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智度論釋初品中十八空義第四十八

ABC_IT_K0549_T_031
014_0808_a_01L대지도론 제31권
014_0808_a_01L大智度論釋初品中十八空義第四十八 卷三十一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014_0808_a_02L聖者龍樹造


48. 초품 중 십팔공(十八空)의 뜻을 풀이함
014_0808_a_03L後秦龜茲國三藏鳩摩羅什譯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내공(內空)‧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자상공(自相空)ㆍ제법공(諸法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 및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014_0808_a_04L【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欲住內空外空內外空空空大空第一義空爲空無爲空畢竟空無始空散空自相空諸法空不可得空無法空有法空無法有法空當學般若波羅
【論】 내공(內空)25)이라 함은 안의 법이어서 안의 법[內法]이 공하다는 것이다. 안의 법이라 함은 이른바 안의 6입(入)이니,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뜻[意]이다. 눈이 공하면 나[我]가 없고 내 것[我所]이 없으며 눈의 법도 없나니,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08_a_10L【論】
內空者內法內法空內法者所謂內六入眼空無我我所無眼法意亦如是
외공(外空)26)이라 함은 바깥의 법이어서 바깥의 법[外法]이 공하다는 것이다. 바깥의 법이라 함은 이른바 바깥의 6입이니,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이다. 빛깔이 공하면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으며 빛깔의 법도 없나니, 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ㆍ법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08_a_12L空者外法外法空外法者所謂外六色空者無我無我無色法法亦如是
내외공(內外空)27)이라 함은 안팎의 법이어서 안팎의 법[內外法]이 공하다는 것이다. 안팎의 법이라 함은 이른바 안팎의 12입(入)이니, 이 12입 중에는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으며 안팎의 법도 없다.
014_0808_a_15L內外空者內外法內外法空內外法者謂內外十二入十二入中無我無我無內外法
【문】 모든 법은 한량없이 공하고 법대로라면 역시 한량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18종류만을 말하는가? 만일 간략히 말하면 하나의 공, 즉 “일체법공(一切法空)”이라고 해야 하며, 만일 자세히 말한다 하면 낱낱의 법을 따르는 공 즉 안공(眼空)ㆍ색공(色空) 등 매우 많아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18공만을 설명할 뿐인가?
014_0808_a_18L問曰諸法無量空隨法則亦無量何以但說十八若略說一空所謂一切法空若廣說隨一一法空所謂眼空色空等甚多何以但說十八空
014_0808_b_01L【답】 만일 간략하게만 말하면 일이 두루하지 않게 되고 만일 자세하게만 말하면 일이 번잡하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약을 적게 먹으면 병이 낫지 않고 많이 먹으면 악화되는 것이므로 병에 알맞게 약을 더하거나 덜하지 않게 먹어야 병이 낫게 되는 것과 같다.
014_0808_a_22L答曰若略說則事不周廣說則事繁譬如服藥少則病不除多則增其患應病投藥令不增減則能愈病
공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부처님께서 하나의 공만을 말씀하면 곧 갖가지의 삿된 소견과 모든 번뇌를 깨뜨릴 수 없게 되고 만일 갖가지의 삿된 소견을 따르면서 공을 말씀하면 공이 너무도 많아서 사람들이 공의 모양에 애착하여 아주 없다[斷滅]는 데에 떨어질 것이므로 이 18공만을 말씀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그 중도(中道)를 얻은 것이다.
014_0808_b_03L空亦如是若佛但說一空不能破種種邪見及諸煩惱若隨種種邪見說空空則過多人愛著空相在斷滅說十八空正得其中
또 만일 10공을 말씀하거나 15공을 말씀하신다 해도 역시 의심은 있을 것이므로 이것은 질문거리가 아니다.
014_0808_b_06L復次若說若說十五俱亦有疑此非問也
또 착하고 악한 업에는 모두가 일정한 수효가 있다. 4념처(念處)나 4정근(正勤)ㆍ37품(品)ㆍ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ㆍ5중(衆)ㆍ12입(入)ㆍ18계(界)ㆍ12인연(因緣)ㆍ3독(毒)ㆍ3결(結)ㆍ4류(流) 및 5개(蓋) 등이 그것이다. 모든 법에는 이와 같이 저마다 일정한 수가 있나니, 18종의 법 가운데서 집착을 깨뜨리는 까닭에 18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014_0808_b_07L復次善惡之法皆有定數若四念處四正勤三十七品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八不共法五衆十二入十八界十二因緣三毒三結四流五蓋等諸法如是各有定數以十八種法中破著說有十八空
【문】 반야바라밀의 공은 18공과는 다른가, 동일한가? 만일 다르다면 18공을 여의고 무엇으로 반야의 공[般若空]을 삼는가? 또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어떤 것이 반야바라밀이냐 하면, 이른바 물질[色]도 공이요 느낌[受]도 공이요 생각[想]도 공이요 지어감[行]도 공이요 의식[識]도 공이며, 일체종지(一切種智)까지도 공이다. 만일 다르지 않다 하면 어찌하여 “18공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014_0808_b_13L問曰般若波羅蜜空八空爲異爲一若異者離十八空何爲般若空又如佛說何等是般若波羅蜜所謂色空識空乃至一切種智空若不異者云何言欲住十八空當學般若波羅蜜
【답】 인연이 있기 때문에 “다르다” 하겠고 인연이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 하겠다. 다르다 함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 하여 온갖 관법(觀法)을 소멸시키며, 18공은 18종의 관(觀)으로 모든 법을 공하게 하므로 이 모든 법의 실상을 배우면 18종의 공이 생기게 되나니, 이것을 다르다고 한다.
014_0808_b_18L答曰有因緣故言異有因緣故言一異者般若波羅蜜名諸法實相滅一切觀法八空則十八種觀令諸法空菩薩學是諸法實相能生十八種空是名異
014_0808_c_01L동일하다 함은 18공 이것은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요 반야바라밀도 역시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며, 18공 이것은 모양을 버리면서 여의는 것이요 반야바라밀의 온갖 법 중에서도 역시 모양을 버리면서 여의는 것이며, 이 18공은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반야바라밀도 역시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바로 18공을 배우는 것인데 이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014_0808_b_22L十八空是空無所有相般若波羅蜜亦空無所有相十八空是捨離相般若波羅蜜一切法中亦捨離相是十八空不著相般若波羅蜜亦不著相是故學般若波羅蜜則是學十八空異故
반야바라밀에는 두 가지의 갈래[分]가 있나니, 작은 것이 있고 큰 것이 있다. 큰 것을 얻고자 하면 먼저 작은 방편의 문을 배워야 하고, 큰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18공을 배워야 한다.
014_0808_c_05L般若波羅蜜有二分有小有大欲得大者先當學小方便門欲得大智慧當學十八空
이 작은 지혜의 방편문에 머무르면 18공을 얻을 수 있다. 어떤 것이 방편의 문이냐 하면, 이른바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密經)』을 읽고 외고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갖가지의 좋은 보물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큰 바다로 들어가야 하듯이 만일 사람이 내공(內空) 등의 삼매와 지혜의 보물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의 큰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
014_0808_c_07L住是小智慧方便能得十八空何者是方便門所謂般若波羅蜜經讀誦正憶念思惟說修行譬如人欲得種種好寶當入大海若人欲得內空等三昧智慧寶當入般若波羅蜜大海
【문】 수행하는 이는 반야바라밀을 배울 때 어떻게 내공과 외공(外空)과 내외공(內外空)에 머무르는가?
014_0808_c_12L問曰行者云何學般若波羅蜜時住內空外空外空
【답】 세간에는 네 가지의 뒤바뀜[四顚倒]이 있다. 깨끗하지 않은[不淨] 것 가운데서 깨끗하다[淨] 하는 뒤바뀜이 있고, 괴로운[苦] 것 가운데서 즐겁다[樂] 하는 뒤바뀜이 있으며, 항상 없는[無常] 것 가운데서 항상하다[常] 하는 뒤바뀜이 있고, 나 없는[無我] 것 가운데서 나가 있다[我] 하는 뒤바뀜이 있다.
014_0808_c_14L答曰世閒有四顚倒不淨中有淨顚倒苦中有樂顚倒無常中有常顚倒無我中有我顚倒
수행하는 이는 이 네 가지의 뒤바뀜을 깨뜨리기 위하여 4념처(念處)와 열두 가지의 관[十二種觀]을 닦는다. 이른바 처음에 “안의 몸(內身]에는 서른여섯 가지의 깨끗하지 못한 것이 가득히 차서 아홉 개의 구멍으로 항상 흐르므로 매우 싫어하고 근심할 만하며 깨끗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觀)하는 것이니, 깨끗한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내공(內空)이라 한다.
014_0808_c_16L行者爲破四顚倒故修四念處十二種觀所謂初觀內身三十六種不淨充滿九孔常甚可厭患淨相不可得淨相不可得名內空
수행하는 이는 “이미 안의 몸은 깨끗하지 않다” 함을 알았으므로 바깥에서 집착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줄 관하는 것이니, 모두가 진실로 깨끗하지 않건마는 어리석은 범부는 미치고 헷갈려서 음욕에 마음이 가리어진지라 그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여긴다. 집착하고 있는 “물질[色]은 역시 나의 몸과 같아서 깨끗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는 것이니, 바로 외공(外空)이다.
014_0808_c_20L行者旣知內身不淨觀外所亦復如是俱實不淨愚夫狂惑婬欲覆心故謂之爲淨觀所著色如我身淨相不可得是爲外空
014_0809_a_01L수행하는 이가 자기 몸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관하면서도 혹은 바깥의 물질은 깨끗하다고 여기기도 하고 바깥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관하면서도 자기 몸은 깨끗하다고 여기기도 하나, 이제는 다 함께 안팎을 관찰하면서 “나의 몸도 깨끗하지 못하듯이 바깥의 것도 그와 같으며 바깥의 몸도 깨끗하지 못하듯이 나도 역시 그와 똑같이 다름이 없어서 깨끗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하나니, 이것을 내외공(內外空)이라 한다.
014_0808_c_23L行者若觀己身不淨或謂外色爲淨若觀外不淨或謂己身爲淨今俱觀內外身不淨外亦如是外身不淨我亦如一等無異淨不可得是名內外空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여 “안팎의 몸이 다 같이 진실로 깨끗하지 못하다” 함을 아는데도 미혹한 이는 이것에 애착하고 그 애착이 깊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몸을 받나니, 몸은 큰 고통덩이인데도 어리석어서 즐거운 것이라고 여긴다.
014_0809_a_04L行者思惟知內外身俱實不淨而惑者愛著愛著深故由以受身身爲大而愚以爲樂
【문】 세 가지의 느낌[三受]은 모두가 밖의 입[外入]에 속한 것인데, 어찌하여 “안의 느낌[內受]으로 관하다”고 하는가?
014_0809_a_07L問曰三受皆外入所云何言觀內受
【답】 6진(塵)은 처음에 6정(情)과 화합하여 즐거움이 생기므로 이것을 밖의 즐거움[外樂]이라 하고, 뒤에 탐착이 깊이 들어가서 즐거움이 생기므로 이것을 안의 즐거움[內樂]이라 한다.
014_0809_a_08L答曰六塵初與六情和合生樂是名外樂後貪著深入生樂是名內樂
또 안의 법이 즐거움을 반연하므로 이것을 안의 즐거움[內樂]이라 하고 밖의 법이 즐거움을 반연하므로 이것을 밖의 즐거움[外樂]이라 한다.
014_0809_a_10L復次內法緣樂是名內樂外法緣樂是名外樂
또 다섯 가지 식[五識]과 상응(相應)한 즐거움을 바로 밖의 즐거움이라 하고 의식(意識)과 상응한 즐거움을 바로 안의 즐거움이라 하며, 거친[麁] 즐거움을 밖의 즐거움이라 하고 세밀한[細] 즐거움을 안의 즐거움이라 한다. 이와 같은 등으로 안팎의 즐거움을 분별하나니, 괴로운 느낌[苦受]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不苦不樂受]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09_a_11L復次五識相應樂是名外樂意識相應樂是名內樂麤樂名爲外樂細樂名爲內樂如是等分別內外樂苦受不苦不樂亦如是
또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이 안의 즐거움은 실로 얻을 수 없다”고 관하면서도 실로 얻을 수 없음을 분별하여 알지 못하고 다만 이 괴로움이 되는 것을 억지로 이름 붙여 즐거운 것이라 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즐거움은 괴로움의 인연에서 생기고 또한 괴로움의 과보를 내기 때문이니, 즐거움은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014_0809_a_15L復次行者思惟觀是內樂實可得不卽分別知實不可得但爲是苦强名爲樂何以故是樂從苦因緣亦生苦果報樂無厭足故苦
또 마치 사람이 옴이 올랐을 때 불을 쪼이면서 긁으면 잠시 동안만은 즐거움을 느끼기는 하나 나중에는 몸을 더욱 상했기 때문에 더 크게 괴로움을 느끼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즐거운 것이라 여기지만 슬기로운 이는 그것을 고통이 될 뿐이라고 본다.
014_0809_a_18L復次如人患疥搔之向火疥雖小樂後轉傷則爲大苦愚人謂之爲樂智者但見其苦
이와 같이 세간에서는 즐거운 것이라 하는 뒤바뀐 병 때문에 5욕락(欲樂)에 집착하게 되고 번뇌는 더욱더 많게 되나니, 이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즐거운 것이라고 보지 않고 다만 괴로운 것이 마치 질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상처와 같고 가시와 같다고 볼 뿐이다.
014_0809_a_21L如是世閒樂顚倒病故著五欲樂煩惱轉多以是故行者不見樂但見苦如病如癰如瘡如刺
014_0809_b_01L또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은 많나니, 즐거움이 적어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이라 하는 것이다. 마치 큰 강물에 한 홉[一合]의 소금을 집어넣으면 그 소금의 형상은 없어지면서 짜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809_a_23L復次少苦多少樂不現故名爲苦如大河投一合鹽則失鹽相不名爲鹹
또 즐거움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미혹하여 이것은 즐거운 것이라 여기고 저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며, 저것은 즐거운 것이라 여기고 이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면서 집착한 이는 즐거운 것이라 하고 상실한 이는 괴로운 것이라고 한다. 어리석으면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슬기로우면 괴로운 것이라고 여긴다. 즐거운 것의 우환을 보면 괴로운 것이 되지만 즐거운 것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즐거운 것이 된다. 즐거운 것은 덧없다는 모양을 보지 않으면 즐거운 것이 되지만 즐거운 것은 덧없다는 모양을 보면 괴로운 것이 된다.
014_0809_b_02L復次樂不定故或此以爲樂彼以爲苦彼以爲樂此以爲苦著者爲樂失者爲苦愚以爲樂智以爲苦見樂患爲不見樂過者爲樂不見樂無常相爲見樂無常相爲苦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한 사람은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욕망을 여읜 사람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즐거운 것과 괴로운 것이 된다고 관찰하고 괴로운 것은 마치 화살이 몸 속에 들어간 것과 같이 관찰하는 것이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도 덧없고 변하여 달라진다는 모양임을 관해야 하는데 이와 같이 세 가지의 느끼는 마음을 관찰하면 곧 버리고 여의게 되나니, 이것을 안의 느낌이 공[內受空]임을 관찰한다고 한다. 밖의 느낌[外受]과 안팎의 느낌[內外受]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09_b_07L未離欲人以爲離欲人以爲苦如是等觀樂爲苦觀苦如箭入身觀不苦不樂無常變異相如是等觀三種受心則捨離名觀內受空觀外受內外受亦如是
수행하는 이는 “만일 즐거움의 그것이 곧 괴로움이라면 누가 이 괴로움을 받는 것인가”라며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곧 마음으로 받는다 함을 알게 된다. 그런 뒤에는 “이 마음이 진실인 것인가 거짓인 것인가” 관찰하며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나고[生] 머무르고[住] 사라지는[滅] 모양”이라고 관찰하나니, 괴롭다고 느끼는 마음[苦受心]과 즐겁다고 느끼는 마음[樂受心]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마음[不苦不樂心]도 저마다 생각을 달리한다.
014_0809_b_11L行者作是念若樂卽是苦誰受是苦念已則知心受然後觀心爲實爲虛觀心無常滅相苦受心樂受心不苦不樂受心各各異念
즐겁다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괴롭다는 마음이 생기고, 괴롭다는 마음이 한동안 머무르다가 그 마음이 도로 사라지면서 다음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한동안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이 머무르다가 그것이 도로 사라지고 나서는 다시 즐겁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나니, 세 가지의 느낌은 무상하기 때문에 마음도 역시 무상하다.
014_0809_b_15L覺樂心滅而苦心生苦心爾所時住住已還滅次生不苦不樂心知爾所時不苦不樂心住住已還滅滅已還生樂心受無常故心亦無常
014_0809_c_01L또 음욕에 물든 마음과 물들지 않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성을 내지 않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과 어리석지 않은 마음과 산란한 마음과 가다듬은 마음과 속박된 마음과 해탈한 마음 등의 마음도 저마다 다른 모양임을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무상하고 일정한 마음의 항상 머무름은 없다 함은 알 것이다. 괴로움을 느끼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마음은 화합하는 인연(因緣)에서 생기고, 인연이 여의거나 흩어지면 마음도 역시 따라 소멸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으로 안의 마음과 바깥의 마음과 안팎의 마음은 무상한 것인 줄 관찰하는 것이다.
014_0809_b_19L復次知染心染心瞋心無瞋心癡心不癡心散心攝心縛心解脫心如是等心各各異相故知心無常無一定心常住受苦受樂等心從和合因緣生因緣離散心亦隨滅如是等觀內心外心內外心無常相
【문】 마음은 곧 안의 입[內入]에 속한 것인데 어찌하여 밖의 마음[外心]이라 하는가?
014_0809_c_02L問曰心是內入攝云何爲外心
【답】 안의 몸[內身]을 관찰하면 안의 마음이라 하고 밖의 몸[外身]을 관찰하면 밖의 마음이라 한다.
또 안의 법[內法]을 반연하면 안의 마음이라 하고 밖의 법[外法]을 반연하면 밖의 마음이라 한다.
또 다섯 가지 식[五識]28)은 항상 밖의 법을 반연하면서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의 마음이라 하고, 의식(意識)은 안의 법을 능히 반연하면서 또한 아름답고 추함도 분별하기 때문에 안의 마음이라 한다.
014_0809_c_03L答曰觀內身名爲內心觀外身名爲外心復次緣內法爲內心緣外法爲外心復次五識常緣外法不能分別故名爲外心意識能緣內法分別好醜故名爲內心
또 의식이 처음에 생겨났으나 아직 분별하여 결정하지 못하면 이것을 밖의 마음이라 하고, 의식이 점차로 깊이 분별하면서 모양을 취하게 되면 이것을 안의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은 등으로 안팎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다.
014_0809_c_07L復次意識初未能分別決定是爲外心意識轉能分別取相是名內心如是等分別內外心
수행하는 이는 마음과 뜻이 차츰차츰 달라지면서 몸은 깨끗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알고, 느낌은 괴로운 모양이라고 알며, 마음은 머무르지 않는 무상한 모양이라고 알면서도 번뇌[結使]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나라는 마음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만일 마음이 무상하다면 누가 이 마음을 알며 마음은 누구에게 속한 것일까. 누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으며 온갖 모든 물건은 누구의 소유(所有)일까” 하기도 한다.
014_0809_c_10L行者心意轉異知身爲不淨相知受爲苦相知心不住爲無常結使未斷故或生吾我如是思惟若心無常誰知是心心爲屬誰誰爲心主而受苦樂一切諸物誰之所有
이렇게 분별하다가 따로 주인도 없고 다만 5중(衆)에서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사람모양이 있다 함을 헤아리면서 나라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안다. 나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 것[我所]이 생기고 내 것이라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나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탐욕을 내고 나를 거스르면 성을 내게 된다. 이 번뇌는 지혜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미치고 미혹된 데서부터 생기기 때문에 이것을 어리석음[癡]이라고 하며, 3독(毒)이 온갖 번뇌의 근본이 된다.
014_0809_c_14L卽分別知無有別主但於五衆取相計有人相而生我心以我心故生我所我所心生故有利益我者生貪違逆我者而生瞋恚此結使不從智生從狂惑生故是名爲癡三毒爲一切煩惱之根本
모두가 나로 말미암아 짐짓 복덕을 지으면서 “나는 뒷날 당연히 얻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도를 돕는 법[助道法]을 닦으면서 “나는 당연히 해탈을 얻어야 한다”고 하면서 처음에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상중(想衆)이라 하며, 나로 말미암아 결사와 모든 선행(善行)을 일으키는 이것을 바로 행중(行衆)이라 하나니, 이 두 가지의 상중ㆍ행중이 바로 법념처(法念處)이다.
