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智度論釋初品大慈大悲義 第四十二

ABC_IT_K0549_T_027
014_0766_a_01L대지도론 제27권
014_0766_a_01L大智度論釋初品大慈大悲義 第四十二卷二十七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014_0766_a_02L 聖者龍樹造


42. 초품 중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뜻을 풀이함
014_0766_a_03L 後秦龜茲國三藏鳩摩羅什譯

【經】 대자(大慈) 대비(大悲)로써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느니라.
014_0766_a_04L 【經】
大慈大悲當習行般若波羅密
【論】 대자대비라 함은 4무량심(無量心) 가운데서 이미 분별했지만 이제 다시 간략히 설명하겠다.
014_0766_a_05L【論】
大慈大悲者四無量心中已分別當更略說
대자는 온갖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대비는 온갖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는 것이다. 대자는 기쁘고 즐거운 인연을 중생에게 주는 것이고 대비는 괴로움을 여의는 인연을 중생에게 주는 것이다.
014_0766_a_07L大慈與一切衆生樂大悲拔一切衆生苦大慈以喜樂因緣與衆生大悲以離苦因緣與衆生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여러 아들이 감옥에 갇혀서 장차 큰 죄를 받게 될 때에 그의 아버지는 사랑과 측은한 생각으로 약간의 방편을 써서 괴로움을 면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대비(大悲)이며, 이 괴로움을 여의게 하고 나서 다섯 가지 바라는 바[五欲]를 아들들에게 주는 것이 바로 대자(大慈)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로 구별하게 된다.
014_0766_a_09L譬如有人諸子繫在牢獄當受大罪其父慈惻以若干方便令得免苦是大悲得離苦已以五所欲給與諸子是大如是等種種差別
【문】 대자대비는 그렇다 하고, 그렇다면 어떤 것이 소자(小慈) 소비(小悲)인가? 이 소(小)로 인하여 대(大)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014_0766_a_13L問曰大慈大悲如是何等是小慈小悲因此小而名爲大
【답】 4무량심 안에서의 자비(慈悲)는 소라 하며, 여기 18불공법 다음에 설명하는 큰 자비를 일컬어 대라 한다. 또 모든 부처님의 마음속의 자비를 대라 하고, 그 밖의 사람들의 마음속의 자비는 소라 한다.
014_0766_a_15L答曰四無量心中慈悲名爲小此中十八不共法次第說大慈悲名爲大復次諸佛心中慈悲名爲大人心中名爲小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보살이 대자대비를 행한다고 하는가?
014_0766_a_18L問曰若爾者何以言菩薩行大慈大悲
【답】 보살의 대자라 함은 부처님보다는 작지만 2승(乘)보다는 크므로 이것을 임시로 이름 붙여서 대라 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대자대비가 진실로 가장 크다.
014_0766_a_19L答曰菩薩大慈者佛爲小於二乘爲大此是假名爲大佛大慈大悲眞實最大
014_0766_b_01L또 소자(小慈)는 다만 마음으로만 중생에게 즐거움을 줄 것을 생각할 뿐 실제로는 즐거운 일이 없다. 소비(小悲)는 중생에게 있는 갖가지 몸의 괴로움[身苦]과 마음의 괴로움[心苦]을 관찰하여 가엾게 여길 따름이요 거기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함을 일컫는다.
대자는 중생이 즐거움을 얻게 되기를 생각하면서 역시 즐거운 일을 주는 것이며, 대비는 중생의 괴로움을 가엾이 여기면서 또한 그 괴로움에서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014_0766_a_21L復次小慈心念與衆生樂實無樂事小悲名觀衆生種種身苦心苦憐愍而已不能令大慈者念令衆生得樂亦與樂事大悲憐愍衆生苦亦能令脫苦
또 범부나 성문이나 벽지불이나 보살의 자비를 일컬어 소라 하고, 모든 부처님이 자비를 일컬어 비로소 대라 한다.
014_0766_b_02L復次凡夫人聲聞辟支佛菩薩慈悲名爲諸佛慈悲乃名爲大
또 대자는 대인(大人)의 마음속에서 생겨나고,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은 대법(大法) 가운데서 나와 능히 3악도(惡道)의 큰 고통을 부수고 세 가지 큰 즐거움, 즉 천상의 쾌락[天上樂]과 인간의 쾌락[人樂]과 열반의 쾌락[涅槃樂]을 준다.
014_0766_b_04L復次大慈大人心中生十力四無所畏四無㝵十八不共法大法中出能破三惡道大苦能與三種大樂天樂人樂槃樂
또 이 대자는 시방과 3세의 중생에서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 사랑은 골수에 사무치도록 두루 차면서 마음에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다. 가령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이 3악도에 떨어졌을 때 어떤 사람이 그들을 대신하여 그 고통을 받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뒤에 5욕의 즐거움과 선정의 즐거움과 세간의 최상의 즐거움을 그들 마음대로 주어서 모두 만족하게 한다 해도 부처님의 자비에 비교하면 천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간의 즐거움은 속임수여서 진실하지도 않고 생사를 여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014_0766_b_08L復次是大慈遍滿十方三世衆乃至昆虫慈徹骨髓心不捨離三千大千世界衆生墮三惡道若人一一皆代受其苦得脫苦已以五所欲禪定樂世閒最上樂自恣與之令滿足比佛慈悲千萬分中不及一何以故世閒樂欺誑不實不離生死故
【문】 법은 부처님의 마음속에 있고 온갖 것이 모두가 크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자비만을 대(大)라 말하는 것인가?
014_0766_b_15L問曰法在佛心中一切皆大以故但說慈悲爲大
【답】 부처님께서 지닌 모든 공덕과 법은 모두가 대라고 할 것이다.
014_0766_b_16L答曰佛所有功德法應皆大故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자비만을 대라고 하는 것인가?
014_0766_b_17L問曰若爾者何以但說慈悲爲大
【답】 자비는 바로 부처님 도의 근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이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과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과 이 세상이나 뒷세상에서 받을 고통 등 모든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큰 자비심을 내어서 이러한 고통을 구제해 주기 때문이다.
014_0766_b_18L答曰慈悲是佛道之根所以者何菩薩見衆生老病死苦身苦心苦今世後世苦等諸苦所惱生大慈捄如是苦
014_0766_c_01L그런 뒤에는 마음을 내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 또한 대자대비의 힘으로써 한량없는 아승기 세상에서 나고 죽고 하는 동안에도 싫증내는 마음이 없으며 큰 자비의 힘 때문에 오래전에 열반을 얻었어야 했는데도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온갖 모든 부처님 법 중에서 자비를 크다 하는 것이다. 만일 대자대비가 없었다면 일찍이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
014_0766_b_21L然後發心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以大慈悲力於無量阿僧祇世生死中心不厭以大慈悲力故久應得涅槃而不取證以是故一切諸佛法中慈悲爲若無大慈大悲便早入涅槃
또 부처님이 도를 얻었을 때에 한량없고 심히 깊은 선정과 해탈과 모든 삼매를 성취하여 청정한 즐거움이 생겼는데도 이를 버리고 누리지 않으면서 마을이나 성읍으로 들어가 갖가지 비유와 인연으로 설법하고, 그 몸을 변화하여 한량없는 음성으로 온갖 중생을 맞이하고 모든 중생들의 욕설과 비방을 참아내며, 나아가 스스로 음악을 울리기도 하나니, 이것은 모두 대자대비의 힘이다.
014_0766_c_03L復次得佛道時成就無量甚深禪定解脫諸三昧生淸淨樂棄捨不受入聚落城邑中種種譬喩因緣說法變現其無量音聲將迎一切忍諸衆生罵詈誹謗乃至自作伎樂皆是大慈悲力
또 대자대비에서 대(大)라는 이름은 부처님께서 지은 것이 아니고 중생들이 이름붙인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자는 큰 힘을 지녔지만 제가 힘이 세다고 말하지 않고 짐승들이 이름을 붙인 것과 같다.
014_0766_c_09L復次大慈大悲大名非佛所作衆生名之譬如師子大力不自言力皆是衆獸名之
중생들은 부처님의 갖가지 묘한 법을 듣고 부처님께서 중생을 도와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한 줄을 알고 있나니, 중생들은 이러한 일을 듣고 보고 하면서 이런 법을 이름하여 대자대비라고 하는 것이다.
014_0766_c_11L衆生聞佛種種妙知佛爲祐利衆生故於無量阿僧祇劫難行能行衆生聞見是事而名此法爲大慈大悲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에게 두 사람의 친한 벗이 있었다. 그가 죄의 인연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한 친구는 필요한 생활용품을 공급해 주고 한 친구는 그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여러 사람들은 그 능히 대신 죽을 수 있는 사람을 말하면서 큰 자비를 행한 이라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세상마다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머리와 눈과 골수며 뇌를 모두 보시한지라 중생들은 이런 일을 보고 듣고 하면서 곧 다 함께 대자대비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014_0766_c_14L譬如一人有二親友以罪事因緣故繫之囹圄一人供給所須一人代死衆人言能代死者爲大慈悲佛亦如是世世爲一切衆頭目髓腦盡以布施衆生聞見是卽共名之爲大慈大悲
마치 시비왕(尸毘王)과 같다. 그는 비둘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몸의 살을 다 떼어주면서 그를 대신했으나 오히려 비둘기의 무게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시 손수 저울을 붙잡고 그 몸을 대신하자 이때에 땅은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바닷물은 파도가 일며 모든 하늘은 향과 꽃으로 왕에게 공양했나니, 중생들은 칭송하면서 “한 마리의 작은 새를 위해서도 정감(情感)이 이러하니, 참으로 이는 대자대비이시다”고 한 것이다.
014_0766_c_19L如尸毘王爲捄鴿故盡以身肉代之猶不與鴿復以手攀稱欲以身代之是時地爲六種震動海水波蕩諸天香華供養於王衆生稱言爲一小鳥所感乃眞是大慈大悲
014_0767_a_01L부처님은 중생으로 인하여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에 “대자대비”라 한 것이니, 이러한 등의 한량없는 일들은 본생경(本生經)에 모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014_0767_a_01L佛因衆生所名言大慈大悲如是等無量本生是中悉應廣說
【문】 선정 등 그 밖의 모든 공덕은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대(大)라고 이름붙이지 못하지만 지혜와 설법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를 얻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대라고 말하지 않는가?
014_0767_a_03L問曰禪定等諸餘功德不知故不名爲大智慧說法等能令人得道何以不稱言大
【답】 부처님께서 지혜로 능히 하는 것을 두루 아는 이는 없다. 대자대비하기 때문에 세상에서마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면서 중생을 구호하셨다. 사람들이 모두가 그것을 알지만 부처님의 지혜는 견주어서 유사하게 알 수 있으되 분명히는 알지 못하고, 자비로운 마음과 곳곳에서 변화하며 큰 사자처럼 외치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으로써 알 수 있을 뿐이다.
014_0767_a_05L答曰佛智慧所能無有遍知者大慈大悲故世世不惜身命捨禪定樂捄護衆生人皆知之於佛智慧可比類知不能了了慈悲心眼見耳聞處處變化大師子吼是故可知
또 부처님의 지혜는 미세하고 묘해 모든 보살이나 사리불 등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사람이겠는가. 자비로운 모양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믿고 받을 수 있지만 지혜는 깊고 오묘하므로 헤아려 알 수는 없다.
014_0767_a_10L復次佛智慧細妙菩薩舍利弗等尚不能知何況餘人慈悲相可眼見耳聞故人能信受慧深妙不可測知
또 이 대자대비는 온갖 중생이 사랑하고 즐기는 바이다. 마치 달콤한 약은 사람들이 먹기 좋아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지혜는 마치 쓴 약을 먹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대개 좋아하기 때문에 자비를 일컬어서 대라고 한다.
014_0767_a_13L復次是大慈大悲一切衆生所愛樂譬如美藥人所樂智慧如服苦藥人多不樂人多樂稱慈悲爲大
또 지혜라 하면 도를 얻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믿고 받을 수 있지만, 큰 자비로운 모양은 온갖 무리들도 모두 믿음을 내게 된다. 마치 형상을 보거나 말소리를 듣고는 모두 믿고 받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요익됨이 많기 때문에 대자대비라 하는 것이다.
014_0767_a_16L復次智慧者得道人乃能信受大慈悲相一切雜類皆能生信如見像若聞說皆能信受多所饒益故名爲大慈大悲
큰 지혜는 버림의 모양[捨相]과 멀리 여윔의 모양[遠離相]이라 하고, 대자대비는 가엾이 여기면서 이익되게 하는 모양[憐愍利益相]이라 한다. 이 가엾이 여기고 이익되게 하는 법은 온갖 중생들이 좋아하는 바이니, 이 때문에 대(大)라고 한다.
014_0767_a_19L復次大智慧名捨相遠離相大慈大悲爲憐愍利益是憐愍利益法一切衆生所愛樂以是故名爲大
014_0767_b_01L이 대자대비는 마치 『지심경(持心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대자대비에는 32종이 있어 중생들 가운데서 행한다. 이 대자대비의 거두는 일[攝]과 모양[相]과 대상[緣]은 4무량심(無量心)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14_0767_a_22L是大慈大悲如『持心經』中說大慈大悲有三十二種於衆生中行是大慈大悲攝如四無量心說
또 부처님의 대자대비의 공덕은 모두 마치 가전연(迦栴延)의 법 가운데에서처럼 분별하면서 그 모양을 구해서는 안 된다. 위의 모든 논의사(論議師)들이 비록 가전연의 법을 이용하며 분별하고 드러내 보인다 하더라도 다 믿거나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가전연은 대자대비와 온갖 지혜를 말하면서 “이것은 유루(有漏)의 법이고 매임의 법[繫法]이며 세간의 법”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나니, 왜냐하면 대자대비를 온갖 부처님 법의 근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것을 유루의 법이요 매임의 법이며 세간의 법이라 하겠는가.
014_0767_b_02L復次佛大慈大悲等功德不應一切如迦旃延法中分別求其相諸論議師雖用迦旃延法分別顯示不應盡信受所以者何迦旃延說大慈大悲一切智慧是有漏法繫法世閒法是事不爾何以故大慈大悲名爲一切佛法之根本云何言是有漏法繫法世閒法
【문】 대자대비가 비록 그것이 부처님 법의 근본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유루이다. 마치 진창 속에서 연꽃이 핀다하여 그 진창까지도 역시 묘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대자대비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그것이 부처님 법의 근본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무루(無漏)는 아니어야 한다.
