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호은집(好隱集) / 好隱集卷之一

ABC_BJ_H0208_T_002

009_0705_a_02L
호은집 제1권(好隱集 卷之一)
총목차總目次
제1권
문文 1 / 15편
천도소薦悼䟽(11수)
『기신론소기』를 다시 판각하는 서문(重刻起信論䟽記序)
『신편보권문』 서문(新編普勸序)
『무하선사시고』 서(無瑕先師詩稿序)
김린 학사에게 드리는 게송(奉金學士偈)
여우 선자에게 보이는 글 서문(示如愚禪子序)
도리사 석종기桃李寺石鍾記
해인사 대종기海印寺大鍾記
반룡사 법당기盤龍寺法堂記
천주사기天柱寺記
봉향각기奉香閣記
함월당기含月堂記
약사전기藥師殿記
관불암기觀佛菴記
청련암기靑蓮菴記
제2권
문文 2 / 28편
낙암 화상 제문(祭洛巖和尙文)
신청천 선생 제문(祭申靑泉先生文)
홍제 존자 제문(祭弘濟尊者文)
무하 선사 제문(祭無瑕先師文)
김중거 제문(祭金重擧文)
김치경 제문(祭金致卿文)
구씨 제문(祭仇氏文)
구씨 만사(挽仇氏)
고 처사 만사(挽高處士)
관 노숙 만사(挽寬老宿)
초 노숙 만사(挽初老宿)
이 동지만사(挽李同知)
김치경 만사(挽金致卿)
한계 대사 찬(寒溪賛)
함월 대사 찬(涵月賛)
환운 스님 찬(幻雲賛)
야봉을 찬하며(冶峰賛)
해인사 복고 사적비海印寺復古事蹟碑
해인사 봉황문 상량문海印寺鳳凰門上梁文
용연사 범음각 상량문龍淵寺梵音閣上梁文
천주사 대웅전 상량문天柱寺大雄殿上梁文
완월루 상량문翫月樓上梁文
대적사 법당 상량문大寂寺法堂上梁文
옥천암 상량문玉泉菴上梁文
청련암 상량문靑蓮菴上梁文
관불암 상량문觀佛菴上梁文

009_0705_a_02L好隱集卷之一

009_0705_a_03L

009_0705_a_04L1)總目次

009_0705_a_05L
卷一

009_0705_a_06L
文(一)十五篇

009_0705_a_07L
薦悼䟽十一
重刻起信論䟽記序
009_0705_a_08L編普勸序無瑕先師詩稿序奉金
009_0705_a_09L鱗學士偈幷序示如愚禪子序
009_0705_a_10L李寺石鍾記海印寺大鍾記盤龍
009_0705_a_11L寺法堂記天柱寺記奉香閣記
009_0705_a_12L含月堂記藥師殿記觀佛菴記
009_0705_a_13L靑蓮菴記

009_0705_a_14L
卷二

009_0705_a_15L
文(二)二十八篇

009_0705_a_16L
祭洛巖和尙文祭申靑泉先生文
009_0705_a_17L弘濟尊者文祭無瑕先師文祭金
009_0705_a_18L應鼎重擧文祭金致光致卿文
009_0705_a_19L仇氏文挽仇氏挽高處士挽寬
009_0705_a_20L老宿挽初老宿挽李同知挽金
009_0705_a_21L致卿寒溪賛涵月賛幻雲賛
009_0705_a_22L峰賛海印寺復古事蹟碑海印寺
009_0705_a_23L鳳凰門上梁文龍淵寺梵音閣上梁文
009_0705_a_24L天柱寺大雄殿上梁文翫月樓上梁文
009_0705_a_25L大寂寺法堂上梁文玉泉菴上梁文
009_0705_a_26L靑蓮菴上梁文觀佛菴上梁文

009_0705_b_01L청암난야 상량문淸巖蘭若上梁文
칠성전 상량문七星殿上梁文
제3권
시문詩文 1 / 46편
용천사 명부전 양간록湧泉寺冥府殿樑間錄
유가사 대웅전 양간록瑜伽寺大雄殿樑間錄
지장사 승당 양간록地藏寺僧堂樑間錄
봉서사 권선문鳳棲寺勸善文
범음각 권선문梵音閣勸善文
화적이 상서를 보인 것에 대한 글(和寂出瑞文)
소옥행小屋行
서산가西山歌
야용가夜舂歌
남악 장로의 운을 따라(和南㠋長老韻(6수))
환운 도남의 운을 따라(次幻雲圖南韻)
한가로이 읊다(漫吟(4수))
유거幽居
졸직拙直
운명運命
등고登高
연지회蓮池會
회당비탑영晦堂碑塔影
벽허실 화엄대회에 참가하다(參碧虛室華嚴大會)
회포를 적다(寫懷)
늦봄에 느낌 있어(晩春有感)
빗속에서 대화하다(雨中會話)
현 법려에게(與賢法侶)
무진 중구일에 대견사 옛 절터에 올라(戊辰重九登大見寺古址(4수))
우연히 읊다(偶吟(3수))
경신년 병중에(庚申年病中(2수))
을미년 가을 유람(乙未秋遊(2수))
만음漫吟
대나무를 읊다(咏竹)
상 법려에게 주다(與祥法侶)
일 법려에게 주다(賽日法侶)
원곡 법려에게(與源谷法侶)
회포를 적다(述懷)
지나는 길손의 시에 화답하다(和過客韻)
상춘賞春
탄국嘆菊
화양 수석華陽水石
가야산 고운의 물음에 답하다(答伽倻山孤雲問)
기미년 봄 하ㆍ식 두 벗과 화개동에서 노닐다(己未春與遐湜兩友玩花開洞)
옛 성에서 묵으며(宿古城)
마을을 나서며(出洞)
영대사靈臺社
만음漫吟
또 한 수(又)
또 한 수(又)
칠성전七星殿
혜 법려에게(與慧法侶)
설간 초사에게(贈雪磵初師)
제4권
시문詩文 2 / 12편
임제종 회당 화상 행적기臨濟宗晦堂和尙行蹟記
현풍 비슬산 유가사기玄風毘瑟山瑜伽寺記
가야산 중봉암기伽耶山中峯菴記
염정 상인에게 주는 게송(與定上人偈)
비슬산 법려를 보내며(送瑟山法侶)
기해년 가을 홍류동에서 걸어서 절에 오르다(己亥秋踏自紅流洞登寺閣)
한가한 날에 가야산 정상에 오르다(暇日登伽耶山頂)
삼가 최치원의 홍류동 시에 차운하여(敬次崔仙紅流洞韻)
우객을 만나 밤새워 이야기하다(逢羽客夜話)
벽암 존자 영감기碧巖尊者影龕記
벽암 존자 영찬碧巖尊者影讃

009_0705_b_01L巖蘭若上梁文七星殿上梁文

009_0705_b_02L
卷三

009_0705_b_03L
詩文(一)四十六篇

009_0705_b_04L
湧泉寺冥府殿樑間錄瑜伽寺大雄
009_0705_b_05L殿樑間錄地藏寺僧堂樑間錄
009_0705_b_06L棲寺勸善文梵音閣勸善文和寂
009_0705_b_07L出瑞文小屋行西山歌夜舂歌
009_0705_b_08L和南㠋長老韻
次幻雲圖南韻
009_0705_b_09L
幽居拙直運命登高
009_0705_b_10L池會晦堂碑塔影參碧虛室華嚴
009_0705_b_11L大會寫懷晩春有感雨中會話
009_0705_b_12L與賢法侶戊辰重九登大見寺古址

009_0705_b_13L偶吟
庚申年病中
乙未秋遊

009_0705_b_14L漫吟咏竹與祥法侶賽日法侶
009_0705_b_15L與源谷法侶述懷和過客韻
009_0705_b_16L嘆菊華陽水石答伽倻山孤
009_0705_b_17L雲問己未春與遐湜兩友玩花開洞
009_0705_b_18L宿古城出洞靈臺社漫吟

009_0705_b_19L七星殿與慧法侶贈雪磵初師

009_0705_b_20L
卷四

009_0705_b_21L
詩文十二篇

009_0705_b_22L
臨濟宗晦堂和尙行蹟記玄風毘瑟
009_0705_b_23L山瑜伽寺記伽耶山中峯菴記
009_0705_b_24L定上人偈送瑟山法侶己亥秋踏
009_0705_b_25L自紅流洞登寺閣暇日登伽耶山頂
009_0705_b_26L敬次崔仙紅流洞韻逢羽客夜話
009_0705_b_27L巖尊者影龕記碧巖尊者影讃

009_0705_c_01L호은우부 자전好隱愚夫自傳
해봉 대사 영찬海峯大師影讃
발문
문文 1
천도소11수. 대신 짓다.

1
사람의 목숨은 숨 한 번 내쉬고 들이마시는 사이에 있으니, 은사님을 영원히 작별함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불법은 돛대 같아서 고해를 빠르게 건네주나니, 작은 정성을 펼쳐 우러러 자존慈尊을 더럽히나이다. 삼가 생각건대 선사先師께서는 환허幻虛에게서 가사를 물려받으셨으니 실로 동운東雲의 손제자이시고, 이 땅에 감로를 뿌리셨으니 곧 임제臨濟의 원손遠孫입니다. 선사께서는 처신은 부드럽게 하셨고, 남에게는 온화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병에 걸려 삼상三常1)을 버리셨으니, 60년의 광음은 홀연히 봄날의 꿈이 되어 버렸고, 삼칠일의 다비茶毘 불은 가을 노을처럼 불붙었습니다.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올 때에 어찌 성인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법려를 초빙하여 삼가 치재癡齋2)를 올립니다. 낮에는 칠축七軸3)의 『법화경』을 낭랑하게 창하니, 글자마다 구절마다 묘법이 아님이 없고, 밤에는 삼단三壇의 승회勝會를 엄정히 진설하니, 쟁반마다 그릇마다 모두 정결한 음식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삼보께서는 이 외로운 영가를 어여삐 여기사 진진세계塵塵世界에 해탈하여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게 하시고, 어리석은 중생들도 때를 따라서 왕생하게 하소서.


2
스승은 어버이와 같나니 어찌 입적하신 근심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곧 중생을 구제하나니 자비로운 교화를 널리 펼치십니다. 삼가 작은 정성을 다하여 성총聖聰에 우러러 고하나이다. 삼가 생각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허우적거리는 덧없는 인생으로 쏜살같이 반세기를 지내오셨는데, 뜻하지 않게 병을 얻어 백 년의 이별을 하였습니다. 스승의 모습이 자주 꿈에 들어와 잊히지 않으나, 혼을 되돌릴 방법이 없어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슬픈 마음을 일으킨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극락에 초승超升할 길을 닦는 것만 못할 것이기에, 오늘 백 일째 되는 날을 맞이하여 특별히 삼귀三歸의 예를 마련합니다. 향 연기는 하늘하늘 올라가니 팔릉八棱의 상서로움인 듯하고, 북소리 둥둥 울리니

009_0705_c_01L
好隱愚夫自傳
009_0705_c_02L海峯大師影讃

009_0705_c_03L

009_0705_c_04L2)文(一)

009_0705_c_05L薦悼䟽十一首
代人作

009_0705_c_06L
人命在呼吸痛永訣於恩師佛法如
009_0705_c_07L船檣庸遄超於苦海俯攄微悃
009_0705_c_08L凟慈尊伏念先師受屈眴於幻虛
009_0705_c_09L東雲之三世灑甘露於仁域迺臨濟
009_0705_c_10L之遠孫處己以柔敎人以愻偶示
009_0705_c_11L一疾奄棄三常六十年之光陰儵忽
009_0705_c_12L春夢三七日之化火炟爀秋虹欲報
009_0705_c_13L師恩盍借聖力故迎法侶敬設
009_0705_c_14L癡齋七軸蓮經朗唱於晝兮字字
009_0705_c_15L句句無非妙法三壇勝會嚴設於
009_0705_c_16L夜兮盤盤器器盡是淨飡伏願三
009_0705_c_17L垂憐一靈得脫塵塵世界旅去
009_0705_c_18L旅來蠢蠢衆生隨遇隨度

009_0705_c_19L
師者猶父豈堪傾逝之夏佛則濟人
009_0705_c_20L誕布慈悲之化俯輸愚悃仰告聖聦
009_0705_c_21L伏念亡師汨汨淨生駸駸半世
009_0705_c_22L染一疾永訣百年頻入夢而未忘
009_0705_c_23L返魂其無術徒興哀而怎補寧修路
009_0705_c_24L於超升玆當百日之辰特設三歸之
009_0705_c_25L香煙裊裊依俙八棱之祥鼓聲
009_0705_c_26L總目次編者作成補入「文一」編者補入

009_0706_a_01L육종六種4)의 변화와 방불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큰 믿음을 발하여 죄성罪性이 본래 공空한 자리에 도달하시고, 법력法力에 힘입어 무명無明을 없애시고 항상 청정한 혜안慧眼을 여시기 바랍니다.


