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호은집(好隱集) / 好隱集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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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은집 제4권(好隱集 卷之四)
시문詩文 2
임제종 회당 화상 행적기
일찍이 듣건대 미덕이 있는데도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혹惑’이라 하고, 아름다운 행실이 없는데도 남들에게 지나치게 선양되는 것을 ‘무誣’라 한다. 나는 회당晦堂 화상에 대해 또한 말하리라.
화상은 하늘이 내린 재주로, 이른 나이에 입산하여 삼장三藏의 교전敎筌에서 터럭 하나로 봉황을 알아보고, 반점 하나로 표범을 알아차렸다. 또 『화엄華嚴』에 더욱 정밀하였으니, 진정 포주蒲州의 태공泰公, 치주淄州의 소공沼公1)과 같은 날로 말할 수 있다 하겠다. 20년 동안 청암淸菴에 출입하여 밤이면 곧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고, 낮이면 곧 『화엄경』을 강하였으니, 납자 가운데 빈손으로 왔다가 채워서 돌아가는 자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이뿐만이 아니었다. 짐승 중의 범이나 사슴, 새 중의 까치와 까마귀, 물속의 물고기와 자라, 땅속의 살무사나 지렁이 등이 모두 법유法乳에 젖었다. 또한 이뿐만이 아니었다. 나무꾼과 목동과 산쟁이(山尺)2)들이 모두 도량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며, 청암을 둘러싼 지경의 수십 리 산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화상이 어루만지고 기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사가 무상無常을 보이신 것도 또한 이 암자에서였다. 고로 용사龍砂3)의 뒤쪽 진지震枝4)의 기슭에 탑갈塔碣이 우뚝하고, 별도로 감실을 보호하는 교룡과 거북을 세웠으며, 홀실笏室5) 머리 쪽에 한 칸의 영당影堂이 우뚝 서 있다. 무릇 공부하는 무리들이 이곳에 들어오면 탱화와 탑에 예배하였고, 비문을 읽으면 곧 의연히 화상이 있는 것 같았다. 이름난 산 어느 곳도 종사가 발우를 머무르게 할 장소가 아니겠는가마는 화상에 있어서는 오직 이 암자와의 인연이 가장 중하도다. 저 중국의 여산廬山은 혜원慧遠 공이 상주한 고로 이름이 났고, 우리 성주星州의 청암이야말로

009_0725_b_02L好隱集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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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725_b_04L1)詩文(二)

009_0725_b_05L臨濟宗晦堂和尙行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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甞聞有美德而不傳於世者惑也
009_0725_b_07L美行而過揚於人者誣也璣於晦堂
009_0725_b_08L和尙亦云和尙天才蚤歲入山
009_0725_b_09L藏敎筌一毛知鳳半點見豹而尤
009_0725_b_10L精華嚴眞可與蒲州泰淄州沼同日而
009_0725_b_11L語也二十餘年出入淸菴而夜則
009_0725_b_12L究無字話晝則講華嚴經衲子之虛
009_0725_b_13L而來實而歸者指不勝屈不徒如斯
009_0725_b_14L獸之虎鹿禽之於鵲水底之魚鼈
009_0725_b_15L中之虺螾咸霑法乳又不徒如斯
009_0725_b_16L童也牧竪也山尺也皆不犯塲
009_0725_b_17L環淸菴數十里之山一草一木
009_0725_b_18L非和尙之撫養而示無常亦於此菴
009_0725_b_19L故龍砂之背震枝之麓塔碣嵬然
009_0725_b_20L別造龕護螭龜笏室之頭一間影堂
009_0725_b_21L巋然凡黌軰之入于此者禮㡠拜塔
009_0725_b_22L而讀碑則依然如和尙之在也名山
009_0725_b_23L何處非宗師之所可駐缾而其於和
009_0725_b_24L唯此菴緣最重也彼華之廬山
009_0725_b_25L遠公之恒居故名我星之淸菴以晦

009_0725_c_01L회당晦堂이 오래 머문 고로 이름이 났으니, 어찌 오직 산만이 중요한 것이겠는가? 수승한 인물이 있으면 산 또한 그와 같아지는 것이다.
화상이 내려온 계보를 거슬러 헤아려 보면 곧 임제臨濟가 30대가 되며, 달마達摩가 40대가 된다. 임제종파에 급암及菴이 있고, 그 아래로 석옥石屋이 있는데, 석옥은 믿음의 신표(가사와 발우)를 우리 동방의 태고太古 존자에게 건네주었다. 태고는 그것을 환암幻菴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전하고, 구곡은 등계登階에게 전하고, 등계는 벽송碧松에게 전하고, 벽송은 부용芙蓉에게 전하였다. 부용 문중에서 부휴浮休를 배출하였고, 부휴 문중에서 벽암碧巖을 배출하였으며, 벽암은 모운慕雲6)을 얻었고, 모운은 보광葆光을 얻었으니, 보광은 곧 회당의 법부法父이다. 태고가 고려 말에 태어난 이래 등불 등불마다 서로 비추어 보광에 이르렀으니, 화엄의 법유法乳에 젖어 면면히 멀리 전함이 회당보다 높은 분이 없는 듯하다. 나는 30년간(立年間)7) 화엄을 화상에게 여쭈어 그 실마리를 얇게 알 뿐이다. 80고개에 다다라 지난날을 미루어 생각하니, 애틋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 신유년(1741)에 강좌江左에서 와서 영정에 곡하고자 하였다가 정유년(1777)에 가야에서 와서 유적을 두루 살펴보고 시냇물로 잔을 올리니,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절로 샘솟듯 흘러 마치 비 그친 자리에 앉은 것 같았다. 취봉 장로翠峰長老는 화상으로부터 세 번째 의발을 전수받은 분으로 나에게 아름다운 자취를 기록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아, 맙소사. 장로여, 나를 잘못 아셨소. 나이는 이미 노쇠하고 글도 본디 풍부하지 못하니, 어찌 감히 대선사의 깊고 오묘한 덕을 조금이라도 써낼 수 있겠소? 하지만 내가 사양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법은法恩을 잊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단지 내가 겪어 아는 사실을 모아 판에 쓰는 것은 ‘무誣’가 아니니, 어찌 ‘혹惑’이라 하겠는가? 내가 사적을 찬술한 글이 오늘을 만나 흡족히 이루어졌다면 부끄럽지 않겠다.

