움으로 온갖 행이 다 갖추어지게 되는데, 이는 참된 성품에서 나와 모두 진정한 공에 순응하나니 다섯째로 참된 성품인 공[眞性空]을 밝혔다.
이 참된 성품에 의해서 온갖 행이 구비되어 여래장 일미의 근원[如來藏一味之源]에 들어가기 때문에 여섯째로 여래장(如來藏)49)을 밝혔다.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고 나면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없다. 지어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할 바도 없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 길을 설하여 대승을 다 거두는 것이다.
한편 이 여섯 품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이른바 첫째 무상법품(無相法品)은 관의 대상이 되는 법[所觀法]을 보인 것인데, 그 법이란 이른바 일심 (一心)인 여래장의 체(體)이다.
둘째 무생행품(無生行品)은 관하는 자의 행[能觀行]을 밝힌 것인데, 이른바 6행(行)이라고 하는 무분별관(無分別觀)이다.
셋째 본각리품(本覺利品)은 일심(一心) 가운데 생멸문(生滅門)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로 입실제품(入實際品)은 일심 가운데 진여문(眞如門)을 나타낸 것이다.
다섯째 진성공품(眞性空品)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한꺼번에 떠나되 그 두 가지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여래장품(如來藏品)은 여러 가지 문을 거두어 들여 모두 일미임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이중(二重)의 6문(門)으로서 대승의 뜻을 남김없이 두루 포섭하였다.
그런데 이 6품(品)은 세 문으로 간추려질 수 있다. 즉 앞의 두 품[無相法品ㆍ無生行品]은 관(觀)과 행(行)의 시작과 끝을 포섭한 것이고, 다음의 두 품[本覺利品ㆍ入實際品]은 교화의 근본과 지말(枝末)을 밝힌 것이며, 마지막 두 품[眞性空品ㆍ如來藏品]은 원인을 포섭해서 결과를 이룬 것을 보인 것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두 품은 형상을 버리고 근본에 돌아가는 것이고, 중간의 두 품은 근본으로부터 참된 행(行)을 일으키는 것이며, 마지막 두 품은 근본에 돌아가는 것과 근본으로부터 행을 일으키는 두 가지를 함께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둘씩 합쳐놓은 세 가지로써 대승(大乘)의 뜻을 모두 포섭한다.
이 6품은 또 두 가지 문(門)으로 요약된다. 형상과 생함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본각(本覺)의 이로움이요, 실제와 참된 공은 여래장이다.50)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문(세 가지 품)은 허망한 것을 버려서 바른 인(因)을 나타낸 것이고, 뒤의 문은 참된 것을 드러내어 과(果)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두 문으로 역시 대승을 두루 포섭한다.
이 6품을 또 오로지 일미(一味)로 볼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가? 형상과 일어남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본각이라고 하지만 근본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고, 실제라고 하는 것도 그 테두리를 한정할 수 없으며, 참된 성품이라고 하여도 그 역시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여래장의 성품인들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러기에 「여래장품」에서 “이 식[是識]은 항상 적멸하고, 적멸하다는 생각마저도 적멸한 것이다”라고 했다. 「총지품(總持品)」에서도 “제7식과 전5식이 발생하지 않고[七五不生], 제8식과 제6식이 적멸하며, 제9식의 상[九相]도 공해서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얻을 수 없는 이 일미(一味)가 이 경의 근본(宗)이며 요지가 된다. 다만 얻어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슨 문이든지 열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무량한 뜻을 지닌 근본이 된다. 사실 일미(一味)이기는 하지만, 여섯 가지 문[六門]을 열어 놓는 까닭에 이 여섯에 의하여 과문(科文)을 나누어 해석하였다.
먼저 품명에 대하여 해석하겠다. ‘무상’이라고 한 것은 무상관(無相觀)으로, 모든 관념[諸相]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다음에 ‘법(法)’이라고 한 것은 관찰할 법[所觀法]으로서, 일심법을 의미한다. ‘무상관’이란 것은 먼저 품(品)전체를 여섯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첫 분[第一分]의 뜻이며, ‘소관법’이란 뒤에 6문(門) 가운데 첫 문(第一門)의 법이다. 여기 첫 품에서는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내므로 ‘무상법품’이라고 부른다.
045_0063_a_10L文有三分一者序分二者第二品下六品餘文是正說分三者入摠持品爾時如來而告衆言已下二紙許文是流通分序分之內有二種序謂通與別通序之中卽有六事前三明親承之後三證大師之說言前三者一如是二我聞三一後三是何一教主二住處三徒衆徒衆之內序四類衆一聲聞衆二菩薩衆三長者衆四雜類衆於中委悉如常所說經曰爾時尊者大衆圍繞爲諸大衆說大乘經名一味眞實無相無生決定實際本覺利行若聞是經至受持一四句偈是人卽爲入佛智地能以方便教化衆生爲一切生作大知識論曰此下第二別序卽有四分一威儀分二說經分三入定分四重頌分威儀分者如經爾時尊者大衆圍繞故說經分者如經爲 諸大衆說大乘經等故經文勢似法華序如彼文言爾時世尊四衆圍遶說大乘經名無量義如彼論中判此經名卽爲法華經之異目#彼意以爲在前說故名爲序分今看此經文皆是經家序辭以是准之應是別經在前廣說#說已入定從定起已方說金剛三昧經也#說經宗後乃說經名當知一味眞實等名是前所說廣經之目是二經大意雖同文相卽異前所說者廣說法門爲益當時後所說者略攝法門爲利末世是故在前廣以爲略經緣由此說經分文相有二先序經名歎經德若聞已下是第二分經曰佛說此經已跏趺坐卽入金剛三昧身心不動論 曰是第三入定分所以欲說經前先須入定者爲顯唯寂靜者法能覺能說故又復爲顯賢聖默然賢聖說法隨時而用不相離故 經曰爾時衆中有一比丘名阿伽陁從座而起合掌胡跪欲宣此義而說偈言 論曰是第四重頌分爲顯前說一味之經與後所說大意不殊故以略偈頌前廣經因此發起後略說經故文卽有二先序後頌是經家序以發後頌阿伽陁者云無去或言滅去此是藥名能令諸病皆悉滅盡故名無去此菩薩亦如是能治衆生諸煩惱病故以藥名爲其目也八行頌中卽有二分前七頌頌說經一頌頌入定初中亦二三頌摠明四頌別顯 經曰大慈滿足尊 智慧通無㝵 廣度衆生故說於一諦義 皆以一味道 終不以小乘所說義味處 皆悉離不實 入諸佛智地決定眞實際 聞者皆出世 無有不解脫論曰摠明三頌卽有四意一者二句歎能說德二者一頌歎能詮教三者一頌歎所詮義四者二句歎教勝利#第二中言一諦義者所謂一心依一心法#有二種門#二門所依唯是一實故名一諦一味道者唯一乘故餘文可知 經曰無量諸菩薩 皆悉度衆生 爲衆廣深問知法寂滅相 入於決定處論曰此下四頌別歎問荅此五句者歎問廣深令知寂滅入實際故 經曰如來智方便 當爲入實說 隨順皆一乘無有諸雜味 猶如一雨潤 衆草皆悉榮隨其性各異 一味之法潤 普充於一切如彼一雨潤 皆長菩提芽論曰是第二歎佛荅勝利於中有三謂法喩合#如其次第四句二句五句應知 經曰入於金剛味證法眞實定決定斷疑悔一法之印成論曰此第二頌入定上半正頌在前入定下半逆頌後起說法後所說教有二勝能一決斷疑悔如金剛能破二印成一乘如金剛不壞下半二句顯此二義#序分文竟正說之中大分爲二謂前六品別顯觀行#摠持一品摠遣疑情別顯之中卽爲六分一無相法品明無相觀#二無生行品顯無生行三本覺利品依本利物入實際品從虛入實五眞性空品辨一切行出眞性空#六如來藏品顯無量門入如來藏如是六門觀行周盡所以然者凡諸妄想無始流轉只由取相分別之患今欲反流歸源先須破遣諸相所以初明觀無相法雖遣諸相若存觀心觀心猶生不會本覺故泯生心所以第二顯無生行行旣無生方會本覺依此化物令得本利故#第三明本覺利門若依本覺以利衆生#衆生卽能從虛入實所以第四明入實際內行卽無相無生外化卽本利入實如是二利以具萬行同出眞性皆順眞空是故第五明眞性空依此眞性萬行斯備入如來藏一味之源所以第六顯如來藏旣歸心源卽無所爲無所爲故無所不爲故說六門以攝大乘又此六品亦有異意謂初品示所觀之法法謂一心如來藏體第二品明能觀之行行謂六行無分別觀第三本覺利品顯一心中之生滅門第四入實際品顯一心中之眞如門第五眞性空品雙遣眞俗不壞二諦第六如來藏品遍收諸門同示一味以此二重六門攝大乘義周盡又此六品合爲三門前二品攝觀行#始終次二品者教化本末其後二門攝因成果又前二品遣相歸本中間二品從本起行後二品者雙顯歸起以此二三攝大乘盡又此六品只是二門相生都泯是本覺利實際眞空是如來藏又前門者遣妄顯因其後門者顯眞成果如是二二之門亦攝大乘周盡又此六品唯是一味所以然者相生無性本覺無本實際離際眞性亦空何由得有如來藏性如下如來藏品中言是識常寂滅寂滅亦寂滅摠持品言七五不生八六寂滅九相空無如是無所得之一味正爲此經之宗之要但以無所得故無所不得所以諸門無所不開故作無量義之宗也雖是一味而開六門故依六分科文而釋先釋品名言無相者謂無相觀破諸相故次言法者謂所觀法一心法故無相觀者先六分中第一分義所觀法者後六門內第一門法今此初品顯是二義以之故言無相法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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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상법품(無相法品)

【經】 그때 존자[尊者:어떤 본에는 世尊으로 되어 있다]께서 삼매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論】 이 일품[無相法品]의 글을 세 부문으로 나누면, 첫째는 정에서 나오심을 밝히는 부분[出定分]이고, 다음은 설명을 일으키는 부분[起說分]이고, 끝으로 이익을 얻음을 밝히는 부분[得益分]이다. 처음과 끝 두 부분은 경전을 기술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서문이요, 둘째 부분이 본격적인 부처님의 말씀이다.
첫째 부분[初分]에서는 세 가지 성취를 나타낸다. 첫째는 설법의 때가 성취되었음을 밝히는 것인데 경에 ‘그 때[爾時]’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설법의 주인이 성취되었음을 드러내는데 경에 ‘존자(尊者)’라고 한 것이다. 다섯 가지에 원만히 통달하셔서51) 세상의 존경을 받는 분이며 매우 심오한 법을 이치에 맞도록 설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재함을 성취했음[自在成就]을 밝힌 것이니 경에 ‘삼매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 것이다. 여래께서 선정에 들어 계실 때는 아무것도 놀라게 하거나 깨울 수 없고, 선정에 머무름과 나오심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經】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法相)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다.”
【論】 이 이하는 (「무상법품」을 세 부문으로 나눈 가운데) 둘째로 본격적인 부처님의 말씀이 나오는 부분이니, 이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장행(長行)52)이고, 둘째는 중송(重頌)53)이다. 장행 중에도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간략히 표방하는 부분[略標分]이요, 둘째는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說分]이다. 이 약표분(略標分) 중에서도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하나는 무상관(無相觀)을 표시한 것이요, 뒤의 것은 소관법(所觀法)을 표시한 것이다. 이 무상관을 표시한 가운데에도 두 구(句)가 있으니 앞에는 여래 스스로가 무상관에 드심을 표시한 것이고, 뒤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상관에 들게 한 것을 표시한다. 스스로 들어가심이란, 경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이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諸佛智地]’란, 앞서 들어간 것과 같은 금강삼매에 상응하는 지혜를 뜻한다. 모든 공덕법(功德法)에 머무르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진실한 법상에 들어갔다[入實法相]’고 한 이유는, 부처님의 이러한 지혜가 모든 형상을 다 깨뜨려 모든 법의 실상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결정한 성품[決定性]’이라고 한 이유는, 실다운 법상(法相)을 부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있거나 없거나를 막론하고 그 성품이 그렇기[自爾] 때문이다.
‘때문이며[故]’라는 말이 이어진 것은, ‘결정한 성품’이라는 말이 그 윗구절의 이유를 해석해주기 때문이다. 결정한 성품이 아니라면 그것은 실상이 될 수 없을 것이므로. (‘때문이며[故]’는) 또 윗구절을 연결하면서 아랫구절을 성립시킨다. 여래 스스로가 진실한 법상[實法相]에 들어가 계시므로, 남들에게도 무상(無相)의 이익을 얻게 할 수 있는 것이다.
【經】 “방편과 신통으로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無相利]을 얻게 하신다.”
【論】 이는 두 번째 구절로서 다른 사람에게도 무상관(無相觀)에 들어가게 하심을 말한 것이다.
‘방편(方便)’이란 팔상방편(八相方便)이니,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오신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열반에 드신 것까지를 말한다.
‘신통(神通)’이란 6신통(神通)54)을 말하는데, 즉 3륜(輪)55)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을 얻게 하신다[皆無相利]’란 이와 같은 8상과 6신통이 모두 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실상에 드심으로부터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상(無相)의 이익을 얻게끔 하기 때문이다. 이상 무상관(無相觀)을 표하여 마친다.
【經】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2승(乘)들은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이를 알 수 있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인 소관법(所觀法)을 표시한 것인데 두 구절로 나뉜다. 하나는 소관법의 심오함을 직접 표시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이 심오한 법을 설하신 것이다.
‘일각의 뚜렷한 뜻[一覺了義]’이란, 일심(一心)ㆍ본각(本覺)ㆍ여래장(如來藏)을 뜻한다. 이보다 더 심오한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움[難解]’이란 그 뜻이 매우 심오하여 2승(乘)들은 알거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기 어려움[難人]’이란 그 바탕이 매우 심오하여 부처님과 보살이라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뒤의 구절로써 앞 구절을 풀이하건대, 첫부분에서 ‘부처님의 지혜는 진실한 법상에 들어가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일심ㆍ본각ㆍ여래장법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적멸(寂滅)을 일심(一心)이라고 하고, 일심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글에서 진실한 법상[實法相]이라고 한 것은 적멸을 의미하는 것이요, 일각의 뚜렷한 뜻이라고 한 것은 일심여래장(一心如來藏)을 뜻한다. 『법화론(法華論)』에서는 “모든 불ㆍ여래께서는 그 법(法)의 궁극적인 실상[究竟實相]을 알고 있다. 실상이란 여래장 법신(法身)의 체를 말하니,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경에서 ‘일각(一覺)’이라고 한 것은 모든 법이 오직 일심이요, 모든 중생이 곧 하나인 본각이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일각이라고 한 것이다. 아래에서 풀이를 통해 다시 분별하겠다.
【經】 “제도할 만한 중생이면 모두 일미(一味)를 설한다.”
【論】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심오한 법을 말했음을 밝힌 것이다.
‘제도할 만한 중생[可度衆生]’이란, 여래께서 교화해야 할 중생은 모두가 일심(一心)이 유전(流轉)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모두 일미를 설함[皆說一味]’이란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교법(敎法)이 그들을 일각(一覺)의 맛[味]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본래 일각이었지만 다만 무명(無明) 때문에 꿈 속에서 유전하다가 모두 여래의 일미의 말씀을 듣고 마침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가 없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마음의 근원에 돌아왔을 때에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일미(一味)라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일승(一乘)이다. 이상 첫 번째인 약표문(略標文)을 마친다.56)
【經】 그 때 해탈보살(解脫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광설분(廣說分)인데 이 가운데도 둘이 있다. 먼저는 설법을 청한 것이고 다음은 설법이다. 먼저 청함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때와 사람의 거동에 대한 것이요, 다음에는 말 꺼낸 것을 밝힌 것이다.
사람의 거동을 서술하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어느 때 누가 말했는가를 밝힌다[依時表人]. ‘해탈보살이란’ 모든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케 하기 때문에 그 묻는 사람에 기탁해서 설해 주신 법[所說法]이 무엇인가를 표시한 것이다. 다음에는 예의에 관해서 말하였으니, 경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라고 한 대목이다.
【經】 “존자여, 만약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는 정법(正法)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상법(像法)이 세상에 머무는 말법(末法)의 시대가 되어 5탁(濁)57) 중생이 가지가지 많은 악업으로 삼계에 윤회하면서 거기서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論】 아래는 둘째 부분으로, 말을 꺼내서 청(請)한 것이다. 거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어느 때를 위해서인가?’하는 시절(時節)을 말하고, 다음에 그 시대의 그들을 위해서 말씀해 주시기를 청한 것이다.
첫 번째로 시절을 든 대목 중에 ‘상법이 세상에 머무는 말법의 시대가 되었을 때’란, 이에 앞서 설한 자세한 경[廣說經]은 정법시대에 이익을 주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이 경은 상법시대를 교화하기 위해 설한다는 것이다. 시대의 두텁고 엷음에 따라 베풀어주는 교리[敎]가 다르기 때문이다.
【經】 “부디 부처님의 자비로 후세의 중생을 위하여 일미(一味)요, 결정된 진실을 널리 말씀하시어 저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하게 하소서.”
【論】 이것은 두 번째로, 널리 가르침 펴주기를 본격적으로 청한 것이다.
‘일미를 설해주십사[宣說一味]’한 것은 일각의 뚜렷한 뜻[一覺了義]의 맛[味]을 설해 주기를 청한 것이요, ‘결정된 진실[決定眞實]’이란 참된 법상[實法相]에 들어가는 관법(觀法)을 설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하게 하소서[今彼衆生等同解脫]’란 저 상법(像法)의 말세 중생들에게도 똑같은 일미(一味)로써 마침내 해탈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건대 교(敎)에는 다음과 같은 네 구절이 있다고 하겠다.
첫째, 바로 정법(正法)시대의 중생을 교화하고 겸해서 후대의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는 교(敎)이니 이 경 앞에서 설한 경[廣說經]을 말한다.
둘째, 바로 상법(像法)시대의 중생을 교화하고 겸해서 그 전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주는 교(敎)이니 이 경 등을 말한다.
셋째, 전후(前後) 시대에 걸쳐 통틀어 교화하는 교(敎)이니 이밖에 다른 경들을 말한다.
넷째, 전후를 이롭게 하지 못하는 교(敎)이니 이상의 언급에서 제외된 가르침을 말한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나에게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因]을 물어 중생을 교화하고, 그 중생들에게 세간을 벗어난 과(果)를 얻게 하려고 하니, 이 불가사의한 하나의 큰 일[一大事]은 네가 대자(大慈)와 대비(大悲)를 쓰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설명하지 않는다면 곧 간탐(慳貪)에 떨어질 터이니 너희들은 일심(一心)으로 자세히 들어라. 너희를 위해 설명해주겠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부분으로 여래께서 중생을 위해 설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질문을 찬양하시고 설하기를 허락하심이요, 다음은 청한 질문에 대하여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물음을 찬탄한 가운데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이란 실상(實相)에 들어가는 관(觀)을 말한다.
‘세간을 벗어난 결과’란 한 맛의 해탈[一味解脫]을 말한다.
‘이 하나의 큰 일’이란 그 이상 없다는[無上] 뜻이며 동일하다[同]는 뜻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란 언설(言說)을 떠났고, 사려(思慮)를 끊었기 때문이다. 『법화경』에서는 “제불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법화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일대사란 네 가지 뜻에 의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그 이상 없다[無上]는 뜻이다. 오직 여래의 일체지지(一切智智)를 빼고는 다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의 지견(知見)을 열어[開] 중생들이 그것을 알고서 청정함을 얻게 하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불지견(佛知見)’이란 여래께서 증득하신 것이니 여실한 지혜[如實智]로 그 뜻을 알기 때문이다.