014_0767_b_09L問曰大慈悲雖是佛法根本故是有漏如淤泥中生蓮華不得言泥亦應妙大慈大悲亦如是雖是佛法根本不應是無漏
【답】 보살로서 아직 부처님이 되시지 않았을 때의 큰 자비 설령 유루라 한다면 당연히 그 허물을 인정하겠지만, 지금은 부처님으로서 무애해탈(無礙解脫)의 지혜를 얻으셨기 때문에 온갖 법들은 모두가 청정하며 온갖 번뇌와 습기가 다하신 것이다.
014_0767_b_12L答曰菩薩未得佛時大慈悲若言有漏其失猶可今佛得無㝵解脫智故一切諸法皆淸淨一切煩惱及習盡
성문이나 벽지불은 무애해탈의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번뇌와 습기가 다하지 않았으며, 곳곳마다 의심이 다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은 마땅히 유루이어야 하지만 모든 부처님은 이러한 일이 없다. 그러니 어찌 부처님의 큰 자비를 유루라 말할 수 있겠는가.
014_0767_b_15L聲聞辟支佛不得無㝵解脫智故煩惱習不盡處處中疑不斷故心應有漏諸佛無是事何以故說佛大慈悲應是有漏
【문】 내가 감히 공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자비로운 마음을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내시니 마땅히 유루인 것이다.
014_0767_b_18L問曰我不敢不敬佛以慈悲心爲衆生故生是有漏
【답】 모든 부처님의 힘과 기세도 불가사의하다.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은 중생이란 생각을 여의지 못하면서 자비심을 내지만 모든 부처님은 중생이란 생각을 여의면서 자비심을 내신다.
014_0767_b_20L答曰諸佛力勢不可思議聲聞辟支佛不能離衆生想而生慈諸佛能離衆生想而生慈悲
014_0767_c_01L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시방의 중생의 모양을 얻을 수 없는데도 중생이란 모양을 취하면서 자비를 내지만, 지금 모든 부처님은 시방으로 중생을 구해도 얻을 수도 없고 또한 중생의 모양을 취하지도 않으면서 능히 자비를 내시기 때문이다. 마치 『무진의경(無盡意經)』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의 자비가 있나니, 중생연(衆生緣)과 법연(法緣)과 무연(無緣)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014_0767_b_22L所以者何如諸阿羅漢辟支佛十方衆生相不可得而取衆生相生慈悲今諸佛十方求衆生不可得亦不取衆生相而能生慈悲如『無盡意經』中說三種慈悲衆生緣法緣無緣
또 온갖 중생 가운데서 오직 부처님만이 속이지 않는 법[不誑法]을 행하신다. 만일 부처님께서 중생들에 대하여 모양을 취하면서 자비심을 행하신다면 속이지 않는 법을 행한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마침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14_0767_c_04L復次切衆生中唯佛盡行不誑法若佛於衆生中取相而行慈悲心不名行不誑何以故衆生畢竟不可得故
성문이나 벽지불은 속이지 않는 법을 모두 행한다고 일컫지는 못한다.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은 중생에게나 법에 대해서 모양을 취하거나 모양을 취하지 않거나 간에 비난하지 않아야 하나니, 속이지 않는 법을 모두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14_0767_c_07L聲聞辟支佛不名爲盡行不誑法故聲聞辟支佛於衆生於法若取相若不取不應難不悉行不誑法故
온갖 지혜로써 온갖 번뇌[漏]를 능히 끊었고, 온갖 유루의 법 중에서 잘 벗어났으며, 무루의 인연을 짓기도 하는데 이런 법이 어찌 스스로 유루가 되겠는가.
014_0767_c_10L一切智能斷一切諸漏能從一切有漏法中能作無漏因緣是法云何自是有
【문】 무루의 지혜는 저마다 반연할 바[所緣]가 있어서 온갖 법을 모두 반연할 수 는 없다. 오직 세속의 지혜[世俗智]만이 온갖 법을 반연할 수 있나니, 이 때문에 “온갖 지혜도 이것은 유루의 모양이다”고 한 것이다.
014_0767_c_13L問曰無漏智各各有所緣無有能悉緣一切法者唯有世俗智能緣一切法以是故說一切智是有漏相
【답】 그대의 법에서는 이런 설명이 있을 수 있으나 부처님 법에서는 말할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스스로 말[斗]을 가지고 저자로 들어갔을 때에 관청의 말과 서로 맞지 않으면 이용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대도 역시 그와 같아서 자기 자신은 그대의 법을 쓸 수 있지만 부처님의 법과는 맞지 않으므로 이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014_0767_c_15L汝法中有是說非佛法中所說人自持斗入市不與官斗相應無人用者汝亦如是自用汝法不與佛法相應無人用者
무루의 지혜가 무엇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지 못한다 하는가. 유루의 지혜는 임시로 붙인 이름이라 거짓이며 세력이 적기 때문에 진실로 온갖 법을 반연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그대의 법에서는 스스로 “온갖 법을 반연할 수 있다”고 한다.
014_0767_c_19L無漏智慧何以故不能緣一切法有漏智是假名虛誑力少故不應眞實緣一切法汝法中自說能緣一切法
014_0768_a_01L또 이 성문의 법에는 10지(智)이고 마하연의 법에서는 11지(智)가 있나니, 여실지(如實智)라고 한다. 이 10지가 여실지에 들어가면 전부 하나의 지혜로 되나니, 이른바 무루의 지혜[無漏智]이다. 마치 시방의 물이 큰 바다로 들어가면 전부 하나의 맛으로 되는 것과 같다.
014_0767_c_22L復次是聲聞法中十智摩訶衍法中有十一智名爲實相智是十智入是如實智中都爲一智所謂無漏智如十方水入大海水中都爲一味
이 대자대비는 부처님의 삼매왕삼매(三昧王三昧)와 사자유희삼매(師子遊戱三昧)에 속한다.
이와 같이 대자대비의 뜻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014_0768_a_03L是大慈大悲佛三昧王三昧師子遊戲三昧所攝如是略說大慈大悲義
【經】 보살마하살이 도혜(道慧)를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며, 보살마하살이 도혜로써 도종혜(道種慧)1)를 구족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느니라.
014_0768_a_05L【經】
菩薩摩訶薩欲得道當習行般若波羅蜜菩薩摩訶薩欲以道慧具足道種慧當習行般若波羅
【論】 도(道)에서 하나의 도라 하면 오로지 열반으로만 나아가고 착한 법 가운데서 일심으로 방일하지 않음이니, 이런 도는 몸과 마음을 따른다.
014_0768_a_08L【論】
道名一道一向趣涅槃於善法中一心不放逸道隨身念
도에는 다시 두 가지의 도가 있나니, 악도(惡道)와 선도(善道), 세간도(世間道)와 출세간도(出世間道), 정도(定道)와 혜도(慧道), 유루도(有漏道)와 무루도(無漏道),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학도(學道)와 무학도(無學道), 신행도(信行道)와 법행도(法行道), 향도(向道)와 과도(果道), 무애도(無礙道)와 해탈도(解脫道), 신해도(信解道)와 견득도(見得道), 혜해탈도(慧解脫道)와 구해탈도(俱解脫道)이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두 가지의 도문(道門)이 있다.
014_0768_a_09L道復有二道善道世閒道出世閒道定道慧道漏道無漏道見道修道學道無學道信行道法行道向道果道無㝵道脫道信解道見得道慧解脫道解脫道如是無量二道門
다시 세 가지의 도가 있나니, 지옥도(地獄道)와 축생도(畜生道)와 아귀도(餓鬼道)이다. 세 가지의 지옥으로서 열지옥(熱地獄)과 한지옥(寒地獄)과 흑암지옥(黑闇地獄)이 있고, 세 가지 축생도로서 지행(地行)과 수행(水行)과 공행(空行)이 있으며, 세 가지 아귀도로서 아귀(餓鬼)와 식부정귀(食不淨鬼)와 신귀(神鬼)가 있다.
014_0768_a_14L復有三道地獄道畜生道餓鬼道三種地獄地獄寒地獄黑闇地獄三種畜生道地行水行空行三種鬼道餓鬼食不淨鬼神鬼
세 가지 선도(善道)가 있으니, 인도(人道)와 천도(天道)와 열반도(涅槃道)이다. 인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죄를 짓는 이와 복을 짓는 이와 열반을 구하는 이이다. 다시 세 가지 사람이 있으니, 욕망을 받아 악을 행하는 이와 욕망을 받고도 악을 행하지 않는 이와 욕망을 받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 이이다.
014_0768_a_18L三種善道人道天道涅槃人有三種作罪者作福者求涅槃復有三種人受欲行惡者受欲不行惡者不受欲不行惡者
천도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욕계의 하늘[欲天]과 색계의 하늘[色天]과 무색계의 하늘[無色天]이다.
열반도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성문의 도[聲聞道]와 벽지불의 도[辟支佛道]와 부처님의 도[佛道]이다.
성문의 도에도 세 가지가 있나니, 배울 것이 있는 이의 도[學道]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도[無學道]와 배울 것이 있는 이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이도 아닌 도[非學非無學道]이다. 벽지불의 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768_a_21L天有三種聞天色天無色天涅槃道有三種學道辟支佛道佛道聲聞道有三種道道無學道非學非無學道辟支佛亦如是
014_0768_b_01L부처님의 도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바라밀의 도[波羅蜜道]와 방편의 도[方便道]와 청정한 세계의 도[淨世界道]이다. 부처님의 도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처음 뜻을 일으키는 도[初發意道]와 모든 선을 행하는 도[行諸善道]와 중생을 성취하는 도[成就衆生道]이다.
다시 세 가지 도가 있나니, 계도(戒道)와 정도(定道)와 혜도(慧道)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세 가지 도의 문이 있다.
014_0768_b_01L佛道有三種波羅蜜道便道淨世界道佛復有三道初發意行諸善道成就衆生道復有三道戒道定道慧道如是等無量三道門
다시 네 가지 도가 있나니, 범부의 도[凡夫道]와 성문의 도와 벽지불의 도와 부처님의 도이다.
다시 네 가지의 도가 있나니, 성문의 도와 벽지불의 도와 보살의 도[菩薩道]와 부처님의 도이다.
성문의 도에 네 가지가 있나니, 괴로움의 도[苦道]와 쌓임의 도[集道]와 사라짐의 도[滅道]와 길의 도[道道]이다.
다시 네 가지의 도가 있나니, 몸을 관하는 실상의 도[觀身實相道]와 느낌[受]ㆍ마음[心]ㆍ법(法)을 관하는 실상의 도이다.
014_0768_b_04L復有四種道凡夫道聲聞道辟支佛佛道復有四種道聲聞道辟支佛菩薩道佛道聲聞道有四種苦道集道滅道道道復有四沙門果道有四種道觀身實相道觀受法實相道
다시 네 가지의 도가 있나니, 아직 생기지 않은 악(惡)과 착하지 않은 법을 끊어 생기지 않게 하는 도와 이미 생긴 악을 끊어 빨리 없어지게 하는 도와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을 생기게 하는 도와 이미 생긴 착한 법은 더욱 자라게 하는 도이다.
또 네 가지 도가 있나니, 욕증상도(欲增上道)와 정진증상도(精進增上道)와 심증상도(心增上道)와 혜증상도(慧增上道)이다.
014_0768_b_10L復有四種道爲斷未生惡不善令不生道爲斷已生惡令疾滅道爲未生善法令生道爲已生善法令增長復有四種道欲增上道精進增上心增上道慧增上道
다시 네 가지 성종도[四聖種道]가 있나니, 옷[衣]과 음식[食]과 침구[臥具]와 의약(醫藥)을 가리지 않고 즐거이 괴로움을 끊으면서 선정을 닦는 것[樂斷苦修定]이다.
다시 네 가지의 행하는 도[四行道]가 있나니, 괴롭고 어려운 도[苦難道]와 괴롭고 쉬운 도[苦易道]와 즐겁고 어려운 도[樂難道]와 즐겁고 쉬운 도[樂易道]이다.
014_0768_b_14L復有四聖種不擇衣臥具醫藥樂斷苦修定有四行道苦難道苦易道樂難道易道
다시 네 가지의 닦는 도[四修道]가 있다. 첫째는 지금 세상의 즐거움[今世樂]을 위하여 닦는 도이고, 둘째는 생사를 아는 지혜[生死智]를 닦는 도이며, 셋째는 번뇌를 다 끊기[漏盡] 위하여 닦는 도이며, 넷째는 분별하는 지혜[分別慧]를 닦는 도이다.
다시 네 가지 하늘의 도[四天道]가 있나니, 이른바 4선(禪)이다.
다시 네 가지 도가 있나니, 하늘의 도[天道]와 범천의 도[梵道]와 성인의 도[聖道]와 부처님의 도[佛道]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네 가지의 도문이 있다.
014_0768_b_17L復有四修道爲今世樂修道生死智修道爲漏盡故修道分別慧修道復有四天道所謂四禪復有四種道天道梵道聖道佛道是等無量四道門
다시 다섯 가지의 도가 있나니, 지옥도와 축생도와 아귀도와 인도와 천도이다.
다시 다섯 가지의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들의 도가 있나니, 배울 것이 없는 이의 계율의 도[戒道] 내지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해탈지견의 도[解脫知見道]이다.
014_0768_b_21L復有五種道地獄畜生餓鬼天道復有五無學衆無學戒衆道乃至無學解脫知見衆道
014_0768_c_01L다시 다섯 가지 정거천의 도[五淨居天道]가 있고, 다시 다섯 가지 욕계 하늘을 다스리는 도[五治欲天道]가 있으며, 다시 다섯 가지의 법다운 말의 도[五如法語道]가 있고, 다시 다섯 가지의 법이 아닌 말의 도[五非法語道]가 있다.
다시 다섯 가지 도가 있나니, 범부의 도와 성문의 도와 벽지불의 도와 보살의 도와 부처님의 도이다.
014_0768_c_01L復有五種淨居天道復有五治復有五如法語道復有五非法語復有五道凡夫道聲聞道辟支佛菩薩道佛道
다시 다섯 가지의 도가 있나니, 색법(色法)을 분별하는 도와 심법(心法)을 분별하는 도와 심수(心數)를 분별하는 도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을 분별하는 도와 무위법(無爲法)을 분별하는 도이다.
