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 海東高僧傳卷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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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제2卷第二
개성 북쪽에 있는 오관산 영통사의 주지 교학사자사문 신 각훈이 왕명을 받들어 찬하다.
유통流通 1-2(一之二)
각덕명관, 지명담육, 원광, 안함호승胡僧 2인二人, 한승漢僧 3인三人, 담화曇和, 안홍安弘, 아리야발마, 혜업, 혜륜, 현각현조와 무명이인亡名二人, 현유승철, 현태
1. 각덕覺德명관明觀
승려 각덕은 신라 사람으로 총명하고 박식하여 범인인지 성인인지 헤아릴 수 없다. 신라는 이미 불교를 받들어 행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다투어 귀의하고 신앙하였다. 스님은 지혜가 뛰어나 세상을 교화할 수 있음을 알고 말하기를, “높은 곳으로 오르려면 반드시 골짜기에서 나와야 하고, 도를 배우려면 스승을 구하는 데 힘써야 한다. 만일 편안한 데 안주하여 천천히 행한다면 부처님의 제자로서 은혜를 저버리고 출가한 본뜻이 아니다.”라고 하고 곧 배를 타고 양나라로 들어가 법을 구하는 데 선봉이 되었다. 다만 몇 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신라인 유학의 시초이다.
드디어 밝은 스승들을 두루 섬기면서 입으로 직접 가르침을 갖추어 받으니, 마치 묵은 꺼풀(翳膜)을 벗긴 듯하고, 귓속의 귀지(耵聹)를 파내 버린 듯하였다. 시작이 있으면 끝을 맺었으며, 등한시하지도 않으며 게으르지도 않았으며, 덕은 높고 행은 뛰어나 도를 이룬 명망은 사방에 극진하였다. 보배를 캐는 것은 나 혼자만이 쓰기 위한 것이 아니니 마땅히 고국으로 돌아가 곤란한 사람들을 널리 구제해야 한다고 하고, 이에 진흥왕 10년(549)에 양나라 사신들과 함께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경주로 돌아왔다. 왕은 급히 유사에게 명하여 백관을 보내 예의를 갖추고 흥륜사 앞길에 나가 맞이하게 하니, 이 또한 부처님 사리의 시초가 된다. 옛날 승회僧會는 오나라에 가서 기도한 지 7일1)이 지나자 비로소 신이한 영험을 얻었다고 한다. 스님은 왕이 이미 불법을 공인한 후에 상국上國인 양나라의 위세가 중한 사신을 따라 본국에 돌아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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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097_a_02L海東高僧傳卷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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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097_a_04L京北五冠山靈通寺住持
006_0097_a_05L敎學賜紫沙門臣覺訓奉宣撰

006_0097_a_06L流通一之二

006_0097_a_07L
覺德
智明
1) [86] 安含2)胡僧
曇和

006_0097_a_08L漢僧
安和
[87] 阿離耶跋摩慧業慧輪玄恪
006_0097_a_09L玄照3) [88]
二人
玄遊
玄大梵

006_0097_a_10L
釋覺德新羅人聰明廣博凡聖莫測
006_0097_a_11L新羅旣奉行佛敎人爭歸信師以
006_0097_a_12L達智知世之可化謂曰遷喬必出谷
006_0097_a_13L學道務求師若安安而居遲遲而行
006_0097_a_14L非釋子棄恩之本意卽附舶入梁爲求
006_0097_a_15L法之先鋒但不知第何年耳此新羅入
006_0097_a_16L學之始遂歷事明師備承口4) [89] 如除
006_0097_a_17L翳膜如去5)盯矃 [90] 有始有終無荒無怠
006_0097_a_18L德高行峻道望彌隆以採寶者非但
006_0097_a_19L自用當還故國普振群貧乃於眞興
006_0097_a_20L王十年與梁使6)齎佛舍利還至舊都
006_0097_a_21L王遽命有司卽遣百官備禮儀出迎于
006_0097_a_22L興輪寺前路此亦舍利之始7)昔僧
006_0097_a_23L會適吳求伸七日方値神驗師當人
006_0097_a_24L主已信之際隨上國重使來儀本國

006_0097_b_01L전혀 어려움이나 막힘이 없었다. 또 불법(法水)2)으로써 먼바다의 밖(신라)까지 두루 윤택하게 하고, 게으른 사람을 밖에서 자립시켜, 모두 다 귀의하고자 하는 뜻을 품게 하였으니, 그 공적과 이익을 또한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후 진흥왕 26년(565)에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양나라에 유학 온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면서 불교의 경론을 무려 2700여 권이나 보냈다. 예전 즉 신라가 불법의 교화를 처음으로 펼 때는 경전과 불상이 빠진 것이 많았지만 이때에 이르러 확연하게 크게 갖추게 되었다. 두 스님의 임종에 대해서는 모두 자세하게 들은 게 없다.
2. 지명智明담육曇育
승려 지명은 신라 사람이다. 신통하게 통달하여 빨리 깨달았으며 행하고 그침이 법도에 맞았다. 안으로는 밀행密行3)을 쌓고도 다른 사람의 덕이라 찬양하고, 잘못된 것은 끌어당겨 자신에게 향하게 하였으며, 값진 것을 희사하여 남에게 주고, 온화하고 의기 높으며 행동함에 배울 점이 있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공인된 후로 처음에는 크게 모이지 못했다. 영웅 준걸이 간간이 나와 떨쳐 일어나니, 혹은 스스로 깨우치는 데 최선을 다했고 혹은 멀리 구하여 길을 떠나려고 하인에게 탈것을 준비시켰다. 새 무당이 옛 무당에게 가려지니 사邪와 정正이 비로소 나뉘었고, 구관이 신관에게 알리니 스승과 제자가 서로 가르쳤다. 이에 서쪽으로 중국에 들어가 물릴 정도로 참여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스님은 한 시대를 바로잡아 구할 만한 뛰어난 인재로서 진평왕 7년(585) 가을 7월이 되자 나루터를 물어 빠른 길은 찾아, 진陳나라에 들어가 법을 구하였다. 바다와 육지를 구름처럼 노니다가, 동으로 서로 다니며 진실로 도가 있고 신령한 분이라면 모두 다 찾아가 물으니, 나무가 먹줄을 따르는 것과 같이 곧고 금이 그릇을 이루는 것과 같았다. 훌쩍 한번 떠난 것이 어느새 10년이 되어, 학문은 이미 골수를 얻어 마음으로 간절히 법맥法脈을 전하고자 하였다.
진평왕 24년(602) 9월에 입조入朝하는 사신을 따라 귀국하였다. 왕은 스님의 풍모를 흠모하고, 계율을 중히 여긴 것을 추앙하고 기리어 대덕으로 삼고 장차 (궁으로) 오기를 권하였다. 스님은 숭산과 화산처럼 우뚝 솟았으며, 도량은 바다를 품었으며, 지혜의 달로써 비추고 덕행의 바람으로써 떨치니, 승속 모두에게 일정하고도 교훈이 되었다. 뒤에는 대대덕大大德이 되어

006_0097_b_01L了無艱8) [91] 又以法水普潤海表使
006_0097_b_02L9)惰夫立10) [92] 皆懷欲往之志其功利
006_0097_b_03L11) [93] 何勝道哉後二十六年陳遣使劉
006_0097_b_04L思及入學僧明觀送釋氏經論無慮二
006_0097_b_05L千七百餘卷初則新羅法化初張經像
006_0097_b_06L多闕至是班班將大備焉二師所終
006_0097_b_07L未詳聞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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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智明新羅人神解超悟行止合度
006_0097_b_09L內蘊密行讃揚他德12) [94] 向己捨直
006_0097_b_10L與人顒顒13)卬卬動有可觀自竺敎宣
006_0097_b_11L通於海東權輿之際未曾大集英俊
006_0097_b_12L間生奮臂而作或自悟以逞能或遠
006_0097_b_13L求而命駕新醫▼(衤+弇)於舊醫邪正始分
006_0097_b_14L舊尹吿於新尹師資相授於是西入中
006_0097_b_15L飽參而14) [95] 繼踵而起師以命世
006_0097_b_16L之才當眞平王之七年秋七月問津利
006_0097_b_17L入陳求法雲遊海陸梗轉西東
006_0097_b_18L有道而有名悉爰諮而爰詣如木從繩
006_0097_b_19L如金成器飄然一去忽爾十霜學旣
006_0097_b_20L得髓心切傳燈以眞平王二十四年九
006_0097_b_21L隨入朝使還國王欽風景仰推重
006_0097_b_22L戒律褒爲大德以勸方來師岳立嵩
006_0097_b_23L15)▼(荔/十) [96] 量含滄溟炤之以慧月振之以德
006_0097_b_24L緇素之徒是彜是訓後加大大德

006_0097_c_01L우뚝 높은 자리에 있었으나 입멸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처음에 스님이 진나라에 들어간 5년(589) 뒤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평왕) 8년4)에 담육曇育이 수나라에 들어갔으며, 27년5)에 입조하는 사신 혜문惠文을 따라 함께 돌아왔다. 스님은 지명과 함께 모두 높은 덕으로 당대에 명성을 날리고 숭상되었으니, 그 아름다운 재능에는 진실로 서로 높고 낮음이 없었다.
 찬하여 말한다. 계찰季札은 주나라의 왕실에서 악樂을 보았고, 공자는 노자(老聃)에게 예禮를 물었으니, 처음으로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으뜸이 있음을 보인 것이다. 각덕 등은 중국을 왕래하면서 도를 묻고 돌아왔으니, 이 또한 사람은 다르지만 돌아간 길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3. 원광圓光
승려 원광의 속성은 설씨 혹은 박씨라고 하며 신라 왕경王京(경주) 사람으로서 13세에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속고승전』에는 당나라 사찰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그릇됨이 크고 넓었으며 총명하여 통달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도교와 유교를 두루 섭렵하고 글을 즐겨 읽었으며, 일상逸想이 고매하여 어지럽고 시끄러운 곳에 살기를 싫어하였다.6)
30세에 삼기산三歧山에 들어가 은거하며 그림자도 동구 밖을 나가지 않았다. 어떤 비구가 부근에 와서 머무르며 난야를 짓고 수도하였다. 스님이 밤에 앉아서 염송하고 있었더니 신이 불러 말하기를. “선재善哉로다! 무릇 수행자는 비록 많지만 법사의 위를 넘을 자는 없습니다. 지금 저 비구는 간사하게 주술을 닦아, 당신의 청정한 염송을 괴롭히고 나의

