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용담집(龍潭集) / 龍潭大師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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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 대사 행장龍潭大師行狀
화상의 법휘는 조관慥冠이요, 자는 무회無懷며, 용담龍潭은 그의 호이다.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남원南原 사람이다. 어머니는 서씨徐氏인데, 서씨가 한 마리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며, 강희康熙 경진년(1700) 4월 8일에 낳았는데 골상이 신령하고 수승하였으니 창끝처럼 뾰족하고 산봉우리처럼 예리하였다. 9세에 입학하여 눈으로 열람하기만 하면 남김없이 암송하였고, 15세 이전에 유업儒業을 이미 완성하였다. 때로 한묵翰墨의 장에 들어가 일과제日課第에 여러 차례 합격하여 향리에서 기동奇童이라 칭하였다. 16세에 먼저 아버지를 잃고는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009_0693_b_17L龍潭大師行狀

009_0693_b_18L
和尙法諱慥冠字無懷龍潭其號
009_0693_b_19L姓金氏南原人也母曰徐氏徐夢
009_0693_b_20L一龍昇天因而有娠以康熙庚辰四
009_0693_b_21L月初八日生骨相靈秀鋒頴峻銳
009_0693_b_22L歲入學目所覽則無遺誦十五歲前
009_0693_b_23L儒業已成時入翰墨塲累中日課第
009_0693_b_24L鄕稱奇童十六先失所怙泣血三年

009_0693_c_01L세상의 무상함을 관찰하고 새장을 벗어날 뜻을 깊이 품었다.
19세에 출가하겠다고 어머니에게 청하자 친지들이 억지로 말릴 수 없어 허락하였다. 결국 감로사甘露寺 상흡尙洽 장로에게 의탁하고 더불어 삭발하였으며, 태허당太虛堂 취간就侃 대덕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향당의 유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호랑이가 빈 숲에 들어갔으니 장차 크게 포효하겠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22세에 걸음을 나서 화엄사로 향하였고, 처음으로 상월霜月 대사를 참예하였는데, 대사가 한번 보고는 깊이 그를 그릇이라 여겼다. 수년을 복역하고는 24세에 영남과 호남을 두루 유행하며 유명한 스님들을 두루 참방하였으니, 말하자면 영해影海113)ㆍ낙암洛庵114)ㆍ설봉雪峰115)ㆍ남악南岳116)ㆍ회암晦庵117)ㆍ호암虎巖118) 등 여러 대화상들이었다. 선과 교에 있어서 오묘함에 이르지 못한 것이 없어 이르는 곳마다 건드리기만 하면 툭 터져 명성이 크게 드러났으니, 이것이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가면 퍼지는 향기를 막기 어렵다는 것이다.
행각을 마치고 나서는 오직 돌이켜 관조하는 것으로 자기 업을 삼고 붓과 벼루를 거두어 바위에다 박살을 내었다. 견성암見性菴에서 지내며 『기신론起信論』을 독송하던 어느 날 밤,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단지 이 경지일 뿐임을 홀연히 깨닫고 신비로운 마음이 활짝 열렸다. 여명이 밝아 올 무렵에 여러 경을 손 가는 대로 잡고 살펴보니, 곧 말씀말씀이 과연 밤중에 깨달은 바와 같았다. 3일 후 꿈속에서 신비한 동자가 한 상자의 책과 열 장의 편지를 화상께 받들어 올렸는데, 그 편지 앞면에 진곡震谷이라 쓰여 있었으니, 그가 동방을 진동시킨다는 징조의 의미였을까? 화상은 스스로 깨달은 후에 더욱 명철해져 검은 장막을 추켜올리고 찾아오는 학인을 받아들여야 마땅했으나, 작은 것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욱 앞으로 나갈 것을 구하였다.
호남에 명진당冥眞堂 수일守一 대사가 계셨으니, 곧 월저月渚 스님의 고족제자로서 종안이 명백하고 견처가 고준하며 말씀에 메아리가 있고 구절 속에 칼을 감춘 자였다. 스님은 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 뵙고 싶어 하였다. 명진 스님 역시 스님의 소문을 듣고는 먼저 스님의 처소에 이르렀다. 이에 스님이 기뻐하며 “마침 저의 숙원이었습니다.” 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화장세계가 모든 곳에 변재하다면