둘째는 같다[同]는 뜻이다. 모든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보여 주고자[示] 세간에 출현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법신(法身)이 평등하다는 것은 불성ㆍ법신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알지 못한다[不知]는 뜻이다. 모든 성문과 벽지불 등은 그 진실한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곳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궁극의 유일한 불승(佛乘)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자[悟]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넷째로 불퇴전지(不退轉地)를 증득하게 한다는 뜻이다. 헤아릴 수 없는 지혜의 업(業)을 주려고 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知見)에 들게[入] 하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지금 이 글 가운데에도 일대사(一大事)에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그 이상 없다[無上]는 뜻이니 위의 문장에 언급된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지혜의 경지[智地]는 실다운 법상[實法相]에 든 까닭이다.
둘째는 같다[同]는 뜻이니 경에서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了義]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셋째는 알지 못한다[不知]는 뜻이니 경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모든 2승(乘) 등이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는 증득케 한다[令證]는 뜻이니 제도할 만한 중생에게는 모두 일미 (一味)를 설하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질문에 대한 찬탄을 끝낸다. 다음에는 설하기를 허락하시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첫 구는 설하지 않으면 잘못이 있게 됨을 역으로 드러낸 것이요, 다음 구는 잘 들으라며 설법 허락하심을 하기를 예사대로 밝힌 것이다.
【經】 “선남자야,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교화한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 교화함이 없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아야 그 교화가 큰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부처님의 설법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무상관(無相觀)을 밝히고 나서 그 이익[無相利]을 자세히 설명하고, 다음에 일각의 마음[一覺心]을 드러내고 나서 그 일각의 뜻[一覺義]을 더 광범하게 설명한다.
무상관을 밝힌 가운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관행(觀行)의 특성[相]을 직접적으로 설한 부분이요, 두 번째는 여러 가지 의심과 논란을 반복해서 풀어준 것이다. 첫 번째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방편관(方便觀)을 다루고, 다음은 정관(正觀)을 밝혔다. 방편관에 네 구가 있으니 맨 첫 구는 교화하는 자[能化]를 다시 들었고, 끝의 한 구는 교화가 큰 것을 찬탄하였으며, 중간의 두 구는 관(觀)의 특성을 밝혔다.
‘교화한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란 처음 관을 닦을 때에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형상을 파하라는 것이다. 즉 허깨비로 나타난 형상[幻化相]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교화함이 없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아야’란 교화한다는 생각[化相]은 이미 깨뜨렸으므로 다음에는 공상(空相)을 버리라는 것이다. 즉 교화함이 없다는 공(空)에 대해서도 역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째서 그런가? 중생은 본래 마음이 형상[相]을 떠나 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두루 온갖 형상을 다 취하여 생각을 움직여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먼저 모든 형상을 깨뜨리므로써 형상 취하는 마음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허깨비로 만들어진 유상(有相)은 이미 깨뜨렸으나, 아직 허깨비가 없다는 공성(空性)에 집착하여 그 공성을 취하기 때문에 공(空)에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므로 이번에는 무화공성(無化空性)까지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라야 공을 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필연적으로 양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無二中道]를 만나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들게 된다. 이렇게 교화(敎化)하기 때문에 큰 교화가 된다.
【문】 이러한 방편관은 어떤 지위[位]에 해당하는가?
【답】 우러러 믿고 닦는 경우에는 10신(信)에 해당하고, 그와 비슷한 관[相似觀]을 닦는 경우에는 30심(心)58)에 해당한다. 그 순수한 수행[純修]을 논한다면 4선근(善根)에 해당하니 장차 초지(初地)에 들어가게 될 가까운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문】 다른 곳에서는 3무성관(無性觀)59)이 있다고 설하였는데 왜 여기서는 두 가지 없음[二無:無相과 無生]만을 설하는가?
【답】 무상(無相)과 무생(無生)은 합하여 한 변[一邊]이 되니, 버려야 할 상(相)과 생(生)이 똑같이 유(有)이기 때문이다. 또 이 두 가지 관[二觀]에는 모두 심사(尋思)가 있지만 무성(無性)을 버릴 때에는 심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셋으로) 벌리거나 (둘로) 합하거나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제까지 방편관을 설하였고, 다음에는 정관을 밝히겠다.
【經】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心:法執)과 아(我:我執)를 떠나게 해야 하는 것이니, 모든 심(心)과 아(我)는 본래 공적한 것이다. 만약 공(空)한 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환상[幻]을 지어내거나 변화[化]하지 않을 것이요, 환상과 변화가 없으면 생멸 없음[無生]을 얻을 것이니, 생멸 없는 마음은 환화(幻化)가 없는 그곳에 있다.”
【論】 여기서는 정관(正觀)을 밝힌 것으로 바로 둘이 없는 모양을 관하는 것을 설명했다.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둘을 떠나게 하는 까닭이다. 소취를 떠난다는 것은 모든 인(人)ㆍ법(法)의 관념을 떠난다는 뜻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보냈기 때문에 떠났다[遣離]는 것이고, 둘은 없기 때문에 떠났다[泯離]는 것이다. ‘견리(遣離)’란 이미 취한 관념을 이제 없애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과 아를 떠나게 해야 한다’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민리(泯離)’란 이미 취한 관념이 본래 공(空)한 까닭에 그렇게 말한다. ‘모든 심과 아는 본래 공적한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심아(心我)’라고 한 데서, 사람[人]을 아(我)라 하고, 법(法)을 심(心)이라고 한다. 심은 모든 법이 의지하는 주(主)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ㆍ법 등이 본래 공하다는 사실을 통달하게 될 때 앞에서 취했던 관념이 일어나지 않으니, 그러므로 두 가지 떠남[離:견리와 민리]이 동시에 다 이루어진다.
소취(所取)를 떠나는 데 대해서는 이미 말하였다.
능취(能取)를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능취의 분별을 떠난다는 뜻으로서,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래 떠났다[本離]는 뜻이요, 둘째는 비로소 떠났다[始離]는 뜻이다.
‘본리(本離)’란 심(心)과 아(我)가 본래 공함을 통달했을 때에 바로 본각(本覺)의 공적한 마음을 얻는데, 이 공적한 마음이 본래 능취를 떠났다는 것이다. 능취를 떠났으므로 본래 환화(幻化)하지 않나니, ‘만약 공(空)한 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환상[幻]을 지어내거나 변화[化]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환화하지 않는 이유는 헛것[虛]이거나 거짓[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리(始離)’란 본각인 공적심(空寂心)을 얻었을 때 능취의 분별이 다시 생길 수가 없고, 그 마음을 얻는 대로 환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환상과 변화가 없으면 생멸 없음[無生]을 얻을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무생(無生)의 마음을 처음으로 얻어서 본래 공적하고 변화 없는 이치에 합하기 때문에 ‘생멸 없는 마음은 환화(幻化)가 없는 그곳에 있다[在]’고 하였다. 심(心)과 경(境)을 가정하여 말하는 까닭에 ‘있다[在]’는 말을 빌려 쓴 것이다.
능취를 비로소 떠났다[始離能取]는 것은 시각(始覺)을 뜻하고, 본래 능취를 떠난 공한 마음[本離空心]이란 본각(本覺)을 뜻한다. 뜻은 비록 두 가지가 있지만 섞여 하나의 각[一覺]을 이루는 것으로서 능소(能所)를 함께 떠났고 신구(新舊)를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시각은 곧 본각과 같은 것이니, 이 각(覺)은 생겨나거나 없어지거나[生滅] 시작하거나 끝나거나[始終]하는 모습[相]을 영영 떠나 있으므로, 처음의 초지(初地)로부터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다만 부분적으로 증득했느냐[分], 완전히 증득했느냐[滿]의 차이가 있을 따름임을 알아야 한다.” 『십지론(十地論)』의 본분(本分) 가운데서도 “본각 자체는 본래 공(空)이나 유(有)의 둘이 아니며 다함이 없는 것……(이하 생략)”이라고 설명하였다.
또 이 일각(一覺)에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뜻이 있으니 본각에는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진수(眞修)라는 설이 도리에 맞는 것이며, 시각에는 닦아서 이룬다는 뜻이 있으므로 신수(新修)라는 말에도 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협한 고집에 사로잡히면 미진함이 남는다.
또 『기신론』과 『십지론』 인용은 여기서 그만두고 본문으로 돌아가 풀이하기로 한다. 이상은 무상관(無相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었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중생의 마음은 성품이 본래 공적(空寂)하고, 공적한 마음은 체 (體)에 색상(色相)이 없는데 어떻게 닦아 익혀야 공(空)한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를 위하여 부디 말씀하여 주옵소서.”
【論】 여기서부터는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의심을 풀어준 대목이다. 네 개의 문답을 통해 차례로 의심을 풀어주었는데 그 첫 질문 가운데 질문한 뜻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의 심성은 본래 공적(空寂)한데 망념(妄念)을 움직여 시작을 알 수 없는 때[無始]로부터 이래로 유전하니, 어떻게 닦아야 본심(本心)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요, 둘째는 공적한 마음은 그 바탕에 색(色)도 상(相)도 없으나 중생이 본래부터 항상 상이 있다고 집착하니 어떻게 무(無)를 익혀서 공적한 마음을 얻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닦아 익혀야 공한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문】 여기에서 말한 중생의 마음이란 필시 6식(識) 등 생멸하는 마음일 터인데,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일심(一心)인 본각(本覺)을 알 수가 있는가?
【답】 『기신론』에 말하기를 “대승에 믿음을 일으키는 법이 있으니 그것이 중생심(衆生心)이다. 일심법(一心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고 자세히 설명하셨다. 또 경(『능가경』)에 말씀하시기를 “적멸(寂滅)이란 일심(一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지금 이 글에서는 ‘공적한 마음은 그 바탕에 색도 상도 없는데’라고 하였으니, 말은 차이가 있으나 뜻은 같다.
‘색이 없다[無色]’고 한 이유는 형태나 색깔 등으로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요, ‘상이 없다[無相]’고 한 이유는 생겨나거나 소멸되는 등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 문장이다. 위에서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 것은 우선 심생멸문(心生滅門)을 든 것이다. 즉 생멸심을 가지고 진여문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품이 본래 공적(空寂)하고’라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門)은 그 체가 둘이 아니니 그러므로 모두 일심법(一心法)일 따름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마음의 온갖 모습[相]은 본래부터 근본[本]이 없으며 근본 자리[本處]가 본래 없으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 마음이 생하는 일이 없으면 그대로가 공적에 든 것이요, 공적한 마음 바탕에서는 마음의 공함을 증득한다. 선남자야, 모습 없는 마음은 무심(無心)이며 무아(無我)이니, 모든 법(法)의 모습도 이와 같으니라.”
【論】 이 답은 정답(正答)과 결답(決答) 두 가지로 나뉜다.
보살이란 해탈보살을 부르는 말이다. 아래의 글에서 부르는 말도 모두 똑 같다.
‘마음의 온갖 모습[一切心相]’이란 8식(識)이 념(念)을 일으킨 것으로서, 심(心)과 심소(心所)에 상응하는 차별된 온갖 행(行)과 상(相)을 뜻한다. 행이든 상이든 모두 네 가지 상[四相]이 있기 때문에 일체심상이라고 하였다.
‘본래부터 근본이 없으며 근본자리가 본래 없으므로[本來無本 本無本處]’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모든 심상(心相)은 종자(種子)를 근본[本]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근본 종자를 찾아보아도 영영 찾을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이 현재에 있는 것인가, 과거에 있는 것인가? 만약 현재에 있다고 한다면 결과[果]와 같이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소[牛]의 두 뿔과 같이 본(本)과 말(末)의 차이가 없게 된다. 반면 과거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만들어낸 원인[作因]이 없어졌을 터이니, 그렇다면 토끼 뿔[兎角]처럼 체성(體性)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는 본래 그러한 것이므로 ‘본래부터 근본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 생멸심(生滅心)이 생겨나려면 반드시 근본 자리에 의지해야 하는데 근본 자리가 이미 없다면 생길 여지가 없다. ‘근본 자리[本處]’란 구유근(俱有根;五色根ㆍ第六識ㆍ第七識ㆍ第八識)을 말한다. 다섯 가지 색근[五色根]은 그 자체가 벌써 색법(色法)이므로 방위나 장소[方所] 여하에 불구하고 모두 얻어지지 않으며, 나머지 세 가지 소의(所依)는 모두 무색법(無色法)이므로 시간의 여하에 불구하고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근본 자리가 본래 없다’는 말을 붙인 것이니, 이는 애초부터 근본 자리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근본 종자도 없고 근본 자리도 없다면 심상(心相)이 본래 생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되 생함을 얻을 수 없을 때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能觀心]도 생기지 않으니, 이 때 본래 공적한 데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다. 들어갈 바의 공적이란 일심(一心)을 말하는데, 일체가 이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지(地)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그대로 공적에 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적한 마음자리[空寂心地]’라고 한 이유는,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유전하면서 항상 모습이 있다[有相]고 집착하지만 그러나 이 문(門)에 의해 관찰하면 본래 공(空)한 마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마음의 공함을 증득한다’고 한 것이다. 마음이 공하다[心空]는 것과 공한 마음[空心]이라는 것은 말은 서로 다르지만 좌우는 있으나 모두 일심본각(一心本覺)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상은 물은 뜻에 정곡으로 답한 부분[正答]이고, 앞으로는 결론을 맺으면서 답하는 부분[結答]이다.
‘모습이 없는 마음[無相之心]’이란 일심(一心)의 체(體)를 가리킨다.
‘무심무아(無心無我)’란 앞에서 ‘공적(空寂)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을 다시 결론짓는 말이다. 즉 모습 없는 마음은 심(心)ㆍ아(我)의 두 가지 모습을 떠났다는 것이다.
‘모든 법의 모습도 이와 같다[一切法相亦如是]’란 공적에 대하여 거듭 매듭짓는 구절이다. 이 심ㆍ아의 두 가지 모습만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 밖의 유위(有爲)ㆍ무위(無爲), 나아가 유상(有相)ㆍ무상(無相) 등의 상(相)도 무상심(無相心)에서는 떠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일체 중생 가운데 아(我)에 사로잡힌 자와 심(心)에 사로잡힌 자를 무슨 법으로 깨닫게 하여, 그 중생들을 이 속박[縛]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문답이다. 앞에 첫 번째 질문 중에서는 모양이 있다[有相]고 보는 견해를 깨뜨리는 문을 전체적으로 밝혔고, 지금 이 문답에서는 두 가지 결박을 떠나는 문을 개별적으로 밝혔다. 두 가지 병을 따로따로 들어 치료할 약을 물은 것이다.
‘아(我)에 사로잡힌 자’란 인집(人執)의 병이요, ‘심(心)에 사로잡힌 자’란 법집(法執)의 병이다.
‘이 속박[縛]’이란 따로따로 말하자면 인집(人執)은 추중박(麤重縛)이요, 법집(法執)은 상박(相縛)이지만, 통틀어 말하자면 두 가지 집(執)에 모두 다 추중박과 상박이 있다. 또 이 두 가지 집(執)에 모두 두 가지 박이 있으니, 그것을 상응박(相應縛)과 능연박(能緣縛)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2장장(障章)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인집(人執)을 다스리고 나중에 법집(法執)을 다스린다. 인집을 다스리는 가운데에도 처음에는 총괄적으로 하고 나중에는 개별적으로 한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게 하라.”
【論】 이것은 총괄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는 데에 크게는 두 가지 문(門)이 있다. 첫째는 만든 자가 없이 연에 의해 생김[無作緣生]을 관하여 만든 자가 있다는 집착[作者執]을 고치는 것이니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항상성이 없이 연에 의해 생김[無常緣生]을 관하여 항상성에 대한 집착[常住執]을 고치는 것이니 ‘이것이 생겼으므로 이것이 생긴다’라고 말하는 경우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고집이 있게 된 이래로 이 두 가지[作者執ㆍ常住執]가 근본이 되는데, 근본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모든 지말적인 것들도 따라서 없어진다.
【經】 “열두 가지 인연은 본래 인과(因果)에서 생기며, 인과는 마음의 작용[心行]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마음이란 있는 것이 아니니, 하물며 몸이 있을 것인가?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며, 반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어라.”
【論】 이 부분은 인집(人執)을 개별적으로 다스린 것이다. 개별적으로 다스린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비를 통해 논파하는 것[況治]이요, 둘째는 추적을 통해 논파하는 것[逐治]이다. 황치(況治) 가운데서 ‘본래 인과에서 생기며’라는 구절은, 총괄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이 나오는데,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다만 인(因)과 과(果)뿐이다. 인(因)으로부터 두 가지[無明ㆍ行]와 세 가지[愛ㆍ取ㆍ有]가 나오고, 과(果)로부터 다섯 가지(識ㆍ名色ㆍ6入ㆍ觸ㆍ受)와 두 가지(生ㆍ老死)가 나온다. 또 인(因)으로부터 10지(十支:앞의 열 가지)가 나오고 과(果)로 부터 2지(二支:뒤의 두 가지)가 설명된다. 그러므로 각 지(支)들이 따라나오는 근본은 다만 인과뿐이다.
‘인과는 마음의 작용[心行]에서 일어난다[因果所起興於心行]라고 한 것은, 인과가 일어나는 데 마음의 작용이 근본이 된다는 말이다. 마음이 인(因)을 만들어 마음이 과(果)를 받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있는 것이 아니니, 하물며 몸이 있을 것인가?[心尙不有何況有身]’라고 한 것은, 위에서 말한 것에 의해 도리를 관찰하면 마음이란 것이 존립할 수 없는데 하물며 마음으로 이루어진 색신(色身)이 어떻게 있겠느냐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없는데, 하물며 어찌 나의 존재가 있겠는가? 또 마음이 있지 않으므로 인과 역시 공(空)하다. 인과도 공하거늘 어찌 나라는 존재가 있겠는가? 또 인과가 공하기 때문에 12지(支)도 공하다. 그러니 어찌 만드는 자[作者]와 받는 자[受者] 등이 있겠는가? 경에 ‘보살이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여도 허공과 같아서 다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씀이다. 여기까지가 대비를 통해 논파하는[況破:況治] 부분이다.
그러면 추적을 통한 논파[逐治]란 어떤 것인가.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를 없애주며[若有我者令滅有見]’라는 구절이 앞의 황파를 다시 거론하면서 내가 존재한다는 집착을 없애준 것이었다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없다는 견해를 없애주어라[無我者令滅無見]’한 구절은, 무아(無我)의 병까지도 추적해서 없애주는 것으로서, 이 구절이 바로 축파에 해당한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 앞서 아집을 깨뜨려 외도들의 병[外道病]을 여의었는데 이번에는 무아라는 데 집착하여 2승의 병[乘病]에 걸렸으므로 이제 그 무(無)에 집착하는 견해를 추적하여 깨뜨린 것이다. 내가 본래 있지 않은데, 어찌 ‘내가 없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총괄적, 개별적인 두 가지 관(觀)으로 아집(我執) 없애는 부분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經】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어떤 본에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기는 성품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지는 성품을 없애주어라’라고 되어 있다]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實際]에 들어간다.”
【論】 이 아래는 마음이 있다는 견해[存心見]를 논파하는 부분인데 이 중에 두 부분이 있다. 즉 정곡으로 논파한 것[正治]과 거듭 해석한 것[重釋]이다. 2승(乘)을 닦는 사람들은 법집(法執)에 마음을 두어[存心], 생멸하는 마음이나 무상(無常)한 마음이 있다고 헤아린다. 그러므로 생멸을 논파하고, 마음이 있다는 견해를 없애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생긴다는 생각 때문에 병든 이가 있으면 앞에 있던 것이 없어졌다는 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왜냐하면 없어졌다는 저 관념에 의거하여 지금 생긴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또 뒤에 없어지는 것을 보고 현재의 마음이 있었다고 집착하는 경우에는, 그 마음이 설사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토끼 뿔과 같은 것이므로 이와 같은 견해를 깨뜨려 생긴다는 관념을 없애야 할 것이다. 생긴 일이 없는데 없어지는 일이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에 들어간다[滅是見性 卽入實際]’한 것은, 없어지는 성품 보는 것을 깨뜨리면 결코 생겨난다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생겨나는 성품 보는 것을 깨뜨리면 결코 없어진다는 견해를 취하지도 않을 것이니, 생멸을 취하지 않으면 마음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經】 “어째서 그런가? 본래 생겨난 것은 없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은[어떤 본에는 ‘본래 없어지는 것은’ 이라고 되어 있다] 생겨나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으니 생겨남이 없고, 생겨나지 않으니 없어짐이 없다. 모든 법상(法相)도 마찬가지다.”
