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智度論釋初品中四緣義第四十九

ABC_IT_K0549_T_032
014_0824_a_01L대지도론 제32권
014_0824_a_01L大智度論釋初品中四緣義第四十九卷三十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014_0824_a_02L 聖者龍樹造


49. 초품 중 사연(四緣)의 뜻을 풀이함
014_0824_a_03L後秦龜茲國三藏鳩摩羅什譯

【經】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의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연연(緣緣)ㆍ증상연(增上緣)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014_0824_a_04L【經】
菩薩摩訶薩欲知諸法因緣第緣緣緣增上緣當學般若波羅
【論】 온갖 유위의 법[有爲法]은 모두가 4연(緣)에서 생기나니, 이른바 인연과 차제연과 연연과 증상연이다.
인연(因緣)이라 함은 상응인(相應因)과 공생인(共生因)과 자종인(自種因)과 변인(遍因)과 보인(報因)이니, 이 다섯 가지 인을 인연이라 한다. 또 온갖 유위의 법을 역시 인연이라 한다.
014_0824_a_07L【論】
一切有爲法皆從四緣生謂因緣次第緣緣緣增上緣因緣相應因共生因自種因遍因因是五因名爲因緣復次一切有爲亦名因緣
차제연(次第緣)이라 함은 아라한(阿羅漢)의 과거ㆍ현재ㆍ미래[末後]의 마음[心]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을 제외한 그 밖의 과거ㆍ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차례[次第]를 따르므로 이것을 차제연이라 한다.
인연(緣緣)과 증상연(增上緣)이라 함은 온갖 법이다.
또 보살은 4연(緣)의 자체의 모양[自相]과 공통의 모양[共相]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014_0824_a_11L次第緣除阿羅漢過現在末後心心數法諸餘過去在心心數法能與次第是名次第緣緣緣增上緣一切法復次菩薩欲知四緣自相共相當學般若波羅蜜
【문】 반야바라밀 안에서의 4연은 모두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원인[因] 가운데에 먼저 결과[果]가 있다면 이 일은 옳지 못하고, 원인 가운데 먼저 없다면 역시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먼저 있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니, 만일 먼저 없다면 무엇으로 원인을 삼겠는가? 만일 없는데도 있다면 역시 원인이 없는 것에서도 생겨야 한다.
014_0824_a_15L問曰如般若波羅蜜中四緣皆不可所以者何若因中先有果是事不因中先無亦不然若先有則無因若先無以何爲因若先無而有者可從無因而生
또 결과가 원인에서 생기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원인이라 하리니, 만일 먼저 결과가 없다면 어떻게 원인이라 하겠는가?
또 만일 결과가 원인에서 생긴다면 결과는 곧 원인에 속한 것이요 원인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다시 그 밖의 다른 원인에 속하게 된다. 만일 원인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결과를 말하겠는가? 다만 이 원인에서 생길 뿐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보면 곧 인연은 없음을 알 수 있다.
014_0824_a_20L復次見果從因生名之爲因若先無果云何名因復次若果從因生果則屬因因不自在更屬餘因若因不自在者云何言果旦從此因生如是種種則知無因緣
014_0824_b_01L과거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모두 소멸되어 능히 지을 바가 없는데 어떻게 차제연(次第緣)이 될 수 있겠는가? 현재에 마음이 있으면 차례는 없고, 만일 미래의 생겨나려는 마음에 차례를 부여한다면 미래는 곧 아직 있지 않은데 어떻게 차례를 따르겠는가? 이와 같이 해서 곧 차제연은 없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은 모양[相]도 없고 대상[緣]도 없거늘 어떻게 연연(緣緣)을 말하는가?
014_0824_b_01L過去心心數法都滅無所能作云何能爲次第緣現在有心則無次第與未來欲生心次第者未來則未有云何與次第如是等則無次第緣是一切法無相無緣云何言緣緣
만일 온갖 법이 딸린 데가 없고 의지할 바가 없어서 모두가 평등하다면 어떻게 증상연(增上緣)을 말하는가?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연(緣)은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4연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014_0824_b_06L若一切法無所屬無所依皆平等云何言增上緣如是四緣不可得云何說知四緣當學般若波羅蜜
【답】 그대는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모르고 있다. 그 때문에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네 가지의 연을 모두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반야바라밀은 온갖 법에 대해 버리거나 무너뜨리는 바가 없으며 필경 청정하여서 모든 희론의 여지가 없다.
014_0824_b_09L答曰汝不知般若波羅蜜相以是故說般若波羅蜜中四緣皆不可得般若波羅蜜於一切法無所捨無所破畢竟淸淨無諸戲論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네 가지의 연이 있되 다만 지혜가 적은 사람들은 네 가지의 연에 집착하면서 삿된 이론을 내나니, 그 집착을 파괴하기 위하여 짐짓 ‘모든 법은 진실로 공하여 무너뜨릴 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014_0824_b_13L如佛說有四緣但以少智之人著於四緣而生邪論爲破著故說言諸法實空無所破
마치 마음의 법[心法]은 내외처(內外處)58)의 인연이 화합함으로부터 생기는 것과 같으니, 이 마음은 환[幻]과 같고 꿈과 같고 거짓이어서 일정한 성품이 없다.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도 역시 그와 같다. 이 마음은 마음에 속한 법을 낳으니, 이른바 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이 그것이다.
014_0824_b_15L如心法從內外處因緣和合生是心如幻如夢無有定性心數法亦如是是心共生心數法所謂受思等
이 마음에 속한 법은 모양[相]을 같이하고 대상[緣]을 같이하기 때문에 상응(相應)한다. 마음은 마음에 속한 법과 상응함을 인(因)으로 삼고 마음에 속한 법은 마음과 상응함을 인으로 삼으니, 이것을 상응인(相應因)이라 한다. 상응인은 마치 친한 벗이나 아는 이가 서로 어울려서 일을 이루는 것과 같다.
014_0824_b_18L是心數法同相同緣故名爲相應心以心數法相應爲因心數法以心相應爲因名相應因相應因者譬如親友知識和合成事
공생인(共生因)이라 함은 온갖 유위법은 저마다 같이 나는 인[共生因]이 있음을 말한다. 같이 나기 때문에 다시 서로가 돕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형제는 같이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 돕는 것과 같다.
014_0824_b_22L共生因者一切有爲法有共生因以共生故更相佐助譬如兄弟同生故互相成濟
014_0824_c_01L자종인(自種因)이라 함은 과거의 착한 종자는 현재와 미래의 착한 법의 인(因)이요 과거ㆍ현재의 착한 종자는 미래의 착한 법의 인이 됨을 말한다. 불선(不善)과 무기(無記)도 역시 그와 같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은 저마다 자종인이 있다.
014_0824_c_01L自種因者去善種現在未來善法因過去現在善種未來善法因不善無記亦如是如是一切法各有自種因
변인(遍因)이라 함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에서 끊어야 할 번뇌[結使]이니, 온갖 때가 낀[垢] 법의 인이므로 이것을 변인이라 한다.
보인(報因)이라 함은 업을 짓는 인연 때문에 선악의 과보를 얻나니, 이것이 보인이다.
이 다섯 가지의 인[五因]을 인연(因緣)이라 한다.
014_0824_c_04L遍因者集諦所斷結使一切垢法因是名遍因報因者行業因緣故得善惡果是爲報因是五因名爲因緣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차례로 상속하면서 간단이 없기 때문에 차제연(次第緣)이라 하고,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대경[塵]을 반연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이것을 연연(緣緣)이라 하며, 모든 법이 생길 때 서로가 장애하지 않는 이것을 무장(無障)이라 한다.
014_0824_c_07L心心數法次第相續無閒故名爲次第緣心心數法緣塵故生是名緣緣諸法生時不相障㝵是爲無障
또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네 가지의 연에서 생기되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은 세 가지의 연에서 생기고 연연은 제외되며, 그 밖의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心不相應] 모든 행과 물질[色]은 두 가지의 연에서 생겨난다. 차제연과 연연이 제외되나니, 유위의 법은 성품이 미약하기 때문에 하나의 연에서 생기는 일이 없다.
014_0824_c_10L復次心心數法從四緣生無想滅盡定從三緣除緣緣諸餘心不相應諸行及色從二緣生除次第緣緣緣有爲法性羸故無有從一緣生
보생(報生)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다섯 가지의 연에서 생기며,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는 때가 낀 법이 아니므로 변인이 제외된다. 모든 번뇌도 역시 다섯 가지의 인에서 생기지만 보인은 제외된다. 왜냐하면 모든 번뇌는 바로 은몰(隱沒)이며 과보는 곧 불은몰이므로 보인이 제거되는 것이다.
014_0824_c_14L報生心心數法五因生不隱沒無記非垢法故除遍諸煩惱亦從五因生除報因何以諸煩惱是隱沒報是不隱沒故除報因
보생의 물질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 모든 행은 네 가지의 인에서 생겨난다. 물질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아니기 때문에 상응인이 제외되고, 불은몰무기의 법이기 때문에 변인이 제외된다.
014_0824_c_18L報生色及心不相應諸行從四因生色非心心數法故除相應因不隱沒無記法故除遍因
014_0825_a_01L염오(染汚)의 물질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 모든 행도 역시 네 가지의 인에서 생기나니,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아니기 때문에 상응인이 제외되고 때가 낀 법이기 때문에 보인이 제외된다. 모든 그 밖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처음의 무루의 마음[無漏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네 가지의 인에서 생기고 보인과 변인이 제외된다. 왜냐하면 무기(無記)가 아니기 때문에 보인이 제외되고 때가 낀 법이 아니기 때문에 변인이 제외된다.
014_0824_c_20L染污色及心不相應諸行亦從四因生非心心數法故除相應因垢故除報因諸餘心心數法除初無漏心皆從四因生除報遍因所以者何非無記故除報因非垢故除遍因
모든 그 밖의 상응하지 않은 법[不相應法], 이른바 물질과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은 만일 자종인(自種因)이 있다면 세 가지의 인에서 생기면서 상응인과 보인과 변인이 제외된다. 만일 자종인이 없다면 두 가지의 인에서 생겨나니, 공생인과 무장인(無障因)이 그것이다.
014_0825_a_02L諸餘不相應法所謂心不相應諸行若有自種因則從三因生除相應因報因遍因若無自種因則從二因生共生因無障因
처음의 무루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세 가지의 인에서 생기나니, 상응인과 공생인과 무장인이다. 이 처음의 무루의 마음속에서 물질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 모든 행은 두 가지 인에서 생기나니, 공생인과 무장인이다. 어떠한 법도 하나의 인에서 생기는 일은 없으니, 만일 여섯 가지 인으로 생긴다면 이것을 네 가지의 연[四緣]이라 한다.
