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lete Works of Korean Buddhism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 解深密經疏卷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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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심밀경소 권3(解深密經疏卷第三)

서명사 사문 원측 찬술하다(西明寺沙門 圓測撰)
백진순 (역)
승의제상품 제2의 나머지(勝義諦相品第二之餘)
4.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의 상을 해석함1)

  이때 세존께서 존자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선현이여,

  이하는 네 번째로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의 상(遍一切一味相)을 해석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장행으로 자세히 해석한 것이고, 나중은 게송으로 간략히 설한 것이다.혹은 게송 문구는 여래의 정설에서 구별시킨 것이라 볼 수도 있다.2)

1) 장행으로 자세히 해석함
장행에 가서 다시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처음은 여래께서 질문하신 것이고, 다음은 선현이 대답 드린 것이며, 마지막은 세존께서 바로 설하신 것이다.

(1) 여래의 질문
이것은 첫 번째로 세존께서 질문하신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시時에 의거해서 질문받은 자를 표시한 것이고, 나중은 질문하실 것을 바로 밝힌 것이다.

① 시時에 의거해 질문받은 자를 표시함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이때”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진여의 일미상(眞如一味相)’을 설하실 때이다. 혹은 선현이 질문했을 때라고 볼 수도 있다.
진제의 『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때’라고 한 것에는 열한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이고, 둘째는 법륜을 굴리실 때이며, 셋째는 상속을 성취한 사람이 모여 있을 때이고, 넷째는 듣고(聞) 사유하며(思) 닦는(修) 때이며, 다섯째는 해탈을 성취할 종자를 심을 때이다. 여섯째는 자신의 바른 의미(正義)를 성립시켰을 때이고, 일곱째는 삿된 집착으로 건립된 의미를 깨뜨릴 때이며, 여덟째는 생사의 감옥을 깨뜨리는 때이고, 아홉째는 바른 의미를 설해 줌으로써 삿된 의미에 의해 (더이상) 장애받지 않게 된 중생을 기쁘게 해 주는 때이다. 열째는 바르게 수행하는 사람이 보사寶祠를 받아들일 때이니, 부처님이 대중에게 설하시기 위해 능히 정법을 나누고 넓히면서 대중에게 수여하는 것, 곧 법보法寶를 대중에게 하사하는 것을 말한다. 열한째는 수행 중에 바른 선정의 지혜로 (마음을) 분발시키거나(拔起) 억누르거나(抑下) 평온히 놓아두고(捨置) 있을 때이다.3)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때’라고 한 것이다.≻
‘선현善現’이란 범음을 갖추어 말하면 ‘수부후저脩浮吼底’4)라고 하고, 여기 말로는 ‘선현’이라 한다. 서로 전하는 설에 따르면, 그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때 집안이 다 텅 비어 있었다. 부모가 괴이하게 여겨 점쟁이에게 물어 보니, 점쟁이가 ‘공을 나타낸 것(現空)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唯善)이다’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에 ‘선현’이라 이름하였다. 혹은 ‘공생空生’이라 하는데, 곧 이러한 의미를 따른 것이다.
무착無著의 논에서는 ‘선길善吉’이라 하였고,5) 급다笈多가 번역한 『직본반야경直本般若經』6)에서는 ‘선실善實’이라 하였다.

001_0201_c_02L解深密經疏卷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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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201_c_04L西明寺沙門圓測撰

001_0201_c_05L1)勝義諦相品第二之餘 [1]

001_0201_c_06L[第四釋遍一切一味相]
爾時世尊告尊者 [1] 善現曰善現

001_0201_c_07L
釋曰自下第四釋遍一切一味相
001_0201_c_08L中有二初長行廣釋後擧頌略說
001_0201_c_09L或可頌文如來
說中乃可分別
初長行廣釋
就長行中復分爲三
001_0201_c_10L如來告問次善現奉答後世尊正說
001_0201_c_11L此卽第一世尊告問於中有二初約
001_0201_c_12L時標所問者後正明告問此卽初也
001_0201_c_13L言爾時者佛說眞如一味相時或可
001_0201_c_14L善現發問之時眞諦記云言爾時者有十一
一佛在世時二轉法輪時
001_0201_c_15L三成就相續人聚集時四聞思修時五下種成就
解脫時六成立自正義時七破邪執所立義時
001_0201_c_16L八破壞生死牢獄義 [2] 九由說正義爲歡喜破除
邪義所鄣衆生時十正脩行人領受寶祠時佛爲
001_0201_c_17L大衆說能分張正法授與大衆即是法寶祠大衆也
十一於脩行中正定智拔起抑下捨置之時由如
001_0201_c_18L是等義
言爾時也
言善現者若具梵音名脩
001_0201_c_19L浮吼底此云善現相傳說云其人
001_0201_c_20L初生宅室皆空父母驚恠以問相
001_0201_c_21L相師報云現空唯善無所加也
001_0201_c_22L故名善現或云空生卽由此義
001_0201_c_23L著論中名爲善吉笈多所翻直本般
001_0201_c_24L「勝義…」一行補加

001_0202_a_01L진제의 『금강반야기金剛般若記』에서는 ‘동방세계의 청룡타불青龍陀佛이 여기에서 영향影嚮을 나타낸 것’이라 하였으니,7) 자세한 것은 그 『기』와 같다. 또 서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본래 어떤 경문에는 ‘그가 아비발치阿鞞跋致(ⓢ avaivartika, 불퇴전)의 지위에 올랐다’고 하였다.그러나 아직 증거가 되는 문구를 보지 못하였다. 혹은 서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라문의 아들이고 하늘에 기도해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장대하였다. 또 그가 청해서 부처님을 모셔다가 큰 법회를 열었는데, 부처님을 기원정사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와서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혹은 정음향왕淨音嚮王의 태자라고 한다.8)

  어째서 이 모임에서는 오직 선현 비구에게만 물으시고 그 밖의 삼부 대중 및 보살중에게는 묻지 않으셨는가?9)
 () 진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밖의 부류에게 묻지 않으신 데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처음에 법륜을 굴리실 때 이 비구가 먼저 입도入道하여 부처님 제자가 되었고 그 밖의 대중들은 나중에 입도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백랍百臘의 비구니라도 일랍一臘의 비구에게 경례하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비구니는) 비구의 힘으로 계戒를 성취했기 때문이고, 또 종신토록 떠나지 않고 비구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셋째, 근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장부의 근성은 굳고 날카롭지만 여성은 암둔하다. 그러므로 율律에서 ‘여인에게 설법해 줄 때 다섯 마디(五語)나 여섯 마디(六語)를 넘으면 파야제波夜提10)’라고 밝혔다.11) ‘다섯 마디’라는 것은 오음五陰을 말하고, ‘여섯 마디’란 육입六入을 말한다. 여인에게 법을 설해 주어도 오음·육입 이외의 의미를 증득할 수 없으니, 근성이 암둔해서 많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부류와 보살중에게 묻지 않은 이유를 자세히 분별하면 모두 다섯 가지 의미가 있는데, 번거로울까 봐 서술하지 않겠다. 또 『오분율』 제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섯 마디란 색의 무상과 수·상·행·식의 무상을 말하고, 여섯 마디란 안의 무아와 이·비·설·신·심의 무아를 말한다.”12) 『사분율』 등에서는 모두 (그 말을) 해석하지 않았다.
지금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수보리에게 (말하도록) 명한 것에 대해 가령 『대지도론』 제40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보리에게 두 가지 인연의 위대함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그에게 설법하라고 명하셨고 그 밖의 제자에게는 명하지 않으셨으니, 첫째는 그가 무쟁정無諍定13)을 수행하길 좋아하고, 둘째는 공법空法을 깊이 수행하길 좋아하기 때문이다.≻14)

  그렇다면 어째서 (성문에게만 물으시고) 보살에게는 묻지 않으셨는가?
  예를 들어 『대지도론』 제1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001_0202_a_01L名爲善實眞諦金剛波若記云
001_0202_a_02L方世界靑龍陀佛於此影嚮也廣如
001_0202_a_03L彼記又相傳云自有經文位登阿
001_0202_a_04L鞞跋致地然未見誠文或相傳云婆羅門子
天而生生始長大1)請又 [2] 延佛爲設
001_0202_a_05L大會送佛祇園返獲羅
或云是淨音嚮王太子
如何此會
001_0202_a_06L告善現比丘不告餘三部衆及菩薩
001_0202_a_07L衆耶眞諦師云不告餘部有其三
001_0202_a_08L一初轉法輪時比丘先入道
001_0202_a_09L佛弟子餘衆後入故二百臈 [3] 比丘尼
001_0202_a_10L禮敬一臈比丘所以者何由比丘力
001_0202_a_11L成就戒故又終身不離依止比丘
001_0202_a_12L根性勝丈夫根性堅利女性闇▼(艹/句)
001_0202_a_13L故律明爲女人說法過五六語波夜
001_0202_a_14L五語者謂五陰六語者謂六入
001_0202_a_15L女說法不得陰入外義根性闇▼(艹/句)
001_0202_a_16L能多受故若廣分別不告餘部及以
001_0202_a_17L菩薩皆有五義恐繁不述又五分
001_0202_a_18L律第六卷云五語者色無常受想
001_0202_a_19L行識無常六語者眼無我耳鼻舌身
001_0202_a_20L心無我四分等律皆不釋也今解
001_0202_a_21L須菩提如智度論第四十卷須菩提
001_0202_a_22L有二因緣大佛命說法不命餘弟子
001_0202_a_23L一者好行無諍定二好深行空法
001_0202_a_24L若爾如何不告菩薩如智度論

001_0202_b_01L≺수보리는 항상 공삼매空三昧를 행하고 또 번뇌를 다 끊었기에 중생들이 믿음을 내므로 그에게 명하여 설법하게 한 것이다.≻15) 『법화론』에서는 다섯 가지 의미에서 부처님이 성문에게 명하고 보살에게는 묻지 않았다고 하였다.16) 『대지도론』 제41권에서는 보살 및 그 밖의 제자에게 명하지 않았고 부처님도 설하시지도 않고 (오직 수보리에게 설법하라고 명한) 이유를 자세하게 해석하였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17) 저 『대지도론』에서 오직 선현에게만 물은 것에 준하여, 지금 이 『해심밀경』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② 질문하신 것을 바로 밝힘

  그대는 유정계에서 얼마나 되는 유정이 증상만增上慢18)을 품고서 증상만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이해한 것을 기별記別19)해 주는지 아는가? 그대는 유정계에서 얼마나 되는 유정이 증상만을 여의고서 (자기가) 이해한 것을 기별해 주는지 아는가?”

  이것은 두 번째로 질문하신 것을 바로 밝힌 것이다.
이 경문에서 말한 “증상만”에 대해, 예를 들면 『법화경』에서는 ‘아직 얻지(得) 못했으면서도 얻었다고 말하고 아직 깨닫지(證) 못했으면서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을 증상만이라 한다’고 하였다.20) 『해절경』도 이와 동일하게 설한다. 『심밀해탈경』에서 “아에 의지하고 만에 의지하여”21)라고 한 것은 번역가의 오류다.
지금 이 경문에서 만慢의 유·무에 의거해서 두 개의 질문을 일으켰는데, 진제의 『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에서는 증상만이 있는 경우를 물었고, 뒤에서는 증상만이 없는 경우를 물었다. 전자는 범부에 대해 물은 것이고, 후자는 성인에 대해 물은 것이다. 앞의 질문은 대치할 수 없는 사람을 나타내었고, 뒤의 질문은 대치할 수 있는 사람을 (나타낸 것이다.) 또 전자는 공과를 행하는 사람(空果行人)에 대해 물은 것이고, 후자는 불공과를 행하는 사람(不空果行人)에 대해 물은 것이다.22) 또 전자는 전도되게 닦는 사람에 대해 물은 것이고, 후자는 전도되지 않고 닦는 사람에 대해 물은 것이다. 또 전자는 사정취邪定聚23)의 사람에 대해 물은 것이고, 후자는 정정취正定聚24)의 사람에 대해 물은 것이다.≻
그런데 이 경문의 해석에서 진제의 『기』에 의하면, ‘만이 있다(有慢)’거나 ‘만이 없다(無慢)’고 한 데는 각기 네 가지 의미가 있다.
‘만이 있다’는 것은 네 가지 의미에서다. 첫째는 증상만의 의지처(依止)이니, 유취오음有取五陰을 말한다.25) 둘째는 만의 인因이니, 만수면慢隨眠26)을 말한다. 셋째는 만의 체體이니, 상심上心(자기를 높이는 마음)에 해당한다. 넷째는 만의 작용(事用)이니, 바로 상심의 만으로 인해 모든 업과 과보 등을 내는 것을 말한다. “얼마나 되는 유정이(知幾有情)”라고 한 것은 만의 의지처를 나타낸 것이고, “증상만을 품고서”라고 한 것은 만의 인을 나타낸 것이며,

001_0202_b_01L第十一云須菩提常行空三昧復斷
001_0202_b_02L漏盡衆生生信命令說法法華論中
五義故佛命
001_0202_b_03L聲聞不告菩薩大智度論第四十一廣釋
不告菩薩及餘弟子佛亦不爲說所由應知

001_0202_b_04L彼智度唯告善現今此經中應知亦
001_0202_b_05L

001_0202_b_06L
汝於有情界中知幾有情懷增上慢
001_0202_b_07L增上慢所執持故 [4] 記別所解汝於有情
001_0202_b_08L界中知幾有情離增上慢故記別所解

001_0202_b_09L
釋曰此卽第三 [5] 正明告問此中所言
001_0202_b_10L增上慢者如法華經未得謂得未證
001_0202_b_11L謂證名增上慢解節同此深密經云
001_0202_b_12L依我我 [6] 慢者譯家謬也今於此中
001_0202_b_13L慢有無以發兩問眞諦記云前問有
001_0202_b_14L增上慢後問無增上慢前問凡夫
001_0202_b_15L問聖人前問顯示不可治人後問可
001_0202_b_16L治人又前問空果行人後問不空果
001_0202_b_17L行人又前問顚倒脩人後問不顚倒
001_0202_b_18L脩人又前問邪定聚人後問正定聚
001_0202_b_19L然釋此文依眞諦記有慢無慢
001_0202_b_20L各有四義有慢四者一增上慢依止
001_0202_b_21L謂有取五陰二慢因謂慢隨眠
001_0202_b_22L慢體卽是上心四慢事用卽是因上
001_0202_b_23L心慢能生諸業果報2) [3] 言知幾
001_0202_b_24L有情者顯慢依上 [7] 懷增上慢者顯慢

001_0202_c_01L“증상만에 사로잡혀서”라고 한 것은 만의 체를 나타낸 것이고, “이해한 것을 기별하는지”라고 한 것은 만의 작용을 나타낸 것이다.
‘만이 없다’는 것은 네 가지 의미에서다. 첫째는 무만無慢의 의지처이니, 무루오음無漏五陰의 상속을 말한다.27) 둘째는 무만의 인이니, 미지욕근未知欲根28)을 말한다. 셋째는 무만의 체이니, 지근知根29)을 말한다. 넷째는 무만의 작용이니, 지이근知已根30)을 말한다. “얼마나 되는 유정이(知幾有情)”라고 한 것은 무만의 의지처이고, “증상만을 여의고서”라고 한 것은 무만의 인 및 무만의 체를 말한다.『해절경』에서는 “증상만이 없이 증상만을 따르지 않고”31)라고 하였고, 『심밀해탈경』에서는 “아를 떠나고 만을 떠나서”32)라고 하였다. ◯이 두 종류 경에는 각기 두 구의 문장이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지금 이 판본에는 오직 한 구만 있는데,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에 다만 “증상만을 여의고서”라고 한 것이다.33) “이해한 것을 기별하는지”라고 한 것은 무만의 작용을 나타낸 것이다.

(2) 선현의 대답

  이때 존자 선현이 부처님께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제가 알기로는 유정계에서 소수의 유정들이 증상만을 여의고서 (자기가) 이해한 것을 기별해 줍니다.

  이하는 두 번째로 선현이 대답을 드린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뒤의 질문에 대해 해석하였고, 나중에 앞의 질문에 대해 답하였다.

① 뒤의 질문에 대해 해석함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오직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이라야 (모든 법에) 편재하는 일미상一味相의 법공승의法空勝義를 여실하게 알고 이로 인해 법에 대한 증상만을 일으키지 않지만, 모든 이승과 이생異生(범부) 등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소수의 유정들이 증상만을 여의고서 (자기가) 이해한 것을 기별해 줍니다.”라고 말하였다.

  어떻게 이승의 (수보리가) 그 (법공승의의) 분제를 알아서 보살을 위해 설해 주겠는가?
  부처님이 가피해 주셨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총상總相을 대략 알기는 해도 궁극에는 낱낱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대품경』 「설상품舌相品」34)에서는 ‘수보리가 보살에게 설법해 준 것은 모두 부처님의 힘이다’라고 하였다.35)

  이 선현이 가피력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법집을 끊었어야 하고,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법공승의를) 설할 수 있겠는가?
  가피력으로 인해 믿고 이해할 수 있으니, 또한 ‘공’을 설할 수도 있는 것이다.

001_0202_c_01L之因增上慢所執持故者顯慢體也
001_0202_c_02L記別所解者顯慢事用無慢四者
001_0202_c_03L無慢依上謂無漏五陰相續二無慢
001_0202_c_04L卽是未知欲根三無慢體卽是知
001_0202_c_05L四無慢事用卽知已根言知幾有
001_0202_c_06L情者無慢依上離增上慢者謂無慢
001_0202_c_07L因及無慢體解節經云無增上慢不由增上
深密經云離我離慢○此二
001_0202_c_08L經各具二文今此本中唯有一句
含有二義是故但云離增上慢也
記別所解
001_0202_c_09L無慢事用

001_0202_c_10L
爾時 [8] 尊者 [9] 善現白佛言世尊我知有情
001_0202_c_11L界中少分有情離增上慢記別所解

001_0202_c_12L
釋曰自下第二善現奉答於中有二
001_0202_c_13L先釋後問後答前問此卽初也謂唯
001_0202_c_14L初地已上菩薩如實了知遍一味相
001_0202_c_15L法空勝義由此不起法增上慢非諸
001_0202_c_16L二乘及異生等故言少分有情離增
001_0202_c_17L上慢記別所解如何二乘知其分
001_0202_c_18L爲菩薩說佛加被故總相略
001_0202_c_19L而非究竟一一了知3) [4] 故大品
001_0202_c_20L經舌相品云須菩提爲菩薩說法
001_0202_c_21L是佛力此善現由加被力若能解
001_0202_c_22L應斷法執若不解者如何能說
001_0202_c_23L解云由加被力故能信知解亦能
001_0202_c_24L「請又」疑寫倒「報」異無「故」異無

001_0203_a_01L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이승이) 법집을 끊었어야 한다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고, 『대지도론』에서 ‘이승은 아직 법공의 이치를 증득하지 못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선현은 바로 이승인데, 어떻게 (부처님에게) 대답을 드리면서 정토에 머물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이 가피해 주셨기 때문에 정토에 갈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부처님이 화작해 낸 것이지 실재의 몸이 아니거나, 혹은 예토에서 이렇게 문답한 것일 수도 있다.

② 앞의 질문에 대해 답함

  세존이시여, 제가 알기로는 유정계에서 한량없이 무수한 불가설의 유정들이 증상만을 품고서 증상만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이해한 것을 기별해 줍니다.

  이하는 두 번째로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한 것이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간략한 대답이고, 다음의 “세존이시여” 이하는 자기가 보았던 것을 진술한 것이고, 마지막의 “세존이시여” 이하는 자기가 생각한 것을 진술한 것이다.

가. 간략한 대답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제가 알기로는 유정계에서 한량없는 유정들이 증상만을 품고서 (각자가) 이해한 것을 기별해 준다’는 것이다.
‘기별記別’의 특징은 뒤에서 설한 것과 같다.36)

● 증상만에 대한 대·소승의 학설
그런데 여기서 말한 ‘증상만을 품는다’는 것에 대해 여러 설이 다르다.

◉ 살바다종과 경부종
살바다종에 의하면 네 종류의 사람이 있어서 증상만을 일으키는데, 이른바 이생異生(범부) 및 하위 삼과三果(예류·일래·불환)의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대비바사론』 제4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세 가지 설이 다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생은 다섯 가지에 대해 (증상만을) 일으키니, 말하자면 사선근四善根과 사과四果를 말한다. 예류과는 네 가지에 대해 일으키니, 첫 번째(사선근)는 제외한다. 일래과는 세 가지에 대해 일으키니, 앞의 두 가지(사선근·예류과)는 제외한다. 불환과는 두 가지에 대해 일으키니, 앞의 세 가지(사선근·예류과·일래과)는 제외한다. 아라한과는 증상만이 없다.≻37)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생은 아홉 종류에 대해 (증상만을) 일으키니, 유루의 선근善根과 (무루의) 사향四向·사과四果38)를 말한다. 예류과는 일곱 가지에 대해 일으키니, 앞의 두 가지는 제외된다. 일래향은 여섯 가지에 대해 일으키니, 앞의 세 가지는 제외된다. 일래과는 다섯 가지에 대해 일으키니, 앞의 네 가지는 제외된다. 불환향은 네 가지에 대해 일으키니, 앞의 다섯 가지는 제외된다. 불환과는 세 가지에 대해 일으키니, 앞의 여섯 가지는 제외된다. 아라한향은 두 가지에 대해 일으키니, 앞의 일곱 가지는 제외된다.39)

001_0203_a_01L說空不爾應斷法執過故智度論
001_0203_a_02L二乘未證法空理故此善現卽
001_0203_a_03L是二乘如何奉答在淨土耶佛加
001_0203_a_04L被故得往淨土或佛所化而非實
001_0203_a_05L或可穢土有此問答

001_0203_a_06L
世尊我知有知界中有無量無數不可
001_0203_a_07L說有情懷增上慢爲增上慢所執持故
001_0203_a_08L記別所解

001_0203_a_09L
釋曰自下第二答第一問於中有三
001_0203_a_10L初略答次世尊下述已 [10] 所見後世尊
001_0203_a_11L申已所念此則初也謂我知有
001_0203_a_12L情界中無量有情懷增上慢記別所解
001_0203_a_13L記別之相如後當說然此所說懷增
001_0203_a_14L上慢諸說不同若依薩婆多宗
001_0203_a_15L四種人起增上慢所謂異生及下三
001_0203_a_16L如大婆沙四十三云起增上慢
001_0203_a_17L說不同有說異生起五謂四善根
001_0203_a_18L及四果預流起四除第一一來起
001_0203_a_19L除前二不還起二除前三阿羅
001_0203_a_20L漢無增上慢有說異生起九謂有
001_0203_a_21L漏善根四向四果預流果起七除前
001_0203_a_22L一來向起六除前三一來果起
001_0203_a_23L除前四不還向起四除前五
001_0203_a_24L還果起三除前六阿羅漢向起二

001_0203_b_01L아라한과는 증상만이 없고, 예류향은 ‘증상만을 일으킨다’는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40)
평가評家는 말한다. ≺성자는 수승한 유루선(勝有漏善)에 대해 증상만을 일으킨다. 따라서 여섯 성자는 이전처럼 일으키고, 각각 다시 하나씩 증가된다.41)42)

자세하게 설하면 그 논과 같다.
경부종에 의하면 살바다종과 똑같으니 이치에 상위되는 것은 없다. 그 부파 내에는 다양한 계탁이 있기 때문이다.

◉ 대승
이제 대승에 의하면 (소승의) 두 종파의 설과 거의 동일하니, ‘만慢’은 이생과 유학有學의 성자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이란 무엇인가? 자기를 믿으면서 남에게 거만하게 구는 것이 (만의) 자성이고, ‘거만하지 않음(不慢)’을 장애하여 고苦를 내는 것이 (만의) 작용이다.……이 만을 차별시키면 일곱 종류나 아홉 종류가 있다. 삼품처三品處와 아처我處와 덕처德處에서 생겨난다.43) 모두 다 견소단·수소단에 통하고, 성인의 지위에서도 아만이 현행할 수 있으니,44) 만의 부류가 이로 인해 일어난다고 해도 또한 과실이 없다.”45)
  ‘일곱 종류 만’이라 한 것에 대해 『오온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이란 무엇인가? 만慢, 과만過慢, 만과만慢過慢, 아만我慢, 증상만增上慢, 비만卑慢, 사만邪慢을 말한다. ‘만’이란 하열한 자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헤아리거나 혹은 동등한 자에 대해 자기가 동등하다고 헤아리는, 마음의 거만함을 자성으로 삼는다. ‘과만’이란 동등한 자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헤아리거나 혹은 더 뛰어난 자에 대해 자기가 동등하다고 헤아리는 것이다. ‘만과만’이란 더 뛰어난 자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헤아리는 것이다. ‘아만’이란 오취온을 따라 관觀하면서 ‘나(我)’라고 여기거나 ‘나의 것(我所)’이라고 여기는, 마음의 거만함을 자성으로 삼는다. ‘증상만’이란 아직 증득하지 못한 증상된 수승한 소증법所證法에 대해 ‘나는 이미 증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만’이란 대단히 수승한 자에 대해 자기가 조금 하열하다고 헤아리는 것이다. ‘사만’이란 실제로 덕이 없는데 자기가 덕이 있다고 헤아리는 마음의 거만함을 자성으로 삼는다.≻46)
『집론』 제4권, 『잡집론』 제6권, 『유가사지론』 제89권에서도 모두 『오온론』과 동일하게 말한다. 『대지도론』 제56권에 의하면, ‘증상만인은 불제자로서 선정은 얻었어도 아직 성도를 얻지는 못했는데 스스로 이미 얻었다고 말한다’고 하였다.47)

001_0203_b_01L前七阿羅漢無增上慢預流向無起
001_0203_b_02L增上慢義評曰聖者亦於勝有漏善
001_0203_b_03L起增上慢故六聖者如前所起
001_0203_b_04L復增一廣說如彼依經部宗同薩婆
001_0203_b_05L於理無違於彼部中有多計故
001_0203_b_06L今依大乘大同二宗慢通異生有學
001_0203_b_07L聖者故成唯識第六卷云云何爲慢
001_0203_b_08L恃已 [11] 於他高擧爲性能障不慢生苦
001_0203_b_09L爲業此慢差別有七九種謂於三
001_0203_b_10L品我德處生一切皆通見脩所斷
001_0203_b_11L位我慢旣得現行慢類由斯起亦無
001_0203_b_12L解云言七慢者五蘊論云云何
001_0203_b_13L爲慢謂慢過慢慢過慢我慢
001_0203_b_14L上慢卑慢邪慢慢謂於劣計已勝
001_0203_b_15L或於等計已等心高擧爲性過慢謂
001_0203_b_16L於等計已勝或於勝計已等慢過慢
001_0203_b_17L謂於勝計已勝我慢謂於五取蘊隨
001_0203_b_18L觀爲我 [12] 我所心高擧爲性增上
001_0203_b_19L慢謂於未得增上殊勝所證法中
001_0203_b_20L我已得卑慢謂於多分殊勝計已少
001_0203_b_21L分下劣邪慢謂實無德計已有德
001_0203_b_22L高擧爲性集論第四雜集第六瑜伽
001_0203_b_23L八十九皆同五蘊若依智度論五十
001_0203_b_24L六云增上 [13] 人者是佛弟子得禪定未

001_0203_c_01L
‘아홉 종류 만’이라 한 것에 대해 『발지론』 제20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홉 종류 만이 있으니, 내가 더 뛰어나다고 하거나(我勝), 나와 동등하다고 하거나(我等), 내가 조금 하열하다고 하거나(我劣), 나보다 조금 뛰어난 점이 있다고 하거나(有勝我), 나와 동등한 점이 있다고 하거나(有等我), 나보다 하열한 점이 있다고 하거나(有劣我), 나보다 뛰어난 점이 없다고 하거나(無勝我), 나와 동등한 점이 없다고 하거나(無等我), 나보다 하열한 점이 없다고 하는(無劣我) 것을 말한다.48)49)
『현양성교론』 제1권에서는 다만 세 종류 만의 부류를 열거하는데,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령 경에서 세 종류 만의 부류를 설했으니, 즉 ‘내가 더 뛰어나다’고 하는 만의 부류와 ‘나와 동등하다’고 하는 만의 부류와 ‘내가 하열하다’고 하는 만의 부류이다.”50)
  (세 종류 만의 부류의) 의미는 아홉 종류 만에 대한 설명에 준하면 되니, 이치에 위배되는 것은 없다.
이 일곱 가지 만과 아홉 가지 만은 『성유식론』에 따르면 다섯 곳에서 생긴다. 따라서 그 논의 제6권에서는 “이 만을 차별시키면 일곱 종류나 아홉 종류가 있으니 삼품처三品處와 아처我處와 덕처德處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51)라고 하였다.
  우선 일곱 종류 만 중에서 만·과만·만과만·비만은 삼품처에 의지해서 일어나고, 아만 한 종류는 아처에 의지해서 생겨나며, 사만·증상만은 덕처에 의지해서 생겨난다. 따라서 『잡집론』 제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품처·중품처에 대해 만을 내고,52) 중품처·상품처에 의거해 과만을 내며,53) 상품처에 의거해 만과만을 내고 상품처에 의거해 하열만(비만)을 낸다.54) 오취온五取蘊을 아·아소라고 집착하여 이로 인해 아만을 일으킨다. 아직 증득하지 못한 수승한 덕에 대해 자기가 이미 수승한 덕을 얻었다고 헤아리면서 증상만을 일으킨다. 실제로는 덕이 없는데 자기가 덕이 있다고 헤아리는 것은 곧 사만이다.≻55)
아홉 종류 만에 대해 설명하면, 본래 두 가지 설이 있다.
『발지론』에 의하면, 예를 들어 『구사론』 제19권에서 설한 것처럼, 이와 같은 아홉 가지 만은 이전에 말한 일곱 종류 만의 세 종류에서 분리된 것이니, 앞서 말한 만·과만·비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종류 만은 견見에 의거해 행行을 내는 경우 차례대로 특수한 면이 있으므로 삼중三重의 세 종류 만이 성립된다. 처음의 세 가지 만은 차례대로 과만·만·비만에 해당하고,56) 중간의 세 가지 만은 차례대로 비만·만·과만에 해당하며,57) 마지막 세 가지 만은 차례대로 만·과만·비만에 해당한다.58) 자세한 것은 『대비바사론』과 같다.
『품류족론』에 의거해 만의 종류를 해석하겠다.

001_0203_c_01L得聖道自謂已得言九慢者發智論
001_0203_c_02L第二十云有九慢類謂我勝我等
001_0203_c_03L我劣有勝我有等我有劣我無勝
001_0203_c_04L無等我無劣我顯揚第一但列
001_0203_c_05L三種慢類故彼論云如經說三種慢
001_0203_c_06L我勝慢類我等慢類我劣慢類
001_0203_c_07L解云義准說九於理無違此七九慢
001_0203_c_08L依成唯識於五處生故彼第六云
001_0203_c_09L慢差別有七九種謂於三品我德處
001_0203_c_10L解云且七慢中過慢慢過
001_0203_c_11L卑慢依三品起我慢一種依我
001_0203_c_12L處生邪慢增上依德處生故雜集論
001_0203_c_13L第六卷云於下中二品處生慢依中
001_0203_c_14L上品處生過慢依上品處生慢過慢
001_0203_c_15L依上品處生劣 [14] 於五邪 [15] 執我我
001_0203_c_16L由此起我慢於未得勝德 [16] 已得
001_0203_c_17L勝德起增上慢於實無德計已 [17] 有德
001_0203_c_18L卽是邪慢若辨九慢自有兩說
001_0203_c_19L依發智論如俱舍第十九說如是九
001_0203_c_20L從前七慢三中離出謂從前慢過
001_0203_c_21L慢卑慢如是三種若依見生行次有
001_0203_c_22L殊成三三類初三如次卽過慢慢卑
001_0203_c_23L中三如次卽卑慢慢過慢後三如
001_0203_c_24L卽慢過慢卑慢廣如婆沙若依品

001_0204_a_01L우선 아승만의 부류는 세 가지 만에서 생기니, 만慢·과만過慢·만과만慢過慢 세 가지를 말한다. 하열한 경계와 동등한 경계와 뛰어난 경계를 관하는 것이 차별되기 때문이다.59) 따라서 『대비바사론』 제199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품류족론』에 의하면 아승만의 부류 중에 세 가지 만이 포함되니, 열등한 자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만’에 해당하고, 동등한 자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과만’에 해당하며, 뛰어난 자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만과만’에 해당한다. 그 밖의 여덟 가지 만의 종류는 이치에 맞게 설해야 한다.”60)
  “그 밖의 여덟 가지 만의 종류는 이치에 맞게 설해야 한다.”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아등만我等慢의 종류는 중품과 상품에 의거하므로 두 종류 만을 포함한다. 동등한 자에 대해 (자기가) 동등하다고 헤아리는 것은 만에 해당하고, 뛰어난 자에 대해 (자기가) 동등하다고 헤아리는 것은 과만에 해당한다. 아열만我劣慢의 종류는 다만 상품에 의거하므로 한 종류의 만을 포함한다. 대단히 뛰어난 자에 대해 자기가 조금 하열하다고 헤아리는 것은 비만에 해당한다. 유승만有勝慢·무열만無劣慢에 대해서는 아열만과 동일하게 설한다. 유등만有等慢·무승만無勝慢에 대해서는 아등만과 동일하게 설한다. 유열만有劣慢·무등만無等慢에 대해서는 아등만과 동일하게 설한다. 이와 같은 아홉 종류 만 중에서 셋은 삼품에 의거하고 셋은 중품·상품에 의거하며 셋은 상품에 의거하니, 이전과 같이 알면 된다.
그런데 지금 이 경문에서 ‘만이 있다’고 한 것은 일곱 가지 만과 아홉 가지 만 중에서 다만 증상만에 의거해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세 가지 설이 다르다.
진제 삼장에 의하면 다만 이생異生에 대해 ‘만이 있다’고 설한 것이니, 유소득관有所得觀에 의거해서 참된 관(眞觀)으로 여기면서 증상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경문에서는 통틀어 이생과 이승의 유학에 대해 ‘만이 있는 자’라고 설한 것이다. 아라한은 이미 번뇌장을 끊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화경』 제1권에서 설하길, “(어떤 비구가) 실로 아라한과를 얻었다면 이 법을 믿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다.”61)고 하였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증상만은) 또한 아라한에게도 통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번뇌장의 만(煩惱慢)은 없어도 소지장의 만(所知慢)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화경』에서 말한 것과 어떻게 회통시켜 해석하겠는가?
  그 경은 번뇌장에 의거해서 설했고 이 경은 소지장에 의거해서 설했으니,

001_0204_a_01L類足釋慢類者且我勝慢勝 [18] 從三慢
001_0204_a_02L謂慢過慢慢過慢三由觀劣等勝
001_0204_a_03L境別故故婆沙第百九十九云依品
001_0204_a_04L類足論我勝慢 [18] 攝三種慢若於
001_0204_a_05L等謂已 [20] 卽是慢若於等謂已勝
001_0204_a_06L是過慢若於勝謂已勝卽慢過慢
001_0204_a_07L八慢類如理應說解云餘八慢類
001_0204_a_08L如理應說者我等慢類依中上品
001_0204_a_09L二種慢於等計等此卽是慢於勝謂
001_0204_a_10L卽是過慢我劣慢類但依上品
001_0204_a_11L一種慢謂於多勝計已少劣卽是卑
001_0204_a_12L有勝無劣同我劣說有等無勝
001_0204_a_13L我等說有劣無等同我勝說如此九
001_0204_a_14L三依三品三依中上三依上品
001_0204_a_15L如前可知而今此中說有慢者七九
001_0204_a_16L慢中但約增上於中三說不同眞諦
001_0204_a_17L三藏但說異生以爲有慢依有所得
001_0204_a_18L以爲眞觀起上慢故有說此中
001_0204_a_19L通說異生二乘有學爲有慢者羅漢
001_0204_a_20L已斷煩惱障故故法華經第一卷說
001_0204_a_21L實得阿羅漢若不信此法無有是處
001_0204_a_22L有說亦通羅漢所以者何雖無煩
001_0204_a_23L惱慢有所知慢故若爾如何會
001_0204_a_24L釋法華所說彼約煩惱此據所

001_0204_b_01L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칠지까지의 모든 보살들 또한 증상만을 일으킬 수도 있는가, 아닌가?
  세 가지 해석이 있다. 한편에서는 초지 이상은 증상만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니, 이미 승의제의 일미상一味相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칠지까지는 일으킨다 해도 과실이 없다고 하니, 경에서 설한 것처럼 고의故意로 일으키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앞의 일곱 지에서는 번뇌장의 만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소지장의 만도 현행할 수 있다고 하니, 지地와 지를 서로 대조해 보면 수승함과 열등함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의 변제邊際를 아시는가, 아닌가?
 () 이와 같은 문답이 예를 들어 『대비바사론』 제186권에 나오는데, 그 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나야에서 설한다. ≺세존이 보리수 아래서 모든 유정들은 삼취三聚를 이룬다고 건립하셨으니, 말하자면 이 정도 되는 이는 사정취邪定聚라고 이름하고, 이 정도 되는 이는 정정취正定聚라고 이름하며, 이 정도 되는 이는 부정취不定聚라고 이름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유정의 분제에 의거해 건립한 것인가, 법의 분제에 의거해 건립한 것인가? 유정에 의거했다면, 어째서 세존께서 수많은 유정해有情海의 변제를 증득하시지 않았겠는가? 법에 의거했다면, 성문도 이와 같은 것(삼취)을 건립할 수 있을 텐데, 부처님이 성문과 더불어 어떤 공통되지 않은 점(不共)이 있겠는가?
어떤 이는 ‘유정에 의거해 건립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찌 수많은 유정해의 변제를 증득한 것이 아니겠는가?
  부처님께서 수많은 유정해의 변제를 증득하셨다고 해도 과실이 없다. 그런데 총상總相을 증득하신 것이지 별상別相을 증득하신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일체 유정은 사생四生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총상)을 증득하신 것이다.
어떤 이는 ‘법에 의거해 건립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문도 이와 같은 것(삼취)을 건립할 수 있을 텐데, 부처님이 성문과 더불어 어떤 공통되지 않은 점이 있겠는가?
  성문은 부처님에게 들었기 때문에 (건립할 수 있지만,) 부처님은 스승 없이 스스로 건립하셨으니, 이것이 공통되지 않은 점이다.
어떤 이는 ‘삼천세계와 천세千歲까지는 유정에 의거해 건립한 것이고, 그 밖의 세계와 그 밖의 시時는 법에 의거해 건립한 것’이라고 말한다.62)

001_0204_b_01L說有說無互不相違七地已
001_0204_b_02L來諸菩薩等於增上慢亦得起不
001_0204_b_03L有三釋一云初地已上不起上慢
001_0204_b_04L得勝義一味相故一云七地已還
001_0204_b_05L亦無失如經所說故意起故一云
001_0204_b_06L前七地中不唯得起煩惱障慢所知
001_0204_b_07L障慢亦得現行地地相望有勝劣故
001_0204_b_08L佛知一切衆生邊際不如是問答
001_0204_b_09L如大婆沙一百八十六彼云毗奈耶
001_0204_b_10L世尊於菩提樹下建立有情爲三
001_0204_b_11L謂齊爾許名邪定聚齊爾許名正
001_0204_b_12L定聚齊爾許名不定聚爲依有情
001_0204_b_13L分齊建立爲依法分齊耶若依有情
001_0204_b_14L云何非是得有情海邊際耶若依
001_0204_b_15L法者聲聞亦能如是建立佛與聲聞
001_0204_b_16L有何不共有說依有情建立
001_0204_b_17L如何非是得有情海邊際耶
001_0204_b_18L得有情海邊際亦無有過然總相得
001_0204_b_19L而非別相謂一切有情不出四生
001_0204_b_20L是而得有說依法建立若爾
001_0204_b_21L聲聞亦能 [21] 建立佛與聲聞有何不共
001_0204_b_22L聲聞因從佛聞佛無師自能建立
001_0204_b_23L是爲不共有說若三千世界及千
001_0204_b_24L歲已來依有情建立若餘世界及餘

001_0204_c_01L
『대지도론』에 또한 문답이 있으니, 제28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중생들의 마음들을 다 아실 수 있는가, 아닌가? 다 아실 수 있다면 중생은 한계(邊)가 있는 것이다. 다 아시지 못한다면, 어째서 ‘모든 중생들의 마음이 나아가려 하는 곳을 아시려 한다’고 말하거나 어떻게 ‘부처님에게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있다’고 말하겠는가?
  (부처님은) 중생의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심소법)을 다 아실 수 있다. 어째서인가? 예를 들어 경에서 ‘모든 진실한 말(實語) 중에 부처님 말씀이 가장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모든 중생의 마음을 다 아시어 그 변제를 증득하실 수 없다면, 어떻게 부처님이 ‘다 아신다’고 하겠으며, 또한 ‘일체지인一切智人’이라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은 모두 진실하니, 반드시 실로 일체지인이 있어야 한다.
다시, 중생은 한계가 없다 해도 일체종지도 또한 한계가 없으니, 비유하면 함函이 크면 뚜껑도 큰 것과 같다. (중생을 아는) 지혜에 한계가 있는데 중생은 한계가 없다면 이런 힐난이 있을 수 있으나, 지금 지혜와 중생이 모두 한계가 없기 때문에 그대들의 힐난은 틀린 것이다. 다시, ‘한계가 있다, 한계가 없다’고 하는 이 두 가지는 불법佛法 안에서는 치답置答63)이다. 이 열네 가지 사(十四事)64)는 허망해서 (그에 대답해 보았자) 아무런 실익이 없기 때문에 힐난거리가 될 수 없다.65)
자세한 것은 그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또 제3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보살이 일체 중생의 원을 채워 줄 수 있다면, 중생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모든 굶주림·추위 따위의 고통을 받는 자가 없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모든 중생들이 다 원하던 것이 충족되니, 고통을 떠나 즐거움을 얻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일체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언어(名字)로 ‘일체’라고 한 것이지 실로 일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법구경』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체가 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매 맞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으니, 자기를 용서하는 것을 비유로 삼아, 죽이지도 매질하지도 말지어다.’ (이 게송에서) 비록 ‘일체가 매 맞는 고통을 두려워한다’고 했지만, 가령 무색계의 중생은 몸이 없기 때문에 매 맞는 고통이 없고, 색계의 중생은 몸이 있기는 해도 또한 매 맞는 고통이 없으며, 욕계의 중생도 매 맞는 고통을 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일체’라고 한 것은 매 맞게 될 사람을 일컬어 ‘일체’라고 한 것이지 실로 일체인 것은 아니다.”66)

나. 자기가 보았던 것을 진술함

  세존이시여, 제가 한때 아련야67)의 큰 숲에 머물렀는데

  이하는 두 번째로 자기가 보았던 것을 진술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001_0204_c_01L依法建立依智度論亦有問答
001_0204_c_02L故第二十八云 [22] 一切衆生 [23] 可得悉
001_0204_c_03L知不若悉知卽衆生有邊若不
001_0204_c_04L何以故說欲知一切衆生心所趣
001_0204_c_05L云何佛有一切 [24] 答曰衆生心
001_0204_c_06L心數法可得悉知何以故如經中說
001_0204_c_07L一切實語中佛最第一若不能悉知
001_0204_c_08L一切衆生心得其邊際者佛何以言
001_0204_c_09L悉知亦不名一切智人而佛語皆實
001_0204_c_10L必應定 [25] 有一切智人1) [5] [26] 衆生雖無
001_0204_c_11L一切種智亦無邊譬如函大蓋亦
001_0204_c_12L若智慧有邊衆生無邊者應有是
001_0204_c_13L今智慧及衆生俱無邊故汝難
001_0204_c_14L非也*後次若言有邊無邊此二於
001_0204_c_15L佛法中是置答是十四事虗妄無實
001_0204_c_16L無益故不應以爲難具如彼說又三
十云
001_0204_c_17L間曰菩薩 [27] 若能滿一切衆生願者則衆生有邊
[28] 無有受諸飢寒苦 [29] 何以故一切衆生皆滿所願
001_0204_c_18L [30] 苦得樂故答云 [31] 滿一切者名字一切非實一
如法句偈說一切皆懼死莫不畏杖痛恕巳 [32]
001_0204_c_19L可爲譬勿煞 [33] 勿行杖雖言一切畏杖痛如無色
衆生無身故即無杖痛色界衆生雖可有身
001_0204_c_20L無杖痛欲界衆生亦有不受杖痛而言
一切 [34] 應得杖者說言一切非實一切

001_0204_c_21L
世尊我於一時住阿練若大樹林中

001_0204_c_22L
釋曰自下第二申已 [35] 所見於中有二
001_0204_c_23L「後」疑「復」次同

001_0205_a_01L처음은 자기와 다른 이들이 머물렀던 곳을 밝힌 것이고, 나중의 “저는(我見)” 이하는 다른 이들이 기별하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가) 자기와 다른 이들이 머물렀던 곳을 밝힘
(가) 자기가 머물렀던 곳을 밝힘
이것은 자기가 머물렀던 곳을 밝힌 것이다.
많은 나무들이 군집해 있기 때문에 ‘숲(林)’이라 한다.
『심밀해탈경』에서는 “제가 기억하기로는 과거세일 때에 어느 한 곳의 아련야阿練若 동산에 머물렀는데”68)라고 하였다. ‘아련야’란 범음인데, 여기 말로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말한다.
진제 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아련야’란 본래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소리를 떠난 곳이니, 말하자면 국읍國邑 사람들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찍거나 베는 일을 떠난 곳이니, 말하자면 나무꾼들이 오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투쟁鬪諍을 떠난 곳이니, 말하자면 모든 번뇌는 모두 선법을 동요시킬 수 있으므로 ‘투쟁’이라 하는데 이곳에 머물면 번뇌를 조복시킬 수 있기 때문에 ‘투쟁을 떠난 곳’이라고 하였다.≻
1구로사拘盧舍 밖으로 백천百千 유순由旬69)에 이르는 데까지 모두 아련야처라고 한다. 살바다부에서는 1구로사가 5백 궁弓이라고 해석하고, 정량부에서는 1구로사가 무릇 1천 궁이라고 해석한다. 1궁이 8척尺이고 무릇 8백 장丈의 땅이니, 이 거리에 준해 보면 4리里쯤 될 것이다. 『비담론』에서는 4주肘는 1궁이고 5백 궁을 1구로사라고 하며 1구로사의 절반을 아련야처라고 하였다.70) 『대비바사론』 제13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주는 1궁이고 마을에서 5백 궁 떨어진 곳을 아련야처라고 하며, 이 이상으로 가면 변방지역(邊遠處)이라 한다. 곧 5백 궁은 마게타국(ⓢ Magadha)에서는 1구로사이고 북방에서는 반半 구로사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마게타국은 그 땅이 평평해서 마을과의 거리가 가깝더라도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북방은 높낮이가 있어서 멀더라도 오히려 소리가 들린다. 그러므로 북방의 구로사가 더 큰 것이다.”71)
『구사론』 제12권에서 그 칭량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데, 거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극미極微·미微와 금진金塵·수진水塵, 토모진兔毛塵·양모진羊毛塵·우모진牛毛塵·극유진隙遊塵, 기蟣·슬蝨·맥麥·지절指節이 있어, 뒤로 갈수록 그 양은 일곱 배씩 증가한다. 24지指는 1주肘이고, 4주는 1궁弓의 길이며, 5백 궁은 1구로사拘盧舍니,

001_0205_a_01L初明自他住處後我見下叙他記別
001_0205_a_02L此明自所住處衆樹聚集故深密經
001_0205_a_03L名爲林 [36] 如我憶念過去世時住於
001_0205_a_04L一處阿練若園阿練若者卽是梵音
001_0205_a_05L此云空閑靜處眞諦釋云阿練若者
001_0205_a_06L自有三義一者離聲處謂國邑音聲
001_0205_a_07L所不至故二者離斫伐處謂採薪所
001_0205_a_08L不至故三者離鬪諍處謂一切煩惱
001_0205_a_09L總能動亂善法名爲鬪諍若住此處
001_0205_a_10L能伏煩惱故名離鬪諍也從一拘盧
001_0205_a_11L舍外外去乃至百千由旬皆名阿練
001_0205_a_12L若處若薩婆多部解一拘盧舍五百
001_0205_a_13L依正量部解一拘盧舍凡一千弓
001_0205_a_14L一弓八尺凡八百丈地若准此間
001_0205_a_15L應成四里少許毗曇論云四肘爲一
001_0205_a_16L五百弓名一拘盧舍一拘盧舍半
001_0205_a_17L名阿練若處大毗婆沙一百三十六
001_0205_a_18L四肘爲一弓 [37] 百弓名阿練若處
001_0205_a_19L從此已去名邊遠處卽五百弓成摩
001_0205_a_20L揭陀國一俱盧舍成北方半俱盧舍
001_0205_a_21L所以者何摩揭陀國其地平正
001_0205_a_22L村雖近而不聞聲北方高下遠猶
001_0205_a_23L聲及是故北方俱盧舍大俱舍第十二廣
辨其量彼云
001_0205_a_24L頌云極微微金水㝹 [38] 羊牛隙塵 [39] 蝨麥指節
後增七倍二十四指肘四肘爲弓量五百拘盧

001_0205_b_01L이것의 여덟 배가 1유선나踰繕那다. 극미가 처음이고 지절이 마지막인데, 뒤로 갈수록 모두 일곱 배씩 증가함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7극미는 1미의 양이고, 미를 일곱 개 쌓은 것을 1금진이라 하며, 금진이 일곱 개 쌓인 것을 수진이라 하고, 수진이 일곱 개 쌓인 것을 1토모진이라 하며, 토모진이 일곱 개 쌓인 것을 1양모진이라 하고, 양모진이 일곱 개 쌓인 것을 1우모진이라 하며, 우모진이 일곱 개 쌓인 것이 극유진72)의 양이 된다. 7극유진은 1기라고 하며, 7기는 1슬이라 하고, 7슬은 1광맥▼(麥+廣)麥이라 하고, 7광맥은 1지절이라 한다. 3지절은 1지指라고 하는데,……24지를 가로로 펼치면 1주이고, 세로로 4주를 쌓으면 1궁이니, 말하자면 1심尋73)이다. 가로로 5백 궁을 쌓으면 1구로사이고, 1구로사는 바로 마을로부터 아련야까지 이르는 중간 도로의 길이 정도라고 한다. 8구로사는 1유선나라고 말한다.”74) 자세히 설하면 『대비바사론』 제136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무성의 『섭대승론석』에서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1구로사 지난 곳을 아련야阿練若(아란야)라고 한다.”75)고 하였다. 『십주론』에서는 ‘온갖 소란을 떠나기 때문에 아련야라고 한다’고 하였다.76) 『유가사지론』에서는 다시 ‘한적한 산림이나 들판에 머물면서 주변에 있는 침구를 사용하면서 모든 촌읍과 취락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을 아련야라고 한다’고 하였다.77) 『두타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련야법은 몸을 소란스러운 곳으로부터 멀리 떠나 한적한 곳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멀리 떠난다’는 것은 온갖 시끄러운 소리들을 떠난다는 것이다. 방목하는 곳이라면 가장 가깝게는 3리이고 멀수록 더욱 좋다. 몸이 멀리 떠나 있어야 또한 당연히 마음도 오욕五欲과 오개五蓋에서 떠나도록 할 수 있다. (이것을) 아련야라고 한다.”78) 『대지도론』도 이와 동일하다.

(나) 다른 중들이 머물렀던 곳을 밝힘

  그때 많은 필추79)들이 있었는데, 또한 이 숲에서 저와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중들이 머물렀던 곳을 밝힌 것이다.
“필추苾蒭”라는 것은 당唐나라 말로 ‘걸사乞士’이니, 구역에서는 ‘비구比丘’라고 하였다. 『금강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범음이다. 이 지역의 말로 의역하면 혹은 ‘걸사’라고 하고, 혹은 ‘파악破惡’이라 하며, 혹은 ‘포마怖魔’라고 하니, 상응해서 번역되는 정확한 이름이 없기 때문에 범어를 그대로 둔 것이다.≻80)
『대지도론』에 의하면 그것에 다섯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걸사’라고 하니, 청정하게 생활해 가기 때문이다. 그 논의 제3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가지 구식口食을 떠나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한다. ‘네 가지 구식’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하구식下口食이다. 어떤 출가인이 약을 만들거나 곡식을 심거나 나무를 기르거나 하는 등의 일로 청정하지 않게 생활해 간다면, 이는 하구식이라 한다. 어떤 출가인이 성좌(星宿)나 해·달이나 바람·비나 천둥 번개·벼락 등을 관찰하는 일로 청정하지 않게 생활해 간다면 이는 앙구식仰口食이라 한다. 어떤 출가인이 부호 권세가에게 아첨하고 사방에 심부름꾼을 보내서 교묘한 말로써 많은 것을 구하는 일로 청정하지 않게 생활해 간다면, 이는 방구식方口食이라 한다. 어떤 출가인이 갖가지 주술呪術과 길흉을 점치는 소술小術을 배워서

001_0205_b_01L此八踰繕那論曰極徵爲初指節爲後應知
後後皆七倍增謂七極微爲一微量積微至七爲
001_0205_b_02L一金塵積七金塵爲水塵量水塵積至七爲一
[40] 毛塵積七莬 [41] 毛塵爲一羊毛塵量積羊毛塵
001_0205_b_03L七爲一牛毛塵積七牛毛塵爲隟 [42] 遊塵量隟塵
七爲蟣七蟣爲一蝨七蝨爲▼(麥+廣) [43] 七麥爲指節
001_0205_b_04L三節爲一指二十四指橫布爲肘䜿積四肘爲弓
謂尋䜿積五百弓爲一俱盧舍一俱盧舍許是
001_0205_b_05L從村至阿練若中間道量說八俱盧舍爲一
踰繕那若廣分別如婆沙論一百三十六說

001_0205_b_06L性攝論云遠離聚落 [44] 盧舍名阿練
001_0205_b_07L十住論云離衆憒丙 [45] 名阿練若
001_0205_b_08L伽復云謂住空閑山林垧野受用邊
001_0205_b_09L際所有臥具遠離一切村邑聚落
001_0205_b_10L阿練若頭陀經云阿練 [46] 若法令身遠
001_0205_b_11L離憒閙住於空閑遠離者離衆惱亂 [47]
001_0205_b_12L若放牧處最近三里能遠益善 [48]
001_0205_b_13L遠離已亦當令心遠離五欲五葢 [49] [50]
001_0205_b_14L阿練若智論亦同

001_0205_b_15L
時有衆多苾蒭亦於 [51] 林依近我住

001_0205_b_16L
釋曰此明衆所住處言苾蒭者
001_0205_b_17L言乞士舊云比丘金剛仙云此是
001_0205_b_18L梵音此方義釋或云乞士或云破惡
001_0205_b_19L或云怖魔無正名相翻故存梵語
001_0205_b_20L智度論有其五義一名乞士淸淨
001_0205_b_21L活命故彼第三卷云離四口食故名淸淨四口
食者一下口食有出家人合藥種穀殖
001_0205_b_22L樹等不淨活命者是名下口食有出家人觀視星
宿日月風雨雷電礔礰 [52] 不淨活命者是名仰口食
001_0205_b_23L有出家人曲媚豪勢通使四方巧言多求不淨活命
[53] 方口食有出家人學種種呪術 [54] 吉凶小術

001_0205_c_01L바르지 못한 이와 같은 것들로 청청하지 않게 생활해 간다면, 이는 사유구식四維口食이라 한다.≻81)
둘째는 번뇌를 깨뜨리는 자를 비구라고 한다.‘비比’는 여기 말로 ‘파破’이고 ‘구丘’는 ‘번뇌’라고 한다. 셋째는 출가인의 호칭이다. 넷째는 ‘청정한 지계’라고 한다. 다섯째는 ‘포마怖魔’라고 한다.‘비’는 ‘포’라고 하고 구는 ‘마’라고 한다.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다섯 종류 비구가 있으니, 따라서 제29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추에는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구걸하는 필추(乞匃苾芻)이고, 둘째는 자칭하는 필추(自稱苾芻)이며, 셋째는 이름만의 필추(名想苾芻)82)이고, 넷째는 번뇌를 파괴하는 필추(破壞煩惱苾芻)이며, 다섯째는 백사갈마83)로 구족계를 받은 필추(白四羯魔受具足戒苾芻)다.”84)
진제의 『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因의 지위에 있을 때는 포마·걸사·파악이라 이름하는데, 과果의 지위에 이르면 포마는 ‘살적煞賊’으로 바꾸고 걸사는 ‘응공應供’으로 바꾸며 파악은 ‘불생不生’으로 부른다.≻

나) 다른 이들이 기별하는 모습을 서술함

  저는 그 필추들이 해질녘에 서로서로 모여서 ‘유소득의 현관(有所得現觀)’에 의지하여 각자 갖가지 상의 법을 설하면서 (각자) 이해한 바를 기별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하는 두 번째로 (각자)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계탁들을 총괄해서 서술한 것이고, 나중은 계탁들을 따로따로 서술한 것이다.

(가) 계탁들을 총괄해서 서술함
이것은 첫 번째로 계탁들을 총괄해서 서술한 것이다. 다음 경문에서 설하는 것처럼, 오온 등에 의거해서 갖가지 이해를 일으켜 승의제로 여기면서, 일미의 법공도리(一味法空道理)가 승의제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나아가서는 팔성도에서의 자성과 차별 및 대치 등을 승의제라고 헤아리면서 증상만을 낸다. 그러므로 이제 그것을 서술한 것이다.
“현관現觀”이란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는 “‘결정決定’의 뜻이 현관의 뜻이다.”85)라고 하였고, 『구사론』 제23권에서는 “모든 진리(諦)의 경계를 현견現見하여 분명해진 것을 ‘견현관見現觀’이라 한다.”86)고 하였다.
그런데 이 현관에 대해 여러 교설이 다르다.
『구사론』에 의하면 세 종류 현관이 있으니, 견見·연緣·사事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87)

001_0205_c_01L不正 [55] 如是等不淨活命
是名四維口食也
二破煩惱名比丘
001_0205_c_02L比此云破
丘名煩惱
三出家人號四名淸淨持戒
001_0205_c_03L五名怖魔比名怖
丘名魔
依瑜伽論有五苾蒭
001_0205_c_04L故第二十九云苾蒭有五種一乞白 [56]
001_0205_c_05L苾蒭二自稱苾蒭三名想苾蒭
001_0205_c_06L破壞煩惱苾蒭五白四羯魔受具足
001_0205_c_07L戒苾蒭眞諦記云在因名怖魔乞
001_0205_c_08L士破惡至果轉怖魔爲煞賊改乞
001_0205_c_09L士爲應供說破惡爲不生

001_0205_c_10L
我見彼諸苾蒭於日後分展轉聚集
001_0205_c_11L依有所得現觀各說種種相法記別所
001_0205_c_12L

001_0205_c_13L
釋曰自下第三 [57] 記別所解於中有二
001_0205_c_14L初總叙諸計後別叙諸計此卽第一
001_0205_c_15L總叙諸計如後所說依五蘊等
001_0205_c_16L種種解以爲勝義不說一味法空道
001_0205_c_17L理爲勝義諦如是乃至八聖道中
001_0205_c_18L性差別及對治等計爲勝義成增
001_0205_c_19L上慢故今叙之現觀者依瑜伽論
001_0205_c_20L五十1) [6] [58] 決定義是現觀義依俱
001_0205_c_21L舍論第二十二 [59] 於諸諦境現見分
001_0205_c_22L名見現觀然此現觀諸敎不同
001_0205_c_23L依俱舍論有三種現觀謂見緣事有
001_0205_c_24L「三」異作「五」

001_0206_a_01L혹은 여섯 종류를 설하는데,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 제55권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88) 혹은 열 종류를 설하는데, 예를 들면 『집론』 제7권과 『잡집론』 제13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89) 어떤 경우는 열여덟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니, 예를 들면 『현양성교론』 제17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90)
그런데 지금 설하는 “유소득의 현관(有所得現觀)”이란 모든 비구들이 최초의 법륜에서 설한 열세 가지 법문91)에 의거해서 말 그대로 의미에 집착하면서 ‘무소득의 일미법구인 승의(無所得一味法句勝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증상만을 일으켜 ‘공’이라는 궁극의 승의제를 증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필추들은 어떤 현관에 의지해서 (자기가) 이해한 것을 기별하는가?
  견도·수도·무학도 및 이전의 방편도의 (현관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경문에서 “사념주를 증득하거나 내지는 팔지성도를 증득함으로 인해”라고 하였다.

(나) 계탁들을 따로따로 서술함

  이 중에 한 부류는 온蘊을 증득했기 때문에, 온의 상相을 증득했기 때문에, 온의 일어남(起)을 증득했기 때문에, 온의 다함(盡)을 증득했기 때문에, 온의 멸滅을 증득했기 때문에, 온의 멸을 작증作證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 (그에 의거해 자기가) 이해한 바를 기별해 주었습니다.

  이하는 두 번째로 계탁들을 따로따로 서술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여섯 가지 선교善巧92)로 관찰된 경계에 의거해서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나중의 “다시 어떤 부류는 염주를 증득하고” 이하는 삼십칠도품 중의 일곱 가지 관문에 의거해서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 여섯 가지 선교로 관찰된 경계에 의거해 기별함
이것은 첫 번째로 여섯 가지 선교로 관찰된 경계에 의거해서 이해한 것을 기별하는 것이다.
‘여섯 가지 선교’란 온蘊·처處·연생緣生·사식四食·사제四諦·십팔계十八界를 말한다. 이치상 실제로는 십이처와 십팔계가 법을 두루 다 포괄하지만, 모든 유정들의 의요가 차별되기 때문에 온 등에 의거해서 여섯 문으로 열어 보였다. 참된 현관이라면 반드시 일미의 승의의 진리를 증득해야 비로소 ‘현관’이라 이름하지만, 필추들은 증상만을 품고 ‘온’ 등의 상을 증득하고 나서 ‘참된 현관’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지금 이 경문에서는 여섯 종류의 계탁을 서술한 것이다.
여섯 문이 있기는 해도

001_0206_a_01L差別故或說六種如瑜伽五十五等
001_0206_a_02L或說十種如集論第七雜集十三
001_0206_a_03L說十八如顯揚十七然今所說有所
001_0206_a_04L得現觀者謂諸苾蒭依初法輪所說
001_0206_a_05L十三法門如言執義不了無所得一
001_0206_a_06L味法句勝義起增上慢便1) [7] 證得
001_0206_a_07L空竟勝義諸苾蒭依何現觀記別
001_0206_a_08L所解通說見脩無學及前2) [8]
001_0206_a_09L下經云由得念住乃至得八支聖道
001_0206_a_10L

001_0206_a_11L
於中一類由得蘊故得蘊相故得蘊起
001_0206_a_12L3) [9] [60] 蘊滅故得蘊滅作證故記別所
001_0206_a_13L

001_0206_a_14L
釋曰自下第二別叙諸計於中有二
001_0206_a_15L初約六種善巧所觀境界記別取 [61]
001_0206_a_16L後復有類得念住下約道品中七種
001_0206_a_17L觀門記別所解此卽第一六種善巧
001_0206_a_18L所觀境界記別所解六善巧者
001_0206_a_19L緣生四食四諦幷十八界
001_0206_a_20L理實處界攝法周盡而諸有情意樂
001_0206_a_21L差別故約蘊等開爲六門若眞現
001_0206_a_22L要證一味勝義諦理方名現觀
001_0206_a_23L諸苾蒭懷增上慢得蘊等相謂眞
001_0206_a_24L現觀故今此中叙六種計雖有六門

001_0206_b_01L다섯 단락으로 거두어진다. 첫째는 오온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처와 연생을 유추해서 밝힌 것이며, 셋째는 사식을 밝힌 것이고, 넷째는 사제를 밝힌 것이며, 다섯째는 십팔계를 밝힌 것이다.

a. 오온의 여섯 구를 해석함
이것은 첫 번째로서 오온의 여섯 구에 대해 해석한 것이다.

  이 여섯 구는 한 종류 계탁인가, 여섯 종류 계탁인가?
  『해절경』과 『심밀해탈경』에서 모두 다음과 같이 설한다. ≺어떤 비구들은 오음의 상相을 증견證見하고 나서 법을 증견했다고 말하고, 어떤 비구들은 오음의 생겨남을 증견하고 나서 법을 증견했다고 한다.≻93) 따라서 여섯 구에 모두 별도의 계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당본唐本 『해심밀경』에서는 하나하나의 문마다 “한 부류(一類)”라는 말을 갖추어 설했으므로 그 경과 마찬가지로 여섯 가지 계탁으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혹은 한 문을 합해서 하나의 계탁으로 삼아도 이치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여섯 구를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 내용이 있다. 첫째는 구의 개수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각 구의) 차별상을 설명한 것이다.

a) 구의 개수를 밝힘
구의 개수(多少)는 다음과 같다.
『심밀해탈경』에는 오직 다섯 구만 있고 첫 번째 구는 빠져 있다.첫째는 오음의 상相이고, 둘째는 오음의 생상生相이며, 셋째는 오음의 멸상滅相이고, 넷째는 오음의 멸법滅法(멸제)이며, 다섯째는 오음의 멸을 현증하는 법(現證法 : 도제)이다. 『해절경』에는 여섯 구가 갖추어져 있으니, 의미는 이 『해심밀경』과 동일하다.첫째는 오음이고, 둘째는 오음의 상이며, 셋째는 오음의 생生이고, 넷째는 오음의 변이變異이며, 다섯째는 오음의 멸滅이고, 여섯째는 오음의 멸을 증득하는 도道이다.
지금 이 『해심밀경』에 의하면 세 곳이 다르다. 제1권에서는 여섯 구가 있으니, 경문 그대로 알면 된다.94) 제2권의 초에는 오직 다섯 구만 있다.95)첫째는 오온의 모든 자상自相이고, 둘째는 생상生相이며, 셋째는 멸상滅相이고, 넷째는 영단永斷이고, 다섯째는 변지遍知이다. 제2권의 말에는 일곱 가지 상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명으로 안립하여 색온色蘊으로 삼아서 혹은 자성상이라 하고 혹은 차별상이라 하며, 가명으로 안립하여 ‘색온의 생’으로 삼고 ‘색온의 멸’로 삼으며 그리고 ‘색온의 영단·변지’로 삼아서 혹은 자성상이라 하고 혹은 차별상이라 합니다.”96)

  어째서 이 경은 구의 개수에 이런 차이가 있는가?
  실제로는 전후로 모두 아홉 구가 있다. 말하자면 첫 권의 여섯 구 이외에 다시 ‘영단永斷’과 ‘변지遍知’를 추가하고, ‘상相’을 두 가지로 열었으니 자성상과 차별상을 말한다. 그런데 이 제1권과 제2권의 말에서는

001_0206_b_01L攝爲五段一明五蘊二類處綠生
001_0206_b_02L明四食四明四諦五明十八界
001_0206_b_03L卽第一釋蘊六句此六句爲一類
001_0206_b_04L爲六計耶解云解節相續 [62] 皆作
001_0206_b_05L此說有諸比丘證見陰相說爲證
001_0206_b_06L有諸比丘證見陰生以爲證法
001_0206_b_07L故知六句皆有別計今此本經一一
001_0206_b_08L門中俱說一類故知同彼分爲六計
001_0206_b_09L或可一門合爲一計於理無違然此
001_0206_b_10L六句釋有二義一句數多少二辨差
001_0206_b_11L別相言多少者依深密經唯有五
001_0206_b_12L少第一句一者陰相二陰生相三陰滅相
四陰滅法五陰滅現證法也

001_0206_b_13L依解節經具有六句意同此經一陰
二陰
001_0206_b_14L三陰生四陰變異
五陰滅六證陰滅道
今依此經三處不
001_0206_b_15L第一卷中有其六句如經可知
001_0206_b_16L第二卷初唯有五句一諸蘊所有自相二者
生相三者滅相四者
001_0206_b_17L永斷
者遍知
第二卷末有七種相故彼
001_0206_b_18L假名安立以爲色蘊或自性相
001_0206_b_19L差別相假名安立爲色蘊生爲色
001_0206_b_20L蘊滅及爲色蘊永斷遍知或自性相
001_0206_b_21L或差別相如何此經句數多少
001_0206_b_22L此異耶解云據實前後總有九句
001_0206_b_23L初卷六句外更加永斷遍知及開相爲
001_0206_b_24L謂自性差別然此第一及第二末

001_0206_c_01L총구總句와 별구別句를 갖추어 설하였으므로 총구를 배치하였고, 제2권의 초에서는 총구는 별구와 분리되지 않으므로 따로 총구를 설하지 않았다. 또 첫 권에서는 자성과 차별을 합해서 ‘온의 상’이라 했고, 제2권에 가면 ‘상’에서 자성과 차별로 나누었다. 또 첫 권에서 오직 멸제와 도제를 설할 뿐 고제와 집제는 논하지 않았고, 제2권의 말에서 ‘영단·변지’를 설하고 멸제와 도제를 설하지 않은 것은, 영략으로 서로 나타낸(影略互顯) 것이다.97) 따라서 서로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b) 차별상을 설명함
‘차별상’이라 한 것에 대해, 진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오온 등의 팔만법문은 ‘일미一味’의 뜻을 얻는데, 그 상은 어떤 것인가? 상좌부에 의하면 팔만사천법문이 있고, 이제 정량부에 의하면 다만 팔만법문이 있다.
  여섯 종류 법상法相에 의거해서 ‘일미’의 뜻을 나타냈다.98)
“비구들은 오음을 증견證見함으로 인해 (자기가) 증득한 것을 기별하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첫 번째로 ‘오음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대사大師(세존)께서 설하신 것은 다만 음성일 뿐 오음이라 이름하는 별도의 법이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한다.99) 이 ‘일미’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집착을 일으켜서 ‘오음이 실유한다’고 말한다. 이 집착으로 인해 전도를 일으키며, 이 전도로 인해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비구는 오음의 상相을 증견하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두 번째로 오음의 상을 나타낸 것이다. 혹은 가명假名의 상이나 혹은 실법實法의 상, 공덕의 상이나 과악過惡의 상, 인연의 상과 삼세의 상, 생상生相·주상住相·멸상滅相, 고제 등 사제의 상, 삼계의 상이나 무루계의 상, 일향답一向答의 상과 분별답分別答의 상과 문답問答의 상과 치답置答의 상,100) 사식四食의 상 내지는 유루의 색심色心·비색심非色心 등의 상, 오음에는 이와 같은 갖가지 도리가 있는 것을 일컬어 ‘오음의 상’이라 한다.