3
십지十地5)와 삼승三乘6)이 모두 중생을 성역聖域에 오르게 하나,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은혜는 오직 우리 여래가 최고이십니다. 천 상자, 만 꾸러미의 경전이 다 부처님 마음(佛心)에서 나왔으나, 고해에서 건져 주는 공덕은 오직 이 『법화경』이 가장 높습니다. 하늘에서 네 가지 꽃7)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서로움이 있고, 땅이 여섯 가지로 솟구치는 상서로움이 있습니다. 다보여래多寶如來8)가 듣고 증명하여 시방에 몸을 나누시고, 보현普賢보살의 행문行門에 천 개의 물결이 다투어 일어나고, 문수文殊보살의 지혜의 몸(智體)은 푸른 하늘까지 뻗칩니다. 묘법에 어찌 고금이 있겠습니까? 영각靈覺은 생사에 막히지 아니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본디 무명無明의 술에 취하여 유루有漏의 병에서 벗어나지 못하셨으며, 은애恩愛의 바다 가운데 떴다 가라앉기를 쉼 없이 하셨고, 아我와 인人의 산 (人我山)9) 위에서 오고 가기를 끊임없이 하셨습니다. 보배로운 곳에 나아가고자 할 때 어찌 법선法船을 빌지 않겠습니까? 고로 육화六和10)의 명망 있는 스님을 모시고 함께 일승一乘의 진전眞典을 풍송諷誦하오니, 글자마다 화택을 벗어나고 구절마다 흰 소(白牛)를 타소서. 향로에는 연기 없는 맑은 향을 피어 올리고 사발에는 눅눅하지 않은 감로를 담아 놓았습니다. 먼저 이 공덕으로 삼가 바라옵나니, 주상 전하께서는 성수聖壽가 늙지 않고 지덕至德이 끝없이 이어지소서. 다음으로 바라옵나니,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이번에 법문을 듣는 좋은 인연으로 저 고통 없는 정토에 왕생하소서. 또 바라옵나니, 재를 올리는 이와 단월 등은 특별히 오늘 각자 선업을 생각한 것을 가지고 함께 훗날 만복萬福의 씨앗을 짓도록 하소서.


4
대법왕大法王이 중생을 접인하는 힘은 겁이 다하도록 끝이 없으십니다. 저희 소제자小弟子들이 선사를 추천하는 정성이 뼈를 간다 한들 어찌 애석하겠습니까? 이에 슬픔과 정성을 다해 자존慈尊께 비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견고하지 아니한 꿈 같은 세상에서 허깨비 같은 몸을 문득 벗으시니, 어찌 한번 이별함에 천추 동안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는지요. 달은 텅 빈 창에 차갑고,

009_0706_a_01L鼕鼕彷彿六種之變伏願亡師
009_0706_a_02L佛加而發大信達罪性之本空乘法
009_0706_a_03L力而滅無明開慧眼之常淨

009_0706_a_04L
十地三乘皆踐聖域而利物之恩
009_0706_a_05L我如來爲㝡千凾萬軸悉自佛心
009_0706_a_06L拔苦之德獨此蓮經居高天雨四花
009_0706_a_07L之祥地湧六種之瑞多寶之證聽
009_0706_a_08L方之分身普賢之行門千波競起
009_0706_a_09L殊之智體一亘靑空妙法豈有古今
009_0706_a_10L靈覺不干生死伏念亡師自醉無明
009_0706_a_11L未脫有漏痾恩愛河中漂沉之
009_0706_a_12L幾度我人山上徃復之無休欲進
009_0706_a_13L其寶所盍借乎法船故邀六和之名
009_0706_a_14L同諷一乘之眞典字字離火宅
009_0706_a_15L句駕白牛爐中焫無煙之淸香甌裏
009_0706_a_16L貯不濕之甘露先以此功德伏願主
009_0706_a_17L上殿下聖壽不老至德無彊次願
009_0706_a_18L亡師藉此聞法之良緣生彼脫苦之
009_0706_a_19L淨界抑願齋者檀越等好將今日一
009_0706_a_20L念善共作他世萬福因

009_0706_a_21L
大法王接人之力窮劫無垠小弟子
009_0706_a_22L薦師之誠粉骨何惜故竭哀恪
009_0706_a_23L丐慈尊伏念亡師夢世匪堅幻軀
009_0706_a_24L奄脫夫何一別永隔千秋月冷空

009_0706_b_01L향 연기는 고즈넉한 전각에 사라집니다. 깊이 애통한 생각뿐이온데 벌써 3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울고 울어도 다시 뵐 수 없고, 아득하고 아득하오니 추천하여 재를 올리는 것만 못합니다. 이에 주머닛돈을 쏟아내어 특별히 법회를 여오니, 겨자 같은 인연이 비록 작으나 능감菱鑑을 두루 비추어 주십시오. 삼가 바라옵나니,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제불의 나롱羅籠11)을 입어 삼유三有12)에 빠짐을 면하소서. 칠중항수七重行樹13)의 가지에 이는 바람 소리 들으며 소요하시고, 팔공덕지八功德池14)의 연화蓮華를 밟으며 유희자재遊戱自在하소서.


5
스승을 여의고 의지할 곳 없으니, 아득하기가 바다에서 뒤집힌 배와 같습니다. 부처님께 의지하여 은덕을 갚는 것이 어찌 길에서 인도하는 대도사大導師를 만난 것과 다르겠습니까? 이에 어리석은 충정을 다하여 감히 혜안을 더럽힙니다. 삼가 생각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따스한 성품과 고요한 행실로 지기志氣가 곧고 밝았습니다. 부처님을 정성으로 모셨고, 대중을 선善으로 제접하였습니다. 대명大命이 갑자기 칠십이 되어 맑은 혼이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 합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이 보잘것없는 후생은 외람되이 후한 은혜를 입었으니, 흰옷을 벗고 검게 물들인 옷을 입은 후로는 실마다 대사의 옷이요, 수저 들고 저를 놓은 사이에 낱낱의 밥알이 모두 대사의 밥이었습니다. 일찍이 없었던 은혜 갚고자 하나 티끌로 산에 보태는 것이니, 부끄러움을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땀이 흘러 냇물을 이룹니다. 3일 동안 사유闍維15)하며 백 번 절하고 은밀한 도움을 청합니다. 연화蓮華의 오묘한 비결은 여러 사람의 입으로 거양하며, 어산魚山의 비밀스런 노래는 높은 누각에서 창하옵니다. 하루 낮밤의 재력齋力에 향 연기가 이내(霞)를 이루고, 십법계十法界16)가 함께 맞이하니 감로가 발우에 가득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부처님이 내려 주신 보살핌을 입어 곧바로 구품 정토에 왕생하시고, 법의 향기에 힘입어 속히 삼세의 고통 그물에서 벗어나소서. 인연을 거듭 이어 내생에서 만나기를 바라나, 또한 면목面目으로 이별함이 실로 애통한 오늘입니다. 남은 액을 흠뻑 적셔 메마른 무리들을 다 젖게 하소서.


6
능인能仁의 천백억 화신은 비록 옥호玉毫17)라도 볼 수 없습니다만,

009_0706_b_01L烟滅古殿長痛一念遽値三霜
009_0706_b_02L泣兮泣兮末由再覿杳矣杳矣
009_0706_b_03L若追修玆傾囊儲特設法會芥緣
009_0706_b_04L雖狹菱鑑即周伏願亡師蒙諸佛
009_0706_b_05L之羅籠免三有之淪溺七重行樹
009_0706_b_06L風柯以逍遙八功德池蹹蓮華而遊
009_0706_b_07L

009_0706_b_08L
失師無依杳如海覆舟檝仗佛報
009_0706_b_09L何殊路得導翁肆竭愚衷敢塵
009_0706_b_10L慧眼伏念亡師性行温靜志氣貞
009_0706_b_11L奉佛以誠接人以善大命奄忽
009_0706_b_12L於七袠淸魂返合於一源顧此藐生
009_0706_b_13L猥受厚渥脫白着緇後絲絲師之衣
009_0706_b_14L拈匙放箸間粒粒師之食報效未有
009_0706_b_15L坋附以足岳慚愧豈勝汗下而成流
009_0706_b_16L三日設闍維百拜請陰隲蓮華妙訣
009_0706_b_17L衆口而擧揚魚山秘歌高樓而發唱
009_0706_b_18L一晝夜之齋力香煙結霞十法界之
009_0706_b_19L咸邀甘露滿鉢伏願亡師蒙佛降
009_0706_b_20L直徃九品淨邦乘法垂薰速脫
009_0706_b_21L三世苦網因緣之重續雖望來生面目
009_0706_b_22L之且辭實慟今日餘液攸沐枯類
009_0706_b_23L俱霑

009_0706_b_24L
能仁千百億身雖玉毫而莫覩蓮經

009_0706_c_01L연경蓮經의 이십팔품은 곧 금구金口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륜왕의 계주髻珠18)를 감히 궁자窮子에게 망령되게 전하였으나, 거름치는 삼태기를 갑자기 놓기 어려웠습니다. 세 수레의 인유로 화택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십여十如19)를 열어 천진天眞을 보이신 것은, 바로 고해苦海를 건너는 자비의 배 (慈航)요, 극락 언덕에 오르는 보배 뗏목(寶筏)입니다. 지전紙錢을 살 때 천당이 이미 화현化現하고, 제목을 창할 때에 지옥이 곧 공空이 됩니다. 삼가 생각건대 돌아가신 스승은 염부閻浮에서 살아오며 장주 동산의 꿈(莊園之夢)을 깨지 못하였으니, 죽어 안양安養에 가려면 반드시 굴산崛山20)의 글을 빌어야 할 것입니다. 고로 사의裟衣의 법사를 맞이하여 패엽貝葉의 보배로운 게송을 낭송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옥호의 빛(毫光)이 비추어 영가를 정토에 인도하시고, 하늘 꽃이 흩날릴 때 본성本性에 오묘한 인연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7
스승이 안 계시니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해로하자던 약속이 영원히 어긋나매 탄식할 뿐입니다. 부처님이 계셔 의지할 수 있기에 간절한 마음을 다하여 명복을 비옵니다. 사자좌(猊座)를 우러러보며 작은 정성을 펴옵니다. 기(幡)에는 삼신三身21)의 변상도를 걸어 놓고 하루 낮의 재회를 열었습니다. 단상에는 육종六種의 좋은 음식22)을 쌓아 놓고, 향로에는 오분향五分香23)을 사릅니다. 삼가 생각건대 돌아가신 스승은 유루有漏의 선인善因을 혹 연화煙火의 세월에 많이 닦았다 하더라도, 무위無爲의 묘과妙果를 선탈(蟬蛻)할 때에 증득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다만 넋을 연꽃 속에 의탁하여 진실로 나계螺髻24)를 맺는 인연을 맺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육화六和를 갖춘 청정한 스님(淨侶)을 청하여 일승一乘의 비전秘詮을 봉독하옵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 성인께서는 그윽한 가피를 내려 주셔서 외로운 혼이 다겁多劫을 넘어 안양세계에서 아미타불을 예경하도록 하기를 진정 바라옵니다. 도사다천覩史多天25)에서 미륵부처님을 뵙는 것도 바라는 바이옵니다.


8
스승께서 길을 떠나신 후 벌써 칠칠일을 맞이하는데, 혼령은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26) 다만 천천千千27)에 쌓이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긴 해 동안 슬픔을 머금는 것보다는 어찌 하룻밤 동안이라도 명복을 비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에 정성스런 마음 다하여 백호白毫를 예경하나이다. 삼가 생각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담대하면서도 자애롭고 덕망이 있어

009_0706_c_01L二十八品乃金口之所宣輪王髻珠
009_0706_c_02L敢妄傳窮子糞器卒難放三車之引
009_0706_c_03L出火宅十如之開示天眞寔可渡苦
009_0706_c_04L海之慈航登樂岸之寶筏買紙之時
009_0706_c_05L天堂已化唱題之頃地獄即空
009_0706_c_06L念亡師生來閻浮未覺莊園之夢
009_0706_c_07L去安養必借崛山之文故迎裟衣之
009_0706_c_08L法師朗誦貝葉之寶偈伏乞毫光照
009_0706_c_09L引靈駕於淨邦天花散時得妙
009_0706_c_10L因於本性

009_0706_c_11L
無師何怙嘆白首之永違有佛堪依
009_0706_c_12L竭赤心以禱薦仰䂁猊座俯申螘忱
009_0706_c_13L幡懸三身會設一晝壇上飣六種之
009_0706_c_14L爐中焫五分之香伏念亡師
009_0706_c_15L漏善因或多修於煙火之日無爲妙
009_0706_c_16L恐未證於蟬蛻之時直欲使神托
009_0706_c_17L蓮胞實可得緣結螺髻故請六和
009_0706_c_18L之淨侶捧讀一乘之秘詮伏願諸聖
009_0706_c_19L垂冥加孤魂超多劫安養世界
009_0706_c_20L彌陁㝡宜覩史多天見彌勒亦得

009_0706_c_21L
師也貪程時已臨於七七魂兮無嗅
009_0706_c_22L恨徒積於千千與其長年之銜哀
009_0706_c_23L若一夜之追薦輒罄赤悃敬禮白毫
009_0706_c_24L伏念亡師膽大而心慈德望仁勇之

009_0707_a_01L인자함과 용맹이 홀로 무리 가운데서 높았고, 용 같은 걸음과 범같이 바라보는 얼굴이 있어 용모와 위의가 다른 이들과 매우 달랐습니다. 비록 일생 동안 허물된 생각이 없었다 하더라도 혹 다겁 동안 원한의 빚이 있다면, 만약 성인의 힘을 빌지 않으면 진실로 그 범속하고 미혹함을 어찌 벗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재의齋儀를 갖추어 삼가 공손히 의식(禮數)을 펼칩니다. 환하디 환한 등촉의 빛은 북두성과 견우성 자리를 비추고, 무리지은 깃발과 꽃(幡花)은 그 색깔이 촉 땅(蜀川)의 비단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삼가 비옵나니 삼보께서는 외로운 혼령을 접인하시고 훨쩍 뛰어넘게 하셔서 구품九品의 연지蓮池를 생을 받는 곳으로 만들어 주시고, 칠중항수七重行樹를 유희하는 곳으로 이루어 주소서.