006_0097_c_01L蔚居峻秩不知所卒初師入陳後五
006_0097_c_02L圓光法師入陳八年曇育入隋 [8]
006_0097_c_03L隨入朝16)使 [97] 惠文俱還師與智明竝以
006_0097_c_04L高德顯名當代之才之美固不相上
006_0097_c_05L下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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賛曰季札觀樂於周室仲尼問禮於
006_0097_c_07L老聃非始學也亦有宗矣德等往
006_0097_c_08L還上國訪道而返斯亦異類而同歸
006_0097_c_09L者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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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圓光俗姓17) [98] 或云朴新羅王京
006_0097_c_11L年十三落髮爲僧續高僧傳云
入唐刹削
神器恢
006_0097_c_12L18) [99] 解超倫校渉玄儒愛染篇章
006_0097_c_13L逸想高邁厭居19) [100] 三十歸隱三20) [101]
006_0097_c_14L影不出洞有一比丘來止近地
006_0097_c_15L蘭若修道師夜坐21)誦念有神呼曰
006_0097_c_16L凡修行者雖衆無出法師右者
006_0097_c_17L彼比丘徑修呪術但惱汝淨念礙我
006_0097_c_18L「光」下有「圓安」{乙}「胡僧曇和漢僧安和」
006_0097_c_19L作「胡僧二人漢僧三人曇和安弘」{乙}
「名」
006_0097_c_20L上有「亡」{乙}
「訅」作「訣」{乙}·註曰訅或訓字{底}
006_0097_c_21L{甲}
「盯矃」作「耵聹」{乙}「齎」作「賫」{甲}{乙}
006_0097_c_22L
「也」無有{乙}▣作「㝵」{乙}「惰」作「懶」{乙}
006_0097_c_23L
▣作「表」{乙}「復」作「後世」{乙}「回」作
006_0097_c_24L「曲」{乙}
「卬卬」作「昻昻」{乙}「來」下有「者」
006_0097_c_25L{乙}
「▼(荔/十)」作「華」{乙}「使」無有{乙}「薜」作
006_0097_c_26L「薛」{乙}
「惠」作「慧」{乙}「情」作「憒」{乙}
006_0097_c_27L
「岐」作「歧」{乙}次同「誦念」作「念誦」{乙}

006_0098_a_01L행로行路에 장애가 될 뿐으로 아무 소득도 없어, 지날 때마다 몇 번이나 악심을 내었습니다. 청컨대 스님은 옮겨 가게끔 타일러 주십시오. 만일 따르지 않고 오래 머무르면 당연히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스님이 가서 저 승려에게 고해 말하기를, “거처를 옮겨서 해를 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지극한 수행으로 마구니의 방해를 받는 것뿐인데 어찌 요귀의 말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그 신이 와서 저 승려의 대답을 물었다. 스님은 노할까 두려워 거짓으로 말하기를, “아직 알지 못하지만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그 사정을 다 알고 있으니 항차 가만히 두고 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밤이 되자 우레 같은 소리가 나므로 날이 밝자 가 보았더니 산이 난야蘭若에 무너져 내려 있었다. 신이 와서 알려 말하기를, “나는 수천 년을 살면서 위의와 변화가 가장 장성하니 이깟 일이 어찌 괴이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깨우치며 말하기를, “지금 스님은 비록 자신을 이롭게는 하지만 남을 이롭게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중국에 들어가 법을 얻어 후학들에게 이르게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스님은 말하기를 “중국에서 도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원하는 바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고 험해 스스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은 중국으로 유학 가는 일에 대해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이에 진평왕 11년(589) 봄 3월에 마침내 진나라로 들어가 강사講肆를 유력遊歷하면서 자질구레한 말까지도 요점을 추려 기록하며, 『성실론成實論』ㆍ『열반경涅槃經』 및 삼장三藏에서 여러 논論을 전해 받았다. 다시 오나라의 호구虎丘에 의탁하여 편안하게 푸른 하늘을 명상하였다. 청신자淸信士들의 청으로 마침내 『성실론』을 강의하니 우러러보며 더욱 청하며 마치 물고기 비늘이 서로 닿듯이 모여들었다.
마침 수나라 군사들이 양도楊都7)에 침입하자, 우두머리 장수가 탑에 불이 난 것을 바라보고 구하려고 하였다. 구하려고 가서 보니 스님이 포박되어 탑 앞에 있었다. 무고한 듯하여 기이하게 여겨 놓아 주었다. 개황開皇 연간(581~600)에 섭론종攝論宗이 비로소 일어났으므로, 문구를 받들어 지녀 경고京皐(수나라 서울)에서 널리 칭송되었다.
업적이 이미 정통하게 되자 도를 해동에서 모름지기 계승해야 한다고 여기고 본국에 여쭈니 칙령으로 돌아가게 하였다.8) 진평왕 22년 경신년(600)에 조빙사朝聘使 나마奈麻인 제부諸父와 대사大舍인 횡천橫川을 따라 신라로 돌아가는데9) 갑자기 보니 바다 가운데서 이상한 사람이 나와 절을 하고 청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스님은

006_0098_a_01L行路而無所得每當經歷幾發惡心
006_0098_a_02L請師誘令移去若不1)▣住從 [102] 當有患
006_0098_a_03L明旦師往吿彼僧曰可移居逃害
006_0098_a_04L不然將有不利對曰至行魔之所妨
006_0098_a_05L憂妖鬼言乎是夕其神來訊彼答
006_0098_a_06L恐其怒也謬曰未委耳何敢不聽
006_0098_a_07L吾已俱知其情且可默住而見之
006_0098_a_08L夜聲動如雷黎明往視之有山頹于蘭
006_0098_a_09L若壓焉神來證曰吾生幾千年威變
006_0098_a_10L最壯此何足怪因諭曰今師雖有自
006_0098_a_11L而闕利他何不入中朝得法波及
006_0098_a_12L後徒師曰學道於中華固所願也
006_0098_a_13L陸逈阻不能自達於是神2) [103] 誘西遊
006_0098_a_14L之事乃以眞平王十3) [104] 年春三月
006_0098_a_15L入陳遊歷講肆領牒微言傳禀成實
006_0098_a_16L涅槃三藏數論便投吳之虎丘攝想
006_0098_a_17L靑霄因信士請遂講成實企仰請益
006_0098_a_18L相接如鱗會隋兵入楊都主將望見塔
006_0098_a_19L將救之祇見師被縛在塔前若無
006_0098_a_20L吿狀異而釋之4) [105] 皇間攝論肇興
006_0098_a_21L佩文言宣譽京臯勣業旣精道東須
006_0098_a_22L本朝上啓有勅放還5)平二十二
006_0098_a_23L年庚申隨朝聘使奈麻諸父大舍橫川
006_0098_a_24L還國俄見海中異人出拜請曰願師

006_0098_b_01L저를 위해 절을 짓고 항상 참된 깨달음을 강의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수승한 과보를 얻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므로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하였다. 스님이 갔다 오신 지 여러 해가 되니 늙은이나 아이들이나 모두 기뻐하였고, 왕 또한 면전에서 경건하게 이야기하며 부처님처럼 우러러 모셨다.
마침내 삼기산 옛집에 이르렀다. 밤 12시에 신이 와서는 “갔다 왔는데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감사하며 말하기를, “당신의 은혜로운 보호 덕택에 모든 일이 원대로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10) 신은 말하기를, “나는 한결같이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습니다. 항차 스님은 해룡海龍과 절을 짓기로 약속하였는데 그 용도 지금 또한 함께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물어 말하기를, “어느 곳이 좋겠습니까?”라고 하니, 신이 말하기를, “저 운문산雲門山에 마땅히 까치들이 쪼아 놓은 땅이 있을 것이니 바로 그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스님과 신과 용이 함께 가서 과연 그 자리를 발견하고는 이에 땅을 팠더니 석탑이 나왔다. 바로 절을 짓고 이름을 운문이라 하고 머물렀다.11)
신도 그윽한 보호를 그만두지 않았다. 하루는 신이 와서 알리며 말하기를, “나는 죽을 날(大期)이 멀지 않았으니 원컨대 보살계를 받아 저승길의 밑천으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에 보살계를 주고 나서, 그로 인해 대대로 서로 제도하겠다는 서약을 맺었다. 또 이르기를, “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스님은 먼동이 틀 때 동방을 바라보면 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큰 팔이 구름을 뚫고 하늘에 닿아 있었다. 신은 말하기를, “스님은 내 팔을 보았습니까? 비록 이런 몸은 갖고 있더라도 무상無常12)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 날이 되면 아무 곳에서 죽을 것이니 오셔서 기약 없는 이별을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때가 되어 가서 보니 한 마리 털 빠진 검은 살쾡이가 숨을 헉헉대다가 죽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신이었다.13)
서해의 용녀가 항상 따라다니며 청강하였는데 마침 큰 가뭄이 들어 스님은 이르기를, “네가 우리나라에 비를 뿌려 주면 좋겠구나.”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상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제가 속이고 비를 내리면 반드시 하늘에 죄를 짓게 될 것이니 빌 곳조차 없어집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말하기를, “내가 힘써 면할 수 있게 해 주겠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경주 남산에 아침 무지개가 피더니 이른 아침 식전 내내 비가 내렸다. 이때에 하늘이 우레 소리를 진동하며 바로 벌주려 하였다. 용이 위급함을 고하자 스님은 용을 강의하는 책상 밑에 숨기고 경을 강의하였다. 상제의 사신이 와서 고하기를, “저는 상제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스님이 도망간 자를 위해 책임지고 모으셨으므로

006_0098_b_01L爲我剏寺常講眞詮令弟子得勝報也
006_0098_b_02L師頷之師往來累稔老幼相忻王亦
006_0098_b_03L面申虔敬仰若能仁遂到三*岐山舊
006_0098_b_04L午夜彼神來問往返如何謝曰
006_0098_b_05L爾恩護凡百適願神曰吾固不離扶
006_0098_b_06L且師與海龍結剏寺約其龍今亦
006_0098_b_07L偕來師問之曰何處爲可神曰于彼
006_0098_b_08L雲門6) [106] 當有群鵲啄地卽其處也
006_0098_b_09L7)朝師與神龍偕歸果見其地卽崛地
006_0098_b_10L有石塔存焉便剏伽藍額曰雲門而住
006_0098_b_11L神又不捨冥衞一日神報曰吾大
006_0098_b_12L期不久願受菩薩戒爲長往之資
006_0098_b_13L乃授訖因結世世相度之誓又謂曰
006_0098_b_14L神之形可得見乎師可遲明望東方
006_0098_b_15L有大臂貫雲接天神曰師見予臂乎
006_0098_b_16L有此神未免無常當於某日死於某
006_0098_b_17L請來訣別師趁期往見一秃黑狸
006_0098_b_18L8)吱吱 [107] 而斃卽其神也西海龍女常隨
006_0098_b_19L聽講適有大旱師曰汝幸雨境內
006_0098_b_20L上帝不許我若謾雨必獲罪於天
006_0098_b_21L無所禱也師曰吾力能免矣俄而南山
006_0098_b_22L朝隮崇朝而雨時天雷震卽欲罰之
006_0098_b_23L龍吿急師匿龍於講床下講經天使來
006_0098_b_24L吿曰予受上帝命師爲逋逃者主萃

006_0098_c_01L명령을 수행할 수가 없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스님은 뜰의 배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용이 변해 이 나무가 되었으니 당신은 저것을 치십시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배나무에 벽력을 치고 떠났다. 용이 이에 나와서 사례하고 그 나무가 자기를 대신해 벌을 받은 것에 대해 손을 내밀어 어루만져 주니 그 나무는 바로 소생하였다.14)
진평왕 30년(608)에 왕은 고구려가 국경을 자주 침범하는 것을 근심하여 수나라 군대를 청해 적국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스님에게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명하였더니, 스님이 말하기를, “스스로 살기 위해 남을 멸하는 것은 사문沙門의 행할 바가 아닙니다만 빈도貧道가 대왕의 땅에 살며 대왕의 옷과 밥을 쓰고 있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서신을 지어 보냈다.15)
스님은 성품이 소탈하면서도 위엄이 있으며, 정도 많고 널리 사랑하였고, 말씀할 때는 항상 미소를 머금었으며 화를 내는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았다. 전표牋表나 계서啓書를 쓸 때는 모두 흉금을 털어 냈으며, 온 나라가 마음을 다해 받들었다. 나라를 치유하도록 맡기니 근기에 맞게 교화를 펴서 후대에까지 본을 보였다.16)
35년(613)에 황룡사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어 복전福田이 되는 경전 강의에 불러 모으니 스님이 제일 높은 수좌가 되었으며,17) 평상시에는 임시로 가실사加悉寺에 거처하면서 참된 깨달음에 대해 강의하였다.18)
사량부沙梁部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은 문에 이르러 옷깃을 여미며 말하기를, “세속의 선비가 몽매하여 지식이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 해 주시면