014_0809_c_20L亦由吾我故作福爲我後當得亦修助道法我當得解脫初取相故名爲想衆因吾我起結使及諸善行是名行衆是二衆則是法念處
014_0810_a_01L상중ㆍ행중의 법 안에서 나를 구해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법은 모두가 인연(因緣)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조작하는 법이어서 견고하지도 않고 실아(實我)의 법과 행도 없다. 마치 파초의 잎사귀마다 구한다 해도 그 속은 견고한 모양이 없는 것과 같고, 마치 멀리서 아지랑이를 보면 물이 없는데도 물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과 같은데 이는 다만 눈이 미혹되어서이다. 이와 같은 등으로 안의 법과 밖의 법과 안팎의 법을 볼 뿐이다.
014_0810_a_01L於想行衆法中求我不可何以故是諸法皆從因緣生悉是作法而不牢固無實我法行如芭蕉葉葉求之中無有堅相如遠見野馬無水有水想但誑惑於眼如是等內法外法內外法
【문】 법(法)은 곧 밖의 입[外入]에 속하는데 어찌하여 안의 법[內法]이라 하는가?
014_0810_a_06L問曰法是外入攝云何爲內法
【답】 안의 법이라 하면 안의 마음과 상응하는 상중과 행중이요 밖의 법이라 하면 밖의 마음과 상응하는 상중ㆍ행중과 그리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心不相應] 모든 행(行)과 무위의 법[無爲法]이다. 그리고 한꺼번에 평등하게 관하면 이것을 안팎의 법[內外法]이라 한다.
014_0810_a_07L答曰內法名爲內心相應想衆行衆外法名爲外心相應想行衆及心不相應諸行及無爲法一時等觀名爲內外法
또 안의 법을 6정(情)이라 하고, 밖의 법을 6진(塵)이라고 한다.
또 몸[身]ㆍ느낌[受]ㆍ마음[心]과 상중ㆍ행중을 통틀어 관하면 법념처(法念處)가 된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이가 이미 상중ㆍ행중과 무위의 법 중에서 나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고 도리어 몸ㆍ느낌ㆍ마음 가운데서 구하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14_0810_a_10L復次內法名爲六情外法名爲六塵復次及想衆行衆摠觀爲法念處何以故行者旣於想衆行衆及無爲法中求我不可得還於身心中求亦不可
이와 같이 온갖 법 중에서 빛깔과 빛깔이 아닌 것과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과 대(對)할 수 있는 것과 대할 수 없는 것과 번뇌[漏]가 있는 것과 번뇌가 없는 것과 함[爲]이 있는 것과 함이 없는 것과 먼 것과 가까운 것과 거친 것과 세밀한 것들 가운데서 나를 구하여도 모두 다 얻을 수 없다.
014_0810_a_15L如是一切法中若色若非色若可若不可見若有對若無對若有漏若無漏若有爲若無爲若遠若近若細其中求我皆不可得
다만, 5중(衆)이 화합한 까닭에 억지로 이름 붙여 중생이라 하며 이 중생이 곧 나요 나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모든 번뇌도 모두가 쇠하고 박할[衰薄] 뿐이다.
014_0810_a_18L但五衆和合故强名爲衆生衆生卽是我不可得故亦無我所我所不可得故一切諸煩惱皆爲衰薄
또 신념처(身念處)를 온갖 색법(色法)이라 하나니, 수행하는 이는 안의 물질[內色]은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며 밖의 물질[外色]을 관찰하는 데서나 안팎의 물질[內外色]을 관찰하는 데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그리고 느낌[受]ㆍ마음[心]ㆍ법(法)도 역시 그러하다.
014_0810_a_21L復次身念處名一切色法行者觀內色無常無我觀外色觀內外色亦如是法亦爾
014_0810_b_01L4념처에서 내관(內觀)과 상응한 공삼매(空三昧)를 내공(內空)이라 하고 4념처에서 외관(外觀)과 상응한 공삼매를 외공(外空)이라 하며 4념처에 내관ㆍ외관과 상응한 공삼매를 내외공(內外空)이라 한다.
014_0810_b_01L四念處內觀相應空三昧名內四念處外觀相應空三昧名外空四念處內外觀相應空三昧名內外
【문】 공은 이 삼매의 힘 때문에 공한 것인가, 이 법이 저절로 공한 것인가.
014_0810_b_04L問曰是空爲是三昧力故空爲是法自空
【답】 삼매의 힘 때문에 공이라 한다. 마치 경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삼삼매(三三昧)의 3해탈문(解脫門)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이다. 이 공삼매는 몸ㆍ느낌ㆍ마음ㆍ법을 반연해도 나와 내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고 한다.
014_0810_b_05L答曰名爲三昧力故空如經三三昧三解脫門無相無作空三昧緣身不得我我所故名爲空
【문】 4념처의 공한 법은 모두가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고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몸은 깨끗하지 않다고 관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관하며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법은 나가 없다고 관하기 때문이다.
014_0810_b_08L問曰四念處空法皆應觀無無我何以故身觀不淨受觀心觀無常法觀無我
【답】 비록 네 가지의 법을 모두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다고 관한다 하더라도 중생은 몸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깨끗하다 하는 뒤바뀜에 집착하고, 느낌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즐겁다 하는 뒤바뀜에 잡착하며, 마음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항상하다고 하는 뒤바뀜에 집착하고, 법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나가 있다 하는 뒤바뀜에 집착한다. 이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몸은 깨끗하지 않다고 관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관하며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법은 나가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014_0810_b_10L答曰雖四法皆觀無常無我而衆生身中多著淨顚倒受中多著樂顚倒心中多著常顚倒法中多著我顚倒以是故行者觀身不淨觀受苦觀心無常法無我
또 내외공(內外空)이라 함은 안과 밖에는 일정한 법이 없고 서로의 인(因)이 상대하기 때문에 안과 밖이라고 하면서 저것은 밖이라고 여기고 나는 안이라고 여기며 나는 밖이라고 여기고 저것은 안이라고 여기나니, 사람에게 매인 바에 따라 안의 법을 안[內]이라 하고 사람이 집착한 바에 따라 밖의 법을 밖[外]이라 한다. 마치 사람이 자기 집을 안이라 하고 다른 이의 집을 밖이라고 하는 것과 같나니, 수행하는 이는 이 안팎의 법은 정해진 모양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고 관하는 것이다.
014_0810_b_15L復次內外空者無有內外定互相因待故謂爲內外彼以爲外我以爲內我以爲外彼以爲內隨人所繫內法爲內隨人所著外法爲外如人自舍爲內他舍爲外行者觀是內外法無定相故空
또 이 안팎의 법은 자성(自性)이 없다. 왜냐하면 화합으로 생기기 때문이니, 이 안팎의 법은 역시 화합하는 인연 가운데에도 있지 않다. 만일 인연 가운데에도 없다면 그 밖의 다른 법도 없고 안팎의 법의 인연도 역시 없나니, 원인과 결과가 없기 때문에 안팎의 법은 공하다.
014_0810_b_20L復次是內外法無有自性何以故合生故是內外法亦不在和合因緣若因緣中無者餘處亦無內外法因緣亦無因果無故內外法空
014_0810_c_01L【문】 안팎의 법은 반드시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말하는가? 마치 손과 발 등이 화합하기 때문에 몸이라는 법이 생기면서 이것을 안의 법이라 한 것과 같고, 마치 들보와 서까래와 벽 등이 화합하기 때문에 집이라는 법이 생기면서 이것을 밖이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몸의 법은 비록 따로따로의 법이 있다하더라도 역시 발 등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발 등을 여읜다면 몸은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집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10_c_01L問曰內外法定有云何言無如手足等和合故有身法生是名內法如梁椽壁等和合故有屋法生是名爲外是身法雖有別名亦不異足等所以者何若離足等身不可得故屋亦如是
【답】 만일 발이 몸과 다르지 않다면 머리는 마땅히 발이어야 하나니, 발과 몸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머리가 바로 발이라 하면 아주 우스운 일이다.
014_0810_c_06L若足不異身者頭應是足足與身不異故若頭是足者甚爲可笑
【문】 만일 발이 몸과 다르지 않다면 이러한 허물이 있을 것이다. 이제 발 등이 화합하기 때문에 다시 법이 생기면서 몸이라고 해야 되나니, 몸이 비록 발 등과 다르다 하더라도 마땅히 발에 의지하여 서야 된다. 마치 뭇 무명실이 화합하면서 무명베가 생기고 이 무명베는 무명실에 의지하면서 있게 되는 것과 같다.
014_0810_c_08L問曰若足與身不異者有如是過今應足等和合故更有法生名爲身身雖異於足等應當依於足住如衆縷和合而能生㲲是㲲依縷而住
【답】 이 몸의 법에서 발 등은 다 함께 갖추어 있는[具有] 것인가, 따로 나누어져 있는[分有] 것인가. 만일 갖추어 있는 것이라면 머리 안에는 마땅히 발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몸의 법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나누어져 있다면 발의 부분과 다를 것이 없다. 또 몸 이것은 하나의 법이면서 인(因)이 되는 것이 많지만 하나가 여럿이 되지도 않고 여럿이 하나가 되지도 않는다.
014_0810_c_12L答曰是身爲足等分中具有爲分有若具有頭中應有足何以故身法具有故分有與足分無異又身是一法所因者多一不爲多多不爲一
또 만일 발 등을 제외하고서 몸이 있다고 분별한다면 온갖 세간과는 모두 어기는 것이 된다. 이 때문에 몸은 그것이 곧 모든 부분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한 모든 부분과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몸은 없다. 몸이 없기 때문에 발 따위도 없는데 이와 같은 것들을 내공(內空)이라고 한다. 방사(房舍) 등의 밖의 법도 역시 이와 같이 공한 것이므로 외공(外空)이라 한다.
014_0810_c_16L復次若除足等分別有身者與一切世閒皆相違以是故身不得言卽是諸分亦不得言異於諸分以是故則無身身無足等亦無如是等名爲內空房舍等外法亦如是空名爲外空
【문】 몸과 집 등을 격파[破]하면 이것은 바로 하나[一]라는 것도 격파하고 다르다[異]는 것도 격파하는 것이 된다. 하나라는 것도 격파하고 다르다는 것도 격파하는 이러한 격파는 외도의 가르침[經]이다. 부처님 경 안에는 실로 안팎의 법이 있나니, 이른바 안의 6정(情)이요 밖의 6진(塵)이다. 이것이 어찌하여 없다는 말인가.
014_0810_c_21L問曰舍等是爲破一破異破一破異破外道經佛經中實有內外法所謂內六情外六塵此云何無
014_0811_a_01L【답】 이 안팎의 법이 호합하여 임시로 가정하여 이름이 있는 것이니, 마치 몸과도 같고 집과도 같다.
014_0811_a_01L答曰是內外法和合假有名字亦如身如舍
또 간략하게 설명하면 두 가지의 공[法空]이다. 소승(小乘)의 제자는 근기가 둔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는 중생의 공함을 말해 주나니, 나와 내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승(大乘)의 제자라면 근기가 영리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는 법의 공함을 말해 주나니, 즉시 세간이 항상 공하여 마치 열반과 같음을 알게 된다.
014_0811_a_02L略說有二種空衆生空法空小乘弟子鈍根故爲說衆生空我所無則不著餘法大乘弟子利根故說法空卽時知世閒常空如涅槃
성문의 논의사(論議師)는 내공(內空)을 말하면서 “안의 법 안에는 나가 없고 내 것도 없으며 무상하고 짓는 이도 없으며 아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다”고 하나니, 이것을 내공이라 한다. 외공(外空)도 역시 그와 같지만 “안의 법의 모양[內法相]과 밖의 법의 모양[外法相]이 곧 공이다” 함은 말하지 않는다.
014_0811_a_06L聲聞論議師說內空於內法中無我無我所無常無作者無知者無受者是名內空外空亦如是不說內法相外法相卽是
대승에서는 “안의 법 안에는 안의 법의 모양이 없고 밖의 법 안에서는 밖의 법의 모양도 없다”고 한다. 마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가운데의 설명과 같아서, 물질[色]은 물질의 모양이 공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은 느낌에서부터 의식에 이르기까지의 모양이 공하며, 눈[眼]은 눈의 모양이 공하고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뜻[意]은 귀에서부터 뜻에 이르기까지의 모양이 공하며, 빛깔의 모양이 공하고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은 소리에서부터 법에 이르기까지의 모양이 공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온갖 법은 스스로 법이 공하다.
014_0811_a_10L大乘說內法中無內法相外法中無外法相如『般若波羅蜜』中說色相識相空眼相空意相空色相空法相空如是等一切諸法自法空問曰此二種說內外空何者是實
【문】 이 두 가지로 내외공을 설명하는데 어느 것이 진실인가?
014_0811_a_15L二皆是實但爲小智鈍根故先說衆生空爲大智利根者說法空如人閉破壞桎梏傷殺獄卒隨意得去有怖畏盜穿牆壁亦得免出
【답】 두 가지 모두가 다 진실이다. 다만 지혜가 적고 근기가 둔한 이를 위하여 먼저 중생의 공을 설명했고, 지혜가 크고 근기가 영리한 이를 위하여 법의 공을 설명했을 뿐이다. 마치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차꼬와 수갑을 부수고 옥졸을 살상한 뒤에 마음대로 도망갈 수 있는 것과 같으며, 또한 어떤 이가 도적을 두려워해29) 담벽을 뚫고 탈출하게 되는 것과 같다.
014_0811_a_19L聲聞者但破吾我因緣生諸煩惱離諸法愛畏怖老惡道之苦不復欲本末推求了了壞破諸法但以得脫爲事
014_0811_b_01L성문을 닦는 이는 다만 나라는 인연으로 생기는 모든 번뇌를 깨뜨리고 모든 법애(法愛)를 여의며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악도(惡道)의 고통을 두려워하면서도 또 욕망의 본말(本末)을 추구하여 분명하게 모든 법을 파괴하지 않고 단지 해탈을 얻는 것을 능사로 삼을 뿐이나, 대승을 닦는 이는 삼계(三界)의 감옥을 깨뜨리고 악마들을 항복 받으며, 모든 번뇌[結使]를 끊고 몸에 밴 기운[習氣]을 없애면서 온갖 법의 본말을 분명하게 알아 통달하고 막힘이 없으며, 모든 법을 부수어 흩고 세간을 열반과 같이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 되게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에 온갖 중생들을 거느리고 삼계를 벗어나게 한다.
014_0811_a_22L大乘者破三界獄降伏魔衆斷諸結使及滅習氣了知一切諸法本末達無㝵破散諸法令世閒如涅槃同寂滅相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一切衆生令出三界
【문】 대승에는 어떠한 방편이 있기에 모든 법을 파괴할 수 있는가?
014_0811_b_04L問曰大乘有何方便能破壞諸法
【답】 부처님께 말씀하시되 “물질은 갖가지 인연에서 생기며 견고하거나 충실함이 없다. 마치 물에 물결이 일면서 거품이 생기면 잠깐 동안 보이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처럼, 물질도 역시 그와 같다. 지금 세상에서의 4대(大)는 전생에 행한 업의 인연이 화합한 까닭에 물질을 이루게 되었지만 이 인연은 소멸되는 까닭에 물질도 역시 함께 소멸된다. 무상한 도[無常道]를 수행하여 차츰차츰 공의 문에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나고 없어지고 하면서 머무르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머무르는 때가 없으면 곧 취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하셨다.
014_0811_b_05L答曰佛說色從種種因緣生無有堅實如水波浪而成泡沫見卽滅色亦如是今世四大先世行業因緣和合故而得成色因緣滅故色亦俱滅行無常道轉入空門所以者何諸法生滅無有住時若無住時則無可取
또 유위(有爲)의 모양이기 때문에 생기는 때에는 소멸함이 있고 소멸하는 때에는 생기는 것이 있다. 만일 이미 생겨났다면 생기는 것이 소용이 없고 아직 생기지 않았다면 생기는 것이 생길 것이 없나니, 법과 생기는 것에는 역시 다름이 있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생기는 것이 만일 생겼다면 법도 당연히 생김이 있어서 생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다시 생김이 있어야 하므로 이것은 곧 다하는 일이 없다.
014_0811_b_11L復次有爲相故生時有滅滅時有生若已生生無所用若未生生無所生法與生亦不應有異何以生若生法應有生生如是復應有是則無窮
만일 생기는 것이 생겨서 다시 생길 것이 없다면 생기는 것은 생기는 일이 있지 않아야 하고, 만일 생기는 것에 생기는 것이 없다면 법도 역시 생기는 것이 있지 않아야 하나니, 이와 같아서 생기는 것도 얻을 수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은 공하여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나니, 이것이 진실이다.
014_0811_b_15L若生生更無生者生不應有生若生無有生者法亦不應有如是生不可得滅亦如是以是故諸法空不生不滅是爲實
014_0811_c_01L또 모든 법이 있다면 마침내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니, 만일 뒤에도 없는 것이라면 처음에도 역시 없어야 한다. 마치 사람이 신을 신을 때 처음부터 헌 데가 있었지만 미세한지라 깨닫지 못한 것과 같나니, 만일 처음에 헌 데가 없었다 하면 언제나 새로운 신이어야 한다. 만일 뒷날 헌 모양이 있었다면 처음에도 역시 헌 데가 있었을 것이다.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뒤에 있을 것이 없기 때문에 처음에도 있을 것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마땅히 공해야 된다. 중생들은 뒤바뀌어서 안의 6정(情)에 집착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이 뒤바뀜을 파괴하는 것이니, 이것을 내공이라 한다. 외공과 내외공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11_b_18L復次諸法若有者終歸於無若後無者初亦應無如人著屐初已有微細不覺若初則應常新若後有故相初亦有法亦如是後有無故初亦有無是故一切法應空以衆生顚倒著內六情故行者破是顚倒名爲內空內外空亦如是
공공(空空)30)이라 함은 공으로써 내공과 외공과 내외공을 깨뜨리는 것이요 이 세 가지의 공을 깨뜨리기 때문에 공공이라고 한다.
014_0811_c_02L空空以空破內外空內外空破是三空故名爲空
또 먼저 법의 공[法空]으로써 안팎의 법을 깨뜨리고 다시 그 공으로써 이 세 가지의 공을 깨뜨리는 것이니, 이것을 공공이라 한다.
014_0811_c_04L復次先以法空破內外法復以此破是三空是名空空
또 공삼매(空三昧)로 5중(衆)이 공함을 관찰하여 8성도(聖道)를 얻고 모든 번뇌를 끊으며 유여열반(有餘涅槃)을 얻으면서 전생의 업의 인연으로 목숨이 다할 때에는 여덟 가지의 도를 놓아 버리고자 하기 때문에 공공삼매(空空三昧)31)가 생기나니, 이것을 공공이라 한다.
014_0811_c_05L復次空三昧觀五衆空得八聖道斷諸煩惱得有餘涅槃先世業因緣身命盡時欲放捨八道故生空空三昧是名空空
【문】 공과 공공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공은 5수중(受衆)을 깨뜨리고 공공은 그 공을 깨뜨린다.
014_0811_c_08L空與空空有何等異答曰空破五受衆空空破空
【문】 공이 만일 이것이 법의 공이라면 이미 깬 것이 되지만 공이 만일 법의 공이 아니라면 무엇을 깬다는 것인가?
014_0811_c_10L問曰空若是法空已破空若非法空何所破
【답】 공이 온갖 법을 깨뜨리면 오직 공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공이 온갖 법을 깨뜨린 뒤에는 그 공도 역시 버려야 하나니, 이 때문에 이 공공이 필요한 것이다.
014_0811_c_11L答曰空破一切法唯有空在空破一切法已亦應捨以是故須是空空
또 공은 온갖 법을 반연하고 공공은 다만 공을 반연할 뿐이니, 마치 하나의 건장한 남아가 온갖 도적을 깨뜨리고 다시 또 어떤 사람이 그 건장한 남아를 깨뜨린 것처럼 공공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014_0811_c_13L復次空緣一切法空空但緣空如一健兒破一切賊復更有人能破此健人空空亦如是
또 마치 약을 먹을 때 약은 병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병을 벌써 깨뜨렸다면 약도 역시 그만두어야 하는 것인데 만일 약을 그만두지 않으면 다시 그 병을 악화시키듯이 이 공으로써 모든 번뇌의 병을 소멸시키지만 이 공이 또 근심거리가 될까 두려워서이니, 이 때문에 공으로써 공을 버리는 것을 바로 공공이라 한다.
또 공으로써 열일곱 가지의 공을 깨뜨리기 때문에 공공이라 하는 것이다.
014_0811_c_16L又如服藥藥能破病病已得破藥亦應出若藥不出則復是病以空滅諸煩惱病恐空復爲患是故以空捨空是名空空復次以空破十七空故名爲空空
대공(大空)32)이라 함은 성문의 법 안에서는 법이 공함을 대공이라 하나니, 마치 잡아함(雜阿含)의 『대공경(大空經)』33)에서 “나는[生] 것은 늙어 죽음[老死]에 인연한다”고 설명한 것과 같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이 늙어 죽는 것이다”고 하거나 “이것이 사람의 늙어 죽는 것이다”고 한다면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삿된 소견이다. “이것이 사람의 늙어 죽는 것”이라 하면 중생이 공한 것이요 “이것이 늙어 죽는 것”이라 하면 바로 법이 공한 것이다.