009_0725_c_01L堂之久住故名豈獨山重哉勝人在
009_0725_c_02L則山亦如之遡數和尙之所自則臨
009_0725_c_03L濟爲三十代達摩爲四十代而濟派
009_0725_c_04L有及菴此下有石屋而石屋畎 [6] 授信
009_0725_c_05L具於我東太古尊者太古傳之幻菴
009_0725_c_06L菴傳之龜谷龜谷傳之登階登階傳
009_0725_c_07L之碧松碧松傳之芙蓉蓉門出浮休
009_0725_c_08L休門出碧巖巖得慕雲雲得葆光
009_0725_c_09L晦堂之法父也太古出自麗末燈燈
009_0725_c_10L相照以至葆光而其於灑華嚴之法
009_0725_c_11L綿綿傳遠似無尙晦堂也璣於
009_0725_c_12L立年間問華嚴於和尙薄知端倪
009_0725_c_13L於八甲嶺底追念徃日能不依依
009_0725_c_14L辛酉自江左來哭影下而丁酉至自
009_0725_c_15L伽倻周瞻遺跡酌獻磵泉無聲之涙
009_0725_c_16L自湧漣如坐雨罷翠峰長老以和尙
009_0725_c_17L之三傳衣請記美蹟余曰毋長
009_0725_c_18L老悞知余矣年已衰而文不素贍矣
009_0725_c_19L何敢容毫於大先師玄玄之德矣余所
009_0725_c_20L不可辭者唯法恩之難忘以也謹摭
009_0725_c_21L璣曾所知之實書之版不是誣也
009_0725_c_22L云惑也余之撰迹之筆遇今日而恰
009_0725_c_23L不媿也

009_0725_c_24L「詩文二」三字編者補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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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 비슬산 유가사기
현풍읍玄風邑 동쪽 10리에 산 이름은 비슬毘瑟이요, 절 이름은 유가瑜伽가 있으니, 곧 숙종 임술년(1682, 숙종 8)에 도경道瓊 화상이 지은 절이다. 원래는 북쪽의 산기슭(坎麓) 1리쯤에 있던 신라 대에 창건된 원각사圓覺寺를 옮긴 것이다. 도경 공은 처음에 지세가 좋은 것을 살펴보고, 더욱이 검은 반송盤松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여 절을 옮겨 짓고 이름을 바꿔 유가瑜伽라 하였다. 법전法殿은 한 채요, 승료僧寮는 여덟 채이니, 경 공瓊公 이래 임술년이 세 번 돌아와서 그 소나무는 이미 아름드리 큰 나무가 되어 시원한 그늘을 사방에 펼쳐 수백 명의 대중을 용납할 만하였다. 그러나 그 전각은 비바람에 시달려 거의 반이나 비가 새고 기울어졌으니, 숲과 산봉우리는 그 때문에 실색失色하고, 시내와 골짜기는 이로 인해 슬프게 오열한다.
다행히 영묘英廟 계사년(1773)에 본사의 갑계 대중들이 장물長物을 희사하고 재목을 사고 장인을 불러 지붕을 엮고 보수하여 새롭게 하였는데, 이때 지현智賢은 승통僧統으로 모든 일을 주관하였고, 을미년(1775)에 승통 상전尙專은 여러 대중들과 상의하여 단청을 드높이 아뢰어 드디어 낙성을 고하였다. 계사, 을미 두 해에 그 재물을 담당한 이는 전前 판사判事 원순元淳이요, 그 일을 감독한 이는 전 승통 하초夏初였다. 그 갑계원甲契員들은 병진생에서 계해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8년간 태어난 이들이었다. 정유년(1777) 승통 하심夏心이 사람을 가야산으로 보내 그 전말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병이 있어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무술년(1778) 승통 순찰順察이 또 편지를 보내 청하기에 나는 곧 사실을 상고하고 엮어내어 돌아가 벽에 걸어두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또한 절에 있는 승려는 적고, 텅 비고 무너진 요사는 아무도 수리하거나 돌보지 않으니, 슬프도다. 전각 뜰에 누각이 있고, 그 아래 문이 있고, 저 소나무는 문밖에 있다.
가야산 중봉암기