006_0098_c_01L不得成命奈何師指庭中梨木曰彼變
006_0098_c_02L爲此樹汝當擊之遂震梨而去龍乃
006_0098_c_03L9)謝禮以其木代己受罰引手撫之
006_0098_c_04L其樹卽蘇眞平王三十年王患10)句高
006_0098_c_05L [108] 屢侵封疆欲請隋兵以征敵國命師
006_0098_c_06L修乞師表師曰求自存而滅他非沙
006_0098_c_07L門之行也然貧道在大王之土地費大
006_0098_c_08L王之衣食敢不11)唯命是從乃述以聞
006_0098_c_09L師性虛閑情多汎愛言常含笑慍結
006_0098_c_10L不形12)牋表啓書竝出自胸襟擧國
006_0098_c_11L傾奉委以13) [109] 乘機敷化垂範後代
006_0098_c_12L三十五年皇龍寺設百座會邀集福田
006_0098_c_13L講經師爲上首常僑居14)加悉寺 [110] 講演
006_0098_c_14L眞詮沙梁部貴山箒15) [111] 詣門摳衣吿
006_0098_c_15L俗士顓蒙無所知識願賜一言
006_0098_c_16L「▣住從」作「從久住」{乙}「祥」作「詳」{乙}
006_0098_c_17L「二」作「三」{乙}
「開」上有註曰事見續高僧傳
006_0098_c_18L卷之十三及三國遺事卷四{底}{甲}
「平」下有
006_0098_c_19L「王」{乙}
「小」作「山」{乙}·注曰小或北字{底}{甲}
006_0098_c_20L
「朝」作「旦」{乙}「吱吱」作「吸吸」{乙}「謝
006_0098_c_21L禮」作「禮謝」{乙}
「句高麗」作「高句麗」{乙}
006_0098_c_22L「唯」作「惟」{乙}
「牋」作「箋」{乙}註曰治原
006_0098_c_23L本作詔續傳十三改之{底}{甲}
註曰寺號遺事
006_0098_c_24L四作嘉瑟岬注云或作加西又嘉栖皆方言也
006_0098_c_25L岬俗云古尸故或云古尸寺猶言岬寺也今雲
006_0098_c_26L門寺東九千歩許有加西岬或云嘉瑟峴峴之北
006_0098_c_27L洞有寺基臺是也{底}{甲}
「頂」作「項」{乙}·註曰
006_0098_c_28L頂遺事四作項貴山箒頂二賢士之名{底}{甲}

006_0099_a_01L평생의 교훈으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보살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10가지가 있다. 그대들은 신하 된 자로서 아마도 능히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세속에 맞는 5계가 있다. 첫째는 임금을 충忠으로 섬기며, 둘째는 부모를 효孝로써 섬기며, 셋째는 벗을 믿음으로 사귀며, 넷째는 전장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않으며, 다섯째는 살생을 할 때는 가려서 해야 한다는 것이니, 그대들은 행함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산이 말하기를, “다른 것은 명을 받들겠습니다만, 다만 살생을 하되 가려서 하라는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말하기를, “봄과 여름 및 육재일六齋日19)에는 살생을 해서는 안 되니 이는 때를 택하는 것이요, 부리는 가축을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소ㆍ말ㆍ닭ㆍ개 등을 이름이고, 미물을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기가 한입도 안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종류를 가리는 것이다. 이 외에 비록 소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많이 죽이는 것만은 해서는 안 되니, 이것을 세속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산 등은 지키며 어기지 않았다.20)
후에 국왕이 병에 전염되었는데 의원들이 치료해도 낫지 않으므로 스님에게 설법을 청했다. 궁중에 맞아들여 편안히 모셔 강의하게 하기도 하고 설법하게 하기도 하니 왕은 성심성의로 신심을 내며 받들었다. 초저녁에 스님의 머리와 목 부분에 걸쳐 둥근 해와 같은 금빛이 보이니 궁인들도 함께 보았다. 왕의 병환은 곧 나았다.21)
법랍이 높아진 후에는 가마를 타고 입궁하였으며, 의복과 약재는 모두 왕이 손수 마련하여 행하면서 복이 내리기만 바랐다. 보시로 받은 재물은 희사하여 절을 운영하는 데에 충당하였으므로 그러고 남은 것은 의복과 발우뿐이었다. 이와 같이 정법을 성대하게 펴고 승속을 모두 이끌며 잘되도록 바로잡아 주었다. 입적할 때에 왕이 친히 임종을 지키며 위로하며, 누대에 법을 남겨 줄 것과 이 나라의 백성을 구제할 것을 아울러 부탁하니, 복을 부르는 방법을 말씀해 주었다. 건복建福 58년(641)에, 7일도 지나지 않아 청정하고도 간절한 분부를 남기고 단정히 앉아 주석한 곳에서 임종하였다. 황룡사 동북쪽 허공 가운데 음악 소리가 가득 찼고 기이한 향기가 절 내를 가득 채웠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경사로 여겼다. 장례의 도구와 장식과 법도는 왕의 장례와 같이하였다. 세납이 99세였으니, 곧 당나라 정관貞觀 4년(630)22)이었다.23)
뒤에 태 속에서 죽은 아이가 있어, 덕이 있는 사람의 무덤 곁에 묻으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세속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몰래 그것을 묻었더니, 그날에

006_0099_a_01L終身之誡師曰有菩薩戒其別有十
006_0099_a_02L若等爲人臣子恐不能行今有世俗五
006_0099_a_03L一曰事君以忠二曰奉親以孝
006_0099_a_04L交友以信四曰臨戰不退五曰殺生
006_0099_a_05L有擇若等行之無忽貴山曰他則旣
006_0099_a_06L受命矣但不曉殺生有擇師曰春夏月
006_0099_a_07L及六齋日不殺是擇時也不殺使畜
006_0099_a_08L謂牛馬鷄犬不殺細物謂肉不足一臠
006_0099_a_09L是擇物也過此1) [112] 2) [113] 3) [114] 但不求
006_0099_a_10L多殺此可謂世俗之善戒貴山等守
006_0099_a_11L而如墮後國王染患醫治不4) [115] 請師
006_0099_a_12L說法入宮安置或講或說王誠心信
006_0099_a_13L初夜見師首領金色如日輪宮人共
006_0099_a_14L王疾立効法臘旣高乘輿入內
006_0099_a_15L服藥石竝是王手自營用希專福
006_0099_a_16L施之資捨充營寺惟餘衣鉢以此盛
006_0099_a_17L宣正法誘掖道俗將終之際王親執
006_0099_a_18L囑累遺法兼濟5)斯民 [116] 爲說徵6) [117]
006_0099_a_19L建福五十八年不豫經七日遺誡淸
006_0099_a_20L端坐終于所住皇隆寺東北虛中
006_0099_a_21L音樂盈空異香充院合國悲7)葬具
006_0099_a_22L羽儀同於王禮春秋九十九卽貞觀
006_0099_a_23L四年也後有兒胎死者聞諺傳埋于有
006_0099_a_24L德人墓側子孫不絕乃私瘞之卽日

006_0099_b_01L태아의 시체에 벼락이 쳐서 무덤 밖으로 내쳐졌다. 삼기산의 부도는 지금도 남아 있다.24)
수제자 원안圓安도 신라 사람이다. 근기와 재능이 날카롭고 뛰어났으며, 성격이 두루 유람하기를 좋아하고 (원광 법사를) 우러러 사모하며 마음을 집중해 구도하였다. 마침내 북으로 구도九都(丸都)25)까지 갔으며, 동쪽으로는 불내不耐(지금의 安邊)를 보았고, 또 서연西燕(384~395)과 북위北魏(386~534)를 유람하였다. 후에 당나라 서울 장안까지 나가 그 나라의 풍속에 두루 통하고, 여러 경론을 찾아 핵심이 되는 내용을 섭렵하고, 자세한 뜻까지도 맑게 통찰했다. 원광의 유업을 훌륭하게 계승하여 도로써 평소에 유명하였으므로 특진特進26) 소우蕭瑀27)가 권청하여 남전藍田28)에 진량사津梁寺를 지어 거하게 하고 사사四事29)를 공급하였다. 그 임종에 대해서는 모른다.30)
 찬하여 말한다. 옛날에 원공遠公31)은 세속의 경전을 버리지 않아 강론할 때 『노자』, 『장자』 등의 책들을 인용하여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현묘한 뜻을 깨닫고 이해하게끔 하였다. 원광 법사가 가르친 세속오계와 같은 것은 아마도 학문의 내외에 통달하고 근기에 따라 설법한 공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살생을 하되 가려서 해야 한다는 것은, 저 은나라의 탕왕이 세 방향으로 성글게 새그물을 터놓은 일과 공자가 잠든 새를 주살로 쏘지 않은 일을 이른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또 그 천신을 감동시키고 천사를 돌려보냈으니, 도력을 진실로 짐작할 만하다.
4. 안함安含호승胡僧 2인, 한승漢僧 3인, 담화曇和, 안홍安弘
승려 안함32)은 속성은 김씨이며 시부詩賦 이찬의 손자이다. 나면서부터 체득하고 깨쳤으며, 성품이 겸허하고 소탈하였다. 의지가 굳고 깊고 훌륭한 도량은 넓으며 깊이가 무궁하였다. 일찍이 방랑하며 세상을 유람하며 풍속을 살피고 널리 교화하는 데 뜻을 두었다. 진평왕 22년(600)에 고승 혜숙惠宿33)과 도반이 되기를 약속하고, 입학승들을 본받아 뗏목을 타고 이포진泥浦津으로 가다가 섭도涉島 부근에서 갑자기 풍랑을 만나 뗏목을 되돌려서 이곳 해안가에 정박하였다. 이듬해(601) 교지에 법기法器를 이룰 수 있는 자를 뽑아 보내 중국에 들어가 학문하게 하였다. 마침내 법사에게 명하여 입당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조공하러 가는 신라 사신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멀리 중국의 조정에 이르렀다.
천왕인 황제 수문제隋文帝가 불러

006_0099_b_01L震胎屍擲于塋外三岐山浮8)至今
006_0099_b_02L存焉

006_0099_b_03L
高弟圓9) [118] 亦新羅人機鋒穎銳性希
006_0099_b_04L歷覽仰慕幽10) [119] 遂北趣九都東觀不
006_0099_b_05L又遊西燕北魏後展帝京備通方
006_0099_b_06L尋諸經論跨轢大綱洞淸纖旨
006_0099_b_07L11)軌光 [120] 以道素有聞特進12) [121] 瑀請
006_0099_b_08L住所造藍田津梁寺供給四事不知所
006_0099_b_09L

006_0099_b_10L
賛曰昔遠公不廢俗典講論之際
006_0099_b_11L引莊老連類能使人悟解玄旨若光
006_0099_b_12L師之13) [122] 世俗戒蓋學通內外隨機
006_0099_b_13L14) [123] 法之効也然殺生有擇者夫豈
006_0099_b_14L湯網去三面仲尼弋不射宿之謂耶
006_0099_b_15L又其動天神返天使則道力固可知
006_0099_b_16L也已