001_0206_c_01L總別具說故置總句第二卷初
001_0206_c_02L不離別不別說總又初卷中自性差
001_0206_c_03L合爲蘊相至於第二相中分爲
001_0206_c_04L自性差別又初卷中唯說滅道
001_0206_c_05L論苦集第二卷末永斷遍知不說
001_0206_c_06L滅道者影略互顯故不相違言差
001_0206_c_07L別相者眞諦師云此五蘊等八
001_0206_c_08L萬法門得一味義其相云何若依
001_0206_c_09L上坐部則有八萬四千法門今依正
001_0206_c_10L量部但有八萬約六種法相
001_0206_c_11L一味義或有 [63] 比丘由 [64] 見陰者 [65] 記自所
001_0206_c_12L此則第一執有五陰不能了別大
001_0206_c_13L師所說但唯音聲無有別法名爲
001_0206_c_14L五陰由不了知此一味故起如是執
001_0206_c_15L謂實有五陰由此執故起於顚倒
001_0206_c_16L比倒故起增上慢或有比丘證見
001_0206_c_17L陰相者此卽第二顯五陰相或假名
001_0206_c_18L或實法相功德相過惡相因緣
001_0206_c_19L三世相生住滅相苦等四諦相
001_0206_c_20L三界相無漏界相一向答相分別
001_0206_c_21L答相及問答相置答相四食相
001_0206_c_22L至有漏色心非色心等相陰有如是
001_0206_c_23L「諸」疑「謂」「方」下疑脫「便」「得」上
001_0206_c_24L異有「得蘊盡故」

001_0207_a_01L도리의 일미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이러한 도리가 실유한다는 집착을 일으키고, 이 집착으로 인해 전도를 일으키며, 이 전도로 인해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비구는 오음의 생을 증견하며”라고 했는데, 이것은 세 번째로 생상生相을 나타낸 것이다. 인과가 일미임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오음에는 진실로 생함이 있다고 집착하고, 이 집착으로 인해 전도를 일으키며, 이 전도로 인해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비구는 오음의 변이變異를 증견하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네 번째로 오음의 변이하는 상을 나타낸 것이다. 멸함 없는 일미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이러한 변이가 실유한다는 집착을 일으키고, 이 집착으로 인해 전도를 일으키며, 이 전도로 인해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비구는 오음의 멸滅(멸제)을 증견하며”라고 했는데, 이것은 다섯 번째로 오음의 멸상滅相을 나타낸 것이다. 청정한 일미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이 청정이 실유한다는 집착을 일으키고, 이 집착으로 인해 전도를 일으키며, 이 전도로 인해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비구는 오음을 멸하는 도道(도제)를 증견합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여섯 번째로 오음의 멸도滅道(멸을 작증하는 도)를 나타낸 것이다. 경계(境)와 지혜(智)가 일미임을 잘 알지 못함으로 인해 멸도가 실재한다는 집착을 일으키고, 이 집착으로 인해 전도를 일으키며, 이 전도로 인해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이다.
오음의 법문에 이미 이러한 여섯 가지 의미가 있으므로 여섯 종류의 일미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이입十二入(십이처) 등의 모든 법문에서 예를 들어도 모두 이와 같다.
또 별도의 해석이 있다. ≺첫 번째 구는 언설의 품류를 나타낸 것이니, 즉 오음이란 단지 언설로만 있을 뿐 별도의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구는 의義와 도리(理)의 품류를 나타낸 것이니, ‘의미’상으로는 가명·실법·삼세의 상 등 갖가지 부동함이 있지만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도리’는 하나의 무아(一無我)이다. 세 번째 구는 소멸시켜야 할 품류를 나타낸 것이니, 집제로서의 번뇌·업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001_0207_a_01L種種道理名爲陰相由不了別道理
001_0207_a_02L一味故起此實1) [10] 道理執因此執
001_0207_a_03L起於顚倒由顚倒故起增上慢
001_0207_a_04L或有比丘證見陰生者此卽第三顯
001_0207_a_05L生相由不了別因果一味故執五陰
001_0207_a_06L眞實有生由此執故起於顚倒
001_0207_a_07L顚倒故起增上慢或有比丘證陰
001_0207_a_08L變異者此卽第四顯陰變異相由不
001_0207_a_09L了別無滅一味故起此實變異執
001_0207_a_10L此執故起於顚倒由顚倒故起增上
001_0207_a_11L或有比丘證見陰滅者此卽第五
001_0207_a_12L顯陰滅相不了別淸淨一味故起此
001_0207_a_13L實淸淨執由此執故2)起顚倒由顚
001_0207_a_14L倒故起增上慢或有比丘證陰滅道
001_0207_a_15L此卽第六顯陰滅道由不了別境
001_0207_a_16L智一味故起實滅道執由此執故
001_0207_a_17L於顚倒由顚倒起增上慢就五陰法
001_0207_a_18L旣有此六義爲六種一味如是
001_0207_a_19L十二入等一切法門中例皆如此
001_0207_a_20L有別解第一句顯言說品類卽是五
001_0207_a_21L陰但有言說無有別故第二句顯義
001_0207_a_22L及理品類義有假名實法三世相等
001_0207_a_23L種種不同如前所列道理一無我
001_0207_a_24L三句顯應滅品類卽是集諦煩惱業

001_0207_b_01L네 번째 구는 알아야 할 품류를 나타낸 것이니, 고제에 해당한다. 다섯 번째 구는 증득해야 할 품류를 나타낸 것이니, 멸제에 해당한다. 여섯 번째 구는 닦아야 할 품류를 나타낸 것이니, 도제에 해당한다. 십이입 등에서 예를 들어도 이 여섯 구가 있다.≻
지금의 해석은 그렇지 않다.101)
“온을 증득했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증득된 오온의 법문을 총괄해서 나타낸 것이니, 총구總句에 해당한다.
“온의 상을 증득했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온의 자성상自性相·차별상差別相을 증득한 것이니, 이 두 구는 총구이고 이하의 모든 구에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구에서 “가명으로 안립하여 ‘색온’으로 삼아서 혹은 자성상이라 하고 혹은 차별상이라 하며 내지는 색온의 영단永斷·변지遍知를 (안립하여) 혹은 자성상이라 하고 혹은 차별상이라 합니다.”102)라고 하였다. ‘자성상’이란 그 법 자체(自法自體)를 자성이라 하니, 예를 들면 색온色蘊·수온受蘊 등과 같다. 자성에서의 차별적 의미를 분별하는 것을 차별상이라 하니, 예를 들면 (색온 등에 대해 그것은) ‘영원하다, 무상하다, 유루다, 무루다’라는 등을 설하는 것이다.
“온의 일어남을 증득했기 때문에, 온의 다함을 증득했기 때문에”라고 했는데, 이 두 구는 ‘생멸하는 것은 무상하다’는 견해를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경문에서는 ‘모든 온의 생상과 멸상’이라 하였고,103) 또 여러 경에서 ‘제행은 무상하니,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법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유가사지론』 제85권에서는 “어째서 제행은 ‘무상하다’고 결정되는가?……일어남(起)·사라짐(盡)과 상응하기 때문이다.104)105)라고 하였다.
“온의 멸을 증득했기 때문에, 오온의 멸을 작증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라고 했는데, 이 두 구는 차례대로 멸제와 도제 두 가지를 나타낸 것이다. 고제와 집제를 끊고 멸제를 얻기 때문이고, 도제로써 오온을 끊고 멸제를 작증하기 때문이다.
십이처 등도 모두 이 해석에 준한다. 오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 그 의미는 『별장』과 같다.

b. 처와 연생을 유추해서 밝힘

  마치 이 한 부류가 온蘊을 증득함으로 인해 (기별하는 것처럼,) 다시 한 부류는 처處를 증득했기 때문에, 다시 한 부류는 연기緣起를 증득했기 때문에, 또한 이렇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두 번째로 처處(십이처)와 연생緣生(십이연기)을 유추해서 밝힌 것이다. 모두 여섯 구가 있으니,

001_0207_b_01L第四句顯應知品類卽是苦諦
001_0207_b_02L五句顯所證得品類卽是滅諦
001_0207_b_03L六句顯應脩品類卽是道諦於入等
001_0207_b_04L例有此六也今解不爾言得蘊
001_0207_b_05L總顯所證五蘊法門卽是總句
001_0207_b_06L得蘊相者得蘊自性差別相此二句
001_0207_b_07L是總通下諸句故第二云假名安
001_0207_b_08L以爲色蘊或自性相或差別相
001_0207_b_09L至色蘊永斷遍知或自性相或差別
001_0207_b_10L言自性相者自法自體名爲自性
001_0207_b_11L如色受蘊等於自性上辨差別義
001_0207_b_12L差別相如說常無常漏無漏等言得
001_0207_b_13L蘊起故得蘊盡故者此二句顯生滅
001_0207_b_14L無常見故下經云諸蘊生相滅相
001_0207_b_15L諸經云諸行無常起盡法故又瑜伽
001_0207_b_16L八十五云云何諸行無常決定起盡
001_0207_b_17L相應故言得蘊滅故得蘊滅作證故
001_0207_b_18L此二句如次顯示滅道二諦斷苦
001_0207_b_19L集諦得滅諦故由道斷蘊作證滅故
001_0207_b_20L十二處等皆准此釋廣辨五蘊
001_0207_b_21L如別章

001_0207_b_22L
如此一顯由得蘊故復有一類由得
001_0207_b_23L處故復有一類得緣起故當知亦爾

001_0207_b_24L
釋曰此卽第二類處緣生皆有六句

001_0207_c_01L‘온’에 유추해서 알아야 한다. 처와 연생의 의미는 『별장』의 설과 같다.

c. 사식의 문에 의거해 밝힘

  다시 한 부류는 식食을 증득했기 때문에, 식의 상을 증득했기 때문에, 식의 일어남을 증득했기 때문에, 식의 다함을 증득했기 때문에, 식의 멸을 증득했기 때문에, 식의 멸을 작증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 (그에 의거해) 이해한 바를 기별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 번째로 사식四食106)의 문에 의거해서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여섯 구에 배당하여 해석하였으니, 앞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 사식의 상을 밝히자면 그 의미는 『별장』과 같다.

d. 사제의 문에 의거해 밝힘

  다시 한 부류는 제諦를 증득했기 때문에, 제의 상을 증득했기 때문에, 제의 변지遍知를 증득했기 때문에, 제의 영단永斷을 증득했기 때문에, 제의 작증作證을 증득했기 때문에, 제의 수습修習을 증득했기 때문에, (그에 의거해) 이해한 것을 기별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네 번째로 사제四諦107)의 문에 의거해서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여섯 구 중에서 처음의 두 구는 총구이니, 앞과 같이 알아야 한다.108) 나중의 네 구는 그 차례대로 ‘고제를 두루 알아야(遍知) 하고, 집제를 영원히 끊어야(永斷) 하며, 멸제는 작증作證해야 하고, 도제는 수습修習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떤 이유에서 고제를 두루 알아야 하고 집제를 영원히 끊어야 하며 멸제를 촉증觸證해야 하고 도제를 수습해야 한다고 설합니까? 저 고제는 네 가지 전도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전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고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 이미 고제를 두루 알았으면 곧 집제를 두루 알게 되니, 저 집제는 고제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고제를 두루 안다 해도 집제가 (그것을) 뒤따라 다니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 ‘집제를 영원히 끊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촉증觸證’이란 ‘현견現見’의 뜻이다. 멸제를 현재 눈앞(現前)에서 보기 때문에, 두려움을 내지 않고 좋아하며 즐겁게 섭수한다. 그러므로 다음에 ‘멸제를 촉증한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부지런히 도를 닦으면 (앞서) 말했던 세 가지 의미를 성취할(成辨)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도제를 수습한다’고 말한 것이다.”109)

001_0207_c_01L類蘊應知處及緣生義如別章

001_0207_c_02L
復有一類由得食故得食相故得食
001_0207_c_03L起故得食盡故得食滅故得食滅作
001_0207_c_04L證故記別所解

001_0207_c_05L
釋曰此卽第三約四食門記別所解
001_0207_c_06L配釋六句准上應知辨四食相
001_0207_c_07L如別章

001_0207_c_08L
復有一類由得諦故得諦相故得諦
001_0207_c_09L遍知故得諦永斷故得諦作證故
001_0207_c_10L諦脩習故記別所解

001_0207_c_11L
釋曰此卽第四約四諦門記別所解
001_0207_c_12L於六句中初二是總如上應知
001_0207_c_13L四如次 [66] 應遍知集應永斷滅應
001_0207_c_14L作證道應脩習若依瑜伽第五十五
001_0207_c_15L何緣故說遍知苦諦永斷集諦
001_0207_c_16L觸證滅諦脩習道諦由彼苦諦
001_0207_c_17L四顚倒所依處故爲除顚倒苦旣遍
001_0207_c_18L [67] 苦卽遍知故遍知集由彼集諦
001_0207_c_19L諦攝故雖遍知苦仍爲集之所隨逐
001_0207_c_20L故須更說永斷集諦言觸證者
001_0207_c_21L現見義由於滅諦現前見故不生怖
001_0207_c_22L [68] 樂攝受是故次說觸證滅諦
001_0207_c_23L勤脩道乃能成辦所觀 [69] 三義是故後
001_0207_c_24L「實」疑「有」「起」下異有「於」

001_0208_a_01L
  그 밖의 세 가지 제諦도 두루 알아야 할 텐데, 어째서 유독 고제만 두루 알아야 한다고 설하는가?
  이는 『대비바사론』 제79권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그 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경에서는 다만 고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고 설하는데, 어째서 아비달마(對法)에서는 일체법을 모두 다 두루 알아야 한다고 설했는가?
 () 협존자脅尊者의 말에 따르면, 세존께서 오직 고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고 설하시거나 혹은 오직 고제만을 바로 두루 알아야 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대법對法(아비달마)에서는 일체법을 두루 알아야 할 대상(所遍知)이라 설하는 것이다.110) 세존께서 오직 집제만 영원히 끊어야 한다고 설하시거나 혹은 오직 집제만을 바로 영원히 끊어야 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대법에서는 유루법을 모두 영원히 끊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세존께서 오직 멸제만 작증해야 한다고 설하시거나 혹은 오직 멸제만을 바로 작증해야 할 것이라고 설하셨기 때문에, 대법에서는 득작증得作證에 의거해서 모든 선법을 다 작증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111) 세존께서 오직 도제만 닦아야 할 것이라고 설하시거나 혹은 오직 도제만을 바로 닦아야 할 것이라고 설하셨기 때문에, 대법에서는 모든 선한 유위법을 다 닦아야 한다고 총괄해서 설한 것이다. 이것은 곧 경에서 설한 의미는 불요의不了義이고 아비달마는 요의了義를 설했음을 나타낸 것이다.112)

자세한 것은 그 논에서 여러 번 부차적으로(復次) 설명한 것과 같다. 사제에 대해 자세하게 분별하면 그 의미는 『별장』과 같다.

e. 십팔계에 의거해 밝힘

  다시 한 부류는 계界를 증득했기 때문에, 계의 상을 증득했기 때문에, 계의 종종성種種性을 증득했기 때문에, 계의 비일성非一性을 증득했기 때문에, 계의 멸을 증득했기 때문에, 계의 멸을 작증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 (그에 의거해) 이해한 바를 기별해 주었습니다.

  다섯 번째는 십팔계에 의거해서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여섯 구 가운데에서 처음의 두 구와 뒤의 두 구는 이전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
중간의 두 구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별이 있다.
종류가 여럿인 것을 “종종種種”이라 하고,

001_0208_a_01L說脩習道諦餘三諦亦應遍知
001_0208_a_02L何唯說苦應遍知此如婆沙七十
001_0208_a_03L九說彼云契經但說苦諦應遍
001_0208_a_04L如何阿毗達磨說一切法皆應遍
001_0208_a_05L脇尊者言世尊唯說應遍知苦
001_0208_a_06L謂唯苦是應遍知故對法中說一切
001_0208_a_07L法是所遍知世尊唯說集應永斷
001_0208_a_08L謂唯集是應永斷故對法中說有漏
001_0208_a_09L法皆應永斷世尊唯說滅應作證
001_0208_a_10L謂唯滅是應作證故對法中說有漏
001_0208_a_11L法皆應永斷世尊唯說滅應作證或
001_0208_a_12L謂唯滅是應作證 [70] 故對法中依得作
001_0208_a_13L說諸善法皆應作證世尊唯說道
001_0208_a_14L應脩習或謂唯道是應脩習故對法
001_0208_a_15L總說一切善有爲法皆應脩習
001_0208_a_16L則顯示經義不了阿毗達磨是了義
001_0208_a_17L廣如彼論多復次說廣辨四諦
001_0208_a_18L如別章

001_0208_a_19L
復有一類 [71] 得界故得界相故得界
001_0208_a_20L種種性故得界非一性故得界滅故
001_0208_a_21L界滅作證故記別所解

001_0208_a_22L
釋曰第五約十八界記別所解
001_0208_a_23L六句中初二後二准前應知中間
001_0208_a_24L二句釋有差別種類衆多名爲種種

001_0208_b_01L수가 하나를 넘으므로 “비일非一”이라 하였다. 따라서 『잡아함경』 제1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이 비구에게 고하였다. 종종계種種界란 무엇인가? 십팔계를 말하니, 안계·색계·안식계 내지는 의계·법계·의식계를 ‘종종계’라고 한다.”113)
『유가사지론』 제27권에서는 오온에 의거해 ‘종종種種’과 ‘비일非一’이라는 두 가지 뜻의 차별을 밝히는데, 그 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의 종종차별성種種差別性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색온이 다르고 내지는 식온이 다름을 말한다.……온의 비일중다성非一衆多性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색온의 하나 아닌 다양한 품류를 말한다. 대종소조大種所造가 차별되기 때문이고, 과거·미래·현재 등의 품류가 차별되기 때문이다.114)115)
『유가사지론』 제5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116) “종종계種種界란 무엇인가? 십팔계의 상호 간의 이상성(展轉異相性)을 말한다. 비일계非一界란 무엇인가? 저 모든 계의 무량한 유정들의 종종의 차별적 소의주성所依住性’을 말한다.117) 무량계無量界란 무엇인가? 그 두 가지를 총괄해서 무량계라고 한다.”118) 또 『유가사지론』 제83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십팔계에 대해 잘 아는 것을 ‘비일계지非一界智’라고 한다. 저 계의 종종의 품류에 대해 잘 아는 것을 ‘종종계지種種界智’라고 하니, 저 계의 취趣·지地·보특가라의 품류 차별에 대해 통달하여 잘 알기 때문이다.”119)
십팔계의 뜻은 『별장』에서 설한 것과 같다.

㉯ 삼십칠도품의 일곱 가지 관문에 의거해 기별함

  다시 한 부류는 염주念住(사념주)를 증득했기 때문에, 염주의 상을 증득했기 때문에, 염주에서 대치시키는 것(能治)과 대치되는 것(所治)을 증득했기 때문에, 염주의 닦음을 증득했기 때문에, 염주가 아직 생기지 않았다가 생기게 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 염주가 이미 생겨났다면 그것을 견고히 머물게 하고 잊지 않고 갑절로 닦아서 증상되고 광대해지게 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 (그에 의거해) 이해한 바를 기별해 주었습니다.

  이하는 두 번째로 도품의 서른일곱 가지 법에 의거해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이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에서 말한 온蘊 등의 법에 (의거해 기별하는 것은)

001_0208_b_01L數過一故名爲非一故雜阿含經第
001_0208_b_02L十六云佛告比丘云何種種界
001_0208_b_03L十八界眼界色界眼識界乃至意界
001_0208_b_04L法界意識界是名種種界若瑜伽二
001_0208_b_05L十七約五蘊明種種非一二義差別
001_0208_b_06L彼云云何名蘊種種差別性謂色蘊
001_0208_b_07L乃至識蘊異云何名蘊非一衆多
001_0208_b_08L謂色蘊非一衆多品類大種所造
001_0208_b_09L差別故 [71] 來今等品類差別故若瑜
001_0208_b_10L伽五十六云云何種種界謂卽十八
001_0208_b_11L界展轉異相性云何非一界謂卽彼
001_0208_b_12L諸界無量有情種種差別所依住 [73]
001_0208_b_13L何無量界謂總彼二名無量界又瑜
001_0208_b_14L伽八十三云若能了知十八界者
001_0208_b_15L非一界智了知彼界種種品類
001_0208_b_16L種種界智通達了知彼界趣地補特
001_0208_b_17L伽羅品類差別故十八界義如別章
001_0208_b_18L

001_0208_b_19L
復有一類由得念住故得念住相故
001_0208_b_20L念住能治所治故得念住脩故得念住
001_0208_b_21L未生令生故得念住生已堅住不忘倍
001_0208_b_22L脩增上廣大 [74] 記別所解

001_0208_b_23L
釋曰自下第二約道品三十七法
001_0208_b_24L別所解此有兩釋一云前蘊等法

001_0208_c_01L‘증득되는 경계(所證境)’에 의거해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고, 뒤에서 염주念住 등에 (의거해 기별하는 것은) ‘증득하는 행(能證行)’에 의거해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필추들은 단지 오온 등의 여섯 가지 상을 반연하여 승의勝義의 현관경계現觀境界로 삼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염주·정단 등의 법의 여섯 가지 별상別相을 반연하여 진실한 현관경계라고 계탁하기 때문에 참된 승의의 일미상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해절경』에서는 “어떤 비구는 염처念處(염주) 및 염처의 상을 증견證見하고……자기가 증득한 것을 기별합니다.”120)라고 하였고, 또 『심밀해탈경』에서는 “이와 같이 비구들은 사념처의 상을 파악하고 법을 증득했다고 말한다.”121)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설하면 그 경과 같다.≻
이 경문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염주에 의거해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다음의 “마치 한 부류가” 이하는 정단正斷·신족神足·근根·역力·각지覺支에 의거해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에 대해 (앞의 경우에) 유추해서 해석한 것이다. 마지막은 팔성도八聖道에 의거해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a. 사념주에 의거해 기별함
이것은 첫 번째로 사념주四念住122)에 의거해 이해한 바를 기별하는 것이다.
“염주念住”라는 것은 사념주, 즉 신身·수受·심心·법法을 말한다.
『순정리론』 제71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이유로 혜慧에 대해 염주라는 이름을 세웠는가? 혜는 염念의 힘으로 유지되고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123) 『구사론』 제25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바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혜는 염의 힘에 의해 유지되어 (소연의 경계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치상 실로 혜가 염을 경계(사제)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니, 여실하게 본 자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124) 『대비바사론』 제9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염의 세력으로 자체를 분석하기 때문에 염주라고 한다. ‘자체’란 유루의 오온이다. 반드시 염주로 인해 그것을 분석하기 때문이다.”125)
『대지도론』 제19권에서는 “‘염’이 지혜에 수순해서 연緣(소연 경계) 가운데 머물게 되면 이때를 염처念處라고 한다.”126)고 하였다.

001_0208_c_01L約所證境記別所解後念住等
001_0208_c_02L能證行記別所解一云彼諸苾蒭
001_0208_c_03L非但緣於蘊1) [11] 中六相以爲勝義現
001_0208_c_04L觀境界亦緣念住正斷等法六種別
001_0208_c_05L計爲眞實現觀境界故不能了眞
001_0208_c_06L勝義中一味相也故解節云或有比
001_0208_c_07L證見念處及念處相等記自所得
001_0208_c_08L又深密云如是諸比丘 [75] 念處相
001_0208_c_09L爲證法具說如彼於中有三初約
001_0208_c_10L念住記別所解次如有一類下
001_0208_c_11L釋正斷神足根力覺支記別所解
001_0208_c_12L約八聖道記別所解此卽第一約四
001_0208_c_13L念住記別所解言念住者謂四念
001_0208_c_14L卽身受心法依正理論七十一云
001_0208_c_15L何緣於慧立念住名慧由念力持令
001_0208_c_16L住故俱舍二十五云毗婆沙師
001_0208_c_17L如是說慧由念力持令住故理實
001_0208_c_18L由慧令念住境如實見者能明記
001_0208_c_19L依毗婆沙第九十六云由念勢力
001_0208_c_20L2) [12] [76] 除自體故名念住自體卽是有
001_0208_c_21L漏五蘊要由念住折除彼故依智度
001_0208_c_22L論第十九云 [77] 順智慧緣中止住
001_0208_c_23L「等」下異有「法」「析」疑「折」{編}

001_0209_a_01L
『유가사지론』 제28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염주란 어떤 뜻인가? 여기에 염이 머물거나, 이로 말미암아 염이 머문다면, 모두 ‘염주’라고 한다. ‘여기에 염이 머문다’는 것은 소연념주所緣念住를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염이 머문다’는 것은 ‘혜’나 ‘염’이 정定을 섭지攝持하는 것을 말하니, 이는 자성념주自性念住다. 그 밖의 상응하는 모든 심과 심소는 상잡념주相雜念住다.127)128)

● 법수法數로서 사념주의 체를 밝힘
(사념주의) 체성體性을 밝혀 보겠다.
살바다에 의하면 ‘혜’를 체로 삼는다.
대승에 의하면 ‘염’과 ‘혜’를 체로 삼는다. 따라서 『잡집론』 제10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염주 자체란 혜와 염을 말한다. 불교 경전에서 ‘신身 등을 순관循觀129)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또 ‘염주’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 순서대로 (혜와 염이 체임을 알 수 있다.130))”131) 『유가사지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혜나 염이 정을 섭지하는 것을 자성념주132)라고 한다.……또 이에 다시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문소성聞所成이고, 둘째는 사소성思所成이며, 셋째는 수소성脩所成이다. 문소성과 사소성은 오직 유루이고, 수소성은 유루와 무루에 통한다.”133)

● 경문 해석
경문을 해석한 곳에 가면, 문장은 여섯 구가 있다.『심밀해탈경』에는 일곱 구가 있다. 여섯 번째 구를 두 구로 늘렸으니, 말하자면 염처가 생기고 나서 ‘머물게 하는 (수행의 상)’과 ‘망실하지 않는 수행의 상’이다.134) 『해절경』의 경문은, 진제의 『기』에 따르면, 열 개의 구로 나뉜다.135)

◉ 진제의 해석
진제의 『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에서 의도적으로 ‘어떤 비구는 염처를 증견한다’는 등의 열 가지 구를 설한 것은 무엇을 나타내려는 것인가?
  열 가지 의미를 나타내려고 이 열 가지 구를 설한 것이다.
제1구에서 ‘염처를 증견한다’고 한 것은 경계념처境界念處에 해당한다. 제2구인 ‘염처의 상相’이란 자성념처自性念處에 해당한다. 제3구인 ‘염처에서의 대치對治’란 염처라는 도道에 의해 대치되는(所治) 네 가지 전도를 나타낸 것이다. 제4구인 ‘염처의 대치도對治道’란 대치시키는(能治) 도를 나타낸 것이니, 곧 잡념처雜念處가 네 가지 전도를 대치시키기 때문이다.136)
제5구인 ‘염처의 수습修習’이란 염처의 방편도를 닦는 것을 말한다.137) 제6구인 ‘아직 염처가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염처가 생기는 것을 증견한다’고 한 것은 무애도無礙道(무간도)에 해당하니, 팔인八忍을 말한다.

001_0209_a_01L時名念處依瑜伽二十八云
001_0209_a_02L住何義若於此念住 [78] 若由此住
001_0209_a_03L皆名念住於此念住者謂所緣
001_0209_a_04L念住由此住念者謂若慧若念
001_0209_a_05L持於定是自性念住所餘相應諸心
001_0209_a_06L心所是相雜念住辨體性者依薩
001_0209_a_07L婆多以慧爲體 [79] 大乘以念慧爲體
001_0209_a_08L故雜集論十云念住自體者謂慧及
001_0209_a_09L由佛經中有於身等隨 [80] 觀言故
001_0209_a_10L有念住言故如其次第依瑜伽云
001_0209_a_11L慧若念攝持於定是名自性念住
001_0209_a_12L此復三種一聞所成二思所成
001_0209_a_13L脩所成聞思所成唯是有漏脩所
001_0209_a_14L成者通有漏無漏就釋文中文有
001_0209_a_15L六句深密經有七句於第六句開爲二句謂念
處生已住及不失脩行相解節經文依眞
001_0209_a_16L諦記開
爲十句
眞諦記云問曰經意或有比
001_0209_a_17L丘證見念處等十句欲何所顯答曰
001_0209_a_18L爲顯十義說此十句初句證見念處
001_0209_a_19L卽是境界念處第二念處相者
001_0209_a_20L是自性念處第三念處對治者顯念
001_0209_a_21L處道所治四倒第四念處對治道者
001_0209_a_22L顯能治道卽是雜念處治四倒故
001_0209_a_23L五念處脩習者卽是脩念處方便道
001_0209_a_24L第六未生念處證見念生者卽是無

001_0209_b_01L제7구인 ‘이미 염처가 생긴 상태에서 염처가 머무는 것을 증견한다’고 한 것은 해탈도解脫道에 해당하니, 팔지八知(八智)를 말한다.138) 제8구인 ‘잊지 않게 한다’는 것은 수도修道에 해당하니, 곧 금강심金剛心까지를 말한다.139) 제9구인 ‘증장시킨다’는 것은 무학도無學道에 해당하니, 곧 금강후심金剛後心을 말한다.140) 제10구인 ‘원만해진다’는 것은 신통도神通道에 해당하니, 세 가지 법륜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세 가지 법륜이란) 신통神通·기심記心·정교正敎를 말한다.141)

사념처에 이 열 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정근 내지는 팔성도를 예로 들어도 또한 이와 같으니, 구체적으로 설하면 그 『기』와 같다.

◉ 지금의 해석
지금의 해석은 그렇지 않다.
하나하나 법문마다 예例의 여섯 구가 있다. 처음 두 개의 구는 오온에 준해서 알아야 하고, 다음에 네 개의 구가 있는데 오온 등의 경우와 다르다.
“사념주에서 대치시키는 것과 대치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사념주로 네 가지 전도를 대치시킴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신념주身念住는 몸의 부정不淨을 관하여 ‘청정하다(淨)’는 전도를 대치시킨다. 수념주受念住는 수受의 무락無樂을 관하여 ‘즐겁다(樂)’는 전도를 대치시킨다. 심념주心念住는 마음의 무상無常을 관하여 ‘영원하다(常)’는 전도를 대치시킨다. 법념주法念住는 법의 무아無我를 관하여 ‘아가 있다’는 전도를 대치시킨다. 자세한 것은 『유가사지론』 제28권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사념주의 닦음을 증득했기 때문에……”이라 한 것에는 세 개의 구문이 있는데, 네 종류 수修에 의거해 사념주를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네 종류 수는, 살바다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염주가 현전한 것을 행수行修라고 하고, 또한 득수得修라고도 한다. 미래법의 종류를 일으켜 획득했거나(起得) 획득 가능한(能得) 경우는 ‘득에 의거해 닦는다(准得修)’고 한다.142) 따라서 『구사론』 제2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修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득수得修이고, 둘째는 습수習修이며, 셋째는 대치수對治修이고, 넷째는 제견수除遣修이다. 이와 같은 네 종류 수는 어떤 법에 의거해서 성립하는가?

 
立得習二脩      득수와 습수를 세운 것은
依善有爲法      선한 유위법에 의거하였고
依諸有漏法      모든 유루법에 의거해서는
立治脩遣脩      대치수와 제견수를 세웠도다

  득수와 습수 두 가지는 유위의 선법에 의거한 것이니, 미래에는 오로지 득수만이 있을 뿐이고,

001_0209_b_01L礙道謂八忍第七已生念處證見念
001_0209_b_02L住者卽解脫道謂八知第八不忘
001_0209_b_03L卽是脩道乃至金剛心第九增
001_0209_b_04L長者卽無學道謂金剛後心第十
001_0209_b_05L圓滿者卽神通道三輪利物也
001_0209_b_06L神通記心正敎如四念處有此十
001_0209_b_07L四正勤乃至八聖道例亦如此
001_0209_b_08L說如彼今解不爾一一法門例有
001_0209_b_09L六句初二句准蘊應知下有四句
001_0209_b_10L同蘊等言得念住能治所治者顯四
001_0209_b_11L念住能治四倒謂身念住觀身不淨
001_0209_b_12L能治淨倒受念住觀受無樂能治
001_0209_b_13L樂倒心念住觀心無常能治常倒
001_0209_b_14L法念往觀法無我能治我倒廣如
001_0209_b_15L瑜伽二十八等言得念住脩故等者
001_0209_b_16L此三句文約四種脩釋四念住
001_0209_b_17L此四脩薩婆多宗念住現前名爲行
001_0209_b_18L亦名得脩起得能得未來種類
001_0209_b_19L准得脩故俱舍論二十六云脩有四
001_0209_b_20L一得脩二習脩三對治脩四除
001_0209_b_21L遣脩如是四種 [81] [82] 法立頌曰

001_0209_b_22L
立得習二 [83] 依善有爲法

001_0209_b_23L依諸有漏法立治脩遣脩

001_0209_b_24L
論曰得習二脩依有爲善未來唯

001_0209_c_01L현재에는 두 가지 수를 갖추고 있다.143) 대치수와 제견수 두 가지는 유루법에 의거한 것이다.144) 따라서 유루의 선법은 네 가지 닦음을 모두 갖추고 있고, 무루의 유위법과 나머지 유루법은 그 차례대로 각기 전자(득수·습수)와 후자(대치수·제견수)의 두 가지 닦음을 갖추고 있다.145)

자세하게 분별하면, 예를 들어 『순정리론』 제74권과 『대비바사론』 제105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146)
이제 대승에 의하면 여러 교설이 서로 다르다.
『집론』 제5권과 『잡집론』 제9권에 따르면, 또한 네 가지 수修에 의거해 염주 등을 닦는다. 거기서는 사정단四正斷(사정근)에 의거해서 네 종류 수를 설명하는데, 따라서 그 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모든 도품을 닦는 차별에 대해 설명하겠다. 대략 설하면 네 종류가 있는데, 득수得修·습수習修·제거수除去修·대치수對治修를 말한다. ‘득수’란 아직 생기지 않은 선법을 수습해서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습수’란 이미 생긴 선법을 수습해서 견고하게 머물게 하고 잊지 않고 갑절로 반복해서 증상되고 광대해지게 하는 것이다. ‘제거수’란 이미 생긴 악한 불선법을 수습으로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대치수’란 아직 생기지 않은 악한 불선법을 수습으로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네 종류 수의 차별상은 그 대응하는 바에 따라 사정단에 의거해 설한 것이다.”147)
『유가사지론』 제66권에서도 『집론』과 동일하게 말한다.148)
이 『해심밀경』에서는 오직 처음의 두 종류 수에 의거해 사념주를 닦는 것에 대해 밝혔다. “염주의 닦음을 증득했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두 종류 수를 총괄해서 표명한 것이다. “아직 생기지 않았다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란 득수를 따로 나타낸 것이고, “이미 생겨났다면 그것을 견고히 머물게 하고……”라고 한 것은 습수를 따로 나타낸 것이다.

  어째서 뒤의 두 종류 수(제거수와 대치수)를 설하지 않았는가?
  여기에서는 모든 선법을 닦는 것을 갖추어 설하고 그 밖의 악한 불선법의 경우는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네 가지 수를 모두 설했다고 해도 되니, 이전의 (네 가지 전도를) ‘대치시키는 것(能治)’에 두 가지 수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염주가 아직 생기지 않았다가 생기게 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현양성교론』 제2권에 준해서 (해석할 수 있다.) “‘아직 생기지 않은 선법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아직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所未得)을 말한다.

001_0209_c_01L1) [13] [84] 二脩治遣二脩依有漏法
001_0209_c_02L故有漏善具足四脩無漏有爲餘有
001_0209_c_03L漏法如次各具前後二脩若廣分別
001_0209_c_04L如順正理七十四婆沙一百五說
001_0209_c_05L依大乘諸敎不同若依集論第五雜
001_0209_c_06L集第九亦依四脩脩念住等彼約
001_0209_c_07L四正斷明四種脩故彼論云更辨
001_0209_c_08L諸道脩之差別略說有四種謂得脩
001_0209_c_09L習脩除去脩對治脩得脩者謂未
001_0209_c_10L生善法脩習令生習脩者謂已生善
001_0209_c_11L法脩令堅住不忘陪復增廣除去脩
001_0209_c_12L謂已生惡不善法脩令永斷對治
001_0209_c_13L脩者謂未生惡不善法脩令不生
001_0209_c_14L是四種脩差別相隨其所應依四正
001_0209_c_15L斷說瑜伽六十六亦同集論若依
001_0209_c_16L此經唯初二脩明脩念住言得念
001_0209_c_17L住脩故者總標二脩言未生令生者
001_0209_c_18L別顯得脩言生已堅住等者別顯習
001_0209_c_19L如何不說後二種脩此中俱
001_0209_c_20L說脩諸善法不說餘惡不善法故
001_0209_c_21L可具四前能治中攝二脩故言得念
001_0209_c_22L住未生令生故者准顯揚第二云
001_0209_c_23L生善法爲令生故未生者謂所未得
001_0209_c_24L「其」異作「具」

001_0210_a_01L‘선법’이란 문聞·사思·수修에 의해 생겨나는 세 가지 혜를 말하니, 허물이 없다는 의미에서 ‘선’이라 하였다. ‘생기게 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이라 한 것은 ‘그것을 획득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149)
“염주가 이미 생겨났다면 그것을 견고히 머물게 하고 잊지 않고 갑절로 닦아서 증상되고 광대해지게 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습수習脩’를 설한 문장인데, 여러 교에서 다르게 말한다.
『현양성교론』에 의하면 그에 일곱 종류가 있다. 첫째 이미 선법이 생겨나고, 둘째 머물게 하며, 셋째 잊지 않고, 넷째 닦아서 원만해지게 하며, 다섯째 갑절로 닦게 하고, 여섯째 증장되게 하며, 일곱째 광대해지게 하는 것이다.150) 따라서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 생겼다’는 것은 이미 획득했기 때문이다. ‘머물게 한다’는 것은 문혜聞慧를 말하고, ‘잊지 않게 한다’는 것은 사혜思慧를 말하며, ‘닦아서 원만해지게 한다’는 것은 수혜修慧를 말한다. 이상의 세 구는 오직 이미 획득한 선법을 수호하는 것을 나타내었다. ‘갑절로 닦게 하고, 증장되게 하며, 광대해지게 한다’는 (세 구는) 그 차례대로 오직 그 (앞의 단계에) 만족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151)
『유가사지론』 제28권에서는 이름을 다 갖추어 열거했지만 해석하지는 않았고, 제29권의 문장에는 단지 앞의 네 구만 있고 뒤의 세 구는 빠져 있다.152)

b. 사정단·사신족·오근·오력·칠각지를 유추하여 해석함

  마치 한 부류가 염주를 증득했기 때문에 (기별해 주는 것처럼,) 다시 어떤 한 부류는 정단正斷을 증득했기 때문에, 신족神足을 증득했기 때문에, 모든 근根을 증득했기 때문에, 모든 역力을 증득했기 때문에, 각지覺支를 증득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두 번째로 다섯 가지 문을 유추해서 해석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념주에 여섯 구가 있었던 것처럼 사정단·사신족·오근·오력·칠각지에도 모두 여섯 구가 있으니, 이전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

● 사정단
다섯 문이라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단은 사정단四正斷153)을 말한다. 즉 이미 생긴 악한 불선법을 끊어지도록 하기 때문이고, 아직 생기지 않은 모든 악한 불선법을 생기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며, 아직 생기지 않은 그 모든 선법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고, 이미 생긴 그 모든 선법을 머물게 하고 망실되지 않게 하고 (갑절로 닦아 증장되고 광대해지게) 하기 때문이다.

001_0210_a_01L善法者謂聞思脩所生三慧由無過
001_0210_a_02L故名爲善爲令生故者謂令脩 [85]
001_0210_a_03L得故言得念住生已堅住不忘倍脩
001_0210_a_04L增廣故者此習脩文諸敎不同
001_0210_a_05L淮顯揚有其七種一已生善法
001_0210_a_06L令住三不忘四令脩滿五令倍脩
001_0210_a_07L六令增長七令廣大故彼論云已生
001_0210_a_08L謂已得故令住者謂聞慧令不忘
001_0210_a_09L謂思慧令脩滿者謂脩慧此上三
001_0210_a_10L顯唯守護已所得善令倍脩令
001_0210_a_11L增長令廣大者如其次第不唯於
001_0210_a_12L彼生知足故若依瑜伽二十八具足
001_0210_a_13L列名而不解釋二十九文但有前
001_0210_a_14L闕後三句

001_0210_a_15L
如有一類得念住故復有一類得正
001_0210_a_16L斷故得神足故得諸根故得諸力故
001_0210_a_17L得覺支故當知亦爾

001_0210_a_18L
釋曰此卽第二類釋五門謂如念住
001_0210_a_19L有其六句正斷神足根力覺支皆有
001_0210_a_20L六句准上應知言五門者一者正
001_0210_a_21L謂四正斷卽已生惡不善法爲令
001_0210_a_22L斷故於諸未生惡不善法爲令不生
001_0210_a_23L於其未生一切善法爲令生故
001_0210_a_24L其已生一切善法爲欲令住令不忘失

001_0210_b_01L
『구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째서 근勤을 정단이라 부르는가? ‘단斷·수修(번뇌를 끊고 대치도를 닦음)’를 바르게 수습하는 지위에서 이 ‘근’의 힘으로 해태懈怠(단·수를 게을리하는 것)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정단을) 정승正勝이라고도 하는데, 신身·어語·의意를 바르게 유지하면서 책려하는 데는 이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154)
『순정리론』과 『대비바사론』도 동일하게 말한다.155)
『대지도론』 제19권에서는 “삿된 법을 깨뜨리고 정도正道 안에서 행하기 때문에 정근이라 한다.”156)고 하였고, 또 “네 종류 정진의 마음을 용맹하게 발동시키고 (그릇된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정근이라 한다.”157)고 하였다.
(법수로 사정근의) 체성을 분별해 보면, 대승과 소승의 모든 교에서 모두 ‘정진精進’을 체로 삼는다고 한다.158)

● 사신족
‘신족神足’이란 사신족四神足159)을 말하니, 즉 욕欲·근勤·심心·관觀의 삼마지이다.
『구사론』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 정定에 대해 ‘신족’이라는 이름을 세웠는가? 모든 영묘한 공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神은 선정에 해당하고, 족足은 욕(·근·심·관) 등을 말한다.≻ 그러나 그 경우 각분의 사事는 열세 가지가 있어야 하니, 욕과 심이 더해지기 때문이다.비바사사들은 각분覺分은 열한 가지 사라고 하는데,160) 욕과 심을 더하기 때문에 열세 가지 사가 된다. 또한 경의 말씀과도 위배된다. 예를 들면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제 그대를 위해 신족 등에 대해 설하겠다. 신神이란 갖가지 신통경계(神境)를 수용하는 것인데, 하나를 나누어 여럿으로 만드는……중간 생략……것이고, 족足이란 욕 등의 네 가지 삼마지를 말한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선정의 과(定果)를 ‘신’이라 하셨고, 욕 등에 의해 생겨난 등지等持161)를 ‘족’이라 하신 것이다.162)163)
『순정리론』도 이와 거의 동일하다.
『대비바사론』에서는 “신묘한 공덕의 소의이기 때문에 신족이라 하였다.164)165)고 하였으니, 자세히 분별하면 가령 『대비바사론』 제141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166)
『대지도론』에 의하면 “마음을 거두어 안은安隱하게 연緣 가운데 두기 때문에 여의족이라 한다.”167)고 하였다. 또 “사정단을 수행할 때 마음이 조금 산란되므로 정定으로써 마음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여의족이라 한다.168)169)고 하였고, 또 “지智와 정定의 힘이 균등해져서 원하던 것을 모두 획득하기 때문에 여의족이라 한다.”170)고 하였다. 자세히 설하면 그 논과 같다.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떤 이유에서 신족이라 이름하는가? 마치 발(足)이 있는 자는

001_0210_b_01L依俱舍論云何故說勤名爲正斷
001_0210_b_02L於正脩習斷脩位中此勤力能斷懈
001_0210_b_03L怠故或名正勝於正持筞 [86] 身語意中
001_0210_b_04L此最勝故順正理毗婆沙亦同依智
001_0210_b_05L度論第十九云破邪法正道中行
001_0210_b_06L名正勤又云四種精進心勇發動
001_0210_b_07L名正動辨體性者大小諸敎皆以
001_0210_b_08L精進爲體言神足者謂四神足
001_0210_b_09L欲勤心觀三摩地依俱舍云何緣於
001_0210_b_10L定立神足名諸靈妙德所依止故
001_0210_b_11L餘師說神卽是定足謂欲等彼應覺
001_0210_b_12L分事有十三增欲心故毗婆沙師覺分十一
加欲心故成十三事

001_0210_b_13L又違經說如契經言吾今爲汝說神
001_0210_b_14L足等神謂受用種種神境分一爲多
001_0210_b_15L乃至廣說足謂欲等四三摩地此中
001_0210_b_16L佛說定果名神欲等所生等持名足
001_0210_b_17L正理大同毗婆沙云能爲神妙功德
001_0210_b_18L所依故名神足若廣分別如大婆
001_0210_b_19L沙百四十一說依智度論云攝心安
001_0210_b_20L隱於緣中故名如意足又云行四
001_0210_b_21L正勤時心等 [87] 散故以定攝心故名
001_0210_b_22L如意足又云智定力等所願皆得故
001_0210_b_23L名如意足具說如彼依瑜伽云
001_0210_b_24L何因緣 [88] 說名神足如有足者

001_0210_c_01L갈 수도 있고 돌아올 수도 있으며 용맹하게 높이 뛰어오를 수도 있는 것처럼, 세간에 있는 모든 수승한 법을 증득하는 데 있어, 세간의 수승한 법을 ‘신’이라 이름하고 그것으로 여기에 이를 수 있으므로 ‘신족’이라 이름한다.……중간 생략……출세간법을 증득하는 데 있어, 출세간법은 가장 수승하고 자재하므로 이것을 가장 수승한 ‘신’이라 이름하였고 그것으로 이것을 증득할 수 있으므로 ‘신족’이라 이름한 것이다.”171) 자세히 설하면 그 논과 같다.
(법수로 사신족의) 체성을 분별해 보면 대승과 소승의 모든 교에서 모두 삼마지三摩地172)를 체로 삼는다고 한다.

● 오근과 오력
“모든 근根과 모든 역力”이라 한 것은 오근五根173)과 오력五力174)을 말하니, 즉 신信·정진精進·염念·정定·혜慧이다.
『구사론』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연유로 ‘신信’ 등을 앞에서는 ‘근’이라 하고 뒤에서는 ‘역’이라 했는가? 이 다섯 가지 법을 하품과 상품에 의거해 전자와 후자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또는 굴복될 수 있는 것과 굴복될 수 없는 것에 의거해 나누었기 때문이다.175)176)
『순정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연유로 신信 등에 대해 ‘근’이나 ‘역’이라는 이름을 세웠는가? 증상되었기 때문이고, 굴복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177) 어떤 연유로 이 다섯 가지 법은 전자를 근이라 하고 후자를 역이라 했는가? 이 다섯 가지 법은 하품과 상품에 의거해 전자와 후자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또 굴복될 수 있는 것과 굴복될 수 없는 것에 의거해 나누었기 때문이다. 하품의 신 등은 세력이 하열하기 때문에 여전히 대치되는 대상(번뇌)과 같은 종류로서 굴복될 수 있지만, 상품은 이와 반대이기 때문에 ‘역’이라는 이름을 얻는다.”178)
『대비바사론』에서는 “세용勢用이 증상되었기 때문에 근이라 하고, 꺾어 누르기 어렵기 때문에 역이라 한다.”179)고 하였다.
『대지도론』에서는 “유연한 지혜(軟智)의 마음으로 획득한 것을 근이라 하고 예리한 지혜(利智)의 마음으로 획득한 것을 역이라 한다.”180)고 하였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생의 근기를 아는 데 있어 자재한 방편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근’이라 하고,……다섯 가지 근의 힘이 증장되어 능히 번뇌를 파괴하고 중생을 제도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오력’이라 한다. 다시 천마天魔와 외도들이 막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을 ‘역’이라 한다.”181) 구체적인 것은 그 논과 같다.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증상되었다’는 의미에서 ‘근’이라 하고,

001_0210_c_01L往能還騰躍勇健能得能證世間所
001_0210_c_02L有殊勝之法世殊勝法說名爲神
001_0210_c_03L能到此故名神足廣說乃至能得能
001_0210_c_04L證出世間法由出世法最勝自在
001_0210_c_05L最勝神彼能證此故名神足廣說
001_0210_c_06L如彼辨體性者大小諸敎皆用三
001_0210_c_07L摩地爲體言諸根諸力者謂五根五
001_0210_c_08L卽信精進念定慧依俱舍論
001_0210_c_09L緣信等先說爲根後名爲力由此五
001_0210_c_10L依下上品分先後故又依可屈
001_0210_c_11L伏不可屈伏故依順正理云何緣信
001_0210_c_12L等立根力名以增上故難屈伏故
001_0210_c_13L緣此五先說爲根後名爲力由此五
001_0210_c_14L依下上品分先後故又依可屈
001_0210_c_15L伏不可屈伏故下品信等勢力 [89] 劣故
001_0210_c_16L猶爲所治同類屈伏上品翻此故得
001_0210_c_17L力名毗婆沙云勢用增上故名爲
001_0210_c_18L難可摧制故名爲力依智度云
001_0210_c_19L [90] 智心得故名根利智心得故名力
001_0210_c_20L又云於知衆生根中得自在方便力
001_0210_c_21L故名爲 [91] 五力 [92] 增長能破煩惱
001_0210_c_22L衆生得無生法忍是名爲 [93] 復次
001_0210_c_23L天魔外道不能俎 [94] [95] 名爲力具說
001_0210_c_24L如彼依瑜伽論增上義故說名根

001_0211_a_01L‘굴복시키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역’이라 한 것이니, 자세한 것은 그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182) 『현양성교론』과 『잡집론』 등에서 말한 뜻도 『유가사지론』과 동일하다.
(법수로 오근·오력의) 체성을 분별해 보면, 대승과 소승의 모든 교에서 모두 신信 등의 다섯 가지 법을 체로 삼는다고 한다.

● 칠각지
‘각지’라고 한 것은 칠각지七覺支183)를 말하니, 즉 염念·택법擇法(慧)·정진精進·희喜·안安·정定·사捨의 각지이다.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여실한 깨달음을 도와주기 때문에 각지라고 한다.
  각지란 어떤 의미인가?
 () 능히 깨달아 아는 것(能覺悟)이기 때문에 각지라고 하고, 각의 지(覺之支)이기 때문에 각지라고 한다.184)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능히 깨달아 아는 것이기 때문에 각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 개는 맞지만 여섯 개는 아닐 것이다.185)
  여섯 개도 각분覺分(각지)이다. (이 여섯 개는) 각에 수순하는 것이니, 수승한 것을 따라 설하여 또한 각지라고 한 것이다.
다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각의 지’이기 때문에 각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곧 여섯 개는 맞지만 한 개는 아닐 것이다.186)
  택법은 각이면서 또한 각지이기도 하고, 나머지 여섯 개는 각지이지만 각은 아니다. 이는 마치 정견正見이 바로 도道이면서 또한 도지道支이지만187) (나머지 일곱 가지는 도지가 아닌 것과) 같다.188)

구체적으로 설하면 그 논과 같다. 『순정리론』의 의미도 『대비바사론』과 동일하다.
『대지도론』에서는 “무학의 진실한 깨달음에 이 일곱 가지 사事로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분分(支)이라 한다.”189)고 하였고, 또 “수도의 작용이기 때문에 ‘각’이라 하고 견도의 작용이기 때문에 ‘도’라고 한다.”190)고 하였다.
『변중변론』에서는 “이 지支는 각覺을 돕기 때문에 각지라고 하니, 이로 인해 각지의 지위는 견도에 있는 것이다.”191)라고 하였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이미 정성리생正性離生192)(견도에 든 성자)에 깨달아 들어간 모든 보특가라의 여실한 각혜覺慧는 이것을 지로 삼기 때문에 각지라고 한다.”193)고 하였다.
(법수로 칠각지의) 체성을 분별해 보면 대승과 소승의 모든 교에서는 혜慧(택법)·정진精進·염念·정定·희수喜受·경안輕安·행사行捨를 체로 삼는다.

c. 팔성도에 의거해 기별함

  다시 한 부류는 팔지성도八支聖道194)를 증득했기 때문에, 팔지성도의 상을 증득했기 때문에, 팔지성도에서 대치시키는 것과 대치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 팔지성도의 닦음을 증득했기 때문에,

001_0211_a_01L伏義故名力具如彼說顯揚雜集等
001_0211_a_02L意同瑜伽辨體性者大小諸敎
001_0211_a_03L用信等五法爲體言覺支者謂七覺
001_0211_a_04L卽念擇法精進
001_0211_a_05L覺支依婆沙云助如實覺故名覺
001_0211_a_06L [96] 支者是何義耶爲能覺悟
001_0211_a_07L故名覺支爲覺之支故名覺支
001_0211_a_08L作是說 [97] 能覺悟故名覺支
001_0211_a_09L卽應一是六非六是覺支 [98]
001_0211_a_10L隨順覺從勝而說亦名覺支復有說
001_0211_a_11L是覺之支故名覺支若爾
001_0211_a_12L應六是一非擇法是覺支亦是覺 [99]
001_0211_a_13L餘六是覺支而非是覺如正見是道
001_0211_a_14L亦正 [100] 道支具說如彼順正理論意同
001_0211_a_15L婆沙依智度論云無學 [101] 實覺此七事
001_0211_a_16L能到故名分又云脩道用故名覺
001_0211_a_17L道用故名道中邊論云此支助覺
001_0211_a_18L故名覺支由此覺支位在見道依瑜
001_0211_a_19L伽論云諸已證入正性離生補特伽
001_0211_a_20L如實覺慧用此爲支故名覺支
001_0211_a_21L辨體性者大小諸敎用慧精進
001_0211_a_22L喜受輕安行捨爲體

001_0211_a_23L
復有一類得八支正道相故得八支聖
001_0211_a_24L道能治所治故得八支聖道脩故得八

001_0211_b_01L팔지성도가 아직 생기지 않았다가 생기도록 하는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 팔지성도가 이미 생겨나서 견고히 머물게 하고 잊지 않고 갑절로 닦아 증상되고 광대해지도록 하는 법을 증득했기 때문에, (그에 의거해) 자기가 이해한 것을 기별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 번째로 팔도지八道支에 의거해 이해한 것을 기별해 주는 것이다.
‘대치시키는 것’이란 팔성도이고, ‘대치되는 것’이란 팔사八邪195)이다. 그밖의 것은 이전의 해석과 동일하다.
“팔지성도”라고 한 것은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말한다.
『대비바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지道支란 어떤 의미인가? 능히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能求趣)이기 때문에 도지라고 하는가, 도의 지(道之支)이기 때문에 도지라고 하는가?
어떤 이는 이렇게 설한다. ≺이것은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도지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개는 맞지만 일곱 개는 아닐 것이다.196)
  일곱 개는 도분道分으로서 도에 수순하는 것이다. 수승한 것을 따라서 설하면 그것들 또한 도지라고 이름한다.
다시 어떤 이는 이렇게 설한다. ≺이것은 ‘도의 지’이기 때문에 도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곱 개는 맞지만 한 개는 아닐 것이다.197)
  정견은 도이면서 또한 도지이기도 하고, 그 밖의 일곱 개는 도지이지만 도는 아니다.198) 예들 들어 가령 택법擇法(慧)은 각覺이면서 또한 각지覺支이고, 나머지 여섯 개는 각지이지만 각은 아닌 것과 같다.199)

『대지도론』에서는 “이 법을 얻어 안은安隱하게 구족하고 나서 열반무위의 성에 들어가려 하기 때문에, 이 법들을 행하는 이때를 ‘도’라고 한다.”200)고 하였다.
『유가사지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떤 이유에서 팔지성도라고 하는가? 모든 성스런 유학들로서 이미 (부처님의) 행적을 본 자들은, 팔지八支의 행적을 포괄하는 정도正道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끊고 해탈을 궁극적으로 작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팔지성도라고 한다.”201)
(팔지성도의) 체성을 분별하자면 여러 설이 같지 않다.
『구사론』에서는 여섯 가지 법을 체로 삼는다고 하니,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은 똑같이 계戒에 해당하기 때문이다.202) 비바사사는 일곱 가지 법을 체로 한다고 하니, 신업과 어업 두 가지는 서로 뒤섞이지 않기 때문이다.203) 『순정리론』도 이와 동일하다.

001_0211_b_01L支聖道未生令生故得八支聖道生已
001_0211_b_02L堅住不忘倍脩增廣故記別所解

001_0211_b_03L
釋曰此卽第三約八道支記別所解
001_0211_b_04L能治是八聖道所治是八邪餘同前
001_0211_b_05L言八支聖道者謂正見正思惟
001_0211_b_06L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
001_0211_b_07L毗婆沙云言道支者是何義耶
001_0211_b_08L爲能求趣故名道支爲道之支故名
001_0211_b_09L道支有作是說此能求趣故名道支
001_0211_b_10L若爾則應一是七非七是道
001_0211_b_11L能隨順道從勝而說亦名道支
001_0211_b_12L復有說者是道之支故名道支
001_0211_b_13L若爾卽應七是一非正見是道
001_0211_b_14L亦道支餘是道支而非道如擇法是
001_0211_b_15L亦是覺支餘六是覺支而非覺
001_0211_b_16L度論云得是諸安隱具足已欲入涅
001_0211_b_17L槃無爲城故行是諸法是時名爲道
001_0211_b_18L瑜伽論云何因緣故名八支聖
001_0211_b_19L諸聖是覺已見迹者由八支
001_0211_b_20L攝行迹正道能無餘斷一切煩惱
001_0211_b_21L於解脫究竟作證是故名爲八支聖
001_0211_b_22L辨體性者諸說不同若依俱舍
001_0211_b_23L法爲體正語業命同1)或故毗婆沙
001_0211_b_24L七法爲體身語二業不相雜故

001_0211_c_01L『대비바사론』에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혹은 여섯 개라고 하고, 혹은 일곱 개라고 하니, 그 의미는 『구사론』과 동일하다. 혹은 여덟 개라고 하니, 정명은 정어·정업이 아니기 때문이다.204)205)
『잡집론』에서는 “도지 자체란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을 말하니,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법을 도지 자체라고 한다.”206)고 하였다.

  칠각지와 팔성도는 어떤 지위에 의거해 설한 것인가?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본래 두 가지 설이 있다. 한편에서는 견도위는 팔정도八正道이고 수도위는 칠각지라고 한다.207) 한편에서는 견도를 칠각지라고 하고 수도를 팔정도라고 한다.208) 평가정의評家正義209)에 따르면 전자의 설이 바르다.210) 『구사론』에 의하면 또한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편에서는 『대비바사론』과 동일하게 설하고, 한편에서는 칠각지는 견도에 있고 팔정도는 견도와 수도에 통한다고 한다.
이제 대승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대지도론』에는 본래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대비바사론』과 동일하다.
『잡집론』과 『변중변론』에서는 칠각지는 견도라고 하고 팔정도는 수도라고 한다.211)
『현양성교론』의 설에 따르면, 칠각지는 견도에 있고, 팔성도 중의 정견은 견도와 수도에 통하고 나머지 일곱 개는 오직 수도에 있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칠각지는 견도이고, 팔성도 중의 정어·정업·정명은 오직 수도에서 세운 것이라 하는데,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따로 설하지 않았다.
도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 그 의미는 『별장』과 같다.

다. 자기가 생각한 바를 진술함

  세존이시여, 저는 그들을 보고 나서 곧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장로들은 유소득의 현관에 의거해 각자 갖가지 상의 법을 말하면서 이해한 것을 기별하는구나.

  이하는 세 번째로 자기가 생각한 바를 진술한 것이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자기 생각을 간략히 진술한 것이고, 다음은 자기 생각을 거듭 진술한 것이며, 마지막은 세존의 공덕을 찬탄한 것이다.

가) 자기의 생각을 간략히 진술함
이것은 첫 번째로 자기 생각을 간략하게 진술한 것이다.


001_0211_c_01L理亦同毗婆沙論有三釋或說爲六
001_0211_c_02L或說爲七意同俱舍或說爲八
001_0211_c_03L命非正語業故依雜集論云道支自
001_0211_c_04L體者謂正見正思惟正語正業
001_0211_c_05L正精進正念正定如是八法
001_0211_c_06L道支自體七覺八道依何位說
001_0211_c_07L依婆沙自有兩說一云見位八正道
001_0211_c_08L脩位七覺支一云見道名覺支
001_0211_c_09L道名八道許家正義前說爲正
001_0211_c_10L俱舍論亦有兩繹一說同婆沙
001_0211_c_11L說七覺在見道八道通見脩今依大
001_0211_c_12L智度論自有兩說同大婆沙雜集
001_0211_c_13L中邊七覺爲見八道爲脩顯揚論
001_0211_c_14L七覺在見八聖道中正見通於見
001_0211_c_15L餘七唯脩瑜伽七覺爲見八聖
001_0211_c_16L道中正語業命唯立脩道餘不別說
001_0211_c_17L廣辨道品義如別章

001_0211_c_18L
世尊我見彼已便作是念此諸長老
001_0211_c_19L有所得現觀各說種種相法記別所
001_0211_c_20L

001_0211_c_21L
釋曰自下第三述已所念於中有三
001_0211_c_22L初略述已念次重述已念後讃世尊
001_0211_c_23L此卽第一略述已念

001_0211_c_24L「或」疑「戒」

001_0212_a_01L
나) 자기의 생각을 거듭 진술함
  저 장로들은 모두 다 증상만을 품고서 증상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승의제의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두 번째로 생각했던 바를 거듭 진술한 것이다.

다) 세존의 공덕을 찬탄함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매우 기이하시고 나아가 세존께서는 선설을 해 주셨습니다.

  이하는 세 번째로 세존의 공덕을 찬탄한 것이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선설善說임을 간략히 찬탄한 것이고, 다음은 찬탄하려는 교설을 든 것이며, 마지막은 그 밖의 사람의 경계가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가) 선설을 간략히 찬탄함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나) 찬탄하려는 교설을 듦

  세존께서는 승의제상의 ‘미세하면서도 가장 미세하고, 심오하면서도 가장 심오하며, 통달하기 어려우면서도 가장 통달하기 어려운,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로 찬탄하려는 교설을 든 것이다. “미세하면서도……”라는 경문은 이미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212)

(다) 그 밖의 사람의 경계가 아님을 나타냄

  세존이시여, 이 성스런 가르침 안에서 수행하는 비구들조차 승의제의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을 오히려 통달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모든 외도들은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세 번째로 그 밖의 사람의 경계가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이승인과 외도들은 ‘편재하는 일미상’을 통달할 수 없으므로 모두 이에 대해 증상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3) 세존의 정설

  이때 세존께서 존자 선현에게 말씀하였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선현이여. 나는 미세하면서도 가장 미세하며 심오하면서도 가장 심오하며 통달하기 어려우면서도 가장 통달하기 어려운,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의 승의제에 대해 정등각을 이루었고 정등각을 이루고 나서 다른 이를 위해 설해 주고 현시해서 일깨워 주고 (언어를) 시설하여 비추어 주었다.

  (이하는 세 번째로 세존께서 바로 설하신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찬탄받은 공덕을 나타낸 것이고, 둘째는 징문에 의거해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213)

① 찬탄받은 공덕을 나타냄
이것은 첫 번째로 찬탄받은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그대가 찬탄했던 것처럼,

001_0212_a_01L
當知彼諸長老一切皆懷增上慢爲增
001_0212_a_02L上慢所執持故於勝義諦遍一切一味
001_0212_a_03L不能解了

001_0212_a_04L
釋曰此卽第二重述所念

001_0212_a_05L
是故世尊甚奇乃至世尊善說

001_0212_a_06L
釋曰自下第三讃世尊德於中有三
001_0212_a_07L初略讃善說次擧所讃敎後顯非餘
001_0212_a_08L此卽初也

001_0212_a_09L
謂世尊言勝義諦相微細最微細甚深
001_0212_a_10L最甚深難通達最難通達遍一切一味
001_0212_a_11L

001_0212_a_12L
釋曰此卽第二擧所讃敎微細等文
001_0212_a_13L已如上釋

001_0212_a_14L
世尊此聖敎中脩行苾蒭於勝義諦遍
001_0212_a_15L一切一味相尙難通達況諸外道

001_0212_a_16L
釋曰此卽第三顯非餘境謂諸二乘
001_0212_a_17L及諸外道不能通達遍一味相皆是
001_0212_a_18L此中起增上慢

001_0212_a_19L
爾時世尊告尊者善現曰如是如是
001_0212_a_20L我於微細最微細甚深最甚深難通
001_0212_a_21L達最難通達遍一切一味相勝義諦
001_0212_a_22L正等現覺等覺已爲他宣說顯示開解
001_0212_a_23L施設照了

001_0212_a_24L
釋曰此卽第二 [102] [103] 所讃德如汝所讃

001_0212_b_01L‘미세하면서도……일미의 승의제’를 스스로 깨달았고 남도 깨우쳐 주었다는 것이다.
  또 처음은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우쳐 준 것’을 총괄해서 찬탄한 것이고, 나중은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우쳐 준 것’을 따로따로 찬탄한 것이니, 자타의 깨달음을 찬탄하면서 거듭해서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② 징문에 의거해 자세히 해석함

  어째서인가?

  두 번째는 징문에 의거해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 앞은 징문이고, 뒤는 해석이다.

가. 징문
이것은 징문에 해당한다.

나. 해석

  선현이여, 나는 이미 모든 온들 중에서의 청정한 소연이 바로 승의제라는 것을 현시하였고,

  이것은 자세한 해석이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법法이고, 다음은 비유(喩)이며, 마지막은 결합(合)이다.

가) 법法
법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청정한 소연에 의거해 ‘일미상’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의 “선현이여, 관행을 닦는” 이하는 세 종류 편재(三遍)의 뜻에 의거해 일미상을 밝힌 것이다. 마지막의 “선현이여, 마치 저” 이하는 세 가지 과실을 떠나는 것을 가지고 일미상을 해석한 것이다.

(가) 청정한 소연에 의거해 일미상을 나타냄
처음의 단락에 가면, 앞은 해석이고 나중은 결론이다.

㉮ 해석
해석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청정한 소연에 의거해 승의제를 나타내었고, 나중의 “이 청정한” 이하는 청정한 소연으로 일미상을 나타낸 것이다.

a. 청정한 소연에 의거해 승의제를 나타냄
전자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온蘊에서의 청정한 소연에 의거해 승의제를 나타낸 것이다. 나중은 처處 등의 청정한 소연이 바로 승의제라는 것을 유추한 것이다.

a) 온의 청정한 소연에 의거해 승의제를 나타냄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모든 온”이란 오온이 하나가 아니므로 ‘모든(一切)’이라고 하였다. 혹은 유루·무루 등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이라 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경문의 뜻을 설하자면, 온 등에 있는 승의제를 또한 청정한 소연이라 하니, 이 경계를 소연으로 삼아 마음의 청정함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양성교론』 제1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청정한 소연은 항상 변함이 없으니,

001_0212_b_01L於微細等一味勝義自覺悟他又解
001_0212_b_02L初是總讃能自覺他後是別讃能
001_0212_b_03L自覺他讃自他覺重言如是

001_0212_b_04L
何以故

001_0212_b_05L
釋曰第二依徵廣釋先徵後釋
001_0212_b_06L卽徵也

001_0212_b_07L
善現我已顯示於一切蘊中淸淨所緣
001_0212_b_08L是勝義諦

001_0212_b_09L
釋曰此卽廣釋於中有三初法
001_0212_b_10L後合法中有三初約淸淨所緣
001_0212_b_11L顯一味相次善現脩觀行下約三遍
001_0212_b_12L以辨一味後善現如彼下卽以離
001_0212_b_13L三過釋一味相就初段中先釋
001_0212_b_14L釋中復二初約淸淨所緣顯勝
001_0212_b_15L義諦後此淸淨下以淸淨所緣
001_0212_b_16L一味相前中有二初約蘊上淸淨所
001_0212_b_17L顯勝義諦後類處等淸淨所緣是
001_0212_b_18L勝義諦此則初也一切蘊者五蘊
001_0212_b_19L非一故言一切或可漏無漏等非一
001_0212_b_20L故言一切此意說云於蘊等上有
001_0212_b_21L勝義諦亦名淸淨所緣由緣此境
001_0212_b_22L心淸淨故是故顯揚十六卷云復次
001_0212_b_23L頌曰

001_0212_b_24L
淸淨之所緣常無有變異

001_0212_c_01L선성善性과 낙성樂性을 모두 다 성취했도다.’ 논하여 말한다. 승의제는 동일성·차이성을 떠나 있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청정한 소연성(淸淨所緣性)임을 알아야 한다. 어째서인가? 이 경계를 소연으로 하여 마음의 청정함을 얻기 때문이다.214) 구체적인 설명은 그 논과 같다.
혹은 승의제는 그 자체가 계박을 떠나 있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볼 수도 있다.

  위의 『해심밀경』에서 아직 이 말을 설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나는 이미 나타내었고(我已顯示)”라고 말했는가?
  모든 부의 『반야경』 및 『무량의경』에서 모두 (온 등의 청정한 소연인) ‘진여’를 설하였다.

b) 처 등의 청정한 소연이 승의제임을 유추함

  나는 이미 모든 처·연기·식·제·계·염주·정단·신족·근·역·각지·도지 중의 청정한 소연이 승의제임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두 번째로 십이처 등의 청정한 소연이 바로 승의제라고 유추해서 해석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승의제의 이치는 모든 법에 편재하기 때문이다.

b. 청정한 소연에 의거해 일미상을 나타냄

  이 청정한 소연은 모든 온 중에서 일미상이고 별도의 이상은 없으니,

  이하는 두 번째로 청정한 소연에 의거해 일미상을 나타낸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모든 온에 의거해 일미상을 해석한 것이고, 나중은 십이처 등에 대해 유추해서 일미상임을 해석한 것이다.

a) 모든 온에 의거해 일미상을 해석함
이것은 첫 번째로 온에서의 청정한 소연에 의거해서 일미상을 나타낸 것이다. 모든 온들에서의 청정한 소연에는 별도의 이상異相이 없다. ‘별도의 다름이 없다’는 뜻에서 곧 ‘일미’이기 때문이다.

b) 처 등에 대해 유추해서 일미상임을 해석함

  마치 온에서 (그런 것처럼) 이와 같이 모든 처에서도 내지는 모든 도지에서도 일미상이고 별도의 이상은 없다.

  이것은 두 번째로 처 등의 제법도 일미임을 유추한 것이다.


001_0212_c_01L善性及樂性一切皆成就

001_0212_c_02L
論曰由勝 [104] 諦離一異性故當知卽是
001_0212_c_03L淸淨所緣 [105] 何以故由緣此境得心
001_0212_c_04L淸淨故具說如彼或可勝義卽體離
001_0212_c_05L故名淸淨上經中未說此言
001_0212_c_06L何說言我已顯示解云諸部般若及
001_0212_c_07L無量義中皆說眞如也

001_0212_c_08L
我已顯示於一切處緣起念住
001_0212_c_09L正斷神足覺支道支中淸淨所緣
001_0212_c_10L是勝義諦

001_0212_c_11L
釋曰此卽第二釋類 [106] 處等淸淨所緣
001_0212_c_12L是勝義諦所以者何勝義諦理
001_0212_c_13L諸法故

001_0212_c_14L
此淸淨所緣於一切蘊中是一味相
001_0212_c_15L別異相

001_0212_c_16L
釋曰自下第二約淸淨所緣顯一味
001_0212_c_17L於中有二初約諸蘊釋一味相
001_0212_c_18L後類處等釋一味相此卽第一約蘊
001_0212_c_19L上淸淨所緣顯一味相於諸蘊上淸
001_0212_c_20L淨所緣無別異相無別異義卽一
001_0212_c_21L味故

001_0212_c_22L
如於蘊中如是於一切處中乃至一切
001_0212_c_23L道支中是一味相無別異相

001_0212_c_24L
釋曰此卽第二類處等諸法一味

001_0213_a_01L
㉯ 결론

  그러므로 선현이여, 이런 도리에 따라 승의제는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두 번째로 ‘승의제는 일미상’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말하자면 앞에서 밝힌 온 등의 법에서의 청정한 소연이 승의제상이지 별도의 도리는 없으니, 따라서 승의제상이 곧 모든 것에 편재함을 알 수 있다.

(나) 세 종류 편재의 뜻에 의거해 일미를 밝힘

  선현이여, 관행을 닦는 필추들은 하나의 온의 진여·승의·법무아성을 통달하고 나면, 다시 각기 별도로 그 밖의 온이나 모든 처·연기·식·제·계·염주·정단·신족·근·역·각지·도지의 진여·승의·법무아성을 구하지 않더라도,

  이하는 두 번째로 ‘세 종류 편재(三遍)’의 뜻에 의거해서 ‘일미一味’를 해석한 것이다. ‘세 종류 편재’란 진여와 승의와 법무아를 말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온 등의 법에 편재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일미’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앞은 해석이고 나중은 결론이다.