9
보살이 몸을 나투어 중생에 응하신 것은 달이 천 강에 인印치는 것에 감응한 것이고, 명부冥府의 왕이 거울을 걸어 놓고 업을 비추는 것은 메아리가 모든 골짜기에 다 울리는 것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정성을 다함이 이같이 절실한데 이익을 얻음은 왜 이리 더딘지요? 이에 치재癡齋를 진설하여 삼가 여러 성인들께 기원합니다. 저 이미 떠난 분은, 곧 저희 양사養師로서 임금이나 부모와 그 의리가 같으니 은혜 무겁기가 산과 바다 같습니다. 백배 천배 하며 절하는 것은, 오직 열왕列王의 강림을 위해 절하는 것이고, 좌로 구하고 우로 구하며 구하는 것은, 다만 여러 성인의 보살핌을 구할 따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저승길에서 천도됨을 얻어 빠르게 서방에 왕생을 얻고, 자성自性의 미타彌陁를 환히 밝히고, 유심唯心의 정토淨土를 완전히 깨우치소서.


10
한 생각 선하고 악한 것에도 반드시 복과 재앙이 따르나니, 시왕전의 성현들이 고통과 즐거움을 자세히 분간하여 주십니다. 넓고 넓은 하늘 그물을 그 누가 뚫고 나가리오. 밝고 밝은 업경業鏡은 진실로 피하기 어렵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살아오면서 드러나는 허물은 없으셨지만 돌아가신 뒤에는 혹 막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천도하는 힘이 없다면 어찌 훨쩍 뛰어넘는 방편이 있으리오. 이에 남은 재물을 다하여 삼가 저승길을 닦습니다. 가느다란 향의 연기는 향로에서 멀리 피어오르고, 겹겹의 등불은 들보 위에 달처럼 걸려 있습니다. 삼가 비옵건대 명부 사자시여, 이 재를 올리는 사람의 정성을 보살피사 저 고해에 빠진 영가를 건져 주소서.


009_0707_a_01L獨高於衆龍行而處視眉目容儀之
009_0707_a_02L特異於人雖則一生無諐尤慮
009_0707_a_03L多劫有寃債倘不假於聖力良難脫
009_0707_a_04L其凡迷故蕆齋儀恭申禮數晃晃
009_0707_a_05L燈燭光射斗牛之墟蔟蔟幡花
009_0707_a_06L奪蜀川之錦伏乞三寶接引一靈超
009_0707_a_07L九品蓮池可作受生之所七重行
009_0707_a_08L便成遊戱之方
菩薩之分身以應
009_0707_a_09L感月印於千江冥王之掛鏡而炤
009_0707_a_10L因響徹於羣壑輸誠若切蒙益
009_0707_a_11L奚遲肆設癡齋伏祈列聖念彼已
009_0707_a_12L曰余養師君父義同山海恩重
009_0707_a_13L拜千拜所拜者唯拜列王之臨左求
009_0707_a_14L右求所求者只求諸聖之鑒伏願亡
009_0707_a_15L幸得薦於冥路遄獲生於西方
009_0707_a_16L明自性之彌陁了達唯心之淨土

009_0707_a_17L
一念之善惡必有慶殃十殿之聖賢
009_0707_a_18L詳分苦樂恢恢天網有誰透昭昭業
009_0707_a_19L鏡良難逃伏念亡師生來且無顯瑕
009_0707_a_20L死去恐有幽滯若非追薦之力安得
009_0707_a_21L超升之方肆殫羨財恭修冥路
009_0707_a_22L縷香氣騰霞於爐中層層燈光
009_0707_a_23L月於樑上伏乞冥司鑑此齋者之誠
009_0707_a_24L濟彼亡靈之沉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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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살았을 때 행한 선악은 방촌方寸만큼도 그냥 넘어가지 않나니, 죽은 후에 승침昇沈하는 것은 명부冥府에서 총괄하여 판결합니다. 마음의 자취는 쉽게 만들어지고 업경業鏡28)은 속이기 어렵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한 번 앓으신 뒤로 차도가 없어 백 년의 긴 이별을 하였습니다. 어느덧 백일이 되었는데 외로운 혼령은 어디를 가셨는지요? 세상에 있어 꿈이 무르익을 때 어찌 허물이 없었으리오. 껍질을 벗고(脫殼)29) 곡천縠穿30)한 후에는 응당 깊은 어둠 속에 막혀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법력에 의지하여 저승길을 닦고자 합니다. 이에 한평생의 넘치는 재물을 다하여 삼단三壇의 승회勝會를 건립합니다. 단지에는 만행화萬行花31)를 꽂아두고, 향로는 오분향五分香 연기를 토해냅니다. 삼가 바라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는 해탈하시어 얽어 매임 없으시고, 천상으로 오르되 지옥으로 빠지지 마십시오. 온갖 생각을 다 내려놓고, 덧없는 인생이 참으로 더부살이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 합하고, 대도大道를 밟아 영원한 영화를 누리소서.
『기신론소기』를 다시 판각하는 서문
아, 대괴大塊32)가 한 번 갈라지자 『역易』의 도가 절로 뚜렷이 드러났도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오직 성현만이 이를 알았도다. 성현은 멀리 후학들도 모두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림으로 이를 보이시고, 문장으로 이를 밝게 드러내셔서 『십익十翼』33)과 전의傳義를 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학자들은 삼역三易34)의 표表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걸음을 옮기기 어려우니, 무릇 성현이 학자에게 바라는 바가 더욱 절실할수록 학자들이 성현을 외롭게 하는 일이 더욱 많구나. 『기신론起信論』은 마명 존자馬鳴尊者가 지은 것으로, 현수 국사賢首國師는 소疏를 붙이고, 석벽石壁과 장수長水 대사는 광기廣記와 약기略記를 지었다. 그러나 배우는 이의 수준이 점점 내려가서 점점 그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본론에 말한 바, “법은 언설과 문자를 벗어난다.(法離言說名字)”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와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근자에 젊고 배움 욕심 많은 무리들이 사사로이 두찬杜撰35)을 더하여 장황하게 본기本記를 해설하여 겨울 한철이나 여름 반 철 동안에 장구章句를 대충 섭렵하고는 사람들에게 과시하며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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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前之善惡方寸靡踰死後之升沉
009_0707_b_02L冥司摠判心影易立業鏡難欺
009_0707_b_03L念亡師一疾弗瘳百年永別百日
009_0707_b_04L奄至一靈何之居世夢熟寧無纇
009_0707_b_05L脫殼縠穿應滯幽暗庶資法力
009_0707_b_06L用修冥程殫一生之羨貲建三壇之
009_0707_b_07L勝會樽中揷萬行之花蕚獸口吐五
009_0707_b_08L分之香烟伏願亡師脫而無縛
009_0707_b_09L而勿沉萬慮都捐覺浮生之眞寄
009_0707_b_10L源返合踐大道以長榮

009_0707_b_11L

009_0707_b_12L重刻起信論䟽記序

009_0707_b_13L
於戱大塊一坼易道自彰而庶人
009_0707_b_14L不識唯聖賢者乃能知之遠思來
009_0707_b_15L學之共知畫以示之文以明之
009_0707_b_16L於十翼又至於傳義而學者於三易
009_0707_b_17L之表難進其步夫聖賢之望學者
009_0707_b_18L愈切而學者之孤聖賢愈多今起信
009_0707_b_19L論者馬鳴尊者之所造賢首國師之
009_0707_b_20L所䟽石壁長水之廣記略記而學子
009_0707_b_21L漸降轉昧其旨本論云法離言說
009_0707_b_22L名字者果驗於此矣近有靑髩貪字
009_0707_b_23L之漢私加杜撰襍說於本記而於
009_0707_b_24L一冬半夏間漁獵章句逢人而夸曰

009_0707_c_01L“내가 『기신론』을 다 보았다.”라고 말한다. 이 어찌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논서는 바로 우리 불가의 심학心學의 뼈대로서, 오랫동안 공부한 용맹한 안목을 가진 이도 몇 년을 기약하여 깊이 연찬하더라도 오히려 환히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초학자들이 쉽게 알 수 있겠는가? 학풍이 쇠미해져 이 지경에 이른 폐단의 하나이다. 기축년(1769) 가을, 나는 가야산에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 안동 봉정사鳳停寺의 납자衲子 승일昇一이 찾아와 말하기를, “저희 절에 청허淸虛의 문손門孫인 지한旨閑ㆍ관성觀性 두 장로가 계신데, 당본唐本 『기신론소기起信論䟽記』를 얻은즉, 네 권으로 나누어 새겨 반포하고자 합니다. 지한 스님은 재물을 담당하였고, 관성 스님은 교감을 담당하였는데, 서문을 쓸 사람이 없어 감히 청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책머리를 더럽힌다는 꾸지람을 괘념치 않고 붓으로 입을 삼아 위와 같이 적는다. 그러니 나를 알아주거나 나를 허물할 이가 있다 한들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기뻐하랴. 다만 바라는 것은, 배우는 이들이 꼭 장로의 수고를 생각하면서 따스한 마음으로 장로의 공적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논설의 맛을 깊이 맛보아 마명馬鳴이 말한 바의 앞(속뜻)까지 넘어갈 수 있다면, 곧 어찌 다만 장로의 공이 사라지지 않을 뿐이겠는가? 나의 넋두리 말 또한 격려하는 이익이 없지 않을 것이로다.
『신편보권문』 서문
옛적에 우리 세존께서 위제희韋提希를 위하여 『무량수경無量壽經』36)을 설하실 때, 저 서방 극락세계의 구품연지九品蓮池와 십육관선十六觀禪이 명백하게 눈앞에 있는 듯 말씀하셨으니, 이는 실로 염불의 요지이다. 염불은 진단眞丹(중국)에 이르러 동진東晋 혜원慧遠37) 법사가 크게 떨쳤고, 우리 접역鰈域(조선)에서도 사람들이 많이들 힘써 왔는데, 근년 이래로 또한 자못 성행하고 있다. 호궁號弓38)의 해인 병신년(1776) 관등절觀燈節 저녁에 응천凝川 영은사靈隱寺의 납자 각성覺醒이

009_0707_c_01L我看起信論畢矣是何無慚愧之至也
009_0707_c_02L此論乃吾人之心學骨子也宿學猛眼
009_0707_c_03L限數載沉硏猶難融會矧其初學
009_0707_c_04L易以知乎學衰至此爲弊一也己丑
009_0707_c_05L余在伽倻山中一夕安東鳳停寺
009_0707_c_06L衲子昇一者來而叙言曰我寺有淸
009_0707_c_07L虛門孫旨閑觀性兩長老得唐本起信
009_0707_c_08L論䟽記則爲卷四即擬雕布閑老
009_0707_c_09L任物性老任校而任序者缺故敢
009_0707_c_10L請焉余於是不懼凂頭之誚以筆爲
009_0707_c_11L書之如右則將有知我罪我者
009_0707_c_12L何憂何喜但願學家須念長老之勤
009_0707_c_13L温披長老之績而深得乎論味以至
009_0707_c_14L於越得乎馬鳴立言之前則豈徒長老
009_0707_c_15L之功不泯余之狂言亦不無所激之
009_0707_c_16L利也

009_0707_c_17L

009_0707_c_18L1)新編普勸序 [2]

009_0707_c_19L
昔我世尊爲韋提希說無量壽經
009_0707_c_20L西方極樂世界九品蓮池十六觀禪
009_0707_c_21L昭昭然如在目前是實念佛之要旨也
009_0707_c_22L至眞丹東晋遠法師大振至我鰈域
009_0707_c_23L多務焉近年以來亦頗盛焉號弓
009_0707_c_24L之年丙申燈夕凝川靈隱寺衲子
009_0707_c_25L此序旣載於此書第九册(六九六頁下段){編}

009_0708_a_01L상복을 입고 강양江陽 땅 가야산으로 나를 찾아왔다. 스님은 이틀을 묶고 말하기를, “제 어머니 현씨는 살아 계실 때 본디 좋아하는 것 없이 오직 염불로 낙을 삼으셨습니다. 임종 시에 당부하시기를, ‘이 어미를 위해 유명한 법사님을 찾아 보권문普勸文 한 권을 집성하여 여러 선인善人들이 염불에 뜻을 내게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하셨습니다. 저는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 말씀을 잠시도 잊지 못하고 감히 이렇게 찾아와 청을 올립니다. 스님께서는 가엾이 여겨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대의 모친은 과거나 미래에도 보기 드문 분이시고, 그대의 정성은 승속 간에 다 미치기 어려운 듯하네. 만약 그대의 청을 따른다면 그대 모친께 효를 보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도 그 이익이 널리 퍼질 것일세. 다만 내가 학식이 얕으니 어찌 감히 가벼이 허락하겠는가? 그대는 물러가게.” 하였다. 각성은 울먹이며 열흘이 다 되도록 떠나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 뜻에 감동하여 『연종보감蓮宗寶鑑』ㆍ『귀원직지歸元直指』ㆍ『정토록淨土錄』 등을 열람하고 염불을 권장할 만한 글 22단을 택하여 제목을 ‘신편보권문新編普勸文’이라 하였다. 각성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곧바로 가사와 발우를 팔아 판목을 갖추어 장인을 불러 새겨 반포하였다. 판목은 해인사에 보관하였다.
『무하선사시고』 서
돌아가신 무하無瑕 스님은 석실石室39)의 문하로 부용당芙蓉堂40)의 5대손이다. 인물됨은 준걸하고 식견도 넓어서 삼장三藏의 교적敎籍에 대해서는 깊은 뜻을 끝까지 탐구하였고, 오행五行41)의 이치(理紀)에 대하여는 정수를 환히 꿰뚫었으나, 그것을 추구蒭狗42)나 해진 신발(廢屣)처럼 여겼다. 항상 문을 닫고 마음을 구하였는데, 이순耳順을 고비로 하여 갑자기 진적眞寂으로 되돌아갔다. 곧 대사는 이처럼 크고 넉넉한(宏贍) 업을 짊어졌으나 사방 멀리에 크게 떨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는 비록 섭섭함이 없으나 후학들이 길에서 헤매는 것은 어찌하리오. 대사는 평소 선정을 닦고 여유가 있을 때 가슴에 쌓인 것을