마하연경(摩訶衍經)에서는 시방을 설명하면서 “시방의 모양은 공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대공이다.
014_0811_c_20L大空聲聞法中空爲大空如『雜阿含ㆍ大空經』說生因緣老死若有人言是老死是人老死二俱邪見是人老死則衆生空是老死是法空『摩訶衍經』說十方十方相是爲大空
014_0812_a_01L【문】 시방이 공한 것을 무엇 때문에 대공이라 하는가?
014_0812_a_01L問曰十方空何以名爲大空
【답】 동방(東方)은 끝이 없기 때문에 대(大)라 하고 또한 온갖 처소도 존재하기 때문에 대라 하며, 온갖 물질[色]에 두루하기 때문에 대라 하고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대라 하며, 세간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대라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답답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대라 하나니, 이와 같이 큰 방소[方]로 능히 깨뜨리기 때문에 대공이라 한다.
014_0812_a_02L答曰東方無邊故名爲大亦一切處有故名爲大遍一切色故名爲常有故名爲大益世閒故名爲大令衆生不迷悶故名爲大如是大方能破故名爲大空
그 밖의 공은 인연(因緣)으로 생긴 법을 깨뜨리고 조작된 법[作法]과 거친 법[麤法]은 깨뜨리기가 쉽기 때문에 대(大)라 하지 않지만, 이 방소는 인연으로 생긴 법도 아니요 조작된 법도 아니며 미세한 법이라 깨뜨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공이라 한다.
014_0812_a_06L餘空破因緣生法作法麤法易破故不名爲大是方非因緣生法非作法微細法難破故爲大空
【문】 부처님 법 안이라면 방소는 없다. 3무위(無爲), 곧 허공무위(虛空無爲)나 지연진무위(智緣盡無爲)나 비지연진무위(非智緣盡無爲)에도 역시 속한 바가 아닌데 무엇 때문에 방소가 있다고 말하는가? 역시 이것은 항상 있는 것[常]이요 무위의 법이어서 인연으로 생긴 법도 아니요 조작된 법도 아니며 미세한 법도 아니다.
014_0812_a_09L問曰若佛法中無方三無爲虛空智緣盡非智緣盡亦所不攝以言有方亦是常是無爲法非因緣生法非作法微細法
【답】 이 방소에 대한 법은 성문의 논의(論議) 안에는 없으며 마하연의 법 안에서는 세속제(世俗諦)로써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제일의(第一義) 안에서는 온갖 법조차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방소이겠는가.
014_0812_a_12L答曰聞論議中無摩訶衍法中以世俗諦故有第一義中一切法不可得何況
마치 5중(衆)이 화합하면 임시로 중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방소도 역시 그와 같아서 4대로 이루어진 물질과 화합하는 가운데 “이 사이다 저 사이다” 등으로 분별하면서 임시로 방소라는 이름을 붙여 “해가 돋아나오는 곳이 바로 동쪽이다. 해가 지는 곳이 바로 서쪽이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따위가 바로 방소의 모양이며 이 방소는 자연히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인연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요 또한 먼저는 없었다가 지금은 있다가 뒤에는 없게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조작된 법도 아니며 바로 눈앞에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미세한 법도 아니다.
014_0812_a_15L如五衆和合假名衆生方亦如是四大造色和合中分別此閒彼閒等假名爲方日出處是則東方日沒處是則西方如是等是方相是方自然常有故非因緣生亦不先無今有有後無故非作法非現前知故是微細法
【문】 방소가 만일 그와 같다면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 것인가?
問曰方若如是云何可破
【답】 그대는 듣지 않았는가. 나는 먼저 “세속의 이치로써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요 으뜸가는 이치로써 하기 때문에 깨뜨린다”고 했다. 세속의 이치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아주 없다[斷滅]는 가운데에 떨어지지 않고 으뜸가는 이치로써 깨뜨리기 때문에 항상하다[常]는 가운데도 떨어지지 않나니, 이것은 간략하게 설명하여 대공(大空)의 뜻이라 한다.
014_0812_a_21L答曰汝不聞我先說以世俗諦故有第一義故破以俗諦有故不墮斷滅中一義破故不墮常中是名略說大空
014_0812_b_01L【문】 제일의공(第一義空)34)으로도 역시 조작이 없는 법과 인연이 없는 법과 미세한 법을 깨뜨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대공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014_0812_b_02L問曰第一義空亦能破無作法因緣法細微法何以不言大空
【답】 앞에서 이미 대(大)라는 이름을 얻었기 때문에 대라고는 하지 않는다. 지금의 제일의(第一義)라는 이름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 이치[義]는 실로 대이다. 출세간(出世間)에서는 열반으로써 대를 삼고 세간(世間)에서는 방소[方]로써 대를 삼나니, 이 때문에 제일의공도 역시 대공이다.
014_0812_b_03L答曰前已得大名故不名爲大今第一義名雖異義實爲大出世閒以涅槃爲世閒以方爲大以是故第一義空亦是大空
또 큰 삿된 소견을 깨뜨리기 때문에 대공이라 한다. 마치 수행하는 이가 인자한 마음[慈心]으로써 동방의 한 국토의 중생을 반연하고 다시 한 국토의 중생을 반연하며 이렇게 하면서 차츰차츰 반연할 때에 만일 “동방의 국토를 모조리 다 반연했다”고 여기면 끝이 있다는 소견[邊見]에 떨어지고 만일 “모조리 다 반연하지 못했다”고 여기면 끝이 없다는 소견[無邊見]에 떨어진 것과 같나니, 이런 두 가지의 소견을 내기 때문에 곧 인자한 마음을 잃게 된다.
014_0812_b_07L復次破大邪見故名爲大空如行者以慈心緣東方一國土衆生復緣一國土衆生如是展轉緣時若謂盡緣東方國土則墮邊見若謂未盡則墮無邊見生是二見故卽失慈心
만일 방소의 공함[方空]으로써 이 동반을 깨뜨린다면 끝이 있다거나 끝이 없다거나 하는 소견이 소멸되겠지만 만일 방소의 공함으로써 동방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동방이라는 마음을 따르게 되고 마음을 따르게 되면 인자한 마음은 이내 소멸되면서 삿된 마음이 생기게 된다.
014_0812_b_12L若以方空破是東方則滅有邊無邊見若不以方空破東方者則隨東方心隨心不已慈心則滅心則生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닷물이 밀려들고 나가고 할 때 그 통상의 한계까지 이르면 물은 도로 나가게 되는데 고기가 만일 그 물을 따라 되돌아가지 않으면 드러난 땅에 있으면서 갖은 괴로움을 받게 되지만 만일 고기가 지혜가 있었다면 물을 따라 되돌아가서 영원한 안온을 누리게 되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마음을 따르면서 되돌리지 않는다면 삿된 소견에 떨어져 있겠지만 만일 마음을 따라 되돌아간다면 인자한 마음을 잃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큰 삿된 소견을 깨뜨리기 때문에 대공이라 한다.
014_0812_b_15L譬如大海潮時至其常限則旋還魚若不還則漂在露地有諸苦患若魚有智則隨水還永得安隱行者如是若隨心不還則漂在邪見若隨心還不失慈心如是破大邪見故名爲大空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함의 제일의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말하는 것이니, 부서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기 때문에 이 모든 법의 실상도 역시 공하다. 왜냐하면 받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법의 실상이 존재한다고 하면 마땅히 받아야 하고 집착해야 하겠지만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받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만일 받거나 집착한다면 곧 그것은 거짓[虛誑]이다.
014_0812_b_20L第一義空第一義名諸法實相不破不壞故是諸法實相亦空何以故無受無著故若諸法實相有者應受應著以無實故受不著若受著者卽是虛誑
014_0812_c_01L또 모든 법 중에서 으뜸가는 법을 열반이라 하나니, 마치 아비담(阿毘曇) 중에서 “무엇이 위가 있는 법[有上法]이고 온갖 유위의 법[一切有爲法]이며 그리고 허공(虛空)과 비지연진(非智緣盡)인가. 무엇이 위없는(無上法)이고 지연진(智緣盡)인가. 지연진 이것이 곧 열반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열반 가운데는 역시 열반이라는 모양이 없나니, 열반이 공한 이것이 바로 제일의공이다.
014_0812_c_01L復次法中第一法名爲涅槃如『阿毘曇』中云何有上法一切有爲法及虛空非智緣盡云何無上法智緣盡智緣盡是卽涅槃涅槃中亦無涅槃相槃空是第一義空
【문】 만일 열반이 공하다면 모양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성인은 3승(乘)의 수레를 타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인가? 또 온갖 부처님 법은 모두가 열반을 위하여 설명된 것이니, 마치 뭇 물의 흐름은 모두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014_0812_c_06L問曰若涅槃空無云何聖人乘三種乘入涅槃又一切佛法皆爲涅槃故說譬如衆流皆入于海
【답】 열반은 있고 이것은 바로 으뜸가는 보배요 위없는 법이다. 이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고, 둘째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탐애(貪愛) 등의 모든 번뇌가 끊어지면 이것을 유여열반이라 하고 성인이 이 세상에서 받은 바의 5중(衆)이 모두 다하여 다시는 받지 않게 되는 것을 바로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014_0812_c_09L答曰有涅槃是第一寶無上是有二種一者有餘涅槃無餘涅槃愛等諸煩惱斷是名有餘涅槃聖人今世所受五衆盡更不復受名無餘涅槃
“열반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중생이 열반이라는 이름을 듣고 삿된 소견을 내면서 열반이라는 음성에 집착하면서 쓸모없는 이론으로 “있다. 없다”고 하므로 그런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열반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014_0812_c_13L不得言涅槃無以衆生聞涅槃名生邪見著涅槃音聲而作戲論若有若無以破著故說涅槃空
만일 사람이 있다는 것에 집착하면 그것은 세간에 집착한 것이요 만일 없다는 것에 집착하면 그것은 열반에 집착한 것이니, 이 범부가 집착한 열반을 깨뜨리는 것이며 성인이 얻은 바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인은 온갖 법 가운데서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014_0812_c_15L若人著有是著世閒若著無則著涅破是凡人所著涅槃不破聖人所何以故聖人於一切法中不取相故
또 탐애 등의 모든 번뇌를 가정으로 이름을 붙여 속박이라 하는데 만일 도를 닦아서 이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으면 곧 열반이라 하나니, 다시 어떤 법이 있어서 열반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014_0812_c_18L復次愛等諸煩惱假名爲縛若修道解是縛得解脫卽名涅槃更無有法名爲涅槃
마치 사람이 차꼬를 차고 있다가 벗어나서도 쓸모없는 의론을 하며 “이것은 차꼬요, 이것은 다리인데 어느 것이 벗어난 것일까”고 한다면, 이 사람은 가소롭게도 다리와 차꼬 밖에서 다시 벗어남을 구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도 역시 그와 같아서 5중(衆)의 차꼬를 여의고 다시 해탈하는 법을 구하는 것이다.
014_0812_c_21L如人被械得脫而作戲論是械是腳何者是解脫是人可怪械外更求解脫衆生亦如是離五衆械更求解脫法
014_0813_a_01L또 온갖 법은 제일의(第一義)를 여의지 않고 제일의는 모든 법의 실상을 여의지 않으면서 모든 법의 실상을 공하게 하나니, 이것을 바로 제일의공이라 하며 이와 같은 등의 여러 가지를 제일의공이라 하는 것이다.
014_0813_a_01L復次一切法不離第一義第一義不離諸法實相能使諸法實相空是名爲第一義空如是等種種名爲第一義空
유위공(有爲空)과 무위공(無爲空)이라 함의 유위의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으로써 이른바 5중(衆)과 12입(入)과 18계(界) 등이요 무위의 법은 인연이 없는 것으로써 항상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서 마치 허공과 같다.
014_0813_a_04L有爲空無爲空有爲法名因緣和合生所謂五衆十二入十八界等爲法名無因緣常不生不滅如虛空
이제 유위의 법에서는 두 가지의 인연 때문에 공한 것이니, 첫째는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으며 그리고 통상 있는 모양에서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공하다. 둘째는 유위의 법은 유위의 법의 모양이 공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014_0813_a_07L今有爲法二因緣故空一者無我我所及常相不變異不可得故空有爲法有爲法相空不生不滅所有故
【문】 나와 내 것[我所]과 그리고 항상 있는 모양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공해야 하지만 어찌해야 “유위의 법은 유위의 법의 모양이 공하다”고 하는가?
014_0813_a_11L問曰我所及常相不可得故應空云何言有爲法有爲法相空
【답】 만일 중생이 없다면 법은 의지할 데가 없다. 또 항상 없기 때문에 머무르는 때도 없고 머무르는 때가 없기 때문에 얻을 수도 없으며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법도 역시 공하다.
014_0813_a_12L若無衆生法無所依又無常故住時無住時故不可得知是故法亦
【문】 유위의 법 안에서 항상 있는 모양을 얻을 수 없을 때 그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중생의 공함[衆生空]이 되는가? 아니면, 법의 공함[法空]인가?
014_0813_a_15L問曰有爲法中常相不可得不可得者爲是衆生空爲是法空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나를 헤아리면서 항상하다 하나니, 이 항상하다는 것이 공하면 곧 중생이 공한 데로 들어간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음으로써 항상함을 삼는다. 마치 범천왕(梵天王)이 이 4대(大)를 설명하면서 ‘4대로 조작된 물질은 모두가 다 항상 없는[無常] 것이지만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은 바로 항상 있는[常] 것이다’고 했으니, 이 항상 있는 것이 공하면 법이 공한 데로 들어간다”고 한다.
014_0813_a_16L答曰人言我心顚倒故計我爲常是常空則入衆生空有人言以心爲常如梵天王說是四大四大造色悉皆無常心意識是常是常空則入法空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5중(衆)은 곧 항상 있는 것이다. 마치 물질[色衆]은 비록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소멸하지 않으며, 그 밖의 4중(衆)은 마치 마음과 같다. 5중이 공함을 말하면 그것이 곧 법의 공함이니, 그러므로 항상 있는 것의 공함도 역시 법의 공안에 들어간다”고 한다.
014_0813_a_20L或有人言五衆卽是常如色衆雖有變化而亦不滅餘衆如心說五衆空卽是法空是故常空亦入法空中
014_0813_b_01L또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이 공하다 함은 수행하는 이는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의 실상(實相)을 관하면서 “짓는 이가 없고 인(因)과 연(緣)이 화합한 까닭에 있는 것이니, 모두 이것은 허망한 것이요 생각과 분별에서 생기는지라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그 두 중간에도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014_0813_a_23L復次爲法無爲法空者行者觀有爲法爲法實相無有作者因緣和合故有皆是虛妄從憶想分別生不在內在外不在兩中閒
범부는 뒤바뀐 소견 때문에 있다 하지만 지혜로운 이면 유위의 법에 대하여 그의 모양을 얻지도 못하고 다만 임시 붙인 이름[假名]일 뿐임을 알면서 이 붙인 이름으로써 범부를 인도하되 그것은 거짓이어서 진실이 없고 생기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는 줄 알므로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
014_0813_b_04L凡夫顚倒見故有智者於有爲法不得其相知但假名以此假名導引凡夫知其虛誑無實生無作心無所著
또 모든 성현은 유위의 법을 반연하지 않으면서 도의 과위[道果]를 얻나니, 유위의 법은 공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이요 유위의 법에 대하여 마음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014_0813_b_07L復次諸賢聖人不緣有爲法而得道果以觀有爲法空於有爲法心不繫著故
또 유위를 여의면 곧 무위는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유위의 법의 실상이 곧 무위이기 때문이니, 무위의 모양이란 유위가 아닌데 다만 중생들이 뒤바뀌어 있기 때문에 분별하며 설명할 뿐이다.
유위의 모양은 나고[生] 멸하고[滅] 머무르고[住] 달라지거니와[異] 무위의 모양은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나니, 이것이 부처님의 도에 들어가는 첫 문이다.
014_0813_b_09L復次離有爲則無無爲所以者何有爲法實相卽是無爲無爲相者則非有爲但爲衆生顚倒故分別說有爲相者無爲相者不生不滅不住不異是爲入佛法之初門
만일 무위의 법에 모양이 있다면 그것은 곧 유위이다. 유위의 법에 모양이 생긴다면 그것은 곧 쌓임의 진리[集諦]이고, 모양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곧 다함의 진리[眞諦]이다. 만일 쌓이지 않는다면 짓지도 않고 만일 짓지도 않는다면 사라지지도 않나니, 이것을 무위법의 여실한 상이라 한다.
014_0813_b_14L若無爲法有相則是有爲有爲法生相者則是集滅相者則是盡諦若不集則不作若不作則不滅是名無爲法如實相
만일 이 모든 법의 실상을 얻으면 다시는 나고 사라지고 머무르고 달라지는 모양 안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때에는 유위의 법이 무위의 법과 함께 합해지는 것도 보지 않고 무위의 법이 유위의 법과 함께 합해지는 것도 보지 않으며 유위의 법이나 무위의 법에 대하여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위의 법이 된다.
014_0813_b_17L若得是諸法實相則不復墮生異相中是時不見有爲法與無爲法不見無爲法與有爲法合於有爲無爲法不取相是爲無爲法
014_0813_c_01L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을 분별하면 유위와 무위에 대하여 장애가 있게 되기 때문이니, 만일 모든 생각과 분별을 끊으면 모든 반연이 소멸하고 반연이 없는 진실한 지혜로써 생기는 수효 안에 떨어지지 않으면 곧 안온하면서 항상 변함이 없고 즐거운 열반을 얻게 된다.
014_0813_b_21L所以者何若分別有爲法無爲法則於有無爲而有㝵若斷諸憶想分別諸緣以無緣實智不墮生數中則得安隱常樂涅槃
【문】 앞의 다섯 가지의 공은 모두가 따로따로 설명하면서 지금의 유위공과 무위공은 무엇 때문에 합쳐서 설명하는 것인가?
014_0813_c_02L問曰前五空皆別說今有爲無爲空何以合說
【답】 유위와 무위의 법은 서로가 상대하면서 존재한다. 만일 유위를 제거시키면 무위는 없고 만일 무위를 제거시키면 유위는 없나니, 이 두 가지의 법은 온갖 법을 포섭한다.
수행하는 이는 유위의 법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한 것 등의 허물을 관찰하면 무위의 법이 이익되게 하는 곳의 광대함을 알게 되나니, 이 때문에 두 가지 일을 합쳐서 설명한다.
014_0813_c_03L答曰有爲無爲法相待而有若除有爲則無無若除無爲則無有爲是二法攝一切法行者觀有爲法無常空等過知無爲法所益處廣是故二事合說
【문】 유위의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며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이런 것은 그럴 수 있지만 무위의 법은 인연으로 생기는 법이 아니며 부서지는 것도 없고 무너지는 것도 없어서 항상 허공과 같은데 어떻게 공하다 하는가?
014_0813_c_07L問曰有爲法因緣和合生無自性故此則可爾無爲法非因緣生法破無壞常若虛空云何空
【답】 마치 먼저의 설명과 같아서 만일 유위를 제외하면 무위는 없으며 유위의 실상이 바로 무위이다. 마치 유위가 공하면 무위도 역시 공하나니, 이 두 가지 일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014_0813_c_10L答曰如先若除有爲則無無爲有爲實相卽是無爲如有爲空無爲亦空以二事不異故
또 어떤 사람은 유위법의 허물을 듣고서 무위법을 집착하나니,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結使]가 생긴다. 마치 아비담(阿毘曇) 안에서의 설명과 같다. 89의 유위법에서의 반연은 여섯 가지이고 무위법에서의 반연은 세 가지이니,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014_0813_c_13L復次有人聞有爲法過罪著無爲法以著故生諸結使如阿毘曇中說八十九有爲法緣六無爲法三當分別
욕계의 속박이 다하는 진리[欲界繋盡諦]에서 끊어야 할 무명의 번뇌[無明使]는 혹 유위의 반연이기도 하고 혹 무위의 반연이기도 하다. 어느 것이 유위의 반연이냐 하면 다함의 진리에서 끊을 바 유위의 법이 반연하는 결사와 상응한 무명의 결사요, 어느 것이 무위의 반연이냐 하면 다함의 진리에서 끊을 바 유위의 법이 반연하는 결사와 상응하지 않는 무명의 번뇌이다.
014_0813_c_16L欲界繫盡諦所斷無明使或有爲緣或無爲緣何者有爲緣盡諦所斷有爲法緣使相應無明使何者無爲緣盡諦所斷有爲法緣使不相應無明使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무명도 역시 그와 같나니, 이 번뇌 때문에 착하지 않은 업[不善業]을 일으키고 착하지 않은 업 때문에 세 가지의 악도(惡道)에 떨어진다. 이 때문에 무위의 법은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014_0813_c_20L無色界無明亦如以此結使故能起不善業不善業故墮三惡道是故言無爲法空
014_0814_a_01L무위의 법이 반연하는 번뇌[結使]는 의심[疑]과 삿된 소견[邪見]과 무명(無明)이다. 의심이란 열반의 법 가운데서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고 의심하는 것이요 삿된 소견이란 만일 마음을 내면서 “결단코 열반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 삿된 의심과 상응한 무명과 그리고 단순한 무명과 합하여져서 무명의 번뇌가 된다.
