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동계집(東溪集) / 東溪集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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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제3권(東溪集 卷之三)
기記
대곡사 창건 전후 사적기大谷寺創建前後事蹟記
내가 일찍이 소년 시절에 안동으로부터 이 절에 당도했을 때 눈썹이 긴 노승 네다섯과 문루門樓 위에서 마주보고 이야기하다가 눈을 들어 잠시 살펴보니, 그 골짝이 고르고 넓었으며 그 터는 네모반듯하였고 전각과 집이 우뚝하고 깨끗하여 그 소쇄함을 느끼고자 했으나, 갈 길이 촉박해 다 보지 못한 채 돌아왔다. 지금 그 일을 생각해 보니 거의 30년 전의 일이라 아득하기가 일장춘몽과 같다. 갑자년 봄에 나에게 법 조카뻘이 되는 탁린琢隣 상인이 금릉金陵의 황악산으로 나를 찾아와서는 소매에서 대곡사의 여러 문서와 창건에 관여한 이들의 기록을 내놓으며 그 사적문을 청하였다. 내가 재주가 졸렬할 뿐만 아니라 근래 병약하여 필묵을 놓은 지가 1년이 넘었지만, 천 리 길을 달려와 다시 청함에 거절하기가 어려워 부득이하게 가져온 기록을 살펴보니, 대곡사는 고려 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지공指空 대사가 창건한 것이었다.
지공 대사는 서천의 108대 조사이다. 인도로부터 동쪽으로 총사蔥沙1)의 험준함을 넘고 육로와 해로로 10만 8천 리 바깥을 지나서 중국에 이르렀으니, 때는 원元나라 순종 황제 시절이었다. 순종 황제는 대사의 도덕을 흠모하여 국사로 삼고 대도의 대경수선찰大慶壽禪刹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우리나라 나옹懶翁 화상이

012_0207_b_02L東溪集卷之三

012_0207_b_03L

012_0207_b_04L

012_0207_b_05L大谷寺創建前後事蹟記

012_0207_b_06L
予嘗在少年之日自花山路經于是寺
012_0207_b_07L有庬眉老宿四五輩對予于門樓之上
012_0207_b_08L接語移時予暫時寓目則其洞壑平寬
012_0207_b_09L基址方正殿閣輪奐房寮潭濟雖愛
012_0207_b_10L其瀟洒仍行忙未能領略而歸于今
012_0207_b_11L想之殆將三十餘年之久怳若一場夢
012_0207_b_12L在甲子春有琢隣上人於吾爲法姪也
012_0207_b_13L訪予於金陵之黃岳袖出大谷寺衆書
012_0207_b_14L及寺之前後創建人之名錄而致之
012_0207_b_15L其事跡之文予非獨才拙近以衰病
012_0207_b_16L廢文墨久矣不爲之操筆越一年
012_0207_b_17L以書走千里再請之勤遂重違上人之
012_0207_b_18L不得已就其來錄而觀之寺盖麗季
012_0207_b_19L恭愍王師指空大師之所創者也指空
012_0207_b_20L乃西天一百八代祖師也以遊化自西
012_0207_b_21L東逾蔥沙之險梯航歷踏十萬八千
012_0207_b_22L里之外至于神州卽元順宗之時也
012_0207_b_23L順宗皇帝欽師道德拜爲國師命住
012_0207_b_24L大都大慶壽禪刹時我國懶翁和尙

012_0207_c_01L원나라에 가서 도를 구했는데, 지공의 오묘한 뜻을 이어받아 동쪽으로 돌아오는 날에 교화를 펼칠 땅을 구하였으니, 삼산三山과 이수二水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대체로 지금의 양주 회암사檜岩寺가 그곳이다. 삼산은 삼각산이고 그 남쪽의 이수는 곧 양화楊花2)와 모진毛津 두 물줄기를 말한다. 그 북쪽은 나옹 화상이 나중에 얻은 땅으로 큰 절을 세우고 싶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서 지공 대사를 모시고 돌아왔다. 공민왕恭愍王 역시 지공을 왕사로 삼고 나옹에게 회암사를 세우도록 명을 내렸다. 지공 대사는 서천으로 들어가 사위국 나란타사의 격식을 본떠 돌아왔으니 대개 절의 80여 개 방, 큰 복도와 긴 행랑채, 긴 지붕이 확 트여 있어 서로 막힘이 없었다. 동쪽에서 보면 서쪽이요 남쪽에서 보면 북쪽이어서 한 방 안에 있는 것과 같았으며, 네 개의 방이 활짝 통하였다. 절이 크게 지어지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지공은 나옹을 머물도록 하고 주지로 삼았으니, 조사들의 교화를 크게 선양하고 이곳에서 노닐었다. 또한 대곡사를 창건했으니 큰 절이 되었다.
무릇 지공은 선문禪門의 산 성인으로, 하늘과 땅을 안목으로 삼았으며 산하를 살과 뼈로 삼고 풍운과 일월을 숨결로 삼았다. 안에서는 사람과 하늘이 존경하는 바가 있었으며, 밖에서는 제왕의 스승이었으니 한때는 사람들이 양나라 때의 달마에 비교하였다. 지리술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지공이 한 땅을 택했으니, 이 땅은 지공의 옛 자취가 남은 터여서, 그 산천의 기이함, 신령의 뛰어남은 인간 세상의 사람들이 논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산과 절은 각기 두 가지 이름이 있는데 비봉산飛鳳山 대국사大國寺는 또한 지공 대사가 친히 지명한 것이다. 대개 봉황이 천 길의 산에서 날다가 사람의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는 내려온 것인즉, 지공이 대원大元과 고려 두 나라에서 놀았으니 봉황이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온 것이 아닌가.

012_0207_c_01L元求道承指空之玄旨東還之日
012_0207_c_02L其演化之地則指點三山二水之間
012_0207_c_03L今之楊州檜岩寺是也三山以三角之
012_0207_c_04L在其南二水卽楊花毛津兩水
012_0207_c_05L其北也懶翁後得其地欲建大伽藍
012_0207_c_06L再入元朝奉指空大師而來恭愍亦拜
012_0207_c_07L爲師命懶翁建檜巖寺指空大師
012_0207_c_08L入西天摸畫舍衛國羅蘭陀寺制而還
012_0207_c_09L盖其寺八十餘房大廡脩廊踈敝洞豁
012_0207_c_10L無相隔碍東望而西南觀而北如坐
012_0207_c_11L一室之內洞開四戶也寺大成衆大
012_0207_c_12L指空留懶翁爲其住持大揚祖化
012_0207_c_13L遊歷于此又剏大谷寺爲大伽藍也
012_0207_c_14L夫指空以禪門活聖以天地爲眼目
012_0207_c_15L河爲肌骨以風雲日月爲氣息入則爲
012_0207_c_16L人天之尊出則爲帝王之師一時之人
012_0207_c_17L以梁朝達磨比之至於地理之術特指
012_0207_c_18L空之一毛髮耳此地旣爲指空遺蹤之
012_0207_c_19L則其山川之異地靈之勝非世人
012_0207_c_20L之所可論者明矣山之與寺旣各有
012_0207_c_21L兩名而飛鳳山大國寺者槩亦指空之
012_0207_c_22L親所指命者也盖鳳翔于千仞之岡
012_0207_c_23L人之德輝而降則指空之來游於大元
012_0207_c_24L高麗兩國非鳳之覽德輝而降者耶

012_0208_a_01L은밀히 그 뜻을 취하여 이로써 산의 이름을 삼은 것은 필연이다. 또한 이 절을 짓고 나라의 복을 크게 끌어올리고자 한 것도 역시 지공의 진실된 마음이다. 어떤 사람은 태행산太行山 대곡사라 한 것을 두고, 옛날 당나라 사람이 산을 지나다 가리키면서 “중국의 대행산이 언제 날아왔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 것이 태행산의 유래가 되었다 한다. 대곡이라 하는 것은, 이 산에 넓게 펼쳐진 골짝이 동남쪽으로 벌어져 천백 갈래로 겹치고 구부러져 갈고리 같고 계곡들 입구의 강물 웅덩이가 십 리에 걸쳐 여울을 만들기 때문에 세간에서 태행산 대곡사라 부르는 것이다. 그 절의 제도와 당우의 성대함은 비록 회암사에 미치지 못하나 또한 나라 안에 널리 알려진 절이다.
명나라 만력 연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변을 맞이하여 천 년 된 보찰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고 덩굴은 시들었으며 구름과 샘물의 흐느낌이 그치지 않았다. 을사년에 이르러 행운이 다시 일어나 좋은 인연이 왔으니, 탄우坦祐 대덕과 계은戒訔·경성敬性·계운戒雲 등 여러 선승들이 이 터에 나아가 의논하여 말하길 “아아, 이곳은 옛날 지공 화상이 지은 것인데 처참하게 섬 오랑캐들에 의해 불타 버렸다. 우리가 이를 보고도 차마 버려둘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탄우 스님이 먼저 법당을 짓고 계은·경성·계운 등 세 스님이 기와로 지붕을 덮고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설선說禪·우화雨花·백수栢樹·취운聚雲 등 네 당과 두월斗月·담월淡月·남월南月·원통圓通 등 네 요사채는 법선·태전·경미·혜린·인규·각심·수경·숭신 스님 등이 차례대로 힘을 기울인 것이다. 서상실西上室과 향로전香爐殿은 보정·태감 스님이 지은 것이며, 오십삼불전五十三佛殿과 시왕전十王殿은 덕잠·희묵 스님이 지은 것이며, 학열·처상 스님은 불상을 만들어 봉안하였으니, 범종각은 우뚝하고

012_0208_a_01L取其旨以名其山者必也又創玆寺
012_0208_a_02L而欲鴻揚其國祚者亦指空之誠意乎
012_0208_a_03L或曰太行山大谷寺者昔有唐之人
012_0208_a_04L山而指之曰中國大行山不知何日
012_0208_a_05L飛來乎此以太行之山有大谷而此
012_0208_a_06L山亦開張洞壑唅呀向巽爲千重百曲
012_0208_a_07L之鉅谷谷之口有江匯瀦爲十里之
012_0208_a_08L灘故俗呼爲太行山大谷寺云耳其寺
012_0208_a_09L之制堂宇之盛雖未及檜岩然亦爲
012_0208_a_10L一國之叢林也逮萬歷丁壬之變千年
012_0208_a_11L寶刹遽作一朝之焦土烟蘿憔悴雲泉
012_0208_a_12L嗚咽而已至乙巳歲寶運重興勝緣
012_0208_a_13L再來有坦祐大德與戒訔敬性戒雲等
012_0208_a_14L諸禪就於玆址相與謀曰嗟乎此乃
012_0208_a_15L古之指空和尙所創者而慘爲島夷之
012_0208_a_16L所燬了吾等其忍視而等棄之耶於是
012_0208_a_17L祐公先構法堂訔性雲三人從以瓦
012_0208_a_18L盖之造佛像以奉安之其說禪雨花栢
012_0208_a_19L樹聚雲等四堂斗月淡月南月圓通等
012_0208_a_20L四寮有法禪太顚敬眉惠璘印圭覺心
012_0208_a_21L秀瓊崇信等相次而用力者也西上室
012_0208_a_22L香爐殿普淨太鑑之所創也五十三佛
012_0208_a_23L殿十王殿德岑熙嘿所造而學悅處祥
012_0208_a_24L造其像而安之至於泛鍾閣之嵯峨

012_0208_b_01L불이문不二門은 제자리를 찾고 향적전香積殿은 높이 솟았다. 덕우·회옥·의화·도한·영민 등의 스님은 갑신년부터 계해년에 이르기까지 앞뒤로 절을 지은 이들이다. 후불後佛·괘불掛佛·삼장三藏·사오로四五路3) 등의 탱화는 처연·영찬 스님이 맡은 것이다. 각일 스님은 성행당省行堂을 맡았고, 계인 스님은 극락전極樂殿을 맡았으며, 인관 스님은 법당을 개축했고, 지웅 스님은 계장階墻을 만들고, 영옥 스님은 전장田庄을 베풀었으며, 도진 스님은 큰 종을 주조하고, 대징 스님은 금수레를 만들었고, 유철 스님은 큰 북을 만들었고, 도청 스님은 금고禁鼓를 맡았으며, 석매 스님은 경함經凾을 맡았고, 담일·회해 스님은 불기佛器를 맡았고, 경해·인지 스님은 바라鈸鑼를 맡았고, 상주 스님은 대상大象을 맡았으며, 경신은 동해東海4)를 맡았고, 조헌 스님은 큰 시루를 맡았으며, 조은 스님은 운판雲板 등을 담당하였다. 비록 사물이 크고 작고 기물이 정밀하고 거친 차이가 있으나 그 용도로 이르면 모두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니, 이런 물건들이 있은 연후에 절의 모양이 갖추어졌다. 그것은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는 것과 같은즉 작은 먼지 조각을 사양하지 않으며, 강과 바다가 작은 물줄기조차 가리지 않는즉 바야흐로 골짜기들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무릇 절은 군에서 북쪽으로 50리에 있는데 산은 용이 서려 있고 봉황이 날아오르는 기이한 형상이다. 지공의 넓고 두터운 도덕으로 이미 나라의 복을 무궁하게 드날렸으니, 절의 공력이 나라와 깊이 관계되는 것이 아닌가. 지공의 도를 돌아보면 나옹에게 전해지고 나옹은 우리 태조의 스승이 되어 경제를 강론하는 틈에 저 한양 300년의 큰 토대를 상의하여 신성한 자손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서로 이어받아 누리게 한 것이니, 이는 나옹의 공인데 주소周召5)와 비교하더라도 차이가 없다. 그런데 후손에 이르러 불교를 초월楚越6)처럼 여기게 되었으니 그것은 나옹의 공을 크게 저버린 것이다. 회암과 신륵 두 절은 대개 나옹 대사의 절로

012_0208_b_01L二門之有序香積殿之嵬然德祐懷玉
012_0208_b_02L義和道閑靈敏等自甲申至癸亥前後
012_0208_b_03L以建者也後佛掛佛三藏四五路等幀
012_0208_b_04L處連靈賛之所務也覺一之省行堂
012_0208_b_05L仁之極樂殿印寬之改法堂智雄之造
012_0208_b_06L階墻靈玉之施田庄道眞之鑄大鍾
012_0208_b_07L大澄之造金輦惟哲之成大鼓道淸之
012_0208_b_08L禁鼓碩梅之經凾淡一懷海之佛器
012_0208_b_09L敬海印暹之鈸鑼尙珠之大象敬信之
012_0208_b_10L東海祖軒之大甑道誾之雲板等
012_0208_b_11L物有大小器殊精粗至其所用之地
012_0208_b_12L皆不可以闕者也有此等物然後寺樣
012_0208_b_13L方成其猶太山不讓土壤則不辭片
012_0208_b_14L埃之微河海不擇細流則方爲衆壑之
012_0208_b_15L宗者也夫寺在郡北五十里而山之形
012_0208_b_16L有龍蟠鳳翥之奇以指空道德之洪庬
012_0208_b_17L旣揚國祚於無窮則寺刹之功豈不關
012_0208_b_18L重於國家哉顧指空以其道傳之於
012_0208_b_19L懶翁懶翁爲我太祖之師講論經濟之
012_0208_b_20L相夫漢陽三百年之丕基而使聖子
012_0208_b_21L神孫至于今相承而享之則其懶翁之
012_0208_b_22L直與周召無異而至于末裔視釋
012_0208_b_23L如楚越其於懶翁之功深有所負
012_0208_b_24L而至於檜岩神勒兩寺皆懶翁之園

012_0208_c_01L지금은 모두 무너진 채 버려져 조금도 돌보지 않고 있는데, 하물며 이 지공이 노닐던 땅은 어떻겠나. 그런즉 고금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도이며 시종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이다. 아, 천지의 움직임과 멈춤을 보고 만물변화의 추이를 살피면 육기는 변화가 무궁하다. 네 계절로 바뀌는 것은 운수인즉 이치가 비록 하나이지만 사물의 변화에 많은 원인이 있으므로, 성인이 태극을 살피고 우주를 베껴서 오행을 추측하고 팔괘를 그려 주역의 도를 이루었다. 대개 순박함은 흐트러지고 길함과 흉함은 그것을 좇으며 길함·흉함·뉘우침·아낌은 부류에 따르며, 천하에 이르러서는 도가 행해지면 성인이 만물을 번창하게 하며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나 은밀하게 감춘다. 저 지공과 나옹은 모두 때를 보고 나타났으며 때를 당하여 돌아갔으니, 어찌 세상의 선악을 가지고 평생 고락에 시달리겠는가. 지금 구차스러운 한 조각의 땅으로 천만세에 신의 자취를 남기고 세상의 변화와 만물의 융성함과 침체함이 구름과 연기같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꿈속의 몽롱함과 같으니, 언제 지공·나옹 같은 무극지인들의 경지에 관계할 수 있을까. 내가 지공·나옹 부자의 풍격을 깊이 사모하는 뜻이 있었는데, 이제 인隣 상인의 청에 따라 절의 고적을 거칠게 썼으며, 또한 두 대사가 저술한 실마리를 서술하여 돌아가는 편에 부친다.
비슬산 용흥사 사적기琵瑟山龍興寺事蹟記
무릇 천하 사람들은 동국의 산천을 가리키며 천하 최고의 산은 삼신산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012_0208_c_01L而今皆廢棄不見一毫之俯護
012_0208_c_02L况玆指空所遊之地乎然則古今不亡
012_0208_c_03L道也始終不克者人也觀天地
012_0208_c_04L之動息審萬化之推移六氣之變化者
012_0208_c_05L無窮四時之遷改者則理雖有一
012_0208_c_06L物化多端故聖人觀太極而摹大象
012_0208_c_07L推五行而畫八卦易道成焉盖大朴旣
012_0208_c_08L休咎從之吉凶悔吝隨類以至天
012_0208_c_09L有道則聖人與物昌之無道則退藏
012_0208_c_10L於密彼指空懶翁1)觀時而來 [7] 應時
012_0208_c_11L而去豈以世之臧否用休戚於其間哉
012_0208_c_12L今以區區一片之地留神寄跡於千萬
012_0208_c_13L而世之變態物之隆替如雲烟之
012_0208_c_14L起滅夢寐之怳惚何嘗關於指空懶翁
012_0208_c_15L無極至人大方之境哉予於指空懶翁
012_0208_c_16L父子之風深有嚮慕之志今仍璘 [3] 上人
012_0208_c_17L之請粗述其寺之古蹟亦敍二大士作
012_0208_c_18L述之緖業以書之附便之歸也

012_0208_c_19L

012_0208_c_20L琵瑟山龍興寺事蹟記

012_0208_c_21L
夫天下之人指東國山川爲天下最者
012_0208_c_22L以其爲三神之山皆在於此故也故以
012_0208_c_23L「觀時而來」五字欄外板刻曰「來觀時而」編
012_0208_c_24L者改爲「觀時而來」移置於此