다시 다섯 가지의 도가 있나니, 고제에서 끊어야 할 도[苦締所斷道]와 집제(集諦)에서 끊어야 할 도와 멸제(滅締)에서 끊어야 할 도와 도제(道諦)에서 끊어야 할 도와 사유(思惟)에서 끊어야 할 도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다섯 가지 법의 도문이 있다.
014_0768_c_04L復有五道分別色法分別心法道分別心數道分別心不相應行道分別無爲法道復有五種道苦諦所斷道集諦所斷道滅諦所斷道道諦所斷道思惟所斷道是等無量五法道門
다시 6도(道)가 있나니, 지옥도와 축생도와 아귀도와 인도와 천도와 아수라도이다.
다시 6진(塵)을 버리는 도가 있고, 다시 6화합(化合)구역(舊譯)으로는 6종(種)이라 한다.의 도와 6신통의 도와 6종아라한(種阿羅漢)의 도와 6지수(地修)의 도와 6정(定)의 도와 6바라밀(波羅蜜)의 도이다. 낱낱의 바라밀에는 저마다 여섯 가지씩의 도가 있나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여섯 가지의 도문이 있다.
014_0768_c_09L復有六種道獄道畜生餓鬼阿修羅道復有捨六塵道復有六和合舊云六種六神通六種阿羅漢道六地修道六定道六波羅蜜道一一波羅蜜各各有六如是等無量六道門
다시 일곱 가지의 도가 있나니, 7각의도(覺意道)와 7지무루도(地無漏道)와 7상정도(想定道)와 7정도(淨道)와 7선인도(仙人道)와 7재복도(財福道)와 7법복도(法福道)와 7조정도(助定道)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일곱 가지의 도문이 있다.
014_0768_c_14L復有七道覺意道七地無漏道七想定道七淨七善人道七財福道七法福道助定道如是等無量七道門
다시 여덟 가지의 도가 있나니, 8정도(正道)와 8해탈도(解脫道)와 8배사도(背捨道)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여덟 가지의 도문이 있다.
014_0768_c_17L復有八八正道八解脫道八背捨道如是等無量八道門
다시 아홉 가지의 도가 있나니, 9차체도(次第道)와 9지무루도(地無漏道)와 9견단도(見斷道)와 9아라한도(阿羅漢道)와 9보살도(菩薩道)이다. 9보살도란 이른바 6바라밀과 방편(方便)과 성취중생(成就衆生)과 정불세계(淨佛世界)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아홉 가지의 도문이 있다.
014_0768_c_19L復有九道九次第道九地無漏道九見斷道九阿羅漢道九菩薩道所謂六波羅蜜方便成就衆生淨佛世界如是等無量九道門
014_0769_a_01L다시 열 가지의 도가 있나니, 이른바 10무학도(無學道)와 10상도(想道)와 10지도(智道)와 10일체처도(一切處道)와 10불선도(不善道)와 10선도(善道)이다
나아가 162종에 이르기까지의 도가 있으니,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도문이 있다. 이러한 모든 도를 모두 다 알고 두루 아나니, 이것이 도종혜(道種慧)이다.
014_0768_c_22L復有十道所謂十無學道十想道智道十一切處道十不善道十善道乃至一百六十二道如是等無量道如是諸道盡知遍知是爲道種慧
【문】 반야바라밀은 바로 보살의 으뜸가는 도이고 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 갖가지의 도를 말하는가?
014_0769_a_03L問曰般若波羅蜜是菩薩第一道所謂無相何以說是種種道
【답】 이 도는 모두가 하나의 도[一道] 가운데 들어가니, 이른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다. 처음 배울 때에는 갖가지 구별이 있지만 나중에는 모두가 동일하여 차별이 없다. 비유하건대 마치 겁(劫)이 다해 불에 탈 때에는 온갖 존재하는 것이 모두 허공과 같이 되는 것과 같다.
014_0769_a_05L答曰是道皆入一道中所謂諸法實相初學有種種別後皆同一無有差別譬如劫盡燒時一切所有皆同虛空
또 중생을 인도하기 위하여 보살은 분별하면서 이 갖가지 도를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세간의 도와 출세간의 도이다.
014_0769_a_08L復次爲引導衆生故菩薩分別說是種種所謂世閒道出世閒道等
【문】 어찌하여 보살이 한 모양인 무상(無相) 가운데 머무르면서 “이것은 세간의 도이다. 이것이 출세간의 도이다”라고 분별하는가?
014_0769_a_10L問曰何菩薩住一相無相中而分別是世閒道是出世閒道
【답】 세간이라는 이름은 다만 뒤바뀐 생각과 거짓이라는 두 가지 법에서 생기는 것이니, 마치 환2)과 같고 마치 꿈과 같으며, 마치 불수레바퀴를 돌리는 것과 같다. 범부는 억지로 세간이라 여기지만, 이 세간은 모두가 허망한 가운데서부터 온다. 지금도 역시 허망하고 본래도 역시 허망하다. 그것은 실로 나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으되 다만 안팎의 6정(精)과 6진(塵)이 화합한 인연(因緣)에서 생길 뿐인데, 범부가 집착하는 바를 따르는 까닭에 세간이라 부르게 된다. 이 세간이라는 갖가지 삿된 소견의 그물은 마치 실로 엉켜서 서로 달라붙은 것과 같나니, 항상 생사 가운데서 왕래하니, 이와 같이 해서 세간인 줄 안다.
014_0769_a_12L答曰世閒名但從顚倒憶想虛誑二法生如幻如夢如轉火輪凡夫人强以爲世閒是世閒皆從虛妄中來今亦虛妄本亦虛妄實無生無作但從內外六情六塵和合因緣生隨凡夫所著故爲說世閒是世閒種種邪見羅網如亂系相著常往來生死中如是知世閒
어떤 것이 출세간도(出世間道)이냐 하면, 여실히 세간을 아는 것이 곧 출세간의 도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혜로운 이는 세간과 출세간을 구하여도 두 가지 일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얻을 수 없다면 임시로 붙인 이름으로서의 세간ㆍ출세간인 줄 알아야 한다. 다만 세간을 깨뜨리기 위하여 출세간을 설명했을 뿐이다.
014_0769_a_19L何等是出世閒道如實知世閒卽是出世閒所以者何智者求世閒出世閒事不可得若不可得當知假名爲世出世閒但爲破世閒故說出世閒
014_0769_b_01L세간의 모양은 그것이 곧 출세간이며 다시 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세간의 모양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출세간과 세간의 모양은 항상 공하여 세간법의 정해진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수행하는 이는 세간을 얻지 않으며 또한 출세간에 집착하지 않는다.
014_0769_a_23L世閒相卽是出世閒更無所復有以者何世閒相不可得是出世閒是世閒相常空世閒法定相不可得故如是行者不得世閒亦不著出世閒
만일 세간을 얻지 않고 또한 출세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애(愛)와 만(慢)이 파괴되기 때문에 세간과 함께 다투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이는 오래전에 세간이 공하여 아무것도 없고 거짓임을 알고 있으므로 생각하거나 분별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014_0769_b_04L若不得世閒亦不著出世閒慢破故共世閒諍何以故行者夂知世閒空無所有虛誑故不作憶想分別
세간을 5중(衆)이라 하는데, 5중의 모양은 가령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것을 구하신다 해도 역시 얻을 수 없어서 오는 곳도 없고 머무르는 곳도 없으며 또한 가는 데도 없다. 만일 5중의 오고 머무르고 가는 모양을 얻지 못하면 그것이 곧 출세간이다.
014_0769_b_07L世閒名五衆五衆相假令十方諸佛求之亦不可得無來處無住處亦無去處若不得五衆來去相卽是出世閒
수행하는 이는 그때에 이 세간과 출세간을 관찰해도 실로 볼 수가 없나니, 세간이 출세간과 합하는 것도 볼 수 없고, 또한 출세간이 세간과 합하는 것도 볼 수 없다. 세간을 여의고서 또한 출세간도 볼 수 없고, 출세간을 여의고서 또한 세간을 볼 수도 없다. 이와 같이 되면 두 가지의 알음알이[識], 즉 세간과 출세간이 생기지 않나니, 만일 세간을 버리고 출세간을 받지 않는다면, 이것을 출세간이라 한다.
014_0769_b_10L行者爾時觀是世閒出世閒實不可不見世閒與出世閒合亦不見出世閒與世閒合離世閒亦不見出世離出世閒亦不見世閒如是則不生二識所謂世閒出世閒若捨世閒不受出世閒是名出世閒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알게 되면 곧 중생을 위하여 세간과 출세간 길을 분별하게 된다. 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온갖 길들 역시 이와 같아서 하나의 모양[一相]에 들어가나니, 이것을 도종혜(道種慧)라 한다.
014_0769_b_16L若菩薩能如是知則能爲衆生分別世閒出世閒道有漏無漏一切諸道亦如是入一相是名道種慧
【經】 도종혜로써 일체지(一切智)를 구족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며, 일체지로써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구족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느니라.
014_0769_b_19L【經】
欲以道種慧具足一切智當習行般若波羅蜜欲以一切智具足一切種智當習行般若波羅蜜
【論】 【문】 일체지와 일체종지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014_0769_b_22L【論】
問曰一切智一切種智有何差
014_0769_c_01L【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별은 없다. 때로는 일체지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체종지라 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전체의 모양[總相]이 바로 일체지요 개별적인 모양[別相]이 바로 일체종지이며, 원인[因]이 바로 일체지요 결과[果]가 바로 일체종지이며, 간략하게 설명하면 일체지요 자세히 설명하면 일체종지이다”라고 한다.
014_0769_b_23L答曰有人言無差別或時言一切或時言一切種智有人言摠相是一切智別相是一切種智因是一切果是一切種智略說一切智廣說一切種智
일체지라 함은 통틀어 온갖 법 중의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깨뜨리는 것이고, 일체종지라 함은 갖가지 법문(法門)을 관하면서 모든 무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일체지라 함은 마치 4제(諦)를 말하는 것과 같고 일체종지라 함은 마치 4제의 뜻을 말하는 것과 같으며, 일체지라 함은 고제(苦諦)를 말하는 것과 같고 일체종지라 함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의 모양을 말하는 것과 같으며, 일체지라 함은 마치 나는 괴로움[生苦]을 말하는 것과 같고 일체종지라 함은 갖가지 중생들이 곳곳에서 받아 나는[受生]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014_0769_c_04L一切智者摠破一切法中無明闇一切種智者觀種種法門破諸無明一切智譬如說四諦一切種譬如說四諦義一切智者如說苦一切種智者如說八苦相一切智如說生苦一切種智者如說種種衆生處處受生
또 온갖 법[一切法]은 눈의 빛깔[眼色]에서 뜻과 법[意法]에 이르기까지 말한다. 이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은 역시 전체의 모양[總相]으로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 등을 아나니, 이 12입(入)을 알기 때문에 일체지라 한다.
014_0769_c_10L復次一切法名眼色乃至意法是諸阿羅漢辟支佛亦能摠相知無常無我等知是十二入故名爲一切智
성문이나 벽지불조차도 오히려 모두 개별적인 모양[別相]으로 한 중생의 태어나는 곳과 곱거나 추함과 사업의 많고 적음을 알지 못하며, 미래와 현재의 세상 역시 그와 같은데 하물며 온갖 중생이겠는가.
014_0769_c_13L聲聞辟支佛尚不能盡別相知一衆生生處好醜事業多少未來現在世亦如是何況一切衆生
마치 한 염부제(閻浮提) 안의 금(金)의 이름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의 한 물건 안의 갖가지 이름에 대해서나 또는 하늘의 말[天語]이나 용의 말[龍語] 등의 이러한 갖가지 말이겠는가. 금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금에 대한 인연과 나는 곳과 좋은 점과 나쁜 점과 귀하고 천함을 알 수 있겠는가.
014_0769_c_16L如一閻浮提中金名字尚不能何況三千大千世界於一物中種種名字若天語若龍語如是等種種語言名金尚不能知何況能知金因緣生處好惡貴賤
그로 인하여 복도 얻고 그로 인하여 죄를 얻으며 그로 인하여 도를 얻는다는 이러한 현재의 일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마음[心]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 이른바 선정과 지혜 등의 모든 법이겠는가. 부처님은 모든 법의 전체의 모양과 개별적인 모양을 모두 다 아시기 때문에 일체종지라 한다.
014_0769_c_20L因而得福因而得因而得道如是現事尚不能知況心心數法所謂禪定智慧等諸法佛盡知諸法摠相別相故名爲一切種智
014_0770_a_01L또 후품(後品) 중에서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일체지는 바로 성문과 벽지불의 일이요 도지(道智)는 바로 모든 보살들의 일이며 일체종지는 바로 부처님의 일이다”고 하셨다.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다만 통틀어 일체지가 있을 뿐 일체종지는 없다.
014_0770_a_01L復次後品中佛自說一切智是聲聞辟支佛事道智是諸菩薩事切種智是佛事聲聞辟支佛但有摠一切智無有一切種智
또 성문이나 벽지불은 비록 개별적인 모양에 분한[分]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체라는 모양[總相]으로 이름을 받게 된다. 부처님의 일체지와 일체종지는 모두가 진실이지만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니, 일체지란 비유하건대 마치 낮에 켠 등불과도 같아서 이름만 있고 등불의 작용은 없는 것이다.
014_0770_a_04L復次聲聞支佛雖於別相有分而不能盡知摠相受名佛一切智一切種智皆是眞實聲聞辟支佛但有名字一切智譬如晝燈但有燈名無有燈用
성문이나 벽지불 같은 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어려운 질문을 하면 때로는 모두 대답하지 못하여 의심을 끊을 수 없기도 하나니, 마치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세 번을 물었는데도 대답하지 못한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일체지가 있었다면 어찌하여 대답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일체지라는 이름만이 있을 뿐이며 범부보다는 나으나 진실함이 없다.