014_0813_c_22L無爲法緣使邪見無明疑者於涅槃法中有耶無耶邪見者若生心言定無涅是邪疑相應無明及獨無明合爲無明使
【문】 만일 무위의 법이 공하다고 한다면 삿된 소견과는 어떻게 다른가?
014_0814_a_03L問曰若云無爲法空與邪見何異
【답】 삿된 소견을 지닌 사람은 열반을 믿지도 않고 그런 뒤에 마음을 내면서 “열반의 법은 없다”고 하는데, 무위의 공이라 하면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니, 이런 것이 다르다.
014_0814_a_04L答曰邪見人不信涅槃然後生心言定無涅槃法無爲空者破取涅槃相是爲異
또 만일 사람이 유위를 버리고 무위에 집착하면 집착하기 때문에 무위는 곧 유위가 되나니, 이 때문에 비록 무위를 깨뜨린다 하더라도 삿된 소견이 아니다. 이것을 유위와 무위의 공이라 한다.
014_0814_a_06L復次若人捨有爲著無以著故無爲卽成有爲以是故破無爲而非邪見是名有爲無爲空
필경공(畢竟空)35)이라 함은 유위공과 무위공으로써 모든 법을 깨뜨려 남는 것이 없게 하나니, 이것을 필경공이라 한다. 마치 번뇌가 다한 아라한을 필경 청정하다[畢竟淸淨]고 하며 아나함(阿那含)에서부터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의 욕망을 여읜 이를 마침내 청정하지 않다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내공(內空)ㆍ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시방공(十方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 및 무위공(無爲空)이요 다시는 그 밖에 공하지 않는 법이 없나니, 이것을 필경공이라 한다.
014_0814_a_08L畢竟空以有爲空無爲空破諸法令無有遺餘是名畢竟空如漏盡阿羅名畢竟淸淨阿那含乃至離無所有處欲不名畢竟淸淨此亦如是外空內外空十方空第一義空爲空無爲空更無有餘不空法是名畢竟空
또 만일 사람이 일곱 세상 또는 백천만억의 한량없는 세상 동안에 귀족(貴族)이었으면 이것을 필경 귀족이라 하고 한 세상 동안이나 두세 세상 귀족이었으면 진실한 귀족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필경공도 역시 그와 같아서 본래부터 결정되고 진실하여 공하지 않는 것이 없다.
014_0814_a_15L復次若人七世百千萬億無量世貴族是名畢竟貴不以一世三世貴族爲眞貴也畢竟空亦如是從本已來無有定實不空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공이라 하더라도 맨 처음에는 공하지 않았나니, 마치 하늘과 물건을 창조한 시초와 그리고 명초(冥初) 때의 작은 티끌과 같다”고 하나, 이들도 모두가 공하다. 왜냐하면 결과가 무상(無常)하면 원인도 역시 무상하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은 결과를 짓지도 않고 또한 원인도 짓지 않는 것처럼, 하늘과 작은 티끌 등도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
014_0814_a_18L有人今雖空最初不空如天造物始及冥初微塵是等皆空何以故果無因亦無常如虛空不作果亦不作天及微塵等亦應如是
014_0814_b_01L만일 이것이 항상 있는 것이라면 무상한 것을 내지 않아야 된다. 만일 과거에 일정한 모양이 없었으면 미래와 현재의 세상에서도 역시 그와 같으며 3세(世) 동안에 하나의 법도 일정하거나 진실하여 공하지 않는 것이 없나니, 이것을 필경공이라 한다.
014_0814_a_22L若是常應生無常若過去無定相未來現在世亦如是於三世中無有一法定實不空者是名畢竟空
【문】 만일 3세가 온통 공하여 작은 티끌과 한 생각까지도 있는 바가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아주 두려워할 일이다. 모든 지혜로운 사람은 선정의 즐거움 때문에 세간의 즐거움을 버리고 열반의 즐거움 때문에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나니, 이제 필경공 안에서는 열반까지도 없는데 어떤 법에 의지하여 열반을 버리게 되는가?
014_0814_b_02L問曰若三世都空乃至微塵及一念無所有者則是大可畏處諸智慧人以禪定樂故捨世閒樂以涅槃樂故捨禪定樂今畢竟空中乃至無有涅槃依止何法得捨涅槃
【답】 나를 집착함이 있는 사람이 하나다, 다르다 하는 모양으로 모든 법을 분별하나니, 이와 같은 사람이 두려운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범부의 사람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해야 할 곳은 이른바 나가 없고 내 것[我所]이 없다는 그것이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014_0814_b_06L答曰有著吾我人以一異相分別諸法是之人則以爲畏如佛說凡夫人大驚怖處所謂無我無我所
또 유위의 법에는 3세(世)가 있고 유루(有漏)의 법이기 때문에 집착하는 일을 낸다. 열반은 온갖 애착이 끊어진 것이라 하는데 어떻게 열반에 대하여 버리거나 여의는 일을 구하겠는가.
014_0814_b_09L復次有爲法有三世以有漏法故生著處涅槃名一切愛著斷云何於涅槃而求捨
또 마치 비구가 4중금(重禁)을 깨뜨리면 이것을 필경파계(畢竟破戒)라 한 것과 같나니, 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마치 5역죄(逆罪)를 지었으면 결국에는 세 가지의 선도(善道)를 닫아버리는 것과 같고 만일 성문의 깨달음[證]을 취하면 결국에는 부처님이 될 수가 없는 것과 같아서 필경공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법에서 필경 공이요 다시는 남는 것이 없다.
014_0814_b_12L復次如比丘破四重禁是名畢竟破戒不任得道又如作五逆罪畢竟閉三善道若取聲聞證者畢竟不得作佛畢竟空亦如是於一切法畢竟無復有餘
【문】 온갖 법이 필경 공이라는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3세(世)와 시방의 모든 법은 법의 모양과 법의 머무름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진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법이라도 진실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법은 허망한 것이 되지만 만일 하나의 법도 진실한 것이 없다면 역시 모든 허망한 법도 이 필경공이 없어야 한다.
014_0814_b_16L問曰一切法畢竟空事不然何以故三世十方諸法乃至法相法住必應有實以有一法實故餘法爲虛妄若無一法實者亦不應有諸虛妄法是畢竟空
014_0814_c_01L【답】 하나의 법도 진실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의 법이라도 진실한 것이 있다 한다면 이 법은 마땅히 유위에나 무위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유위라면 유위공에서 이미 깨뜨렸고 만일 이것이 무위라면 무위공에서도 역시 깨뜨렸다. 이와 같아서 세간에서나 출세간에서도 만일 세간에서라면 내공ㆍ외공ㆍ내외공 및 대공에서 이미 깨뜨렸고 만일 출세간에서라면 제일의공에서 이미 깨뜨렸다. 색법(色法)과 무색법(無色法)과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에서도 역시 이와 같다.
014_0814_b_20L答曰無有乃至一法實者何以故若有乃至一法實者是法應有若有爲若無爲若是有有爲空中已破若是無爲無爲空中亦破如是世閒出世閒若世閒外空內外空大空已破若出世閒第一義空已破色法無色法有漏漏法等亦如是
또 온갖 법은 모두가 필경 공이라 이 필경공도 역시 공이며 공에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역시 허망하나 진실이 서로가 상대함이 없다.
또 필경공이라 함은 온갖 법을 깨뜨려서 남는 것이 없게 하기 때문에 필경공이라 하며 만일 조금이라도 남는 것이 있다면 필경공이라 하지 못한다. 만일 “서로가 상대하기 때문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면 이 일은 옳지 못하다.
014_0814_c_04L復次一切法皆畢竟是畢竟空亦空空無有法故亦無虛實相待復次畢竟空者破一切法令無遺餘故名畢竟空若小有遺餘不名畢竟若言相待故應有是事不
【문】 모든 법은 모두 다 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因)과 연(緣)으로 생긴 법은 공하지만 인과 연은 공하지 않기 때문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들보와 서까래의 인과 연이 화합한 까닭에 집이라 할 때 집은 공하면서도 들보와 서까래는 공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014_0814_c_09L問曰諸法不盡空何以故因緣所生法空而因緣不空譬如梁椽因緣和合故名舍舍空而梁椽不應空
【답】 인과 연도 역시 공하나니, 인과 연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이 아버지가 낳았기 때문에 아들이라 하고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라 하는 것이다.
014_0814_c_11L因緣亦空因緣不定故譬如父子父生故名爲子生子故名爲父
또 맨 나중의 인과 연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산과 강물과 초목과 중생의 무리는 모두가 땅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땅은 물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물은 바람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바람은 허공에 의지하여 머무르되 허공은 의지하여 머무는 데가 없는 것과 같다. 만일 근본이 의지한 데가 없으면 줄기도 의지할 데가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은 필경공인 줄 알아야 한다.
014_0814_c_13L復次後因緣無所依止故如山樹木衆生之類皆依止地地依止水水依止風依止虛空虛空無所依止若本無所依止末亦無所依止以是故當知一切法畢竟空
【문】 그렇지 않다. 모든 법은 마땅히 근본이 있어야 한다. 마치 신통(神通)으로 변화를 가져올 때 그 변화로 된 것은 비록 거짓이라 하더라도 변화하는 주인은 공하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814_c_18L問曰不然諸法應有根如神通有所變化所化雖虛而化主不空
【답】 범부들이 볼 때 그 변화로 된 물건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공이라고 여기고 변화하는 주인은 오래 있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여기지만 성인은 변화하는 주인도 전생의 업의 인연이 화합하여 생겼고 금생에서도 모든 착한 법을 쌓아서 신통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변화를 짓는다고 본다.
014_0814_c_20L答曰凡夫人見所化物不久故謂之爲空化主久故謂之爲實人見化主復從前世業因緣和合生今世復集諸善法得神通力故能作
014_0815_a_01L마치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의 후품(後品)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세 가지의 변화가 있나니, 번뇌(煩惱)의 변화요 업(業)의 변화며 법(法)의 변화법은 법신(法身)이다.이다. 이 때문에 변화하는 주인도 역시 공한 줄 알 것이다.
014_0815_a_01L如『般若波羅蜜』後品中說有三種變化煩惱變化業變化法變化 法身也是故知化主亦空
【문】 모든 견고하지 않은 것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공해야 하지만 모든 견고한 물건과 진실한 법은 마땅히 공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땅덩이와 수미산과 큰 바닷물과 해와 달과 금강(金剛) 등의 물질은 진실한 법이요 견고하기 때문에 공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땅과 수미산은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겁(劫)을 마치기 때문이며 여러 시내들은 마른 적이 있기는 하나 바다는 항상 가득 차 있고 해와 달은 하늘을 빙빙 돌면서 한이 없기 때문이다.
014_0815_a_03L問曰諸不牢固者不實故應空諸牢固物及實法不應如大地須彌山大海水金剛等色實法牢固故不應空所以者何地及須彌常住竟劫故衆川有竭海則常滿日月周天無有窮極
또 범부가 보는 것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공해야 하지만 성인이 얻은 바의 여(如)와 법성(法性)과 진제(眞際)와 열반(涅槃)의 모양은 바로 진실한 법이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결국에는 모두가 공하다고 하는가?
014_0815_a_08L又如凡人所見虛妄不眞故應空聖人所得如及法性眞際涅槃相應是實法云何言畢竟皆空
또 유위의 법은 인연으로 생겼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으나 무위의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진실이어야 하는데 또 어찌하여 필경공이라고 말하는가?
014_0815_a_11L復次有爲法因緣生不實無爲法不從因緣生故應實云何言畢竟空
【답】 견고하고 견고하지 않은 것은 정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공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견고한 것이 되지만 어떠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견고한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은 금강을 견고한 것으로 여기지만 제석(帝釋)은 마치 사람이 손으로 지팡이를 잡듯 견고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815_a_13L答曰堅固不堅固不故皆空所以者何有人以此爲堅有人以此爲不堅固如人以金剛爲牢固帝釋手執如人捉杖不以爲牢固
또 금강을 부수는 인연을 모르기 때문에 견고하다고 여기지만 만일 거북의 껍질 위에다 놓고 산양(山羊)이 뿔로 깨뜨려 버린다는 것을 알면 견고하지 않는 줄을 알 것이다.
마치 일곱 자가 되는 몸은 큰 바다를 깊다고 여기지만 라후아수라왕(羅睺阿修羅王)이 큰 바다 속에 가 서면 무릎이 물 위로 나오고 두 손으로 수미산의 꼭대기를 숨기면서 아래로는 도리천(忉利天)의 희견성(喜見城)을 내려다보나니, 이런 이에게는 바닷물이 얕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014_0815_a_17L又不知破金剛因緣故以爲牢若知著龜甲上以山羊角打破知不牢固如七尺之身以大海爲深羅睺阿修羅王立大海中膝出水上以兩手隱須彌頂下向觀忉利天喜見城此則以海水爲淺
또 수명이 짧은 사람은 땅이 항상 오래 있고 견고한 것으로 여기지만 오래도록 사는 이는 땅은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다고 본다. 마치 『불설칠일유경(佛說七日喩經)』36)에서와 같나니,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014_0815_a_22L若短壽人以地爲常夂牢固長壽者見地無常不牢固如佛說『七日喩經』佛告諸比丘
014_0815_b_01L“온갖 유위의 법은 무상하고 변하면서 모두가 다 닳아서 없어지고 만다. 겁(劫)이 다하려 할 때 큰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하면서 약초와 나무들이 모두 다 말라 죽는다. 두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조그맣게 흐르는 물들은 모두 다 바짝 마르게 되고, 세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큰 강물에서 흐르는 물들은 모두 말라버리며, 네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염부제(閻浮提) 안의 네 개의 큰 강물[四大河]과 아나바달다못[阿那婆達多池]도 모두 다 바짝 말라버린다. 다섯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큰 바다 바짝 말라버리고, 여섯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대지(大地)와 수미산 등이 모두 다 연기를 뿜어내는 것이 마치 기와 그릇을 굽는 가마와 같이 되며, 일곱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모두가 다 활활 타서 연기조차도 없어지고 땅과 수미산과 범천(梵天)까지도 온통 불바다가 되고 만다.
014_0815_b_01L一切有爲法無常變異皆歸磨滅欲盡時大旱積久藥草樹木皆悉燋有第二日出諸小流水皆悉乾竭第三日出大河流水亦都涸盡第四日出閻浮提中四大河及阿那婆達多池皆亦空竭第五日出大海乾涸第六日出大地須彌山等皆悉煙出如窯燒器第七日出悉皆熾然無復煙氣地及須彌乃至梵天火皆然滿
그때 새로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난 천인이 이 불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벌써 범궁(梵宮)이 다 탔습니다. 여기까지 번져 오지 않을까요’라고 하면, 그보다 먼저 난 하늘들은 그 뒤에 난 하늘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일찍이 여기서 살고 있었는데 범궁까지 타고는 그곳에서 꺼지면서 여기까지는 번지지 않았고’라고 한다. 이렇게 삼천대천세계를 다 태운 뒤에는 재나 숯까지도 없어진다.”
014_0815_b_10L爾時新生光音天者見火怖畏言燒梵宮將無至此先生諸天慰喩後生天言曾已有此正燒梵宮於彼而滅不來至此燒三千大千世界已無復灰炭
이어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큰 사건을 그 누가 믿겠느냐. 오직 눈으로 직접 본 이라야 믿게 될 뿐이다. 또 비구들아, 지나간 세상에 수열다라(須涅多羅)라는 외도(外道)의 스승이 있었다. 욕망을 여의고 4범행(梵行)을 행하였으며 그의 한량없는 제지들도 역시 욕망을 여의게 되었는데, 수열다라는 생각하기를 ‘나는 제자들과는 같이 한 곳에 나지 않아야 하며 이제 인자한 마음[慈心]을 깊이 닦아야겠다’고 하고, 이 사람은 인자한 마음을 깊이 생각한 까닭에 광음천에 가 나게 되었다.”
014_0815_b_15L佛語比丘如此大事誰信之者唯有眼見乃能信耳比丘過去時須涅多羅外道師離欲行四梵行量弟子亦得離欲須涅多羅作是念我不應與弟子同生一處今當深修慈心此人以深思慈故生光音天
부처님은 이어서 말씀하시되 “그 수열다라는 바로 지금의 나의 몸이다. 나는 그때에 눈으로 이 일을 똑똑히 보았었다”고 하셨나니, 이 때문에 견고하고 진실한 물건도 모두가 다 소멸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014_0815_b_20L須涅多羅者我身是也我是時眼見此事以是故當知牢固實物皆悉歸滅
【문】 그대는 필경공(畢竟空)을 설명하면서 무엇 때문에 무상(無常)한 일을 말하고 있는가? 필경공은 지금도 곧 그것은 공하지만 무상은 지금은 있다가 나중에 공한 것이다.
014_0815_b_23L問曰汝說畢竟空何以說無常畢竟空今卽是空無常今有後空
014_0815_c_01L【답】 무상은 그것이 곧 공의 첫 문이다. 만일 무상을 진실하게 깨달아 알면 모든 법은 곧 공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처음에 네 가지의 행[四行]으로써 세간은 무상하다고 관찰한다. 만일 집착하던 물건을 보게 되면 무상함을 느끼고 무상함을 느끼면 괴로움이 생기며 괴롭기 때문에 마음에 싫증을 내게 된다. 만일 무상하고 공한 모양이면 취할 수가 없어서 마치 환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이것을 공하다 하며, 바깥의 물건이 이미 공한지라 안의 주인도 역시 공하나니, 이것을 나가 없다[無我]고 한다.
014_0815_c_01L答曰無常則是空之初門若諦了無諸法則空以是故聖人初以四行世閒無常若見所著物無常無常則能生苦以苦故心生厭離若無常則不可取如幻如化是名爲空外物旣空內主亦空是名無我
또 필경공은 바로 진실한 공[眞空]이 된다. 두 가지의 중생이 있나니, 첫째는 애착[愛]을 많이 익힌 이고, 둘째는 소견[見]을 많이 익힌 이다. 애착이 많은 이는 기뻐하면서 애착하게 되나, 애착한 바가 무상하기 때문에 근심과 고통이 생기므로 이런 사람을 위하여 “그대가 애착하는 물건은 무상이 파괴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만일 이 애착하던 물건에서 고통이 생긴다면 애착을 내지 않아야 된다”고 말해 주나니, 이것을 조작이 없는 해탈의 문[無作解脫門]이라 한다.
014_0815_c_07L復次畢竟空是爲眞空有二種衆生多習愛多習見愛多者喜生著以所著無常故生憂苦爲是人說汝所著物無常壞故汝則爲之生苦若此所著物生苦者不應生著是名說無作解脫
소견이 많은 이는 모든 법을 분별하게 되면서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삿된 소견에 집착하나니, 이런 사람을 위해서는 곧장 “모든 법은 필경공이다”고 설명하여 준다.
014_0815_c_13L見多者爲分別諸法以不知實故而著邪見爲是人故直說諸法畢竟
또 만일 말한 바가 있으면 이는 모두 깨뜨릴 수 있나니,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 보는 대상도 이미 공한지라 보는 주인도 역시 공하나니, 이것을 필경공이라 한다.
014_0815_c_15L復次若有所說皆是可破可破故所見旣空見主亦空是名畢竟空
그대는 말하기를 “성인이 얻게 된 법은 마땅히 진실해야 한다”고 하는데, 성인의 법으로는 3독(毒)을 소멸시킬 수 있어서 뒤바뀐 것이거나 거짓이 아니며 중생들로 하여금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여의면서 열반에 이를 수 있게 하나니, 이것이 비록 이름은 진실하다 하더라도 모두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먼저는 없다가 지금은 있다가 나중에는 없어지고, 때문에 받을 수도 없고 집착할 수도 없나니, 그러므로 역시 공한 것이요 진실이 아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벌유경(栰喩經)』37)에서의 말씀과 같이 착한 법조차도 오히려 버려야 하겠거늘 하물며 착하지 않은 일이겠는가.
014_0815_c_16L汝言聖人所得法應實以聖人法能滅三毒非顚倒虛誑能令衆生離老病死苦得至涅槃是雖名實從因緣和合生故先無今有今有後無故不可受不可著故亦空非實如佛說『栰喩經』善法尚應捨何況不
014_0816_a_01L또 성인은 유위무루(有爲無漏)의 법은 유루(有漏)법의 인연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유루의 법은 허망하며 진실하지 않은 인연에서 생기는 법인데 어찌하여 진실한 것이 되겠는가.
014_0815_c_23L復次聖人有爲無漏法從有漏法緣生有漏法虛妄不實緣所生法何爲實
유위의 법을 여의면 무위의 법도 없다 함은 먼저 설명한 것과 같다. 유위법의 실상(實相)이 곧 무위법이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마침내 얻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필경공이라 한다.