009_0726_a_01L玄風毘瑟山瑜伽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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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邑東十里山曰毘瑟寺曰瑜伽
009_0726_a_03L肅廟壬戌道瓊和尙所建而原自坎
009_0726_a_04L麓一里許羅代所創圓覺寺來者也
009_0726_a_05L公初閱形勝且愛樨盤松一株在
009_0726_a_06L建改額曰瑜伽法殿一僧寮八
009_0726_a_07L瓊公以來壬戌垂三還其松也
009_0726_a_08L成大樹淸陰四布可容數百衆
009_0726_a_09L其殿也爲風雨所傷太半漏歪
009_0726_a_10L巒爲之失色磵壑因而哀咽幸於英
009_0726_a_11L廟癸巳本寺甲契之衆樂捨長物
009_0726_a_12L材召工而葺之補而新之于時智
009_0726_a_13L以僧統視凡百乙未僧統尙專
009_0726_a_14L衆成議倜奏丹采仍以告落癸乙
009_0726_a_15L兩年掌其財者前判事元淳董其
009_0726_a_16L役者前僧統夏初其甲也自丙辰
009_0726_a_17L至癸亥凡八生人丁酉僧統夏心
009_0726_a_18L人伽耶請記顚末而有病不果戊戌
009_0726_a_19L僧統順察又以書來請余乃攷繹事
009_0726_a_20L俾歸揭壁勿壞而亦有僧少空廢
009_0726_a_21L之寮無人修治悲夫殿庭有樓其下
009_0726_a_22L有門松在門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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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726_a_24L伽耶山中峰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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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호사虎砂8) 밖 시내 건너 5리쯤에 축좌丑坐(동북쪽을 등진 자리) 미향未向(남서향)에 중봉암中峰菴 옛터가 있다. 그곳의 형세는 시원하게 트이어 깊고 고요하니, 청오靑烏9)의 눈이 지나면 혀를 차고 내두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가야산의 별천지다. 그것이 언제 허물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남은 초석에 먼지와 이끼가 덮여 잡풀이 우거진 밭이 된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지난 영묘英廟조 신묘년(1771)에 본산本山 납자衲子 찬혜賛慧가 서원을 내어 대중들에게 권하여 점차 많은 재물을 얻어 이 터에 다시 선암禪菴을 세웠다. 정당正堂 두 칸, 장물방藏物房 한 칸, 연주煙厨 한 칸이 있고, 반쯤 이어진 뒤로 작은 방이 좌우로 각 한 칸이 있고, 앞으로 뺀 영감影龕 한 칸, 감실을 마주한 횡각橫閣 한 칸이 있다. 임진년에 또 오십삼불五十三佛 초상綃像과 미타불 목상木像을 만들었고, 이어 명부탱(冥府㡠)ㆍ도리탱(忉利幀)ㆍ신중탱(神衆幀) 등도 함께 만들었다. 무쇠솥(釜鐺) 같은 집물什物도 모두 갖추었고, 기와를 올리고 단청을 그렸으며, 샘물은 물길을 텄고, 화초를 심었다. 이로부터 뒤에 모이는 사람들은 백 가지 일을 걱정하지 않고 일심으로 수도하게 하였으니, 위대하도다 혜 공慧公이여, 마음과 몸의 수고가 정말 많았도다. 나는 이때 어느 산에 있으면서 그 일을 모두 알고 있었는데, 무술년(1778)에 이르러 이 암자의 선자禪子인 탄정綻正이 찾아와 기문記文을 구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혜 공은 능히 사람들에게 간업慳業을 깨뜨리고 정행淨行에 힘쓰게 하셨소. 대사는 돌아가 내 말을 암자 대중들에게 전하기를, ‘손으로는 성성惺惺한 지혜의 검을 잡아 어둡고 혼혼昏昏한 수마睡魔를 베어 끊어 버리시오. 한밤중에 일어나 나라의 만세와 곡식이 잘 익고 백성들이 화합하기를 축원하여 마침내 임금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경지10)에 이를 것이오. 그리하면 곧 사은四恩에 보답한다 할 수 있으니, 어찌 나에게 뼈대 있는 말(骨語)을 막고 청정한 땅(淨地)을 더럽히라고 하겠소?’라고 하시오.”
정正 스님은 이에 합장하고 물러갔다.
염정 상인에게 주는 게송설說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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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寺虎砂外越磵五里有丑坐未向
009_0726_b_02L中峰菴舊基其局勢也開豁幽靜
009_0726_b_03L烏目涉無不嘖舌伽耶山之別區也
009_0726_b_04L其破也未詳何時而遺礎羃塵苔
009_0726_b_05L榛田者旣久徃於英廟辛卯本山衲
009_0726_b_06L子賛慧發誓勸人得物漸夥乃依
009_0726_b_07L本址復立禪菴正堂二間藏物房
009_0726_b_08L一間煙厨一間有半鱗後小室左右
009_0726_b_09L各一間抽前影龕一間龕面橫閣一
009_0726_b_10L壬辰又造五十三佛綃像彌陀佛
009_0726_b_11L木像至於冥府㡠忉利幀神衆幀
009_0726_b_12L造焉釜鐺什物皆備焉瓦焉丹焉
009_0726_b_13L䟽泉焉植花焉自後會者百事無
009_0726_b_14L一心修道偉㦲慧也勤苦多矣
009_0726_b_15L余時在一山稔悉其事越戊戌本菴
009_0726_b_16L禪子綻正來索記余曰慧公能令
009_0726_b_17L人破慳業而務淨行也唯師趣歸
009_0726_b_18L吾之言告菴中人曰手握惺惺之慧
009_0726_b_19L斬斷昏昏之睡魔中夜而起
009_0726_b_20L國萬歲穀熟民和竟至於帝力何有
009_0726_b_21L之境則可謂報四恩何求余之閑骨
009_0726_b_22L語汙淨地乎正也於是拜而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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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726_b_24L與定上人偈并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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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사湧泉寺 염정念定 상인上人은 내가 총애하는 학인 스님이다. 그 사람됨을 보면 외모는 초라하나 마음은 넓고, 문자를 알고 행실은 신중하며, 어버이를 봉양하고 스승을 경배하되, 성실로 일관하니, 말세(季世)의 기남자奇男子라 할 수 있다. 내가 현산絃山에 들어온 후로는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더니, 오늘 저녁 창자를 씻어 내리는 감로주를 가지고 저무는 풍경 속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기쁨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시 한 수를 읊고 뜻을 풀어 해설하기를, “아, 요즘 납자들은 산문을 버리고 야인으로 돌아가는 자가 매우 많다. 나는 상인이 혹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궁금했었다. 이미 산문에 의탁하였는데 형체를 왜 다시 바꾸려 하는가? 형체가 변하면 마음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면 뜻이 어지러워지고, 뜻이 어지러워지면 곧 복된 일이 저절로 물러간다. 고인이 또한 이르지 않았던가? 천지는 여관이요, 일월은 나그네이니, 백 년의 영고榮枯 간이 바둑 한 판 끝나지 않은 시간이로다. 어찌 작은 이 한 몸으로 스스로 그 사이에 두 사람의 삶을 살려 하는가? 바라건대 우리 상인上人은 부디 이 말을 그렇다 여기고 띠에 쓰고 뼈에 새긴다면, 곧 이 말이 공허한 말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하였다.
게偈는 다음과 같다.

