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허백집(虛白集) / 虛白堂詩集序

ABC_BJ_H0169_T_001

008_0379_c_01L
허백집虛白集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 서序
옛날부터 나는 허백당虛白堂과 본래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이태백(謫仙)과 관휴貫休1)의 사이와 같았을 뿐만 아니라, 동파東坡2)와 불인佛印3) 사이와 같았다. 그러나 유교와 불교는 도가 서로 다르고 한가하고 바쁜 길이 서로 달라 중간에 서로 만나지 못한 지 거의 20여 년이나 되었다.
얼마 전 무술년戊戌年에 구월산九月山에서 묘향산妙香山으로 가면서 나를 찾아와서 만났는데, 한번 얼굴을 대하고 보니 옛정이 너무나 두터웠다. 이로부터 소식이 끊어지지 않고 늘 편지를 주고받으며 문안할 따름이었다. 그 뒤 신축년辛丑年 가을 9월에 허백당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놀라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슬퍼하였으나 부질없는 몽상夢想일 따름이었다.
지난 10월 어느 날 허백당의 문하생 남인南印이 허백당의 시문 몇 권을 소매 속에서 꺼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지금 이 문집을 간행하여 장차 배포하려고 하는데 오직 서문이 부족합니다. 상사上舍께서는 우리 스승님과 일찍이 서로 아주 두터운 의리가 있으셨기 때문에 감히 여기에 와서 문을 두드린 것이니, 우리 스승님과 유명幽明의 간격이 있다고 하여 혹 솜씨를 아끼는 일이 없으시면 다행으로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자리에서 즉시 응답하여 말하기를, “허백당은 곧 석씨釋氏의 제자입니다. 도의 눈이 이미 높으셨고 학술 또한 정밀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골몰汨沒하여 배운 촌스러운 학문이니, 어찌 그 문집의 서문을 쓸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문장은 이미 낡고 재주 또한 없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뿐 아니라, 또한 틀림없이 허백당의 혼령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어찌하여 서울의 큰 유생儒生 석사들을 찾아가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면서 머리를 흔들며 굳게 사양하였다.
그런데도 남인 등이 다시 나서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의 행적이 알려지고 감춰지는 것과 학술이 정밀하고 거칢과 실천의 득실得失과 시문詩文의 교졸巧拙함에 대하여 상사께서 일찍부터 이미 자세하게 알고 계시니

008_0379_c_01L[虛白集]

008_0379_c_02L1)虛白堂詩集序

008_0379_c_03L
008_0379_c_04L
昔余與虛白堂素相善不啻若謫仙之
008_0379_c_05L於貫休東坡之於佛印也然而儒釋殊
008_0379_c_06L閑忙異路中間未能會面者將二
008_0379_c_07L十有餘年矣頃於戊戌年自九月還香
008_0379_c_08L嶽也過余而訪焉一接容顏萬重舊
008_0379_c_09L自是音塵不絕常自寄問而已
008_0379_c_10L辛丑秋九月聞虛白昇化之奇驚號痛
008_0379_c_11L徒費夢想去十月日虛白門下禪
008_0379_c_12L南印袖出虛白詩文若干卷示余曰
008_0379_c_13L今欲刊此集將印布而所乏者惟序文
008_0379_c_14L上舍與吾師曾有相厚之義故
008_0379_c_15L此來控幸勿以吾師爲幽明之隔而或
008_0379_c_16L慳焉余即應之曰虛白乃釋氏之徒也
008_0379_c_17L道眼旣高學術且精余以汨沒村學
008_0379_c_18L何足以序其集乎況文已老矣才又薄
008_0379_c_19L非徒買笑於他人亦必見哂於虛白
008_0379_c_20L之靈何不徃求於京華之宏儒碩士乎
008_0379_c_21L掉頭固辭印等更進曰吾師之行迹顯
008_0379_c_22L學術精粗踐履得失詩文巧拙
008_0379_c_23L{底}康熙八年妙香山普賢寺留鎭本 (東國大學
008_0379_c_24L校所藏)