014_0816_a_02L離有爲法無無爲法如先說有爲法實相卽是無爲法以是故一切法畢竟不可得故名爲畢竟空
무시공(無始空)38)이라 함은 세간의 중생이나 또는 법이 모두가 비롯됨이 없다[無始]는 것이다. 마치 금생은 전세의 인연에서 존재하고 전세는 다시 그 전세에서 존재한다. 이와 같이 차츰차츰 나아가도 중생에게 그 비롯됨이 없는 것처럼 법도 역시 그와 같다. 왜냐하면 만일 먼저 태어나고 뒤에 죽는다면 죽음을 좇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고, 태어났어도 역시 죽음이 없을 것이며 만일 먼저 죽고 뒤에 태어난다면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을 것이며 또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죽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그 비롯됨이 없다.
014_0816_a_04L無始世閒若衆生若法皆無有始今生從前世因緣有前世復從前世如是展轉無有衆生始法亦如是何以故若先生後死則不從死故生生亦無死若先死後有生則無因無亦不生而有死以是故一切法則無有始
마치 경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중생은 그 비롯됨이 없다. 무명(無明)이 가리고 애욕에 얽매어서 생사(生死)에 가고 오고 하나 그 비롯됨은 얻을 수 없다”고 하셨나니, 이 비롯됨이 없는 법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시공이라 한다.
014_0816_a_11L如經中說佛語諸比丘衆生無有始無明覆愛所繫往來生死不可得破是無始法故名爲無始空
【문】 비롯됨이 없다[無始]는 것은 바로 진실이라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중생과 법에 비롯됨이 있다[有始] 하면 곧 끝이 있다는 소견[邊見]에 떨어지고 또한 인연이 없다는 소견[無因見]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등의 허물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마땅히 중생과 법은 그 비롯됨이 없다고 설명해야 된다. 그런데 이제 무시공으로써 비롯됨이 없는 것을 깨뜨리면 도리어 비롯됨이 있다는 소견에 떨어지고 만다.
014_0816_a_13L問曰無始是實不應破何以故若衆生及法有始者卽墮邊見亦墮無因遠離如是等過故應說衆生及法無始今以無始空破是無始則還墮有始見
【답】 이제 무시공으로써 비롯됨이 없다는 소견을 깨뜨리면서 또 비롯됨이 있다는 소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을 불에서 구하면서 깊은 물속을 집착하지 않아야 하듯이 이제 이 비롯됨이 없음을 깨뜨리면서도 역시 비롯됨이 있는 속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이다.
014_0816_a_18L答曰今以無始空爲破無始見又不墮有始見譬如救人於火不應著深水中今破是無始亦不應著有始是則行於中道
【문】 어찌하여 비롯됨이 없음을 깨뜨리는가?
問曰云何破無始
014_0816_b_01L【답】 끝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끝이 없다면 뒤가 없을 것이요 끝이 없어서 뒤가 없다면 역시 그 중간도 없다. 만일 비롯됨이 없다면 온갖 지혜를 지닌 사람[一切智人]을 깨뜨리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세간이 끝이 없다면 그 비롯됨을 알지 못하고 그 비롯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지혜를 지닌 사람이 없게 된다. 만일 온갖 지혜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비롯됨이 없다고 하지 못한다.
014_0816_a_21L答曰以無窮故若無窮則無後無窮無後則亦無中若無始則爲破一切智人所以者何若世閒無窮則不知其始不知始故則無一切智人若有一切智人不名無始
또 만일 중생의 모양을 취하거나 또 모든 법이 동일한 모양[一相]과 다른 모양[異相]을 취하면 이 동일하다, 다르다 하는 모양으로 지금 세상에서 그 전의 세상을 추구하고 그 전의 세상에서 다시 그 전의 세상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중생과 법에 대해 차츰차츰 추구해도 그 비롯됨을 얻을 수 없으면 비롯됨이 없다는 소견을 내게 된다. 이런 소견은 허망한 것인데 동일하다 다르다 하는 것으로 그 근본을 삼았기 때문이니 이는 깨뜨려야 한다.
014_0816_b_03L復次若取衆生又取諸法一相異相以此一異相從今世推前世從前世復推前世是展轉衆生及法始不可得則生無始見是見虛妄以一異爲本是故應
마치 유위공(有爲空)으로 유위의 법을 깨뜨리면 이 유위공이 다시 곧 근심거리가 되므로 다시 무위공(無爲空)으로 무위의 법을 깨뜨리는 것처럼 이제 비롯됨의 없음으로 비롯됨의 있음을 깨뜨리면 비롯됨이 없는 것이 다시 곧 근심거리가 되므로 다시 무시공으로써 이 비롯됨이 없음을 깨뜨리므로 이것을 무시공이라 한다.
014_0816_b_08L如有爲空破有爲法是有爲空卽復爲患復以無爲空破無爲法今以無始破有始無始卽復爲患復以無始空破是無始是名無始空
【문】 만일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중생이 생사를 왕래하면서도 그 본제(本際)를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가?
014_0816_b_11L問曰爾者佛何以說衆生往來生死本際不可得
【답】 중생으로 하여금 오랜 옛날부터 생사를 왕래하면서 큰 괴로움을 당한 것을 알아 싫증내는 마음을 내게 하려 함에서다. 마치 경의 말씀과 같이, 한 사람이 세간에 있으면서 한 겁(劫) 동안에 몸으로 받은 피해(被害)를 헤아린다 할 때 그가 흘린 모든 피를 한데 모으면 바닷물보다 더 많고 울면서 쏟은 눈물과 어머니의 젖을 먹은 것도 모두가 그만큼 하여 몸의 뼈를 한데 쌓으면 비부라산(毘浮羅山)보다 더 크다.
014_0816_b_13L答曰欲令衆生知夂遠已來往來生死爲大苦生厭患心如經說一人在世閒計一劫中受身被害時聚集諸血多於海水啼泣出淚及飮母乳皆亦如是積集身骨過於毘浮羅山
비유하건대 마치 천하의 초목을 모두 베어서 두 치[二寸] 되는 산가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曾祖)를 센다 해도 오히려 다할 수 없으며, 또한 땅을 모조리 다 이겨 환(丸)을 만들어서 그 어머니와 증조모(曾祖母)를 센다 해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겁 동안에 나고 죽는 고뇌를 받으면서도 처음의 비롯됨을 얻을 수 없으므로 마음에 두려움을 내면서 모든 번뇌[結使]를 끊는 것이다.
014_0816_b_18L譬喩斬天下草木爲二寸籌其父曾祖猶不能盡又如盡以地爲泥丸數其母及曾祖母猶亦不盡是等無量劫中受生死苦惱初始不可得故心生怖畏斷諸結使
014_0816_c_01L 마치 무상(無常)하다 함이 비록 치우친 소견이기는 하나 부처님께서는 이 무상한 것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듯이 비록 됨이 없는[無始] 것도 그와 같다. 비록 이것이 치우친 소견이기는 하나 역시 이 비롯됨이 없는 것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며 중생을 제도하면서 싫증내는 마음을 내게 하기 때문에 비롯됨의 없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실로 비롯됨의 없음이 있다 한다면 무시공을 말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014_0816_b_22L如無常雖爲邊而佛以是無常而度衆生始亦如是雖爲是邊亦以是無始而度衆生爲度衆生令生厭心故說有無始非爲實有所以者何若有無始應說無始空
【문】 만일 비롯됨이 없음이 진실한 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람을 제도하는 것인가?
014_0816_c_04L問曰若無始非實法何以度人
【답】 진실한 법 안에서는 사람을 제도하면서도 법을 설할 만한 언어가 없다. 사람을 제도하는 이것은 모두 유위(有爲)이고 거짓된 법이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은 방편의 힘으로써 이 비롯됨이 없음을 말씀하신다.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말씀하기 때문에 받는 이도 역시 집착이 없게 되고, 집착이 없기 때문에 싫증내는 마음을 내게 된다.
014_0816_c_05L答曰實法中無度人諸可說法語言度人皆是有爲虛誑法以方便力故說是無始以無著心說故受者亦得無著無著故則生厭離
또 숙명지(宿命智)로써 중생이 생사를 계속함이 끝이 없음을 보시나니, 이때에는 진실한 것이 된다. 또 혜안(慧限)으로는 중생과 법은 필경공임을 보시나니, 이 때문에 무시공을 말씀하신다.
014_0816_c_08L復次以宿命智見衆生生死相續無是時爲實若以慧眼則見衆生及法畢竟空以是故說無始空
마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중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항상하다는 관[常觀]이 진실하지 않다면 무상하다는 관[無常觀] 역시 진실하지 않으며, 괴롭다는 관[苦觀]이 진실하지 않다면 즐겁다는 관[樂觀] 역시 진실하지 않다.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항상하다[常]ㆍ즐겁다[樂]는 것은 뒤바뀐 것이고 무상하다[無常]ㆍ괴롭다[苦]는 것은 진리라고 말씀하신다.
014_0816_c_11L如『般若波羅蜜』中說常觀不實無常觀亦不苦觀不實樂觀亦不實而佛說樂爲倒無常苦爲諦
중생들은 대개가 항상함ㆍ즐거움에 집착하고, 무상함ㆍ괴로움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무상하다는 진리와 괴롭다는 진리로써 이 항상하고 즐겁다 하는 뒤바뀜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함ㆍ괴로움을 말하며 진리를 삼으시면서도, 만일 중생이 무상함과 괴로움에 집착하면 무상함이나 괴로움 역시 공임을 말씀하신다.
014_0816_c_14L以衆生多著常不著無常是故以無常苦諦是常樂倒以是故說無常苦爲諦衆生著無常苦者說無常苦亦空
비롯됨이 있음과 비롯됨이 없다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롯됨이 없는 것으로 비롯됨이 있다는 집착을 깨뜨린다. 만일 비롯됨이 없다는 것에 집착하면 다시 비롯됨이 없다는 것으로 공을 삼으니, 이것을 무시공이라 한다.
014_0816_c_17L無始亦如是無始能破著始倒著無始復以無始爲空是名無始空
【문】 비롯됨이 있는 법[有始法]도 역시 삿된 소견이므로 마땅히 깨뜨려야겠지만, 무엇 때문에 단지 비롯됨이 없음을 깨뜨리는 것만을 말씀하는가?
014_0816_c_19L問曰有始法亦是邪見應當破何以但說破無始
014_0817_a_01L【답】 비롯됨이 있다면 이것은 크게 미혹된 일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비롯됨이 있으면 처음에 받은 몸은 죄와 복의 인연이 없는데도 행복하거나 불행한 곳[善惡處]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죄와 복의 인연에서 태어났다면 처음 받은 몸이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일 죄와 복이 있다면 그 앞의 몸에서 나중의 몸을 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014_0816_c_21L答曰有始是大惑所以者何若有始者初身則無罪福因緣而生善惡處若從罪福因緣而生名爲初身何以故若有罪福則從前身受後身故
만일 세간의 비롯됨이 없다면 이러한 허물이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보살은 먼저 이미 이 추악한 사견을 버리나니, 보살은 항상 비롯됨이 없음을 가지고 중생을 생각하는 일을 익히기 때문에 비롯됨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항상 인연의 법을 행하기 때문에 법에는 비롯됨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아직은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비롯됨이 없는 가운데 착오가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무시공을 말씀한 것이다.
014_0817_a_02L若世閒無始無如是咎是故菩薩先已捨是麤惡邪見菩薩常習用無始念衆生故說無始常行因緣法故言法無始未得一切智故或於無始中錯謬是故說無始空
또 비롯됨이 없는 것으로 이미 비롯됨이 있는 것을 깨뜨렸다면 공으로써 비롯됨이 있는 것을 깨뜨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비롯됨이 없는 것을 깨뜨리고자 하는 까닭에 무시공을 말씀한 것이다.
014_0817_a_06L無始已破有始不須空破有始欲破無始故說無始空
【문】 만일 비롯됨이 없는 것으로 비롯됨이 있는 것을 깨뜨렸다면, 비롯됨이 있는 것도 역시 비롯됨이 없는 것을 깨뜨릴 수 있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다만 공만으로써 비롯됨이 없는 것을 깨뜨린다 하는가?
014_0817_a_08L問曰若無始破有始者有始亦能破無始汝何以但以空破無始
【답】 이 두 가지는 비록 모두가 삿된 소견이기는 하나 차별이 있다. 곧 비롯됨이 있다[有始]는 것은 모든 번뇌와 삿된 소견을 일으키는 인연이고, 비롯됨이 없다[無始]는 것은 자비와 바른 소견[正見]을 일으키는 인연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중생들이 무시이래로 세상의 고뇌를 받는 것을 생각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고, 몸으로부터 차례로 몸을 내어 상속하면서 끊어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곧 죄와 복의 과보를 알면서 바른 소견을 내기 때문이다.
014_0817_a_10L荅曰是二雖皆邪而有差別有始起諸煩惱邪見因無始起慈悲及正見因緣所以者念衆生受無始世苦惱而生悲心知從身次第生身相續不斷便知罪福果報而生正見
만일 사람이 비롯됨이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그것이 도를 돕는 [助道] 착한 법이지만, 만일 모양을 취하면서 집착을 내면 곧 그것은 삿된 소견이다. 마치 항상하다[常]ㆍ무상하다[無常]는 소견과 같다.
014_0817_a_15L若人不著無始是助道善法若取相生著卽是邪見如常無常見
비롯됨이 있다는 소견[有始見]이 비록 비롯됨이 없다는 소견[無始見]을 깨뜨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비롯됨이 없다는 것을 깨뜨릴 수는 없다. 비롯됨이 없다는 것이 결국에는 비롯됨이 있다는 것을 깨뜨리나니, 이 때문에 비롯됨이 없다는 것이 더 뛰어나다.
014_0817_a_17L有始見雖破無始見能畢竟破無始無始能畢竟破有始是故無始爲勝
마치 착한 일이 착하지 않은 일을 깨뜨리고 착하지 않은 일이 착한 일을 깨뜨리는 경우, 비록 서로가 깨뜨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착한 일이 나쁜 일을 깨뜨리게 되는 것과 같으며, 마치 성현의 도를 얻으면 영원히 악(惡)을 짓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817_a_19L如善破不善不善破雖互相破而善能畢竟破惡如得賢聖道永不作惡
014_0817_b_01L악한 법은 곧 그렇지 못하니, 세력이 미약하고 천박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비록 5역죄(逆罪)를 일으켜 선근(善根)을 끊고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아무리 오래 가야 한 겁(劫)을 지나지 않아서 인연에 의해 지옥에서 벗어나 마침내는 도의 과위[道果]를 이루는 것과 같다.
014_0817_a_21L惡法則不然勢力微薄故如人雖起五逆罪斷善根地獄久不過一劫因緣得脫地獄終成道果
비롯됨이 없음과 비롯됨이 있음의 우열이 같지 않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롯됨이 없음의 힘이 크기 때문에 비롯됨이 있다는 것을 깨뜨리게 되다. 이 때문에 유시공(有始空)은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014_0817_b_02L無始有始優劣不同亦如是以無始力大故能破有始是故不說有始空
산공(散空)39)이라 했는데, 산(散)이란 따로따로 떨어지는 모양을 말한다. 마치 모든 법이 화합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마치 수레는 바퀴살과 바퀴테와 끌채와 바퀴통의 여러 가지가 합쳐서 수레가 되지만, 만일 떨어지고 흩어져서 저마다 딴 곳에 있게 되면 수레라는 이름을 잃게 되는 것과 같다. 5중(衆)이 화합한 인연 때문에 사람이라 할 뿐, 만일 5중이 따로따로 떨어지면 사람은 얻을 수 없다.
014_0817_b_03L散空名別離相如諸法和合故如車以輻衆合爲車若離散各在一處則失車名五衆和合因故名爲人若別離五衆人不可得
【문】 만일 그렇게 설명한다면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만을 깨뜨릴 뿐, 물질[色]은 깨뜨리지 못한다. 바퀴살과 바퀴테가 떨어져 흩어지면 수레라는 이름은 깨뜨릴 수 있되 바퀴살과 바퀴테는 깨뜨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산공도 역시 그와 같아서 5중이 떨어져 흩어지면 사람만을 깨뜨릴 수 있을 뿐 물질 중의 5중은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014_0817_b_07L問曰若如是說但破假名而不破色亦如離散輻輞可破車名不破輻散空亦如是但離散五衆可破人而不破色等五衆
【답】 물질 등도 이것은 임시로 붙인 이름이라 깨뜨리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작은 티끌[微塵]이 화합한 것을 임시로 이름 붙여 물질이라 하기 때문이다.
014_0817_b_11L答曰色等亦是假名破所以者何和合微塵假名爲色故
【문】 나는 작은 티끌을 수용하지는 않는다.40) 지금 볼 수 있는 것으로 물질을 삼으며, 이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흩어져서 공이 된다 하는가?
014_0817_b_12L問曰我不受微塵今以可見者爲色是實爲有云何散而爲空
【답】 설령 미진은 제외한다 해도 4대(大)가 화합한 인연으로 생겨서 볼 수 있는 물질이 나온 것이니, 역시 이것은 붙인 이름이다. 마치 사방의 바람이 화합하여 물위로 불면 거품 무더기가 생겨나듯이 4대가 화합하여 물질을 이루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4대가 떨어져 흩어지면 물질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014_0817_b_14L答曰若除微塵四大和合因緣生出可見色亦是假如四方風和合扇水則生沫聚大和合成色亦如是若離散四大無有色
또 이 물질은 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 및 4대가 화합했기 때문에 물질로 볼 수 있고, 모든 냄새ㆍ맛ㆍ닿임 등을 제외하면 다시는 다른 물질은 없게 된다. 지혜로써 분별하면 저마다 떨어지고 흩어져서 물질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014_0817_b_18L復次是色以香觸及四大和合故有色可見除諸香觸等更無別色以智分別各各離散色不可
014_0817_c_01L만일 물질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모든 법을 버리고 따로 물질이 있어야 함에도 다시는 다른 물질은 없나니, 이 때문에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존재하는 물질은 모두 4대(大)가 화합함으로 인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화합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가 이것은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이며 임시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흩어져야 한다.
014_0817_b_21L若色實有捨此諸法應別有色更無別色是故經言所有色皆從四大和合有和合有故皆是假名假名故可散
【문】 물질은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흩어질 수 있겠다. 하지만 4중(衆)에는 물질이 없는데 어찌하여 흩어져야 한다는 것인가?
014_0817_c_02L問曰色假名故可散四衆無色云何可散
【답】 4음(陰)도 역시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나고 늙고 머무르며 무상(無常)하다고 보기 때문에 흩어져 공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때에도 달라지고 늙는 때에도 달라지며, 머무르는 때에도 달라지고 무상한 때에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 3세(世) 가운데의 이 4중을 관해도 모두가 역시 흩어져 소멸된다. 또 마음은 반연할 바[所緣]를 따르고 대상이 없어지면 곧 소멸하며 대상이 무너지면 곧 스스로도 무너진다. 또한 이 4중은 일정하지 않으니, 반연을 따르면서 생기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불은 타는 것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나 만일 타는 경우를 여의면 불은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눈[眼]은 빛을 반연함으로 인해 안식(眼識)을 낳으나, 만일 반연할 바를 여의면 식(識)은 얻을 수 없다. 그 밖의 정식(情識)41)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17_c_03L答曰四陰亦是假名無常觀故散而爲空所以者何時異老時異住時異無常時異故三世中觀是四衆皆亦散滅復次心隨所緣緣滅則滅緣破則破復次此四衆不定隨緣生故譬如火隨所燒處爲名若離燒處火不可得因眼緣色生眼識若離所緣識不可得情識亦如是
마치 경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나타(羅陀)42)에게 말씀하시되 “이 물질[色衆]은 파괴되고 흩어지고 없어져서 아무것도 없게 되나니, 그 밖의 중(衆)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산공이라 한다.
014_0817_c_11L如經中說佛告羅陁色衆破壞散滅令無所有餘衆亦如是名散空
또 비유하건대 마치 어린아이가 흙을 모아서 궁전[臺殿]이나 성곽ㆍ마을ㆍ문[閭里]ㆍ관청[宮舍]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쌀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밀가루라 하면서 애착하고 지키다가 해가 저물어 돌아가려 할 때 그런 마음을 모두 버리고는 밟아 무너뜨리고 흩어버리는 것과 같다. 범부도 역시 그와 같아서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법 가운데서 애착하는 마음을 내다가도 만일 욕망을 여의고 모든 법을 본다면 흩어 무너뜨리고 버리게 된다. 이것을 산공(散空)이라 한다.
014_0817_c_13L復次譬如小兒聚土爲臺殿城郭閭里宮舍或名爲米或名爲麪愛著守護日暮將歸其心捨離踏壞散滅凡夫人亦如是未離欲故於諸法中生愛著心若得離欲見諸法皆散壞棄捨是名散空
또 모든 법이 합치고 모이기 때문에 저마다 이름이 있다. 범부는 이름을 따르면서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고 물들고 집착하니,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법을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그 진실을 관찰해야 한다. 이름을 쫓아서는 안 되나니, 있거나 없거나 모두가 공하다”고 하신다.
