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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704_b_01L호은집好隱集해봉집海峯集 서문지금 어떤 이가 봉액縫掖1)을 입고 장보관章甫冠2)을 쓴 채 느릿느릿 걷거나 단정하게 앉아 있지만, 그 마음을 살펴보면 꽉 막혀 있고, 또 그 동기를 살펴보면 욕심 가득한 구덩이라면, 이와 같은 이를 유자儒者라 할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이가 방포方袍3)를 입고 염주를 메고 다니며 절할 땐 합장하고(膜拜4)) 여름에는 결제結制5)를 하나, 일삼는 것을 보면 『희역羲易』6)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온갖 문체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이를 승려라 할 수 있겠는가?겉으론 그럴듯하나 안으로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그렇지 않음’으로 그렇지 않다 여기고, 겉으론 그럴듯하지 않으나 속이 그럴듯하면, 나는 그 ‘그럴듯함’을 따라 그렇다 여기니, 그럴듯함이 과연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럴듯하지 않음이 과연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일전에 가야산의 승려 지학旨學이 천 리 길을 걸어 유양維揚7)의 초목사樵牧社로 나를 방문하였는데, 스승 해봉海峯의 글을 모은 문집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한마디 말을 구하고자 하였다. 나는 지학에게 말하였다.“이상하도다, 그대 스승의 말이여. 그대 스승은 승려로서 승려의 언어를 쓰는 것이 합당할 것인데, 지금 이 시문을 보면 겉으로는 가끔씩 서방의 게어偈語를 섞어 놓았지만, 글의 체재는 왕왕 조고가操觚家8)가 얽어 만든 경지가 아닌 것이 없고, 또한 그 감개 불평한 기운이 때때로 글의 가락 사이(音調之間)에 드러나 있으니, 어찌 그 까닭이 없겠는가? 나는 비록 대사를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 글을 통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도다. 내가 대사를 승려가 아니라고 한다면, 곧 대사는 진실로 승려였으니, 옳은 말이겠는가? 대사를 승려라 한다면, 곧 승려의 언어가 진실로 상응하지 않으니, 옳은 말이겠는가? 이상하도다, 그대 스승의 말이여. 내가 대사를 알 수 없다 말한다면 -
009_0704_b_01L[好隱集]
009_0704_b_02L1)海峯集序 [1]
009_0704_b_03L
009_0704_b_04L今有衣縫掖冠章甫。行則徐坐則危。叩
009_0704_b_05L其有。茅塞也。觀其由。慾坑也。若是者
009_0704_b_06L可謂之儒乎。衣方袍荷念珠。拜則膜。
009_0704_b_07L夏則結。問其業。羲易不離手。讀其
009_0704_b_08L文。象 [1] 體無不具。若是者可謂之釋
009_0704_b_09L乎。然於外不然於內。吾以其不然
009_0704_b_10L而不然之。不然於外然於內。吾從
009_0704_b_11L其然而然之。然果可不重之乎。不然
009_0704_b_12L果可不耻之乎。日伽倻僧旨學。千里
009_0704_b_13L飛錫。訪余於維揚 [2] 撨 [3] 牧社。袖其師海
009_0704_b_14L峯所裒錄一册。要得余一言。余進學
009_0704_b_15L而謂曰。異㦲。而師之語也。而師釋也。
009_0704_b_16L釋而爲釋。語可也。今其詩若文。以
009_0704_b_17L皮則徃徃雜西方偈語也。以體裁則無
009_0704_b_18L徃非操觚家結搆三昧。且其感慨不平
009_0704_b_19L之氣。有時呈露於音調之間。豈其無
009_0704_b_20L所以㦲。余雖不見師。余之得於文如
009_0704_b_21L此。余以師謂師之非釋也。則師固釋
009_0704_b_22L也。其可乎㦲。以師謂師之爲釋也。則
009_0704_b_23L釋之語。固不應爾。其可乎㦲。異㦲。
009_0704_b_24L而師之語也。使余言爲不知師者。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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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704_c_01L모르는 사람으로서 대사의 글에 서문을 쓸 수 없을 것이고, 과연 대사를 안다고 한다면 이미 말을 하였으니, 또 어찌 서문을 쓰겠는가?”지학은 한참이나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천천히 말하였다.“우리 대사는 본래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집안이 가난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마침내 여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뜻은 유학儒學에 두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온갖 불경(貝葉)에 비록 해박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좋아한 것은 『희역』이었습니다. 견성見星과 미묘한 뜻을 비록 강설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심복한 것은 유교였습니다. 그러나 대사는 일찍이 남들이 대사를 아는 것을 원치 않아서, 대사의 일은 대사와 두세 명의 아사리阿闍梨(스님)만 알고 있을 뿐 나머지 대중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글로써 대사를 아시고, 대사에 대하여 아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문장은 말을 담은 것이니, 방금 하신 말씀을 기록해 주시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또 우리 대사는, 공公이 예전에 지으신 봉암鳳巖 대사의 명銘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고문古文이로다. 