006_0099_b_17L
釋安含俗姓金詩賦伊15) [124] 之孫也
006_0099_b_18L而覺悟性乃冲虛毅然淵懿之量
006_0099_b_19L窮涯畛嘗浪志遊方觀風16) [125] 眞平
006_0099_b_20L二十二年約與高僧惠宿爲伴擬將乘
006_0099_b_21L桴泛泥浦津過渉島之下忽値風浪
006_0099_b_22L回泊此濱明年有旨簡差堪成法器者
006_0099_b_23L入朝學問遂命法師允當行矣乃與
006_0099_b_24L聘國使同舟渉海遠赴天庭天王引

006_0099_c_01L접견하고는 크게 기뻐하며 칙명으로 대흥성사大興聖寺34)에 머물게 하니, 열흘이나 달포 만에 그윽한 뜻을 깨우쳤다. 이에 화산華山에서 선장仙掌까지 역이 10개나 되는 여정을 반나절도 안 되어 갔다 왔으니 누가 저녁 북소리를 들었겠는가? 진령秦嶺에서 제궁帝宮까지의 땅을 유성처럼 빠르게 하룻밤에 갔다 오니 어찌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었겠는가? 십승十乘35)의 비법과 법화法華의 현의玄義36)의 경문을 5년 동안 자세하게 보았다. 그 뒤 27년(605)에 우전于闐37)의 사문 비마진제毘摩眞諦와 사문 농가타農加陀 등과 함께 신라로 돌아왔으니, 서역의 호승이 직접 계림雞林에 온 것은 아마도 이때부터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찬술한 『의상전義湘傳』에 이르기를 “의상은 진평왕 건복 42년(625)에 태어났다. 이 해에 동방의 성인 안홍安弘 법사가 서역인 삼장 세 사람 그리고 중국인 승려 두 사람과 함께 당나라에서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주에 이르기를, “북천축 오장국烏萇國의 비마라진제의 나이는 44세, 농가타의 나이는 46세, 마두라국摩豆羅國의 불타승가佛陀僧伽의 나이는 46세로 52개국을 경유하여 비로소 중국 땅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동쪽으로

006_0099_c_01L皇情大悅勅配於大興聖寺居住
006_0099_c_02L旬月之間洞解玄旨於是17)▼(荔/十) [126] 山仙掌
006_0099_c_03L十驛之程卽日午行廻誰聞夕鼓
006_0099_c_04L嶺帝宮千里之地卽星馳陟降豈待晨
006_0099_c_05L十乘秘法玄義眞文五稔之中
006_0099_c_06L不該覽越二十七年爰與于闐沙門毘
006_0099_c_07L摩眞諦沙門農加陀等俱來至此西
006_0099_c_08L域胡僧直到雞林蓋自玆也崔致遠
006_0099_c_09L所撰義18) [127] 傳云相眞平建福四十二年
006_0099_c_10L受生是年東方聖人安弘法師與西國
006_0099_c_11L19) [128] 三藏漢僧二人至自唐注云北天
006_0099_c_12L竺烏萇國毘摩羅眞諦年四十四農伽
006_0099_c_13L年四十六20) [129] 豆羅國佛陀僧伽
006_0099_c_14L四十六經由五十二國21) [130] 漢土遂東
006_0099_c_15L「雖」作「惟」{乙}▣作「其」{乙}▣作「用」
006_0099_c_16L{乙}·註曰二空字宜作有用二字遺事作唯其所用
006_0099_c_17L{底}{甲}
▣作「損」{乙}·註曰空字據遺事四及續僧
006_0099_c_18L十三宜作損{底}{甲}
註曰斯民遺事四作民斯{底}
006_0099_c_19L{甲}
「詳」作「祥」{乙}·註曰詳遺事四作祥{底}{甲}
006_0099_c_20L
「慶」作「警」{乙}「屠」作「圖」{乙}注曰安
006_0099_c_21L原本作光今依本傳改之{底}{甲}
「永」作「求」
006_0099_c_22L{乙}·註曰永遺事續傳俱作求{底}{甲}
「軌光」作
006_0099_c_23L「軓先」{乙}
「肅」作「蕭」{乙}「論」作「諭」{乙}
006_0099_c_24L
註曰設或說字{底}{甲}「飱」作「飡」{乙}「私」
006_0099_c_25L作「弘」{乙}
「▼(荔/十)」作「華」{乙}註曰相恐想字
006_0099_c_26L{底}{甲}
「二」作「三」{乙}「摩」無有{乙}「始」
006_0099_c_27L下有「至」{乙}·註曰始下恐脫入字{底}{甲}

006_0100_a_01L와서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旃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해 내니, 신라의 승려 담화曇和가 받아썼다. 얼마 안 가 중국 승려들은 표表를 올려 중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하므로 왕이 허락하고는 보냈다.”라고 하니 여기서 안홍이란 아마도 이 화상일 것이다.
또 『신라본기』를 살펴보면 “진흥왕 37년(576)에 안홍이 진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구하고, 호승胡僧 비마라毘摩羅 등 두 사람과 돌아와 『능가경楞伽經』과 『승만경勝鬘經』 그리고 부처님 사리를 진상하였다.”라고 한다.38) 진흥왕 말년에서 진평왕의 건복 연간까지는 서로 50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어찌 삼장이 온 전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안함과 안홍은 실제로는 두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함께한 삼장이 다르지 않고 그 이름도 다르지 않으므로 이제 합쳐서 전기를 만들었다. 또 서역의 삼장 법사들이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다.
화상은 신라로 돌아온 뒤로 예언서(讖書) 한 권을 지었는데, 글자와 도장이 이합집산되어 있어 글공부한 자들도 헤아리는 자가 드물었고 근본 종지와 요강이 그윽하게 숨어 있어 이치를 탐구하는 이들도 헤아리기가 어려워 마치 부엉이와 올빼미처럼 비슷한 새들을경문의 글이 희미하여 자세하지 않다. 풀어놓은 것과 같았다. 또 ‘첫 번째 여왕(선덕여왕)을 도리천忉利天에 장사 지낸 일,39) 천 리나 되는 먼 곳에 나가 싸우던 군사가 패한 일, 사천왕사가 완공된 일,40) 왕자가 고향에 돌아온 해,41) 대군이 왕조를 융성하게 한 해42)’가 모두 멀고 먼 미래의 얘기인데도 그 기록이 목도한 것처럼 밝아서 어긋나거나 빠짐이 없었다.
선덕왕 9년(640) 9월 23일에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입적하니 향년 62세였다. 이달에 신라 사신이 중국으로부터 오다가 법사와 해후하였는데 푸른 파도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흐뭇한 표정으로 서방정토를 향해서 가고 계셨다. 진실로 이른바 하늘을 날아오르기를 계단을 오르듯 하고, 물 위에 앉기를 땅 위를 걷듯 하였다.
한림翰林 벼슬에 있던 설모薛某가 조서를 받들어 비명을 찬술하였다. 그 비명에 이르기를, “황후(선덕여왕)를 도리천에 장사 지내고, 사천왕사를 건립하였는데 괴이하게도 새가 밤새도록 우니, 군사들이 다 아침에 죽었다. 왕자(김인문)가 관문을 넘어 중국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뵙고 5년간 외지에 있다가 30세에 돌아오니,43) 부침浮沈이 있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저와 내가 어찌 면하겠는가? 나이 62세에

006_0100_a_01L住皇龍寺譯出1) [131] 檀香火星光妙
006_0100_a_02L女經鄕僧曇和筆授未幾漢僧上表
006_0100_a_03L乞還中國王許而送之則安弘者殆和
006_0100_a_04L尙是也又按新羅本記眞興王三十七
006_0100_a_05L安弘入陳求法與胡僧毘摩羅等二
006_0100_a_06L人廻上楞伽勝鬘經及佛舍利自眞
006_0100_a_07L興末至眞平建福相去幾五十年
006_0100_a_08L三藏來之前却如是或恐安含安弘
006_0100_a_09L有二人然其所與三藏不殊而厥名不
006_0100_a_10L今合而立傳又未詳西國三藏
006_0100_a_11L留所終和尙返國以後作讖書一卷
006_0100_a_12L印離合2) [132] 者穻 [9] 宗途幽隱索理
006_0100_a_13L者難究如云鵂鶹鳥3) [133] 文隱
晦未詳散
又云
006_0100_a_14L第一女主葬忉利天及千里戰軍之敗
006_0100_a_15L四天王寺之成王子還鄕之歲大君盛
006_0100_a_16L明之年皆懸言遙記的如目覩了無
006_0100_a_17L差脫善德王九年九月二十三日終于
006_0100_a_18L萬善道場享年六十二是月鄕使
006_0100_a_19L漢而邂逅法師敷座于碧浪之上怡然
006_0100_a_20L向西而去眞所謂騰空步階坐水行地
006_0100_a_21L者矣翰林薛某奉詔撰碑其銘云
006_0100_a_22L葬忉利建天4) [134] 恠鳥夜鳴兵衆旦
006_0100_a_23L王子渡關入朝聖顏五年限外
006_0100_a_24L十而還浮沈輪轉彼我奚免年六十

006_0100_b_01L만선萬善 도량에서 입적하니, 사신이 바닷길로 돌아오다가 스님 또한 교차하여 만나니 물 위에 단정히 앉아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라고 하였다.비문에 이끼가 끼고 침식되어 10자가 이지러졌으며 네다섯 자는 없어졌다. 대략 볼 수 있는 것을 추려 비슷하게 문장을 만들었다. 아마도 못 읽는 다른 글자를 기다리지 않아도 또한 그가 남긴 자취와 비슷할 것이다.
 찬하여 말한다. 스님의 신통과 해탈은 떠나고 머무름에 자재하니 대보살과 같은 스님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어찌 그 사이에 글이나 말로써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중국 조정에 들어가 처음으로 서역의 삼장과 함께 손수 진원眞源을 나누고 법의 고동을 불고 법의 비를 뿌려 강물이 바다 구석까지 적시듯이 참으로 부처의 법을 넓힌 성인이었다. 경전의 글자를 세 번 옮겨 적어 아마도 까마귀 오烏 자가 말 마馬 자로 되듯 나는 안함의 함과 안홍의 홍 두 글자에 착란이 있었을 것이라 의심한다.
5.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44)
승려 아리야발마는 신통한 지혜가 있어 홀로 깨쳤으며, 모습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예전에 신라에서 중국에 들어가 스승을 찾아 더 설명을 청하고자 할 때에 멀다고 찾아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쉬면서도 여러 하늘을 맘대로 올라갔다. 오직 당대에 규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내세의 인연을 만들고자 하였다.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것에 간절히 뜻을 두어 먼 곳이라도 유람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드디어 서인도에서 구법하다가 멀리 총령葱嶺에까지 올랐으며, 기이한 명승지를 찾아다녔으며, 부처님의 자취를 두루 다니며 참배하였다. 오랜 소원은 이미 이뤘으나 노자와 식량이 떨어져 이에 나란다사那爛陀寺에 머무른 지 얼마 안 가 입적하였다.
이때에 고승 혜업惠業이 보리사菩提寺에 주석하였고, 현각玄恪과 현조玄照가 대각사大覺寺에 이르렀으니 위의 네 사람은 모두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천축에 갔던 것이다. 모두 다 수승한 인因을 심고, 드디어 부처의 종자를 풍부히 하고, 본국을 멀리 하직하고 가서 천축의 풍속을 보았다. 동서에 무성한 명예를 떨치고 망극할 정도로 커다란 기쁨을 드리웠으니, 마음이 크고 상근기의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연보를 살펴보면, 현장삼장玄奘三藏과 비슷하니 함께 서역을 향해 간 듯하나, 다만 누가 먼저 어느 해였는지를 모를 뿐이다.
6. 혜업惠業
승려 혜업은 기량이 깊고 넓으며, 기개가 엄숙하고 원대하였다. 험준한 바위와 같은