009_0693_c_01L觀世無常深有出籠之志十九以出
009_0693_c_02L請于慈親親知不可强而䚷之
009_0693_c_03L投於甘露寺尙洽長老仍以祝髮受具
009_0693_c_04L於太虛堂就侃大德鄕黨儒士聞之
009_0693_c_05L歎曰虎入空林將有大咆二十二發
009_0693_c_06L足向華嚴寺初叅霜月大師大師一
009_0693_c_07L深器之服役數年而二十四遍
009_0693_c_08L遊嶺湖歷叅名師曰影海洛庵雪峰
009_0693_c_09L南岳晦庵虎巖諸大和尙也禪敎無不
009_0693_c_10L臻妙則到處扣決聲名大彰是謂
009_0693_c_11L麝過春山馨香難掩也行脚旣了
009_0693_c_12L以返照爲己業收筆硯碎石上在見
009_0693_c_13L性菴讀誦起信一日夜忽悟諸佛說
009_0693_c_14L只是這箇地神心豁然黎明諸經信
009_0693_c_15L手拈看則言言果如中夜所悟底也
009_0693_c_16L三日夢中神童以册一凾書十張
009_0693_c_17L擎授和尙而書面曰震谷意其振東
009_0693_c_18L方之徵耶和尙自覺後益有明徹
009_0693_c_19L褰緇帷納來學而不以得少爲足
009_0693_c_20L求前進湖有冥眞堂守一大師即月
009_0693_c_21L渚之高弟宗眼明白見處高峻
009_0693_c_22L中有響句裡藏鋒者也師聞而欲趍
009_0693_c_23L謁矣冥眞亦聆師之風猷先至師所
009_0693_c_24L師喜曰適我宿願也問曰華藏遍一

009_0694_a_01L현재 천당과 지옥은 마땅히 어느 곳에 있습니까?”
수일 장로가 대답하였다.
“회주의 소가 풀을 먹었는데, 익주의 말이 배가 터졌구나.”
또 물었다.
“이렇게 격식을 벗어나 서로 만났지만 진실로 단박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일전어를 청합니다.”
그러자 대답하였다.
“천하 사람들이 의원을 찾아 돼지 왼쪽 허벅지에다 뜸을 뜨네.”
스님이 이에 그 오의를 간파하고는 가슴으로 복종하였으니, 가히 신비로운 기틀이 서로 투합한 것이라 하겠다. 33세에 곧장 영원암靈源菴으로 들어가 십 년 동안 그림자가 산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했던 원공遠公의 맹세로 깊이 맹세하였다. 그리고 암자 동쪽 모퉁이에 손수 흙집을 건축하였고, 또 암자 서쪽 기슭에 사社를 하나 창건하고는 그 이름을 가은佳隱이라 하였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좌선할 장소로 삼고는 극기의 공부에 더욱 힘썼다.
아! 검이 신령하면 빛이 쏟아져 나오고 과일이 익으면 향기가 날리는 법이라. 석덕과 고사들이 팔도에서 다투어 달려왔으니, 가히 해동의 상다리가 부러지는 회상이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스님은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기반을 삼았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그렇게 비록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 5리에 깔린 안개의 시장을 결국 고함으로 흩어버리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대중이 너도나도 옹립하여 저절로 등용문으로 변화했으니, 이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룩한 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에게 이끌려 결국 본래의 맹세를 완수하지 못하고, 회문산廻門山 심원사深源寺와 동락산動樂山 도림사道林寺와 지리산智異山의 여러 암자를 두루 유행하며 교화의 시장을 널리 열었다. 그렇게 염송拈頌의 종지로 용상龍象들을 우리와 새장에 가두고 원돈圓頓의 법으로 총림叢林을 확 뒤집어 놓은 것이 20여 년이었다.
그가 단에 자리하여 법을 강설하면 그 소리의 운이 웅장한 파도와 같고 그 설명이 강이 하늘에 매달린 것 같았으며, 한 마디 한 마디 한 구절 한 구절이 사람들로 하여금 설 자리를 만들게 하였기에 본 자 들은 자들이 마치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은 듯하였다. 그리고 또 경론 중에서 단지 종지를 밝힐 것만을 요구하고 문장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는 교묘하지 않아 통발과 올가미119)만을 숭상하는 자들은 간혹 제접이 무미건조하다고 그를 나무랐다. 기사년(1749) 겨울에 상월 화상이 의발을 전하였는데, 앞뒤로 5년을 시봉하면서