【論】 이 부분은 거듭 해석한 것[重釋]이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생긴다고 보는 자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滅性]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보는 자에게는 생긴다는 성품[心性]을 없애주느냐 하는 물음을 ‘어째서 그런가?[何以故]’라고 표현한 것이다.
‘본래 생겨난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本生不滅]’한 뜻은 무엇인가? 전에 생긴 마음을 찾아도 영영 얻을 수 없다. 얻을 수가 없는데 무엇을 없앤다는 말인가? 이와 같이 앞의 마음이 없어졌다는 생각을 두지 않으면 지금의 마음이 생겼다고 하는 생각에 집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不滅不生]’고 하였다. 이는 ‘없어진다는 관념을 없애준다[令滅滅性]’고 한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다음에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不滅不生]’고 한 것은, 앞에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 뜻을 받아서 지금의 마음이 생겨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지금의 마음이 생하는 성품을 얻을 수가 없다면, 이 마음이 없어진다는 성품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겨나지 않으니 없어짐이 없다[不生不滅]’고 하였다. 이는 ‘생겨난다는 관념을 없애준다[令滅生性]’고 한 이유를 풀이한 것이다.
마음 법[心法]이 없어지거나 생기는 일이 없듯이, 그 밖의 모든 법도 이와 똑같이 관하기 때문에 ‘모든 법상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이다.
【문】 마음이 생긴다고 잘못 생각하면 생긴다는 이 견해만 정곡으로 깨뜨릴 것이지, 그 전에 생긴 마음[前心]이 없어졌다는 생각까지 깨뜨릴 필요가 있는가?
【답】 지금 생긴 마음은 현재 나타나 있는 것이라 깨뜨리기가 쉽지 않지만, 전심(前心)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 그 공(空)함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으므로, 먼저 쉬운 것을 깨뜨려서 어려움을 없애주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로 ‘지금 생한다’는 관념을 깨뜨리고, 이것으로 ‘나중에 멸한다’는 집착을 놓아주니, 이야말로 의왕(醫王)의 뛰어난 의술이라고나 할까?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법이 생겨남을 보는 중생이 있다면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까?”[어떤 본에는 “법이 없어짐을 보는 중생이 있다면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까?(見法滅時 令滅何見)]”라는 여덟 글자가 더 있다.]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없애야 할 그릇된 견해의 병에 관하여 밝혔고, 여기 문답에서는 그릇된 견해의 병을 없애주는 약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또 앞에서는 생겨남[生]과 없어짐[滅]이라는 양 극단의 견해를 깨뜨렸고, 여기에서는 있음[有]과 없음[無]의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깨뜨린다.
지금 이렇게 묻는 의도는 관행(觀行)하는 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닦다가 법이 생겨남을 본다면 어떠한 견해를 없애야 하느냐는 것이다. ‘어떠한 견해를 없애야 하느냐’는 문장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묻는 것인데, 우선 한 쪽[生]만을 들어서 멸(滅)을 관하는 것까지도 같이 설명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법이 생기는 것을 보는 중생에게는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고, 법이 없어지는 것을 보는 중생에게는 있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어라. 이러한 견해들을 없애기만 하면 법이 진짜 없음[眞無]을 깨달아 결정한 성품[決定性]에 들고, 그렇게 되면 생겨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論】 ‘법이 생기는 것을 본다[見法生時]’는 것은, 세속의 법이 인과 연에 의해 생기는 것을 바로 관찰할 때를 말한다. 이 때에는 공(空)에 집착하는 견해를 버려야 하기 때문에 ‘없다는 견해를 없애주라[令滅無見]’고 하였다.
‘법이 없어지는 것을 본다[見法滅時]’는 것은 세속의 법이 본래 멸(滅)해 있음을 바로 관찰할 때를 말한다. 이 때에는 있음에 집착하는 견해를 버려야 하므로 ‘있다는 견해를 없애주어야 한다[令滅有見]’고 하였다.
이 중에 무슨 이유로 ‘없애라[令滅]’라고 했느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관(觀)하는 자로 하여금 멸(滅)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관행자(觀行者)가 법이 생겼다고 볼 때 없다는 견해만을 떠나지만 생(生)을 남겨두는 것이 아니고, 또 적멸(寂滅)을 관할 때에는 있다는 견해만을 떠나지만 적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데 이 말의 의도가 있다. 어째서 그런가? 생겨남이 있다고 하자니 생은 본래 적멸(寂滅)이라 하고, 없어짐을 취하려고 하자니 멸이 곧 생기(生起)’라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인연으로 생긴 것이란
멸의 뜻이지 생의 뜻이 아니며
모든 생멸을 멸했다고 함은
생의 뜻이지 멸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무(有無)의 두 치우침[二邊]을 여의었으면서 그렇다고 중간에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무(無)를 떠나 유(有)를 집착[取]하거나 유(有)를 파하고 공(空)을 집착한다면 이는 거짓 공[妄空]이요, 진짜 무[眞無]는 아니다. 여기서는 유를 떠났으나 공도 남겨두지 않았으니, 이래야만 모든 법이 진짜 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법이 진짜 없음[眞無]을 깨달아’라고 하였다. ‘결정한 성품[決定性]’이란 앞에서 설명한대로다. 진공(眞空)을 얻었을 때 마음이 생하지 않음을 관찰하여 있다, 없다하는 마음을 멀리 떠났으므로 ‘생겨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決定無生]’라고 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저 중생들을 무생(無生)에 머물게 하면 이것이 곧 무생이나이까?”
【論】 이 아래는 네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두 가지 치우침을 떠난 참된 관행[眞觀]을 밝혔다면, 여기서는 (무생에) 머문다는 생각 내는 것[生住]을 떠나지 못한 거짓 이해[妄解]를 밝혔다.
공부가 덜된 채로 관행을 닦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생각과 말로 분별하기를 ‘법(法)이 생(生)하지 않음을 관하여 산란(散亂)한 마음을 거두어들여 무생(無生)의 경계에 머물게 되었다’고 여기고 ‘이것이 무생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나중에 선정(禪定)에서 나올 때 증상만(增上慢)60)을 일으켜 ‘이미 무생법인(無生法忍)61)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병을 없애주기 위해 병을 들어서 ‘무생에 머물게 하면 이것이 무생입니까?’라고 물었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생에 머문다면 그것은 생이다. 왜냐하면 무생에도 머무름이 없어야 비로소 그것이 무생이기 때문이다.”
【論】 답에 두 가지가 있으니 간략하게 대답한 것[略答]과 거듭 자세히 설명한 것[重詳]이다. 간략하게 대답한 두 구절 가운데 위의 구는 그것이 생임을 자연스럽게 밝혔으니, 무생의 경지에 머문다는 것이 바로 분별심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 구는 거꾸로 무생을 풀이한 것이다. 만약 마음이 무생의 경지에도 머무름이 없으면 모든 분별을 여의게 되니, 이것이 무생인(無生忍)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있으면 그것은 무생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뒤집어서 해석하였다. 간략한 대답은 이 문장으로 마친다.
【經】 “보살아, 무생을 생(生)한다면, 생을 가지고 생을 멸하는 것이다.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 본생(本生)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며, 그 공적함이 머무는 곳 없고 마음이 머무는 곳 없어야 이것이 무생(無生)이다.”
【論】 이것은 (답 중에서) 거듭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생(生)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고, 나중은 무생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다. 머무는 마음이 있어 무생의 경지에 그것이 생기면, 이것은 생멸로써 그 경계를 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비록 경계가 생기는 것을 멸(滅)하기는 했으나 멸해서 없어진 그것을 취한다면, 저 멸무(滅無)의 경계에 대해 취하는 마음[能取心]이 생긴다. 그렇다면 생과 멸이 다같이 있는데, 어찌 무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상 두 구절은 앞에서 다룬 생을 자세히 말한 것이다.
참된 무생인(無生忍)은 그렇지 않으니, 밖으로는 소취(所取)를 멸함에 마음을 두지 않고, 안으로는 능취(能取)의 생함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生滅俱滅]’라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멸이 동시에 멸한다[俱滅]는 것은 ‘무로 돌아갔다’는 말이 아니다. 그 본래의 생을 추구해 보건대 그 생(生)이 없다는 것이다. 생이 없다면 어찌 멸(滅)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 때 본래 공적(空寂)함을 깨닫기 때문에 ‘본생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하며[本生不生心常空寂]’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공적은 능(能)ㆍ소(所)가 평등하여 공(空)의 경지에 머문다 하는 마음[能住心]이 없다. 그러므로 ‘공적함이 머무는 곳이 없고[空寂無住]’라 하였으니 이렇게 되어야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생이다’라고 하였다. 이상 무생관(無生觀)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마음에 머무름이 없는데 무슨 닦고 배울 것[修學]이 있습니까? 유학(有學)이라야 합니까, 무학(無學)이라야 합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일각(一覺)의 뜻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62) 이 가운데 여덟 개의 문답이 있는데 크게 둘로 분류하면 처음 두 문답은 일각여래장(一覺如來藏)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한 것이고, 나중의 여섯 문답은 논을 의지해서 논을 일으켜[因論生論] 모든 의심과 논란을 제거한 부분이다.
지금 이 첫 물음에서는 마음이 머무름이 없다는 것을 들어 묻는다. 배울 것이 있다고 한다면 머무름이 없지 않을 터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면 관행(觀行)이 아닐 터이다. 또 배움이 있다고 한다면 마음이 생겨나는 바가 있는 것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면 오직 공리(空理)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생(生)함이 없는 마음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마음이 아니다. 본각(本覺)인 여래장(如來藏)이므로 그 성품이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性寂不動].”
【論】 여기서는 먼저 도리를 밝히고, 나중에 질문에 대답한다. 도리를 밝힌다는 것은, 머무름이 없게 되었을 때 생함이 없는 마음[無生之心]은 항상 적멸(寂滅)하여 관에서 나오는 일[出觀]이 없고, 본래 일어나지 않음을 통달하여 (관에) 비로소 들어가는 일[始入]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心無出入]’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을 관찰하여 이미 출입(出人)이 없으면 곧 본각(本覺)이요, 여래장(如來藏)인 마음이다. 이는 시각(始覺)이 본각과 같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생함 없는 이 마음[無生心]은 이미 본각인 여래장이라, 본래 그 성품이 고요하여 다시는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으니 어찌 들락날락하며 일어나고 멈추는 일이 있겠는가? 이는 출입이 없다는 뜻을 거듭 확증하는 말이다.
【經】 “유학(有學)도 아니고 무학(無學)도 아니다. 배움도 배우지 않음도 없는 것이 무학이며, 배움이 없지 않다는 그것이 바로 배울 바가 된다.”
【論】 이 부분은 묻는 뜻에 대한 정답이 되겠는데, 이 중에 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부정[遮]하고 나중에 긍정[許]한 것이다.
시작이 있어서 들어가는 것[始入]이 아니므로 학(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끝이 있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학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한편 머무는 마음[能住心]이 없으므로 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머물지 않는 마음[無住心]이 없지도 않으므로 학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는 둘 다 ‘아니다’ 라고 부정[遮]하는 논법으로서, (잘못된 견해를) 차단하고 그치게 한 것이다.
‘배움도 배우지 않음도 없는 것이 무학(無學)’이라는 것은 배울 것[所學]이 따로 없으므로 배운다는 일[能學]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학이라는 것을 용인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학(學)이 있을 수 없다는 뜻에 의거하여 무학을 인정한 것이다.
‘배움이 없지 않다는 그것이 바로 배울 바가 된다’고 한 것은 비록 머무름이 있는 관(觀)은 아니라 할지라도 머무름이 없는 행(行)이 없지 않기 때문에 유학(有學)을 허용한 것이다.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무학) 이전의 경지에서 배울 것이다. 이는 배울 것이 없지 않다는 뜻[非無學義]에 의거하여 유학(有學)을 허용한 것이다. 이는 둘 다 허용하는 논리로서, 자재(自在)한 답변이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여래장(如來藏)의 성품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시각(始覺)이 본각ㆍ여래장의 성품과 다르지 않음을 밝혔고, 여기에서는 여래장의 성품이 숨겨져 있고 움직이지 않음을 밝히는데 이 중에 여래장(如來藏)의 요점이 설명되어 있다.
여래장에 대해서는 두 가지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셋으로 설명하는 근거는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중생계 가운데서 세 가지 법을 보여주는데, 모두 진실하고 여여[如]하여 다름이 없고 차이가 없다. 그 셋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여래장의 본제(本際)63)에 상응하는 체(體)와 청정한 법이다. 이 법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떠나거나[離] 벗어나지[脫]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으로서, 시작 없는 본제(本際)로부터 이와 같이 청정한 것에 상응하는 법체(法體)이다.
둘째는 여래장의 본제에 상응하지 않는 체와 번뇌에 얽매여 청정하지 못한 법이다. 이는 본제와 이탈하여 상응하지 않으며 번뇌에 얽매여 청정하지 못한 법이니 오직 여래의 지혜[菩提智]로만 끊을[斷]수 있다.
셋째로 여래장의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있게 될 법[及有]이다. 이는 모든 법의 근본이 되며, 모든 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으며[備], 모든 법을 일일이 갖추고 있어서[具] 세간을 떠나거나 벗어나지 않는 법이다.”
내 생각에 이 경문은 여래장을 세 가지 측면[門]으로 나누어 밝힌 것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거두어들이는 여래장[能攝如來藏]이다. 자성(自性)에 머물러 있을 때 여래 과지(果地)의 공덕을 다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여래를 거두어들이고 있다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둘째는 거두어들여진 여래장[所攝如來藏]이다. 번뇌에 얽매어 청정하지 못한 법이 모두 여래의 지혜 안에 있다. 여래가 그것을 거두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여래에 속하는 법이라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셋째는 숨겨지고 덮여진 여래장[隱覆如來藏]이니, 법신인 여래가 번뇌에 덮여 있음을 말한다. 여래가 스스로 숨었다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른 것이다.
진제 삼장(眞諦三藏)64)은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있게 될 법’이란 경문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다.