006_0100_b_01L終于萬善使還海路師亦交遇
006_0100_b_02L坐水上指西而去碑文苔蝕字缺十喪四五
略取可觀擬5) [135] 成文

006_0100_b_03L不待他亦髣髴其遺跡矣

006_0100_b_04L
賛曰師之神通解脫去住自在
006_0100_b_05L菩薩之閑事豈容筆舌於其間哉
006_0100_b_06L入朝始與西域三藏手派眞源吹法
006_0100_b_07L螺而雨法雨河潤海陬眞弘法之聖
006_0100_b_08L6) [136] 字經三寫烏焉成馬予疑
006_0100_b_09L含弘二字之有一錯焉

006_0100_b_10L
釋阿離耶跋摩神智獨悟形貌異倫
006_0100_b_11L始自新羅入于中國尋師請益無遠
006_0100_b_12L7)瞰憩冥壑凌臨諸天非惟規範
006_0100_b_13L當時亦欲陶津來世志切遊觀不殫
006_0100_b_14L8) [137] 遂求法於西竺乃遐登於葱嶺
006_0100_b_15L搜奇討勝歷見聖蹤夙願已圓9)
006_0100_b_16L時絕乃止那爛陀寺未幾終焉是時
006_0100_b_17L10)11) [138] 住菩提寺玄恪玄照
006_0100_b_18L大覺寺此上四人竝於貞觀年中
006_0100_b_19L12)此行 [139] 共植勝因聿豊釋種遙謝舊
006_0100_b_20L往見竺風騰茂譽於東西垂鴻休
006_0100_b_21L於罔極非大心上輩其何預此乎
006_0100_b_22L年譜似與玄奘三藏同發指西國
006_0100_b_23L不知第何年耳

006_0100_b_24L
釋惠業器局冲深氣度凝13) [140] 14)巉巖

006_0100_c_01L용모와 위의에, 깎아지른 산처럼 우뚝한 풍모와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변방 신라의 땅을 하직하고 드디어 중국에 들어가, 드디어 정관 연간(627~649)에는 서역을 유람하면서 광활한 사막을 건너 설산의 높고 험한 봉우리에 올랐다. 청정하게 밝아오는 새벽마다 깊은 숲속에 잠복하고, 밝은 달이 하늘에 빠져들면 이내 먼 길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삶을 가볍게 여기며 불법을 따랐으며 불법을 널리 펴는 데 간절한 뜻을 두었다. 마침내 보리사菩提寺로 가서 부처님의 자취를 찾아보고 예배하였다. 또 나란다사那爛陀寺에서는 자취가 남아 있는 거처에 참으로 오랫동안 머물렀다. 『유마경(淨名經)』을 읽기를 청하자 당나라의 번역본들을 두루 조사하여 통달하여 조리를 모두 꿰었다.45) 『양론梁論』46) 하권의 기록에 이르기를, “부처님 치아 사리가 모셔져 있는 나무 아래서 신라 승려 혜업이 필사하여 기록한다.”라고 하였다. 『전』에 이르기를 “혜업이 이 절에서 입적하니 나이가 60여 세 정도였다. 필사한 범본은 모두 나란다사에 있다.”라고 하였다.
7. 혜륜惠輪
승려 혜륜은 신라 사람으로 법명은 반야발마般若跋摩이다.혜신惠申 또는 혜갑惠甲이라 한역한다. 본국에서 출가한 뒤로 성스러운 곳(인도)을 앙모하였다. 배를 띄워 민월閩越(지금의 福建省)을 지나, 건너고 걸어서 장안에 이르렀다. 추위와 더위를 모두 겪고 어려움과 위험을 다 겪었다. 조칙을 받들어 현조玄照 법사를 따라 서쪽으로 갈 때 시봉을 담당하여 사닥다리를 오르고 험한 곳에 판자를 두어 건넜다. 서역에 가고 나서는 부처님의 기이한 발자취를 편력하고 예배했으며, 암마라파국菴摩羅波國의 신자사信者寺에 머물렀다. 머무른 지 10년 가까이 되자 동쪽 끝의

006_0100_c_01L容儀戌削風骨直辭邊壤遽入中華
006_0100_c_02L遂於貞年中往遊西域渉流沙之廣
006_0100_c_03L登雪嶺之嶔岑每以淸暉啓曙
006_0100_c_04L潜伏幽林皓月淪霄乃崩彼永路
006_0100_c_05L生徇法志切宣通遂往菩提寺觀禮
006_0100_c_06L聖蹤又於那爛陀寺寄跡棲眞久之
006_0100_c_07L請讀淨名經15)撿唐本淹通綸貫
006_0100_c_08L論下記云在佛齒樹下新羅僧惠業寫
006_0100_c_09L16)傳云 [141] 業終于是寺年將六十餘矣
006_0100_c_10L所寫梵本竝在那爛陀寺焉

006_0100_c_11L
釋惠輪新羅人梵名般若跋摩唐云
17) [142]

006_0100_c_12L自本國出家翹心聖境泛舶而凌閩越
006_0100_c_13L涉步而屆長安寒暑備受艱危罄盡
006_0100_c_14L奉勅隨玄照法師西行充侍飛梯架險
006_0100_c_15L旣至西國遍禮奇蹤寓居菴摩羅18) [143]
006_0100_c_16L國信者寺淹住十載近住次東邊
006_0100_c_17L「旃」作「栴」{乙}「之」作「文」{乙}「碑」作
006_0100_c_18L「經」{乙}
「天」作「王」{乙}·註曰第二天字恐王字
006_0100_c_19L{底}{甲}
「以」作「似」{乙}「字」無有{甲}{乙}
006_0100_c_20L「參」作「叅」{乙}次同
「遊」作「遠」{乙}「糧」作
006_0100_c_21L「粮」{乙}
▣作「僧」{乙}·註曰空字恐僧字{底}{甲}
006_0100_c_22L
「專」作「惠」{甲}{乙}註曰新羅僧八人入竺事
006_0100_c_23L見大唐求法高僧傳{底}{甲}
「深」作「遠」{乙}
006_0100_c_24L「巉」作「峻」{乙}
「撿」作「檢」{乙}註曰事見
006_0100_c_25L求法傳{底}{甲}
「甲」作「申」{乙}·註曰甲原本作
006_0100_c_26L申非也{底}{甲}
註曰波求法傳作跛宋元明三
006_0100_c_27L本作跋國屬中天或可{底}{甲}

006_0101_a_01L건타라국犍陀羅國의 산다사山茶寺에 머물렀다. 재물이 풍부하고 공양도 잘 갖춰졌으니 나머지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 북방의 호승으로 왕래하는 자는 다 이 절에 머물렀으니 벌떼처럼 운집하여 각기 법문法門을 닦았다. 혜륜은 범어를 잘하게 된 후로는 『구사론俱舍論』을 조용히 가까이하였다. (의정삼장이) 오셨을 때도 여전히 건재하였으니, 이미 나이는 40세에 가까웠다. 자세한 것은 의정삼장義淨三藏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갖춰져 있다.47)
8. 현각玄恪,현조玄照와 무명이인亡名二人
승려 현각은 신라 사람이다. 의연하게 홀로 굳건하여 커다란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성품은 말하기를 좋아하여 근기에 맞게 감응시켜 당대 사람들은 그를 불 속에 핀 연꽃(火中芙蓉)이라 하였다.48)
항상 변방에 태어나 중화中華를 보지 못함을 한탄하여 중국에 대한 풍문이라도 들으면 기뻐하였다. 뱃길로 중국에 이르러 동쪽 나라에서 넝쿨이 자라나 드디어 서쪽을 품게 됨에 미소지었으나 마음으로 이제야 중간에 획을 그은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두루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데 뜻을 두었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달이 가듯이 밤낮으로 운에 맡겨 전전하였다. 혹은 높은 낭떠러지가 사방에 모여 있어 새나 날아 지날 수 있는 험준한 길이 구름과 나란하였고 혹은 빙판이 천 리 길이나 이어져 바람처럼 가고 구름처럼 눕기도 하였다. 마침내 현조 법사와 함께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역의 대각사大覺寺에 이르렀다. 불타오르는 사막길을 유람했으며 그림자도 없는 중천축국(無影之邦)49)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책을 짊어지고 타지에서 열심히 연구하기를 마치 옥을 다듬어 그릇을 만드는 듯했다. 40세가 지나자 병이 들어 죽었다.
현조玄照50)도 신라의 고승이다. 현각과 함께 시종 같은 길을 걸었으나 그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또한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장안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에 닿았으나 병에 걸려 모두 죽었다.51)
9. 현유玄遊52)승철僧哲
승려 현유는 고구려 사람이다. 성품이 소탈하고 화합하며 타고난 자질은 따뜻하고 고아하며, 자리와 이타의 두 가지 이익에 마음을 두고, 찾아가 구도하는 것을 중히 하는 데 뜻을 두었다. 잔을 타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깊은 골짜기에 집을 짓기도 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 승철선사僧哲禪師를 예로써 섬겨 옷깃을 여미며 부처님의 깊은 뜻을 여쭈었다.
승철은 성인의 자취를 사모하여 서역으로 배를 띄워 인연 따라 가서 교화하였으며, 순례하며 두루 돌아다니다 동인도로 돌아왔다. 유람하면서 언제나 고승[附鳳]들을 따라다니다가 그것을 인연으로 저곳에 머물렀다. 지혜의 횃불이 빨리 밝아졌고, 선禪의 가지도 빨리 무성해져 끝까지 궁구하여 기량을 꽉 채웠다.

006_0101_a_01L陀羅山茶寺1)貲產豊饒供養飡設
006_0101_a_02L莫加也其北方胡僧往來者皆住此寺
006_0101_a_03L蜂屯雲集各修法門輪旣善梵言
006_0101_a_04L閑俱舍來日尙在年向四十矣具如
006_0101_a_05L義淨三藏求法高僧傳中

006_0101_a_06L
釋玄恪新羅人嶷然孤硬具大知見
006_0101_a_07L性喜講說赴感隨機時人指爲火中芙
006_0101_a_08L蓉也2)歎受生邊地未覩中華聞風
006_0101_a_09L而悅 [10] 道乃屆3) [144] 東圻 [11] 遂含西笑
006_0101_a_10L4)慚中5) [145] 志要歷*參比猶月行
006_0101_a_11L任運而轉或層岩四合鳥道雲齊
006_0101_a_12L或連氷千里風行雲臥遂與玄照法師
006_0101_a_13L相隨至西乾大覺寺遊滿6)焰之路
006_0101_a_14L無影之邦負笈精硏琢玉成器年過
006_0101_a_15L不惑遇疾乃亡7)玄照 [146] 亦新羅之高
006_0101_a_16L士也與恪同科始終一揆未詳所卒
006_0101_a_17L8)復有新羅僧二人莫知其名發自長
006_0101_a_18L泛泊至室利佛逝國遇疾俱亡

006_0101_a_19L
釋玄遊句高麗人叶性虛融禀質溫
006_0101_a_20L意存二利志重詢求乘盃泝流
006_0101_a_21L室幽壑入唐禮事僧哲禪師摳衣禀旨
006_0101_a_22L哲思慕聖蹤泛舶西域適化隨緣
006_0101_a_23L禮略周歸東印道遊常隨附鳳因住
006_0101_a_24L於彼9) [147] 夙明禪枝早茂窮涯盈量