012_0209_a_01L옛날 진시황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봉래에서 노닐 것을 상상하며 공자 같은 성인도 동해로 떠가기를 원했으니, 세상의 현자나 불초한 사람이나 우리 동방을 신선의 고향으로 여기지 않은 이가 없는즉, 하물며 영남 가운데에 있는 금오산 곁이겠는가. 무릇 영남의 산천은 비록 물줄기 하나, 언덕 하나일지라도 금오산의 빼어난 기운의 나머지가 아닌 것이 없다. 옛날 내가 낙동강 가를 따라 상류를 지나는데 푸른빛이 끝이 없더니, 그곳이 비슬산琵瑟山임을 알았다. 신유년에 나는 비슬산 남쪽의 용흥사龍興寺에 노닐면서, 봉황 같은 산굴과 용 같은 언덕이 단단히 연이어 있고 촘촘하게 끌어안고 있는 샘과 골짝이 맑고 깊은 것을 보았다. 경내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완연히 세상 밖의 이름난 곳으로 두루 돌아갈 생각을 잊었다. 이에 머물러 노닐며 삼백三白7)을 맞았는데 계해년 여름에 절의 여러 스님들이 나에게 “이 절은 지어진 지 오래되었으나 사적의 전말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대는 문필에 종사하니 글을 써 달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말하길 “나로 말하면 학문은 이치에 이르지 못하고 글은 나아갈 방향을 모르는데 어찌 그 청에 따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끈질기게 청하는 바람에 뿌리치지 못하고 청을 받아들여 “이 절은 언제 지어졌으며 지은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눈썹이 두터운 노승이 말하길 “듣기로는 신라 때 지어졌으며 고승인 관기觀機가 이 절을 짓고 편액을 용흥이라 했다.”라고 말했다. 그 후에 병화를 여러 번 거치면서 불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도인인 각료와 단사인 곽항이 다시 일으켜 세우고 이름을 바꾸어 요항사了恒寺라 했는데, 그 두 사람의 이름을 취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고려 시대였다.
우리 조선 만력 연간에 임진란을 맞아서 절은 왜구들에 의해 짓밟히고 화려한 절집은 다시 불타고, 오직 나한전만이 풀섶 아래 파묻힌 채로 황폐하게 홀로 남았다. 갑인년 여름에 이르러 지혜 스님이 그 터를 보고

012_0209_a_01L秦皇之暴想游蓬萊夫子之聖思浮
012_0209_a_02L東海而世之賢不肖之人莫不以吾東
012_0209_a_03L爲仙鄕則况嶺國之近在鰲山之側者
012_0209_a_04L然則凢山川之在嶺國者雖至一水
012_0209_a_05L一丘莫非鰲山孕秀之餘者也昔予由
012_0209_a_06L洛江之上而過水上有碧無限者指點
012_0209_a_07L知其爲琵瑟山也歲辛酉予游龍興寺
012_0209_a_08L在琵山之陽卽見鳳岫龍岡鈎聯擁密
012_0209_a_09L泉壑淸邃境壤爽沃宛爲衆外名區
012_0209_a_10L遂樂而忘歸仍留屣而遽周三白也
012_0209_a_11L癸亥夏寺之諸德語予曰玆寺也
012_0209_a_12L旣久而未紀寺蹟之顚尾子其操觚而
012_0209_a_13L洒翰也曰若予者學不足以就理
012_0209_a_14L不足以知方烏得以從所諸乎請德請
012_0209_a_15L益膠辭不獲已乃徵之曰盖此寺之創
012_0209_a_16L在何世也創之人其誰耶有厖眉老宿
012_0209_a_17L對曰聞在新羅之世有高僧觀機
012_0209_a_18L是寺扁曰龍興焉厥後累經兵火
012_0209_a_19L廢久矣卽道人覺了與檀士郭恒重復
012_0209_a_20L改名曰了恒寺取其二人之名而名之
012_0209_a_21L乃高麗時也至我朝萬曆壬辰爲倭寇
012_0209_a_22L之蹂躪華堂梵宇再爲煨燼之場
012_0209_a_23L惟羅漢一殿沒在藤蘿下頽然獨存
012_0209_a_24L至甲寅之夏有僧智惠見遺址慨然

012_0209_b_01L“이것이 요항사의 터가 아닌가.”라며 개탄하더니, 동지를 거느리고 우거진 것을 베어 내고 모래와 자갈을 걷어 내고 계단을 높이 쌓고 바닥을 단단하게 다지니 완연하게 그전과 같아졌다. 마침내 그 곁에다 초가집을 지어 머물렀는데 어느 날 저녁에 어떤 스님이 씨를 뿌리다가 무엇이 호미에 부딪치며 쨍그랑 소리가 들려 파 보니, 바라 한 짝이 있었고 용흥사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획이 분명하여 상고할 수 있었다. 혜공 등이 기뻐 말하길 “지금 산신령이 지신을 시켜 비밀스런 기록을 보여 준 것으로 이는 절을 복원하라는 징표가 아니던가.”라고 하였다. 즉시 용흥으로 그 절의 편액을 고치고 나한전 기둥의 구부러진 곳을 고치고 온전한 기와로 바꾸고 빠진 곳을 기우고 십육나한을 비호하였다. 이때에 혜공이 안선지당安禪之堂을 건립하고 선오 스님에게 권하여 모연의 책임자가 되도록 하였으며, 당이 지어지자 혜공은 스님들을 초청하였는데 편안히 머물다 때를 기다려 오는 일이 거의 20년에 이르렀다.
백양의 해에 학순 스님에게 권하여 서상실西上室을 지었는데 지금의 명부전㝠府殿이 그것이다. 사경 스님은 양로당養老堂과 괘월당掛月堂을 지었는데, 지금은 고쳐서 영월료詠月寮가 되었다. 푸른 돼지의 해에는 성오 대사가 대웅전을 지었으며, 신사년에는 신종·선규·계훈·석륜 스님이 승당을 지었으며, 옥령 대덕이 불상을 조성했으며, 선오 스님이 또 나한상과 불전을 중수하였다. 을유년에 홍인 스님이 종각을 지었으며, 기축년에는 신종 스님이 상동실上東室을 조성하였다. 경인년에는 홍연 스님이 금화당金華堂을 지었으며, 신묘년에는 도신 스님이 관음전觀音殿을 지었는데 지금은 편액을 바꾸어 백설료白雪寮라 한다. 정묘년에는 성진 스님이 극락전極樂殿을 지었다. 만월滿月·청운靑雲 두 당은 무오년에 사중이 힘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신유년에는 철심 스님이 향적전香積殿, 나한전의 동사東舍,

012_0209_b_01L此非了恒寺之基乎乃卛同志
012_0209_b_02L剔蒙翳剗去砂礫則其階砌之崇
012_0209_b_03L礎之堅宛然如昨遂就其傍而結茆
012_0209_b_04L居之一夕有僧種菜之際有物觸鋤
012_0209_b_05L鏗然作聲乃掘而得波鑼一隻有刻龍
012_0209_b_06L興寺字字畵分明可考惠公等喜曰
012_0209_b_07L今有山靈使地媪呈其閟記此非得復
012_0209_b_08L是寺之徵耶卽以龍興改其所居扁
012_0209_b_09L羅漢殿柱之橈者改以之正瓦之缺者
012_0209_b_10L掇以補之以護十六聖軀也於是惠公
012_0209_b_11L乃建安禪之堂勸僧禪悟爲募緣之主
012_0209_b_12L堂旣成惠公乃招集緇流燕晏而居
012_0209_b_13L待時之來者幾二十年至白羊之歲
012_0209_b_14L勸僧學淳創西上室卽今之㝠府殿是
012_0209_b_15L僧思敬建養老堂及掛月堂今改爲
012_0209_b_16L詠月寮者也在靑猪之年有性悟大師
012_0209_b_17L創大雄殿於辛巳有信宗善圭戒薰碩
012_0209_b_18L建僧堂有玉玲大德成佛像禪悟
012_0209_b_19L又重修羅漢像殿乙酉弘印建鍾閣
012_0209_b_20L己丑信宗造上東室庚寅弘衍創金
012_0209_b_21L華堂辛卯道信作觀音殿今改額白
012_0209_b_22L雪寮者也至丁卯性眞建極樂殿
012_0209_b_23L滿月靑雲兩堂則在戊午寺衆協謀而
012_0209_b_24L建者也辛酉哲心造香積殿其羅漢

012_0209_c_01L극락전의 서헌西軒, 문수文殊·향로香爐의 작은 방을 조성했는데, 오른쪽 당과 요의 앞뒤에 위치한 것이다. 계해년 가을 나는 절 사람들에게 말하길 “이 절의 터는 뒤가 높고 앞이 낮다. 절의 모양 또한 그 형세를 헤아려 짓는 것이 아닌가. 행랑채와 복도가 길지 않아 그 앞을 가로막는 탓에 앞을 볼 수가 없으며 단지 그 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스님이 앞에 담장을 쌓고 그 위에 긴 행랑을 지어 앞에 장막을 두른 것 같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주지인 종혜 대덕을 불러서 그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무신년에 이르러 장랑長廊 네 채와 불이不二·금강金剛 건물이 지어졌는데, 네 건물이란 영월詠月·홍하紅霞·관세灌世·채운彩雲 등이다. 세간의 도구와 쇠북 등속들을 말하면 선정·수원 스님이 힘을 합해 갖가지를 구비하였으니, 절의 격식이 모자람이 없었다. 이때에 전殿·각閣·당堂·실室이 기러기 같은 처마에 원앙 같은 복도를 갖추어 나는 듯하고 조용했으며, 단청으로 그려 놓은 흰 수레가 환히 빛났다. 등불 빛과 종고 소리가 육시六時8)에 그치지 않았으니, 대체로 강 왼편에서 손꼽는 절이 되었던 것이다.
아, 무릇 절이 세워지게 된 데에는 유래가 있는바, 옛날 후한 명제 때 불법이 중국으로 들어왔으니 마등摩騰9)ㆍ법란法蘭10) 두 인도승이 채음蔡愔11)을 따라 낙양에 이르자, 황제가 보고서 크게 기뻐하고 인도의 절같이 세워 주기를 청하여 낙양성 동쪽에 처음으로 백마사가 세워졌다. 아울러 성의 안팎 십여 군데에 절을 지어 승니를 도와 머물게 하였으며, 그 후에도 인도승이 오면 곧 절을 지어 머물게 하였는데 단지 약간의 당사堂社일 뿐이었다. 달마가 양나라에 들어와 선법이 크게 천하에 현양하게 되면서 불교 대중이 집에 먼지처럼 모였으며, 당나라 백장 대지百丈大智12) 선사에 이르러 도가 크게 이루어지고

012_0209_c_01L殿之東舍極樂殿之西軒文殊香爐些
012_0209_c_02L小之室在右堂寮之前後而造者
012_0209_c_03L癸亥之秋予語寺衆曰盖此寺之基址
012_0209_c_04L後高而前低堂舍之勢亦未卜其形勢
012_0209_c_05L以制之無長廊脩廡掩蔽其前可謂
012_0209_c_06L不顧其前但瞻其後者歟師築長▼(土+切)於
012_0209_c_07L建長廊於上以爲前藩也於是囑
012_0209_c_08L住持宗惠大德董其役至戊辰長廊四
012_0209_c_09L及不二門金剛二成四舍曰詠月
012_0209_c_10L紅霞灌世彩雲等舍也至其什用之具
012_0209_c_11L鍾皷之屬有禪定守元同爲僶俛
012_0209_c_12L色俱成寺樣無歉也於是殿閣堂室
012_0209_c_13L鴻簷鴦廡翼翼潭潭施丹雘而用繪素
012_0209_c_14L輪焉奐焉香燈之明鍾皷之聲不絕
012_0209_c_15L於六時殆爲江左之叢林也夫叢
012_0209_c_16L林之設有自來矣昔在漢明之時
012_0209_c_17L法入中國則有摩騰法蘭二梵僧隨蔡
012_0209_c_18L愔而至洛陽帝見而大悅請西國寺院
012_0209_c_19L之制始創白馬寺於洛陽城東又創寺
012_0209_c_20L於城內外凢十餘所度僧尼而使居之
012_0209_c_21L厥後有西僧之來游者輙建寺而留之
012_0209_c_22L但若干堂社而已至有達摩之入梁也
012_0209_c_23L其禪法大揚於天下其法衆坋集於屋
012_0209_c_24L至唐世有百丈大智禪師以爲道旣

012_0210_a_01L대중도 많아졌다. 크고 넓은 집이 아니라면 조사들의 가르침을 현양하고 황제의 복을 축원할 수 없으니 이에 큰 건물을 지어 총림이라 부르고, 법을 만들어 대중을 머물게 하여 향화에 힘쓰고 임금의 장수를 빌고 세상에 부처의 교화를 알리고 백세에 조사의 기풍을 떨치니, 총림을 짓는 것이 어찌 세상의 양민과 더불어 여염閭閻에 머무르며 나그네로 하여금 집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천하 변방의 군신들은 중국의 풍습을 사모하고 또한 총림을 지어 조종을 이어 갔으니, 신라의 일천 개 보비처나 고려의 오백 선찰이 그런 종류이다.
아, 무릇 지령地靈의 성함과 쇠퇴함, 사람과 사물의 영화와 쇠퇴, 나라의 흥성과 멸망, 총림의 창건과 쇠락은 모두 세상의 운수에 달려 있으니, 이 절 역시 관기·각료·지혜 등 세 사람을 만났을 때 지어지고 흥성했으며 영화로웠고 성대하였다. 생각해 보면 그때에 나라 역시 창건의 흥함과 영화의 왕성함을 더불어 즐겼으며, 병화의 재앙이 미치면 절과 나라가 같이 쇠퇴해지고 멸망하는 참변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런즉 총림이 지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이 나라의 흥망과 똑같이 관계되는 것이 아닌가. 어찌 총림만 특별한 것인가. 혹 하나의 사물에 있어서도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나라도 어쩔 수 없이 이것과 매여 있는 것이 아닌가. 지혜·성오 등 여러 스님들이 힘을 다하는 때를 맞이하여 나라는 일기가 순조로웠으며 백성들은 할 일을 즐겼으니, 선함을 좇는 것이 물 흐르는 것 같았으며 세월이 가면서 익어서 한번에 근본이 세워졌다. 대중의 선함이 모여진 까닭에 수백 개의 총림이 경영되어 뭇 사람들이 좋아했으니 마치 자식들이 와서 혜공이 때를 기다림을 도와주는 것 같았다. 그 생각하는 바가 깊었으며 그 도모하는 바가 원대했다.

012_0210_a_01L太矣衆旣盛矣若非大厦廣宇無以
012_0210_a_02L揚祖敎而祝皇祚於是乃創大棟宇
012_0210_a_03L名曰叢林制規繩而處其衆勤香火而
012_0210_a_04L祝聖壽揚佛化於天下振祖風於百世
012_0210_a_05L則叢林之作豈與世之養民庶之閭閻
012_0210_a_06L留使客之廨宇同其槩哉以故至夫天
012_0210_a_07L下外藩之君臣慕中華之風而亦建叢
012_0210_a_08L林以永祖宗宗社之福則其新羅之一
012_0210_a_09L千裨補高麗之五百禪刹卽其流也
012_0210_a_10L夫地靈之盛衰人物之榮悴國家
012_0210_a_11L之興亡叢林之創廢皆關於世數
012_0210_a_12L此寺亦當乎觀機覺了智惠等三人之際
012_0210_a_13L創之興之榮之盛之想有其時之國家
012_0210_a_14L亦與之創以興之榮以盛之之樂也
012_0210_a_15L其兵燹之禍寺刹與國家俱不免衰悴
012_0210_a_16L廢亡之慘也則叢林之創廢非與國家
012_0210_a_17L之興亡同所關者哉豈特叢林哉或至
012_0210_a_18L一事一物莫不如斯則當乎國家者
012_0210_a_19L不可不以此係其念也哉至夫智惠性
012_0210_a_20L悟等諸德當乎戮力之際家國安寧
012_0210_a_21L風雨調順民樂其業從善如流歲有
012_0210_a_22L其稔一役纔擧衆善畢集故其營數
012_0210_a_23L百架之叢林衆人樂之如子來而神棐
012_0210_a_24L惠公之待時其所慮也深所謀也遠也

012_0210_b_01L관기의 성스러운 자취를 싣고 있는 지지地誌13)에는 “신라 때 관기·도성 두 고승이 있어 같이 포산의 남과 북에 숨어 지냈는데, 십여 리를 떨어져 지냈지만 서로 자주 만났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 싶으면 산중의 나무들이 모두 남쪽으로 구부러졌으며, 관기가 도성을 부르고 싶으면 나무들이 모두 북쪽으로 누웠다.”라고 했다. 포산은 이 산의 다른 이름인데 어떤 사람이 찬미하기를 “서로 찾아 달빛 밟고 운천을 희롱하니 두 노인의 풍류 몇 백 년 되었나. 골짜기에 가득한 안개와 노을 고목에 어렸는데, 구부렸다 일어서는 찬 그림자 아직도 서로 맞는 듯.”이라고 했는데, 그 신이한 행적은 내가 말할 필요도 없이 세상에서 이미 알고 있다.
또한 산을 비슬이라 하고 절을 용흥이라 하는데, 대개 산맥은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내려와 낙동강 복판을 가로막고 산줄기에 의지한 채 성주·밀양·현풍·창녕 사이에 위치하였다. 거만한 형세가 마치 비파 같아서 그리 지은 것이다. 산의 기세 또한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노니는 용과 같이 날아오르다 절의 뒤편에서 멈추고 머리를 높이 쳐들어 절의 주봉이 되었다. 그 정상에는 거석이 있으니 우뚝 솟은 것이 마치 용의 뿔 같은데, 세속에서 관기봉이라 하는 것은 관기가 노닐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관기봉으로부터 그 형세가 다시 일어나 굼실거리다 동남쪽 모퉁이로 움직이며 치달려 60리 지점에서 우뚝 솟아 울타리가 되었으니, 창녕현의 주산인 관룡산이다. 비슬산과 관룡산은 창창하게 고을의 남과 북에서 마주하고 있는데, 관룡산의 줄기가 이윽고 일어선 까닭에 용흥을 절의 이름으로 삼았으니 참으로 마땅하다. 무릇 심어진 것은 북돋워 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 버린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하늘의 도는 그런 것이다. 그 변하지 않는 바를 본다면 바다와 산의 기울어짐과 옮겨짐, 세상의 뒤집어짐 그리고 음양의 쇠퇴와 융성, 고금의 오고 감이 있으니, 그 사이에서 한 점도 관여하는 것이 없고 물아가 모두 끝이 없다.

012_0210_b_01L其在觀機之聖跡備在地誌曰新羅時
012_0210_b_02L有觀機道成二高僧同隱苞山南北
012_0210_b_03L距十餘里每相過從成欲致機則山
012_0210_b_04L中樹木皆俯南機欲致成則樹木皆
012_0210_b_05L北偃云苞山乃此山之異稱也有人讃
012_0210_b_06L相過踏月弄雲泉二老風流幾百年
012_0210_b_07L滿壑烟霞餘古木低昂寒影尙如迎
012_0210_b_08L其神異之跡不待予言而世已知之矣
012_0210_b_09L且山之爲琵瑟寺之爲龍興者盖山之
012_0210_b_10L自金剛五臺而來枕洛心據嶺腹
012_0210_b_11L跨星密玄昌四州之間其勢偃然若琵
012_0210_b_12L瑟之形故也山之勢又自北而南
012_0210_b_13L游龍之矯矯而止寺之後昂然擧首
012_0210_b_14L寺之主峯其頂有巨石屹然而立如龍
012_0210_b_15L俗謂之觀機峰以觀機之所遊處故
012_0210_b_16L又自觀機之峯其勢重起逶迤
012_0210_b_17L巽之隅奔至六十里許嵬然大藩
012_0210_b_18L昌縣之主者觀龍山也則兩山蒼蒼
012_0210_b_19L相對於一邑之南北以觀龍之脉旣興
012_0210_b_20L於此故以龍興名此寺固其宜矣
012_0210_b_21L夫培栽傾覆固天道之常然以其不變
012_0210_b_22L者觀之則海岳之傾遷人世之飜覆
012_0210_b_23L陰陽之消長古今之往復無一點相干
012_0210_b_24L於其間者而物與我皆一無窮也

012_0210_c_01L이것은 부처가 말한 청평 세계로 우리나라를 위하고 큰 원각으로 우리 절을 위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여러 산령에게 붙여 장차 한 덩어리의 언덕과 골짝, 한 구역의 가람을 돕도록 하여 그에 의지하여 청평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니, 깨달음의 땅은 삼재의 해가 없으며 사겁四劫14) 동안의 침입이 없으므로 천만 년 무궁하기를 기약하며 또한 나아가 그것을 노래한다.