009_0694_a_01L切處現今天堂地獄當在何處
009_0694_a_02L老答曰懷州牛喫草益州馬腹脹
009_0694_a_03L問曰此是格外相見實不頓入
009_0694_a_04L乞一轉語答曰天下人求醫灸猪左
009_0694_a_05L膊上師於是覰其粤而服膺之可謂
009_0694_a_06L神機相投也三十三直入靈源菴
009_0694_a_07L以遠公十年影不出山之誓爲誓而手
009_0694_a_08L築土窩於庵之東隅又創一社於庵之
009_0694_a_09L西麓名之曰佳隱以爲終年宴息之
009_0694_a_10L而益務克己工夫劒靈光射
009_0694_a_11L菓熟香飄碩德高士八表爭趍
009_0694_a_12L謂海東折床會也然師恒以自貶爲基
009_0694_a_13L故拒雖膠固其五里霧市終難喝
009_0694_a_14L因衆紛擁自化登門可不謂之
009_0694_a_15L無爲而成者耶被人所牽竟未遂本
009_0694_a_16L遍遊於廻門之深源動樂之道林
009_0694_a_17L智異之諸庵普開化市而以拈頌之
009_0694_a_18L牢籠龍象以圓頓之法掀翻叢
009_0694_a_19L林者二十餘年其臨坍講法則聲
009_0694_a_20L韻雄浪說河如懸言言句句令人
009_0694_a_21L搆取立地見者聞者若換骨洗膓焉
009_0694_a_22L而且於經論中只要明宗不巧釋文
009_0694_a_23L純尙筌蹄者或以提接無味譏之
009_0694_a_24L巳冬霜月和尙傳托鉢衣以前後

009_0694_b_01L깨달은 바가 많았다. 신미년(1751) 봄에 대중들에게 고하기를 “(상월 화상의) 명을 수행해 2년이 넘게 문자공부만 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는 결국 율시 한 수를 지었다.

强吐深懷報衆知  깊은 속내를 억지로 토해 대중에게 알리니
講坍虛弄說玄奇  강단에서 헛되이 희롱하며 현묘함과 기이함 설하였네
看經縱許年靑日  경전 보는 일 비록 젊은 날에야 허락되겠지만
念佛偏宜髮白時  백발이 되었을 땐 도리어 염불이 마땅하지
生死若非憑聖力  생사에서 만약 성인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昇沉無計任渠持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를 지탱할 방도가 없지
況復世間頗閙閙  하물며 또 세간은 자못 시끌시끌해
白雲幽谷有歸思  흰 구름 그윽한 골짜기로 돌아갈 생각이네

이를 대중에 게시하고는 강의를 그만두었다. 그러다 무인년(1758) 여름에 문도들이 강의를 받고자 다시 청한 까닭에 다시 대암臺庵에서 교화의 장을 열었으나 다음해 겨울에 다시 그것을 철회하였다. 그때 또 율시 한 수를 지었다.