006_0101_b_01L빈 것으로 갔다가 열매를 맺어 돌아오니 진실로 불가의 대들보요, 진실로 승려들의 영수라 하겠다.53)
골짜기에 배를 숨기고 못 속에 산을 숨겨 놓고 견고하리라 여기지만 세상사[舟壑]는 쉽게 변하고, 골짜기가 언덕으로 변하고 언덕이 골짜기로 변하듯이 변천함을 슬퍼하며, 세월[居諸]이 쉽게 저묾에 인간 세상의 무상을 측은히 여기지만 땔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니 다시 어떻게 좇을 수 있겠는가? 의정삼장은 현유가 어려서부터 법을 사모하고 뜻이 굳건함을 칭송하였다. 이미 동하東夏(중국)에서 정성을 다한 뒤에 다시 서천(인도)으로 가 더 설해 줄 것을 칭하였다. 다시금 신주神洲(중국)로 향하여 중생들을 위해 오래 머무르면서 십법十法54)을 전하여 불법을 넓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새롭기만 하다. 비록 이역만리에 몸을 버리고 경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의 공명은 이와 같이 크고 뛰어났다. 어찌 죽백(책)에 이름을 걸어 후세에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구법고승전』을 지었다. 내가 우연히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 마음으로 깊이 우러러 사모하여 마침내 뽑아 엮어서 쓴 것이다.
10. 현태玄太
승려 현태는 신라 사람으로서, 범명梵名으로는 살바신야제바蕯婆愼若提婆한역어는 일체지천一切智天이다.55) 어려서부터 깊이 생각에 잠기며 대인의 바탕이 있었다.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하는 듯하였다. 일찍이 배를 띄워 당나라에 가서 학문을 하는데 예사롭지 않았으며 깊고 미세하게 천착하고 궁구했다.
당나라 고종高宗 영휘永徽 연간(650~655)에 마침내 중인도로 가서 보리수에 예배하고, 사자와 같이 유람 다니면서 반려를 구하지 않았다. 다섯 겹으로 된 황금 지팡이를 휘두르며 삼도三道의 보배계단(寶揩)56)을 바라보았다. 그가 멀리 사모했던 것은 어렵고 위험하더라도 풍토를 두루 유람하고자 함이었지만, 또한 다 갈 수는 없었다. 곧 대각사로 가서 머물면서 경론을 자세히 검토하고 지방의 풍속을 두루 살폈다. 뒤에 진단震旦(중국)으로 돌아와 불법과 교화를 널리 펼쳐 그윽한 공적이 이에 드러나니 그의 성공은 뛰어나게 높고 우뚝 솟았다.57)
 찬하여 말한다. 이상의 몇 사람은 아득한 옛날 청요靑徼(우리나라)에서 바로 중화로 들어가 법현法顯과 현장玄獎58)의 잃어버린 발자취를 좇았다. 길이 끊어진 지역을 왕래하기를 마치 자기 마을 거리처럼 여겼으니, 비유컨대 그들은 장건張騫59)과 소무蘇武60)와 같은 사신에

006_0101_b_01L虛往實歸誠佛家之棟樑實僧徒之領
006_0101_b_02L旣而舟壑潜移10)陵谷之遷質
006_0101_b_03L諸易11) [148] 惻人世之難常薪盡火滅
006_0101_b_04L何可追義淨三藏嘉爾幼年慕法情
006_0101_b_05L旣虔誠於東夏復請益於西天
006_0101_b_06L指神洲爲物淹留傳十法而弘法
006_0101_b_07L千秋而不秋雖捐軀異域未返舊都
006_0101_b_08L彼之功名落落如此安得不掛名竹帛
006_0101_b_09L以示將來12)遂著求法高僧傳予偶覽
006_0101_b_10L大藏閱至13)於斯志深嚮慕遂抽繹而
006_0101_b_11L書之

006_0101_b_12L
14)玄大 [149] 15) [150] 新羅人16) [151] 名薩婆愼17) [152]
006_0101_b_13L提婆唐言一
切智天
童稚深沈有大人相不茹
006_0101_b_14L18)▣▣ ▣▣ [153] ▣▣▣▣▣19) [154]
006_0101_b_15L嘗泛舶如唐學問靡常闡奧窮微
006_0101_b_16L宗永徽中遂往中印度禮菩提樹
006_0101_b_17L師子遊行不求伴侶振五樓之金策
006_0101_b_18L望三道之寶階其所遠慕艱危歷覽風
006_0101_b_19L亦未能盡導便向大覺寺掛錫
006_0101_b_20L20)撿經論備省方俗後還震旦敷宣法
006_0101_b_21L玄績乃著巍巍乎21) [155] 成功矣

006_0101_b_22L
賛曰此上數人邈若靑徼徑入中
006_0101_b_23L追法顯玄22)奘之逸跡朅來絕域
006_0101_b_24L視如里巷比之奉使張23)騫蘇武之

006_0101_c_01L견줄 만하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제2卷第二 끝(終)