㉮ 해석
해석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앞은 반해이고, 나중은 순석이다.215)

a. 반해反解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승의제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대반야경』에 의하면 열두 가지 이름이 있으니, 진여眞如, 법계法界, 법성法性, 불허망성不虛妄性, 불변이성不變異性, 평등성平等性, 이생성離生性, 법정法定, 법주法住, 실제實際, 허공계虛空界, 부사의계不思議界다. 이와 같이 나아가 그 밖의 교에서 설한 것들은 다 진술할 수가 없다. 지금 여기서는 우선 세 가지 의미에 의거해 ‘일미’를 해석하겠다.

● 진여眞如
‘진여’라고 한 것은 예를 들어 『성유식론』 제9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眞’이란 ‘진실眞實’을 말하니, 허망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여’는 ‘항상 그러함(如常)’을 말하니, 변화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이 진실은 모든 지위에서 항상 그 성품 그대로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 바로 깊고 고요하여 허망하지 않다는 의미다.”216)

001_0213_a_01L
是故善現由是道理當知勝義諦是遍
001_0213_a_02L一切 [107] 味相

001_0213_a_03L
釋曰此卽第二結勝義諦是一味相
001_0213_a_04L謂由前所明蘊等法中淸淨所緣勝義
001_0213_a_05L諦相無別道理故知勝義諦相卽是
001_0213_a_06L遍一切

001_0213_a_07L
[108] 脩觀行苾蒭通達一蘊眞如勝義
001_0213_a_08L法無我性已更不尋求各別餘蘊諸處
001_0213_a_09L緣起念住正斷神足覺支
001_0213_a_10L道支眞如勝義法無我性

001_0213_a_11L
釋曰自下第二約三遍義以釋一味
001_0213_a_12L言三遍者謂眞如勝義及法無我
001_0213_a_13L三皆遍蘊等法中故說此三名爲一
001_0213_a_14L於中有二先釋後結釋中有二
001_0213_a_15L先反解後順釋此卽初也謂勝義
001_0213_a_16L諦有衆多義依大般若有十二名
001_0213_a_17L眞如法界法性不虛妄性不變異
001_0213_a_18L平等性離生性法定法住
001_0213_a_19L虛空界不思議界如是乃至餘
001_0213_a_20L敎所說不可具述今於此中且約
001_0213_a_21L三義以釋一味言眞如者如成唯識
001_0213_a_22L第九卷云眞謂眞實顯非虛妄如謂
001_0213_a_23L如常表無變異 [109] 謂此眞實於一切位
001_0213_a_24L常如其性故曰眞如卽是湛然不虛

001_0213_b_01L
  이전에는 참된 승의제는 모든 언어를 떠났다고 설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이 논에서는 ‘진여’라고 말하는가?
  이 힐난을 해석하자면, 예를 들어 『성유식론』 제2권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진여도 또한 가짜로 시설된 이름이다. ‘없다’고 부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있음’을 설하고, ‘있다’는 집착을 막기 위해 ‘공’을 설한다. (변계소집과 같이) 허虛하다거나 (의타기와 같이) 환幻이라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실實’이라 설하였고, 이치는 허망한 전도가 아니기 때문에 ‘진여’라고 하였다.”217)

● 승의勝義
‘승의’라고 한 것은, ‘승勝’은 수승한 지혜(勝智)이고 ‘의義’는 경계(境義)를 말하니, 이 진여는 두 종류 수승한 지혜의 소연 경계이기 때문에 승의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양성교론』 제1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 승의제는 바로 원성실자성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 일곱 종류 진여218)를 승의제라고 하는가? 이것은 두 종류 가장 수승한 지혜의 영역(所行)이기 때문이니, (두 종류 지혜란) 출세간지 및 후소득의 세간지를 말한다. 이 승의에는 희론이 없기 때문에 그 밖의 지혜의 경계가 아니다.”219)
그 밖의 별도의 의미는 예를 들어 「이제장二諦章」의 설과 같다.

● 법무아法無我
‘법무아’라고 한 것에 대해 예를 들어 『집론』 제3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어떤 것이 무아상인가? 가령 아론자我論者들에 의해 정립된 아상我相과 같은 것은 온·계·처에는 이런 상이 없으니, 온·계·처에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무아상’이라 한 것이다.”220) 『잡집론』 제8권에서도 이와 동일하게 말한다.

  공과 무아, 두 종류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여러 교설이 같지 않다.
『구사론』에 의하면 네 가지 설이 다르다. 따라서 제26권에서는 “(오온 등의 고과苦果는) 아소견我所見과 어긋나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고 아견我見과 어긋나기 때문에 비아非我라고 한다.”221)고 하였다.222) 또 “그것은 내적으로 사부士夫(ⓢ puruṣa : 자아)를 떠난 것이기 때문에 ‘공’이고,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아’다.”223)라고 하였다.224) 또 “여기에 ‘아’가 없기 때문에 ‘공’이고, 그 자체는 ‘아’가 아니기 때문에 ‘비아’다.”225)라고 하였다.226) 또 아소견을 대치하기 위해 ‘공’의 행상을 닦고, 아견을 대치하기 위해 ‘비아’의 행상을 닦는다고 하였다.227)
『대비바사론』 제79권에도

001_0213_b_01L妄義豈不前說眞勝義諦離諸名
001_0213_b_02L如何於此說名眞如解釋此難
001_0213_b_03L成唯識第二卷說眞如亦是假施設
001_0213_b_04L遮撥爲無故說爲有遮執爲有
001_0213_b_05L故說爲空勿謂虛幻故說爲實
001_0213_b_06L非妄倒故名眞如言勝義者勝謂
001_0213_b_07L勝智義卽境義謂此眞如二種勝
001_0213_b_08L智所緣境義故名勝義是故顯揚第
001_0213_b_09L十六云論曰此勝義諦當知卽是
001_0213_b_10L圓成實 [110] 何因緣故七種眞如
001_0213_b_11L名勝義諦由是二最勝智所行故
001_0213_b_12L謂出世智及後所得世間智由此勝
001_0213_b_13L義無戱論故非餘智境自餘別義
001_0213_b_14L二諦章言法無我者如集論第三說
001_0213_b_15L何等無我相謂如我論者所立我相
001_0213_b_16L蘊界處非此相由蘊界處我相無故
001_0213_b_17L [111] 名無我相雜集第八亦同此說
001_0213_b_18L空與無我二種何別諸敎不同
001_0213_b_19L依俱舍論四說不同故第二十六云
001_0213_b_20L違我所見故空違我見故非我又云
001_0213_b_21L內離士夫故空不自在故非我又云
001_0213_b_22L於此無我故空自非我故非我又云
001_0213_b_23L爲治我所見故脩空行相爲治我見
001_0213_b_24L脩非我行相大毗婆沙第七十九

001_0213_c_01L두 가지 설이 있는데, 『구사론』의 처음 두 가지 해석과 동일하다. 『순정리론』 제74권에서는 “주재主宰가 없기 때문에 ‘공’이고 아상我相과 어긋나기 때문에 ‘비아’다.”228)라고 하였다. 또 “아소견을 대치하기 위해 ‘공’의 행상을 닦고, 아견을 대치하기 위해 ‘비아’의 행상을 닦는다.”229)고 하였다.이것은 『구사론』의 네 번째 해석과 동일하다.230)
『대지도론』 제32권에서는 “실재(實)를 보지 않는 것을 ‘공’이라 하고 ‘아我’를 보지 않는 것을 ‘무아’라고 한다.”231)고 하였다.
『집론』 제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것이 공의 모습인가? 만약 이곳에 이것이 있지 않다면 이 도리에 따라 ‘공空’이라고 바르게 관하고, 만약 이곳에 그 밖의 것이 있다면 이 도리에 따라 ‘있다(有)’고 여실하게 안다면, 이것을 공성空性에 잘 깨달아 들어간다고 한다.……어떤 곳에 무엇이 있지 않다는 것인가? 온·계·처에는 항상 견고하게 머무르면서 변하여 무너지지 않는 ‘법·아·아소’ 등은 있지 않으니, 이 도리에 따라서 그것들은 모두 ‘공’이다. 어떤 곳에 그 밖의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즉 ‘이곳에서의 무아성(此處無我性)’, ‘이 아의 무성(此我無性)’과 ‘무아의 유성(無我有性)’이니, 이것을 ‘공성’이라 일컫는다.232)233)
『성실론』 제15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인경法印經』에서 설한 것처럼, 행자는 색의 무상無常과 공허空虛를 관한다. ‘무상’이란 색의 체성이 무상함을 말하고, ‘공허’란 마치 병 안에 물이 없으면 ‘빈 병’이라 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오온 중에는 신아神我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234)235) 또 「성행품聖行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가지 행이 있으니, 공행空行과 무아행無我行이다. 오음 중에서 중생을 보지 않는 것을 공행이라 하고, 오음도 또한 없다고 보면 무아행이라 한다.”236)

b. 순석順釋

  오직 이 진여·승의·무이에 수순하는 지智를 의지로 삼기 때문에,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의 승의제를 심찰하고 취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로 ‘일미一味’에 대해 순석한 것이다.
이 경문의 해석에서 여러 설이 다르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唯)”과 “이(此)”는 모두 하나의 온(一蘊)을 가리키니, 차전遮詮과 표전表詮이 다르기 때문에 두 자를 말한 것이다. ‘오직’이라 말한 것은 차전으로서 그 밖의 온 등을 배제시킨 것이고, ‘이’라는 것은 표전으로서 ‘이 하나의 온’을 지시한 것이다.237) 이 말의 뜻을 설하자면, 오직 이 하나의 온의 진여와 승의 및 유·무 둘 없는 법무아의 경계에 (수순하는)

001_0213_c_01L亦有兩說同俱舍初二釋順正理論
001_0213_c_02L第七十四云無主宰故空違我相故
001_0213_c_03L非我又云爲治我所見故脩空行相
001_0213_c_04L爲治我見故脩非我行相此同俱舍
論第四釋

001_0213_c_05L智度論第三十二云不見實是名空
001_0213_c_06L不見我是名無我依集論第三云
001_0213_c_07L等空相謂若於是處此非有由此理
001_0213_c_08L正觀爲空若於是處餘是有由此理
001_0213_c_09L如實1) [14] [112] 是名善入空性於何處誰
001_0213_c_10L非有於蘊界處常恒凝住不變壞法
001_0213_c_11L我我所等非有由此理彼皆是空
001_0213_c_12L何處誰餘有卽此處無我性此無我 [113]
001_0213_c_13L無我有性是謂空 [114] 成實論第二 [115] 十五云
如法印經中說
001_0213_c_14L者觀色無常空虛 [116] 無常者謂色體性無常空虛者
如瓶中無水名曰空瓶如是如是 [117] 五蘊中無神我
001_0213_c_15L故名爲空又聖行品云有二行空行無我行
五陰中不見衆生是名空行見五陰亦無是無
001_0213_c_16L我行

001_0213_c_17L
唯卽隨此眞如勝義無二智爲依止故
001_0213_c_18L於遍一切一味相勝義諦審察趣證

001_0213_c_19L
釋曰此卽第二順釋一味釋此文
001_0213_c_20L說不同一云唯此皆是一蘊遮表異
001_0213_c_21L故說二言唯是遮遣遮餘蘊等此者
001_0213_c_22L示此一蘊也此意說云唯此一蘊
001_0213_c_23L眞如勝義及有無無二法無我境
001_0213_c_24L「如」異作「知」

001_0214_a_01L세 종류 무분별지를 의지로 삼기 때문에 후소득지로 저 모든 것의 일미상에 대해 심찰하고 취증하며, 따라서 진여가 바로 일미상임을 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이에 (수순하는) 지”란 ‘인·법 두 가지 무아의 지(人法二無我智)’를 말한다. 나머지는 이전의 설과 같다.≻238)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자는 세 종류 무분별지를 의지로 삼기 때문에 이 지智로써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에 대해 심찰하고 취증한다.239) 나머지는 처음의 설과 같다. 혹은 나머지는 이전의 설과 같다고 할 수도 있다.≻
이상으로 모두 세 가지 설이 있었다.240) 한편에서는 ‘오직’과 ‘이’는 모두 ‘일미의 진여’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에 또한 세 가지 해석이 있으니 앞의 것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 한편에서는 ‘오직’은 ‘하나의 온’을 말하고 ‘이’는 진여를 말한다고 하는데, 이에 또한 세 가지 해석이 있으니 앞의 것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이상으로 모두 아홉 가지 해석이 있다. 혹은 ‘오직’이란 진여를 말하고 ‘이’는 하나의 온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이에 또한 세 가지 해석이 있으니 앞의 것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
비록 이런 해석들이 있기는 해도 문장의 표현이 간편하지 않다. 그 뜻을 총괄해서 해석하자면, 앞 문장은 ‘그 밖의 법의 승의를 구하는 경우’를 차단한 것이므로 ‘반해反解’라고 하였고, 이 문장은 ‘오직 하나의 온의 승의를 구하는 경우’를 성립시킨 것이므로 ‘순석順釋’이라 한 것이다.
진제 삼장은 두 단락의 경문을 해석하면서, 앞 문장은 ‘세 가지 경계(진여·승의·무이)에 통달하는 것’에 대해 해석한 것이고, 뒤 문장은 ‘심찰과 취증’을 해석한 것이라고 하였다.
(진여·승의·무이라는) 이 세 가지의 차별은, 소승에 의하면 세 가지 무루근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견도위와 수도위와 무학위가 차별되기 때문이다.241) 이제 대승에 의하면, 지地마다 모두 들어가고(入) 머물고(住) 나오는(出) 단계가 있는데, 그 차례대로 배당시킨 것임을 알아야 한다.

㉯ 결론

  그러므로 선현이여, 이런 도리에 따라 승의제는 바로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두 번째로 결론지은 문장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 세 가지 과실을 떠난다는 점에서 일미상을 해석함

  선현이여, 마치 저 모든 온의 전전이상展轉異相242)처럼, 마치 저 모든 처·연기·식·제·계·염주·정단·신족·근·역·각지·도지의 전전이상처럼,


001_0214_a_01L種無分別智爲依止故後所得智
001_0214_a_02L彼一切一味相審察趣證故知眞如
001_0214_a_03L是一味相一云無二智者人法二無
001_0214_a_04L我智餘如前說一云行者以三種無
001_0214_a_05L分別智爲依止故卽用此智於遍一
001_0214_a_06L切一味相中審察趣證餘如初說
001_0214_a_07L可餘如前說上來總有三說一云
001_0214_a_08L此皆是一味眞如亦有三釋准上應
001_0214_a_09L一云唯謂一蘊此卽眞如亦有三
001_0214_a_10L准上應知如是上來總有九釋
001_0214_a_11L可唯是眞如此卽一蘊亦有三釋
001_0214_a_12L上應知雖有此釋文辭不便總釋
001_0214_a_13L意云前文遮求餘法勝義故名反解
001_0214_a_14L此文成立唯求一蘊故名順釋眞諦
001_0214_a_15L三藏釋兩段經云前文釋通達三境
001_0214_a_16L後文釋審察趣證此三別者若依小
001_0214_a_17L三無漏根有差別故此卽見脩無
001_0214_a_18L學位差別故今依大乘地地皆有入
001_0214_a_19L住出分如其次第配屬應知

001_0214_a_20L
是故善現由此道理當知勝義諦是遍
001_0214_a_21L一切一味相

001_0214_a_22L
釋曰此卽第二結文可知

001_0214_a_23L
[118] 如彼諸蘊展轉異相如彼法 [119]
001_0214_a_24L念住正斷神足覺支道支

001_0214_b_01L
  이하는 세 번째로 세 가지 과실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일미상을 해석한 것이다. 곧 진여 등은 ‘인因이 있다’는 등의 세 종류 과실을 벗어나기 때문에 ‘일미’를 성립시킨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앞은 해석이고 나중은 결론이다.

㉮ 해석
해석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온 등의 전전이상에 대해 밝힌 것이고, 나중은 진여에는 별개의 이상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a. 온 등의 전전이상을 밝힘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경문에 두 개의 절이 있다. 처음은 모든 온의 전전이상을 밝힌 것이고, 나중의 “마치 저” 이하는 처處 등의 전전이상을 유추해서 밝힌 것이다.
이 온 등의 상相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승의제가 마치 온 등과 같다면) 세 가지 과실이 있게 된다.243) 첫째는 인因이 있으니, 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유위有爲가 되니, 상에 의해 변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승의가 아니므로 마땅히 다시 추구해야 할 것이니, 궁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b. 진여에 별개의 이상이 없음을 나타냄

  만약 일체법의 진여·승의·법무아성에도 이상異相이 있다면, 이는 진여·승의·법무아성에도 마땅히 인因이 있어서 인에서 생겨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인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마땅히 이는 유위일 것이다. 만약 이것이 유위라면, 마땅히 승의제가 아닐 것이다. 만약 승의제가 아니라면, 마땅히 다시 그 밖의 승의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하는 두 번째로 승의제는 별개의 이상異相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승의제에 세 가지 과실이 있음’을 반현返顯한 것이고,244) 나중의 “선현이여” 이하는 ‘승의제는 세 가지 과실을 떠난다’고 순석順釋한 것이다.

a) 승의제에 세 가지 과실이 있음을 반현返顯함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경문에 두 개의 절이 있다. 처음에는 ‘이상異相’을 표제로 내걸었고, 나중에는 세 가지 과실을 나타내었다.
세 가지 과실이란 앞에서 이미 설했던 것과 같다. 혹은 다섯 가지 과실이라 할 수도 있다. 첫째는 인因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인에서 생긴 것이며, 셋째는 유위여야 하고, 넷째는 승의가 아니며, 다섯째는 (그 밖의) 승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문에 준해 보면, 대원경지大圓鏡智245) 등도 ‘인’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유위에 속하고 승의제가 아니게 된다.

001_0214_b_01L展轉異相

001_0214_b_02L
釋曰此下第三以離三過釋一味相
001_0214_b_03L卽眞如等離有因等三種過失故成
001_0214_b_04L一味於中有二先釋後結釋中有
001_0214_b_05L初明蘊等展轉異相後辨眞如無
001_0214_b_06L別異相此卽初也文有二節初明
001_0214_b_07L諸蘊展轉異相後如彼下類處等展
001_0214_b_08L轉相異 [120] 由此蘊等相別異故有三過
001_0214_b_09L一者有因因所生故二者有爲
001_0214_b_10L相所遷故三非勝義應更尋求非究
001_0214_b_11L竟故

001_0214_b_12L
若一切法眞如勝義法無我性亦異相者
001_0214_b_13L是卽眞如勝義法無我性亦應有因
001_0214_b_14L因所生若從因生應是有爲若是有
001_0214_b_15L應非勝義若非勝義應更尋求餘
001_0214_b_16L勝義諦

001_0214_b_17L
釋曰此下第二顯勝義諦無別異相
001_0214_b_18L於中有二初返顯勝義有三過失
001_0214_b_19L善現下順釋勝義離三過失此卽初
001_0214_b_20L文有二節初牒異相後顯三失
001_0214_b_21L言三失者如前已說或可五失一應
001_0214_b_22L有因二從因生三應有爲四非勝
001_0214_b_23L五應求勝卽准此文圓鏡智等
001_0214_b_24L從因生故是有爲攝非勝義諦故親

001_0214_c_01L따라서 친광親光 등은 수용신受用身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무상하니,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한다’고 한결같이 대답해야 하기(一向記)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것은 영원하다’고 설한다.≻246)문장을 조사해 보라. 이와 같은 의미는 제5권에서 자세히 분별할 것이다.

b) 승의제는 세 가지 과실을 떠남을 순석順釋함

  선현이여, 이에 따르면 진여·승의·법무아성은 인因이 있다고 하지 않고, 인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또한 유위도 아니고, 바로 승의제이니, 이 승의제를 얻으면 다시 그 밖의 승의제를 찾지 않는다.

  이하는 두 번째로 승의제가 세 가지 과실을 떠남을 순석順釋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승의제는 세 가지 과실을 떠남’을 바로 순석한 것이고, 나중의 “오직(唯有)” 이하는 (바른) 도리로 거듭 성립시킨 것이다.

(a) 바로 해석함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승의제에) 별개의 이상異相이 있다면 세 종류 과실이 있게 되니, 따라서 승의제는 오직 일미이고 세 종류 과실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b) 도리로 거듭 성립시킴

  오직 상상시常常時에 항항시恒恒時에 여래께서 세상에 나시든 나시지 아니하든 제법의 법성이자 안립법계로서 안주하는 것이다.247)

  이것은 두 번째로 (바른) 도리로 거듭 성립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저 승의의 일미진여는 오직 언제 어느 때나 여래가 세상에 나시든 나시지 아니하든 일체 제법의 법성이고 안립법계로서 안주하는 것이니, 다시 변이된 갖가지 이상異相들이 없다는 것이다.
『해절경』에서는 단지 “항상恒常……법성法性·법계法界·법주法住로서 (모두 상주한다.)”248)고 하였고, 진제 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도 이전(道前)의 단계에서는 이전부터 본래 있는 것이므로 “항恒”이라 하였으니,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고서야 비로소 있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 중간(道中)과 도 이후(道後)의 지위에서는 이 이치가 사라지지 않으므로 “상常”이라 하였으니,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후에도 이치는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법성”이란 바로 ‘자성주불성自性住佛性’이다. 도 이전의 지위에서 보면 (그것이) 보리를 이루기 위한 근본이 될 수 있으니, 중생이 이로 말미암아 발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계”란 ‘인출불성引出佛性’이다. 도 중간의 지위에서 보면

001_0214_c_01L光等釋受用身卽是無常生者必滅
001_0214_c_02L一向記故有說是常勘文如是等義
001_0214_c_03L第五卷中當廣分別

001_0214_c_04L
善現由此眞如勝義法無我性不名有
001_0214_c_05L非因所生亦非有爲是勝義諦得此
001_0214_c_06L勝義更不尋求餘勝義諦

001_0214_c_07L
釋曰自下第二順釋勝義離三過失
001_0214_c_08L於中有二初正釋勝義離三過後唯
001_0214_c_09L有下以理重成此卽初也謂若別異
001_0214_c_10L有三失故故知勝義唯是一味離三
001_0214_c_11L種失

001_0214_c_12L
唯有常常時恒恒時如來出世若不
001_0214_c_13L出世諸法法性安立法界安住

001_0214_c_14L
釋曰此卽第二以理重成謂彼勝義
001_0214_c_15L一味眞如唯常恒時如來出世
001_0214_c_16L不出世一切諸法法性安立法界安
001_0214_c_17L更無變異種種異相依解節經
001_0214_c_18L說恒常乃至法性法界法住眞諦解
001_0214_c_19L於道前位中先來本有故名爲
001_0214_c_20L非佛出世方始有故道中後位
001_0214_c_21L理無滅故稱爲常佛出世後理無盡
001_0214_c_22L法性者卽自性住佛性約道前
001_0214_c_23L能爲菩提以作根本衆生由此得
001_0214_c_24L發心故法界者卽引出佛性約道

001_0215_a_01L계界를 제행의 근본이라 이름하니, (이로 말미암아) 만행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법주”란 ‘지득과불성至得果佛性’이다. 도 이후의 지위에서 보면, 열반에 이르기까지 법체가 상주하기 때문이다.≻249)
지금 이 판본(현장 역 『해심밀경』)에서는 “상상시常常時에 항항시恒恒時에”라고 하였다.
  일미진여는, 본래부터 지금까지 이전의 때(前時)도 하나가 아니므로 ‘상상시’라고 하였고 이후의 때(後時)도 하나가 아니므로 ‘항항시’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시간 속에서 제법의 법성이자 안립법계로서 안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성안립법계안주法性安立法界安住’에는 본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다른 두 판본(『해절경』과 『심밀해탈경』)에 준해 보면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제법법성諸法法性이고, 둘째는 안립법계安立法界이며, 셋째는 안립안주安立安住이다.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4권에 준해 보면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제법의 ‘법성안립’이다. 둘째는 ‘법계안주’인데, 안주란 안립의 다른 이름이다.250)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세 가지로 나뉘니, 법성과 법계와 법주法住이다. 안주가 곧 법성이기 때문에 제1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연기는 무시이래로 도리가 성취된 성질(理成就性)이니, 이를 ‘법성’이라 이름한다. 성취된 성질 그대로 전도 없는 문구로 안립되니, 이를 ‘법주’라고 이름한다. 이 법주는 저 법성을 인因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을 ‘법계’라고 이름한다.”251)
  『유가사지론』에서는 저 ‘연기’를 들어 저 이성理性을 나타낸 것이다. 혹은 그 논에서는 ‘연기’를 설하면서 이 세 구를 둔 것이지, 저 이성을 나타낸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 구를 해석하는 데 있어 그 이치는 다름이 없다.

㉯ 결론

  그러므로 선현이여, 이런 도리에 따라 승의제는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두 번째로 결론지은 문장임을 알아야 한다.

나) 비유(喩)

  선현이여, 비유하면 갖가지 하나 아닌 품류의 이상異相의 색 안에서

001_0215_a_01L中位界名爲諸行根本引出萬行故
001_0215_a_02L法住者卽至得果佛性約道後位
001_0215_a_03L涅槃法體常住故今依此本云常常
001_0215_a_04L時恒恒時者解云一味眞如從本
001_0215_a_05L已來前時非一名常常時後時非一
001_0215_a_06L名恒恒時於如是時諸法法性安立
001_0215_a_07L法界安住然此法性安立法界安住
001_0215_a_08L自有二義准餘二本分爲三種
001_0215_a_09L諸法法性二安立法界三安立安住
001_0215_a_10L若准無性攝論第四分爲二種一諸
001_0215_a_11L法法性安立二法界安住安住卽是
001_0215_a_12L安立異名若依瑜伽分爲三種
001_0215_a_13L法性法界法住安住卽是法性故
001_0215_a_14L十卷云是諸緣起無始時來理成
001_0215_a_15L就性是名法性如成就性以無顚
001_0215_a_16L倒文句安立是名法住由此法住
001_0215_a_17L彼法性爲因是故說彼名爲法界
001_0215_a_18L瑜伽擧彼緣起顯彼理性或可
001_0215_a_19L彼論卽說緣起有此三句非顯彼性
001_0215_a_20L然釋三句其理無別

001_0215_a_21L
是故善現由此道理當知勝義諦是遍
001_0215_a_22L一切一味相

001_0215_a_23L
釋曰是第二結文應知

001_0215_a_24L
善現譬如種種非一品類異相色中

001_0215_b_01L허공은 상도 없고 분별도 없으며 변이도 없이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인 것처럼,

  두 번째는 비유를 들어 거듭 설한 것이다.
“갖가지 하나 아닌 품류”라고 했는데, 색온을 일반적으로 논하면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사대四大 및 소조所造의 상이다.252) 둘째는 유견유대有見有對와 무견유대無見有對와 무견무대無見無對라는 세 구의 차별적 상이다.253) 셋째는 변괴變壞의 상이니, 말하자면 앞의 두 종류는 모두 변하여 무너짐이 있기 때문에 변괴의 상이라 한다. 이 세 가지를 갖추기 때문에 ‘갖가지 하나 아닌 품류’라고 하였고, 혹은 ‘이상異相’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허공 중에는 능조能造·소조所造254)의 상이 없기 때문에 ‘모습이 없다(無相)’고 하였다. 유견유대의 색 등의 갖가지 차별이 없기 때문에 ‘분별이 없다(無分別)’고 하였는데, 분별이란 바로 ‘차별’의 다른 이름이다. 『해절경』에서 ‘차별이 없다(無差別)’고 하였기 때문이다.255) 또한 ‘변괴가 없다(無變壞)’는 것을 ‘변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의미를 갖추므로 ‘일미상’이라 한 것이다.

다) 결합

  이와 같이 이성異性과 이상異相의 모든 법들 안에서 승의제가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이라는 것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세 번째는 법동유法同喩256)를 든 것이다.
“이성異性과 이상異相”이란 자상自相과 차별差別을 말한다.257) 따라서 『심밀해탈경』에서는 ‘자상과 차별’이라고 하였다.258)
이 경문의 뜻을 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법들은 다 두 가지 상을 갖고 있으니, 첫째는 자성(자상)이고 둘째는 차별이다. 그런데 승의제 중에서는 일체법의 자상과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일미’라고 한다.≻
따라서 『불지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유하면 허공은 비록 모든 색의 갖가지 상 가운데 편재하지만 (허공에) 갖가지 상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고 체는 오직 일미인 것처럼,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는 비록 다시 갖가지 상의 품류의 알아야 할 경계(所知境界)에 편재하지만 (청정법계에) 갖가지 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체는 오직 일미다.”259) 『불지경론』 제5권에서는, 의타기성은 똑같이 진여인 원성실성에 돌아가기 때문에 ‘일미’라고 하였고,

001_0215_b_01L空無相無 [121] 別無變異遍一切一味相

001_0215_b_02L
釋曰第二擧喩重說言種種非一品
001_0215_b_03L類者凡論色蘊有其三種一者四
001_0215_b_04L大及所造相二者有見有對無見有
001_0215_b_05L無見無對三句差別之相三者
001_0215_b_06L變壞謂前二種皆有變壞名變壞相
001_0215_b_07L具此三種故言種種非一品類或云
001_0215_b_08L異相也然虛空中無能所造相
001_0215_b_09L名無相無有有見有對色等種種差
001_0215_b_10L別故名無分別分別卽是差別異名
001_0215_b_11L解節經云無差別故亦無變壞名無
001_0215_b_12L變異具此三義名一味相

001_0215_b_13L
如是異性異相一切法中勝義諦遍一
001_0215_b_14L切一味相當知亦爾 [122]

001_0215_b_15L
釋曰第三擧法同喩言異性相者
001_0215_b_16L自相差別故深密云自相差別此意
001_0215_b_17L說云一切諸法皆有二相一者自性
001_0215_b_18L二者差別而勝義中無一切法自相
001_0215_b_19L差別故名一味故佛地經云譬如
001_0215_b_20L虗空雖遍諸色種種相中而不可說
001_0215_b_21L有種種相體唯一味如是如來淸
001_0215_b_22L淨法界雖復遍至種種相類所知境
001_0215_b_23L而不可說有種種相體唯一味
001_0215_b_24L地論第五依他起性同皈眞如圓成

001_0215_c_01L또 변계소집의 무無에 의해 현현된 진여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일미’라고 하였다.260)

2) 게송으로 간략히 설함

  이때 세존께서 이러한 의미를 거듭 펼치시기 위해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하는 두 번째로 게송으로 간략히 설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송문을 발기한 것이고, 나중은 게송으로 간략히 설한 것이다.

(1) 송문을 발기함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2) 게송으로 간략히 설함
 
此遍一切一味相    이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의
勝義諸佛說無異    승의제를 제불께서는 다름없이 설하시니261)
若有於中異分別    이에 대해 다름을 분별하는 자 있다면
彼定愚癡依上慢    그는 정녕 우치하여 증상만에 의지한 자로다

  이하는 두 번째로 게송으로 간략히 설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 나온 반 송은 부처님들이 똑같이 설하셨음을 들어서 ‘일미상’을 찬탄한 것이다. 뒤의 두 구는 어리석은 이는 ‘다르다’고 집착함을 밝힘으로써 이치의 심오함을 나타낸 것이다.
전자 중에서 상구上句는 일미상이 모든 온 등에 편재함을 읊은 것이고, 하구下句는 그 승의제를 제불께서 똑같이 설하셨음을 밝힌 것이다. 혹은 “승의제를 제불께서는 다름없이 설하시니”라고 했는데, ‘다름없음(無異)’이 바로 ‘일미’의 뜻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다. 다음의 반 송 중에서, 앞의 구는 ‘다르다’는 계탁을 밝힌 것이고, 뒤의 구는 계탁의 소의所依(증상만)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게송에는, 『해절경』에 따르면, 다시 한 개의 게송 및 봉지奉持에 해당하는 장행이 덧붙어 있는데,262) 이는 정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이유는 당본唐本과 『심밀해탈경』에는 모두 (『해절경』에 덧붙은) 뒤의 게송과 뒤의 봉지가 없기 때문이다.
진제 스님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뒤 문구는 유통분으로 가야지 이 품 안에 둘 것은 아니다. 이는 최후의 유통분에 포함되는데 여기에 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전서前序도 또한 그러하니, 경의 전서를 베껴서 첫 번째 품에 둔 것이다.≻263)
지금 이 진제의 해석을 판별해 보면, 또한 경문과 맞지 않는다. 경의 끝부분의 봉지분에서는 ‘만수실리’가 최후이기 때문이다.264)
『심밀해탈경』의 게송에서는 “여래께서는 마땅히 일체가 일미상이고 제일의제를 떠나지 않는다고 설하시니 다르다고 본다면 이는 교만이로다.”265)라고 하였다. 『해절경』에는 두 개의 송이 있다. “법의 공통된 모습인 일미를 모든 부처님들이 평등하게 설하시니, 이 중에 다름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이 사람은 증상만을 가진 이로다. 생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도道는 미세하고 심오하여 통찰하기 힘드니, 욕망에 물들고 우치에 덮여서 범인들은 획득할 수 없다네.”266)

001_0215_c_01L實性故名一味又遍計所執 [123] 所顯眞
001_0215_c_02L如無差別故名爲一味

001_0215_c_03L[後以頌略說]
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頌曰

001_0215_c_04L
釋曰自下第二擧頌略說於中有二
001_0215_c_05L初發起頌文後擧頌略說此卽初
001_0215_c_06L

001_0215_c_07L
此遍一切一味相勝義諸佛說無異
001_0215_c_08L有於中異分別彼定愚癡依上慢

001_0215_c_09L
釋曰自下第二以頌略說於中有二
001_0215_c_10L初有半頌擧佛同說讃一味相後二
001_0215_c_11L辨愚異執顯理甚深前中上句
001_0215_c_12L一味相遍諸蘊等下句明其勝義諸
001_0215_c_13L佛同說或可勝義諸佛說無異者
001_0215_c_14L異卽是一味義也下半頌中前句辨
001_0215_c_15L異計後句計所依然此頌中依解
001_0215_c_16L節經更有一頌及奉持長行應非正
001_0215_c_17L所以爾者唐本深密皆無後頌又 [124]
001_0215_c_18L後奉持眞諦自云後去流通非此
001_0215_c_19L品內乃是攝最後流通文安此未了
001_0215_c_20L前序亦然抄經前序安第一品也
001_0215_c_21L判此釋亦不順經經末奉持曼殊
001_0215_c_22L室利以爲後故深密頌云如來應說法 [125] 見別
是憍慢解節經有其二頌
001_0215_c_23L通相一味 [126] 一切一味相不離第一義 [127] 是人增上
逆生死流通 [128] 微細深難見諸佛說平等若於
001_0215_c_24L中執異 [129] 欲染癡覆
凡夫 [130] 不能得

001_0215_c_25L

001_0216_a_01L
해심밀경소 제3 심의식상품(解深密經疏 心意識相品第三)
이 품을 해석하면 대략 두 가지 내용이 있다. 첫째는 품의 이름을 해석한 것이고, 둘째는 경문을 바로 해석한 것이다.
제1장 품의 이름을 해석함
“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이라 한 것에서, ‘심의식’이라는 이름은 통명通名이 있고 별명別名이 있다. 예를 들면 『성유식론』 제5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가범은 경전 곳곳에서 심·의·식의 세 가지 개별적 의미를 설하였다. 집기集起하는 것을 심이라 하고, 사량思量하는 것을 의라고 하며, 요별了別하는 것을 식이라 하니, 이것이 세 가지 개별적 의미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의미는 여덟 가지 식에 공통되지만 뛰어나게 두드러진 점을 따라서 말하면, 제8식을 ‘심心’이라 하니, 제법의 종자를 적집하여 제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제7식을 ‘의意’라고 하니, 장식藏識(제8식) 등을 소연으로 삼아 항상 깊이 사량하면서 ‘나(我)’ 따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밖의 여섯 가지 식을 ‘식識’이라 하니, 여섯 가지 개별적 경계에서 거칠게 움직이고 중간에 끊기기도 하면서 요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267) ‘상’이란 체상體相 혹은 상상相狀을 말한다. ‘품’의 의미는 이전에 설명한 것과 같다.
비록 두 가지 문이 있지만 이 품은 통명의 세 가지 의미를 밝히는 것을 종지로 삼은 것이고, 이 중에서 뛰어난 점에 의거해 제8식을 설한 것이다.268) 혹은 이 품에서 별명의 세 가지 의미를 밝혔다고 할 수도 있다. 비록 두 가지 해석이 있지만 앞의 설이 뛰어나다. (전자의 의미에 따르기) 때문에 제목을 ‘심의식상품’이라고 한 것이다.
제2장 경문을 바로 해석함

  이때 광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가령 세존께서는 심의식의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에 대해 설하셨는데,

  관찰되는 경계(所觀境)에 가면 본래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승의제이고, 둘째는 세속제이다. 이상으로 승의제에 대한 해석을 끝냈고, 이하부터는 두 번째로 세속제를 설명한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장행으로 자세히 해석한 것이고, 나중은 게송으로 간략히 설한 것이다.
1. 장행으로 자세히 해석함
전자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앞은 질문이고, 뒤는 대답이다.

1) 질문
질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질문하려는 교를 든 것이고, 나중은 교에 의거해 질문한 것이다.

(1) 질문하려는 교를 듦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광혜보살廣慧菩薩”이란 혜慧를 따라서 이름을 세운 것이다. 진제의 『기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광혜는 부처님의 설법을 대면해서 들은 사람이다.

001_0216_a_01L解深密經心意識相品第三

001_0216_a_02L
將釋此品略有二義一釋品名
001_0216_a_03L正釋文
[一釋品名]
言心意識相品者心意識名
001_0216_a_04L有通有別如成唯識第五卷云謂薄
001_0216_a_05L伽梵處處經中說心意識三種別義
001_0216_a_06L集起名心思量名意了別名識
001_0216_a_07L三別義如是三義雖通八識而隨
001_0216_a_08L勝顯第八名心集諸法種起諸法
001_0216_a_09L第七名意緣第八 [131] [132] 恒審思量
001_0216_a_10L爲我等故餘六名識於六別境
001_0216_a_11L動間斷了別轉故相謂體相或是
001_0216_a_12L相狀品義如前雖有二門此品宗
001_0216_a_13L明通名三義於中就勝故說第八
001_0216_a_14L可此中別名三義雖有兩釋前說爲
001_0216_a_15L是故題云心意識相品

001_0216_a_16L[二正釋文]
爾時廣慧菩薩摩訶薩白佛言世尊
001_0216_a_17L世尊說於心意識秘密善巧菩薩

001_0216_a_18L
釋曰就所觀境自有二種一者勝
001_0216_a_19L二者世俗上來已釋勝義諦訖
001_0216_a_20L下第二辨世俗諦於中有二初長行
001_0216_a_21L廣釋後以頌略說
[初長行廣釋]
前中有二先問
001_0216_a_22L後答
中有二初擧所問敎後依
001_0216_a_23L敎發問此卽初也言廣慧菩薩者
001_0216_a_24L從慧立名眞諦記云廣慧對佛說法

001_0216_b_01L모든 보살들은 이 ‘광대한 지혜(廣慧)’라는 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지만, 단지 이 보살만 광대한 지혜의 법문을 따라서 이름을 세웠다.≻
『불지경론』에서는 “깊고 넓고 원만하게 잘 통달하기 때문에 광혜라고 이름한다.”269)고 하였고, 『대지도론』에서는 도속道俗의 갖가지 경서의 논의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광혜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270) 『유가사지론』에서는 “말하자면 이 지혜의 한량없고 끝없는 소행所行271)의 경계 때문에”272) 광혜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273)
세존께서 설하신 심의식의 비밀스런 의미를 여실하게 잘 알므로 “선교보살”이라 이름한다.274)

(2) 교에 의거해 질문함

  ‘심의식의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란, 어느 정도 되어야 심의식의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라 합니까? 여래께서는 어느 정도 되어야 그를 심의식의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라고 시설하십니까?” 이와 같이 말하고 나자,

  이것은 두 번째로 교설에 의거해 질문한 것이다. 경문에 두 개의 구절이 있다. 처음은 질문하려는 교를 표제로 내건 것이고, 나중의 “어느 정도 되어야” 이하는 묻는 말을 바로 진술한 것이다.
질문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275) 처음에 “어느 정도 되어야 심의식의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라 합니까.”라고 한 것은 보살의 지위를 물은 것이니, 즉 교에 의해 설해진 대상에 해당한다. 나중의 “여래께서는 어느 정도 되어야 그를 심의식의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라고 시설하십니까.”라고 한 것은 여래께서 어떤 보살에 의거해서 그런 교를 시설하셨는지를 물은 것이다. ‘시설’은 ‘선설宣說’의 뜻이다.

2) 대답

  이때 세존께서 광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이하는 두 번째로 질문에 의거해 바로 대답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질문을 칭찬하면서 설법을 허락하신 것이다. 나중의 “광혜여, 마땅히 알라.” 이하는 질문에 대해 바로 대답한 것이다.


001_0216_b_01L之人一切菩薩無不具此廣慧之德
001_0216_b_02L但此1) [15] [133] 從廣慧法門立名佛地論云
001_0216_b_03L深廣圓滿善通達故名爲廣慧智度
001_0216_b_04L論云道俗種種經書論議無不悉知
001_0216_b_05L名爲廣慧瑜伽論云謂卽此慧無量
001_0216_b_06L無邊所行境故名爲廣慧謂世尊說
001_0216_b_07L於心意識秘密義中如實了知名善
001_0216_b_08L巧菩薩

001_0216_b_09L
於心意識秘密善巧菩薩者齊何名爲
001_0216_b_10L於心意識秘密善巧菩薩如來齊何施
001_0216_b_11L設彼爲於心意識秘密善巧菩薩說是
001_0216_b_12L語已

001_0216_b_13L
釋曰此卽第二依敎發問文有二節
001_0216_b_14L初牒所問敎後齊何下正設問辭
001_0216_b_15L有二意初齊何名爲於心意識秘密
001_0216_b_16L善巧菩薩者問菩薩位卽是敎所說
001_0216_b_17L後如來齊何施設彼爲於心意識
001_0216_b_18L秘密善巧菩薩者問如來依何菩薩
001_0216_b_19L2)施設彼敎 [16] 施設彼敎施設卽是宣
001_0216_b_20L說之義

001_0216_b_21L[答]
爾時世尊告廣慧菩薩摩訶薩曰善哉
001_0216_b_22L善哉

001_0216_b_23L
釋曰此下第二依問正答於中有二
001_0216_b_24L初讃問許說後廣慧當知下對問正

001_0216_c_01L
(1) 질문을 칭찬하며 설법을 허락함
전자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그가 질문한 것을 칭찬하였고, 나중에는 잘 들으라고 하면서 설법을 허락하였다.

① 그가 질문한 것을 칭찬함
전자에도 두 가지가 있다. 앞은 총괄적으로 칭찬한 것이고, 뒤는 따로따로 칭찬한 것이다.

가. 총괄적 칭찬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질문의 심오한 의미는 유익한 데다가 또 광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해서 “훌륭하다,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십지경론』에서는 “‘훌륭하다’는 것은 설해진 교법에 훌륭한 점(善)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276)라고 하였다. 『유가사지론』 제83권에서는 “‘훌륭하다’고 한 것은 모든 현성들이 칭찬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277)라고 하였고, 제98권에서도 똑같이 말한다. 『대지도론』 제41권에 따르면, ‘훌륭하다, 훌륭하다’고 한 것은 덕의 장점을 칭찬하신 것이다.278) 또 『대지도론』 제66권에 따르면, 말이란 반드시 믿을 만해야 하는데, 부처님께 질문하여 대중들의 의심을 끊어 주고 큰 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한 것이다.279) 『무상의경』 제1권에서는 “내게 만약 번뇌가 있어도 더럽히거나 달라붙지 못한다면 이것을 ‘훌륭하다’고 한다.”280)고 하였다.

나. 개별적 칭찬

  광혜여, 그대는 이제 여래에게 이와 같은 심오한 의미를 청하여 물을 수 있으니,

  이하는 따로따로 칭찬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승의勝義에 대해 물은 것을 칭찬한 것이고, 나중은 질문의 유익함을 칭찬한 것이다.

가) 승의에 대해 물은 것을 칭찬함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나) 질문의 유익함을 칭찬함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려고, 세간 및 모든 천·인·아소락 등을 가엾게 여겨 이익(義利)과 안락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하였다.

  이하는 두 번째로 질문의 유익함을 칭찬한 것이다. 경문에는 두 개의 구절이 있다. 처음은 전체적 이익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세간 및……) 가엾게 여겨” 이하는 개별적 이익을 밝힌 것이다.
“이익과 안락”이라 한 것은, 예를 들어 『불지경론』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의 이익을 ‘낙樂’이라 하고 미래의 이익을 ‘이利’라고 한다. 세간적인 것은 ‘낙’이라 하고 출세간적인 것은 ‘이’라고 한다. 악을 떠난 것을 ‘낙’이라 하고 선을 거두는 것을 ‘이’라고 한다. 복덕을 ‘낙’이라 하고 지혜를 ‘이’라고 한다.≻281)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7권에도 일곱 가지로 대비시킨 것이 있는데,

001_0216_c_01L前中有二初讃其所問後勅聽許
001_0216_c_02L前中有二先總後別此卽初也
001_0216_c_03L所問深義能益復廣是故重讃善哉
001_0216_c_04L善哉十地論第一云善哉者所說法
001_0216_c_05L中善具足故瑜伽八十三云 [134] 哉者
001_0216_c_06L是諸賢聖 [135] 所稱讃 [136] 九十八亦同
001_0216_c_07L智度論四十一云善哉善哉者讃德
001_0216_c_08L之美也又智度論六十六云言必可
001_0216_c_09L能問於佛斷大衆疑能大利益
001_0216_c_10L言善哉無上依經第一卷云 [137] 有煩
001_0216_c_11L惱不能染著是名善哉

001_0216_c_12L
廣慧汝今乃能請問如來如是深義

001_0216_c_13L
釋曰自下別讃於中有二初讃問
001_0216_c_14L勝義後讃問有益此卽初也

001_0216_c_15L
汝今爲欲利益安樂無量衆生哀愍世
001_0216_c_16L間及諸天人阿素落 [138] 爲令獲得義利
001_0216_c_17L安樂故發斯問

001_0216_c_18L
釋曰自下第二讃問有益文有兩節
001_0216_c_19L初明總益後哀愍下明別利益言利
001_0216_c_20L益安樂者如佛地論第一卷云現益
001_0216_c_21L名樂當益名利世間名樂出世名
001_0216_c_22L離惡名樂攝善名利福德名樂
001_0216_c_23L智慧名利無性攝論第七亦有七對
001_0216_c_24L「中」異作「菩薩」「施設彼敎」疑剩

001_0217_a_01L『불지경론』 제1권과 거의 동일하다.
『불지경론』 제7권에는 다섯 가지로 대비시킨 것이 있으니,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청정한 법계 및 네 가지 오묘한 지혜282)로 모든 중생들의 이익과 안락을 모두 안립할 수 있다. 선한 인(善因)을 닦도록 하는 것을 이익이라 하고, 즐거운 과(樂果)를 얻도록 하는 것을 안락이라 한다. 또 악을 떠나도록 하는 것을 이익이라 하고, 그 선을 거두게 하는 것을 안락이라 한다. 또 그에게 고를 뽑아내 주는 것을 이익이라 하고, 그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것을 안락이라 한다. 이번 세世와 다른 세, 세간과 출세간 등에서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283)284)
  이익과 안락은 제1권에서 설한 것과는 서로 어긋남을 알아야 한다.285)
“(세간 및……) 가엾게 여겨” 등이라 한 것은 그 이익을 밝힌 것이니, 이에 본래 두 가지가 있다. ‘세간世間’이란 오온의 세간으로서 ‘사람을 이루는 법’을 말하고, ‘인人·천天’ 등이란 오온으로 이루어진 사람, 즉 오온에서 가립된 자를 말한다.286) 『대지도론』에 의하면 세 종류 세간이 있으니, 첫째는 기세간이고, 둘째는 오온세간이며, 셋째는 중생세간이다.287) 지금 여기에서는 교법에 의해 이익 받는 대상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다만 오온세간과 중생세간을 설한 것이다. 혹은 이익 받는 모든 대중을 가리켜 ‘세간’이라 하였고, 영해領解288)하는 대중의 우두머리를 ‘천·인’ 등이라 한 것일 수도 있다.

  게송에서는 “나는 범우凡愚에게는 설하지 않으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여기서는 “세간 및 천·인 등을 가엾게 여겨……”라고 했는가?289)
  교를 설해 준 대상(所爲)이라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악을 떠나 선을 닦게 하기 위해서라면, 통틀어 종성이 있는 자와 종성이 없는 자를 위해 설한 것이다. 무상정등보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다만 보살종성과 종성이 결정되지 않은 자를 위해 설한 것이다.

② 잘 들으라고 하면서 설법을 허락함

  그대는 자세히 들어야 한다. 내가 그대를 위해 심의식의 비밀스런 의미를 설해 줄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로 자세히 들으라고 하면서 설법을 허락하신 것이다.
‘자세히 들으라(諦聽)’고 한 것에 대해, 『공덕시반야론』290)에서는 “‘자세히 들으라’는 것은 마음을 오로지 하나의 경계에 두는 것”291)이라 하였고,

001_0217_a_01L大同佛地第一若依佛地第七有其
001_0217_a_02L五對故彼論云謂淨法界及 [139] 妙智
001_0217_a_03L能安立一切衆生利益安樂令脩善
001_0217_a_04L名爲利益令得樂果名爲安樂
001_0217_a_05L令離惡名爲利益令其攝善名爲安
001_0217_a_06L樂又拔其苦名爲利益施與其樂
001_0217_a_07L爲安樂此世他世世出世等應知亦
001_0217_a_08L解云利益安樂與第一卷相違應
001_0217_a_09L言哀愍等者明其利益自有二
001_0217_a_10L言世間者五蘊世間成人之法
001_0217_a_11L天等者蘊所成人謂五蘊假者
001_0217_a_12L智度論有三世間一器世間二五
001_0217_a_13L蘊世間三衆生世間今於此中辨敎
001_0217_a_14L所益是故但說五蘊衆生或可所益
001_0217_a_15L諸衆名爲世間領解衆首名天人
001_0217_a_16L豈不頌言我於凡愚不開演
001_0217_a_17L如何此云哀愍世間及天人等
001_0217_a_18L敎所爲有其多義若爲令離惡脩善
001_0217_a_19L通爲有性無性故說若爲趣無上正
001_0217_a_20L等菩提但爲菩薩種姓不定者說

001_0217_a_21L
汝應諦聽吾當爲汝說心意識秘密之
001_0217_a_22L

001_0217_a_23L
釋曰此卽第二勅聽許說言諦聽者
001_0217_a_24L依功德施波若論云諦聽者心專一

001_0217_b_01L『유가사지론』 제83권에서는 “‘자세히 들으라’는 것은 이와 같은 상의 법292)을 자세히 들으라고 권한 것이다.”293)라고 하였다.

(2) 질문에 대해 바로 대답함

  광혜여, 마땅히 알라. 육취294)의 생사에서 저 각각의 유정은 저 각각의 유정 무리 가운데 떨어져서,295) 어떤 것은 난생으로 어떤 것은 태생으로 어떤 것은 습생으로 어떤 것은 화생으로 신분身分(몸)이 생겨난다.

  이하는 두 번째로 질문에 대해 바로 대답한 것이다. 이 심의식은 곧 여덟 가지 식이기 때문에, 지금 먼저 여덟 가지 식의 차별을 설명하고, 이후에 심의식의 의미를 바로 해석하겠다.

① 여덟 가지 식의 차별을 설명함
여덟 가지 식의 차별은 대략 여섯 가지 내용으로 설명하겠다. 첫째로 (식의) 종류 수가 몇 개인지를 밝히고, 둘째로 이름을 해석하며, 셋째로 체성을 나타내고, 넷째로 소의근所依根을 밝히며, 다섯째로 소연경所緣境을 나타내고, 여섯째로 심소의 상응을 밝힌다.

가. 식의 종류 수가 몇 개인지를 밝힘
종류 수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성문장에서는 단지 여섯 가지 식만 설하고 제7식과 제8식은 설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것은 여러 교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제 대승에 따르면 본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 번째, 용맹 등은 단지 여섯 가지 식만 설한다. 그러므로 청변淸辨296)보살이 지은 『중관심론』 「입진감로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섯 가지 식 이외에 별도의 아뢰야식은 없다. 안식 등의 여섯 가지 식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 꽃과 같다.≻297) 따라서 그 종에서는 오직 여섯 가지 식만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미륵종은 『금광명경』 등에서 여덟 가지 식을 모두 세운다. 그런데 이 종의 서방 논사들에 의하면 그에 대해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보리유지의 『유식론』에 따르면, 두 종류 마음을 안립한다. 첫째는 법성심法性心이니, 진여를 체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진여에 해당하니, 심의 자성이기 때문에 심이라 이름했지만 능연能緣은 아니다.298) 둘째는 상응심相應心이니, 신信·탐貪 등의 심소와 상응하는 것이다.
  오직 의意의 자성이기 때문에, 식識의 자성이기 때문에, 또한 ‘의·식’이라 한다고 해석해도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없다.
둘째로 진제 삼장은 『결정장론』299)에 의거해서 아홉 가지 식의 의미를 세웠으니, 예를 들면 「구식품九識品」의 설과 같다.300)


001_0217_b_01L瑜伽八十三云言諦聽者 [140]
001_0217_b_02L是相法勸令審聽

001_0217_b_03L
廣慧當知於六趣生死彼彼有情 [141]
001_0217_b_04L或在卵生或在胎生或在濕生或在
001_0217_b_05L化生身分生起

001_0217_b_06L
釋曰自下第二對問正答此心意識
001_0217_b_07L卽是八識故今先辨八識差別後方
001_0217_b_08L正釋心意識義八識差別略辨六義
001_0217_b_09L一種數多少二釋名字三出體性
001_0217_b_10L所依根五所緣境六心所相應
001_0217_b_11L言種數者諸聲聞藏但說六識
001_0217_b_12L無七八具如諸敎今依大乘自有
001_0217_b_13L兩釋一龍猛等但說六識是故淸
001_0217_b_14L辨菩薩所造中觀心論入眞甘露品
001_0217_b_15L離六識外無別阿賴耶識眼等
001_0217_b_16L六識所不攝故猶如空華故知彼宗
001_0217_b_17L唯立六識二彌勒宗依金光明等
001_0217_b_18L立八識然依此宗四 [142] 方諸師有其
001_0217_b_19L三說一菩提留支唯識論云立二種
001_0217_b_20L一法性心眞如爲體此卽眞如
001_0217_b_21L心之性故名之爲心而非能緣
001_0217_b_22L相應心與信貪等心所相應解云
001_0217_b_23L釋意之性故識之性故亦名意識
001_0217_b_24L理無違二眞諦三藏依決定藏論

001_0217_c_01L
‘아홉 가지 식’이라 한 것에서, 안식 등의 여섯 가지 식은 「유식론」과 거의 동일하다.
제7아타나식阿陀那識은 여기 말로 ‘집지執持’라고 하니, 제8식을 붙잡고 있으면서 ‘아’나 ‘아소’라고 여긴다. (이 식은) 오직 번뇌장만 있고 법집法執은 없으며, 결정코 성불하지 못한다.301)
제8아리야식阿梨耶識은 본래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해성解性의 아리야이니, 성불의 의미가 있다.302) 둘째는 과보果報의 아리야이니, 십팔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303) 따라서 『중변분별론』의 게송에서는 “근根·진塵·아我·식識이란 본식이 그것들과 유사하게 생한 것이다.304)305)라고 하였으니, 그 논 등의 설명에 따르면 제8식은 십팔계를 소연으로 삼는다. 셋째는 염오染汙의 아리야이니, 진여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아 네 종류 비방306)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곧 법집法執에 해당하지 인집人執은 아니다.
안혜종安慧宗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제9아마라식阿摩羅識은 여기 말로 무구식無垢識이라 하니, 진여를 체로 삼는다. 하나의 진여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소연 경계(所緣境 : 인식 대상)로서는 진여 및 실제實際 등이라 이름한다. 둘째, 능연能緣(인식하는 마음)이라는 의미에서는 무구식이라 하고 또한 본각本覺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것은 「구식장九識章」에서 『결정장론』 「구식품」을 인용해서 설명한 것과 같다.
셋째, 대당 삼장은 『능가경』 등 및 호법종護法宗에 의거해서 오직 여덟 가지 식을 세우고 제9식은 설하지 않았다. 그는 청변을 논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증을 세우는 가운데 곧 자교상위自敎相違의 과실이 있으니, 『능가경』 등에서 모두 제8아뢰야식을 설하기 때문이다.≻307)

  그렇다면 어째서 『대품경』 등에서는 오직 여섯 가지 식만 설했는가?
 () 호법이 회통시켜 해석하였는데, 예를 들면 『성유식론』 제5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어떤 경에서 ‘여섯 가지 식’만 설하였으니, 그것은 수전리문隨轉理門308)임을 알아야 한다. 혹은 소의인 육근에 근거해서 여섯 가지라고 설하였지만, 식의 종류를 구별하면 실제로 여덟 종류가 있다.”309)

  어찌 용맹이 오직 여섯 가지 식만 건립한 것이 아니겠는가?
  실제로는 용맹 등은 제7식과 제8식이 있다고 믿었으니, 지위가 극희지極喜地310)에 있는 대보살이기 때문이다.

001_0217_c_01L九識義如九識品說言九識者
001_0217_c_02L等六識大同識論第七阿陀那此云
001_0217_c_03L執持執持第八爲我我所唯煩惱障
001_0217_c_04L而無法執定不成佛第八阿梨耶識
001_0217_c_05L自有三種一解性梨耶有成佛義
001_0217_c_06L果報梨耶緣十八界故中邊分別偈
001_0217_c_07L根塵 [143] 我及識本識生似彼依彼論
001_0217_c_08L等說第八識緣十八界 [144] 染汙阿梨
001_0217_c_09L緣眞如境起四種謗卽是法執
001_0217_c_10L而非人執依安慧宗作如是說
001_0217_c_11L九阿摩羅識此云無垢識眞如爲體
001_0217_c_12L於一眞如有其二義一所緣境
001_0217_c_13L爲眞如及實際等二能緣義名無垢
001_0217_c_14L亦名本覺具如九識章引決定藏
001_0217_c_15L論九識品中說三大唐三藏依楞伽
001_0217_c_16L等及護法宗唯立八識不說第九
001_0217_c_17L淸辨云所立量中便有自敎相違之
001_0217_c_18L楞伽等經皆說第八阿賴耶故
001_0217_c_19L若爾如何大品經等唯說六識
001_0217_c_20L法會釋如成唯識第五卷說然有
001_0217_c_21L經中說六識者應知彼是隨轉理門
001_0217_c_22L或隨所依六根說六而識類別實有
001_0217_c_23L八種豈不龍猛唯立六耶解云
001_0217_c_24L據實龍猛等信有七八位在極喜大

001_0218_a_01L그런데 그 논에서 ‘여섯 가지 식’이라 설한 것은 『대품경』 등의 뜻을 서술한 것이니, 따라서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 진제의 해석에 대한 원측의 비판
진제 스님이 설했던 아홉 가지 식 가운데 나중의 세 가지 식에 대한 해석은 모두 과실이 많다.
우선 예를 들어 제7식의 해석에서 두 종류 과실이 있다.
첫째, ‘아타나’란 제8식의 다른 이름이지 제7식은 아니다. 따라서 이 경 등에서 ‘제8식을 아타나라고 이름한다’고 설한 것이다.311)
둘째, 의미가 서로 어긋난다. 이른바 ‘(제7식은) 오직 번뇌장만 있다’고 한 것은 곧 이 경에서 팔지八地 이상도 염오의 말나末那가 있다고 한 것과 어긋난다.312) 혹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장엄경론』 등에서 여덟 가지 식을 전환시켜 사지四智313)를 이룬다고 하는 의미와도 어긋난다.
제8아뢰야식이 능히 법집을 일으킨다거나, 혹은 ‘십팔계를 소연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심소법 가운데 무명, 즉 무명수無明數(무명 심소)가 어떻게 법집과 더불어 구기俱起할 수 있겠는가?314)
또 신역 『변중변론』에서는 “ 식이 생겨날 때, 의義·유정有情·아我·요了로 변사變似하네. 이 경계들은 실제로 있지 않으니, 경계가 없으므로 식도 없다네.”315)라고 하였다. 장행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의義로 변사한다’는 것은 색 등의 모든 경계(境性)와 유사하게 현현하는 것을 말한다. ‘유정으로 변사한다’는 것은 자·타의 몸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五根性)과 유사하게 현현하는 것을 말한다. ‘아我로 변사한다’는 것은 염오의 말나가 아치我癡 등과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다. ‘요了로 변사한다’는 것은 그 밖의 육식은 요별의 상이 거칠기 때문이다.”316) 자세한 설명은 그 논과 같다. 따라서 제8식은 심 등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317) 자세하게 분별하면, 『성유식론』의 설과 같다.
또 진제 스님은 ‘아마라식은 자체를 반조反照한다’고 했는데, 이는 교리적 근거가 없다. 게다가 『여래공덕장엄경』과도 어긋나니, 그 경에서는 “여래의 무구식은 청정하고 무루계이니, 모든 장애를 벗어나서 대원경지와 상응하도다.”318)라고 하였다. 이 경에 준해 보면, 무구식이란 바로 정분淨分의 제8식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319)

001_0218_a_01L菩薩故而彼論中說六識者述大
001_0218_a_02L品經等意故不相違眞諦師說九
001_0218_a_03L種識中後之三識皆有多失且如
001_0218_a_04L第七有二種失一阿陀那者第八
001_0218_a_05L異名而非第七故此經等說第八
001_0218_a_06L名阿陀那二義相違所謂唯煩
001_0218_a_07L惱障便違此經八地已上有染末那
001_0218_a_08L或不成佛違莊嚴論等轉八識成四
001_0218_a_09L智義也第八賴耶能起法執或云
001_0218_a_10L十八界皆不應理心所法中無明
001_0218_a_11L無明數如何得與法執俱起又新翻
001_0218_a_12L辨中邊論云頌曰

001_0218_a_13L
識生變似義有情我及了

001_0218_a_14L此境實非有境無故識無

001_0218_a_15L
長行釋云論云變似義者謂似色等
001_0218_a_16L諸境性現變似有情者謂似自他身
001_0218_a_17L五根性現變似我者謂染末那與我
001_0218_a_18L癡等恒相應故變似了者謂餘六識
001_0218_a_19L了相麤故具說如彼故知第八不緣
001_0218_a_20L心等若廣分別如成唯識也又眞諦
001_0218_a_21L阿摩羅識反照自體無敎可憑
001_0218_a_22L違如來功德莊嚴經彼云如來無垢
001_0218_a_23L是淨無漏界解脫一切障圓鏡智
001_0218_a_24L相應准經可知無垢識者卽是淨

001_0218_b_01L
또 『결정장론』이란 바로 『유가사지론』인데, 그 논에는 본래 「구식품」이 없다.320)

나. 이름을 해석함
이름을 해석한다고 했는데, 먼저 공통된 이름(通名)을 (해석하고) 나중에 개별적 이름(別名)을 (해석하겠다.)
‘팔식八識’이란 공통된 이름이다. ‘팔’이란 수를 나타낸다. ‘식’은 요별了別이니, 이는 (식의) 성性과 상相에 통하는 것이다. ‘오직 육식만 있다’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 ‘팔식’이라 하였다. 이것은 육합석 중에서 대수석帶數釋321)에 해당한다.
개별적 이름이란 다음과 같다. 안식 등의 여섯 가지 식은 모두 의주석依主釋에 해당하니, ‘눈에 의지하는 식’을 안식이라 하고 내지는 ‘의에 의지하는 식’을 의식이라 하는 것을 말한다.322)
제7말나末那는 여기 말로 ‘의意’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성유식론』에서 “항상 자세히 사량하는 것이 그 밖의 식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323)라고 하였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의가 곧 식’이기 때문에 의식이라 이름한 것이니, 이는 지업석持業釋에 해당한다.324)
제8아뢰야식은 여기 말로 장식藏識이라 하니, ‘능장能藏·소장所藏·집장執藏’의 의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차례대로 ‘과果는 인因 속에 저장되고, 인은 과 속에 저장되며, 경계는 집착 속에 저장된다’는 것이다.325) 자세한 것은 『성유식론』과 『섭대승론』에서 설한 것과 같다.326) 이것도 지업석에 해당하니, ‘장이 곧 식(藏卽識)’이기 때문이다.

다. 체성을 나타냄
체성體性이라 한 것은 우선 세 가지 의미에 의거해서 (분별해 보겠다.) 첫째는 삼성三性에 의거하고, 둘째는 삼과三科에 의거하며, 셋째는 법수法數에 의거한다.
삼성에 의거해서 여덟 가지 식을 분별해 보면 이 하나하나가 삼성에 통한다. 허망한 것을 거두어 진실한 것에 귀속시키면 모두 ‘진여’이기 때문이다. 인연에 의탁해서 일어나는 것은 모두 ‘의타依他’라고 이름하고, 집착하는 정情을 따라 있는 것은 ‘소집성所執性’이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9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식성唯識性에는 대략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허망이니, 변계소집을 말한다. 둘째는 진실이니, 원성실성을 말한다.……다시 두 종류 자성이 있다. 첫째는 세속이니, 의타기성을 말한다. 둘째는 승의이니, 원성실성을 말한다.”327)
삼과에서 체를 나타내면,328) 오온의 문 중에서는 여덟 가지 식은 모두 식온識薀을 체로 삼고, 십이처 안에서는 모두 의처意處에 속하니,

001_0218_b_01L分第八識也又決定藏論卽是瑜伽
001_0218_b_02L彼論本無九識品也

001_0218_b_03L
言釋名者先通後別言八識者
001_0218_b_04L其通名八謂標數識卽了別通性
001_0218_b_05L及相簡唯六識故言八識卽六釋
001_0218_b_06L中帶數釋也言名別 [145] 眼等六識
001_0218_b_07L依主釋謂依眼之識名爲眼識乃至
001_0218_b_08L依意之識名爲意識第七末那此云
001_0218_b_09L如成唯識恒審思 [146] 勝餘識故若依
001_0218_b_10L此釋意卽識故名爲意識是持業釋
001_0218_b_11L八阿賴耶此云藏識具有能藏所藏
001_0218_b_12L執藏義故此卽如次果於因中藏
001_0218_b_13L於果中藏境於執中藏具如成唯識
001_0218_b_14L論及攝大乘此亦持業藏卽識故

001_0218_b_15L
言體性者且依三義一約三性
001_0218_b_16L約三科三依法數若依三性分別
001_0218_b_17L八識一一此通三性攝妄皈眞
001_0218_b_18L眞如故託因緣起皆名依他隨執
001_0218_b_19L情有是所執性故唯識第九卷云
001_0218_b_20L唯識性略有二種一者虛妄謂遍
001_0218_b_21L計所執二者眞實謂圓成實 [147] 復有
001_0218_b_22L二性一者世俗謂依他起二者勝
001_0218_b_23L謂圓成實三科出體五蘊門中
001_0218_b_24L八識皆用識蘊爲體十二處中皆意

001_0218_c_01L모두 무간멸의無間滅依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329) 십팔계 중에서 앞의 다섯 종류 식은 하나하나 모두 자기의 식계識界 및 의계意界 일부를 체로 삼고,330) 제6식·제7식·제8식의 세 가지 식은 하나하나 모두 의식계와 의계의 일부를 자성으로 삼는다.331)

라. 소의근所依根을 밝힘
(식의) 소의所依를 설명하겠다. 여덟 가지 식의 소의에는 각기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인연의因緣依332)이니, 여덟 가지 식을 직접 발생시킬 수 있는 종자를 말한다.333) 따라서 『성유식론』 제4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는 인연의이니, 자기 종자를 말한다. 모든 유위법들은 모두 이 소의에 의탁하고 있으니, 자기의 인연因緣(직접적 원인)을 떠나서는 결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334)
둘째는 개도의開導依335)이니, 전 순간에 멸한 자류自類의 여덟 가지 식들은 각기 다음 순간의 것과 대망시키면 개도의가 된다.336) 따라서 『성유식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셋째는 등무간연의等無間緣依337)(개도의)이니, 이는 전 순간에 멸한 의意를 말한다. 모든 심법과 심소법은 모두 이 소의에 의탁하니, 열어서 인도해 주는 근(開導根 : 등무간연의)을 떠나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338)
셋째는 구유의俱有依339)인데, 구유의는 모든 식들마다 다르다.
안식 등의 오식은 각기 네 개의 구유의가 있다. 첫째는 동경근同境根이니, 안근眼根 등의 오근이 각기 자기 식과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340) 둘째는 분별근分別根이니, 오식과 함께 일어난 동연의식同緣意識341)을 말한다.342) 셋째는 염정근染淨根이니, 제7말나식을 말한다.343) 넷째는 근본의根本依이니, 제8식을 말한다.344) 따라서 『성유식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에 따르면 오식과 구유하는 소의는 결정코 네 종류가 있으니, 다섯 가지 색근과 제6식·제7식·제8식을 말한다. (오식은) 이 구유의 가운데 한 종류가 결여됨에 따라 결정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고, 동경同境·분별分別·염정染淨·근본根本의 소의는 구별되기 때문이다.”345)
제6의식과 구유하는 소의는 오직 두 종류가 있다.346) 따라서 『성유식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6의식과 구유하는 소의는 오직 두 종류이니, 제7식과 제8식을 말한다.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347)
제7말나식과 구유하는 소의는 오직 한 종류가 있다.348) 따라서 『성유식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001_0218_c_01L處攝皆有無間滅依義故十八界中
001_0218_c_02L前五種識一一皆用自識界及意界
001_0218_c_03L一分爲體第六七八三識一一皆用
001_0218_c_04L意識及意界少分以爲自性

001_0218_c_05L
辨所依者八識所依各有三種
001_0218_c_06L因緣依謂能親生八識種子故成唯
001_0218_c_07L識第四卷云一因緣依謂自種子
001_0218_c_08L有爲法皆託此依離自因緣必不
001_0218_c_09L生故二開導依謂前念滅自類八識
001_0218_c_10L各望後念爲開導依故唯識云
001_0218_c_11L等無間緣依謂前滅意諸心心所
001_0218_c_12L託此依離開導根必不轉故三俱
001_0218_c_13L有依然俱有依諸識不同眼等五
001_0218_c_14L各有四依一同境根謂眼等五
001_0218_c_15L根各望自識二分別根謂五識俱同
001_0218_c_16L緣意識三染淨根謂第七末那
001_0218_c_17L根本依謂第八識故唯識云由此
001_0218_c_18L五識俱有所依定有四種謂五色根
001_0218_c_19L六七八識隨▼(門*報) [148] 一種必不轉故
001_0218_c_20L境分別染淨根本所依別故第六意
001_0218_c_21L識俱有所依唯有二種故唯識云
001_0218_c_22L第六意識俱有所依唯有二種謂七
001_0218_c_23L八識隨▼(門*報)一種必不轉故第七末
001_0218_c_24L那俱有所依唯有一種故唯識云

001_0219_a_01L“제7의식(말나식)과 구유하는 소의는 다만 한 종류가 있으니, 제8식을 말한다. 장식藏識(제8아뢰야식)이 없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349)
제8아뢰야식과 구유하는 소의도 또한 오직 한 종류다.350) 따라서 『성유식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뢰야식과 구유하는 소의도 다만 한 종류이니, 제7식을 말한다. 그 식이 없으면 결정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논에서 ‘장식은 항상 말나와 동시에(俱時) 전전한다’고 설했기 때문이다.”351)
  여덟 가지 식의 소의는 유루·무루에 따라 차별되지 않는다.