閱經何歲月    경전 열람한 것 그 세월 얼마던가
空費鬂邊春    귀밑머리의 청춘만 공연히 낭비했네
托病知人險    험한 인심을 알기에 병을 내세우고
藏蹤厭世紛    세상의 분분함이 싫어 종적을 감춘다
谷風時至友    골짜기 바람은 때맞춰 찾아 주는 벗
松月自來賓    소나무에 달님은 저절로 오는 손님
定中知己在    선정 가운데 지기가 있으니
於道喜相親    도를 기뻐하며 서로 가까이하리라

전후로 대중을 물리고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익힌 것이 자못 옛사람의 행적과 같았다. 스님은 형체와 위의가 큰 언덕과 같았고, 성품과 도량이 넓은 바다와 같았으며, 부드러움으로 일을 처리하고 관대하게 대중에 임하였으며, 걸리는 바 없이 호탕하였으니, 그 거두고 펴는 기틀의 변화를 누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 문하에 노닌 제자들이라 해도 그 담장 안은 엿보질 못하였고,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간간이 찾아와 알현하고는 물러나면서 또 “직접 뵈니 소문보다 배는 더하다.”며 감탄하였다.
건륭 임오년(1762) 6월 27일에 입적하셨으니, 세수는 63세이고, 법랍은 44세였다. 임종할 때 시자에게 명하여 게송 한 구를 받아쓰게 하시며 말씀하셨다.
먼저 구품 연화대 위에 올라
옛 주인 아미타불을 우러러뵈리라
그런 다음 손수 유촉을 쓰셨다.
“사람의 삶 일어나고 사라짐이 구름이 허공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아 원래 실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어찌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여길 수 있겠는가. 도우들에게 바라노니, 즉시 다비하라. …….”
문인들이 그 유교를 한결같이 준수하였다.

009_0694_b_01L五侍多所悟益辛未春告徒曰
009_0694_b_02L命過二文字工夫豈不愧㦲遂作偈
009_0694_b_03L一律曰强吐深懷報衆知講坍虛弄
009_0694_b_04L說玄奇看經縱許年靑日念佛偏宜
009_0694_b_05L髮白時生死若非憑聖力昇沉無計
009_0694_b_06L任渠持況復世間頗閙閙白雲幽谷
009_0694_b_07L有歸思揭示大衆仍罷講焉戊寅
009_0694_b_08L門徒復請講受故再開化塲於臺
009_0694_b_09L翌年冬還撤之又作一律曰
009_0694_b_10L經何歲月空費鬂邊春托病知人險
009_0694_b_11L藏蹤厭世紛谷風時至友松月自來
009_0694_b_12L㝎中知己在於道喜相親盖前
009_0694_b_13L後退衆均習定慧者頗同古人也
009_0694_b_14L之形儀魁岸性度泓洋處事以柔
009_0694_b_15L衆以寬宕無所碍其卷舒機變
009_0694_b_16L能思議耶雖遊門之伍未窺其墻
009_0694_b_17L僧俗間來謁者退且唶曰面倍于耳
009_0694_b_18L至乾隆壬午六月二十七日入寂焉
009_0694_b_19L世壽六十三法臘四十四臨終時命
009_0694_b_20L侍者寫一句偈曰先登九品蓮臺上
009_0694_b_21L仰對彌陁舊主人次手書遺囑云
009_0694_b_22L生起滅如雲起長空元無所實
009_0694_b_23L可以不實爲實願道友等即時闍維
009_0694_b_24L云云門人等一遵遺敎焉闍維之夜

009_0694_c_01L다비하던 밤에 신비한 빛이 내원의 골짜기와 하늘에 두루 펼쳐져 밖에 있는 자들이 먼저 보았다. 문인들이 5재를 지내는 밤에 사리 5과를 수습하였으니, 바로 꿈에 감응한 일이었다. 이를 나눠 세 곳에 탑을 세웠으니, 즉 삭발한 곳인 감로사와 오랫동안 노닐던 곳인 파근사와 입적한 곳인 실상사였다. 또 스님께서 읊으신 가송歌頌 약간 편이 일찍이 산실되었는데 이제 겨우 백여 수를 모아 간행한다.
그러나 문장은 바로 도인의 여사이다. 무릇 청이 있으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붓 가는 대로 일필휘지하는 것이 마치 형산荊山에 사는 사람이 옥으로 까치를 쫓는 것 같았다. 따라서 간혹 음률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 도탑고 명석했던 신우神宇는 아무리 우러러도 엿볼 수 없고 세차게 용솟음쳤던 법의 바다는 아무리 굽어보아도 측량할 수 없으니, 진실로 허술한 글재주로 칭술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전하여 사라지지 않게 하고자 그 시말을 간략히 기술할 따름이다.
무자년(1768) 8월 일에 문인 혜암 윤장惠庵玧藏이 삼가 기록하다.