045_0065_a_20L 經曰爾時尊者從三昧起而說是言論曰此一品文科爲三分初出定分次起說分後得益分初#後二分是經家序其第二分正是佛言初分中顯三種成就一說法時成就如經爾時故二說法主成就如經尊者故具五通達爲世所尊於甚深法如義說故三自在成就如經從三昧起說是言故來入定無能驚寤於定住出得自在故 經曰諸佛智地入實法相決定性故 論曰此下第二正發言此中有二一者長行二者重頌初長行中亦有二一略標分二廣說分略標分中標二種義初標無相觀後標所觀法無相觀中有其二句先標如來自入無相觀後標令他入無相觀言自入者如經諸佛智地入實法相決定性故諸佛智地者謂如前所入金剛三昧相應之智住持一切功德法故入實法相謂此佛智破一切相通達諸法之實相故決定性是實法相非佛所作有佛無佛性自爾故次言故以決定性釋成上句若不決定卽非實相故又攝上句而成下句如來自入實法相故故能令他得無相利也 經曰方便神通皆無相利 論曰此第二句令他得入言方便者八相方便謂從兜率天退至入涅槃故神通者六神通卽爲三輪化衆生故無相利者如是八六方便神通皆從自入實相而起能令他得無相利故標無相觀竟在於前 經曰覺了義難解難入非諸二乘之所知見唯佛菩薩乃能知之 論曰此下第二標所觀法亦有二句一者直標所觀法深二者爲他說是深法一覺了義者心本覺如來藏義過是永無餘深法故難解者義甚非諸二乘所知見故難入者體甚深唯佛菩薩乃能入故卽以後句而釋前句欲明初門所標佛智所入實法相者直是一心本覺如來藏法如楞伽經言寂滅者名爲一心一心者名如來藏今此文言實法相者是寂滅義一覺了義者卽是一心如來藏義華論云諸佛如來能知彼法究竟實相言實相者如來藏法身之體不變義故今此經言一覺者一切諸法唯是一心一切衆生是一本覺由是義故名爲一覺至下演中當更分別 經曰可度衆生皆說一 論曰此明爲他皆說深法可度衆生者如來所化一切衆生莫非一心之流轉故皆說一味者如來所說一切教法無不令入一覺味故欲明一切衆生本來一覺但由無明隨夢流轉皆從如來一味之說無不終歸一心之源歸心源時皆無所得故言一味卽是一乘初略標文竟在於前 經曰爾時解脫菩薩卽從座起合掌胡跪而白佛言 論曰此下第二廣說於中有二先請後說請中有二先序人儀後明發言序有二句一依時表人解脫菩薩者令諸衆生同一解脫故寄能問人表所說法故二序禮儀如經卽從座起等故 經曰尊者若佛滅後正法去世法住世於末劫中五濁衆生多諸惡業輪迴三界無有出時 論曰此下第二發言而請於中有二先擧所爲時節後請爲彼宣說初中像法住世末劫中者先廣說經爲益正法之時今此經者爲化像法之節#隨時厚薄設教異故 經曰願佛慈悲爲後衆生說一味決定眞實令彼衆生等同解脫 論曰此是第二正請宣說宣說一味者請說一覺了義之味定眞實者請說入實法相之觀令彼衆生等同解脫令彼像法末世衆生等同一味究竟解脫由是言之教有四句一正化正法兼利後時謂前經等二正化像法兼利前時謂此經等三通化前後謂諸餘經等四不利前後除上爾所教 經曰佛言善男子汝能問我出世之因欲化衆生令彼衆生獲得出世之果是一大事不可思議以大慈故以大悲故我若不說卽墮慳貪汝等一心諦聽爲汝宣說 論曰此下第二如來爲說於中有二一者讚問許說二者對請宣讚問中言出世之因者入實相觀故出世之果者一味解脫故是一大事者無上同義故不可思議者離言絕慮故如法華經言諸佛世尊#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論者釋言一大事者依四種義何者爲四一者無上義唯除如來一切智智更無餘事經欲開佛知見令衆生知得淸淨故出現於世故知見者如來能證以如實智知彼義故二者同義諸聲聞辟支佛佛法身平等如經欲示衆生佛知見出現於世故法身平等者佛性法身無差別故者不知義以諸聲聞辟支佛等不能知彼眞實處故不知眞實處者不知究竟唯一佛乘故如經欲令衆生悟佛知見故出現於世故四者令證不退轉地現欲與無量智業故如經欲令衆生入佛知見故現於世故今此文中一大事者亦有四義一無上義如上文言諸佛智地入實法相故二者同義如經一覺了義難解難入故三不知義非諸二乘所知見故四令證義可度衆生皆說一味故讚問已竟次許說中亦有二句初句反顯不說有過後句順明誡聽許 經曰善男子若化衆生無生於化不生無化其化大焉 論曰自此已下正爲宣說於中有二先明無相觀廣明無相利後顯一覺心廣前一覺義#無相觀中亦有二分一者直說觀行之相二者往 復決諸疑難初中亦二先方便觀後明正觀方便觀中有其四句初一句牒能化後一句歎化大中間二句正明觀相無生於化者初修觀時破諸有相於幻化相滅其生心故不生無化者旣破化相次遣空相於無化空亦不生心故所以然者衆生本來迷心離相遍取諸相動念生心故先破諸相滅取相心雖復已破幻化有相而猶取其無化空性取空性故於空生心以亦遣無化空性于時不生取空之心不得已會無二中道同佛所入諸法實相如是化故其化大焉此方便觀爲在何位若仰信修在於十信其相似觀在三十心論其純修在四善根將入初地近方便餘處說有三無性觀何故此中但說二無相無生合爲一邊所遣相生同是有故又此二觀皆有尋思遣無性時無尋思故或開或合皆有道理故已說方便次顯正觀 經曰令彼衆生皆離心我切心我本來空寂若得空心心不幻化無幻無化得無生無生之心在於無化 論曰是明正觀無二之相以離所取能取二故離所取者以離一切人法相此有二種一者遣離二者泯離遣離者先所取相今滅除故如經令彼衆生皆離心我故泯離者先所取相本來空故如經一切心我本來空寂故言心我人名爲我法名爲心心是諸法所依主故達諸人法本來空時先所取相此時不起所以二離一時成已說離所取云何離能取謂離一切能取分別亦二種一者本離二者始離言本離者通達心我來空時正得本覺空寂之心此空寂心本離能取能取故本不幻化如經若得空心心不幻化故不幻化者非虛妄故言始離者得此本覺空寂心時能取分別不復得生隨所得心無幻化故如經無幻無化卽得無生故如是始得無生之心會本空寂無化之理故言無生之心在於無化假說心境故寄言在然始離能取是始覺義本離空心是本覺義義雖有二混成一覺同離能所離新舊故如論說言以始覺者卽同本覺當知此覺永離生滅始終等相始從初地乃至佛地但有分滿不同而已如十地論本分中說自體本來空有不二不盡乃至廣說又此一覺有本始義以有本覺顯成義故眞修之說亦有道理以有始覺修成義故新修之談亦有道理#如其偏執卽有未盡且止乘論還釋本文廣無相觀竟在於前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衆生之心性本空寂寂之心體無色相云何修習得本空心願佛慈悲爲我宣說 論曰此下第二往復決疑有四問荅次第決疑第一問中問意有二一者衆生心性本來空寂而猶動念無始流轉云何方修而得本心二者空寂心體無色無相衆生本來恒取有相云何習無而得空心故言云何修習得本空心此中所說衆生之應是六識等生滅心何以得知一心本覺起信論云有法能起大乘信根謂衆生心依一心法有二種門乃至廣說又如經言寂滅者名爲一心今此文空寂之心體無色相言有左右意致還同言無色者無顯形等色故無相者無生滅等相故此文卽顯心眞如門上言衆生之心且擧心生滅門擧生滅心顯眞 如門以之故言性本空寂然此二門其體無二所以皆是一心法耳 經曰佛言菩薩一切心相來無本本無本處空寂無生若心無生卽入空寂寂心地卽得心空善男子無相之心無心無我一切法相亦復如是 論曰此荅有二正荅決荅言菩薩是呼解脫菩薩之辭下文呼辭皆亦同也一切心相者一切八識動念之心#心所相應行相差別若行若相皆有四相故本來無本本無本處者一切心相種子爲本求此本種永無所得所以然者爲在現時爲已過去若在現時卽與果俱無本末異如牛兩角若已過去卽無作因無體性故猶如兔角如是道理本來法爾以之故言本來無本又生滅心生必依本本處旣無卽不得生言本處者謂俱有根其五色旣是色法有方無方皆不可得餘三所依皆無色有時無時竝不可得是故亦言本無本處謂從本來無其本處旣無本種亦無本處當知心相本來無以之故言空寂無生如是觀察不得生時其能觀心亦無所生是時卽入本來空寂所入空寂卽是一一切所依名之爲地故言卽入空寂空寂心地雖諸衆生本來流轉恒取有相然依此門推求觀察能得本空心故言卽得心空心空空心語有左右是一心本覺之義正荅所問竟在於前此下結荅相之心者擧一心體無心無我者結前所說空寂無生無相心中離心我相一切法相亦如是者重結空非直離此心我二相其餘一切有爲無爲乃至有上無上等相無相心中無不離故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一切衆生若有我者若有心者以何令彼衆生出離斯縛 論曰自此已下第二問前一問荅摠明破有相門今此問荅別顯離二縛別擧二病以問其藥言有我者人執之病若有心法執之病言斯縛者別而言之人執是麤重縛法執是相縛通而說之二執皆有麤重相縛又此二執皆有二縛謂相應縛及能緣縛二障章中其義已具荅中有二先治人執後治法執治人執中先摠後別經曰佛言善男子若有我者令觀十二因緣 論曰此是摠治觀十二支略有二門一觀無作緣生治作者執如說是事有故是事有二觀無常緣生治常住如說是事生故是事生存我之來此二爲本本旣除故諸末隨滅也 經曰十二因緣本從因果因果所起興於心行心尚不有何況有身若有我者令滅有見若無我者令滅無見 論曰此是別治別治有一者況治二者逐治況治中言本從因果者從摠出別摠而言之唯因與果從因出二三從果出五二又從因出十支從果說二支故所從本但是因果果所起興於心行者因果之起心行爲本心能作因心受果故心尚不有何況有身者依上所說觀察道理心不可得況心所作色身是有乎身心尚無況有我耶又心不有故因果亦空因果尚空況有我乎因果空故十二支空況有作者受者等耶如經言薩觀十二因緣如虛空不可盡此之謂也已說況破云何逐治謂若有我者令滅有見者牒前況破滅存我執若無我者令滅無見者此正逐破無我之病以然者先破我執離外道病而取無我墮二乘病故今逐破著無之見我本非有況有我無故摠別二觀破我執竟經曰若心生者令滅滅性若心滅者令滅生性滅是見性卽入實際 論曰此下第二治存心見於中有二正治重釋二乘人等法執存心#計有生滅無常之心故破生滅滅存心見若存心生而成病者破前滅性要依彼滅存今生故若見後滅執有現心心設不滅如兔角故破如是見令滅生性無生有滅不應理故滅是見性卽入實際者破見滅性必不取生破見生性必不取滅不取生滅必不存心故經曰何以故本生不滅不滅不生不滅不生不生不一切法相亦復如是 論曰此是重釋何以見心生者令滅滅性見心滅者令滅生性故言何以故釋此問本生不滅者求前生心永不可得不可得有何法而滅如是不存前心滅性卽不得取今心之生故言不滅不生是釋令滅滅性之由次言不滅不生牒前不滅今不得生如是不得今心生性則不得取此心之滅故言不生不滅是釋令滅生性之由如於心法無滅無生其餘諸法亦同是觀故言一切法亦如是若計心生眞破此生何須破彼前心之滅今生是現破有不易前心己過解空不難故先破易而遣其難依此次第破今生性由是卽遣後滅之執是謂醫王善巧之術耶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若有衆生見法生時令滅何見 論曰此下第三問荅次前問荅明所滅之見之病今此問荅顯能滅之見之藥又前破生滅二際之見今破有無二邊之見今問意言若觀行者順佛教意觀法生時令滅何見滅何見者問佛教意且擧一邊兼顯觀滅佛言菩薩若有衆生見法生時令滅無見見法滅令滅有見若滅是見得法眞無入決定性決定無 論曰見法生時者正觀俗法因緣生時此時離取空之見故言令滅無見見法滅時者正觀俗法本來滅時此時能離取有之見故言令滅有見此中何故言令滅者佛教能令觀者滅故此意正明修觀行者觀法生時只離無見而不存生觀寂滅時唯離有見而不取滅所以然者若存生耶生本寂滅若取滅耶滅卽生起如下頌曰因緣所生義是義滅非生滅諸生滅義是義生非滅所以能離二邊而不著中如其離無取有破有取空此爲妄空而非眞無今雖離有而不存空如是乃得諸法眞無故言得法眞無決定性義如前已說得眞空時觀心不生遠離一切有旡心故故言決定旡生 經曰解脫菩薩而白佛尊者令彼衆生住於旡生是旡生耶 論曰此下第四問荅前明眞觀離二邊相今顯妄解不離生住謂有寡學修觀行者意言分別觀法旡生能攝散亂住無生境作如是念謂是無生後出定時起增上慢意謂已得無生法忍爲破是病擧病問言住於無生是無生耶 經曰佛言住於無生卽是生何以故住無生乃是無生 論曰荅中有二略荅重詳此卽略荅有其二句上句順明是生住無生境卽是分別之心生故下句反釋旡生若心旡住於旡生境離諸分別是旡生忍故知有住非旡生忍如是反釋略荅文竟 經曰菩薩若生旡生以生滅生生滅俱滅生不生心常空寂空寂旡住心旡有住乃是旡生論曰此是重詳於中有二先詳是生後詳旡生若有住心生於旡生之境卽是以生滅其境界之生故言若生旡生以生滅生雖滅境界之生而取其滅之旡於滅旡境能取心生生滅俱存豈曰旡生耶如是二句詳前是生眞旡生忍卽不如是外不存於所取之內不生其能取之生以之故言生滅俱滅然此俱滅非謂還旡推求本生不得其生旣不得生何得還于時證會本來空寂故言本生不生心常空寂是空寂能所平等旡能住心住於空境故言空寂旡如是乃名旡生法忍故言乃是旡生演旡生觀竟在於前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心旡有住有何修學爲有學也爲旡學也 論曰此下廣一覺於中有八問荅科爲二分前二問荅正廣一覺如來藏義後六問荅因論#生論遣諸疑難今此初問心旡住若有學者卽非旡住若旡學者卽非觀行若有學者應有心生若旡學者只是空理 經曰言菩薩旡生之心心旡出入本如來藏性寂不動論曰此中先顯道理後正對問顯道理者得旡住時旡生之心心常寂滅旡有出觀#達本旡起亦非始入以之故言心旡出入如是觀心旣旡出入卽是本覺如來藏心是明始覺卽同本覺此旡生心旣是本藏本來性寂不復起動云何得有入出起息此言重成旡出入義 經曰亦非有學亦非旡學旡有學不學是卽旡學非旡有學是爲所學 論曰此是正對問於中有二先遮後許旣非始入故#非有學亦旡終出故非旡學又旡能住之心故非有學不旡旡住之心故非旡學此是俱遮遮止句也旡有學不學是卽旡學者以旡別所學卽不是能學由是義故許是旡此依非有學義許是旡學也非旡有學是爲所學雖非有住之觀非旡旡住之行以是義故許是有旣有學故下地所學此依非旡學義許是有學也此是俱許自在荅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云何如來藏性寂不動 論曰此下第二問荅明始覺不異本覺如來藏性今者正顯如來藏性隱藏不動此中略明如來藏義如來藏門有二有三言三者如不增不減經言衆生界中示三種法皆眞實如不異不差何謂三法一者如來藏本際相應體及淸淨法此法如實不虛妄不離不脫智不思議法旡始本際來有此淸淨相應法體二者如來藏本際不相應體及煩惱纏不淸淨法此本際離脫不相應煩惱纏不淸淨法唯有如來菩提智之所能斷三者如來藏未來際平等恒及有法卽是一切諸法根本備一切法具一切法於世法中不離不脫案云是顯三種如來藏門何等爲三一者能攝如來藏住自性能攝果地#如來功德能攝如來名如來藏故二者所攝如來藏謂煩惱纏不淸淨法一切皆在如來智皆爲如來之所攝持如來所攝名如來藏三者隱覆如來藏謂法身如來煩惱所覆如來自隱名如來眞諦三藏作如是說消其文者言未來際平等恒及有者
045_0072_b_01L“일심의 체(體)는 3제(際)에 두루 하나 앞의 두 측면을 설명할 때 본제(本際)에 관해서는 이미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후제(後際)까지도 밝힌 것이다. 이 문장의 또 다른 의도는 ‘여래’라는 뜻을 나타내려는 데 있다. 즉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라는 구절은 여(如:같다는 뜻)를, ‘있게 될 법[及有]’은 래(來:온다는 뜻)를 나타낸다.”
『불성론(佛性論)』65)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참다운 여[眞如]는 여(如)가 아닌 가운데 여함이 있는 것이며, 여(如) 아님이 없는 가운데도 여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2승(乘)의 여(如)는 여(如)가 아닌 가운데서는 여함이 있지만, 여(如) 아님이 없는 가운데에서는 여함이 없다. 어째서 그런가? 2승(乘)을 닦는 사람들은 허망관(虛妄觀)에 의지하여 무상(無常) 등의 모양만을 보고 그것을 진여(眞如)라고 생각하는데, 이 허망관은 인지(因地)에만 있고 과지(果地)에는 없다. 그렇다면 이 여(如)가 성립되었다가 파괴되었다가 하는 것이 된다.
보살의 여(如)는 어떤가? 보살은 허망을 떠나 진성(眞性)에 입각하여 이 여를 보므로 인과(因果) 두 곳에서 다름이 없고, 성립되거나 파괴되는 때가 없다……”
그러므로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後際平等恒]’라는 구절이 대승에서 말하는 여(如)의 뜻을 밝힌 것임을 알 수 있다.
‘있게 될 법[及有]이라는 것은 래(來:온다는 뜻)를 나타낸다’라고 한 말은, 범부의 법이 감[去]을 상대로 해서 일심(一心)이 옴을 나타낸 것이다. 범부의 법이 갔을 때는 오취온법(五取蘊法)이 과지(果地)에 이르지 못하니, 즉 가서는 오지 못하는 법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일심의 여는 과지에서도 그냥 그대로 있어 영원히 지나가 버림이 없으므로 ‘있게 될 법[及有]’이라고 하였으니, 즉 래(來)의 뜻을 밝힌 것이다. 논에서 ‘자성(自性)에 머무르면서부터 지득(至得:佛果)에 이른다’고 한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일심은 더럽거나 깨끗한 모든 법에게 공통적인 의지처[依止]가 되므로 (앞의 『不增不減經』에서) ‘모든 법의 근본’이라 하였고, 또 본래 고요한 면으로 보아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무수한 공덕(功德) 중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하였고, 연(緣)을 따라 움직이는 면으로 보아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염법(染法) 중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일일이 갖추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염법(染法) 쪽에서 심체(心體)를 바라보면 두루 통할 수 없으므로 이탈하지만, 심체 쪽에서 염법을 바라보면 염법(染法)에 두루 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세간을 떠나거나[離]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떠나거나 벗어나지[脫] 않는다는 것은 숨어 갈무리되어 있다[隱藏]는 뜻이다. 여래장(如來藏)의 세 번째 측면을 설명하는 이곳에서는 일심이 움직임과 고요함에 통하며 염법과 정법에게 의지처가 됨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여래장의 두 번째 측면을 설명한 곳에서는, 여래장의 움직이는 측면이 염법(染法)의 소의(所依)가 됨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여래장의 첫 번째 측면을 설명한 곳에서는, 여래장의 본래 고요한 측면이 정법(淨法)의 소의가 됨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두 번째에서 ‘본제에 상응하지 않는 체’라고 한 것은, 모든 번뇌 법이 심체(心體)를 위반한다는 뜻에서 ‘상응하지 않는다[不相應]’고 한 것이다. 일심의 체가 연을 따라 움직이는 면[隨緣動門]에서는 번뇌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상응하지 않는 법의 체가 된다.
‘…와 번뇌에 읽혀 청정하지 못한 법’이라고 한 것은, 의지하는[能依:染法] 법이 심체에 의지해 전전하면서 스스로 심체를 얽어매고 따라서 물들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능의(能依)와 소의(所依)의 법을 함께 취하여 여래장의 두 번째 체라고 본 것이다.
‘오직 여래의 지혜[菩提智]로만 끊을[斷]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해탈도(解脫道)에서만 올바로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러한 뜻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첫 번째에서 ‘본제에 상응하는 체’라고 한 것은 (일심의 체가) 본래 고요하다는 면[本來靜門]에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덕(德)이 갖추어져 있어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니, 이는 공덕에 상응하는 체(體)이다.
‘…와 청정법(及淸淨法)’이란 능의(能依) 공덕이 본래 염법을 떠나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능의와 소의의 법을 함께 취하여 여래장의 첫 번째 체라고 본 것이다.
‘이 법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떠나거나[離] 벗어나지[脫]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이라고 한 것은 상응(相應)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며, 법신(法身)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니, (일심의 체가)모든 공덕법(功德法)과 상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윗글에서 말한 것과 같이, 불법(佛法)의 떠나지 않는 면, 벗어나지 않는 면, 끊어지지 않는 면, 다르지 않는 면, 불가사의한 면과 상응하므로 법신(法身)이라고 부른다. 무슨 뜻인가? 이 일심(一心)의 체(體)에는 크게 보아 다섯 가지 특성[相]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 특성인가?
첫째는 취하는 대상[所取]의 차별된 모습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취하는 자[能取]의 분별하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셋째는 3세제(世際)에 두루 미쳐 평등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넷째는 허공계(虛空界)와 같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다섯째는 있다[有], 없다[無], 전체다[一], 개별이다[異]하는 따위의 극단에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마음이 가는 곳을 벗어나 있고, 언어의 길을 초월하여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본래 공덕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도 심체와 상응하는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낱낱의 공덕이 소취(所取)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법신과 떠나 있지 않는 것이니, 앞서 본 첫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경에서 ‘떠나지 않는다[不離]’고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둘째는 낱낱의 공덕이 능취(能取)의 집착을 벗어났기 때문에 법신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앞에서의 두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不脫]’고 한 것이 그 뜻이다.
셋째는 이 낱낱의 공덕이 3세제(世際)에 두루 미쳐 시간적[縱]으로 보아 전후의 단절이 없는 것이니, 앞서 말한 세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끊어지지 않는다[不斷]’고 하였다.
넷째는 이 낱낱의 공덕이 허공계와 같아서 공간적[橫]으로 여기다 저기다 하는 차이가 없으니, 네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不異]’고 하였다.
다섯째는 낱낱의 공덕이 모두 극단[邊]을 떠나 있어 사량(思量)의 경계가 아니며 언어의 길을 넘어서 있으니, 이는 다섯 번째 특징과 상응한다. 경에 ‘부사의(不思義)’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한다.
모든 공덕법에는 이 다섯 가지 뜻이 있어 (일심의) 체(體)와 별개가 아니라 한 맛[一味]에 융통되므로, 이런 이유에서 ‘상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지 심왕(心王)과 심수(心數)가 개별적인 체로서 상응하는 것과는 다르다.
지금 여기에서 ‘떠나거나 벗어나지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不離不脫智不思議法]’이라고 한 것은 모든 공덕 중에 각(覺)의 의미를 추려서 다섯 가지 상응 중에 세 가지 뜻만을 요약한 것이다. 이상이 첫 번째인 능섭여래장[能攝藏]이다. 여기까지 여래장의 뜻을 세 가지 측면에서 간략히 설명하였다.66)
여래장의 뜻을 두 측면으로 설명하는 것[二門]에 대해 『부인경(夫人經:勝鬘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여래장(空如來藏)이란 (법신을) 떠나 있거나[離] 벗어나 있거나[脫] 다르거나[異]한 모든 번뇌장(煩惱藏)을 말한다.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란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다르지 않은 불가사의한 불법을 말한다.”
위 경문을 나는 이렇게 해석하겠다.
모든 번뇌법(煩惱法)은 다 허망하니, 경계[境]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허(虛)라 하고 체(體)가 산란하기 때문에 망(妄)이라 한다. 거짓[妄]이기 때문에 참[眞]이 없고, 헛것[虛]이기 때문에 실다움[實]이 없다. 진실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고, 여래를 숨겨 덮고 있으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공’이란 진(眞)을 숨겨 덮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번뇌의 경계는 실답지 않은 형상[相]인데 그것이 법신(法身)을 떠나 있기 때문에 ‘떠나 있거나[若離]’라 하였다. 모든 번뇌의 체는 망령된 집착에 결박되어 법신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벗어나 있거나[若脫]’라고 하였다. ‘다르거나[若異]’라고 함은 앞서 말한 허망의 차별과 분별이 법신의 평등한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면에서 (법신과) 상응하지 않으므로 이를 진실이 없다 하고, (여래장의) 공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다.