009_0708_a_01L覺醒以孝服訪余江陽伽倻山中
009_0708_a_02L宿而叙言曰吾萱親玄氏在世素亡
009_0708_a_03L攸嗜唯念佛是樂臨訣囑曰汝爲
009_0708_a_04L尋得有名法師集成普勸一策使
009_0708_a_05L諸善人發心念佛則死無餘憾
009_0708_a_06L在子道瞬息難忘敢以是來請唯
009_0708_a_07L法師哀之憐之余曰子之親前後罕
009_0708_a_08L子之誠緇素莫及若從子請
009_0708_a_09L不徒於親報孝至於衆人其利溥博
009_0708_a_10L顧余膚學何敢輕諾子其去矣
009_0708_a_11L也涕泣浹旬不去余感其意覔諸
009_0708_a_12L蓮宗歸元淨土等錄取其可勸念佛之
009_0708_a_13L語二十有二段命名曰新編普勸文
009_0708_a_14L喜不自抑即鬻衣盂市梓召工
009_0708_a_15L而印而佈之其版藏置海印寺

009_0708_a_16L

009_0708_a_17L無瑕先師詩稿序

009_0708_a_18L
無瑕先師出石室之門爲芙蓉五世
009_0708_a_19L之孫器宇峻識量濶三藏敎籍
009_0708_a_20L探其旨五行理紀洞炤於髓而置之
009_0708_a_21L如蒭狗廢屣常以杜門求心限裁耳
009_0708_a_22L遽返眞寂則夯此宏贍之業
009_0708_a_23L未見大振於四遠在我雖無慍奈來
009_0708_a_24L學之迷塗何平日修㝎之餘胷中所

009_0708_b_01L시로 풀어내었다. 시의 내용은, 혹 분수가 박함(分薄)을 느꺼워하며, 혹 귀밑머리가 쇠함을 탄식하며, 혹 소문날 것 없음(失聞)을 부끄러워하며, 혹은 한 곳에 머물러 있음(滯跡)을 두려워하고, 혹은 숨어 사는 것(幽居)을 찬탄하며, 혹은 뜬 명예를 조롱하기도 하고, 혹은 부자에게 교훈을 주기도 하며, 혹은 세상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었다. 대사의 시는, 혹은 높다란 누각에서 읊을 만하며, 혹 맑은 시내에서 노래할 만하다. 글자 글자가 시의 맛이 있고 구절구절이 신의 경지에 들어갔으니, 음풍농월하는 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아니라, 진실로 배우는 이들이 큰 띠(紳)에 써서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나(有璣)는 옛날 사미일 때 돌아가신 스승에게 도를 묻고 몇 해 동안 가르침을 받았으나 털끝만큼도 보답을 하지 못하였는데, 유고 10여 수를 모아 장차 세상에 전하려 하니, 이미 입적하신 영가께서 과연 좋다고 여기실지 아니실지. 돌아가신 스승의 휘는 묘경妙瓊이요, 무하無瑕는 호이다. 찬한다.

大朴初散   대박大朴43)이 처음 흩어졌을 때
人所受猶訏  사람들이 받은 것은 오히려 컸는데
漸自季世   점차 도가 쇠한 계세季世로부터
小器失其塗  작은 그릇들 그 길을 잃었네.
孰究其源   누가 그 근원 궁구하려나.
無瑕其人乎  무하無瑕가 바로 그분이로다.
詩出本性   시는 본성에서 나왔고
字字即唾珠  글자마다 모두 구슬을 뱉은 듯.
김린 학사에게 드리는 게송서문과 함께
옛날 이 도위李都尉는 부귀한 가운데 선리禪理를 참구하여 깨달았고, 양 문공楊文公은 한림원 벼슬을 하면서 선리를 참구하여 깨우쳤고, 장무진張無盡은 강서江西의 수장으로 있을 때 선리를 참구하여 꿰뚫었다.44) 이 세 분의 대로大老는 바로 세간의 모습을 허물지 않은 채 출세한 실상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즉 어찌 꼭 처자식을 버리고 풀뿌리를 씹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직위를 버리며, 마음이 꺼져 버린 재와 같고 몸이 마른나무처럼 된 연후에야 비로소 선의 참뜻을 깨쳤다고 할 것인가? 다만 세월이 멀리 흐르고 불도佛道가 사라져 아는 이가 드물어졌도다. 치문緇門들은 유자儒者를 나무라기를 육진六塵에 빠져 있다 하고, 유자들은 치문을 비웃기를

009_0708_b_01L洩之以詩則或以感分薄或以
009_0708_b_02L歎髩衰或以愧失聞或以惧滯跡
009_0708_b_03L以讃幽居或以嘲浮名或亦垂訓於
009_0708_b_04L或亦不平於世或能吟高樓
009_0708_b_05L能詠淸溪字字有味句句入神
009_0708_b_06L與嚼雲哢月者肩之政宜學家之書
009_0708_b_07L諸紳而銘座右也有璣頃於沙彌時
009_0708_b_08L問道於先師蒙接數稔而無以報毫
009_0708_b_09L爲裒遺藁十有餘首將傳於世而旣
009_0708_b_10L忽之靈果其肯不先師諱妙瓊
009_0708_b_11L瑕號也賛曰

009_0708_b_12L大朴初散人所受猶訏漸自季世
009_0708_b_13L器失其塗孰究其源無瑕其人乎
009_0708_b_14L出本性字字即唾珠

009_0708_b_15L

009_0708_b_16L奉金學士偈并序

009_0708_b_17L
昔李都尉在富貴中叅得禪悟得去
009_0708_b_18L文公身居翰苑叅得禪徹得去張無
009_0708_b_19L盡爲江西長叅得禪透得去只這三
009_0708_b_20L大老便是箇不壞世間相而得出世
009_0708_b_21L實相底樣子也則何必去妻孥咬菜
009_0708_b_22L休官去職心如死灰身如枯木
009_0708_b_23L然後方悟得箇禪旨㦲但世遠道喪
009_0708_b_24L識得者鮮緇則譏素汨於六塵

009_0708_c_01L오상五常에 어둡다 하는데, 이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만약 선을 깨우치면 곧 치문이 유자요 유자가 치문이니, 어찌 다시 검은 옷과 흰옷으로 틈을 벌여 놓고, 저는 저고 나는 나다 할 것인가? 나 또한 그런 사람으로 항상 그런 사람들과 그런 일을 토로해 왔다. 지금 화암花巖 선장禪場에서 우연찮게 그러한 사람을 만나 그런 뜻을 매우 진지하게 담론한즉, 아무 씨 아무개도 모두 재가 도인들이라, 가히 불꽃 속의 연꽃(火中蓮)이라 할 만하다. 앞서 말한 세 분의 대로大老 같으니 더구나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이별하는 즈음에 게송 한 구를 써서 방편으로 삼으니 한 번 웃어 주기를 바라노라. 게송은 다음과 같다.

一訣無生曲    이별에 즈음하여 무생곡無生曲을
爲君松下彈    그대 위해 솔 아래서 타노라.
釋儒不二地    불佛과 유儒가 둘이 아닐 터
密密時時干    가깝고 가깝게 때때로 구하리라.
여우 선자如愚禪子에게 보이는 글 서문
아, 인간의 성정性情은 태초에 근원은 동일하나 재치와 졸렬함(巧拙)이 같지 않음은 실로 관습에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재치가 있으면 간사하고, 졸렬하면 겸손하다. 간사한 이는 도에 들어가기 어렵고, 겸손한 이는 도에 들어가기 쉽다. 그 몸이 잠시라도 간사한 편에 서기보다는 이름이 겸손함으로 널리 퍼지는 것이 차라리 낫다. 소인과 군자의 재주 있음과 없음, 덕이 있음과 없음이 실로 이로부터 나뉜 것이다. 인간이 신중해야 할 것은 오직 관습이로다. 나는 또한 매우 노둔하여 매사에 이루는 것이 항상 남들 뒤에 있었으나, 항상 곧음으로 근본 마음을 삼았을 따름이어서 사람들과 조금도 인간 관계로 부침浮沈하지 않았다. 우연히 어느 날 저녁 호거 산인虎踞山人이 배우고자 나를 찾아와 이름을 물으니 여우如愚라 하였는데, 미우眉宇가 헌칠하였다. 나는 이에 재삼 그 이름을 불러 보고 조용히 생각하기를, ‘이 납자는 응당 도를 좋아하는 이로, 더불어 도를 이야기할 만하리라’ 하고는,

009_0708_c_01L則嘲緇昧於五常俱錯了也如得
009_0708_c_02L悟禪則緇則素素則緇復何以緇
009_0708_c_03L素爲間而彼爲彼我爲我㦲愚箇中
009_0708_c_04L每欲與箇中人吐露箇中事也
009_0708_c_05L於花嵓禪塲忽着得箇中人劇談箇
009_0708_c_06L中旨則氏某字某儘在家道人
009_0708_c_07L謂火中蓮也如上三大老尙何言㦲
009_0708_c_08L別路呈一偈亦方便幸一笑偈曰

009_0708_c_09L一訣無生曲爲君松下彈

009_0708_c_10L釋儒不二地密密時時干

009_0708_c_11L

009_0708_c_12L示如愚禪子序

009_0708_c_13L
人之性情同一初源而其有巧
009_0708_c_14L拙之不同者實由慣習之有異也
009_0708_c_15L則佞拙則愻佞者於道難入遜者
009_0708_c_16L於道易進與其身蹔立於佞曷若名
009_0708_c_17L遐播於遜至於小人君子之才不才德
009_0708_c_18L不德實由是而分矣人之所可愼者
009_0708_c_19L其唯慣習乎余亦甚魯凡所成立
009_0708_c_20L在人後而恒以直爲本心而已少無
009_0708_c_21L與人浮沉也偶於一夕虎踞山人
009_0708_c_22L余求學問其名則如也愚也眉宇且
009_0708_c_23L軒徵余於是再三誦其名而默念
009_0708_c_24L此衲子應爲好道者可與語道

009_0709_a_01L재치와 졸렬의 변辯으로 보이노라. 이와 함께 게송 하나를 보인다.

名實如一     이름과 실상이 하나로 같으니
乃具文質     곧 문채와 바탕을 갖추었네.
文質彬彬     문채와 바탕이 또렷하게 빛나니
於道不失     도를 잃지 않음이리라.
信風加楫     믿음의 바람이 노를 보태나니
船行且疾     배가 나아감이 역시 빠르리라.
도리사 석종기
계해년(1743, 영조 8) 여름, 나는 포산苞山45)의 유가사瑜伽寺에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홀연히 도리사桃李寺46)의 석종石鍾을 화주하는 스님이 씩씩하게 찾아와 잠시 있다가 말하기를, “선주善州(선산) 냉산冷山 기슭에 석적사石積寺 옛터가 있습니다. 또 그곳에는 흙에 파묻혀 탑 끝 부분만 조금 나와 있는 석탑이 있는데, 해를 걸러, 달을 걸러 상서로운 빛을 발하였습니다. 나무꾼 김계장金界丈이란 이가 신이한 꿈을 꾸고 금함金凾과 사리舍利 1매를 탑 아래에서 얻었습니다. 곧 사리는 백옥색의 율무 같았고, 큰 사리함의 사방 표면에는 여덟 금강과 네 보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로써 석가모니의 사리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도리사에 헌납한 지 어느덧 30여 년이 흘렀습니다만, 여전히 늘 그대로 서광이 빛납니다. 제가 올봄에 권선문을 가지고 재물을 모은 후 윤사월에 장인을 불러 탑을 만들고 향을 사르어 안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문記文으로 그 일의 내력을 기록하지 않으면 후에 오는 이들이 오늘의 일을 알 도리가 없으니, 창힐蒼頡과 태사太史가 태어나기 전 일과 같아질 것입니다.” 하면서 내게 간절하게 청을 하였다.
나는 비록 배움이 길지 않으나 생각해 보니, 부처님께서 학수鶴樹47)에서 열반하신 지 거의 3천여 년에 가깝고, 구시라국拘尸羅國은 여기에서 백만 리가 떨어져 있으나, 다행히 이 바다 밖 좁은 땅의 말세 중생들이 홀연히 황면 노야黃面老爺(부처님)의 신령한 자취를 만나본즉, 이는 눈먼 거북이 바다에 떠다니는 널빤지를 만난 것(盲龜遇木)보다 더 희유한 일이로다. 어찌 사양하여 감히 서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서술한다.
중국에는 백마사白馬寺가 처음이니,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 지은 것이고, 우리 동토에는 도리사가 처음이니