014_0817_c_18L復次諸法合集故各有名字凡夫人隨逐名字生顚倒染著佛爲說法當觀其實逐名字有無皆空
마치 『가전연경(迦旃延經)』43)에서 “쌓임의 진리[集諦]를 관찰하면 곧 없다는 소견[無見]이 없고, 사라짐의 진리[滅諦]를 관찰하면 곧 있다는 소견[有見]이 없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을 바로 산공이라 한다.
014_0817_c_21L如『迦旃延經』說集諦則無無見觀滅諦則無有見是種種因緣是名散空
014_0818_a_01L성공(性空)44)이라 함은, 모든 법의 성품은 항상 공하지만 임시의 업[假業]이 상속하는 까닭에 마치 공하지 않은 듯한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물의 성품은 스스로 찬 것[冷]이지만 불을 빌리기[假] 때문에 더워지며, 불이 그치고 오래 있으면 물은 곧 도로 차지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의 성품도 역시 그와 같아서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에는 공하여 아무것도 없음이 마치 물의 성품이 항상 찬 것과 같으며, 모든 법은 못 연(緣)이 화합하기 때문에 있음은 마치 물이 불을 만나 더워지는 것과 같다. 뭇 연이 적거나 없다면 곧 법이 없음은 마치 불이 꺼지면 끓던 물이 식는 것과 같다.
014_0817_c_23L性空諸法性常空假業相續故似若不空譬如水性自冷假火故熱止火停久水則還冷諸法性亦如是未生時空無所如水性常冷諸法衆緣和合故有如水得火成熱衆緣若少若無則無有法如火滅湯冷
마치 경에서 말씀하시기를45) “눈은 공하여 나도 없고 내 것[我所]도 없다. 왜냐하면 성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물질[色] 내지는 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한 것과 같다.
014_0818_a_06L如經說眼空無我無我所何以故性自爾色乃至法等亦復如是
【문】 이 경에서는 나와 내 것이 공함을 말했으니, 그것은 바로 중생공(衆生空)이 된다. 법공(法空)은 말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성공을 증명하겠는가?
014_0818_a_08L問曰此經說我所空是爲衆生空不說法空何證性空
【답】 이 가운데서는 성공만을 말씀하시지 중생공과 법공은 말씀하시지 않는다. 성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12입(入) 가운데에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는 것이며, 둘째는 12입의 모양[相]은 저절로 공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성문의 논[聲聞論] 중의 설명이다. 마하연(摩訶衍)의 법에서는 “12입은 나와 내 것이 없기 때문에 공하며, 12입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고 설명한다.
014_0818_a_10L答曰此中但說性空不說衆生空及法空性空有二種一者十二入中無我無我所二者十二入相自空無我無我所是聲聞論中說摩訶衍法說十二入我我所無故空十二入性無故空
또 만일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다면 저절로 법공을 얻으니, 사람들은 대개 나와 내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다만 “나와 내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나도 없고 네 것도 없다”고 말씀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이 공한 줄 알아야 한다. 만일 나와 내 것이라는 법조차 집착하지 않는다면, 어찌 나머지 법이랴.
이 때문에 중생공과 법공은 결국에는 한 뜻으로 돌아가니, 이것을 법공이라 한다.
014_0818_a_15L復次若無我無我自然得法空以人多著我及我所故佛但說無我無我所如是應當知一切法空若我我所法尚不著何況餘法以是故衆生空法空終歸一義是名性空
014_0818_b_01L다시 성(性)이란 이름은 저절로 있는 것으로 인연을 기다리지 않으니, 만일 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이는 곧 지어진 법으로서 성(性)이라 부르지 않게 된다.
모든 법 가운데에는 모두 성품이 없다. 왜냐하면 온갖 유위의 법은 인연을 좇아 생겨나는데 인연을 좇아 생겨난다면 곧 이것은 지어진 법이며, 만일 인연화합에 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법이 존재하지 않음[無法]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의 성품은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일컬어 성공(性空)이라 하는 것이다.
014_0818_a_20L復次性名自有不待因緣若待因緣則是作法不名爲性諸法中皆無性何以故一切有爲法皆從因緣從因緣生則是作法若不從因緣和則是無法如是一切諸法性不可得名爲性空
【문】 필경공이서 존재하는 바 없음을 일컬어 성공이라 한다. 그런데 어째서 거듭 말씀하는가?
014_0818_b_02L問曰畢竟空無所有是性空今何以重說
【답】 필경공이란 일컬어 ‘남음[遺餘]이 없는 것’이라 하며, 성공이란 일컬어 ‘본래부터 항상 그러한 것’이라 한다.
014_0818_b_03L答曰畢竟空名爲無有遺餘性空名爲本來常
마치 물의 성품은 찬 것인데 불을 빌리기 때문에 더워지지만 불이 없으면 다시 식는 것과 같다. 필경공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언제나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그런데 어찌하여 같다고 하는가?
014_0818_b_05L如水性冷假火故熱止火則還冷畢竟空如虛空常不生不滅不垢不云何言同
또 모든 법은 필경공이다. 왜냐하면 성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성품이 공하다. 왜냐하면 필경공이기 때문이다.
014_0818_b_07L復次諸法畢竟空何以性不可得故諸法性空何以故竟空故
또 성공은 대부분 보살이 행할 바이며, 필경공은 대부분 모든 부처님께서 행할 바이다. 왜냐하면 성공 안에는 다만 인연의 화합이 있을 뿐 진실한 성품이 없고, 필경공은 3세가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차별이 있다.
014_0818_b_09L復次性空多是菩薩所行竟空多是諸佛所行何以故性空中但有因緣和合無有實性畢竟空世淸淨有如是等差別
또 온갖 법의 성품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전체의 성품[總性]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성품[別性]이다. 전체의 성품이라 함은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ㆍ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래(無來)ㆍ무거(無去)ㆍ무입(無入)ㆍ무출(無出) 등이며, 개별적인 성품이란 불은 더운 성품이고, 물은 습한 성품이며, 마음은 분별하는 성품[識性]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사람이 모든 악한 일을 즐겨 짓기 때문에 나쁜 성품[惡性]이라 하고, 착한 일을 좋아해 쌓는 까닭에 착한 성품[善性]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014_0818_b_12L復次一切諸法性有二種一者摠性二者別性性者無常無我無生無滅無來無去無入無出等別性者如火熱性濕性心爲識性如人喜作諸惡名爲惡性好集善事故名爲善性
마치 『십력경(十力經)』46) 가운데서 말하기를 “부처님은 세간의 갖가지의 성품을 아시며, 이와 같은 모든 성품은 모두가 공하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을 성공이라 한다. 왜냐하면 만일 무상한 성품[無常性]이 진실이라면 당연히 업의 과보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고 멸하여 과거는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니, 6정(情)도 역시 대경[塵]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인연을 쌓거나 익히지도 않으며, 만일 쌓거나 익히지도 않는다면 경전을 외거나 좌선(坐禪) 등도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무상한 성품은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무상한 것조차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항상한 모양[常相]이겠는가.
014_0818_b_17L『十力經』中說佛知世閒種種性如是諸性皆空是名性空何以故若無常性是實應失業果報所以者何生滅過去不住故六情亦不受塵亦不積習因緣若無積習則無誦經坐禪等以是故知無常性不可得無常尚不可得何況常相
014_0818_c_01L 또한 괴로운 성품[苦性] 역시 얻을 수 없다. 만일 실로 이 괴로움이 있다면 물들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만일 사람이 고통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면, 모든 쾌락에 대해서도 당연히 싫어하고 두려워해야 하며, 부처님 역시 괴로운 느낌[苦受]과 즐거운 느낌[樂受]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不苦不樂受]의 이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지 않았어야 한다. 또한 괴로운 가운데서 성을 내거나, 즐거운 가운데서 좋아하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서 어리석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만일 하나의 모양이라면, 즐거운 가운데서도 성을 내어야 하고, 괴로운 가운데서도 좋아해야 할 것이나. 다만 이런 일만은 그렇지가 못한다.
014_0818_c_01L復次苦性亦不可得若實有是苦則不應生染著心若人厭畏苦痛於諸樂中亦應厭畏佛亦不應說三受苦受樂受不苦不樂受不應苦中生瞋樂中生愛不苦不樂中生癡若一相者樂中應生瞋苦中應生但是事不然
이와 같은 등의 이 괴로운 성품조차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즐거운 성품[樂性]은 허망하거늘 얻을 수 있겠는가. 또한 공한 모습[空相]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공한 모습이 있다면 죄와 복이 없고,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역시 지금의 세상과 뒤의 세상도 없기 때문이다.
014_0818_c_07L如是等苦性尚不可何況樂性虛妄而可得復次空相亦不可得所以者何若有空相則無罪福無罪福故亦無今世後世
또 모든 법은 서로 기다려[相待] 존재한다. 왜냐하면 만일 공함이 있으면 당연히 진실이 있어야 하고, 만일 진실이 있으면 당연히 공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한 성품조차도 오히려 없는데 하물며 진실함이 있겠는가.
014_0818_c_10L復次諸法相待有所以者何若有空應當有實若有實應當有空空性尚無況有實
또 만일 나가 없다면[無我] 곧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또한 지금의 세상에서 뒷세상에 이르러 죄와 복을 받는 일도 없고, 또한 업의 인연과 과보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나 없는 성품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음을 아는데 하물며 나의 성품[我性]이랴.
014_0818_c_13L復次若無我者則無縛無解亦無從今世至後世受罪福亦無業因緣果報如是等因緣知無我性尚不可得何況我性
또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는[無生無滅] 성품 역시 진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진실이라면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온갖 법이 항상하다면 죄도 없고 복도 없다. 만일 존재한다면 항상 있음[常有]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항상 없음[常無]이다.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남이 없고[不生], 존재한다면 잃을 게 없어[不失] 남이 없고 멸함이 없는 성품은 얻을 수 없다. 그러니 하물며 생멸의 성품이겠는가. 무래ㆍ무거ㆍ무입ㆍ무출 등의 모든 총체적인 성품 역시 이와 같다.
014_0818_c_16L復次無生無滅性亦不實何以故若實則墮常見若一切法常則無罪無福若有者常有者常無若無者不生有者不失如不生不滅性不可得何況生滅性無來無去無入無出等諸摠性亦如是
014_0819_a_01L 다시 모든 법의 개별적인 성품[別性] 이것 역시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불은 탈 수 있는 만들어진 물질[造色]과 능히 비추는[能炤] 두 법이 화합한 까닭에 일컬어 불이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두 가지의 법을 여의고 불이 있다면 달리 불의 작용이 있어야 하지만 달리 작용이 없다. 그러므로 불은 곧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이며 또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실로 불이라는 법이 없다면 어떻게 더운 것[熱]이 바로 불의 성품이라고 말하겠는가.
014_0818_c_21L諸法別性是亦不然何以故火能燒造色能炤二法和合故名爲若離是二法有火者應別有火用無別用以是故知火是假名亦無有若實無火法云何言熱是火性
또 더운 성품은 온갖 연(緣)에서 생겨나니, 안으로는 몸의 감관[身根]이 있고 밖으로는 물질의 접촉이 있을 때 화합하여 신식(身識)이 생겨나 더운 것이 있음을 깨달아 안다. 만일 아직 화합하지 않았다면 곧 더운 성품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더운 것이 불의 성품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014_0819_a_03L熱性從衆緣生內有身根外有色和合生身識覺知有熱若未和合則無熱性以是故知無定熱爲火性
또 만일 불이 진실로 더운 성품이 있다면 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불에 들어왔는데도 타지 않는가. 나아가 사람의 몸 속에는 불이 있는 데도 몸을 태우지 못하고, 공중의 불은 물로도 끄지 못하는가. 불에는 결정된 더운 성품이 없기 때문이고, 신통력 때문에 불이 몸을 태우지 못하는 것이다. 업의 인연으로 된 5장(藏)은 열을 내지도 않고, 신통력 때문에 물로도 없애지 못한다.
014_0819_a_06L復次若火實有熱性云何有人入火不及人身中火而不燒身空中火不能滅以火無有定熱性故神通力火不能燒身業因緣五藏不熱龍力故水不能滅
또 만일 더운 성품과 불이 다르다면 불은 곧 더운 것이 아니다. 만일 더운 것과 불이 하나라면 어떻게 더운 것이 바로 불의 성품이라고 말하겠는가. 그 밖의 성품도 역시 그와 같다. 이 전체의 성품과 개별적인 성품이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이라 한다.
014_0819_a_11L復次若熱性與火火則非熱若熱與火一云何言熱是火性餘性亦如是是摠性別性無名爲性空
또 성공이라 함은 본래부터 공한 것이다. 마치 세간의 사람은 허망하고 오래지 않다면 이것을 공하다고 여기고, 수미산이나 금강과 같은 물건과 성인이 아는 바는 진실로 공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과 같나니, 이러한 의심을 끊게 하려고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비록 견고하고 상속하면서 오래 머무른다 하더라도 모두가 역시 성품은 공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인은 지혜로 비록 중생을 제도하면서 모든 번뇌를 깨뜨린다 하더라도 그 성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 역시 공하다.
014_0819_a_14L復次性空者從本已來如世閒人謂虛妄不久者是空須彌金剛等物及聖人所知以爲眞實不空欲斷此疑故佛說是雖堅固相續久住皆亦性空聖人智慧雖度衆生破諸煩惱性不可得故是亦爲
또 사람들은 “5중(衆)ㆍ12입(入)ㆍ18계(界)는 모두가 공이지만, 단지 진여(眞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와 같은 것은 바로 진실한 성품이다”고 여기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런 의심을 끊어 주기 위해 다만 분별하시어 “5중과 진여와 법성과 실제도 모두가 역시 공하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을 성공이라 한다.
014_0819_a_20L又人謂五衆十二入十八界皆空但如法性實際是其實性佛欲斷此疑故但分別說五衆法性實際皆亦是空是名性空
014_0819_b_01L또 유위의 성품[有爲性]에 세 가지 모양이 있으니, 나고[生] 머무르고[住] 멸하는 것[滅]이다. 무위의 성품[無爲性]에도 역시 세 가지의 모양이 있으니, 나지 않고 머무르지 않고 멸하지 않는 것이다. 유위의 성품조차도 오히려 공한데 하물며 유위의 법이겠는가. 무위의 성품조차도 오히려 공한데 하물며 무위의 법이겠는가. 이러한 갖가지 인연으로써 성품은 얻을 수 없음을 일컬어 성공이라 한다.
014_0819_a_23L復次有爲性三相無爲性亦三相不生不住有爲性尚空何況有爲法無爲性尚空何況無爲法以是種種因緣不可得名爲性空
자상공(自相空)이라 했는데, 온갖 법에는 두 가지의 모양이 있나니, 전체의 모양[總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이다. 이 두 가지의 모양이 공한 까닭에 일컬어 모양이 공하다[相空]고 한다.
014_0819_b_04L自相空一切法有二種相摠相是二相空故名爲相空
【문】 어떤 것이 전체의 모양이고 어떤 것이 각각의 모양인가?
014_0819_b_06L問曰何等是摠相何等是別相
【답】 전체의 모양이란 마치 무상(無常) 등과 같다. 각각의 모양이라 함은 모든 법이 비록 모두 무상하다 하더라도 저마다 별개의 모양이 있는 것이니, 마치 땅은 단단한 모양이요 불은 더운 모양인 것과 같다.
014_0819_b_07L答曰摠相者無常等別相者諸法雖皆無常而各有別相如地爲堅相火爲熱相
【문】 먼저는 이미 성품[性]을 설명했고 지금은 모양을 설명하는데, 성품과 모양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014_0819_b_09L問曰已說性今說相相有何等異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실체에는 다름이 없으나, 이름에 차별이 있다. 성품을 설명하면 모양을 설명한 것이 되고, 모양을 설명하면 성품을 설명한 것이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불의 성품을 말하면 곧 그것이 더운 모양이고, 더운 모양을 말하면 곧 그것이 불의 성품인 것과 같다”고 한다.
014_0819_b_10L答曰
어떤 사람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014_0819_b_11L有人言其實無異名有差別說性則爲說相說相則爲說性譬如說火性卽是熱相說熱相卽是火性
“성품과 모양에는 조금의 차별이 있다. 성품은 그 자체[體]를 말하고, 모양은 ‘알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마치 석가의 제자들이 금계(禁戒)를 받아 지니는 것은 바로 성품이고, 머리를 깎고 물든 옷을 입는 것은 그 모양이며, 범지(梵志)가 스스로 그 법을 받는 것은 성품이고, 정수리에 주라(周羅)가 있고 끝이 세 갈래인 지팡이[三岐杖]를 짚는 것은 그 모양인 것과 같다.
014_0819_b_13L有人言相小有差別性言其體相言可識如釋子受持禁戒是其性剃髮割截染衣是其相梵志自受其法是其性頂有周羅執三奇杖是其相
마치 불의 열기는 그 성품이고 연기는 그 모양이며, 가까운 것은 성품이 되고 먼 것은 모양이 되는 것과 같다. 모양은 일정하지 않아서 몸에서 출현하며, 성품은 그 실체를 말한다. 마치 황색이 금의 모양으로 보이지만 속이 구리인 경우 불에 태워 돌로 갈아 보면 돌의 성품이 아닌 것을 알게 되듯이, 사람이 공경하고 공양 할 때 그가 착한 사람인 듯 보인다면 이것은 모양이 되고, 욕설을 해대고 헐뜯으며 발끈 성을 낸다면 이것은 성품이 된다.”
014_0819_b_17L如火是其性煙是其相近爲性遠爲相不定從身出性則言其實如見黃色爲金相而內是銅火燒石磨知非金如人恭敬供養時似是善人是爲罵詈毀辱忿然瞋恚便是其性
014_0819_c_01L성품의 모양과 안팎, 멀고 가까움, 처음과 나중 등에는 이와 같은 차별이 있다.
이러한 모양들이 모두 공한 것을 일컬어 모양의 공함[相空]이라 한다.
마치 말하기를 “온갖 유위의 법은 무상한 모습이다. 왜냐하면 나고 멸하여 머물지 않는 까닭에 앞에는 없었으나 지금은 있고, 이미 있었다가 도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인연에 속하기 때문이며, 거짓이면서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며, 무상한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며, 여러 가지로 화합한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등의 인연 때문에 온갖 유위법은 바로 무상한 모양이다.
014_0819_b_22L性相內外遠近初後等有如是差別是諸相皆空名爲相空如說一切有爲法是無常相所以者何生滅不住故無今有已有還無故屬諸因緣故誑不眞故無常因緣生故衆合因緣起故如是等因緣故一切有爲法是無常相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내기 때문에 괴로운 몸[苦身]이라 한다. 4위의(威儀)가 괴롭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고 괴로움은 거룩한 진리[苦聖諦]이기 때문이며, 성인은 버리면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고 괴롭지 않은 때가 없기 때문이며 무상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괴로운 모양[苦相]이라 한다.
014_0819_c_06L能生身心惱故名爲苦身四威儀無不苦故苦聖諦故聖人捨受故無時不惱故無常故如是等因名爲苦相
내 것[我所]을 여의기 때문에 공이고,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공이며,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처음도 마지막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공이고 마음을 속이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성현은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모양 없고[無相] 지음 없는[無作] 해탈의 문이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온갖 언어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온갖 마음의 작용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공이라 하며, 모든 부처님과 벽지불과 아라한은 들어가되 나오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 때문에 이것을 공이라 하는 것이다.
014_0819_c_09L離我所故空因緣和合生故空無常無我故名爲空終不可得故空誑心故名爲空賢聖一切法不著故名爲空以無相無作解脫門故名爲空諸法實相無量無數故名爲空斷一切語言道故名爲滅一切心行故名爲空諸佛辟支阿羅漢入而不出故名爲空如是等因緣故是名爲空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기 때문에 나가 없고,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가 없으며, 주인이 없기 때문에 나가 없다. 모든 법은 인연에서 생겨나지 않음이 없고, 인연에서 생기기 때문에 나가 없으며, 모양 없고 지음 없기 때문에 나가 없다. 임시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나가 없고, 몸에 대한 소견[身見]은 뒤바뀐 것이기 때문에 나가 없고, 나라는 마음을 끊으면 도를 얻기 때문에 나가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나가 없다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을 일컬어 전체의 모양[總相]이라 한다.
014_0819_c_17L無常空故無不自在故無我無主故名爲無我諸法無不從因緣生從因緣生故無無相無作故無我假名字故無我身見顚倒故無我斷我心得道故無以是種種名爲無我如是等名爲摠
014_0820_a_01L개별적인 모양[別相]이라 함은 땅은 단단한 모양이고 불은 뜨거운 모양이며, 바람은 움직이는 모양이다. 안식(眼識)이 의지하는 곳을 눈의 모양이라 한다. 귀ㆍ코ㆍ혀ㆍ몸 역시 그와 같으며, 식(識)은 깨닫는 모양이고, 지(智)는 슬기로운 모양이며, 혜(慧)는 사리 밝은 모양이다.