014_0770_a_08L如聲辟支佛若有人問難或時不能悉不能斷疑如佛三問舍利弗而不能答若有一切智云何不能答以是但有一切智名勝於凡夫無有實
이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진실한 일체지요 일체종지로서 이러한 한량없는 이름이 있다. 때로는 부처님을 일컬어 ‘일체지를 지닌 사람’이라고 하며, 때로는 ‘일체종지를 지닌 사람’이라고도 하나니, 이러한 등으로 일체지와 일체종지의 갖가지 차별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014_0770_a_13L是故佛是實一切智一切種智如是無量名字或時名佛爲一切智或時名爲一切種智人如是等略說一切智一切種智種種差別
【문】 경에서 말씀하듯이 6바라밀과 37품(品)과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 등의 모든 법을 행하여 일체지를 얻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도종지(道種智)만으로써 일체지를 얻는다고 하는가?
014_0770_a_16L問曰如經中說行六波羅蜜三十七品四無所畏等諸法得一切智何以故此中說但用道種智得一切智
【답】 그대가 말한 바의 6바라밀 등이 곧 도(道)이다. 이 도를 알고 이 도를 행하여 일체지를 얻는 것인데 의심할 것이 무엇인가.
014_0770_a_19L汝所說六波羅蜜等卽是道知是行是道得一切智何所疑
또 처음 발심하여 도량(道場)에 앉기까지의 그 중간에 온갖 착한 법은 모두 다 도라 한다. 이 도 가운데서 분별하고 사유해서 행하는 것을 도지(道智)라 한다. 이 경의 뒤에서 설명하듯이 도지는 바로 보살의 일이다.
014_0770_a_21L復次發心乃至坐道場於其中閒一切善盡名爲道此道中分別思惟而行是名道智如此經後說道智是菩薩
014_0770_b_01L【문】 부처님은 도의 일을 이미 구비했기 때문에 도지라 하지 않으나, 아라한과 벽지불의 모든 공덕은 아직 구비하지 못했는데 무엇 때문에 도지라 하지 않는가?
014_0770_b_02L問曰佛道事已備故不名道智羅漢辟支佛諸功德未備何以不名道智
【답】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는 스스로 행할 바를 역시 마쳤나니 이 때문에 도지라 하지 않는다. 도(道)는 곧 행상(行相)이기 때문이다.
014_0770_b_04L答曰阿羅漢辟支佛道自於所行亦辦是故不名道智道是行相
또 이 경에서 성문이나 벽지불을 말하지만 성문 가운데서는 세 가지 도[三道]를 포섭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도는 크기 때문에 도지라 하지만 성문과 벽지불의 도는 작기 때문에 도지라 하지 않는다.
014_0770_b_06L復次此經中說聲聞辟支佛聲聞中不攝三道故此中不說佛道大故爲道智聲聞辟支佛道小故不名道智
또 보살마하살은 스스로 도를 행하면서 역시 중생에게 각각 행할 바의 도를 나타내 보이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도지를 행하여 일체지를 얻는다고 설명한다.
014_0770_b_08L復次菩薩摩訶薩自行道亦示衆生各各所行道以是故說名菩薩行道智得一切智
【문】 어떤 것이 일체지가 알아야 할 온갖 법인가?
014_0770_b_11L問曰何等是一切智所知一切法
【답】 마치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을 위하여 온갖 법을 말해 주리라. 어떤 것이 온갖 법이냐 하면, 이른바 눈과 빛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접촉, 뜻과 법이니, 이 12입(入)을 온갖 법이라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또 온갖 법이 있나니, 이름[名]과 물질[色]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중경(利衆經)』3)의 게송과 같다.
014_0770_b_12L答曰如佛告諸比丘爲汝說一切法何等是一切法所謂眼色鼻香舌味身觸意法是十二入名一切法復有一切法所謂名如佛說『利衆經』中偈

만일 진실한 관[眞觀]을 구하고자 하면
다만 이름과 물질이 있을 뿐이며
만일 진실한 앎[實知]을 살피고자 하면
역시 이름과 물질을 알아야 한다.
014_0770_b_16L若欲求眞觀
但有名與色
若欲審實知
亦當知名色

비록 어리석은 마음과 많은 생각으로
모든 법을 분별한다 하더라도
다시는 다른 일이 있어서
이름과 물질을 벗어나는 일 없다.
014_0770_b_18L雖癡心多想
分別於諸法
更無有異事
出於名色者
014_0770_c_01L
또 온갖 법은 이른바 빛깔[色]과 빛깔이 없는 법[無色法], 볼 수 있는 것[加見]과 볼 수 없는 것[不可見], 대할 수 있는 것[有對]과 대할 수 없는 것[無對], 번뇌가 있는 것[有漏]과 번뇌가 없는 것[無漏], 지어진 것[有爲]과 지어지지 않은 것[無爲], 마음[心]과 마음이 아닌 것[非心], 마음과 상응하는 것[心相應]과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것[非心相應], 마음과 함께 나는 것[共心生]과 마음과 함께 나지 않는 것[不共心生], 마음을 따라 행하는 것[隨心行]과 마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不隨心行], 마음의 인을 따르는 것[從心因]과 마음의 인을 따르지 않는 것[不從心因] 등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두 개의 법문으로 온갖 법을 포섭한다. 마치 아비담(阿毘曇) 섭법품(攝法品)4)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14_0770_b_19L復次一切法所謂色無色法可見可見有對無對有漏無漏有爲無爲非心心相應非心相應共心生共心生隨心行不隨心行從心因從心因如是等無量二法門攝一切如『阿毘曇ㆍ攝法品』中說
또 온갖 법은 이른바 착한 법[善法]과 착하지 않는 법[不善法]과 무기의 법[無記法], 견제에서 끊어야 할 것[見諦所斷]과 사유에서 끊어야 할 것[思惟所斷]과 끊지 않는 법[不斷法], 과보가 있는 법[有報法]과 과보가 없는 법[無報法]과 과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보가 없는 것도 아닌 법[非有報非無報法]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세 가지씩의 법문으로 온갖 법을 포섭한다.
014_0770_c_02L復次一切所謂善法不善法無記法見諦所思惟所斷不斷法有報法無報法非有報非無報法如是等無量三法門攝一切法
또 온갖 법은 이른바 과거의 법[過去法]과 미래의 법[未來法]과 현재의 법[現在法]과 과거ㆍ미래ㆍ현재도 아닌 법[非過去未來現在法], 욕계에 매인 법[欲界繫法]과 색계에 매인 법[色界繫法]과 무색계에 매인 법[無色界繫法]과 매이지 않는 법[不繫法], 착한 인을 좇는 법[從善因法]과 착하지 않은 인을 좇는 법[從無善因法]과 무기의 인을 좇는 법[從無記因法]과 착한 것도 아니고 착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무기도 아닌 인을 좇는 법[非善非不善非無記因法], 대상을 반연함이 있는 법[有緣緣法]과 대상을 반연함이 없는 법[無緣緣法]과 대상을 반연하는 법이 있기도 하고 대상을 반연하는 법이 없기도 하는 법[有緣緣法無緣緣法]과 대상을 반연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을 반연하는 법이 없는 것도 아닌 법[非有緣緣非無緣緣法] 등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네 가지씩의 법문으로 온갖 법을 포섭한다.
014_0770_c_06L復次一切法所謂過去未來法現在法非過去未來現在欲界繫法色界繫法無色界繫法不繫法從善因法從不善因法從無記因法從非善非不善非無記因法有緣緣法無緣緣法有緣緣亦無緣緣法非有緣緣非無緣緣法如是等無量四法門攝一切法
또 온갖 법은 이른바 물질의 법[色法]과 마음의 법[心法]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과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의 법[心不相應諸行法]과 무위의 법[無爲法]과 4제(諦) 및 무기무위(無記無爲) 등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다섯 가지씩의 법문으로 온갖 법을 포섭한다.
014_0770_c_13L復次一切法所謂色法心法心數法心不相應諸行法無爲法四諦及無記無爲如是等無量五法門攝一切法
또 온갖 법은 이른바 5중(衆)과 무위(無爲)와 고제에서 끊어야 할 법[苦諦所斷法]과 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ㆍ사유에서 끊어야 할 법[思惟所斷法]과 끊지 않는 법[不斷法] 등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여섯 가지씩의 법문으로 온갖 법을 포섭한다.
그리고 일곱 가지, 여덟 가지, 아홉 가지, 열 가지 등의 모든 법문은 바로 아비담(阿毘曇)에서 그 뜻을 분별한다.
014_0770_c_16L復次一切所謂五衆及無爲苦諦所斷法滅諦道諦思惟所斷法不斷法是等無量六法門攝一切法十等諸法門是阿毘曇分別義
또 온갖 법은 이른바 있는 법[有法]과 없는 법[無法], 공한 법[空法]과 진실한 법[實法], 반연할 바의 법[所緣法]과 능히 반연하는 법[能緣法], 모이는 법[聚法]과 흩어지는 법[散法] 등이다.
014_0770_c_20L復次切法所謂有法無法空法實法所緣能緣法聚法散法等
014_0771_a_01L또 온갖 법은 이른바 있는 법과 없는 법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법[亦有亦無法], 공한 법과 진실한 법과 공한 것도 아니고 진실한 것도 아닌 법, 반연할 대상의 법과 능히 반연하는 법과 반연할 대상도 아니고 능히 반연하는 것도 아닌 법[非所緣非能緣法] 등이다.
014_0770_c_22L復次一切法所謂有法無法亦有亦無法空法非空非實法所緣法能緣法非所緣非能緣法
또 온갖 법은 이른바 있는 법과 없는 법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법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법[非有非無法]과 공한 법과 공하지 않는 법[不空法]과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는 것도 아닌 법[非空非不空法]과 나는 법[生法]과 멸하는 법[滅法]과 나기도 하고 멸하는 법[生滅法]과 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닌 법[非生非滅法]과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不生不滅法]과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닌 법[非不生非不滅法]과 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닌 법[不生不滅亦非不生非不滅法]과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나지 않음이 아닌 것도 아니고 멸하지 않음이 아닌 것도 아닌 법[非不生不滅亦非不不生亦非不不滅法]이다.
014_0771_a_02L復次一切法所謂有法無法亦有亦無法非有非無法空法不空法空不空法非空非不空法滅法生滅法非生非滅法不生不滅法非不生非不滅法不生不滅亦非不生非不滅法非不生非不滅亦非不不生亦非不不滅法
또 온갖 법은 이른바 있는 법과 없는 법과 있고 없는 법[有無法]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법[非有非無法]의 이 네 구절[四句]을 버린다. 법이 공(空)하고 공하지도 않고[不空] 나고[生] 없어지고[滅]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不生不滅] 이 다섯 구절도 모두가 역시 그와 같다.
014_0771_a_08L復次一切法所謂有法無法有無法非有非無法捨是四句法空不空生滅不生不滅五句皆亦如是
이와 같은 갖가지 한량없는 아승기의 법의 문에 포섭되는 법들이 있으니, 이 무애의 지혜[無礙智慧]로써 위의 모든 법을 두루 다 아는 것을 일컬어 ‘일체지,’ ‘일체종지’라 한다.
014_0771_a_11L如是等種種無量阿僧祇法門所攝諸法以是無㝵智慧盡遍知上諸法名爲一切智一切種
【문】 온갖 중생들은 모두가 지혜를 구하는데 어찌하여 유독 부처님 한 사람만이 일체지를 얻으셨는가?
014_0771_a_14L問曰一切衆生皆求智慧云何獨佛一人得一切智
【답】 부처님은 온갖 중생 가운데서 으뜸이기 때문에 혼자만이 일체지를 얻으셨다.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발이 없는 것, 두 발 달린 것, 네발 달린 것, 여러 발 가진 것, 모양[色]이 있는 것, 모양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非有想非無想] 것 등 온갖 중생 가운데서 부처님은 가장 으뜸이시기 때문이다.
014_0771_a_15L答曰佛於一切衆生中第一故獨得一切智如佛所說無足二足四足多足有色無色有想無想非有想非無想等一切衆生中佛最第一
비유하건대 마치 수미산(須彌山)은 많은 산 가운데서 저절로 가장 으뜸인 것과 같고, 4대(大) 가운데서 불[火]의 힘이 가장 세기 때문에 능히 비추고 태우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중생 중에서 가장 으뜸가기 때문에 일체지를 얻으셨다.
014_0771_a_19L譬如須彌山於衆山中自然最第一如四大中火最有力能照能燒佛亦如是於一切衆生中最第一故得一切智
【문】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온갖 중생 가운데서 홀로 가장 으뜸이라고 하는가?
014_0771_a_22L問曰佛何以故於一切衆生中獨最第一
014_0771_b_01L【답】 앞에서 대답했듯이, 일체지를 얻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설명하자면, 부처님은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다른 이들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중생들 가운데서 가장 으뜸인 것이다.
014_0771_a_23L答曰如先答得一切智故今當更說佛自利益亦利益他故於衆生中最第一
마치 온갖 비추는 것 가운데서 해가 가장 으뜸이고, 온갖 사람 가운데서는 전륜성왕이 가장 으뜸이며, 온갖 연꽃 가운데서는 청련화(靑蓮華)가 가장 으뜸이고, 온갖 육지에서 나는 꽃에서는 수만(須曼)의 빛깔이 가장 으뜸이며, 온갖 나무 향 가운데서는 우두전단(牛頭栴檀)이 가장 으뜸이고, 온갖 구슬 가운데서는 여의주(如意珠)가 가장 으뜸인 것과 같다.
014_0771_b_02L如一切照中日爲第一一切人中轉輪聖王最第一切蓮華中靑蓮華爲第一一切陸生華須曼色第一一切木香中牛頭栴檀爲第一一切珠中如意珠爲第
또 마치 온갖 계율 가운데서는 성인의 계율[聖戒]이 가장 으뜸이고, 온갖 해탈 가운데서는 불괴해탈(不壞解脫)이 가장 으뜸이며, 온갖 청정함 가운데서는 해탈(解脫)이 가장 으뜸이고, 온갖 모든 진리 가운데서는 공관(空觀)이 가장 으뜸이며, 온갖 법들 가운데서는 열반이 가장 으뜸이니, 이와 같이 한량없는 것들이 저마다 으뜸이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중생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시며, 으뜸이신 까닭에 혼자만이 일체지를 얻으셨다.