006_0101_c_01L類乎

006_0101_c_02L
海東高僧傳卷第二終

006_0101_c_03L「貲」作「貨」{乙}「歎」作「嘆」{乙}「目」作
006_0101_c_04L「自」{乙}
「慚」作「暫」{乙}「晝」作「畫」{乙}
006_0101_c_05L
「焰」作「燄」{乙}註曰求法傳唯云太州人
006_0101_c_06L不以爲新羅人{底}{甲}
「復」作「優」{乙}「矩」
006_0101_c_07L作「炬」{乙}
「陵」作「淩」{乙}「脫」作「晩」{乙}
006_0101_c_08L
「遂」作「偶」{乙}「於」作「于」{乙}註曰求
006_0101_c_09L法傳玄太法師遺事四歸竺諸師下作玄泰{底}{甲}
006_0101_c_10L
註曰梵宜在下名字上{底}{甲}註曰法字宜削
006_0101_c_11L之{底}{甲}
「菩」作「若」{乙}▣▣▣▣作「喜鬪
006_0101_c_12L其入」{乙}
▣作「如」{乙}「撿」作「檢」{乙}
006_0101_c_13L「其」下有「有」{乙}
「奘」作「焚」又註曰焚恐奘
006_0101_c_14L{甲}
「騫」作「蹇」{乙}
  1. 1)7일 : 『梁高僧傳』 권1 康僧會 條(T50, 325b)에 의하면 康僧會는 삼칠일(21일)을 기도했다고 한다.
  2. 2)불법(法水) : 법수法水는 중생의 번뇌를 깨끗하게 씻어 주는 물이라는 뜻으로, 불법佛法을 일컫는 말이다.
  3. 3)밀행密行 : 계율의 세세한 부분까지 철저하게 실천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서, 라후라 존자는 석가모니불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도 은밀하게 스스로 행할 바를 실천하여 부처님으로부터 밀행제일密行第一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4. 4)8년 : 이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4 眞平王 18年(596) 條의 “春三月, 高僧曇育入陳求法.”이 참조가 된다.
  5. 5)27년 : 『三國史記』 권4 眞平王 27年 條에 “春三月, 高僧曇育, 隨入朝使惠文還.”이라 되어 있으므로 본문의 ‘七年’은 ‘二十七年’으로 고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6. 6)승려 원광의~살기를 싫어하였다 : 이에 대해서는 『續高僧傳』 권13 「釋圓光傳」(T50, 523c)의 “俗姓朴, 本住三韓, 卞韓ㆍ馬韓ㆍ辰韓, 光卽辰韓新羅人也. 家世海東, 祖習綿遠, 而神器恢廓. 愛染篇章, 挍獵玄儒, 討讎子史, 文華騰翥於韓服. 博贍猶愧於中原, 遂割略親朋, 發憤溟渤.”, 『三國遺事』 권4 義解 제5 圓光西學 條의 “又東京安逸戶長貞孝家, 在古本殊異傳, 載圓光法師傳曰, 法師俗姓薛氏, 王京人也, 初爲僧學佛法.”이 참조가 된다.
  7. 7)양도楊都 : 금릉金陵으로 지금의 남경南京을 말한다.
  8. 8)업적이 이미~돌아가게 하였다 : 이에 대해서는 『續高僧傳』 권13 「釋圓光傳」의 “勣業旣成, 道東須繼, 本國遠聞, 上啓頻請, 有勅厚加勞問, 放歸桑梓.”가 참조가 된다.
  9. 9)진평왕 22년~신라로 돌아가는데 : 이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4 新羅本紀 제4 眞平王 22年 條의 “高僧圓光, 隨朝聘使奈諸文, 大舍橫川還.”, 『三國遺事』 권4 圓光西學 條 소전의 『殊異傳』의 “法師依其言歸中國, 留十一年, 博通三藏, 兼學儒術. 眞平王二十二年庚申,三國史云, 明年幸酉來. 歸將理第東還, 乃髓中國朝聘使還國.”이 참조가 된다.
  10. 10)마침내 삼기산~라고 하였다 : 이에 대해서는 『三國遺事』 권4 圓光西學 條 소재 『殊異傳』의 “法師欲謝神, 至前住三岐山寺, 夜中神亦來, 呼其名曰, 海陸送問, 往還如何. 對曰, 蒙神鴻恩, 平安到訖.”이 참조가 된다.
  11. 11)신이 말하기를~하고 머물렀다 : 이에 대해서는 『三國遺事』 권4 寶壤梨木 條의 “祖師知識上文云寶壤, 大國傳法來還, 次西海中, 龍邀入宮中, 念經施金羅袈裟一領, 兼施一子璃目, 爲侍奉而追之. 囑曰, 于時三國擾動, 未有歸依佛法之君主, 若與吾子, 歸本國鵲岬, 創寺而居, 可而避賊, 抑亦不數年內, 必有護法賢君, 出定三國矣. 言訖, 相別而來還, 及至玆洞, 忽有老僧, 自稱圓光, 抱印櫃而出, 授之而沒.按圓光以陳末間東還, 住嘉西岬, 而沒於皇隆. 計至淸泰之初, 無慮三入中國, 開皇百年矣. 今悲嘆諸岬開廢, 而喜見壤來而將興, 故告之爾 於是壤師, 將興廢寺, 而登北嶺望之, 庭有五層黃塔, 下來尋之則無跡. 再陟望之, 有群鵲啄地. 乃思海龍鵲岬之言, 尋掘之, 果有遺塼無數. 聚而蘊崇之, 塔成而無遺塼, 知是前代伽藍墟也. 畢創寺而住焉, 因名鵲岬寺. 未幾太祖統一三國, 聞師至此創院而居, 乃合五岬田束五百結納寺. 以淸泰四年丁酉, 賜額曰雲門禪寺, 以奉袈裟之靈蔭.”이 참조가 된다.
  12. 12)무상無常 : 상주常住하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모든 것이 늘 변하며, 나고 죽으며 흥하고 망하는 것이 덧없음을 일컫는다.
  13. 13)나는 죽을~그 신이었다 : 이에 대해서는 『三國遺事』 권4 圓光西學 條 소재 『殊異傳』의 “神曰, 吾亦授戒於神, 仍結生生相濟之約. 又請曰, 神之眞容可得見耶, 神曰, 法師若欲見我形, 平旦可望東天之際. 法師明月日望之, 有大臂貫雲接於天際. 其夜神亦來曰, 法師見我臂耶. 對曰, 見已甚奇絶異. 因此俗號臂長山. 神曰, 雖有此身, 不免無常之害. 故吾無月日, 捨身其嶺, 法師來送長逝之魂. 待約日往看, 有一老狐黑如漆, 但吸吸無息, 俄然而死.”가 참조가 된다.
  14. 14)서해의 용녀가~바로 소생하였다 : 이에 대해서는 『三國遺事』 권4 寶壤梨木 條의 “璃目常在寺側小潭, 陰隲法化, 忽一年元旱, 田蔬焦槁. 壤勅璃目行雨, 一境告足. 天帝將誅不識, 璃目告急於師, 師藏於床下, 俄有天使到庭, 請出璃目, 師指庭前梨木, 乃震之而上天, 梨木萎摧, 龍撫之卽蘇.一云師呪之而生”가 참조가 된다.
  15. 15)진평왕 30년(608)에~지어 보냈다 : 이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4 眞平王 30年 條의 “王患高句麗屢侵封場,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 乃述以聞. 二月, 高句麗侵北境, 虜獲八千人. 四月,高句麗拔牛鳴山城.”, 『三國遺事』 권4 圓光西學 條 소재 『殊異傳』의 “法師始自中國來, 本朝君臣敬重爲師, 常講大乘經典. 此時高麗百濟, 常侵邊鄙. 王甚患之, 欲請兵於隋宜作唐, 請法師作乞兵表. 皇帝見, 以三十萬兵親征高麗, 自此知法師旁通儒術也.”가 참조가 된다.
  16. 16)스님은 성품이~본을 보였다 : 이에 대해서는 『續高僧傳』 권13 「釋圓光傳」(T50, 524a)의 “光性在虛閑, 情多汎愛, 言常含笑, 慍結不形. 而牋表啓書, 往還國命, 並出自胸襟, 一隅傾奉. 皆委以治方, 詢之道化. 事異錦衣, 請同觀國, 乘機敷訓, 垂範于今.”이 참조가 된다.
  17. 17)35년(613)에 황룡사에서~수좌가 되었으며 : 이는 『三國史記』 권4 眞平王 35年 條의 “秋七月, 隋使王世儀至皇龍寺, 設百高座, 邀圓光等法師說經.”에 의한 듯하다. 한편 『三國遺事』 권4 圓光西學 條에도 위의 『三國史記』의 기사를 인용하여 “又建福三十年癸酉卽眞平王卽位三十五年也秋, 隋使王世儀至, 於皇龍寺設百座道場, 請諸高德說經, 光最居上首.”라고 하였다.
  18. 18)평상시에는 임시로~대해 강의하였다 : 이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45 列傳 제5 貴山 條의 “時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가 참조가 된다.
  19. 19)육재일六齋日 : 불교에서 재계齋戒를 닦는 날로 매달 음력 8ㆍ14ㆍ15ㆍ23ㆍ29ㆍ30일의 여섯 날을 말한다. 이날은 사천왕四天王이 천하를 순방하면서 사람들의 선악을 살피는 날이라 하고, 또한 악귀가 사람의 빈틈을 보는 날이라 하여 사람마다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계를 지켜야 하며, 소식素食을 하고 선행을 닦는 날로 되어 있다.
  20. 20)사량부沙梁部의 귀산(貴山)과~어기지 않았다 : 이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45 列傳 제5 貴山 條의 “貴山, 沙梁部人也, 父武殷阿干. 貴山少與部人箒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盍聞道於賢者之側乎. 時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貴山等詣門, 摳衣進告曰, 俗士顓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行之無忽.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師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雞犬, 不殺細物謂肉不足一臠, 是擇物也. 如此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世俗之善戒也,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가 참조가 된다.
  21. 21)후에 국왕이~곧 나았다 : 이에 대해서는 『續高僧傳』 권13 「釋圓光傳」 소재 「釋圓安傳」(T50, 524a~b)의 “安嘗叙光云, 本國王染患, 醫治不損, 請光入宮, 別省安置, 夜別二時, 爲說深法, 受戒懺悔. 王大信奉, 一時初夜, 王見光首, 金色晃然, 有象日輪, 隨身而至. 王后宮女, 同共覩之. 由是重發勝心, 克留疾所, 不久遂差.”가 참조가 된다.
  22. 22)정관(貞觀) 4년(630) : 정관 4년은 630년이며 위의 건복建福 58년(641)보다 앞서므로 오류이다. 한편 입적에 대해서는 『三國遺事』 권4 圓光西學 條 소재 『殊異傳』의 “享年八十四入寂, 葬明活城西.”가 참조가 된다.
  23. 23)법랍이 높아진~정관(貞觀) 4년(630)이었다 : 이에 대해서는 『續高僧傳』 권13 「釋圓光傳」(T50, 524a)의 “年齒旣高, 乘輿入內, 衣服藥食, 並王手自營, 不許佐助, 用希專福. 其感敬, 爲此類也. 將終之前, 王親執慰, 囑累遺法, 兼濟民斯爲說, 徵祥被于海曲, 以彼建福五十八年. 少覺不悆, 經于七日, 遺誡淸切, 端坐終于所住皇隆寺中, 春秋九十有九, 卽唐貞觀四年也. 當終之時, 寺東北虛中, 音樂滿空, 異香充院. 道俗悲慶, 知其靈感. 遂葬于郊外, 國給羽儀, 葬具同於王禮.”, 『三國遺事』 권4 圓光西學 條의 “年八十餘, 卒於貞觀間, 浮圖在三岐山金谷寺.今安康之西南洞也, 亦明活之西也. 唐傳云, 告寂皇隆寺, 未詳其地. 疑皇龍之訛也, 如芬皇作王芬寺之例也.”가 참조가 된다.
  24. 24)뒤에 태~남아 있다 : 이에 대해서는 『續高僧傳』 권13 「釋圓光傳」(T50, 524a)의 “後有俗人兒胎死者, 彼土諺云, 當於有福人墓埋之, 種胤不絶. 乃私瘞於墳側, 當日震此胎屍, 擲于塋外. 由此不懷, 敬者率崇仰焉.”이 참조가 된다.
  25. 25)구도九都(丸都) : 고구려의 서울인 환도丸都를 말하며 사료에서 자주 혼용된다.
  26. 26)특진特進 : 인재를 특별히 발탁해 천거하는 직위이다.
  27. 27)소우蕭瑀 : 574~647. 당대唐代의 사람으로 그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63 「蕭瑀傳」이 참조가 된다.
  28. 28)남전藍田 :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의 직할현이다.
  29. 29)사사四事 : 부처나 법사法師에게 공양하는 데 쓰는 네 가지 물건으로 침구寢具ㆍ의복衣服ㆍ음식飮食ㆍ탕약湯藥 또는 방사房舍ㆍ의복ㆍ음식ㆍ산화소향散華燒香을 가리킨다.
  30. 30)수제자 원안圓安도~대해서는 모른다 : 이에 대해서는 『續高僧傳』 권13 「釋圓光傳」 소재 「圓安傳」(T50, 524a)의 “有弟子圓安, 神志機頴, 性希歷覽, 慕仰幽求, 遂北趣九都, 東觀不耐, 又西燕魏. 後展帝京, 備通方俗, 尋諸經論, 跨轢大綱, 洞淸纖旨. 晩歸心學, 高軌光塵. 初住京寺, 以道素有聞, 特進蕭瑀, 奏請住於藍田所造津梁寺, 四事供給, 無替六時矣.”가 참조가 된다.
  31. 31)원공遠公 : 334~416. 여산 혜원廬山慧遠의 약칭으로 중국 동진東晉 대의 승려이다. 산서성山西省 출신으로 도안道安을 따라 강남江南 여산廬山(江西省)의 서림사西林寺로 들어가 402년에 유유민劉遺民 등과 염불결사念佛給社인 백련사白蓮社를 창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32. 32)안함安含 : 『三國遺事』 권3 東京興輪寺金堂十聖 條가 참조가 된다.
  33. 33)혜숙惠宿 : 『三國遺事』 권4 義解 제5 二惠同塵 條가 참조가 된다.
  34. 34)대흥성사大興聖寺 :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628)에 건립된 것으로 수隋 개황開皇 2년(582)에 세워진 대흥선사大興善寺의 오자誤字로 여겨진다는 장휘옥의 견해가 참조가 된다.
  35. 35)십승十乘 : 십승관법十乘觀法을 말한다. 『摩訶止觀』에 나오는 10종의 관법觀法으로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 발진정보리심發眞正菩提心, 선교안심지관善巧安心止觀, 파법편破法遍, 식통색識通塞, 도품조적道品調適, 대치조개對治助開, 지차위知次位, 능안인能安忍, 무법애無法愛를 말한다.