‘불공(不空)’이란 모든 공덕이 체(體)와 상응함을 말한다. 체가 망령되지 않기 때문에 참이며, 경계가 헛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다운 것이다. 진실하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不空]’고 하며, 여래가 숨겨져 있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한다.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라는 등의 문구는 여래장의 공하지 않은 측면을 풀이한 것이다. 그 뜻은 세 가지로 여래장을 설명한 대목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여기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의 체는 앞에 세 가지로 설명한 중에서 첫 번째 법[能攝如來藏]에 해당하고, 여기 공여래장의 뜻은 저곳의 두 번째[所攝如來藏]에 해당한다. 그리고 세 가지 여래장 중 ‘숨겨 덮고 있다[隱覆]’는 의미는 세 번째에 들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앞(셋으로 설명한 것)에서는 첫 번째ㆍ두 번째를 가지고 능섭(能攝)과 소섭(所攝)의 두 가지 뜻을 구별한 반면, 여래장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 여기서는 공[空;妄法]이 진실을 덮고있다는 측면을 드러내려고 덮는 쪽[能覆]과 덮이는 쪽[所覆] 두 가지로 구별한 것이다. 또 이 두 경[不增不減經과 勝鬘經]이 서로 다른 의미를 드러내려 했기 때문에 두 가지로 설명하거나 세 가지로 설명하는 양쪽의 해석이 다른 것이다. 부연설명은 여기서 그치고 다시 본문해석으로 돌아가겠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장(如來藏)이란 무엇인가? 생멸하는 사려[慮知]의 모습을 말한다. 이치를 숨겨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므로 여래장이라 하며, 그 본성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論】 ‘생멸하는 사려의 특성’이란 공여래장(空如來藏)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숨기는 쪽[能隱義]만 드러냈을 뿐, 이것을 여래장이라는 이름으로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치를 숨겨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므로 여래장이라’ 함은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을 말하는데, 숨겨진 쪽[所隱義]을 잡아서 여래장이라 이름하였다.
‘본성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란 여래장의 성품이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이 여래장의 성품에는 다섯 가지 의미가 있으니 『무상론(無相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첫째는 종류(種類)의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병(甁)이니 옷이니 하는 따위의 모든 색법(色法)이 4대(大:지ㆍ수ㆍ화ㆍ풍)를 떠나지 않고 모두 네 가지 요소를 성품으로 삼듯이, 중생은 하나의 계[一界]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1계로 종류를 삼고 있기 때문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67)에서는 체류(體類)의 뜻이라 하였고, 『불성론(佛性論)』에서는 자성(自性)의 뜻이라고 하였는데, 말은 다른 것 같으나 뜻에는 다름이 없다.
둘째는 인(因)의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나무에는 타는 성질이 있어 불에게 원인이 되는 까닭에 이것을 그 본성이라고 말하듯, 성인의 모든 무루법(無漏法)은 이 본성을 인(因)으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위 두 논(論)에서 한결같이 인이라고 부른다.
셋째는 생긴다[生]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진금(眞金)을 단련하여 장식품을 만들 때 만들어진 장식품은 금을 본성으로 한다. 이 계(界)도 그와 같아서 과지(果地)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을 낳게 하니, 법신이 생기는 것은 이 계를 본성으로 한다.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생(生)의 뜻이라 하였고, 『불성론(佛性論)』에서는 지득(至得)의 뜻이라 하였다. 과(果) 전에 있다는 뜻에서 쓰는 인(因)의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미 생겼다’는 뜻에 의해 지득(至得)이라고 부른 것이다.
넷째는 바뀌지 않는다[不改]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마치 금강보(金剛寶)의 성질이 일겁(一劫) 동안 한결같이 머물면서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듯이, 이 계(界)가 3세(世)에 평등하게 머물면서 세간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출세간에서도 다 없어지지 않는다. 저 두 논(論)에서는 진실(眞實)의 뜻이라고 하였으니, 진실하다는 것은 파괴되지 않는다[不壞]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다섯째는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密藏]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황석(黃石) 중에는 진짜 금의 성질이 있으나 그 광석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이익을 얻을 수가 없다. 녹이고 단련함에 따라서 보배로 쓸 수 있게 되므로 그 본성은 숨겨진 뜻이 있다고 한다. 여래장의 본성도 이와 같아 감싸고 있는 것[纏]을 벗겨내지 않으면 밖에서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 때문에 물이 들지만 그 감싸고 있는 것을 깨뜨려 본성에 맞닥뜨리면 안에 이루어진 청정함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성이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는 뜻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성론』에서는 비밀(秘密)이라 하였고, 『섭대승론』에서는 감추어져 있다[藏]고 하였으니 뜻은 같으나 말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 이 글에서 말하는 본성[性]이란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寂不動]’는 것은 간략하게 위의 마지막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고요함’은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일각(一覺:여래장)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하였다.68)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무엇이 생멸하는 사려의 모습[生滅慮知相]입니까?”
【論】 이 아래부터는 여섯 가지 질문과 여섯 가지 대답이 나오는데, 인론생론(因論生論)으로 모든 의심과 논란을 풀어준다. 이는 첫 번째 문답으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숨게 하는 것[能隱]이 사려[慮知]임을 밝혔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이치에는 긍정[可]과 부정[不]이 없다. 긍정과 부정이 있다면 모든 망념이 생겨나니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곧 생멸하는 모습이다.”
【論】 이 답은 두 겹으로 되어 있으니, 먼저는 간략하게 답하고[略答] 나중에는 자세하게 설명한다[廣演]. 간략한 대답에 두 구가 있는데, 먼저 무엇을 미혹하고 있는지[所迷]를 말한다. 미혹의 대상이 되는 이치는 마음가는 곳이 사라진 것이므로 ‘이치에는 긍정과 부정이 없다’고 하였다. 가(可)란 옳다[是]는 것이요, 부(不)란 그르다[非]는 뜻이다. 이치는 4구(句)를 끊고 모든 시비를 떠나 있어 분별심으로 닿을 곳이 아니다.
다음에는 무엇이 미혹하는가[能迷]를 밝혔다. ‘옳고 그름이 있으면 모든 망념이 생긴다’는 것은 무명(無明)이 있어서 평등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더러운 마음[六染心]을 함께 일으킨다는 뜻이다.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이 곧 생멸하는 모습’이라고 함은 여섯 가지 더러운 마음에 거친 것[麤]과 미세한 것[細]이 있다고 할지라도 평등함을 거스르기는 마찬가지라, 이것이 생멸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멸의 모습을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마음과 상응하는 거친[麤] 생멸상이며, 둘째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미세한[細] 생멸상이다. 여기서 거친 것 중의 거친 것[麤中之麤]은 범부의 경계이고, 거친 것 중의 미세한 것[麤中之細]과 미세한 것 중의 거친 것[細中之麤]은 보살의 경계이고, 미세한 것 중의 미세한 것[細中之細]은 부처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생멸은 무명(無明)의 훈습(薰習)에 의하여 생기게 되니, 이른바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한다는 것이다. 인에 의한다는 것은 불각(不覺)의 뜻이고, 연에 의한다는 것은 망령되게 경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이 없어지면 연도 없어진다. 인이 없어지므로 상응하지 않는 마음[不相應心]이 사라지고, 연이 없어지므로 상응하는 마음[相應心]이 사라진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마음과 상응하는 거친 생멸상’이란 세 가지 상응염(相應染)을 말하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미세한 생멸상’이란 세 가지 불상응염(不相應染)이다. ‘거친 것 중의 거친 것’이란, 집상응염(執相應染)과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으로서 모두 6식(識)에 있으므로 범부의 경계이다. ‘거친 것 중의 미세한 것’이란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으로서 제7식(第七識)에 있으며, ‘미세한 것 중의 거친 것’이란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며, ‘미세한 것 중의 미세한 것’이란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이 셋은 모두 제8식(第八識)의 자리에 있다. 이 중에 세 가지 미세한 생멸은 무명(無明)이라는 바람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인(因)이 없어지므로 불상응심(不相應心)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또 세 가지 거친 생멸은 경계(境界)의 바람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연(緣)이 없어지므로 상응심(相應心)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금 이 경에서 ‘천 가지 생각’이라고 한 것은 모든 불상응염의 미세한 분별을 다 포함했기 때문이며, ‘만 가지 생각’이라고 한 것은 모든 상응염심의 거친 분별을 다 포함했기 때문인데, 둘 다 동요하는 생각의 모습[動念之相]이므로 ‘생멸하는 모습[生滅相]’이라고 하였다.
【經】 “보살아, 본각의 성품과 모습[性相]을 살펴보았더니 이치[理]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 그러니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은 도의 이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헛되이 움직이고 산란케 하여 본래의 심왕(心王)을 잃는다.”
【論】 이 아래로는 자세한 설명인데, 여기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생멸의 모습에 대비해서 이치가 만족되어 있음을 밝혔고, 둘째는 이치가 만족한데 대비해서 물든 마음에는 결여가 있음을 밝혔으며, 셋째는 이치를 따라 물든 마음을 없애서 동요를 버리고 고요한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이익[利]을 설명하였다.
처음에 ‘보살’이라고 한 것은 해탈보살을 부른 말이다. ‘본각의 성상을 관찰했다[觀本性相]’고 한 것은, 부처님께서 본각(本覺) 여래장성(如來藏性)을 관하셨다는 말이다. ‘이치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理自滿足]’고 한 것은, 관찰한 바 본각 여래장의 이치에 무량한 성품의 공덕이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다는 말이다. 『기신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또한 진여(眞如) 자체의 모습은 본래부터 자성에 저절로 일체의 공덕을 만족하고 있다. 이른바 그 자체에 큰 지혜의 빛이라는 뜻이 있고,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 있으며, 진실로 안다는 뜻이 있고, 자성이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이라는 뜻이 있으며,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뜻이 있고, 청량하고 불변하고 자재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불법, 즉 떠나지 않고, 끊어지지 않으며, 다르지 않은 불가사의한 불법을 구족하고 있으며 …… 조금도 모자람 없이 만족해 있는 까닭에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표현하며, 여래의 법신이라고도 부른다.” 지금 이 『금강삼매경』에서는 ‘이치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理自滿足]’고 하여 총괄적으로 그와 같은 공덕이 만족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첫 단락[생멸의 모습에 대비해서 이치가 만족되어 있음을 밝힘(對生滅相 顯理滿足)]을 마친다.
다음으로 생멸하는 동념(動念)의 잘못을 밝힌다. 여기에서는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음을 전체적으로 밝혔다. 『기신론』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풀이하였다.
【문】 ‘진여는 그 체(體)가 평등하여 모든 모양을 떠나 있다’고 위에서 말했는데, 이번에는 어째서 체에는 그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사실 이러한 모든 공덕의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차별의 모양은 없다. 똑같은 한 맛[一味]이라 유일한 진여일 뿐이다. 무슨 뜻인가? 분별하는 일이 없으므로 분별상(分別相)을 떠났으니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業識)에 의지해서 생멸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어떻게 나타내는가? 모든 법은 본래 마음뿐[唯心]이어서 사실은 모습[相]과 생각[念]이 없다. 그러나 허망한 마음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생각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본다. 이런 뜻에서 무명(無明)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본성[心性]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큰 지혜의 광명[大智慧光明]이다. 만약 마음에 소견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게 되지만 심성(心性)이 소견[見]을 여의면 법계를 두루 비춘다. 그러므로 마음에 동요가 있으면 진실되게 아는 것이 못 되고, 자성(自性)이 없어서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하지도 못하며 ……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허망한 생각의 오염[妄染]을 다 갖추게 된다.
이러한 뜻에 대비해서 심성(心性)에 동요가 없으면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온갖 청정한 공덕상이 나타난다. 만약 마음에 생멸이 일어나서 다시 앞의 법에 대해 생각할 만하다는 견해를 가지면, 모자라는 것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정법(淨法)의 무량한 공덕은 다름 아닌 일심(一心)이며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으므로 만족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법신여래(法身知來)의 장(藏)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 경에서 ‘헛되이 움직이고 산란케 함’이란,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진실한 앎이 아니며, 자성이 없으면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아니기 때문에 ‘동(動)’이라고 하였다. 마음이 소견을 일으키면 불견(不見)의 모습[相]이 있으므로 ‘난(亂)’이라고 하였다.
‘본래의 심왕을 잃음’이란, 무량한 공덕이 일심(一心)인데, 일심이 주(主)가 되므로 ‘심왕(心王)’이라고 하며, 생멸심이 동요하고 산란하면 이 심왕에 위반되어 다시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잃는다[失]’고 하였다.
【經】 “그러나 사려(思慮)가 없으면 생멸이 없고, 실제와 같아져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모든 식(識)이 안정되고 고요하여 끊임없는 흐름[流注]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섯 가지 깨끗한 법을 얻는데, 이를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論】 이 아래는 셋째 부분으로 이치에 순종하여 오염을 없앰으로써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감을 밝힌 것이다. 이 중에도 둘이 있으니 정곡으로 설명한 부분[正顯]과 거듭 설명해서 결론짓는 부분[重成]인데, 위의 경문은 전자에 해당하며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감을 밝힌다.
‘사려가 없으면[若無思慮]’이란, 초지(初地)에서 불지(佛地)까지 점차로 일심의 평등한 법계에 순응하여 모든 사려분별(思慮分別)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생멸이 없다[卽無生滅]’고 한 것은, 앞에서의 사려로 말미암아 생멸의 모습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려가 없으므로 영원히 분별이 없고, 두 가지 생멸(生滅)을 다 온전히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여기서부터는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어서 미래가 다하도록 다시는 동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실제와 같아져서 일어나지 않는다[如實不起]’고 하였다.
두 가지 생멸이 끝까지 다 종식되었을 때 여덟 가지의 식의 움직임이 모두 다 고요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끊임없이 흐르던 여섯 염심[六染]이 영원히 끊어져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식(識)이 안정되고 고요하여 끊임없는 흐름[流注]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끊임없는 흐름이 생기지 않으니 법계가 원만하게 나타나고, 모든 식(識)이 안정되니 4지(智)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깨끗한 법을 얻는다[得五法淨]’고 말한 것이다. 싣고 나르는[運載] 공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총괄하는 의미에서 ‘대승(大乘)’이라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간다’ 라고 한 부분을 정곡으로 설명한 것이다.
【經】 “보살아, 5법[法]의 청정함에 들어가면 마음에 망념이 없으며, 망념이 없으면 곧 여래께서 자각하신 거룩한 지혜[聖智]의 경지에 들어간다.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모든 것이 본래부터 생기지 않음을 잘 알 것이요,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상이 없어진다.”
【論】 이것은 거듭 설명해서 결론짓는 부분[重顯:重成]인데 세 구가 있다. 첫째 ‘5법의 청정함에 들어가면 마음에 망념이 없다’는 것은 일심의 근원에 돌아갔을 때는 망념의 불각(不覺)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망념이 없으면 곧 여래께서 자각하신 거룩한 지혜의 경지에 든다’고 한 것은 불각이 다했을 때 시각(始覺)의 원만한 지혜 경지에 들기 때문에 한 말이요, 불각을 상대로 시각의 원만함을 드러낸 것이다.
셋째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일체가 본래부터 생기지 않음을 잘 알고’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상이 없어진다’ 하였는데, 이는 시각이 원만할 때 불각의 네 가지 상이 망념을 일으키나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곧 본래부터 망상이란 없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시각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중생을 각(覺)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본래부터 생각 생각이 계속 잇달아 생겨나서 한번도 생각을 떠난 일이 없기 때문에 시작 없는 때로부터의 무명[無始無明]이라고 한다. 생각이 없어지면 심상(心相)의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을 알게 되니 무념(無念)과 같아지기 때문이며, 사실상 시각(始覺)의 다름이 없이 네 가지 모습이 독자적으로 존립하지 못하고 동시에 있어 본래 평등하여 일각(一覺)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위 글을 이렇게 생각한다.
이 중에서 ‘생각이 없어지면 심상의 생주이멸을 알 것’이라 함은, 이 경에서 ‘모든 것이 …임을 잘 안다[善知一切]’라고 한 말을 나타낸다. ‘사실상 시각과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은 이 경에서 ‘본래 생기지 않음을 잘 알면’이라고 한 말을 나타낸다. 또한 ‘네 가지 모습이 독자적으로 존립하지 못하고 동시에 있어 본래 평등하여 일각(一覺)과 같아지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이 경에서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념이 없어진다’고 한 말을 나타낸 것이다. 꿈속에 강을 건너는 비유69)도 이런 맥락에서 설해져야 한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망상(妄想)이 없으면 멈추고[止] 그치게[息]하는 일도 없겠습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문답 중에) 둘째 문답인데, 멈춤과 그침이 없음을 밝혔다. 본래 망상이 없다면 멈추게 할 대상[所止]이 없고, 멈추게 할 대상이 없으면 멈추는 일[能止]도 없다. 멈추는 일이 없으므로 시각(始覺)도 당연히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지는 것이 이 질문의 의도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허망[妄]이란 본래 생겨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치게 할 만한[息] 허망이 없으며, 마음이 본래 무심임을 알면 멈추게 할 만한 마음도 없다. 나뉨[分]이 없고 구별[別]이 없어 현식(現識)이 생기지 않는다. 멈추게[止]할만한 생이 없으니 그것이 멈춤 없는 것이다. 그렇다해서 멈춤이 없는 것[無止]도 아니다. 왜냐하면 멈춤 없음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論】 이렇게 답한 의도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멈출 것이 없음을 허락하고 나중에 멈출 것이 없음을 부정한다. 허락한다는 것은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부정한다는 것은 시각이 그대로 본각은 아니기 때문이다.
허락하는 말씀에서 그침과 멈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허망은 일어나 동요하니까 그치게 해야 하고, 마음은 흩어져 달아나므로 멈추게 해야 한다. 그러나 본래 일어남[起]도 없고, 달아남[馳]도 없으므로 그치게 해야 할 것도 멈추게 해야 할 것도 없다.
‘나눔이 없다[無分]’고 한 것은 견분(見分)과 나뉘어진 상분(相分)이 없다는 뜻이다. ‘구별이 없다[無別]’고 한 것은 상분과 구별되는 견분이 없다는 뜻이다. 상분과 견분이 나뉘거나 구별되는 일이 없다면 현재의 식[現識]이 본래 생기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식이 생기지 않음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다같이 알기 때문에 현재를 들어서 본래 생하지 않음[本不生]을 밝힌 것이다.
이미 멈추어야 할[所止] 불각(不覺)이 생기는 일이 없으므로 멈추게 하는[能止] 시각(始覺)도 따로 있지 않으니, 따로 있지 않다는 입장에서 질문의 뜻을 긍정한 것이다. ‘그렇다해서 멈춤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다르지 않은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멈춤 없음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생기는 일 없는 망심(妄心)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생기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저 무생(無生)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무생(無生)만은 아니기 때문에 멈출 바가 없지 않다. 그런 까닭에 멈추게 하는 각(覺)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답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만약 멈출 것이 없는 것을 멈추게 한다면 멈춘다[止]는 것이 곧 생기는 것[生]이 될 터인데 어찌 무생(無生)이라고 하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셋째 문답으로서 무생관(無生觀)을 밝혔다. 만약에 멈추게 하는 각(覺)이 있다고 한다면 멈춤의 관(觀)이 생길 것이니, 불각(不覺)의 일어남을 막았다 할지라도 이번에는 다시 시각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생관(無生觀)을 증득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따져 묻는 이의 의도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멈추는 그것이 바로 생기는 것이기는 하나 멈추고 난 후에는 멈춤이 없다. 멈춤이 없는[無止] 거기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름이 없는 거기에도 머물지 않으니 어찌 생(生)한다 하겠는가?”
【論】 이 답에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먼저는 인정하고[與], 나중에는 부정한다[奪]. 인정한다는 것은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許]한 것이다. 방편관(方便觀)에서는 멈추게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세제일법(世第一 法)을 닦을 때는 식(識)이 생기는 것을 멈추어 식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멈추게 하는 마음[能止心]이 무(無)를 취하여 생기니, 멈추는 바로 그 순간에는 생겨남을 긍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멈추는 그것이 바로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한 생각을 넘어서면 무(無)를 취하지 않으니, 무를 취하지 않으므로 취하는 마음[取心]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멈추고 난 후에는 멈춤이 없다’고 하였다. 이 때는 일체의 분별을 멀리 떠나기 때문에 무지(無止)의 무(無)에도 머물지 않고, 스스로 머무름이 없다는 마음도 취하지 않아 능소(能所)가 영원히 끊어지니 평등하고도 평등하다. 이런 때 생겨난다고 할 그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답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생겨남이 없는 마음은 무엇을 취하고 버리며, 어떤 법상(法相)에 머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겨남이 없는 마음은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마음 아닌 데[不心] 머물고 법 아닌 데[不法]에 머문다.”