014_0825_a_05L無漏心心數法從三因生相應因生因無障因是初無漏心中色及心不相應諸行從二因生共生因無障無有法從一因生若六因生是名四緣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연을 관찰하여 마음에 집착한 바가 없고, 비록 이 법을 분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이요 모두가 마치 허깨비와 같은 줄을 안다. 허깨비 가운데서 비록 갖가지의 다름이 있다 하더라도 지혜로운 이는 그것을 관찰하면서 진실한 것은 없고 다만 눈을 속여서 분별하게 되는 줄을 안다. 범부의 법은 모두가 그것은 뒤바뀌고 거짓이면서 진실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니, 네 가지의 연이 있어도 그와 같은데 어떻게 진실한 것이 되겠는가. 성현의 법의 인(因)은 범부의 법에서 생기기 때문에 역시 그것은 진실하지 않나니, 마치 먼저의 18공(空)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014_0825_a_10L菩薩行般若波羅蜜如是觀四心無所著雖分別是法而知其空皆如幻化幻化中雖有種種別異者觀之知無有實但誑於眼爲分別知凡夫人法皆是顚倒虛誑而無有故有四緣如是云何爲實賢聖法因從凡夫法生故亦是不實如先十八空中說
보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하나의 법도 일정한 성품[定性]으로써 취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으며 중생은 인연이 공한 법을 집착하기 때문에 파괴할 수 있다고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린아이가 물속에 있는 달을 보고는 마음에 애착을 내어 가지려고 하나 얻을 수가 없게 되자 마음에 근심하고 괴로워하므로 지혜로운 이가 “비록 눈으로는 볼 수 있을지라도 손으로 잡을 수는 없다”고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다만 취할 수 있는 것을 부술 뿐이요 볼 수 있는 것을 부수지는 않는다.
014_0825_a_17L菩薩於般若波羅蜜中有一法定性可取故則不可破以衆生著因緣空法故名爲可破譬如小兒見水中月心生愛著欲取而不能心懷憂惱智者教言雖可眼見可手捉但破可取不破可見
014_0825_b_01L보살은 모든 법이 네 가지의 연에서 생겨남을 관찰하여 아나니, 네 가지의 연 안의 정해진 모양(定相)을 취하지 않는다. 곧 네 가지의 연이 화합하여 생김은 마치 물속의 달과 같아서 비록 거짓이요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물과 달의 인(因)과 연(緣)에서 생기는 것이요 그 밖의 다른 인연으로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있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저마다 스스로의 인연에서 생기되 역시 정해진 진실은 없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인연과 차제연과 연연과 증상연을 여실히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014_0825_a_22L菩薩觀知諸法從四緣生而不取四緣中定四緣和合生如水中月雖爲虛誑無所有要從水月因緣生不從餘緣諸法亦如是各自從因緣生亦無定實以是故說菩薩欲如實知因緣次第緣緣緣增上緣相當學般若波羅蜜
【문】 만일 널리 네 가지 연[四緣]의 이치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아비담(阿毘曇)을 배워야 하는데, 어찌하여 여기서는 네 가지의 연의 이치를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가?
014_0825_b_06L問曰若欲廣知四緣義應學阿毘曇云何此中欲知四緣義當學般若波羅蜜
【답】 아비담에서의 네 가지 연의 이치는 처음에 배우는 이면 그 진실을 얻는 것도 같지만 그것을 구하면 구할수록 삿된 소견에 깊이 빠져드나니, 마치 위에서 네 가지 연의 이치를 파하는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014_0825_b_08L答曰阿毘曇四緣義初學如得其實求之轉深入於邪見如汝上破四緣義中說
또 모든 법의 인할 바[所因]는 네 가지의 연에 인하는 것인데 네 가지의 연에서 다시 인할 바가 무엇이겠는가. 만일 인(因)이 있다면 끝이 없게 된다. 끝이 없다면 비롯됨이 없으며 비롯됨이 없다면 인이 없는 것이니, 만일 그렇게 되면 온갖 법은 모두가 인이 없어야 하리라. 만일 비롯됨이 있다면 그 시초는 인할 바가 없을 것이요 만일 인할 바가 없는데도 있다면 인연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온갖 법들도 역시 인연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있게 될 것이다.
014_0825_b_10L復次諸法所因因於四緣四緣復何所因若有因則無窮若無窮則無若無始則無因若然者一切法皆應無因若有始始則無所因若無所因而有則不待因緣若然者一切諸法亦不待因緣而有
또 모든 법은 인연에서 생기되 두 가지가 있다. 만일 인연 가운데 먼저 있다면 인연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생기는 것이므로 곧 인연이 아니다. 만일 인연 가운데에 먼저 없다면 저마다의 인연은 없는 것이다. 네 가지의 연에 대하여 부질없는 의론[戱論]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허물들이 있게 된다.
014_0825_b_16L復次諸法從因緣生有二種若因緣中先有則不待因緣而生則非因緣若因緣中先則無各各因緣以戲論四緣故如是等過
014_0825_c_01L반야바라밀 안에서의 불가득공(不可得空) 같은 것은 이러한 허물들이 없다. 마치 세간 사람이 귀와 눈으로 보게 되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곧 유(有)가 되지만 미세하게 그의 모양을 구하면 얻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 안에서는 삿된 소견만을 제거시킬 뿐 네 가지의 연은 파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네 가지 연의 모양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014_0825_b_20L如般若波羅蜜中不可得無如是等失如世閒人耳目所睹生老病死是則爲有細求其相則不可得以是故般若波羅蜜中但除邪見而不破四緣是故言欲知四緣相當學般若波羅蜜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들의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를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014_0825_c_02L【經】
復次舍利弗薩摩訶薩欲知一切諸法如法性實際當學般若波羅蜜舍利弗菩薩摩訶薩應如是住般若波羅蜜
【論】 모든 법의 여(如)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저마다의 모양[自相]이고, 둘째는 실상(實相)이다. 저마다의 모양이라 함은 마치 땅은 단단한 모양이고, 물은 축축한 모양이며, 불은 더운 모양이고, 바람은 움직이는 모양인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을 분별하건대 저마다 스스로 모양이 있는 것이다.
014_0825_c_05L【論】
法如有二種一者各各相二者實相各相者如地堅相濕相熱相動相如是等分別諸法各自有相
실상이라 함은 저마다의 모양 가운데서 분별하면서 진실을 구하여도 얻을 수도 없고 파할 수도 없고 모든 허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자상공(自相空) 안에서의 설명과 같다.
014_0825_c_08L相者於各各相中分別求實不可得不可破無諸過失如自相空中說
땅이 만일 진실로 단단한 모양[堅相]이라면 무엇 때문에 아교[膠]나 밀[蠟] 등이 불을 만날 때에는 그 자성(自性)을 버리며, 신통이 있는 사람은 땅에 들어가기를 마치 물과 같이 하겠는가? 또 나무와 돌을 분산시키면 단단한 모양을 잃게 되고, 또 땅을 부수어 작은 티끌을 만들어서 어느 방향을 향해 먼지로 보내면 마침내 허공으로 돌아가 역시 단단한 모양을 잃게 된다.
014_0825_c_10L若實是堅相者何以故膠蠟等與火會時捨其自性有神通人入地如水又分散木石則失堅相又破地以爲微塵以方破塵終歸於空亦失堅相
이와 같이 땅의 모양을 추구(推求)하건대 얻을 수가 없다. 만일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진실로 모두가 공이요 공이면 곧 그것이 땅의 실상이다. 온갖 개별적인 모양(別相)도 역시 그와 같나니, 이것을 여(如)라 한다.
014_0825_c_14L如是推求地相則不可得若不可得其實皆空空則是地之實相一切別皆亦如是是名爲如
법성(法性)이라 함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저마다 법은 공하다. 공과 존재[有]의 차품(差品), 이것이 여(如)가 되며 동일하게 하나의 공이 되면 이것이 법성이 된다.
이 법성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써 모든 법을 분별함이니, 저마다 스스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한량없는 법[無量法]이라 하나니, 이른바 모든 법의 실상이다.
014_0825_c_17L法性者如前說各各法空空有差品是爲如同爲一空是爲法性是法性亦有二種用無著心分別諸法各自有性故二者名無量法所謂諸法實相
014_0826_a_01L마치 『지심경(持心經)』59)에서 말씀하시기를 “법성은 한량없다. 성문(聲聞)의 사람은 비록 법성을 얻는다 하더라도 지혜에 한량이 있기 때문에 한량없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록 사람이 큰 바다에 이른다 하더라도 그릇이 작기 때문에 한량없는 물을 취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이 법성이다.
실제(實際)60)라 함은 법성으로써 확실한 증득[實證]을 삼기 때문에 제(際)가 되나니, 마치 아라한을 일컬어 실제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과 같다.
014_0825_c_21L如『持心經』說法性無量聲聞人雖得法性以智慧有量故不能無量說如人雖到大海以器小故不能取無量水是爲法性實際者以法性爲實證故爲際如阿羅漢名爲住於實際
【문】 여와 법성과 실제의 이 세 가지 일은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일 동일한 것이면 어찌하여 세 가지로 말하는가? 만일 세 가지라면 이제 분별하여 설명해야 하리라.
014_0826_a_02L問曰實際是三事爲一爲異若一云何說三若三今應當分別說
【답】 이 세 가지는 모두 모든 법의 실상을 다르게 부른 이름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범부는 지혜가 없어서 온갖 법에 대하여 삿된 관[邪觀]을 짓기 때문이니, 이른바 항상하고, 즐겁고, 깨끗하고, 실제의 나[實我]라고 하는 등이다.
014_0826_a_04L答曰是三皆是諸法實相異名所以者何凡夫無智於一切法作邪觀所謂常我等
부처님의 제자는 법의 본래 모양 그대로를 관찰하면서 이때에 항상하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즐겁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괴롭다[苦]고 하며, 깨끗하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부정하다[不淨]고 하며, 진실하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공(空)하다 하며, 나라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나 없다[無我]고 한다. 만일 항상함을 보지 않으면서 무상하다고 본다면 이것은 곧 망령된 소견[妄見]이니, 괴롭고 공하고 나 없고 깨끗하지 않다고 보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이것을 일컬어 여(如)라고 한다.
014_0826_a_07L佛弟子如法本相觀是時不見常是名無常不見樂是名苦見淨是名不淨不見實是名空不見是名無我若不見常而見無常者是則妄見見苦無我不淨亦如是是名爲如
여라 함은 본래 그대로요 부수거나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세 가지 법을 말씀하시어 법인(法印)으로 삼으셨으니, 이른바 온갖 유위의 법은 무상하다는 법인[無常印]과 온갖 법은 나 없다는 법인[無我印]과 열반은 고요하다는 법인[寂滅印]이 그것이다.
014_0826_a_12L如者如本無能敗壞以是佛說三法爲法印所謂一切有爲法無常印一切法無我印涅槃寂滅
【문】 이 세 가지의 법인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모두 무너진다. 마치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보살마하살이 물질[色]을 항상하다[常]고 관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물질을 무상하다고 관해도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은 것이다. 괴로움ㆍ즐거움ㆍ나 있음ㆍ나 없음ㆍ고요히 사라짐ㆍ고요히 사라진 것이 아님 역시 그와 같다”고 하셨다. 이와 같거늘 어떻게 법인이라 하는가?