上人聽我言     상인上人이여 내 말 듣소.
百吉從心屯     온갖 길함은 마음의 진지(心屯)에서 나옵니다.
胷海恒敎靜     마음의 바다를 항상 고요하게 하면
塵間夢豈犇     티끌세상의 꿈에 어찌 분주하리오.
비슬산 법려를 보내며짧은 서문과 함께
사람을 전송하며 말을 하는 것은 현원玄元11) 이래 전해 오는 법칙이다. 내가 비록 어리석으나 어찌 한마디 말로 증별하지 않겠는가? 근래에 선문에 좋은 사람이 적으니, 그대가 고산故山으로 돌아가거든 힘을 모아 수도하여 남들보다 앞서는 표상이 된다면 곧 말운末運의 행복이겠다. 그대는 잘 생각하라. 옛말에도 “욕심낼 만한 것을 보지 않으면 이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를 그대에게 주노니, 그대가 이 말을 듣고 나를 생각하면, 곧 마땅히 장래에 이익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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湧泉寺念定上人乃吾之寵役而其
009_0726_c_02L人也貌侵臆寬識字愼行奉親敬
009_0726_c_03L一於誠季世之奇男子也吾入絃
009_0726_c_04L山後久而不至今夕携滌膓之露
009_0726_c_05L吾於暮景之中喜不能自抑吟成一
009_0726_c_06L解而說之曰近來衲子
009_0726_c_07L山歸野者頗繁吾恐上人或致其然
009_0726_c_08L旣托山門則形何更變形變則心
009_0726_c_09L心變則志雜志雜則福事自退也
009_0726_c_10L古人亦不云乎天地旅亭日月過客
009_0726_c_11L百年榮枯間一局棋未終則其胡以
009_0726_c_12L一藐身自作二人於其間㦲惟吾上
009_0726_c_13L幸以斯言爲然也書諸紳而鏤於
009_0726_c_14L則斯言也不歸於空言矣偈曰

009_0726_c_15L上人聽我言百吉從心屯

009_0726_c_16L胷海恒敎靜塵間夢豈犇

009_0726_c_17L

009_0726_c_18L送瑟山法侶并小引

009_0726_c_19L
送人以言玄元之遺則也余雖顓蒙
009_0726_c_20L無一言之可贈乎近來禪門少好人
009_0726_c_21L君歸故山奏力修道出於人表
009_0726_c_22L末運之幸也君其思之古語有之曰
009_0726_c_23L不見可欲此心不亂我以此與君
009_0726_c_24L以此憶我則應有將來之益也并示

009_0727_a_01L아울러 게송 한 구절을 보이노라.