009_0709_a_01L以巧拙之辯而示之并示一偈云
009_0709_a_02L實如一乃具文質文質彬彬於道
009_0709_a_03L不失信風加楫船行且疾

009_0709_a_04L

009_0709_a_05L桃李寺石鍾記

009_0709_a_06L
癸亥夏余在苞之瑜寺矣忽於一夕
009_0709_a_07L桃李寺石鍾化士僧得得來訪良久
009_0709_a_08L而叙言曰善州冷山麓有石積寺古
009_0709_a_09L又有石塔薶塵土微露頂而或
009_0709_a_10L間年或間月發瑞光樵夫金界丈者
009_0709_a_11L感異夢獲奉金凾舍利一枚於塔下
009_0709_a_12L白玉色薏苡大凾之方面刻諸八金
009_0709_a_13L剛四菩薩以此決知釋尊之舍利
009_0709_a_14L于桃李寺者殆三十餘載而發瑞
009_0709_a_15L恒如前矣貧徒今春帶勸䟽收物力
009_0709_a_16L閏四月召工造塔焫香入藏而不以
009_0709_a_17L文紀其緖則使來者無以知今日事
009_0709_a_18L便如蒼頡大史未生前事請余勤勤
009_0709_a_19L雖學力無餘仰念鶴樹示滅歲近三
009_0709_a_20L拘尸羅國里將百萬幸此海外
009_0709_a_21L褊邦末葉衆生忽覩黃面老爺之靈跡
009_0709_a_22L則盲龜之遇木未足比其稀也辭不
009_0709_a_23L敢謹述曰在中華白馬寺爲初東漢
009_0709_a_24L明帝之所創也在我東桃李寺爲初

009_0709_b_01L신라 아도阿度 화상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석적사는 어느 때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가? 통도사通度寺 사적을 살펴보니, 신라 자장 율사慈藏律師가 당唐에 들어가 사리 백 매를 구하여 돌아왔다고 하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석적사 역시 자장 율사 때 지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난리 전의 일이니 자세히 살필 수는 없다. 아, 삼매의 불 속에서 나온 사리는 대략 8휘(斛) 4말(斗)이니, 주라周羅의 법계에 탑을 안치하고48)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부처님 살아 계신 듯 정성이 지극하도다. 이 세상의 만물은 오래되면 스스로 사라지나 사리만은 영겁永劫이 지나도 쇠하지 않으니, 생멸 가운데 생멸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다. 이는 진실로 사람의 정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로다.
화주 스님의 이름은 체안體眼으로, 일찍 세상의 인연을 끊고 우리 불법을 깊이 믿어 요령을 터득한 이로다.
해인사 대종기
이 절은 계미년(1763)에 화재를 당하였는데, 이때 종도 함께 녹아내렸다. 몇 년 동안 절은 옛 모습을 회복했으나 종을 만들 겨를은 없었다. 병술년(1766)에 다시 만들기 시작하여 세 번 주조한 후에 완성하였으니, 봄부터 가을까지 대략 7개월이 소요되었다. 사용한 재물은 수천 냥이며 무게는 4천 근이다. 소리는 예전에 비해서는 조금 작으나 멀리 울려 나가는 소리는 오히려 더 나아졌다. 듣는 이는 내면을 성찰하였고, 보는 이는 금세 목이 메였으며, 귀신은 고통을 그쳤고, 이무기는 자취를 감추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두 종의 위엄에 순종한 것이다. 그 신이함은 진실로 붓으로 적기 어렵도다. 나는 비슬산毘瑟山에 있으면서 그 이야기를 얻어 들은 바가 있었는데, 정해년(1767) 정월 대보름날에 와서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객석에서 붓을 뽑아 대략 그 경개를 적었고, 그 나머지 수고한 여러 사람의 이름은 아래에 차례대로 적었으니, 이는 대개 모연할 때의 주지 스님의 청에 따른 것이다.
반룡사 법당기자인 구룡산

009_0709_b_01L新羅阿度之所建也如石積寺何時
009_0709_b_02L誰人之所造耶按通度寺蹟羅之慈
009_0709_b_03L入唐求舍利百枚而還據此則石
009_0709_b_04L積寺亦藏師時所立邪事在亂前不
009_0709_b_05L可攷三昧火裏所出舍利凡八
009_0709_b_06L斛四斗周羅法界置塔膜拜以致
009_0709_b_07L如在之誠世之萬物久乃自滅
009_0709_b_08L於舍利窮劫而不衰生滅中不生滅
009_0709_b_09L此之謂矣固非人情所能測也化士
009_0709_b_10L體眼其名蚤謝世緣於吾佛法
009_0709_b_11L信領解者

009_0709_b_12L

009_0709_b_13L海印寺大鍾記

009_0709_b_14L
寺也癸未火鍾亦融液數年之間
009_0709_b_15L則復古鍾則未暇越丙戌改做
009_0709_b_16L經三鑄得成自春徂秋凡涉七箇月
009_0709_b_17L用財以千數堅則四千斤聲則比前
009_0709_b_18L差下而其遠徹則猶勝聞者發省
009_0709_b_19L者驀嗄至於鬼歇苦魅藏蹤皆繇鐘
009_0709_b_20L其爲神異良難下筆余在毘瑟
009_0709_b_21L剽聞其說丁亥燈夕來見則果然
009_0709_b_22L席抽毫觕擧其槩其餘執勞諸人
009_0709_b_23L書下方盖緣時之寺長之請也

009_0709_b_24L

009_0709_b_25L盤龍寺法堂記慈仁九龍山

009_0709_c_01L
무릇 천하의 일에 공이 이루어지는 데는 반드시 그 때와 사람이 필요하다. 만약 ‘그 사람’이 아니고 ‘그 때’가 아니라면 일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반룡사盤龍寺는 신라 헌덕왕憲德王 때 원응 국사圓應國師가 창건한 절이다. 신라와 고려(雞鵠49))를 거쳐 우리 성조聖朝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흥망을 겪었으니, 모두 그 때와 사람이 관여되어 있고, 성상星霜을 지나옴이 심원하였다.
주상(영조) 42년 병술년(1766) 봄에 온 절이 함께 궐기하여 대웅전을 중건하였는데, 여기에 들어간 재물은 무려 수천 냥이었다. 이듬해 봄 단청을 하여 준공하였는데, 여기에는 6백 근의 금동과 천 말의 쌀이 들어갔다. 우宇ㆍ윤允 등 여섯 명의 스님들은 스승의 유훈을 따라 이와 같은 재산을 희사하였다. 그 이름은 발원문에 있고, 그 재산은 본사를 풍요롭게 했으니, 이들은 진정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로다. 이들은 재산 나누기를 사후死後보다 앞세웠고, 이름이 생전生前보다 더 널리 퍼졌고, 윤允 스님 등 소산小山들 역시 스승의 뜻에 응답한 것이니, 대단하도다. 만약 이들 대중과 문文 스님, 윤允 스님 등 걸출한 제자들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능히 이와 같이 그 법당을 일신一新할 수 있었으랴. 이는 반드시 절의 기운이 화창和暢하여 선한 공덕 쌓는 이들이 상응한 것이로다.
경인년(1770) 여름 나는 가야산에 들어가 하루 저녁을 반룡사에서 머물렀는데, 전前 총섭揔攝 관정灌頂이 본사의 승통僧統 보일普一 스님의 편지 한 자(尺)와 이포梨浦 정 공鄭公이 찬한 사적비 한 축을 가지고 와서 매우 정성스레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비록 글솜씨가 없으나 그 정성을 만류하기 어려워 그 경개를 들어 보인다. 다만 이포 공의 비문에 자세한 내용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상세한 기록은 하지 않는다. 이에 관정 스님이 떠나려 할 때 나는 잠시 문밖으로 나와 신신당부하기를, 돌아가거든 승통에게 “절을 빛내는 것은 비록 불전의 화려함 여부에도 있지만, 또한 스님들의 공경스런 자세 여부에 있습니다. 스님들 행실에 대한 계율을 반드시 엄격하게 하십시오.”라는 말을 전해 달라 하였다. 관정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009_0709_c_01L
凡天下事功心有其時與人矣苟或
009_0709_c_02L人非其人時非其時不可得而濟事
009_0709_c_03L今盤龍寺者新羅憲德王時圓應
009_0709_c_04L國師之所剏而歷雞鵠至我聖朝
009_0709_c_05L度廢興皆關其時與人而閱星霜者深
009_0709_c_06L上之四十二年丙戌春渾寺一起
009_0709_c_07L重建大雄殿其所用財無慮數千計
009_0709_c_08L明年春施丹堊以竣功六百鏹銅
009_0709_c_09L千㪷米其所用而宇允等六僧遵其
009_0709_c_10L師遺言得如是捨財厥名會文厥産
009_0709_c_11L饒本寺好施之人也斯人也散財優
009_0709_c_12L於身後流名勝於生前而允等小山
009_0709_c_13L亦答師志偉㦲微斯大衆及文也允
009_0709_c_14L也等諸傑則孰能如是一新其殿㦲
009_0709_c_15L必寺運和暢善者相應㦲庚寅夏余入
009_0709_c_16L伽倻山中一夕盤龍寺前揔攝灌頂
009_0709_c_17L袖本寺僧統普一書一尺梨浦鄭公所撰
009_0709_c_18L事蹟碑一軸來請記甚勤余雖辭拙
009_0709_c_19L難留其欵即擧其槩而浦碑具載
009_0709_c_20L不及其詳云於是頂師告去余蹔出
009_0709_c_21L申申言頂使歸告僧統曰寺之
009_0709_c_22L光否雖在乎殿之華朴而亦在乎僧
009_0709_c_23L行之敬肆其戒僧行須嚴峭頂頷而
009_0709_c_24L退

009_0710_a_01L
천주사기天柱寺記
기성箕城50)의 가산산성架山山城51)은 영남의 관방關防으로 중요한 곳이다.52) 그런데 내성內城은 오래되어 상고할 만한 문적文蹟이 없다. 외성外城은 시골 노인들에 따르면 강희 초에 쌓은 것이라 한다. 그 안에 절이 있는데 이름이 천주사天柱寺이다. 강희康熙 신사년(1701)에 당영棠營53)에서 선원善元 스님에게 명을 내려 고을을 보호하는 성을 쌓도록 하였다. 누각의 이름은 완월翫月인데, 강희 무자년(1708)에 또한 감영에서 특별히 성을 위하여 인선仁善을 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이 세운 것이다. 절을 중창한 것은 강희 임진년(1712)인데, 처밀處密ㆍ종안宗眼 두 대사가 주관하여 누각을 세우고 중창하였다. 불전佛殿을 삼창三創한 것은 모두 금년 무인년(1758)인데, 홍눌弘訥ㆍ홍찬弘賛ㆍ석초碩草ㆍ석종碩宗ㆍ쾌정快淨ㆍ해순海順 등 여섯 대사가 단금斷金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였다. 특히 홍눌과 석초 스님의 공이 더욱 크다. 한 분은 감영에 호소하여 재물을 확보했고, 한 분은 화주를 펴 재물을 모았다. 두 일(전각, 누각)을 함께 시행하여 전각은 곧 세 칸으로, 누대는 곧 다섯 칸으로 하여 두어 달 내로 모두 완성하니, 우뚝 솟아오른 불전과 누각이 일시에 웅장하고 화려하게 빛났다. 이때부터 절은 면모를 일신했고, 성곽 역시 묵직한 무게감을 얻었다. 이러한 견고하고 완비된 모습은 양한兩漢54)이 오히려 양보할 정도다. 그때의 여러 대사들의 호국지심은 진실로 높은 관리(搢紳)나 이름 있는 유자儒者들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미 불전과 누각의 상량문(六偉之文55))을 지었지만 절을 다시 세운 공에 대해서는 아직 다 쓰지 않았다. 홍눌 공이 또 말하기를, “대들보에 법로法老의 상량문을 갈무리한 것은 다행입니다마는, 만약 그 전후의 여러 사람들의 공과 일의 전말을 빠뜨리고 드러내지 않으면, 곧 훗날에 이르러 아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법로께서 다시 글을 갖추어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자취가 없다는 탄식을 면하게 한다면, 이 역시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공이 나라를 위해 보호하여 막아내고, 병진兵塵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대책을 마련한 것은 정말 가상한 일이오만,

009_0710_a_01L天柱寺記

009_0710_a_02L
箕之架城嶺以下關防重地然其內
009_0710_a_03L城古矣無文蹟可攷其外城以土老
009_0710_a_04L所聞康熙初所築而有寺曰天柱
009_0710_a_05L熙辛巳自棠營命僧善元爲保障
009_0710_a_06L建也有樓曰翫月康熙戊子亦自
009_0710_a_07L特爲城發仁善九邑民立也
009_0710_a_08L之重剏亦在於康熙壬辰而處密宗
009_0710_a_09L眼兩師尸之樓之重創佛殿之三創
009_0710_a_10L皆在今戊寅而弘訥弘賛碩草碩宗快
009_0710_a_11L淨海順六師斷金共謀而訥草兩師
009_0710_a_12L之功尤大焉一以訴營得財一以發
009_0710_a_13L化裒物兩役偕設而殿則三間
009_0710_a_14L則五間數月之內皆告成巋然殿
009_0710_a_15L一時而輪焉奐焉自此而寺亦新
009_0710_a_16L城亦重矣此之堅完比彼兩漢
009_0710_a_17L猶讓一頭矣向之諸師護國之心
009_0710_a_18L不在搢紳儒重之下矣余旣撰殿樓六
009_0710_a_19L偉之文而寺之修功猶未盡訥公
009_0710_a_20L又言樑藏法老之文幸且幸也
009_0710_a_21L其前後衆功顚末漏而無揭則至於
009_0710_a_22L異日有誰知者願法老更爲備書
009_0710_a_23L令來者免無蹟之歎此亦非幸乎
009_0710_a_24L曰公之爲國保防作兵塵不入之策