014_0826_a_15L問曰是三法印般若波羅蜜中悉皆破壞如佛告須菩提若菩薩摩訶薩觀色常不行般若波羅蜜觀色無不行般若波羅蜜無我非寂滅亦如是如是云何名法印
【답】 두 가지의 경은 모두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반야바라밀경』 안에서는 똑똑이 모든 법의 실상을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에 집착하는 까닭에 항상하다는 소견[常見]도 버리고 무상하다는 모양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을 법인이라 하는 것이다. 항상함을 버리고 무상에 집착함이 법인이라는 것은 아니니, 나에서 고요히 사라짐[寂滅]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26_a_19L答曰二經皆是佛說如『般若波羅蜜經』中了了說諸法實相有人著常顚故捨常見不著無常相是名法印非謂捨常著無常者以爲法印我乃至寂滅亦如是
014_0826_b_01L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무상 등의 견해에 집착함을 파하나니,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것을 깨뜨린다는 말이 아니다. 이 모든 법의 여(如)를 얻은 뒤에는 곧 법성 안에 들어가서 모든 관(觀)이 소멸되고 다른 믿음이 생기지 않나니, 성품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014_0826_b_01L般若波羅蜜中破著無常等見非謂破不受不著得是諸法如已則入法性滅諸觀不生異性自爾故
비유하건대 마치 어린아이가 물속에 있는 달을 보고 물에 들어가서 그것을 구해도 얻지 못하면 이내 근심하기에 지혜 있는 이가 말해주기를 “성품은 스스로 그런 것이니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법성에 잘 들어가게 되는 이것이 실제이다.
014_0826_b_04L譬如小兒見水中月水求之不得便愁智者語言性自爾莫生憂惱善入法性是爲實際
【문】 성문의 법 안에서는 무엇 때문에 이 여(如)와 법성(法性)과 실제(實際)를 말하지 않으면서 마하연의 법 안에서는 곳곳에서 설명하는가?
014_0826_b_06L問曰聲聞法中何以不說是如法性實際而摩訶衍法中處處說
【답】 성문의 법 안에서도 역시 설명하는 곳이 있는데 다만 적을 뿐이다. 마치 잡아함(雜阿含) 가운데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어느 한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12인연(因緣)의 법은 부처님께서 지은 것이옵니까? 아니면, 이것은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이옵니까?”고 하자, 부처님은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12인연을 짓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은 그와 같아서[如] 법의 모양과 법의 지위는 항상 있는 것이니, 이른바 이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생기기 때문에 이 일이 생기는 것이다.
014_0826_b_08L答曰聲聞法中亦有說處但少耳如『雜阿含』中說有一比丘問佛十二因緣法爲是佛爲是餘人作佛告比丘我不作十二因緣亦非餘人作有佛無佛諸法法相法位常有所謂是事有故是事有是事生故是事生
마치 무명(無明)의 인연 때문에 모든 지어감[行]이 있고, 모든 지어감의 인연 때문에 의식[識]이 있으며, 또한 늙어 죽음[老死]의 인연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함[憂悲苦惱]이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일이 없기 때문에 이 일이 없고, 이 일이 소멸하기 때문에 이 일이 소멸하나니, 마치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모든 지어감이 소멸하고, 모든 지어감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하며, 나아가 늙어 죽음이 소멸하기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함이 소멸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나고 멸하는 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항상 그러하다.”
이 경우에는 여(如)를 말씀한 것이다.
014_0826_b_14L如無明因緣故諸行諸行因緣故識乃至老死因緣故有憂悲苦惱是事無故是事無是事滅故是事滅如無明滅故諸行諸行滅故識滅乃至老死滅故憂悲苦惱滅如是生滅法有佛無佛常是處說
014_0826_c_01L마치 잡아함의 『사리불사자후경(舍利佛師子吼經)』61) 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에게 한 글귀의 이치를 물으면서 세 번이나 거듭하셨으나, 세 번 다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조금 열어 보이신[開示] 뒤에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사리불은 비구들을 모아 놓아 그 비구들에게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일의 실마리[事端]를 아직 보이지 않으셨기에 아직 즉석에서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제 나는 이 법에 대하여 밤낮 이레 동안 그 일을 연설한다 해도 다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014_0826_b_20L如『雜阿含ㆍ舍利弗師子吼經』中說佛問舍利弗一句義三問三不能答佛少開示舍利弗已入於靜室舍利弗集諸比丘語諸比丘言佛未示我事端未卽能答今我於此七日七夜演說其事而不窮盡
그때 다시 어느 한 비구가 부처님께 아뢰기를 “부처님께서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신 뒤에 사리불은 사자후를 외치면서 스스로를 찬탄하였나이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시되 “사리불의 말은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리불은 법성에 잘 통달했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014_0826_c_02L有一比丘白佛佛入靜室後舍利弗作師子吼而自讚歎佛語比丘舍利弗語實不虛所以者何舍利弗善通達法性故
성문의 법 중에서는 모든 법이 나고 멸하는 모양을 관찰함을 여(如)로 삼아 온갖 관(觀)을 멸하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는다.
이 경우에는 법성(法性)을 말씀하신 것이다.
014_0826_c_06L聲聞法中觀諸法生滅相是爲滅一切諸觀得諸法實相處說法性
【문】 여기에서는 다만 여와 법성을 설명했을 뿐이다. 어느 곳에서 다시 실제(實際)를 설명하는가?
【답】 이 두 가지 일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설명한 것이요 실제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았다.
014_0826_c_08L問曰是處但說法性處復說實際答曰此二事有因緣故實際無因緣故不說實際
【문】 실제는 곧 그것이 열반이다. 열반을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12부경(部經)을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인연이 없다고 말하는가?
014_0826_c_10L問曰實際卽是涅槃爲涅槃故佛說十二部經云何言無因緣
【답】 열반은 갖가지의 이름으로 설명한다. 혹은 여읜다[離] 하기도 하고 혹은 묘하다[妙] 하기도 하며 혹은 벗어난다[出]고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으로 실제를 말하게 되지만 다만 이름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연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또 모든 법의 여(如)라 함은 마치 모든 법이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와 같아서 생길 때에도 역시 그와 같고 생긴 뒤의 과거와 현재도 역시 그와 같다. 모든 법은 3세에 평등하므로 이것을 여라 한다.
014_0826_c_12L答曰涅槃種種名字或名爲或名爲或名爲是等則爲說實際但不說名字故言無因緣復次諸法如者如諸法未生生時亦如是生已過去現在亦如諸法三世平等是名爲如
【문】 만일 아직 법이 생기지 않았으면 아직 생긴 법이 없다고 한다. 현재에는 곧 법이 있어 사용할 수가 있다. 현재의 법으로 인하여 일과 작용의 특징이 있는 까닭에 지나간 일을 기억하면서 이것을 과거라 한다. 3세는 저마다 다르므로 사실대로 하면 동일한 것이 아니어야 하거늘 어떻게 3세 평등한 이것을 여(如)로 삼는다 하는가?
014_0826_c_17L問曰若未生法名爲未有生法現在則有法可因現在法有事用相故追憶過事是名過去三世各異不應如實爲一云何言三世平等是名爲如
【답】 모든 법의 실상(實相) 안에는 3세가 평등하고 동일하여 다름이 없다. 마치 반야바라밀의 여품(如品) 중에서 “과거의 여(如)와 미래의 여와 현재의 여와 여래(如來)의 여는 동일한 여(如)이어서 다름이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014_0826_c_21L答曰法實相中三世等一無異如『般若波羅蜜ㆍ如品』中說過去如未來如現在如來如一如無有異
014_0827_a_01L또 먼저 논의(論義)한 가운데서 이미 생기는 법[生法]을 파했다. 만일 생기는 법이 없다면 미래나 현재에도 역시 생기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평등하지 않겠는가. 또 다시 과거의 세상은 비롯됨이 없고, 미래의 세상은 나중이 없으며, 현재의 세상은 머무르지 않나니, 이 때문에 3세의 평등을 여라 하며, 이 여를 행하고 나면 한량없는 법의 성품 안에 드는 것이다.
014_0827_a_01L復次先論議中已破生法若無生法者未來現在亦無生云何不等又復過去世無始來世無後現在世無住以是故三世平等名爲如行是如已入無量法性
법성이라 했는데, 법은 열반을 말하며 무너뜨릴 수 없고 희론할 수도 없다. 법성은 본분의 종자[本分種]가 됨을 말하니, 마치 황색의 돌 속에는 금의 성품이 있고 백색의 돌 속에는 은의 성품이 있는 것과 같다.
014_0827_a_06L法性者法名涅槃不可壞不可戲法性名爲本分種如黃石中有金性白石中有銀性
이와 같이 온갖 세간의 법 속에는 모두가 열반의 성품이 있나니,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지혜(智慧)와 방편(方便)과 지계(持戒)와 선정(禪定)으로써 교화하고 인도해 이 열반의 법성을 얻게 한다.
014_0827_a_08L如是一切世閒法中皆有涅槃性諸佛賢聖以智慧方便持戒禪定教化引導令得是涅槃法
근기가 영리한 이면 곧 이 모든 법은 모두가 바로 법성임을 아나니, 마치 신통있는 사람이 기와와 돌을 변화시켜 모두 금이 되게 하는 것과 같다. 근기가 둔한 이면 방편으로 분별하고 구해 비로소 법성을 얻으니, 마치 큰 대장장이가 돌을 두드려 부순 연후에야 금을 얻는 것과 같다.
014_0827_a_11L利根者卽知是諸法皆是法性如神通人能變瓦石皆使爲金鈍根者方便分別求之乃得法性譬如大冶鼓石然後得金
또 마치 물의 성품은 아래로 흘러가기 때문에 마침내는 바다로 돌아가 합쳐서 하나의 맛이 되는 것처럼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전체의 모양(總相)과 각각의 모양[別相]은 모두가 법성으로 돌아가서 다 같이 하나의 모양이 되나니, 이것을 법성이라 한다.
014_0827_a_14L復次如水性下流故會歸於海合爲一味諸法亦如是一切摠相別相皆歸法性同爲一相是名法性
마치 금강(金剛)이 산꼭대기에 있다가 점차로 아래로 뚫고 내려가 금강의 땅 끝에 이르러 자성에 도달해야 비로소 그치는 것처럼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지혜로 분별하며 추구하다가 여(如) 가운데에 이르고, 여를 쫓아 자성에 들어가서 본말(本末)이 생긴 그대로 되어 모든 희론이 소멸되면 이것을 법성이라 한다.
014_0827_a_17L如金剛在山頂漸漸穿下至金剛地際到自性乃止諸法亦如是智慧分別推求已到如中從如入自如本末生滅諸戲論是名爲法性
또 마치 송아지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울어대다가도 어미소를 만나게 되어야 비로소 그치는 것처럼,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갖가지로 다르며 취하고 버릴 것이 같지 않으면서도 자성에 도달하게 되면 비로소 그치게 되어 다시는 지나는 곳이 없나니, 이것을 법성이라 한다.
실제(實際)라 함은 마치 앞에서 설명했듯이 법성을 실(實)이라 하고 들어가는 곳을 제(際)라 한다.
014_0827_a_20L又如犢子周慞嗚呼得母乃止諸法亦如是種種別異取捨不同得到自性乃止無復過處是名法性實際如先說法性名爲入處名爲
014_0827_b_01L낱낱의 법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體]이 있다. 둘째는 저마다 법(法)이 있나니, 마치 눈과 귀는 같은 4대(大)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눈만이 볼 수 있고 귀에는 보는 공(功)이 없는 것과 같으며, 또 불은 더운[熱] 것으로 법을 삼으면서 촉촉이 적시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셋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힘[力]이 있나니, 마치 불은 태우는 것으로 힘을 삼고 물은 적시는 것으로 힘을 삼는 것과 같다.