塊之氣兮           대지의 기운이여
有精英之蘊兮         정영精英이 모여 있도다
泄而布結爲山川之秀兮     흩어졌다 모여 생긴 산천
有湯湯兮           빼어나고도 넓구나
嶾嶾兮            높고 높도다
瞻彼三山兮          저기 보이는 삼산三山이여
屹在我之東兮         우리 동방에 우뚝 솟았도다
維東方山水之秀且麗兮     동방산수東方山水의 빼어남과 화려함이여
爲佛國與仙宮兮        부처 나라와 신선 궁전이 되었도다
况嶺近在鰲山之側兮      더구나 고개 근처 오산鰲山의 곁이라니
惟琵岳逾爲嶺之最兮      비슬산毗瑟山만이 튀어나와 산 중의 최고 되고
跨星洛而據昌密兮       성주 낙동강을 넘어서 창녕·밀양에 웅거했지
鎭舟車之要會兮        배와 수레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穹隆窅窕乎千古        천고의 세월 한적하고 편안했지
積翠葱蘢乎杳靄兮       울창한 푸른 산, 아득한 아지랑이여
爲萬古之仙區兮        만고의 신선 고향일세
洛水洋洋兮          낙동강 물은 넘실대고
苞山藹藹兮          포산苞山은 화기가 서려 있네
丹崖萬丈翠壁千尋兮      만 길의 붉은 벼랑 천 길의 푸른 절벽
有揉岩鶴窟之危兮       험하기가 학굴鶴窟처럼 위태롭네
予得盤桓而不去兮       나는 배회하면서 돌아가지 못한 채
圖岑寂而無爲兮        적막과 무위를 도모한다네
羌弄管而摛山之藻兮      아, 붓을 놀려 산의 아름다움을 짓자니
爲壁玷而山疵兮        절벽을 더럽히고 산에 흠을 냈네
想孫公白傅之賦天台與龍門兮  손공孫公15)과 백부白傅16)의 천태天台·용문龍門 노래 되길 바랐지만
媿夫金聲月韻之辭兮      금성金聲17)과 월운月韻18)의 시 욕되게 했을 뿐이네
밀양 재악산 영정사 전후 창건기密陽載岳山靈井寺前後創建記
밀양은 영남의 이름난 고을인데 그 풍토의 아름다움과 산천의 빼어난 경치 때문이다. 고을에서 동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푸르게 울창한 곳을 재악載岳이라고 하는데, 그 산속에 있는 절을 영정靈井이라 한다.

012_0210_c_01L釋氏所謂以淸平世界爲我國土以大
012_0210_c_02L圓覺爲我伽藍者也予將此語附諸
012_0210_c_03L山靈將以此一塊之丘壑一區之伽藍
012_0210_c_04L撝而阿之轉歸於淸平之界圓覺之地
012_0210_c_05L而不爲三灾之所害四劫之所侵將期
012_0210_c_06L於千萬年之無窮也又從而爲之歌曰
012_0210_c_07L大塊之氣兮有精英之蘊兮泄而布結
012_0210_c_08L爲山川之秀兮有湯湯兮嶾嶾兮
012_0210_c_09L彼三山兮屹在我之東兮維東方山水
012_0210_c_10L之秀且麗兮爲佛國與仙宮兮况嶺近
012_0210_c_11L在鰲山之側兮惟琵岳逾爲嶺之最兮
012_0210_c_12L跨星洛而據昌密兮鎭舟車之要會兮
012_0210_c_13L穹隆窅窕乎千古兮積翠葱蘢乎杳靄
012_0210_c_14L爲萬古之仙區兮洛水洋洋兮
012_0210_c_15L山藹藹兮丹崖萬丈翠壁千尋兮有揉
012_0210_c_16L岩鶴窟之危兮予得盤桓而不去兮
012_0210_c_17L岑寂而無爲兮羌弄管而摛山之藻兮
012_0210_c_18L爲壁玷而山疵兮想孫公白傅之賦
012_0210_c_19L台與龍門兮媿夫金聲月韻之辭兮

012_0210_c_20L

012_0210_c_21L密陽載岳山靈井寺前後創建記

012_0210_c_22L
密爲嶺國之名州者以其有風土之美
012_0210_c_23L山川之勝者故也州治之東五十里
012_0210_c_24L鬱乎蒼蒼者曰載岳山之中有寺曰靈

012_0211_a_01L산은 오대와 태백에서 내려와 이리저리 남쪽으로 달려왔으니 몇천 리를 내려와 이곳에서 멈추어 겹겹으로 바위와 봉우리가 되었으며, 구름이 쌓이고 물결이 무너지는 듯 우뚝하게 치솟아 호랑이가 웅크리고 독수리가 깃들어 있는 듯 울타리를 만들고, 봉황이 날아오르듯 용이 서려 있는 듯 갈고리가 연달아 둘러 있는 듯 큰 골짝을 만들었다. 시내들이 모여 들어 하나의 큰물을 이루었고 굽이굽이 몇 차례 건너 이곳으로 들어오니, 소위 물은 윤택하고 구름은 많고 수레가 거의 오지 않는 곳이다. 산의 메마른 땅은 낙엽이 수북하고 대숲을 등지고 구름을 누르면서 시원스럽게 툭 트여 있으니, 남향의 터가 옛날에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 그 터를 점지한 사람은 황발 노선이다. 신라 시대 황발 노선이 서천에서 와 이곳에 은둔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인이 병에 걸려 그를 찾아와 치료 방법을 구하자 신선이 흐르는 샘물을 가리키며 “이 물을 마시면 그 병이 나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인이 가르쳐 준 대로 하자 효험이 있었 다. 그가 놀라며 감사하면서 “신선께서는 대성이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가서 향인鄕人들에게 말하니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다투어 재물을 보시했고 이를 근간으로 절이 세워졌다. 그 샘물을 영정이라 불렀는데, 절의 동쪽 모퉁이의 작은 샘이다. 네 국사가 있을 때에 물이 솟다가 그쳤다. 대중이 늘어나고 사세를 떨친 자취는 사적寺蹟에 갖추어 실렸으므로 이제 번거롭게 말하지 않겠다.
임진·정유 난 이후에 혜징 스님이 계셨는데, 호남 사람으로 호남에서부터 영남으로 와서 놀며 구경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마침내 무너진 터를 복원했으니, 우선 금당을 짓고 다음으로 법당을 지었다. 동지·각능·도전 등 16명의 개사開士19)가 혜징 스님의 유지를 이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20여 년간 다투며 힘을 다하여 온갖 것이 갖추어졌으나, 산이 험하고 땅이 깊어 머무는 스님이 드물어졌다. 기축년에 이르러 태수인 황 공이 이 절에 들렀다가 사방을 둘러보고는 여러 스님에게 조언하기를 “이 절은 서남 방향이 비어 있는데 물이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마땅히 긴 회랑을 지어

012_0211_a_01L井也山自五臺太白透迤南走幾乎
012_0211_a_02L千里而至于此止爲重巖疊巚雲委波
012_0211_a_03L嵬然嶮阻以虎踞鷲栖爲藩蘺
012_0211_a_04L翥龍蟠鉤連環鎻爲巨洞壑澮衆淙
012_0211_a_05L爲一大溪曲折屢渡而入此所謂水潤
012_0211_a_06L雲多𥪟輪罕到之地而山之腊土落爲
012_0211_a_07L堆隼負竹林壓雲澗爲一爽塏作癸
012_0211_a_08L坐丁向之基卽古之基也初占其基者
012_0211_a_09L則黃髮老仙也在新羅之世有黃髮之
012_0211_a_10L自西天來至此遁跡焉有異人抱
012_0211_a_11L殘疾來求治仙指一流泉曰飮此則爾
012_0211_a_12L疾瘳矣異人如其敎立效遂驚謝曰
012_0211_a_13L仙乃大聖也乃出吿諸鄕人聞者悅之
012_0211_a_14L競以財施乃就此建寺宇以其泉名曰
012_0211_a_15L靈井卽寺之東隅細泉也及其在四國
012_0211_a_16L相繼而止衆益盛寺益振之跡
012_0211_a_17L載于寺籍今不煩云逮丁壬亂後
012_0211_a_18L僧惠澄湖南人也自湖抵嶺游翫至
012_0211_a_19L遂復廢址先建金堂次創法堂
012_0211_a_20L同志覺能道全等十六開士承惠澄之
012_0211_a_21L先後爭相戮力於二十年間百色俱
012_0211_a_22L以其重嶮深邃居僧鮮少至己丑
012_0211_a_23L有太守黃公來遊於寺顧四隅而諭諸
012_0211_a_24L僧曰爾寺庚兌旣虛水出其方宜建

012_0211_b_01L이로써 그 결함을 덮어야 한다. 그러면 그대들이 생활하는 데 이득이 될 뿐 아니라 흩어졌던 스님들이 모여드는 상서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총섭인 삼학이 곧 회랑을 지었다. 강희 기미년에 문득 화기가 엄습하는 변고가 있어 법당法堂·명부전冥府殿·선당禪堂이 모두 불타 버렸다. 사중들이 상의하여 말하길 “이번 환란은 실로 승사僧舍에서 시작되어 법당으로 번진 것이니 일찍부터 머물렀던 승려들을 행랑으로 옮겨 가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거듭하여 의론하여 말하길 “이전의 법당은 규모가 작아서 산의 형세가 높고 큰 것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탄영·상순 등 33명의 선승에게 명하여 공덕주를 맡고 혹 성조成造를 짓고 혹 단청을 하고 혹 기와를 만들고 혹 땅을 고르고 혹 철물을 다루고 혹 복전을 짓게 했는데, 대중도 일을 같이 했으며 숱한 공장이들이 기술을 보탰다. 경신년에 크게 동우棟宇를 지었는데 웅장하고도 아름다워 낙동강 왼편에서는 첫째였다. 도총섭인 지월 역시 영조인 중추부사 박재흥朴再興을 이끌어 단청의 시주자가 되게 하였다. 다음 해에는 도한·신일·계화·회소·대윤 등이 명부전을 지었다.
아아, 시간에는 선후가 있으며 일에는 득실이 있다. 선후는 사람에 해당되고 득실은 운수에 해당된다. 지금 이 절을 본다면 앞서 황발 노선이 있었으며 네 국사에 이르렀다. 혹 신라 시대 혹은 고려 시대에 절이 지어지고 유지되어 왔으며, 후에는 혜징·도전 등이 흥성케 했으니 득실의 운수 역시 그 사이를 따랐다. 또한 탄영 등 33인의 선승들이 옛 규모를 바꾸어 큰 집을 지었다. 비록 큰 환란으로 없어졌으나 크게 지어질 수 있었으니, 이것 역시 그 사이의 운수인 것이다. 나로서 살펴본다면 일찍이 20년 전에 탄영이 나에게 사적을 청하였고

012_0211_b_01L長廊以蔽其缺則非獨爾等生涯有潤
012_0211_b_02L必有僧伍坋集之祥云㧾攝三學卽建
012_0211_b_03L廊宇焉康熙己未輙有鬱攸之變
012_0211_b_04L堂及㝠府殿禪堂盡爲蕩燬了寺衆相
012_0211_b_05L議曰今之此患實由僧舍逼近於法
012_0211_b_06L堂所致也卽使曾居之僧移之於廊舍
012_0211_b_07L重與之議曰前之法堂規制其小
012_0211_b_08L稱山形高大之勢乃命坦英尙淳等
012_0211_b_09L十三禪伯爲功德主或爲成造或爲
012_0211_b_10L修莊或爲盖瓦或爲地正或爲鐵物
012_0211_b_11L或爲複殿衆役齊施百工迭手
012_0211_b_12L庚申之歲大建棟宇其壯麗宏大
012_0211_b_13L於江左有都㧾攝智月亦用影助中樞
012_0211_b_14L府使朴公再興爲丹雘之檀越也次年
012_0211_b_15L有道閑信日戒和懷佋大允等建㝠府
012_0211_b_16L殿也嗚呼時有先後事有得失先後
012_0211_b_17L人也得失者數也今以此寺觀之
012_0211_b_18L則先有黃髮老仙及四國師或在羅朝
012_0211_b_19L或在麗世創之守之後有惠澄道全等
012_0211_b_20L復之興之則得失之數亦隨於其間
012_0211_b_21L有坦英等三十三士變舊制創鉅宇
012_0211_b_22L則雖失之於大患而得之於大成此亦
012_0211_b_23L數之存焉於其間者也若夫以予而觀
012_0211_b_24L則嘗在二十年前有英公請寺蹟於予

012_0211_c_01L현재에는 종사가 역시 나에게 기記를 청하였다. 만약 사적문이 빼어난 재주를 지닌 석학의 솜씨로 훌륭하게 지어진 바가 있다면 얻은 것이 있다고 이를 만한데, 나의 쓸모없는 능력, 거친 지식, 비천한 언사, 둔한 글로 짓는다면 잃는 것이 많다고 이를 것이다. 그러한즉 얻고 잃음의 구분은 또한 문장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저 황발 노선과 네 국사의 자취는 누가 좇아서 살필 것인가. 이윽고 산중의 노스님인 쌍운이 노닐며 완상하다가 태백산 정암定庵에 이르렀다가 먼지 쌓인 들보 사이에서 이 절의 고적 한 편을 찾아가지고 와서 그간의 자초지종을 전해 주었다. 무릇 절의 얻음과 잃음, 지어짐과 무너짐의 운수는 비단 오늘만에 해당되지 않으니, 후대 천만세의 무궁한 때까지도 또한 반드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후세 이 글을 보는 사람 또한 혜징·도전·탄영·상순 등 여러 스승의 자취에 대해 감회가 있을 것이니, 옛것을 살리고 끊어진 과업을 잇는 데 힘을 바친다면 나의 이 글이 또한 헛되지 않을 것이다.
지리산 백련대기智異山白蓮臺記
내가 지리지를 보니 동해의 삼신산을 여섯 마리의 자라가 떠받치고 있는데, 방장산이 그 하나라고 하였다. 산 아래에 13개 주가 있는데 봉성鳳城20)도 그중의 하나이다. 성에서 북쪽으로 10리 되는 계곡에 있는 큰 절을 화엄사華嚴寺라 하는데, 고려 시대 도선道詵 국사가 창건하였다. 절이 임진·정유 변란에 모두 불타 버린 뒤 100여 년이 흘렀으나 그것을 복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숭정 연간 갑술년(1634)에 국일國一 선사21)가 강주康州22)의 쌍계사雙溪寺에서 와서 절터를 보고 애석하게 탄식하면서 “이곳은 고려 시대 도선공이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던 도량이 아니던가. 도선 대사의 공을 애석해하는 것은 물론

012_0211_c_01L今有宗師亦請記於予若在記蹟之文
012_0211_c_02L乃高材碩學大手茂詞之所能者則可
012_0211_c_03L謂得矣若予之樗材鹵學淺詞鈍筆之
012_0211_c_04L所事則可謂失之矣然則得失之數
012_0211_c_05L亦存於文墨之間者歟彼黃髮之仙與
012_0211_c_06L四國師之跡從誰而審之乃山之古釋
012_0211_c_07L雙運游翫至大白山定庵於塵梁間
012_0211_c_08L覘得此寺之古跡一篇而來傳之所詳
012_0211_c_09L至夫寺之得失成毀之數非亶今
012_0211_c_10L於後之千萬世無窮之間亦未必不
012_0211_c_11L有者矣後之覽此文者亦有感於惠澄
012_0211_c_12L道全坦英尙淳等諸師之跡而着力於
012_0211_c_13L復古繼絕之業則予之此文亦不爲虛
012_0211_c_14L作矣爾

012_0211_c_15L

012_0211_c_16L智異山白蓮臺記

012_0211_c_17L
愚按地誌曰東海有三神山爲六鰲之
012_0211_c_18L所戴方丈卽其一也山下有十三州鳳
012_0211_c_19L亦一數也城之北十里之谷有大
012_0211_c_20L伽藍曰華嚴乃高麗國師道詵之所剏
012_0211_c_21L而寺爲丁壬之變盡燒之自八九
012_0211_c_22L紀來無人復之崇禎甲戌有國一禪
012_0211_c_23L自康州之雙溪來見遺址而慨然曰
012_0211_c_24L此非麗之詵公講華嚴道場耶非徒惜

012_0212_a_01L어찌 화엄의 가르침을 생각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이에 문도들을 이끌고 『화엄경』이 새겨진 돌 조각들의 나머지를 모으고 전각을 지어 보관하였으며, 허물어진 터를 청소하여 천 년이 지나 없어진 도선의 공로를 이어서 마침내 그 터에 중창을 하니 원근에서 호응하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얼마 뒤 절이 크게 이루어지자 국일 대사가 문인들에게 말하길 “그대들이 모두 부지런히 힘써 겨우 절의 뼈대가 회복되었고 지혜를 닦는 힘이 갖추어졌으니 더욱 힘써라.”라고 하였다. 장로인 미공眉公이 머뭇거리다 나아가 아뢰기를 “제자는 불도에 뜻을 둔 지 오래되었습니다. 원하건대 나아갈 바를 일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대사가 “지금은 말세의 운수로 오탁23)이 다투어 흐르는데 마구니를 복종시켜 부처의 경지에 오르려면 정토업24)을 닦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편안한 곳에 고요히 앉아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멀리 서방정토를 생각하면 이 도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로가 기뻐하며 물러나 깊이 무상함을 생각하면서 면벽하여 문을 닫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진리를 살피는 데 힘써 좌선하면서 다소간의 진전을 보았다.
무술년(1658) 봄에 장로는 마음을 가다듬어 고요히 수행할 장소를 정하려 지팡이에 의지하여 발이 부르트도록 벼랑을 넘고 계곡을 건너 절의 북동쪽 산봉우리까지 올랐다. 골짝과 봉우리를 오르내리고 언덕과 산을 우러러보니 봉우리가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 학이 나는 듯 용이 춤추는 듯하였으며, 서쪽으로부터 굽이져 이어져 와서 멈추어 대臺가 되었다. 대는 가파르게 솟았지만 평평한 터가 되었는데 올라가 살펴보니 해좌사향亥坐巳向25)의 자리였다. 방향에 따라 판별하면 반야봉은 할아버지 산이요, 백운봉은 손자 산이며, 동남쪽으로 잔강潺江26)과 오악鰲岳이 옷깃과 띠처럼 감싸 안고 있었다. 종석은 그 뒤를 어루만지고 비옥한 들이 그 앞에 있으며, 청련대는 위에 있고 극락대는 아래에 있으며, 백련대는 그 가운데에 있어 삼대三臺가 서로 도와 하나의 극락정토를 이루었다. 이에 장로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길 “북천이 나를 기다린 까닭이 이곳을 주기 위해서였구나.”라고 하였다. 동지들을 이끌고 가파르고 높은 곳을 깎고 험하고 위태로운 곳을 끊고, 흙을 져다가 계단을 쌓고 벽돌을 쌓아 우물을 만들고 재목과 곡식을 모아

012_0212_a_01L詵功豈不念華嚴敎哉卽率徒拾其石
012_0212_a_02L字華嚴爍碎之餘結閣以藏之掃其廢
012_0212_a_03L繼詵功千載已滅之後遂重剏其基
012_0212_a_04L於是遠近響應如赴約束居無何寺大
012_0212_a_05L成國一大師吿門人曰爾等咸勤道力
012_0212_a_06L僅復金田福諦已足慧力且勉之
012_0212_a_07L長老眉公逡巡而進曰弟子留心斯道
012_0212_a_08L者久矣願垂指歸大師曰今玆季運
012_0212_a_09L五濁爭流攝伏魔寃超登佛地莫若
012_0212_a_10L修淨土業端居燕處調攝身心遠想
012_0212_a_11L樂邦斯道可成也長老欣然而退
012_0212_a_12L念無常面壁杜門用習止觀坐閱多
012_0212_a_13L少蟾蜍在戊戌春擬卜頤養之所
012_0212_a_14L策杖蠒足踰崖越澗登寺之艮岑
012_0212_a_15L徊嵌巚睢盱岡蠻有峯從甲而起
012_0212_a_16L鶴之翔如虬之舞迤逶西來止以爲
012_0212_a_17L陡聳而平正就上銓之得亥坐巳
012_0212_a_18L向之基從其辦方則般若爲祖白雲
012_0212_a_19L爲孫潺江鰲岳回抱衿帶於丙丁
012_0212_a_20L石拊其背沃野當其面靑蓮在上
012_0212_a_21L樂居下白蓮居中三臺扶翊完成一
012_0212_a_22L淨土之界也於是長老頭點曰北天之
012_0212_a_23L所以待我與之者也帥同志軰鏟嶇嶁
012_0212_a_24L斷嶬險負土補砌甃石開井鳩材募