마. 소연경所緣境을 밝힘
(식의) 소연所緣(경계)을 나타내자면, 그에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오식의 소연이고, 둘째는 의식의 소연이며, 셋째는 말나식의 소연이고, 넷째는 아뢰야식의 경계이다. 각각의 문에서 먼저 유루식에 대해 밝히고, 나중에 무루식에 대해 나타내겠다.

● 오식의 소연
유루의 오식은 오경 중에 각기 오직 하나를 소연으로 삼으니, 말하자면 안식은 색을 소연으로 삼고 내지는 신식은 촉을 소연으로 삼는다.이것은 오직 현량現量352)이다.
무루의 지위에 대해 『성유식론』 제10권에 의하면 두 논사의 주장이 있다. 따라서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소작지成所作智353)와 상응하는 심품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단지 다섯 종류 현재의 경계만 소연으로 삼는다. 『장엄경론』에서 ‘여래의 오근은 하나하나 모두 오경에서 일어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심품은 또한 삼세의 일체법을 두루 소연으로 삼으니,……『불지경』에서는 ‘성소작지로 삼업三業의 모든 변화의 사事를 일으키고 유정의 심행心行의 차별을 결택해서 (그들로 하여금) 과거·미래·현재 등의 의미를 받아들이게 한다’고 설하였다.≻354)355)(이 무루의 오식) 또한 오직 현량이고, 진지眞智356)에는 통하지 않는다.

● 제6식의 소연
유루의 의식이 두루 십팔계를 소연으로 삼는다는 것은 모든 논에서 다 똑같이 설한다.양量과 비량非量357)에 통하고, 혹은 현량現量(직접 지각)이거나 혹은 비량比量358)이다.
이미 전의한 경우(무루의 지위)는 또한 두루 제법을 소연으로 삼는다. 따라서 『성유식론』에서는 “묘관찰지妙觀察智359)와 상응하는 심품은 모든 법의 자상自相(사물의 특수상)과 공상共相(사물의 보편상)을 소연으로 삼는 데 있어 모두 장애가 없다.”360)고 하였다.이것은 오직 현량이고, 진지眞智·속지俗智에 통한다.

● 제7말나식의 소연
유루의 제7식은 오직 제8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을 소연으로 삼아 아법我法이라고 집착하니, 이는 모든 논에서 다 똑같이 설하는 것이다.이것은 오직 비량非量이다.361)

001_0219_a_01L第七意識俱有所依但有一種
001_0219_a_02L第八識藏識若無 [149] 不轉故第八
001_0219_a_03L賴耶俱有所依亦唯一種故唯識云
001_0219_a_04L阿賴耶識俱有所依亦但一種謂第
001_0219_a_05L七識彼識若無定不轉故論說藏
001_0219_a_06L識恒與末那俱時轉故解云八識所
001_0219_a_07L有漏無漏無有差別

001_0219_a_08L
顯所緣者有其四種一五識所緣
001_0219_a_09L意識所緣三末那所緣四阿賴耶境
001_0219_a_10L一一門中先辨有漏後顯無漏
001_0219_a_11L漏五識於五境中各唯緣一謂眼識
001_0219_a_12L緣色乃至身識緣觸唯是
現量
若無漏位
001_0219_a_13L依成唯識論第十卷有兩師義故彼
001_0219_a_14L成所作智相應心品有義但緣五
001_0219_a_15L種現境莊嚴論說如來五根一一
001_0219_a_16L皆於五境故轉 [150] 有義 [151] 能通 [152] 緣三世
001_0219_a_17L諸法佛地論 [153] 成所作智 [154] 三業
001_0219_a_18L諸變化事決擇有情心行差別領受
001_0219_a_19L去來現在等義亦唯現量
不通眞智
有漏意識
001_0219_a_20L緣十八界諸論皆同通量非量
或現咸比
若已轉
001_0219_a_21L亦遍緣諸法故唯識云妙觀察
001_0219_a_22L智相應心品緣一切法自相共相
001_0219_a_23L無障礙唯是現量
通眞俗智
有漏第七唯緣第八
001_0219_a_24L賴耶見分執爲我法諸論悉同唯是
非量

001_0219_b_01L
무루의 말나식에 대해서는 『성유식론』에 의하면 세 가지 해석이 다르다. 따라서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평등성지平等性智362)와 상응하는 심품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것은 다만 제8정식淨識만을 소연으로 삼는다. 마치 염오의 제7식이 장식藏識(제8아뢰야식)을 소연으로 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363)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것은 다만 진여를 소연의 경계로 삼으니, 모든 법의 평등성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두루 진제·속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불지경』에서 ‘평등성지는 열 종류 평등성(十種平等性)364)을 증득한다’고 설하기 때문이고, 『장엄경론』에서 ‘유정들의 자타평등을 소연으로 삼아서 타자의 승해勝解에 수순해서 무변한 부처님의 영상을 시현한다’365)고 설하기 때문이다.≻”366)이것은 오직 현량이고, 진지·속지에 통한다.

● 제8아뢰야식의 소연
유루의 아뢰야식의 소연 경계에 대해 여러 논에서 다르게 설한다. 『유가사지론』 제51권에 의하면 오직 두 종류를 설한다. 따라서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뢰야식에 대해 간략히 설하면, 두 종류 소연 경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첫째는 내적인 집수(內執受)367)를 요별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외적인 무분별의 기세간상(外無分別器相)368)을 요별하기 때문이다.”369) 『성유식론』 제2권의 전반부 문장에 따르면 세 종류 경계를 소연으로 삼으니, 즉 외적 기세간과 유루종자와 유근신有根身(감각 기관을 가진 몸)이다.370) 『성유식론』 제2권의 후반부 문장에 따르면 네 종류 경계를 소연으로 삼으니, 즉 이전의 세 종류 이외에 다시 ‘법처의 실색(法處實色)’371)을 더한 것이다. 따라서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식에 의해 전변된 경계를 간략히 설하면 유루종자와 열 가지 유색처有色處372) 그리고 타법처의 소현실색(墮法處所現實色)373)이다.”374)이것은 오직 현량이다.

  어째서 이 식은 마음 등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가?
  예를 들면 『성유식론』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숙식이 변현해 낸 것에는 반드시 실질적 작용(實用)이 있다. 만약 마음 등을 변현해 낸다면 (그 마음은) 다시 실질적 작용이 없을 것이니, 상분의 마음 등은 인식 작용(能緣)이 아니기 때문이다.375) 무위법 등을 변현해 내더라도 (무위법) 또한 실질적 작용이 없게 된다.376) 따라서 이숙식은 마음 등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377)
무루의 제8식의 소연 경계에 대해 『성유식론』 제10권에 의하면 두 논사의 주장이 있다. 따라서 그 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원경지大圓鏡智378)와 상응하는 심품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심품은) 다만 진여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으니,

001_0219_b_01L無漏末那依唯識論三釋不同故彼
001_0219_b_02L平等性智相應心品有義但緣第
001_0219_b_03L八淨識如染末那 [155] 緣藏識故有義
001_0219_b_04L緣眞如爲境緣一切法平等性故
001_0219_b_05L遍緣眞俗爲境佛地經說平等性
001_0219_b_06L證得十種平等性故莊嚴論說
001_0219_b_07L諸有情自他平等隨他勝解示現無
001_0219_b_08L邊佛影像故唯是現量
通眞俗智
有漏賴耶所緣
001_0219_b_09L諸論不同若依瑜伽五十一唯說
001_0219_b_10L二種故彼云謂若略說阿賴耶識
001_0219_b_11L於二種所緣境轉一由了別內執受
001_0219_b_12L二由了別外無分別器相故若依
001_0219_b_13L成唯識第二卷前文緣三種境謂外
001_0219_b_14L器世間有漏種子及有根身若依唯
001_0219_b_15L識第二後文緣四種境前三之外
001_0219_b_16L加法處實色故彼云略說此識所變
001_0219_b_17L境者謂有漏種十有色處及隨 [156]
001_0219_b_18L處所現實色唯是
現量
何故此識不緣心
001_0219_b_19L解云如唯識第二卷云異熟識
001_0219_b_20L必有實用若變心等便無實用
001_0219_b_21L相分心等不能緣故變無爲等亦無
001_0219_b_22L實用故異熟識不緣心等無漏第八
001_0219_b_23L依唯識論第十有兩師義故彼云
001_0219_b_24L圓鏡智相應心品有義但緣眞如爲

001_0219_c_01L이는 무분별지無分別智379)이고 후득지後得智380)는 아니다. 행상도 소연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심품은 모든 법을 소연으로 삼는다. 『장엄경론』에서 대원경지는 모든 경계에 대해 우매하지 않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불지경』에서 여래지경如來智鏡(대원경지)은 모든 처處·경境·식識의 온갖 영상을 나타낸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결정코 무루종자 및 몸·국토 등의 모든 영상들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381)이것도 오직 현량이고, 진지·속지에 통한다.
여덟 가지 식은 가법과 실법을 소연으로 삼으며, 실재의 경계는 유위·무위·삼세 등의 차별이 있다. 자세한 것은 『성유식론』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바. 심소의 상응을 밝힘
심소상응법이라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성유식론』의 호법護法의 정의에 따르면, 쉰한 개 심소법 중에서 유루의 오식五識은 각기 서른네 개 심소와 상응한다. 변행심소遍行心所382) 다섯 개, 별경심소別境心所383) 다섯 개, 선심소善心所384) 열한 개가 있다. 근본혹根本惑385)은 세 개이니, 탐·진·치를 말한다. 수혹隨惑386)은 열 개이니, 두 개의 중수혹中隨惑과 여덟 개의 대수혹大隨惑을 말한다.387) 그런데 선심소 열한 개에 대해 두 논사의 주장이 있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식에는 오직 열 종류가 있으니, 자성산란自性散亂388)에는 경안輕安389)이 없기 때문이다.≻390)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식에도 경안이 있다. 선정에 의해 이끌려 나온 선심善心에도 안락함(調暢)이 있기 때문이고, 성소작지에는 동시에 반드시 경안이 있기 때문이다.391)≻”392) 그 밖의 심소는 없으니, 그 논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유루의 의식意識은 쉰한 개 심소와 상응하는데, 모든 논에서 똑같이 설하며 또한 다른 주장이 없다.
유루의 말나식末那識은, 호법의 정의에 의하면, 오직 열여덟 개의 심소와 상응한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4권에서는 “이 의意와 함께하는 심소는 열여덟 개이니, 이전의 아홉 가지 법, 여덟 가지 수번뇌, 아울러 별경심소 중의 혜慧를 말한다.”393)고 하였다.
  “이전의 아홉 가지 법”이란 다섯 개의 변행심소와 네 종류 번뇌를 말하는데, 네 종류 번뇌란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를 말한다. 그 밖의 다른 심법心法(심소)은 없으니, 의미는 그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
유루의 아뢰야식은 오직 다섯 개의 변행심소와 상응한다.

001_0219_c_01L是無分別非後得智行相所緣
001_0219_c_02L可知故有義此品緣一切法莊嚴論
001_0219_c_03L大圓鏡智於一切境不愚迷故
001_0219_c_04L地經說如來智鏡諸處境識衆像現
001_0219_c_05L又此決定緣無漏種及身土等諸
001_0219_c_06L影像故亦唯現量
通眞俗智
八識緣假實實境有
001_0219_c_07L爲無爲三世等別廣如唯識論等說
001_0219_c_08L言心所相應者依唯識論護法正義
001_0219_c_09L於五十一心所法中有漏五識各與
001_0219_c_10L三十四心所相應謂遍行五別境五
001_0219_c_11L善有十一根本惑三謂貪瞋痴
001_0219_c_12L惑有十謂中二大八然善十一中
001_0219_c_13L兩師義故唯識第六云有義五識唯
001_0219_c_14L有十種自性散亂無輕安故有義
001_0219_c_15L識亦有輕安定所引善者亦有調暢
001_0219_c_16L成所作智俱必有輕安故無餘心
001_0219_c_17L如論廣說有漏意識與五十一心
001_0219_c_18L所相應諸論共同亦無異義有漏
001_0219_c_19L末那護法正義唯與十八心所相應
001_0219_c_20L故成唯識第四云然此意俱心所十
001_0219_c_21L [157] 九法八隨煩惱幷別境中慧
001_0219_c_22L前九法者謂遍行五及四煩惱
001_0219_c_23L煩惱者謂我知 [158] 我見我慢我愛無別
001_0219_c_24L心法義如論說有漏賴耶唯與五種

001_0220_a_01L따라서 『성유식론』의 게송에서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와 상응한다.”394)고 하였고, 그 밖의 심소는 없다. 자세한 것은 그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무루의 여덟 가지 식들은 모두 스물한 개의 심소와 상응한다. 말하자면 변행심소가 다섯 개, 별경심소가 다섯 개, 선심소는 열한 개가 있다. 이 중에 다른 점은, 묘관찰지는 인위因位에서 또한 심尋·사伺와도 상응하니, 약과 병 등에서 아직 자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과佛果에 이르면 심·사는 없어지니, 사유(思)하지 않고서도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395) 자세하게 분별하면, 구체적인 것은 여러 논의 설과 같다.
심·의·식의 의미를 자세히 설하면 『별장』과 같다.

② 심의식의 의미를 해석함
경문을 해석한 곳에서 경문을 구별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심의식의 비밀스런 의미를 밝힌 것이고, 나중의 “광혜여, 이와 같이” 이하는 비밀스런 선교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전의 두 질문에 대답한 것이다.

가. 심의식의 비밀스런 의미를 밝힘
전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제8식의 여러 이름들의 차별을 밝힌 것이고, 나중의 “광혜여, 아타나식은” 이하는 여러 식들의 구전俱轉의 차별을 밝힌 것이다.

가) 제8식의 여러 이름들의 차별을 밝힘
전자 중에 네 개가 있다. 첫째는 종자식에 대해 해석한 것이고, 둘째는 아타나에 대해 설명한 것이며, 셋째는 아뢰야에 대해 밝힌 것이고, 넷째는 심心이라는 이름을 나타낸 것이다.

(가) 종자식에 대해 해석함
이 경문은 첫 번째로 ‘일체종자식’에 대해 해석한 것이다.396)
‘일체종자’란 세 가지 습기에 해당한다. 이 경문의 뜻을 설하자면, 제8식이 세 종류 습기를 섭지攝持함으로 인해 결생상속結生相續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8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생사의 상속은 모든 습기로 말미암은 것인데, 모든 습기는 총괄하면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명언습기名言習氣이고, 둘째는 아집습기我執習氣이며, 셋째는 유지습기有支習氣이다.≻397)
그 종자식은 본래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식에 담지된 종자를 종자식이라 이름하고, 둘째는 종자를 담지한 식을 종(자)식이라 이름한다. 비록 두 종류가 있지만 지금 이 경문에서는 종자를 담지한 식을 바로 밝힌 것이니, 몸(身分)이 생겨날 때 소의(몸)와 종자를 집지執持하기 때문이다.398) 그 식에 의해 집지되는 종자가 곧 세 종류 습기이다.

001_0220_a_01L遍行相應故論頌云觸作意受想思
001_0220_a_02L相應無餘心所具如論說無漏八識
001_0220_a_03L皆二十一心所相應謂遍行五別境
001_0220_a_04L善有十一於中別者妙觀察智
001_0220_a_05L因位亦得尋伺相應於藥病等未自
001_0220_a_06L在故若至佛果尋伺卽無無思成事
001_0220_a_07L若廣分別具如諸論心意識義
001_0220_a_08L具如別章

001_0220_a_09L
就釋文中文別有二初明心意識秘
001_0220_a_10L密之義後廣慧如是下辨秘密善巧
001_0220_a_11L答前兩問前中有二初明第八衆名
001_0220_a_12L差別後廣慧阿陀那識下明諸識俱
001_0220_a_13L轉差別前中有四一釋種子識
001_0220_a_14L辨阿陀那三明阿賴耶四顯心名
001_0220_a_15L卽第一釋一切種子識一切種子
001_0220_a_16L三習氣此中意說由第八識攝持三
001_0220_a_17L種習氣結生相續故成唯識第八卷
001_0220_a_18L復次生死相續由諸習氣然諸
001_0220_a_19L習氣總有三種一名言習氣二我
001_0220_a_20L執習氣三有支習氣其種子識
001_0220_a_21L有二種一識所持種名種子識
001_0220_a_22L能持種識名爲種識雖有二種
001_0220_a_23L此正明能持種識身分生時執持所
001_0220_a_24L依及種子故彼所持種卽三習氣

001_0220_b_01L
따라서 이제 세 종류 습기를 간략히 설명하겠다. 그래서 세 종류 습기를 대략 네 문으로 분별하였으니, 첫째는 이름을 해석한 것이고, 둘째는 체성을 나타낸 것이며, 셋째는 과를 내는 차별을 밝힌 것이고, 넷째는 사연四緣으로 분별한 것이다.

● 세 종류 습기의 이름을 해석함
첫째로 이름을 해석하면, 통칭하는 이름이 있고 개별적 이름이 있다.
‘삼습기三習氣’란 그것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삼’이란 개수를 표시한 것이다. ‘습기’라고 한 것에서, 명언名言 등을 가리켜 ‘습習’이라 하고, 제8식 안의 종자가 훈습된 기운(氣分)이기 때문에 ‘습기’라고 한 것이다. (삼습기란) 육합석 중에서는 대수석帶數釋에 해당한다.
개별적 이름이란 예를 들어 『성유식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모든 습기는 총괄하면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명언습기名言習氣이니, 유위법 각각의 직접적 종자(親種)를 말한다. 명언습기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표의명언表義名言이니, 의미를 능히 언표하는 음성의 차별을 가리킨다. 둘째는 현경명언顯境名言이니, 경계를 능히 요별하는 심법·심소법을 가리킨다.399) 그 순서대로 구역에서는 언설명言說名과 사유명思惟名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아집습기我執習氣이니, 허망하게 ‘나(我)’와 ‘나의 것(我所)’에 집착하는 종자를 말한다. 아집습기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생아집俱生我執이니, 수도에서 끊어지는 아집我執·아소집我所執이다. 둘째는 분별아집分別我執이니, 견도에서 끊어지는 아집·아소집이다. 두 종류 아집을 따라서 훈습되어 이루어진 종자는 유정 등으로 하여금 자·타를 차별하도록 만든다.400)
셋째는 유지습기有支習氣이니, 삼계의 이숙업을 초감하는 종자를 말한다. 유지습기도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유루의 선善한 습기이니, 좋아할 만한 과보를 초감하는 업종자이다. 둘째는 모든 불선한 습기이니, 좋아하지 않는 과보를 초감하는 업종자이다.401) 402)

  세 가지 습기의 특징은 『성유식론』에서 설한 대로 알아야 한다. 세 가지 습기의 (개별적 이름들은) 모두 의주석依主釋에 해당하니, ‘명언훈습의 기종자(名言習之氣種子)’이기 때문이고, 내지는 ‘유지훈습의 기종자(有支習之氣種子)’이기 때문이다.403)

● 습기의 체성을 나타냄
(습기의) 체를 나타내자면 이전에 설한 것처럼, 두 가지 명언을 따라서 훈습된 종자를 명언습기라고 하고, 두 종류 아견에 의해 훈습되어 이루어진 종자를 아견습기라고 하며,

001_0220_b_01L今略辨三種習氣然三習氣略以四
001_0220_b_02L門分別一釋名字二出體性三生
001_0220_b_03L果差別四四緣分別

001_0220_b_04L
第一釋名有通有別三習氣者
001_0220_b_05L其通名三是標數言習氣者說名
001_0220_b_06L言等名之爲習第八中種習之氣分
001_0220_b_07L故名習氣卽六釋中帶數釋也言別
001_0220_b_08L名者如成唯識然諸習氣總有三
001_0220_b_09L一名言習氣謂有爲法各別親種
001_0220_b_10L名言有二一表義名言卽能詮義音
001_0220_b_11L聲差別二顯境名言卽能了境心心
001_0220_b_12L所法如其次第舊云言
說名思惟名也
二我執習氣謂虛
001_0220_b_13L妄執我我所種我執有二一俱生我
001_0220_b_14L卽脩所斷我我所執二分別我執
001_0220_b_15L卽見所斷我我所執隨二我執所熏
001_0220_b_16L成種令有情等自他差別三有支習
001_0220_b_17L謂招三界異熟業種有支有二種 [159]
001_0220_b_18L一有漏善卽是能招可愛果種 [160] 二諸
001_0220_b_19L不善卽是能招非愛果報 [161] 解云
001_0220_b_20L習氣相如論應知三種習氣皆依
001_0220_b_21L主釋謂名言習之氣種子故乃至有
001_0220_b_22L支習之氣種子故

001_0220_b_23L
言出體者如前所說隨二名言所熏
001_0220_b_24L種子爲名言習氣二種我見所熏成

001_0220_c_01L내지는 선업과 악업에 의해 훈습된 종자를 유지습기라고 한다.
(습기의 체가) 종자種子인지 현행現行인지 분별하면, 오직 종자이지 현행은 아니다.
삼과三科의 문에서 체를 나타내겠다.
명언습기는, 오온문五蘊門에서는 일부의 종자는 오온을 자성으로 삼으니, 무루의 종자를 제외하면 종자는 생겨난 곳을 따라서 동일한 온에 속하기 때문이다. 처문處門·계문界門에서는 일부는 십이처의 종자와 십팔계의 종자를 자성으로 삼으니, 무루의 종자를 제외하면 오온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404) 아견습기(아집습기)는 오온문에서는 행온의 일부에 속하고, 처문·계문에서는 법처와 법계의 일부를 체로 삼는다.405) 유지습기는, 오온문에서는 색온과 행온의 두 가지를 체로 삼으니, 신업·어업은 색온에 속하기 때문이고, 의사업意思業의 종자는 행온에 속하기 때문이다. 처문·계문에서는 색처·성처·법처와 색계·성계·법계의 일부를 체로 삼는다.406)
법수로서 체를 나타내겠다. 명언습기는 백법문百法門에서는 모두 백법 종자를 체로 삼는다. 영상影像으로서의 백법이 모두 종자를 훈습하기 때문이다.407) 아견습기는 별경심소 중에서 혜慧 그리고 십번뇌 중에서 살가야견을 자성으로 삼는다.408) 유지습기는 열한 개의 색법 중에서 색色·성聲 두 가지 법을 (자성으로 삼고,) 그리고 심소 중의 사思를 자성으로 삼으니 의사업(의업) 때문이다.409)

● 과를 내는 차별을 밝힘
‘과를 낸다(出果)’고 했는데, 그에 두 가지 내용이 있다. 첫째, 『성유식론』에 의하면 공통적으로 제법에 의거해서 과를 내는 것을 설명한다. 둘째, 『섭대승론』에 의하면 열한 가지 식에 의거해서 과를 내는 것을 설명한다.
통틀어 제법에 의거해서 과를 내는 것을 설명하겠다.
명언습기는 통틀어 백법을 낸다. 그런데 차별되는 것은, 아흔네 가지 법의 본질本質·영상影像410)은 모두 명언에서 생겨나지만, 여섯 종류 무위법의 본질과 영상은 동일한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위법 중에) 본질로서의 여섯 종류는 종자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니,

001_0220_c_01L爲我見習氣乃至由善惡業所熏
001_0220_c_02L種子爲有支習氣種現分別唯種非
001_0220_c_03L1) [17] 出體名言習氣五蘊門中
001_0220_c_04L一分種子五蘊以爲自性除無漏種
001_0220_c_05L種隨所生同蘊攝故處界門中一分
001_0220_c_06L十二處種十八界種以爲自性除無
001_0220_c_07L漏種准蘊應知我見習氣五蘊門中
001_0220_c_08L行蘊一分所攝處界門中法處法界
001_0220_c_09L少分爲體有支習氣五蘊門中色行
001_0220_c_10L二蘊以身語業是色蘊故意思業種
001_0220_c_11L行蘊攝故處界門中色處聲處法處
001_0220_c_12L色界聲界法界一分爲體法數出體
001_0220_c_13L名言習氣百法門中通用百法種子
001_0220_c_14L爲體影像百法皆熏種故我見習氣
001_0220_c_15L用別境中慧及十煩惱中薩伽 [162] 耶見
001_0220_c_16L以爲自性有支習氣十一色中色聲
001_0220_c_17L二法及心所中思爲自性意思業故
001_0220_c_18L言出果者有其二義一依成唯識
001_0220_c_19L約諸法以明生果二依攝論就十
001_0220_c_20L一識以辨生果言通約諸法以明生
001_0220_c_21L果者名言習氣通生百法而差別
001_0220_c_22L九十四法本質及影皆名言生
001_0220_c_23L六種無爲本影不同本質六種
001_0220_c_24L「果」異作「科」

001_0221_a_01L원성실성의 무위법에는 ‘생生’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상으로서의 여섯 종류는 명언에서 일어나고,411) (이러한) 의타기의 무위법은 실제로는 유위법이니, 인因에 의탁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유식론』에서 ‘명언습기는 유위법의 각각의 직접적 종자를 말한다’고 하였다.

  유위법 중에서 실법實法은 체가 있으므로 종자에서 생긴다고 말할 수 있지만, 불상응행법 등은 이미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인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실제로는 가법假法은 종자에서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2권에서 “가법은 무無와 같으니 인연으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12)라고 하였다.
  가법에는 이미 인연의 의미가 없어서 오직 가법일 뿐이고 또한 (인연으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가법을 실법에 종속시켜서 가법의 종자는 인연에서 생긴다고 설한 것이다.413) 따라서 『성유식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名·상相·분별分別의 세 종류 습기414) 중에, 아견습기는 자신自身·타신他身의 백법의 차별을 생기게 하고, 유지습기는 백법의 선취善趣·악취惡趣의 차별을 생기게 한다.415)
무위의 가법은 앞에 준해서 생각해야 한다.416)
열한 가지 식에 의거해서 과를 내는 것을 설명한다고 했는데, 예를 들면 『섭대승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중에서 신身·신자身者·수자受者의 식識, 피소수식彼所受識, 피능수식彼能受識, 세식世識, 수식數識, 처식處識, 언설식言說識, 이 식들은 명언훈습종자에서 생긴 것이다. 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 이것은 아견훈습종자에서 생긴 것이다. 선취악취사생식善趣惡趣死生識, 이것은 유지훈습종자에서 생긴 것이다.417)418) 자세한 것은 그 논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 습기를 사연으로 분별함
사연으로 분별한다고 했는데, 명언습기는 바른 인연因緣이고 그 밖의 두 종류 습기는 증상연增上緣이다.419) 따라서 『성유식론』 제8권에서 “두 종류 명언을 따라서 훈성熏成된 종자는 유위법 각각의 인연이 된다.”420)고 하였다. 또 그 논에서 부연하길, “아집습기와 유지습기는

001_0221_a_01L從種生圓成無爲無生義故影像六
001_0221_a_02L從名言起依他無爲據實有爲
001_0221_a_03L因生故故唯識論云名言習氣
001_0221_a_04L有爲法各別親種有爲法中實法
001_0221_a_05L有體可言種生不相應等旣無實體
001_0221_a_06L如何因起解云據實假法不從種生
001_0221_a_07L故成唯識論第二卷云假法如無
001_0221_a_08L因緣故解云假法旣非因緣義唯假
001_0221_a_09L亦非所生然以假從實說爲假
001_0221_a_10L種從因緣生故唯識論第二卷云
001_0221_a_11L相分別三種習氣我見習氣能生自
001_0221_a_12L他身中百法差別有支習氣能生百
001_0221_a_13L法善惡趣別無爲假法准前應思
001_0221_a_14L就十一識辨生果者如攝大乘論第
001_0221_a_15L [163] 卷云此中若身身者受者識彼所
001_0221_a_16L受識彼能受識世識數識處識
001_0221_a_17L說識此由名言熏習種子若自他差
001_0221_a_18L別識此由我見熏習種子若善趣惡
001_0221_a_19L趣死生識此由有分 [164] 熏習種子廣如
001_0221_a_20L彼釋

001_0221_a_21L
言四緣分別者名言習氣是正因緣
001_0221_a_22L餘二習氣增上緣故成唯識第八卷
001_0221_a_23L隨二名言所熏成種作有爲法各
001_0221_a_24L別因緣又彼復云應知我執有支習

001_0221_b_01L차별적 결과에 대해 증상연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421)고 하였다. 자세하게 분별하면 『성유식론』 제8권의 소疏에서 설한 것과 같다.

㉮ 육취·사생에 의거해 몸의 생기에 대해 간략히 밝힘
종자식을 밝힌 곳에서 경문을 구별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육취와 사생에 의거해서 ‘몸의 생기’를 간략히 밝힌 것이고, 나중의 “이 중에서” 이하는 종자식에 의거해서 수생受生의 차별을 자세히 밝힌 것이다.
이 경문은 처음에 해당한다.

● 육취
“육취六趣”라고 한 것은, 다음 경문에서 설한 것처럼 나락가那落迦(ⓢ naraka)·방생傍生(ⓢ tiryañc)·아귀餓鬼(ⓢ preta)·천天(ⓢ deva)·아소락阿素洛(ⓢ asura)·인人(ⓢ manuṣya)이다. 그런데 이 육취에 대해 여러 종에서 다르게 말한다.
살바다종에 의하면 오직 오취만 세운다. 따라서 『대비바사론』 제172권에서는 ‘계경에서 설한 것처럼 오취란 나락가·방생·아귀·인·천이다’라고 하였다.422)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다른 부파는 아소락(아수라)을 여섯 번째 취로 안립하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계경에서 오직 오취만 있다고 설하기 때문이다.”423) 자세하게 설하면 그 논과 같다.

  그렇다면 아소락은 어떤 취에 속하는가?
  『대비바사론』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한편에서는 천취天趣라고 하고, 평가정의評家正義424)에 따르면 귀취鬼趣에 속하는 것이다.425) 『순정리론』 제21권과 『구사론』 제8권도 『대비바사론』과 거의 동일하게 말한다.
경부종에 따르면 오직 오취만 세운다. 따라서 『성실론』 제14권에서는, 업에 여섯 종류가 있으니 오취업五趣業과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하였다.426)
이제 대승에 의하면, 어떤 곳에서는 오직 오취五趣라고 하니, 예를 들면 『불지경』과 『유마경』 등이다.

  그렇다면 아소락은 어떤 취에 속하는가?
  『불지경론』 제6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아소락들의 종류는 일정하지 않다. 어떤 것은 천天이고 어떤 것은 귀鬼이며 어떤 것은 다시 축생이기도 하다. 따라서 따로 설하지 않는다.”427)
어떤 곳에서는 육취라고 설하니, 예를 들면 이 『해심밀경』과 『법화경』 등이다.
어떤 곳에서는 오취 혹은 육취라고 설한다.428)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오취를 세우는 것이 바르다. 따라서 제4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모든 비천非天(아소락)429)은 천취에 속함을 알아야 한다.

001_0221_b_01L於差別果是增上緣若廣分別
001_0221_b_02L成唯識論第八疏就種識中文別有
001_0221_b_03L初約趣生略明身分生起後於
001_0221_b_04L中下依種子識廣辨受生差別此卽
001_0221_b_05L初也言六趣者如下經說那落迦
001_0221_b_06L傍生餓鬼阿素洛然此六
001_0221_b_07L諸宗不同依薩婆多宗唯立五
001_0221_b_08L故大婆娑第一百七十二云如契
001_0221_b_09L經說五趣謂那落迦傍生餓鬼
001_0221_b_10L又云謂有餘部立阿素洛爲第
001_0221_b_11L六趣彼不應作是說契經唯說有五
001_0221_b_12L趣故廣說如彼若爾阿素洛何
001_0221_b_13L趣所攝婆沙有二說一云天趣
001_0221_b_14L評家正義鬼趣所攝正理二十一
001_0221_b_15L舍第八大同婆沙依經部宗唯立
001_0221_b_16L五趣故成實論第十四云業有六種
001_0221_b_17L謂五趣業及不定業今依大乘
001_0221_b_18L處唯五如佛地經及維摩等
001_0221_b_19L阿素洛何趣所攝依佛地經
001_0221_b_20L第六卷云諸阿素落種類不定
001_0221_b_21L或鬼或復傍生故不別說有處
001_0221_b_22L說六如卽此經及法華經等或有處
001_0221_b_23L說或五或六若依瑜伽立五爲正
001_0221_b_24L故第四云又諸非天當知天趣所攝

001_0221_c_01L그런데 마음속에 대개 속이거나 홀리려는 뜻을 품고서 아첨과 기만을 많이 하기 때문에 제천諸天이 깨끗한 법기法器인 것과는 같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 어떤 때는 경에서 별도의 취라고 설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천취이다.”430) 또 제2권에서는 “이와 같이 안립된 세계가 성립하고 나서 이 중에 오취를 얻을 수 있으니, 나락가·방생·아귀·인·천을 말한다.”431)고 하였다.
『대지도론』에 의하면 육취를 세우는 것이 바르다. 따라서 제30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마하연(대승) 중에 『법화경』에서는 육취의 중생이 있다고 설하니, 여러 가지 뜻을 살펴볼 때 마땅히 육도가 있다. 다시 선취와 악취를 구별하기 때문에 육도가 있다. 선취善趣에 상·중·하가 있기 때문에 삼선도三善道인 천·인·아수라의 도가 있고, 악취惡趣에 상·중·하가 있기 때문에 지옥·축생·아귀의 도가 있다.”432) 자세하게 설하면 그 논과 같다. 또 제1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은 분명하게 오도가 있다고 설하신 것은 아니다. 오도라고 설한 것은 설일체유부의 승려들이 설한 것이다. 파차불투로부婆嗟弗妬路部(독자부)433) 승려들은 육도가 있다고 설한다. 또 육도가 있어야만 한다. 어째서인가? 삼악도는 한결같이 죄가 많은 곳이다. 만약 복이 많고 죄가 적으면 이를 ‘아수라’라고 하는데, 태어나는 곳이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육도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434)

  염마왕琰摩王435)은 어떤 취에 속하는가?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귀취鬼趣에 속하니, 따라서 그 논의 제172권에서는 “『시설론』에서 설하길 ‘지금 귀세계鬼世界의 왕을 염마라고 하는 것과 같다.’”436)고 하였다. 또 “섬부주 아래로 5백 유선나 되는 곳에 염마왕의 세계가 있는데 이는 모든 귀鬼들이 본래 머무는 곳이니, 여기로부터 유전하여 또한 그 밖의 곳에 있기도 하다.”437)고 하였다.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지옥취地獄趣에 속하니, 따라서 제2권에서는 “어떤 유정은 잡염을 초감해 내는 증상된 업으로 인해 나락가 중에 태어나서 정식왕靜息王(염마왕)438)이 되기도 한다.”439)고 하였다.

● 사생
‘난생卵生과 태생胎生과 습생濕生과 화생化生’이라 한 것은 사생四生에 해당한다.

001_0221_c_01L然由意思 [165] 多懷詐約 [166] 諂誑多故不如
001_0221_c_02L諸天爲淨法器由此因緣有諸 [167] 經中
001_0221_c_03L說爲別趣實是天趣 [168] 又第二元
001_0221_c_04L是安立世界成已於中五趣可得
001_0221_c_05L那落伽傍生餓鬼依智度
001_0221_c_06L立六爲正故第三十云又摩訶
001_0221_c_07L衍中法華經說有六趣衆生觀諸義
001_0221_c_08L [169] 應有六道復次分別善惡故有
001_0221_c_09L六道善有上中下故有三善道
001_0221_c_10L人阿修羅惡有上中下故有地獄畜
001_0221_c_11L生餓鬼道廣說如彼又第十云 [170]
001_0221_c_12L不分明說有五道說五道者是一切
001_0221_c_13L有部僧所說婆嗟弗姡 [171] 路部僧說有
001_0221_c_14L六道復次應有六道何以故三惡
001_0221_c_15L道一向是罪處若福多罪少是名阿
001_0221_c_16L脩羅生處應別以是故應言六趣 [172]
001_0221_c_17L琰摩王何趣所攝依大婆沙
001_0221_c_18L趣所攝故彼一百七十二云施設
001_0221_c_19L論說如今時鬼世界王名琰摩又云
001_0221_c_20L瞻部洲下五百踰繕那有琰摩王界
001_0221_c_21L是一切鬼本所住處從彼流轉亦在
001_0221_c_22L餘處若依瑜伽地獄趣攝故第二云
001_0221_c_23L隨一有情由感雜染增上業生在那
001_0221_c_24L落迦中作靜息王言卵胎濕化生者

001_0222_a_01L
『유가사지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생이란 무엇인가? 알을 까고 나오는 모든 유정을 말한다. 그것은 또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거위·기러기·공작·앵무새·사리조舍利鳥 등이다. 태생이란 무엇인가? 태에 얽혀 있다가 태를 가르고 나오는 모든 유정을 말한다. 그것은 또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코끼리·말·소·나귀 등이다. 습생이란 무엇인가? 일종의 습기로 인해서 태어나는 모든 유정을 말한다. 그것은 또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벌레·나무좀·날아다니는 나방 등이다. 화생이란 어떤 것인가? 업이 증상되었기 때문에 육처를 완전히 갖추고 태어나는 모든 유정을 말한다.440) 혹은 완전히 갖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또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천과 나락가의 전부, 그리고 인·귀·축생의 일부다.”441)
자세히 분별하면 『비담론』 제8권, 『현종론』 제12권, 『구사론』 제8권, 『순정리론』 제22권, 『대비바사론』 제120권과 같다.

  이전에 육취를 설했는데, 어째서 다시 네 종류 생을 설했는가?
  『구사론』 제8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설족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사생은 오취를 포함하지만 오취가 사생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른바 중유中有442) 때문이다.443)444) 이런 도리에 따르면, 천 등의 육취는 사생을 다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거듭해서 난생 등의 사생을 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시 육취를 설한 것인가?
  선취와 악취에서 생을 받는 것(受生)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해 육취를 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문에서는) 어째서 계는 설하지 않았는가?
  계는 유정 아닌 것(非情)에도 통하기 때문에 여기서 설하지 않았다. 진제 삼장도 또한 이와 동일한 뜻으로 말하였다.
육취와 사생의 의미는 『별장』에서 설한 것과 같다.
그런데 이 경문을 해석하자면, 그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취의 생사에서 저 각각의 유정은”이라 한 것은 버려지는 몸(所捨身)을 밝힌 것이고, “저 각각의 유정 무리 가운데 떨어져서”라고 한 것은 받는 몸(所受身)을 밝힌 것이다. 받는 몸에 본래 두 종류가 있다.

001_0222_a_01L卽是四生瑜伽第二云云何卵生
001_0222_a_02L諸有情破▼(穀-禾+卵)而出彼復云何如鵝
001_0222_a_03L鴈孔雀鸚鵡舍利鳥等云何胎生
001_0222_a_04L諸有情胎所纒裏1) [18] [173] 胎而出彼復
001_0222_a_05L云何如象馬牛驢等云何濕生
001_0222_a_06L諸有情隨因一種濕氣而生彼復云
001_0222_a_07L如虫蝎飛蛾等云何化生謂諸
001_0222_a_08L有情業增上故具足六處而生或復
001_0222_a_09L不具彼復云何如天那落迦全
001_0222_a_10L人鬼傍生一分若廣分別如毗曇第
001_0222_a_11L顯宗十二俱舍第八順正理二
001_0222_a_12L十二婆沙一百二十前說六趣
001_0222_a_13L何故復說四種生耶俱舍第八云
001_0222_a_14L施設足論作如是說四生攝五趣
001_0222_a_15L五攝四生不攝者何所謂中有
001_0222_a_16L是道理天等六趣攝生不盡故
001_0222_a_17L重說卵等四生若爾何故更說
001_0222_a_18L六趣欲顯善惡受生差別故說
001_0222_a_19L六趣若爾何故不說界耶
001_0222_a_20L通非情故此不說眞諦三藏亦同
001_0222_a_21L此意六趣四生義如別章然釋此
001_0222_a_22L有其兩解一云於六趣生死彼
001_0222_a_23L彼有情者明所捨身墮彼彼有情衆
001_0222_a_24L中者辨所受身所受身中自有二

001_0222_b_01L첫째는 육취의 몸이고, 둘째는 사생의 몸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신분(몸)이 생겨난다(身分生起).”는 말은 앞의 두 종류에 공통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받는 몸이란 모두 사생에 해당한다. “저 각각의 유정 무리 가운데 떨어져서”라는 것은 총체적 원인(總因)을 밝힌 것이고, “어떤 것은 난생卵生으로……”라고 한 것은 사생을 따로따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금강선론』에서는 난생 등은 수생의 차별이고, 유색有色이나 (무색無色) 등은 거침·미세함의 차별이라고 하였다.≻445) 이 설명에 따르면, ‘신분(몸)이 생겨난다’는 것은 사생에 의거해 설한 것이다.

㉯ 종자식에 의거해 수생의 차별에 대해 자세히 밝힘

  이 중에서 맨 먼저 일체종자심식이 성숙하고, 전전하여 화합하며, 증장하고 광대해지니,

  이하는 두 번째로 종자식에 의거해서 수생受生의 차별을 자세히 밝힌 것이다.446)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수생의 분위分位의 차별을 밝힌 것이고, 나중은 종자식이 두 가지 집수에 의지함을 밝힌 것이다.

a. 수생의 분위의 차별을 밝힘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경문에 세 개의 절이 있다. 처음에는 종자식의 성숙을 밝혔고, 다음에는 전전하여 화합함을 밝혔으며, 세 번째로 증장하고 광대해짐을 밝혔다.

● 종자식의 성숙, 전전화합, 증장광대
“이 중에서 맨 먼저 일체종자심식이 성숙하고”라는 것은 종자식의 성숙에 대해 밝힌 것이다. 말하자면 이 취趣에 태어나서 생을 받는 단계(受生位)에서 최초로 생을 이어 주는(結生) 일체종자심식이 성숙하는데, 처음 생을 이을 때 종자식이 성숙하여 갈라람羯羅監(ⓢ kalala)을 이루는 것을 일컬어 ‘생을 잇는다’고 한다.
따라서 『유가사지론』 제1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때 부모의 탐애가 둘 다 절정에 이르러 최후에 결정적으로 각기 한 방울의 농후한 정혈을 배출하면 두 방울이 화합해서 모태 안에 머물면서 합쳐져 한 덩어리가 되는데, 이는 마치 숙성된 우유가 응결했을 때와 유사하다. 바로 이곳에, ‘일체종자의 이숙이 섭장되고 (그것을) 집수하는 소의로서의 아뢰야식’447)이 화합하고 의탁한다.
‘화합하고 의탁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말하자면 이 배출된 농후한 정혈이 한 덩어리로 합해지면

001_0222_b_01L一六趣身二四生身若依此釋
001_0222_b_02L身分生起通前二類一云所受身
001_0222_b_03L皆是四生墮彼彼有情衆中 [174]
001_0222_b_04L其總因或有卵生等者別顯四生
001_0222_b_05L金剛仙論云卵生等者受生差別
001_0222_b_06L色等者麤細差別若依此說身分
001_0222_b_07L生起依四生說

001_0222_b_08L
於中最初一切種子心識成熟展轉和合
001_0222_b_09L增長廣大

001_0222_b_10L
釋曰自下第二約種子識廣辨受生
001_0222_b_11L差別於中有二初明受生分位差別
001_0222_b_12L2) [19] 明種 [175] 依二執受此卽初也文有
001_0222_b_13L三節初明種識成熟次展轉和合
001_0222_b_14L增長廣大

001_0222_b_15L
言於中最初一切種子心識成熟者
001_0222_b_16L此明種識成熟謂於此趣生受生位
001_0222_b_17L最初結生一切種子心識成熟
001_0222_b_18L結生時種識成熟成羯羅監名爲
001_0222_b_19L結生故瑜伽論第一卷云爾時父母
001_0222_b_20L貪愛俱極最後決定各出一滴濃厚
001_0222_b_21L精血二滴和合住母胎中合爲一
001_0222_b_22L猶如熟乳凝結之時當於此處
001_0222_b_23L切種子異熟所攝執受所依阿賴耶
001_0222_b_24L和合依託3) [20] [176] [177] 出濃厚精血成

001_0222_c_01L‘전도의 연(顚倒緣)’과 더불어 중유中有가 함께 소멸하는데,448) 소멸과 동시에 일체종자식의 공능의 힘으로 인해 그 밖의 미세한 근根 및 대종大種이 화합하여 생겨나고, 또 그 밖의 유근有根의 동분同分449)도 정혈이 화합해서 생겨난다.450) 이 시기에 있을 때 ‘식이 이미 머물며 결생상속結生相續451)한다’고 설하니, 즉 이것을 갈라람위羯羅藍位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갈라람 안에 모든 근들의 대종이 있는데, (처음에는) 오직 신근身根 및 근의 의지처(根所依處)의 대종들만 구생俱生한다.452) (그 다음에) 곧 이 신근과 구생한 모든 근들의 대종의 힘으로 인해 안근 등 모든 근들이 차례로 생겨나고, 또 이 신근과 구생한 근의 의지처(부진근)의 대종의 힘으로 인해 모든 근의 의지처들이 차례대로 생겨난다. 저 모든 근 및 의지처가 다 갖추어져 생겨나기 때문에 ‘원만한 의지처의 성취(圓滿依止成就)’453)라고 하는 것이다.454)
나아가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라람은 식識이 최초로 의탁하는 곳이니 곧 심장(肉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식은 이곳에 최초로 의탁했다가 곧 이곳에서 최후로 놓아진다.”455)
『구사론』 제9권에 의하면 “어떤 이는 말하길 ‘정혈이 근의 소의를 이룬다’고 하니, 말하자면 전찰나의 무근無根인 자가 중유와 동시에 멸하고 후찰나의 유근有根인 자가 무간으로 이어서 생겨난다.456)457)고 하였고, 또 “어떤 다른 논사는 말하길 ‘별도로 대종이 생겨나니 마치 버려진 똥에 의지하여 별도로 벌레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고 한다.”458)고 하였다.
『유가사지론』에서 설한 것은 (『구사론』의) 첫 번째 논사의 해석과 동일한데,459) 『순정리론』 제24권에 따르면 나중의 설을 정설로 취한다. 자세한 것은 그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
“전전하여 화합하며”라고 한 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초로 생을 받을 때 식識이 연이 되어 근의 대종 등이 전전하며 화합하는 것이다.460) 따라서 『유가사지론』 제1권에서는 “곧 일체종자식의 공능의 힘으로 인해

001_0222_c_01L合一段與顚倒緣中有俱滅 [178]
001_0222_c_02L由一切種子識功能力故有餘微細
001_0222_c_03L根及大種和合而生及餘有根同分
001_0222_c_04L精血和合轉 [179] 於此時中說識已
001_0222_c_05L住結生 [180] 卽此名爲羯羅藍位此羯
001_0222_c_06L羅藍中有諸根大種唯與身根及根
001_0222_c_07L所依處大種俱生卽由此身根俱生
001_0222_c_08L諸根大種力故眼等諸根次第當生
001_0222_c_09L又由此身根俱生根所依處大種力故
001_0222_c_10L諸根依處次第當生由彼諸根及所
001_0222_c_11L依處具足生故名得圓滿依止成熟 [181]
001_0222_c_12L乃至彼云羯羅藍識最初託處卽名
001_0222_c_13L肉心如是識 [182] 此處最初託卽從此
001_0222_c_14L處最後捨依俱舍論第九云有言
001_0222_c_15L血卽成根依謂前無根中有俱滅
001_0222_c_16L有根者無間續生又云有餘師云
001_0222_c_17L生大種如依葉糞別有虫生瑜伽所
001_0222_c_18L同初師釋若依順正理二十四
001_0222_c_19L後說爲正廣如彼說

001_0222_c_20L
言展轉和合者此有兩釋一云
001_0222_c_21L受生之時以識爲緣根大種等展轉
001_0222_c_22L和合故瑜伽第一卷云卽由一切種
001_0222_c_23L「部」疑「剖」「復」疑「後」「謂」下異有
001_0222_c_24L「何和合依託謂」

001_0223_a_01L그 밖의 미세한 근 및 대종들이 화합하여 생겨난다.”461)는 등의 말을 하였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과 갈라람이 전전하며 화합하는 것이다.462) 따라서 『섭대승론』에서는 “모태 안에서 식과 갈라람이 다시 서로 화합한다.”463)고 하였다. 무성의 『섭대승론석』 제3권에서는 “이숙식과 그 적백赤白(정혈이 한 덩어리로 뭉친 것)이 안온과 위험을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464)고 하였다. 세친이 『섭대승론석』에서 말한 뜻도 무성과 동일하다.양조梁朝 『섭대승론석』 제3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 식은 가라라柯羅邏(갈라람)에 의탁하여 모태 안에서 변하고 화합해서 생을 받는다. 이 식은 곧 의식意識이다. 동일한 때에 가라라와 상응하기 때문에 ‘가라라에 의탁한다’고 하였다. 이 과보식果報識은 이전의 염오식(의식)과는 다르기 때문에 ‘변한다’고 하였고, 전생의 업(宿業)의 공능으로 인해 (사대의) 풍風을 일으켜서 적백(정혈)과 화합하여 식과 합해지도록 하기 때문에 ‘화합한다’고 하였으니, 즉 이것을 일컬어 ‘생을 받는다(受生)’고 한다.”465)
“증장하고 광대해지니”라고 한 것에 대해 또한 두 가지 해석이 있다.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전의 ‘전전하며 화합했던(展轉和合)’ 힘으로 인해 갈라람 등이 점차로 증장하는 단계(位)에서 근의 대종 등이 증장하고 광대해진다.≻466)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합하기 때문에 명名·색色467)이 점차 증장하고 광대해진다. 따라서 『유가사지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갈라람이 점차 증장할 때 명·색이 평등하게 증장하고 둘 다 점점 광대해진다. 이와 같이 증장하여 나아가 의지처(신체)가 원만해진다. 마땅히 알라. 이 중에서 지계地界로 인해 ‘의지처를 만드는 색(依止造色)’이 점점 증장하고 광대해진다. 수계水界로 인해 유지되어 (흩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화계로 인해 성숙해지고, 그것이 견고해지게 하니, 물기를 없애기 때문이다.468) 풍계로 인해 지절肢節들이 나뉘어 각기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469)

● 수생의 분위
분위分位에는 두 종류 분위가 있다. 첫째는 태장팔위이고, 둘째는 통상팔위이다.

◉ 태장팔위胎藏八位
태장팔위란 갈라람 등을 말한다.470) 따라서 『잡집론』 제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다음부터 근이 점차 생장하니, 예를 들어 연기緣起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471)……그러므로 열거해서 게송으로 말한다.

最初羯羅藍      최초로 갈라람羯羅藍이 생기고
次生遏部曇      다음에 알부담遏部曇이 생기며
從此生閉尸      이로부터 폐시閉尸가 생기고
閉尸生鍵南      폐시에서 건남鍵南이 생기며

001_0223_a_01L子識功能力故有餘微細根及大種
001_0223_a_02L和合而生等一云識與羯羅藍
001_0223_a_03L轉和合故攝大乘論云於母胎中
001_0223_a_04L羯羅藍更相和合無性釋論第三云
001_0223_a_05L異熟與其赤白同一安危世親釋論
001_0223_a_06L意同無性梁朝攝論第三云論云 [183] 是識託柯羅
於母胎中變合受生釋曰是識
001_0223_a_07L即是意識於一時中與柯羅邏相應故言託柯
羅邏此果報識異前染汙識故言變由宿業功
001_0223_a_08L能起風和合赤白令與識
[184] 即名此爲受生

001_0223_a_09L言增長廣大者亦有兩釋一云
001_0223_a_10L前展轉和合力故羯羅藍等漸增長
001_0223_a_11L根大種等增長廣大一云由和
001_0223_a_12L合故名色漸漸增長廣大故瑜伽第
001_0223_a_13L二云又羯羅藍漸增長時名之與色
001_0223_a_14L平等增長俱漸廣大如是增長乃至
001_0223_a_15L依止圓滿應知此中由地界故依止
001_0223_a_16L造色漸漸增廣由水界攝持故 [185] 由火
001_0223_a_17L界成熟故 [186] 令其 [187] 堅梗 [188] 由無閏 [189]
001_0223_a_18L風界故分別支 [190] 各安其所若分
001_0223_a_19L位者有二種位一者胎藏八位
001_0223_a_20L者通相八位胎藏八位謂羯羅藍等
001_0223_a_21L故雜集第六云自此已後根漸生長
001_0223_a_22L如緣起 [191] 故列頌云

001_0223_a_23L
最初羯羅藍次生遏 [192] 部曇

001_0223_a_24L從此生閉尸閉尸生鍵南

001_0223_b_01L次鉢羅賖佉      다음에 발라사구鉢羅賒佉가 생기네
後髮毛爪等      마지막으로 머리털·손톱 등과
及色根形相      또 색근과 형상이
漸漸而生長      점차로 나고 자라네472)

또 『유가사지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이 태장팔위는 차별되는데, 팔위란 어떤 것인가? 갈라람위羯羅藍位, 알부담위遏部曇位, 폐시위閉尸位, 건남위鍵南位, 발라사구위鉢羅賖佉位, 발모조위髮毛爪位, 근위根位, 형위形位를 말한다. 만약 이미 응결되었는데 전箭의 속처럼 성기다면 ‘갈라람’이라 이름한다. 만약 겉과 속이 마치 우유(酪) 같고 아직 살(肉)이 붙은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면 ‘알부담’이라 이름한다. 만약 이미 살이 붙었는데 지극히 유연하다면 ‘폐시’라고 이름한다. 만약 이미 단단하고 두터워져서 조금이라도 마찰(摩觸)에 견딜 수 있으면 ‘건남’이라 이름한다. 곧 이 살덩이가 증장하여 사지로 나뉜 모습이 나타나면 ‘발라사구’라고 이름한다. 이 이후에 머리털·손톱이 나타나면 이런 위(발모조위)라고 이름한다. 이 이후에 안근 등이 생겨나면 근위라고 이름한다. 이 이후부터는 그것의 소의처(신체)가 분명하게 현현하므로 형위라고 이름한다.”473)
대당 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라람은 여기 말로 ‘화합和合’이라 한다. 알부담頞部曇은 여기 말로 포胞라고 한다. 폐시는 여기 말로 응혈凝血이라 한다. 건남은 여기 말로 견후堅厚라고 한다. 발라사구는 여기 말로 지분支分이라 하니, 발라는 여기 말로 ‘분’이고 사구는 여기 말로 ‘지’이다.≻ 진제 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식本識이 부모님의 유체遺體(정혈)와 화합하는 것을 ‘생을 받는다(受生)’고 한다. 태장 안에서는 간략히 다섯 단계가 있다. 첫째는 가라라柯羅邏이니, ‘응활凝滑’이라 번역한다. 식識이 부모의 정혈과 화합하여 마치 묽은 우유(薄酪)처럼 되면 곧 ‘근根’이라고 집착하는데, 이때를 일컬어 ‘최초로 생을 받는다’고 한다. 둘째로 14일째까지 알호타頞呼陀라고 하고,474) ‘태결胎結’이라 번역한다. 처음에는 하나의 태에 묶여서 응활(가라라, 갈라람) 가운데 있는데, 마치 엉긴 소蘇가 하얀 낙유酪乳에 떠 있는 것과 같다. 셋째로 21일째까지 폐시라고 하고, ‘육단肉團(살덩이)’이라 번역한다. 남자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으며 여자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다. 살이 여전히 조금 부드러운 상태다. 넷째로 28일째까지 가하나伽訶那라고 하고, ‘견실堅實’이라 번역한다. 이때 살덩이가 비로소 단단해진다. 다섯째로 35일째까지 파라사구波羅捨佉라고 하고, ‘지지枝枝’라고 번역한다. 이때 비로소 머리와 발과 손과 다리 등의 모습이 나타나고, 비로소 업풍業風이 불어 아홉 구멍을 찢어 열리게 해서 매우 고통스런 느낌을 발생시킨다. 그 이후(36일 이후)로는 근육과 뼈와 머리카락과 손톱 등이 있게 된다.≻ 양梁 『섭론소攝論疏』 제5권의 설과 같다.

  갈라람 등의 팔위는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야 원만해지는가?
  『유가사지론』 제2권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그 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태 안에서 266일 지나면 이 태장에 모든 사지들이 다 갖추어지고,

001_0223_b_01L次鉢羅賖 [193] 後髮毛爪等

001_0223_b_02L及色根形相漸漸而生長

001_0223_b_03L
又瑜伽第二云復次此胎藏八位差
001_0223_b_04L何等爲八謂羯羅藍位遏部曇
001_0223_b_05L閉尸位鍵南位鉢羅賒佉位
001_0223_b_06L毛爪位根位形位若已結凝箭內
001_0223_b_07L名羯羅藍若表裏如酪未至肉位
001_0223_b_08L名遏部曇若已成肉仍極柔煗 [194] 名閉
001_0223_b_09L若已堅厚稍勘 [195] 摩觸名爲鍵南
001_0223_b_10L此肉團 [196] 增長支分相現名鉢羅賒佉
001_0223_b_11L從此以後髮毛爪現卽名此位
001_0223_b_12L此以後眼等 [197] 名爲根位從此以後
001_0223_b_13L彼所依處分別 [198] 顯現名爲形位大唐三
藏云
001_0223_b_14L羅藍此云和合頞部曇此云胞閏尸此云凝血
鍵南此云堅厚鉢羅奢佉此云支分鉢羅此云分
001_0223_b_15L奢佉此云支眞諦三藏云本識與父母遺體和合
名爲受生於胎藏中略有五位一者柯羅邏
001_0223_b_16L爲凝滑識與父母精血和合如薄酪即執爲根
爾時名爲初受生二者第二七日名頞呼陀
001_0223_b_17L爲胎結始有一胎結在凝滑中如凝蘇在白酪乳
三者第三七日名閉尸翻爲肉團男則上闊
001_0223_b_18L下狹女則下闊上狹肉猶少軟四者第四七日
名伽訶郡翻爲堅實爾時肉團始堅强五者第
001_0223_b_19L五七日名彼 [199] 羅捨佉翻爲技技爾時始有頭足
手脚等相貌方有業風吹破開九孔生大苦受
001_0223_b_20L後以去則有觔肉骨髮爪
梁攝論疏第五卷說
羯羅藍等八
001_0223_b_21L經幾許時1) [21] 得圓滿如瑜
001_0223_b_22L伽論第二卷說彼云又於胎中
001_0223_b_23L三十八七日此之胎藏一切支分

001_0223_c_01L이로부터 다시 4일이 지나서 비로소 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박가범께서 『입태경入胎經』에서 자세하게 설하신 것과 같다. 이것은 ‘지극히 원만하게 갖추어진 자(極滿足者)’를 설하신 것인데, 간혹 9개월을 경과하거나 이보다 더 지나기도 한다. 오직 8개월만 경과했어도 ‘원만하다(圓滿)’고 하지만 ‘지극히 원만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7개월이나 6개월이 경과했다면 ‘원만하다’고 하지 않는다. 혹은 더 결감되기도 한다.”475)
『오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것을 일컬어 태어나는 고통(生苦)이라 하는가? 사람이 죽을 때 정신精神이 어떤 도道에 가게 될지 알지 못하고, 아직 태어날 곳을 얻지 못하며, 아울러 중음中陰의 형상을 받는데, 그 21일째까지는 부모가 화합하면 곧장 수태될 곳에 들어온다. 첫 번째 7일간은 마치 묽은 우유 같다. 14일까지는 마치 걸쭉해진 우유(稠酪) 같다. 21일까지는 마치 엉긴 소蘇 같다. 28일까지는 마치 고기 조각 같다. 35일까지는 다섯 개의 포皰가 성숙하고,476) 교풍巧風(業風)이 배 속으로 들어가 그 신체를 불어 대면 육정六情(여섯 가지 근들)이 열려서 커진다. 엄마 배 속에서 생장生藏의 아래이고 숙장熟藏의 위인 곳에 있는데, 어미가 한 잔의 뜨거운 음료를 마시면 그의 신체에 내리부어져서 마치 가마 속 끓는 물에 들어간 것 같고, 어미가 한 잔의 차가운 물을 마시면 또한 차가운 얼음이 몸을 베는 것 같으며, 어미가 배부를 때는 그의 몸통을 짓눌러서 말할 수 없이 아프고, 어미가 굶주릴 때는 배 속이 헐렁해져서 또한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이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 달수가 다 차서 태어나려 할 때는 머리가 산문産門을 향하는데 옥죄는 것이 마치 두 산 골짜기에 돌이 낀 것과 같다. 태어나려고 할 때 어미가 위험하면 아비가 두려워하고, 태어나서 풀 위에 떨어질 때 신체가 섬세하고 부드러워서 풀이 그 몸에 닿으면 마치 칼날을 밟는 것 같아 갑자기 소리를 놓아 크게 울부짖는다. 이것이 바로 큰 고통이다.”477)
또 『대집경』 제24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어나는 고통을 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업의 인연을 따라서 부모가 화합하면, 최초로 의식意識을 받는 가라라歌羅羅일 때는 그 몸이 마치 정력자亭歷子478)만 하다. 이때는 아직은 들어가고 나오는 기식氣息(숨)은 있지 않다.”479)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라라 시기는 42일까지 지속되고, 42일부터 바꿔서 알부타頞浮陀라고 이름한다. 이때 형색은 마치 작은 대추(小棗)만 하고 49일까지 지속되다가 바꿔서 가나伽那라고 이름한다. 이때 형색은 마치 호두 껍데기(胡桃㲉)만 하고 56일까지 지속되다가 바꿔서 폐시閉尸라고 부른다. 형색은 마치 빈바라 과일(頻婆羅菓)480)만 하고 이때 몸 주변에 다섯 개의 포胞가 튀어나오니, 즉 머리와 양손과 두 발이다. 91일까지는 비로소 장腸 모양을 갖게 되고, 140일까지는 남녀의 근이 구별되며, 147일까지는 뼈마디가 비로소 생긴다. 나아가 252일까지는 그 몸에 혈액·살·털·근들이 갖추어지고, 266일까지는 몸의 사지가 갖추어진다. (그 다음에) 4일 밤낮을 태 안의 냄새 나는 곳에 머물러 있는데, 이때 다시 본생本生의 일을 기억해 낸다. 기억해 내고서 시름겹게 괴로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말한다. ‘내가 태 밖으로 나가면 마땅히 선법을 닦으리라. 바라건대, 나중에 다시는 이런 곳에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고 생을 받는 일을 멀리 떠나리라.’ 비로소 모태 밖으로 나오면, 이때는 온몸이 압박받는 고통을 받고, 바람이 들어와 몸에 닿으면 또한 다시 고통을 받는다. 몸이 처음에 땅에 닿아서 물로 씻어 주면 다시 큰 고통을 받으니, 마치 지옥과 같다. 이때 다시 전생의 일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니, 태어나서 다시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뒤따라 다니면서 놓아주질 않는 것이다.”481) 자세하게 설하면 그 경과 같다.
(태장팔위를) 자세하게 분별하면 『해탈도론』 제7권 및 『입태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 통상팔위通相八位
통상팔위란 예를 들어 『유가사지론』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팔위란 무엇인가?

001_0223_c_01L悉具足從此以後復經四日方乃
001_0223_c_02L出生如薄伽梵於入胎經廣說此說
001_0223_c_03L極滿足者或經九月或復過此 [200]
001_0223_c_04L經八月此名圓滿非極圓滿若經
001_0223_c_05L七月六月不名圓滿或復缺減五王
經云
001_0223_c_06L何謂生苦人死之時不知精神趣向何道未得
生處 [201] 受中陰之形至其三七日中父母和合
001_0223_c_07L便來受胎一七日如薄酪二七日如裯 [202] 三七
日如凝蘇 [203] 四七日如肉團 [204] [205] 皰成熟 [206] 巧風入腹
001_0223_c_08L吹其身體六情開張在胎 [207] 生藏之下熟藏之上
母䧩 [208] 一杯熱食灌其身體如入鑊湯母飮一杯
001_0223_c_09L冷水亦如寒氷切身 [209] 母飽之時迫迄 [210] 身體痛石 [211]
可云 [212] 母飽 [213] 之時腹中了了亦如倒懸受苦無量
001_0223_c_10L至月 [214] 滿欲生之時頭向產門劇如兩石挾山
生之時母危父怖生墮草上身體細軟草觸其
001_0223_c_11L如履刀劒忽然失聲大呼此是大苦 [215] 又大集
經二十五 [216] 云何名爲觀於生苦從業因緣父母
001_0223_c_12L和合初受意識歌羅羅時其身猶如亭歷子許
是時未有入出氣息乃至云歌羅羅時住六七日
001_0223_c_13L六七日轉名頞浮陀是時形色猶如小1) [22] [217] 住七
七日轉名伽那是時形色如胡桃▼(穀-禾+卵)住八七日
001_0223_c_14L名閉尸形色猶頻婆羅菓是時身邊有五胞出
頭手脚十三七日始有腹 [218] 二十七日男女根
001_0223_c_15L二十一七日始生骨節乃至三十六七日 [219]
身具足血肉毛根三十八七日具足身枝四日 [220]
001_0223_c_16L住在胎 [221] 中臰 [222] 穢之處爾時還憶本生之事憶已
愁苦作是念言若我出胎當脩善法願後更莫
001_0223_c_17L生如是處脩不放逸遠離受生始出母胎爾時
擧身受迫迮苦 [223] 風觸手 [224] 亦復受苦身初至地
001_0223_c_18L以水摩洗復受大苦猶如地獄爾時還失憶宿
命事生已復有老病死 [225] 隨逐不捨具說如彼

001_0223_c_19L若廣分別如解脫道論第七卷及入
001_0223_c_20L胎經說

001_0223_c_21L
通相八位者如瑜伽第二云云何八
001_0223_c_22L「方」疑「可」「來」疑「棗」

001_0224_a_01L처태위處胎位, 출생위出生位, 영해위嬰孩位, 동자위童子位, 소년위少年位, 중년위中年位, 노년위老年位, 모숙위耄熟位를 말한다. 처태위란 갈라람 등을 말하고, 출생위란 이 다음부터 모숙위까지를 말한다. 영해위란 걸어 다니면서 놀 수 있게 되기 전까지를 말한다. 동자위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단계를 말한다. 소년위란 욕망의 경계를 받아들이는 단계로부터 30세까지를 말한다. 중년위란 이 단계로부터 50세까지를 말한다. 노년위란 이 단계로부터 70세까지를 말한다. 이 이후부터는 모숙위라고 한다.”482)

b. 종자식이 두 가지 집수에 의지함을 밝힘

  두 가지 집수執受에 의지하니,

  두 번째는 종자식이 두 가지 집수에 의지함을 밝힌 것이다.483) 이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표장標章으로서 수를 든 것이고, 다음은 수에 의거해 이름을 나열한 것이며, 마지막은 계界에 의거해 분별한 것이다.

a) 표장으로서 수를 듦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이상으로 이미 근根 등이 식識에 의지해서 생기하고 증장함을 밝혔고, 이하는 식이 색근 등에 의지함을 밝힌 것이다.

b) 수에 의거해 이름을 나열함

  첫째는 유색의 모든 근들(有色諸根)과 소의所依를 집수하는 것이고, 둘째는 상相·명名·분별分別의 언설희론습기를 집수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로 수에 의거해 이름을 나열한 것이다. 말하자면 수생위에 이숙식이 있는데 두 종류를 집수하여 소연 경계로 삼는다.484) 첫째는 오근과 그 소의인 색·향·미·촉을 집수하여 의지할 곳으로 삼는 것이다. 둘째는 상·명·분별의 세 가지 법의 습기를 집수하여 소연 경계로 삼는 것이다. 무루의 종자는 제외하니, 그것은 소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식에 의해 섭수되는 대상은 모두 소연이다.
그러므로 『유가사지론』 제51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뢰야식에 대해 간략히 설한다면, 두 종류 소연 경계를 따라서 전전한다. 첫째는 내적인 집수(內執受)485)를 요별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외적인 무분별의 기세간상(外無分別器相)을 요별하기 때문이다.

001_0224_a_01L謂處胎位出生位嬰孩位童子
001_0224_a_02L少年位中年位老年位耄熟位
001_0224_a_03L處胎位者謂羯羅藍等出生位者
001_0224_a_04L從此後乃至耄熟嬰孩位者謂乃
001_0224_a_05L至未能遊行嬉戲童子位者謂能爲
001_0224_a_06L彼事少年位者謂能受用欲塵乃
001_0224_a_07L至三十中年位者謂從此位乃至
001_0224_a_08L五十老年位者謂從此位乃至七
001_0224_a_09L從此已上名耄熟位

001_0224_a_10L
依二執受

001_0224_a_11L
釋曰第二種識依二執受於中有三
001_0224_a_12L初標章擧數次依數列名後約界分
001_0224_a_13L此卽初也上來已辨根等依識生
001_0224_a_14L起增長此下明識依色根等

001_0224_a_15L
一者有色諸根及所依執受 [226] 相名分
001_0224_a_16L別言說戱論習氣執受

001_0224_a_17L
釋曰此卽第二依數列名謂受生位
001_0224_a_18L有異熟識執受二種爲所緣境一者
001_0224_a_19L執受五根及彼所依色香味觸爲所
001_0224_a_20L依止二者執相名分別三法習氣
001_0224_a_21L所緣境除無漏種非所緣故此所
001_0224_a_22L攝受皆是所緣是故瑜伽五十一云
001_0224_a_23L謂若略說阿賴耶識由於二種所緣
001_0224_a_24L境轉一由了別內執受故二由了 [227]

001_0224_b_01L‘내적인 집수를 요별한다’는 것은 변계소집자성의 망집습기 및 모든 근들과 그 근의 의지처를 요별하는 것을 말하니, 이것은 유색계有色界에 있을 경우다. 무색계에서라면, 오직 습기만 있어서 (그것을) 집수하고 요별한다. ‘외적인 무분별의 기세간상을 요별한다’는 것은, ‘내적인 집수를 소연으로 삼는 아뢰야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때 끊어짐이 없는 기세간상’486)을 요별하는 것을 말한다. 비유하면 등의 불꽃이 생길 때 안으로 기름 심지를 잡고 있고 밖으로 광명을 발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아뢰야식이 내적인 집수(습기, 몸)를 소연으로 삼고 외적인 기세간상을 소연으로 삼아서 생기하는 도리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487)
또 『성유식론』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뢰야식의 소연은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기세간이고, 둘째는 유루의 종자이며, 셋째는 유근신有根身이다.488) 아뢰야식의 인연의 힘으로 인해 자체가 생할 때 안으로 종자 및 유근신으로 변현하고 밖으로 기세간으로 변현하면, 곧 변현된 것을 자기의 소연所緣(인식 대상)으로 삼는다. 행상行相(인식 작용)이 그에 의지해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489) 자세하게 설하면 그 논과 같다.