人生於世欲難隄   인생살이에서 세상 욕심은 막기 어려워라.
自古英雄到此迷   예부터 영웅들도 여기에 이르러 미혹했지.
鏡裏看形雖似外   거울 속에 보이는 모습이 바깥에 있는 듯해도
皆於己面出乎㦲   모두 자기 얼굴에서 나온 것이라네.
기해년(1779) 가을 홍류동에서 걸어서 절에 오르다(己亥秋踏自紅流洞登寺閣)
秋深洞口路還迷   가을 깊은 골짜기 초입에 길은 다시 미로 되고
左右丹楓中有溪   좌우편 불타는 단풍 숲길 그 가운데 시내 흐르네.
松栢經霜猶不變   소나무 잣나무는 서리 겪어도 외려 기상 변함없고
烏鳩見客故隨齊   까마귀 비둘기는 길손 보고는 짐짓 나란히 따르네.
靑茶白醴花邊酌   푸른 녹차 흰 단술은 꽃 가에서 대작하고
長律短歌石面題   긴 가락 짧은 노래는 돌 표면에 쓰네.
步步扶笻上高閣   한 걸음씩 지팡이 부여잡고 높은 누각 올라가니
三竿12)紅日掛峯西   세 발 장대 붉은 태양 서쪽 봉우리에 걸려 있구나.
한가한 날에 가야산 정상에 오르다정상에 우비정牛鼻井이 있다.(暇日登伽耶山頂頂有牛鼻井)
逶迤扶藜上鼻峰   구불구불 청려장 짚고 비봉에 올랐어라.
荷衣數幅汗流濃   연잎 옷 몇 폭이 땀으로 흥건한 채.
濕雲値暖浮仍滅   눅눅한 구름은 햇살에 떴다가 사라지고
宿鳥驚風出復從   자는 새는 바람에 놀라 나왔다가 따르다가.
頭擧靑空疑壓倒   머리 드니 푸른 하늘은 눌려 내릴 듯하고
掌承白露得痕蹤   손바닥에 이슬 받으니 신선 자취 얻은 듯해.
人間永絕傳書鴈   인간 세상에서 영원히 기러기 편지 끊었으니
天外難聞告事鍾    하늘 밖에서 일을 아뢰는 종소리 듣기 어려워라.
虎岳鷲岑平似席   호악虎岳과 취잠鷲岑은 평탄하기가 자리를 깐 듯하고
琴湖洛水小於弓   금호琴湖와 낙수洛水는 활보다 더 작아 보이네.
須彌更大何能到   수미산이 더욱 높은들 어찌 도달할 수 있나.
此日壯觀可謂宗   오늘의 이 장관을 으뜸이라 하리로다.
삼가 최치원의 홍류동 시에 차운하여(敬次崔仙紅流洞韻)
鶴膝蜂腰最勝巒   학의 무릎 같고 벌의 허리 같은 최고 수승한 봉우리여.
崔仙深遯一壺間   최치원이 신선되어 호리병 하나 사이에 깊이 숨었네.
狂奔佳句人爭誦   미친 듯이 달린다13)는 멋진 구절 사람들 다투어 읊고
絲入錦還爲此山   실처럼 갔다가 비단처럼 왔다더니14) 이 산을 말하누나.
우객羽客15)을 만나 밤새워 이야기하다(逢羽客夜話)
久閉雲扉不出山   오랫동안 구름 삽짝 걸어둔 채 산문 나서지 않으니
萬緣空寂一身閒   만 가지 인연 공적하고 일신이 한가하다.
偶逢羽客談眞趣   우연히 우객羽客 만나 진정한 지취旨趣를 담화하다
月影西窓夜已闌   달그림자 서창에 지는 걸 보니 밤이 벌써 늦었구나.
벽암 존자 영감기