012_0212_b_01L세 칸의 절을 지어 아름답게 이루고 장엄하게 꾸몄다. 금빛과 푸른빛이 나는 우물의 색은 찬란하게 빛나 구름 위에 솟은 푸른 절벽에 아득하게 비치어 바라보니 곤륜산의 신선 궁궐과 같았다.
3년이 지나 경자년 여름에 나는 대의 오른쪽 선방에 머물었는데, 초암草菴 장로가 나를 찾아와 몇 줄의 글을 청했는데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장로가 내게 다가와 조용하고 간절하게 “내가 국일 선사의 깨우침을 받들어 과업을 마무리짓고자 하는데 이제 당신의 글과 말을 받아 내 뜻을 나타내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에 공손한 낯으로 말하길 “그런즉 장로의 신의는 숭상할 만하고 그 뜻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이익이 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며 도움이 되는 것 역시 세 가지가 있으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깨달은 사람의 깨우침을 종신토록 가슴에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그대의 구도를 따르게 하는 것이 이로움의 첫 번째요, 또한 조용한 곳에 나아가 편안하고 고요하게 거처하며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움의 뜻에 따라 도를 행하는 것이 이로움의 두 번째요, 듣는 이로 하여금 믿음을 일으키게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같이 기뻐하게 하고 욕심 많은 이로 하여금 인색함을 후회하게 하고 겁이 많은 이로 하여금 의리를 불러일으키고 난폭한 이로 하여금 인을 좇게 하여, 고루 복되고 선한 곳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이로움의 세 번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높은 산 위에 거처하며 풍진 세상의 사방 툭 터진 누대에서 즐기니 숱한 봉우리들 다 다르고 먼 골짝이 제각각이요, 녹수는 갈라져 흐르고 흰 구름은 가볍게 일어나고 아침의 놀은 난간을 감싸고 석양빛은 창문에 비친다. 꽃들은 서림에 비치고 비는 남악에 내리고 달은 선방 뜰에 가득하고 눈은 차 달이는 부뚜막을 에워쌌다. 아침저녁의 모습과 사철의 풍경은 번갈아 색깔을 지어 내 눈을 어지럽게 사로잡으니, 반조返照27)하여 살피면 환몽과 같을 뿐이다. 선방에서 가부좌하고 앉아 밤낮으로 선정에 들면, 바람이 부딪치며 내는 갖가지 소리, 수많은 갈래로 흐르는 물소리 종소리는 달빛 어린 골짜기로 울리고, 경쇠 소리는 구름을 뚫고 울리고, 물시계 소리 오경을 알리고, 두견이 정오 독경까지 울고, 하늘에는 학들이 무리지어 내는 울음소리 시끄럽게 들리지만

012_0212_b_01L構三間蘭若怳然成儼然飾以金
012_0212_b_02L碧井井之色焃焃之光縹緲照暎於翠
012_0212_b_03L壁白雲之上望之若閬風仙闕也越三
012_0212_b_04L年庚子夏余栖禪于𡋛右草菴長老
012_0212_b_05L扣余門請數行文以不敢辭長老搭
012_0212_b_06L余從容而恳曰吾受國一禪師之諭
012_0212_b_07L願果遂今欲受子文而言吾志耳余於
012_0212_b_08L是歛容而吿曰然則長老之信可尙
012_0212_b_09L志可嘉矣然有所利者三而所裨者亦
012_0212_b_10L則不可不言也其守先覺之箴
012_0212_b_11L身銘膺使後來者有所爾之徇道之利
012_0212_b_12L一也且詣閑處燕結端居行住坐臥
012_0212_b_13L有所適意行道之利二也能令聞者發
012_0212_b_14L見者隨喜貪夫悔悋懦夫興義
012_0212_b_15L夫從仁均歸福善之域其濟衆之利三
012_0212_b_16L而至居于嵽𡾒之上游舍風塵之表
012_0212_b_17L軒窓四闢則千峰異態萬壑殊狀
012_0212_b_18L水分流白雲輕起朝霞繞檻夕照斜
012_0212_b_19L花暎西林雨歸南岳月滿禪庭
012_0212_b_20L擁茶竈朝暮之狀四時之景遆來爲
012_0212_b_21L攅眩於目返照以觀惟幻焉跏趺
012_0212_b_22L靜室入定宵旰風交萬籟水激千途
012_0212_b_23L鍾鳴月壑磬透雲開五夜仙漏一聲
012_0212_b_24L啼䳌至於午梵宵鶴群音咻聒於聽

012_0212_c_01L반조하여 들으니 단지 정적일 뿐이다. 거기에 더해 향을 맡고 맛을 보고 만져 보고 분별하더라도 하나의 고요함뿐이다. 이렇게 한다면 지止에서 관觀이 생기고 관觀에서 환幻이 생기고 환幻에서 적寂이 생기고 적寂에서 정定이 생기니, 정定하게 된 연후에 혜慧가 발하니 정定과 혜慧가 성취되고 지관止觀이 갖추어져 이 한 암자가 원각圓覺28)을 이루는 절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도를 이룰 것인데 무엇을 걱정하는가. 이에 반하여 옛날에는 옥을 버리고 금을 녹이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과 선사鳥窠禪師의 고목 이야기와 무엇이 다르겠나. 반드시 밝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에 써서 기문으로 삼는다.
재악산기載岳山記
재악載岳이란 이름이 지어진 뜻은 알려져 있지 않다. 무릇 만물은 대개 이름 지은 뜻을 지니고 있은 연후에야 그 이름의 연고가 드러난다. 촉나라의 동산銅山은 동철銅鐵29)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인도의 설산은 돌의 색깔이 대부분 하얗기 때문인데, 비단 산 이름만 이런 것이 아니다. 천하 만물들은 무릇 그 이름이 있으니 혹은 그 기능에서 유래하기도 하고 혹은 그 색에서 유래하기도 하고 혹은 그 모양에서 유래하기도 하고 혹은 그 생산물에서 유래하기도 하니, 황하黃河30)ㆍ흑수黑水31)ㆍ지석砥石32)ㆍ반목蟠木33) 같은 것은 가리켜 주는 바가 없지 않다. 이제 재악이란 이름은 기량·모양·색깔·생산물 중 무엇인가. 마침내 고을의 노인들에게 유래를 물으니 혹은 산의 모양이 수레에 짐을 실은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고, 혹은 신라 왕이 병이 났을 때 이 산의 물을 길어다 마시게 할 때 수레에 그것을 실었기 때문이라 했으니 이 모양새에서 생겨난 것이다. 혹은 산이 아니라 약초 때문이라 하는데 옛날 산중에 약초가 많았다고 한다.
나는 말하길 “모두 맞지 않는다.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하는 것은 소소한 것이고 참된 것이 아니다. 이제 내가 뜻을 모아 생각하여 보면

012_0212_c_01L反照以聞則惟一寂焉且夫於香於味
012_0212_c_02L於觸於知惟一靜焉夫如是則止能
012_0212_c_03L生觀觀能生幻幻能生寂寂能生靜
012_0212_c_04L靜然後定定後慧定慧成就止觀具
012_0212_c_05L則以此一庵爲圓覺伽藍矣又何
012_0212_c_06L患乎未幾佛之道之成之哉反是則古
012_0212_c_07L有捐玉消金之說鳥窠枯木之談何其
012_0212_c_08L不同耶必有辨之者矣遂書爲記

012_0212_c_09L

012_0212_c_10L載岳山記

012_0212_c_11L
載岳之爲名未詳其所命之意也凢物
012_0212_c_12L皆有所命之意然後著其名故蜀之銅
012_0212_c_13L以其多產銅鐵也笁之雪山以其
012_0212_c_14L石色多白非獨山之如此至於天下萬
012_0212_c_15L物也凢有其名者或因其能而或因
012_0212_c_16L其色或因其形或因其產而名黃河
012_0212_c_17L黑水砥石蟠木之流非無所指焉今載
012_0212_c_18L岳之名其能耶形耶色耶產耶
012_0212_c_19L以徵諸鄕之耆老或曰山之形如車之
012_0212_c_20L載物也或曰羅王病運此山之水而服
012_0212_c_21L以輿載之然則此以其形與產耶
012_0212_c_22L或曰非岳而是藥以其山中古有多藥
012_0212_c_23L草也余曰皆非也其命名之意瑣細
012_0212_c_24L而不實矣今余以率意而思之山之根

012_0213_a_01L산의 뿌리가 멀리 백두산·풍악산·오대산·태백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와 동해 바다로 흘러가다가 높이 솟아 푸른 산이 되어 청도·밀양·양산·언양의 수백 리를 휘감고 있다. 그 높이는 만 길을 넘어서는데 위로는 동쪽의 별자리를 범하였다. 그 골짝은 매우 깊고 바위산은 풍만하고 아름다워 다른 산과 비교할 수 없다. 계곡물의 장관, 폭포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골짝과 바위에서 생겨났다. 은밀한 사이로 물줄기는 넓게 흐르고 물결은 가득 차 넘쳐 흘러 천만고부터 물이 마르지 않았다. 비록 7년의 가뭄이라도 고갈되지 않으며 콸콸거리고 골짝에서 고을 50리 남쪽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물이 비옥한 논과 윤택한 밭 사이에 끼어들어 몇천만의 사람들이 이에 의지해 살아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밀양 사람들은 모두 이 산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산은 밀양 고을 사람들의 보배가 아니겠는가. 밀양 사람들은 또한 나라의 백성이니 이 산 역시 나라의 보배가 아닌가. 그러므로 밀양 사람과 나라 백성은 모두 이 산을 이름하여 재악이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재약載藥이 병자에게 약을 주는 것이 분명하니 보통 이름이 아니다. 혹은 약초를 캔 세 신선을 말하는데 어찌 한갓 병 치료를 위해서였겠는가. 도리어 장생불로하며 세상의 허물을 벗고 신선에 오르게 하는 약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나는 말하길 “불사약은 비록 세상에서 좋은 약이라고 하지만 어찌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무릇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인자도 지자도 아니다. 다만 산수를 좋아하는 병이 있으니 산이 밝고 물이 고운 것을 보고는 은둔하는 군자가 지낼 만한 곳임을 알게 되었다. 우연하게 들어와 종 바위 아래 초가에 주석하여 수 년간을 거처했으니 산에는 머물 만한 곳이 네 군데이며, 완상할 만한 곳이 네 군데 있다는 것을 알고는 감상하고 즐겼다. 무릇 산은 높고도 풍부하며 골짝은 깊어졌다가 다시 평평해졌으며

012_0213_a_01L遠自白頭楓岳五𡋛太白而下東抵于
012_0213_a_02L窮隆積翠盤絡於淸密梁彥數百里
012_0213_a_03L其高則萬丈餘上侵于箕房之宿
012_0213_a_04L其洞壑之深邃岩巒之豊麗不是與他
012_0213_a_05L山之比溪澗之壯泉瀑之美根於萬
012_0213_a_06L壑千岩窅窕之間其源浩浩其派洋
012_0213_a_07L而自千萬古流而不歇雖七年之旱
012_0213_a_08L不爲枯涸溶溶然出於洞抵府五十里
012_0213_a_09L南入於洛其間膏沃之田良潤之畦
012_0213_a_10L不知其幾千萬區人賴以活則密府之
012_0213_a_11L非咸載命於此山者耶然則此山
012_0213_a_12L非密城一府之人所可寶歟密人亦國
012_0213_a_13L之民則此山亦非爲國之寶歟然則密
012_0213_a_14L人與國人皆名此山爲載岳宜矣
012_0213_a_15L藥則藥於病者惟宜非通名也或曰凢
012_0213_a_16L采藥三神者豈徒療病之是求哉乃長
012_0213_a_17L生不老蛻凢登仙之藥耳余曰不死之
012_0213_a_18L雖徒聽之爲美世安有不死而長生
012_0213_a_19L者乎夫智者樂水仁者樂山余非仁
012_0213_a_20L智者有山水之癖見此山明水麗
012_0213_a_21L其有隱君子所可栖也偶入而駐錫於
012_0213_a_22L鍾岩下草堂而留居者數年知山之有
012_0213_a_23L所可居者四而可賞者四也感玩而樂
012_0213_a_24L夫山高而且豊富洞邃而還平寬

012_0213_b_01L샘과 돌은 아름답고 밝았으며 수목이 예쁘게 우거졌으니, 족히 양지자養智者가 머물 만한 장소인 것이 첫 번째이다. 물은 넓고 구름은 많아 세상의 티끌이 미칠 수 없고 수레나 말이 허용되거나 어지럽게 신음 소리가 들리는 일이 드물어 족히 양정자養定者가 머물 곳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두 번째이다. 푸른 소나무가 산에 가득하고 붉은 상수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봄에는 나물이 지천이며, 가을에는 요기할 열매들이 있으며 산속에는 오곡이 우거져 있고 숲 사이에는 온갖 시끄러움이 사라지니, 족히 양명자養命者가 머물 만한 것이 세 번째이다. 뒤로는 만 개의 언덕이 울타리 치고 앞으로는 띠 같은 길이 멀어 왕복하는 데 비록 열흘이 걸리기는 하나, 험한 벼랑이 없어 넘어설 만하고 험한 산이 없어 장애가 되지 않는다. 지팡이를 날려 나아가고 말을 타고 올 만큼 평탄하니 족히 양신자養身者가 머물 만한 것이 네 번째이다. 또한 굽이굽이 400리 밖으로 3주州 사이에 낀 바위산의 기세가 성하여 막힘이 없다. 용납하여 핍박함이 없으니 군자의 기상과 같다. 천 개의 바위들이 빼어남을 경쟁하고 만 개의 골짝은 흘러감을 다투고 물은 빼어나고 산은 밝아, 능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티끌 마음과 속된 걱정을 홀연히 날려 스스로 가슴이 맑아지고 도기道氣와 선심禪心이 갑자기 마음에 흘러들어 선지식의 모습과 같으니, 이는 칭찬할 만하다. 산들이 네 모퉁이를 두루 감싸 안고 물줄기들은 앞으로 띠같이 둘러 있으며, 산 얼굴이 그 가운데에서 의젓하게 나오는 것이 왕의 형상과 같으니, 이는 완상할 만하다. 샘물은 협곡에서 나와 백성의 밭을 적시고 못 속의 용은 비를 내리고 산령은 구름을 토하니, 비록 가뭄 속이라 하더라도 오래도록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못이 장자長者의 풍모와 자태 같다. 이것이 완상할 만한 여덟 가지로 모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도의 기운을 도와주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꿈속에서 어떤 산속에 이르렀는데 서쪽으로 험한 계곡이 있었다. 옥 같은 봉우리, 비단 같은 골짝, 낙석, 위태로운 바위가 그 사이에 켜켜이 드러나 있었으니, 하나의 맑은 계곡물이었다.

012_0213_b_01L泉石娟明樹木佳茂足以爲養智者所
012_0213_b_02L可居一也水濶雲多紅塵不到罕見
012_0213_b_03L其車馬之容紛咻之態足以養定者所
012_0213_b_04L可居二也靑松滿嶺赤橡堆林春多
012_0213_b_05L可茹之菜秋有療飢之果五穀蕃於山
012_0213_b_06L百擾息於林間足以爲養命者所可
012_0213_b_07L居三也背有萬嶺之藩前脩一紳之路
012_0213_b_08L其爲往復雖有一臾旬之遠而無險崖
012_0213_b_09L可越無險峻可碍飛笻而進鞍馬而
012_0213_b_10L坦然而平足以爲養身者所可居四
012_0213_b_11L且有逶迤四百里外磅礡數三州間
012_0213_b_12L其勢豊而不阨其容雍而不迫似有君
012_0213_b_13L子之氣象是可賞也千岩競秀萬壑
012_0213_b_14L爭流水秀山明能使見之者塵心俗
012_0213_b_15L慮泯然自澄于胷而道氣禪心頓激
012_0213_b_16L於心似有善知識之形儀是可賞也
012_0213_b_17L衆山周擁於四隅群水縈帶於一面
012_0213_b_18L之面儼然出御于中似有王者之狀
012_0213_b_19L是可賞也泉流出峽灌漑民田潭龍
012_0213_b_20L施雨山靈吐雲雖於旱天之中長含
012_0213_b_21L潤物之澤似有長者之風資是可賞也
012_0213_b_22L此八者皆爲激人心助道氣者也余嘗
012_0213_b_23L夢至一山中西有岑嶔之谷瑤峯綉峽
012_0213_b_24L落石危岩間露層出而一道淸溪

012_0213_c_01L그로부터 나와서는 날려서 폭포가 되고 떨어져서는 못을 이루고 평지에서는 시내를 이루고 치달아서 여울이 되었다. 대체로 웅장한 바위와 맑은 물은 스스로 높고 낮고 둥굴고 평평하게 되었으며, 물은 위로 10리 정도를 흘러 아름다운 지경을 만들었다. 거슬러 올라가 그 위에는 때때로 시인들이 손잡고 함께하였으며 승려들이 짝을 이루어 혹은 맑은 물가, 바위 위에서 읊조리고 혹은 푸른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았으니, 어른어른한 것이 신선 세계 사람들 같았다. 물의 근원이 다한 곳에 산이 있으니 부용 같은 만 길의 봉우리가 하늘로 들어가고 몸은 산꼭대기로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위로는 북두칠성을 어루만지고 동해를 굽어보며 배회하다가 날이 저물어 내려와 골짝을 나왔다. 늘어선 옛 절은 동쪽 벼랑 푸른 물 위에서 가로막는데, 붉은 문에 조각한 난간이 우거진 숲과 긴 대 밖으로 화려하게 비쳤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 채 깨어났는데 지금 이 산을 보니 일찍이 꿈꾼 것과 방불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산에 몸으로는 비록 처음 왔으나 생각 속에서는 이미 노닐었던 곳이다. 마침내 기를 지었으니 여러 산의 신령에게 의탁하여 같이 평생을 은거하기로 맹세한다.
비명碑銘
청주 낙영산 공림사 사적 비명 병서淸州落影山空林寺事蹟碑銘并序
대체로 도는 세속을 떠난 것으로써 성인은 중원이나 오랑캐의 구분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노자 두 성인은 동쪽 땅에 내려오고 중생을 구하는 부처님은 저 서쪽 지역에서 떠올랐으니, 희씨의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자 고금의 천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마치 일월성신이 동쪽 바다 위에서 합하고 강수·하수·회수·제수가 미려尾閭34)의 못으로 모이는 것과 같다. 공자는 인의를 근본으로 삼고 노자는 도덕을 주된 뜻으로 삼아서 모두 세상 안에서 노닐지만, 불교는 진정 무위로서