014_0827_b_01L一一法有九種一者有體二者各有法如眼耳雖同四大造而眼獨能見耳無見功又如火以熱爲法不能潤三者諸法各有力如火以燒爲力水以潤爲力
넷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스스로 인(因)이 있고, 다섯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스스로 연(緣)이 있으며, 여섯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스스로 결과[果]가 있다.
일곱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스스로 성품[性]이 있고, 여덟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한계[限礙]가 있으며, 아홉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열리고 통하는 방편이 있나니, 모든 법이 생할 때는 몸과 그 밖의 법에 이르기까지 무릇 아홉 가지의 일이 있는 것이다.
014_0827_b_06L四者諸法各自有五者諸法各自有緣六者諸法各自有果七者諸法各自有性八者諸法各有限㝵九者諸法各各有開通方便諸法生時體及餘法凡有九
이 법에 저마다 몸의 법[體法]이 두루 갖추어진 것을 알면 이것을 세간에서의 하(下)의 여(如)라 하고, 이 아홉 가지의 법은 마침내 변하여 달라지고 다하여 소멸한다는 것을 알면 이것을 중(中)의 여(如)라 하나니, 마치 이 몸이 태어날 때는 청정하지 않는 데서부터 나왔으며 비록 또 몸을 씻고 장식한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도로 청정하지 않은 데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이 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관법(觀法)이 소멸하여 마침내는 청정해지니, 이것을 상(上)의 여(如)라 한다.
014_0827_b_11L知此法各各有體法具足是名閒下如知此九法終歸變異盡滅中如譬如此身生從不淨出雖復澡浴嚴飾終歸不淨是法非有非無非生非滅滅諸觀法究竟淸淨是名上如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아홉 가지 일 안에서 법이 있다[有法]는 것이 바로 여(如)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땅의 법은 굳고 무거우며, 물의 법은 차고 습하며, 불의 법은 덥고 비추며, 바람의 법은 가볍고 움직이며, 마음의 법은 식별하고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와 같은 법을 여라 한다.
014_0827_b_16L復次有人言是九事中有法者是名譬如地法堅重水法冷濕法熱照風法輕動心法識解如是等法名爲
마치 경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거나 간에 그대로의[如] 법의 모양과 지위는 항상 세간에 머무르나니, 이른바 무명(無明)의 인연과 모든 지어감[行]은 언제나 본래의 법 그대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법성이라 함은 이 아홉 가지의 법 중에서 성품[性]이며, 실제라 함은 아홉 가지 법 중에서 과증(果證)을 얻는 것이다.
014_0827_b_19L如經中說有佛無佛法位常住世閒所謂無明因緣諸常如本法法性是九法中性九法中得果證
014_0827_c_01L또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항상 머무르면서 동요하지 않건만, 중생이 무명 등의 모든 번뇌 때문에 실상 가운데 바뀌고 달라지고 삿되고 굽게 된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갖가지 방편으로 설법하면서 무명 등의 모든 번뇌를 파괴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도로 진실한 성품을 얻어서 본래대로 다르지 않게 하나니, 이것을 여(如)라 한다.
014_0827_b_22L復次諸法實相常住不動衆生以無明等諸煩惱故於實相中轉異邪曲諸佛賢聖種種方便說法破無明等諸煩惱令衆生還得實性如本不異是名爲
진실한 성품이 무명과 합하기 때문에 변하고 달라져 곧 청정하지 않게 된다. 만일 무명 등을 물리쳐 없애면 그 진실한 성품을 얻는데, 이것을 법성이 청정한 실제(實際)라 하고 법성 안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014_0827_c_03L實性與無明合故變異則不淸淨若除卻無明等得其眞性是名法性淸淨
법성이 한량없고 그지없음을 아는 일은 가장 미묘하다. 나아가 어떠한 법도 법성보다 뛰어나나 법성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 함을 알면 마음이 만족해져서 다시는 그 밖의 것을 구하지 않고 곧 증과를 짓게 된다.
014_0827_c_05L名入法性中知法性無量無邊爲微妙更無有法勝於法性出法性心則滿足更不餘求則便作證
비유하건대 마치 길을 갈 때 날마다 가면서 쉬지 않다가 목적지에 도달하면 다시는 더 가려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가 실제(實際)에 머무르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마치 아라한과 벽지불이 실제에 머무르게 되면 비록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이 그를 위하여 설법한다 해도 역시 다시는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며 다시는 삼계(三界)에 태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827_c_08L如行道日日發引而不止息到所至無復去心行者住於實際亦復如如羅漢辟支佛住於實際縱復恒沙諸佛爲其說法亦不能更有增進又不復生三界
만일 보살이 이 법성 가운데에 들어가면 멀리 떨어져서 실제를 알게 된다. 설령 아직 6바라밀을 두루 갖추지 못했다 해도 중생을 교화하게 되며, 이때 만일 증득하면 중생이 성불하는 도에 방해가 되므로 보살은 대비(大悲)와 정진하는 힘으로 다시 모든 행을 닦는다.
014_0827_c_13L若菩薩入是法性中懸知實際若未具足六波羅蜜教化衆生爾時若證妨成佛道是時菩薩以大悲精進力故還修諸行
또 모든 법의 실상 안에는 항상하는 법[常法]이 없고 즐거운 법[樂法]이 없으며, 나의 법[我法]이 없고 진실한 법[實法]이 없음을 알면서 역시 이 관법[觀法]을 버린다면 이 같은 온갖 관법이 모두 소멸된다. 이것이 곧 모든 법은 실로 열반과 같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어서 본말(本末)의 생긴 그대로가 되는 것이다. 마치 물은 찬 모양이지만 불을 빌리기 때문에 더워지다가 만일 불이 꺼지고 열이 다하면 다시 차게 되어 본래대로 되는 것과 같다.
014_0827_c_16L復次諸法實相中無有常法無有樂法有我法無有實法亦捨是觀法如是等一切觀法皆滅是爲諸法實如涅不生不滅如本末生譬如水是冷假火故熱若火滅熱盡還冷如本
014_0828_a_01L모든 관법(觀法)을 쓰는 것은 마치 물이 불을 만나는 것과 같고, 모든 관법이 소멸되는 것은 마치 불이 꺼지면서 물이 차게 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일컬어 그렇듯[如] 실답게 항상 머무른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성품은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온갖 형상 있는 법[色法]에는 모두 공의 몫이 있는 것과 같다.
014_0827_c_21L用諸觀法如水得火若滅諸觀法火滅水冷是名爲如如實常住何以諸法性自爾譬如一切色法皆有空分
모든 법 안에는 모두가 열반의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법성이라 한다. 열반을 얻는 갖가지의 방편의 법 안에는 모두가 열반의 성품이 있는데 만일 증과를 얻는 때에 법성과 같이 되면 이것이 실제(實際)이다.
또 법성은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으로는 헤아릴 바 아니다. 이것을 법성이라 하고, 미묘하게 이 극치에 이르는 이것을 진제(眞際)라 한다.
014_0828_a_02L諸法中皆有涅槃性是名法性得涅槃種種方便法中皆有涅槃性若得證時法性則是實際復次性者無量無邊非心心數法所量名法性妙極於此是名眞際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삼천대천세계 안의 대지(大地)와 모든 산과 작은 티끌을 헤아려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하나의 털을 백 개로 쪼개고 그 쪼개진 한 개의 털로써 삼천대천세계 안의 큰 바다와 강물과 못과 샘의 모든 물을 모조리 들어 올리면서도 그 물의 성품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014_0828_a_06L【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欲數知三千大千世界中大地諸山微塵當學般若波羅蜜菩薩摩訶薩欲析一毛爲百分欲以一分毛盡擧三千大千世界中大海江河池泉諸水而不擾水性者當學般若波羅蜜
삼천대천세계 안의 모든 불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서 마치 겁(劫)이 다하듯 타오를 때 보살마하살이 한 번 입으로 불어서 꺼지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삼천대천세계 안의 모든 큰 바람이 일어나서 삼천대천세계와 모든 수미산을 마치 썩은 풀을 꺾듯이 불어 무너뜨리고자 할 때 보살마하살이 한 손가락으로 그 바람의 힘을 막아 일어나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014_0828_a_12L三千大千世界諸火一時皆然譬如劫盡燒時薩摩訶薩欲一吹令滅者當學般若波羅蜜三千大千世界中諸大風起欲吹破三千大千世界及諸須彌山如摧腐草菩薩摩訶薩欲以一指障其風力令不起者當學般若波羅蜜
【論】 【문】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모든 보살의 6바라밀[六度] 등의 모든 공덕은 찬탄하지 않으면서 이 큰 힘을 찬탄하시는가?
014_0828_a_18L【論】
問曰佛何以不讚歎諸菩薩六度等諸功德而讚歎此大力
【답】 중생에게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착한 법을 좋아하는 이이고, 둘째는 착한 법의 과보를 좋아하는 이이다. 착한 법을 좋아하는 이를 위해서는 모든 공덕을 찬탄하고, 착한 법의 과보를 좋아하는 이를 위해서는 큰 신력(神力)을 찬탄하게 된다.
014_0828_a_20L答曰衆生有二種一者樂善法二者樂善法果報爲樂善法者讚歎諸功德爲樂善法果報者讚歎大神力
014_0828_b_01L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대(大)라는 이름은 실제로는 끝이 없고 다함이 없고 항상 세간에 있다. 때문에 능히 모두 움직여 그 다소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비록 성곽(城廓)과 대전(臺殿)을 짓는다 하더라도 사용되는 바는 매우 적고 땅은 광대하여 만물을 싣고 양육하므로 가장 견고한 것이다”고 한다.
014_0828_a_23L復次有人言大之名其實亦無邊無盡常在世故無能悉動量其多少人雖造作城郭臺殿所用甚少地之廣大載育萬物最爲牢固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삼천대천세계 안의 대지와 수미산 등 모든 산의 작은 티끌의 수효를 모조리 알고자 하며, 나아가 낱낱의 작은 티끌 안에 있는 중생의 업의 인연은 저마다 분한(分限)이 있어 그 많고 적음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14_0828_b_04L爲是故佛說三千大千世界中地及須彌諸山微塵皆欲盡知其數及一一微塵中衆生業因緣各各有分欲知其多少當學般若波羅蜜
【문】 하나의 돌과 흙의 작은 티끌조차 오히려 그 수효를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의 땅 및 모든 산의 작은 티끌의 수효이겠는가? 이것은 믿을 수조차 없는 일이다.
014_0828_b_07L一石土之微塵尚難可數何況三千大千世界地及諸山微塵之數不可信
【답】 성문과 벽지불의 지혜로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범부이겠는가. 이 일은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만이 아시는 바이다.
014_0828_b_10L答曰聲聞辟支佛智慧尚不能知何況凡夫是事諸佛及大菩薩所知
마치 『법화경(法華經)』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비유하건대 마치 삼천대천세계의 땅 및 모든 산을 가루 내어 티끌로 만들어서 동방으로 천의 세계를 지나가서 티끌 한 개를 떨어뜨리고, 마찬가지로 천의 세계를 지나가서 다시 티끌 한 개를 떨어뜨리며, 이렇게 하면서 삼천세계의 모든 티끌을 모두 다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작은 티끌 수의 세계를 산수(算數)로 헤아려서 알 수 있겠느냐?’고 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말하기를 ‘알 수 없나이다’고 했다. 이어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작은 티끌이 나타날 수 있거나 작은 티끌이 나타나지 않는 모든 나라를 모조리 다 갈아서 티끌을 만든다 하면 대통혜부처님[大通慧佛]62)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이후의 겁수(劫數)가 그만 하느니라.”