014_0819_c_23L別相者堅相熱相濕相動相眼識依處名眼相身亦如是覺相慧相智相
버리는 것은 보시하는 모양이고, 뉘우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모양은 계를 지니는[持戒] 모양이며, 마음이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것은 참는 모양이다. 부지런히 힘쓰는 것은 정진하는 모양이고, 마음을 가다듬는 것은 선정의 모양이며, 집착함이 없는 것은 지혜의 모양이다.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은 방편의 모양이고, 식(識)으로 생멸을 짓는 것은 세간의 모양이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은 저마다 모양이 있다.
014_0820_a_02L捨爲施不悔不惱爲持戒相心不變異爲忍相發懃爲精進相攝心爲禪相所著爲智慧相能成事爲方便相作生滅爲世閒相無識爲涅槃相是等諸法各有別相
그러므로 모든 모양은 다 공한 줄 알아야 하나니, 이것을 스스로의 성품이 공함[自相空]이라 한다. 그 밖의 이치는 성공(性空) 중에서의 설명과 같으니, 성품과 모양이란 그 이치가 같기 때문이다.
014_0820_a_07L當知是諸相皆是名自相空餘義如性空中說相義同故
【문】 무엇 때문에 모양이 공함[相空]만을 말하지 않고 자상공을 말하는가?
014_0820_a_09L問曰何以不但說相空自相空
【답】 만일 모양이 공한 것만을 설명하면 법의 본체가 공임을 설명하지 못하나 자상공이라 하면 곧 법의 본체가 공임을 설명하게 된다.
또 뭇 법이 화합한 까닭에 하나의 법이 생겨나지만, 이 법 역시 공하다. 이와 같이 해서 낱낱의 법이 모두 공한 것이다. 이제 화합한 인연의 법은 모두 공하며, 온갖 법은 각각 스스로의 모양이 공하니, 이 때문이 자상공이라 하는 것이다.
014_0820_a_10L答曰若說相空不說法體空自相空卽法體空復次法和合故一法生是一法空如是等一一法皆空今和合因緣法展轉皆亦空一切法各各自相空以是故名爲自相空
【문】 만일 온갖 법이 저마다 자상이 공하다면 어째서 다시 설명하는가?
014_0820_a_15L問曰若一切法各各自相空云何復有所說
【답】 중생은 뒤바뀐 생각 때문에 하나의 모양[一相]ㆍ다른 모양[異相]ㆍ전체의 모양[總相]ㆍ개별적인 모양[別相] 등으로 모든 법에 집착하는데, 이것을 끊게 하기 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을 자상공이라 한다.
014_0820_a_16L答曰衆生顚倒故以一相異相摠相別相等而著諸法爲斷是故而有所說如是等因名爲自相空
일체법공(一切法空)이라 했는데, 일체법(一切法)이란 5중(衆)ㆍ12입(入)ㆍ18계(界) 등을 말한다. 이 일체법은 모두 갖가지의 문에 들어가는데, 이른바 온갖 법의 존재하는 모양[有相]ㆍ아는 모양[知相]ㆍ분별하는 모양[識相]ㆍ반연하는 모양[緣相]ㆍ늘어나는 모양[增上相]ㆍ원인의 모양[因相]ㆍ결과의 모양[果相]ㆍ전체의 모양[總相]ㆍ개별적인 모양[別相]ㆍ의지하는 모양[依相] 등이 그것이다.
014_0820_a_19L一切法空一切法名五衆十二入十八界等是諸法皆入種種門所謂一切法有相知相緣相增上相因相果相摠相別相依相
014_0820_b_01L【문】 무엇을 온갖 법의 존재하는 모양[有相]이라 하는가?
【답】 온갖 법에는 아름다운 것도 있고 추한 것도 있으며, 안도 있고 바깥도 있다. 온갖 법은 마음이 있어 생겨나기 때문에 존재한다[有]고 한다.
014_0820_a_23L問曰云何一切法有相答曰切法有好有醜有內有外一切法有心生故名爲有
【문】 법이 없는 가운데서 어떻게 존재하는 모양을 말할 수 있는가?
014_0820_b_02L問曰無法中云何言有相
【답】 만일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있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법이 없다고 할 뿐이다. 만일 실로 무법(無法)의 상태가 있다면 곧 명칭이 유(有)가 될 뿐이다. 이 때문에 온갖 법의 있는 모양을 설명하는 것이다.
014_0820_b_03L答曰若無法不名爲但以遮有故名爲無法若實有無法則名爲有是故說一切法有相
아는 모양[知相]이라 했는데, 고법지(苦法智)ㆍ고비지(苦比智)로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알고, 집법지(集法智)ㆍ집비지(集比智)로 쌓임의 진리[集諦]를 알며, 멸법지(滅法智)ㆍ멸비지(滅比智)로 사라짐의 진리[滅諦]를 알고, 도법지(道法智)ㆍ도비지(道比智)로 도의 진리[道諦]를 안다. 그리고 세속의 착한 지혜로는 괴로움[苦]을 알고, 쌓임[集]을 알고, 사라짐[滅]을 알고, 도(道)를 알며, 또한 허공(虛空)과 비지연멸(非智緣滅)47)을 아니, 이것을 온갖 법의 아는 모양이라 한다. 이 아는 모양은 온갖 법을 포섭한다.
014_0820_b_05L知相法智苦比智能知苦諦集法智集比智能知集諦滅法智滅比智能知滅道法智道比智能知道諦及世俗善智能知苦能知集能知滅能知道亦能知虛空非智緣滅是名一切法知相知相故攝一切法
분별하는 모양[識相]이라 함은 안식(限識)은 빛깔[色]을 알고, 이식(耳識)은 소리[聲]를 알며, 비식(鼻識)은 냄새[香]를 알고 설식(舌識)은 맛[味]을 알며, 신식(身識)은 닿임[觸]을 알고, 의식(意識)은 법(法)을 안다.
그리고 눈[眼]을 알고 빛깔을 알고 안식을 알며, 귀[耳]를 알고 소리를 알고 이식을 알며, 코[鼻]를 알고 냄새를 알고 비식을 알며, 혀[舌]를 알고 맛을 알고 설식을 알며, 몸[身]을 알고 닿임을 알고 신식을 알며, 뜻[意]을 알고 법을 알고 의식을 아나니, 분별하는 모양이라 한다.
014_0820_b_11L識相識能知色耳識能知聲鼻識能知舌識能知味身識能知觸意識能知法能知眼能知色能知眼識能知耳能知聲能知耳識能知鼻能知香能知鼻識能知舌能知味知舌識能知身能知觸能知身識知意能知法能知意識是名識相
014_0820_c_01L반연하는 모양[緣相]이라 했는데, 안식 및 안식과 상응하는 모든 법으로는 빛깔을 반연하고, 이식 및 이식과 상응하는 모든 법으로는 소리를 반연하며, 비식 및 비식과 상응하는 모든 법으로는 냄새를 반연하며, 설식 및 설식과 상응하는 모들 법으로는 맛을 반연하며, 신식 및 신식과 상응하는 모든 법으로는 닿임을 반연하며, 의식 및 의식과 상응하는 모든 법으로는 법을 반연한다. 또 눈을 반연하고 빛깔을 만연하고 안식을 반연하며, 귀를 반연하고 소리를 반연하고 이식을 반연하며, 코를 반연하고 냄새를 반연하고 비식을 반연하며, 혀를 반연하고 맛을 반연하고 설식을 반연하며, 몸을 반연하고 닿임을 반연하고 신식을 반연하며, 뜻을 반연하고 법을 반연하고 의식을 만연하나니, 이것을 반연하는 모양이라 한다.
014_0820_b_18L眼識及眼識相應諸法能緣色耳識及耳識相應諸法能緣聲鼻識及鼻識相應諸法能緣香舌識及舌識相應諸法能緣味身識及身識相應諸法能緣觸意識及意識相應諸法能緣法能緣眼能緣色能緣眼識緣耳能緣聲能緣耳識能緣鼻能緣香能緣鼻識能緣舌能緣味能緣舌識緣身能緣觸能緣身識能緣意能緣能緣意識是名緣相
늘어나는 모양[增上相]이라 했는데, 온갖 유위의 법은 저마다 늘어나며 무위의 법[無爲法] 역시 유위법에 대해서 늘어나고 커지나니, 이것을 늘어나는 모양이라 한다.
원인과 결과의 모양[因果相]이라 했는데, 온갖 법은 각각 원인이 되고 각각 결과가 되나니, 이것을 원인과 결과의 모양이라 한다.
014_0820_c_05L增上相切有爲法各各增上無爲法亦於有爲法有增上是名增上相因果相一切法各各爲因各各爲果是名因果相
전체의 모양[總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이라 했는데, 온갖 법 가운데에는 전체의 모양과 각각의 모양이 있다. 마치 말[馬]은 바로 전체의 모양이고, 흰색은 바로 개별적인 모양인 것과 같다. 또한 마치 사람은 바로 전체의 모양이고, 만일 하나의 귀가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모양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전전(展轉)해서 모든 것에는 전체의 모양과 개별적인 모양이 있나니, 이것이 전체의 모양과 각각의 모양이다.
014_0820_c_09L摠相別相一切法中各各有摠相別相如馬是摠相白是別相人是摠相若失一耳則是別相如是各各展轉皆有摠相別相是爲摠相別相
의지하는 모양[依相]이라 했는데, 모든 법은 저마다 함께 서로가 의지하게 되는 것으로 마치 들과 나무와 산과 하천은 땅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등 이와 같이 온갖 것은 저마다 서로가 의지하게 되나니, 이것을 의지하는 모양이라 한다. 이와 같이 하나의 법의 문의 모양은 온갖 법을 포섭한다.
014_0820_c_13L依相諸法各共相依止草木山河依止於地地依止水是一切各各相依是名依止相止相攝一切法如是等一法門相攝一切法
다시 둘의 법의 문은 온갖 법을 포섭하나니, 이른바 형상 있고 형상 없는 법[色無色法], 볼 수 있고 볼 수 없는 법[可見不可見法], 대함이 있고 대함이 없는 법[有對無對法], 번뇌 있고 번뇌 없는 법[有漏法無漏法], 지어지고 지어지지 않은 법[有爲法無爲法], 안팎의 법[內法外法], 관찰과 대상의 법[觀法緣法],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법[有法無法] 등 이와 같은 갖가지 두 개의 법문의 모양이 있으며, 그리고 셋ㆍ넷ㆍ다섯 내지는 한량없는 법문의 모양이 있어 온갖 법을 포섭한다.
이 모든 법이 다 공함은 먼저 설명한 바와 같으니, 일체법공이라 하는 것이다.
014_0820_c_17L復次二法門攝一切法謂色無色法可見不可見法有對對法有漏無漏法有爲無爲法內法外法觀法緣法有法無法如是等種種二法門相六乃至無量法門相攝一切法是諸法皆空如上說名一切法空
【문】 만일 모두가 공하다면 무엇 때문에 온갖 법의 갖가지 이름을 말하는가?
014_0820_c_23L問曰若皆空者何以說一切法種種名字
014_0821_a_01L【답】 범부들은 공한 법 가운데서 무명(無明)으로 뒤바뀌어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갈애[愛] 등의 모든 번뇌를 내게 된다. 이 번뇌로 인하여 갖가지의 업을 일으키고, 갖가지의 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갖가지의 갈래[道]로 들어가며, 갖가지의 갈래로 들어가기 때문에 갖가지 몸을 받으며, 갖가지의 몸을 받기 때문에 갖가지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게 된다. 마치 누에가 아무 이유 없이 제 몸에서 실을 내어 스스로를 휘둘러 감고는 결국 삶아지는 고통을 받는 것과도 같다.
014_0821_a_01L答曰凡夫人於空法中無明顚倒取相故生愛等諸煩惱因煩惱故起種種業起種種業故入種種入種種道故受種種身受種種身受種種苦樂如蠶出絲無所因從己出而自纏裹受燒煮苦
성인은 청정한 지혜의 힘 때문에 온갖 법의 본말이 모두 공하다고 분별하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 집착하는 곳을 말해주나니, 이른바 5중ㆍ12처ㆍ18계 등이 그것이다. 그대는 다만 무명 때문에 5중 등을 내어서 스스로가 짓고 스스로가 집착하고 있을 뿐이니, 만일 성인이 다만 공만을 말한다면 도를 얻지 못한다. 곧 인(因)하는 바도 없고 싫증을 내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014_0821_a_06L聖人淸淨智慧力故分別一切法本末皆空欲度衆生故說其著處所謂五衆二入十八界等汝但以無明故而生五衆等自作自著若聖人但說空者不能得道以無所因無所厭故
【문】 그대는 온갖 법이 공하다 하는데 그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온갖 법은 저마다 자상(自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땅은 단단한 모양이고 물은 축축한 모양이며, 불은 더운 모양이고 바람은 움직이는 모양이며, 마음은 식별(識別)하는 모양이고 지혜는 아는 모양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은 저마다 스스로 그의 모양에 머무르고 있거늘 어찌 공하다 하는가?
014_0821_a_11L問曰汝言一切法空是事不然何以故切法各各自相攝故如地堅相水濕火熱相風動相心爲識相慧爲知如是一切法各自住其相云何言
【답】 성공(性空)과 자상공(自相空) 안에서 이미 설파했으나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모양[相]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모양이 아니어야 한다. 마치 소(酥)와 꿀과 아교[膠]와 밀[蠟] 등은 모두가 땅의 모양[地相]이지만 불과 만나면 스스로 그의 모양을 버리면서 축축한 모양[濕相]으로 바뀌고, 금ㆍ은ㆍ동ㆍ철도 불과 합치게 되면 역시 스스로 그 모양을 버리면서 물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과 같으며, 또 물이 추위를 만나면 얼음이 되면서 땅의 모양으로 바꾸어지는 것과 같다.
014_0821_a_16L答曰性空自相空中已破今當更相不定故不應是相如酥等皆是地相與火合故自捨其相轉成濕相鐵與火合故亦自捨其相變爲水相如水得寒成冰爲地相
또 사람이 취하거나 잠이 들거나, 무심정(無心定)에 들거나, 얼음 속에 있는 물고기 같은 경우는 모두가 심식이 없다. 그 마음의 모양을 버리어 지각(知覺)이 없음이 마치 지혜는 아는 모양[知相]이지만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들어가면 곧 지각이 없이 스스로 아는 모양을 버리게 되는 것과 같다. 때문에 모든 법은 정해진 모양[定相]이 없다.
014_0821_a_21L如人醉睡入無心定凍冰中魚皆無心識捨其心相無所覺知如慧爲知相入諸法實相則無所覺知捨知相是故諸法無有定相
014_0821_b_01L또 만일 모든 법이 정해진 모양이라 하면 이 역시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미래의 법의 모양은 현재에는 이르지 않아야 하고, 만일 현재에 이르게 되면 미래의 모양을 버리게 되며, 만일 미래의 모양을 버리지 않고 현재로 들어온다면 그것은 현재요 미래의 과보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014_0821_b_01L復次謂諸法定相是亦不然所以者何未來法相不應來至現在若至現在捨未來相若不捨未來相入現在者未來則是現在爲無未來果報
또 현재가 과거로 들어가면 현재의 모양을 버리는 것이며, 만일 현재의 모양을 버리지 않고 과거로 들어간다면 과거가 바로 현재라는 이러한 허물이 있게 된다. 그러니 모든 법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는 줄 알게 된다.
014_0821_b_05L若現在入過去則捨現在相若不捨現在相入過去過去則是現在如是等過則知諸法無有定相
또 만일 무위의 법이 반드시 있다 한다면 마땅히 별개의 모양이 있어야 한다. 마치 불은 스스로 더운 모양이 있어 다른 것으로 인하여 모양을 짓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무위의 법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없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014_0821_b_08L復次若謂無爲法定有者應別自有相如火自有熱不因他作相是故當知無爲法無相故實無
또 그대가 미래 세상 안의 비지연멸(非智緣滅)의 법으로써 한다 해도 이것은 유위의 법이면서 유위의 모양은 없다. 만일 그대가 비지연멸의 이것이 소멸하는 모양[滅相]이라고 여긴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무상하여 소멸하기 때문에 이것을 소멸하는 모양이라 할 뿐 비지연멸 때문에 소멸하는 모양이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서 갖가지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 만일 정해진 모양이 있다면 공하지 않게 할 수 있겠지만, 정해진 모양이 없음에도 공하지 않다 한다면 이 일은 옳지 못하다.
014_0821_b_11L復次汝以未來世中非智緣滅法是有爲法而無有爲相汝謂以非智緣盡是滅相是亦不然所以者何無常滅故是名滅相以非智緣滅故名爲滅相如是等種種無有定相若有定相可使不而無定相而不空者是事不然
【문】 마땅히 실제로 존재하는 법은 공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범부와 성인은 아는 바가 각각 달라서 범부의 아는 바는 그것이 허망하지만 성인이 아는 바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한 성인의 지혜에 의거하는 까닭에 허망한 법을 버리는 것으로, 허망한 법에 의지하여 허망한 것을 버릴 수는 없다.
014_0821_b_17L問曰應實有法不空所以者何聖人所知各異凡夫所知是虛妄聖人所知是實依實聖智故捨虛妄不可依虛妄捨虛妄
【답】 범부의 아는 바를 깨뜨리므로 성인의 지혜라 한다. 만일 범부의 법이 없으면 성인의 법도 없으니, 마치 병이 없으면 약도 없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경에서 말씀하기를 “범부의 법을 여의면 다시는 성인의 법은 없으며, 범부의 법의 진실한 성품[實性]이 곧 성인의 법이다”고 한다.
014_0821_b_21L答曰爲破凡夫所知故名爲聖智若無凡夫法無聖法如無病則無藥是故經言凡夫法更無聖法凡夫法實性卽是聖
014_0821_c_01L또 성인은 모든 법에서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나니, 이 때문에 성인의 법은 진실하지만 범부는 모든 법에서 모양을 취하고 또한 집착하기 때문에 범부의 법은 허망한 것이 된다. 성인은 비록 그것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모양을 취하지 않나니,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정해진 모양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따지지 말아야 한다.
014_0821_c_02L復次聖人於諸法不取相亦不著是故聖法爲眞實凡夫於諸法取相亦著故以凡夫人法爲虛妄聖人雖用而不取相不取相故則無定相是不應爲難
범부의 지위에서는 법에 집착하여 분별하면서 “이것은 성인의 법이다. 이것은 범부의 법이다”고 하지만 만일 성현의 지위에 서면 분별하는 바가 없다. 다만 중생의 병을 없애주기 위하여 “이것은 거짓이고, 이것은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의 말씀은 거짓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며, 속박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한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분별함이 없으면 청정하기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다.
014_0821_c_06L於凡夫地著法分別聖法是凡夫法若於賢聖地則無所分別爲斷衆生病故言是虛是實佛語非虛非實非縛非解不一不是故無所分別淸淨如虛空
또 만일 법이 모두가 공하지 않다면 설명하지도 않아야 한다. 희론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의 모양이므로 역시 설명하지 않아야 하나니,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의지할 바도 없으며, 공하고 모양이 없고 조작이 없으면 진실한 법[眞法]이라 한다.
014_0821_c_10L復次若法不悉空不應說不戲論爲智人相亦不應說不受不著無所依止無作名爲眞法
【문】 만일 온갖 법이 공하다면 역시 이것도 진실인데 어찌하여 진실 된 것이 없다고 하는 가?
【답】 만일 온갖 법이 공하다면 가령 법이 있다 해도 벌써 온갖 법 안에 들어가서 타파되었다. 만일 법이 없다면 따지지 말 것이다.
014_0821_c_13L問曰若一切法空卽亦是實云何言無實答曰若一切法空假令有法已入一切法中破無法不應致難
【문】 만일 일체법공(一切法空)이 진실이라면 부처님은 3장(藏) 가운데에서 무엇 때문에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는 법을 많이 말씀하셨는가? 마치 경48)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곧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을 위하여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는 법을 설해 주리라. 무엇이 제일의공이냐 하면, 눈[眼]이 생기되 온 데도 없으며, 없어지되 또한 가는 데도 없으며, 다만 업(業)이 있고 업의 과보가 있을 뿐이며, 짓는 이[作者]도 얻을 수 없나니,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014_0821_c_16L問曰若一切法空是眞實者佛三藏中何以多說無常我法如經說佛告諸比丘爲汝說法爲第一義空何等是第一義空眼生無所從來滅亦無所去但有業有業果報作者不可得亦復如
014_0822_a_01L이 안에서 만일 생겨나되 어디로부터 온 곳도 없고 멸하되 역시 가는 곳도 없다 한다면, 이것은 항상 있는 것이고, 항상 있는 법이면서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상(無常)한 것이며, 단지 업과 업의 과보가 있을 뿐 짓는 이를 얻을 수 없다. 이것이 성문의 법 중의 제일의공인데 어떻게 일체법공이라 하는가?