008_0380_a_01L사양하지 않았으면 다행스럽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재삼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애원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행장에 의거하여 기록하여 서술한다.
저 허백당의 사람 됨됨이는 천성이 진실하고 평범하였으며, 계략과 사려는 깊고 원대遠大하였고, 학술은 고명高明하였으며, 동정動靜은 법도에 딱 맞아서 청허淸虛나 사명四溟, 송월松月과 비교해 보면 선후가 똑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문을 살펴보면, 현묘한 이치를 가만히 드러내고 심오한 뜻을 탐구하여 터득하였으며, 바람 속의 구름이요 달빛 아래 이슬처럼 자연 그대로 꾸밈이 없다. 문장은 은근하면서도 간절하고, 강하나 부드러우며, 고상하면서도 웅건하고, 기상이 호방豪放해서 성률聲律에 구애받지 않았다. 배비排比4)하여 뒤섞이지 않으면서도 의취意趣는 훨씬 뛰어나고 구법句法이 새롭고 기이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유연悠然히 흘러나가서 스스로 한 가풍을 이룬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 문집을 한번 열람해 보니, 허백당의 흉금胸襟을 짐작할 만하였다.
아! 허백당은 송월 스님에게서 석씨의 도를 받았고, 송월 스님은 사명 스님에게 받았으며, 사명 스님은 청허 스님으로부터 받았고, 청허 스님은 영관靈觀 스님에게서 받았으며, 영관 스님은 지엄智嚴 스님에게 받았고, 지엄 스님은 정심正心 스님에게 받았으며, 정심 스님은 환암幻菴 스님에게 받았고, 환암 스님은 태고太古 스님에게 받았으며, 태고 스님은 석옥石屋 스님에게서 받았다. 그런즉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여 년 동안 계속해 이어 받들어서 연면連綿히 끊어지지 않았으니, 어찌 도가 사라지지 않고 그 학문을 계속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우리 허백당은 다만 불가佛家에만 공이 있었던 게 아니라, 나라에도 또한 큰 공을 세웠으니, 정묘년丁卯年 변란에는 승군僧軍 4천여 명을 거느리고 힘을 합쳐 안주安州를 지켜 냈고, 병자년丙子年 난리에는 의로운 곡식 수백여 섬을 모집해서 군량미를 넉넉하게 조달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정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부종수교扶宗樹敎 복국우세福國佑世 비지쌍운悲智雙運 의승도대장등계義僧都大將登階’라는 직첩을 하사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지혜의 칼이 빛을 더하고 자비의 배가 널리 중생들을 건져 준 것이라 하겠다. 명성과 한 일이 이미 융성하니, 불가와 속가에서 다 우러러보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는 더욱 밝아지고 덕은 더욱 높아졌으니, 그러고 보면 허백당은 곧 승려들 중의 우두머리이고,

008_0380_a_01L舍曾已詳悉幸勿辭焉再三欵恳
008_0380_a_02L不得已遂据其狀記以叙之夫虛白
008_0380_a_03L爲人天性實凡計慮深遠學術高明
008_0380_a_04L動靜合度視之淸虛四溟松月先後一
008_0380_a_05L揆也觀其詩文則㝠著玄契探頥奧
008_0380_a_06L風雲月露詞指勤恳强柔高健
008_0380_a_07L像豪放不拘聲律不襍排比而意趣
008_0380_a_08L超邁句法新奇此所謂悠然流出
008_0380_a_09L成一家者也一閱是集可知虛白之胷
008_0380_a_10L襟也嗚呼釋氏之道虛白受之於松
008_0380_a_11L松月受之於四溟四溟受之於淸虛
008_0380_a_12L淸虛受之於靈觀靈觀受之於智嚴
008_0380_a_13L嚴受之於正心正心受之於幻菴幻菴
008_0380_a_14L受之於太古太古受之於石屋則上下
008_0380_a_15L凡千有餘年繼繼承承連綿不絕者
008_0380_a_16L豈非道不泯而傳其學者乎況我虛白
008_0380_a_17L不但有功於佛家亦有勳勞於王國
008_0380_a_18L卯之變領僧軍四千餘名恊守於安州
008_0380_a_19L丙子之亂募義粟數百餘石優佑於餫
008_0380_a_20L是以朝廷嘉之賜嘉善大夫國一都
008_0380_a_21L大禪師扶宗樹敎福國佑世悲智雙運義
008_0380_a_22L僧都大將登階之牒於是慧釼增耀
008_0380_a_23L航普濟名業旣隆道俗咸仰由是而
008_0380_a_24L道益明德益邵則虛白乃緇徒之領袖