014_0828_b_12L如『法華經』說譬喩三千大千世界地及諸山末以爲塵東方過千世界下一塵如是過千世界復下一塵如是盡三千世界諸塵佛告比丘微塵數世界筭數籌量可得知不比丘言不可得知佛言所可著微塵不著微塵諸國盡皆末以爲塵大通慧佛出世已來劫數如是
이와 같은 한량없는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의 작은 티끌도 부처님과 큰 보살은 모두 다 알 수 있거늘 하물며 하나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이겠는가.
또 한량없다[無量] 함은 사람의 마음을 따라 말하는 것이다. 마치 큰 바다의 물을 일컬어 한량없다 하고, 깊이가 8만 유순이라 해도 큰 몸을 가진 라후(羅睺) 아수라왕(阿修羅王) 같은 이는 그 많고 적음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여기지 않는 것과도 같다.
014_0828_b_19L如是無量恒河沙等世界微塵大菩薩皆悉能知何況一恒河沙等世界復次無量隨人心說如大海水名爲無量深八萬由旬如大身羅睺阿修羅王其多少不以爲難
014_0828_c_01L【문】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런 지혜를 얻는가?
014_0828_c_01L問曰云何行般若波羅蜜得是智慧
【답】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모든 번뇌 및 삿된 소견과 희론을 없애고 보살의 매우 깊은 선정에 들면 염지(念智)가 청정하면서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온갖 모든 물질의 작은 티끌을 분별하면서 그 수량을 알 수 있게 된다.
014_0828_c_02L答曰有人行般若波羅蜜滅諸煩惱及邪見戲論入菩薩甚深禪定念智淸淨增廣故則能分別一切諸色微塵知其量數
또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은 장애 없는 해탈[無礙解脫]을 얻기 때문에 이 일보다 더한 것조차도 오히려 어렵다고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이것쯤이랴.
014_0828_c_05L復次諸佛及大菩薩得無㝵解脫故過於是事尚不以爲難何況於此
또 어떤 사람은 “땅은 단단한 것이요 마음은 형질이 없지만 모두 이것은 허망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힘[心力]이 크다”고 말씀하나니, 반야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이 대지(大地)를 부수어 작은 티끌로 만드는 것이다.
014_0828_c_07L復次人爲地爲堅牢心無形質皆是虛妄以是故佛說心力爲大行般若波羅蜜故散此大地以爲微塵
땅에는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이 있어 무겁기 때문에 스스로 짓는 바가 없다. 물은 냄새가 적기 때문에 움직이고 짓는 일이 땅보다는 낫고, 불은 냄새와 맛이 적기 때문에 세력이 물보다는 나으며, 바람은 빛깔ㆍ냄새ㆍ맛이 적기 때문에 움직이고 짓는 일이 불보다는 낫지만, 마음은 이 네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하는 바의 힘이 크다.
014_0828_c_10L以地有色觸重故自無所作水少香故作勝地火少香味故勢勝於水風少味故動作勝火心無四事故爲力大
또 마음은 번뇌의 결사(結使)가 많아 얽매이기 때문에 마음의 힘이 미약하고 적게 되고, 유루(有漏)의 착한 마음은 비록 번뇌는 없다 하더라도 마음이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그 힘은 역시 적다. 2승(乘)의 무루(無漏)의 마음은 비록 모양을 취하지 않더라도 지혜에 한량이 있으며, 무루의 도(道)에서 벗어날 때는 6정(情)으로써 세속을 따라 분별하면서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마음의 힘을 다하지 못한다.
014_0828_c_14L又以心多煩惱結使繫縛故令心力微少有漏善心雖無煩惱心取諸法相故其力亦少二乘無漏雖不取相以智慧有量及出無漏道時六情隨俗分別取諸法相故盡心力
014_0829_a_01L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은 지혜가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항상 선정에 머물면서 세간과 열반에 대하여 분별하는 바가 없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그것이 실로 다르지 않고 다만 지혜에 우열(優劣)이 있을 뿐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는 마침내 청정하여 걸림이 없으며 한 생각 동안에 시방의 온갖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의 대지와 모든 산의 작은 티끌을 셀 수 있다. 그러니 하물며 시방으로 각각 하나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이겠는가.
014_0828_c_19L諸佛及大菩薩智慧無量無常處禪定於世閒涅槃無所分別諸法實相其實不異但智有優劣般若波羅蜜者畢竟淸淨無所罣㝵一念中能數十方一切如恒河沙等三千大千世界大地諸山微塵何況十方各一恒河沙世界
또 만일 반야바라밀을 여의면 비록 신통을 얻는다 하더라도 위에서와 같이 알 수가 없나니, 이 때문에 “이 큰 신력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14_0829_a_02L復次若離般若波羅蜜雖得神通則不能如上所以是故說欲得是大神力當學般若波羅蜜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온갖 모든 물질 안에서는 물이 가장 크다. 그것은 왜냐하면, 대지의 위와 아래는 4면으로 물이 있지 않는 데가 없고, 만일 호세천주(護世天主)가 하늘의 용이 내리는 비의 양을 조절하지 않거나 또는 물을 소멸시키는 구슬이 없다면, 하늘과 땅은 물에 빠져버리며, 또는 물의 인연으로 세간의 중생이나 중생 아닌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나고 자라게 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물이 가장 큰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물방울의 많고 적음을 알면서 방울마다 분산하여 힘을 없애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14_0829_a_05L復有人言一切諸物中爲最大所以者何大地上下四邊不有水若護世天主不節量天龍雨又無消水珠者則天地漂沒又以水因緣故世閒衆生數非衆生數皆得生長以是可知水爲最大是故佛說菩薩欲知水渧多少渧渧分散令無力者當學般若波羅蜜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불이 가장 크다. 그것은 왜냐하면, 냄새와 맛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또한 물이 나오는 곳은 매우 많은데도 불은 그것을 소멸할 수 있으며, 큰 불의 힘은 만물을 태울 수 있고 모든 어둠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이 가장 큰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입으로 불어서 큰 불을 끄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14_0829_a_12L復有人言爲最大所以者何除香味故又以水出處甚多而火能滅之大火之力燒萬物能照諸闇以是故知火爲最是故佛說菩薩欲吹滅大火者學般若波羅蜜
【문】 불은 바람에 의해 더욱 왕성하게 타게 되거늘 어떻게 끈다는 것인가?
【답】 비록 그렇기는 하나 바람이 지나치면 꺼지게 된다.
014_0829_a_17L問曰火因於風乃得然熾云何相滅答曰雖復相因過則相滅
【문】 만일 그렇다면 불은 많아서 한량없고 입의 바람은 심히 적은데 어찌 끌 수 있겠는가?
014_0829_a_19L問曰若爾者火多無量口風甚何能滅之
【답】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선정으로 인하여 신통을 얻는지라 몸을 변화시켜 크게 할 수 있으니, 입의 바람도 역시 커지기 때문에 끌 수가 있다. 또 신력으로서 비록 작은 바람으로도 끌 수 있나니, 마치 조그마한 금강(金剛)이 큰 산을 꺾어 부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은 이 신력을 보고 모두가 다 숭앙하고 굴복하는 것이다.
014_0829_a_20L答曰菩薩行般若波羅因禪定得神通能變身令大口風亦大故能滅之又以神力小風能滅譬如小金剛能摧破大山以是故天世人見此神力皆悉宗伏
014_0829_b_01L보살은 불이 해치는 것이 큰지라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신력으로써 끄는 것이다. 또 삼천세계가 성립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보살은 복덕과 지혜 때문에 그 힘으로 능히 제어할 수 있다.
014_0829_b_01L復次薩以火爲害處廣憐愍衆生故以神力滅之又以三千世界成立甚難薩福德智慧故力能制之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대(大) 가운데서 바람이 가장 크다. 빛깔과 냄새와 맛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양도 가장 크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마치 허공이 끝이 없듯이 바람도 역시 끝이 없기 때문이다. 온갖 것이 나고 길러지고 이루어지고 무너짐은 모두가 바람으로 말미암는다. 큰 바람의 세력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산을 꺾어 부순다”고 한다.
014_0829_b_04L復有人言於四大中風力最大無色味故相最大所以者何如虛空無邊風亦無邊一切生育成敗皆由於風大風之勢摧碎三千大千世界諸山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한 손가락으로 그 바람의 힘을 막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실상(實相)은 한량없고 끝이 없는지라 손가락의 힘으로도 이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014_0829_b_08L以是佛說能以一指障其風力當學般若波羅蜜所以者何般若波羅蜜實無量無邊能令指力如是
【經】 보살마하살이 한번 결가부좌하여 삼천대천세계 안의 허공에 두루 차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보살은 어떤 인연 때문에 이처럼 결가부좌하는 것인가?
014_0829_b_11L【經】
菩薩摩訶薩欲一結加趺坐遍滿三千大千世界中虛空者當學般若波羅蜜【論】
菩薩以何因緣故如是結加趺坐
【답】 범천왕(梵天王)은 삼천세계의 주인인지라 삿된 소견의 마음을 내면서 스스로 대단한 체하다가 보살이 가부하고 앉아 허공에 두루 찬 것을 보면 교만하던 마음이 이내 쉬게 된다.
014_0829_b_14L以梵天王主三千世界生邪見心自以爲大見菩薩結加趺坐遍滿虛則憍慢心息
또 신통의 힘 안에서는 공교한 방편 때문에 하나를 여럿으로 만들 수 있고 여럿을 하나로 만들 수도 있으며 작은 것을 큰 것으로 만들 수도 있고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만들 수도 있나니, 역시 희유하고 하기 어려운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허공에 두루 차게 앉는 것이다.
014_0829_b_17L又於神通力中巧方便故一能爲多多能爲一小能作大大能作小亦爲欲現希有難事故遍虛空
014_0829_c_01L또한 모든 귀신과 용왕이 중생들을 괴롭히거나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허공을 가득 채워 앉아서 중생을 안온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난타(難陀)와 바난타(婆難陀)용왕 형제가 사바제성(舍婆提城)을 부수고자 모든 무기와 독사 따위를 비처럼 내렸는데 이때 목련이 단정히 앉아 허공에 두루 차 있으면서 모든 해치는 물건을 모두 꽃과 향과 영락으로 변화시켜 버린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한번 가부하고 앉아서 삼천대천세계의 허공에 두루 차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14_0829_b_20L亦爲遮諸鬼神龍王惱亂衆生故坐滿虛空令衆生安隱如難陁婆難陁龍王兄弟欲破舍婆提城諸兵仗毒蛇之屬是時目連端坐滿虛空變諸害物皆成華香瓔珞是故說菩薩摩訶薩欲一結加趺坐遍滿三千大千世界虛空當學般若波羅蜜
【經】 다시 보살마하살이 한 개의 털로써 삼천대천세계 안의 모든 수미산왕을 들어서 다른 방향의 한량없는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던지면서도 중생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보살은 무엇 때문에 수미산과 모든 산을 들어서 다른 뱡향의 한량없는 세계에 던진다는 것인가?
