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침굉집(枕肱集) / 枕肱遺稿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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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굉집枕肱集
침굉 현변枕肱懸辯
침굉유고枕肱遺稿 서문
우리 동방에서 서학西學의 종지宗旨를 얻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 종지의 요체를 얻은 사람은 바로 우리 침굉枕肱이라고 할 것이다. 침굉의 학문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그 마음의 덕德이 소리로 발현되고 그 소리의 운율이 글로 드러났으니, 글은 대사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대사의 마음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무위無爲를 체용體用으로 삼아 하나로 관통하였으니, 문장은 바로 여사餘事로 한 일이었다. 그 시는 아순雅順하다는 평에 걸맞고, 그 글은 부과浮誇한 일이 없다. 산에 감추어진 옥돌과 같고 못에 잠긴 구슬과 같으니, 덕이 있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언어가 있게 마련이라는 말이 수긍이 간다. 아, 옥이 빛남을 부끄러워하고 비단이 드러남을 꺼리듯, 한가한 시절에 읊어진 이 시문들이 그만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대사가 스스로 문집을 불 속에 던졌다. 이는 대개 대사가 무명無名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대사가 입적한 지 12년이 지난 봄날에 문제자門弟子 약휴若休 등이 사람의 입으로 흩어져 전해 오는 약간의 시문을 모아 간행하기로 하고, 시승詩僧 호연浩然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침굉의 학문은 무위無爲인데 세상에 유명有名하고, 청광淸狂의 학문은 유위有爲인데 지금 무명無名이다. 유위를 가지고 무위에 서문을 쓴다면 외람된 일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자 옆에서 간청하던 계석季釋 사겸士謙이 말하기를 “무명無名을 귀하게 여겨 무명에 감사한다면, 서문을 써도 쓰지 않은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서문을 쓰게 되었다.
강희康熙 세차歲次 을해년(1695, 숙종 21)에 은암隱岩 청광자淸狂子 박사형朴士亨1)은 쓰다.

008_0345_a_01L[枕肱集]

008_0345_a_02L1)枕肱遺稿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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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東西學凡幾人得宗宗得其要
008_0345_a_05L惟我枕肱乎枕肱之學心也心之德
008_0345_a_06L發乎聲聲之律著乎文文其見大師
008_0345_a_07L之心乎大師之心歸於一一歸甚處
008_0345_a_08L無爲軆用一以貫之文章迺餘事耳
008_0345_a_09L詩當雅順文謝浮誇山蘊之玉澤莊 [1]
008_0345_a_10L之珠信乎有德者必有言也玉羞
008_0345_a_11L2) [1] [2] 惡著三餘之吟八人之灰大師自投
文集于火

008_0345_a_12L蓋以無名爲貴也示寂之越十有二年
008_0345_a_13L門弟子若休等鳩散在人口碑者
008_0345_a_14L詩及文若干首錄諸榟韻釋浩然書
008_0345_a_15L余序余惟枕肱之學無爲有名於世
008_0345_a_16L淸狂之學有麽而無名於時以有麽序
008_0345_a_17L無爲不以泰乎傍懇者季釋士謙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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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無名將無同乎辭無辭於是
008_0345_a_19L乎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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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熙龍集乙亥隱岩淸狂子朴士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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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5_a_22L{底}崇禎後乙亥曺溪山仙巖寺開刊本(東國大
008_0345_a_23L學校所藏)
▣草書難解{編}
  1. 1)박사형朴士亨 : 1635~1706. 자는 서옹瑞翁, 호는 청광자淸狂子. 전남 보성 사람이다. 보성의 마고산麻姑山 아래에 정사精舍를 짓고 학생을 교육하였다. 문집으로 『청광집淸狂集』이 있다. 담배의 효능을 예찬한 가사 ≺남초가南草歌≻가 전한다.
  1. 1){底}崇禎後乙亥。曺溪山仙巖寺開刊本(東國大學校所藏)。
  2. 2)▣草書難解{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