008_0380_b_01L우리나라의 큰 종사宗師임이 틀림없다. 마침내는 물병을 들고 지팡이를 떨치면서 절묘한 경계를 찾아서 동쪽으로 봉래산에 가고 남쪽으로는 방장산方丈山(智異山)을 올랐으며, 금전金田과 옥실玉室의 명승지리를 거의 다 밟아 보았으며, 가는 곳마다 문도의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이곤 하여 움직였다 하면 수백 명에 이르렀으니, 그렇다면 석옥 화상이 물려준 도를 잘 이어받고 송월 대사의 의발衣鉢을 잘 전하신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니 그의 문집을 간행하여 뒷세상에 영원히 전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아! 슬프다! 나는 임천林泉에서 머리가 하얘졌고, 시골 마을에 숨어 살면서 그렇게 살아왔는데, 마침 남인 스님의 간청으로 인해 이 시집을 열람하고 그 전말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이 책머리에 두어 뒷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재료를 주게 되었다.
때는 대청大淸 강희康熙 8년(1669), 해의 차례 기유己酉 늦봄 어느 날에 전 진사 선성宣城의 후인인 노몽수盧夢脩가 서序를 쓰노라.


008_0380_b_01L而東方之大宗師也遂乃提瓶振策
008_0380_b_02L搜玅境東自蓬萊南登方丈金田玉
008_0380_b_03L勝踐殆遍而徒弟雲集動至數百
008_0380_b_04L則可謂善繼石屋之遺道而能傳松月
008_0380_b_05L之衣鉢者也然則刊其集而永於後
008_0380_b_06L不宜哉余皓首林泉蠖屈村墟
008_0380_b_07L亦有年適因南印之請覽此詩集
008_0380_b_08L記顚末弁其卷端以資後人之▼((夂/(应-广)+⻏)唾
008_0380_b_09L

008_0380_b_10L
時大淸康熙八年歲次己酉暮春日
008_0380_b_11L前進士宣城後人盧夢脩序

008_0380_b_12L「▼((夂/(应-广)+⻏)」疑「鄙」{編} [1]
  1. 1)관휴貫休(832~912) : 당唐나라 말 오대五代의 난계蘭溪 사람으로 속성은 강姜이고 자는 덕은德隱이다. 17세 때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시를 잘 써서 이태백과 교분이 두터웠고 특히 수묵화水墨畵에 능했다.
  2. 2)동파東坡 : 송宋나라 때의 대문호 소식蘇軾(1036~1101)의 호다. 자는 자첨子瞻, 시호는 문충文忠.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라 불리며, 삼부자가 모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철종哲宗에게 중용되어 구법파舊法派의 중심적 인물로 활약하였고, 특히 구양수歐陽脩와 비교되는 대문호로서 부賦를 비롯하여 시詩·사詞·고문古文 등에 능하였으며, 재질이 뛰어나 서화書畵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문학은 송나라뿐만 아니라 우리 고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 3)불인佛印(1032~1098) : 송나라 때 스님. 이름은 요원了元, 자는 각로覺老이다. 40년 동안 운거산雲居山에 살았고, 뒤에 여산廬山에 있으면서 황주에 귀양 온 소동파와 글로 사귀었다. 원부元符 1년, 67세로 입적하였다.
  4. 4)배비排比 : 구문句文이 유사하고 내용이 병렬적인 문장을 둘 이상 나열하는 표현.
  1. 1){底}康熙八年。妙香山普賢寺留鎭本 (東國大學校所藏)。
  2. 1)「▼((夂/(应-广)+⻏)」疑「鄙」{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