012_0213_c_01L中而出或飛而爲瀑洛而爲潭平而
012_0213_c_02L成川走而爲瀨大抵磐岩娟潔如礱
012_0213_c_03L如磨自成高下圓平而水以流其上
012_0213_c_04L約十里許爲佳勝之境也㳂流而上
012_0213_c_05L往往有騷人連袂梵侶成雙或吟於淸
012_0213_c_06L泉石上或坐於碧樹陰中依依若壺中
012_0213_c_07L人物也至窮源處有峰如萬丈之芙蓉
012_0213_c_08L斗入於紫虛之內騰身而上冢頂上摩
012_0213_c_09L斗杓俯瞰桑海徘徊日夕而下出其
012_0213_c_10L有古寺排壓於東崖碧澗之上
012_0213_c_11L戶雕闌燦暎於茂林脩竹之表然而未
012_0213_c_12L知其某處而覺今觀此山殆非彷彿於
012_0213_c_13L曾所夢者耶然則此山身雖始到
012_0213_c_14L則旣遊之地也遂作記以寄諸山靈
012_0213_c_15L擬與約平生歸隱之盟爾

012_0213_c_16L

012_0213_c_17L碑銘

012_0213_c_18L淸州落影山空林寺事蹟碑銘并序

012_0213_c_19L
夫道出離微聖匪夷夏是故孔老二聖
012_0213_c_20L降于東土金僊佛日昇彼西乾皆在
012_0213_c_21L於姬周之一世並駕于古今之天下
012_0213_c_22L猶日月星辰合於扶桑之上江河淮濟
012_0213_c_23L匯于尾閭之淵孔以仁義爲宗老以道
012_0213_c_24L德爲旨齊游於六合之內佛以眞正無

012_0214_a_01L마음의 도를 밝히고 인의와 도덕을 겸하고 육합六合의 안과 밖에서 노니나니 논하여 변론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도의 넓음은 우주가 만물을 포용하는 것과 같으며, 그 가르침의 광대함은 바다가 온갖 냇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비견된다. 여러 사물을 찾아 취하여 물상을 감싸 안으니 설법을 할 때면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내려 그 올바른 자리에 들어가서 땅에는 육서六瑞35)가 샘솟았다. 하늘·사람·제석천·범천왕이 그 법륜을 움직이기를 청하였으며 용과 귀신과 마귀는 머리를 숙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순하였으니, 외로운 공자는 저 구구한 인의仁義로서 일곱 개의 포악한 나라 사이에서 늙었으며, 노자는 외로이 남은 『도덕경』을 5천 마디 안에서 세상을 걱정하는 것으로 그쳤을 따름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의 각황께서는 재앙이 닥치기 전에 부처의 도를 멀리 계승하여 밝히시고, 사바의 존자가 될 운수에 응하여 대천大千의 주인이 되셨으며 다시 사생四生의 아버지로 돌아가셨으니, 그 성대한 공렬은 어찌 사람의 마음으로 예측할 수 있겠는가. 삼가 그 대중을 교화하는 가르침이 동방에 전해진 것을 생각해 보니 주나라 목왕의 시대에 이미 화인化人이 서방에서 날아와 은밀히 점점 전해졌다. 동한의 명제가 꿈에 금인을 보고 스님인 섭마등을 맞아들여 마침내 중국에 불교가 크게 전해지고, 천하에 퍼져 나가기가 큰물이 평지를 달려가고 맹렬한 바람이 허공에 크게 부는 것과 같았으니, 누가 그 성대한 기세를 길들여 막아 내겠는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멀리 하늘의 동쪽에 있지만 다행히 지극한 교화가 미치게 되었으니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유불도 삼교가 널리 퍼진 뒤로 마침내 사해의 명산대천과 빼어난 경개를 가진 고을이 모두 아름다운 불교 세계의 동산이 되고 훌륭한 절터가 되어 중국과 오랑캐 원근遠近의 교외까지 포함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도가 있으면 가는 곳마다 불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낙영산의 공림사는 서원西原36)의 동쪽 80리에 있는 옛 절인데,

012_0214_a_01L昭著惟心之道兼仁義道德而優
012_0214_a_02L游於六合之內外論以卞之明也其道
012_0214_a_03L之愽如大象之包容萬物其敎之廣
012_0214_a_04L比滄海之呑納百川撈摝群品籠羅衆
012_0214_a_05L其說法也天雨四花入定也地湧
012_0214_a_06L六瑞人天釋梵請轉其法輪龍鬼邪
012_0214_a_07L稽首而歸命則䀌彼以區區仁義
012_0214_a_08L卒老于七暴國之間孑孑道德憤世於
012_0214_a_09L五千言之內而止之而已也恭惟我覺
012_0214_a_10L遠繼燈明佛之道於塵墨劫之前
012_0214_a_11L運娑婆尊爲大千之主普作四生之父
012_0214_a_12L其爲盛烈豈人情之所能測哉謹考其
012_0214_a_13L聲敎之東被也則聿自周穆之世已有
012_0214_a_14L化人從西極而飛來潛爲其漸遹乎
012_0214_a_15L東漢明帝夢金人邀沙門葉騰以來
012_0214_a_16L遂大被神州汎濫天下如洪瀾之走平
012_0214_a_17L猛吹之1) [8] 太虛其沛然孰能御以
012_0214_a_18L遏之哉惟我邦邈在天地之東2) [9]
012_0214_a_19L忝其至化之中其亦幸矣夫自鼎敎之
012_0214_a_20L風*楊遂使四海名山大川勝槩之鄕
012_0214_a_21L盡囿於佛界金銀之域致其金田玉刹
012_0214_a_22L布於華夷遠近之郊此所謂道之所
012_0214_a_23L無所往而不可者也今玆落影山空
012_0214_a_24L林寺者在於西原府之東八十里盖古

012_0214_b_01L그 절과 산의 기이한 자취가 여섯 가지가 있다. 옛날 신라 경문왕 때에 자정慈淨이라는 고승이 있었는데, 그 도와 덕이 사방에까지 전해져 왕이 흠모하고 우러러서 대사를 불러들여 국사로 삼아 벽상삼한삼중대광사壁上三韓三重大匡師로 봉하였으며 마치 원거鶢鶋37)가 노나라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대우하니, 대사는 즉시 사양하고 숨어서 이곳에 초가집을 지었다. 왕이 이를 듣고 사찰을 세워 거처하게 하고 사액을 내려 공림空林이라고 하였다. 그 후 명나라 건문제建文帝 때에 이르러 함허당涵虛堂 득통得通 화상이란 분이 자정 선사의 행적을 사모하여 그 법당과 요사채 등을 다시 짓고 하나같이 새롭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함허 도량이라고 한다. 이것이 그 사찰의 전후에 걸친 기이한 자취 중의 첫 번째가 된다.
천순天順 연간에 이르러 우리 세조 대왕께서 선문에 뜻을 두시어 친히 이곳에 행차하시고 특별히 성지를 내리시어 이곳을 보전하고 보호하라고 하셨으니, 그 당시 삼가 받은 문권이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영원히 산문의 중요한 보물이 되고 있다. 사찰이 고금의 임금께서 모두 중요하게 여긴 바가 되었으니 기이한 자취 중의 두 번째가 된다.
사찰의 북쪽에 미륵봉彌勒峰이 있는데, 부용이 만 장이나 되게 치솟아 은하수 속으로 들어갔다. 그 꼭대기에 큰 돌이 있고 돌 가운데에 황금빛의 보탑이 있었는데, 그 그림자가 중국의 도읍 낙양 성중에 드리워졌다. 무덕武德 연간에 당나라 고조가 점을 보는 사람에게 점을 치게 하고 곧 사신을 보내 남은 자취를 추적하게 하였다. 그 사신이 봉우리의 정상에 이르러 보니 단지 돌만 보이고 탑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돌의 윗부분을 뚫어 보니 과연 탑이 있었으므로 이에 그 탑을 꺼냈다. 드디어 6장丈이 되는 미륵불상 세 구를 돌 표면에 새겨 안정시키고는 그 산의 이름을 낙영落影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산의 기이한 자취 중의 세 번째가 된다.
낙영봉의 북쪽은 깊은 계곡과 험하고 높은 봉우리가 있고 빼어난 물과 돌이 위아래로 10리에 펼쳐 있어 모두 선경이다. 세상에서는 파환波環이라 부른다. 이것이 산의 기이한 자취 중의 네 번째가 된다.

012_0214_b_01L伽藍也其寺之異跡山之奇蹤有六焉
012_0214_b_02L昔在新羅景文王朝有高僧慈淨道德
012_0214_b_03L餘馨聞于四遠王欽而仰之邀致輦
012_0214_b_04L拜爲國師加封壁上三韓三重大匡
012_0214_b_05L師視之如鶢鶋之聽魯樂卽辭而遁
012_0214_b_06L結茆於此王聞之爲建寶坊而俾居
012_0214_b_07L賜其額曰空林云後至明建文之世
012_0214_b_08L有涵虛堂得通和尙淑慕慈淨之跡
012_0214_b_09L創其法堂及諸寮寀之屬一以新之
012_0214_b_10L或稱爲涵虛之道場也其寺之前後神
012_0214_b_11L聖之異跡一也至天順中我世祖大王
012_0214_b_12L俯留睿意於禪門親運玉趾特加聖旨
012_0214_b_13L而宛護之其拜軸至今存焉永爲山
012_0214_b_14L門之重寶其寺之爲古今人主之所共
012_0214_b_15L重之者二也寺之北有彌勒峰芙蓉
012_0214_b_16L萬丈上入雲漢其頂有大石石中有
012_0214_b_17L黃金寶塔其影落於中國洛陽都中
012_0214_b_18L武德中唐高祖使望氣者覘之卽遣
012_0214_b_19L使跟之使至登峰則只見石而不見塔
012_0214_b_20L鑿其石頂則果有之乃拔其塔遂鎸
012_0214_b_21L丈六彌勒佛像三軀於石面而鎭之
012_0214_b_22L名其山曰落影焉山之奇者三也峯之
012_0214_b_23L北洞壑岩巒秀麗泉石娟明上下十
012_0214_b_24L皆爲仙境而世謂之波環卽山之

012_0214_c_01L
산 남쪽의 법화원은 시원하게 허공으로 치솟았는데 신라의 신승 검단 선사黔丹禪師와 최고운이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했던 자리이다. 그러므로 검단산이 그 서쪽에 있고 고운대는 그 아래에 있다. 또 청화산이 있어 동쪽에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속리산은 남쪽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낙영산은 두 명산의 사이에 있으면서 자정·함허·검단·고운 등 네 사람과 나란히 세상에서 고명을 얻었다. 이것이 산의 훌륭한 경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기이한 자취의 다섯 번째이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난리 때에는 왜구가 갑자기 들이닥쳤으나 사찰의 신령스럽고 기이한 기운을 두려워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불을 놓았다. 그러나 동서의 회랑은 다 타서 재가 되었지만 불전과 스님의 거처는 바람이 바뀌어 불길이 꺼져 모두 재앙을 면하였다. 적들이 화를 내며 활을 어지러이 쏜 뒤에 돌아가니, 그 화살촉의 흔적이 절의 기둥에 완연히 남아 있는 것이 어제 일과 같았다. 이것이 또한 절의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 중의 여섯 번째가 된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모두 자정과 함허가 일찍이 마련한 것이지 난리 후에 사람들이 새로이 지은 것은 아니다. 지금 큰스님 태행太行이 부처님을 모실 계획으로 여러 시주들에게 알리니, 즉각 서오남 등 24명과 성철·일훈·죽간 등의 비구가 같이 부처님께 큰 소원을 빌며 함께 논을 희사하고 부처님께 시주하여 영원히 부처님을 모시는 재원으로 삼았으니, 어찌 적은 보탬이겠는가. 팔도도총섭자헌대부八道都㧾攝資憲大夫를 지낸 제하당霽霞堂 경특瓊特 대사가 노병으로 남한산성에서 사직하고 신유년에 이곳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어느 날 저녁 체심體心 도인이 말하길 “아, 이 절이 자정·함허 양 성사가 일군 도량인데 일찍이 기문을 지은 것이 없다. 옛날의 기이한 자취에 대해 비록 사람들이 입으로 외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012_0214_c_01L奇者四也山之南有法華院爽嵦凌
012_0214_c_02L卽羅之神僧黔丹禪師與崔孤雲講
012_0214_c_03L論蓮經之處也故黔丹之山在其西
012_0214_c_04L雲之臺在其下也又有靑華孕秀於東
012_0214_c_05L離岳誇䧺於南而落影處于兩名山之
012_0214_c_06L得與慈淨涵虛黔丹孤雲四人騁高
012_0214_c_07L名於宇宙之內山之名勝者五也至萬
012_0214_c_08L歷丁壬之亂倭寇猝至畏寺之神異
012_0214_c_09L不敢突入以火縱之惟東西廊宇
012_0214_c_10L爲煨燼其佛殿僧廬則風迴火熄盡免
012_0214_c_11L其烖賊恕之以箭亂射而去其𨮹痕猶
012_0214_c_12L在沙門之柱而如昨焉此亦爲寺靈異
012_0214_c_13L之六也然則今之所存堂宇皆慈淨涵
012_0214_c_14L虛之曾所經營者非在亂後之人新所
012_0214_c_15L建者也今有大德太行爲供佛之計
012_0214_c_16L以吿諸檀越則有徐五男等二十四人
012_0214_c_17L與比丘性喆日熏竹簡等同發鴻願
012_0214_c_18L捨畓而施於佛爲萬世享佛之需胡爲
012_0214_c_19L小補哉前八道都㧾攝資憲大夫釋霽
012_0214_c_20L霞堂瓊特大師以老病辭南漢歲辛酉
012_0214_c_21L歸隱于此一夕誘體心道人曰
012_0214_c_22L寺乃慈淨涵虛兩聖師之道場而曾無
012_0214_c_23L所紀之文古之奇跡雖有人口之誦
012_0214_c_24L「楊」通「揚」{編}次同「郵」疑「陲」{編}

012_0215_a_01L어찌 문인의 손을 빌려 글을 지어서 쇠나 돌에 새김으로써 도모하는 것과 같겠는가. 비석을 세워 옛일을 빛나게 하는 것은 모두 지금 시주들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계종 장로 조영祖瑛 대덕이 살펴보고 기뻐하여 정묘년에 간단한 편지를 써서 하인을 통해 영남으로 보내서 나에게 뇌문을 청하였다. 나와 조영은 함께 가르침을 받은 복이 있을 뿐 아니라 소년 시절의 교분도 깊었으므로 그의 바람을 거스르기 싫었으나, 졸렬한 글재주로서 감히 붓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해 겨울 다시 통정대부通政大夫 응민應敏 스님을 보내 글을 재촉하니 마침내 부득이해서 청하는 말에 따라 하는 수 없어 시를 지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佛氏東邁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된 것은
閱周秦邦           주周나라와 진秦나라 때의 일이고
爰及漢顯           한漢나라 때에 이르자 더욱 빛나서
海印全彰           해인海印이 온전히 밝혀졌지
濫觴寰宇           천축에서 기원하여
流冾扶桑           동방에 두루 전파되었네
粤有慈淨           이에 자정慈淨 선사 계셔서
法味親嘗           불법을 친히 익히시니
下風問道           고개 숙여 도를 묻는
彼新羅王           저 신라 왕
從其鳥養           어미 새가 그 새끼를 좇아 기르듯이
爲創道場           도량을 창건하였다네
涵虛緝古           함허涵虛가 옛 모습에 따라서
乃殿乃堂           전각과 당을 짓고
世廟親幸           세조 대왕이 친히 행차하시니
山益增光           산은 더욱 빛이 났네
蒼蒼落影           푸르른 낙영산落影山은
影唐洛陽           당唐나라 낙양에 그림자 드리우고
晃曜金塔           금탑은 찬란히 빛나고
胎石而藏           태석胎石은 숨어 있네
溪山明秀           산천은 수려하고
洞壑淸涼           골짝은 맑고 시원하네
中藏寶所           보물을 간직한 곳이요
千古禪房           천 년의 선방禪房일세
而山而寺           산과 절에
六異流芳           여섯 이적 전해 오니
有諸檀信           여러 단월자들이
施以農莊           농장을 시주하니
不怠供佛           공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求福知方           복을 구함에 예절을 아네

012_0215_a_01L曷若借辭於文人之手被之金石以圖
012_0215_a_02L其固爾其樹石以賁古事兼備今諸檀
012_0215_a_03L越之功也於是曺溪宗長老祖瑛大德
012_0215_a_04L審而喜之於丁卯春折簡而走伻嶺
012_0215_a_05L南來請誄於子子於瑛非獨有同風
012_0215_a_06L之慶亦深其少年之契欲不負其所望
012_0215_a_07L以樗櫟散材拙魯於文不敢爲之搦管
012_0215_a_08L其冬更遣通政大夫釋應敏而珿其文
012_0215_a_09L遂不獲已就紓其來語强賦其銘曰

012_0215_a_10L佛氏東邁閱周秦邦

012_0215_a_11L爰及漢顯海印全彰

012_0215_a_12L濫觴寰宇流冾扶桑

012_0215_a_13L粤有慈淨法味親嘗

012_0215_a_14L下風問道彼新羅王

012_0215_a_15L從其鳥養爲創道場

012_0215_a_16L涵虛緝古乃殿乃堂

012_0215_a_17L世廟親幸山益增光

012_0215_a_18L蒼蒼落影影唐洛陽

012_0215_a_19L晃曜金塔胎石而藏

012_0215_a_20L溪山明秀洞壑淸涼

012_0215_a_21L中藏寶所千古禪房

012_0215_a_22L而山而寺六異流芳

012_0215_a_23L有諸檀信施以農莊

012_0215_a_24L不怠供佛求福知方

012_0215_b_01L跡被豊石           그 행적 비석에 적혀 있어
遠示無疆           오래도록 멀리 전해질 것이고
浮雲擁衛           떠가는 구름도 돌을 보호하니
卓爾凌岡           산 위에 우뚝하다네
감로사 사적 비명 병서甘露寺事蹟碑銘并序
무릇 도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공평하여 천지 사이에 차 있으니, 그것은 탁약橐籥38)이 비어도 구부러지지 않는 것 같아 움직일수록 더 드러나며 퍼내더라도 마르지 않으며 적당하여 부족하지 않다. 옛 성인들이 천하에 이를 전하여 배척하지 않고 만세에 미치도록 하여 멋대로 재단하지 않으면서 넉넉하게 여유가 있는 것이다. 오로지 부처님께서 광대무변한 세계의 성인 중의 성인이 되었으니 하늘 중의 하늘이라 부르는데, 정수리에서는 백 가지 보배의 빛을 비추고 얼굴에는 둥그런 보름달이 열렸으며 금모지후金毛之吼39)를 떨치고 옥룡의 울음을 퍼뜨리고 성품의 바탕에 은혜로운 구름을 깔고 깨달음의 정원에 불법의 벼락을 치니, 일렁거리는 가르침의 물결이 사바에 가득 찼도다. 어찌 삼 척三尺의 부리40)와 오색호五色毫41)의 보잘것없는 글과 창록蒼鹿42)의 오천 언五千言에 비유할 것인가. 아득한 유한劉漢43) 시절에 금신金身44)이 문득 왕의 꿈에 나타난 뒤 백마가 갑자기 신주神州45)로 달렸고 옥축과 상자의 글이 절과 석실에 보관되었으니 하늘이 동쪽 땅의 생령을 꺾어 유절有截46)의 지역에 채워 옮기고 대방가47)에 노닐도록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나라로부터 위·진·제·양 나라 사이에 그 도는 세월이 갈수록 빛이 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막을 수 없으니, 그 자비와 제도의 공은 끝이 없다. 최후에는 정법안장正法眼藏48)으로서 대구씨大龜氏49)에게 부촉하여 28세에 이르도록 전했으니, 달마 대사가 멀리서 이심전심으로 총령葱嶺50)을 넘고 사막을 건너 양과 위나라 사이에 노닐며 앉은 채로 9년을 보내고