【論】 이것은 네 번째 문답인데 더하는 견해와 덜어내는 견해를 버리게 한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학자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관(觀)에 드는 마음은 모습 없는 이치[無相理]를 취하고, 모습 있는 모든 일[事]을 버린다’고. 이와 같은 증익견(增益見)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不取不捨]’고 하였다.
혹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수도 있다. ‘관(觀)에 들어 있을 때는 도무지 머무를 법이 없고, 머무는 마음도 없다. 그렇다면 필경무(畢竟無)70)와 다름이 없다’고. 더하거나 덜어내는 이런 식의 소견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음 아닌 데 머물고 법 아닌 데 머문다’고 하였다. 머무름이 있지 않다 할지라도 머무름이 없는 것이 아니니, 머무름이 없지 않으므로 머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論】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마음 아닌 데 머물며, 법 아닌 데 머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바로 마음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며, 법을 내지 않는 것이 법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다섯 번째 문답인데 의심나는 생각을 거듭 떨쳐주는 것이다. ‘이미 머문다고 했다면 그것은 마음이요, 법일 것이다. 그런데 마음도 법도 아니라고 한다면 머물지 않는다[不住]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이 말씀은 너무 심오하니 어떻게 믿고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의문의 골자이다.
부처님께서 답하신 뜻은, 증득하는 주체인 관심[觀心]이 있어도 안 되고, 증득의 대상이 되는 이법(理法)이 있어도 안 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내지[生] 않는다, 법을 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낸다[生]는 것은 지닌다[存]는 뜻과 같다.
언제나 마음과 법을 내지 않는다고 하면 혹 실념(失念)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므로 ‘마음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며, 법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머문다[住]는 말은 항상하다[恒]는 말과 같다. 항상하여 물러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머문다고 한다. 머문다[住]는 뜻이 이렇게 마음 아닌 데에 순응하니 그 사이에 무슨 어긋남이 있으랴. 이렇게 해서 물음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아래부터는 이 이치를 거듭 설명한다.
【經】 “선남자야, 마음과 법을 내지 않으면 의지(依止)가 없고, 아무 행(行)에도 머물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습이 없다. 비유하면 저 허공이 움직이거나 머무는 일이 없고, 또 무엇을 일으키거나 만드는 일이 없어 여기다 저기다 할 것이 없다는 것과 같다. 공(空)한 마음의 눈을 얻고 법이 공한 몸[法空身]을 얻으면 5음(陰)과 6입(入)이 모두 다 공적해질 것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서 거듭 설명하는 것[重顯]인데,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모든 상을 멀리 떠나 3세에 두루 미침을 밝히고, 다음에는 법계에 수순해서 6바라밀을 남김 없이 닦음을 밝혔다.
첫 부분에도 세 구가 있으니, 즉 법(法)과 유(喩)와 합(合)이다. ‘마음과 법을 내지 않음’이란 앞서 질문에 답한 구절을 반복해 서두를 꺼낸 것이다.
‘의지가 없다’란 횡적으로 보았을 때 의지하는 주체[能依]와 의지할 대상[所依]의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아무 행에도 머물지 않음’이란 종적으로 보았을 때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행이 없다는 뜻이다. 과거와 미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공적하다’ 하였고, 능(能)과 소(所)가 없기 때문에 ‘다른 모습이 없다’고 하였다. ‘비유하면…저’ 이하는, 비유를 끌어오는 두 번째 부분이다. ‘움직이거나 머무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세간의 허공이 무위(無爲) 상주(常住)하여 앞서 멸했다가 뒤에 생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모든 행(行)에 머물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또 의지할 주체에도 의지할 대상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은 ‘의지(依止)가 없다’고 한 말씀에 비유한 것이다.
‘일으키거나 만드는 일이 없음’이란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다’는 말과 같다. ‘여기다 저기다 할 것이 없음’이란 ‘다른 모습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이 허공을 들어서 불생관(不生觀)을 비유한 것이다.
합(合:주장과 비유를 맞추는 것)에서 ‘공한 마음의 눈을 얻었다’는 것은 능관심(能觀心:내가 관찰을 하노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관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법이 공한 몸을 얻음’이란 소관법(所觀法:관찰할 법이 있다는 생각)이 생기지 않으므로 평등한 법신을 얻는다는 뜻이다.
‘5음이 모두 공하다’란 공한 마음의 눈을 얻어서 3세의 5음이 공하다는 사실을 통달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니, 앞에서 ‘허공이 무엇을 일으키거나 만들어내는 일이 없다’한 비유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6입이 모두 공함’이란 법이 공한 몸을 얻어서 안팎에 두루하여 6입이 공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허공에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다’고 한 비유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經】 “선남자야, 공한 법을 닦는 자는 삼계에 의지하지 않으며, 계상(戒相)에 머물지 않으며, 청정하여 생각이 없으며, 다잡지도 않고 풀어주지도 않으며, 그 성품이 금강과 같으며, 3보(寶)를 무너뜨리지 않으니, 공심(空心)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波羅蜜)을 갖춘다.”
【論】 이것은 두 번째로71) 6도(度)를 빠짐없이 닦음을 밝히는 부분이다.
‘공한 법을 닦는 자’란 앞에서 말한 공적한 마음을 되새긴 것이다. 그 이하는 6도를 갖춘 것을 따로 나타내는 부분이다. 삼계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보시바라밀[施度]을 갖추며, 계상(戒相)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지계바라밀[戒度]을 갖추며, 청정하여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인욕바라밀[忍度]을 갖추며, 다잡지도 않고 풀어버리지도 않기 때문에 정진바라밀[精進]을 갖추며, 성품이 금강과 같기 때문에 선정바라밀[禪定]을 갖추며, 3보를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般若]을 갖춘다.
어째서 그런가? 오직 관하는 마음 하나가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을 두루 비추어서 온갖 쟁론을 끊었기 때문에 3보를 구비하며, 3보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의 공한 마음은 별달리 움직이거나 일으키는 일 없이 6도를 갖추기 때문에 ‘공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을 갖춘다’고 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6바라밀은 모두 모양이 있는데, 모양이 있는 법으로 세간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내가 말한 6바라밀은 모양이 없고[無相] 애써 노력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無爲].”
【論】 이 아래는 여섯 번째 문답으로서 세간을 벗어나는 6바라밀의 의미를 거듭 설명한 것이다. 묻는 자는 의심을 빌미로 결단을 보기 위해 세간에서 닦는 6바라밀의 현상[事相]을 가지고 출세간의 마음에 6바라밀을 어떻게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내놓은 것이다. 답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간략하게 표방하고, 둘째는 자세히 해석했는데 이 문장은 간략하게 표방한 것이다.
무상(無相)이란 주고[施] 받는[受] 것 등 3륜의 모양[三輪相]을 여읜 것을 말한다.
‘무위(無爲)’란 생(生)ㆍ주(住) 등 세 가지 유위(有爲)가 없음을 말한다. 내가 앞에서 ‘일심(一心)에 6바라밀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상(無相)이며 무위(無爲)이기 때문이다. 이 6도(度)는 곧 출세간이므로 세간의 유상(有相)ㆍ유위(有爲)와는 다르다.
【經】 “어째서 그런가? 욕심을 떠난 경지에 잘 들어가서 마음이 항상 청정하고, 진실한 말의 방편과 본각의 이익으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니 이것이 단바라밀(檀波羅蜜:보시바라밀)이다.”
【論】 이 아래는 자세하게 해석한 것인데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는 따로 따로 해석하고[別釋], 나중에는 총괄적으로 밝힌다[摠明].
‘어째서 그런가?’란 물음을 제기하여 말을 꺼낸 것으로, 이미 여섯 개의 법수[六數]가 있는데 어째서 무상이라고 하느냐는 뜻이다. 진여에 전의(轉依)하는 것을 두고 ‘욕심을 떠났다’고 하는데, 3유(有)의 욕(欲)을 떠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체(體)를 관찰하여 이해했기 때문에 ‘잘 들어갔다’고 하였다. 다시는 들어가고 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이라고 하였다. 3륜(輸)72)의 때[垢]를 벗어났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위에서는 ‘삼계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치에 맞게 설하므로 ‘진실한 말[實語]’이라 하였다. 솜씨 있게 편리하게 인도하므로 ‘방편(方便)’이라 하였는데, 공용(功用)이 없을지라도 근기에 맞게 말을 꺼내는 것이 마치 하늘의 북과 같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모든 중생이 오직 하나인 본각(本覺)이며,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일각(一覺)으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본각의 이로움으로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출세간의 단바라밀(檀波羅蜜)73)이라고 한다.
【經】 “지극한 생각[至念]이 견고하여 마음이 항상 머무르지 않으며, 청정하고 물들지 않아 삼계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이 시바라밀(尸波羅蜜)74)이다.”
【論】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기를 외아들을 보듯이 하는 까닭에 ‘지극한 생각이 견고하다’고 하는 것이다.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 열반에 머물지 않으므로 ‘마음이 항상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2승(乘)의 과실을 예방하는 것이다.
밝고 철저하게 마음을 관찰하여 모든 번뇌[諸漏]에 뒤섞이지 않으므로 ‘청정하고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육도(六道)에 두루 걸쳐 다니지만 모두 공적한 경지를 통달하였으므로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범부의 악을 멈추게 한 것이다. 이는 범부와 성현의 계상(戒相)에 머무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위에서도 ‘계상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을 출세간의 시바라밀(尸波羅蜜)이라고 한다.
【經】 “공(空)을 닦아 번뇌의 얽힘[結]을 끊으며, 세속의 모든 것[諸有]에 의지하지 않고, 3업을 적정(寂靜)하게 하며, 몸에도 마음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이다.”
【論】 위의 두 구는 공한 이치에 평안히 있어 모든 번뇌를 여읜 것이요, 아래 두 구는 3업을 고요하게 하고 몸과 마음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이니 모두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뜻이다. 위에서는 이를 ‘청정하여 아무 생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經】 “명수(名數:法數)를 떠나고 공견(空見)과 유견(有見)을 끊어서 5음(陰)이 공(空)한 데 깊이 들어가니 이것이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75)이다.”
【論】 위 두 구는 거친 것[麤]을 여의고 정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한 데 들어간다’는 것은 나아간다[進]는 뜻이다. 위에서는 이를 ‘다잡지도 않고 놓아버리지도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출세간의 정진바라밀[精進度]이다.
【經】 “공적함을 모두 떠나 어떤 공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마음이 무(無)에 처하여 대공(大空)에 있으니[心處無 在大空:어떤 본에는 ‘心處無住 不住大空’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선바라밀[禪波羅蜜]이다.”
【論】 ‘공적함을 모두 떠난다’는 것은 응화(應化)해서 생(生)을 받을 때 3유(有)에 두루 미치기 때문이다. ‘어떤 공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5공(空)에 막히지 않고[不滯] 항상 시방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중생을 교화하는 선(禪)을 밝힌 것이다.
‘마음이 무에 처함[心處無]’이란 몸은 비록 3유에 걸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이무(理無)에 처함이니, ‘이무(理無)’란 이(理)가 3유의 모습을 끊었다는 뜻이다. ‘대공(大空)에 있다’는 것은 항상 시방에서 교화를 할지라도 마음이 대공에 있다는 것이니, 대공이란 시방의 큰 모습으로서 공하다는 뜻이다. 이는 불법(佛法)을 성취하는 선(禪)을 밝힌 것이다.
몸은 비록 무언가를 일으키고 만든다 할지라도 마음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이를 위에서 ‘성품이 금강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대공에는 대략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의 두 공을 대공이라고 한다. 『잡아함(雜阿含)』의 「대공경(大空經)」과 『유가론(瑜伽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둘째 반야바라밀공을 대공이라고 부른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능가경(楞伽經)』에서도 역시 같은 설명을 하였다.
셋째 기세계의 공함[器世界空]을 대공이라고 한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중변론(中邊論)』에서도 같은 설명을 하였다.
넷째 아뢰야식의 공함[阿梨耶識空]을 대공이라고 부른다. 『십지론(十地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다섯째 시방(十方)의 모습이 공함을 대공이라 부른다. 『지도론(智度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지금 이 경문은 다섯 번째에 해당하나, 우선 편의에 따라 이렇게 설명했을 뿐이다.
【經】 “마음에 마음이라는 상[心相]이 없으나 허공을 취하지 않으며, 모든 행(行)이 생하지 않으나 적멸(寂滅)을 증득[證]하지도 않으며, 마음에 출입이 없으므로 본성[性]이 항상 평등하며, 모든 법의 실제가 한결같이 결정된 성품이므로, 그 어떤 단계[諸地]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반야바라밀(船若波羅蜜)이다.”
【論】 ‘마음에 마음이라는 상이 없다’는 것은, 자기 내면을 관할 때 마음의 상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허공을 취하지 않음’이란 마음이 비어 있다는 공성(空性)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증도혜(證道慧)라 한다.
‘모든 행이 생하지 않음’이란 모든 행이 본래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적멸을 증득하지도 않음’이란 무생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밖을 교화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교도혜(敎道慧)라고 한다.
‘마음에 출입이 없으므로 본성이 항상 평등하다’는 것은 앞의 2도(道)가 항상 서로 분리되지 않음을 말한다. 움직이면서도 언제나 고요하고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움직이므로 출입이 없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 병행하되 한편에 치우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본성이 항상 평등하다’고 하였다.
‘모든 법의 실제가 한결같이 결정된 성품’이란 증득하는 도의 항상 고요한 상(相)을 설명한 것이니, 그 상은 진제(眞諦)와 같고 법성(法性)과 동등하다.
‘그 어떤 단계[諸地]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머물지 않음’이란 가르치는 교리가 항상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니, 10중법계(重法界)에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적조혜(寂照慧)에 머물러 지체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 가운데에는 깨달아 비춘다는 뜻과 법으로 삼을 만하다는 뜻과 쟁론을 끊었다는 뜻이 구비되어 있다. 이를 위에서는 ‘3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을 출세간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이상 6바라밀에 대한 개별적인 설명을 마친다.
【經】 “선남자야, 이 6바라밀은 모두 본각(本覺)의 이로움을 얻어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가 초연히 세간을 벗어나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총괄적인 설명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6도(度)가 해탈과 동일함을 밝히고, 다음에 해탈이 곧 열반임을 드러낸다. ‘모두 본각의 이로움을 얻어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6바라밀을 처음 닦아 모두 본각과 같아지고, 본각 자체가 그대로 드러나 본각의 이익이 행해지기 때문에 여래장에 들어가는데, 그 본성이 본래 고요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바뀌거나 전변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6바라밀은 본각의 이로움을 얻기 때문에 망념과 유전(流轉)하는 모양을 멀리 떠난다. 그러므로 ‘초연히 세간을 벗어난다’고 하였다. 또한 법성(法性)에 들어가기 때문에 법계(法界)에 두루 미쳐 모양이 없고 작위가 없으며, 결박됨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고 하였다.
【經】 “선남자야, 이와 같은 해탈법의 모습은 모두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으며, 또한 벗어났다거나[解], 벗어나지 못했다는[不解] 구별이 없다. 이를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해탈의 모습은 형상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동요도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고요한 열반이지만 그렇다고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論】 둘째는 해탈이 곧 열반임을 밝힌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해탈을 말하고 다음에 열반을 말한다. ‘모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한 것은, 6도의 행은 모두 본각과 동일한 것인데 본각의 모습이 상(相)과 성(性)을 떠나 있기 때문에 상(相)이 없다고 하였다. 6도의 행은 닦음도 떠났고, 행함도 떠난 것이므로 행(行)이 없다고 하였다. 행과 상이 모두 끊어졌으므로 ‘모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였다. 해탈법의 모습이 이미 이와 같으니 어찌 결박을 떠난 벗어남[解]이 있으며, 또 어찌 벗어나지 못한 결박이 있으랴. 그러므로 ‘벗어났다거나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 하면’은, 어째서 6도의 행을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느냐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여, 그와 같은 6도는 단지 해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반이기도 하기 때문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해탈의 모습이 무상하고 무행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해탈을 지적한 것이요, ‘동요도 없고[無動] 산란함도 없어서[無亂] 고요한[寂靜] 열반[涅槃]’이란 열반에 관한 설명이다. 앞에서 설한 6도의 행이란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본래 적정한 열반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6도가 열반이라면 어찌 모습과 행이 있겠는가? 동요하고 산란한 모습을 떠났으므로 적정이라고 하고, 또 그 적정한 본성마저도 떠났으므로 열반의 상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6도ㆍ해탈ㆍ열반은 초지(初地)에서 시작하여 불지(佛地)까지 이른다. 여기서 열반이라고 한 것은 네 가지 뜻 중에서 본래 청정한 열반, 즉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해탈(解脫)을 가리킨다. 자재하다는 뜻과 장애가 없다는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무애해탈(無碍解脫)이라고 말한다.
【論】 해탈의 뜻이 대단히 많아서 쌍도(雙道)76) 중의 해탈이 있고 3점(點)77) 중의 해탈이 있으며 오분법신(五分法身)78) 중의 해탈이 있고 십종해탈문(十種解脫門) 중의 해탈이 있는데, 그 같은 여러 문 가운데 어느 문에 해당하는가?
【論】 이는 3사(事)79) 중의 해탈이다. 해탈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는 6도의 행에 3사의 덕(德)이 있음을 드러내려고 한 것인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초지(初地)에서 이미 얻고 묘각위(妙覺位)에 이르러 마지막의 완성을 보는 것이다. 경에서도 “보살이 대열반에 머물면 큰 뜻을 세울 수 있다…”하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껏 없던 일이라고 크게 기뻐하면서 뜻을 다시 펴기 위하여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깨달음을 구족하신 세존께서
대중을 위하여 법을 설명하시되
모두 다 일승(一乘)에 대한 설법이요
이승(二乘)의 도는 설하지 않으셨네.

일미(一味)의 모양 없는 이로움은
마치 저 큰 허공[大虛空]과 같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제각기 다른 성품[性]을 따라
모두 다 근본 자리를 얻게 하시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거듭 송한 것[重頌]이다.80) 먼저 경을 서술하는 자의 서문이 있고 게송이 시작된다. 게송은 모두 7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앞의 여섯 게송은 개별적인 게송이고, 뒤의 한 게송은 총괄하는 게송이다. 이 게송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 2송 1구는(장행 중에서 논지를 간략하게 표시했던) 약표(畧標)의 부분이고, 둘째 3송 3구는 뒤의 자세한 해석 부분[廣釋]을 노래 한 것이다. 약표 중에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法相)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며, 방편과 신통으로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無相利]을 얻게 하신다’라고 하신 것은 지금 이 게송 중에서는 첫 1송으로 노래한다. 또한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2승들은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이를 알 수 있으니) 제도할 만한 중생이면 모두 일미(一味)를 설한다’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 이 게송에서는 세 가지 뜻[三義:法ㆍ喩ㆍ合]으로 노래한다. 즉 앞의 1구는 법(法), 다음 2구는 유(喩), 끝의 2구는 합(合)에 해당한다.

【經】 저와 같이 마음[心]과 나[我]를 떠나면
하나의 법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든 행(行)이
모두 다 본각(本覺)의 이로움[利]을 얻게 하여
상(相)과 견(見) 두 가지를 다 끊어 버리네.

【論】 이 아래는 자세히 해석한 부분을 송한 것인데 이 가운데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다섯 구는 무상관(無相觀)을 설명한 것이고, 다음 두 구 반은 일각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무상관을 설명하는 게송에도 정광(正廣)과 중현(重顯)이 있다. 지금 처음 두 구절은 정광의 글이다. 정광 중에도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방편관(方便觀)을, 다음에 정관(正觀)을 밝힌다.