014_0821_c_22L是中若說生無所從來滅亦無所去是常常法不可得故無常但有業及業果報而作者不可得是爲聲聞法中第一義空云何言一切法空
【답】 나[我] 이것이 온갖 번뇌의 근본이다. 먼저 5중(衆)에 집착하여 나를 삼고 그런 뒤에는 바깥 물건에 집착하여 내 것[我所]으로 삼는다. 내 것에 속박되기 때문에 탐욕과 성을 내고, 탐욕과 성을 내는 인연 때문에 모든 업을 일으킨다. 마치 부처님의 말씀과 같아서 짓는 이가 없다면 온갖 법 안의 나를 타파한 것이다.
014_0822_a_02L答曰是一切諸煩惱根本先著五衆爲我然後著外物爲我所我所縛故而生貪貪恚因緣故起諸業如佛說無作則破一切法中我
만일 눈이 어디로부터 온 곳도 없고 멸하되 역시 가는 곳도 없다 한다면 눈은 무상하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만일 무상하다면 그것은 곧 괴로운 것이고 괴로우면 곧 나와 내 것이 없으며, 나와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온갖 법 가운데서 마음에 집착함이 없고 마음에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곧 번뇌[結使]가 생기지 않는다. 번뇌가 생기지 않거늘 어째서 공함을 말하겠는가. 이 때문에 3장(藏) 가운데에서는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 함을 많이 말씀하시면서 온갖 법이 공하다는 것은 많이 말씀하지 않으셨다.
014_0822_a_06L若說眼無所從滅亦無所去則說眼無常若無常卽是苦苦卽是非我我所我所無於一切法中心無所著心無所著則不生結使不生結使何用說空以是故三藏中多說無常無我不多說一切法空
또 중생은 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 함을 듣는다 하더라도 모든 법에 대하여 희론하기에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법의 공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나가 없으면 또한 내 것도 없나니, 만일 나가 없고 내 것이 없다면 이것은 곧 공의 이치에 들어가게 된다.
014_0822_a_12L復次衆生雖聞佛無常無我而戲論諸法爲是人故說諸法空若無我亦無我所若無無我所是卽入空義
【문】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업이 있고 과보가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만일 업이 있고 과보가 있다면 그것은 곧 공한 것이 아니다.
014_0822_a_15L問曰佛何以有業有果報若有業有果報是則不空
【답】 부처님께서 설법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신(神)이 영원하다고 고집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짓는 이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단절되었다고 고집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업이 있고 업의 과보가 있다”고 말씀하시며, 만일 사람이 “짓는 이가 없다”는 설명을 듣고 점차로 아주 없다는 소견 안에 떨어지게 되면 그를 위해서도 “업이 있고 업의 과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014_0822_a_17L答曰佛說法有二種一者無我一者無法爲著見神有常者故爲說無作者爲著斷滅見者故爲說有業有業果報若人聞說無作者轉墮斷滅見中爲說有業有業果報
014_0822_b_01L 이 5중(衆)은 업을 일으키면서도 뒷세상에까지 이르지 않거니와 이 5중의 인연(因緣)은 5중을 내면서 업의 과보를 받으며 상속하기 때문에 “업의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마치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와도 같나니, 몸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인연이 상속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약을 먹으면 아이의 병이 낫게 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아서 금세와 후생의 5중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죄와 복의 업의 인연은 상속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5중의 인연으로부터 뒷세상의 5중의 과보를 받게 된다.
014_0822_a_21L此五衆能起業而不至後世此五衆因緣五衆受業果報相續故說受業果報如母子身雖異而因緣相續故如母服藥兒病得差如是今世後世五衆雖異而罪福業因緣相續故從今世五衆因緣受後世五衆果報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법의 모양을 구하면서 하나의 법에 대해 있다ㆍ없다ㆍ항상하다ㆍ무상하다는 등으로 집착한다. 법에 집착함으로써 자기의 법에는 애착을 내고 다른 이의 법에는 성을 내면서 악업을 일으키므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법은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014_0822_b_04L復次人求諸法相著一法若有若無若常若無常等以著法故自法生愛他法生恚而起惡業爲是人故說諸法空
모든 법이 공하면 법이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애착하게 되는 법에 번뇌[結使]를 내기 때문이다. 번뇌를 내게 되는 이것이 곧 무명(無明)의 인연이다. 만일 무명이 생긴다면 어떻게 그것이 진실이겠는가. 이것이 법공(法空)이다.
014_0822_b_07L諸法空則無有法所以者何所可愛能生結使能生結使則是無明因若生無明云何是實是爲法空
또 중생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세간에 집착하는 이이고, 둘째는 출세간(出世間)을 구하는 이이다. 출세간을 구하는 이에게는 상ㆍ중ㆍ하가 있다. 상이라 함은 영리한 근기[利根]로써 큰 마음을 내어 부처님의 도를 구하는 이이고, 중이라 함은 증간의 근기[中根]로써 벽지불의 도를 구하는 이이며, 하라 함은 둔한 근기[鈍根]로써 성문의 도를 구하는 이이다.
014_0822_b_10L衆生有二種一者著世閒二者出世閒求出世閒有上上者利大心求佛道中者中根求辟支佛下者鈍根求聲聞道
부처님의 도를 구하는 이를 위해서는 6바라밀과 법의 공함을 설명하고, 벽지불을 구하는 이를 위해서는 12인연(因緣)과 혼자 수행하는 법을 설명하며, 성문을 구하는 이를 위해서는 중생의 공[衆生空]함과 4제의 법을 설명하게 된다.
014_0822_b_14L爲求佛道者說六波羅蜜及法空爲求辟支佛者說十二因緣及獨行法爲求聲聞者說衆生空及四眞諦法
성문은 생사(生死)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므로 중생의 공함과 4제의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을 들어도 모든 법에 대하여 희론을 하지 않나니, 마치 포위된 가운데서 어떤 사슴이 독화살을 맞고는 오로지 그곳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면서 다시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다.
014_0822_b_17L聲聞畏惡生聞衆生空及四眞諦無常不戲論諸法如圍中有鹿旣被毒一向求脫更無他念
벽지불은 비록 늙고 병들고 죽음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조금은 매우 깊은 인연을 관찰하고 또한 조금은 중생을 제도하게 되나니, 마치 무소가 포위된 가운데에 있으면서 비록 독화살을 맞았다 하더라도 아직도 그의 새끼를 돌보면서 사랑하는 것과 같다.
014_0822_b_20L辟支佛雖厭猶能少觀甚深因緣亦能少度衆生譬如犀在圍中雖被毒箭能顧戀其子
014_0822_c_01L보살은 비록 늙고 병들고 죽음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고 궁구하여 다하면서 12인연에 깊이 들어가며, 법의 공함을 통달하고 한량없는 법 성품에 들어간다. 비유하건대 마치 흰 향상[白香象]이 사냥꾼의 포위 안에 있으면서 비록 쏜 화살에 맞았다 하더라도 사냥꾼을 돌아보며 마음에 두려워함이 없으면서 자신에게 딸린 무리들을 거느리고 편안히 걸어서 떠나가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3장 가운데서 법공(法空)을 많이 말하지 않았다.
014_0822_b_23L菩薩雖厭老能觀諸法實相究盡深入十二因緣通達法入無量法性譬如白香象王在獵圍中雖被箭射顧視獵者心無所畏及將營從安步而去以是故三藏中不多說法空
혹 어떤 근기가 영리한 범지(梵志)는 모든 법의 실상을 구하면서 늙고 병들고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으며, 갖가지의 법의 모양에 집착하기도 하므로 이들을 위한 까닭에 법공을 설명하나니, 이른바 선니(先尼)49) 범지는 5중(衆)이 곧 진실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또한 5중을 여의고서 그것이 진실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014_0822_c_05L或有利根梵志求諸法實相不厭老病死著種種法相爲是故說法空所謂先尼梵志不說五衆卽是實亦不說離五衆是實
또 억지를 써가며 말하는 어떤 범지에게 부처님은 대답하시되 “나의 법 안에서는 있다,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거늘 너는 무엇 때문에 논하는 것이더냐? 있다, 없다는 것은 바로 희론의 법이며 번뇌[結使]가 생기는 곳이다”50)고 하셨다.
014_0822_c_08L復有强論梵志佛答我法中不受有無汝何所論有無是戲論法結使生處
그리고 『잡아함(雜阿含)』 중의 『대공경(大空經)』51)에서는 중생공(衆生空)과 법공(法空)의 두 가지 공을 말씀하셨고, 『나타경(羅陀經)』52) 안에서는 “물질[色衆]은 부서지고 분산되어서 아무것도 없게 된다” 함을 말씀하셨으며, 『벌유경(筏喩經)』53) 안에서는 “법조차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고 말씀하셨고, 『바라연경(波羅延經)』54)과 『이중경(利衆經)』55) 안에서는 “지혜로운 이는 온갖 법에서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만일 법을 받아들이거나 집착하면 희론이 생기지만 만일 의지한 바가 없으면 논할 바도 없다”고 하셨다.
014_0822_c_10L及『雜阿含』中『大空經』說二種空衆生空『羅陁經』中說色衆破裂分散令無所有『栰喩經』中說法尚應捨何況非『波羅延經』『利衆經』中說智者於一切法不受不著若受著法則生戲論若無所依止則無所論
모든 도를 얻은 성인들은 모든 법에서 취하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나니. 만일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 없으면 온갖 소견을 여의게 된다. 이와 같이 3장 가운데 곳곳에서 법공(法空)을 말씀하셨나니, 이와 같은 것 등을 일체법공이라고 한다.
014_0822_c_16L諸得道聖人於諸法無取無捨若無取捨能離一切諸見如是等三藏中處處說法空如是等名爲一切法空
014_0823_a_01L불가득공(不可得空)이라 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衆)ㆍ계(界)ㆍ입(入) 가운데서 나라는 법과 항상하다는 법은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불가득이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인연 가운데서 법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은 마치 다섯 손가락 가운데서 주먹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한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온갖 법과 인연은 마침내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한다”고 한다.
014_0822_c_19L不可得空有人言於衆入中常法不可得故名爲不可得空人言諸因緣中求法不可得如五指中拳不可得故名爲不可得空有人一切法及因緣畢竟不可得故爲不可得空
【문】 무엇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하는 것인가? 지혜의 힘[智力]이 적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인가? 진실로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인가?
【답】 모든 법은 진실로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지혜의 힘이 적어서가 아니다.
014_0823_a_02L問曰何以故名不可得爲智力少故不可得爲實無故不可得答曰諸法實無故不可得非智力少也
【문】 만일 그렇다면 필경공(畢竟空)이나 자상공(自相空)과도 다름이 없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불가득공을 말하는가?
014_0823_a_05L問曰若爾者與畢竟空自相空無異今何以故更說不可得空
【답】 만일 사람이 위에서 말한 모든 공에서 아무것도 없다 함을 들으면 마음에 두려움을 품으면서 의심을 낼 것이므로 이제는 그 공이 되는 까닭을 말하고, 그것을 구하고 찾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불가득공을 말해 주어 이런 의심과 두려움을 끊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불가득공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나는 처음 발심해서부터 부처를 이루기까지, 그리고 시방의 부처님은 모든 법 가운데서 진실을 구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불가득공이라 한다.
014_0823_a_06L若人聞上諸空都無所有心懷怖畏生疑今說所以空因緣以求索不可得故爲說不可得空斷是疑怖故佛說不可得空所以者何佛言我從初發心乃至成佛及十方佛於諸法中求實不可得是名不可得空
【문】 어떤 일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인가?
【답】 온갖 법과 무여열반(無餘涅槃)까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한다.
또 수행하는 이가 이 불가득공을 얻으면 3독(毒)ㆍ4류(流)ㆍ4박(縛)ㆍ5개(蓋)ㆍ6애(愛)ㆍ7사(使)ㆍ8사(邪)56)ㆍ9결(結)57)ㆍ10악(惡) 등의 모든 악하고 더러운 번뇌를 얻지 않게 되며 도무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한다.
014_0823_a_12L問曰何事不可答曰一切法乃至無餘涅槃不可得故名爲不可得空復次行者得是不可得空不得三毒四流四縛五蓋六愛七使八邪九結十惡諸弊惡垢結等都不可得故名爲不可得空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불가득공을 수행하면 어떠한 법의 이익을 얻는가?
【답】 계율ㆍ선정ㆍ지혜를 얻고 4사문과(沙門果)ㆍ5근(根)ㆍ5무학중(無學衆)ㆍ6사법(捨法)ㆍ7각분(覺分)ㆍ8성도분(聖道分)ㆍ9차제정(次第定)ㆍ10무학법(無學法)을 얻는다. 이와 같은 것들을 얻는 것은 바로 성문의 법이며, 만일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곧 6바라밀과 10지(地)의 모든 공덕을 두루 갖추게 된다.
014_0823_a_17L若爾者行是不可得空得何等法答曰得戒得四沙門果五根五無學衆六捨法七覺分八聖道九次第定十無學法得如是等是聲聞法若得般若波羅蜜則具足六波羅蜜及十地諸功德
014_0823_b_01L【문】 위에서는 온갖 법과 열반까지도 얻을 수 없다고 말했거늘 이제는 무엇 때문에 계율ㆍ선정ㆍ지혜와 10무학법까지를 얻는다고 하는가?
014_0823_a_23L問曰一切法乃至涅槃不可得今何以言得戒乃至十無學法
【답】 이 법은 비록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불가득공을 돕기 때문에 역시 얻을 수 없다[不可得]고 한다. 또 받아들임도 없고 집착함도 없기 때문에 이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고, 무위(無爲)의 법이 되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 하며, 성제(聖諦)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 하고, 제일의(第一義)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고 한다.
014_0823_b_02L是法雖得皆助不可得空故名不可得又復無受無著故是名不可得爲無爲法故名不可得聖諦故名不可得第一義諦故名不可得
성인은 비록 모든 공덕을 얻더라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는 까닭에 얻었다고 여기지 않지만 범부들은 크게 얻는다고 여긴다. 이것은 마치 사자(師子)가 비록 짓는 일[所作]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은 특별하게 생각지 않음에도 다른 중생들이 보면 희유(希有)하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이치를 불가득공이라고 한다.
014_0823_b_06L聖人雖得諸功德入無餘涅槃故以爲得凡夫人以爲大得如師子雖有所作不自以爲奇餘衆生見以爲希有如是等義名爲不可得空
무법공(無法空)과 유법공(有法空)과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이라 했는데, 무법공이란 어떤 사람은 “무법(無法)은 법이 이미 소멸된 것을 말하고, 이 소멸된 법까지도 없기 때문에 무법공이라 한다”고 말한다.
014_0823_b_10L法空有法空無法有法空無法空有人言無法名法已滅是滅無故名無法空
유법공은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있는 법[有法]이 없고, 이 있는 법까지도 없기 때문에 유법공이라 한다. 무법유법공은 무법유법의 모양을 취하여도 얻을 수 없나니, 이것이 무법유법공이다. 또 없는 법과 있는 법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에 무법유법공이다.
014_0823_b_13L有法空諸法因緣和合故無有法有法無故名有法空法有法空取無法有法相不可得是爲無法有法空復次觀無法有法故名無法有法空
또 수행하는 이가 모든 법의 생기고 소멸함을 관하면서 문이 있고 문이 없을 때에 생기는 문[生門]에서는 기쁨이 생기게 되고 소멸하는 문[滅門]에서는 근심이 생기게 되지만, 수행하는 이가 생기는 법[生法]의 공함을 관찰하면 곧 기뻐하던 마음이 소멸하게 되고, 소멸하는 법의 공함을 관찰하면 곧 근심하던 마음이 소멸하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생함으로도 얻는 바가 없고 소멸함으로도 잃는 바가 없다면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법유법공이라 한다.
014_0823_b_17L復次行者觀諸法生若有門若無門生門生喜門生憂行者觀生法空則滅喜心滅法空則滅憂心所以者何生無所滅無所失除世閒貪憂故是名無法有法空
또 18공(空) 가운데서 처음의 세 가지 공은 온갖 법을 깨뜨리고 나중의 세 가지 공도 역시 온갖 법을 깨뜨린다. 곧 유법공은 온갖 법이 생길 때와 머무르는 때를 깨뜨리고, 무법공은 온갖 법이 소멸할 때를 깨뜨리며, 무법유법공은 생기고 소멸하는 것을 한꺼번에 같이 깨뜨린다.
014_0823_b_22L復次十八空中初三空破一切法後三空亦破一切法有法破一切法生時住時無法空破一切法滅時無法有法空滅一時俱破
014_0823_c_01L또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와 미래의 법이 공함을 바로 무법공이라 하고, 현재와 무위의 법이 공함을 바로 유법공이라 한다. 왜냐하면 과거의 법은 소멸되고 멸하여서 없는 데로 돌아가며, 미래의 법은 인연이 아직 화합하지 못해 아직 생겨나지 못하고 아직 있지 못하고 아직 나오지 못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에 무법(無法)이라 하며, 현재의 법 및 무위의 법을 관찰해 알건대 현재에 존재한다면 이것을 유법(有法)이라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공하기 때문에 무법유법공이라 한다.”
014_0823_c_01L復次有人言過去未來法空是名無法空現在及無爲法空是名有法空何以故過去法滅失變異歸無未來法因緣未和合未生未有未出未起以是故名無法觀知現在法及無爲法現有是名有法是二俱空故名爲無法有法空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위의 법은 나고[生] 머무르고[住] 소멸됨이 없으니, 이것을 무법이라 한다. 유위의 법은 나고 머무르고 소멸하니, 이것을 유법이라 한다. 이와 같은 등의 공함을 무법유법공이라 한다”고 한다.
이것이 “보살은 내공(內空)에서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에 이르기까지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014_0823_c_08L復次有人言無爲法無生住滅是名無法有爲法生住滅名有法如是等空名爲無法有法空是爲菩薩欲住內空乃至無法有法當學般若波羅蜜
大智度論卷第三十一
辛丑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25)범어로는 adhyātmaśūnyatā.
  2. 26)범어로는 bahirdhāśūnyatā.
  3. 27)범어로는 adhyātmabahirdhāśūnyatā.
  4. 28)곧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이다.
  5. 29)문맥상은 ‘자신이 도둑질을 한 것을 두려워해’라고 해야 할 듯하다.
  6. 30)범어로는 śūnyatā-śūnyatā.
  7. 31)범어로는 śūnyatā-śūnyatā-samādhi.
  8. 32)범어로는 mahāśūnyatā.
  9. 33)범어로는 Mahāśūnyatā-sūtra.
  10. 34)범어로는 paramārthaśūnyatā.
  11. 35)범어로는 atyantaśūnyatā.
  12. 36)범어로는 Saptasūryopamāsūtra.
  13. 37)범어로는 Kolopamasūtra.
  14. 38)범어로는 anagraśūnyatā.
  15. 39)범어로는 avakāraśūnyatā.
  16. 40)곧 미진(微塵)에 관한 이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17. 41)정(情)이란 6근(根, indriya)을 말한다. 따라서 나머지 정식(情識)이란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이다.
  18. 42)범어로는 Rādha.
  19. 43)범어로는 Kātyāyanasūtra.
  20. 44)범어로는 prakrṛtiśūnyatā.
  21. 45)Samṛddhisūtra의 교설을 가리킨다.
  22. 46)범어로는 Daśabalasūtra.
  23. 47)범어로는 apratisaṃkhyānirodha. 설일체유부에서 말하는 3무위(無爲) 가운데 하나로,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라고도 한다. 법이 생겨날 만한 대상을 결여해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지혜로써 얻은 멸(滅)이 아니기 때문에 비지(非智) 혹은 비택멸(非擇滅)이라 하는 것이다.
  24. 48)곧 Paramārthaśūnyatāsūtra를 가리킨다.
  25. 49)범어로는 Śreṇika.
  26. 50)Dīrghanakhasūtra에서 설해지고 있는 내용이다.
  27. 51)범어로는 Mahāśūnyatā-sūtra.
  28. 52)범어로는 Rādhasūtra.
  29. 53)범어로는 Kolopamasūtra.
  30. 54)범어로는 Pārāyaṇasūtra.
  31. 55)범어로는 Arthavargīyāṇi sūtrāṇi.
  32. 56)사(邪)란 범어로는 mithyātva. 곧 ‘허망한 것,’ ‘진실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8사(邪)란 8정도와 대비되는 것으로 mithyādṛṣṭiㆍmithyāsaṃkalpaㆍmithyā-vācㆍmithyākarmāntaㆍmithyājīvaㆍmithyāvyāyāmaㆍ mithyāsmṛtiㆍmithyāsamādhi 등이다.
  33. 57)결(結)이란 범어로는 saṃyojana. 곧 ‘결박’을 의미한다. 아홉 가지란, anun- ayaㆍpratighaㆍmānaㆍavidyāㆍdṛṣṭiㆍparāmarśaㆍvicikitsāㆍīrṣyāㆍmāt-sarya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