014_0771_b_07L一切諸戒中聖戒爲第一一切解脫中不壞解脫爲最第一一切淸淨中解脫爲第一一切諸諦中空觀爲第一一切諸法中涅槃爲第一如是等無量各各第一佛亦如是於一切衆生中最爲第一故獨得一切智
또 부처님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큰 서원으로 장엄하여 온갖 힘을 잃고 가라앉는[衰沒]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모든 착한 길을 두루 행하면서 선(善)이란 선은 쌓지 않음이 없었고, 고행(苦行)이란 고행은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쌓으셨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부처님은 온갖 중생 가운데서 유독 으뜸이시다.
014_0771_b_12L復次佛從初發意以大誓莊嚴一切衰沒衆生欲拯濟故盡遍行諸善道無善不集無苦不行皆集一切諸佛功德如是等種種無量因緣故佛於一切衆生中獨第一
【문】 3세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 역시 이러한 공덕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부처님 혼자만이 가장 으뜸이라고 하는가?
014_0771_b_17L問曰三世十方諸佛亦有是功德何以故言佛獨第一
【답】 모든 부처님을 제외한 그 밖의 중생들의 세계에서 부처님 혼자만이 가장 으뜸이라고 말한다. 모든 부처님은 평등하고 동일한 공덕을 지니셨다.
014_0771_b_18L除諸佛爲餘衆生故言佛獨第一諸佛第一功德
014_0771_c_01L또 살바야다(薩婆若多)5)라 했는데, 살바(薩婆)는 진나라 말[秦言]로 온갖 것[一切]이라는 말이고, 야(若)는 진나라 말로 지혜[智]라는 말이며, 다(多)는 진나라 말로 모양[相]이라는 말이다. 온갖 것[一切]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이름과 물질[名色] 등의 모든 법이다. 부처님은 이 온갖 법의 동일한 모양[一相]과 다른 모양[異相]과 번뇌의 모양[漏相]과 번뇌가 아닌 모양[非漏相]과 지어진 모양[作相]과 지어지지 않은 모양[非作相] 등 온갖 법의 각각의 모양과 각각의 힘과 각각의 인연과 각각의 과보와 각각의 성품과 각각의 장점과 각각의 단점을 다 아신다.
014_0771_b_20L復次薩婆若多秦言一切秦言智秦言相如先說名色等諸法佛知是一切法一相異相漏相非漏相作相非作相等一切法各各相各各力各各因各各果報各各性各各得各各失
온갖 지혜의 힘 때문에 온갖 세상과 온갖 종류를 모두 두루 아신다. 이 때문에 “도종혜(道種智)로써 일체지(一切智)를 구족하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며, 일체지로써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구족하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14_0771_c_02L一切智慧力故一切世一切種盡遍解知以是故說欲以道種智具足得一切智當習行般若波羅蜜欲以一切智具足一切種智當習行般若波羅蜜
【문】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도를 증득하실 때 도지(道智)로써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두루 갖추게 되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일체지로써 일체종지를 구족하게 된다고 말씀하는 것인가.
014_0771_c_07L問曰如佛得佛道時以道智得具足一切智一切種智今何以言一切智得具足一切種智
【답】 부처님은 도를 증득하실 때 도지로써 비록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구족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일체종지를 쓰지 않으시니, 마치 큰 국왕이 왕위를 얻었을 때에 국토와 보물 창고를 이미 모두 얻었으면서도 다만 아직 열어서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771_c_09L答曰佛得道時以道智雖具足得一切智得具足一切種智而未用一切種智大國王得位時境土寶藏皆已得但未開用
【經】 일체종지로써 번뇌의 습(習)을 끊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하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014_0771_c_13L【經】
欲以一切種智斷煩惱當習行般若波羅蜜舍利弗菩薩摩訶薩應如是學般若波羅蜜
【論】 【문】 한마음 가운데서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얻으며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인데 이제 무엇 때문에 일체지로써 구족하게 일체종지를 얻고 일체종지로써 번뇌의 습기를 끊는다는 것인가?
014_0771_c_15L【論】
一心中得一切智一切種智斷一切煩惱習今云何言以一切智具足得一切種智以一切種智斷煩惱習
【답】 실은 온갖 것을 한꺼번에 얻으셨다. 여기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반야바라밀을 믿게 하기 위하여 차례로 차별되게 말씀하는 것이요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한 마음을 얻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014_0771_c_18L答曰實一切一時得此中爲令人信般若波羅蜜故次第差品說欲令衆生得淸淨心是故如是說
또 비록 한마음 가운데서 얻는다 하더라도 역시 처음과 중간과 나중의 차례가 있는 것이니, 마치 한마음에 세 가지 모양이 있어서 나는 것[生]은 머무르는 것[住]에 인연이 되고 머무는 것은 사라지는 것[滅]에 인연이 되는 것과 같다.
014_0771_c_21L復次雖一心中得亦有初後次第如一心有三相生因緣住住因緣滅
014_0772_a_01L또 마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과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不相應諸行]과 그리고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같아서 도지(道智)로써 일체지를 구족하고, 일체지로써 일체종지를 구족하며, 일체종지로써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771_c_23L又如心數法不相應諸行及身業口業以道智具足一切智以一切智具足一切種智以一切種智斷煩惱習亦如是
먼저 말한 일체종지가 바로 일체지이며, 도지는 금강삼매(金剛三昧)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처음 내시는 마음이 곧 일체지요 일체종지이어서 이때에 번뇌의 습기는 끊어진 것이니, 일체지와 일체종지에 대한 모양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014_0772_a_03L先說一切種智卽是一切智道智名金剛三昧佛初心卽是一切智切種智是時煩惱習斷一切智一切種智先已說
온갖 번뇌의 습기가 끊어졌다고 했는데, 번뇌라는 이름은 간략하게 말하면 3독(毒)이요 자세히 말하면 삼계(三界)의 98사(使)이니, 이것을 번뇌라 한다. 번뇌의 습(習)이라 함은 번뇌의 남은 기운[殘氣]이다. 만일 신업과 구업이 지혜를 따르지 않으면 번뇌로부터 일어난 것과 같게 되며, 다른 이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그 일어나는 것만을 보고서 청정하지 않은 마음을 내게 되나니, 이것은 진실한 번뇌가 아니요 오랫동안 번뇌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러한 업(業)을 일으키는 것이다.
014_0772_a_07L斷一切煩惱習名略說則三毒廣說則三界九十八使是名煩惱煩惱習名煩惱殘氣若身業口業不隨智慧似從煩惱起不知他心者見其所起生不淨心非實煩惱久習煩惱故起如是業
비유하건대 마치 오랫동안 다리에 쇠고랑을 차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풀려나게 되어 걸어갈 때에는 바로 지금은 쇠고랑이 없다 하더라도 아직도 있는 것처럼 걷는 것과 같으며, 마치 유모(乳母)가 오랫동안 옷을 입어서 때가 묻었을 때에 비록 맑은 잿물로 깨끗이 빨아서 때가 없어졌다 하더라고 때의 기운[氣]이 아직도 옷에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성인(聖人)의 마음의 때나 모든 번뇌 같은 것도 비록 지혜의 물로서 깨끗이 씻었다 해도 번뇌의 습기가 남아 있는 것이다.
014_0772_a_12L如久鎖腳人卒得解脫行時雖無有猶有習在如乳母衣久故垢著以淳灰淨浣雖無有垢垢氣猶在衣如聖人心垢如諸煩惱雖以智慧水浣煩惱垢氣猶在
이와 같이 모든 다른 성현도 비록 번뇌는 다 끊었다 하더라도 습기는 끊을 수 없다. 마치 난타(難陀)는 음욕의 습기 때문에 비록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하더라도 남녀의 대중 가운데에 앉으면 눈이 먼저 여인들이 있는 데를 보면서 말도 하고 설법을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사리불은 성을 내는 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사리불은 청정하지 못한 음식을 먹었다”고 한 말씀을 듣고 이내 음식을 토(吐)해 버리면서 다시는 끝내 청을 받지[受請] 않은 것과 같다. 또 사리불은 자신이 게송으로 말했다.
014_0772_a_17L如是諸餘賢聖雖能斷煩惱不能斷習如難陁婬欲習故得阿羅漢道於男女大衆中坐眼先視女衆而與言語說法如舍利弗瞋習故聞佛言舍利弗食不淨食便吐食終不復受請又舍利弗自說偈言
014_0772_b_01L
죄를 덮고 망념(妄念) 있는 사람은
지혜가 없어 게으름을 피우므로
끝내 이런 이들이 망령되어 와서
내게 다가와 머무르게 하고 싶지 않다.
014_0772_a_23L覆罪妄念人
無智而懈怠
終不欲令此
妄來近我住

마하가섭(摩訶迦葉) 같은 이는 성을 내는 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법을 결집(結集)할 때 아난(阿難)으로 하여금 여덟 가지 돌길라죄(突吉羅罪)를 참회하게 하고는 다시 자신이 아난의 손을 끌어 내보내면서 “그대는 번뇌가 아직 다 끊어지지 못한 부정(不淨)한 사람이라 함께 법을 결집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또한 필릉가바차(畢陵迦婆蹉) 같은 이는 항상 항하의 신[恒神]에게 “이 어린 여종아!”라며 욕을 했다.
014_0772_b_02L如摩訶迦葉瞋習故佛滅度後集法勅令阿難六突吉羅懺悔而復自牽阿難手出不共汝漏未盡不淨人集法如畢陵伽婆蹉常罵恒神爲小
마두바사타(摩頭婆私吒) 같은 이는 뛰놀며 장난하는 습기 때문에 때로는 횃대에서 들보로 뛰어오르고 들보에서 선반으로 왔다가 다시 선반에서 누각으로 뛰어다녔다. 또한 교범바제(憍梵鉢提) 같은 이는 소로 있었던 업의 습기 때문에 항상 먹은 것을 새김질 했다.
014_0772_b_07L如摩頭婆和咤跳戲習故或時從衣枷踔上梁從梁至枰從枰至閣憍梵鉢提牛業習故常吐食而齝
이와 같은 모든 성인들도 비록 번뇌가 다했다 하더라도 번뇌의 습기는 남아 있나니, 마치 불이 땔나무를 태운 뒤에 아직도 잿더미 속에 불기운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다 타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겁이 다할 때에 불이 삼천대천세계를 태우게 되면 다시는 남은 것이 없게 됨은 그 불의 힘이 크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일체지의 불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번뇌를 태우고서 다시는 그 남는 습기조차 없다.
014_0772_b_09L如是等諸聖人雖漏盡而有煩惱習如火焚薪已灰炭猶在火力薄故不能令若劫盡時火燒三千大千世界無復遺餘火力大故佛一切智火亦如燒諸煩惱無復殘習
어떤 바라문 같은 이는 5백 가지 나쁜 말로써 대중 가운데서 부처님께 욕설을 퍼부었는데, 부처님께서는 다른 기색이 없고 또한 마음도 달라짐이 없었다. 그래서 바라문은 마음에 감복하여 다시 5백 가지의 말로써 부처님을 찬양했으나 부처님은 역시 기뻐하는 기색도 없고 즐거워하는 마음도 없으셨으니, 이런 비방이나 칭찬에 마음과 안색에 변함이 없었다.
014_0772_b_14L如一婆羅門以五百種惡口衆中罵佛佛無異色亦無異心此婆羅門心伏還以五百種語讚佛佛無喜色亦無悅心於此毀譽心色無變
또 전차(旃遮) 바라문 여인이 물통을 배에 차고는 부처님을 비방했지만 부처님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으셨으며, 그 사정이 모두 탄로된 뒤에도 부처님은 기뻐하는 기색이 없으셨다. 법륜(法輪)을 굴릴 때에 찬미하는 소리가 시방에 가득히 찼는데도 역시 뽐내는 마음도 없으셨고, 손타리(孫陀利)가 죽은 뒤에 나쁜 소문이 널리 퍼졌으나 역시 마음이 주눅들지 않으셨다.
014_0772_b_18L又復旃遮婆羅門女帶杅謗佛佛無慚色事情旣露佛無悅色轉法輪時讚美之聲滿於十方心亦不高孫陁利死惡聲流布心亦不下
014_0772_c_01L아라비(阿羅毘)6)나라는 바람 불고 추우며 납가새가 많았는데, 부처님은 그 안에서 앉고 눕고 하면서도 괴롭다고 여기지 않으셨으며, 또한 천상의 환희원(歡喜園)7) 가운데서 여름 동안 안거(安居)하실 때에 검파석(劍婆石)8)의 부드럽고 청결한 데에 앉아 마치 하늘의 면류관 싸개와 같은데도 역시 즐거운 느낌을 갖지도 않으셨다.
014_0772_b_22L阿羅毘國土風寒又多蒺蔾於中坐臥不以爲苦又在天上歡喜園中夏安居時坐劍婆石柔軟淸潔如天綩綖亦不以爲樂
대천왕(大天王)이 꿇어앉아 하늘의 음식을 바치는데도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고, 비란야국(毘蘭若國)9)에서 말이 먹는 보리[馬麥]를 잡수시면서도 싫다고 하시지 않으셨다.
014_0772_c_02L受大天王跪奉天食不以爲美毘蘭若國食馬麥不以爲惡
모든 큰 나라 왕들이 훌륭한 음식으로 공양할 때에도 얻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고, 살라(薩羅)라는 마을에 들어가 빈 발우로 나오실 때에도 얻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014_0772_c_04L諸大國王供奉上饌不以爲得入薩羅聚落空鉢而出不以爲
제바달다(提婆達多)가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돌을 밀어뜨려 부처님을 해치려 할 때에도 부처님은 역시 미워하지 않았고, 이때에 라후라(羅睺羅)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데도 역시 부처님은 좋아하지 않으셨다.
014_0772_c_06L提婆達多於耆闍崛山推石壓佛佛亦不憎是時羅睺羅敬心讚佛亦不愛
아사세(阿闍世)가 취한 코끼리들을 풀어 놓으면서 부처님을 살해하려 할 때에도 부처님은 역시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미친 코끼리들을 항복 받으시니 왕사성(王舍城)의 사람들이 더욱더 공경하면서 향과 꽃과 영락을 가지고 나와 부처님께 공양을 하였으나 부처님은 역시 기뻐하지 않으셨다.