009_0727_a_01L一偈語

009_0727_a_02L人生於世欲難隄自古英雄到此迷

009_0727_a_03L鏡裏看形雖似外皆於己面出乎㦲

009_0727_a_04L

009_0727_a_05L己亥秋踏自紅流洞登寺閣

009_0727_a_06L
秋深洞口路還迷左右丹楓中有溪

009_0727_a_07L松栢經霜猶不變烏鳩見客故隨齊

009_0727_a_08L靑茶白醴花邊酌長律短歌石面題

009_0727_a_09L步步扶笻上高閣三竽紅日掛峯西

009_0727_a_10L暇日登伽耶山頂頂有牛
鼻井

009_0727_a_11L
逶㦾扶藜上鼻峰荷衣數幅汗流濃

009_0727_a_12L濕雲値暖浮仍滅宿鳥驚風出復從

009_0727_a_13L頭擧靑空疑壓倒掌承白露得痕蹤

009_0727_a_14L人間永絕傳書鴈天外難聞告事鍾

009_0727_a_15L虎岳鷲岑平似席琴湖洛水小於弓

009_0727_a_16L須彌更大何能到此日壯觀可謂宗

009_0727_a_17L敬次崔仙紅流洞韻

009_0727_a_18L
鶴膝蜂腰最勝巒崔仙深遯一壺間

009_0727_a_19L狂奔佳句人爭誦絲入錦還爲此山

009_0727_a_20L逢羽客夜話

009_0727_a_21L
久閉雲扉不出山萬緣空䢘一身閒

009_0727_a_22L偶逢羽客談眞趣月影西窓夜已闌

009_0727_a_23L

009_0727_a_24L碧巖尊者影龕記

009_0727_b_01L
벽암碧巖 존자16)의 영감影龕은 가야산 국일암에 모셔져 있다. 예전에 인종仁宗은 존자를 초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존자를 큰 그릇으로 여겨 국일도 대선사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효종孝宗은 재위 전 한번 만나 보고 석가의 동량으로 여겼고, 보위에 오른 후 궁궐(禁苑)에 초대하여 삼교三敎의 동이同異를 물은 후 어찰을 내려 특별히 안부를 물었으며, 광주리에 가득 하사품(寵賚17))을 내렸다. 여러 진신搢紳18)들이 또한 모두 아끼고 앙모하였으니, 원두표元斗杓ㆍ구봉서具鳳瑞 두 분은 존자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처음에 어머니 조씨曹氏가 꿈에 오래된 거울을 보고 존자를 낳았다. 영특(歧嶷19))하고 조숙하여 어린 나이에 공문空門을 좋아하였다. 부휴浮休 존자에 의지하여 스승으로 모신 지 몇 해 되지 않아 선교禪敎의 종맥宗脈을 얻고 돌부鈯斧를 전해 받았다. 이후로 명성이 널리 퍼져 산머리에 으뜸으로 횡행하였다. 두 왕조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니, 이는 성천聖天의 우로雨露가 고하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자 이름이 국일國一인 것은 임금이 내린 시호이기 때문이고, 이곳에 영정影㡠을 봉안한 것은 이곳이 존자가 오래 머문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감影龕이 흐릿해져 우러러 예배하는 이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다행히 올봄 문손門孫인 운파雲波가 떨치고 일어나 옛 감실을 철거하고 10여 발짝 앞으로 내어 별도로 그려 영정影㡠을 옮기니, 멀리서 바라보면 황홀하게 존자가 다시 살아난 듯하였다. 그 가계는 김씨金氏이고, 법휘法諱는 각성覺性이며, 벽암碧巖은 호이다. 그 관향 문벌(貫閥)과 축발하고 구족계를 받은 것, 입적한 것, 연보 등은 제자 백곡 처능白谷處能이 찬한 행장 중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 지금은 다만 운파雲波가 영감을 개수한 정성을 간략하게 써서 감실 머리에 건다.
벽암 존자 영찬짧은 서문과 함께
고려 말 우리나라 태고太古 화상이 진단眞丹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서

009_0727_b_01L
碧巖尊者影龕峙於伽耶山國一菴
009_0727_b_02L於仁廟朝召見與語深器之賜國
009_0727_b_03L一都大禪師號孝廟在邸一見以爲
009_0727_b_04L釋家之棟梁及登寶位引入禁苑
009_0727_b_05L三敎同異後降御札特問之至於寵
009_0727_b_06L賚滿籝搢紳諸公亦皆愛慕而元
009_0727_b_07L公斗杓具公鳳瑞交最密初慈曹
009_0727_b_08L夢古鏡而生尊者歧嶷夙成
009_0727_b_09L樂空門依於浮休尊者師事不多年
009_0727_b_10L得禪敎宗脉受傳來鈯斧自後名薌
009_0727_b_11L騰播以山頭一橫服與於兩朝殊
009_0727_b_12L此由聖天雨露不擇高下也
009_0727_b_13L頟國一以賜號也奉影㡠者以久住
009_0727_b_14L處也然而厥龕沉暗瞻禮者病之
009_0727_b_15L於今春門孫雲波振翼撤舊龕
009_0727_b_16L前十餘赤 [7] 另餙移㡠遠而望之
009_0727_b_17L如尊者之再生也系出金氏法諱覺
009_0727_b_18L碧巖其號也其貫閥也祝具也
009_0727_b_19L寄歸也歲元也弟子能白谷所撰行
009_0727_b_20L狀中已具矣今但以雲波改龕之誠
009_0727_b_21L書揭眉

009_0727_b_22L

009_0727_b_23L碧巖尊者影讃并小引

009_0727_b_24L
麗末我國太古和尙入眞丹霞霧山

009_0727_c_01L 임제종臨濟宗 석옥石屋 화상의 법을 이어받아 온 후 환암幻菴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구곡은 등계登階에게, 등계는 벽송碧松에게, 벽송은 부용芙蓉에게 전하였다. 부용 문하에서 부휴浮休가 나왔고, 부휴 문하에서 벽암碧巖 존자가 나왔고, 존자의 오세五世인 운파雲波와 우선愚善에 이르렀다. 이들이 어느 날 저녁 존자의 영찬을 부탁한즉, 내 글이 비록 껄끄럽지만 그 청을 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어서 억지로 네 개의 ‘이已’ 자로 압운하여 한 장을 지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호랑이를 그리되 포효하는 모습까지 미칠 수 있는가? 터럭일 뿐이고.
사람을 그리되 그 속마음까지 드러낼 수 있는가? 얼굴일 뿐이다.
이제 벽암 존자의 영정에서
그 명성과 덕행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의대衣帶일 뿐이다.
나의 찬사여,
이 또한 어찌 그 존자가 재세하던 때 감로甘露의 법우法雨를 무한한 천인天人에게 두루 뿌리던 교화를 다 드러낼 수 있겠는가?
어렵도다. 붓의 행로가 이에 막힐 뿐이로다.
호은우부 자전
숙묘肅廟 정해년(1707) 9월 14일, 우부愚夫는 청주淸州 주안촌周岸村에서 태어났다. 가계는 문화文化 유씨柳氏이고,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의 후예이다. 엄친嚴親은 휘가 춘영春英이고, 조부는 원原, 증조부는 옥玉이다. 자친慈親은 박씨朴氏로 공주公州의 은사隱土 업嶪의 따님이며, 응천파凝川派이다. 내외의 관작과 좌훈佐勳은 적지 않는다. 우부는 아홉 살에 속리산에 들어가 『소학』을 읽었는데, 어떤 스님이 대혜大惠의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15세에 판사 수 공判事秀公에게서 머리를 깎았고, 16세에 무하 경 공無瑕瓊公에게서 계를 받았다. 이후 여러 산을 떠돌아다니며 스승을 찾아 학문을 쌓았다. 28세에 낙암洛巖 화상을 가야산에서 뵙고,