009_0710_b_01L기문記文을 구하는 것은 곧 그대를 위해 하지 않으리다. 천지일월에는 고금이 없고, 충을 다하는 유자와 큰 스님은 어느 시대나 없지 않지만, 위에서 열거한 여러 스님들 같은 분은 반드시 후세에도 없지는 않을 것이오. 하물며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달려 있고, 공을 이루고 못 이룸은 나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나의 공에 대해 구차하게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할 것인가? 바라건대 그대는 조용히 가시오.”라고 하였다. 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감히 공의 말을 그대로 따라서 다만 기록할 뿐이다.
봉향각기
가산架山에 쌓은 성은 영남의 중요한 보장처保障處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본영에서 보호하고 지킨 것은 다른 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산에는 예로부터 절이 있었는데, 절에는 불전佛殿이 있고, 그 옆으로는 봉향각奉香閣이라는 작은 전각이 있었다. 그런데 이를 건립한 지 오래되어 무너지고 썩어서 사람들이 거처할 수 없었으니, 온 절 여러 노덕老德들이 새롭게 고치자고 모의한 지가 오래되었다.
금년 성상聖上 임오년(1762, 영조 38)에 장인을 불러 새로 고쳐 지으니, 건물의 모습과 구조가 전에 비해 열 배나 뛰어났다. 3월(季春)에 시작하여 5월(仲夏)에 마쳤으니, 사무를 주관한 이는 쾌정快淨 스님이요, 재물을 담당한 이는 세명世明 스님이었다.
올 여름이 끝날 무렵에 정 공淨公이 시자를 슬악瑟岳으로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그 시자에게 말하기를, “전각이 새로우면 보기에 아름다운데 나에게 기문을 지으라 하니, 곧 공덕을 이야기하리까, 아니면 경치를 이야기하리까? 경치는 곧 산수를 유람하는 자의 눈에 있을 것이요, 공은 곧 지은 이들의 몸에 돌아갈 것인데 어찌 기문을 쓰리오? 돌아가 정 공에게 ‘국가가 성을 쌓음은 병진兵塵을 막고자 함이라. 향香을 받들어 나라를 축원하여 정성이 부처님(佛天)까지 통하면, 풍년이 들고 풍속이 순박하게 되고, 융의戎衣로 집 밖을 나서지 않은즉, 곳간 가득 있는 화살과 돌 무기가 조금도 쓰이지 않게 될 것이오. 이 말을 우활迂闊하다 생각 마오’라고 전하시오. 그리고 정 공이 만일 옳다고 하면

009_0710_b_01L誠嘉矣其於求記則爲公不取也
009_0710_b_02L地日月無古無今忠儒洪緇無代
009_0710_b_03L無之如上諸公必不無於後世
009_0710_b_04L其知不知在彼功不功在我又何以
009_0710_b_05L我功苟求於彼知願公默矣徃㦲
009_0710_b_06L公頷之余敢依公所語謹識之

009_0710_b_07L

009_0710_b_08L奉香閣記

009_0710_b_09L
架之爲城嶺以南所重保障自昔而
009_0710_b_10L本營護助不是他城之比也
009_0710_b_11L故有寺寺有殿殿邊又有奉香小閣
009_0710_b_12L而創來年遠頹朽有積人不堪居
009_0710_b_13L寺諸老謀所以改新者久矣今於聖
009_0710_b_14L上壬午召匠重建則屋之形制
009_0710_b_15L前十勝始在季春訖在仲夏幹其
009_0710_b_16L蠱者快淨也料其財者世明也
009_0710_b_17L年夏末淨公致伻瑟岳托余求記
009_0710_b_18L謂其伻曰閣之新則媺矣而求其記
009_0710_b_19L則說功乎談景乎景則在於遊者之
009_0710_b_20L功則歸於作者之身何用記爲
009_0710_b_21L歸語淨公曰國家置城爲備兵塵
009_0710_b_22L香祝國誠徹佛天歲熟風淳以至
009_0710_b_23L於戎衣不出戶則滿庫矢石少無所
009_0710_b_24L切勿以此語爲迂淨公如曰是

009_0710_c_01L벽 위에 붙여 두는 것도 좋으리다.” 하였다.
함월당기
가산성架山城에 있는 천주사天柱寺는 영남 지방의 보장처保障處이다. 절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는데, 함월당含月堂은 그중 하나이다. 성상聖上(영조) 46년 경인년(1770)에 전前 총섭總攝 쾌정快淨 스님이 함월당을 중창하였다. 처음에 정 공淨公은 환초幻草ㆍ문철文哲ㆍ희준希俊 스님 등과 함께 수고를 다하여 봄부터 가을이 지나도록 밤을 낮 삼아 부지런히 일을 마치니, 곧 탁 트이고 방정方正함이 옛날보다 훨씬 나아졌다. 재물을 희사하고 힘을 보탠 이들은, 아는 이들은 다 알리라.
공은 나와 인연이 있어 당이 완성된 지 3년 봄이 지나서야 만나 손을 잡고, “수고하였습니다.” 하자, 내 글로 기문記文을 삼고자 하면서 말하기를, “집이 연수가 오래되어 물이 흐르고 허물어져 사람이 살 수 없는 것을 겨우 복구했으니, 기문이야 어찌 바라리오? 수고로움은 그저 수고로움으로 돌리고, 공도 그저 공으로 돌리면 되지요. 저는 다시 기억할 생각도 없으니, 남들이 헐뜯는 말이 없는 정도면 어찌 족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기記라는 것은 모름지기 후인들에게 공을 알리고 공을 갚게 하는 것인데, 어찌 꼭 그 업적을 없애야 하겠습니까?” 하자, 공은 빙긋 웃었다. 이에 찬하여 말한다.

幸㦲堂也    다행이로다. 함월당이여.
將必有如公者  장차 반드시 그대 같은 이가
遇時間出    때때로 출현하여
此堂長存    이 당堂이 길이 보존되리라.
寺必亘     절은 반드시 끝없이 유지되고
城必完     성은 틀림없이 완벽할지니
國有緩急之變  나라에 크고 작은 변란이 있을 때
則必保一隅   반드시 한쪽 모서리 보호하리라.
彼南北兩漢   저 남한산성, 북한산성이
奚足云云    어찌 이보다 더하리오.

공은 다시 웃으면서 절하였다.
약사전기
선주善州(善山) 금오산金烏山 약사전藥師殿은 영남에서 제일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009_0710_c_01L願以此揭諸壁上可爾

009_0710_c_02L

009_0710_c_03L含月堂記

009_0710_c_04L
天柱寺在架山城中即嶺以下保障處
009_0710_c_05L而寺有五房含月卽其一也聖上四
009_0710_c_06L十六年庚寅前捴攝快淨重剏含月
009_0710_c_07L初淨公與幻草文哲希俊諸師
009_0710_c_08L致勤㳂春涉秋視夜如晝矻矻竣
009_0710_c_09L則䟽暢方直越勝舊制至於捨
009_0710_c_10L財施力知者方知公於余有契
009_0710_c_11L成三年春過而目之握手而語曰
009_0710_c_12L矣勞矣欲以鄙文做記公曰 [5]
009_0710_c_13L其年深滲漉陊阤人不堪居僅以
009_0710_c_14L復之記且何望勞自歸勞功自歸功
009_0710_c_15L我無更思之念人無譏伐之舌豈不
009_0710_c_16L足乎余曰不然夫記也者要令後
009_0710_c_17L人知功報功何必絕其績公哂
009_0710_c_18L乃譛曰幸㦲堂也將必有如公者
009_0710_c_19L遇時間出此堂長存寺必亘城必
009_0710_c_20L國有緩急之變則必保一隅彼南
009_0710_c_21L北兩漢奚足云云公復哂而拜

009_0710_c_22L

009_0710_c_23L藥師殿記

009_0710_c_24L
善州金烏山藥師殿嶺以南最勝處

009_0711_a_01L그러나 세워진 지 오래되어 그 사이에 병화兵火를 입었는데 문적文蹟을 상고할 수 없다. 비바람이 들이쳐 허물어져 지붕은 새고 불상은 벗겨진 것이 거처하는 이의 근심이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서글픔이었다. 나들이하는 도학道學이라는 자가 대지팡이를 짚고 이곳에 와서 상태를 보고는 탄식하며 권선문을 지니고 재물을 수집하여 기묘년(1759)에 중창하고 단청을 입혔고, 경진년(1760)에는 금을 사서 도금하였다. 이에 동우棟宇가 곧게 펼쳐지고 부처님의 존안은 이마를 펴고 미소를 머금었다. 산 빛이 춤을 추고 시냇물이 소리 높여 노래 부르니, 지나가는 사람은 눈을 비비며 바라보고 머무는 이들은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만약 도학道學의 공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이 면모를 일신할 수 있었겠는가? 신사년(1761) 여름에 도학이 가야산에 들어와 나에게 그 일에 대해 기록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이에 즉시 중中 산인山人에게 부탁하여 도학의 말에 의거하여 대략 그 단초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관불암기
용천사湧泉寺 밖 좌향(龍上)으로 몇 리 쯤 되는 곳에 관불암觀佛菴이 있다. 이 암자는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절 뒤에는 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트여 있으며, 절 좌우로는 산이 에워싸고 있고, 가운데는 텅 비어 있다. 이곳에서 보면 각현角縣이 30리에 걸쳐 이어져 있는 모양과 화악華嶽의 산줄기가 60리에 걸쳐 굽이치는 모습을 한눈 아래 바라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보리가 익고 벼가 익어 가는 모습을 앉아서도 볼 수 있고, 시내에 구름이 밀려오는 모습과 고개에 달이 떠오는 모습을 먼저 볼 수 있으나, 길 가는 사람들과 나무꾼들이 높다고 겁을 내어 다가가지 못한다. 그러니 도를 구하는 이들이 정신을 고양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도량으로 어찌 이보다 더 좋은 암자가 있겠는가?
이 절은 곧 신라 의상 조사義湘祖師가 처음 관심처觀心處로 세운 곳인데 근자에 심하게 무너지고 퇴락하였다. 무인년(1758) 겨울 이 암자의 전잠典岑 스님이 본사의 여러 선인들에게 권유하여 재물을 모으고, 기묘년(1759) 봄에 가야산伽倻山 장석匠石ㆍ승태升太 등 일곱 명을 초청하여

009_0711_a_01L其建則古矣間經兵燹文蹟無攷
009_0711_a_02L雨之攸傷屋漏而像脫居者憂
009_0711_a_03L者悲矣遊方人道學者鳴笻及此
009_0711_a_04L其然而嗟之帶勸䟽裒物兒己卯重
009_0711_a_05L剏而丹雘之庚辰買金而鍍被之
009_0711_a_06L宇翼舒繩直尊容展眉含笑山色呈
009_0711_a_07L溪聲獻樂過者刮目居者安枕
009_0711_a_08L倘非道學之功其如是一新耶
009_0711_a_09L於辛巳夏道學到伽倻請余記其事
009_0711_a_10L余於是輒命中山人爰據道學之口訣
009_0711_a_11L觕擧其端倪

009_0711_a_12L

009_0711_a_13L觀佛菴記

009_0711_a_14L
湧泉寺外龍上可數里許有觀佛菴
009_0711_a_15L壬背而丙面後擁而前通左右圍而
009_0711_a_16L中洞角縣三十里之叅差華嶽六十
009_0711_a_17L里之嵯峨皆在眺望中麥熟稻結之
009_0711_a_18L坐而見之川雲嶺月之態先而
009_0711_a_19L得之行軰樵徒怯高而莫涉之
009_0711_a_20L求道者頥神養性之塲曷有越於此
009_0711_a_21L菴㦲菴乃羅代義湘祖師草建觀心
009_0711_a_22L而近甚頹朽戊寅冬本菴比丘典
009_0711_a_23L勸諭本寺諸善人贏得財己卯
009_0711_a_24L春邀諸伽倻山匠石升太等七人數月