012_0215_b_01L跡被豊石遠示無疆

012_0215_b_02L浮雲擁衛卓爾凌岡

012_0215_b_03L

012_0215_b_04L甘露寺事蹟碑銘并序

012_0215_b_05L
夫道至大至公而塞乎天地之間其猶
012_0215_b_06L橐籥之虛而不屈動而愈出酌焉而不
012_0215_b_07L澍焉而不匱故聖人得以施之於
012_0215_b_08L天下而不爲伐被之於萬世而不爲
012_0215_b_09L綽綽然有餘裕者也惟我覺皇
012_0215_b_10L運大千之上爲聖中聖號天中天
012_0215_b_11L放百寶之光面開滿月之輪奮金毛之
012_0215_b_12L宣玉龍之吟布慈雲於性空震法
012_0215_b_13L雷於覺苑敎海之波瀾於是乎瀰漫於
012_0215_b_14L沙界庸詎以三尺喙五色毫一蒼鹿五
012_0215_b_15L千言而比之哉逮乎劉漢金身輙入於
012_0215_b_16L御夢白馬倐驤乎神州玉軸良凾之文
012_0215_b_17L已縢於蘭𡋛石室非天之所以衄其東
012_0215_b_18L土生靈厭洫於有截之域畀之游於大
012_0215_b_19L方之家者耶自漢曆于魏晋齊梁之間
012_0215_b_20L其道愈久而愈光以至于今不能遏之
012_0215_b_21L則其慈濟之功靡有紀極也在末後
012_0215_b_22L正法眼藏付於大龜氏其傳至二十八
012_0215_b_23L有達麽大師遠佩祖印踰葱嶺渡
012_0215_b_24L流沙而游於梁魏之間1) [10] 耳九年

012_0215_c_01L신광씨神光氏51)를 제자로 삼아 의법衣法을 주었다. 그 가르침이 오종五宗52)에 전해지고 사해를 떨쳐 우리 불가의 기풍이 비단 위에 꽃을 더하는 것에 못지않았으니, 이를 일컬어 격외의 선문이라 한다.
신라의 혜운惠雲 스님이 당나라에 들어가 안주 백조산 지원 선사志圓禪師의 법윤法胤53)이 되었으니, 달마로부터 10세손에 해당된다. 때는 당나라 소종昭宗 천우 17년 정묘였다. 혜운은 곧 백조白兆54)를 하직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 흥덕 대왕이 선사를 자우 국사慈雨國師로 삼으니, 갑자기 자우 국사가 조양鳥養55)을 생각하고는 석장을 떨치며 남쪽을 향하여 배를 타고 물을 건너 이곳에서 노닐었다. 창주의 위쪽으로 산봉우리들이 푸르게 둘러 있고 골짜기는 평평하고 넓었으니 호중壺中56)의 별세계였다. 선사는 마음이 흡족하여 큰 도량임을 알리고 백조 선사의 종풍을 널리 떨치게 되었으며 큰 법우가 내려 널리 인천의 뛰어난 기틀과 맞닿았으니, 마치 신룡이 큰 구름에 의지하고 바람과 천둥을 타고 용문에 감로를 뿌리며 고래·물고기·자라 등으로 하여금 그 머리가 모두 변하게 하여, 마침내 산을 신어神魚라 하고 절을 감로라 하였다. 선사가 이곳을 죽을 곳으로 여기고는 이곳에서 입적하였으므로 그 부도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뒤에 송나라 이종理宗 가희 원년 정유년에 해안海眼 스님이 자우 선사의 높은 자취를 사모하여 그 절을 중창하여, 무너지고 기울어진 전각과 요사가 새롭게 옛 모양대로 되었다.
황명 만력皇明萬曆 중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이르러 절이 왜적들에 의해 짓밟혀 온통 빈터가 되었으니 병란의 참상인 것이다. 만력 갑인년에 덕성德性·두인杜仁·각순覺淳·혜언惠彥 등 네 분의 대덕이 그 터가 수풀더미로 변한 것을 보고 마침내 탄식하여 말하길 “이곳은 자우가 남기신 터이다.

012_0215_c_01L得神光氏以衣法付之其傳至於五宗
012_0215_c_02L大振於四海使吾佛之風不啻如華添
012_0215_c_03L錦上此所謂格外禪門者也有新羅僧
012_0215_c_04L惠雲入唐爲安州白兆山志圓禪師之
012_0215_c_05L法胤於達麽爲十世孫卽唐昭宗天祐
012_0215_c_06L十七年丁卯也雲卽辭白兆而東還
012_0215_c_07L羅興德大王拜師爲慈雨國師也俄而
012_0215_c_08L慈雨思其鳥養拂錫而南乘盃渡水
012_0215_c_09L游歷于此卽見山屏環翠於滄州之上
012_0215_c_10L洞壑平寬爲壺中之別區師忻其愜願
012_0215_c_11L乃闡大道場廣震白兆之宗風雨大法
012_0215_c_12L普接人天之峻機者若神龍之據大
012_0215_c_13L而乘風雷雨甘露於龍門使鯤鯨
012_0215_c_14L魚鼈之屬緫變其頭角故遂以神魚名
012_0215_c_15L其山甘露榜其寺以爲終焉之所仍
012_0215_c_16L入寂于此故其浮圖至今尙存焉後至
012_0215_c_17L宋理宗嘉熙元年丁酉有僧海眼淑慕
012_0215_c_18L慈雨之高躅重緝是寺其隳橈陊圯之
012_0215_c_19L殿宇堂寮一新舊制焉逮皇明萬曆丁
012_0215_c_20L壬之亂寺爲島夷之蹂躪焉蕩然爲焦
012_0215_c_21L其兵燹之慘也至萬曆甲寅
012_0215_c_22L德性杜仁覺淳惠彥等四大德見其址
012_0215_c_23L完爾於草莾之中遂慨歎曰此其慈
012_0215_c_24L「態」疑「熊」{編}

012_0216_a_01L비록 도란 고금이 따로 없고 흥망이 운수에 달려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복구하는 데 힘을 모을 것인즉 반드시 날개를 쳐서 선을 따라야 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서로 맹세하고 이로써 다시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과연 승 원준이 그 울림에 응답하여 이에 법당이 지어졌으며, 그 당·요·누각 등은 또한 동지들이 피땀 어린 노력으로 지은 것이다. 숭정 임진년에 이르러 위엄 있던 당우가 전란의 불길에 타 버렸으니, 숲과 산도 빛을 잃고 구름과 시내는 비통함을 머금었다. 천학·혜언 양 대덕이 비통함을 달래 주면서 무리에게 말하길 “앞선 이들의 공덕이 이미 헛된 것이 되어 가슴을 어루만지면 백마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손바닥을 치며 적오赤烏57)의 상서로운 무리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처문處文·담식曇湜·초영楚英·신매信梅·처호處湖·일청一淸·처열處悅·담혜曇惠·탁균卓均·담성曇性·대언大彥·극신克信·대현大玄 등 열두 명의 개사開士58)들이 상의하고 힘을 합쳤다. 마침내 불전의 장엄함과 절집의 성대함이 후인들을 놀라게 했으니 호연湖演 상인이 구름 뿌리를 자르고 갈아 안치鴈齒59)의 층계를 쌓았다. 의론하는 자가 말하길 “그 전의 절 건물은 동쪽 봉우리에 치우쳐 있었고 서쪽이 비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한 팔을 자른 것과 같으며, 또한 스님이 많고 집이 좁은 것이니 마땅히 서쪽으로 요사를 넓혀 지령을 흡족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성준性俊·문학文學·천학天學·담식曇湜·탁징卓澄 등이 즉시 서쪽을 깎아 명월明月·청풍淸風·대월對月·미타彌陁 등 네 건물과 대장전을 더 넓혔으니, 이에 절은 바야흐로 모양을 갖추었다. 승려 대흡大洽이 사천왕상을 조성하여 문에 안치하였고 날듯이 높은 집이 삐죽삐죽하게 솟아 호수와 강 밖에서도 우뚝하게 빛났으니, 강 건너에서 이를 바라보는 자들이 다투어 가리키며 연화정토蓮花淨土라 하였다.
내가 자우·해안의 행적을 얻어 살펴보니

012_0216_a_01L雨之遺基也雖道無古今興廢有數
012_0216_a_02L吾等倡以復之則必有皷翼以從善之
012_0216_a_03L遂相與矢心以重復爲己任果有
012_0216_a_04L僧元俊從後響應而至乃成法堂也
012_0216_a_05L至其堂寮樓閣之屬亦有同志之軰所
012_0216_a_06L戮力也及乎崇禎之壬辰嵬然堂宇
012_0216_a_07L盡爲劫火之焚燬亦見林巒失色雲澗
012_0216_a_08L含悲有天學惠彥兩大德愈爲之痛
012_0216_a_09L謂之衆曰前人之功已歸於虛與其
012_0216_a_10L撫膺而聽白馬之悲嘶曷若拊掌而觀
012_0216_a_11L赤烏之祥集卽與處文曇湜楚英信梅
012_0216_a_12L處湖一淸處悅曇惠卓均曇性大彥克信
012_0216_a_13L大玄等十二開士協謀致力遂使佛殿
012_0216_a_14L之壯僧廬之盛有竦於後觀而湖演
012_0216_a_15L上人斷礱雲根以築鴈齒之層砌也
012_0216_a_16L議者又曰寺之舊制迫於東岑虛其
012_0216_a_17L西𡼂若人之折一臂而且僧多屋窄
012_0216_a_18L宜於西增開寮舍以愜地靈有性俊文
012_0216_a_19L學天學曇湜卓澄等卽鏟西𡼂加拓明
012_0216_a_20L月淸風對月彌陁四舍及大藏殿於是
012_0216_a_21L方爲具體也僧大冾造四天王像
012_0216_a_22L以安於門使飛薨峻宇叅差嵬煥於湖
012_0216_a_23L山之外有隔江而望之者爭指爲蓮花
012_0216_a_24L淨土也予取慈雨海眼之蹟而觀之

012_0216_b_01L덕성·혜언이 앞장서고 천학·담식 등 여러 스님들이 뒤를 이어 비록 지금 다시 복구하였으나 절이 오래되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무릇 당나라 때 혜운이 지었고 송나라 때 해안이 중건했으며 명나라 때 덕성 등이 복구하였다. 그 절의 폐함도 당·송·명 3대와 시종始終이 같으니 해안·혜언 등의 공력이 대체로 임진란을 맞아 사라지고 자우의 자취 또한 임진란으로 매몰된 것으로 여겨지며, 천학 등의 공력이 임진란으로 위협받아 또한 없어진 것을 본다. 그러한즉 대개 절은 분성盆城60)의 동쪽에 있는데, 분성은 수로왕의 유허지이며 감로사는 자우 대사가 머물던 옛터이다. 수로는 신성한 자질로 나라를 세운 임금이며, 자우는 용상龍象61) 가운데 표상으로 개산조가 되어 천년의 훗날까지 높은 풍도와 성대한 공렬이 나란히 빛난다. 분성의 기적과 감로사의 신령스러운 향기는 사라지지 않고 이미 국사와 지리지에 씌어 있으니, 남쪽 지역에서 크고 이름난 절이 된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 건물의 기세를 본즉 뒤로 어산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낙동강을 굽어보는데, 어산의 근원은 두류산에서부터 진주와 함양 등 대여섯 고을 사이를 구불구불 내려와 여기에 이르러 감돌아 후전이 되었다. 낙동강의 원류는 태백을 따라 상성商星 등의 마을 800리 밖으로 거침없이 흐르다 이곳에 흘러들어 웅덩이를 이뤘으니, 앞에서 전금前襟62)을 잡아당기니 그 산하의 아름다움을 누가 더 보태리오. 그러므로 동서의 사대부와 선비들이 이 절을 지날 때는 반드시 손뼉 치면서 “비록 동정호의 금산사와 금릉의 감로사라 할지라도 이곳보다 아름답지 않다.”라고 하였다.
전에 삼남의 총섭摠攝이었던 성준性俊 스님은 절이 오래되었으나 볼 만한 사적이 없음을 개탄하면서, 그 전후 사정을 기록하고

012_0216_b_01L前之德性惠彥後之天學曇湜等諸公
012_0216_b_02L雖在於今而復之寺之爲古也審矣
012_0216_b_03L夫惠雲之創在於唐海眼之緝在於宋
012_0216_b_04L德性等復在於明其與廢者與唐宋明
012_0216_b_05L三代相終始而其海眼惠彥等功皆遇
012_0216_b_06L壬辰而敗則慈雨之跡亦想以壬辰而
012_0216_b_07L天學等功將恐以壬辰且見其亡
012_0216_b_08L然則物之理天之數恠且休也
012_0216_b_09L寺在盆城之東𡼂盆城乃首露之遺墟
012_0216_b_10L甘露卽慈雨之舊址也首露以神聖之
012_0216_b_11L爲創國之君慈雨以龍象之表
012_0216_b_12L開山之主於千載之下其高風盛烈
012_0216_b_13L炳然相並以不泯其盆城之奇跡甘露
012_0216_b_14L之靈芬已載於國史及輿經則爲南國
012_0216_b_15L巨鎭名刹者宜矣且觀其宅勢則背倚
012_0216_b_16L魚岑面俯洛流魚之根自頭流逶迤
012_0216_b_17L於晋咸等五六州之間而抵於此盤紆
012_0216_b_18L而爲後殿洛之源從大白而奔放於商
012_0216_b_19L星等府八百里之外而注於是匯瀦而
012_0216_b_20L爲前襟其山河之美孰有加於此哉
012_0216_b_21L故東西搢紳之行過是寺者必抵掌曰
012_0216_b_22L雖洞庭之金山金陵之甘露亦不足以
012_0216_b_23L爲多於此也有前三南㧾攝釋性俊
012_0216_b_24L寺古而無蹟可眎來者錄其前後創復

012_0216_c_01L사람들의 이름과 시기를 복원하였다. 또한 행훈行熏 대덕에게 명하여 돌을 세워 기록하도록 하니 나에게 명을 청하였다. 나는 이를 사양하면서 “명문銘文과 뇌문誄文은 문장이 높은 거장들이 쓰는 것인데 어찌 별 볼일 없는 늙은 중에게 마땅한 일이겠소.”라고 하였으나, 성준 스님의 청이 완강하여 부득이하게 잠깐 만에 서序를 지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於赫覺皇獨步大方       위대한 부처님 대방大方63) 사이를 홀로 걸으며
顯于西土世周昭王       서쪽 땅에 나타나시니 주소왕周昭王 때라
高揭慧日遠燭東鄕       높이 지혜의 해가 걸리고 멀리 동방에 촛불이 밝혀졌네
慈雲廣布法雨霈滂       자비의 구름 넓게 덮이고 법의 비가 흡족히 내리니
其道甚大如海汪洋       그 도는 지극히 커서 넓은 바다와 같네
渡人彼岸建大法檣       피안에 사람들 건네 줄 법의 돛대 크게 세우고
金身帝夢白馬龍驤       금빛 부처 황제 꿈에 보이고 백마가 용처럼 날아와
聲敎遠達屆于漢邦       부처의 가르침 멀리서 한나라에 이르렀고
曆魏曁晋閱隋而唐       위魏와 진晋을 거쳐 수隋와 당唐에 들어가
道德風楊天下濫觴       도와 덕이 버들에 바람 불듯 천하에 처음 나타나니
洞徹塵劫日月爭光       무한히 깨우치고 일월日月 다투어 빛나네
有孫達摩得法玄綱       달마라는 후손 있어 법을 얻고 진리를 통달하니
高佩祖印一葦游梁       고상한 조사의 인장을 차고 외딴 배로 양梁나라에 가
栖遲小室九載倘佯       작은 방에서 고요히 9년을 머물렀네
一花五葉久而乃昌       한 송이 꽃, 오엽五葉64)이 오래되어 곱게 피니
有彼白兆妙旨承張       저 백조산白兆山 지원志圓 선사의 오묘한 가르침 이어지고
曰子惠雲毓于扶桑       제자인 혜운惠雲 선사 동방에서 와서
就飽禪悅游道康莊       맘껏 선리를 깨닫고 굳건한 도에서 노닐었네
還于日下羅王拜床       일하日下65)로 돌아오니 신라 왕이 상 아래로 절했지

012_0216_c_01L之人名字及歲月且命行熏大德而樹
012_0216_c_02L石以其錄請銘於予予讓之曰銘誄
012_0216_c_03L必籍文章鉅公之手豈縷褐老宿之所
012_0216_c_04L宜也俊公之請彌堅不護已姑爲之
012_0216_c_05L乃爲銘曰

012_0216_c_06L於赫覺皇獨步大方

012_0216_c_07L顯于西土世周昭王

012_0216_c_08L高揭慧日遠燭東鄕

012_0216_c_09L慈雲廣布法雨霈滂

012_0216_c_10L其道甚大如海汪洋

012_0216_c_11L渡人彼岸建大法檣

012_0216_c_12L金身帝夢白馬龍驤

012_0216_c_13L聲敎遠達屆于漢邦

012_0216_c_14L曆魏曁晋閱隋而唐

012_0216_c_15L道德風楊天下濫觴

012_0216_c_16L洞徹塵劫日月爭光

012_0216_c_17L有孫達摩得法玄綱

012_0216_c_18L高佩祖印一▼(竹/韋)游梁

012_0216_c_19L栖遲小室九載倘佯

012_0216_c_20L一花五葉久而乃昌

012_0216_c_21L有彼白兆妙旨承張

012_0216_c_22L曰子惠雲毓于扶桑

012_0216_c_23L就飽禪悅游道康莊

012_0216_c_24L還于日下羅王拜床

012_0217_a_01L鳳儀旣擧爲瑞爲祥       위인의 모습 널리 알려지니 경사롭고 상서로웠네
鳥逝南邁創此道場       새와 같이 빠르게 내달려 이 도량을 세웠지
年深院度道存人亡       세월 가며 절의 기틀 다져졌는데 도만 남고 사람 없자
海安踵武緝以重莊       해안海安 스님 뒤를 이어 웅장하게 중창했지
照曜湖山乃殿乃堂       빛나는 강산 속의 전각과 당우들
逮于丁壬斑寇陸梁       임진년·정유년에 이르러 이 땅에서 왜구들 날뛰어
金田被毒賊灰飄揚       절들은 해악을 입어 재 가루만 날렸네
山悲泉咽鶴㤪猱傷       산천은 슬피 흐느끼고 학과 원숭이도 원망하고 근심하는데
德性惠彥換彼卽唐       덕성德性과 혜언惠彥 스님 폐허를 바꿔 넓혔으니
熒熒香火祝釐無疆       향화 올리는 전통 빛나고 복을 비는 일 무궁하리
歲周黑龍劫燼流煌       흑룡 해가 되니 타고 남는 재는 말끔히 걷히고
有學有湜業乃重匡       천학天學과 담식曇湜 스님 중창에 힘을 다했지
有緣斯會衆翼翺翔       이곳에 인연 있어 뭇 새들이 날아드는데
覘勢東岫更添西廂       동쪽의 산세를 살펴 서쪽에 곁집을 붙였네
復舊拓新馳彩雲岡       옛집을 되살리고 새롭게 하여 산기슭을 아름답게 꾸몄네
潭潭梵宇大廡脩廊       맑고 깨끗한 절집, 크고도 긴 원랑들
日暎花磚雲濃粉墻       해는 꽃 벽돌을 비추고 구름 그림자 흰 벽에 어려 있네
原厥宅勢象設寶坊       가운데 건물은 기세를 갖추었고 불상은 보배 집에 있네
若木東秀駕洛西望       동쪽으로 칠곡이 우뚝하고 서쪽으로 멀리 가야가 보이네
皇皇首露來自帝旁       위대한 수로왕이 상제의 곁에서
臨乎民極手握天章       백성의 중도에 임하여 손에는 하늘 문장을 쥐었네
神蹤異跡永世流芳       신비하고 기이한 자취 오래도록 전해지니
魚岳蒼蒼洛水湯湯       신어산神魚山은 푸르고 낙동강은 양양하네
國師之風水遠山長       국사國師의 풍모 물과 산같이 영원하리니