009_0694_c_01L神光周亘於內院洞天在外者先見
009_0694_c_02L人軰收五箇舍利於第五齋夕乃感夢
009_0694_c_03L分塔於三處即甘露寺之剃髮處
009_0694_c_04L波根寺之熟遊所實相寺之入寂地也
009_0694_c_05L又師所詠歌頌若干篇曾散失之
009_0694_c_06L今僅得百餘首刊行焉然文章乃道
009_0694_c_07L人之餘事凡有請則不經意而信筆揮
009_0694_c_08L若荊山之人以玉抵鵲也故或
009_0694_c_09L不中音律於戯敦碩神宇仰不可
009_0694_c_10L洶湧法海俯不可測實非弱辭
009_0694_c_11L所能稱述而爲傳不朽略記始末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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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仲秋日門人惠庵玧藏謹錄
  1. 113)영해影海(1668~1754)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약탄若坦이다. 전라도 고흥 분천粉川출신으로 10세에 출가하여 능가사楞伽寺 득우 장로得牛長老의 제자가 되었다. 17세에 수연秀演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이후 수연의 법을 이었다. 송광사松廣寺와 능가사楞伽寺에서 화엄의 교학을 강설하였다. 저서로 3권의 문집이 있었으나 2권은 없어지고 『影海大師文集』 1권만 전한다.
  2. 114)낙암洛庵(1666~1737)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의눌義訥이다. ‘낙암洛巖’이라고도 하고 능허凌虛라고도 하였다. 속성은 박씨朴氏로 경상북도 일선군一善郡 해평촌海平村 출신이다. 12세에 기양基陽의 곡대사谷大寺로 출가하여 황악산 모운慕雲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28세에 용문사龍門寺 상봉霜峰의 법을 잇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입적 직전에 “유골을 부도에 간직하거나 영정을 안치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제자 유기有璣 등이 행장을 짓고, 비는 현풍 유가사瑜伽寺에 세웠다.
  3. 115)설봉雪峰(1678~1738)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회정懷淨이다. 전라남도 영암 출신이며, 9세에 달마산達磨山 희명 장로熙明長老의 권유로 입산하여, 16세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 후 문신文信에게 경론經論을 배우고 그의 법을 이었다. 청빈한 생활에 여러 경전에 통달하여 남방의 모든 승려들이 그를 선림종주禪林宗主라 불렀다. 법을 이은 제자로 각훤覺喧 등 16명이 있다. 다비 후 사리 1과와 영주靈珠 1매를 얻어 미황사美黃寺에 탑을 세웠다. 김진상金鎭商이 찬술한 비가 있다.
  4. 116)남악南岳(?~1732)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태우泰宇이다. 전라도 용성龍城 출신이며, 청허淸虛의 6세손인 추붕秋鵬의 법을 이었다.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찬한 비문에 의하면, 이덕수李德壽와 매우 친하였고, 이덕수는 그를 호남의 종승宗乘이라 평하였다. 저서로는 『南岳集』 1권이 있다.
  5. 117)회암晦庵 : 주 10 참조.
  6. 118)호암虎巖(1687~1748)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체정體淨이다. 16세에 출가하여 지안志安의 법을 전수받았다.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 중 제10종사이고, 영남의 명찰인 통도사와 해인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만년에는 강석을 파하고 오직 선정禪定만 닦다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내원통암內圓通庵에서 입적하였다.
  7. 119)통발과 올가미(筌蹄) :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를 비유한다.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경론의 언구를 비유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