● 집수執受의 의미
이 경문에서 말한 ‘집수執受’의 의미는 ‘능집수能執受’에 해당한다.490) (일체종자식은) 오근 및 그것의 소의를 집수하여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않게 하면서 자기의 소의所依로 삼는데, 종자를 섭수하여 자기의 소유로 삼는 것도 또한 ‘소의’라고 한다.
그런데 이 집수에 대해 여러 교설이 같지 않다.
『구사론』 제2권에서는 십팔계 중에 아홉 개는 집수가 아니고 그 밖의 것은 두 가지에 통한다고 한다.491) 그 논은 한 가지 의미에 의거해 집수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 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집수有執受’라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심·심소법에 의해 함께 집지執持되어서 (심 등의) 의처依處로 포섭되는 것을 유집수라고 하니, 손해와 이익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서로 뒤따르기 때문이다.492)……이하 생략……”493)
『순정리론』 제4권에는 세 논사의 해석이 있다.
첫 번째는 『구사론』과 동일한데, 『순정리론』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그렇다면 색 등은 한결같이 무집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심·심소법은 그것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고,

001_0224_b_01L無分別器相故了別內執受者謂能
001_0224_b_02L了別遍計所執自性妄執習氣及諸
001_0224_b_03L色根根所依處此於有色界若在無
001_0224_b_04L [228] 習氣執受了別了別外無分別
001_0224_b_05L器相者謂能了別依止緣內執受阿
001_0224_b_06L賴耶識故於一切時無有間斷器
001_0224_b_07L世間相譬如燈焰生時內執膏炷
001_0224_b_08L發光明如是阿賴耶識緣內執受
001_0224_b_09L外器相生起道理應知亦爾又成
001_0224_b_10L唯識第二卷云賴耶所緣有其三種
001_0224_b_11L一器世間二有漏種三有根身
001_0224_b_12L賴耶識因緣力故自體生時內變爲
001_0224_b_13L種及有根身外變爲器卽以所變爲
001_0224_b_14L自所緣行相杖之而得起故廣說如
001_0224_b_15L此中所說執受義者是能執受
001_0224_b_16L受五根及彼所依令不損壞爲自所
001_0224_b_17L攝受種子爲自所有亦名所依
001_0224_b_18L然此執受諸敎不同俱舍第二云
001_0224_b_19L八界中九不受餘二彼約一義釋執
001_0224_b_20L受故彼云有執受 [229] 此言何義心心所
001_0224_b_21L法共所執持攝爲依處名爲 [230] 執受
001_0224_b_22L益展轉更相隨故乃至廣說正理
001_0224_b_23L第四有三師釋一同俱舍正理釋云
001_0224_b_24L若爾色等卽應一向名無執受心心

001_0224_c_01L근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다. 색 등이 근과 분리되지 않는다면 비록 소의가 아니라도 이 심 등이 직접 의지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실은 없다.”494)
두 번째는 비바사사의 설이다. “만약 모든 색법들이 핍박받아 쪼개지고 무너지면 곧바로 고통을 발생시키고 이와 상반되면 즐거움을 발생시키는데, 이것이 자기 몸에 속하는 경우라면 ‘유집수’라고 한다.”495)
세 번째는 어떤 다른 논사의 설이다. ≺만약 모든 유정들이 자기의 체라고 집착하면서 일체의 처處와 시時에 방편으로 방호하는 것이라면 (유집수라고 한다.)……중간 생략……()그렇다면 계경에서 설한 것과 위배될 것이니, 계경에서는 ‘만약 이곳에 식이 집장執藏되어 있고 식이 따라다니며 포섭하는 것이라면 유집수라고 한다’고 하였다. () 비록 이런 설이 있기는 해도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유집수의 법에는 대략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유애有愛와 유신견有身見496)으로 자기의 존재에 집착하는 것을 유집수라고 하니, 청정한 지혜가 생겨나면 곧바로 끊어져 사라진다. 둘째는 인因이 되어 고락을 발생시키는 것을 (유집수라고 하니), 이는 반열반에 이르기까지 따라다니며 버려지지 않는다. 이처럼 경론에서는 (두 가지 의미 중에서) 각기 한 가지 의미에 의거한 것이다.≻497)
  경에서는 ‘유애와 유신견으로 인해 자기가 있다고 집착한다’는 데 의거해서 유집수라고 한 것이다.498) 논(『순정리론』)에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처음 논사의 뜻을 설하자면, (유집수란) 의지처라고 집착되는 것이다. 다음 논사의 뜻을 설하자면, 고통과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마지막 논사의 뜻을 설하자면, 자기의 체라고 집착되는 것이다. 모두 본론에 부합하니, 자기 몸에 속하는 것을 유집수라고 한다면 곧 당연히 인이 되어 고락을 일으킨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두 번째 논사는 오직 ‘고통과 즐거움을 발생시킨다’고만 하였고, 처음과 마지막 두 논사는 그 밖의 의미도 아울러 취하였다. 경과 논을 합해서 말한다면, 모두 네 가지 해석이 있다.499) 자세하게 설하면 그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
『대비바사론』 제148권의 ‘집수執受의 납식納息(ⓢ vagga : 품品)’에 의하면 여섯 가지 교설이 같지 않은데, 번거로울까 봐 서술하지 않겠다.
이제 대승에 의하면 세 가지 설이 같지 않다.
어떤 경우는 오직 ‘고苦와 낙樂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집수라고 이름한다. 따라서 『집론』에서는 ‘오색계의 전부와

001_0224_c_01L所法不依彼故非根性故不爾色等
001_0224_c_02L若不離根雖非所依而是心等之所
001_0224_c_03L親附故無有 [231] 二毗婆沙師說
001_0224_c_04L諸色法逼迫斷壞便能生苦與此相
001_0224_c_05L卽能生樂是已 [232] 身攝名有執受
001_0224_c_06L三有餘師說若諸有情執爲自體
001_0224_c_07L切處時方便防護乃至廣說若爾
001_0224_c_08L違契經所說故契經云若於此處
001_0224_c_09L所執藏識所隨攝名有執受雖有
001_0224_c_10L是說而不相違有執受法略有二
001_0224_c_11L一者有愛乃有身見執爲已 [233]
001_0224_c_12L有執受若淨智生卽便斷滅二者
001_0224_c_13L爲因能生苦樂至般涅槃隨轉不捨
001_0224_c_14L是爲經論各據一義 [234] 解云經約有愛
001_0224_c_15L身見執爲已 [235] 名有執受論有三釋
001_0224_c_16L初師意說執爲依處次師意說
001_0224_c_17L生苦樂後師意說執爲自體並符
001_0224_c_18L本論已身所攝名有執受卽當爲因
001_0224_c_19L生苦樂義然第二師唯生苦樂
001_0224_c_20L後兩師兼取餘義經論合說總有
001_0224_c_21L四釋具說如被若依毗婆沙第一百
001_0224_c_22L四十八執受納息六敎不同恐繁不
001_0224_c_23L今依大乘三說不同或有唯約
001_0224_c_24L生苦樂故名爲執受故集論云

001_0225_a_01L사계의 일부’를 유집수라고 하였다.500) 이미 ‘성聲’을 (집수라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고와 낙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집수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오직 ‘자기의 체로 포섭한다’는 점에서 유집수라고 이름한다.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 제51권 등에서는 ‘제8식이 없으면 의지처의 집수는 있을 수 없다’고 하기 때문이고,501) 또 제56권에서 다시 “다섯 개는 집수이고 다섯 개는 집수이거나 비집수非執受이며 그 밖의 것은 한결같이 비집수다.”502)라고 하였다.503) 이러한 문장 등에 준해 볼 때, 오직 ‘자기의 체로 포섭한다’는 점에서 집수를 설명한 것이다.
어떤 경우는 공통으로 두 가지 의미에 의거해서 집수를 설명하는데, 예를 들면 제5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이 집수하는 것과 집수하지 않는 것에서,504) 만약 식의 의지처(識依)로서 집수한 것이라면 집수執受의 색色이라 한다. 이것은 다시 어떤 것인가? 식이 의탁하는 곳으로서 안온하거나 위험한 사를 함께 겪으며(安危事同) 화합하여 생장하는 것을 말한다. 또 이것이 소의가 되어 모든 감각을 일으키는데(能生諸受), 이와 상반되면 비집수의 색이다.505)506) 또 『유가사지론』 제10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수법執受法이란 색법이 심·심소에 의해 집지되는 것을 말한다. 그 (색법에) 의탁함으로 인해 심·심소가 전전하면서 안온과 위험의 일을 함께 하는 것이다. 안온과 위험을 함께 겪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심·심소의 담지하는 힘으로 인해 그 색이 끊어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허물어지지 않고, 곧 이와 같이 집수된 색이 어떤 때는 손상되거나 어떤 때는 이익을 얻는데 그 심·심소 또한 그에 따라 손상되거나 이익을 얻는 것이다.507) 이와 상반되면 ‘비집수’라고 한다.”508)
지금 이 『해심밀경』에서 설한 ‘집수’는 우선 두 가지 의미에 따른 것이다. 첫째는 아뢰야식이 근根·의지처(依處)509)를 집지하여 자기의 소의(自所依)로 삼는 것이고, 둘째는 종자를 집지하여 자기의 소속물(自所攝)로 삼는 것이다.510) 구체적인 것은 여러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

c) 계에 의거해 분별함

  유색계에서는 두 종류 집수를 갖추고 무색계에서는 두 종류 집수를 갖추지 않는다.

  이것은 세 번째로 계에 의거해서 분별한 것이다. 이 경문에 준해 볼 때,

001_0225_a_01L色界全四界一分名有執受卽旣
001_0225_a_02L不說聲故知唯約生苦樂故名執受
001_0225_a_03L或有唯約攝爲自體名有執受
001_0225_a_04L瑜伽五十一等云若無第八依止執
001_0225_a_05L受不可得故又五十六復云 [236] 執非
001_0225_a_06L執受所餘一向非執受准此等文
001_0225_a_07L約攝爲自體明執受也或有通約二
001_0225_a_08L以明執受如五十三云識執不
001_0225_a_09L執者若識依執名執受色此復云
001_0225_a_10L謂識所託安危事同和合生長
001_0225_a_11L又此爲依能生諸受與此相違
001_0225_a_12L執受攝 [237] 又瑜伽論第一百云執受法
001_0225_a_13L謂色法爲心心所 [238] 執持由託彼故
001_0225_a_14L心心所轉安危事同同安危者由心
001_0225_a_15L心所住 [239] 持力故其色不斷不壞不爛
001_0225_a_16L卽由如是所執受色 [240] [241] 或時攝
001_0225_a_17L其心心所亦隨損益與此相違
001_0225_a_18L名非執受今此經中說執受者且依
001_0225_a_19L二義一者賴耶執根依處爲自所依
001_0225_a_20L二者執持種子爲自所攝具如諸
001_0225_a_21L

001_0225_a_22L
有色界中具二執受無色界中不具二
001_0225_a_23L

001_0225_a_24L
釋曰此卽第三約界分別卽准此文

001_0225_b_01L대승종에 의하면 무색계에는 안계眼界·이계耳界 등 열 종류 색계가 없다는 것이니, 가령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511)에서 열 가지 색 및 다섯 가지 식들을 갖춘다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런데 『본업경』에는 ‘무색계의 제천諸天이 모임에 들어와 있다’고 하거나,512) 『법화경』에서는 ‘유정천의 향기를 맡는다’고 하는데,513) 이와 같은 문구들은 모두 ‘법처에 속하는 색(法處所攝色)’에 의거해서 설한 것이다.

(나) 아타나식에 대해 설명함

  광혜여, 이 식은 또한 아타나식이라 한다. 어째서인가? 이 식이 몸을 뒤따라 다니며 집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번째로 아타나식을 해석한 것이다.
범어로 ‘아타나阿陀那(ⓢ ādāna)’라는 것은 여기 말로 번역하면 ‘집지執持’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 식이 몸을 뒤따라 다니면서 색근을 집수하여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이 식을 ‘집지’라고 이름한 것이다.
『섭대승론』에 의하면 그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아타나’(라고 한 이유를) 해석하자면, 첫째는 색근을 집수하여 무너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기의 체를 집수하여 그것을 취해서 태어나기 때문이다.≻514) 예를 들면 그 논의 제1권에서 자세하게 분별한 것과 같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그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제3권에서는 “제법의 종자를 집지執持하고, 색근과 의지처를 집수執受하며, 또한 결생과 상속을 집취執取하기 때문에,515) 이 식을 아타나라고 이름한다.”516)고 하였다.
이 경문은 두 논에서 말한 ‘집수’에 해당한다.

(다) 아뢰야식에 대해 밝힘

  또한 아뢰야식이라 한다. 어째서인가? 이 식이 몸을 섭수하여 (거기에) 숨어 있으면서 안온과 위험을 함께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 번째로 아뢰야식에 대해 해석한 것이다.
범어로 ‘아뢰야阿賴耶(ⓢ ālaya)’라는 것은 여기 말로 번역하면 ‘장藏’이라 한다. ‘장’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능장能藏이고, 둘째는 소장所藏이며, 셋째는 집장執藏이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식은 능장·소장·집장의 의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잡염품과 더불어 상호 간에 연이 되기 때문이고,517) 유정들이 자기의 내적인 ‘아我’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518)519)

001_0225_b_01L依大乘宗無色界中無眼耳等十種
001_0225_b_02L色界非如摩訶僧祇部說具十色及
001_0225_b_03L五識身而本業經無色諸天來入
001_0225_b_04L會中法華經中 [242] 有頂香如此等文
001_0225_b_05L皆依法處所攝色說

001_0225_b_06L
廣慧此識亦名阿陀那識何以故
001_0225_b_07L此識於身隨逐執持故

001_0225_b_08L
釋曰此卽第二釋阿陀那識梵云阿
001_0225_b_09L陀那此翻名執持謂由此識隨逐於
001_0225_b_10L執受色根令不失壞故說此識
001_0225_b_11L名爲執持依攝大乘有其二義
001_0225_b_12L阿陀那一執受色根令不壞故二執
001_0225_b_13L受自體取彼生故如彼第一具廣分
001_0225_b_14L依成唯識具有三義故第三云
001_0225_b_15L以能執持諸法種子及能執受色根
001_0225_b_16L依處亦能執取結生相續故說此識
001_0225_b_17L名阿陀那此當二論所說執受

001_0225_b_18L
亦名阿賴耶識何以故由此識於身攝
001_0225_b_19L受藏隱同安危義故

001_0225_b_20L
釋曰此卽第三解阿賴耶梵云阿賴
001_0225_b_21L此翻名藏藏有三義一者能藏
001_0225_b_22L二者所藏三者執藏故成唯識第二
001_0225_b_23L卷云此識具有能藏所藏執藏義故
001_0225_b_24L [243] 與雜染互爲緣故有情執爲自內

001_0225_c_01L
『섭대승론』 제1권에서도 세 가지 의미를 설하는데,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어떤 이유에서 이 식을 아뢰야라고 이름하는가? 생을 가진 모든 부류들의 잡염품법이 이것(아뢰야식) 안에 섭장攝藏되어 과성果性이 되기 때문에, 또 이 식은 그것(잡염품법) 안에 섭장되어 인성因性이 되기 때문에, 혹은 모든 유정들이 이 식을 섭장하여 자아自我로 삼기 때문에, 아뢰야식이라 이름한 것이다.≻520)
  ‘장藏’의 의미는 세 가지로 구별된다. 첫째는 ‘능장’이니, 이것은 과법果法이 인因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식 안의 종자가 현행의 일곱 가지 식을 발생시키는데 잡염된 과果는 그것을 ‘발생시킨 인因’과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소장’이니, 이것은 인의 종자가 과果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훈습되는(所熏) 종자는 훈습하는(能熏) 일곱 가지 현행식 안에 저장된 상태에서 인성因性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아애에 의해 집장執藏되는 것을 뜻하니, 이것은 경계(아뢰야식)가 집착하는 자(能執 : ‘아애’를 가리킴) 안에 저장되는 것이다.
지금 이 『해심밀경』에 의하면 여러 논들과는 같지 않다. 말하자면 이 식이 유근신有根身(근을 가진 몸)에 대해 그것을 섭수하여 의지처로 삼고 거기에 숨어 있으면서 소의신所依身과 더불어 안온과 위험을 함께하기 때문에, 이 경에서는 식이 소의(몸) 안에 내장되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장’이라 한 것이다. 이는 ‘소장所藏’의 뜻 중에 부분적 의미에 해당한다.521) 따라서 『심밀해탈경』에서는 “그 몸 안에 머물며 붙어 있기 때문이고 일체가 되어 상응하기 때문이다.”522)라고 하였다. ‘머물며 붙어 있다(住著)’고 한 것은 이 경에서 ‘섭수하여 숨어 있다’고 한 것에 해당하고, ‘일체가 되어 상응한다’는 것은 ‘안온과 위험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라) 심이라는 이름을 나타냄

  또한 심이라고 이름한다. 어째서인가? 이 식이 색·성·향·미·촉 등을 적집하여 증장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네 번째로 그 ‘심’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범음 ‘질다質多(ⓢ citta)’는 여기 말로 번역하면 ‘심’이다. 그에 많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집기集起’라고 하니, 제법의 종자를 모아서 제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유식론』 제5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523)
둘째는 적집積集이라 하니, 그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이 식에 의해) 제법의 종자가 적집되기 때문이니,

001_0225_c_01L我故攝論第一亦辨三義故彼論
001_0225_c_02L復何緣故此識亦 [244] 名阿賴耶 [245]
001_0225_c_03L切有生雜染品法於此攝藏爲果性
001_0225_c_04L又卽此識於 [246] 彼攝藏爲自 [247] 性故
001_0225_c_05L諸有情攝藏此識爲自我故說名
001_0225_c_06L阿賴耶識解云藏義三種別者第一
001_0225_c_07L能藏此卽果法於因中藏謂識中
001_0225_c_08L種生現七識染果不離能生因故
001_0225_c_09L二所藏此卽因種於果中藏謂所熏
001_0225_c_10L種藏在能熏七現識中成因性故
001_0225_c_11L三我愛所執藏義此卽境於能執中
001_0225_c_12L今依此經不同諸論謂由此識
001_0225_c_13L於有根身能攝受彼爲所依止
001_0225_c_14L彼藏隱與所依身同安危故此卽現
001_0225_c_15L識藏所依中故名爲藏於所藏中
001_0225_c_16L分之義故深密云於彼身中住者 [248]
001_0225_c_17L一體相應故住者 [249] 卽此攝受藏隱
001_0225_c_18L體相應同安危義

001_0225_c_19L
亦名爲心何以故由此識色聲香味觸
001_0225_c_20L等積集滋長故

001_0225_c_21L
釋曰此卽第四釋其心義梵音質多
001_0225_c_22L此翻爲心有其多義一名集起
001_0225_c_23L諸法種起諸法故如成唯識第五卷
001_0225_c_24L二名積集有其二義一諸法種

001_0226_a_01L예를 들면 『섭대승론』 제1권에서 “갖가지 법의 훈습종자가 적집되기 때문이다.”524)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 외적인 여섯 가지 경계가 적집되고 증장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채집採集이라 하니, 갖가지 소연 경계를 캐어내서 모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심밀해탈경』과 『오온론』에서 설한 것과 같다.
지금 이 『해심밀경』에 의하면 두 번째 뜻에 의거해 ‘심’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적집의 뜻이고, 둘째는 증장(滋長)의 뜻이니, (이 식에 의해) 색 등의 경계가 적집되고 증장하기 때문이다.525)

● 그 밖의 다른 이름들 : 소지의所知依, 이숙식異熟識, 무구식無垢識
『성유식론』 제3권에 의하면 (제8식의) 일곱 종류 이름이 있다. 이 『해심밀경』에 나온 네 가지 이름 이외에 다시 세 가지 이름을 더한 것이다. 세 가지는 무엇인가?

◉ 소지의
예를 들면 그 논에서 “혹은 소지의所知依라고 하니, (이 식은) 알아야 할 모든 잡염법과 청정법들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526)라고 하였다.
해석해 보면, 이는 『섭대승론』의 열 가지 수승(十殊勝) 중에서 첫 번째 수승을 ‘소지의’라고 이름했던 것과 같다.527)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마땅히 알려질 수 있기(所應可知)’ 때문에 ‘소지所知’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모든 잡염법과 청정법, 즉 삼자성三自性이다.528) ‘의依’는 ‘인因’의 뜻이다.”529)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마땅히 알려질 수 있기’ 때문에 ‘소지’라고 하였고, ‘의’란 소의所依를 말한다. 이 소의라는 말(聲)은 능의能依로서의 잡염·청정의 모든 유위법을 가려내어 취한 것이고 무위법을 취하지는 않으니, 그것(무위)에는 소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530) 소의란 바로 아뢰야식이니, 그 대응하는 바에 따라, 그것의 인因이기 때문이고 그것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531)532)
  세친 보살은 제8식이 통틀어 삼성三性에 대해 의지처가 된다고 인정한다. 무성 보살은 오직 의타기성에 대해서만 소의가 될 뿐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에 대해서는 소의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의 인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염분染分의 의타기성에 대해 소의가 된다는 말이고, ‘그것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정분淨分의 의타기성에 대해 소의가 된다는 말이다.

  어째서 두 논에 이런 상위점이 있는가?
  세친은 공통적 소의(通依)라는 점에서 삼성에 통한다고 하였고, 무성은 오직 직접적 소의(親依)라는 점에서 의타기성의 소의라고 하였다.

001_0226_a_01L子所積集故如攝論第一由種種法
001_0226_a_02L熏習種子所積集故二外六境界積
001_0226_a_03L集滋長故三名採集採集種種所緣
001_0226_a_04L境故如深密經及五蘊論今依此經
001_0226_a_05L依第二義故名爲心此有二義
001_0226_a_06L者積集二者滋長由色等境之所積
001_0226_a_07L集及滋長故若依成唯識論第三卷
001_0226_a_08L有七種名此經四名外更加三名
001_0226_a_09L名者何如彼論云或名所知依能與
001_0226_a_10L染淨所知諸法爲依止故釋如攝論
001_0226_a_11L十殊勝中第一殊勝名所知依世親
001_0226_a_12L釋云所應可知故名所知所謂雜染
001_0226_a_13L淸淨諸法卽三自性依是因義無性
001_0226_a_14L釋云所應可知故名所知依謂所依
001_0226_a_15L此所依聲簡取能依雜染淸淨諸有
001_0226_a_16L爲法不取無爲由彼無 [250] 所依義故
001_0226_a_17L依卽是阿賴耶識是彼因故1) [23] [251]
001_0226_a_18L彼故如其所應解云世親菩薩
001_0226_a_19L第八識通與三性爲所依止無性菩
001_0226_a_20L唯與依他起性爲依不與遍計圓
001_0226_a_21L成爲依是彼因故者與染分依他爲
001_0226_a_22L能*列彼故者與淨分依他爲依
001_0226_a_23L如何兩論有此相違解云世親
001_0226_a_24L約通依故通三性無性唯約親依

001_0226_b_01L각자 하나의 의미에 의거해서 (말하였으니) 또한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 이숙식
“혹은 이숙식異熟識이라고 한다. 능히 생사의 선업·불선업의 이숙과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533)
  이숙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전변하면서 무르익기 때문에 이숙이라 한다. 둘째는 이시적異時的으로 무르익기 때문에 이숙이라 한다. 셋째는 다른 부류로 무르익는 것이니, 인은 선·악의 성질인데 과는 오직 무기이므로 이숙이라 한다. 세 가지 의미 중에서 오직 세 번째의 ‘다른 부류’라는 뜻을 취한 것이니, 앞의 두 가지는 그 밖의 과에도 통하기 때문이다.534)

◉ 무구식
“혹은 무구식無垢識이라 한다. 가장 지극히 청정해서 모든 무루법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535)
  범음으로 ‘아말라식(ⓢ amala-vijñāna)’이란 여기 말로 ‘무구식’이라 한다. 즉 묘각위妙覺位536)의 대원경지와 상응하는 심체를 무구식이라 하니, 가장 지극히 청정한 모든 지智·정定 등 무루의 도법道法에 대해서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537) 따라서 『여래공덕장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如來無垢識      여래의 무구식은
是淨無漏界      청정하고 무루의 계이며
解脫一切鄣      모든 장애를 벗어났고
圓鏡智相應      대원경지와 상응하네538)

자세한 것은 『유식소』(『성유식론』)제3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

나) 여러 식들의 구전의 차별을 밝힘

  광혜여, 아타나식을 의지依止로 삼아 건립하였기 때문에, 여섯 가지 식들이 일어난다고 하니,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을 말한다.

  이하는 두 번째로 모든 식들의 구전俱轉(동시에 일어남)의 차별을 설명한 것이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法이고, 둘째는 비유(喩)이며, 셋째는 결합(合)이다.

(가) 법法
전자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아타나식이 육식과 더불어 구전함을 밝힌 것이고, 나중의 “광혜여, 만약” 이하는 의식을 오식과 대응시켜 구전하는 개수를 밝힌 것이다. 처음은 근본과 지말을 들어서 구전을 설명한 것이고, 나중은 의식을 오식과 대응시켜 그것들의 구전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유가사지론』 등에서는 우선 처음의 뜻에 의거하여 구전에 판별하였다. 여기에서 마땅히 말나식의 구전에 대해서도 설해야 하는데 설하지 않았으니, 처음의 것을 들거나 나중의 것을 들면 그에 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설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가사지론』 등에서도 통틀어 말나식에 의거해서 구전을 설명한 것이다.


001_0226_b_01L依他各據一義亦不相違或名異
001_0226_b_02L熟識能引生死善不善業異熟果故
001_0226_b_03L解云異熟有三一轉變而熟故名
001_0226_b_04L異熟二異時而熟故名異熟三異
001_0226_b_05L類而熟因是善惡果唯無記故云
001_0226_b_06L異熟三中唯取第三異類以前二名
001_0226_b_07L通餘果故或名無垢識最極淸淨諸
001_0226_b_08L無漏法所依止故解云梵音阿末羅
001_0226_b_09L此云無垢識卽妙覺位大圓鏡
001_0226_b_10L智相應心體名無垢識最極淸淨諸
001_0226_b_11L智定等無漏道法爲依止故故如來
001_0226_b_12L功德莊嚴經云如來無垢識是淨無
001_0226_b_13L漏界解脫一切鄣圓鏡智相應
001_0226_b_14L如唯識疏第三卷說

001_0226_b_15L
廣慧阿陀那識爲依止爲建立故六識
001_0226_b_16L身轉謂眼識耳鼻舌身意識

001_0226_b_17L
釋曰自下第二明諸識俱轉差別
001_0226_b_18L中有三初法次喩後合前中有二
001_0226_b_19L初阿陀那與六識俱轉後廣慧若於
001_0226_b_20L明意識對五俱轉多少初擧本末
001_0226_b_21L以辨俱轉後以意對五明其俱轉
001_0226_b_22L瑜伽等且約初義以辨俱轉此中應
001_0226_b_23L說末那俱轉而不說者擧初擧後
001_0226_b_24L可知故略而不說故瑜伽等通約

001_0226_c_01L
㉮ 아타나식과 육식의 구전을 밝힘
전자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구전한다’는 것을 총괄해서 표시하였고, 나중에는 난점을 따라가며 거듭 해석하였다.

a. 구전함을 총괄해서 표시함
이 경문은 처음에 해당한다. 아타나식을 의지처로 삼기 때문에 여섯 가지 식들이 일어나니, 안식 등을 말한다.

b. 난점을 따라가며 거듭 해석함

  이 중에서 ‘식이 있는 안과 색(有識眼色)’을 연으로 하여 안식이 발생하고, 안식과 함께하면서 따라다니는 동시同時·동경同境의 유분별의식이 일어난다.

  이하는 두 번째로 난점을 따라가며 거듭 해석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안식이 반드시 의식과 구전함을 밝힌 것이고, 나중은 네 가지 식이 의식과 구전함을 밝힌 것이다.

a) 안식은 반드시 의식과 구전함을 밝힘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라고 한 것은 이문理門에 의거해서 설한 것인데, 그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논의 단서(論端)를 일으킨다는 뜻이고, 둘째는 ‘가려낸다(簡持)’는 뜻이다. 이상으로 모든 식들이 구전함을 총괄해서 말했는데, 오식은 반드시 의식에 의지하지만 의식이 반드시 오식에 의지하는 것은 아님을 아직 분별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의미의 단서를 일으키기 위해서 “이 중에서”라고 말한 것이다. 또 ‘구전’이란 말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단번에 설명할 수 없으니, 그 밖의 의미를 배제시키고 이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 “이 중에서”라고 말한 것이다.

● 동분同分·피동분彼同分에 대한 각 종파의 교설
“식이 있는 안(有識眼)”이라고 했는데, 말하자면 안眼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식이 있는 안이니, 이는 동분同分의 안이라 이름한다. 둘째는 식이 없는 안(無識眼)이니, 이는 피동분彼同分의 안이라 이름한다. 피동분의 안을 배제하기 위해 ‘식이 있는 안’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동분과 피동분에 대해 여러 교설들이 같지 않다.
첫째, 살바다종은 십팔계에 의거해서 동분과 피동분의 뜻을 해석한다. 말하자면 십팔계에서 작용(業用)을 하고 있는 것을 동분이라 하고, 작용이 없는 것을 피동분이라 한다. 따라서 『구사론』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십팔계 중에서 몇 개가 동분이고 몇 개가 피동분인가? ‘법계는 동분이고 그 밖의 계는 두 가지이니, 자신의 작용을 일으킨 것과 일으키지 않은 것이다.’

001_0226_c_01L末那以辨俱轉前中有二初總標
001_0226_c_02L俱轉後逐難重釋此卽初也以阿陀
001_0226_c_03L那爲依止故六識身轉謂眼識等

001_0226_c_04L
此中有識眼及色爲緣生眼識與眼識
001_0226_c_05L俱轉 [252] 隨行同時同境有分別意識轉

001_0226_c_06L
釋曰自下第二逐難重釋於中有二
001_0226_c_07L初明眼識必意識俱後明四識與意
001_0226_c_08L識俱
此卽初也
001_0226_c_09L言此中者依理門說有其二義
001_0226_c_10L起論端義二簡持義上來總言諸識
001_0226_c_11L俱轉而未分別五必依意意不依五
001_0226_c_12L爲欲發起如是義端故言此中又於
001_0226_c_13L俱轉含有多義不可頓說簡餘諸
001_0226_c_14L持取此義故言此中言有識眼
001_0226_c_15L謂眼二種一有識眼名同分眼
001_0226_c_16L二無識眼名彼同分簡彼同分
001_0226_c_17L有識眼然此同分及彼同分諸敎不
001_0226_c_18L一薩婆多依十八界以釋同分
001_0226_c_19L彼同分義謂十八界有業用者名爲
001_0226_c_20L同分若無業用名彼同分故俱舍
001_0226_c_21L論第二卷云十八界中幾是同分
001_0226_c_22L幾彼同分頌曰

001_0226_c_23L
法同分餘二作不作自業

001_0226_c_24L「列」疑「引」次同

001_0227_a_01L 한 개의 법계는 오직 동분이다.539) 말하자면 모든 성자들의 두 찰나 이상 무아를 관하는 지(無我觀智)는 일체법을 소연으로 삼아서 두루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법계는 항상 동분이라 이름한다.≻540) (이에 대해) 『잡아비담심론』에서는 ‘모든 법계는 의식의 경계이기 때문’이라 해석하였고,541) 『대비바사론』에서는 ‘삼세에 의식의 경계에 속하지 않는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542)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 논과 같다.

(✽ 『대비바사론』의 두 가지 문답)543)

  법계 이외에 17계는 의식의 소연이므로 당연히 모두 동분이고 피동분은 없어야 한다.544)
  17계는 의식에 의거해서 동분과 피동분으로 건립된 것이 아니라, 다만 각기 별개의 근과 경에 의거해서 건립된 것이다. 안眼에 대응하는 색色, 색에 대응하는 안 내지는 신身에 대응하는 촉觸, 촉에 대응하는 신을 말한다.

  그렇다면, 의계 및 의식계는 오직 법계에 대해서만 동분과 피동분으로 건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즉 그 이외의 17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은 마땅히 동분이 아닐 것이다.
  이치상으로는 이와 같다. 그러나 의계 및 의식계는 일체법을 통틀어 요별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의 작용에 의거해서 동분으로 건립된 것이다. 가령 안근 등의 근은 보는(見) 등의 작용이 있으면 결코 피동분으로 건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논사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법계는 일체법을 모두 다 포괄하니, 17계도 또한 법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법’이라는 이름은 비록 공통되지만 ‘법계’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를 때, 전자의 설이 이치상으로 훌륭하다.
이에 준해 보면, 살바다종에서 통틀어 일체법이 다 법계에 속한다고 한 것은 아니다.

(✽ 『구사론』의 해석)545)

말하자면 (그 법계) 이외의 17계에는 모두 동분과 피동분이 있다. 무엇을 동분 또는 피동분이라 하는가? 자기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자기의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자기의 작용을 일으키면 동분이라 하고, 자기의 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 피동분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안계眼界의 경우, 볼 수 있는 색(有見色)을 이미 보았거나 바로 지금 보고 있거나 미래에 보게 될 눈을 ‘동분의 눈(同分眼)’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자세히 설하자면 의계意界에 이르기까지 각각 모두 자기의 경계에 대해 자기의 작용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가습미라국의 비바사사들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001_0227_a_01L
論曰謂一法界唯是同分謂諸聖者
001_0227_a_02L二念已去無我觀智緣一切法無
001_0227_a_03L不同 [253] 是故法界恒名同分雜心釋
001_0227_a_04L一切法界意式境故大婆沙云
001_0227_a_05L無有法非三世攝意識境故具說如
001_0227_a_06L十七界意識所緣應皆同分
001_0227_a_07L無彼同分十七界不依意識立爲
001_0227_a_08L同分及彼同分但依各別根境 [254]
001_0227_a_09L色色對眼乃至身對觸觸對身
001_0227_a_10L若爾意界及意識界唯應對法界立
001_0227_a_11L同分彼同分是則綠餘十七界者
001_0227_a_12L非同分理應如是然以意界及意
001_0227_a_13L識界能遍 [255] 了一切法故依自作用
001_0227_a_14L爲同分如眼等根有見等用必不立
001_0227_a_15L爲彼同分故有餘師說法界總攝一
001_0227_a_16L切法盡以十七界亦名法故彼不應
001_0227_a_17L作是說法名雖通而法界別故
001_0227_a_18L此前說於理爲善解云准此薩婆多宗
通一切法非法界攝

001_0227_a_19L餘十七界皆有同分及彼同分何名
001_0227_a_20L同分彼同分耶謂依 [256] 自業不作自業
001_0227_a_21L若作自業名爲同分不作自業名彼
001_0227_a_22L同分此中眼界 [257] 已正當見名同分
001_0227_a_23L如是廣說乃至意界 [258] 各於自
001_0227_a_24L [259] 應說自用迦濕彌羅國毗婆沙師

001_0227_b_01L≺피동분의 안에는 단지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색을 보지 않은 채 이미 멸하였거나 바로 지금 멸하고 있거나 미래에 멸하게 될 것과 불생법不生法546)을 말한다.≻
서방(간다라 지방)의 논사들은 (피동분의 안에) 다섯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불생법을 다시 두 종류로 나눈 것이니, 첫째는 유식속有識屬이고 둘째는 무식속無識屬이다.547) 나아가서는 신계身界 또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의계의 피동분은 오직 불생법뿐이다.548)해 이에 준해 보면, 아라한의 최후의 온은 동분의 의계이다. 이는 능연能緣이라는 의미에서 동분이라고 말한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동분이라 하겠는가?549)
색계의 경우, 눈에 이미 보였거나 바로 지금 보이고 있거나 미래에 보게 될 것을 ‘동분의 색’이라 이름한다. 피동분의 색 또한 네 가지 종류가 있고,550)……중간 생략…… 촉계 또한 이러하여 각기 자기의 근에 대해 자기의 작용을 일으킨다고 설해야 한다.551)
마땅히 알아야 하니, 동분의 눈과 피동분의 눈이 만약 한 사람에게 동분이라면 그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도 역시 동분이 되며, 피동분의 눈 또한 이와 같다.……중간 생략……의계 또한 그러하다.
『잡아비담심론』에서도 이와 같이 설한다.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이에 대해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처음 논사는 『구사론』 등과 동일하다.552)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553) ≺색을 보는 모든 눈(眼)은 유정 자신에 있어서는 동분의 눈이라 하고, 그 이외의 유정에 있어서는 피동분의 눈이라 한다. 색을 보지 못한 모든 눈은 유정 자신에 있어서는 피동분의 눈이라 하고, 그 이외의 유정에 있어서도 또한 피동분의 눈이라 한다.≻ 다시 다음과 같이 설하는 자가 있다.554) ≺색을 보는 모든 눈은 유정 자신에 있어서는 동분의 눈이라 하고, 그 이외의 유정에 있어서는 동분의 눈도 아니고 또한 피동분의 눈도 아니다. 색을 보지 못한 모든 눈은 유정 자신에 있어서는 피동분의 눈이라 하고, 그 이외의 유정에 있어서는 동분의 눈도 아니고 피동분의 눈도 아니다.≻ 그는 그와 같이 설해서는 안 된다. 어째서 눈이 있는데 동분의 눈도 아니고 또한 피동분의 눈도 아니겠는가?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하니, 세 가지 설 가운데 처음의 설이 이치에 맞다.”555)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 논과 같다.
또 『구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眼)은 (한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고) ‘공유되지 않기(不共)’ 때문에 한 사람의 상속하는 몸에 의거해서 동분과 피동분을 건립한다. 하지만 색은 ‘공유되기(共)’ 때문에

001_0227_b_01L彼同分眼但有四種謂不見色
001_0227_b_02L已正當滅及不生法西方諸師說有
001_0227_b_03L五種謂不生法復開爲二一有識
001_0227_b_04L二無識屬乃至身界應知亦然
001_0227_b_05L彼同分唯不生法解云准此羅漢最後蘊
分意界約能緣義說爲同
001_0227_b_06L不爾如何
說爲同分
色界爲眼已正當見名同
001_0227_b_07L分色彼同分色亦有四種乃至
001_0227_b_08L界亦爾各對自根應說自用應知同
001_0227_b_09L分及彼同分眼若於一是同分於餘
001_0227_b_10L一切亦同分彼同分眼 [260] 如是廣說乃
001_0227_b_11L意界亦爾雜心亦爾若依婆沙
001_0227_b_12L其三釋初師說同俱舍等有作是說
001_0227_b_13L諸見色眼於自有情名同分眼
001_0227_b_14L餘有情名彼同分眼 [261] 諸不見色眼
001_0227_b_15L自有情名彼同分眼於餘有情
001_0227_b_16L名彼同分眼復有說者諸見色眼
001_0227_b_17L自有情名同分眼於餘有情非同
001_0227_b_18L分亦非彼同分諸不見色眼於自有
001_0227_b_19L名彼同分眼於餘有情非同分
001_0227_b_20L眼亦非彼同分彼不應作是說
001_0227_b_21L何有眼而非同分亦非彼同分
001_0227_b_22L作是說於三說中初說應理具說
001_0227_b_23L如彼又俱舍云眼不共故依一相
001_0227_b_24L建立同分及彼同分色是共故

001_0227_c_01L여러 사람의 상속하는 몸에 의거해서 동분과 피동분을 건립한다. 색계에 대해 설한 것처럼, 성·향·미·촉의 경우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성聲’은 색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556) 그런데 향·미·촉의 세 가지 계는 근에 닿아야 비로소 파악되고 이는 공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이 파악할 때 그 이외의 사람은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이치상으로 당연히 안계眼界 등과 같다고 해야 하지, 색계와 같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557) 비록 이런 이치가 있기는 해도, 간혹 ‘공유되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향 등의 세 가지 계는 (아직 근에 닿지 않았을 때) 한 사람과 그 이외의 사람에게 모두 비식鼻識 등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눈 등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향·미·촉은) 색계와 같다고 설한 것이다.”558)
『잡아비담심론』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눈이 색을 보는 경우는 유분有分(동분)이고, 색을 보지 않는 경우 여유분餘有分(피동분)이라 한다. 말하자면 색이 눈에 보인 것(所見)은 유분이고 보이지 않은 것(所不見)은 여유분이다. 차별점은, 만약 눈이 한 사람에게 유분이라면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도 유분이고, 만약 (눈이) 한 사람에게 여유분이라면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도 여유분이라는 것이다. 색의 경우 보인 것이면 유분이고 여유분은 아니다. 이·비·설·신과 성·향·미·촉도 이와 같으니, 제일의第一義에서는 눈의 경우와 같다고 설하지만, 세속의 이치(俗數)로는 색의 경우와 같다고 설한다.”559) 『잡아비담심론』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대비바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색계처럼 성계·향계·미계·촉계도 그러하니, 동분과 피동분의 품류들의 차별은 모두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 대해, ① 어떤 이는 ‘오직 각기 자기 몸에 있는 모든 향·미·촉을 맡고 맛보고 느낀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향계·미계·촉계는 세속의 이치에 따르면 색계의 경우와 같다고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네가 맡은 향은 우리도 맡는다. 네가 맛본 맛을 우리도 맛본다. 네가 느낀 감촉을 우리도 느낀다’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승의의 이치에 따르면 향계·미계·촉계는 안계의 경우와 같다고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한 명의 유정이 맡은 향계는 그 밖의 사람들은 맡을 수 없고, 한 명의 유정이 맛본 미계는 그 밖의 사람들은 맛볼 수 없으며, 한 명의 유정이 느낀 촉계는 그 밖의 사람들은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001_0227_c_01L多相續建立同分及彼同分如說色
001_0227_c_02L聲香味觸應知亦爾聲可如色
001_0227_c_03L香味觸三至根方取是不共故
001_0227_c_04L取非餘理應如眼等不應如色說
001_0227_c_05L有是理而容有共所以者何香等三
001_0227_c_06L於一及餘皆有可生鼻等識義
001_0227_c_07L等不爾 [262] 故如 [263] 色說若依雜心謂眼見
001_0227_c_08L色是有分不見色是餘有分謂色眼
001_0227_c_09L [264] 見是有分所不見是餘有分差別
001_0227_c_10L若眼是一有分餘一切亦有分
001_0227_c_11L一餘有分餘一切亦餘有分色若見
001_0227_c_12L是有分非餘耳鼻舌身聲香味觸
001_0227_c_13L亦如是第一義如眼說俗數如色說
001_0227_c_14L解云雜心
意不分明
毗婆沙云如色界聲香味
001_0227_c_15L觸界亦爾同分彼同分品類差別
001_0227_c_16L相似故然於此義或有欲令唯齅嘗
001_0227_c_17L覺各自身中諸香味觸彼作是說
001_0227_c_18L香味觸界依世俗理如色界說
001_0227_c_19L諸世間作如是語汝所齅香我等
001_0227_c_20L亦齅汝所嘗味我等亦嘗汝所覺
001_0227_c_21L我等亦覺依勝義理香味觸界
001_0227_c_22L如眼界說謂一有情所齅香界餘不
001_0227_c_23L能齅若一有情所嘗味界餘不能嘗
001_0227_c_24L若一有情所覺觸界餘不能覺

001_0228_a_01L
  만약 하나의 촉계를 두 명의 유정의 몸이 각기 한쪽에서 공동으로 접촉한다면, 어찌 승의의 이치에서 색계의 경우와 같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촉계는 많은 극미들이 있어서 한곳에 화집和集하여 있는데, 두 몸이 접촉해서 각기 한쪽을 획득한 것이지 공통으로 획득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승의의 이치에서 안계의 경우와 같다고 설하였으니, 향계·미계 두 가지도 이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
다시 ② 어떤 이는 ‘또한 다른 사람과 무정물(非情)의 모든 향·미·촉도 맡고 맛보고 느낀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향계·미계·촉계를 이미 수용했거나 또 수용하고 있을 때, 세속의 이치에 의하면 색계의 경우와 같다고 설해야 한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공동으로 얻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560) 승의의 이치에 의하면 안계의 경우와 같다고 설하니, 한 사람이 수용한 것은 그 외의 사람이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 수용하지 않았을 때라면, 향계·미계·촉계는 승의의 이치에 의해서 또한 공동으로 얻을 수도 있으니 마치 색계의 경우와 같다고 설한다. 말하자면 미래에서 이제 막 현재에 이르려 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얻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561)
전자(①)의 뜻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향계·미계·촉계는 세속의 이치에 의거해서 색계의 경우와 같다고 설하고, 승의의 이치에 의거해서 안계의 경우와 같다고 설한다.≻ 후자(②)의 뜻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향계·미계·촉계는 이미 수용했거나 또 수용하고 있을 때라면, 세속의 이치에 의거해서 색계의 경우와 같다고 설하고 승의의 이치에 의거해서 안계의 경우와 같다고 설한다. 아직 수용하지 않았을 때라면, 승의의 이치에 의거해서 또한 ‘색계와 같다고 설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562)≻ 그러므로 여러 논들에서 모두 다음과 같이 설한다. ≺색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계·향계·미계·촉계 또한 이러하니, (성은 물론이고) 향·미·촉도 공통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563)
안식 등 육식의 동분과 피동분은, 발생하였거나 불생법이기 때문에, 의계意界의 경우와 같다고 설한다.564)

● 동분·피동분의 이름 해석
다음으로 동분과 피동분의 이름을 해석하겠다.
『구사론』에 의하면 그에 세 가지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 논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동분과 피동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근·경·식의 세 가지가 서로 간에 교섭하고 있기 때문에 ‘분分’이라 한다.

001_0228_a_01L一觸界二有情身各在一邊共所
001_0228_a_02L逼觸豈非勝義如色界說如是
001_0228_a_03L觸界有多極微和集一處二身逼
001_0228_a_04L各得一邊無共得者故勝義理
001_0228_a_05L如眼界說香味二界淮此應知
001_0228_a_06L有欲令亦齅嘗覺他及非情諸香味
001_0228_a_07L [265] 已受用及受用時依世俗理
001_0228_a_08L如色界說謂諸世間說共得故依勝
001_0228_a_09L義諦 [266] 如眼界說一所受用餘不得
001_0228_a_10L若未受用香味觸界依勝義理
001_0228_a_11L亦得 [267] 如色界說 [268] 謂在未來當至現在
001_0228_a_12L有多人等共得義故若依前義
001_0228_a_13L作是說香味觸界依世俗理如色界
001_0228_a_14L依勝義理如眼界說若依後義
001_0228_a_15L應作是說香味觸界若已受用及受
001_0228_a_16L用時依世俗理如色界說依勝義
001_0228_a_17L如眼界說若未受用依勝義理
001_0228_a_18L亦可得言如色界說是故諸論皆作
001_0228_a_19L是說如色界聲香味觸界亦爾
001_0228_a_20L香味觸可共得故眼等六識同分彼
001_0228_a_21L同分生不生法故如意界說

001_0228_a_22L
次釋同分彼同分名伏俱舍論有其
001_0228_a_23L三義故彼問言云何同分彼同分義
001_0228_a_24L根境識三更相交雜 [269] 故名爲分

001_0228_b_01L혹은 다시 ‘분’이란 ‘자기의 작용을 하는 것(己作用)’, 혹은 다시 ‘분’이란 ‘발생된 촉(所生觸)’을 말한다. 이 ‘분’을 똑같이 갖고 있기 때문에 ‘동분’이라 이름한다. 이와 상반되는 것을 피동분이라 이름하니, 동분은 아닌데 그(彼) 동분과는 종류種類·분分이 동일하기 때문에 피동분이라 한 것이다.”565)
『순정리론』도 『구사론』과 동일한 의미를 설한다.
『잡아비담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유분有分(동분)과 여유분餘有分(피동분)이란 어떤 뜻이 있는가? 분分이 있는 때를 유분이라 한다. 안계는 두 종류니, 유업분有業分(작용하고 있는 부분)과 무업분無業分(작용하지 않는 부분)이다. 그 유업분은 무업분에 의해 구분되기 때문에 유분이라 설하고, 그 무업분도 유업분에 의해 구분되므로 또한 유분이라 설한다. 두 개의 분이 둘 다 ‘유분’의 상을 얻는다.”566)
경부종에 의하면, 아직 정확한 문장을 보지 못했지만, 준해 볼 때 대승과 동일하며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없다.
이제 대승에 의하면 여러 논들이 같지 않다.567)
세친과 안혜의 『오온론』에 따르면,568) 오직 다섯 가지 내처內處에 의거해서 동분의 의미를 해석한다. 따라서 그들의 논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분은 몇 개인가? 말하자면 다섯 가지 내적인 유색계有色界이니, 그 각자의 식과 더불어 경계와 동등해지기 때문이다.569) 피동분은 몇 개인가? 그 각자의 식이 없을(空) 때이니, 자기 부류에 대해 동등하기 때문이다.570)571)
  동분은 ‘경계와 동등하다(等境)’는 의미에서 동분이라 한 것이다.
『집론』 제3권과 『잡집론』 제5권에서 말한 뜻도 『오온론』과 동일하다. 따라서 『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분과 피동분이란 무엇인가? 동분과 피동분은 몇 개인가? 어떤 의미에서 동분과 피동분을 관하라고 하는가?572) 말하자면 식과 분리되지 않은 채 그 식과 서로 유사한 근이 경계에서 상속하며 생하기 때문이고, 식과 분리된 채 자기 부류와 서로 유사한 근이 상속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분과 피동분의 뜻이다.”573)
(이에 대해 『잡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는 동분이다. 오근과 식이 동시에 일어날 때는, 식은 경계들과 서로 유사해진 상태로 상속하여 생하기 때문에, 근도 식과 서로 유사하게 전전한다는 의미에서 ‘동분’이라 이름한 것이다.574) 두 번째는 피동분이다. 근들이 식과 분리된 채 자기 부류와 서로 유사하게 상속하여 생하기 때문에,

001_0228_b_01L復分者是已 [270] 作用或復分者是所
001_0228_b_02L生觸同有此分故云 [271] 同分與此相
001_0228_b_03L名彼同分由非同分與彼同分與
001_0228_b_04L彼同分 [272] 種類分同名彼同分正理同
001_0228_b_05L俱舍雜心論云 [273] 分餘有分有何
001_0228_b_06L有分時說名有分 [274] 眼界二種
001_0228_b_07L有業及無業分彼有業分爲無業分
001_0228_b_08L同分 [275] 說有分彼無業分亦爲有業
001_0228_b_09L分可 [276] 亦說有分二分俱得有分相
001_0228_b_10L依經部宗未見正文准同大乘
001_0228_b_11L理無違今依大乘諸論不同若依
001_0228_b_12L世親安慧五蘊論唯約五內處釋同
001_0228_b_13L分義故彼論皆云幾同分謂五內
001_0228_b_14L有色界與彼自識等境界故幾彼同
001_0228_b_15L謂彼自識空時與自類等故解云
001_0228_b_16L司分等境義故名同分集論第三雜
001_0228_b_17L集第五意同五蘊故集論云云何
001_0228_b_18L同分彼同分 [277] 同分彼同分爲何義
001_0228_b_19L觀同分彼同分耶謂不離識彼相
001_0228_b_20L似根於境相續生故離識自類 [278] 相似
001_0228_b_21L相續生 [279] 是同分彼同分 [280] 初是同分
001_0228_b_22L根與識俱識相似於諸境 [281] 相續生故
001_0228_b_23L由根與識相似轉義說名同分第二
001_0228_b_24L是彼同分諸根離識自類相似相續

001_0228_c_01L근은 식과 결합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체와 서로 유사한 상태로 상속해서 생한다.575) 근의 상相이 서로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피동분이라 설한 것이다. 색온의 일부, 안근 등 다섯 가지 유색有色의 계·처의 일부는 바로 동분과 피동분이다.”576)
또 『유가사지론』 제56권에서 또한 다섯 가지 내처에 의거해서 설하니,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십팔계 중에서 몇 개가 동분이고 몇 개가 피동분인가? ‘식이 있는 안계(有識眼界)’를 동분이라 하고, 그 밖의 안계는 피동분이라 한다. 안계와 마찬가지로 내지는 신계 또한 그러하다. 오직 근에 속하는 내적인 모든 계에 대해서만 동분·피동분을 사량하는 것이지, 색 등의 외적인 모든 계에 대해서는 (사량하지) 않는다.577) 법계에서 소연이 있는 모든 것(심소법 등)은 마치 심계心界의 경우와 같다고 설하고, 소연이 없는 모든 것은 마치 색계 등과 같다고 설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578)
『심밀해탈경』에는 이 문장은 빠져서 없고, 양梁 『섭대승론석』에 인용된 『해절경』에서는 “식이 있는 안근에 의지하고 바깥의 색진을 소연으로 삼아 안식이 일어날 수 있다.”579)고 하였다. 진제 스님은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만약 죽은 사람의 눈이라면 식이 없는 눈(無識眼)이라 한다. 따라서 식이 있는 눈이라 말함으로써 식이 없는 눈을 배제시킨 것이다.≻ 이 해석은 맞지 않다. 목숨을 버린 뒤라면 눈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 설한 “식이 있는 이(有識耳)……”에 대해서도 이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
“안식과 구전하여 따라다니는……”이라 했는데, 이는 안식이 일어날 때 반드시 유분별의식이 동시에 따라다니면서 하나의 경계를 똑같이 소연으로 삼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b) 네 가지 식이 의식과 구전함을 밝힘

  식이 있는 이·비·설·신과 성·향·미·촉을 연으로 하여, 이식·비식·설식·신식이 발생하고, 이식·비식·설식·신식과 함께하면서 따라다니는 동시·동경의 유분별의식이 일어난다.

  이것은 두 번째로 그 밖의 네 종류 식이 의식과 구전함을 해석한 것이니, 앞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

㉯ 의식을 오식과 대응시켜 구전하는 개수를 밝힘

  광혜여, 만약 이때에 하나의 안식이 일어났다면 곧 이때에는 오직 하나의 분별의식만 있어서 안식과 더불어 동일한 소행所行(인식 영역) 에서 일어난 것이다.


001_0228_c_01L生故由根不與識合唯自體相似相
001_0228_c_02L續生根相 [282] 似義1) [24] [283] 同分色蘊一分
001_0228_c_03L眼等五有色界處一分是同分彼同分
001_0228_c_04L又瑜伽五十六亦依五內處說彼云
001_0228_c_05L十八界中幾是同分幾彼同分
001_0228_c_06L有識眼界名爲同分所餘眼界
001_0228_c_07L彼同分如眼界乃至身界亦爾
001_0228_c_08L根所攝內諸界中思量同分及彼同
001_0228_c_09L非於色等外諸界中當知法界諸
001_0228_c_10L有所緣如心界說 [284] 所緣如色等說
001_0228_c_11L若深密經闕無此文梁攝論所列 [285] 解節經云
有識眼根緣外色塵眼識得生眞諦解云若死
001_0228_c_12L人眼名無識眼故言有識以簡無識
此釋不然若捨命後不成眼故也
下有識
001_0228_c_13L耳等准此應知
001_0228_c_14L與眼識俱隨行等者此明眼識起時
001_0228_c_15L必有分別意識同時隨行同緣一
001_0228_c_16L

001_0228_c_17L
有識耳鼻百身及聲香味觸爲緣生耳
001_0228_c_18L鼻舌身識與耳鼻舌身識俱隨行同時
001_0228_c_19L同境有分別意識轉

001_0228_c_20L
釋曰此卽第二釋餘四識與意識俱
001_0228_c_21L准上應知

001_0228_c_22L
廣慧若於爾時一眼識轉卽於此時
001_0228_c_23L唯有一分別意識與眼識同所行轉

001_0228_c_24L「說」下異有「彼」

001_0229_a_01L
  이하는 두 번째로 구전하는 개수를 따로따로 해석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의식이 안식과 더불어 구전함을 밝힌 것이고, 나중은 의식이 안식 등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의 식들과 더불어 구전함을 밝힌 것이다.

a. 의식이 안식과 구전함을 밝힘
이것은 첫 번째로 의식이 안식과 더불어 구전하는 것은 하나의 연緣과 결합했기 때문임을 밝힌 것이다.

b. 의식이 소연 경계에 따라서 몇 개의 연과 합하는지를 밝힘

  만약 이때에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의 식들이 일어났다면, 곧 이때에는 오직 하나의 분별의식이 있어서 다섯 가지 식들과 더불어 동일한 소행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로 소연 경계 등에 따라서 몇 개의 연이 결합하는지를 밝힌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의식이 안식 등 오식과 더불어 몇 개가 구전하는지를 밝힌 것인데, 그 수가 일정하지 않다. 『심밀해탈경』에서는 ‘무분별의식’이라고 하였지만,580) 『해절경』 등에서는 모두 ‘분별의식’이라고 하였으니,581) 이 판본(『해심밀경』)과 동일하다. 따라서 ‘분별’이라고 한 것이 바름을 알 수 있다.

(나) 비유(喩)

  광혜여, 마치 큰 폭포수의 흐름에서 만약 하나의 파랑이 생길 연이 현전해 있으면 오직 하나의 파랑이 일어나고,

  이것은 두 번째로 비유를 들어 거듭 해석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물과 파랑의 개수로 비유한 것이고, 둘째는 거울과 영상의 개수로 비유한 것이다.

● 두 가지 비유에 대한 제교諸敎의 해석
전후의 두 가지 비유에 차이가 있는데, (이에 대해) 여러 설들이 같지 않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가지 비유의 의취意趣는 각기 다르다. 예를 들어 진제의 『기』에서는, ‘물이 파랑을 생기한다’는 비유는 육식이 본식과 똑같이 생하고 멸함을 뜻하고, ‘거울에 영상이 생기한다’는 비유는 여러 식들이 일어나기는 해도 본식의 체가 육식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님을 뜻한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가지 비유의 의취는 차이가 없다. 모든 식이 구전한다는 뜻을 똑같이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가사지론』 제51권, 『현양성교론』 제17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582)
지금의 해석에서는 두 가지 비유에 대해 여러 교설들이 같지 않다.
어떤 곳에서는 소의所依와 능의能依의 두 종류 차별을 나타내고자 하여 두 가지 비유를 설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001_0229_a_01L
釋曰自下第二別釋俱轉多少於中
001_0229_a_02L有二初明意識與眼識俱轉後明意
001_0229_a_03L識與眼等二三四五識俱轉此卽第
001_0229_a_04L一明意識與眼識俱轉一緣合故

001_0229_a_05L
若於爾時二三四五諸識身轉卽於此
001_0229_a_06L唯有一分別意識與五色身同所行
001_0229_a_07L

001_0229_a_08L
釋曰此卽第二明隨所緣境等綠合
001_0229_a_09L多少是一意識與眼等五識俱轉多
001_0229_a_10L其數不定深密經云無分別意
001_0229_a_11L依解節經等皆云分別意識
001_0229_a_12L此本同故知分別爲正

001_0229_a_13L
廣慧如大暴水流若有一浪生緣現前
001_0229_a_14L唯一浪轉

001_0229_a_15L
釋曰此卽第二擧喩重釋於中有二
001_0229_a_16L初水浪多少喩二鏡影多少喩前後
001_0229_a_17L二喩有差別者諸說不同一云
001_0229_a_18L喩意趣各別如眞諦記水生浪譬
001_0229_a_19L識與本識同生滅義鏡生影譬諸識
001_0229_a_20L雖起非本識體轉作六識一云二喩
001_0229_a_21L意趣無異同顯諸識俱轉義故如瑜
001_0229_a_22L伽論第五十一顯揚十七今解二喩
001_0229_a_23L諸敎不同有處欲顯所依能依二種
001_0229_a_24L差別故說二喩如瑜伽六十三云

001_0229_b_01L“승의의 도리에 의해 차별을 건립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대략 두 종류 식識이 있으니, 첫째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고 둘째는 전식轉識583)이다. 아뢰야식은 ‘소의所依(의지되는 곳)’이고 전식은 ‘능의能依(의지하는 자)’이다. 이것(전식)은 다시 일곱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안식에서 의식까지를 말한다.584) 비유하면 물의 파랑이 폭류에 의지하는 것과 같고, 혹은 영상이 밝은 거울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승의의 도리에 의해 소의와 능의의 차별을 건립한다’고 한다.”585)
어떤 곳에서는 (두 가지 비유는) 제8식과 일곱 가지 식의 구전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 제51권과 『현양성교론』 제17권의 설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두 가지 비유는) 제8식과 일곱 가지 식이 차이가 없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성유식론』 제7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덟 가지 식의 자성은 결정코 하나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상行相과 소의所依와 소연所緣과 상응법相應法이 다르기 때문이다.586) 또 하나가 멸할 때 그 밖의 것이 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능훈能熏·소훈所熏 등의 상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587) 또한 결정코 다른 것도 아니다. 경에서 ‘여덟 가지 식은 마치 물과 파랑 따위처럼 차별이 없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결정코 다르다면 당연히 인과의 성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588) 마치 환사幻事 등과 같아서 일정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이전에 설했던 식의 차별적 상들은 세속의 도리에 따른 것이지 진실한 승의勝義에 따른 것은 아니다. 진실한 승의에서는 마음과 언어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타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심心·의意·식識이라는 여덟 가지 식은, 속제에서는 상이 차별되지만, 진제에서는 상의 차별이 없으니, 상相·소상所相이란 없기 때문이네.589)≻”590)
지금 이 경문의 의취는 앞에서 말했던 모든 의미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혹은 이 경의 두 가지 비유의 의미는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전자는 ‘동시에 일어나고 또 인과의 상속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을 비유한 것이다.591) 예를 들면 『성유식론』 제3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恒’이라는 말은 ‘단멸(斷)’을 차단한 것이고 ‘전轉’이라는 말은 ‘영원하지 않음(非常)’을 표시한 것이니, 마치 폭류와 같아서 인과因果가 본래 그러하다.”592) 구체적으로 설하면 그 논과 같다. 후자는 ‘동시에 일어나고 또 제8식이 일곱 가지 식으로 전변되는 것은 아니며 또 수용에 다함이 없다’는 뜻을 비유한 것이다.593)

㉮ 물과 파랑의 개수로 비유함
전자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하나의 연과 하나의 파랑으로 비유한 것이다. 다음은 여러 개의 연과 여러 개의 파랑으로 비유한 것이다. 마지막의 “그런데 이” 이하는 자기 부류가 단절되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001_0229_b_01L何名爲勝義道理建立差別謂略有
001_0229_b_02L二識一阿賴耶二者轉識阿賴耶
001_0229_b_03L識是所依轉識是能依此復七種
001_0229_b_04L謂眼識乃至意識譬如水浪依止暴
001_0229_b_05L或如影像依止明1)如是名依勝
001_0229_b_06L義道理建立所依能依差別有處
001_0229_b_07L顯第八與七俱轉如瑜伽五十一
001_0229_b_08L揚十七有處爲顯第八與七不異義
001_0229_b_09L如成唯識第七云八識自性不可
001_0229_b_10L言定一行相所依緣相應異故又一
001_0229_b_11L滅時餘不滅故能熏等相各異故
001_0229_b_12L非定異經說八識如水波等無差
001_0229_b_13L別故定異應非因果性故如幻等
001_0229_b_14L定性故如前所說識差別相依理世
001_0229_b_15L非眞勝義眞勝義中心言絕故
001_0229_b_16L如伽他說心意識八種俗故相有別
001_0229_b_17L眞故相無別相所相無別故今此經
001_0229_b_18L意含有如上所說諸義或可此經二
001_0229_b_19L喩意異前喩俱起及因果相續不斷
001_0229_b_20L如成唯識第三卷云恒言遮斷轉
001_0229_b_21L非常猶如暴流因果法爾具說如
001_0229_b_22L後喩俱起及八不轉成七及受用
001_0229_b_23L無盡義
前中有三初一緣一浪喩
001_0229_b_24L多緣多浪喩後然此下自類無斷喩

001_0229_c_01L
a. 하나의 연과 하나의 파랑으로 비유함
이 경문은 첫 번째로 하나의 연과 하나의 파랑으로 비유한 것이다.

b. 여러 개의 연과 여러 개의 파랑으로 비유함

  만약 두 개나 여러 개의 파랑이 생길 연이 현전해 있다면 여러 개의 파랑이 일어난다.

  이것은 두 번째로 여러 개의 연과 여러 개의 파랑으로 비유한 것이다.

c. 자기 부류가 단절되지 않음을 비유함

  그런데 이 폭포수는 자기 부류로서 항상 흐르면서 끊임도 없고 다함도 없다.

  이것은 세 번째로 자기 부류가 단절되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입능가경』도 이 뜻을 함께하니, 따라서 그 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如海遇風緣      바다가 바람이라는 연을 만나
起種種波浪      갖가지 파랑을 일으키면
現前作用轉      현전한 작용이 일어나서
無有間斷時      잠시도 끊어짐이 없는 것처럼
藏識海亦然      장식의 바다 또한 그러하여
境等風所擊      경계 등의 바람에 부딪혀서
恒起諸識浪      언제나 식들의 물결을 일으키고
現前化用轉      현전한 작용이 일어난다네594)

㉯ 거울과 영상의 개수로 비유함
  비유하면 아주 깨끗한 거울 면에 만약 하나의 영상이 생길 연이 현전해 있다면 오직 하나의 영상이 일어나고,
  이하는 두 번째로 거울과 영상의 개수로 비유한 것이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의 연과 하나의 영상으로 비유한 것이고, 둘째는 여러 개의 연과 여러 개의 영상으로 비유한 것이며, 마지막 “이 거울 면이……아니고” 이하는 수용에 다함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a. 하나의 연과 하나의 영상으로 비유함
이것은 첫 번째로 하나의 연과 하나의 영상으로 비유한 것이다.

b. 여러 개의 연과 여러 개의 영상으로 비유함

  만약 두 개나 여러 개의 영상이 생길 연이 현전해 있다면 여러 개의 영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두 번째로 여러 개의 연과 여러 개의 영상으로 비유한 것이다.

c. 수용에 다함이 없음을 비유함

  이 거울 면이 전변해서 영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수용이 멸하여 다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세 번째로 수용에 다함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 거울 면이 전변하여 영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라고 한 것에 대해, 진제의 『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울은 영상의 발생을 보조하는 연(藉緣)이지, 거울이 전변하여 영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육식이 보조적 연이 되어 진塵이 발생한다는 것은,

001_0229_c_01L此卽第一一緣一浪喩

001_0229_c_02L
若二若多浪生緣現前有多浪轉

001_0229_c_03L
釋曰此卽第二多緣多浪喩

001_0229_c_04L
然此暴水自類恒流無斷無盡

001_0229_c_05L
釋曰第三自類不斷喩入楞伽經
001_0229_c_06L同此意故彼頌云

001_0229_c_07L
如海遇風緣起種種波浪

001_0229_c_08L現前作用轉無有間斷時

001_0229_c_09L藏識海亦然境等風所擊

001_0229_c_10L恒起諸識浪現前化 [286] 用轉

001_0229_c_11L
譬如善淨鏡面若有一影生緣現前
001_0229_c_12L一影起

001_0229_c_13L
釋曰自下第二鏡影多少喩於中有
001_0229_c_14L初一緣一影喩二多緣多影喩
001_0229_c_15L非此下受用無盡喩
此卽第一一緣
001_0229_c_16L一影喩

001_0229_c_17L
若二若多影生緣現前有多影起

001_0229_c_18L
釋曰此卽第二多緣多影喩

001_0229_c_19L
非此鏡面轉變爲影亦無受用滅盡可
001_0229_c_20L

001_0229_c_21L
釋曰此卽第三受用無盡喩言非此
001_0229_c_22L鏡面轉影等者眞諦記云鏡影
001_0229_c_23L生藉緣鏡不轉作影六識藉緣塵生
001_0229_c_24L「觀」疑「鏡」

001_0230_a_01L전 찰나의 육식의 종자로써 후 찰나의 육식을 발생시킨다는 말이지, 본식本識의 체가 육식으로 전환된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전변轉變에는 본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인의 전변(因變)이니, 종자인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일곱 가지 식으로 되는 것이다.595) 둘째는 과의 전변(果變)이니, 현행한 제8식은 자기의 상분을 변현해 내지만 안식 등의 일곱 가지 식의 (상분을) 변현해 낼 수는 없다.596) 지금 이 『해심밀경』에서는 과의 전변이라는 의미에서 ‘이 거울 면이 전변해서 영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597)
또 ‘이 거울 면이 영상을 나타내는 것은 멸하지 않는다’고 한 뜻은 제8식이 과를 내는 작용은 다함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어째서 ‘합合(법동유)’에서는 물과 파랑의 비유만 들었는가?598)
  뜻을 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설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심밀경』과 『해절경』에서는 ‘합’과 두 가지 비유를 모두 들었는가?599)
  범본에 이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 결합(合)

  이와 같이 광혜여, 흡사 폭류와 같아서 아타나식을 의지처로 삼아 건립하였기 때문에, 만약 이때에 하나의 안식이 생길 연이 현전해 있으면 곧 이때에 하나의 안식이 일어나고,

  이하는 세 번째로 법동유法同喩600)를 든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하나의 연으로 하나의 식이 일어남을 밝힌 것이고, 나중은 여러 개의 연으로 여러 개의 식이 일어남을 밝힌 것이다.

㉮ 하나의 연으로 하나의 식이 일어남을 밝힘
이것은 첫 번째로 하나의 연으로 하나의 식이 일어남을 밝힌 것이다.

㉯ 여러 개의 연으로 여러 개의 식이 일어남을 밝힘

  만약 이때에 나아가서 다섯 개의 식들이 생길 연이 현전해 있으면 곧 이때에 다섯 가지 식들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은 두 번째로 여러 개의 연으로 여러 개의 식이 일어남을 밝힌 것이다. 위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

나. 비밀선교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전의 두 질문에 답함

  광혜여, 이와 같이 보살은 비록 법주지法住智를 의지처로 삼아 건립하였기 때문에 심의식의 비밀선교를 (잘 안다고 했지만), 모든 여래는 이 정도를 가지고 그들에 대해 심의식의 모든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라고 시설하는 것은 아니다.


001_0230_a_01L並前六識種子生後六識非爲
001_0230_a_02L本識體轉作六識今解轉變自有二
001_0230_a_03L一者因變種子賴耶變成七識
001_0230_a_04L者果變現行第八變自相分而不能
001_0230_a_05L變眼等七識今此經中約果變義
001_0230_a_06L非此鏡面轉爲影又此鏡面現影
001_0230_a_07L無滅意顯第八生果無盡
如何
001_0230_a_08L合中唯擧水波解云義准可知
001_0230_a_09L而不說若爾如何深密解節具合二
001_0230_a_10L解云梵本有此差別

001_0230_a_11L
如是廣慧由似暴流阿陀那識爲依
001_0230_a_12L爲建立故若於爾時有一眼識生
001_0230_a_13L緣現前卽於此時一眼識轉

001_0230_a_14L
釋曰自下第三擧法同喩於中有二
001_0230_a_15L初明一緣一識轉後明多緣多識轉

001_0230_a_16L
此卽第一明一緣一識

001_0230_a_17L
若於爾時乃至有五識身生緣現前
001_0230_a_18L於此時五識身轉

001_0230_a_19L
釋曰此卽第二明多緣多識轉准上
001_0230_a_20L應知

001_0230_a_21L
廣慧如是菩薩雖由法住智爲依止
001_0230_a_22L爲建立故於心意識秘密善巧然諸如
001_0230_a_23L來不齊於此施設彼爲於心意一切
001_0230_a_24L秘密善巧菩薩

001_0230_b_01L
  이하는 두 번째로 비밀선교秘密善巧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전의 두 질문에 답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물음에 의거해 바로 해석한 것이고, 나중의 “광혜여, 이 정도 되어야” 이하는 이전의 물음에 결론지어 답한 것이다.

가) 물음에 의거해 바로 해석함
전자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초지 이전은 부처님이 설했던 대상이 아님을 밝힌 것이고, 나중은 초지 이상이 바로 부처님이 설했던 대상임을 밝힌 것이다.