014_0772_c_08L阿闍貰縱諸醉象欲令害佛佛亦不畏降伏狂象王舍城人益加恭敬持香華纓珞出供養佛佛亦不
96종(種)의 외도들이 어느 한때에 어울려서 의논하기를 “우리들도 역시 모두가 일체지를 지닌 사람들이다”고 하면서 사바제(舍婆提)로부터 와서 부처님과 함께 논의(論議)하려고 했다. 그때 부처님은 신족(神足)으로써 배꼽에서 광명을 놓으시어 그 광명 속에는 모두 변화로 된 부처님들이 계시게 하자 국왕 바사닉(波斯匿)도 역시 그들에게 명하여 그 자리 위로 오게 했지만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는데 하물며 부처님과 논의할 수가 있었겠는가.
014_0772_c_11L九十六種外道一時和合議言等亦皆是一切智人從舍婆提來共佛論議爾時佛以神足從臍放光光中皆有化佛國王波斯匿亦命之令來於其坐上尚不能得動何況能得與佛論議
부처님은 온갖 외도의 도적들이 오는 것을 보아도 마음에 역시 물러남이 없이 이런 외도들을 깨뜨리시며,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이 갑절 더 공경하는데도 마음이 역시 나아가지도 않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들이 와서 부처님을 훼방하려고 해도 부처님은 동요시킬 수가 없었다.
014_0772_c_16L佛見一切外道賊來亦無退破是外道諸天世人倍益恭敬供養心亦不進如是等種種因緣來欲毀佛佛不可動
비유하건대 마치 진짜 염부단금(閻浮檀金)은 불에 태워도 변하지 않고 망치로 때리고 갈고 찍는다 해도 부서지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것처럼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욕설과 비방과 논의를 당한다 해도 동요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모든 번뇌와 습기는 모두가 다하여 남은 것이 없는 줄을 알 수가 있다.
014_0772_c_19L譬如眞閻浮檀火燒不異搥打磨斫不敗不異亦如是經諸毀辱誹謗論議不動不以是故知佛諸煩惱習都盡無餘
【문】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다 같이 무루의 지혜[無漏智]로써 모든 번뇌와 습기를 끊었는데 무엇 때문에 다한 이와 다하지 않은 이가 있다고 하는가?
014_0772_c_22L問曰諸阿羅漢辟支佛同用無漏智斷諸煩惱習何以有盡不盡
014_0773_a_01L【답】 먼저 “지혜의 힘이 엷어 마치 세간의 불과 같고 모든 부처님의 힘은 커서 마치 겁(劫)이 다할 때의 불과 같다”고 이미 설명했지만 이제 다시 대답하겠다.
성문이나 벽지불은 모든 공덕과 지혜를 쌓은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혹은 한 세상이나 두 세상 아니 세 세상이 고작이지만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널리 닦고 널리 익히면서 착한 법을 오래도록 훈습(熏習)했기 때문에 번뇌의 습기에서 다시는 남은 기운이 없다.
014_0773_a_01L答曰已說智慧力薄如世閒火諸佛力大如劫盡火今當更答聲聞辟支佛集諸功德智慧不久或一世二世三世佛智慧功德於無量阿僧祇劫廣修廣習善法久熏故於煩惱習無復餘
또 부처님은 온갖 모든 공덕에 있어서 모두 이미 거두고 다하셨기 때문에 모든 번뇌의 습기까지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착한 법의 공덕으로 모든 번뇌를 녹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아라한은 이 공덕들을 다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세간의 애욕만을 끊고 곧장 열반에 들어갈 뿐이다.
014_0773_a_07L復次佛於一切諸功德皆已攝盡乃至諸煩惱習氣永盡無餘何以諸善法功德消諸煩惱故諸阿羅漢於此功德不盡得故但斷世閒愛直入涅槃
또 부처님은 번뇌[結使]를 끊는 지혜의 힘이 심히 날카롭고 10력(力)으로써 큰 칼을 삼아 막힘이 없는 지혜[無礙智]로써 곧장 지나가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모두 다 끊고 다시는 남은 것이 없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중한 죄가 있으므로 국왕이 그의 7세(世)의 근본까지 다 죽여 버리고 남은 자손이 없게 하는 것처럼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번뇌의 중한 도적을 그 근본까지 뽑아 없애고 남은 것이 없게 하시나니, 이 때문에 “일체종지로써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014_0773_a_11L復次佛斷結使智慧力甚用十力爲大刀以無㝵智直過故斷諸結使盡無復遺餘譬如人有重國王大瞋誅其七世根本令無遺佛亦如是於煩惱重賊誅拔根本令無遺餘以是故說欲以一切種智斷一切煩惱習當習行般若波羅蜜
【문】 다만 습기만을 끊어도 역시 번뇌가 제거되는가?
014_0773_a_17L問曰但斷習亦除煩惱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번뇌가 끊어지면 습기도 함께 다한다”고 했는데, 마치 먼저 습기가 다하여 남은 것이 없다고 설명한 것과 같다.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다만 번뇌만을 끊었을 뿐 습기는 끊지 못했지만 보살은 온갖 번뇌와 습기를 끊고 다하여 남은 것이 없게 한다.
014_0773_a_18L答曰有人言斷煩惱及習俱盡如先說習盡無餘阿羅漢辟支佛但斷煩惱不能斷習菩薩斷一切煩惱及習令盡無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오래전에 이미 욕망을 멀리 여의셨다. 마치 부처님께서 ‘나는 정광불(定光佛)을 뵙게 된 이후부터 이미 욕망을 여의었으나 방편의 힘 때문에 나고 죽으면서 처자와 권속이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014_0773_a_21L人言佛久已遠欲如佛說我見定光佛已來已離欲以方便力故現有生妻子眷屬
014_0773_b_01L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후부터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기 때문에 온갖 번뇌와 습기가 다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처음 마음을 내실 때부터 번뇌는 있었고 도량(道場)에 가 앉으신 뒤에 새벽이 되어서야 온갖 번뇌와 습기를 끊으셨다”고 한다.
014_0773_b_01L有人言從得無生法忍得諸法實相故一切煩惱及習盡有人言佛從初發意來有煩惱至坐道場於後夜時斷一切煩惱及習
【문】 이와 같은 갖가지 설은 어느 것이 진실인가?
014_0773_b_04L如是種種說何者爲實
【답】 이것은 모두 부처님 입으로 하신 말씀이라 진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성문의 법 가운데서는 부처님께서 방편의 힘을 쓰시기 때문에 실제로 인법(人法)을 받아서 나고 늙고 병들고 춥고 덥고 배고프고 목마름 등이 있으시다. 사람으로서 나서 번뇌가 없는 이는 없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도 사람의 법을 따르면서 번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014_0773_b_05L答曰皆是佛口所說故無有不實聲聞法中以方便力故現受人法有生老病飢渴等無人生而無煩惱者是故佛亦應隨人法有煩惱
나무 왕[樹王] 아래서 밖으로는 먼저 악마와 군사를 깨뜨리고 안으로는 번뇌의 도적을 없애서 밖과 안의 도적을 깨뜨렸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나니, 사람들이 모두 믿고 받아들여 “이 사람은 이런 일을 하셨으니, 우리들도 역시 이런 일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할 것이다.
014_0773_b_09L於樹王下先破魔軍內滅結使賊破外內賊故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人皆信受是人能爲是事我等亦當學習是事
만일 “오래전부터 번뇌가 없었다”고 하고, 또 “연등부처님[然燈佛]으로부터 무생법인을 얻은 이후로는 번뇌를 끊어 다하셨다”고 한다면 이것도 역시 방편의 말씀이니, 모든 보살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보살로서 오래전에 이미 온갖 번뇌를 끊었다면 성불하실 때에는 또 어떤 일을 하셨겠는가.
014_0773_b_12L若言夂來無煩惱從然燈佛得無生法忍來斷煩惱盡是亦方便說令諸菩薩歡喜故若菩薩夂已斷一切煩惱成佛時復何所爲
【문】 부처님께는 갖가지의 일이 있는데 번뇌를 끊는 것도 한 가지의 일이다. 그 밖에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하게 하는 일 등이 있지만 아직 갖추지 못하셨고, 많은 일들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한다.
014_0773_b_16L問曰佛有種種事斷結使是一事餘有淨佛國土成就衆生等未具以具足衆事故名爲佛
【답】 그렇다면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번뇌를 끊은 것은 바로 맨 마지막의 몸[末後身]이다”고 하셨다. 사람으로서 만일 도무지 번뇌가 없었다면 어떻게 생(生)을 얻었겠는가.
014_0773_b_18L答曰若爾者佛言斷結使是末後身人若都無結使云何得生
【문】 무생법인을 얻은 이후부터는 항상 법성생신(法性生身)을 얻으면서 변화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014_0773_b_20L問曰從得無生法忍已來常得法性生身變化
014_0773_c_01L【답】 변화로 된 법에는 반드시 변화하는 주인[化生]이 있어야 하며 그런 뒤에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무생법인을 얻고 온갖 번뇌를 끊었었다면 죽을 때 이 육신(肉身)을 버리고 진실한 몸이 없었을 터인데 그 누가 변화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무생법인을 얻은 이후에도 번뇌가 다해서는 안 된다 함을 알 수 있다.
014_0773_b_22L答曰化法要有化主然後能化得無生法忍斷一切結使死時捨是肉身無有實身誰爲變化以是故知得無生已來不應盡結使
또 성문의 사람이 말하기를 “보살은 번뇌가 끊어지지 않았고 도량에 가 앉으신 연후에야 끊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큰 착오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의 법 가운데서 “보살은 이미 3아승기의 겁을 다 채웠고 뒤에 다시 백 겁 동안 있으면서 항상 숙명지(宿命智)를 얻었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기억하건대, 가섭불(迦葉佛) 때 울다라(鬱多羅)라는 비구가 되어 부처님이 법을 수행했는데 어찌하여 이제 6년 동안 고행으로 삿된 도법(道法)을 수행하면서 하루에 깨 한 알과 쌀 한 톨을 먹는다는 말인가. 마지막 몸의 보살은 하루조차도 오히려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6년 동안이겠는가.
014_0773_c_02L復次聲聞人言菩薩不斷結使乃至坐道場然後斷是爲大錯何以故汝法中說薩已滿三阿僧祇劫後更有百劫中常得宿命智自憶迦葉佛時作比丘名鬱多羅修行佛法云何今六年苦修邪道法日食一麻一米後身菩薩一日尚不應謬何況六年
성내는 일도 또한 그와 같다. 오래전의 먼 세상에 독사로 있을 때 사냥꾼이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는데도 오히려 성을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맨 마지막의 몸이면서 다섯 사람에게 성을 내었겠는가. 그러므로 성문의 사람들이 부처님의 뜻을 잘못 받아들인 줄 알 것이다.
014_0773_c_09L瞋亦如從久遠世時作毒蛇獵者生剝其猶尚不瞋云何最後身而瞋五人以是故知聲聞人受佛義爲錯
부처님은 방편의 힘으로써 외도들을 깨뜨리려고 6년 동안의 고행을 나타낸 것이다. 그대가 말한 “다섯 사람에게 성을 내었다”는 것도 이것은 방편으로 역시 성을 내는 습기이지 번뇌는 아니다.
014_0773_c_12L佛以方便力欲破外道故現六年苦行言瞋五人者是爲方便亦是瞋習煩惱也
이제 사실대로 말해 주겠다.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으면서 번뇌는 이미 다했지만 습기는 아직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에 습기로 인하여 법성생신을 받아 자유자재로 화생(化生)하였고, 큰 자비로 중생들을 위하여 또한 본래의 서원[本願]을 완성하기 위하여 도로 세간으로 오셨으며, 남은 부처님의 법을 구족하고 성취하기 위하여 10지(地)가 원만하면서 도량에 앉아 무애해탈(無礙解脫)의 힘으로써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얻고는 번뇌의 습기를 끊으신 것이다.
014_0773_c_15L今當如實說菩薩得無生法煩惱已盡習氣未除故因習氣受及法性生身能自在化生有大慈悲爲衆生故亦爲滿本願故還來世閒具足成就餘殘佛法故十地滿坐道場以無礙解脫力故得一切智一切種斷煩惱習
014_0774_a_01L마하연(摩訶衍)의 사람이 말하기를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은 온갖 번뇌와 습기가 모두 다한다”고 하나, 이것 역시 잘못이다. 만일 모두 다하여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면 역시 법성생신을 받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고서도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生身]을 버리고 법성생신을 얻은 것이다.
014_0773_c_21L摩訶衍人言得無生法忍菩薩一切煩惱及習都盡亦是錯若都盡與佛無異亦不應受法性生以是故菩薩得無生法忍捨生身得法性生身
만일 “도량에 앉기에 이르러 온갖 번뇌와 습기가 함께 다했다”고 하면 이 말도 역시 잘못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3독(毒)이 있었다면 어떻게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독이 든 병에 비록 감로(甘露)를 넣는다 하더라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은 모든 순수하고 청정한 공덕을 쌓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3독이 섞였다면 어떻게 청정한 부처님 법을 갖출 수 있겠는가.
014_0774_a_02L若言至坐道場一切煩惱及習俱斷是語亦非所以者何若菩薩具有三毒者云何能集無量佛法譬如毒甁雖著甘露皆不中食菩薩集諸純淨功德乃得作佛若雜三毒云何能具足淸淨佛法
【문】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았기 때문에 3독을 엷게 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청정한 공덕을 쌓으실 수 있었다.
014_0774_a_07L問曰觀諸法實相及修悲心故能令三毒薄故能集淸淨功德
【답】 3독이 엷으면 전륜성왕과 모든 천왕(天王)의 몸은 얻을 수 있지만 부처님 공덕의 몸을 얻고자 하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3독이 끊어지고 습기가 아직 다하지 못했으면 모든 공덕을 쌓을 수 있다.
014_0774_a_09L答曰薄三毒可得轉輪聖諸天王身欲得佛功德身無有是三毒斷習未盡可得集諸功德
또 엷다 하면 마치 욕망을 여읜 사람[離欲人]이 아래 경지[下地]의 번뇌를 끊었으나 아직 높은 경지[上地]의 번뇌는 남아있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수다원(須陀洹)이 견제(見諦)에서 끊어야 할 번뇌를 다하고 사유(思惟)에서 끊어야 할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한 것과 같음을 바로 ‘엷다’라고 한다.