009_0711_b_01L몇 개월에 걸쳐 준공하고 낙성하였다. 건물의 규모와 제도는 전에 비해 열 배나 커졌으니, 이는 의상 조사의 원력이 아닐 수 없다. 오래도록 길이 이어지리니, 하물며 그 암자가 창건된 지 오래되었음에랴. 그간 무너지고 다시 일으킨 것이 적지 않으니, 잠 공의 공은 진실로 비교할 데 없도다. 어찌 의상 조사의 원력이 아니겠는가? 이날 이후 이곳에 거처하는 이는 일념으로 나머지 잡생각을 밀어내고 항상 영각靈覺의 부처를 관하여 묵묵히 국가에 정성을 다하고 드러내어 단문檀門에게 덕을 갚으리니, 잠岑이 곧 의상이요, 의상이 곧 잠이로다. 게다가 또한 의상 대사의 원력은 샘과 같아 끝이 없으니, 반드시 후세에 잠과 같은 이가 시운을 타서 간간이 생장하여 이 암자를 오늘같이 만드는 경우가 비늘처럼 많아질 것이다. 우리 부처님을 보건대 세도世道를 잘 보우하심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나는 올해 이웃에 있는 청련사靑蓮寺에서 여름 결재를 나던 중 일찍이 잠 스님의 청으로 대들보 사이에 상량문을 썼는데, 잠 스님이 다시 와서 기문을 청하기에 두레박줄이 짧은 것도 헤아리지 않고 감히 의상 대사 법해法海의 만분의 일이라도 뜨고자 하였다. 이로써 잠 스님의 수고에 우러러 보답하고자 한다.
청련암기
달성達城 남쪽 1유순由旬56) 밖에 지장사地藏寺가 있다. 이 절은 신라 때의 고찰이나 문적文蹟이 병화를 입어 연대를 상고할 수 없다. 절 왼편의 화살을 쏘면 닿을 만한 거리(一箭程)에 청련암靑蓮菴이 있다. 지난 경신년(1680)에 승민勝敏 대사가 처음 창건한 후 35년 만인 갑오년(1714) 지월 대사池月大師 처밀處密이 덕심德心ㆍ사순思順ㆍ명헌明憲ㆍ선명善明 등 네 분의 대사와 함께 중창하였다. 지월은 손수 감나무 10여 그루를 심었는데 의연히 고목이 되었다. 이 두 번의 불사는 모두 강희康熙 연간에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009_0711_b_01L之間竣而落之屋之䂓制比前十
009_0711_b_02L此莫非湘師之願力久而彌亘
009_0711_b_03L其菴之剏來逖矣間有隨廢而興者不
009_0711_b_04L而岑公之功眞若沒雙此豈非
009_0711_b_05L湘師之願力乎今而後凡居于此者
009_0711_b_06L一念靡餘念恒觀靈覺之佛默以致
009_0711_b_07L誠於國家顯以報德於檀門則岑亦
009_0711_b_08L湘也湘亦岑也又況湘之願力
009_0711_b_09L泉無窮必有後世如岑者乘運間生
009_0711_b_10L使此菴如今日者鱗矣其於觀我
009_0711_b_11L佑世道之宜豈有窮矣愚於是
009_0711_b_12L結夏於隣社靑蓮曾因岑請
009_0711_b_13L述樑間六兒之文而岑復來請記
009_0711_b_14L顧綆短敢㪺湘法海之萬一仰賡岑
009_0711_b_15L之勤爾

009_0711_b_16L

009_0711_b_17L靑蓮菴記

009_0711_b_18L
達城南一由旬外有地藏寺羅代古
009_0711_b_19L文蹟入兵火年紀不可攷寺左
009_0711_b_20L一箭程有靑蓮菴徃者庚申勝敏
009_0711_b_21L師草剏之後三十五年甲午池月大
009_0711_b_22L師處密與德心思順明憲善明四師
009_0711_b_23L剏之池月手植杮十餘株依然成古
009_0711_b_24L二皆康熙年中甲乙也又五十三

009_0711_c_01L또 53년 만인 병술년(1766)에 모계慕溪 대사가 권선문을 취하여 개수하였고, 또한 오토五土57)를 시주하였으니, 적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아 집의 제도가 전보다 열 배나 갖추어졌다. 사용된 쌀과 금전은 모두 모계 공이 여러 선인善人들에게 권선하여 얻은 것이다. 일을 지속한 달수로는 반년이 넘었는데, 금년 병술년부터 경신년을 소급하면 대략 87년이 된다. 앞으로 시간이 흘러 40년, 50년이 되면 무너진 곳을 따라 다시 고치는 자가 반드시 그 사이에 나타날 것이로다.
나는 지금 용천湧泉 남사南寺에 주석하고 있는데, 10년 전 그 암자에 머물러 그때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 암자 스님 몇 분이 내방하여 요청하기를, “모계 공께서 우리 암자에 들어온 지 몇 년 만에 백방으로 수리한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온 절집 여기저기(末梢渾屋) 무너지고 썩은 곳이 대번에 새로워졌습니다. 또 여러 스님들을 경계하며 ‘절집 일은 이미 마쳤으니 성공한 이상 어찌 오래 머무는 것이 옳으랴. 장차 자리를 옮길 계획을 세울 생각이다. 여러 스님에게 청하노니 날 새면 향 올리고 해 지면 등을 켜서 나라가 태평하길 축원하시오. 종사宗師를 청하여 강설하고 서로 토론하되, 절대로 한가로이 잡담을 하지 마시오. 그러면 내가 비록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함께 있는 것과 진배없을 것이니, 청하건대 절대 소홀히 하지 마시오’ 하시던 말씀이 귓전에 맴돕니다. 바라건대 법로法老께서는 여러 스님들을 위해 써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묵묵히 듣고 있다가 이윽고, “공적은 말씀한 대로이고, 말씀한 것은 공적과 같습니다.”라 하고는 곧바로 질박한 문장으로 기를 짓는다.