내가 죽어서라도 공의 글을 얻는다면 죽어서도 영광이겠다’라 하셨으니, 대사께서 공을 안 것은 공이 대사를 아는 것보다 먼저였습니다. 감히 이로써 간청합니다.”나는 그러리라 하였다. 대사의 법명은 유기有璣요, 속성은 유씨柳氏로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의 후손이다. 9세에 속리산에 들어가 『소학』을 읽었는데, 눈으로 세 번 스치면 입으로 암송할 수 있었다. 15세에 낙발(落紺)하였고, 79세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시적示寂하였다. 화욕火浴하는 날 저녁에 정골頂骨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한다. 대사는 일찍이 자호를 호은好隱이라 하였는데, 대개 유자로서 부도浮屠에 숨은 자라 하겠다.성상聖上(정조) 9년(1785) 을사乙巳 5월(仲夏) 초하룻날 번암樊巖 채백규蔡伯䂓9) 쓰다. -
009_0704_c_01L可以不知。文師之文也。言果知師。已言
009_0704_c_02L之矣。又安用文爲。學瞠然久。徐以對
009_0704_c_03L曰。吾師本簪纓世。幼而失怙恃。家
009_0704_c_04L貧無所於托身。卒爲如來弟子。然意
009_0704_c_05L未甞不在於儒也。貝葉諸書。雖無不
009_0704_c_06L淹貫。乃若所嗜羲易也。見星微旨。雖
009_0704_c_07L無不講說。乃若所服儒敎也。然師甞
009_0704_c_08L不欲人知師。師之事。師知之。二三
009_0704_c_09L闍梨知之。餘人莫師知也。今公以文
009_0704_c_10L而知師。知師而言之。文言之載也。何
009_0704_c_11L有乎以是言而載之。且吾師見公甞
009_0704_c_12L爲鳳巖師作銘。歎曰。古文也。吾死而
009_0704_c_13L得公文。死亦榮矣。師之知公。在公之
009_0704_c_14L知師之先也。敢以是爲請。余曰諾。師
009_0704_c_15L法名有璣。俗姓柳。文簡公公權之裔
009_0704_c_16L也。九歲。入俗離山。讀小學。目三過
009_0704_c_17L口能誦。十五落紺。七十九。示寂于伽
009_0704_c_18L倻之海印寺。火浴之夕。頂骨超騰云。
009_0704_c_19L師甞自字曰好隱。盖儒之隱於浮啚 [4] 者
009_0704_c_20L也。
009_0704_c_21L聖上九年乙巳。仲夏。初吉。樊巖
009_0704_c_22L蔡白䂓書。
009_0704_c_23L{底}乾隆五十年蔡伯䂓書記本 (精神文化硏究
009_0704_c_24L院圖書館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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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봉액縫掖 : 예전에 선비가 입던, 옆이 넓게 터진 도포道袍. 『예기』 권41 「儒行」에 나오는 말로,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선생의 복服은 선비의 옷인가요?”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어려서 노나라에 살면서는 봉액의를 입었고, 자라서 송나라에 살면서는 장보관을 썼습니다. 군자의 배움이 넓다 해도 그 복은 그곳에서 입는 것을 따른다고 합니다.” 하였던 일이다.
- 2)장보관章甫冠 : 은殷나라 때의 관의 이름. 공자가 이 관을 썼다 하여 유자儒者의 관을 지칭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에 있는 자들이 평상복을 입을 적에 썼다.
- 3)방포方袍 : 가사袈裟. 가사의 모양이 네모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4)막배膜拜 : 합장하고서 절하는 것. 땅에 무릎을 꿇고 손을 올려 합장하는 방식이다.
- 5)결제結制 : 비구들이 여름 장마철에 90일 동안 한 곳에 있으면서 수행하는 기간. 하안거夏安居, 또는 우안거雨安居라고도 한다.
- 6)『희역羲易』 : 『周易』. 복희씨伏羲氏가 괘를 만들었다고 해서 유래된 명칭이다.
- 7)유양維揚 : 양주揚州의 다른 이름이다.
- 8)조고가操觚家 : 문장가. 고觚는 사각형의 나무 조각으로 목간과 비슷하다. 즉 문필에 종사한다는 뜻이다.
- 9)채백규蔡伯䂓 : 채제공蔡濟恭(1720~179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1743년 정시 문과에 급제했다. 1758년 도승지로 임명된 후 사도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철회시켰다. 1777년 벽파僻派의 정조 시해 음모를 사전에 적발했고, 1789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경종내수실록』과 『영조실록』, 『國朝寶鑑』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문집으로 『번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그는 한편 양명학·불교·도교·민간신앙을 모두 이단으로 비판했으며, 서학(천주교)에 대해서도 그것이 비문화적, 비윤리적, 비합리적이라고 보았다. 즉 서학이 무부무군無父無君한 논리이고, 그 내세관이 불교와 비슷하며, 이적異跡이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서문은 이러한 그의 종교관과는 상관없이 당대의 문장가로서의 명성에 따라 의뢰한 것으로 보인다. 연보를 보면 예조판서이던 채제공이 1781년에는 소론계 서명선徐命善 정권의 공격을 받고 낙향하였으며, 1786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삭직되었다가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서문을 쓴 1785년(정조 9), 권력에서 물러나 한거하던 시기에 양주의 별서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 1){底}乾隆五十年蔡伯䂓書記本 (精神文化硏究院圖書館所藏)。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김종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