014_0774_a_11L名如離欲人斷下地結猶有上地煩惱又如須陁洹見諦所斷結盡思惟所斷未盡是名爲
마치 부처님께서 “3결(結)을 끊고 음욕[婬]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이 엷어지면 사다함(斯陀含)이라고 한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그대가 만일 “엷어지면 마땅히 이것은 끊어져야 하나니, 그 때문에 무생법인을 얻은 때에 번뇌가 끊어졌고 부처님이 되셨을 때에 번뇌의 습기가 끊어진다” 한다면 이것은 곧 진실한 설명이 될 것이다.
014_0774_a_14L如佛說三結薄婬怒癡名爲斯陁含汝若言應當是斷以是故得無生法忍時斷煩惱得佛時斷煩惱習是則實說
【經】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지위[菩薩位]에 오르려고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014_0774_a_17L【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欲上菩薩當學般若波羅蜜
【論】 보살의 지위라 함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이 바로 그것이다. 이 법인을 얻으면 온갖 세간이 공임을 관하면서 마음에 집착함이 없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머무르면서 다시는 세간에 물들지 않는다.
014_0774_a_19L【論】
菩薩位無生法忍是得此法忍觀一切世閒空無所著住諸法實相中不復染世閒
014_0774_b_01L또 반주반삼매(般舟般三昧)가 바로 보살의 지위이니, 이 반주반삼매를 얻으면 현재 계신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모두 뵙게 되고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는 모든 의심의 그물이 끊어지게 된다. 이때에 보살의 마음은 동요되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보살의 지위라 한다.
014_0774_a_21L復次般舟般三昧是菩薩位得是般舟般三昧悉見現在十方諸佛從諸佛聞法斷諸疑網是時菩薩心不動是名菩薩位
또 보살의 지위라 함은 6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방편의 지혜[方便智]를 내며, 모든 법의 실상에서도 역시 머무르지 않으면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증득하여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도 않아서 설령 악마가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와도 마음은 역시 미혹되지 않는다.
014_0774_b_02L復次菩薩位者具足六波羅蜜生方便智於諸法實相亦不住自知自證不隨他語若魔作佛形來心亦不惑
또 보살로서의 법과 지위의 힘에 들어가기 때문에 아비발치보살(阿鞞跋致菩薩)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014_0774_b_05L復次入菩薩法位力得名阿鞞跋致菩薩
또 보살마하살이 이 법위(法位)에 들어가면 다시는 범부의 범주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도를 얻은 사람[得道人]이라고 한다. 온갖 세간의 일이 그의 마음을 파괴하려 하여도 동요하게 할 수 없으며, 3악취(惡趣)의 문을 닫고 모든 보살의 범주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보살의 집에 태어나고 지혜가 청정하게 성숙한다.
014_0774_b_06L復次菩薩摩訶薩入是法位中不復墮凡夫數爲得道人一切世閒事欲壞其心能令動閉三惡趣門墮諸菩薩數中初生菩薩家智慧淸淨成熟
또 꼭대기[頂]에 머무르면서 떨어지지 않으므로 이것을 보살의 법위[菩薩法位]라 한다. 마치 학품(學品)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상위(上位)보살은 악취에 떨어지지도 않고 하천한 집에 태어나지도 않으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도 않고 또한 꼭대기에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014_0774_b_10L復次頂不墮是名菩薩法位如「學品中」說上位菩薩不墮惡趣不生下賤家墮聲聞辟支佛地亦不從頂墮
【문】 무엇을 꼭대기에서 떨어진다[頂墮] 하는가?
014_0774_b_13L問曰云何爲頂墮
【답】 마치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기를 “만일 보살마하살이 방편의 마음이 없이 6바라밀을 행하면 공하고 모양 없고[無相] 지음 없는[無作] 가운데에 들어간다 해도 보살의 지위에 오를 수 없으며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공덕의 법에 애착하고 5중(衆)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에도 모양을 취하고 마음에 집착하면서 “이것은 도(道)요 이것은 도가 아니며 이것은 행해야 하고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모양을 취하고 분별하면 이것이 곧 보살이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014_0774_b_14L答曰如須菩提語舍利若菩薩摩訶薩無方便心行六波羅蜜入空無相無作中不能上菩薩亦不墮聲聞辟支佛地愛著諸功德於五衆無常無我取相心著言是道是非道是應行是不應行是等取相分別是菩薩頂墮
그렇다면, 무엇이 꼭대기에 머무르는[住頂] 것인가? 곧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법에 대한 애착이 끊어지고 애착이 끊어진 법에 대하여 또한 취하지도 않는 것이니, 주정의(住頂義)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14_0774_b_20L何等是住頂如上所說諸法愛斷於愛斷法亦復不取如「住頂義」中說
014_0774_c_01L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때에는 내공(內空)에서는 외공(外空)을 보지 못하고 외공에서는 내공을 보지 못하며, 외공에서는 내외공(內外空)을 보지 못하고 내외공에서는 외공을 보지 못한다. 나아가 없는 법과 있는 법의 공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774_b_22L若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內空中不見外空外空中不見內空外空中不見內外空內外空中不見外空乃至無法有法空亦如是
또 상위의 보살은 등등함이 없는[無等等] 마음을 얻는데도 역시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고 마음의 모양이 진실로 공임을 알면서 모든 있고 없는 등의 쓸모없는 다른 논리가 소멸된다.
014_0774_c_03L復次上位菩薩得無等等心亦不自高知心相眞空有無等戲論滅
【문】 무엇 때문에 성문의 법에서는 바른 지위[正位]라 하고, 이 보살의 법에서는 다만 지위[位]라고 하는가?
014_0774_c_05L問曰何以故聲聞法中名爲正位此菩薩法中位但名
【답】 설령 바른 지위라 해도 역시 허물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보살의 법에서 말하면 지위 그것이 곧 바른[正] 것이기 때문이다. 성문의 법에서는 다만 지위를 말하면서 성문의 지위[聲聞位]라고 말하지 않을 뿐이니, 이 때문에 바른 지위라고 말한다.
014_0774_c_06L答曰若言正位亦無咎所以者何菩薩法位是則爲正聲聞法中但不言聲聞位以是故言正位
또 성문을 배우는 사람은 큰 자비의 마음이 없고 지혜가 날카롭지 않기 때문에 싫증내는 마음을 내지 못하고 모든 법을 많이 구하면서 갖가지 삿된 소견과 의심을 내지만, 보살마하살은 온갖 것을 크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중생들의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모두 제도하려 하면서 갖가지 의론을 구하거나 분별하지 않는다.
014_0774_c_09L學聲聞人無大慈悲心智慧不利故未生厭心多求諸法生種種邪見疑菩薩摩訶薩大慈愍一切故多求度脫衆生老病死苦不求分別種種戲論
비유하건대 마치 장자가 외아들을 몹시 애지중지하는데 그 아들이 병이 들면 다만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좋은 약만을 구할 뿐이요 그 약의 이름이나 그 약을 취한 시절이나 지어진 분량이나 숫자를 따져 분별하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774_c_14L譬如長者有一子愛之甚重子得病但求良藥能差病者不求分別諸藥名字取之時節合和分數
그러므로 모든 보살은 결과[果]를 좇아 12인연(因緣)을 관하지 원인[因]을 좇아 관하지는 않는다. 소견이 많은 이는 원인을 좇아 관찰하고, 애착이 많은 이는 결과를 좇아 관찰한다. 모든 성문의 사람은 인(因)이 곧 지위이기 때문에 바른 지위가 있지만 보살은 삿된 지위[邪位]가 엷기 때문에 다만 보살의 지위라고만 한다.
014_0774_c_16L是故諸菩薩從果觀十二因緣不從因觀見多者從因觀愛多者從果觀諸聲聞人因邪位故有正位菩薩邪位薄故但名菩薩位
【문】 성문의 법 중에서는 고법인(苦法忍)에서 도비인(道比忍)까지를 바른 지위라 한다. 경에서 말씀하시듯이, 3악도(惡道) 중에서는 세 가지의 일, 즉 바른 지위[正位]와 성인의 과위[聖果]와 번뇌가 다함[漏盡]을 얻을 수 없으며, 파계(破戒)와 삿된 소견과 5역죄(逆罪) 등도 역시 그와 같다. 어느 법을 얻게 되기에 보살의 지위라 하는가?
014_0774_c_20L問曰聲聞法中從苦法忍乃至道比忍名爲正位『經』中說三惡道中不可得三事所謂正位聖果漏盡破戒邪見五逆罪等亦如是從得何法名爲菩薩位
014_0775_a_01L【답】 발의(發意)와 수행(修行)과 대비(大悲)와 방편(方便)이 두루 갖추어지고 이 네 가지 법을 행하면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된다. 마치 성문의 법 중에서 먼저 네 가지의 선근인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을 자세히 말한 연후에야 고법인(苦法忍)의 바른 지위에 든다는 것과 같다.
014_0775_a_01L答曰發意修行大悲方便具足行是四法得入菩薩位如聲聞法中先具四種善根煖法頂法忍法世閒第一法後入苦法忍正位
【문】 수행은 모두 네 가지 법을 포섭하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차별하면서 네 가지로 삼는가?
014_0775_a_05L問曰修行皆攝四何以故差別爲四
【답】 처음 뜻을 일으키어[發意] 비록 수행한다 하더라도 오래 닦지 않기 때문에 수행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마치 집에 있는 이가 비록 종일토록 집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갔다고[行] 하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775_a_06L答曰初發意雖有修行不久修故不名修行如在家雖終日不住不名爲行
또 뜻을 일으키는 때에는 다만 뜻에서 원함이 있을 뿐이며, 행할 때에는 조작(造作)하고 재물을 남에게 주고 금계(禁戒)를 받아 지니는 등 이와 같이 6바라밀을 행하므로 이것을 수행이라 한다.
014_0775_a_08L復次發意時但有意願行時造作以財與人受持禁戒如是等行六波羅蜜是名修行
수행한 뒤에는 반야바라밀로써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고 대비(大悲)의 마음으로써 중생을 가엾이 여기게 되지만, 이 모든 법의 실상을 알지 못하면 세간의 거짓된 법에 물들어 집착하고 갖가지 몸의 괴로움[身苦]과 마음의 괴로움[心苦]을 받는다. 이것은 다시 대비라는 이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수행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014_0775_a_10L修行已以般若波羅蜜知諸法實相以大悲心愍念衆生不知是諸法實染著世閒虛誑法受種種身苦是更受大悲名故不名修行
방편이라 했는데,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기 때문에 모든 법의 공함을 알고, 대비의 마음 때문에 중생을 가엾이 여기나니, 이 두 가지 법에 대하여 방편의 힘으로써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비록 모든 법이 공임을 안다 하더라도 방편의 힘 때문에 역시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비록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모든 법이 진실로 공임을 안다.
014_0775_a_14L方便具足般若波羅蜜故知諸法空悲心故憐愍衆生於是二法以方便力不生染著雖知諸法空方便力故亦不捨衆生雖不捨衆生亦知諸法實空
만일 이 두 가지 일에 대하여 평등하면 곧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나니, 마치 성문의 사람이 선정과 지혜의 두 가지 법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이때 곧 바른 지위에 들게 되는 것과 같다.
014_0775_a_19L若於是二事等卽得入菩薩位如聲聞人於定慧二法等故是時卽得入正位
이 법에 비록 행함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그 밖의 다른 이름이 있으면 수행이라고 하지 않지만,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도량에 가 앉기까지 그 중간에 행한 것은 모두 수행이라 한다. 소소한 차별에 다름은 있지만 명자(名字)를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014_0775_a_21L是法雖有行更有餘名字不名修行從初發意乃至坐道場其中閒所行皆名修行小小差別異名字爲易解故
014_0775_b_01L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처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일으켜 온갖 중생의 늙고 병들고 죽는 등의 몸과 마음의 모든 고통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큰 서원을 세우며, 공덕(功德)과 혜명(慧明)의 두 가지 일을 장엄하는 인연 때문에 소원이 모두 만족하게 되는 것과 같다.
014_0775_b_01L譬如有人初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意欲度脫一切衆生老病死等身心諸苦作大誓莊嚴功德慧明二事因緣故所願皆滿
이 두 가지 일에는 여섯 갈래의 수행이 있나니, 곧 6바라밀이다.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인욕(忍辱)은 공덕의 갈래이고, 정진(精進)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는 바로 혜명의 갈래이다. 6바라밀다를 수행하여 이 모든 법의 모양은 심히 깊고 미묘하여 이해하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각하기를 “중생은 삼계(三界)의 모든 법에 집착하고 있으니, 어떤 인연을 써서 중생으로 하여금 이 모든 법의 모양을 알게 할까. 마땅히 모든 공덕을 두루 갖춤으로써 청정한 지혜를 성취해야겠다”고 한다.
014_0775_b_04L二事有六分修行名爲六波羅蜜持戒忍辱是功德分精進禪定慧是慧明分修行六波羅蜜知是諸法相甚深微妙難解難知作是念生著三界諸法以何因緣令衆生得是諸法相當以具足諸功德淸淨智
부처님 몸은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로 광명이 두루 갖추고 신통이 한량없으며,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18불공법(不共法)과 4무애지(無礙智)로써 제도해야 할 이를 관찰하면서 설법하고 교화하신다.
014_0775_b_11L成就佛身三十二相八十隨形好光明具足神通無量以十力四無所十八不共法四無礙智觀應可度者說法開化
비유하건대 마치 금시조왕(金翅鳥王)이 목숨이 끝나는 용을 두루 관찰한 뒤에 날개로 바다를 쳐서 물이 열리게 하고 잡아먹는 것처럼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불안(佛眼)으로써 시방세계의 5도(道) 중생으로서 누가 제도될 수 있는지를 관찰하신 뒤에 처음에는 신족(神足)을 나타내고 다음에는 그를 위하여 그 마음의 나아갈 데를 보여주신다.
014_0775_b_14L譬如金翅鳥王普觀諸龍應盡者以翅摶海令水兩闢取而食佛亦如是以佛眼觀十方世界五道衆生誰應得度初現神足次爲示其心趣
이 두 가지 일로써 세 가지 장애[三障礙]를 제거하면서 그를 위하여 설법하며 삼계의 중생들을 구제하시니, 부처님의 힘과 한량없는 신통을 얻게 되는 것이 가령 허망하다 하여도 오히려 믿어야 하는데 하물며 진실한 말씀이겠는가. 이것을 방편이라 한다.