012_0217_a_01L鳳儀旣擧爲瑞爲祥

012_0217_a_02L鳥逝南邁創此道場

012_0217_a_03L年深院度道存人亡

012_0217_a_04L海安踵武緝以重莊

012_0217_a_05L照曜湖山乃殿乃堂

012_0217_a_06L逮于丁壬斑寇陸梁

012_0217_a_07L金田被毒賊灰飄揚

012_0217_a_08L山悲泉咽鶴㤪猱傷

012_0217_a_09L德性惠彥換彼卽唐

012_0217_a_10L熒熒香火祝釐無疆

012_0217_a_11L歲周黑龍劫燼流煌

012_0217_a_12L有學有湜業乃重匡

012_0217_a_13L有緣斯會衆翼翺翔

012_0217_a_14L覘勢東岫更添西廂

012_0217_a_15L復舊拓新馳彩雲岡

012_0217_a_16L潭潭梵宇大廡脩廊

012_0217_a_17L日暎花磚雲濃粉墻

012_0217_a_18L原厥宅勢象設寶坊

012_0217_a_19L若木東秀駕洛西望

012_0217_a_20L皇皇首露來自帝旁

012_0217_a_21L臨乎民極手握天章

012_0217_a_22L神蹤異跡永世流芳

012_0217_a_23L魚岳蒼蒼洛水湯湯

012_0217_a_24L國師之風水遠山長

012_0217_b_01L鐫辭載石巋然千霜       돌에 사연을 새겼으니 우뚝하니 천년을 가리라
보조국사가 심은 은행나무에 비를 세우다(築普照國師手植銀杏樹碣)
적천사는 보조국사가 지은 것이다. 국사는 대송 영종 경원년에 이 절을 지었으나 기록이 없고, 사지에는 오직 손수 이 나무를 심었다는 것만 썼으니 이로써 천만세 자취를 밝히려 하였다. 이것은 세존과 견줄 수 있는 것이니 보리수를 가리켜 성도의 장소를 표시하는 것과 완연히 같은 일이 아닌가. 또한 달마 대사가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요지를 말하는 것과 합치되는 일이 아닌가. 이는 순서에 따른 국사의 자취와 창사의 사건에까지 부합된다. 비치된 사적에 이르기를 “도인인 혜철이 광주에서부터 유력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이 나무를 보고 ‘아, 이 나무는 보조국사가 손수 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이 말이 사중에게 전해지니 돌이 쌓여 축대가 만들어지고 흙이 모아져 봉토가 이루어졌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한 자의 비석돌을 만들고 나에게 와서 고하니, 내 도인의 정성에 감동되어 명銘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堂堂國師聖師子兒       당당하신 국사님은 성사聖師의 아들이시니
嗣法延壽道震華夷       연수延壽 연간에 법을 잇고 중국까지 도를 떨쳐
千乘屈節天子卑辭       제후도 굴복시키고 천자도 사양케 했네
重興佛日法海無涯       거듭해서 부처의 가르침 일으키니 법해法海가 끝이 없고
建寺于此樹植于玆       이곳에 절을 짓고 나무를 심어
表忘言旨千載爲奇       말없이 뜻을 드러내니 천년의 기이함일세
有僧惠哲遡仰眞慈       혜철惠哲 스님은 예부터 진실된 자애로 숭앙되었지
以土以石環築其枝       흙과 돌로 둥글게 이곳저곳 쌓고
踵予徵語應以濫吹       전해 준 가르침 따랐으나 응하기엔 부족했네
葱葱嘉木覺樹菩提       무성하게 잘 뻗은 보리수나무

012_0217_b_01L鐫辭載石巋然千霜

012_0217_b_02L

012_0217_b_03L築普照國師手植銀杏樹碣

012_0217_b_04L
磧川寺乃普照國師之所創也國師於
012_0217_b_05L大宋寧宗慶元年創是寺而不用文字
012_0217_b_06L以誌其事惟以手植此樹以表千萬世
012_0217_b_07L之遺蹤此可與世尊指菩提樹表爲
012_0217_b_08L成道之場宛同事蹟亦非契於達麽不
012_0217_b_09L立文字之旨耶及其國師時順間之跡
012_0217_b_10L與寺創建之事備在寺蹟中云有道人
012_0217_b_11L惠哲自廣州遊歷而至見此樹曰
012_0217_b_12L樹乃普照手自植者也卽吿諸寺衆
012_0217_b_13L石以築之輦土以封之遂斷尺碣
012_0217_b_14L吿于予予感道人之誠以爲銘云

012_0217_b_15L堂堂國師聖師子兒

012_0217_b_16L嗣法延壽道震華夷

012_0217_b_17L千乘屈節天子卑辭

012_0217_b_18L重興佛日法海無涯

012_0217_b_19L建寺于此樹植于玆

012_0217_b_20L表忘言旨千載爲奇

012_0217_b_21L有僧惠哲遡仰眞慈

012_0217_b_22L以土以石環築其枝

012_0217_b_23L踵予徵語應以濫吹

012_0217_b_24L葱葱嘉木覺樹菩提

012_0217_c_01L爲祥爲瑞大千陰垂       상서롭게 대천세계에 그늘을 드리웠는데
以諍來目樹此短碑       후인에게 알려 주고파 이 작은 비석 세우네
유명 조선국 냉산 도리사 아도 화상 비명 병서(有明朝鮮國冷山桃李寺故阿度和尙碑銘并序)
법계에는 크고 원만한 바다가 있는데 밑은 일곱 개의 금강으로 되어 있으며 언덕은 네 개의 열반으로 되어 있고 백천 개의 부당왕찰浮幢王刹66)이 섬을 이루고 하나의 태극이 그 기운을 이루고 끝이 없는 인간계와 천계가 어류가 된다. 일렁이는 겁파劫波와 가득한 항하사 모래가 허공계에 가득하다. 비람풍(嵐風)도 움직일 수 없고 겁화劫火도 태울 수 없으며 재앙의 물이 들이칠 수 없으니, 아득하여 그 끝을 볼 수 없도다. 삼라만상이 그 안에 비추어지니 신룡의 집이며, 숱한 보배를 간직한 곳이로다. 고금의 뭇 성인 가운데 누가 능히 그 근원을 보았겠는가.위의 모든 것은 성해性海를 형용한 것이다.
옛날 주周 소왕昭王 때에 한 도사導師가 있었는데 ‘대각’이라 불렸다. 사바 세계에서 대운을 만나 서방의 땅에서 신의 모습으로 내려와 큰 원력을 가지고 바닥이 없는 배를 타고 자비를 상앗대로 삼고 방편을 돛으로 삼아 지혜의 바람을 따라서 마침내 이 바다에 들어왔다. 큰 가르침의 그물을 펼쳐 사람과 하늘의 물고기를 깨워 저 언덕으로 데려다 놓았고, 중천축국의 가운데로 그 물줄기가 거의 천 년간 흐른 것이 총령葱嶺 사막으로 넘쳐 나 한漢나라로 흘러간 뒤, 진晋·위魏·제齊·양梁·수隨·진陳 나라를 거치며 천하를 흡족하게 적시고 물결이 동쪽에 미쳐 마침내 동이를 안고 표주박을 쓰는 무리와 뗏목을 타고서 길을 잃은 무리로 하여금 비로소 망양지탄望洋之歎67)을 터뜨리게 하였다. 그 사이에 곤鯤과 고래가 진노하는 충만(沖融)한 가운데 붕鵬과 물수리가 높이 나는 아득한 바깥으로 유유자적하게 높이 날아 세 층의 풍도風濤를 매어 놓고

012_0217_c_01L爲祥爲瑞大千陰垂

012_0217_c_02L以諍來目樹此短碑

012_0217_c_03L

012_0217_c_04L有明朝鮮國冷山桃李寺故阿度和
012_0217_c_05L尙碑銘并序

012_0217_c_06L
夫法界有大圓滿海以七金剛爲其底
012_0217_c_07L四湼槃爲其岸以百千浮幢王爲島嶼
012_0217_c_08L一太極爲其氣以無盡人天爲魚蝦
012_0217_c_09L洋劫波彌滿恒沙滔滔乎盡虛空界
012_0217_c_10L嵐風不能動劫火不能焦災水不能浸
012_0217_c_11L淼淼乎不見其涯㵀萬像森羅影印其
012_0217_c_12L而神龍之爲宅衆寶之所藏焉
012_0217_c_13L今凡聖之流其孰能窺淵源哉上皆形容
性海也

012_0217_c_14L昔在周昭之世有一導師號曰大覺
012_0217_c_15L屆大運於娑婆降神姿於西土承大願
012_0217_c_16L駕無底船以慈悲爲篙以方便爲
012_0217_c_17L隨智慧風遂入此海張大敎網
012_0217_c_18L人天魚置於彼岸而畎其流於中天笁
012_0217_c_19L之中者幾乎千齡而濫于葱沙溢於漢
012_0217_c_20L流歷於晋魏齊梁隋陳之間沛然天
012_0217_c_21L波及東隅遂使抱瓮酌瓢之徒
012_0217_c_22L筏迷津之輩殆興望洋之歎也而間有
012_0217_c_23L鯤鯨奮振乎冲融之間鵬鶚翺翔乎浩
012_0217_c_24L渺之表優游遐擧繫三級之風濤

012_0218_a_01L백 가지 골짝의 깊은 곳에 이른 이가 곧 아도阿度 화상이다.
스님의 법명은 아도이며 속성은 아阿씨요 고구려 사람이다. 아버지 굴마屈摩는 위나라 사람으로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 고구려 왕이 집안 여자인 고도령에게 장가가게 하여 아도 화상을 임신하게 되었다. 태어날 저녁이 되자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차고 상서로운 빛이 집을 관통했다. 태어나면서 신이하여 골격이 남달랐다. 여섯 살이 되자 학문을 구하였으며 겨우 열 살에 벌써 구류九流68)가 좁다고 여겼다. 열여섯 살이 되자 갑자기 어머니를 떠나 바다를 건너 위나라로 들어가 아버지를 뵙고 출가하기를 청하였다. 아버지는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문제文帝가 이를 알고 그를 불러 영준한 자질과 탈속함을 보고는 아비로 하여금 출가시키게 하였으니, 아도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현창玄暢 법사를 뵙도록 시켰다. 현창 법사가 그를 보더니 탄식하면서 “그대는 보살로서 불교를 동쪽으로 흘러가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승방에 들어가기를 허락하고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힌 후 구족계를 주었다. 스님의 지혜로운 말솜씨는 타고났으며 선관禪觀이 쉽게 통하였으니 드넓은 대도에 나아가는 것이 천리마가 평탄한 길을 달리는 것 같았다. 현창 법사가 현기玄機로서 시험해 본즉 화살촉이 서로 부딪는 것 같아 서로 합치하지 않는 데가 없었으니 깊은 뜻을 꿰뚫었다. 현창 법사의 제자가 비록 수만 명이었으나 스님이 상족을 차지하였다. 스님은 이미 현창 법사의 법인을 차게 되었는데 동쪽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현창 법사가 “동방은 비록 작지만 준걸한 기틀을 가진 이가 점차 늘어나고 있으나 특별히 불교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는 지금 물줄기를 돌려 해외의 메마른 백성을 무궁하게 적셔 주도록 한다면 그것이 널리 구제하는 공덕이니 어찌 사소한 일인가. 그대는 모름지기 노력하여 단절되지 않게 하라.”라고 하였다.
스님은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와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어머니 고씨 또한 기이한 사람으로 스님이 불도를 전해 올 것을 알고 있었는데, 기뻐하면서도 다짐하면서 말하길 “도가 행해지는 것은 때가 있으니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 3천여 달즉 110년 이후에

012_0218_a_01L百谷之奧域者卽我和尙其人也師法
012_0218_a_02L諱阿度俗姓阿氏句高麗人也父屈
012_0218_a_03L曺魏人奉使于句高麗句麗王以
012_0218_a_04L族女高氏道寧尙之娠師焉將誕之
012_0218_a_05L異香滿室祥光貫屋生而神異
012_0218_a_06L骨非常而年甫六歲乃求學甫十歲
012_0218_a_07L已有隘九流之志至十六歲遽辭母
012_0218_a_08L航海入魏謁其父求出家父異之
012_0218_a_09L聞于文帝帝召見其英姿脫俗以其
012_0218_a_10L父度之卽賜阿度之名使謁玄暢法
012_0218_a_11L暢見而歎曰此菩薩人也佛敎
012_0218_a_12L東行之漸也卽容入室仍削染輙授
012_0218_a_13L具戒師慧辯天縱禪觀易豁至於大
012_0218_a_14L道之康莊其造之如驥騏之走坦途也
012_0218_a_15L暢以玄機試之則箭鋒相柱無不契投
012_0218_a_16L針之密旨暢之徒雖數萬而師居其上
012_0218_a_17L足焉師旣佩玄暢法印辭欲東還
012_0218_a_18L東方雖小俊機稍多而特佛敎尙
012_0218_a_19L未流入爾今畎流而去使海外槁氓
012_0218_a_20L永得蒙潤於萬世之無窮則其爲普濟
012_0218_a_21L之功豈曰淺淺哉爾須努力無令斷
012_0218_a_22L師稽首而還省其母母高氏亦異
012_0218_a_23L人也知師佩道以來喜而誌之曰
012_0218_a_24L之行時乎不可急爾後三千餘月卽一
百十

012_0218_b_01L계림에 성왕이 나타나 불교가 크게 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어머니의 말에 때가 이르지 않음을 알고는 곧 속진에 섞여 살다가 신라 일선군 모례毛禮 장자의 집에 가 머물렀다.
이에 앞서 승려인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모례의 집에 이르자 모례가 굴을 만들어 그를 머물러 있게 하여 스님을 돌보아 주었으니 때는 눌지왕 시절이었다. 법흥왕 15년에 왕이 스님의 도예道譽를 듣고 사신을 보내 궁 안으로 맞아들여 예로서 공경하며 불교를 흥성시키려 하였다. 근신近臣 이차돈異次頓은 그 계획을 찬성했으나, 나머지 신하들은 그를 미워하며 은밀히 일을 꾸며 그를 죽였다. 왕이 안타까워하면서 “이차돈이 과인을 찬성하여 죽음을 자초했으니 과인은 이를 통탄스럽게 여기며 이후 이같이 의론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왕은 스님을 무상사無上師로 삼아 수만 사람을 승려가 되게 하였으며, 뭇 대중의 스승으로 위촉하였다. 바야흐로 겨울철인데 푸른 칡이 여러 덩굴로 뻗어 화상의 굴로 들어갔다. 스님이 덩굴을 따라 이르니 냉산冷山 속에 오색 복숭아, 오얏 나무 두 그루가 눈 속에서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스님이 눈을 치우고 절집을 지었으니 법흥왕이 대단월이 되었으며 스님의 도덕의 감화를 생각하여 ‘도리桃李’로 편액을 삼았다. 절 동쪽에 있는 바위가 상탑床榻과 같아 스님이 그 위에서 크게 무외의 선정에 들어갔다. 혹 비바람이 불고 캄캄한 밤에도 두려운 마음을 가진 적이 없어 사람들이 ‘무외 화상無畏和尙’으로 칭하였다. 왕이 스님이 있는 곳이 멀다고 여겨 성 밖에 대흥륜사大興輪寺를 짓고 머무르기를 청하였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 왕이 바야흐로 스님의 교화에 갈증이 나고 더욱 공경함이 두터워져서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며, 또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고 크게 탑묘塔廟를 높이 세웠다.
진흥왕 5년 갑자년에 이르러 나라 안에 조서를 내려서 불교를 크게 흥성시킬 방도를 밝히고 마침내 큰 절 일곱 개를 지었으니

012_0218_b_01L
雞林有聖王出大興佛敎也師禀
012_0218_b_02L母誌知時未至卽混跡同塵至新羅
012_0218_b_03L一善郡毛禮長者家止之先是有沙門
012_0218_b_04L墨胡子者自句高麗至毛禮家禮爲
012_0218_b_05L作窟室以留之至是禮又以此室留
012_0218_b_06L師而奉之卽訥祗王時也至法興王十
012_0218_b_07L五年王聞師之道譽遣使迎入掖內
012_0218_b_08L勤加禮敬欲興佛敎近臣異次頓
012_0218_b_09L其計群臣嫉之陰以別事構殺之
012_0218_b_10L悔之曰頓以賛寡人計死矣寡人痛之
012_0218_b_11L以後如有敢議者斬之乃拜師爲無上
012_0218_b_12L度數萬人爲僧尼囑爲師之徒衆
012_0218_b_13L方冬月有蒼葛數蔓入師之窟
012_0218_b_14L扳蔓而至冷山中有五色桃李兩株
012_0218_b_15L開花於雪中師掃雪擬創梵宇法興王
012_0218_b_16L爲大檀越以爲師道德之感以桃李扁
012_0218_b_17L寺之東有石如床榻師於其上
012_0218_b_18L大無畏定或當風雨晦㝠之夜未嘗有
012_0218_b_19L怖畏之心人稱爲無畏和尙也王以師
012_0218_b_20L居之遠爲創大興輪寺於城外請留住
012_0218_b_21L至眞興王朝王鼎渴師之道化
012_0218_b_22L尤加敬重執摳衣之禮又度人不止
012_0218_b_23L大崇塔廟至五年甲子下詔國中
012_0218_b_24L其大興佛敎之旨遂創大伽藍七曰永

012_0218_c_01L영흥永興·분황芬皇·영묘靈妙·천왕天王·담엄曇嚴·법수法水·법주法住를 말하는 것이다. 이후 온 성내의 사녀士女와 공경대부 등이 각자 큰 원을 세우고 경쟁하듯 집안의 재물을 내놓고 다투어 절을 높이 세웠다. 마침내 3천 비보裨補(사찰)와 500개의 발원처가 교외 언덕과 성안 시장 사이에 바둑알처럼 흩어져 있고 백성들 사는 곳에도 절들이 연이어 있었으니, 동방의 불법은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크게 행해졌다. 어머니 고씨의 말은 이에 이르러 증험이 있었다. 왕은 말년에 머리를 깎고 스스로 법운자法雲子라 하고서 백성을 다스렸다. 스님이 처지가 어렵게 되자 크게 사자후師子吼의 일성을 터뜨리고는 몸을 숨기고 영원히 떠나갔다. 이때에 땅이 솟구치고 산이 흔들리면서 흰빛이 땅을 꿰뚫었으며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천지가 이와 같이 감동을 받았는데 하물며 왕·신하·선비·서민들은 어떠했겠는가. 아아, 해가 깊어지고 사적이 멀어지자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은 사라졌다.
스님의 자취가 내려와 태어나던 날과 중생을 교화하고 적막으로 돌아가게 된 때는 분명하지 않아, 상세히 상고하기 어렵다. 대개 화상은 위魏나라 정시正始69) 연간에 태어나 당나라 정관貞觀70) 연간에 세상을 떴으니 그 시간을 따져 보면 스님의 연세는 280여 세가 된다. 대개 지인은 세상에 내려와 대도를 천만세 오래도록 만들어 전하는 것이니, 어찌 짧은 수명과 범인의 능력이겠는가. 지금 도리사의 여러 석덕들은 2천 년의 제사를 이어오면서 스님의 도덕비를 세우고자 하여 상인 1인을 뽑았는데 그가 발 부르트도록 달려와 나에게 뇌문誄文을 청하였다. 나는 여러 승려들의 스님을 향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삼가 동국의 사서와 스님의 행장을 살펴 시종을 엮었으니, 명銘은 이러하다.