  36. 36)현의玄義 : 일반적으로 현묘한 도리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앞의 십승비법十乘秘法과 관련시켜 천태대사天台大師의 『法華玄義』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전全 10권으로서, 『法華經』의 경제經題를 해석함으로써 경經의 요지를 개괄한 것(T33 所收)이다.
  37. 37)우전于闐 : 화전和闐이라고도 하며,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타림분지 남단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 실크로드의 요지이다. 한漢나라 때와 당唐나라 때에 번영하여 간다라 양식의 불상 등이 남아 있으며, 특산품인 연옥軟玉으로 알려졌다.
  38. 38)또 『신라본기』를~라고 한다 : 이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4 新羅本紀 제4 眞興王 37年 條의 “安弘法師, 入隋求法, 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 上稜伽勝鬘經及佛舍利.”, 『三國遺事』 권3 塔像 제4 皇龍寺九層塔 條의 “又海東名賢安弘撰, 東都成立記云.”이 참조가 된다.
  39. 39)첫 번째~장사지낸 일 : 이에 대해서는 『三國遺事』 권1 紀異 善德王知幾三事 條가 참조가 된다.
  40. 40)사천왕사가 완공된 일 : 이에 대해서는 『三國遺事』 권2 文虎王法敏 條가 참조가 된다.
  41. 41)왕자가 고향에 돌아온 해 : 김인문金仁問의 귀국을 안함이 예언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44 列傳 제4 金仁問 條가 참조가 된다.
  42. 42)대군이 왕조를~한 해 : 太宗武烈王과 文武王이 삼국 통일할 것을 안함이 예언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5 新羅本紀 제5 太宗武烈王 條 및 권6 新羅本紀 제6 文武王 條가 참조가 된다.
  43. 43)왕자(김인문)가 관문을~30세에 돌아오니 : 이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44 列傳 제4 金仁問 條가 참조가 된다. 다만, 김인문金仁問은 영휘永徽 2년(651)에 23세로 당唐에 들어가 영휘 4년(653)에 귀국하였다고 하여 내용상에 조금 차이가 있다.
  44. 44)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 이에 대해서는 『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상(T51, 2b)의 “阿難耶跋摩者, 新羅人也. 以貞觀年中, 出長安之廣脇王城小名追求正敎, 親禮聖蹤. 住那爛陀寺, 多閑律論, 抄寫衆經. 痛矣歸心所期不契. 出雞貴之東境, 沒龍泉之西裔. 卽於此寺無常, 年七十餘矣.”, 『三國遺事』 권4 義解 제5 歸竺諸師 條의 “廣函求法高僧傳云, 釋阿離那一作耶跋摩一作▣, 新羅人也. 初希正敎, 早入中華, 思覲聖蹤, 勇銳彌增, 以貞觀年中離長安, 到五天, 住那蘭陁寺, 多閱律論, 抄寫貝莢. 痛矣歸心, 所期不遂, 忽於寺中無常, 齡七十餘. 繼此有惠業ㆍ玄泰ㆍ求本ㆍ玄恪ㆍ惠輪ㆍ玄遊, 復有二亡名法師等, 皆忘身順法, 觀化中天, 而或夭於中途, 或生存住彼寺者, 竟未有能復雞貴與唐室者. 唯玄泰師克返歸唐, 亦莫知所終.”이 참조가 된다.
  45. 45)승려 혜업은~모두 꿰었다 : 이에 대해서는 『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상(T51, 2b-c)의 “慧業法師者, 新羅人也. 在貞觀年中, 往遊西域. 住菩提寺, 觀禮聖蹤, 於那爛陀, 久而聽讀. 淨因檢唐本, 忽見梁論, 下記云, 在佛齒木樹下, 新羅僧慧業寫記. 訪問寺僧, 云終於此, 年將六十餘矣. 所寫梵本, 並在那爛陀寺.”와 앞의 『三國遺事』 권4 歸竺諸師 條가 참조가 된다.
  46. 46)양론梁論 : 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권제3에 인용되어 있어 참고가 되며, 眞諦 譯의 『攝大乘論』이라는 견해도 있다.
  47. 47)승려 혜륜은~갖춰져 있다 : 이에 대해서는 『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상(T51, 5a)의 “慧輪師者, 新羅人也. 梵名般若跋摩唐云慧甲自本國出家, 翹心聖迹, 汎舶而陵閩越, 涉步而屆長安. 奉勅隨玄照師西行, 以充侍者. 旣之西國, 遍禮聖蹤, 居菴摩羅跛國, 在信者寺, 住經十載. 近住次東邊北方覩貨羅僧寺. 元是覩貨羅人, 爲本國僧所造. 其寺巨富, 貲産豊饒, 供養飡設, 餘莫加也. 寺名健陀羅山茶. 慧輪住此, 旣善梵言薄閑俱舍. 來日尙在, 年向四十矣.”가 참조가 된다.
  48. 48)승려 현각은~연꽃(火中芙蓉)이라 하였다 : 이에 대해서는 『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상(T51, 2c)의 “玄恪法師者, 新羅人也. 與玄照法師, 貞觀年中, 相隨而至大覺. 旣伸禮敬, 遇疾而亡. 年過不惑之期耳.”가 참조가 된다.
  49. 49)그림자도 없는 중천축국(無影之邦) : 이에 대해서는 『梁高僧傳』권7 「釋慧嚴」(T50, 368a)의 “天竺夏至之日, 方中無影, 所謂天中.”이 참조가 된다.
  50. 50)현조玄照 :『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상(T51, 1b)의 현조는 신라인이 아닌 태주太州의 선장仙掌(陜西省 華陰縣) 사람으로 나온다.
  51. 51)또한 신라의~모두 죽었다 : 이에 대해서는 『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상(T51, 2c)의 “復有新羅僧二人, 莫知其諱, 發自長安, 遠之南海, 汎船至室利佛逝國西婆魯師國, 遇疾俱亡.”이 참조가 된다.
  52. 52)현유玄遊 : 『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하(T51, 8c)의 “僧哲弟子玄遊者, 高麗國人也. 隨師於師子國出家, 因住彼矣.”가 참조가 된다.
  53. 53)성인의 자취를~영수라 하겠다 : 『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하(T51, 8b-c)의 “思慕聖蹤, 乏舶西域, 旣至西土, 適化隨緣, 巡禮略周, 歸東印度, 到三摩㫜吒國.”이 참조가 된다.
  54. 54)십법十法 : 보살이 십법을 성취해야 대승大乘에 머물 수 있는데 이 십법이란 성취정신成就正信, 성취행成就行, 성취성成就性, 낙보리심樂菩提心, 낙법樂法, 낙관정법樂觀正法, 행어정법급순법行於正法及順法, 원리만遠離慢, 선호통달제미밀어善好通達諸微密語, 불락성문급연각不樂聲聞及緣覺을 말한다.
  55. 55)승려 현태는~살바신야제바蕯婆愼若提婆한역어는 일체지천一切智天이다 : 이에 대해서는 『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상(T51, 2c)의 “玄太法師者, 新羅人也梵名薩婆愼若提婆.唐云一切智天”가 참조가 된다.
  56. 56)삼도三道의 보배계단(寶揩) : 부처님이 어머니를 위해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 설법하고 내려올 때, 제석帝釋이 만들어 준 금ㆍ은ㆍ유리로 된 삼도의 계단이다. 여기서 삼도란 성문聲聞이나 보살이 수행하는 과정의 세 단계로 견도見道ㆍ수도修道ㆍ무학도無學道를 가리킨다.
  57. 57)고종高宗 영휘永徽~우뚝 솟았다 : 이에 대해서는 『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상(T51, 2c)의 “永徽年內, 取吐蕃道, 經泥波羅, 到中印度, 禮蓓提樹, 詳儉經論. 旋踵東土, 行至土谷渾, 逢道希師. 覆相引致, 還向大覺寺, 後歸唐國. 莫知所終矣.”가 참조가 된다.
  58. 58)현장玄奘 : 중국의 4대 번역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법상종法相宗의 개창자이다. 인도를 널리 유람하고 나란다사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후 장안으로 돌아와 번역 사업에 전념하여 75부 1335권에 달하는 번역을 하였다.
  59. 59)장건張騫 : 건원建元 2년(기원전 139)경에 한漢 무제武帝의 친서親書를 가지고 흉노를 거쳐 대월지국大月氏國에 갔다가 원삭元朔 3년(기원전 126)에 장안으로 돌아온 사신이다.
  60. 60)소무蘇武 : 천한天漢 연간(기원전 100~97) 초에 한 무제의 사신으로 흉노에 갔다가 온 사신이다.
  1. 1)「光」下有「圓安」{乙}。
  2. 2)「胡僧曇和。漢僧安和」作「胡僧二人漢僧三人。曇和。安弘」{乙}。
  3. 3)「名」上有「亡」{乙}。
  4. 4)「訅」作「訣」{乙}·註曰訅或訓字{底}{甲}。
  5. 5)「盯矃」作「耵聹」{乙}。
  6. 6)「齎」作「賫」{甲}{乙}。
  7. 7)「也」無有{乙}。
  8. 8)▣作「㝵」{乙}。
  9. 9)「惰」作「懶」{乙}。
  10. 10)▣作「表」{乙}。
  11. 11)「復」作「後世」{乙}。
  12. 12)「回」作「曲」{乙}。
  13. 13)「卬卬」作「昻昻」{乙}。
  14. 14)「來」下有「者」{乙}。
  15. 15)「▼(荔/十)」作「華」{乙}。
  16. 16)「使」無有{乙}。
  17. 17)「薜」作「薛」{乙}。
  18. 18)「惠」作「慧」{乙}。
  19. 19)「情」作「憒」{乙}。
  20. 20)「岐」作「歧」{乙}次同。
  21. 21)「誦念」作「念誦」{乙}。
  22. 1)「▣住從」作「從久住」{乙}。
  23. 2)「祥」作「詳」{乙}。
  24. 3)「二」作「三」{乙}。
  25. 4)「開」上有註曰事見續高僧傳卷之十三。及三國遺事卷四{底}{甲}。
  26. 5)「平」下有「王」{乙}。
  27. 6)「小」作「山」{乙}·注曰小或北字{底}{甲}。
  28. 7)「朝」作「旦」{乙}。
  29. 8)「吱吱」作「吸吸」{乙}。
  30. 9)「謝禮」作「禮謝」{乙}。
  31. 10)「句高麗」作「高句麗」{乙}。
  32. 11)「唯」作「惟」{乙}。
  33. 12)「牋」作「箋」{乙}。
  34. 13)註曰治原本作詔。續傳十三改之{底}{甲}。
  35. 14)註曰寺號遺事四作嘉瑟岬。注云。或作加西又嘉栖。皆方言也岬俗云古尸。故或云古尸寺。猶言岬寺也。今雲門寺東九千歩許有加西岬。或云嘉瑟峴。峴之北洞有寺基臺是也{底}{甲}。
  36. 15)「頂」作「項」{乙}·註曰頂遺事四作項。貴山箒頂二賢士之名{底}{甲}。
  37. 1)「雖」作「惟」{乙}。
  38. 2)▣作「其」{乙}。
  39. 3)▣作「用」{乙}·註曰二空字宜作有用二字。遺事作唯其所用{底}{甲}。
  40. 4)▣作「損」{乙}·註曰空字據遺事四及續僧十三宜作損{底}{甲}。
  41. 5)註曰斯民遺事四作民斯{底}{甲}。
  42. 6)「詳」作「祥」{乙}·註曰詳遺事四作祥{底}{甲}。
  43. 7)「慶」作「警」{乙}。
  44. 8)「屠」作「圖」{乙}。
  45. 9)注曰安原本作光。今依本傳改之{底}{甲}。
  46. 10)「永」作「求」{乙}·註曰永遺事續傳俱作求{底}{甲}。
  47. 11)「軌光」作「軓先」{乙}。
  48. 12)「肅」作「蕭」{乙}。
  49. 13)「論」作「諭」{乙}。
  50. 14)註曰設或說字{底}{甲}。
  51. 15)「飱」作「飡」{乙}。
  52. 16)「私」作「弘」{乙}。
  53. 17)「▼(荔/十)」作「華」{乙}。
  54. 18)註曰相恐想字{底}{甲}。
  55. 19)「二」作「三」{乙}。
  56. 20)「摩」無有{乙}。
  57. 21)「始」下有「至」{乙}·註曰始下恐脫入字{底}{甲}。
  58. 1)「旃」作「栴」{乙}。
  59. 2)「之」作「文」{乙}。
  60. 3)「碑」作「經」{乙}。
  61. 4)「天」作「王」{乙}·註曰第二天字恐王字{底}{甲}。
  62. 5)「以」作「似」{乙}。
  63. 6)「字」無有{甲}{乙}。
  64. 7)「參」作「叅」{乙}次同。
  65. 8)「遊」作「遠」{乙}。
  66. 9)「糧」作「粮」{乙}。
  67. 10)▣作「僧」{乙}·註曰空字恐僧字{底}{甲}。
  68. 11)「專」作「惠」{甲}{乙}。
  69. 12)註曰新羅僧八人入竺事見大唐求法高僧傳{底}{甲}。
  70. 13)「深」作「遠」{乙}。
  71. 14)「巉」作「峻」{乙}。
  72. 15)「撿」作「檢」{乙}。
  73. 16)註曰事見求法傳{底}{甲}。
  74. 17)「甲」作「申」{乙}·註曰甲原本作申非也{底}{甲}。
  75. 18)註曰波求法傳作跛。宋元明三本作跋國屬中天或可{底}{甲}。
  76. 1)「貲」作「貨」{乙}。
  77. 2)「歎」作「嘆」{乙}。
  78. 3)「目」作「自」{乙}。
  79. 4)「慚」作「暫」{乙}。
  80. 5)「晝」作「畫」{乙}。
  81. 6)「焰」作「燄」{乙}。
  82. 7)註曰求法傳。唯云太州人不以爲新羅人{底}{甲}。
  83. 8)「復」作「優」{乙}。
  84. 9)「矩」作「炬」{乙}。
  85. 10)「陵」作「淩」{乙}。
  86. 11)「脫」作「晩」{乙}。
  87. 12)「遂」作「偶」{乙}。
  88. 13)「於」作「于」{乙}。
  89. 14)註曰求法傳玄太法師。遺事四歸竺諸師下作玄泰{底}{甲}。
  90. 15)註曰梵宜在下名字上{底}{甲}。
  91. 16)註曰法字宜削之{底}{甲}。
  92. 17)「菩」作「若」{乙}。
  93. 18)▣▣▣▣作「喜鬪其入」{乙}。
  94. 19)▣作「如」{乙}。
  95. 20)「撿」作「檢」{乙}。
  96. 21)「其」下有「有」{乙}。
  97. 22)「奘」作「焚」又註曰焚恐奘{甲}。
  98. 23)「騫」作「蹇」{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