014_0775_b_18L以此二事除三障礙而爲說拔三界衆生得佛力無量神通令虛妄猶尚可信何況實說是名便
014_0775_c_01L또 보살은 반야바라밀로써 모든 법의 모양을 알고 그 본래의 서원을 생각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생각하기를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서는 중생을 얻을 수 없으니 어떻게 제도해야 될까”라고 하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모든 법의 실상에서 중생을 비록 얻을 수 없다 하더라도 중생들은 이 모든 법의 모양을 모르기 때문에 이 실상을 알게 하려 한다”고 한다.
014_0775_b_21L復次菩薩以般若波羅蜜知諸法念其本願欲度衆生作是思惟法實相中衆生不可得當云何度作是念諸法實相中衆生雖不可得而衆生不知是諸法相故欲令知是實相
또 이 진실한 법의 모양은 역시 중생을 장애하지 않나니, 진실한 법의 모양이라 함은 없애거나 무너뜨릴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며 또한 지울 것도 없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바로 방편이라 한다.
이 네 가지 법을 완전히 갖추면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된다.
014_0775_c_03L復次是實法相亦不礙衆生法相者名爲無所除壞亦無所作方便具足是四法得入菩薩位
【經】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阿鞞跋致地]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014_0775_c_05L【經】
欲過聲聞辟支佛地住阿鞞跋致地當學般若波羅蜜
【論】 【문】 보살이 법위(法位)에 들어갈 적에 곧 이미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말씀하시는 것인가?
014_0775_c_07L【論】
問曰菩薩入法位卽已過聲聞辟支佛地住阿鞞跋致地何以故復說
【답】 비록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다 이룬다 할지라도 모든 법을 저마다 상응하게 차례로 칭찬해야 한다. 마치 한마음 가운데서 한꺼번에 무루(無漏)의 5근(根)을 얻으면서도 저마다 그 모양을 분별하면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4_0775_c_09L答曰雖三事一時諸法各各相應當次第讚如一心中一時得無漏五根而各各分別說其
보살이 법위에 들 때에는 약간의 번뇌[結使]를 끊고 약간의 공덕을 얻으면서 이 지위를 지나서 이 지위에 머문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시고 또한 모든 보살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갖가지로 찬탄하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014_0775_c_12L菩薩入法位時斷若干結使得若干功德過是地住是地唯佛能知欲引導諸菩薩故佛種種讚說
마치 이 경의 첫머리에서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서 5천의 비구들과 함께 계셨으니, 그들은 모두 아라한이어서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고 할 일을 다 마쳤다”고 하는 것 등과 같다. 아라한이란 곧 번뇌가 다한 이[漏盡]이다. 번뇌가 다했다[漏盡] 함은 바로 그것이 할 일을 다 마친[所作巳辦] 것이지만 역시 그 밖의 사람들을 인도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아무런 허물이 없다.
014_0775_c_14L如此經始佛在耆闍崛山與五千比丘俱皆是阿羅漢諸漏已盡所作已辦等羅漢卽是漏盡漏盡者卽是所作已辦等亦爲引導餘人令心淸淨故種讚說無咎
이것 역시 그와 같아서 법위에 드는 것이 곧 아라한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는 것이다. 또 이 법위에 들므로 인하여 아라한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014_0775_c_19L此亦如是入法位卽是過阿羅漢辟支佛地住阿鞞跋致地復次因入法位故得過阿羅漢辟支佛地住阿鞞跋致地
014_0776_a_01L【문】 법위에 들어가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초월하며, 나아가 모든 번뇌를 끊고 3악도(惡道)를 깨뜨린다는 등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만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 역시 갖가지 공덕에 머무른다 하며, 무엇 때문에 다만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른다고만 말하는가?
014_0775_c_22L問曰入法位中過老病死及斷諸結使破三惡道等如先說何以但說過聲聞辟支佛地亦住種種功德何以故但說住阿鞞跋致地
【답】 모든 나쁜 일을 버리면 모든 공덕을 얻게 된다. 머물게 될 공덕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례로 설명하겠지만, 모든 법은 모름지기 차례를 거쳐야 하고 한꺼번에 단번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014_0776_a_03L答曰捨諸惡事得諸功德當次第說及所住功德諸法當須次不可一時頓說
또 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킬 때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보다 더한 것이 없다. 정작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이보다 더한 두려움은 없으니, 대승(大乘)을 영원히 파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이 대승을 영영 소멸시키는 것이다.
014_0776_a_05L復次菩薩初發意所可怖畏無過聲聞辟支佛地使墮地獄無如是怖畏不永破大乘道故阿羅漢辟支佛於此大乘以爲永滅
비유하건대 마치 넓은 빈 땅에 사마리(舍摩梨)라는 나무가 있었다. 높고 뾰족한 나뭇가지들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여러 새들이 모여서 잠을 잤다. 마침 비둘기 한 마리가 뒤에 이 나뭇가지 위에 와서 앉았는데 그 나뭇가지가 이내 휘청하면서 부러져 버렸다. 그러자 택신(澤神)이 그 나무신에게 묻기를 “큰 새나 수리는 모두 견뎌내면서 어찌하여 작은 새인데도 이겨 내지 못하시오”라고 했다.
014_0776_a_09L譬如空地有樹名舍摩梨觚枝廣大衆鳥集宿一鴿後至住一枝上其枝及觚卽時壓折澤神問樹神鳥雕鷲皆能任持何至小鳥便不自
수신이 대답하기를 “이 새는 나의 원수인 니구로나무[尼俱盧樹] 위에서 왔습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다가 와서 나의 나뭇가지에 앉게 되면 틀림없이 똥을 쌀테고 그 씨가 땅에 떨어지면 그 나쁜 나무가 다시 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해로움은 아주 클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한 비둘기를 몹시 두려워한 것이니, 차라리 나뭇가지 하나를 버리고 온전함을 도모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고 한 것과 같다.
014_0776_a_13L樹神答言此鳥從我怨家尼俱盧樹上來食彼樹果來拪我上必當放子墮地者惡樹復生爲害必大是故於此一鴿大懷憂畏寧捨一枝所全者大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모든 외도나 악마와 그리고 번뇌와 악업이라도 아라한이나 벽지불만큼은 두렵지가 않다. 왜냐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은 보살 곁에 있으면서 마치 저 비둘기처럼 대승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영원히 부처님의 업을 멸망시키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다만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라고 말할 뿐이다.
014_0776_a_17L菩薩摩訶薩亦如是於諸外道魔衆及諸結使惡業無如是畏如阿羅漢辟支佛何以故聲聞辟支佛於菩薩邊亦如彼鴿壞敗大乘心永滅佛業以是故但說過聲聞辟支佛地
014_0776_b_01L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른다고 함은,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항상 아비발치의 지위를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모든 보살들이 물러나는 일이 많다 함을 들었기 때문에 뜻을 낼 때에 원을 세우되 “언제나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리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른다”고 한다.
014_0776_a_22L住阿鞞跋致地從初發意已常喜樂住阿鞞跋致地聞諸菩薩多退轉故發意時作願何時當得過聲聞辟支佛地住阿鞞跋致地以是故說住阿鞞跋致地
【문】 어떤 것이 아비발치의 지위인가?
014_0776_b_03L問曰何等是阿鞞跋致地
【답】 보살은 온갖 법은 나지도 않고[不生] 멸하지도 않으며[不滅],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공통하지도 않고 공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하여 삼계(三界)를 벗어나면서도 공으로써 하지도 않고 공이 아닌 것으로써도 하지 않는다.
014_0776_b_04L答曰若菩薩能觀一切法不生不滅不不生不不滅不共非不如是觀諸法於三界得脫不以空不以非空
일심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쓰신 실상(實相)의 지혜를 믿고 알면 파괴할 수 있는 이도 없고 움직일 수 있는 이도 없나니 이것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하는데, 이 무생법인이 곧 아비발치의 지위이다.
014_0776_b_07L一心信忍十方諸佛所用實相智慧無能壞無能動者是名無生忍法無生忍法卽是阿鞞跋致地
또 보살의 지위에 드는 것이 바로 아비발치의 지위이며,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면 역시 아비발치의 지위라 한다.
014_0776_b_09L復次入菩薩位,是阿鞞跋致地過聲辟支佛地亦名阿鞞跋致地
또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면 세상마다 항상 과보(果報)를 얻고 신통을 잃지 않으며 물러나지도 않는다. 만일 보살이 이 두 가지 법을 얻으면 비록 모든 법의 실상을 얻는다 하더라도 대비(大悲)로써 온갖 중생들을 버리지 않는다.
014_0776_b_11L復次阿鞞跋致地世世常得果報神通,不失不退若菩薩得此二法雖得諸法實相而以大悲不捨一切衆生
또 두 가지 법이 있나니, 첫째는 청정한 지혜이고, 둘째는 방편의 지혜이다. 다시 두 가지의 법이 있나니, 첫째는 깊은 마음으로 열반을 염(念)하는 것이고, 둘째는 일을 하되 세간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용이 꼬리를 큰 바다에다 두고 머리는 허공에다 두면서 우레와 번개를 치며 큰 비를 내리게 하는 것과 같다.
014_0776_b_14L復有二法一者淸淨智慧二者方便慧有二法一者深心念涅槃二者所作不離世閒譬如大龍尾在大海頭在虛空震電雷霆而降大雨
또 아비발치보살은 이 모든 법의 실상의 지혜를 증득하여 세상마다 잃지 않고 끝내 잠시도 여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의 깊은 경전에 끝내 의심을 내지도 않고 또한 방해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온갖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요 어느 방편이나 어떤 인연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이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014_0776_b_18L復次阿鞞跋致菩薩得是諸法實相智慧世世不失終不蹔離於諸佛深經終不疑亦不作礙何以故我未得一切智慧不知何方便何因緣故如是說
아비발치보살은 항상 깊은 마음으로써 끝내 악(惡)을 내지 않으며, 아비발치보살은 깊은 마음으로써 모든 선행(善行)을 쌓고 얕은 마음[淺心]으로써 여러 착하지 않은 일을 짓는다.
014_0776_b_22L鞞跋致菩薩常以深心終不生惡鞞跋致以深心集諸善淺心作諸不
014_0776_c_01L【문】 만일 아비발치의 모양이라면 무생법인을 얻었는데 어찌하여 얕은 마음으로써 여러 착하지 않은 일을 짓는다고 하는가?
014_0776_c_02L問曰若阿鞞跋致相,得無生法忍云何以淺心作諸不善
【답】 두 가지의 아비발치가 있다. 첫째는 무생법인을 얻은 이이고, 둘째는 비록 아직 무생법인은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그의 과거와 미래에 짓는 바의 인연을 알고 반드시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므로 주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를 위하여 수기(授記)하신 이이다. 이 보살은 나고 죽는 육신(肉身)과 번뇌는 아직 끊지 못했다 하더라도 모든 범부 가운데서는 가장 으뜸이므로 그도 역시 아비발치의 모양이라 한다.
014_0776_c_03L答曰有二種阿鞞跋致一者得無生忍法二者未得無生忍法佛知其過去未來所作因緣必得作佛爲利益傍人故其授記是菩薩生死肉身,結使未斷於諸凡夫中爲最第一,是亦名阿鞞跋致相
만일 무생법인을 얻었다면 모든 번뇌를 끊었으므로 이야말로 청정하여서 마지막의 육신도 다하고 법성생신(法性生身)을 얻게 되며 번뇌에 방해 받지도 않고 가르치거나 훈계할 필요도 없나니, 마치 큰 항하(恒河)에 떠 있는 배는 끌어갈 필요도 없이 저절로 큰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014_0776_c_09L若得無生忍法斷諸結使則淸淨末後肉身盡得法性生身使所不礙,不須教誡如大恒河中船須將御自至大海
또 어떤 이는 처음 뜻을 일으킬 때에 큰 마음[大心]을 내면서 모든 번뇌를 끊고 모든 법의 실상을 알면서 곧 아비발치를 얻기도 하며, 어떤 이는 다만 단(檀)바라밀만을 행하면서 곧 6바라밀을 두루 갖추기도 하나니, 나아가 반야(般若)바라밀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776_c_12L復次有初發意生大心斷諸煩惱知諸法實相便得阿鞞跋致有但行檀波羅蜜便具足六波羅蜜,乃至般若波羅蜜亦如是
어떤 이는 6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아직 아비발치를 얻지 못하다가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는 순간에 곧 아비발치를 얻기도 한다.
014_0776_c_15L行六波羅蜜未得阿鞞跋致於衆生中生大悲心是時便得阿鞞跋致
또 어떤 이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만일 모든 법이 모두 공하다면 중생이 없으므로 누가 제도될 수 있을 것인가” 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미약해 지기도 하며 때로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도 모든 법이 공하다는 관[空觀]에 있어서는 약해지기도 한다.
014_0776_c_17L得悲心而作是念若諸法皆空則無衆生誰可度者是時悲心便弱或時以衆生可愍於諸法空觀弱
014_0777_a_01L만일 방편의 힘을 얻게 되면 이 두 가지 법이 평등하여 치우침이 없을 것이므로 대비의 마음도 모든 법의 실상에 방해될 것이 없고 모든 법의 실상을 얻는 데서도 대비에 방해될 것이 없다. 이와 같은 방편을 내면 이때에 곧 보살의 법위에 들게 되며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른다. 마치 「왕생품(往生品)」10)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아비발치의 모양에 대해서는 이 뒤에 아비발치이품(阿鞞跋致二品)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14_0776_c_20L若得方便力於此二法等無偏黨大悲心不妨諸法實相得諸法實相不妨大悲如是方便是時便得入菩薩法位住阿鞞跋致地,如「往生品」中說復次阿鞞跋致相如後「阿鞞跋致」二品中說
大智度論卷第二十七
庚子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범어로는 mārgākārajñatā.
  2. 2)범어로는 māya. 곧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3. 3)범어로는 Arthavargīya-sūtra. 『중의경(衆義經)』를 말한다.
  4. 4)범어로는 Dharmasaṃgraha-parivarta.
  5. 5)범어 sarvajñatā의 음사어. 여기에서는 sarva-jña-tā로 분석해 설명하고 있다.
  6. 6)범어로는 Āḷavī.
  7. 7)범어로는 Nandanavana.
  8. 8)범어로는 Kambalaśilā.
  9. 9)범어로는 Verañja.
  10. 10)범어로는 Upapada-parivar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