지금 이 게송 가운데 정관을 노래한 것은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心:法執)과 아(我:我執)를 떠나게 해야 한다…’고 하고 능소(能所)를 떠나는 것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이 두 구가 바로 그 문장들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이 게송에서 ‘하나의 법[一法]’이란 유(有)와 무(無)의 극단을 멀리 떠난 하나의 중도관(中道觀)을 뜻하니, 마음(心)ㆍ나[我] 두 가지 집착에서 멀리 떠나도록 한 것이다.
다음에는 거듭 설명하는 글 중에 네 개의 문답이 있는데, 지금 두 구는 두 번째 문답을 노래한 것이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든 행(行)’이라는 것은 저 첫 번째 답 가운데 ‘마음의 온갖 모습[相]은 본래부터 근본[本]이 없으며… (근본 자리[本處]가 본래 없으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글에 해당하며 동행총상관(同行總相觀)이다. 둘째 문답 중에서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게 하라’ 한 것과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며, 반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어라.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한 글 등은 이행별상관(異行別相觀)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동행(同行)과 이행(異行)은 들어가는 곳[實際]에 차이가 없으므로 ‘모두 본각의 이로움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 ‘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實際]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이 게송에서 ‘상(相)과 견(見) 두 가지를 다 끊어버린다’고 한 것은 나중의 두 번째 문답의 게송이다. 셋째 답 중에서 말하기를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것을 그대로 게송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2견(二見:有見ㆍ無見)을 없앤다고 말한다. 또한 넷째 답 중에서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 본생(本生)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며, 그 공적함이 머무는 곳 없고… ’라 했는데, 지금 그것을 송하여 두 가지 상[二相]을 끊었다고 한 것이다.

【經】 적정한 열반에 있어도
증득했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고
결정한 자리에 들어가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네.

【論】 이 아래의 2송 반은 일각(一覺)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일각을 자세히 설명한 중에도 정광(正廣)과 중현(重顯)이 있는데 지금 이 게송은 중현만을 노래하고 있다. 중현문 가운데에도 여섯 개의 문답이 있다. 이 중에 두 부분이 있으니 앞의 1송으로 여섯 번째 답을 노래하고, 다음 1송 반으로 다섯 번째 답을 노래하고, 그 전의 네 문답은 노래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여섯 번째 답 중에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가 초연히 세간을 벗어나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 해탈의 모습은 형상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동요도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고요한 열반이지만 그렇다고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게송에서는 순서를 거꾸로 노래한 것이다.

【經】 공한 마음의 고요한 경지에서는
적멸하여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저 금강의 본성과 같아
3보를 무너뜨리는 일 없이
6바라밀을 모두 다 갖추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네.

【論】 이 게송은 다섯 번째 답에 대한 노래이다. 저 경문에 말하기를 ‘마음과 법을 내지 않으면 의지(依止)가 없고, 아무 행(行)에도 머물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습이 없다. 그 성품이 금강과 같으며, 3보(寶)를 무너뜨리지 않으니, 공심(空心)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波羅蜜)을 갖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게송에서 이 내용을 순서대로 노래한 것이다.

【經】 초연히 삼계를 벗어나되
다 소승으로써 하지 않고
한 가지 맛의 법인(法印)뿐이니
일승으로 성취한 것이로다.

【論】 이 1송은 총괄하는 게송이다. 앞의 1품[無相法品] 전체의 요지를 총괄적으로 노래한 것이니, 그 요지에 대한 해석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經】 그 때 대중이 이러한 뜻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마음[心]과 나[我]에 대한 집착을 떠나 공(空)과 무상(無相)에 들어갔다. 마음이 넓고 활달해져서 모두 결정성을 얻어 결박을 끊고 번뇌를 다 없앴다.
【論】 이 일품[無相法品] 속에는 세 부분이 있는데 그 중 두 부분은 앞에서 다 해석하였고, 이것은 세 번째로 그 때의 대중들이 이익 얻음을 나타낸 부분이다.
‘마음과 나에 대한 집착을 떠났다’는 것은, 2공(空)의 진여(眞如)를 증득함을 말한다. ‘결박[結]을 끊고 번뇌[漏]를 다 없앴다’고 한 것은, 견혹(見惑)과 수혹(修惑) 두 가지 의혹을 끊어버린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초지(初地), 즉 견도(見道)에 들어갈 때 견혹을 정곡으로 끊고 겸해서 수혹까지도 끊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이 내용은 『미륵소문론(彌勒所問論)』에서 말한 것과 같고, 더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 있다.
045_0072_a_03L一心之體遍於三際然前二門中已顯本際此門中明後際等又欲顯其如來之義謂未來際平等恒者卽是如義言及有者是其來義如佛性論此眞如者非如中有如旡非如亦如二乘如者非如中如旡非如中非如云何如是二乘之人約虛妄觀旡常等相以爲眞如此虛妄觀唯因中有果地則旡是故此如或成或壞菩薩如者離虛妄約眞性以觀如故於因果二處旡異唯成旡壞乃至廣說知後際平等恒者正顯大乘之如義也所言及有明來義者對凡法去顯一心來如凡去時五取蘊法不至異地去而不來此一心如果地猶有永旡過去言及有卽顯來義如論說言從住自性來至至得謂此也如是一心通爲一切染淨諸法之所依止故卽是諸法根本本來靜門恒沙功德旡所不備故言備一切法隨緣動門恒沙染法旡所不具故言具一切法然擧染法以望心體不能遍通所以離脫若擧心體望諸染法遍諸染法旡所不通故言於世法中不離不脫不離脫義是隱藏義此第三門摠明一心通於動靜爲染淨依第二門者別顯動門染法所依第一門者別顯靜門淨法所依第二中言本際不相應體者諸煩惱法違反心體名#不相應一心之體隨緣動門爲彼所依故是不相應法之體言及煩惱纏不淸淨法者彼能依法依心體轉纏自心體令隨染合取能依所依之法以爲第二如來藏體唯有如來菩提智之所能斷者唯解脫道能正斷故此義具如二障章說第一中言本際相應體者本來靜門備恒沙德與心相應故是相應功德之體言及淸淨法能依功德性離染故合取能依所依之法以爲第一如來藏體此法如實不虛妄不離不脫智不思議法者釋相應義是法身義與諸功德法相應故如上文言不離不脫不斷不異不思議佛法相應名爲法是義云何此一心體略有五相何等爲五一者遠離所取差別之相二者解脫能取分別之執三者遍三世際旡所不等四者等虛空界旡所不遍五者不墮有旡一異等邊超心行處過言語道過恒沙等本有功德亦有五義與體相應一者一一功德離所取相故非法身所離與第一相相應如經言不離故者一一功德脫能取執故非法身所脫與第二相相如經不脫故三者此一一德遍三世際縱旡前後際斷與第三相相應故言不斷四者此一一德等虛空界橫旡彼此處異與第四相相應故言不異五者一一功德皆離諸邊非思量境絕言語路與第五相相應如經言不思議故諸功德法有此五義與體旡別融通一味由是道理名爲相應非如王數別體相今此中言不離不脫智不思議法者諸功德中擧覺義五相應中略說三義此是第一能攝藏也種藏義略述如之言二門者如夫人經言空如來藏若離若脫若異一切煩惱藏不空如來藏者不離不脫不異不思議佛法案云諸煩惱法皆是虛妄境不實故虛由體散亂故妄妄故旡眞虛故旡實眞實故說名爲空能覆如來名如來藏卽是空義覆眞也諸煩惱境不實之相法身所離故曰若離煩惱體妄執之縛法身所脫故言若脫言若異者前虛妄差別分別於法身平等性故以此三義不相應故是旡眞實卽是空義也言不空者一切功德與體相應體非妄故眞境非虛故實由眞實故說名不空如來被覆名如來藏不離不脫等句是釋不空之義義如三種藏門已說然此中不空如來藏體前三中第一之法此中空義是彼第二而彼三種如來藏中隱覆之義合在第三故前二中別顯能攝所攝二義今此二種如來藏門欲顯空義隱覆眞實別能覆所覆二義又此二經互顯別義所以二三兩門異釋且止乘論還釋本文 經曰佛言如來藏者生滅慮知相隱理不顯是如來藏性寂不動 論曰生滅慮知相者卽是空如來藏但此文中顯能隱義而不名此爲如來藏言隱理不顯是如來藏者是不空如來藏約所隱義名如來藏言性寂不動者顯此藏性雖隱不改此性有五義如旡相論說一種類義#是性義如甁衣等一切色法不離四大種類皆以四大爲性如是衆生不出一界皆用一界爲種類故攝大乘論名體類義佛性論中名自性義言有左右意旡異也二者因義是性義如木中有火性與火作因故名爲性如是聖人諸旡漏法以此爲因而得成故彼二論中同名因義也三者生義是性義如鍊眞金生莊嚴具莊嚴具生以金爲性此界亦爾能生果地五分法身法身之生此界爲性攝大乘中亦名生義佛性論中名至得義爲別因義是在果前故就已生名至得義四者不改義是性義猶如金剛寶性一劫等住旡增旡減如是此界三世等住世閒不壞出世不盡彼二論中名眞實義眞實義者是不壞義所以言異而意同也五者密藏義是性義如黃石中有眞金性若不破鑛旡所利益隨順鍊治卽有寶用是故彼性是隱藏義如來藏性當知亦爾不破其纏爲外爲染破纏相應成內成淨故知此性是密藏義佛性論中名秘密義攝大乘論名爲藏義義同言異灼然可見今此文中所言性者含此五義寂不動者略顯後二寂是密藏義不動是不改義故上來正廣一覺義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云何生滅慮知相 論曰自此已下有六問荅因論生論決諸疑此一問荅明其能隱慮知之相 經曰佛言菩薩理旡可不若有可不卽生諸念千思萬慮是生滅相論曰此荅中有二重先略荅後廣演略中二句先擧所迷所迷之理心行處滅故言理旡可不可者是也不者非也理絕四句離諸是非非分別心之所行處次顯能迷若有可不卽生諸念者以有旡明不覺平等卽有分別可不之心由是具起六種染心故思萬慮是生滅相者六種染心雖有麤細皆違平等是生滅相故如起信論云復次分別生滅相者略有二種云何爲二一者麤與心相應故二者細與心不相應故又麤中之麤凡夫境界麤中之細細中之麤菩薩境界細中之細是佛境界此二種生滅依於旡明熏習而有所謂依因依緣依因者不覺義故依緣者妄作境界義故若因滅卽緣滅因滅故不相應心緣滅故相應心滅案云此中麤與心相應者謂三種相應染細與心不相應者三種不相應染麤中之麤者謂執相應染不斷相應染皆在六識故凡夫境界也麤中之細者謂分別智相應染在第七識細中之麤者謂現色不相應染能見心不相應染細中之細者謂根本業不相應染此三皆在第八識位此中三種細生滅者旡明風所動故言因滅故不相應心於中三種麤生滅者境界風所動故言緣滅故相應心滅於中委悉如彼論疏中說也今此經言千思摠攝一切不相應染細分別故萬慮者摠攝一切相應染心麤分別故此二皆是動念之相以之故言是生滅相也 經曰菩薩觀本性相理自滿足千思萬慮不益道理徒爲動亂失本心 王論曰此下廣於中有三一者對生滅相顯理滿足二者對理滿明染闕失三辨順理滅染去動趣寂之利初中言菩薩者是呼解脫菩薩之辭觀本性相者佛觀本覺如來藏性故理自滿足者所觀本覺如來藏理具足旡量性功德故如起信論云復次眞如自體相者本已來性自滿足一切功德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遍照法界義故眞實識知義故自性淸淨心義故常樂我淨義故淸涼不變自在義故具足如是過於恒沙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乃至滿足旡有所少義故名爲如來藏亦名如來法身故今此經理自滿足摠顯如是功德滿足也初段文竟次明生滅動念之過於中摠明旡益有損如彼論中廣釋此義云問曰上說眞如其體平等離一切相云何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荅曰雖實有此諸功德義旡差別之相等同一味唯一眞如此義云何以旡分別離分別相是故旡二復以何義得說差別以依業識生滅相示此云何示以一切法本來唯心實旡相而有妄心不覺起念見諸境界故說旡明心性不起卽是大智慧光明義故若心起見卽有不見之相心性離見卽是遍照法界義故若心有動非眞識知旡有自性非常非樂非我非淨乃至具足過恒沙等妄染之義對此義故心性旡動卽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若心有起更見前法可念者卽有所如是淨法旡量功德卽是一心更旡所念是故滿名爲法身如來之藏今此經言徒爲動亂者以心有動非眞識知旡有自性非常樂我淨等故言動也以心起見卽有不見之相等故言亂也失本心王者旡量功德卽是一心一心爲主故名心王生滅動亂違此心王不得還歸故言失也 經曰若旡思慮旡生滅如實不起諸識安寂流注不生得五法淨謂大乘 論曰此下第三順理滅染去動就寂於中有二正顯重成此卽正顯去動就寂若旡思慮者從初地乃至佛地漸順一心平等法界永旡一切思慮分別故卽旡生滅者由前思慮有生滅相今旡思慮永旡分別二種生滅究竟離故從此已去順理不窮未來際不復還動故言如實不起二種生滅究竟息時八種識動皆得歸靜六染流注永滅不起言諸識安寂流注不生流注不生故法界圓顯諸識安寂故四智滿成故言得五法淨運載之功莫過於此故摠結言是謂大乘正明去動就寂文竟 經曰菩薩入五法淨心卽旡妄若旡有妄卽入如來自覺聖智之地入智地者善知一切從本不生知本不生卽旡妄想 論曰此是重顯卽有三句初言入五法淨心卽旡妄者歸心源時卽旡妄念之不覺故第二若旡有妄卽入如來自覺聖智之地者不覺盡時卽入始覺圓智之地故是對不覺顯始覺滿也第三入智地者善知一切從本不生知本不生卽旡妄想始覺滿時能知不覺四相動念本來不生卽知本來旡妄想故是顯始覺不異本覺也如起信論云切衆生不名爲覺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離念故說旡始旡明若得旡念者卽知心相生住異滅以旡念等故而實旡有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皆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案云此中言若得旡念卽知心相生住異滅者卽顯經中善知一切也而實旡有始覺之異者卽顯經中善知從本不生也以四相俱時而有皆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者卽顯經中知本不生卽旡妄想也夢中渡河之喩此中應廣說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旡妄想者應旡止息 論曰此下第二問荅明旡止息問意言旡妄想卽旡所止所止旡故能止亦旡旡能止故旡始覺如是難也 經曰佛言菩薩妄本不生旡妄可息知心旡心旡心可止旡分旡別現識不生旡生可止#是卽旡止亦非旡止何以故止旡止故 論曰荅意有二先許旡止後遮旡止許者始覺不異本覺故遮者始覺非唯是本覺故許中息與止何異者起動故可息心馳散故可止而本旡起旡馳故#旡可息可止耳旡分者旡相分於見故旡別者旡見別於相故相見旣旡分別現識本來不生去來不生愚智共知故約現在明本不生旣旡所止不覺之生卽旡能止始覺之異依不異門如是許也亦非旡止者旡不異之始覺故止旡止故者能止旡生之妄心故雖生不可得而非徒旡生故非徒旡生故不旡所止所以非旡能止之覺如是荅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若止旡止止卽是生何謂旡生 論曰此下第三問荅顯旡生觀難意云若有能止之覺生能止之觀雖遣不覺之起還存始覺之生何謂能證旡生觀耶 經曰佛言菩薩當止是生止已旡止亦不住於旡止亦不住於旡住云何是生 論曰意有二先與後奪與者許生在方便觀能止心生故且如世第一法之時雖止識生不取於識而能止心取旡而生當此止時卽許是生以之故言當止是生過此一念卽不取旡不取旡故取心不生以之故言止已旡止此時遠離一切分別故不住於旡止之旡亦不取其自旡住心能所永絕平等平等云何是時可得是生如是荅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旡生之心有何取捨住何法相佛言旡生之心不取不捨住於不心住於不法 論曰此是第四問荅遣增減見謂諸學者猶作是念入觀之心取旡相理捨諸相事爲遣此增益見故言不取不捨或作是念入觀之時都旡所住法亦旡能住心如是不異於畢竟旡爲除此損減見故言住於不心住於不法雖非有住而非旡住非旡住故得言住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云何住於不心住於不法佛言生於心是住不心不生於法是住不法 論曰此下第五問荅重遣疑情疑情之言旣言住者卽應是心是法若不心法卽應言是不住此言甚深云何信解如是疑也佛荅意言不存能證觀心不存所證理法故言不生於心不生於法生猶存也旣恒不存心法非或失念而存故言是住不心是住不法住猶恒也恒不退失故名爲住住義如是彌順不心何容相違於其閒哉如是正荅下卽重顯 經曰善男子不生心法卽旡依止不住諸行心常空寂旡有異相譬彼虛空旡有動住旡起旡作旡彼旡此得空心眼得法空身五陰六入悉皆空寂 論曰此下第二重顯中有二先顯遠離諸相周遍三世後顯隨順法界具修六度初中三句謂法喩合不生心法者牒前正荅卽旡依止者橫旡能依所依之異不住諸行者旡曾當今現之行旡曾當故心常空寂旡能所故旡有異相譬彼已下第二引喩旡有動住者如世虛空旡爲常住旡有前滅後生之動喩於不住諸行亦旡能依所依之住比於卽旡依止旡起旡作卽同心常空寂旡彼旡此不異旡有異相故擧虛空喩不生觀合中言得空心眼者由不生能觀心得旡所不觀得法空身者由不生所觀法得平等法身故五陰皆空者以得空心眼達於三世五陰空故合前虛空旡起作也六入悉空者以得法空身遍於內外六入空故合前虛空旡彼此也 經曰善男子修空法者不依三界不住戒相淸淨旡念旡攝旡放性等金剛不壞三寶空心不動具六波羅密 論曰是第二顯具修六度修空法者者牒前空寂之心下別顯具六不依三界故具施度不住戒相故具戒度淸淨旡念故具忍度旡攝旡放故具精進性等金剛故具禪不壞三寶故具般若何以故唯一觀心遍照可軌絕諸諍論故#備三寶三寶義成故言不壞唯一空心旡別動作而具六度故言空心不動具六波羅密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六波羅密者皆是有有相之法能出世耶佛言善男子我所說六波羅密者旡相旡爲 論曰此下第六問荅重顯出世六度之義問者乘疑而爲決之故擧世間六度事相疑出世心中具六荅中有二一者略標二者廣釋卽略標言旡相者離施受等三輪相故言旡爲者生住等三有爲故我前所說一心具六者一一皆是旡相旡爲故此六度是出世閒#不同世間有相有爲經曰何以故善入離欲心常淸淨實語方便本利利是檀波羅密 論曰此下廣釋於中有二先別釋後摠明何以故者因問發起旣有六數何故旡相也轉依眞如名爲離欲離三有欲之所顯故觀心體解故言善入更旡出入故曰心常離三輪垢故曰淸淨卽是上言不依三界如理而說故言實語巧便引導故曰方便雖旡功用應機發語猶如天鼓此之謂也一切衆生唯一本覺令諸衆生同歸一覺以之故言本利利人是名出世檀波羅密 經曰至念堅固常旡住淸淨旡染不著三界是尸波羅密 論曰念衆生如視一子故曰至念堅固恒在世閒不住涅槃故曰心常旡住是防二乘之非觀心明徹不雜諸漏故言淸淨旡染遍涉六道達皆空寂故言不著三是止凡夫之惡是明不住凡聖戒相卽是上言不住戒相是名出世尸波羅密 經曰修空斷結不依諸有寂靜三業不住身心是羼提波羅密 論曰二句者安空理離有結下二句者靜三業泯身心是旡生法忍之義#卽是上言淸淨旡念 經曰遠離名數斷空有見深入陰空是毘梨耶波羅密 論曰上二句者離麤精義入空者是進義卽是上言旡攝旡放此是出世精進度也 經曰具離空寂不住諸心處旡在大空是禪波羅密 