(가) 초지 이전은 부처님이 설했던 대상이 아님을 밝힘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법주지法住智”라고 한 것은, 살바다종에 의하면 과법果法이 머물고 있는 인因에 대해 알기 때문에 법주지라고 한다. 따라서 『대비바사론』 제110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째서 법주지라고 하는가? ‘법’이란 ‘과’이고 ‘주’란 ‘인’이다. 과법이 머물고 있는 인에 대해 알기 때문에 법주지라고 한다. 말하자면 삼계의 하·중·상의 과가 머물고 있는 인을 아는 것을 법주지라고 한다.”601) 자세히 설하면 그 논과 같다.
경부종에 의하면, 법이 상주함을 알기 때문에 법주지라고 한다. 따라서 『성실론』 제1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법의 생기에 대해 알기 때문에 법주지라고 한다. 예를 들면 생生은 노사老死의 연이 되고 나아가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이 된다. 부처님이 계시든 부처님이 계시지 않든 이 법성은 상주하기 때문에 법주지라고 한다.”602)
이제 대승에 의하면, 『현양성교론』 제15권에서는 “법주지란 소달람(經) 등에 의거해 법문을 안립하는 지를 말한다.”603)고 하였다. 『유가사지론』에서도 『현양성교론』과 똑같이 설하는데, 따라서 제10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것을 법주지라고 하는가? 부처님이 시설하여 보여주신 대로 전도 없이 아는 것을 말한다.”604) 또 제94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주지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이 연생緣生·연기緣起에 수순하는 전도 없는 가르침을 청문聽聞하고 나서, 연생하는 행行의 인과의 분위에 대해 이생지異生地(범부의 지위)에 머물면서 곧 능히 여실하게 문聞·사思·수修에 의해 성립된 작의作意로써 이치에 맞게 사유하고, 능히 오묘한 지혜로써 ‘고는 진실로 고이다’, ‘집은 진실로 집이다’, ‘멸은 진실로 멸이다’, ‘도는 진실로 도이다’라고 깨닫고 신해信解하는데,

001_0230_b_01L
釋曰此下第二辨秘密善巧答前兩
001_0230_b_02L於中有二初依問正釋後廣慧
001_0230_b_03L齊此下結答前問
前中有二初明
001_0230_b_04L地前非佛所說後明地上是佛所說

001_0230_b_05L
此卽初也法住智者依薩婆多宗
001_0230_b_06L果法所住內故名法住智故大婆沙
001_0230_b_07L一百一十云何故名法住智
001_0230_b_08L法者是果住者是因知果法所住因
001_0230_b_09L名法住智謂知三界下中上果所
001_0230_b_10L住之因名法住智廣說如彼依經
001_0230_b_11L部宗知法常住故名法住智故成
001_0230_b_12L實論二十六云知諸法生起名法住
001_0230_b_13L如生緣老死
乃至無明緣行以有
001_0230_b_14L佛無佛此性常住故曰法住智
今依
001_0230_b_15L大乘依顯揚論第十五云法住智者
001_0230_b_16L謂依素怛纜等安立法門智依瑜伽
001_0230_b_17L同顯揚論故第十云云何法住
001_0230_b_18L謂如佛施設開示無倒而知又九
001_0230_b_19L十四云云何法住智謂如有一人
001_0230_b_20L隨順緣生緣起無倒敎已於緣生行
001_0230_b_21L因果分位住異生地便能如實以聞
001_0230_b_22L思脩所成作意如理思惟能以妙慧
001_0230_b_23L悟入信解苦眞是苦集眞是集滅眞
001_0230_b_24L是滅道眞是道諸如是等如其因果

001_0230_c_01L이와 같이 그 인과에 맞게 안립된 법들에 대한 모든 오묘한 지혜를 법주지라고 이름한다.”605)
이제 이 경에서 설한 뜻도 『현양성교론』과 『유가사지론』 제10권과 동일하다. 이 경문의 뜻을 설하자면, 지전地前보살은 비록 법주지의 힘으로 심의식에서의 세속적 차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해도 아직 심의식의 비밀스런 승의勝義를 증득하여 신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이 정도 된다고 해서 그들을 ‘선교보살’이라고 시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초지 이상이 부처님이 설했던 대상임을 밝힘

  광혜여, 만약 보살들이 내內의 각별各別한 것에서 여실하게 아타나를 보지 않고 아타나식을 보지 않으며 아뢰야를 보지 않고 아뢰야식을 보지 않으며 적집을 보지 않고 심을 보지 않으며,606)

  이하는 두 번째로 초지 이상이 바로 부처님이 기별하신 바임을 바로 밝힌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두 질문에 총괄해서 답한 것이고, 나중의 “이것을 이름하여” 이하는 두 질문에 따로따로 답한 것이다.

㉮ 두 질문에 총괄해서 답함
앞의 (총괄적) 대답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교에 의해 언표된 의미(所詮義 : 경계)이니, 이는 처음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둘째는 의미에 의거해 시설된 교이니, 이는 나중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제8식의 세 가지 이름에 의거해 여실지如實知를 설명한 것이고, 나중은 십팔계에 의거해서 여실지를 밝힌 것이다.

a. 제8식의 세 가지 이름에 의거해 여실지를 설명함
이것은 처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경문을 해석하자면 여러 설들이 같지 않다.
진제의 『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이전부터 식識·색色 등을 보았다면 이는 세속에 의거해 이해한 것이니, 부처님은 이런 사람이 심의식의 비밀스런 의미를 이해했다고 기별하시지는 않는다. 여실하게 이전부터 설명했던 식의 의미를 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은 비로소 이 사람은 심의식의 비밀스런 의미를 이해했다고 기별하신다. 여기서는 식이 허망하여 있는 바가 없음이 곧 진실이라는 것을 밝혔으니, 근본의 비밀에 통달함으로써 허망한 지말도 비로소 명료해지는 것이다.≻
  또 “내內의 각별한 것에서(於內各別)”라고 했는데, ‘내內’는 진여를 말하니 제법 자체이기 때문에 ‘내’라고 하였고, ‘각별各別’이란 언어(詮)를 따라 진여를 나타내기 때문에 ‘각별’이라 한 것이다.

001_0230_c_01L安立法中所有妙智名法住智今此
001_0230_c_02L所說意同顯揚瑜伽第十此意說云
001_0230_c_03L地前菩薩雖由法住智力了知心意
001_0230_c_04L識中世俗差別而未證解於心意識
001_0230_c_05L秘密勝義是故世尊不齊於此施設
001_0230_c_06L彼爲善巧菩薩

001_0230_c_07L
廣慧若諸菩薩於內各別如實不見阿
001_0230_c_08L陀那不見阿陀那識不見阿賴耶
001_0230_c_09L見阿賴耶識不見積集不見心

001_0230_c_10L
釋曰自下第二正明地上是佛所記
001_0230_c_11L於中有二初總答兩問後是名下
001_0230_c_12L答兩問
謂前答中含有二義一者
001_0230_c_13L敎所詮義以答初問二者依義設敎
001_0230_c_14L卽答後問於中有二初約第八三名
001_0230_c_15L辨如實知後約十八界明如實知

001_0230_c_16L卽初也然釋此文諸說不同眞諦
001_0230_c_17L記云菩薩若如此前來見識色等
001_0230_c_18L依俗解佛不記說此人解心意識秘
001_0230_c_19L密義由如實不見前來所明識義
001_0230_c_20L方記說此人解心意識秘密義此明
001_0230_c_21L識虗妄無所有卽眞由達本秘密
001_0230_c_22L虛妄之末方始明了也
又解云
001_0230_c_23L內各別者內謂眞如諸法自體故名
001_0230_c_24L爲內各別者隨詮顯眞名爲各別

001_0231_a_01L이 뜻을 설하자면, 초지 이상의 보살은 승의제勝義諦에 의거하고 근본지根本智로 말미암아 ‘내의 각별한 것에서’ 진여의 경계를 증득한 상태에서 여실하게 아타나의 작용을 보지 않고 여실하게 아타나의 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니, 아뢰야와 심의 체·용의 차별은 이에 준해서 알아야 한다.607)
  또 “내內의 각별한 것에서”라고 했는데, 아타나 등의 제법의 체에는 모두 자상自相·공상共相의 도리가 있으니, 이 중에서 자상(사물의 특수상)은 현량現量(직접 지각)의 경계이기 때문에 ‘내內’라고 하였고, 제법의 자상은 각기 자체에 부합하는 것이므로 ‘각별各別’이라고 하였다.608) 그러므로 『잡집론』 제1권에서는 “자기가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知’의 뜻이다.609)610)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현량으로 자상을 안다는 뜻이다. 또 『유가사지론』 제2권에서는 다시 이런 말을 하였다. “‘지에 의거한 언설(依知言說)’이란, 각기 따로(各別) 내면에서 받아들이고(所受) 증득되고(所證) 감촉되고(所觸) 획득되면(所得) 이런 인연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설해 주는 것을 말한다.”611)
이 해석에 따르면, 정체지正體知(근본지)와 후득지後得智는 모두 현량이다. 여실하게 아타나의 자상을 알아서 모든 분별을 떠났기 때문에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이지, ‘분별이 없는 것’을 일컬어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니다.612)

b. 십팔계에 의거해 여실지를 밝힘

  눈과 색과 안식을 보지 않고, 귀와 소리와 이식을 보지 않으며, 코와 향과 비식을 보지 않고, 혀와 맛과 설식을 보지 않으며, 몸과 촉과 신식을 보지 않고, 의와 법과 의식을 보지 않으면,

  이것은 십팔계를 보지 않기 때문에 선교보살이라 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 두 질문에 따로따로 답함

  이것을 이름하여 승의의 선교보살이라 이름하고, 여래께서는 그를 ‘승의의 선교보살’이라 시설한다.

  이것은 두 번째로 이전의 두 질문에 따로따로 답한 것이다. 경문에 두 절이 있다. 처음에 “이것을 이름하여 승의의 선교보살이라 이름하고”라고 한 것은 소전의 의미(所詮之義)를 앞에 표시함으로써 앞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다. 나중에 “여래는 그에 대해 승의의 선교보살이라 시설한다.”라는 것은

001_0231_a_01L此意說地上菩薩依勝義諦由根
001_0231_a_02L本智於內各別由證眞如境上如實
001_0231_a_03L不見阿陀那用如實不見阿陀那體
001_0231_a_04L賴耶及心體用差別准此應知
又解
001_0231_a_05L於內各別者阿陀那等諸法體上
001_0231_a_06L皆有自共相道理於中自相現量境
001_0231_a_07L名之爲內諸法自相各附自體
001_0231_a_08L爲各別是故雜集第一云自內所受
001_0231_a_09L是知義此卽現量知自相義又瑜伽
001_0231_a_10L第二復作此言依知言說者謂各別
001_0231_a_11L於內所受所證所觸所得由此因緣
001_0231_a_12L爲他宣說若依此釋正體後得
001_0231_a_13L是現量如實了知陀那自相離諸分
001_0231_a_14L故名不見非無分別乃名不見

001_0231_a_15L
不見眼色及眼識不見耳聲及耳識
001_0231_a_16L見鼻香及鼻識不見舌味及舌識不見
001_0231_a_17L身觸及身識不見意法及意識

001_0231_a_18L
釋曰此釋不見十八界故名善巧菩
001_0231_a_19L

001_0231_a_20L
是名勝義善巧菩薩如來施設彼爲勝
001_0231_a_21L義善巧菩薩

001_0231_a_22L
釋曰此卽第二別答前兩問文有兩
001_0231_a_23L初是名勝義善巧菩薩者牒上所
001_0231_a_24L證之義以答前問後如來施設彼爲

001_0231_b_01L능전의 교(能詮之敎)를 앞에 표시함으로써 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혹은 “이것을 이름하여(是名)”라는 두 글자는 두 단락에 아울러 통한다고 볼 수도 있다.

나) 이전의 물음에 대해 결론지어 답함

  광혜여, 이 정도는 되어야 심의식의 모든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라 하고, 여래는 이 정도는 되어야 그에 대해 심의식의 모든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라 시설한다.”

  이것은 두 번째로 이전의 질문에 결론지어 대답한 것이니, 문장 그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2. 게송으로 간략히 설함

  이때 세존께서 이런 의미를 거듭 펼치시고자 게송을 설하셨다.

  이하는 두 번째로 게송을 들어 간략히 설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송문을 발기한 것이고, 나중은 게송을 들어 간략히 설한 것이다.

1) 송문을 발기함
이것은 첫 번째로 송문을 발기한 것이다.

2) 게송으로 간략히 설함
 
阿陀那識甚深細    “아타나식은 매우 깊고 미세하며
一切種子如暴流    일체종자식은 마치 폭류와 같네
我於凡愚不開演    나는 범우凡愚613)에게는 설해 주지 않으니
恐彼分別執爲我    그들이 분별하여 ‘아’라고 집착할까 염려해서네”

『심밀해탈경』의 게송에서는 “제종아타나식諸種阿陀那識은 제법을 능히 생하니 나는 물과 거울의 비유를 설하되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설해 주지 않네.”614)라고 하였다. 『해절경』에서는 “집지식執持識은 매우 미세하고 제종자식諸種子識은 항류恒流와 같네. 범부에게 나는 설해 주지 않으니 그들은 ‘아’라고 집착하지 말지어다.”615)라고 하였다.
  이것은 두 번째로 게송으로 간략히 설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게송의 해석에서 여러 논이 같지 않다.
『섭대승론석』에 의하면 무성無性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매우 깊다(甚深)’고 한 것은 세상의 총명한 자들의 모든 각혜覺慧로도 그 근원을 궁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매우 미세하다(甚細)’고 한 것은 모든 성문 등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문 등에게는 이 식에 대해 알려 주지 않는 것이니, 그들은 미세한 일체지지一切智智616)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종자식은 폭류와 같다’고 한 것은 찰나마다 전전하고 상속하며 끊어지지 않는 것이 마치 물의 폭류와 같다는 것이다. ‘나는 범우에게는 설해 주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견我見을 품은 자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가 분별하고 계탁해서 ‘아’라고 집착할까 염려해서이다. 어째서 저 부류들이 분별·계탁하면서

001_0231_b_01L勝義善巧菩薩者牒上能詮之敎
001_0231_b_02L答後問咸可是名兩
該通兩段

001_0231_b_03L
廣慧齊此名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
001_0231_b_04L巧菩薩如來齊此施設彼爲於心意識
001_0231_b_05L一切秘密善巧菩薩

001_0231_b_06L
釋曰此卽第二結答前問如文可
001_0231_b_07L

001_0231_b_08L[後以頌略說]
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頌曰

001_0231_b_09L
釋曰自下第二擧頌略說於中有二
001_0231_b_10L初發起頌文後擧頌略說
[發起頌文]
此卽第一
001_0231_b_11L發起頌文

001_0231_b_12L[後以頌略說]
阿陀那識甚深細一切種子如暴流
001_0231_b_13L於凡愚不開演恐彼分別執爲我深密頌

001_0231_b_14L種阿陀那解節經曰執持識深細能生於諸法
說水鏡喩不爲愚人說諸種子恒流於凡我不說
001_0231_b_15L彼勿執
爲我

001_0231_b_16L
釋曰此卽第二擧頌說然釋此頌
001_0231_b_17L論不同依攝大乘無性釋曰言甚
001_0231_b_18L世聰叡者所有覺慧難窮底故
001_0231_b_19L甚細者諸聲聞等難了知故是故不
001_0231_b_20L爲諸聲聞等開示此識 [287] 不求微細
001_0231_b_21L一切智智故一切種子如暴流者
001_0231_b_22L那展轉相續不斷如水暴流我於凡
001_0231_b_23L愚不開演者懷我見者不爲開示
001_0231_b_24L彼分別計執爲我何容彼類分別計

001_0231_c_01L‘생사의 때가 다하도록 행상이 한 종류로서 바뀌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617)라고 집착하는 것을 허용하겠는가?”618)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아타나식’이란 해석하려 했던 (아뢰야식의) 이명異名이다. ‘매우 깊고 미세하다’고 한 것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체종자식은 마치 폭류와 같다’는 것은 차례대로 전전하기 때문이니, 일체종자식이 찰나마다 전전하는 것이 마치 사나운 물줄기의 흐름이 상속해서 일어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저들이 분별하여 아라고 집착할까 염려해서다’라고 한 것은 동일한 행상으로 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아’라고) 분별하여 집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619)
『성유식론』에서 호법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제법의 종자를 집지執持할 수 있고 또 색근과 의지처를 집수執受할 수 있으며,620) 또한 결생상속結生相續621)을 집취執取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식을 아타나라고 이름한 것이다. 종성이 없는 유정(無性有情)은 그 근원을 궁구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깊다’고 하였고, 취적종성趣寂種性은 통달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미세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일체법의 진실한 종자로서, 연에 부딪힐 때마다 곧 전식轉識의 파랑을 일으켜서 항상 사이가 끊어짐이 없으니 마치 폭류와 같다. ‘범凡’이란 ‘종성이 없는 자’이고, ‘우愚’란 ‘적멸로 달려가는 자’이니, 그들이 이에 대해 분별과 집착을 일으켜서 모든 악취惡趣에 떨어지고 성도聖道를 생하는 데 장애될까 염려하기 때문에 ‘나 세존은 알려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622)

001_0231_c_01L [288] 窮生死際行相一類無改易故
001_0231_c_02L親釋云阿陀那識者所釋異名
001_0231_c_03L深細者難了知故一切種子如暴流
001_0231_c_04L次第轉故一切種子刹那展轉
001_0231_c_05L如暴水流相續轉故恐彼分別執爲
001_0231_c_06L我者一行相轉故分別執可得
成唯
001_0231_c_07L識論護法釋云以能執持諸法種子
001_0231_c_08L及能執受色根依處亦能執取結生
001_0231_c_09L相續故說此識名阿陀那無性有情
001_0231_c_10L不能窮底故說甚深趣寂種性不能
001_0231_c_11L通達故名甚細是一切法眞實種子
001_0231_c_12L緣擊便生轉識波浪恒無間斷猶如
001_0231_c_13L暴流凡卽無性愚卽趣寂恐彼於
001_0231_c_14L此起分別執墮諸惡趣障生聖道
001_0231_c_15L我世尊不爲開示