009_0711_c_01L年丙戌慕溪大師取札改建之
009_0711_c_02L以五土施之不儉不奢屋之制
009_0711_c_03L蓰於前而所消米錢皆慕溪公之善
009_0711_c_04L勸諸善人得出也所積日月半年有
009_0711_c_05L奇也自今丙戌泝及庚申凡八十
009_0711_c_06L七年轉到四五紀則隨廢而興者
009_0711_c_07L然間生矣余時在湧泉南社而十年
009_0711_c_08L前居其菴知其事詳矣一夕其菴衲
009_0711_c_09L子數人來請余曰慕溪公之入吾菴
009_0711_c_10L有年凡百修理者不爲不多而末
009_0711_c_11L梢渾屋頹朽者頓然新之且戒諸
009_0711_c_12L僧曰菴務已竟而成功之下豈合
009_0711_c_13L久居將作移趾之計其惟諸師
009_0711_c_14L香夕燈祝國太平請入宗師講說
009_0711_c_15L相難勿致閒雜語則吾雖他適
009_0711_c_16L在無殊幸須毋忽其言入耳朶
009_0711_c_17L願法老爲諸僧書之余於是默默鹽
009_0711_c_18L良久而迺言曰所功如所言
009_0711_c_19L言如所功輒以朴直之辭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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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隱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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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삼상三常 :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세 가지의 사상事象. 『管子』 「君臣」 상에, “하늘에는 상상常象이 있고, 땅에는 상형常形이 있고, 사람에게는 상례常禮가 있는데, 이들은 한 번 세워지면 바뀌지 않는다. 이를 삼상이라 한다.(天有常象。 地有常形。 人有常禮。 一設而不更。 此謂三常。)”라고 하였다.
  2. 2)치재癡齋 : 우치재愚癡齋. 어리석은 중생의 슬퍼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올리는 재라는 말이다. 조동종曹洞宗의 개조開祖인 당唐나라 동산 양개洞山良价 선사가 입적하려 할 적에 대중이 통곡하며 슬퍼하자 그들을 위해 우치재를 지내게 하였는데, 대중의 요청에 따라 7일 동안이나 계속된 재가 끝나자 그 이튿날 단정히 앉아서 시적示寂한 고사가 『景德傳燈錄』 권15 「筠州洞山良价禪師」(T51, p.323b)와 『五燈會元』 권13 「瑞州洞山良价悟本禪師」(X80, p.263c)에 수록되어 있다.
  3. 3)칠축七軸 : 『妙法蓮華經』이 7권으로 구성되어 있어 『법화경』을 대유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4. 4)육종六種 : 육종 진동震動. 부처님이 설법할 때의 길조로, 대지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는 것. ‘동動’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기起’는 흔들려 일어나는 것, ‘용涌’은 솟아오르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땅이 움직이는 모습을 가리킨다. ‘각覺’은 큰 소리를, ‘진震’은 은은한 것을, ‘후吼’는 포효를 의미한다. 이들 셋은 땅이 움직이는 소리를 가리킨다.
  5. 5)십지十地 :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52위位 중 제41위로부터 제50위까지를 말한다. 이 십위는 불지佛智를 생성하고, 능히 주지住持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 이익되게 하는 것이, 마치 대지大地가 만물을 싣고 이를 윤택하게 함과 같으므로 지地라 이른다.
  6. 6)삼승三乘 : 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ㆍ보살승菩薩乘이라는 세 가지 실천 방법. 각각의 사람을 능력과 소질에 맞게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는 가르침을 탈것에 비유한 것으로 성문ㆍ연각ㆍ보살에게 적합한 가르침을 말한다.
  7. 7)네 가지 꽃 :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할 때에 나타나는 상서로운 징조로서 하늘에서 내린 네 가지 꽃이다. 만다라꽃(백화)ㆍ마하만다라꽃(큰 만다라꽃, 대백화)ㆍ만수사꽃(적화)ㆍ마하만수사화(대적화, 큰 만다라꽃). 『무량수경』에는 백련화白蓮花ㆍ청련화靑蓮花ㆍ홍련화紅蓮花ㆍ황련화黃蓮花로 제시되어 있다.
  8. 8)다보여래多寶如來 : 『법화경』에 등장하는 동방 보정세계寶淨世界의 교주敎主이다. 이 부처님은 보살로 있을 때에, “내가 성불하여 멸도한 뒤,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면 시방세계 어디든 나의 보탑寶塔이 솟아 그 설법을 증명하리라.”라고 서원하였다. 석존께서 영산靈山에서 『법화경』을 설했을 때에도 그 탑이 솟았다고 한다.
  9. 9)아我와 인人의 산(人我山) : 인人과 아我를 산에 비유한 것. 인아는 물질계와 정신계의 양면에 걸쳐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일체의 것으로,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인신人身에 대하여 마치 실재한 것같이 생각하여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아我란 것이 있는 것으로 아는 그릇된 견해를 말한다.
  10. 10)육화六和 : 육화경六和敬의 줄임말이다. 보살이 중생과 어우러져 함께 공경하고 사랑하는 여섯 가지 덕목이다. 여섯 가지는 동계화경同戒和敬ㆍ동견화경同見和敬ㆍ동행화경同行和敬ㆍ신자화경身慈和敬ㆍ구자화경口慈和敬ㆍ의자화경意慈和敬이다. 혹 승려는 화합을 의義로 삼는데, 그 화합에는 이치의 화합(理和)과 일의 화합(事和),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일의 화합 가운데는 다시 여섯 가지의 화합이 있으니, 몸을 함께하는 일(身和), 입을 모아 예불하는 일(口和), 남의 뜻을 존중하는 일(意和), 계율을 함께하는 일(戒和), 의견을 함께하는 일(見和), 이익을 함께하는 일(利和) 등의 일이다.
  11. 11)나롱羅籠 : 그물과 바구니. 구제를 의미한다.
  12. 12)삼유三有 : 삼계三界와 같은 말이다. 유有는 존재한다는 뜻으로, 선악의 업인業因에 따라 받게 되는 고통과 즐거움이 제각기 다른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를 말하는 것이다.
  13. 13)칠중항수七重行樹 : 『阿彌陀經』 권1에, “또 사리불아, 극락국토에는 칠중난순과 칠중나망과 칠중항수가 모두 사보로 이루어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데, 이 때문에 그 나라를 극락이라고 부른다.(又舍利弗。 極樂國土。 七重欄楯。 七重羅網。 七重行樹。 皆是四寶。 周匝圍繞。 是故彼國名爲極樂。)”라는 말이 나온다. 칠중항수는 곧 일곱 겹으로 줄지어 선 나무라는 뜻이다.
  14. 14)팔공덕지八功德池 : 여덟 가지 공덕을 지닌 물.
  15. 15)사유闍維 : 다비茶毘와 같은 뜻이다. 죽은 이를 화장하는 일이다.
  16. 16)십법계十法界 : 미계迷界의 천상계天上界ㆍ인간계人間界ㆍ수라계修羅界ㆍ축생계畜生界ㆍ아귀계 餓鬼界ㆍ지옥계地獄界와 오계悟界의 불계佛界ㆍ보살계菩薩界ㆍ연각계緣覺界ㆍ성문계聲聞界를 말한다.
  17. 17)옥호玉毫 : 32상相의 하나. 부처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
  18. 18)계주髻珠 : 상투 속의 구슬이라는 말로, 최고의 진리를 뜻하는 불교의 용어이다. 국왕이 상투 속의 구슬을 꺼내어 공신功臣에게 수여하는 『법화경』 「安樂行品」의 비유에서 유래한 것이다. 상투는 이승二乘의 권교權敎를 뜻하고, 구슬은 일승一乘의 실리實理를 뜻하는바, 법화회상法華會上의 개권현실開權顯實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른바 법화칠유法華七喩의 하나인데, 정주유頂珠喩라고도 한다.
  19. 19)십여十如: 십여시十如是. 모든 존재(諸法)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이 열 종류의 여시如是로써 파악한 것. 『법화경』 「方便品」에서, “오직 불佛과 불佛만이 제법의 실상을 사무쳐 남김없이 다 아신다. 이른바 여시상如是相ㆍ여시성如是性ㆍ여시체如是體ㆍ여시력如是力ㆍ여시작如是作ㆍ여시인如是人ㆍ여시연如是緣ㆍ여시과如是果ㆍ여시보如是報ㆍ여시본말구경如是本末究境 등이다.”라고 설한 데 기초한다.
  20. 20)굴산崛山 : 『법화경』의 설법 장소인 기사굴산耆闍崛山. 영취산靈鷲山이라 번역하고, 줄여서 영산靈山이라고도 한다. 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의 동북쪽에 솟아 있고, 석존이 설법하던 곳으로 이름난 산이다. 굴산의 글은 『법화경』을 가리킨다.
  21. 21)삼신三身 :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 혹 탱화를 말한다면, 아미타 삼존불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22. 22)육종六種의 좋은 음식 : 육종공양ㆍ육종공구六種供具. 부처님께 공양하는 여섯 가지 좋은 음식. 물ㆍ도향塗香ㆍ꽃ㆍ음식ㆍ등명燈明ㆍ소향燒香. 이것을 육도六度에 배대하면, 물은 곧 보시, 도향은 지계持戒, 꽃은 인욕忍辱, 음식은 선정禪定, 등명은 지혜, 소향은 정진을 상징한다.
  23. 23)오분향五分香 : 오분법신五分法身을 향에 비유한 말. 곧 계향戒香ㆍ정향定香ㆍ혜향慧香ㆍ해탈향解脫香ㆍ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다.
  24. 24)나계螺髻 : 머리털을 소라 껍데기처럼 빙빙 감아 올린 모양. 부처님 32상의 하나이다. 부처님의 정수리에는 소라 모양의 살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25. 25)도사다천覩史多天 : 욕계 육천六天 중 네 번째 하늘이다. 도솔천이라고도 한다. 장래 부처가 될 보살이 있는 곳이다.
  26. 26)참고로 『중용』에서, “하늘이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지극하시도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라고 하였다.
  27. 27)천천千千 : 아득한 길, 혹 푸른 하늘, 구천.
  28. 28)업경業鏡 : 지옥 염라대왕의 청사에 있는 거울이다. 사자를 여기에 비추면 생전에 지었던 선행과 악행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29. 29)껍질을 벗고(脫殼) : 범부가 번뇌 망상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매미가 껍질에서 빠져나가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또 병아리가 달걀을 깨고 나온 것을 뜻하기도 하는바, 해탈을 의미한다.
  30. 30)곡천縠穿 : 비단을 뚫고 나갈 때. 비유하여 사람이 죽어서 혼백이 이미 떠나간 것을 말한다. 『法句經』에서, “정신이 형신 안에 거처하는 것은 참새가 병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 병이 깨져 버리면 참새는 날아가 버린다.” 하였으며, 『大智度論』에서는, “새가 날아와서 병 속으로 들어가매, 깁(거친 비단) 가지고 병 주둥이를 막았네. 깁이 뚫어져 새가 날아가 버리자, 신명도 그에 따라 달아나누나.(鳥來入甁中。 羅縠掩甁口。 縠穿鳥飛去。 神明隨業去。)”라고 하였다.
  31. 31)만행화萬行花 : 꽃 공양은 성불을 목적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원만한 육바라밀을 비롯한 보살의 수행을 상징하여 공양하므로 만행화라 한다.
  32. 32)대괴大塊 : 천지, 대자연 또는 대지大地를 말한다. 『장자』 「齊物論」에서, “대괴가 기운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고 한다.(夫大塊噫氣。 其名爲風。)”라고 하였다
  33. 33)『십익十翼』 : 공자가 『주역』 64괘의 본문을 경經으로 해서 이를 보익輔翼할 목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십전十傳을 말한다. 즉 「彖傳上」ㆍ「彖傳下」ㆍ「象傳上」ㆍ「象傳下」ㆍ「繫辭上」ㆍ「繫辭下」ㆍ「文言」ㆍ「序卦」ㆍ「說卦」ㆍ「雜卦」를 가리킨다.
  34. 34)삼역三易 : 세 가지 역易. 『連山易』ㆍ『歸藏易』ㆍ『周易』을 말하는데, 이들 가운데 현재는 『주역』만이 전해진다. 여기서는 『易經』의 의미로 쓰였다.
  35. 35)두찬杜撰 : 사실의 근본 없이 억측으로 만든 것을 칭한다. 오류가 많은 저술.
  36. 36)『무량수경無量壽經』 : 『觀無量壽經』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위제희의 청에 따라서 왕사성 궁중에 강림하여 설한 것이다. 위제희는 왕사성의 주인인 빈비사라왕의 왕후이자 아사세의 어머니이다. 아사세가 제바달다의 유혹에 빠져 왕위에 오르려고 부왕을 일곱 겹의 방에 감금하여 굶겨 죽이려 했다. 아사세는 또 남편을 위해 남 몰래 음식을 날라 준 어머니 위제희마저 깊은 궁중에 감금해 버렸다. 위제희가 비탄에 빠져 마음으로 부처님을 찾을 때 부처님은 이를 알고 기사굴산에서 왕궁으로 출현하여 그에게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의 정토를 나타내 보였다. 위제희는 그중에서 서방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면서 정토왕생의 방법과 그것을 관하는 수행법을 설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설법한 내용이 바로 『관무량수경』이다.
  37. 37)혜원慧遠 : 335~417. 동진東晋 때의 스님. 여산 백련사의 개조開祖. 안문雁門 누번樓煩 사람으로 13세에 이미 육경을 연구하였고, 특히 노장학에 정통하였다. 21세에 향산정 도안道安을 찾아가서 수행 정진하였고, 373년(전진, 건원 9) 부비苻丕가 양양襄陽을 공격하여 도안을 데리고 돌아가자 제자 수십 인과 함께 남 형주로 갔다. 후에 나부산으로 가는 길에 여산을 지나다가 그곳에 혜영慧永의 힘을 빌려 동림사를 짓고 주석하며, 그의 덕을 사모하여 모여 온 사람들 123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창설하고 염불을 수행하였다. 30년 동안 여산에 있으면서 법정法淨ㆍ법령法領 등을 멀리 서역에 보내어 범본을 구하고, 계빈국 스님 승가바제僧伽婆提에게 청하여 『阿毘曇心論』ㆍ『三法度論』을 다시 번역하였다. 또 담마류지曇摩流支에게 청하여 『十誦律』을 완전히 번역하였다. 당나라 선종은 변각 대사辨覺大師라 시호를 내렸고, 송나라 태종은 원오 대사圓悟大師라 시호하였다. 저서로는 『大智度論要略』 20권, 『問大乘中深義十八科』 3권, 『沙門不敬王者論』, 『法性論』 2권, 『沙門袒服論』 1권이 있다.
  38. 38)호궁號弓 : 활을 안고 호곡한다는 뜻으로, 임금의 죽음을 가리킨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였던 것에 비추어 이 글이 1776년에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호궁의 유래는 『史記』에 나온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채굴하여 형산 아래 호숫가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신하와 후궁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수염과 활을 안고 통곡하였는데, 그 활을 오호궁烏號弓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사기』 권28 「封禪書」)
  39. 39)석실石室 : 석실 명안石室明眼(1646~1710). 조선 후기의 스님. 대사의 문집으로 『百愚隨筆』이 있다. 문집 부록으로 「石室先師行狀」이 전한다.
  40. 40)부용당芙蓉堂 : 부용 영관芙蓉靈觀(1485~1571). 조선 중기의 스님. 삼천포 출신으로 13세에 덕이산德異山에 입산, 고행苦行 선사를 의지하여 3년간 공부하다 출가하였다. 그 후 위봉威鳳ㆍ조우祖愚ㆍ학매學梅 등에게 사사했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벽송 지엄碧松知儼을 만나 20년간의 의심을 풀고 대오하였다. 태고 보우의 법통을 이어받고 이를 청허 휴정에게 전하였다.
  41. 41)오행五行 : 우주 사이에 순환하는 목木ㆍ화火ㆍ토土ㆍ금金ㆍ수水의 다섯 가지 기운. 행行은 순환, 즉 운행運行의 뜻이다.
  42. 42)추구蒭狗 : 풀을 엮어서 만든 개를 말하는데,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소중하게 여기다가 제사를 지내고 나면 함부로 버린다는 뜻을 취하여 쓸모없는 사물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莊子』 「天運」에서, “추구를 진설하기 전에는 상자에 담아서 좋은 비단으로 감싸 두고 시축尸祝이 재계를 한 뒤에 모셔다가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끝나고 나면 발로 밟기도 하고 가져다가 불을 지펴 밥을 짓기도 한다.” 하였다
  43. 43)대박大朴 : 원시原始의 질박한 대도를 말한다.
  44. 44)이들은 모두 송나라 때의 인물로서 벼슬을 하면서 참선을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른 인물들이다. 『圓悟心要』 하에서, “고귀한 세도에 처하여 재상과 대신을 지낸 경우에 이르러서는, 배 상국裵相國, 진조상서陳操尙書, 백낙천白樂天, 왕상시王常侍와 본조本朝의 문공文公 양대년楊大年, 부마駙馬 이 도위李都尉 같은 이는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고 성인에 필적하였으니, 믿음이 사무치고 견해가 투철하여 다함없는 복을 누렸습니다. 모두가 특출한 지모와 빼어난 견해를 타고나서 세간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길목을 장악코자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라 하였다.(『선림고경총서』 31권 25쪽 참고) 『大慧語錄』 「示徐提刑」(T47, 899c)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이문화 도위는 부귀 더미 속에 있으면서 선의 대철대오를 참구해내었고, 양문공楊文公이 선을 참구할 때는 한림원에서 재직할 시기였다. 장무진張無盡이 선을 참구할 때는 강서의 수송 담당관이었다. 이 세 어른들은 곧 일상 세계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고도 실제의 양태를 담론할 수 있었다. 또 어찌 일찍이 반드시 처자를 버리고 관직을 쉬고 직분을 버리고, 풀뿌리를 씹어야만 가능하겠는가?”
  45. 45)포산苞山 : 비슬산琵瑟山.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소재. 『삼국유사』 「包山二聖」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46. 46)도리사桃李寺 : 우리나라 최초의 가람으로 신라 불법佛法의 초전법륜지이다. 아도阿度 화상은 위나라의 현창玄暢 화상의 문하에서 그의 법을 이어받았고, 374년(소수림왕 4) 19세에 고구려로 돌아왔다. 440년 신라 눌지왕 24년에 경주를 가다가 선주善州(선산)에 이르러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다 산으로 들어가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때 눈 속에 오색찬란한 복사꽃이 피었으므로 그 암자를 도리사라 하였는데, 눌지왕 때 세운 이 도리사가 신라 최초의 절이 되었다.
  47. 47)학수鶴樹 : 부처님이 열반하신 쌍림雙林의 다른 이름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자 사라수 숲(쌍림)이 하얗게 변하였는데, 그 빛이 마치 학과 같았다고 한다.
  48. 48)옛날 아육왕阿育王이 세존의 사리舍利 8휘(斛) 4말(斗)을 받들고 8만 주라국周羅國(小國)에 나누어 탑에 안치하게 하였다고 한다.
  49. 49)계곡鷄鵠 : 계림鷄林과 곡령鵠嶺. 계림은 신라의 서울 경주, 곡령은 고려의 수도 송도 송악산을 말한다.
  50. 50)기성箕城 : 경북 칠곡의 옛 지명이다. 참고로 평안도의 평양도 기성箕城이라고 한다.
  51. 51)가산산성架山山城 : 경북 칠곡군 동명면과 가산면의 경계에 있는 가산의 해발 901m에서 600m에 이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내성ㆍ중성ㆍ외성을 쌓은 산성이다. 조선 인조 대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명웅李命雄이 가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보고하여 성을 쌓기 시작하여 먼저 외성을 쌓았고, 이후 여러 차례 수축修築하였으며, 1741년(영조 17) 관찰사 정익하의 장계에 의하여 중성이 완성되었다. 이곳에는 천주사天柱寺와 보국사寶國寺가 있었는데, 이곳에 승창미僧倉米를 보관하고 승려를 모집하여 궁술弓術을 연습시키고 승장僧將을 뽑아 이들로 하여금 포루砲樓ㆍ장대將臺ㆍ진남대鎭南臺 등을 수비시켰다고 한다. 승창이 있었던 천주사에는 요사寮舍와 승창僧倉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내성은 1640년(인조 18)에 축성되기 시작하였다. 석성의 둘레는 4,710보이고, 1,887첩堞이 설치되었다. 동ㆍ서ㆍ북의 성문이 있었으며, 여덟 개의 암문이 있었다. 내성이 완성되면서 칠곡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군위軍威ㆍ의흥義興ㆍ하양河陽ㆍ신녕新寧이 예속되었다. 외성은 1700년(숙종 26)에 만들어진 석축이다. 둘레는 602보이고, 402첩이 생겼으며, 중성문이 만들어졌다. 성내에는 객사客舍ㆍ인화관人和館을 비롯한 관아官衙와 군관청軍官廳ㆍ군기고軍器庫ㆍ보루堡樓ㆍ포루砲樓ㆍ장대將臺가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성의 목적이 방어를 위한 성곽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52. 52)인악 의첨仁嶽義沾(91746~1796)의 『仁嶽集』 「天柱寺禪堂重創記』에도, “우리 영남은 예로부터 이름난 절이 많다고 하는데, 험준한 요해지를 말한다면 반드시 기성箕城의 천주사天柱寺라고 해야 하니, 남쪽의 제일가는 관방關防이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53. 53)당영棠營 : 감영監營을 가리킨다. 감당甘棠은 팥배나무. 원래는 『시경』 「召南」의 편명인데, 보통 방백方伯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周 무왕武王 때 소공召公 희석姬奭이 서백西伯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모한 나머지 그가 잠시 그늘 아래 쉬었던 감당나무를 기념하여 잘 가꾸며 보존하는 한편, 이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54. 54)양한兩漢 :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55. 55)육위지문六偉之文 : 상량문. 상량문의 형식이 앞부분에 건물의 여러 내력을 서술하고 맨 끝에 시를 짓는데, ‘어량위於樑偉’라는 투식어로 사방, 상하의 방향을 노래하여 육위라 한다.
  56. 56)유순由旬 : 고대 인도에서 이수里數를 잰 단위. 제왕이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소달구지로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1유순이라 하기도 하며, 약 11km~15km라고 하는 등 여러 이설이 있다.
  57. 57)오토五土 : 산림山林ㆍ천택川澤ㆍ구릉丘陵ㆍ하천지河川地ㆍ저습지低濕地를 가리킨다.
  1. 1)總目次。編者作成補入。
  2. 2)「文一」編者補入。
  3. 1)此序。旣載於此書第九册(六九六頁下段){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