論曰具離空寂者應化受生遍三有故不住諸空者不滯五空恒化十方故此明教化衆生禪也心處旡者雖身涉於三有心常處於理旡理旡者理絕三有之相也在大空者雖恒化於十方而心在於大空大空者十方大相之空也此顯成就佛法禪也身雖起作心寂不動卽是上言性等金剛然大空義略有五種一者人法二空#名爲大空如雜阿含大空經說瑜伽論中亦同是說二者般若波羅密空名爲大空如大涅槃經說楞伽經中亦同是說三者器世界空名爲大空如解深密經說中邊論中亦同是說四者阿梨耶識空名爲大如十地論說五者十方相空名爲大空如智度論今此經文在於第五且隨意便作是說耳 經曰心旡心相不取虛空諸行不生不證寂滅心旡出入性常平等諸法實際皆決定性不依諸地#不住智慧是般若波羅密 論曰心旡心相者不存自內觀心相故不取虛空者不取心虛之空性故此是證道慧諸行不生者達一切行本來不生故不證寂滅者不著旡生而恒外化故此是教道慧也心旡出入性常平等者前之二道恒不相離動而常寂寂而恒動旡出入動寂恒竝不滯一邊故性常平等諸法實際皆決定性者演證道之常寂之相相同眞際等法性故不依諸地不住智慧者演教道之恒動之由依著於十重法界不住滯於寂照慧故此中卽具覺照可軌絕諍之義卽是上言不壞三寶是名出世般若波羅密也上來別釋六度文竟 經曰善男子六波羅密者皆獲本利入決定性超然出世旡礙解 論曰此下第二摠明於中有二先明六度同一解脫後顯解脫卽是涅槃初中言皆獲本利入決定性者六度始修皆同本覺本覺顯成本利行故入如來藏性本寂靜旡始旡終旡改轉故如是六度得本利故遠離妄念流轉之相故曰超然出世入法性故周遍法界旡相旡爲旡縛旡脫故曰旡礙解脫善男子如是解脫法相皆旡相行亦旡解不解名解脫何以故解脫之相旡相旡行旡動旡亂寂靜涅槃亦不取涅槃相 論曰是第二明解脫卽是涅於中有二先明解脫後卽涅槃初中言皆旡相行六度之行皆同本覺本覺之相離相離性故曰旡六度之行離修離行故曰旡行行相俱絕故言皆旡相行解脫法相旣其如是何有離縛之解何有不解之縛故言亦旡解不解何以故者何故六度之行而言旡相行耶荅此意言如是六度非但卽是解脫亦乃卽是涅槃是故說言旡相行也解脫之相旡相旡行者牒前解脫旡動旡亂寂靜涅槃者明卽涅槃欲明如前所說六度之行皆旡起動亦旡散亂卽是本來寂靜涅槃旣卽是涅槃何有相行耶離動亂相故曰寂靜亦離寂靜性故亦不取涅槃相也此中六度解脫涅槃始從初地乃至佛地言涅槃者四種之中卽是本來淸淨涅槃正是不可思議解脫依其自在旡障礙義是故說名旡礙解脫解脫之義乃有衆多有雙道中解脫有三點中解脫五分法身之中解脫十種解脫門中解脫是諸門內爲在何門三事中解脫解脫卽是涅槃故欲顯六度之行三事之德剋實而言初地已得乃至妙覺位究竟圓滿經中說若有菩薩住大涅槃能建大義乃至廣說故經曰解脫菩薩聞是語已心大欣懌得未曾有欲宣義意而說偈言大覺滿足尊 爲衆敷演法 皆說於一乘旡有二乘道 一味旡相利 猶如大虛空旡有不容受 隨其性各異 皆得於本處論曰此下第二重頌於中在先經家序發正頌之中有七行頌於中有二前六別頌後一摠頌初中亦二一者二頌一句頌前略標二者三頌三句頌後廣釋略標中言諸佛智地入實法相決定性故方便神通皆旡相利今此頌中初一頌頌又言一覺了義難解難入乃至可度衆生皆說一味今此頌中以三義頌謂前一句是法說頌次二句引喩頌後二句合喩頌經曰如彼離心我 一法之所成 諸有同異行皆獲於本利 滅絕二相見論曰此下頌廣釋文於中有二先五句頌廣旡相觀後二頌半頌廣一覺義廣旡相中正廣重顯今初二句頌正廣文前正廣中亦有二分先方便觀後明正今此頌中頌正觀文彼言令彼衆生皆離心我至廣說遠離能所今此二句正頌此文言一法者有旡邊一中道觀以此能離心我執故重顯文中有四問荅今此二句頌前二番問荅所言諸有同異行彼初番荅中言一切心相本來旡本如是等文卽是同行摠相觀故第二番荅中言若有我者令觀十二因緣又言若有我者令滅有見若旡我者令滅旡若心生者令滅滅性若心滅者令滅生性如是等卽是異行別相觀故此同異行所入旡異故言皆獲於本利如前末言滅是見性卽入實際故又此頌言滅絕二相見者頌後二番問荅彼第三荅中言法生時令滅旡見見法滅時令滅有見今正頌此故言滅二見也第四荅言生滅俱滅本生不生心常空空寂旡住今正頌此故言絕二相也 經曰寂靜之涅槃 亦不住取證 入於決定處旡相旡有行論曰此下二頌半頌廣一覺廣一覺中正廣重顯此頌中唯頌重顯重顯文中有六問荅此中有二之一頌頌第六荅次一頌半頌第五荅前四問荅略而不頌第六荅中言入決定性超然出世旡礙解脫脫之相旡相旡行旡動旡亂寂靜涅槃亦不取涅槃今此頌中逆次頌也 經曰空心寂滅地 寂滅心旡生 同彼金剛性不壞於三寶 具六波羅密 度諸一切生論曰此是頌第五荅彼文言不生心法卽旡依止住諸行心常空寂旡有異相乃至性等金剛不壞三空心不動具六波羅密今此頌中順次頌也經曰超然出三界 皆不以小乘 一味之法印一乘之所成論曰此一頌者摠頌前來一品大意消文大意已如前說 經曰爾時大衆聞說是義心大欣懌得離心我入空旡相恢廓曠蕩皆得決定斷結盡漏 論曰一品之內有三分中前之二分竟在於前此是大文第三時衆得益得離心我者證二空眞如故斷結盡漏者斷見修二惑故欲顯得入初地見道正斷見惑兼斷修惑義如彌勒所問論說於中委悉在二障章也金剛三昧經論卷上
  1. 1)아공(我空)ㆍ법공(法空)ㆍ아법구공(我法俱空)을 3공이라 한다.
  2. 2)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인 도리(道理), 그렇지 않지만 큰 의미에서 그렇고, 자질구레한 특정한 진리가 아니지만 모든 것에 다 통하는 진리다.
  3. 3)진여법신(眞如法身)과 대원경지(大圓鏡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성소작지(成所作智).
  4. 4)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回向)ㆍ10지(地)ㆍ등각(等覺) 등 수도의 계위.
  5. 5)제9 백정식(白淨識)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께만 갖추어진 식이다.
  6. 6)전5식(前五識)ㆍ제6식(識)ㆍ제7식(識)ㆍ제8식(識).
  7. 7)성소작지(成所作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대원경지(大圓鏡智).
  8. 8)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으로 부처님의 세 가지 몸이다.
  9. 9)열반(涅槃)과 생사(生死)의 언덕으로 전자를 피안(彼岸), 후자를 차안(此岸)이라고도 한다.
  10. 10)범부중(凡夫衆)과 소승중(小乘衆).
  11. 11)인아(人我)와 법아(法我).
  12. 12)아공(我空)과 법공(法空).
  13. 13)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14. 14)진제(眞諦)와 속제(俗諦).
  15. 15)이입(理入)과 행입(行入).
  16. 16)법신불(法身佛)ㆍ보신불(報身佛)ㆍ화신불(化身佛).
  17. 17)섭율의계(攝律儀戒)ㆍ섭선법계(攝善法戒)ㆍ섭중생계(攝衆生戒)로서 3취정계(三聚淨戒)라고도 함.
  18. 18)속제(俗諦)ㆍ진제(眞諦)ㆍ제일의제(第一義諦).
  19. 19)허공해탈(虛空解脫)ㆍ금강해탈(金剛解說)ㆍ반야해탈(般若解脫). 이 경의 독특한 법수이다.
  20. 20)백겁지(百劫地)ㆍ천겁지(天劫地)ㆍ만겁지(萬劫地).
  21. 21)법신ㆍ보신ㆍ화신.
  22. 22)공상(空相)의 공(空)ㆍ공공(空空)의 공(空)ㆍ소공(所空)의 공(空).
  23. 23)첫째, 이미 생긴 악을 없애려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 둘째,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미리 방지하려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 셋째, 이미 생긴 선을 더욱 더 자라게 하려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 넷째,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부지런히 행하는 것.
  24. 24)선정에 들어가는 수단으로 첫째 욕(欲), 둘째 정진(精進), 셋째 심념(心念), 넷째 사유(思惟)를 말함.
  25. 25)작택멸력취연(作擇滅力取緣)ㆍ본리정근력소집기연(本利淨根力所集起緣)ㆍ본혜대비력연(本慧大悲力緣)ㆍ일각통지력연(一覺通智力緣).
  26. 26)행(行)ㆍ주(住)ㆍ좌(坐)ㆍ와(臥).
  27. 27)유심유사정(有尋有伺定)ㆍ무심유사정(無尋唯伺定)ㆍ무심무사정(無尋無情定)ㆍ사념법사정(捨念法事定)을 말함.
  28. 28)인과론에서의 네 가지 주장. 자기 원인에 의해 생함[自生], 다른 원인에 의해 생함[他生], 자와 타가 함께 하는 데서 생함[共生], 원인 없이 생함[無生].
  29. 29)다섯 가지 무루근(無漏根).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
  30. 30)불가사의한 작용이 있는 다섯 가지의 힘으로, 정력(定力)ㆍ통력(通力)ㆍ차식력(借識力)ㆍ원력(願力)ㆍ법위덕력(法威德力).
  31. 31)인공(人空)ㆍ법공(法空)ㆍ반야바라밀다공(般若波羅蜜多空)ㆍ기세계공(器世界空)ㆍ아리야식공(阿梨耶識空)ㆍ시방상공(十方相空)을 말함.
  32. 32)수행상의 다섯 가지 계위. 첫째 자량위(資糧位), 둘째 가행위(加行位), 셋째 통달위(通達位), 넷째 수습위(修習位), 다섯째 구경위(究竟位).
  33. 33)5취(趣)라고도 하며,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도ㆍ천도를 말한다.
  34. 34)불도를 수행하는 지혜로써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살펴서 골라내는 일곱 가지. 첫째 택법각분(擇法覺分), 둘째 정진각분(精進覺分), 셋째 회각분(喜覺分), 넷째 제각분(除覺分), 다섯째 사각분(捨覺分), 여섯째 정각분(定覺分), 일곱째 염각분(念覺分). 만일 마음이 혼침하면 택법각분ㆍ정진각분ㆍ희각분으로 마음을 일깨우고, 마음이 들떠서 흔들리면 제각분ㆍ사각분ㆍ정각분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35. 35)의(義)는 온(蘊)ㆍ처(處)ㆍ계(界) 등. 과(科)는 본식(本識)을 말함. 「여래장품(如來藏品)」 참고.
  36. 36)전5식에 제6 의식ㆍ제7 말나식ㆍ제8 아뢰야식을 합한 것.
  37. 37)『대품반야경』의 주석인 『대지도론(大智度論)』을 가리킨다.
  38. 38)『대품반야경』을 말함. 정식 경명은 『마하반야바라밀경』이라 함. 2만 5천의 게송으로 되어 있으며, 28ㆍ30, 또 40권으로 된 한역이 있다.
  39. 39)인도의 문법에서 복합어를 구성할 때 여섯 가지 해석방법이 있어 이를 육리합석(六離合釋)이라고 말한다. 지업석은 앞의 말이 뒷말의 형용사, 또는 부사 구실을 하는 경우이다.
  40. 40)비슷한 것은 비유를 들어서 뒷말을 지적하는 복합어이다.
  41. 41)두 개 이상의 말이 복합되어 있을 경우, 뒷말이 주(主)가 되어 앞말이 그에 의존하는[伴] 경우이다. 금강삼매의 경우, 주(主)는 삼매이고 반(伴)이 금강이다.
  42. 42)경의 제목을 두 대목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중에, 첫 번째는 금강이라는 이름을 해석하였고 이제부터는 삼매에 관한 해석이다.
  43. 43)『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준말이다. 미륵(彌勒)이 짓고, 무착(無着)이 편집해서 당(唐) 현장(玄奘)이 번역한, 백 권으로 된 부파불교시대의 논서이다.
  44. 44)심(尋)은 대강의 이치를 심구(尋求)하는 것이고, 사(伺)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밀하게 분별하고 관찰하는 정신 작용이다.
  45. 45)심왕(心王)에 동시적으로 수반되는 여러 가지 정신 작용을 여섯 가지로 분류한 것. 변행(遍行)ㆍ별경(別境)ㆍ선(善)ㆍ번뇌(煩惱)ㆍ수번뇌(隨煩惱)ㆍ부정(不定).
  46. 46)욕(欲)ㆍ승해(勝解)ㆍ염(念)ㆍ정(定)ㆍ혜(慧).
  47. 47)이 부분은 동국대 영인본과 대정신수대장경에는 원문이 없으나 조선불교회(1919년) 간본에 그 원문이 있다.
  48. 48)여덟 수의 게송을 두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이제까지의 일곱 게송은 경을 설하심을 송한 것이고, 이 한 게송은 정에 드심을 송한 것이다.
  49. 49)미계 (迷界)에 있는 진여(眞如) 즉 미계의 중생과 사물이 모두 진여와 여래의 덕성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 함.
  50. 50)무상법품과 무생행품은 본각리품에 들어가고, 입실제품과 진성공품은 여래장품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51. 51)5신통(神通)을 가리킨다.
  52. 52)운문체(韻文體)의 게송에 대해 산문체(散文體)의 경문(經文)을 말함.
  53. 53)산문으로 된 경문의 뒤에 다시 경문의 뜻을 운문체로 나타낸 게송.
  54. 54)6통(通), 혹은 6종신통력(種神通力)이라 함. ①천안통(天眼通), ③천이통(天耳通), ③타심통(他心通), ④숙명통(宿命通), ⑤신족통(神足通), ⑥누진통(漏盡通) 등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한 공덕작용을 말함.
  55. 55)신변륜(神變輪) 교계륜(敎誡輪) 기심륜(記心輪). 여래의 수승한 3업을 전륜왕의 윤보(輪寶)에 비유한 것.
  56. 56)세존의 본격적인 설법이 시작되는 부분을 장행(長行)과 중송(重頌)으로 크게 나누고, 장행을 다시 약표분(略標分)과 광설분(廣說分)으로 나누었다.
  57. 57)또는 5재(滓)ㆍ5혼(渾)이라고 함. 나쁜 세상에 유행하는 다섯 가지의 더러움, 즉 ①겁탁(却濁) ②견탁(見濁) ③번뇌탁(煩惱獨) ④중생탁(衆生濁) ⑤명탁(命濁)을 말함.
  58. 58)3현위(賢位), 즉 10지(地) 전의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을 말한다.
  59. 59)상무성(相無性)ㆍ생무성(生無性)ㆍ승의무성(勝義無性)을 관하는 것으로, 각각 변계소집(遍計所執)ㆍ의타기(依他起)ㆍ원성실(圓成實)에 의해 세워진 것을 없애는 것이다. 3성은 유(有)의 관점에서, 3무성은 공(空)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60. 60)4만의 하나, 또는 7만의 하나. 훌륭한 교법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하여 제가 잘난 체하는 거만. 곧 자기 자신을 가치 이상으로 생각함.
  61. 61)불생불멸하는 진여 법성을 인지(忍知)하고, 거기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 보살 초지(初地)나 7ㆍ8ㆍ9지에서 얻는 깨달음.
  62. 62)정위선설(正爲宣說:善男子 若化衆生 無生於化 不生無化 其化大焉…)을 무상관(無相觀)을 밝히는 부분과 일각의(一覺義)를 밝히는 부분으로 크게 나눈 가운데 여기서부터 후자가 시작되는 곳이다.
  63. 63)제(際)란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서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있는데, 시작하는 시점이나 끝나는 시점으로 잡힐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본제(本際)라 한다.
  64. 64)진제(499~569)는 인도의 스님으로 중국 섭론종(攝論宗)의 개조로써 『섭대승론(攝大乘論)』 3권, 『대승기신론(大乘起身論)』 1권 등 모두 64부 278권을 번역했다. 삼장이란 경(經)ㆍ율(律)ㆍ논(論)의 3장(藏)을 번역하는 이를 삼장이라 부름.
  65. 65)인도 천친(天親)의 논서로서 진제가 한역함. 내용은 연기분ㆍ파집분ㆍ현체분ㆍ변상분의 4분으로 되어 있어 불성(佛性)을 자세히 설명했음.
  66. 66)앞에서 여래장의 은장부동(隱藏不動)한 성품을 설명하는 가운데 여래장의 뜻을 두 가지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고, 우선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과 『불성론(佛性論)』을 근거로 삼아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였다. 이제부터는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67. 67)인도의 무착(無著)지음. 3권으로 양나라 진제(眞諦)의 번역과 당나라 현장(玄奘)의 번역 등이 있다. 만유는 마침내 유심(唯心)으로 돌아간다는 이론과 이에 의한 종교적 실천을 말하여 대승의 교리가 소승의 교리보다 뛰어남을 주장. 또 아뢰야식과 3성을 말하여 아뢰야를 유식에서는 망식(妄識)이라 하는데 반하여 이 논에서는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 하고, 한편으로는 차별적 미망의 세계를 나타내어 그 망(妄)을 일소하는 곳에 진정한 깨달음이 나타난다고 한다.
  68. 68)일각(一覺)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에 여덟 개의 문답이 있는데, 크게 둘로 분류하면 처음 두 문답은 일각여래장(一覺如來藏)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한 것이고, 나중의 여섯 문답은 인론생론(因論生論)으로 모든 의심과 논란을 제거한 부분이다.
  69. 69)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자기 몸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손발을 허우적거려 저쪽 언덕에 닿았는데, 꿈에서 깨어나서는 피안과 차안이 없었으나 그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생멸하는 념이 다 멸하면 각이 청정해지나 깨달음의 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뜻.
  70. 70)거북 털이나 토끼 뿔과 같이 절대 존재하지 않는 것.
  71. 71)다섯 번째 문답을 질문에 대한 답변[正答]과 거듭 설명하는 부분[重顯]으로 나누었다. 중현에도 두 가지가 있어서 먼저 모든 상을 멀리 떠나 3세에 두루 미침을 밝히고, 이어서 법계에 수순해서 6바라밀을 남김 없이 닦음을 밝히는데, 여기서부터가 후자에 해당한다.
  72. 72)보시할 때 시자(施者)ㆍ수자(受者)ㆍ시물(施物)을 말함.
  73. 73)보시바라밀.
  74. 74)지계바라밀.
  75. 75)정진바리밀.
  76. 76)해탈도(解脫道)와 무간도(無間道).
  77. 77)범어의 ∴자의 모양이 3점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함. 여기에서는 열반덕(涅槃德)ㆍ지덕(知德)ㆍ해탈덕(解脫德)을 3점 중의 해탈이라 함.
  78. 78)계(戒)ㆍ정(定)ㆍ혜(慧):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
  79. 79)자재(自在)ㆍ무장(無障)ㆍ무애(無碍)를 말함.
  80. 80)무상법품(無相法品) 서두에 세존이 삼매에서 일어나 “諸佛智地 入實相法 決定性故”라고 설법을 시작하는 부분부터가 본격적인 설법[正發言說]에 들어가는데, 이를 크게 장행(長行)과 중송(重頌) 둘로 나눈 가운데 여기서부터가 중송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