014_0829_c_04L【經】
復次菩薩摩訶薩欲以一毛擧三千大千世界中諸須彌山王擲過他方無量阿僧祇諸佛世界不擾衆生當學般若波羅蜜【論】
問曰菩薩何以故擧須彌山及諸山過著他方無量世界
【답】 반드시 드는 일이 있다는 것은 아니니, 이것은 보살의 힘으로 능히 들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것뿐이다.
또 모든 보살은 부처님께서 장차 설법하시려는 까닭에 먼저 삼천대천세계를 장엄하면서 모든 산을 없애고 땅을 편편하게 정돈한다. 마치 『법화경(法華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변화로 된 부처님을 모으려 하시는 까닭에 먼저 땅을 편편하게 다스리셨다”고 설한 것과 같다.
014_0829_c_09L答曰不必有擧此明菩薩力能擧之耳復次諸菩薩爲佛當說法故先莊嚴三千大千世界除諸山令地平整如『法華經』中佛欲集諸化佛故先平治地
또한 희유한 일을 나타내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하나의 수미산 높이는 8만 4천 유순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하나의 산을 들면 벌써 희유한 일이 되는데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백억의 수미산이겠는가.
만일 한 개의 털로써 삼천대천세계의 백억의 수미산을 드는 것조차도 오히려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하나의 털끝으로써 백억의 수미산을 던지며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를 지나가게 함이겠는가.
014_0829_c_13L亦欲現希有事令衆生見故所以者何須彌山高八萬四千由旬若擧此一已爲希有何況三千大千世界百億須彌山若以一毛擧三千大千世界百億須彌山尚難何況以一毛頭擲百億須彌山過無量阿僧祇世界
중생은 보살의 그러한 희유한 일을 보고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면서 생각하기를 ‘이 보살은 아직 부처님의 도를 이루지 못했는데도 그 신력이 곧 이러하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이 되신 분이겠는가”고 하리니, 그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014_0829_c_19L衆生見菩薩希有事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作是念言是菩薩未成佛道神力乃爾何況成佛以是故如是說
014_0830_a_01L【經】 한 그릇 밥으로 시방으로 각각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과 승가[僧]에게 공양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며, 한 벌의 옷과 꽃ㆍ향ㆍ영락ㆍ가루 향ㆍ바르는 향ㆍ사르는 향ㆍ등촉ㆍ당기ㆍ번기 및 꽃일산 등으로 모든 부처님과 승가에게 공양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014_0829_c_23L【經】
欲以一食供養十方各如恒河沙等諸佛及僧當學般若波羅蜜欲以一衣華香瓔珞末香塗香燒香燈燭幢幡華蓋等供養諸佛及僧學般若波羅蜜
【論】 【문】 보살이 만일 한 그릇의 밥으로 한 부처님과 승가에게 공양한다면 이것조차도 오히려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과 승가이겠는가?
014_0830_a_03L【論】
問曰菩薩若以一食供養一佛及僧尚是難事何況十方如恒河沙等諸佛及僧
【답】 공양하는 공덕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일에 있지 않다. 만일 보살이 한 그릇의 밥으로 큰 마음을 내어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승가에게 공양한다면 역시 멀고 가까움에 구애받지 않으리니, 이 때문에 모든 부처님들이 보시고 모두 받으신다.
014_0830_a_05L答曰供養功德在心不在事也若菩薩以一食大悉供養十方諸佛及僧亦不以遠近爲㝵是故諸佛皆見皆受
【문】 모든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가 있기 때문에 모두 보시고 모두 받으시겠지만 스님들은 일체지가 없는데 어떻게 볼 수 있고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014_0830_a_08L問曰佛有一切智故皆見皆受僧無一切云何得見云何得受
【답】 스님들은 비록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나 그 공양을 보시하는 이는 복을 받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심부름을 보내어 그 사람에게 공양하게 할 때 그 사람은 비록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벌써 보시한 복을 얻게 된 것과 같다. 마치 자삼매(慈三昧)와 같아서 중생에게는 비록 베푸는 바가 없다 하더라도 수행한 이는 그 공덕이 한량없다.
014_0830_a_10L答曰僧雖不見不知而其供養施者得福譬如有人遣使供養彼人彼人雖不得而此人已獲施福如慈三昧於衆生雖無所施而行者功德無量
또 모든 보살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되나니, 한 그릇의 밥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승가에게 공양한다 해도 모두 다 충족시켜 다하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샘에서 물이 솟아나와 다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마치 문수시리(文殊尸利)가 한 발우의 환희환(歡喜丸)을 8만 4천의 스님에게 공양할 때 모두 다 충족시키고도 다함이 없는 것과 같다.
014_0830_a_14L復次諸菩薩無量無盡功德成就以一食供養十方諸佛及僧皆悉充足而亦不盡如涌泉出而不竭如文殊尸利以一鉢歡喜丸供養八萬四千僧皆悉充而亦不盡
또 이 경우에 보살이 이 한 발우의 밥을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지만 시방의 부처님 앞에는 온 음식거리가 갖추어져서 나오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귀신은 사람의 한 입밖에 되지 않는 밥을 얻어 천 배ㆍ만 배를 내놓는 것과 같다.
014_0830_a_19L復次菩薩於此以一鉢食供養十方諸佛而十方佛前飮食之具具足而出譬如鬼神得人一口之食而千萬倍出
014_0830_b_01L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한량없는 선정의 문을 얻으며 한량없는 지혜와 방편의 문을 얻나니, 이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반야바라밀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이 보살이 마음으로 짓는 바도 역시 장애가 없다.
014_0830_a_22L復次菩薩行般若波羅蜜得無量禪定門及得無量智慧方便門以是故無所不能以般若波羅蜜無㝵故是菩薩心所作亦無
이 보살은 시방의 천만억 항하의 모래수 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공양할 수 있거늘 하물며 각각 하나의 항하의 모래수 만큼이겠는가. 옷ㆍ꽃ㆍ향ㆍ영락ㆍ가루 향ㆍ바르는 향ㆍ사르는 향ㆍ등촉ㆍ당기ㆍ번기 및 꽃 일산 등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30_b_03L是菩薩能供養十方千萬恒河沙等諸佛及僧何況各如一恒河沙華香瓔珞末香塗香燒香燈燭華蓋等亦如是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시방으로 각각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가 계율[戒]ㆍ삼매(三昧)ㆍ지혜(智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을 갖추게 하고, 수다원의 과위[須陀洹果]‧사다함의 과위[斯陀含果]‧아나함의 과위[阿那含果]‧아라한의 과위[阿羅漢果]에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이르기까지를 얻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014_0830_b_06L【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欲使十方各如恒河沙等世界中衆生悉具於戒三昧智慧解脫解脫知見令得須陁洹果斯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乃至令得無餘涅槃當學般若波羅蜜
【論】 5중(衆)의 이치는 먼저의 설명과 같다. 수다원의 과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3결(結)을 끊어 무위의 과위[無爲果]를 얻는다”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아비담(阿毘曇)에서는 “88결(結)을 끊어 무위의 수다원 과위를 얻는다”고 설명한 것과 같다. 둘째는 신행(信行)과 법행(法行)의 사람이 도비지(道比智) 안에 머무르면서 수다원의 증과(證果)를 얻는 것이 그것이다.
014_0830_b_11L【論】
五衆義如先須陁洹果有二種一者佛說三結得無爲果又如『阿毘曇』說八十八結斷得無爲須陁洹果二者信行行人住道比智中得須陁洹果證者
또 수다(須陀)를 유(流)라 부르니, 곧 그것은 8성도분(聖道分)이다. 반나(般那)는 입(入)이라 하며 이 8성도분에 들어가 열반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로소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관하여 한량없는 법성(法性)의 갈래에 들게 되면서 성인의 범주 가운데 든다고 한다.
014_0830_b_16L復次須陁洹名流卽是八聖道分名入入是八聖道分流入涅槃名初觀諸法實相得入無量法性分墮聖人數中
식기(息忌)63)는 일(一)이라 하고 가미(伽彌)64)는 내(來)라 하나니, 이 사람은 여기서 죽어서 천상에 가 나고 천상에서 다시 한 번 와서[一來]는 뭇 괴로움을 다하게 된다.
아나(阿那)65)는 불(不)이라 하고 가미(伽彌)는 내(來)라 하나니, 이것은 오지 않는 모양[不來相]이라 한다. 이 사람은 욕계(欲界) 안에서 죽어서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 안에 가 나서는 그곳에서 번뇌를 다해 다시는 와 나지 않는다.
014_0830_b_19L息忌名一伽彌名來人從此死生天上天上一來得盡衆阿那名不伽彌名來是名不來相是人欲界中死生色界無色界中彼漏盡不復來生
014_0830_c_01L【문】 금세에서 죽는 아나가미(阿那伽彌)와 중음(中陰)에서 죽는 아나가미, 이들도 역시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아나가미라 하는가?
014_0830_b_23L問曰今世滅阿那伽彌中陰滅阿那伽彌此亦不生色色界何以名爲阿那伽彌
【답】 아나가미는 대부분 색계와 무색계 안에 가 나며, 현재에 죽는 이는 적다. 곧 적은 것이 많은 것을 따르기 때문이니, 중간에 죽는 이도 역시 색계에 가 나려고 하면서 후생의 몸이 근심거리임을 보고 이내 열반을 취하게 된다. 이 때문에 많이 있는 것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014_0830_c_02L答曰阿那伽彌多生色無色界中現在滅者少以少從多故中閒滅者亦欲生色界見後身可患卽取涅槃以是故因多得名
아라한은 온갖 번뇌를 다하기 때문에 온갖 하늘과 용과 귀신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이 아라한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즉 퇴법(退法)ㆍ불퇴법(不退法)ㆍ사법(死法)ㆍ호법(護法)ㆍ주법(住法)ㆍ승진법(勝進法)ㆍ불괴법(不壞法)ㆍ혜해탈(慧解脫)ㆍ공해탈(共解脫)이다. 이 아홉 가지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나아가 8배사(背捨)와 8승처(勝處)와 10일체처(一切處)와 멸진정(滅盡定)과 무쟁삼매(無諍三昧)와 원지(願智) 등의 아라한의 모든 묘한 공덕 및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얻게 된다.
014_0830_c_06L阿羅漢盡一切煩惱故應受一切天龍鬼神供養是阿羅漢有九種退法不退法死法護法住法勝進法壞法慧解脫共解脫九種義如先說及八背捨八勝處十一切處滅盡定無諍三昧願智等阿羅漢諸妙功德得無餘涅槃
무여열반을 아라한이라 하나니, 이 5중(衆)을 버리고 다시는 상속하면서 후생의 5중(衆)을 받는 일이 없으며, 몸과 마음의 괴로움은 모두 다 영원히 소멸된다. 뒤의 세 가지 도의 과위[三道果]는 처음의 도[初道]에서의 설명과 같다.
014_0830_c_12L無餘涅槃名阿羅漢捨此五衆更不復相續受後五衆身心苦皆悉永滅後三道果如初道說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보시할 때에는 “이와 같이 보시는 큰 과보를 얻는다. 이와 같이 보시에 의해 찰리(刹利)의 큰 성바지와 바라문(婆羅門)의 큰 성바지와 거사(居士)의 큰 집안에 태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보시에 의해 사천왕천처(四天王天處)ㆍ삼십삼천(三十三天)ㆍ야마천(夜摩天)ㆍ도솔타천(兜率陀天)ㆍ화락천(化樂天)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나게 된다.