001_0231_c_16L
解深密經卷第三

001_0232_a_01L
  1. 1)이하에서는 승의제의 오상 중에 다섯 번째 ‘모든 것에 편재하는 일미상一味相’을 설한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보살의 목격담을 실마리로 하여 설법이 행해지는데, 이 ‘일미상’을 설한 경문에서는 이례적으로 먼저 세존이 어떤 의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선현善現(수보리)이 자신의 경험담을 진술한다. 여기서 세존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참으로 승의제를 깨닫고 나서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하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보살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의제를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깨달았다고 자만하는 ‘증상만增上慢’을 갖고 자기가 안 것에 대해 기별한다고 답한다. 이 문답에서는 증상만이야말로 승의제를 증득하는 데 있어서 마지막까지 따라다니는 장애이고, 이로 인해 모든 것에 편재하는 승의제의 일미상을 알지 못함을 일깨워 준다. 그에 따르면, ‘승의제’라는 청정한 경계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증상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설해진 모든 교법들 안에서도 알려질 수 있는 ‘일미상’이다.
  2. 2)이 품은 전반부의 설법은 선현의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다음에 여래의 정설이 추가되는데, 마지막에 나오는 게송의 약설은 그 여래의 정설 안에서 구분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3. 3)진제의 『記」에 나온 ‘拔起抑下捨置’라는 문구는 다른 용례를 찾을 수가 없으므로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여기서는 이것을 선정을 닦을 때에 있는 세 가지 상, 즉 마음의 침체를 대치시키기 위해 분발하는 상(發相), 마음의 산란을 제지하는 상(制相), 그리고 평정한 마음을 가만히 놓아두고 있는 모습(捨相) 등으로 간주하고 번역하였다.
  4. 4)수부후저脩浮吼底(ⓢ Subhūti) : ‘수보리’라고도 음역하고, 부처님의 4대 제자 중에서 특히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린다. ‘수보리’는 선현善現·선길善吉·공생空生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하 원측 소에 나타나듯, 이 이름들은 모두 그가 태어날 때의 일화와 연관된다. ‘공생’이란 이름은 그가 태어났을 때 온 집 안이 텅 비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또 ‘선현·선길’이라는 이름은, 점쟁이가 그 집이 빈 일에 대해 ‘공空’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좋은 징조라고 해석하면서, “공을 나타낸 것은 좋습니다.(現空唯善。)”, “좋습니다. 길조입니다.(唯善唯吉。)”라고 말했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維摩經疏』 권3(T85, 384b7), 『金剛般若經疏論纂要』 권1(T33, 157c9) 참조.
  5. 5)원측 소에서 ‘무착無著의 논’이라 칭하는 경우 이는 무착의 『金剛般若論』(T25)을 가리키는데, 이 논에서는 ‘선길’이 아니라 ‘수보리’로 되어 있다. 세친世親의 『金剛般若波羅蜜經論』에는 ‘선길’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논과 혼동한 듯하다.
  6. 6)『직본반야경直本般若經』 : 수隋의 천축 삼장 ‘급다’가 번역한 『金剛能斷般若波羅蜜經』(T8)을 가리킨다.
  7. 7)수보리는 동방세계의 청룡타불이 응현應現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위 문장에서 ‘영향影嚮’이라 한 것은 불보살의 응현을 묘사한 말로서, 마치 그림자(影)가 형태(形)를 따라 나타나고 메아리(響)가 소리(聲)를 따라 나타나듯이 모든 불보살들이 부처님의 교화를 돕기 위해 자유자재로 시현하는 것을 말한다.
  8. 8)이상의 상전相傳의 설에 대해서는 길장吉藏의 『金剛般若經義疏』 권2(T33, 100a2) 참조.
  9. 9)이하의 『解深密經』의 문답에서는 부처님이 ‘증상만이 있는 자와 없는 자’에 대해 질문하고, 이에 대해 선현 보살이 자세하게 대답하는데, 이 선현의 대답이 설법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따라서 왜 유독 선현 보살에게만 질문하여 그가 설하도록 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10. 10)파야제波夜提(ⓢ pāyattika) : 파야제는 ‘타墮’를 뜻한다. 이것은 가령 가져야 할 의발의 수량을 초과한 경우 몰수되거나 참회해야 하는 가벼운 죄를 가리키는데, 이 죄를 범하고 참회하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지므로(墮三惡道) ‘파야제’라고 한다.
  11. 11)이 문구는 예를 들면 『四分律』이나 『十誦律』 등의 여러 율장에 나온다.
  12. 12)『五分律』 권6(T22, 39a21).
  13. 13)무쟁정無諍定 : 혜원의 『維摩義記』 권2(T38, 452c1)에서는 “항상 욕계의 중생을 예상하며 관찰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그 뜻이 일어나려 하면 방호해서 그와 경쟁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무쟁정이라 한다.”고 하였다.
  14. 14)이상은 『大智度論』 권40(T25, 356a20) 참조.
  15. 15)『大智度論』 권11(T25, 137a12) 참조.
  16. 16)『妙法蓮華經憂波提舍』 권1(T26, 5a5)에 따르면, 부처님은 다섯 가지 의미(五義)에서 성문에게 명하고 보살에게는 명하지 않는다. 이 논에 따르면, 첫째는 묘법연화의 설법은 성문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문들이 회심하여 대보리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다. 셋째는 보살에게 설하면 성문들이 겁약해져서 ‘이것은 나의 분수에 맞지 않다’고 할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넷째는 성문이 부처님께 명을 받았으니 그 밖의 성문들도 ‘나도 그와 같은 부류이니 명을 받겠지’라고 잘 사념思念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다섯째는 성문들이 멸과滅果를 증득했다는 이유로 ‘지어야 할 바를 이미 성취하였다(所作已辦)’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규기의 『妙法蓮華經玄贊』 권3(T34, 696c4) 참조.
  17. 17)『大智度論』 권41(T25, 357c3) 참조.
  18. 18)증상만增上慢(ⓢ adhimāna) : 훌륭한 교법을 알지도 못하면서 알았다고 생각하거나,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했으면서 증득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이를 무시하는 거만한 마음을 말한다. 뒤의 ≺(2)-②-가. 간략한 대답(略答)에서 ‘증상만’에 대한 대·소승의 학설이 자세히 소개된다.(pp.380~388)
  19. 19)기별記別(ⓢ vyākaraṇa) : 기별은 십이부경의 한 형식이기도 한데, 여기에서는 기답記答, 즉 대답해 주는 것을 말한다.
  20. 20)『妙法蓮華經』 권1(T9, 7a9) 참조.
  21. 21)『深密解脫經』 권1(T16, 668a22).
  22. 22)이 문장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후 문맥으로 볼 때 ‘공과를 행하는 사람(空果行人)’이란 증상만이 있는 사람이나 범부 등과 상응하고, ‘불공과를 행하는 사람(不空果行人)’이란 증상만이 없는 사람이나 성인 등과 상응한다. 이에 따를 때 전자는 공허한 과를 닦는 사람을, 후자는 공허하지 않은 과를 닦는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다.
  23. 23)사정취邪定聚 : 삼취三聚 중의 하나로서, 오무간업五無間業을 성취하여 반드시 악도에 떨어질 자를 말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전의 ≺1.-2)-(2)-②-나.≻에서 ‘삼취’에 대한 대·소승의 학설(pp.159~168) 참조.
  24. 24)정정취正定聚 : 삼취三聚 중의 하나로서, 유학법有學法과 무학법無學法을 성취한 자를 말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전의 〈1.-2)-(2)-②-나.〉에서 ‘삼취’에 대한 대·소승의 학설(pp.159~168) 참조.
  25. 25)유루의 오온, 다시 말하면 아직 번뇌를 여의지 못한 사람의 상속하는 오온을 ‘만의 의지처’라고 하였다.
  26. 26)만수면慢隨眠 : 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와 오견五見의 근본번뇌를 십수면十隨眠이라 하는데, 이 중의 ‘만’ 수면을 가리킨다.
  27. 27)이미 번뇌를 여읜 사람의 오온의 상속, 즉 무루오온이 ‘무만의 의지처’다.
  28. 28)미지욕근未知欲根(ⓢ anājñātam-ājñāsyāmi-indriya) : 삼무루근三無漏根의 하나로서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이라고도 한다. 『俱舍論』에 나온 22근 중에서 의意·낙樂·희喜·사捨·신信·근勤·염念·정定·혜慧라는 아홉 가지 근은 무루의 청정한 성법聖法을 발생시키는 데 증상된 힘이 있기 때문에 이에 의거해서 무루근을 안립한 것이다. 특히 견도의 지위에 있을 때는 이것이 ‘아직 알지 못했으나 알아야 할’ 사제의 이치를 관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에 ‘미지당지근’이라 한다.
  29. 29)지근知根(ⓢ ājñā-indriya) : 삼무루근三無漏根의 하나로서 이지근已知根이라고도 한다. 이미 사제의 이치를 알아서 미리혹迷理惑은 끊어졌고 다만 미사혹迷事惑만 남았는데, 다시 나아가 사제를 관하여 그 사혹을 끊는 토대가 되어 주기 때문에 이전의 아홉 가지 근을 ‘이지근’이라 바꿔서 이름한다.
  30. 30)지이근知已根(ⓢ ājñātāvi-indriya) : 삼무루근三無漏根의 하나로서 구지근具知根이라고도 한다. 무학위에서는 모든 번뇌를 이미 끊고 모든 일을 다 성취했기 때문에 이전의 아홉 가지 근을 ‘구지근’이라고 바꿔서 이름한다.
  31. 31)『解節經』 권1(T16, 713c16)에는 “無增上慢不由慢心”이라고 되어 있다.
  32. 32)『深密解脫經』 권1(T16, 668a23).
  33. 33)다른 두 본의 경에서는 증상만이 있는 경우를 두 구로 표현하고 이와 대비시켜 증상만이 없는 경우에 대해서도 『深密解脫經』에서는 “아를 떠나고 만을 떠나서(離我離慢)”, 『解節經』에서는 “증상만이 없고 만심을 따르지 않으며(無增上慢不由慢心)”라는 두 구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 『解深密經』에서는 증상만이 있는 경우는 “증상만을 품고서 증상만에 사로잡혀서(懷增上慢。 爲增上慢所執持故)”라고 하고, 없는 경우는 간단히 “증상만을 여의고서(離增上慢)”라고 한 것을 말한다.
  34. 34)수보리가 지혜의 힘으로 보살마하살들에게 반야바라밀을 설한 것은 모두 부처님의 힘 때문이라는 내용은 「설상품舌相品」이 아니라 그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삼가품三假品」에 나온다.
  35. 35)『摩訶般若波羅蜜經』 권2(T8, 230b25) 참조.
  36. 36)‘기별’에 대해서는 뒤의 「分別瑜伽品」 중 12부의 교법에 대한 해석에서 후술.
  37. 37)이 견해에 따르면, 아직 견도에 들지 못한 범부(이생)뿐만 아니라 예류과·일래과·불환과는 자기 과(自果)보다 하위의 과를 제외하고 각기 자기 과 및 더 상위의 과에 대해 증상만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그 과를 아직 증득하지 못했음에도 증득했다고 자만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과에 대해 증상만을 일으킨다는 의미가 성립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논에서는 자기 과 안에 있는 ‘더 수승한 근성(勝根性)에 대해 증상만을 일으킨다’고 답한다. 『大毘婆沙論』 권43(T27, 225a30) 문답 참조.
  38. 38)사향四向·사과四果 : 예류·일래·불환·아라한의 네 종류 성자를 다시 사향과 사과로 세분한 것이다. 이미 그 과위에 들어간 것을 ‘과’라고 하고, 반면에 아직 그 과위에 들어가지는 못한 상태에서 그 과로 나아간다(趣向)는 뜻에서 ‘향’이라 하였다.
  39. 39)이 학설은 소승의 성자를 사향과 사과로 나누어 증상만을 일으키는 경우를 논한 것이다. 이들은 보다 더 높은 지위에 대해 증상만을 일으키고 더 낮은 지위에 대해서는 증상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지위가 하나씩 높아질수록 증상만의 대상도 하나씩 줄어든다. 예류과는 유루선근·예류향이 제외되고, 일래향은 유루선근·예류향·예류과가 제외되며, 일래과는 유루선근·예류향·예류과·일래향 등이 제외된다.
  40. 40)예류과부터는 수도에 속하고, 수도에 들기 직전에 욕계·상계의 사제에 대한 인忍·지智가 일어나면 이것을 견도십육심見道十六心이라 한다. 이 견도십육심 중에 열여섯 번째 찰나의 마음은 이미 과를 획득한 것이고, 그전의 15심에 대해 ‘예류향’이라는 지위를 설정한다. 그런데 이 15심의 단계에서는 시간적으로 ‘증상만’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증상만을 일으킨다(起增上慢)’는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41. 41)예류과에서 아라한향까지 여섯 성자는 바로 앞의 설과 동일하게 증상만을 일으키는데, 상위의 과로 갈수록 줄어드는 증상만의 개수가 하나씩 늘어난다는 말이다.
  42. 42)이상은 『大毘婆沙論』 권43(T27, 225a26) 참조.
  43. 43)하열한 품에 대해 자기가 수승하다고 자만하거나 동등한 품에 대해 자기가 더 수승하다고 자만하는 등 삼품三品과 관련해서 만이 일어나기도 하고, 아온我蘊에 대해 아만我慢을 일으키기도 하며, 아직 증득하지 못한 수승한 덕(勝德)에 대해 이미 증득했다고 자만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成唯識論述記』 권6(T43, 444b27) 참조.
  44. 44)소승에 의하면 ‘만’은 근본번뇌로서 견소단·수소단의 번뇌에 통하지만, 수도의 성자에게 있어서는 가령 만과 아만은 아직 끊지 않았을지라도 결정코 현행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수도에도 이미 아만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성자에게도 만의 부류가 현행한다고 한다. 『成唯識論述記』 권6(T43, 444c20) 참조.
  45. 45)『成唯識論』 권6(T31, 31b26).
  46. 46)이상은 『大乘五蘊論』 권1(T31, 849a8), 『大乘廣五蘊論』 권1(T31, 852b29) 참조.
  47. 47)『大智度論』 권56(T25, 461b5) 참조.
  48. 48)이 중에서 아등我等·유등아有等我·무승아無勝我는 동등한 자에 대해 자기가 동등하다거나 그가 나보다 나은 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는 모두 만慢에 속한다. 아승我勝·유열아有劣我·무등아無等我는 동등한 자와 비교해서 내가 그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므로 모두 과만過慢에 속한다. 아열我劣·유승아有勝我·무열아無劣我는 뛰어난 자와 비교해서 자기가 조금 모자란다고 생각하거나 그가 자기보다 못한 점이 없다고만 생각하는 것인데, 이는 모두 비만卑慢에 해당한다. 『俱舍論記』 권19(T41, 302a14) 참조.
  49. 49)『發智論』 권20(T26, 1028b26).
  50. 50)『顯揚聖敎論』 권1(T31, 482a8).
  51. 51)『成唯識論』 권6(T31, 31b29).
  52. 52)하열한 품의 사람(下品處)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여기거나, 혹은 자기와 유사한 품의 사람(中品處)에 대해 자기와 유사하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53. 53)자기와 유사한 품의 사람(中品處)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여기거나, 혹은 자기보다 뛰어난 품의 사람(上品處)에 대해 자기와 유사하다고 여기는 것을 ‘과만’이라고 한다.
  54. 54)자기보다 더 뛰어난 품의 사람(上品處)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것은 ‘만과만’이고, 자기가 조금 하열하다고 여기는 것은 ‘하열만’이다.
  55. 55)이상의 내용은 『雜集論』 권6(T31, 723b20) 참조.
  56. 56)처음의 세 가지는 아승我勝·아등我等·아열我劣을 말한다. ‘아승만’은 동등한 자에 대해 내가 더 뛰어나다고 지나치게 높이는 것이므로 ‘과만過慢’에 속한다. ‘아등만’은 동등한 자에 대해 나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만慢’에 속한다. ‘아열만’은 훨씬 뛰어난 자에 대해 내가 조금만 하열하다고 낮추는 것이므로 ‘비만卑慢’에 속한다,
  57. 57)중간의 세 가지는 유승아有勝我·유등아有等我·유열아有劣我를 말한다. ‘유승아만’은 더 뛰어난 자에 대해 그가 나보다 뛰어난 점이 있기는 있다고 조금만 낮추는 것이므로 ‘비만’에 속한다. ‘유등아만’은 동등한 자에 대해 그가 나와 동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만’에 속한다. ‘유열아만’은 동등한 자에 대해 내가 그보다 낫다고 자기를 높이는 것이므로 ‘과만’에 속한다.
  58. 58)마지막 세 가지는 무승아無勝我·무등아無等我·무열아無劣我를 말한다. ‘무승아만’은 동등한 자에 대해 나보다 뛰어난 점이 없다고 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만’에 속한다. ‘무등아만’은 동등한 자에 대해 나와 동등한 점이 없고 내가 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므로 ‘과만’에 속한다. ‘무열아만’은 뛰어난 자에 대해 나보다 못한 점이 없다고만 하면서 자기를 조금만 낮추는 것이므로 ‘비만’에 속한다. 이상은 『發智論』 권20(T26, 1028b28), 『俱舍論』 권19(T29, 101a25) 참조.
  59. 59)『品類足論』 권1(T26, 693b1) 참조.
  60. 60)『大毘婆沙論』 권199(T27, 995c14).
  61. 61)『妙法蓮華經』 권1(T9, 7c4).
  62. 62)『大毘婆沙論』 권186(T27, 930c21).
  63. 63)치답置答 : 불교 안에서 물음에 대답하는 네 가지 방식(四記答) 중의 하나인 사치기捨置記를 가리킨다. 가령 질문들 중에서 한결같이 대답해 주어야 하는 경우(一向記)가 있고, 분별해서 알려 주어야 하는 경우(分別記)가 있으며, 반문하는 방식으로 답하는 경우(反詰記)가 있고, 대답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경우(捨置記)가 있다.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는 ‘한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질문은 네 번째 ‘사치기’에 해당하며, 이런 질문은 대답할 만한 의미가 없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64. 64)열네 가지 사(十四事) : 외도들의 질문들 중에서 세존께서 대답하지 않으셨던 ‘열네 가지 난문難問’을 가리킨다. 세존은 그 질문에 대답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그렇다, 아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해당하는 열네 가지 질문을 특히 십사무기十四無記라고 하는데,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세간은 영원(常)한가, ② 영원하지 않은가, ③ 영원하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 ④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닌가, ⑤ 세간은 끝(邊)이 있는가, ⑥ 없는가, ⑦ 있으면서 없는 것인가, ⑧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⑨ 여래의 사후는 존재하는가, ⑩ 존재하지 않는가, ⑪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가, ⑫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⑬ 신체(身)와 명命이 동일한가, ⑭ 다른가?
  65. 65)『大智度論』 권28(T25, 265c28).
  66. 66)『大智度論』 권30(T25, 278b17).
  67. 67)아련야阿練若(ⓢ araṇya) :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가리키는데, 이하 원측의 주석에서 이 단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소개된다. 이 단어는 본래 부정접두사 ‘a’와 ‘raṇa’와 접미사 ‘ya’의 합성어이다. ‘raṇa’는 어근 √raṇ의 파생어로서 싸움·전쟁, 소리·소음, 움직임·이동 등의 뜻을 갖는데, 이런 것들이 없는 곳을 ‘아란야’라고 한다. 이하에 소개된 다양한 해석들은 모두 이와 같은 어원적 의미를 배경에 깔고 있다.
  68. 68)『深密解脫經』(T16, 668a27).
  69. 69)유순由旬(ⓢ yojana) : 유사나踰闍那·유선나踰繕那 등으로 음역한다. 자세한 것은 이하 원측의 협주에서 나온 『俱舍論』 인용문 참조.
  70. 70)『雜阿毘曇心論』 권2(T28, 887a10) 참조.
  71. 71)『大毘婆沙論』 권136(T27, 702a18).
  72. 72)극유진隙遊塵(ⓢ vātāyanacchidra-rajas) : 구역에서는 극광중진隙光中塵이라 하는데, 문틈으로 비친 광선에 비쳐서 우리 육안으로 겨우 보이는 먼지 정도의 크기를 가리킨다.
  73. 73)심尋 : 고대의 길이를 재는 단위로서 양팔을 펼쳤을 때의 길이를 1심이라 한다. 대략 8척 혹은 6척 정도 되거나, 7척이라고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불보살의 몸 주변에 밤낮으로 항상 광명이 빛나는 것을 가리켜 ‘항상 한 길 광명이 빛난다(常光一尋)’고 한다.
  74. 74)『俱舍論』 권12(T29, 62a26).
  75. 75)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2c29).
  76. 76)『十住毘婆沙論』 권16(T26, 113a17)에는 ‘아련야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나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두려움을 떠나고 싶어서 여기에 온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온갖 소란을 두려워하고, 온갖 말들을 두려워하며…….”
  77. 77)『瑜伽師地論』 권25(T30, 422b10) 참조.
  78. 78)『十二頭陀經』 권1(T17, 720c18).
  79. 79)필추苾蒭(ⓢ bhikṣu) : 구역에서는 비구比丘라고 하였다. 이하 원측의 주석에서 이 단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소개된다. 이 단어가 ‘구걸하다’라는 뜻의 어근 √bhikṣ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때 ‘구걸하는 자’를 뜻한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에 대해 다른 분석을 하기도 한다. 만약 이 단어가 ‘파괴한다’는 뜻의 어근 √bhid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번뇌를 파괴하는 자’를 뜻하기도 하고, 또 ‘두려워하다’라는 뜻의 어근 √bhi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마라들을 떨게 하는 자’를 뜻한다. 이하에 소개된 다양한 해석들은 모두 이와 같은 어원적 의미를 배경에 깔고 있다.
  80. 80)『金剛仙論』 권1(T25, 801c27) 참조.
  81. 81)『大智度論』 권3(T25, 79c8) 참조.
  82. 82)이름만의 필추(名想苾芻) : 머리를 깎기는 했지만 아직 계를 받지 않은 자를 말한다. 이런 사람은 다만 ‘필추’라는 명호名號만 있을 뿐 아직 계가 없기 때문에 ‘이름만의 필추’라고 한다. 『瑜伽論記』 권7(T32, 461c26) 참조.
  83. 83)백사갈마白四羯磨(ⓢ jñapticaturtha-karman) : 백사白四·백사법白四法·일백삼갈마一白三羯磨라고도 한다. 백白(ⓢ jñapti)은 고백의 뜻이고, 갈마羯磨(ⓢ karma)는 의역하면 업業·작법作法 등을 뜻한다. 백사갈마는 모두 승단에서 행하는 사무를 가리킨다. 가령 수계의 작법에 대해 규정하거나, 또는 구족계를 받을 때 삼사三師 중의 갈마사羯磨師가 승가 대중들에게 ‘아무 아무개가 출가 요구를 제출했다’고 먼저 고백하는 것 등에 대해 규정해 놓는 경우와 같다.
  84. 84)『瑜伽師地論』 권29(T30, 447a19).
  85. 85)『瑜伽師地論』 권55(T30, 605c8).
  86. 86)『俱舍論』 권23(T29, 121c13).
  87. 87)이 논에서는 ‘현관’을 견見·연緣·사事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갖 현관을 살펴보면 모두 세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견·연·사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곧 오로지 무루의 혜로써 모든 진리(諦)의 경계를 현견하여 분명해진 것을 ‘견현관見現觀’이라고 하고, 이러한 무루의 혜와 아울러 그 밖의 다른 상응법이 (온갖 진리의 경계를) 동일한 소연으로 삼는 것을 ‘연현관緣現觀’이라 하며, 이 같은 온갖 능연能緣(무루혜와 그 상응법)과 더불어 그 밖에 구유俱有하는 계戒와 생상生相 등의 불상응법이 (온갖 진리의 경계에 대해) 동일하게 사업事業을 행하는 것을 ‘사현관事現觀’이라고 한다.” 『俱舍論』 권23(T29, 121c12) 참조.
  88. 88)『瑜伽師地論』 권55(T30, 605c10)에서 열거한 6종 현관은 다음과 같다. 사현관思現觀, 신현관信現觀, 계현관戒現觀, 현관지제현관現觀智諦現觀, 현관변지제현관現觀邊智諦現觀, 구경현관究竟現觀.
  89. 89)『集論』 권7(T31, 690b7)과 『雜集論』 권13(T31, 756c1)에서 열거한 10종 현관은 다음과 같다. 법현관法現觀, 의현관義現觀, 진현관眞現觀, 후현관後現觀, 보현관寶現觀, 불행현관不行現觀, 구경현관究竟現觀, 성문현관聲聞現觀, 독각현관獨覺現觀, 보살현관菩薩現觀.
  90. 90)『顯揚聖敎論』 권17(T31, 562c27) 참조.
  91. 91)열세 가지 법문 : 『解深密經』의 다음 경문에서 자세히 언급되는 것처럼 ‘증상만의 경계가 되는 열세 가지 법문’을 말한다. 여러 부류의 비구들은 각기 이 열세 가지 법문을 증득함으로 인해 궁극의 승의를 얻었다는 증상만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 열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십이연기十二緣起·사식四食·사제四諦·십팔계十八界·사념주四念住·사정단四正斷·사신족四神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지성도八支聖道.
  92. 92)여기서 말하는 ‘선교善巧’란 선교방편으로서 시설해 놓은 오온 등의 법문을 가리킨다.
  93. 93)『解節經』 권1(T16, 713c26)과 『深密解脫經』 권1(T16, 668b2) 참조.
  94. 94)제1권에서 언급된 여섯 구라는 것은 가령 온蘊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由得蘊故。 得蘊相故。 得蘊起故。 得蘊盡故。 得蘊滅故。 得蘊滅作證故。” 『解深密經』 권1(T16, 691b21) 참조.
  95. 95)『解深密經』 권2(T16, 693c18) 참조.
  96. 96)『解深密經』 권2(T16, 696b16).
  97. 97)서로 연관되는 두 가지 사실에서 각각 한 측면씩만 나타내고 다른 한 측면은 생략함으로써 상호 미루어 알게 하는 설명 방식을 ‘영략호현影略互顯’이라 한다. 본래는 고·집·멸·도의 사제를 설하려는 것인데, 가령 제1권에서는 멸제·도제만 설하고 반대로 제2권에서는 고제·집제만 설한 것처럼, 전자에서 생략된 것을 후자에서 거론하고 후자에서 생략된 것을 전자에서 거론하는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98. 98)이하에서는 ‘일미’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미상’을 알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데, 여섯 부류 비구들의 관찰을 예로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 요점은 일미상은 각각의 교법 안에서도 다 편재하지만 각자가 교법에 대한 지엽적 통찰을 얻고서 그것이 ‘승의제’라고 증상만을 일으키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하의 진제 『記』의 인용문은 『解節經』 권1(T16, 713c25)에 나온 “有諸比丘。 由證見陰。 記其所得。 或有比丘證見陰相。 或有比丘證見陰生。 或有比丘證陰變異。 或有比丘證見陰滅。 或有比丘證陰滅道。”라는 경문에 대한 해석이다.
  99. 99)세존께서 설하신 ‘오음’ 등은 그 자체로는 말소리이고 방편으로 시설된 언어일 뿐 그에 반드시 대응하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망각하기 때문에 마치 ‘오음’이라는 별도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100. 100)‘일향답一向答·분별답分別答·문답問答·치답置答’이라 한 것은 일향기一向記·분별기分別記·반힐기反詰記·사치기捨置記를 가리킨다. 이것은 물음에 답하는 네 가지 방식(四記答)을 가리킨다. 가령 질문들 중에서 한결같이 대답해 주어야 하는 경우를 일향기(일향답)라고 하고, 분별해서 알려 주어야 하는 경우를 분별기(분별답)라고 하며, 반문하는 방식으로 답해야 하는 경우는 반힐기(문답)라 하고, 대답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경우는 사치기(치답)라고 한다.
  101. 101)이상으로 구유식을 대변하는 진제 스님의 해석을 진술하였고, 이하에서는 원측 당시의 유식학자들의 새로운 해석을 진술한 것이다.
  102. 102)『解深密經』 권2(T16, 696b16).
  103. 103)『解深密經』 권2 「無自性相品」(T16, 693c18)에 나온 “曾說諸蘊所有自相生相滅相永斷遍知”라는 경문을 가리킨다.
  104. 104)이 논에서는 제행諸行에 네 가지 결정(四決定)이 있음을 설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무상결정無常決定’이다. 현재의 제행이 결정코 무상한 이유는 ① 전에 없다가 있기 때문이고(先無而有故), ② 전에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이며(先有而無故), ③ 일어남·사라짐과 상응하기 때문이다(起盡相應故). 여기서 세 번째 이유(起盡相應)는 ‘起’는 ‘① 없다가 있게 되는 것’을 말하고, ‘盡’은 ‘②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법은 있다가 없어졌으므로 ‘진’과 상응하고 미래의 법은 없다가 있게 되므로 ‘기’와 상응하는 데 비해, 현재법은 일어나자마자 곧 사라지므로 ‘기·진’ 두 가지와 상응한다. 따라서 결정코 무상하다는 것이다.
  105. 105)『瑜伽師地論』 권85(T30, 774b19) 참조.
  106. 106)사식四食 : 중생의 생명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 단段·촉觸·사思·식識 등의 네 가지 음식물을 가리킨다. ① 단식段食은 욕계欲界에서 향香·미味·촉觸의 세 가지 물질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조각조각 잘려서 섭취되는 것으로, 입이나 코에서 나누어 수용된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섭취하는 곡물이나 음료수 등과 같은 음식물을 가리킨다. ② 촉식觸食은 세활식細滑食·낙식樂食이라고도 한다. 촉觸이라는 심리 작용이 그 본질이다. 이것이 감촉되는 경계에 대해 즐거워하는 애욕을 일으켜서 몸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데, 이 촉은 번뇌 있는 감각 기관(根)·대상(境)·인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긴다. 예를 들어 희극을 하루 종일 보면서 먹지 않아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 그는 촉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③ 사식思食은 의지식意志食·의념식意念食·업식業食이라고도 한다. 의식에서 욕구하는 대상에 대해 희망하고 사유함으로써 모든 감각 기관을 키우고 상속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희망이나 사상·신념에 의해 살아가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또 가령 거북이가 육지로 나와서 알을 낳은 후에 모래로 덮고서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저 알들이 부모를 생각하면서 잊지 않으면 부패되어 파괴되지 않지만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곧 부패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 ④ 식식識食 : 이것은 모든 유루식有漏識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모든 유루식은 앞의 단식·촉식·사식 세 가지 음식의 힘에 의해 증장되는데 다시 그 식들이 모든 근의 대종(諸根大種)을 장양長養시키면서 능히 식사食事가 되어 준다. 이 유루식들 중에서도 제8식이 이러한 ‘음식’의 의미가 강한데, 제8아뢰야식이 토대가 되어 중생들의 몸과 생명을 파괴되지 않게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107. 107)사제四諦 : 고苦·집集·멸滅·도道라는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이 네 가지 진리는 성자에 의해 알려진 것이므로 사성제四聖諦라고도 한다. 이 사제는 원시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이며 세존의 최초 설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 네 가지 진리 중에서, 앞의 고제와 집제는 미망의 세계의 결과(고)와 원인(집)을 표시한 것이고, 멸제와 도제는 깨달음의 세계의 결과(멸)와 원인(도)을 표시한 것이다. 즉 세간의 번뇌로 인해 수반된 모든 결과를 ‘고苦’라고 하고, 그런 고통스런 과를 낸 원인을 ‘집集’이라 하며, 출세간의 번뇌가 사라진 과를 ‘멸滅’이라 하고, 출세간의 번뇌가 사라진 결과를 내는 원인을 ‘도道’라고 한다. 이 사성제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후에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한 설법으로서, 불교의 가장 기본적 교리이자 생사해탈의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후대에는 사성제를 소승의 성문聲聞의 법이라고 하지만, 가령 『勝鬘經』이나 북본北本 『大般涅槃經』 등과 같은 대승 경전 중에도 이 사제의 교설이 등장한다.
  108. 108)이전의 ‘오온의 여섯 구’에 준해 보면, “사제를 증득했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증득의 대상이 되는 ‘사제’를 총괄해서 나타낸 것이므로 총구總句에 해당하고, 또한 “사제의 상을 증득했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사제의 자성상自性相·차별상差別相을 증득한 것을 말하므로 총구에 해당하며 이하의 모든 구에 공통되는 것이다.
  109. 109)『瑜伽師地論』 권55(T30, 605b28).
  110. 110)계경에서 세존은 밀의密意의 방편적 언어로써 설하셨기(不了義의 설) 때문에 오직 고제에 대해서만 변지遍知해야 한다고 설하신 것이고, 아비달마(對法) 논서들에서는 그 의미를 완전하게 드러내어 설하기(了義의 설) 때문에 ‘일체법을 변지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하의 집제의 영단永斷, 멸제의 작증作證, 도제의 수습修習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11. 111)『大毘婆沙論』 권90(T27, 465c15)에서는 ‘작증’을 지작증智作證과 득작증得作證으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법을 작증하는 데 대략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지智’로 작증하는 것이고, 둘째는 ‘득得’으로 작증하는 것이다. 지로 작증한다는 것은 일체법을 ‘지’가 능히 증지證知하는 것을 말한다. 득으로 작증한다는 것은 모든 선법과 통과무기를 ‘득’이 능히 증획證獲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오직 득작증에 의거해 설한 것이다.”
  112. 112)이상은 『大毘婆沙論』 권79(T27, 406c2) 참조.
  113. 113)『雜阿含經』 권16(T2, 116a8).
  114. 114)이 해석에 따르면, ‘종종種種’이라는 말은 좀 더 상위의 차원에서 서로 다른 종류들 간의 차별을 가리키는 말이고, ‘비일非一’이라는 말은 좀 더 하위의 차원에서 동일한 종류 내에서의 다양한 품류들 간의 차이를 가리킨다.
  115. 115)『瑜伽師地論』 권27(T30, 433c23).
  116. 116)이하의 두 인용문은 모두 ‘십팔계’에 의거해서 ‘종종種種’과 ‘비일非一’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117. 117)이 해석에 따르면, ‘종종種種’이란 십팔계에서 하나의 계는 그 밖의 계와 상호 대망시켜 보면(展轉) 상이한 자성(展轉異相性)이 있음을 나타낸 말이고, ‘비일非一’이란 그 계들마다 다시 수많은 유정의 품류들이 의지하고 머무는 토대(所依住性)가 갖가지로 차별됨을 나타낸 말이다. 여기서 전자는 서로 다른 계들 간의 다양한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 말이고, 후자는 하나의 계 내에서 무량한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오온’에 의거한 해석과 대동소이하다.
  118. 118)『瑜伽師地論』 권56(T30, 609c23).
  119. 119)『瑜伽師地論』 권83(T30, 761b29).
  120. 120)『解節經』 권1(T16, 714a4).
  121. 121)『深密解脫經』 권1(T16, 668b16).
  122. 122)사념주四念住 : 사념처四念處·사의지四意止·사지념四止念·사념四念·신수심법身受心法이라고도 한다. 초기불교도들의 일반적 수행법인 삼십칠도품의 첫 번째 행법行法이다. 몸(身)의 부정不淨, 수受의 고통(苦), 마음(心)의 무상無常, 법法의 무아無我를 관찰함으로써 신·수·심·법에 대해 그 차례대로 ‘청정하다(淨), 즐겁다(樂), 영원하다(常), 자기동일성이 있다(我)’고 보는 네 가지 전도된 생각을 대치시키는 관법이다.
  123. 123)『順正理論』 권71(T29, 727a9).
  124. 124)『俱舍論』 권25(T29, 132b29).
  125. 125)『大毘婆沙論』 권96(T27, 496b23).
  126. 126)『大智度論』 권19(T25, 198b14).
  127. 127)이 논에서는 ‘염주念住’에서 세 가지 측면을 구분하여, 소연념주所緣念住와 자성념주自性念住와 상잡념주相雜念住라고 하였다. 염주란 마음을 하나의 소연의 경계에 집중하는 정定의 일종인데, 이 선정에서 어떤 대상을 관하거나 집중하고 있는 마음의 작용 자체로서의 혜·염을 ‘자성념주’, 즉 염주 그 자체라고 하였다. 또 이러한 집중하는 마음의 소연 경계가 되는 신·수·심·법 등을 소연념주라고 하였다. 또 혜나 염과 상응해서 일어난 그 밖의 심법·심소법들을 상잡념주라고 하였다.
  128. 128)『瑜伽師地論』 권28(T30, 442a10).
  129. 129)순관循觀 : 순신관循身觀이라고도 하며, 사념처관 중에서 신념처관身念處觀을 말한다. 신체를 관찰하면서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두루 거치면서 청결하지 않은 서른여섯 가지 사물을 관하기 때문에 ‘순신관’이라 한다.
  130. 130)‘몸 등을 쫓아서 관하는 것(循身觀)’은 ‘혜’로 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염주’라는 말 자체에 이 관법의 본질이 ‘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혜와 염 두 가지 법이 염주의 체라고 하였다.
  131. 131)『雜集論』 권10(T31, 739a4).
  132. 132)자성념주自性念住 : 앞에 나온 『瑜伽師地論』 제28권 인용문과 역주 참조.
  133. 133)『瑜伽師地論』 권28(T30, 442a12) 참조.
  134. 134)여기서 착오가 있는 듯하다. 『深密解脫經』에서 ‘머물게 하는 상’과 ‘망실하지 않는 상’으로 나눈 것은 다음에 나오는 ‘사정근四正勤·사여의四如意’ 등을 설한 경문이고, 사념주에서는 ‘망실하지 않는 상(不失相)’과 ‘증상하고 광대해지게 하는 상(增廣相)’으로 구분하였다. 말하자면 『解深密經』의 여섯 번째 구는 “得念住生已。 堅住不忘倍脩。 增上廣大故。”이고, 『深密解脫經』에서 그에 해당하는 두 개의 구는 “⑥ 有諸比丘。 取已生四念處。 爲不失修行相故說爲證法。 ⑦ 有諸比丘。 取已生四念處。 爲增廣修行相故說爲證法。”이다. 『深密解脫經』 권1(T16, 668b20) 참조.
  135. 135)『解節經』 권1(T16, 714a4)에서 “① 或有比丘證見念處。 ② 及念處相。 ③ 念處對治。 ④ 念處對治道。 ⑤ 念處修習。 ⑥ 未生念處證見念生。 ⑦ 已生念處證見念住。 ⑧ 及不忘失。 ⑨ 增長。 ⑩ 圓滿。 記自所得。”이라 한 것을 말한다.
  136. 136)이상의 세 구에서는 경계념처境界念處·자성념처自性念處·잡념처雜念處 세 종류로 나누어 경문을 해석하였는데, 이 세 종류는 앞의 『瑜伽師地論』 인용문에서 언급된 소연념주所緣念住와 자성념주自性念住와 상잡념주相雜念住와 유사하다. 경계·자성·잡의 세 종류 염처에 대해 『四諦論』 권4(T32, 397c7)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첫째 자성념처는 다만 억념憶念이 생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이 염은) ‘왕’과 같다. 둘째 잡념처란 염을 도와줄 수 있는 법들도 또한 염이라 한 것이니, 비유하면 왕의 신하가 또한 왕이라는 이름을 얻는 경우와 같다. 셋째 경계념처는 염이 이것을 연으로 하여 일어난다면 (그 경계를) 또한 염이라 한 것이니, 비유하면 왕의 주처와 같다. 따라서 염근念根(경계)도 또한 염처이다.”
  137. 137)이는 견도見道에 들기 전에 가행위加行位에서 사념주를 닦는 것을 말한다. 이 가행위에는 삼현위三賢位와 사선근四善根이 포함되는데 이것을 방편도方便道라고도 한다.
  138. 138)제6구와 제7구는 견도의 십육심(見道十六心)에 의거해서 염처의 수행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견도에서 사제의 이치를 관하여 무루의 인忍과 지智가 일어나는데, 예를 들어 욕계에서 사제를 관찰하여 얻은 지를 법지法智라고 한다면, 색계·무색계에서의 사제를 관할 때는 관의 경계(境)와 지智가 ‘법지’의 경우와 유사하므로 ‘유지類智’라고 한다. 또 그 제諦를 제로서 인가하는 것을 ‘인忍’이라 하는데, 이 자체는 지는 아니지만 지의 권속眷屬에 속한다. 이것을 팔인八忍·팔지八智라고 하는데, 즉 욕계의 4법지와 색계의 4유지, 그리고 욕계의 4법지인法智忍과 색계의 4유지인類智忍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십육심 중에 앞의 열다섯 가지는 견도에 속하고, 제16심인 도류지道類智에서는 사제법을 이미 한 번에 두루 관하여 안 것이기 때문에 수도에 속한다. 그런데 모든 번뇌는 견도와 수도에서 모두 끊어지는 것인데, 이처럼 번뇌를 본격적으로 끊는 지위를 무간도無間道라고 하고, 무간도에 이어 그러한 번뇌의 끊어짐을 확증하여 아는 지智가 들어서면 이를 해탈도解脫道라고 한다. 요컨대, 견도15심 중에서 8인은 모두 무간도에 속하며, 7지는 해탈도에 속한다.
  139. 139)수도修道에서는 이미 증득한 지智에 의거해 그것을 잊지 않고 반복적으로 닦음으로써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끊는다. 소승에서는 사제의 이치를 관함으로써 생긴 팔인·팔지 중에서 마지막 제16심에서 수도에 들어가 예류과預流果를 획득하고 나서 아라한과를 얻기 직전 단계인 아라한향阿羅漢向까지를 말하며, 대승에서는 초지初地의 주심住心에서부터 제10지의 최후인 금강무간도金剛無間道까지를 수도라고 한다.
  140. 140)소승에서는 성문사과의 마지막인 아라한과를 무학도라고 하고, 대승에서는 제10지의 금강무간도에서 획득되는 최후의 마음(金剛後心), 즉 불과佛果를 무학도라고 한다.
  141. 141)이 신통도의 단계는 불·보살·아라한 등이 온갖 신변神變을 시현示現하는 경지를 말한다. 여기서 부처님 등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세 종류의 묘한 신통변화를 일으키는데, ① 때에 맞게 몸을 나타낼 수도 있고 사라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을 ‘신통神通’이라 하고, ② 타인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기심記心’이라 하며, ③ 어떻게 보리를 구하고 번뇌를 끊는가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을 ‘교계敎誡’라고 한다. 이 세 가지를 『瑜伽師地論』 권27(T30, 435c10)에서는 신경신변神境神變·기설신변記說神變·교계신변敎誡神變이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142. 142)행수行修(習修)는 현재 실제로 수행하는 것이다. 득수得修란 미래수未來修로서 현재의 수행력에 의해 미래의 법을 획득하여 함께 닦는 것을 말하는데, 이때 미래법은 오직 ‘득得’에 의거해 ‘닦는다(修)’고 한다는 것이다. 이 ‘득수’에 관해서는 『俱舍論』 제26권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143. 143)아직 획득하지 못한 공덕이 현전하고 또한 미래의 그 밖의 공덕을 획득(得)하는 경우, 그것은 새로 수득修得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득수得修’라고 한다. 그리고 이전에 획득하였거나 아직 획득하지 못한 공덕이 현기現起하여 현재 그것을 수습하고 있는 것을 ‘습수習修’라고 한다. 『順正理論』 권74(T29, 745b28), 『俱舍論記』 권26(T41, 402a13) 참조.
  144. 144)신身·수受·심心·법法과 같은 유루법의 대치를 획득하는 경우 대치되는(所治) 신·수·심·법 등을 가리켜 ‘대치수對治修’라고 하고, 신·수·심·법 등을 소연의 경계로 하는 번뇌가 끊어지는 경우 그 신·수·심·법 등을 ‘제견수除遣修’라고 한다. 말하자면 신·수·심·법 등에 대한 대치를 획득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번뇌들이 끊어지는 경우도 ‘신 등을 닦는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順正理論』 권74(T29, 745c2), 『俱舍論記』 권26(T41, 402b25) 참조.
  145. 145)『俱舍論』 권26(T29, 140a3).
  146. 146)『順正理論』 권74(T29, 745b24)와 『大毘婆沙論』 권105(T27, 545a18) 참조.
  147. 147)『雜集論』 권9(T31, 738a10).
  148. 148)『瑜伽師地論』 권66(T30, 667a3) 참조.
  149. 149)『顯揚聖敎論』 권2(T31, 488b29).
  150. 150)『顯揚聖敎論』 권2(T31, 488c9) 참조.
  151. 151)『顯揚聖敎論』 권2(T31, 488c9).
  152. 152)『瑜伽師地論』 권28(T30, 439c29)에는 “於已生善法。 爲欲令住。 令不忘失。 令修圓滿。 令倍修習。 令其增長。 令其廣大。”라고 되어 있고, 같은 책 제29권(T30, 442c24)에는 그중에서 ‘已生善法의 令住와 令不忘失과 令修圓滿’에 대해서만 설해져 있다.
  153. 153)사정단四正斷 : 삼십칠도품 중의 두 번째 행법이다. 또는 사정근四正勤·사의단四意斷·사의단四意端·사정승四正勝·사단四斷이라고도 한다. ‘근勤’은 게으르지 않다는 뜻이고, ‘단斷’은 장애를 끊는다는 뜻이다. 이는 특히 악을 끊고 선을 생기게 하기 위해 정진하는 네 가지 수행법을 말한다. ① 이미 생한 악을 끊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고, ②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이 생기지 못하도록 부지런히 정진하며, ③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이 생길 수 있도록 부지런히 정진하고, ④ 이미 생긴 선이 증장되도록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일심으로 정진하면서 이 네 가지 법을 수행하므로 ‘사정근’이라 한다.
  154. 154)『俱舍論』 권25(T29, 132c3).
  155. 155)『順正理論』 권71(T29, 727a10)과 『大毘婆沙論』 권96(T27, 496b26) 참조.
  156. 156)『大智度論』 권19(T25, 198b15).
  157. 157)『大智度論』 권19(T25, 202c2).
  158. 158)여기서 말하는 정진精進은 구사종의 열 가지 대선지법大善地法의 하나이고 유식종의 열한 가지 선심소善心所의 하나를 가리킨다. 용맹하게 부지런히 채찍질하며 나아가면서 모든 선법을 닦는 것을 말한다. 이 심소의 작용으로 인해 선을 닦고 악을 끊는 과정에서 게으르지 않고 노력하며 나아가게 되므로, 정진은 수도의 근본이 된다.
  159. 159)사신족四神足 : 사여의분四如意分·사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도 하며, 삼십칠도품의 세 번째 행법이다. 원하거나(欲) 부지런히 노력하거나(勤) 마음을 거두어들이거나(心) 지혜로 관찰하는(觀) 등, 즉 욕欲·근勤·심心·관觀의 네 가지 법에 의거해서 갖가지 신통을 이끌어 내는 선정을 말한다.
  160. 160)비록 ‘삼십칠도품’이라고 명명하기는 했지만 이 도품의 체體는 실제로는 열 가지 사(十事)로서, 즉 혜慧·근勤·정定·신信·염念·희喜·사捨·경안輕安·계戒·심尋을 말한다. 이 중에서 팔정도 중의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은 ‘계戒’를 체로 삼는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비바사사들은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계’를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도품의 체는 열한 가지 사事라고 한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俱舍論』 권25(T29, 132b10) 참조.
  161. 161)등지等持 : 삼마지(ⓢ samādhi)의 의역으로서 선정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이 용어는 정위定位와 산위散位에 모두 통용되지만, 다만 유심위有心位에 국한되고 무심위無心位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162. 162)어떤 다른 논사의 주장대로 ‘사신족’에서 ‘신’이 선정(定)이고 ‘족’이 욕·근·심·관이라면, 사신족은 ‘정·욕·근·심·관’이라는 다섯 가지 법을 체體로 삼는 것이고, 이는 앞서 말한 비바사사의 설과는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경에서는 ‘신’은 선정의 결과이고 ‘족’은 욕·근·심·관에 의해 획득된 선정(等持)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사신족은 ‘정定’을 체로 삼는 것이다.
  163. 163)『俱舍論』 권25(T29, 132c5).
  164. 164)이 선정을 닦음으로써 온갖 신통력을 획득하는데, 이 선정이 온갖 신통한 경계들을 변화시켜 내는 근거가 되므로 ‘신족’이라 했다는 것이다.
  165. 165)『大毘婆沙論』 권96(T27, 496b27).
  166. 166)『大毘婆沙論』 권141(T27, 725a28) 참조.
  167. 167)『大智度論』 권19(T25, 198b15).
  168. 168)사정근을 수행할 때는 지혜의 힘이 증대되고 그에 따라서 선정의 힘은 약화되어 마음이 산란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욕·근·심·관의 네 종류 법을 통해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지智와 정定이 균등한 상태가 되게 만드는데, 이러한 것을 여의족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169. 169)『大智度論』 권19(T25, 202c6).
  170. 170)『大智度論』 권19(T25, 202c10).
  171. 171)『瑜伽師地論』 권29(T30, 444c29).
  172. 172)여기서 말하는 삼마지三摩地는 구사종의 십대지법十大地法의 하나이자 유식종의 오별경五別境심소의 하나인 ‘정定’ 심소를 가리킨다. 즉 마음을 하나의 경계에 고정시켜서 산란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173. 173)오근五根 : 삼십칠도품 중에서 네 번째 행법이다. 신信·정진精進·염念·정定·혜慧의 다섯 가지는 번뇌를 조복시키고 성도聖道를 이끌어 내는 데 증상된 작용이 있고, 또 일체의 선법善法을 일으키는 근본이 되며, 또 무루의 성도에 들어가거나 그것을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오근이라 한다. 먼저 신근信根은 삼보三寶·사제四諦 등의 도리를 믿는 것이다. 정진근精進根은 용맹하게 선법을 닦는 것이다. 염근念根이란 항상 정법正法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근定根은 마음을 하나의 경계에 묶어 두고 산란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혜근慧根은 선정 중에 관하는 지혜(觀智)가 일어나서 진리를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174. 174)오력五力 : 삼십칠도품의 다섯 번째 행법이다. 신信·정진精進·염念·정定·혜慧의 다섯 가지 근이 더욱 증장됨에 따라 생겨난 다섯 가지 힘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악을 깨뜨리는 힘이 있기 때문에 오력이라 한다. 이 오력의 내용은 오근과 동일한 것이며, 실천 과정에서 전자인 오근으로 인해 점차로 후자인 오력에 이르게 된다.
  175. 175)오근과 오력의 체體는 똑같은 신信·근勤(精進)·염念·정定·혜慧의 다섯 가지 법이다. 이 다섯 가지 법은 하품인 단계에서는 오근이라 하고 상품인 단계에서는 오력이라 한다. 또는 쉽게 굴복될 수 있는 하열한 단계는 오근이라 하고, 쉽게 굴복되지 않는 수승한 단계는 오력이라 한다는 것이다.
  176. 176)『俱舍論』 권25(T29, 132c11).
  177. 177)신·근(정진)·염·정·혜의 다섯 가지 법이 증상增上되어 있을 때는 오근이라 하고, 그것이 굴복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해졌을 때는 오력이라 한다는 것이다.
  178. 178)『順正理論』 권71(T29, 727b23).
  179. 179)『大毘婆沙論』 권96(T27, 496b28).
  180. 180)『大智度論』 권19(T25, 198b16).
  181. 181)『大智度論』 권19(T25, 204c27).
  182. 182)『瑜伽師地論』 권29(T30, 444b12) 참조.
  183. 183)칠각지七覺支 : 삼십칠도품의 여섯 번째 행법이다. ‘각覺’이란 보리·지혜를 뜻하고, 일곱 가지 법이 보리를 여는 데 도움을 주므로 ‘각지覺支’라고 한다. 첫째 염각지念覺支는 마음속이 밝아져서 항상 선정과 지혜를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택법각지擇法覺支는 지혜에 의지해서 진실한 법을 선택하고 거짓된 법을 버리는 것이다. 셋째 정진각지精進覺支란 정법을 정성껏 부지런히 닦되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 희각지喜覺支란 정법을 얻고서 희열하는 것이다. 다섯째 안각지安覺支란 경안각지輕安覺支를 말하며, 의각지猗覺支라고도 한다.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안은安隱해지는 것이다. 여섯째 정각지定覺支란 선정에 들어 마음이 산란되지 않는 것이다. 일곱째 사각지捨覺支란 마음이 편파적이지 않고 집착함이 없이 평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184. 184)‘능히 각오하는 작용(能覺悟)’, 즉 혜慧심소(擇法)처럼 각覺 자체에 해당하는 것을 물론 각지覺支라고 이름하고, 또한 ‘각의 지’, 즉 그 ‘각’에 수순하거나 상응하는 부류들도 모두 각지라고 이름한다.
  185. 185)‘깨달아 아는 것(能覺悟)’만을 각지라고 하는 경우, ‘혜慧’에 해당하는 택법擇法은 각지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나머지 여섯 개는 ‘혜’에 수순하는 부류들이기는 해도 ‘혜’ 자체는 아니므로 ‘각지’라고 이름할 수 없다고 반문하였다.
  186. 186)‘각의 지’만을 각지라고 하는 경우, 혜(택법)를 제외한 그 밖의 여섯 개는 ‘각의 지’에 해당하지만 혜는 각 자체이기 때문에 ‘혜’는 ‘각지’라고 할 수 없다고 반문하였다.
  187. 187)팔정도八正道의 본질은 혜慧이고 정견正見은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정견은 팔정도의 도체道體이자 도지道支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일곱 가지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188. 188)이상은 『大毘婆沙論』 권96(T27, 496b29) 참조.
  189. 189)『大智度論』 권19(T25, 198c8).
  190. 190)『大智度論』 권19(T25, 198b17).
  191. 191)『辯中邊論』 권2(T31, 472a23).
  192. 192)정성리생正性離生 : 견도에 들어간 성자를 일컫는 말이다. 『俱舍論』에 따르면 ‘정성正性’이란 열반이나 성도聖道를 가리키고, ‘생生’이란 번뇌 혹은 근기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성도 등은 이러한 생을 초월하게 하기 때문에 ‘이생離生’이라 하였다. 그런데 대소승의 정성리생에 대한 정의는 매우 다양한데, 뒤의 「分別瑜伽品」 중에 “이것을 획득했기 때문에 보살의 정성리생에 들어갔다고 이름한다.(由得此故名入菩薩正性離生。)”는 경문을 해석하면서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193. 193)『瑜伽師地論』 권29(T30, 444c29).
  194. 194)팔지성도八支聖道 : 삼십칠도품 중에 일곱 번째 행법이다. 열반과 해탈로 나아가는 여덟 가지 바른 길 또는 지름길을 말한다. 열반으로 향하는 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실천도로서,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실 때 낙욕樂欲과 고행苦行의 두 극단을 떠나서 중도中道에 나아가는 길을 설하신 것이 바로 이 팔정도이다. 첫째 정견正見은 고苦는 고라고 보고 집集은 집이라고 보며 멸滅은 멸이라고 보고 도道는 도라고 보며, 선악의 업이 있으면 선악의 과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정사유正思惟는 탐욕스런 마음(欲覺)과 성내는 마음(恚覺)과 해치려는 마음(害覺)이 없는 것이다. 셋째 정어正語는 망언妄言·양설兩舌·악구惡口·기어綺語 등을 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 정업正業은 살생 등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 정명正命은 주술 등의 사명邪命을 버리고, 법에 합당하게 의복이나 음식 등의 모든 생활 도구를 구하는 것이다. 여섯째 정정진正精進은 이미 생한 악법이 영원히 끊어지고 아직 생하지 않은 악법이 일어나지 않으며 아직 생하지 않은 선법이 생겨나고 이미 생한 선법이 증장되기를 발원하고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일곱째 정념正念은 여실하게 제법의 성性·상相을 억념憶念하면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여덟째 정정正定은 악한 불선법을 떠나 초선初禪을 성취하고 사선四禪에 이르는 것이다.
  195. 195)팔사八邪 : 팔정도에 의해 대치되는 여덟 가지 삿된 행들, 즉 사견邪見·사사邪思·사어邪語·사업邪業·사명邪命·사정진邪精進·사념邪念·사정邪定을 ‘팔사’ 또는 ‘팔사행八邪行’이라 한다.
  196. 196)팔정도 중에서 ‘혜慧’를 본질로 하는 ‘정견正見’만이 ‘능히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能求趣)’에 해당하기 때문에, ‘능히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을 도지라고 할 경우에는 그 밖의 일곱 지는 도지가 아니라고 반문한 것이다.
  197. 197)‘도의 지(道之支)’라는 의미에서 ‘도지’라고 했다면, 정견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개는 ‘도의 지’에 해당하지만 정견은 도 자체에 해당하므로 ‘도의 지’라고 할 수 없다고 반문한 것이다.
  198. 198)팔정도八正道의 본질은 혜慧이고 정견正見은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정견은 도 자체(道體)이자 도의 지(道支)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일곱 가지는 오직 도의 지일 뿐이라고 하였다.
  199. 199)『大毘婆沙論』 권96(T27, 496c12).
  200. 200)『大智度論』 권19(T25, 198c8).
  201. 201)『瑜伽師地論』 권29(T30, 445a12).
  202. 202)팔지성도의 법체를 말한다면, 정견正見은 혜慧, 정정진正精進은 근勤, 정정正定은 정定, 정념正念은 염念,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은 계戒, 정사유正思惟는 심尋을 체로 삼는다. 『俱舍論』 권25(T29, 132b19) 참조.
  203. 203)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은 모두 ‘계戒’를 체로 삼지만, 어업과 신업의 체는 구별되므로 그 ‘계’도 두 가지로 구분된다. 따라서 이전의 여섯 가지 체에서 다시 하나가 늘어난다.
  204. 204)이 해석에 따르면,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은 각각 체가 구별되기 때문에 이전의 일곱 가지 체에다 다시 하나가 늘어나서 모두 여덟 가지 체가 된다.
  205. 205)『大毘婆沙論』 권96(T27, 496a23) 참조.
  206. 206)『雜集論』 권10(T31, 741a5).
  207. 207)첫 번째 설은 ‘팔도지는 견도에서 수승하고 칠각지는 수도에서 수승하다’라는 것인데, 이 논에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추구하며 나아간다(求趣)’는 뜻이 ‘도지道支’의 뜻이다. 견도에서는 신속하게 나아가면서 기약한 마음(期心 : ‘나는 서른네 찰나(三十四念)에 성도하리라’라는 등의 결심)을 넘어서지 않는데, ‘추구하여 나아간다’는 의미에 수순하기 때문에 견도에서는 팔도지가 수승하다고 한다. ‘깨친다(覺悟)’는 뜻이 ‘각지覺支’의 뜻이다. 수도에서는 구품九品을 자주 반복해서 각오하니, ‘깨친다’는 의미에 수순하기 때문에 수도에서는 칠각지가 수승하다.≻ 『大毘婆沙論』 권96(T27, 497a2) 참조.
  208. 208)두 번째 설에 따르면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의 사념주·사정단·사여의족과 오근·오력과 칠각지와 팔정도는 계위의 선후 차례로 설한 것이다. 따라서 칠각지와 팔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력의 의미가 이미 성취되면 능히 사성제의 경계를 여실하게 깨달을 수 있고 더 이상 주저함(猶豫)이 없으니, 따라서 여섯 번째로 칠각지를 설한 것이다. 이미 여실하게 사성제를 깨닫고 나서는 생사를 싫어하며 버리고 열반에 기뻐하며 나아가니, 따라서 일곱 번째로 팔도지를 설한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칠각지는 사성제를 깨달은 단계, 즉 견도見道이고, 팔도지는 견도 후에 열반에 나아가기 위해 계속 수행하는 단계, 즉 수도修道에 해당한다.
  209. 209)평가정의評家正義 : 비바사 4대 논사를 가리킨다. 가습미라국 가니색가迦膩色迦왕 통치 시절에 오백아라한이 결집하여 『發智論』을 평석하여 『大毘婆沙論』을 편찬하였는데, 그들 중에 법구法救(ⓢ Dharmatrāta)·묘음妙音(ⓢ Ghoṣa)·세우世友(ⓢ Vasumitra)·각천覺天(ⓢ Buddhadeva) 등 4대 논사를 예로부터 사평가 또는 평가정의라고 한다.
  210. 210)평가정의에 따르면, ‘칠각지는 수도다’라고 보는 설이 우수하다. 왜냐하면 수도의 계위가 더 보리에 근접해 있고, ‘각覺’에 수순한다는 뜻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大毘婆沙論』 권96(T27, 497a25) 참조.
  211. 211)『辯中邊論』에 따르면, 각覺을 보조하는 것을 각지覺支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칠각지는 견도에 있다. 또 팔정도를 분별지分別支·회시타지誨示他支·영타신지令他信支·대치장지對治障支 등의 네 종류 지로 정리해서 수도修道에서의 수행으로 설명하였다. 『辯中邊論』 권2(T31, 472a23) 참조.
  212. 212)이전의 해석에 따르면, 이 승의제는 십신十信 이전의 외도 범부의 경계를 넘어서 있으므로 그들이 설할 수 있는 것도 사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미세하면서도 가장 미세하다’고 하였다. 또 지전地前의 불교 내 범부의 지위를 넘어서 있으므로 언어나 사유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심오하면서도 가장 심오하다’고 하였다. 혹은 등각等覺 이하의 모든 보살의 지위를 넘어서 있으므로 언어로 설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통달하기 어렵고도 지극히 통달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전의 ‘3. 모든 법과의 동일성·차이성을 넘어선 상(超過諸法一異性相)’에 대한 해석(pp.360~361) 참조.
  213. 213)‘석(釋曰)’ 다음에 많은 글자가 누락된 듯하다. 이 경문은 ‘1) 장행으로 해석함’ 이하의 세 번째 과목인 ‘(3) 세존의 정설’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우선 ‘自下第三世尊正說’이라는 문구가 나와야 한다. 또 이 과목 아래에는 다시 ‘① 찬탄받는 공덕을 나타냄(顯所讚德)’과 ‘② 징문에 의거해 자세히 해석함(依徵廣釋)’이라는 두 개의 세부 과목이 있다. 따라서 ‘釋曰’ 다음에 적어도 ‘於中有二。 初顯所讚德。 後依徵廣釋。’이라는 문구가 나와야 한다. 이 누락된 문구를 보완하여 번역하였다.
  214. 214)『顯揚聖敎論』 권16(T31, 559b4).
  215. 215)이하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반해反解와 순석順釋으로 ‘승의제의 일미상’을 논증한다. 이전의 경우 ‘반해’라는 것은 도리에 반하는 사례를 들어서 그것이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보여주는 해석 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원측이 후술하듯 위 경문은 ‘그 밖의 법의 승의를 다시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 밖의 법의 승의를 구하는 것’을 배제시킨 문구이기 때문에 ‘반해’라고 한 것이다. 그에 비해 다음의 경문에서는 ‘오직 이 하나의 온의 승의를 구하는 것’만으로도 일미상을 알 수 있음을 순리대로 해석한 것이므로 ‘순석’에 해당한다.
  216. 216)『成唯識論』 권9(T31, 48a23).
  217. 217)『成唯識論』 권2(T31, 6c16).
  218. 218)일곱 종류 진여(七種眞如) : 일곱 가지 진여는 ‘오염법과 청정법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궁극의 진리’로서 요가행자들이 반드시 관해야 하는 대상을 말한다. 일곱 가지 진여란 다음과 같다. 첫째 유전流轉진여란 모든 행行이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둘째 상相진여란 모든 법에 내재된 인人·법法의 무아성無我性을 말한다. 셋째 요별了別진여란 모든 것이 ‘유식唯識’이라는 진리를 말한다. 다음에 안립安立·사행邪行·청정淸淨·정행正行의 네 가지 진여는 각기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진리(諦)를 나타낸다. 이 일곱 가지 진여는 여소유성如所有性이라 이름하며, 지관止觀의 네 종류 소연 중에서 ‘사변제성事邊際性’에 해당한다. 자세한 것은 「分別瑜伽品」에 나온 ‘지관의 소연’에 대한 해석 참조.
  219. 219)『顯揚聖敎論』 권16(T31, 559a28).
  220. 220)『集論』 권3(T31, 675b2).
  221. 221)『俱舍論』 권26(T29, 137a10).
  222. 222)여기에서는 고제苦諦에 대해 비상非常·고苦·공空·비아非我의 네 가지 행상을 설한 이유를 밝히는데, 이하에 모두 네 가지 해석이 나온다. 그중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오온五蘊 등의 고과苦果는 반드시 많은 연을 기다려야 생겨나기 때문에 ‘비상非常’이라 하고, 천류하면서 핍박받는 성질이기 때문에 ‘고苦’라고 하였으며, 내가 소유하는 것(我所)’이라고 집착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이라 하였고, ‘나(我)’라고 집착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아’라고 하였다. 『俱舍論記』 권26(T41, 392b20) 참조.
  223. 223)『俱舍論』 권26(T29, 137a19).
  224. 224)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오온 등의 고제苦諦는 궁극적 열반의 영원함(常)과는 어긋나기 때문에 ‘비상非常’이라고 하였고, 유루有漏의 행법行法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과 같기 때문에 ‘고苦’라고 하였으며, 오온 안에는 ‘사부士夫(我)’라고 집착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였고, 그 체가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아非我’라고 하였다. 『俱舍論記』 권26(T41, 392b29) 참조.
  225. 225)『俱舍論』 권26(T29, 137a24).
  226. 226)세 번째 해석에 따르면, 오온 등의 고제는 그 자체가 생멸하기 때문에 ‘비상非常’이라 하였고, 이러한 유루有漏의 법은 성인의 마음과는 어긋나기 때문에 ‘고苦’라고 하였으며, 마치 집 안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 온 중에는 ‘아’가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였고, 마치 집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온 자체가 ‘아’는 아니기 때문에 ‘비아非我’라고 하였다. 『俱舍論記』 권26(T41, 392c25) 참조.
  227. 227)네 번째 해석에 따르면, 고제苦諦의 네 가지 행상은 그릇된 견들을 대치하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상견常見을 대치하기 위해 ‘비상非常’의 행상을 닦고, 낙견樂見을 대치하기 위해 ‘고苦’의 행상을 닦으며, 아소견我所見을 대치하기 위해 ‘공空’의 행상을 닦고, 아견我見을 대치하기 위해 ‘비아非我’의 행상을 닦는다. 이상은 『俱舍論』 권26(T29, 137b24), 『俱舍論記』 권26(T41, 393c13) 참조.
  228. 228)『順正理論』 권74(T29, 741a7).
  229. 229)『順正理論』 권74(T29, 740c20).
  230. 230)『順正理論』의 두 번째 해석은 앞의 『俱舍論』의 네 번째 해석과 마찬가지로 고제苦諦 하의 비상非常·고苦·공空·비아非我의 행상 중에서 뒤의 두 가지 행상은 아소견과 아견을 대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231. 231)『大智度論』 권32(T25, 297c20).
  232. 232)이 논에서는 ‘공空’과 ‘공성空性’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가령 온·처·계 등에는 범부들이 집착하는 것과 같은 실아實我·실법實法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어떤 곳에 X가 ‘없음(無)’을 일컬어 ‘공空’이라 말한다. 그런데 온·처·계 등에는 이와 같은 아가 없다는 사실로 인해 ‘무아’는 ‘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무아의 유성(無我有性)’을 일컬어 ‘공성’이라 한다.
  233. 233)『集論』 권3(T31, 675a21).
  234. 234)여기서 ‘공’이란 마치 물병에 물이 없으면 병이 공하다고 하듯이, 오온 중에 ‘아’가 없다는 의미에서 ‘공’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앞의 『集論』에서 말한 ‘공’과 같은 의미이고, ‘무아의 있음(無我有性)’을 나타내는 ‘공성’과는 의미상 차이가 난다.
  235. 235)『成實論』 권15(T32, 363b7).
  236. 236)『成實論』 권16(T32, 365b18).
  237. 237)이전의 경문에서 “하나의 온의 진여·승의·법무아성을 통달하고 나면, 다시 각기 별도로 그 밖의 온이나 모든 처·연기·식·제·계·염주·정단·신족·근·역·각지·도지의 진여·승의·법무아성을 구하지 않더라도”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했던 ‘그 밖의 온’ 등을 배제하고 바로 이 ‘하나의 온’만을 가리키기 위해서 이번 경문에서도 ‘유唯’와 ‘차此’라는 말을 쓴 것이다. 즉 “오직 이 진여·승의·무이에 수순하는 지智(唯卽隨此眞如勝義無二智)”라는 문구에 쓰인 ‘唯’와 ‘此’를 가리킨다. 그런데 ‘오직(唯)’이라는 것은 ‘그 밖의 온 등’을 배제하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특정한 A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A 아닌 것’을 배제시키는 말이므로 ‘차전’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이것(此)’이라는 말은 ‘하나의 온’을 가리킨다. 이는 특정한 A를 긍정하는 말이므로 ‘표전’이라고 하였다.
  238. 238)첫 번째 해석과 이 해석은 오직 ‘무이지無二智’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가 난다. 전자는 ‘무이지’를 인법이무아지人法二無我智, 즉 인무아·법무아 두 가지 무이의 경계에 수순하는 지라고 해석한 반면, 후자는 유무무이법무아경有無無二法無我境, 즉 유·무 둘 없는 법무아의 경계에 수순하는 지라고 해석하였다.
  239. 239)첫 번째 해석과 이 해석은 일미상을 심찰·취증하는 지智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가 난다. 전자는 ‘진여·승의·무이에 수순하는 세 종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소의로 삼기 때문에 그 무분별지 이후에 획득된 후득지後得智로 일미상을 심찰·취증한다고 해석한 반면, 후자는 세 종류 무분별지로 심찰·취증한다고 해석하였다.
  240. 240)앞에 진술된 세 가지 해석은 공통적으로 경문의 “오직(唯)”과 “이(此)”라는 단어가 차전·표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이 하나의 온”을 직접·간접적으로 가리킨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이하에 진술된 해석들은 그 두 단어가 모두 ‘진여’와 연결된다고 보거나, 혹은 그 두 글자가 각기 따로 ‘진여’나 ‘이 하나의 온’에 연결된다고 보았다.
  241. 241)의意·낙樂·희喜·사捨·신信·근勤·염念·정定·혜慧 등의 아홉 가지는 증상시키는 힘이 있어서 무루의 청정한 성법聖法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그것들을 무루근無漏根으로 가립한다. 이 아홉 가지 근들은 견도위의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사제의 진리를 알고자 하여 지전地前 방편의 해행解行을 닦아 익힐 때 그런 수행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이라 한다. 또 수도위의 사람이 사제의 진리를 이미 알고 아울러 이치에 대한 미혹을 제거하였는데, 다만 사事에 대한 미혹을 제거하기 위해 정진해서 사제의 이치를 관할 때 이 근들은 그런 관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수도위에서는 이것을 이지근已知根이라 한다. 또 사제의 이치를 통찰한 무학위의 사람은 모든 번뇌를 이미 끊고 일체의 이뤄야 할 일을 다 성취했기 때문에 무학위에서는 그것을 구지근具知根이라 한다.
  242. 242)전전이상展轉異相 : ‘전전展轉’이라는 말은 어떤 것들을 시간적 전후 관계에서 비교해 보거나 혹은 상호 대망對望시켜 보는 관계를 모두 가리킨다. ‘전전이상’이란 상호간에 비교해 보았을 때 모습이 각기 다르다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을 모두 의미할 수 있다.
  243. 243)여기에 진술된 세 가지 과실은 모두 유위법의 특징에 해당하는데, 승의제가 마치 온 등과 마찬가지로 전전이상展轉異相을 갖는다고 할 경우 그러한 유위법의 특징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과실이라고 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오온의 고과苦果는 모두 인因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인에서 생긴 것들은 생生·주住·이異·멸滅이라는 유위의 사상四相을 거치므로 유위법이며, 따라서 수행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승의勝義는 아니다.
  244. 244)‘반현返顯’은 앞서 말한 ‘반석反釋’과 같다. 바른 도리와는 상반되는 경우를 들어 그 과실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해석하였으므로 ‘반현’이라고 하였다.
  245. 245)대원경지大圓鏡智(ⓢ ādarśa-jñāna) : 전의轉依를 이루고 불과佛果를 획득했을 때 제8식이 전환되어 대원경지를 이룬다고 한다. 마치 대원경大圓鏡이 일체의 영상을 두루 비추는 것과 같이 일체법을 비추는 완전한 지智를 말한다.
  246. 246)아마도 친광의 『佛地經論』의 내용을 언급한 듯한데, 문장이 완전하지 않아 그 취지를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논에는 수용신 등에 대해 어떤 경우는 ‘무상無常’이라 말하고 어떤 경우는 ‘상주常住’라고 말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여래의 수용신과 변화신도 비록 순간순간 생하고 멸함이 있기는 해도, ‘간단이 없다(無間斷)’는 측면에서 ‘상常’이라 설하거나 ‘상속한다(相續)’는 측면에서 ‘상’이라 설하기도 하므로 경에서 ‘여래의 색色·수受 등은 상주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여래의 몸은 찰나마다 생멸이 있고, 이 몸은 무루종자를 수습하고 증장시켜서 생겨난 것이며, 또 ‘생겨난 것은 모두 멸한다’고 한결같이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여래의 몸은 무상하다’고 설하는 것이다.≻ 『佛地經論』 권7(T26, 326b11) 참조.
  247. 247)다음의 『解深密經疏』 문장에도 나오듯 이 ‘諸法法性安立法界安住’라는 문구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머지 다른 두 판본에서처럼 이 문구를 ‘제법법성, 안립법계, (안립)안주’라는 세 구절로 나누어 해석하는 경우, 혹은 무성의 『攝大乘論釋』에서처럼 ‘법성안립, 법계안주’라는 두 구절로 나누어 해석하는 경우다.
  248. 248)『解節經』 권1(T16, 714b18).
  249. 249)이상의 진제 해석에서는 도道의 전前·중中·후後 지위에 의거해서 불성을 세 종류로 나누었는데, 이러한 구분은 『佛性論』 등에도 나온다. 그에 따르면, 자성주불성自性住佛性이란 견도 이전의 범부 지위에 있는 중생들이 아직 수행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을 가리킨다. 인출불성引出佛性이란 발심하고 나서 금강심金剛心에 이르기까지 성도聖道를 닦는 유학의 지위에서, 수습과 지혜와 선정의 힘에 의지해서 본유本有의 불성이 이끌려 나온 것을 가리킨다. 지득과불성至得果佛性이란 무학의 지위에서 수행이 완전히 충족되어 그 과성果性이 분명하게 현현한 상태를 말한다. 『佛性論』 권4(T31, 808b17), 『攝大乘論釋』 권7(T31, 200c23) 참조.
  250. 250)무성의 『攝大乘論釋』 권4(T31, 399c8) 참조.
  251. 251)『瑜伽師地論』 권10(T30, 327c24).
  252. 252)사대四大와 소조所造는 다음의 ‘능조能造·소조所造’에 대한 역주 참조.
  253. 253)‘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은 눈에 보이는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고, ‘유대有對와 무대無對’란 질애質礙가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다. 유견유대는 눈에 보이고 질애도 있는 것으로 ‘색色’을 말한다. 무견유대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질애를 가진 것으로 ‘색’ 이외의 사경四境과 오근五根을 말한다. 무견무대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질애도 없지만 물질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소승에서 말하는 ‘무표색無表色’ 등을 가리킨다.
  254. 254)능조能造·소조所造 : 지地·수水·화火·풍風 등의 사대종四大種은 능히 모든 색법을 만들 수 있으므로 ‘능조’라고 하고, 기타의 모든 색법들은 다 사대종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소조’라고 한다.
  255. 255)위의 경문 중에서 “무분별無分別”이라 한 것은 『解節經』 권1(T16, 714b21)에는 “무유차별無有差別”이라 되어 있다. 따라서 위의 경문에서 ‘분별’이라 한 것은 ‘차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였다.
  256. 256)원측의 『解深密經疏』에서는 비유를 들고 나서 마지막 하나의 주장을 추가하여 동품의 비유를 완전하게 진술하는 경우, 그 마지막 문장을 특별히 ‘합合’ 또는 ‘법동유’라고 한다.
  257. 257)위 경문에서 말한 ‘이성異性’이란 제법의 자상自相(自性)을 뜻하고 ‘이상異相’이란 차별差別(差別相)을 뜻한다고 하였다. 본래 대승불교에서 ‘자성’이란 말해질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현량現量으로 파악되는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상’이란 하나의 사물 자체의 상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그에 대해 ‘차별’이란 그 사물에 있는 갖가지 차별적 상들을 가리킨다. 이것을 판단에서의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사과는 빨갛다’는 등등의 단순한 지각 판단에서, ‘사과’는 아직 분별이 가해지기 이전의 개별적 법 자체(自性)를 가리킨다. 그리고 ‘빨갛다, 둥글다, 시다’는 등의 특징은 ‘사과’를 다른 것과 차별시키는(差別) 역할을 한다.
  258. 258)『深密解脫經』 권1(T16, 669a1).
  259. 259)『佛地經』 권1(T16, 721a4).
  260. 260)이것은 “세간은 적정하여 모두 똑같은 일미다.(世間寂靜皆同一味。)”라는 『佛地經』의 문구를 해석한 것이다. 『佛地經論』에 따르면, 유루의 오온을 ‘세간’이라 하고 그것의 그침(息滅)을 ‘적정’이라 할 경우, 성도聖道 등의 의타기성에서는 그 세간이 적정하여 모두 똑같이 진여(원성실성)로 귀결된다는 의미에서 ‘일미’라고 한다. 또 변계소집을 ‘세간’이라 하고 그 변계소집자성의 무無를 ‘적정寂靜’이라 할 경우, 이러한 적정에 의해 현현된 진여에는 차별적 상이 없다는 의미에서 ‘일미’라고 한다. 『佛地經論』 권5(T26, 315b7) 참조.
  261. 261)이하의 원측의 해석에 따르면, ‘勝義諸佛說無異’는 제불들께서 승의제에 대해 똑같이 설하셨음을 찬탄한 구句다. 따라서 “승의제를 제불께서는 다름없이 설하시니”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원측의 또 다른 해석에 따르면, 마지막 ‘無異’라는 두 자는 승의제에 차이(異相)가 없는 것, 즉 ‘일미一味’를 뜻할 수도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승의제를 제불께서는 다름없다고 설하시니”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262. 262)『解節經』 권1(T16, 714b28)에는 마지막에 “생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도는 미세하고 심오하여 보기 어려우니 욕망에 오염되고 우치에 덮여서 범인들은 획득할 수 없다네.(逆生死流道 微細深難見 欲染癡覆故 凡人不能得)”라는 한 송이 추가되어 있고, 이 게송에 이어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경의 가르침을 봉지하였다는 장행의 문구가 나온다.
  263. 263)진제 역 『解節經』은 현장 역 『解深密經』의 처음 두 품에 해당하는데, ‘서품’ 명칭은 없고 ‘승의제상품’을 네 개의 품으로 나눈 것이다. 그중에서 첫 품인 「不可言無二品」의 서두에는 서품에 해당하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는데, 그와 유사하게 최후의 품인 「一味品」의 끝에는 유통분에 들어갈 문구가 삽입되었다는 말이다.
  264. 264)『解深密經』의 마지막 품인 「如來成所作事品」에서는 최후에 만수실리보살이 이 경의 가르침을 봉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解節經』 「一味品」의 추가된 장행에는 관세음보살이 봉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최후의 유통분에 들어가야 할 부분이 「一味品」에 들어간 것이라는 진제의 추측도 맞지 않다는 말이다.
  265. 265)『深密解脫經』 권1(T16, 669a4).
  266. 266)『解節經』의 게송 문구가 많이 도치되었는데, 원래의 게송은 “法通相一味 諸佛說平等 若於中執異 是人增上慢 逆生死流道 微細深難見 欲染癡覆故 凡人不能得”이다. 『解節經』 권1(T16, 714b26) 참조.
  267. 267)『成唯識論』 권5(T31, 24c9).
  268. 268)이 견해에 따르면, 『解深密經』 「心意識相品」에서 ‘심의식’이라는 단어는 모든 식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이름으로서 사용된 것이다. 다만 특별히 그 식의 두드러진 활동에 초점을 맞추면 ‘심’은 제8식을 가리키고 ‘의’는 제7식을 가리키며 ‘식’은 여섯 가지 식을 가리키지만, 모든 식들은 집기와 사량과 요별의 활동이 있다는 점에서 심의식이라는 통명으로 지칭할 수 있다. 이 경에서는 그런 통명으로서 ‘심의식’의 밀의密意를 설한 것인데, 이 밀의란 특별히 제8아뢰야식에 대한 것이라는 말이다.
  269. 269)『佛地經論』 권2(T26, 299a22).
  270. 270)『大智度論』 권83(T25, 641a29) 참조.
  271. 271)소행所行(ⓢ gocara) : go는 ‘소’, cara는 ‘걸어 다닌다’는 뜻으로, 즉 소가 걸어 다니는 목초지牧草地를 뜻한다. 이 단어는 인식론적으로는 감각 기관이나 지智에 의해 인식되는 ‘영역’ 혹은 ‘범위’를 뜻한다.
  272. 272)『瑜伽師地論』 권83(T30, 761a27).
  273. 273)『佛地經論』과 『大智度論』의 해석에 의하면 보살의 지혜 자체가 심오하고 광대하다는 뜻에서 ‘광혜’라고 이름한 것이라면, 이 『瑜伽師地論』의 해석에 의하면 지혜의 경계 자체가 한량없이 광대하기 때문에 ‘광혜’라고 이름한 것이다.
  274. 274)여기서 ‘선교善巧’란 특히 세존께서 교화하기 위해 시설해 놓은 선교방편, 즉 교법들을 말하고, 선교보살이란 그러한 교법에 통달한 보살을 가리킨다. 그런데 특히 ‘심의식의 비밀’에 관한 교법에 통달한 보살이라면 ‘심의식의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於心意識秘密善巧菩薩)’이라 하고, 모든 법상(諸法相)에 관한 교법에 통달한 자라면 ‘모든 법상을 잘 아는 선교보살(於諸法相善巧菩薩)’이라고 한다.
  275. 275)이하에서 원측은 위의 경문에 유사한 질문이 두 번 나온 이유를 설명했는데, 두 질문의 차이가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후반부에 제시된 대답에 의거해서 역으로 이 두 질문의 차이를 설명해 보겠다. 그에 따르면, 지전地前보살들도 ‘심의식의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라 불리는 경우가 있고, 또한 성교聖敎에서는 특별히 지상地上보살들만을 ‘심의식의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라고 시설施設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 경에서는 교에서 시설된 ‘선교보살’이라는 말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두 번의 유사한 질문을 던지고, 여래께서는 지전보살이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지상보살이 이해하는 정도는 되어야 ‘심의식의 비밀을 잘 아는 선교보살’이라고 시설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장행長行의 마지막 부분에 진술된 대답 참조.
  276. 276)『十地經論』 권1(T26, 130c3).
  277. 277)『瑜伽師地論』 권83(T30, 762b3).
  278. 278)
  279. 279)『大智度論』 권41(T25, 361b5) 참조.
  280. 280)『大智度論』 권66(T25, 524a17) 참조.
  281. 281)여기에 인용된 『佛地經論』의 문장은 본래 ‘의리義利’라는 단어를 해석한 것으로서, 원문은 “現益名義。 當益名利。 世間名義。 出世名利。 離惡名義。 攝善名利。 福德名義。 智慧名利。”이다.〔『佛地經論』 권1(T26, 295a19)〕 『佛地經論』 원문에는 ‘낙樂’이 모두 ‘의義’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위의 『解深密經』 경문에서도 ‘의리와 안락’은 ‘이익과 안락’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 것처럼, ‘의리’라는 단어는 ‘이익’과 같은 뜻이다. 마찬가지로 『佛地經論』에서 ‘의리’는 이익에 대한 총괄적 표현이고, 이 이익의 차별을 설명하기 위해 ‘의’와 ‘리’를 각기 현재의 것과 미래의 것 등에 배당시켜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원측의 소에서는, ‘의義’를 ‘낙樂’으로 대체시켜 ‘의리’ 자체가 ‘안락과 이익’을 뜻하는 것처럼 해석하였는데, 이는 『佛地經論』의 설명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하 원측 자신의 풀이(해)에서도 ‘이익과 안락에 대한 제1권과 제7권의 설명이 서로 어긋난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뭔가 착오가 생겼기 때문인 듯하다.
  282. 282)네 가지 오묘한 지혜 : 전의轉依를 이루고 불과佛果를 획득했을 때 획득하는 네 가지 지혜를 말한다. 유식종에 의하면, 제8식과 제7식과 제6식과 전오식前五識이 각기 순서대로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등 네 종류 무루지無漏智로 전환된다.
  283. 283)이번 세(此世)의 것을 ‘이익’이라 하고 다른 세(他世)의 것을 ‘안락’이라 하며, 세간적인 것을 ‘이익’이라 하고 출세간적인 것을 ‘안락’이라 한다는 말이다.
  284. 284)『佛地經論』 권7(T26, 324c21).
  285. 285)『佛地經論』 제7권에서 말한 이익과 안락은 제1권의 설명과는 다르다. 제1권에서는 현재 얻는 이익을 ‘안락’이라 하고 미래에 얻을 이익을 ‘이익’이라 했는데, 이 7권에서는 현재의 선한 인을 닦는 행위를 ‘이익’이라 하고 그로 인해 얻어질 미래의 결과를 ‘안락’이라 한 것 등을 말한다.
  286. 286)이 해석에 따르면 본문의 “세간世間”이라는 말은 ‘오온세간五蘊世間’을 가리키며, 이 오온은 인人 등과 같은 복합물을 이루는 요소에 해당하므로 ‘사람을 이루는 법(成人之法)’이라 하였고, ‘인人·천天’ 등의 중생은 오온의 적취積聚와 상속相續에 의거해서 가립된 것이므로 ‘오온에서 가립된 자(五蘊假者)’라고 하였다.
  287. 287)『大智度論』 권47(T25, 402a23)에서는 ‘세간’을 중생세간衆生世間·주처세간住處世間·오중세간五衆世間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일반적으로 ‘세간’이라 할 때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가리킬 수 있다. 이 중에서 중생세간이란 세상의 중생들을 가리킨다. 주처세간은 기세간이라고도 하며, 그 중생들이 머무는 장소를 가리킨다. 오중세간이란 오음세간五陰世間 또는 오온세간五蘊世間이라고도 하며, 중생 등을 이루는 법들, 즉 그것의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등의 오온을 가리킨다.
  288. 288)영해領解 : 타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가르쳐 준 그대로 깨닫는 것을 말한다.
  289. 289)「心意識相品」 마지막 게송에서는 “아타나식은 매우 깊고 미세하며 일체종자식은 마치 폭류와 같네. 나는 범우凡愚에게는 설해 주지 않으니, 그들이 ‘아’라고 분별하고 집착할까 염려해서네.(阿陀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瀑流。 我於凡愚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이 경문에서는 세간 및 천·인 등을 가엾게 여겨 이익과 안락을 주려고 ‘심의식의 비밀’을 설했다고 하는가라고 반문하였다.
  290. 290)『공덕시반야론功德施波若論』 : 공덕시보살功德施菩薩이 짓고 당唐 지파가라地婆訶羅 등이 번역한 『金剛般若波羅蜜經破取著不壞假名論』을 가리킨다.
  291. 291)『金剛般若波羅蜜經破取著不壞假名論』 권1(T25, 887b20).
  292. 292)‘이와 같은 상의 법’이라 한 것은 이 인용문 바로 앞에서 설명된 네 종류 오묘한 상, 즉 ‘순일純一·원만圓滿·청정淸淨·선백鮮白’의 상을 가리킨다. 이 논에 따르면 팔지성도는 이 네 가지 상에 의해 현시되는 것이다. 『瑜伽師地論』 권83(T30, 763b16) 참조.
  293. 293)『瑜伽師地論』 권83(T30, 763b20).
  294. 294)육취六趣 : 육도六道와 같은 말이다. 중생들이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해 가고 오는 세계를 여섯 가지로 나눈 것이다. 즉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인人·아수라阿修羅·천天을 말한다. 이 육도에서 아수라는 천취天趣 또는 귀취鬼趣 또는 축생畜生에 속한다는 설도 있기 때문에 아수라를 빼고 오도 또는 오취를 말하기도 한다.
  295. 295)이후에 진술되는 원측의 해석에 따르면, 이 문장은 육취의 생사에서 새로운 생을 받을 때 버리는 몸과 받는 몸을 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앞의 “육취의 생사에서 저 각각의 유정”이란 새로운 생을 받는 단계에서 버려지는 몸(所捨身)을 가리키고 뒤의 “저 각각의 유정 무리 가운데 떨어져서”라고 한 것은 받게 되는 몸(所受身)을 가리킨다.
  296. 296)청변淸辨(ⓢBhāvaviveka) : 6세기경 남인도 대승불교의 중관학파中觀學派의 논사다. 유식종의 호법護法보살이 마갈타국에서 아뢰야 연기론을 주창한 데 대항하여, 용수와 제바가 주장하던 일체개공一切皆空의 학설을 선양하는 데 힘쓴 사람이다. 저서로는 『大乘掌珍論』 2권, 『般若燈論』 15권, 『中觀心論頌』 등이 있다.
  297. 297)청변의 『中觀心論頌』과 그 주석서는 북경판北京版 서장대장경西藏大藏經 제96책에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문장의 자세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것은 인명因明의 삼지작법三支作法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이 논증식(立量)을 세운 것이다. ≺주장명제(宗) : 여섯 가지 식 이외에 별도의 아뢰야식은 없다. 이유(因) : 안식 등의 여섯 가지 식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례(喩) : 허공 꽃처럼.≻ 이 논증식에서 청변은 ‘별도의 아뢰야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여섯 가지 식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여기서 ‘여섯 가지 식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인명의 규칙에 주장의 근거(因)는 무릇 입론자와 대적자 쌍방이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다. 따라서 청변은 가령 십팔계十八界의 교설처럼 중관학자나 유식학자 모두가 기본적으로 인정하는(自許) 교리에 의거해서, 아뢰야식은 육식계六識界 중의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허공 꽃처럼 별도로 존재하는 식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298. 298)진여는 심의 자성이기 때문에 ‘법성심法性心’이라고 명명하기는 했지만, 진여가 소연所緣 경계를 인식하는 능연能緣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299. 299)진제가 말한 『決定藏論』이란 『瑜伽師地論』 「攝決擇分」 중의 ‘五識身相應地意地品’의 이역본이다.
  300. 300)원측이 뒤에서 “구체적인 것은 「九識章」에서 『決定藏論』 「九識品」을 인용해서 설명한 것과 같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 이 9식설은 진제의 「九識章」에 의거해서 진술된 것이다. 이하에서는 먼저 진제의 학설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는 이 학설에 대해 교리적 비판뿐만 아니라 문헌학적 비판도 제시하였다.
  301. 301)현장 이후의 신역에서는 아타나식阿陀那識은 제8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하는데 이 경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진제를 포함하여 중국의 초기 구유식가들은 아타나식을 제7식으로 구분하고 이것을 무해식無解識이라고 불렀다. 이 제7식은 제8식에 해성解性이 있는 것과는 달리, 항상 무명과 상응하는 어리석은 마음이기 때문에 ‘무해無解’라고 불린다. 예를 들어 중국 지론종地論宗의 혜원慧遠은 『大乘義章』 권3(T44, 524c7)에서 “아타나란 이 지역의 말로 정확히 번역하면 무해라고 하니, 그 체는 무명에 싸인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이기 때문이다.(阿陀那者。 此方正翻名爲無解。 體是無明癡闇心故。)”라고 하였다.
  302. 302)아리야식에 내포된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깨달아 아는 성질’을 가리켜 ‘해성解性의 아리야’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해성’ 때문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303. 303)아리야식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들 중에서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이 식은 업業의 담지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생들은 각자의 아리야식의 전변에 의해 자기만의 세계를 그 과보로서 수용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십팔계를 소연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다음의 『中邊分別論』의 인용문에서 ‘이 식의 전변에 의해 육근과 육경과 의意와 육식 등이 현현한다’고 한 것과 같다.
  304. 304)이 게송은 『中邊分別論』의 제3송에 해당한다. 이 논의 장행에 따르면, 아직 공성空性을 깨닫지 못한 중생의 경우에는 아뢰야식이 근根·진塵·아我·식識의 네 가지로 변현한다고 한다. ‘근’이란 자신과 타인의 신체를 이루는 오근五根이고, ‘진’은 여섯 가지 경계(六境)를 말한다. ‘아’란 아견 등을 동반하는 ‘의意(ⓢ manas)’라는 식, 혹은 이것을 감각 기관의 하나로 간주할 때는 여섯 번째 의근意根을 뜻한다. ‘식’이란 안식 등의 육식을 말한다. 아뢰야식이 변현할 때, 소취所取의 경계로서는 육경·오근처럼 나타나고 능취能取의 식으로서는 ‘의’와 육식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이 소취와 능취는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마치 X가 실재하는 것처럼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X와 유사하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305. 305)『中邊分別論』 권상(T31, 451b7).
  306. 306)네 종류 비방 : 흔히 사방四謗이라고 하며, 대승의 이치를 훼손시키는 네 종류 그릇된 주장, 즉 증익방增益謗과 손감방損減謗과 상위방相違謗과 희론방戱論謗을 말한다. 증익방이란 없는 것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손감방이란 있는 것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상위방이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면서 모순된 주장에 집착하는 것이고, 희론방이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무의미한 말장난을 하는 것이다.
  307. 307)인명因明(불교논리학)에 따르면, 하나의 주장(宗)이 성립하려면 이유(因)와 실례(喩)가 타당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주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오류들이 있다. 그것들은 아홉 개의 사이비 주장(似宗)으로 분류되는데, 그 중에 ‘자교상위自敎相違’란 자종自宗을 받드는 사람이 자종의 교리와 위배되는 주장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말(聲)의 무상함을 인정하는 승론勝論의 학자가 ‘말은 영원하다(聲是常)’고 주장하는 경우 이유를 따지기에 앞서 주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교 경전인 『楞伽經』 등에서는 ‘장식藏識(아뢰야식)’ 등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용맹종의 청변이 앞의 『中觀心論』에서 ‘여섯 가지 식 이외에 별도의 아뢰야식은 없다’고 한 것은 자교상위自敎相違의 과실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308. 308)수전리문隨轉理門 : 교화 대상의 근기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서 방편으로 설한 교법을 가리킨다.
  309. 309)『成唯識論』 권5(T31, 26a9).
  310. 310)극희지極喜地 : 보살의 십지十地 중에서 최초의 지위로서, 또한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한다. 대승의 보살은 이 지위에 들면 견도見道의 성자聖者가 된다. 아공我空·법공法空 두 가지를 증득하고 자리와 이타를 할 수 있어서 마음에 큰 기쁨이 생기므로 환희지라고 한다.
  311. 311)이 『解深密經』 「心意識相品」에서는 제8식의 이명異名을 설하면서, 종자식種子識과 아타나阿陀那와 아뢰야阿賴耶와 심心 등의 네 가지 이름을 거론하였다.
  312. 312)『解深密經』 권4 「地波羅蜜多品」(T16, 707c18)에서는 제8지의 미세수면微細隨眠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8지 이상부터는 일체의 번뇌가 다시 현행하지 않고, 오직 소지장所知障만 있어서 의지依止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제8지 이상에서는 모든 번뇌가 다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말나식末那識과 함께하는 미세한 소지장만이 유루법有漏法의 의지처가 되어 준다고 한다. 따라서 진제가 ‘제7식(말나식)에는 오직 번뇌장만 있다’고 한 것은, 이 『解深密經』에서 ‘말나식과 구기俱起한 미세한 소지장이 있다’고 한 것과는 의미상으로 어긋난다고 하였다.
  313. 313)사지四智 : 전의轉依를 이루고 불과佛果를 획득했을 때 제8식과 제7식과 제6식과 전오식前五識을 전환시켜 각기 순서대로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등을 얻는다.
  314. 314)이것은 진제가 진여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아 증익增益·손감損減·상위相違·희론戱論 등 네 종류 비방을 일으키는 것이 ‘염오染汚의 아리야’이고 이것은 법집法執이지 인집人執은 아니라고 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 비판의 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成唯識論』 등의 호법의 해석에 따르면, 법집은 제6식과 제7식에만 있기 때문에 진여에 대해 ‘유有’(증익방) 혹은 ‘무無’(손감방) 등이라고 집착하며 법집을 일으키는 것은 제8식이 아닌 제6식 등이다. 그렇다면 아뢰야식의 ‘염오染汚’라는 것도 제8식의 법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에 있는 ‘우치愚癡’ 즉 심소법에 속하는 무명無明을 가리키는 것이다.