009_0727_c_01L臨濟宗石屋之法而來傳之幻菴
009_0727_c_02L菴傳之龜谷龜谷傳之徐登階徐登
009_0727_c_03L階傳之碧松碧松傳之芙蓉蓉門出
009_0727_c_04L浮休休門出碧巖尊者尊者五世
009_0727_c_05L雲波與愚善矣一夕要尊者影讃
009_0727_c_06L愚文雖澀而重違其請乃强押四個
009_0727_c_07L已字爰題一章其詞曰

009_0727_c_08L畫虎而能及其虓乎毛而已畫人而能
009_0727_c_09L及其衷乎面而已今碧巖尊者之影
009_0727_c_10L畫其聲德乎衣帶而已愚之讃詞
009_0727_c_11L曷盡其尊者在世遍灑甘露法雨於無限
009_0727_c_12L天人之化乎難矣筆路斯塞而已

009_0727_c_13L
好隱集卷之四

009_0727_c_14L

009_0727_c_15L好隱愚夫自傳

009_0727_c_16L
肅廟丁亥九月十四日而愚夫生于淸
009_0727_c_17L州周岸村系出文化柳而文簡公諱公
009_0727_c_18L權之後也嚴春英祖原曾祖玉
009_0727_c_19L朴氏公州隱土諱嶪女而凝川之派
009_0727_c_20L外內官爵佐勳不書云愚夫九歲
009_0727_c_21L入俗離山讀小學見僧讀大惠書
009_0727_c_22L有省十五落紺于判事秀公十六服
009_0727_c_23L戒于無瑕瓊公自後浮游諸山尋師
009_0727_c_24L績學二十八謁洛巖和尙于伽倻山中

009_0728_a_01L3년 동안 스승으로 섬겨 자못 선교禪敎의 조백糟魄20)을 체득하여 이에 가사와 발우를 전수받았다.
우리 동방 고려 말에 태고 국사太古國師가 중국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 임제파臨濟派 신 공信公의 법맥21)을 계승하고 전하여 서산西山에 이르렀다. 서산의 일파는 낙암洛巖에게 전하였으니, 낙암은 임제의 30대가 된다. 우부는 이른 나이에 검은 물 들이고 머리를 깎은 후 벌써 늘그막에 이르러 잡저 몇 권을 써서 소산小山에게 주었으니, 이는 남의 손에 맡겨 퇴고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문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을 수합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봉 대사 영찬
홍류동 바위 읊은 고운孤雲 시는 천겁이요,
가야산의 영감影龕은 해봉海峯 진영眞影 한 폭이라.
시와 진영 중에 어느 쪽이 오래갈까?
신선은 죽지 않고, 스님은 끝과 시작 없을지니.
홍류의 이슬 기운 마시고, 가야에 나막신을 끄는 자여.
손으론 고운 시를 어루만지고, 머리 숙여 해봉 영정에 예배하렷다.

을사년(1785) 5월 번암樊巖 채백규蔡伯䂓22)가 회룡골(回龍谷) 만목萬木의 그늘에서 쓰다.

009_0728_a_01L服事三秊頗得禪敎糟魄仍受信具
009_0728_a_02L我東麗末太古國師入中國霞霧
009_0728_a_03L嗣臨濟派下信公之法傳至西山
009_0728_a_04L西山一派傳至洛巖而洛巖於臨濟
009_0728_a_05L爲三十世也愚夫蚤歲染鬀已至暮
009_0728_a_06L雜著錄數卷寫與小山而不願
009_0728_a_07L他手之推敲又不願門人之收入散在
009_0728_a_08L文也

009_0728_a_09L

009_0728_a_10L1)海峯大師影讃 [3]

009_0728_a_11L
紅流之石孤雲詩千劫伽倻之龕
009_0728_a_12L峯眞一幅詩與眞孰壽孰夭僊不死
009_0728_a_13L釋則無始無竟吸紅流之瀣
009_0728_a_14L伽倻之屐者吾知其手摩孤雲詩
009_0728_a_15L禮海峯幀