014_0830_c_14L【經】
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布施時應作如是分別如是布施大果報如是布施得生剎利大姓婆羅門大姓居士大家如是布施得生四天王天處三十三天夜摩天兜率陁天化樂天他化自在天
이 보시로 인하여 초선(初禪)ㆍ2선(禪)ㆍ3선(禪)ㆍ4선(禪)ㆍ무변공처(無邊空處)ㆍ무변식처(無邊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들게 되고, 이 보시로 인하여 능히 8성도분(聖道分)을 내며, 이 보시로 인하여 능히 수다원의 도에서부터 부처님의 도에 이르기까지를 얻는다. 그러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만 한다”고 이처럼 분별해야 하느니라.
014_0830_c_20L因是布施得入初禪二禪三禪四禪無邊空處無邊識處無所有處非有想非無想處是布施能生八聖道分因是布施得須陁洹道乃至佛道當學般若波羅蜜
014_0831_a_01L【論】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의 실상을 알면서 취하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고 무너뜨리는 바도 없으며, 얻을 수 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대비(大悲)의 마음으로써 다시 복행(福行)을 닦는다. 복행의 첫 문은 먼저 보시를 행하는 것이니,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로 밝고 날카롭게 보시의 복을 분별하게 된다.
014_0831_a_02L【論】
菩薩摩訶薩知諸法實相無取無捨無所破壞行不可得般若波羅以大悲心還修福行福行初門行布施菩薩行般若波羅蜜智慧明能分別施福
보시하는 물건은 비록 같다 하더라도 복덕의 많고 적음은 마음의 우열(優劣)에 따른다. 마치 사리불이 한 발우의 밥을 부처님께 올리자 부처님께서는 이내 그 밥을 개에게 돌려 베풀면서 사리불에게 물으시되 “너는 밥을 나에게 보시하였고 나는 밥을 개에게 보시하였으니, 누가 복을 얻는 것이 많겠느냐?”고 하자, 사리불이 대답하기를 “제가 부처님 법의 이치를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개에게 보시하여 얻는 복이 더 많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014_0831_a_06L施物雖同福德多少隨心優劣如舍利弗以一鉢飯上佛佛卽迴施狗而問舍利弗汝以飯施我以飯施狗誰得福多舍利弗言如我解佛法義佛施狗得福多
사리불은 온갖 사람 가운데서 지혜가 맨 위이지만 부처님의 복밭[福田]은 가장 으뜸이 되시기에 부처님께서 개라는 열악한 밭[惡田]에 보시하여 극히 많은 복을 얻으신 것보다는 못하다. 이 때문에 큰 복은 마음을 따를 뿐 밭[田]에 있지 않은 것인 줄 알 수 있다. 마치 사리불이 천 배ㆍ만 배ㆍ억 배를 베푼다 해도 부처님의 마음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014_0831_a_10L舍利弗者於一切人中智慧最上而佛福田最爲第一不如佛施狗惡田得福極多以是故知大福從心生不在田也如舍利弗千萬億倍不及佛心
【문】 그대의 설명과 같이 복밭은 묘하기 때문에 복을 얻는 것이 많다. 그러나 사리불이 부처님께 보시한 것이 어찌 큰 복을 얻지 못하는가?
014_0831_a_14L問曰如汝說福田妙故得福多而舍利弗施佛不得大福
【답】 좋은 밭[良田]은 비록 복을 얻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마음보다는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음은 안의 주인이 되고 밭은 바깥의 일이기 때문이다. 혹 때로는 보시의 복이 복밭에 있기도 하나니, 마치 억이(億耳) 아라한이 옛적에 한 송이의 꽃을 불탑에 베풀고는 91겁 동안 인간과 천상 가운데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그 나머지의 복덕의 힘으로 아라한이 된 것과 같다.
014_0831_a_16L答曰良田雖復得福而不如心所以者何心爲內主是外事故或時布施之福在於福田如億耳阿羅漢昔以一華施於佛塔九十一劫人天中受樂餘福德力得阿羅漢
또 아수가왕(阿輸迦王)66)이 어릴 적에 흙을 부처님께 보시하여 염부제(閻浮提)의 왕이 되어 8만의 탑을 일으키고 최후에는 도를 얻은 것과 같다. 보시한 물건은 지극히 미천하고 어린아이 마음은 박(薄)했지만, 다만 복밭이 묘한 까닭에 큰 과보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큰 복은 좋은 밭에서 생기는 줄 알 것이다.
014_0831_a_21L又如阿輸迦王小兒時以土施佛王閻浮提起八萬塔最後得道施物至賤小兒心簿但以福田妙故得大果報當知大福從良田生
014_0831_b_01L만일 대(大) 가운데서도 상(上)이라 하면 세 가지의 일이 모두 갖추어지니, 마음[心]과 물건[物]과 복밭[福田]의 세 가지의 일이 모두 묘하다. 마치 반야바라밀의 초품(初品) 중에서 “부처님께서는 좋은 꽃으로 시방의 부처님께 뿌리셨다”고 말한 것과 같다.
014_0831_b_01L若大中之上三事都具福田三事皆如『般若波羅蜜』初品中說佛以好華散十方佛
또 마치 반야바라밀의 마음으로 보시함은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큰 과보를 얻는 것과 같다.
또 열반을 위하여 보시하는 것도 역시 큰 과보를 얻으며, 대비(大悲)의 마음으로 온갖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보시하는 것도 역시 큰 과보를 얻는다.
또 큰 과보라 함은 마치 여기에서 설명하듯이 찰리의 집안에 태어나고, 나아가 부처님이 되는 그것이다.
014_0831_b_04L復次又如以般若波羅蜜心布施無所著故得大果報復次爲涅槃故施亦得大報以大悲心爲度一切衆生故布施亦得大報復次大果報者如是中說生剎利家乃至得佛者是
【문】 어떻게 보시하면 찰리의 집안에 태어나게 되고, 나아가 부처님이 되는가?
014_0831_b_09L問曰云何布施得生剎利家乃至得佛
【답】 만일 어떤 사람이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면 그 때문에 인간과 천상 안의 부귀를 얻고, 마치 어떤 사람이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기 때문에 찰리의 집안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찰리란 왕과 대신이다.
014_0831_b_10L答曰若有人布施及持戒故得人天中富貴如有人至心布持戒故生剎利家剎利者王及大
만일 지혜의 경서(經書)67)에 집착하면서도 중생을 괴롭히지 않고 보시하면서 계율을 지니면 그 때문에 바라문의 집에서 태어난다. 만일 보시하고 계율을 지님이 적으면서 세간의 쾌락에 집착하기 좋아하면 거사의 대갓집에 태어나니, 거사라 함은 소인(小人)이면서도 큰 부자이다.
014_0831_b_13L若著於智慧經書而不惱衆生持戒故生婆羅門家若布施持戒減少而樂著世樂生居士大家居士小人而巨富
만일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면서 청정함이 조금은 뛰어나고 집안의 일에 싫증을 내며 법을 듣기 좋아하고 착한 사람에게 공양하면 사천왕의 처소에 태어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곳에 있으면서 필요한 것에 욕망이 생긴다 해도 모두가 항상 이 세간의 성현과 착한 사람을 만나게 되므로 공양하려는 마음이 생기면서 복을 닦는 곳을 가까이하기 때문이다.
014_0831_b_16L若布施持戒淸淨小厭患家業好樂聽法供養善人四天王處所以者何在彼有所須欲心生皆得常見此閒賢聖善人心生供養以近修福處故
만일 보시하고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면서 부모 및 그 존중할 이에게 공양하고 마음이 뛰어난 데를 구하려 하면 삼십삼천에 태어난다. 만일 보시하고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면 야마천에 태어난다.
014_0831_b_20L若布施持戒淸供養父母及其所尊心欲求勝三十三天若布施持戒淸淨而好學其心柔和生夜摩天
014_0831_c_01L만일 보시하고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면서 두 일을 갈수록 뛰어나게 하며, 많이 듣기를 좋아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분별하며 열반을 좋아해 마음이 공덕에 집착하면 도솔천에 태어난다.
014_0831_b_23L若布施持戒淸淨令二事轉勝好樂多聞分別好愛樂涅槃心著功德生兜率天
만일 보시하고 깊은 마음으로 계율을 지니며, 많이 듣고 학문을 즐기며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면 화락천에 태어난다.
만일 보시할 때 청정하고 계율을 지님이 더욱 깊으며, 많이 듣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귀히 여기는 심정이 많아서 스스로 고생을 하지 않고서도 남으로부터 쾌락을 구할 수 있으면 타화자재천에 태어난다.
014_0831_c_02L布施深心持戒多聞好樂學問自力生活生化樂天若布施時淸淨持戒轉深好樂多聞自貴情多不能自苦從他求樂生他化自在天
다른 이가 사유하고 부지런히 마음의 방편을 부려 여색(女色)과 5욕(欲)으로 변화시켜 지어내는 바, 그것의 즐거움을 빼앗아서 자재하나니, 마치 서민(庶民)들이 자신의 괴로운 몸을 자기업의 강한 힘 때문에 빼앗겨 버리는 것과 같다.
014_0831_c_06L他所思惟懃心方便化作女色五欲奪而自在譬如庶民苦身自業强力奪之
또 보시할 때는 원(願)의 인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는데, 마치 경의 말씀과 같다.
“어떤 사람이 조그마한 보시와 지계(持戒)를 행하면서 선정도 알지 못하나, 이 사람은 사천왕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항상 뜻하면서 원하므로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치면 사천왕천에 태어나리니, 이것은 틀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타화자재천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31_c_08L復次布施時以願因緣故生天上如經說有人少行布施持戒不知禪定是人聞有四天王天心常志願佛言是人命終生四天上必有是處乃至他化自在天亦如是
또 어떤 사람이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면서 보시를 닦을 때에는 그의 마음에 즐거움을 얻고 만일 보시함이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움도 많게 된다.
이와 같이 사유해 5욕(欲)을 버리고 5개(蓋)를 제거해 초선(初禪)에 들게 되니, 비유상비무상천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4선(禪)과 4무색정(無色定)의 뜻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014_0831_c_13L復次有人布施持戒修布施時其心得樂若施多樂亦多如是思惟捨五欲除五蓋入初禪至非有想非無想天如是四禪四無色定義如上說
또 어떤 사람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에게 보시하고 그로부터 도법(道法)의 해설을 듣게 되면 이 사람은 이 보시로 인하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지혜가 총명하고 영리해지면서 곧 8성도분(聖道分)이 생기며 3결(結)을 끊고 수다원의 과위를 얻게 된다. 나아가 부처님의 도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 보시로 인하여 그 설법을 듣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014_0831_c_17L復次有人布施佛及佛弟子從其聞說道法是人因此布施故心得柔軟智慧明利卽生八聖道分斷三結得須陁洹果乃至佛道亦如是因是布施聞其說法便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014_0832_a_01L또 아직 욕망을 여의지 않은 채 보시하면 인간 안의 부귀와 6욕천(欲天) 안에 태어나고, 만일 욕망을 여의고 보시하면 범세천상(梵世天上)68) 내지는 광과천(廣果天)에 태어난다. 만일 색심(色心)을 여의고 보시하면 무색천(無色天)에 태어난다.