  315. 315)『辯中邊論』 권상(T31, 464c9). 이 논은 『中邊分別論』의 신역본이다.
  316. 316)『辯中邊論』 권상(T31, 464c11).
  317. 317)이것은 진제가 앞에서 구역 『中邊分別論』을 인용하여 아리야식이 십팔계를 소연으로 삼는다고 했던 것에 대한 비판이다. 진제는 구역에서 ‘근根·진塵·아我·식識’이라 한 것을 모두 아뢰야식의 소연으로 간주했지만, 원측은 신역 『辯中邊論』을 인용하여, 십팔계 중에서 ‘심心’ 등에 해당하는 것은 제8식의 소연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논에서 “의義·유정有情·아我·요了와 유사하게 현현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제8식이 오진五塵(義)과 오근五根(유정)을 소연으로 삼고, 제7식이 ‘아我’를 소연으로 삼으며, 여섯 가지 식이 각기 요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제8식은 심 등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고 하였다.
  318. 318)“如來無垢識。 是淨無漏界。 解脫一切障。 圓鏡智相應。”이라는 게송은 『成唯識論』 권3(T31, 13c23)을 비롯하여 여러 주석서들에서 인용되는 문구인데, 이 게송이 실린 『如來功德莊嚴經』이 어떤 경인지는 현재 확인할 수 없다.
  319. 319)진제는 안혜종에 의거해서 제9아마라식阿摩羅識은 능연能緣의 마음으로서는 ‘무구식無垢識’이라 이름한다고 했는데, 원측을 비롯하여 제9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중국 법상학자들은 대개 ‘무구식’이란 제8아뢰야식의 정분淨分을 가리키므로 ‘아뢰야식’과는 이름만 다를 뿐 별도의 체는 없다고 한다. 말하자면 염위染位에서는 아뢰야식이라 하지만, 전의轉依를 성취한 정위淨位에서는 ‘무구식’이라 하는 것이다.
  320. 320)현존하는 진제 역 『決定藏論』에는 오직 「心地品」만 있고, 이것은 『瑜伽師地論』 「攝決擇分」 중에 「五識身相應地意地品」의 이역본으로서 같은 책 제51권 이하의 네 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決定藏論』에는 「九識品」은 없다. 이에 대해 둔륜의 『瑜伽論記』 권1(T42, 318a11)에서는 경景 스님의 말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제 스님은 『決定藏論』 「九識品」을 인용하여 구식九識의 뜻을 세웠다. 그런데 그 『決定藏論』은 이 『瑜伽論』의 두 번째 분分(「攝決擇分」)에 해당하는데, 조사해 보니 「九識品」은 없었다.(眞諦師引決定藏論九識品。 立九識義。 然彼決定藏即此論第二分。 曾無九識品。)”
  321. 321)대수석帶數釋 : 가령 ‘팔식’ 이나 ‘삼습기’처럼 두 단어 이상의 복합어에서 앞의 수식하는 단어가 숫자인 경우를 말한다.
  322. 322)원측의 주석에서, ‘눈에 의지하는 식(依眼之識)’ 혹은 ‘의에 의지하는 식(依意之識)’의 경우처럼 ‘A之B’의 관계로 분석되는 것은 모두 의주석으로 분류하였다. 이것은 범어 복합어 중에서 수식하는 단어와 수식되는 단어가 격이 다른 경우에 해당한다.
  323. 323)『成唯識論』 권4(T31, 19b8).
  324. 324)원측의 주석에서, ‘의가 곧 식(意卽識)’이거나 ‘장이 곧 식(藏卽識)’인 경우처럼 ‘A卽B’의 관계로 분석되는 것은 모두 지업석으로 분류하였다. 이것은 범어 복합어에서 두 단어가 동격 관계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한정하고 있는 경우이다.
  325. 325)‘장藏’에는 능장能藏과 소장所藏과 집장執藏의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이 중에서 ‘능장과 소장’의 의미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이견이 많았는데, 원측은 종자(因)와 현행(果)의 관계에서 전자를 능장, 후자를 소장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아뢰야식의 종자가 팔식의 현행을 일으킬 원인 노릇을 하는 측면을 ‘능장’이라 하고, 현행한 팔식의 결과에 다시 그 원인이 반영되어 있는 측면을 ‘소장’이라 하였다. 또 ‘집장’에 대해 원측은 ‘경계가 집착 속에 저장된다’는 뜻이라고 다소 포괄적으로 해석하였는데, 『成唯識論』 등에 따르면 ‘집장’이란 특히 중생들이 제8식(아뢰야식)을 자기의 내적 자아라고 굳게 집착하는 것을 뜻한다.
  326. 326)『成唯識論』 권2(T31, 7c20), 『攝大乘論本』 권1(T31, 133b20) 참조.
  327. 327)『成唯識論』 권9(T31, 48a28).
  328. 328)여기서 ‘삼과에서 체를 나타낸다(三科出體)’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둘째 삼과에 의거한 설명’과 ‘셋째 법수에 의거한 설명’을 합해서 진술한 것이다.
  329. 329)‘의처意處’는 바로 전 순간에 멸한 식들의 총체를 가리키는데, 이처럼 직전 순간에 멸한 식들이 다음 순간의 식에 대해 소의근所依根이 되어 주므로 무간멸의無間滅依라고 하였다. 여덟 가지 식들은 모두 이러한 ‘무간멸의’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십이처의 문에서는 모두 ‘의처’에 속한다.
  330. 330)십팔계 안에서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다섯 종류 식은 안식계·이식계 등 다섯 종류 계 중에서 각각의 계를 체로 삼는다고 하였고, 또 이 다섯 종류 식들은 ‘바로 직전에 멸한 식들의 총체’, 즉 무간멸의無間滅意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므로 ‘의계意界의 일부를 체로 삼는다’고 하였다.
  331. 331)십팔계 안에서 제6식·제7식·제8식은 ‘의식계’라고 총괄해서 명명되었으므로 세 가지 식은 각기 ‘의식계의 일부를 자성으로 삼는다’고 하였고, 또 이 세 종류 식들은 ‘바로 직전에 멸한 식들의 총체’, 즉 무간멸의無間滅意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므로 각기 ‘의계의 일부를 자성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332. 332)인연의因緣依 : 여기서는 ‘모든 유위법들의 자기 과를 직접 발생시키는(親生自果) 소의’를 뜻한다. 아뢰야식에 내재된 유위법의 종자가 제법을 발생시키는 직접적 원인에 해당하므로 아뢰야식을 인연의 혹은 종자의種子依라고도 한다.
  333. 333)원측은 ‘인연의’의 의미를 무엇보다 현행식現行識을 직접 발생시키는 ‘종자種子’에 국한시켰지만, 『成唯識論』에 따르면 아뢰야식을 훈습하는(能熏) 현행식들도 인연의 역할을 한다. 가령 종자에서 자류自類의 종자와 동류同類의 현행식이 발생한다는 측면에서는 종자가 자기 결과인 종자와 현행식에 대해 인연성을 갖고, 그와 반대로 현행식의 훈습으로 아뢰야식에 종자가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는 현행식들이 그 종자에 대해 인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동일한 현행식들 간에 또는 서로 다른 부류의 식들 간에는 이처럼 ‘직접 발생시키는’ 인과 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인연성이 없다. 요컨대, 종자와 종자, 종자와 현행식, 현행식과 종자 사이에서만 직접적으로 발생시키는 작용이 있으며, 이때 전자는 후자에 대해 ‘직접적 원인(因緣)’이다. 이상의 ‘인연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成唯識論』 권8(T31, 40ab) 참조.
  334. 334)『成唯識論』 권4(T31, 19b22).
  335. 335)개도의開導依 : 직전에 사라진 현행식과 심소법들이 직후에 일어난 동일한 부류의 마음들이 생길 수 있도록 즉각적으로 ‘자리를 열어서 인도하는(開導)’ 역할을 하므로 ‘개도의’라고 한다. 또 사연설四緣說에서 만약 이 식에 이어 ‘등질적이고 즉각적으로(等無間)’ 저 식이 생긴다면 이 식은 저 식에 대해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 하는데, 사연의 명칭을 붙여서 개도의를 ‘등무간연의等無間緣依’라고도 한다.
  336. 336)『成唯識論』에 따르면, 자리를 열어서 인도하는(開導) 관계는 전후의 ‘같은 종류(同類)’의 식들 간에 성립하며, 그 식(心王)에 연합되어 있는 심소心所들도 하나의 무리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전후의 제8식 간에, 전후의 말나식 간에, 전후의 의식 간에, 전후의 각각의 오식 간에, 이전의 식은 이후의 식에 대해 ‘개도의’ 즉 ‘등무간연의’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상의 ‘개도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成唯識論』 권8(T31, 40bc) 참조.
  337. 337)등무간연의等無間緣依 : 앞의 ‘개도의開導依’ 주석 참조.
  338. 338)『成唯識論』 권4(T31, 19b26).
  339. 339)구유의俱有依 : 하나의 식이 성립할 때 ‘그와 함께 동시에 존재하면서 도와주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 식을 ‘직접 발생시킨’ 것이 아니라 단지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식 발생의 내적 토대 역할을 하는 감각 기관들(根)이다. 가령 안식眼識의 경우에는 색色이라는 동일한 경계에서 작용하는 ‘눈’이 대표적인 구유의다. 또 이외에도 그 안식과 동시에 일어나서 동일한 대상(同緣)을 분별하고 있는 의식, 그리고 언제나 상속하는 제7식과 제8식은 모두 구유의라고 할 수 있다.
  340. 340)안근眼根은 안식眼識과 더불어 동일한 색경色境을 갖는 것처럼 각각의 오근은 각각의 오식과의 관계에서 동일한 경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오근은 오식에 대해 ‘동일한 경계를 갖는 근(同境根)’이라 한다는 것이다.
  341. 341)동연의식同緣意識 : 제6의식이 안식 등의 오식과 동시에 일어났을 때 이 의식은 안식 등과 함께 동일한 대상(所緣)을 인식하기 때문에 ‘동일한 소연을 갖는 의식(同緣意識)’이라고 한다.
  342. 342)동연의식은 오식과 더불어 동일한 경계를 인식하는데, 오식이 감각적 인식이라면 의식은 분별分別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동연의식은 오식에 대해 ‘분별의 토대가 되는 근(分別根)’이라고 하였다.
  343. 343)제7말나식末那識은 항상 상속하는 식으로서 아애我愛 등의 네 가지 번뇌와 상응해서 ‘아我’의 상相을 일으키기 때문에 ‘염오染汚의 소의’라고 한다. 제7식으로 인해 오식도 유루有漏가 되는데, 전의轉依를 획득하여 이 염오의 근본이 청정해지면 오식도 자연히 청정해진다. 따라서 제7말나식은 오식에 대해 ‘염오와 청정의 토대가 되는 근(染淨根)’이라고 하였다.
  344. 344)제8아뢰야식은 항상 상속하는 식으로서 다섯 가지 식들이 항상 공통적으로 의지하는 근본적 토대이기 때문에 제8식은 오식에 대해 ‘근본의根本依’라고 하였다.
  345. 345)『成唯識論』 권4(T31, 20c12).
  346. 346)전오식前五識은 각각의 특정한 색근色根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제6식은 색근을 구유의로 삼지 않는다. 또 전오식이 일어날 때는 의식은 함께 일어나지만 제6의식이 일어날 때는 전오식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제6의식은 전오식을 구유의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구유의는 제7식과 제8식 두 가지뿐이다.
  347. 347)『成唯識論』 권4(T31, 20c16).
  348. 348)제7식은 항상 상속하는 식이기 때문에 중간에 끊기기도 하는 전오식이나 제6의식을 구유의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제7식과 마찬가지로 항상 상속하면서 모든 식의 근본적 소의가 되는 제8식만을 구유의로 삼는다.
  349. 349)『成唯識論』 권4(T31, 20c19).
  350. 350)제8아뢰야식은 항상 상속하는 식이기 때문에 제8식과 마찬가지로 항상 상속하는 제7말나식만을 구유의로 삼는다.
  351. 351)『成唯識論』 권4(T31, 20c24).
  352. 352)현량現量(ⓢ pratyakṣa-pramāṇa) :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고 경계를 직접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섯 가지 감관으로 외적인 경계를 직접 지각하는 경우이다.
  353. 353)성소작지成所作智 : 불과佛果에 이르면 얻게 되는 사지四智 중의 하나로서, 유루의 전前오식과 그에 상응하는 심품들을 전사轉捨하고 나서 획득한 지혜다. 이 지혜로 십지 이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신身·구口·의意의 삼업으로 여러 가지 신통 변화의 사업을 지어낸다고 한다.
  354. 354)앞의 해석에 따르면, 성소작지라는 무루의 오식五識은 유루의 오식과 마찬가지로 현량이고 오직 현재의 오경五境만을 소연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해석에 따르면, 성소작지는 오식이기는 해도 과거·현재·미래의 일체법을 소연으로 삼는다. 그 전거로서 『佛地經』의 문구를 들었는데, 여기서 ‘중생의 온갖 심행의 차별을 안다’는 말 자체가 단지 색色 등의 물리적 경계뿐만 아니라 의업意業을 포함한 삼세의 일체법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355. 355)『成唯識論』 권10(T31, 56c21).
  356. 356)진지眞智 : 여기서는 ‘속제俗諦를 소연으로 하는 지혜(俗智)’에 대해서 ‘진제眞諦를 소연으로 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357. 357)양量과 비량非量 : ‘양量’이란 범어 pramāṇa의 의역으로서 광의廣義와 협의狹義가 있다. 협의에서는 사물을 인식하는 기준이나 근거를 말하고, 광의에서는 인식 작용의 형식·과정·결과 그리고 지식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 등을 가리킨다. 유식종에서는 진나陳那(ⓢ Dignāga) 이후에 이러한 정당한 인식의 기준을 두 가지로 압축했는데, 직접 지각에 해당하는 현량現量과 추론에 해당하는 비량比量이다. 또 ‘비량非量(ⓢ apramāṇa)’이란 사현량似現量(ⓢ pratyakṣa-ābhāsa)과 사비량似比量(ⓢ anumāna-ābhāsa)을 뜻하니, 즉 대상을 잘못 지각하거나 그릇되게 추론하는 것을 말한다.
  358. 358)비량比量(ⓢ anumāna-pramāṇa) : 인명논리의 용어로서, 추리 또는 추론을 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因)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사실을 추리하여 증명함으로써 바른 지혜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불’이 있다고 추론하는 것과 같다.
  359. 359)묘관찰지妙觀察智 : 전의轉依를 이루었을 때 획득되는 사지四智 중의 하나로서, 제6식을 전환시켜 묘관찰지를 얻는다. 즉 제법을 교묘하게 관찰하여 자재하게 법을 설하는 지혜를 말한다.
  360. 360)『成唯識論』 권10(T31, 56c19).
  361. 361)유루有漏의 지위에서는 제7말나식은 항상 아애我愛 등의 네 종류 번뇌와 상응하는 식으로서 제8식의 견분을 대상으로 삼아서 ‘아我’라는 심상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말나식의 인식은 언제나 그릇된 양에 속한다고 하였다.
  362. 362)평등성지平等性智 : 전의轉依를 이루었을 때 획득하는 사지四智의 하나로서, 제7말나식을 전의하여 획득한 지혜를 말한다. 이것은 자타의 유정들을 평등하게 보는 지혜인데, 이 지에 의거해 모든 사물들과 자타가 모두 평등함을 깨닫고 큰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
  363. 363)이 해석에 따르면, 염染·정淨의 제8식에 의거해서 평등성지의 소연 경계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직 전의를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는 염오의 제7식이 제8아뢰야식의 견분을 소연으로 삼는 것처럼, 전의를 이루어 제7식이 평등성지로 전환되었을 때는 제8식의 정분淨分을 소연으로 삼는다.
  364. 364)열 종류 평등성(十種平等性) : 『佛地經』에 따르면, 첫째로 제상諸相과 증상增上(富貴·自在 등)과 그에 따르는 희애喜愛 등의 평등한 법성을 증득하는 것을 비롯해서 모두 열 종류 평등성平等性을 원만성취圓滿成就하였기 때문에 ‘평등성지平等性智’라고 이름한다. 이 열 종류 상에 대해서는 『佛地經』 권1(T16, 721c28) 참조.
  365. 365)이 『莊嚴經論』의 내용은, 여래가 십지十地의 지위에 있는 보살들을 위해서 자·타를 구분하지 않는 평등한 마음으로 타자(십지보살들)가 마음속으로 듣고 싶어 하는 불법佛法이나 보고 싶어 하는 불신佛身에 맞춰서 한량없는 영상을 시현함을 말한 것이다. 『成唯識論疏義演』 권13(X49, 889a19) 참조.
  366. 366)『成唯識論』 권10(T31, 56c13).
  367. 367)내적인 집수(內執受) : 여기서 ‘집수’란 ‘집수된 것(所執受)’을 뜻하니, 이 논에 따르면 아뢰야식이 내적으로 집수하는 것은 두 종류다. 첫째는 허망한 집착에 의해 훈습되어 이루어진 습기習氣이고, 둘째는 모든 색근色根·근소의처根所依處를 가리킨다. 전자는 종자를 가리키고, 후자는 감각 기관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 몸의 경우, 정묘한 감각 기관으로서의 색근, 즉 승의근勝義根과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물리적 토대로서의 부진근扶塵根으로 나누었다. 요컨대 아뢰야식이 내적으로 습기와 감각 기관을 가진 몸을 감각적 직관의 형태로 파악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瑜伽師地論』 권51(T30, 580a5) 참조.
  368. 368)외적인 무분별의 기세간상(外無分別器相) : 아뢰야식은 외적으로는 기세간을 인식 대상으로 삼는데, 이 경우 아뢰야식은 외적 기세간을 무분별적으로 일시에 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분별의 기세간상’이라고 하였다.
  369. 369)『瑜伽師地論』 권51(T30, 580a2).
  370. 370)『成唯識論』에서는 아뢰야식의 세 종류 소연 중에서 ‘외적 기세간’은 ‘처處’라고 하였고, ‘유루종자有漏種子와 유근신有根身’은 ‘집수執受’라고 하였다. 이 중에서 ‘종자’는 앞의 『瑜伽師地論』에서 ‘망집습기妄執習氣’라고 한 것에 해당하고, ‘유근신’은 ‘모든 색근·색의지처’라고 한 것에 해당한다. 『成唯識論』 권2(T31, 10a11) 참조.
  371. 371)법처의 실색(法處實色) : 뒤에 나오는 각주 105 ‘타법처의 소현실색’ 참조.
  372. 372)열 가지 유색처有色處 : 유근신有根身과 기세간을 이루는 오진五塵과 오근五根을 총괄해서 표현한 말이다.
  373. 373)타법처의 소현실색(墮法處所現實色) : ‘타법처墮法處’에서 ‘墮’는 ‘攝’의 뜻이고 ‘타법처’는 ‘법처에 속하는 실색實色’의 다른 이름이다. ‘타법처의 소현실색’이란 구체적으로는 ‘선정의 과로서 현현해 낸 색(定果色)’ 등을 말한다. 규기의 『成唯識論述記』(T43, 325c26) 참조.
  374. 374)『成唯識論』 권2(T31, 11a19).
  375. 375)이숙식異熟識에 의해 변현된 법들은 언제나 오직 인연因緣, 즉 실재의 종자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반드시 실질적 작용(實用)이 있다. 가령 이 식이 변현해 낸 색법들은 모두 식의 소연이 되어 주기 때문에 색으로서의 실질적 작용이 있다. 그런데 이 식이 심법을 변현해 내어 자기의 소연所緣으로 삼는다고 할 경우, 이 마음은 상분相分으로서 그 자체는 소연所緣이지 능연能緣은 아니기 때문에 인식 작용(能緣)이라는 마음의 실질적 작용이 없는 것이다. 이숙식의 실재의 종자에서 그런 무용한 것이 변현되는 일은 없다. 따라서 마음이 소연이 되는 경우는 없다고 하였다.
  376. 376)앞서 말했듯, 유식설에 따르면 실질적 인연 종자에서 생겨난 법들은 실질적 작용이 있다. 그런데 제8식이 실재의 무위를 소연으로 삼는다고 하면 무위는 무용한 것이 된다. 그것을 변현해 내어 소연으로 삼고 있음에도 아직 이것을 증득하지 못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또 만약 제8식이 무위와 유사한 것을 변현해 낸다고 한다면, 그것은 유사한 것이지 실재의 무위는 아니다. 따라서 제8식이 무위를 변현해 낸다고 할 수 없다. 『成唯識論述記』 권3(T43, 327a26) 참조.
  377. 377)『成唯識論』 권2(T31, 11a23) 참조.
  378. 378)대원경지大圓鏡智 : 전의轉依를 이루고 불과佛果를 획득했을 때 제8식을 전환시켜서 획득되는 무루지無漏智를 말한다. ‘대원경’이란 전의를 이룬 자의 완전한 지혜가 온 세계를 두루 비추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379. 379)무분별지無分別智 : 근본지根本智·정체지正體智라고도 한다. 직접 법공法空·아공我空에 의해 현현된 진여의 이치를 증득하고 혹장을 끊어 버린 지혜로서, 무차별적 세계를 비추는 지이다.
  380. 380)후득지後得智 : 근본무분별지 이후에 획득된 지혜이므로 후득지라고 하니, 유위有爲의 사경事境에서 일어나는 지혜로서 차별적 세계를 비추는 지이다.
  381. 381)『成唯識論』 권10(T31, 56c4).
  382. 382)변행심소遍行心所 : 모든 마음의 작용에 반드시 일어나는 다섯 가지 심소, 즉 촉觸(ⓢ sparśa)·작의作意(ⓢ manaskāra)·수受(ⓢ vedanā)·상想(ⓢ saṃjñā)·사思(ⓢ cetanā)를 말한다. ‘촉’이란 대상(境)과 감각 기관(根) 그리고 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觸)하는 것을 말한다. ‘작의’란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의지적 차원의 ‘주의작용’이다. ‘수’란 거스르는(違) 경계나 거스르지 않는(順) 경계 등에 대해 고苦·낙樂의 감각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상’이란 대상에 대해 개념·이름을 상기함으로써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사’란 마음을 조작해서 곧장 행동(業)으로 옮기려는 의지 작용을 말한다.
  383. 383)별경심소別境心所 : 특정한 상을 인식할 때 발생하는 욕欲(ⓢ chanda)·승해勝解(ⓢ adhimokṣa)·염念(ⓢ smṛti)·정定(ⓢ samādhi)·혜慧(ⓢ prajñā) 심소를 오별경五別境이라 한다. 이 중에서 ‘관觀의 경계’를 인식할 때 정·혜의 심소, 마음이 좋아하는 경계를 인식할 때는 욕심소, 결정의 대상을 인식할 때는 승해심소, 일찍이 경험한 적이 있는 경계를 인식할 때는 염심소에 의해 경계가 인식된다.
  384. 384)선심소善心所 : 모든 선한 마음에 수반되는 심소를 말하며, 신信·정진精進·참慚·괴愧·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경안輕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불해不害 등 열한 가지가 있다.
  385. 385)근본혹根本惑 : 근본번뇌根本煩惱라고도 하며, 수번뇌隨煩惱의 대칭어다. 모든 번뇌의 바탕이 되는 여섯 종류 번뇌를 가리키니, 즉 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견見을 말한다. 이 여섯 가지에서 ‘견見’을 다시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 등 다섯 가지로 나누어 십수면十隨眠이라고도 한다.
  386. 386)수혹隨惑 : 수번뇌隨煩惱라고도 하며 근본번뇌(근본혹)를 따라서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387. 387)열 개의 수혹隨惑 중에서 도거掉擧·혼침昏沈·불신不信·해태懈怠·방일放逸·산란散亂·부정지不正知·실념失念 등의 8종 번뇌를 대수혹大隨惑이라 한다. 이것은 모든 오염된 마음에 편재하는 것이므로 대수혹(大隨煩惱)이라 한다. 또 모든 불선심과 동시에 일어나는 무참無慚·무괴無愧를 중수혹中隨惑이라 한다. 그 작용의 범위가 대수혹과 소수혹 중간 정도이므로 중수혹(中隨煩惱)이라고 한 것이다. 이외에 분忿·한恨·부覆·뇌惱·질嫉·간慳·광誑·첨諂·해害·교憍 등은 각기 따로 일어나므로 소수혹小隨惑(小隨煩惱)이라고 한다. 『成唯識論』 권6(T31, 33b1) 참조.
  388. 388)자성산란自性散亂 : ‘산란’ 혹은 ‘산동’이란 마음이 소연의 경계에서 노닐면서 산란되는 정신작용을 뜻하며, 유식학에서는 수번뇌의 하나로 간주된다. 『雜集論』에서는 이러한 산란의 종류를 여섯 가지로 구분했는데, 그 중에서 ‘자성산란’은 ‘자성산동自性散動’이라고도 하니, 오식 자체가 본래 산란한 성질을 갖는 것을 말한다. 『雜集論』 권1(T31, 699b17) 참조.
  389. 389)경안輕安(ⓢ prasrabdhi) : 심신이 경쾌하고 편안해져서 소연의 경계에서 느긋하게 자적하는 상태를 경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선정 중에 일어나면 마음이 유연해져서 성도를 감내할 수 있는 상태(堪忍)가 되어 수습이 잘 진행될 수 있다.
  390. 390)오식과 상응하는 선심소의 개수가 열 개 혹은 열한 개로 달라지는 것은 경안輕安심소가 오식과 상응하는지에 대한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논사에 따르면 오식은 본성적으로 산란된 식이므로 경안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391. 391)이 논사에 따르면, 전의轉依를 이루어 오식이 성소작지로 전환되었을 때는 경안심소와 상응하기 때문에 경안도 오식과 상응하는 선심소에 포함된다.
  392. 392)『成唯識論』 권6(T31, 31b7).
  393. 393)『成唯識論』 권4(T31, 23b10).
  394. 394)『成唯識論』 권2(T31, 7c16).
  395. 395)무루의 묘관찰지와 상응하는 심소 중에서 ‘심尋과 사伺’라는 심소법은 인위因位에서는 작용하기도 하지만 불과에 이르면 심·사라는 사유 작용 없이도 모든 일을 성취하므로 심사도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 심과 사는 거칠거나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모두 사유(思) 활동에 해당하는 정신 작용들이다.
  396. 396)지금까지 경문 해석에 앞서 심의식의 종류와 차별에 대한 긴 설명이 이어졌고, 이하부터는 본격적 경문 해석이다. 본래의 경문은 “광혜여, 마땅히 알라. 육취의 생사에서 저 각각의 유정은 저 각각의 유정 무리 가운데 떨어져서, 어떤 것은 난생으로 어떤 것은 태생으로 어떤 것은 습생으로 어떤 것은 화생으로 신분身分(몸)이 생겨난다.”이다. 원측에 따르면, 이 경문은 제8식의 여러 이름들 중에서 ‘일체종자식’에 내포된 종교적·철학적 의미를 설한 것이다. 이 경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일체종자식이란 일차적으로 결생상속結生相續하는 윤회의 주체로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97. 397)이 세 종류 습기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바로 다음의 ‘● 세 종류 습기의 이름을 해석함’ 참조.
  398. 398)‘종자식種子識’이라는 용어는 아뢰야식에 담지된 ‘종자’를 가리키거나 혹은 종자를 담지하는 ‘식’ 자체를 가리키는데, 지금 이 경문은 결생상속할 때 아뢰야식이 몸(身分)과 종자를 집지한다는 것을 설하고 있으므로, ‘종자식’이란 ‘식’ 자체를 가리킨다.
  399. 399)명언습기名言習氣는 유식학에서는 일체법을 생하는 직접적 종자로 간주된다. 이 명언습기는 다시 표의명언表義名言과 현경명언顯境名言으로 구분된다. 이 둘을 모두 ‘명언’이라 간주했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음성을 발화하여 의미를 전달하던 우리의 실질적인 언어 행위로부터 생겨난 습기를 가리키고, 후자는 비언어적 마음의 활동으로부터 생겨난 습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자의 경우에 명언(名) 자체가 종자種子 혹은 습기習氣를 이룬다기보다는 그 명언을 매개로 사유하는 제6식의 활동이 습기를 이루는 것인데, 제6식의 외연外緣(명언)에 의거해서 표의명언이라 명명한 것이다. 또 후자의 경우는 명언을 매개로 하지 않는 제7식의 견분見分의 모든 심·심소법을 말한다. 이것들이 ‘언어의 세력’으로 취급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경계를 현현시키는 작용이 마치 말(言說)이 그 지시 대상(所詮法)을 현현시키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규기의 『成唯識論述記』 권8(T43, 516c14) 참조.
  400. 400)구생아집俱生我執과 분별아집分別我執은 내적 원인(內因力)으로 인해 생긴 선천적 아집, 그리고 현재의 외적 조건들(現在外緣)로 인해 생긴 후천적 아집을 구분한 것이다. ‘구생아집’이란 언제나 하나의 개별적 ‘몸(身)’과 함께 일어나는데, 가령 제8식(아뢰야식)의 견분을 대상으로 하여 제7식이 자기의 개별적 심상(自心相)을 그려 내고 그로부터 ‘실재하는 나’라는 관념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 밖의 제6식 차원에서 자기의 정신적·물리적 현상들을 ‘나’라고 여기기도 한다. 제7식의 아집은 제8식과 함께 언제나 상속하지만, 제6식(의식) 차원의 아집은 깊은 수면이나 혼절의 경우 때로 간단間斷이 있다. ‘분별아집’이란 자기가 태어난 당대 사회의 문화적 환경이나 종교 등과 같은 외적인 여건들 때문에 생기는데, 가령 ‘불변의 자아’ 등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이나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세간의 언어적 관행을 반복적으로 행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이 아집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제6의식에 존재한다. 이 아집의 습기들 때문에 유정들은 ‘자기’라는 관념을 갖게 되고 그것을 타자와 차별된다고 생각한다. 『成唯識論』 권1(T31, 2a9) 참조.
  401. 401)유지습기有支習氣란 업종자業種子를 가리키는데, ‘유지’라는 표현을 쓴 것은 전前오식과 의식처럼 선악이 뚜렷한 인식 활동이 윤회의 세계에서 서로 다른 존재 형태(有)로 갈라지게 만드는 원인(支)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전통적 업설에 따르면, 세속적으로 선하지만 여전히 번뇌가 있는 행위들은 미래에 좋은 과보를 초감하고, 모든 불선한 행위들은 좋지 않은 과보를 초감한다. 이 두 가지 유지를 따라서 훈습되어 이루어진 종자는 미래의 이숙의 과보가 다섯 가지 존재의 갈래(五趣) 중에서 선한 존재(天·人)로 되는가 아니면 악한 존재(축생·지옥·아귀)로 나타나는가를 결정짓는다. 규기의 『成唯識論述記』 권8(T43, 517a29) 참조.
  402. 402)이상은 『成唯識論』 권8(T31, 43b2) 참조.
  403. 403)명언습기·아집습기·유지습기는 모두 ‘名言習의 氣種子’, ‘我執習의 氣種子’, ‘有支習의 氣種子’로 분석되는데, 이처럼 ‘A之B’의 관계로 분석되는 복합어는 의주석에 해당한다.
  404. 404)명언습기는 표의表義와 같은 언어적 분별 혹은 현경顯境과 같은 비언어적 분별에서 비롯되는데, 무루의 종자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모든 종자는 일체법에 대한 분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각각의 법들이 속하는 과문에 소속된다고 하였다.
  405. 405)아집습기는 근본적으로 살가야견薩迦耶見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번뇌는 오온에서는 행온에 속하고 처문·계문에서는 법처 또는 법계에 속한다. 이것은 다음의 ‘법수로 체를 나타내는(出體)’ 대목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406. 406)유지습기는 ‘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俱舍論』 등에서는 신업이란 신체의 특정한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그 본질을 형색形色이라고 보았고, 어업이란 음성을 발화하는 것이므로 그 본질을 성聲이라 보았다. 이러한 신업과 구업의 결과로 내 몸 안에서 무형의 색법이 일어난 것을 무표색無表色이라 한다. 이것은 밖으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무표’라고 하는데, 몸 안의 지·수·화·풍 등의 사대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오온에서는 ‘색온에 속하고 십이처·십팔계에서는 색처·성처 혹은 색계·성계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 무표색 개념이 후대에는 습기 또는 종자 개념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의사업意思業의 경우는 마음속의 강한 선악의 의지(思)에 의해 좌우되므로 그 본질은 ‘사思’심소인데, 사심소는 오온에서는 행온에 속하고 십이처·십팔계에서는 법처·법계에 속한다.
  407. 407)‘유식唯識’의 교의에 따르면 백법百法은 식에 나타난 영상影像이고 무시이래 이 영상에 의거해서 분별함으로써 종자가 훈습되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영상으로서의 백법이 종자를 훈습한다’고 하였다.
  408. 408)아견습기는 살가야견薩迦耶見(ⓢ satkāya-dṛṣṭi), 즉 유신견有身見에서 비롯되는데, 살가야견이란 오온의 화합물에 대해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는 허망한 아견我見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살가야견도 본래는 혜慧의 판단 작용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악혜惡慧의 그릇된 결정이나 그릇된 판단이 두드러질 때 그것을 특별히 악견惡見이라 한다. 살가야견은 다섯 가지 악견 중의 하나다. 따라서 아집습기는 유식 백법 중에서 ‘혜와 살가야견을 자성으로 한다’고 하였다.
  409. 409)아비달마 논서에서는 신업의 본질은 모양(形色)의 변화이고 어업의 본질은 음성의 발화라고 보았으므로 법수 중에 체를 나타내면 색色과 성聲이고, 의업의 본질은 ‘사思’이기 때문에 심소법 중에 ‘사’를 체로 한다는 것이다.
  410. 410)본질本質·영상影像 : 유식의 교의에 따르면, 본질은 영상의 대칭어이다. 심과 심소가 대상을 인식할 때는 자기의 식識에 대상의 영상을 변현해 내어 그것을 직접적 인식 대상으로 삼는데, 이것을 영상상분影像相分이라 한다. 이러한 영상의 실질적 근거가 되는 것을 본질이라고 하는데, 이 본질상분本質相分은 직접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안식眼識이 색경色境을 인식할 때 안식에 나타난 영상 이외에 별도로 제8아뢰야식의 종자에서 생겨난 실질적 색법이 본질에 해당한다.
  411. 411)원성실성의 무위법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본래 언어를 떠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진여’나 ‘허공무위’ 등과 같은 단어에 의거해서 마음속으로 그것의 심상을 떠올려서 헤아리고 있을 때, 이처럼 ‘진여’나 ‘허공’이라는 말에 의거해서 생겨난 무위의 영상은 실제로는 명언에서 생겨난 의타기의 무위법이다. 『成唯識論』 권2(T31, 6c6) 참조.
  412. 412)『成唯識論』 권2(T31, 8a8).
  413. 413)유위의 종자는 가법假法으로서 인연에 의해 생겼다고 말할 수 없지만, 유위의 실법實法에 의거해서 설정된 것이므로 실법에 종속시켜서 ‘인연에 의해 생긴다’고 설한다는 것이다.
  414. 414)명名·상相·분별分別의 세 종류 습기 : 이 『解深密經』의 다음 경문에서는 일체종자식이 내적으로 집수하는 유근식有根身과 종자種子에 대해 설하면서, 뒤의 종자에 대해 “상相·명名·분별分別의 언설희론습기”라고 하였다. 이 경에서는 명언名言·아집我執(아견)·유지有支 등의 세 종류 습기(三習氣)를 ‘명·상·분별의 언설희론의 습기’라고 총칭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식학 내에서 습기를 무엇보다 언어적 분별 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명언 등의 세 종류 습기는 사실상 각기 다른 습기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언어적 분별에 의해 형성된 명언습기이지만, 습기의 작용 중에 각기 두드러진 점을 부각시켜 다른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415. 415)『成唯識論』 권2(T31, 8a5)에 나온 ‘종자’에 대한 논의, 같은 책 권2(T31, 11a8)에 나온 ‘유근신有根身’에 대한 해석 참조. 또 이와 관련해서는 앞서 ‘세 종류 습기의 이름’을 해석하면서 이미 자세히 진술되었다.
  416. 416)앞서 언급했듯, 본질本質로서의 여섯 종류 무위법에는 본래 ‘생生’의 의미가 없지만, 영상影像으로서의 여섯 종류 무위법은 모두 명언에서 비롯되며 실제로는 의타기의 유위법에 해당한다.(해당 번역문 역주 참조.) 따라서 유위법의 종자가 비록 가법이지만 실법에 종속시켜 ‘인연에서 생긴다’고 하듯이, 마찬가지로 무위법의 종자도 비록 가법이지만 실법에 종속시켜 ‘인연에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17. 417)유식唯識의 교의에서 보면 모든 법들은 아뢰야식에 나타난 일종의 영상, 즉 ‘식’일 뿐이다. 이 식들은 아뢰야식의 종자에서 생긴 것인데, 『攝大乘論』에서는 그 식들을 열한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 중에서 ‘신身·신자身者·수자受者’라고 한 것에서, ‘신’이란 안·이·비·설·신 등 오계를 말하고, ‘신자’란 염오의染汚意를 말하며, ‘수자’란 의계意界를 가리키고, 이 세 가지에 대한 식이란 인식 주체에 관한 표상이 생긴 것을 말한다. 피소수식彼所受識은 색·성·향·미·촉·법 등의 육경을 가리키고, 피능수식彼能受識은 그 육경을 인식하는 육식을 가리킨다. 세식世識이란 생사의 시간적 지속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수식數識이란 ‘1’ 등과 같은 숫자의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처식處識이란 마을·정원 등과 같은 기세간의 공간에 대한 영상을 말한다. 언설식言說識이란 견見·문聞·각覺·지知에 의거해 일으키는 네 종류 언설에 대한 인식이다. 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이란 이전에 말한 것처럼 아견훈습종자로 인해 자기와 타인의 차이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고, 선취악취사생식善趣惡趣死生識이란 천·인·아수라·축생·아귀·지옥 등의 나고 죽음에 대한 영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세친의 『攝大乘論釋』 권4(T31, 338a11), 무성의 『攝大乘論釋』 권4(T31, 399a1) 참조.
  418. 418)『攝大乘論本』 권2(T31, 138a3).
  419. 419)『成唯識論』에 따르면, 유지습기有支習氣(업종자)들은 미래의 이숙과異熟果를 내는 증상연增上緣(보조하는 역할)이라고 한다. 다른 ‘생生’이라는 총체적 결과는 이 생에서 했던 모든 업의 힘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다른 생(이숙과)을 초감하는 실질적 능력은 업종자에 있다. 그런데 업종자를 직접적 원인(因緣)이라 하지 않는 이유는, 선악의 성질이 뚜렷한 업들의 결과가 무기無記의 과라는 다른 성질(異性)로 나타나기 때문이고, 또한 사연설의 관점에서도 이 종자가 결과를 ‘직접 발생시켰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자기의 결과를 직접 발생시켰을(親生自果) 때 그것은 그 결과에 대해 직접적 원인(因緣)으로 간주된다. 명언습기名言習氣는 차별적 이숙과들을 직접 산출해 낸 ‘인연의 종자’다. 다시 말하면 이 명언습기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업의 습기를 보조인으로 해서 다음 생을 직접적으로 산출해 낸다. 사연의 정의에 의거하면, 명언습기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결과를 ‘직접(親) 내는 인연’이고, 업종자는 그것을 ‘보조하는 증상연’이다. 규기의 『成唯識論述記』 권8(T43, 517b5) 참조.
  420. 420)『成唯識論』 권8(T31, 43b5).
  421. 421)『成唯識論』 권8(T31, 43b13).
  422. 422)『大毘婆沙論』 권172(T27, 864c24) 참조.
  423. 423)『大毘婆沙論』 권172(T27, 868b2).
  424. 424)평가정의評家正義 : 비바사 4대 논사를 가리킨다. 가습미라국 가니색가迦膩色迦왕 통치 시절에 오백아라한이 결집하여 『發智論』을 평석하여 『大毘婆沙論』을 편찬하였는데, 그들 중에 법구法救(ⓢ Dharmatrāta)·묘음妙音(ⓢ Ghoṣa)·세우世友(ⓢ Vasumitra)·각천覺天(ⓢ Buddhadeva) 등 4대 논사를 예로부터 사평가 또는 평가정의라고 한다.
  425. 425)『大毘婆沙論』 권172(T27, 868c6~7) 문답 참조.
  426. 426)『成實論』에 따르면 업에는 여섯 종류가 있으니, 지옥의 과보를 받는 업(地獄報業), 축생의 과보를 받는 업(畜生報業), 아귀의 과보를 받는 업(餓鬼報業), 인의 과보를 받는 업(人報業), 천의 과보를 받는 업(天報業) 등 다섯 종류 취趣의 과보를 받는 업(五趣業), 그리고 그밖에 과보가 일정하지 않은 업(不定報業)을 말한다. 『成實論』 권14권(T32, 300b26) 참조.
  427. 427)『佛地經論』 권6(T26, 317a17).
  428. 428)오취와 육취에 대한 설이 다른 이유는 ‘아수라(아소락)’를 독립적인 취로 간주하는가의 여부에 있다. 따라서 다음 인용문들에서는 아수라가 어떤 취에 속하는지를 논한다.
  429. 429)비천非天 : 천취이기는 해도 천답지 않은 존재, 즉 아소락(아수라)을 가리킨다.
  430. 430)『瑜伽師地論』 권4(T30, 297c22).
  431. 431)『瑜伽師地論』 권2(T30, 288a25).
  432. 432)『大智度論』 권30(T25, 280a20).
  433. 433)파차불투로부婆嗟弗妬路部(ⓢ Vātsī-putrīya) : 소승 한 부파인 독자부犢子部를 말한다. 이 부파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다르다. 『異部宗輪論』의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 입멸 후 300년쯤에 설일체유부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하고, 『舍利弗問經』 등에 따르면 상좌부上座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도 한다.
  434. 434)『大智度論』 권10(T25, 135c22).
  435. 435)염마왕琰摩王(ⓢ Yama-rāja) : 귀鬼 세계의 시조이자 명계冥界를 총괄하는 자이고, 지옥의 주신主神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염마왕의 소속처와 성질에 대해서는 경론들마다 이설이 많다. 어떤 곳에서는 지옥취地獄趣에 속한다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귀취鬼趣 혹은 아귀취餓鬼趣에 속한다고 하며, 『華嚴經』 등에서는 별도로 염라왕취閻羅王趣가 있다고도 한다.
  436. 436)『大毘婆沙論』 권172(T27, 867a20).
  437. 437)『大毘婆沙論』 권172(T27, 867b4).
  438. 438)정식왕靜息王 : 죄인들이 염마왕이 가르쳐 준 대로 자기의 죄를 알고서 고요히 쉬게 된다는 뜻에서 염마왕을 ‘정식왕’이라 하였다.
  439. 439)『瑜伽師地論』 권2(T30, 288a10).
  440. 440)변화로 태어나는 중생은 안·이·비·설·신·의 등이 점차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섯 가지 처를 단박에 다 갖추고 나타난다.
  441. 441)『瑜伽師地論』 권2(T30, 288b12).
  442. 442)중유中有(ⓢ antarā-bhava) : 중음中陰·중온中蘊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생사 유전의 네 단계, 즉 생유生有·본유本有·사유死有·중유中有의 하나이다. 중유란 중생이 죽는 순간(死有)부터 다음 생을 받는 찰나(生有)의 중간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존재하는 것을 중유신中有身이라 하는데, 이것은 정혈 등과 같은 외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의意에 의해 화생化生한 몸이기 때문에 의생신意生身이라고도 한다. 또 『俱舍論』 권9(T29, 45c19)에 의하면, 이 중유신은 지극히 미세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의 미래의 취趣가 업에 의해 이끌려 나오기 때문에 그 형량形量은 그것이 태어날 취의 본유本有의 형상과 유사하다고 한다.
  443. 443)‘중유’와 같은 존재들은 목숨을 마친 바로 직후 변화로 태어나므로 사생 중에서 화생에 속하는데, 육취의 중생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육취보다는 사생이 포괄하는 존재의 범위가 더 크다.
  444. 444)『俱舍論』 권8(T29, 42a25).
  445. 445)『金剛仙論』 권2(T25, 805b21) 참조.
  446. 446)초기 유식학 내에서 일체종자식(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신체를 유지·발달시키는 생명의 근원체로 받아들였다. 이하의 경문에서는 일체종자식의 공능에 의해 모든 근의 대종들이 점점 서로 화합하고 다시 점차로 증장하는 과정을 설하는데, 이것은 초기 유식학의 전통적 관점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447. 447)『瑜伽師地論』에 나온 “一切種子異熟所攝執受所依阿賴耶識”이라는 문구는 간단히 ‘일체종자아뢰야식’ 또는 이 『解深密經』처럼 ‘일체종자식’이라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규기의 『瑜伽師地論略纂』 권1(T43, 5b11) 등에 따르면 이 문구에 대한 해석들이 분분한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 ‘일체종자식’이라는 말이 ① 식에 담지된 ‘종자’를 뜻할 수도 있고 ② 종자를 담지하는 ‘식’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일체종자, 이숙소섭, 집수소의, 아뢰야식’이라는 단어들의 관계가 다르게 분석될 수 있다. 그런데 이 『解深密經』에서는 결생상속할 때의 일체종자식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아뢰야식은 일체종자가 ‘이숙하면서 섭장되는 곳’이므로 ‘이숙소섭異熟所攝’이라 하였고, 그 일체종자가 아뢰야식에 의해 집수되는 대상(所執受)이라면 아뢰야식은 일체종자를 집수하는 주체(能執受)이자 소의所依이므로 ‘집수소의執受所依’라고 한 것이다.≻
  448. 448)『瑜伽師地論』에 따르면, 아직 생을 받지 못한 중유의 존재는 부모가 교합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교합한다는 전도된 생각(顚倒)을 일으킨다고 한다. 여자가 되고 싶으면 아버지와 교합하려는 애욕이 생기고 남자가 되고 싶으면 어머니와 교합하려는 애욕이 생긴다. 부모가 절정의 순간에 배출된 정혈精血이 한 덩어리가 되는 순간, 그 중유의 마지막 마음(中有末心)은 정혈에 대해 자기 몸이 그와 하나가 되었다는 전도된 생각을 일으킨다. 이 정혈이 바로 ‘중유의 마지막 몸(中有末身)’인데, 이것을 ‘전도의 연(顚倒緣)’이라 한다. 그 한 방울의 정혈, 즉 전도의 연은 무정물(非情)에 불과한 것인데, 다음 찰나 곧바로 거기에 식이 깃드는 순간 그것은 중유와 함께 소멸해 버리고 ‘유정’의 몸이 된다. 따라서 이 식이 머물게 되는 순간부터 ‘갈라람위羯羅藍位’라고 한다. 『瑜伽師地論』 권1(T30, 282c14), 둔륜의 『瑜伽論記』 권1(T42, 323b25) 참조.
  449. 449)유근有根의 동분同分 : 여기서 동분同分이란 ‘중동분衆同分’의 뜻으로, 어떤 유정이 ‘유정으로서의 동일성(類等)’을 갖고서 그런 유정으로 전전展轉하게 하는 것, 즉 ‘유類’ 또는 ‘유정’이라는 보편성을 말한다. 가령 사람은 사람의 동분을 가짐으로써 사람으로 전전하게 되고, 소는 소의 동분을 가짐으로써 소로서 전전하게 된다.
  450. 450)이 논에서는 감각 기관들을 가진 개별적 실체가 ‘정혈이 화합해서 생겨난다(和合摶生)’고 했는데, 여기서 ‘단생摶生’이라는 표현은 신체 기관들이 돌출하면서 생겨나는 것을 뜻한다.
  451. 451)결생상속結生相續 : 아직 몸을 받지 않은 중유中有의 상태에 있다가 새로운 생을 맺고 다음 생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452. 452)여기서 말하는 ‘근根’이란 가령 신경조직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질적 작용을 하는 정미한 기관들을 가리키며, 이것을 승의근勝義根이라 한다. 또 ‘그 근의 의지처(根所依處)’란 그 정미한 기관들을 떠받치고 있는 물리적 토대, 즉 지·수·화·풍의 사대 물질로 이루어진 눈·코·입·귀·몸을 가리키며, 이것을 부진근扶塵根이라 한다.
  453. 453)원만한 의지처의 성취(圓滿依止成就) : 신체에 모든 감각 기관이 완전하게 다 갖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454. 454)『瑜伽師地論』 권1(T30, 283a1).
  455. 455)『瑜伽師地論』 권1(T30, 283a18).
  456. 456)‘전찰나의 무근無根인 자’란 부모가 교합의 절정에서 정혈을 배출해서 한 덩어리로 뭉친 순간을 말하며 이것은 바로 중유中有의 최후 찰나의 몸에 해당한다. 그 다음 찰나 일체종자식이 깃든 정혈을 ‘후찰나의 유근有根인 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속생續生의 첫 순간에 해당하고 앞서 말한 ‘갈라람’에 해당한다.
  457. 457)『俱舍論』 권9(T29, 46c24).
  458. 458)『俱舍論』 권9(T29, 46c29).
  459. 459)앞의 『俱舍論』의 인용문에는 정혈精血과 신근身根의 소의가 되는 대종大種의 관계에 대해 두 논사의 견해가 소개되었다. 전자는 정혈이 바로 신근의 소의처가 되는 대종이라고 주장하고, 후자는 정혈 이외에 별도의 대종이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瑜伽師地論』에서 “유근有根의 동분同分은 정혈이 화합해서 생겨난다.”고 한 것은 감각 기관을 가진 개체의 몸이 정혈의 결합으로 생겨난다는 것인데, 이것은 정혈이 바로 신근의 구성 물질(大種)이라는 말이므로 『俱舍論』의 첫 번째 견해와 같다고 하였다.
  460. 460)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전전화합展轉和合’이란 종자식은 오직 연緣이 될 뿐이고 실제로 화합하는 것은 몸을 이루는 근의 대종들이 점차적으로 화합해서 자라고 커지는 것을 말한다.
  461. 461)『瑜伽師地論』 권1(T30, 283a7).
  462. 462)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전전화합展轉和合’이란 종자식과 갈라람이 서로 화합함으로써 몸이 자라고 커지는 것을 말한다.
  463. 463)『攝大乘論本』 권1(T31, 135c29).
  464. 464)무성의 『攝大乘論釋』 권3(T31, 332a3).
  465. 465)세친의 『攝大乘論釋』 권3(T31, 169b28).
  466. 466)이 해석은 앞의 ‘전전화합’에 대한 첫 번째 해석과 그 맥락이 동일한 것이다. 말하자면 갈라람이 식 자체와 화합한다는 두 번째 해석과는 달리, 이 해석에 의하면 ‘일체종자식의 공능의 힘’이 연緣이 되어 갈라람에서 그 밖의 근의 대종들이 화합하는 것이다.
  467. 467)명名·색色 : 여기서는 유정有情으로서 갈라람에서 심·심소에 해당하는 것을 명名이라 하였고, 물리적 몸을 색色이라 하였다.
  468. 468)“수계로 인해 유지되어……물기를 없애기 때문이다.”라는 인용문은 『瑜伽師地論』의 원문과는 차이가 있다. 현존하는 『瑜伽師地論』에는 “由水界故。 攝持不散。 由火界故。 成熟堅鞕。 由無潤故。 由風界故。 分別肢節。 各安其所。”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자체 교감주에 따르면, 원측 소에서 인용된 문장과 동일한 판본도 있었던 듯하다.
  469. 469)『瑜伽師地論』 권2(T30, 284b6).
  470. 470)이하에서 태장팔위胎藏八位에 대한 해석들을 자세하게 소개하는데, 이것은 모태 안에서 몸이 성장하는 단계를 여덟 가지로 나눈 것이다. ① 갈라람위羯羅藍位(ⓢ kalala-avasthā)는 수태 후의 7일간을 가리킨다. ② 알부담위遏部曇位(ⓢ arbuda-avasthā)는 수태 후 8~14일이며, 이 시기에 그 모양이 창포瘡疱와 같다. ③ 폐시위閉尸位(ⓢ peśī-avasthā)는 수태 후 15~21일이며, 그 모양이 취혈聚血과 같다. ④ 건남위鍵南位(ⓢ ghana-avasthā)는 수태 후 22~28일이며, 그 모양이 점점 견고해져서 신근과 의근이 생기는데, 아직 눈·귀·코·혀 등은 생기지 않는다. ⑤ 발라사구위鉢羅賖佉位(ⓢ praśākhā-avasthā)는 수태 후 29~35일이며, 살덩이가 커지고 비로소 사지와 신체의 형상이 나타난다. ⑥ 발모조위髮毛爪位(ⓢ keśaromanakha-avasthā)는 수태 후 36~42일이며, 이미 머리카락과 손톱 등이 생긴다. ⑦ 근위根位(ⓢ indriya-avasthā)는 수태 후 43~49일이며, 눈·귀·코·혀 등의 네 근이 완전하게 갖추어진다. ⑧ 형위形位(ⓢ vyañjana-avasthā)는 수태한 지 50~56일 이후이며 형상이 완전히 갖추어진 단계다.
  471. 471)‘연기 중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십이연기설을 생을 받는 단계(受生位) 이후 태속에서 점차로 근이 형성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다음의 게송에 나온 태장팔위는 명색名色 등이 변화하는 전후 차례를 설명한 것이다.
  472. 472)『雜集論』 권6(T31, 722b10).
  473. 473)『瑜伽師地論』 권2(T30, 284c26).
  474. 474)처음의 갈라람위는 수태 후의 7일간을 말하고, 다시 ‘두 번째 칠일(第二七日)’, 즉 8일째부터 14일째까지를 알호타頞呼陀(알부담위)라고 한다. 이하에 나온 ‘세 번째 칠일(第三七日)’ 등도 이에 준해서 알면 된다.
  475. 475)『瑜伽師地論』 권2(T30, 284c17).
  476. 476)이것은 태장팔위 중에 다섯 번째 단계인 ‘발라사구위’로서, 장차 머리·양손·두 발이 될 부위들이 포胞의 형태로 돌출하는 단계를 말한다.
  477. 477)『五王經』(T14, 796a28).
  478. 478)정력자亭歷子 : 지극히 작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四分律鈔簡正記』 권16(X43, 443c2)에는 “정력자란……가령 겨자잎이나 유마油麻(참깨)보다 더 미세하다. 지금 이것을 든 것은 극히 작은 사물을 표현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479. 479)『大方等大集經』 권24(T13, 169a29).
  480. 480)빈바라 과일(頻婆羅菓) : 빈바과頻婆菓 혹은 빈려과頻蠡果라고도 하며, 남방 지역에서 나는 과일로서 중국에는 없다. 『一切經音義』 권23(T54, 452b1)에서는 그 모양이 이 지역의 능금(林檎)과 비슷하고 선명한 붉은색이라 하였고, 『瑜伽論記』 권2(T42, 339a26)에서는 그 모양이 탱자(枳)와 유사하다고 하였다.
  481. 481)『大方等大集經』 권24(T13, 169b10).
  482. 482)『瑜伽師地論』 권2(T30, 289a19).
  483. 483)이상에서는 일체종자식의 공능으로 인해 몸을 이루는 대종들이 화합하고 증장하는 과정을 설했는데, 이하의 경문에서는 다시 ‘일체종자식이 몸과 종자에 의지하는’ 측면에 대해 설명한다. 일체종자식은 최초의 수생위受生位에서는 최초의 몸(身分)을 성장시키는 생명의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몸·종자에 의탁해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484. 484)『瑜伽師地論』에 따르면, 부모의 정혈이 한 덩어리로 결합해서 갈라람이 만들어지는 순간 아뢰야식(일체종자식)이 거기에 결합한다. 이때 식은 두 가지를 집수하는데, 즉 신체와 습기를 말한다. 이 중에서 ‘신체’는 다섯 가지 정묘한 감각 기관(五根 : 승의근勝義根)과 근의 물리적 토대를 이루는 사대소조四大所造의 색·향·미·촉의 사진四塵(부진근扶塵根)으로 구분된다. 또 ‘습기’란 종자를 가리키며, 유식학 내에서는 형상(相)과 이름(名)을 결합시키는 분별分別로 인해 형성된 언어적 습기들을 가리킨다. 아뢰야식은 이 두 가지를 내적으로 집수執受함으로써 전생에서 금생을 잇는 윤회의 주체로서 기능한다.
  485. 485)내적인 집수(內執受) : 여기서 집수란 아뢰야식에 의해 ‘집수된 것(所執受)’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종자들(습기) 그리고 감각 기관을 가진 신체(有根身)를 말한다.
  486. 486)“내적인 집수를 소연으로 삼는 아뢰야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때 끊어짐이 없는 기세간상”이란 아뢰야식의 소연 경계인 기세간상의 특징을 서술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아뢰야식은 내적으로는 종자·몸을 집수執受하고 외적으로는 기세간器世間을 인식 대상으로 삼아 요별한다. 그런데 아뢰야식이 외적 기세간을 요별할 때, 아뢰야식은 외적인 기세간상들을 산출해 내는 공상종자共相種子를 내적으로 집수執受하고 있기 때문에 그 종자로부터 그 상들을 항상 끊임없이 변현해 낸다. 위 인용문에서 “내적인 집수를 소연으로 삼는 아뢰야식에 의지하기 때문”이라 했는데, 기세간상을 산출해 내는 공상종자를 ‘내적인 집수(內執受)’라고 하였고, 아뢰야식에 집수된 그 공상종자로부터 끊임없이 외부 기세간상들을 변현해 내기 때문에 ‘모든 때 끊어짐이 없는 기세간상’이라고 하였다. 『瑜伽論記』 권13(T42, 597c23) 참조.
  487. 487)『瑜伽師地論』 권51(T30, 580a2).
  488. 488)『成唯識論』에서 말한 아뢰야식의 세 종류 소연은 『瑜伽師地論』에서 말한 내집수內執受와 기세간器世間과 일치한다. 이 중에서 종자와 유근신은 내집수에 해당하는데, 이 논에서 ‘근을 가진 몸(有根身)’이라 한 것은 『瑜伽師地論』에서는 ‘모든 근들과 그 근들의 의지처’라고 하였다.
  489. 489)『成唯識論』 권2(T31, 10a17) 참조.
  490. 490)‘집수執受’는 아뢰야식 혹은 일체종자식의 소연에 대한 작용을 가리키는 독특한 용어다. 아뢰야식은 외적인 기세간에 대해서는 ‘요별하는’ 관계에 있지만, 특히 내적인 종자·신체에 대해서는 ‘집수하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뢰야식이 종자와 신체에 대해서 단순한 인식 관계를 넘어서서 신명身命을 함께하는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하에서 원측은 방대한 문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집수’라는 한역 용어가 어원적으로 크게 두 가지를 뜻한다고 하였다. 첫째는 ‘능집수能執受’로서 ‘집수한다’는 동사적 의미를 갖는데, 아뢰야식이 몸과 종자를 감각적 직관의 형태로 붙잡고 있는 작용을 가리킨다. 둘째는 ‘소집수所執受’로서 ‘집수된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는 아뢰야식에 의해 집수된 대상을 가리킨다. 요컨대, 어떤 경우는 일체종자식이 몸·종자 등을 집수하는 작용 자체를 뜻하고, 어떤 경우는 이 식에 의해 집수되는 몸·종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위의 『解深密經』 경문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쓰였는데, 반면에 앞의 『瑜伽師地論』 인용문에 나온 ‘내집수內執受’나 혹은 『成唯識論』의 제2송에 나오는 “집수와 처와 요는 불가지하다.(不可知執受處了。)”는 문구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
  491. 491)『俱舍論』에서는 십팔계를 유집수有執受와 무집수無執受로 구분한다. 유집수는 가령 ‘몸’처럼 감각이 있는 물질을 가리키고, 무집수는 가령 ‘나무’나 ‘돌’처럼 감각이 없는 물질을 가리킨다. 십팔계 중에서 다섯 가지 감각 기관들(五色根)과 색·향·미·촉은 유집수와 무집수에 통한다. 즉 안 등의 오근으로서 현재세에 머무는 것을 유집수라고 하고, 과거세·미래세에 머무는 것을 무집수라고 한다. 색·향·미·촉의 경우, 현재세에 머무는 것으로서 오근과 분리되지 않는 것은 유집수라고 하지만, 현재에 머무는 것이면서도 근과 분리되어 있는 것(무정물)과 과거·미래에 머무는 것을 무집수라고 한다. 그 이외의 나머지 칠심계七心界와 법계는 물질이 아니므로 무집수이고, 성계聲界는 모두 무집수이다. 『俱舍論』 권2(T29, 8b16) 참조.
  492. 492)‘유집수有執受’란 감각 작용이 있는 물질을 가리키며, 그 대표적인 것이 유정의 신체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물질의 특징은, 심법·심소법에 의해 집수執受(執持)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법 등은 그것을 오근五根으로 포섭해서 소의처所依處로 삼고 부진근扶塵根의 네 가지 경계(색·향·미·촉)를 포섭해서 의처依處로 삼는데, 위의 본문에서 ‘의처’라고 한 것은 그 소의처와 의처를 모두 가리킨다. 이 심법·심소법들은 그 의처와 더불어 손해와 이익을 함께하면서 상호 뒤따르는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심법 등이 우고憂苦를 일으켜서 손상되면 의처도 손상되고, 심법 등이 희락喜樂을 일으켜서 이익 되면 의처도 이익 된다. 만약 의처가 좋은 음식 등으로 이익 되면 심 등도 이익 되고, 나쁜 음식 등으로 손상되면 심 등도 손상된다. 이상의 설명은 『俱舍論記』 권2(T41, 39c22) 참조.
  493. 493)『俱舍論』 권2(T29, 8b24).
  494. 494)『順正理論』 권4(T29, 352b9).
  495. 495)『順正理論』 권4(T29, 352b12).
  496. 496)유신견有身見(ⓢ satkāya-dṛṣṭi) : 살가야견薩迦耶見이라고도 하며, 오온 화합물에 대해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는 허망한 아견我見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497. 497)『順正理論』 권4(T29, 352b13) 참조.
  498. 498)이것은 앞에 나온 세 번째 논사의 해석에서 반문의 근거로 제시된 경문의 취지를 설명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 계경에서 “만약 이곳에 식이 집장執藏되어 있고 식이 따라다니며 포섭하는 것이라면 유집수라고 한다.”고 했던 것은, 유애와 유신견으로 인해 자기가 있다고 집착한다는 점에 의거해서 유집수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499. 499)『順正理論』 인용문에는 세 논사의 해석이 나왔고, 거기에 인용된 계경의 해석까지 합하면 ‘유집수’에 대해 모두 네 가지 해석이 있다는 말이다.
  500. 500)『集論』 등에서 말한 ‘집수’란 ‘감각을 발생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의 ‘집수’는 앞의 『俱舍論』 등에서 말한 유집수有執受와 유사해서, 가령 ‘몸’처럼 감각 작용을 가진 물질을 가리킨다. 이 ‘집수’에 해당하는 법을 열거해 보면, 안·이·비·설·신의 오근에 해당하는 ‘오색계’ 그리고 오경 중에서 ‘성聲’을 제외하고 앞의 오근들과 분리되지 않은 색·향·미·촉 등 ‘사계의 일부’이다. 『集論』 권3(T31, 672a6) 참조.
  501. 501)『瑜伽師地論』 권51(T30, 579a20) 참조.
  502. 502)『瑜伽師地論』 권56(T30, 609c20).
  503. 503)『瑜伽師地論』 제51권과 제56권의 설명에 따르면, ‘아뢰야식에 의해 거두어져 그것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집수執受라고 한다. 이 경우에도 집수는 ‘집수되는 물질’을 가리키는데, 특히 아뢰야식에 의해 거두어져 그 식의 물리적 토대(體) 노릇을 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자기 신체를 이루는2 안·이·비·설·신의 다섯 개는 집수이다. 또 색·성·향·미·촉 다섯 개 중에서 앞의 오근과 분리되지 않는 내적인 물질들은 식識이 집수하지만 오근과 분리된 외계의 물질은 식이 집수하지 않기 때문에 집수이거나 비집수非執受이다. 그 밖의 나머지 일곱 개의 심계心界와 법계는 물리적 토대 노릇을 할 수 없으므로 집수가 아니다.
  504. 504)이 문장에서 ‘집수한 것과 집수하지 않는 것’이란 색온色蘊 중에서 식에 의해 집수하는 색과 그렇지 않은 색을 구분한 것이다.
  505. 505)『瑜伽師地論』 제53권에는 후대 중국 법상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한 ‘집수’의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 있다. 첫째는 식의 의지처가 됨으로써 식과 더불어 안락과 위험을 함께하는 것이고, 둘째는 감각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 안위공동安危共同과 능생각수能生覺受라고 표현한다. 이런 정의에 따라서 아뢰야식의 내적 인식 대상인 몸과 종자의 차이를 살펴보면, ‘안위공동’의 측면에서는 몸과 종자는 모두 집수에 속하지만 ‘능생각수’의 측면에서는 몸은 집수에 속하고 종자는 비집수에 속한다. 이 정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집수를 설명한 사람은 법상종의 규기窺基다. 규기의 해석에 대해서는 『成唯識論述記』 권3(T43, 315c9~316a7) 참조.
  506. 506)『瑜伽師地論』 권53(T30, 593c28).
  507. 507)이것은 심법 등에 의해 집수되는 물리적 몸이 심법 등과 더불어 운명을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몸이 좋은 음식 등의 섭취를 통해 상태가 좋아지면 마음도 그에 따라 상태가 좋아지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마음이 안온한가 위험한가에 따라서 몸도 안온해지거나 위험해진다.
  508. 508)『瑜伽師地論』 권100(T30, 880a1).
  509. 509)근根·의지처(依處) : 일체종자식이 집수하는 ‘몸’을 ‘근과 의지처’로 구분한 것이다. ‘근’이란 승의근勝義根으로서의 안·이·비·설·신을 말하고, ‘의지처’란 그 근을 떠받치고 있는 물리적 토대(扶塵根)로서의 색·향·미·촉 등의 사진四塵을 말한다.
  510. 510)원측에 의하면 『解深密經』에서 나온 ‘집수’라는 용어는 무엇보다 윤회의 주체로서 일체종자식이 ‘몸과 종자를 집수하는 작용(能執受)’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집수는 아뢰야식이 어떤 것을 붙잡아서 자기의 물리적 토대로 삼거나 혹은 어떤 것을 자기의 소속물로 삼는 작용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瑜伽師地論』 제53권 등에서 언급된 ‘집수’의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 즉 ‘능히 감각을 발생시킨다(能生覺受)’의 뜻은 배제된 것이다.
  511. 511)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 Mahāsaṅghika) : 소승의 20부파 중의 하나인 대중부大衆部를 가리킨다. 불멸후 100년 될 때 대천大天 비구가 오조교의五條敎義를 제출한 후에 그것에 찬성하는 혁신파 비구들과 그것에 반대하는 보수파 비구들이 서로 다투었는데, 전자가 결집해서 대중부를 이루었고 후자는 상좌부上座部를 결성하였다.
  512. 512)『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0c25) 이하 참조.
  513. 513)『妙法蓮華經』 권6(T9, 48c6)에는 이 경을 수지하고 독송함으로써 성취된 청정한 비근鼻根으로 온갖 향기를 맡을 수 있음을 설하면서, “이와 같이 연속해서 범세에 이르기까지, 위로는 유정천의 모든 천신의 향기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다 맡을 수 있다.(如是展轉。 乃至梵世。 上至有頂諸天身香。 亦皆聞之。)”는 등의 문구가 나온다.
  514. 514)‘아타나’라는 용어는 이 식의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을 암시한 것이다. 첫째, 이 식은 물리적인 몸을 집수하여 파괴되지 않게 하면서 목숨이 다 끝날 때까지 몸을 따라다니며 전전한다. 둘째, 새로운 생을 받을 때 이 식이 그 몸을 취해서 태어나기 때문에 ‘자체自體를 집수한다’고 하였다. 현장 역 『攝大乘論本』 권1(T31, 133b29) 참조.
  515. 515)이 논에서는 ‘아타나’를 집지執持·집수執受·집취執取라는 세 가지 의미로 설명하였다. 첫째, 종자와의 관계에서 ‘집지執持’라고 한다. 이것은 이 식이 종자를 갖고 있으면서 상실되지 않게 하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 몸과의 관계에서는 ‘집수執受’라고 한다. 이것은 감각을 지닌 몸을 붙잡고 있으면서 스스로 ‘감각(覺受)을 일으킨다’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이 식은 최초로 생을 이어 주고(結生) 그 후에는 생이 계속 이어지게(相續) 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처럼 제유諸有를 취取하는 측면을 강조하여 ‘집취執取’라고 하였다. 이와 대조해서 외적인 자연계의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타나’의 세 가지 의미가 적용되지 않는다. 규기의 『成唯識論述記』 권4(T43, 350c10) 참조.
  516. 516)『成唯識論』 권3(T31, 14c7).
  517. 517)이 아뢰야식이 ‘잡염법과 더불어 상호 간에 연이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뢰야의 세 가지 의미 중에서 ‘능장能藏과 소장所藏’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아뢰야식은 잡염법 혹은 현행한 일곱 가지 식과의 관계에서 후자를 능히 저장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반대로 아뢰야식의 종자가 잡염법 등에 저장되어 있다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능장과 소장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하의 원측의 풀이(해)에서 다시 자세하게 진술된다.
  518. 518)이것은 아뢰야의 세 가지 의미 중에 ‘집장執藏’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이 아뢰야식은 언제나 유정들의 아애我愛의 경계로서 집착되는 것을 말한다.
  519. 519)『成唯識論』 권2(T31, 7c20).
  520. 520)『攝大乘論本』 권1(T31, 133b20) 참조.
  521. 521)이전의 『成唯識論』이나 『攝大乘論』 등에서 ‘아뢰야’의 의미를 능장能藏·소장所藏·집장執藏 등 세 가지로 해석했던 것과는 달리, 이 『解深密經』 경문에서는 ‘장藏(아뢰야)’이란 주로 식이 몸을 집수하여 의지처로 삼아서 거기에 깃들어 있는 측면을 나타낸 말이다. 따라서 앞의 두 논에서 말한 ‘소장’의 의미, 말하자면 아뢰야식이 잡염법(혹은 현행한 일곱 가지 식들) 안에 인성因性으로 내장되어 있다고 하는 의미에 일부분 일치한다고 하였다.
  522. 522)『深密解脫經』 권1(T16, 669a25).
  523. 523)『成唯識論』 권5(T31, 24c10) 참조.
  524. 524)『攝大乘論本』 권1(T31, 134a9).
  525. 525)원측에 따르면, 이 『解深密經』에서는 제8식에 내포된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도 이 식은 특히 신체의 물리적 토대를 이루는 색법 등을 적집하고 증장시키는 근원적 동인動因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심心’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526. 526)『成唯識論』 권3(T31, 13c10).
  527. 527)『攝大乘論』은 『阿毘達磨大乘經』에 대한 해석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논에 따르면 이 경에서는 열 가지 상의 수승수승어(十相殊勝殊勝語)를 설하였다. 지금 제8식을 ‘소지의’라고도 부른 것은 그 열 가지 상에 대한 수승한 말씀들 중에서 첫 번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 논에 나온 열 가지 수승어란, ① 소지의所知依와 ② 소지상所知相과 ③ 입소지入所知와 ④ 피입인과彼入因果와 ⑤ 피인과수차별彼因果修差別과 ⑥ 증상계增上戒와 ⑦ 증상심增上心과 ⑧ 증상혜增上慧와 ⑨ 피과단彼果斷과 ⑩ 피과지彼果智에 대한 수승한 말씀을 가리킨다. 『攝大乘論本』 권1(T31, 132c23) 참조.
  528. 528)알려질 수 있는 제법의 상을 의타기상依他起相,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 원성실상圓成實相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을 ‘삼자성三自性’이라 하는데, 이 삼자성에 통달해야만 ‘알려질 수 있는 것(所知)’에 대해 다 알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삼자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一切法相品」에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529. 529)세친의 『攝大乘論釋』 권1(T31, 322b29).
  530. 530)‘소의’는 아뢰야식이고, 그 소의라는 말과 대응해서 다시 ‘능의’라는 말도 성립한다. 그런데 이때의 ‘능의’, 다시 말하면 ‘그 아뢰야식에 능히 의지하는 법들’은 유위법에 국한된다. 말하자면 무위법은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아뢰야식에 의지해 발생하거나 이끌려 나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식이 무위법의 소의가 된다는 의미도 성립하지 않는다.
  531. 531)아뢰야식은 저 잡염법에 대해서는 그것의 인因이 되고, 또한 가령 무루의 도道와 같은 청정법에 대해서는 그것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532. 532)무성의 『攝大乘論釋』 권1(T31, 381a20).
  533. 533)이것은 『成唯識論』에서 별도로 추가된 제8식의 세 가지 다른 이름 중에서 두 번째 ‘이숙식’에 대한 설명이다. 『成唯識論』 권3(T31, 13c17).
  534. 534)인과因果 관계의 특징에 따라 ‘과果’의 이름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전변하면서 무르익는’ 관계나 ‘이시적으로 무르익는’ 관계라는 것은 가령 전후 찰나의 동질적 흐름을 형성하는 ‘동류인同類因과 등류과等流果’의 경우 등에도 통하는 것이지만, ‘인因과 다른 부류의 과果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는 이숙과異熟果에 국한된다. 여기서 ‘다른 부류’라고 한 것은 인의 성질은 선善·불선不善인데 그 과의 성질은 무기無記인 경우를 말한다. 아뢰야식은 과거 선악의 행위의 과보로서 주어지는 무기의 이숙과라는 측면을 갖는데, 이처럼 ‘다른 부류의 과를 낸다’는 의미에서 이 식을 ‘이숙식異熟識’이라 이름했다는 것이다.
  535. 535)이것은 『成唯識論』에서 추가된 제8식의 세 가지 다른 이름 중에서 세 번째 ‘무구식’에 대한 설명이다. 『成唯識論』 권3(T31, 13c19).
  536. 536)묘각위妙覺位 : 대승보살의 계위는 경론마다 일정하지는 않다. 그런데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십지十地 다음에 등각위等覺位와 묘각위妙覺位를 추가해서 보살의 오십이위五十二位를 말할 경우, ‘묘각’은 그 중 마지막 쉰두 번째 계위다.
  537. 537)‘무구식無垢識’에 대해서는 제2장 경문 해석 중에서 ‘1.-2)-(2)-①-가. 식의 종류 수가 몇 개인지를 밝힘’에서 다룬 적이 있다.(p.81, p.86 참조.) 이와 관련해서 진제 스님은 제9아마라식阿摩羅識을 ‘무구식’이라 한다고 했는데, 중국 법상학자들은 제9식의 존재를 부정한다. 원측에 따르면, ‘무구식’이란 ‘묘각위의 대원경지와 상응하는 심체’로서 제8식의 정분淨分을 가리킨다. 염위染位에서는 아뢰야식이라 하지만 정위淨位에서는 ‘무구식’이라 하는데, 이 가장 청정한 식은 가장 청정한 무루의 성도聖道를 이끌어 내는 토대가 된다는 의미에서는 ‘청정법의 소의’라는 의미를 갖는다.
  538. 538)이 경전의 게송은 『成唯識論』 권3(T31, 13c23)에서 인용된 것이다.
  539. 539)자신의 작용을 일으킨 것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동분과 피동분을 구분할 때, 법계는 오직 동분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의 인용문에서 언급되듯, 무엇보다 법계가 의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일단 생기해 있는 이상 대상을 갖지 않는 경우는 없다. 의식의 대상이 되어 주는 한에서 법계는 자기 작용을 한 셈이다. 그런데 일반적 의식이 법계에 속한 모든 법들을 한꺼번에 인식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므로 법계에 속한 것이 오직 동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법계가 오직 동분이 될 수밖에 없는 근거로서 성자의 인식을 예로 든 것이다. 가령 일체법의 무아를 관하고 있는 성자들의 지智는 일체법을 소연으로 삼고 있는데, 이러한 성자의 지에 있어서 법계의 모든 법들은 자기 작용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법계는 오직 동분이라고 하였다.
  540. 540)이상은 『俱舍論』 권2(T29, 10a2) 이하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541. 541)『雜阿毘曇心論』 권1(T28, 877c1) 참조.
  542. 542)『大毘婆沙論』 권71(T27, 370c8) 참조.
  543. 543)이하에 나오는 두 개의 문답은 별도로 전거를 밝히지 않았지만, 모두 『大毘婆沙論』 권71(T27, 370c10)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544. 544)첫 번째 질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법계가 의식의 경계이므로 오로지 동분이고 피동분은 없다고 한다면, 나머지 17계도 의식의 대상(所緣)이 될 수 있으므로 당연히 오로지 동분만 있다고 해야 하는데 어째서 거기에 피동분도 있다고 설했는가.
  545. 545)이하의 내용은 별도로 전거를 밝히지 않았지만, 모두 『俱舍論』 권2(T29, 10a12~26)에서 발췌한 것이다.
  546. 546)불생법不生法 : 제법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진행할 때 ‘생연生緣’이 결여됨으로써 장차 영원히 미래의 상태에 머물면서 절대로 생겨나지 않는 것을 ‘불생법’이라 한다. 지혜의 간택에 의해 드러난 멸제를 ‘택멸擇滅’이라 하는 데 대해서, 이 불생법은 간택의 힘이 아니라 연緣의 결여로 인해 나타난 것이므로 ‘비택멸非擇滅’이라 한다.
  547. 547)유식속불생법有識屬不生法은 근도 있고 식도 있지만 연이 결여됨으로써 끝내 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말하고, 무식속불생법無識屬不生法이란 근은 있지만 식이 없기 때문에 끝내 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548. 548)가령 눈이 생기하여 존재하지만 작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과는 달리, 의계(마음)라는 것은 아무 작용 없이 생기해 있는 경우는 없고 한번 생기한 이상 이미 어떤 대상에 대해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의계는 언제나 동분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불생법不生法은 어떤 연이 결여됨으로써 끝내 생겨나지 않고 영원히 미래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유일한 의계의 피동분으로 간주된다.
  549. 549)의계는 이미 발생한 이상 어떤 것을 소연所緣으로 삼는 작용, 즉 인식 작용(能緣)을 행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동분이다. 그런데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도 이미 발생한 것이므로 인식 작용을 행한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동분으로 정립되었다는 말이다.
  550. 550)네 종류 피동분의 색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바로 지금 멸하고 있거나, 장차 미래에 멸하게 될 것, 그리고 불생법을 가리킨다.
  551. 551)성계·향계·미계·촉계도 모두 색계에 준해서 알 수 있다. 촉계를 예로 들면, 신근에 대해 감촉의 작용을 일으킨 것은 ‘동분의 촉’이고, 몸에 감촉되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바로 지금 멸하고 있거나 장차 미래에 멸하게 될 것, 그리고 불생법은 ‘피동분의 촉’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552. 552)이하는 동분·피동분과 유정 간의 관계를 논한 것이다. 이 『大毘婆沙論』에 나온 첫 번째 견해는 앞의 『俱舍論』의 해석과 동일하다고 했는데, 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색을 보는 모든 눈은 유정 자신에 있어서는 동분의 눈이라 하고 그 밖의 유정에게도 또한 동분이다. 색을 보지 못한 모든 눈은 유정 자신에 있어서는 피동분의 눈이라 하고 그 밖의 유정에게도 또한 피동분이다.≻ 『大毘婆沙論』 권71(T27, 368b2) 참조.
  553. 553)이것은 두 번째 논사의 해석이다.
  554. 554)이것은 세 번째 논사의 해석이다.
  555. 555)『大毘婆沙論』 권71(T27, 368b5).
  556. 556)성계聲界의 경우는 한 사람에게 들리는 소리는 그 이외의 여러 사람들에게도 역시 들리기 때문에 색계와 마찬가지로 ‘공유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557. 557)향계·미계·촉계의 경우, 그것이 감각 기관에 이를 때 비로소 파악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취하는 것을 그 이외의 다른 사람이 공동으로 취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자기 눈(眼)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소용될 뿐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쓰일 수 없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향·미·촉의 세 가지 대상은 안근의 경우와 같다고 말해야 한다고 따진 것이다.
  558. 558)『俱舍論』 권2(T29, 10b1).
  559. 559)『雜阿毘曇心論』 권1(T28, 877c3).
  560. 560)‘공동으로 얻는다고 말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 사람들이 일상적인 언어적 관행에 따라서 “네가 맡은 향을 우리도 맡는다. 네가 맛본 맛을 우리도 맛본다. 네가 느낀 감촉을 우리도 느낀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561. 561)이 주장에 따르면, 승의勝義의 차원에서는 향·미·촉 세 가지는 일차적으로는 안계眼界의 경우처럼 한 사람만의 고유한 근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므로 공유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자기 근에 닿지 않았을 때에는 자기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다른 사람 모두에게 냄새·맛·감촉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하면 ‘공동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향·미·촉 등은 색계의 경우와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562. 562)향계·미계·촉계는 직접 닿아야만 파악되는 경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경계가 이미 수용된 경우에는 승의제에 의거해서 ‘안계의 경우와 같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 수용되지 않았을 때, 다시 말해 그것이 아직 자기 근에 닿지 않았을 때는 자기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 냄새·맛·감촉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공동으로 파악된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승의제에 의거해서 또한 ‘색계의 경우와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두 번째 견해()와 그에 대한 역주 참조.
  563. 563)이상은 『大毘婆沙論』 권71(T27, 369a20~b17) 참조.
  564. 564)안식 등 육식은 이미 생겨난 것인 이상 어떤 소연에 대해서 이미 자신의 작용을 행한 것이므로 모두 ‘동분’이고, 이 육식의 피동분은 결코 생겨나지 않을 법, 즉 ‘불생법不生法’뿐이다. 따라서 육식의 동분과 피동분은 의계意界의 경우와 같다고 하였다.
  565. 565)『俱舍論』 권2(T29, 10b9).
  566. 566)『雜阿毘曇心論』 권1(T28, 877c12).
  567. 567)이하에서는 동분과 피동분에 대한 대승의 여러 경론들의 해석이 나오는데, 공통적 특징은 모두 ‘다섯 가지 내처內處’, 즉 오근五根에 의거해서 동분과 피동분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소승의 『俱舍論』 등에서 근과 색에 대해 모두 동분과 피동분을 설정했던 것과는 다르다.
  568. 568)세친이 『大乘五蘊論』을 지었고 안혜가 그 논에 대한 해석서로 『大乘廣五蘊論』을 지었기 때문에 ‘세친과 안혜의 『오온론』’이라고 하였다.
  569. 569)‘다섯 개의 내적인 유색계’란 다섯 가지 감각 기관(五根)을 말하고, ‘그 각자의 식’이란 가령 눈의 식(眼識), 코의 식(鼻識) 등을 말한다. 그런데 식이 일어나고 있을 때는 가령 안식이 ‘경계와 동등해지는(等境)’ 것처럼 근도 안식과 함께 경계와 동등해진다. 마찬가지로 귀와 코와 혀와 몸도 이식·비식·설식·신식과 관계에서 각기 성·향·미·촉이라는 경계와 동등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식이 일어날 때의 눈 등을 ‘동분’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경계와 동등해진다’는 것은 ‘경계와 유사해진다’는 뜻인데,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이하의 『集論』과 『雜集論』의 인용문 참조.
  570. 570)식이 일어날 때의 오근은 그 각각의 식과 마찬가지로 ‘경계와 동등해진다’는 의미가 있지만, 식이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의 오근은 ‘자기 부류와 동등하다(自類等)’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피동분’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이하의 『集論』과 『雜集論』의 인용문 참조.
  571. 571)『大乘廣五蘊論』 권1(T31, 855b4).
  572. 572)이하의 『雜集論』의 인용문에는 이 질문의 대답이 생략되었다. 이와 같은 동분과 피동분이라는 독특한 범주를 가립해서 그것을 관찰하는 이유에 대해 그 논에서는 “식과 상응하는 아我나 상응하지 않는 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 동분과 피동분을 관찰하는 것이다.(爲捨執著與識相應不相應我故。 觀察同分彼同分。)”라고 하였다. 『雜集論』 권5(T31, 716a5) 참조.
  573. 573)『集論』 권3(T31, 671c28).
  574. 574)‘식이 경계와 서로 유사해진다’는 것은 어떤 경계에 대한 인식이 발생할 때 하나의 표상으로서의 식識에는 경계와 유사한 영상이 현현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식과 함께 작용하고 있는 근의 경우, ‘근의 부류로서 전후 유사하게 상속된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식과 유사해진 상태로 상속된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식이 있는 근’을 동분이라 했다는 말이다.
  575. 575)식이 일어나지 않고 다만 근이 전후 찰나 연속해서 생기하고 있을 때는 그 근은 ‘자기 부류와 유사하게 생겨난다(自類相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식이 없을 때의 근’을 피동분이라 했다는 말이다.
  576. 576)『雜集論』 권5(T31, 715c28).
  577. 577)소승의 논에서는 오근과 오경에 대해 동분·피동분을 관찰하지만, 대승의 논에서는 오직 내적인 오근에 대해서만 동분·피동분을 사량하는데, 그 이유는 동분·피동분을 관찰하는 목적과도 연관된다. 앞의 각주에서 언급했듯, ‘식識과 상응하는 아我’ 혹은 ‘식과 상응하지 않는 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해 이 동분·피동분을 관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로 집착되는 대상이 아닌 외부의 물리적 세계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사량하지 않는다.
  578. 578)『瑜伽師地論』 권56(T30, 609c3).
  579. 579)여기서 진술된 “식이 있는 안근에 의지하고 바깥의 색진을 소연으로 삼아 안식이 일어날 수 있다.(依有識眼根。 緣外色塵。 眼識得生。)”는 문장은 현존하는 『解節經』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진제가 번역한 세친의 『攝大乘論釋』(梁攝論) 권1(T31, 157b25)에는 그에 해당하는 『解節經』의 경문이 길게 인용되는데, 원측은 바로 이 인용문을 재인용한 것이다. 진제 역, 세친의 『攝大乘論釋』 권1(T31, 157b25) 참조.
  580. 580)『深密解脫經』 권1(T16, 669a29) 참조.
  581. 581)진제 역 『攝大乘論釋』 권1(T31, 157b28)에서 인용된 『解節經』에는 “……이때 하나의 유분별의식有分別意識이 다섯 가지 식과 더불어 공동의 소연 경계에서 일어난다.(是時一有分別意識。 與五識共緣境生。)”라고 되어 있다.
  582. 582)『瑜伽師地論』 권51(T30, 581a3), 『顯揚聖敎論』 권17(T31, 566c28) 참조.
  583. 583)전식轉識 : 유식종에서는 제8아뢰야식을 제외한 그 밖의 일곱 종류 현행식들, 즉 전前오식과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을 가리킨다. ‘전轉’이란 전변轉變·개전改轉·전기轉起·전역轉易 등의 뜻으로서, 이 일곱 종류 식은 아뢰야식을 소의所依로 삼고 색色·성聲 등의 경계들을 소연所緣으로 삼아 일어나기(轉起) 때문에 ‘전식’이라 한다.
  584. 584)전식의 개수는 일곱 종류라고 했는데, 이 『瑜伽師地論』 문장에서 “오식에서 의식까지를 말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의식意識’이란 ‘의의 식(意之識)’인 제6식, 그리고 ‘의 그 자체가 식(意卽識)’인 제7식(末那識)을 통칭한 것이다. 『成唯識論述記』 권4(T43, 377b12) 등 참조.
  585. 585)『瑜伽師地論』 권63(T30, 651b13).
  586. 586)여덟 가지 식의 인식 작용(行相), 그 식들이 의거하는 근根들(所依), 그 식의 인식 대상(所緣), 그 식과 상응해서 일어나는 심소법들(상응법)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일괄해서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587. 587)일곱 가지 전식轉識들이 현행했다가 사라질 때 아뢰야식에 종자種子의 형태로 흔적을 남기는 것을 ‘훈습熏習’이라 하는데, 일곱 가지 전식이 ‘훈습하는 주체(能熏)’라면 제8아뢰야식은 ‘훈습되는 대상(所熏)’에 해당한다.
  588. 588)제8아뢰야식과 일곱 가지 전식轉識들 간에는 상호 간에 인과因果 관계가 성립한다. 제8식의 종자에서 일곱 가지 현행식들이 생한다는 측면에서는 전자가 인이고 후자가 과라면, 전식들이 능히 훈습하여(能熏) 그 결과로서 아뢰야식의 종자가 훈습된다(所熏)는 측면에서는 전자가 인이고 후자가 과이다. 『成唯識論』 권2(T31, 8c7), 『成唯識論述記』 권2(T43, 306b1) 참조.
  589. 589)‘상相’이란 ‘능히 형상화하는 작용(能相)’을 가리키고, ‘소상所相’이란 ‘형상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능能·소所의 구분은 사실상 ‘식識’에 의거해서 안립된 것이다. 말하자면 식의 형상화하는 작용(用)은 외경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식의 체體를 토대로 일어난 것으로서, 식의 작용이 ‘능상’이라면 식 자체는 ‘소상’에 해당한다. 그런데 식의 자성에 있어서 능상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고, 능상이 없기 때문에 소상도 얻을 수 없으니, 이런 의미에서 ‘상·소상은 없다’고 하였다. 규기의 『成唯識論述記』 권7(T43, 486b12) 참조.
  590. 590)『成唯識論』 권7(T31, 38c4).
  591. 591)두 가지 비유 중에서, 물과 파랑의 비유는 ‘동시에 일어나고 또 인과의 상속이 끊어지지 않음’을 뜻한다고 했는데, 그 예로서 다음에 『成唯識論』의 문구를 인용하였다. 이 논에서는 아뢰야식에 대해 “단멸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으니, 항상 전전하기 때문이다.(非斷非常。 以恒轉故。)”라고 하고서, 다시 ‘항상 전전한다(恒轉)’는 것은 ‘마치 폭류와 같다(猶如暴流)’고 비유하였다. 이 ‘폭류의 비유’가 바로 물과 파랑의 비유로서, 이는 아뢰야식이 전식과 더불어 동시에 일어나고, 둘 간의 인과 관계가 상속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짐을 뜻한다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成唯識論』 권3(T31, 12b28) 참조.
  592. 592)『成唯識論』 권3(T31, 12c4).
  593. 593)물과 파랑의 비유와 거울과 영상의 비유는 제8식과 전식이 ‘동시에 일어남(俱起)’을 비유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후자의 경우는 특히 거울에 영상이 현현하는 것처럼 제8식 자체가 전식들로 전변되는 것이 아니라 제8식을 소의로 삼아 일곱 가지 전식이 일어난다는 점, 또 마치 거울이 영상을 수용하는 데 있어 다함없는 것처럼 제8식에 의거해 전식들이 일어남도 그러하다는 점을 비유한 것이다.
  594. 594)두 경에는 이와 유사한 게송이 나오지만, 문구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大乘入楞伽經』(T16, 594c11)에는 “譬如巨海浪。 斯由猛風起。 洪波鼓溟壑。 無有斷絕時。 藏識海常住。 境界風所動。 種種諸識浪。 騰躍而轉生。”이라고 되어 있고, 『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T8, 911c22)에는 “如海遇風緣。 起種種波浪。 現前作用轉。 無有間斷時。 藏識海亦然。 境界風所動。 恒起諸識浪。 無間斷亦然。”이라고 되어 있다.
  595. 595)이것은 『成唯識論』 권2(T31, 7c1)에서 제시된 ‘능변能變’의 두 가지 의미에 의거한 것이다. 그 논에서는 이것을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그 중에 ‘인능변’이란 제8아뢰야식에 내재된 명언종자名言種子와 업종자業種子가 직접적 원인(親因緣)이 되어 자기 과果를 산출하는 것을 말한다. 종자가 자기 과를 낸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전 순간의 종자가 다음 순간의 자류自類의 종자를 생하는 것이고, 둘째는 종자로부터 일곱 가지 전식轉識이 현행하는 것을 말한다. 위의 원측 소에서 ‘종자로서의 아뢰야식(種子賴耶)이 전변하여 일곱 가지 식이 된다’는 것은 후자를 말한다. 이때 ‘인능변’이란 종자로서의 아뢰야식 자체가 일곱 가지 식들을 전변해 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거울과 영상의 비유’는 그러한 ‘인능변’의 의미를 나타내기에는 적절하지 않고, 오히려 후술되는 ‘과능변’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과능변’에 대해서는 바로 뒤의 각주 참조.
  596. 596)『成唯識論』에서는 과능변에 대해 “연緣을 지닌 법으로서 능히 변현하는 것을 과능변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때의 ‘변현한다(變)’는 의미는 이전의 인능변의 의미와는 달라서 ‘연을 지니는 변현(有緣變)’, 즉 모든 식들이 각자의 인식 대상(所緣)을 갖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식의 자증분自證分이 견분見分(인식 작용)과 상분相分(인식 대상)이라는 이분 구조를 띠고 현재화되는 것이다. 『成唯識論述記』 권2(T43, 299a28) 참조.
  597. 597)과능변의 측면에서 보면, 제8식을 토대로 해서 일곱 가지 식들이 일어나지만 각각의 식들은 그 자체가 생할 때 언제나 자기의 소연所緣인 상분相分을 띠고 있다. 이러한 소연의 영상상분影像相分들은 근원적으로는 제8식을 토대로 삼기는 해도 제8식의 자체가 인因이 되어 직접적으로 변현해 낸 과果라기보다는 각 식들의 자증분自證分에 의해 변현된 것이다. 따라서 『解深密經』 경문에서 제8식과 이러한 영상들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거울과 영상의 비유’를 들어서 “이 거울 면이 전변해서 영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598. 598)이전의 비유에다 본래 주장하려 했던 교법을 결합시켜 진술하는 경문을 ‘합合’ 또는 법동유法同喩라고 한다. 다음에 나온 경문이 바로 법동유에 해당하는데, 거기서 거울과 영상의 비유는 제외하고 오직 물과 파랑의 비유만을 들어 “이와 같이 광혜여, 흡사 폭류와 같아서 아타나식을……”이라고 설한 것을 말한다.
  599. 599)가령 『深密解脫經』 권1(T16, 669b8)에서는 “광혜여, 마치 저 흐르는 물이나 밝은 거울의 영상 등과 같이, 아타나식을 의지하여…….(廣慧。 如彼流水明鏡像等。 依止阿陀那識……。)”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비유를 모두 들어서 교법과 결합시켰다.
  600. 600)법동유法同喩 : 경문 해석에서 이전의 비유에다 다시 본래 주장하려 했던 교법을 결합시켜서 의미를 완전하게 진술하는 대목을 ‘합合’ 또는 법동유法同喩라고 한다.
  601. 601)『大毘婆沙論』 권110(T27, 572a27).
  602. 602)『成實論』 권16(T32, 368c7).
  603. 603)『顯揚聖敎論』 권15(T31, 556b3) 참조.
  604. 604)『瑜伽師地論』 권10(T30, 327c19).
  605. 605)『瑜伽師地論』 권94(T30, 835c24).
  606. 606)이하의 경문 해석에 따르면, 이 경문은 제8식의 세 가지 이름에 의거해서 심의식心意識을 여실하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한 것이다. 세 가지 이름이란 ① 아타나와 아타나식, ② 아뢰야와 아뢰야식 그리고 ③ 적집積集과 심心을 말한다. 여기서 ‘아타나와 아뢰야와 적집’이라는 용어는 제8식의 특수한 작용(用)을 나타내고 그 작용에 근거해서 제8식의 체體를 각기 아타나식과 아뢰야식과 심 등이라 명명하는데,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세 가지 의미를 보지 않아야 비로소 심의식의 비밀스런 선교방편에 통달한 보살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607. 607)이 해석에 따르면, 위의 경문에서 아타나와 아타나식, 아뢰야와 아뢰야식, 적집과 심 등은 각기 제8식의 작용(用)과 체體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 모든 것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진여의 이치를 증득한 정체지正體智(根本智)로 무차별적인 세계를 비추는 것을 말한다.
  608. 608)이하에서는 ‘내의 각별한 것(內各別)’이라고 명명된 경계에 대해 통달한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雜集論』과 『瑜伽師地論』에 나온 ‘지知’의 정의를 소개하였다. ‘지’란 견見·문聞·각覺·지知 중의 하나를 말한다. 이 견·문·각·지에 대한 대·소승의 해석은 매우 다양하고, 이에 대해서는 「勝義諦相品」 중에서 ‘절제표시絶諸表示’라는 경문을 해석하면서 이미 상세하게 논한 바 있다. 이 「心意識相品」에서는 심의식의 비밀에 통달한 선교보살의 경지란 어느 정도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이 개념을 도입한 것인데, 이 해석에 따르면 ‘심의식의 비밀선교에 통달한다’는 것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고 제법 자체의 특수상(自相)을 현량現量으로 아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견·문·각·지 중에서 특히 ‘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609. 609)이것은 견見·문聞·각覺·지知 중에서 ‘지’의 의미를 설명한 내용이다.
  610. 610)『雜集論』 권1(T31, 695c10).
  611. 611)『瑜伽師地論』 권2(T30, 289b19).
  612. 612)이 해석에 따르면, 진여의 이치를 증득하고서 단지 무차별적 세계를 비추는 정체지正體智(根本智)만으로 심의식의 비밀을 통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지 이후에 획득된 지혜로서 차별적인 유위有爲의 경계를 비추는 후득지後得智로도 통달하는 것이고, 정체지와 후득지는 모두 현량에 해당한다. 위의 경문에서 ‘아타나 등을 보지 않는다’고 반복적으로 말한 것은 언어적 분별을 매개로 하지 않고 사물의 자상을 직접 현량으로 증득한다는 말이지, 분별 자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613. 613)이하에 진술되는 호법의 해석에 따르면, ‘범우凡愚’라고 한 것에서 ‘범凡’이란 ‘종성이 없는 유정(無性有情)’을 가리키고, ‘우愚’란 ‘취적종성趣寂種性’을 가리킨다. 이들은 가령 궁생사온窮生死蘊처럼 목숨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 있고 그것이 ‘아’라고 집착하는 자들이다.
  614. 614)여기서 『深密解脫經』과 『解節經』의 게송의 문구가 뒤섞여 있다. 『深密解脫經』 권1(T16, 669b26)에 나온 게송은 다음과 같다. “諸種阿陀那。 能生於諸法。 我說水鏡喻。 不爲愚人說。”
  615. 615)여기서 『深密解脫經』과 『解節經』의 게송의 문구가 뒤섞여 있다. 이전의 『深密解脫經』 게송 문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게송을 배열하면 “執持識深細。 諸〔=法〕種子恒流。 於凡我不說。 彼勿執爲我。”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解節經』은 현장 역 『解深密經』 「勝義諦相品」을 네 개로 나눈 것으로 「心意識相品」에 해당하는 품이 없다. 다만 진제가 번역한 세친의 『攝大乘論釋』 등에는 『解節經』의 게송들이 자주 인용되는데, 그 책의 권1(T31, 157b10)에는 “執持識深細。 法種子恒流。 於凡我不說。 彼勿執爲我。”라고 되어 있다.
  616. 616)일체지지一切智智(ⓢ sarvajñā-jñāna) : 부처님의 지혜는 일체지一切智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일체지는 성문과 연각 등에도 통하는 것인데, 그 둘과 구별하기 위해 부처님의 지혜를 특별히 ‘일체지지’라고 한다.
  617. 617)어리석은 범부들은 이 아뢰야식에 대해 설하면 이 식은 생사의 때가 다하도록 한 종류로 상속하면서 바뀌지 않는 ‘아我’라고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618. 618)무성의 『攝大乘論釋』 권1(T31, 383b17).
  619. 619)세친의 『攝大乘論釋』 권1(T31, 325a11).
  620. 620)‘색근과 의지처’란 감각 기관을 가진 몸(有根身)을 가리키며, 이 중에 ‘색근’이란 정묘한 감각 기관으로서의 승의근勝義根을 말하고 ‘의지처’란 그 근을 떠받치고 있는 물리적 토대로서의 부진근扶塵根을 말한다.
  621. 621)결생상속結生相續 : ‘결생’이란 수생受生의 단계에서 새로운 생을 잇는 것을 말하고, ‘상속’이란 생을 맺은 이후로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622. 622)『成唯識論』 권3(T31, 14c7).
  1. 1)「勝義…」一行補加。
  2. 1)「請又」疑寫倒。
  3. 2)「報」異無。
  4. 3)「故」異無。
  5. 1)「後」疑「復」次同。
  6. 1)「三」異作「五」。
  7. 1)「諸」疑「謂」。
  8. 2)「方」下疑脫「便」。
  9. 3)「得」上異有「得蘊盡故」。
  10. 1)「實」疑「有」。
  11. 2)「起」下異有「於」。
  12. 1)「等」下異有「法」。
  13. 2)「析」疑「折」{編}。
  14. 1)「其」異作「具」。
  15. 1)「或」疑「戒」。
  16. 1)「如」異作「知」。
  17. 1)「中」異作「菩薩」。
  18. 2)「施設彼敎」疑剩。
  19. 1)「果」異作「科」。
  20. 1)「部」疑「剖」。
  21. 2)「復」疑「後」。
  22. 3)「謂」下異有「何和合依託謂」。
  23. 1)「方」疑「可」。
  24. 2)「來」疑「棗」。
  25. 1)「列」疑「引」次同。
  26. 1)「說」下異有「彼」。
  27. 1)「觀」疑「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