009_0728_a_16L
乙巳孟夏樊巖蔡伯䂓書于回龍
009_0728_a_17L谷萬木陰中
  1. 1)포주蒲州의 태공泰公, 치주淄州의 소공沼公 : 당나라 때의 스님.
  2. 2)산쟁이(山尺) : 산에서 사냥을 하거나 약초를 캐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3. 3)용사龍砂 : 용처럼 꿈틀거리는 산세. ‘사砂’란 혈장穴場을 중심으로 한 주의 이십사방二十四方을 둘러싼 대소의 봉峰을 포함해서 암석ㆍ수목ㆍ강ㆍ해ㆍ호수ㆍ사막ㆍ건물ㆍ평야ㆍ구릉ㆍ도로 등을 총칭한 말이다.
  4. 4)진지震枝 :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
  5. 5)홀실笏室 : 절의 주지가 있는 방.
  6. 6)모운慕雲 : 조선 후기의 승려로 법명은 진언震言이다. 직지사直指寺에서 강석을 펴고 화엄종주로 명성을 떨쳤다. 환성 지안이 참학하자 그의 그릇됨을 간파하고는 강석을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7. 7)30년간(立年間) : 입년立年은 ‘이립지년而立之年’의 준말로 30세를 가리킨다.
  8. 8)사砂 : 풍수 용어. 풍수에서는 혈 주변에 있는 모든 산과 바위 건물들을 사砂 또는 사격이라고 한다. 혈을 사방에서 감싸 주는 현무ㆍ주작ㆍ청룡ㆍ백호를 비롯해서 멀리 외곽을 둘러싸 주는 조산 등을 말한다. 사砂라는 용어는 옛날 종이가 귀하던 시절 모래로 산 모양을 만들어 지리를 설명한 데서 유래되었다. 사의 역할은 혈의 생기를 바람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있다. 혈의 지기가 바람으로부터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변 산들이 둘러 감싸 주어야 한다. 혈 뒤에 있는 산은 현무, 앞에 있는 산은 안산(주작), 좌측에 있는 산은 청룡, 우측에 있는 산은 백호라 한다.
  9. 9)청오靑烏 : 풍수가ㆍ지관. 원래는 『靑烏經』의 약칭.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이 담긴 책.
  10. 10)임금 힘이~하는 경지 : 함포고복含哺鼓腹의 고사. 요堯임금 때에 한 노인이 배부르게 밥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며,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서 밥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何有於我哉。)”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태평세월의 구가를 의미한다.
  11. 11)현원玄元 : ① 천지가 분화되기 전의 혼돈에 있는 일체의 기운. ② 도가에서 말하는 천지 만물의 본원이 되는 도. ③ 혹은 노자老子. 당나라 초에 노자에게 호를 추증하기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 하였고, 이를 줄여 현원玄元이라 하였다.
  12. 12)삼간三竿 : 바지랑대 세 개의 높이란 뜻인데, 해가 높이 떴음을 형용하는 것이다. 소식蘇軾의 「過海得子由書」에서, “문밖에는 해가 높이 떴고, 강관에는 가을에 낙엽이 진다.(門外三竿日。 江關一葉秋。)”라고 하였다.
  13. 13)미친 듯이 달린다(狂奔) : 최치원崔致遠(857~?)의 〈題伽倻山讀書堂〉의 첫 구절이다.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14. 14)최치원의 사적에서, “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歲。 錦還東國。”이라 하였는데, 12세에 실처럼 미약하게 중국에 갔다가 28세에 비단처럼 찬란하게 본국에 돌아왔다고 한 말이다.
  15. 15)우객羽客 : 신선ㆍ도사ㆍ방사方士를 가리키는 말.
  16. 16)벽암碧巖 존자 : 벽암 각성碧巖覺性(1575~1660). 자는 징원澄圓, 속성은 김씨金氏, 보은 사람.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화산華山의 설묵雪黙을 스승으로 섬겨 14세에 승려가 되었다. 부휴浮休를 따라 속리산ㆍ금강산ㆍ덕유산ㆍ가야산 등으로 다니면서 경을 공부하였고, 초서ㆍ예서를 잘 썼다. 임진왜란 때에 산중에서 피난하면서도 문난問難을 쉬지 않았다. 1593년 부휴를 따라 싸움터에 나가 해전海戰에 공을 세웠다. 20여 년 동안 부휴에게서 진수眞髓를 체득하였고, 계행이 청정하였으며, 쌍계사ㆍ화엄사ㆍ송광사를 중건하였다. 광해군 때에 요승의 무고로 부휴가 서울로 붙들려 갈 적에 따라갔다가 봉은사에 머물면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總攝이 되었다. 인조 때 남한상성을 쌓을 적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승려들을 거느리고 성 쌓는 일을 감독, 3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보은천교원조국일도 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도 중 수천 명을 모집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하고 북으로 올라가던 도중 화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산으로 돌아왔다. 그 뒤 사신으로 일본에 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사퇴하였고, 화엄사에서 나이 86세, 법랍 72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는 『圖中決疑』 1권, 『간화결』 1권, 『석문상의초』 1권 등이 있다. 법제자는 처능處能이다.
  17. 17)총뢰寵賚 : 총애하여 물건을 내려 주다는 뜻이다. 임금의 총애.
  18. 18)진신搢紳 : 벼슬아치의 총칭.
  19. 19)기의歧嶷 : 높게 빼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남을 이르는 말이다.
  20. 20)조백糟魄 : 술찌꺼기라는 말이다. 조박糟粕이라고도 한다. 『장자』 「天道』에 제 환공齊桓公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윤편輪扁이, “왕이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술찌꺼기이다.(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而夫。)”라고 한 고사가 전한다.
  21. 21)신 공信公의 법맥 : 원나라 급암 종신及庵宗信의 법맥. 급암 종신의 법맥은 석옥 청공石屋淸珙(1272~1352)을 이어 태고 보우太古普愚(1301~1382)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22. 22)채백규蔡伯䂓 : 채제공蔡濟恭(1720~1799). 조선 후기의 문신. 자세한 것은 서문의 각주 9 참조.
  1. 1)「詩文二」三字。編者補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