014_0831_c_22L復次未離欲布施生人中富貴及六欲天中若離欲心布施生梵世天上乃至廣果天若離色心布施生無色天中
삼계(三界)를 여의고 보시하면 열반을 위하기 때문에 성문의 도를 얻는다. 보시할 때 시끄러운 데를 싫어하고 고요한 곳을 좋아하면서 깊은 지혜를 기뻐하면 벽지불을 얻으며, 보시할 때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온갖 중생을 제도하려 하면서 으뜸가게 깊고 필경 청정한 지혜를 위한다면 부처님의 도를 이루게 된다.
014_0832_a_02L離三界布施爲涅槃故得聲聞道布施時惡厭憒鬧好樂閑靜喜深智慧得辟支布施時起大悲心欲度一切爲第一甚深畢竟淸淨智慧得成佛道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보시할 때 지혜의 방편[慧方便]의 힘 때문에 능히 단(檀)바라밀ㆍ시라(尸羅)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반야(般若)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느니라.
014_0832_a_06L【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布施時以慧方便力故能具足檀波羅蜜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般若波羅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보시할 때 어떻게 해야 지혜의 방편의 힘 때문에 단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까지를 구족하는지요?”
014_0832_a_11L舍利弗白佛言世尊菩薩摩訶薩云何布施時以慧方便力故具足檀波羅蜜乃至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베푸는 이[施人]와 받는 이[受人]와 재물(財物)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능히 단바라밀을 구족하느니라. 죄가 됨과 죄가 되지 않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시라바라밀을 구족하게 되고, 마음이 동요하지 않기 때문에 찬제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며, 몸과 마음이 정진하면서 게으르거나 쉬지 않기 때문에 비리야바라밀을 구족하게 되고, 어지럽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기 때문에 선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며, 온갖 법은 얻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느니라.”
014_0832_a_13L佛告舍利施人受人財物不可得故能具足檀波羅蜜不罪不可得故具足尸羅波羅蜜心不動故具足羼提波羅身心精進不懈息故具足毘梨耶波羅蜜不亂不味故具足禪波羅蜜知一切法不可得故具足般若波羅
【論】 구족(具足)한다는 뜻은 먼저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지혜의 방편[慧方便]은 이제 이 가운데에서 설명하리니, 이른바 세 가지 일[三事]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014_0832_a_20L【論】
具足先已廣說慧方便今此中所謂三事不可得者是
【문】 지혜의 방편이라 함은 그 일을 성취하고도 파괴하는 바가 없으며 다시는 더 지을 바도 없는 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의 일을 파한다면 응당 단멸(斷滅)에 떨어져야 하거늘 어떻게 지혜의 방편이라 하는가?
014_0832_a_21L問曰慧方便者能成就其事無所破壞更無所今破此三事應墮斷滅云何言方便
014_0832_b_01L【답】 두 가지의 얻을 수 없는 것[不可得]이 있다. 첫째는 얻으면서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둘째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얻으면서 얻을 수 없다면 단멸에 떨어지겠지만, 만일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이것은 지혜의 방편이 되며 단멸에 떨어지지 않는다.
014_0832_b_01L答曰有二種不可得一者得不可得二者不得不可得得不可得者墮於斷滅若不得不可得者是爲慧方便不墮斷滅
만일 지혜의 방편이 없이 보시하면 세 가지 일의 모양[三事相]을 취하게 된다. 만일 세 가지 일의 공으로써 한다면 곧 없는 모양[無相]을 취하는 것이다. 지혜의 방편이 있는 이라면 본래부터 세 가지 일의 모양을 보지 않나니, 이 때문에 지혜의 방편이라 하면 있다 없다 하는 가운데에 떨어지지 않는다.
014_0832_b_04L若無慧方便布施者取三事相若以三事空則取無相慧方便者從本以來不見三事相是故慧方便者不墮有無中
또 보시할 때는 모든 번뇌를 깨뜨리니, 이것을 지혜의 방편이라 한다. 또 온갖 중생에 대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보시하니, 이것을 지혜의 방편이라 한다.
014_0832_b_07L復次施時壞諸煩惱是名慧方便復次一切衆生起大悲心布施是名慧方便
또 과거와 미래의 한량없는 세상 동안에 닦은 복덕과 보시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도 역시 지혜의 방편이라 한다.
또 온갖 시방 3세(世)의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이 지닌 공덕에 대해 억념하고 더불어 기뻐하면서 베풀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면 이것도 지혜의 방편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힘, 이것이 지혜방편의 뜻이 된다. 반야바라밀까지의 지혜의 방편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32_b_10L復次過去未來無量世所修福德布施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名慧方便復次於一切十方三世諸佛及弟子所有功德憶念隨喜布施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名慧方便如是等種種力是爲慧方便義乃至般若波羅蜜慧方便亦如是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014_0832_b_16L【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欲得過去未來現在諸佛功德者當學般若波羅
【論】 【문】 과거의 부처님의 공덕은 이미 없어졌고, 미래의 부처님의 공덕은 아직 있지 않으며, 현재의 부처님의 공덕은 얻을 수 없다. 또 3세 동안의 부처님의 공덕은 모두가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3세의 부처님의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가?
014_0832_b_19L【論】
問曰過去佛功德已滅未來佛功德未有現在佛功德不可得又三世中佛功德皆不可得云何言欲得三世佛功德當學般若波羅蜜
014_0832_c_01L【답】 3세(世)의 부처님의 공덕을 얻으려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3세의 부처님의 공덕과 같은 줄어지거나 적어지는 바가 없는 공덕을 얻고자 할 뿐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부처님의 공덕은 모두가 평등하여 많은 것도 없고 적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014_0832_b_22L答曰欲得三世佛功德自欲得如三世佛功德無所減少耳所以者何一切佛功德皆等無多無少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수명은 한량없고 광명은 천만억 유순이며 한량없는 겁 동안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가?
014_0832_c_02L問曰若爾者何以言阿彌陁佛壽命無量光明千萬億由旬無量劫度衆生
【답】 모든 부처님의 세계는 갖가지여서 청정한 곳과 청정하지 않은 곳이 있고 같이 뒤섞인 데도 있다. 마치 『삼십삼천품경(三十三天品經)』69)에서와 같다. 곧 부처님께서는 삼십삼천(三十三天)에 계시면서 안거(安居)하고 자자(自恣)하셨는데, 4중(衆)들은 오랫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하자 근심하면서 좋아하지 않다가 목련(目連)을 보냈다.
014_0832_c_04L答曰諸佛世界種種有淨不淨有雜如『三十三天品經』說佛在三十三天安居自恣時至四衆久不見佛愁思不樂
목련은 가서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어떻게 이 중생들을 버리고 저 천상에서만 머무르시나이까?” 하니, 부처님께서는 목련에게 말씀하시되 “너는 3천의 세계를 자세히 살펴보아라”고 하셨다. 목련은 부처님의 신력으로 자세히 살펴보자, 부처님들께서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는 것이 보이기도 하고, 혹은 좌선하시는 것이 보이기도 하며 혹 걸식하시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014_0832_c_07L遣目連白佛言世尊云何捨此衆生住彼天上時佛告目連汝觀三千世界連以佛力故觀或見諸佛爲大衆說或見坐禪或見乞食
이와 같이 갖가지 불사(佛事)를 베풀어 지으신 것을 보고 목련은 즉시 오체투지(五體投地) 했는데 이때 수미산이 기우뚱거리면서 크게 움직였으므로 모든 하늘들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 목련은 슬피 울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께 아뢰기를 “부처님께서는 대비(大悲)가 있으시어 온갖 중생을 버리지 않으시니, 이처럼 갖가지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시옵니다”고 하였다.
014_0832_c_11L如是種種施作佛事目連卽時五體投地是時須彌山王跛𨁟大動諸天皆大驚怖連涕泣稽首白佛佛有大悲不捨一作如是種種化度衆生
부처님께서는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본 것은 매우 적은 것이니라. 네가 본 곳을 지나면 동방에 나라가 있는데 순전히 황금으로 땅이 되었고 그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아라한으로 6신통을 갖추어 걸림이 없느니라. 다시 그 동방을 지나서 나라가 있는데 순전히 백은(白銀)으로 땅이 되었고 그 부처님의 제자는 모두가 벽지불의 도를 배우고 있느니라.
014_0832_c_15L佛告目連汝所見甚少過汝所見東方有國純以黃金爲地彼佛弟子皆是阿羅漢六通無㝵復過是東方有國純以白銀爲地彼佛弟子皆學辟支佛道
다시 그 동방을 지나서 나라가 있는데 순전히 7보(寶)로써 땅이 되었고 그 땅에는 항상 한량없는 광명이 있으며 그 부처님의 교화를 받은 제자들은 순전히 보살들이며 모두가 다라니(陀羅尼)와 모든 삼매(三昧)의 문을 얻어서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에 머무르고 있느니라.
014_0832_c_19L過是東方有國純以七寶爲地其地常有無量光明彼佛所化弟子純諸菩薩皆得陁羅尼諸三昧門住阿毘跋致地
014_0833_a_01L목련아, 그 모든 부처님이란 모두가 나의 몸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은 동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한량없는 세계에는 장엄한 곳도 있고 장엄하지 않은 곳도 있나니, 이는 모두 나의 몸으로 짓는 불사이니라. 마치 동방에서처럼 남방ㆍ서방ㆍ북방과 네 간방과 위와 아래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014_0832_c_23L目連當知彼諸佛者,皆是我如是等東方恒河沙等無量世界,有莊嚴者不莊嚴者,皆是我身而作佛事如東方,南西北方四維上下,亦復如是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님께도 다시 청정한 세계가 있음은 마치 아미타부처님의 나라와 같고 아미타부처님께도 역시 엄정(嚴淨)한 세계와 엄정하지 않은 세계가 있음은 마치 석가모니부처님의 나라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014_0833_a_04L以是故,當知釋迦文佛更有淸淨世界如阿彌陁國阿彌陁佛,亦有嚴淨不嚴淨世界如釋迦文佛國
모든 부처님의 대비는 골수까지 사무치며 세계의 아름답고 추함을 가리지 않고 제도해야 할 이를 좇아서 그들을 교화하신다. 마치 인자한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기에 아들이 비록 뒷간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애써 건져 구하면서 밉게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833_a_06L諸佛大悲,徹於骨髓不以世界好醜隨應度者而教化之如慈母愛子雖沒在廁溷懃求拯拔不以爲惡
大智度論卷第三十二
辛丑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58)6근ㆍ6경의 12처(處)를 말한다.
  2. 59)범어로는 Viśeṣacintisūtra.
  3. 60)범어로는 bhūta-koṭi. 진리의 경계를 의미한다.
  4. 61)범어로는 Śāriputrasiṃhanādasūtra.
  5. 62)범어로는 Mahābhijñānabhibhū.
  6. 63)범어 sakṛd의 음역어.
  7. 64)범어 āgāmi의 음역어.
  8. 65)범어 ana에 해당한다.
  9. 66)범어로는 Aśoka. 아육왕(阿育王)을 말한다.
  10. 67)여기에서는 바라문의 16대경(大經)을 말한다.
  11. 68)범어로는 Brahmalokadeva.
  12. 69)범어로는 Trāyatrṃśa-devaparivarta-sū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