廣大刹內性海汪洋       넓고 큰 찰토刹土 안에는 바다 같은 마음 넘실거리고
其岸浮幢其底金剛       언덕은 부당왕찰浮幢王刹이요 그 밑에는 금강金剛이라

012_0218_c_01L曰芬皇曰靈妙曰天王曰曇嚴
012_0218_c_02L曰法水曰法住而後傾城士女及卿大
012_0218_c_03L夫等各發大願競捐家貲爭崇佛刹
012_0218_c_04L遂使三千裨補五百祝釐之所棊布霧
012_0218_c_05L列於郊原城市之間而梵宇之簷連於
012_0218_c_06L閭閻之梋東方佛法之始自師而大行
012_0218_c_07L高氏之誌至此乃驗也王晩歲剃
012_0218_c_08L自號法雲子以治政焉師化緣將
012_0218_c_09L作大師子吼一聲而遂隱身永逝
012_0218_c_10L于時地湧山搖白光貫地大星殞天云
012_0218_c_11L天地之感如斯而况君臣士庶乎嗚呼
012_0218_c_12L年深事遠代異人亡及乎師降跡出胎
012_0218_c_13L之時日化衆歸寂之歲紀㛪婀而不可
012_0218_c_14L細考也盖師生於魏正始之間滅於唐
012_0218_c_15L貞觀之中取其間曆數而計之則師之
012_0218_c_16L春秋有二百八十餘歲矣盖至人降世
012_0218_c_17L以大道創傳於千萬世之悠遠則豈小
012_0218_c_18L壽凡骨之所能哉今桃李寺諸德緬嚮
012_0218_c_19L師於二千年之下欲樹師道德之碑
012_0218_c_20L選上人一人繭足而請誄於余余嘉其
012_0218_c_21L諸德嚮師之恳謹按東史及師之行狀

012_0218_c_22L捃編始終因獻銘曰

012_0218_c_23L
廣大刹內性海汪洋

012_0218_c_24L其岸浮幢其底金剛

012_0219_a_01L金波匝匝智月汪汪       겹겹의 금빛 물결 넓고 넓은 지혜의 달
遍滿空界容含十方       두루 허공의 세계에 채우고 시방 세계 담았네
滔滔湛湛不見其傍       넓고도 맑아서 흐릿하지 않고
森羅普現萬像齊彰       펼쳐져 두루 보이고 온갖 형상 뚜렷하네
群靈所宅衆寶所藏       여러 신령들 머물고 보배들 간수했으니
六道四生孰窺其央       육도의 사생四生들 누가 그 속을 보았나
昔有導師其號覺皇       옛적 스승 있어 각황이라 불렀으니
把慈悲篙建方便檣       자비의 상앗대를 쥐고 방편의 돛대를 세웠지
乘智惠風駕無底航       지혜의 바람을 타고 바닥 없는 배에 올라
入此大海大敎網張       큰 바다에 들어가 큰 가르침의 그물 펼치네
摝人天魚置于覺塲       사람·하늘의 물고기를 깨우쳐 깨달음 터에 있게 하고
畎道西流東入漢梁       서쪽에서 흐르던 도의 물길이 동으로 한漢·양梁에 들어갔네
濫觴天下波及海邦       천하에 흘러넘쳐 물결이 동쪽 나라에 이르니
抱甕者歎失津者倀       동이를 안은 자는 탄식하고 길 잃은 자 넘어졌네
流支東陟日照西光       물줄기는 갈라져 동쪽으로 넘고 해는 서쪽에서 빛나고
心田樹德海岸垂芳       마음 밭에는 덕이 자라고 해안에는 향기가 드리웠네
梵偈遐傳法㷎遼煌       범게梵偈71)는 먼 데 전해지고 법의 은혜 멀리 빛나는데
群賢隱顯衆聖低昂       숨었다 드러나는 현자들 오가는 성인들
鯨鼇游泳鵬鶚翺翔       헤엄치는 고래·자라, 하늘 나는 붕새·물수리
粤有大士降跡日鄕       아, 대사가 동방에 강림하여
乘盃渡魏獨駕高浪       배 타고 위魏에 가는 길 홀로 높은 물결에 몸 맡기고
拜父謁帝遂蹈大方       부친에게 절하고 황제를 뵙고는 대가들을 찾았지
首詣玄暢便佩宗綱       먼저 현창玄暢 대사를 찾아 곧 종지를 전해 받고
奄還東土歛跡以藏       갑자기 동국으로 돌아와 자취를 감추었네

012_0219_a_01L金波匝匝智月汪汪

012_0219_a_02L遍滿空界容含十方

012_0219_a_03L滔滔湛湛不見其傍

012_0219_a_04L森羅普現萬像齊彰

012_0219_a_05L群靈所宅衆寶所藏

012_0219_a_06L六道四生孰窺其央

012_0219_a_07L昔有導師其號覺皇

012_0219_a_08L把慈悲篙建方便▼(扌+(墻-土))

012_0219_a_09L乘智惠風駕無底航

012_0219_a_10L入此大海大敎網張

012_0219_a_11L摝人天魚置于覺塲

012_0219_a_12L畎道西流東入漢梁

012_0219_a_13L濫觴天下波及海邦

012_0219_a_14L抱甕者歎失津者倀

012_0219_a_15L流支東陟日照西光

012_0219_a_16L心田樹德海岸垂芳

012_0219_a_17L梵偈遐傳法㷎遼煌

012_0219_a_18L群賢隱顯衆聖低昂

012_0219_a_19L鯨鼇游泳鵬鶚翺翔

012_0219_a_20L粤有大士降跡日鄕

012_0219_a_21L乘盃渡魏獨駕高浪

012_0219_a_22L拜父謁帝遂蹈大方

012_0219_a_23L首詣玄暢便佩宗綱

012_0219_a_24L奄還東土歛跡以藏

012_0219_b_01L肇興佛敎爰憑聖王       처음 불교를 일으켜 왕에 의지했으니
屈千乘尊師資道昌       천승千乘 지존을 굴복시키고 대사는 도의 창성을 도왔지
公卿趐佇士庶趨蹌       공경은 나아가 기다리고 사서士庶는 급히 달려오니
廣施法藥宜救膏肓       널리 법약法藥을 내려 의연히 병자를 구했네
慈雲廕庇法雨霈霶       자비의 구름으로 가득 덮고 법우法雨를 억수로 내려
淸凉火宅滴沃焦腸       화택火宅72)의 불을 끄고 마음의 근심을 식혔지
飡法喜食飮甘露漿       법희法喜73)의 밥을 먹고 감로의 장을 마시며
入無畏定晏坐石床       무외無畏74)의 선정에 들고 돌 책상에 앉았네
沈痾忽瘳其有精禳       깊은 병 홀연히 낫게 하는 것은 정성 들인 제사인데
王終剃髮道邁禹湯       끝내 삭발하는 왕의 도는 우탕禹湯75)에 앞서네
締構伽藍乃殿乃堂       절을 지으니 전각과 당우가 늘어서고
雄排川陸羅列城隍       웅장하게 시내와 언덕을 배치하고 성황당을 나열했네
煥然如翼蔚以相望       건물은 날개처럼 빛나며 아름답게 마주보는데
禪流滿室法寶盈箱       선승들은 방 안에 가득하고 법보는 상자에 넘치네
寔效蘇塗珠貝間莊       참으로 소도蘇塗76)를 이어받아 진주들 사이에 장중하고
像鐫琰琓經餙縑緗       불상은 옥으로 새기고 경전은 겸상縑緗77)으로 꾸몄네
福安社稷道構廟廊       복으로 사직을 편안케 하고 도로써 묘당을 지었으니
偉哉功德不可思商       위대하다 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도다
時移代久道存人亡       세월이 오래 되니 도는 남고 사람은 없어졌는데
美矣諸德緬欽千霜       아름답도다, 여러 스님들이여 천년 세월 오래도록 공경하네
恭序睿跡昧而未詳       밝은 자취 쓰려 해도 혼매하여 상세치 못하니
畧紀大槩永貽無彊       간략히 대략만을 기록하여 영원토록 전해질지어다
龜珉卓立地久天長       귀부 위에 우뚝 선 비석 천지와 함께 장구하기를 바라노라

012_0219_b_01L肇興佛敎爰憑聖王

012_0219_b_02L屈千乘尊師資道昌

012_0219_b_03L公卿趐佇士庶趨蹌

012_0219_b_04L廣施法藥宜救膏肓

012_0219_b_05L慈雲廕庇法雨霈霶

012_0219_b_06L淸凉火宅滴沃焦腸

012_0219_b_07L飡法喜食飮甘露漿

012_0219_b_08L入無畏定晏坐石床

012_0219_b_09L沈痾忽瘳其有精禳

012_0219_b_10L王終剃髮道邁禹湯

012_0219_b_11L締構伽藍乃殿乃堂

012_0219_b_12L雄排川陸羅列城隍

012_0219_b_13L煥然如翼蔚以相望

012_0219_b_14L禪流滿室法寶盈箱

012_0219_b_15L寔效蘇塗珠貝間莊

012_0219_b_16L像鐫琰琓經餙縑緗

012_0219_b_17L福安社稷道構廟廊

012_0219_b_18L偉哉功德不可思商

012_0219_b_19L時移代久道存人亡

012_0219_b_20L美矣諸德緬欽千霜

012_0219_b_21L恭序睿跡昧而未詳

012_0219_b_22L畧紀大槩永貽無彊

012_0219_b_23L龜珉卓立地久天長

012_0219_c_01L
  1. 1)총사蔥沙 : 파미르(Pamir) 고원 지역을 일컫는다. 총령葱嶺이라고도 한다.
  2. 2)양화楊花 : 조선 시대 삼진三鎭의 하나이다.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다.
  3. 3)사오로四五路 : 염라대왕이 망자의 집에 파견하는 저승사자인 사직사자四直使者와 오제五帝를 그린 탱화.
  4. 4)동해東海 : 일종의 다라니판으로, 한 장으로 만들어진 큰 경판을 말한다.
  5. 5)주소周召 : 주周는 주실周室의 기초를 다지고 예악과 제도를 마런한 주공周公을 말하며, 소召는 주공과 함께 주실을 세운 소공召公을 가리킨다.
  6. 6)초월楚越 : 초월지간楚越之間. 전국시대 초楚나라와 월越나라 사이처럼 서로 원수같이 지낸다는 뜻. 여기서는 불교를 억압한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
  7. 7)삼백三白 : 동지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술일戌日을 납일臘日이라고 하며, 이날 전에 세 번 눈이 내리는 것을 삼백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전해 납일 때부터 다음 해 납일 때까지 머물렀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8. 8)육시六時 : 불가佛家에서 1주야를 여섯으로 나눈 시각을 말하는데, 신조晨朝·일중日中·일몰日沒·초야初夜·중야中夜·후야後夜가 그것이다. 이때는 종을 울려서 각 시각을 알렸다.
  9. 9)마등摩騰 : 가섭마등迦葉摩騰을 말하며 축섭마등竺葉摩騰·섭마등攝摩騰이라고도 한다. 서인도에서 『金光明經』을 강설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중국 후한의 명제明帝가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승려 법란法蘭과 함께 채음蔡愔 등을 인도에 보냈을 때, 중앙아시아 대월지국大月氏國에서 가섭마등을 만났다. 그는 67년 불상과 경전을 백마에 싣고 낙양洛陽에 이르러 백마사白馬寺를 짓고 중국에 불법을 최초로 전파한 인도승으로 전해지고 있다.
  10. 10)법란法蘭 : 축법란竺法蘭을 말한다. 중인도 스님으로 67년(후한 영평 10) 가섭마등과 함께 중국의 낙양에 와서 『四十二章經』을 번역하였는데, 이는 중국 역경의 첫 사업이었다. 가섭마등이 죽은 뒤에는 특히 역경에 주력하였으며 『所佛本行經』 등 5부 13권을 번역하였다.
  11. 11)채음蔡愔 : 중국 후한의 명제明帝가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승려 법란法蘭과 함께 인도에 보낸 인물이다.
  12. 12)백장 대지百丈大智(749~814) : 법명은 회해懷海. 마조 도일馬祖道一(709~788)의 수제자로 선종禪宗 교단을 독립시키고, 자신의 문하에 훗날 위앙종潙仰宗의 시조가 된 위산 영우潙山靈祐와 황벽 희운黃檗希運을 배출시켰다. 마조 도일 → 백장 회해 → 황벽 희운(780?~850) → 임제 의현臨濟義玄(?~866)으로 이어지는 선맥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13. 13)지지地誌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7 「慶尙道」 ≺玄風縣≻.
  14. 14)사겁四劫 : 이 세계가 성립하여 파멸에 이르기까지의 네 기간. 지극히 긴 시간을 의미한다.
  15. 15)손공孫公 : 진晉나라의 손작孫綽을 말한다. 천태산天台山의 절승絶勝을 보고 지은 시가 있다.
  16. 16)백부白傅 : 만년에 태자소부太子少傅를 지냈던 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별칭이다. 그는 말년에 향산에 별장을 짓고 시회를 베풀며 지냈는데, 용문은 향산 근처에 있는 산을 말한다. 『新唐書』 권119 「白居易傳」.
  17. 17)금성金聲 : 진晉나라 때 문인 손작孫綽이 ≺天台山賦≻를 지어 놓고 자기 친구인 범영기范榮期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시험 삼아 이 부를 땅에 던져 보게나. 의당 금석 소리가 날 것일세.(卿試擲地。 當作金石聲。)”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시문 등이 뛰어남을 비유한다. 여기서 금성은 손작의 시문을 가리킨다.
  18. 18)월운月韻 : 백거이白居易가 ≺中秋≻, ≺十五夜≻ 등 달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은 것을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는 백거이의 시 작품을 일컫는다.
  19. 19)개사開士 : 원래는 보살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스님의 뜻으로 쓰였다.
  20. 20)봉성鳳城 : 구례의 옛 지명.
  21. 21)국일國一 선사 : 벽암 각성碧巖覺性을 말한다.
  22. 22)강주康州 : 진주의 옛 이름.
  23. 23)오탁五濁 : 세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을 말한다. 오재五滓 또는 오혼五渾이라고도 하며, 겁탁劫濁·견탁見濁·번뇌탁煩惱濁·중생탁衆生濁·명탁命濁이 이에 속한다.
  24. 24)정토업淨土業 : 극락 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 청정한 행업.
  25. 25)해좌사향亥坐巳向 : 해방亥方을 등지고 사방巳方을 바라보고 앉은 자리를 말하는데, 11시 방향을 등지고 앉아 5시 방향을 바라보는 자리라는 뜻이다.
  26. 26)잔강潺江 : 섬진강의 옛 이름.
  27. 27)반조返照 : 도가道家의 수련법修鍊法의 하나인 회광반조回光返照를 줄인 말이다
  28. 28)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한 깨달음. 조금도 결함이 없는 우주의 신령스러운 깨침을 이르는 말이다.
  29. 29)동철銅鐵 : 동산銅山에서 생산되는 동銅과 철鐵을 말한다. 한漢 문제文帝가 일찍이 촉蜀의 엄도동산嚴道銅山을 영신佞臣인 등통鄧通에게 주어서 돈을 주조하게 한 데서, 동산은 재물이나 재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30. 30)황하黃河 : 중국 서부에서 동북부로 흐르는 강.
  31. 31)흑수黑水 : 중국 동북 지역의 흑룡강黑龍江을 말한다.
  32. 32)지석砥石 : 전설상의 산 이름으로 이곳 요수遼水에서 지석이 생산된다고 한다.
  33. 33)반목蟠木 : 동해 속에 있다고 전하는 전설 속의 산. 부상扶桑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34. 34)미려尾閭 : 『莊子』 「秋水」에 나오는 말로, 해저의 큰 구멍을 일컫는다. 바닷물이 이 구멍을 통해 쉴 새 없이 빠져 나간다고 한다.
  35. 35)육서六瑞 : 법화육서法華六瑞의 준말로, 부처님이 『法華經』의 설법을 시작하기 전에 일어났던 상서로운 일을 말한다. 즉 설법서說法瑞·입정서入定瑞·우화서雨華瑞·지동서地動瑞·중희서衆喜瑞·방광서放光瑞의 여섯 가지가 그것이다. 설법서는 부처님께서 『無量義經』을 설해 마쳤어도 대중이 일어나지 아니함이요, 입정서는 부처님이 무량의 삼매에 드심이며, 우화서는 하늘에서 흰 연꽃, 붉은 연꽃의 꽃비가 내린 일이요, 지동서는 대지가 여섯 가지로 진동한 일이며, 중희서는 대중이 여러 가지 상서를 보고 큰 설법이 있을 것을 짐작하고 기뻐함이요, 방광서는 부처님의 미간 백호眉間白毫에서 광명을 놓아 동방 1만 8천 불국토佛國土를 비춘 것을 일컫는 것이다.
  36. 36)서원西原 : 통일신라 시대 오소경五小京의 하나. 685년(신문왕 5) 지금의 청주 지방에 서원 소경이라는 이름으로 설치한 행정 구역으로,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37. 37)원거鶢鶋 : 처지에 맞지 않게 과분하게 대접받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원거鶢鶋 새가 바람을 피해서 노魯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임금이 그 새에게 순舜임금의 소악韶樂을 연주하고 고기 요리로 대접했으나 오히려 근심과 슬픔으로 3일 만에 죽고 말았다고 한다. 『莊子』 「至樂」.
  38. 38)탁약橐籥 : 탁槖은 풀무의 바깥쪽이고, 약籥은 안쪽의 관管으로 움직이면서 바람을 일으킨다. 『道德經』 5장에 “천지의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비어 있으나 다하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 쏟아져 나온다.(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천지와 같은 말로 쓰였다.
  39. 39)금모지후金毛之吼 : 사자후獅子吼와 같은 말이다. 불가에서는 부처의 설법하는 소리를 사자獅子가 토하는 울음소리에 비유한다.
  40. 40)삼 척의 부리(三尺喙) : 육여경陸餘慶이 모든 일에 있어 말로는 잘하나 판결력이 부족하므로 사람들이 “말할 적에는 부리가 석 자나 길어지고 판결할 적에는 손이 닷 근이나 무겁다.(說事則喙長三尺。 判事則手重五斤。)”라고 조소하였다. 『唐書』 「陸餘慶傳」. 여기서는 말만 잘할 뿐 뛰어난 문장을 지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41. 41)오색호五色毫 : 오색필五色筆과 같은 말로, 문재文才를 말한다.
  42. 42)창록蒼鹿 : 『列仙傳』에 의하면, 함곡관령函谷關令 윤희尹喜가 함곡관 위에 자줏빛 서기가 서려 있는 것을 관측했는데, 이윽고 노자老子가 푸른 소를 타고 그곳을 지나가므로 그에게 부탁하여 『道德經』 5천 언言을 받았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푸른 소가 아니라 푸른 사슴을 탄 사람으로 설정하여 『道德經』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43. 43)유한劉漢 :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를 말한다.
  44. 44)금신金身 : 금으로 만든 불상으로, 금불이라 하기도 한다. 순금純金·금동金銅·도금鍍金으로 제작하므로 금신이라 칭한다.
  45. 45)신주神州 : 중국을 가리킨다. 전국시대 학자 추연鄒衍이 중국을 신주라고 한 이후 중국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46. 46)유절有截 : 『詩經』 “상토께서 열렬하시자 해외의 사방 제후들이 일제히 귀의하였다.(相土烈烈。 海外有截。)”에 보이는 말로, 구주九州·천하天下·해외海外 등을 지칭한다.
  47. 47)대방가大方家 : 식견識見이 넓고 사리事理에 밝은 사람. 대가大家를 가리킨다. 하백河伯이 자신이 관장하는 하수河水의 물이 불어나 자신만만했으나 북해北海의 물이 끝없이 펼쳐진 것을 보고는 “대방지가大方之家의 비웃음을 사겠다.”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48. 48)정법안장正法眼藏 : 선문禪門에서 바른 세계를 보는 방법. 즉 깨달음의 진실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데, 석존이 깨달은 무상의 정법正法을 가리킨다. 청정법안淸淨法眼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불이 삼처전심三處傳心으로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정법안장을 전하였다. 정법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이에게 함장되어 있는 진리의 내용이라는 뜻도 지닌다.
  49. 49)대구씨大龜氏 : 가섭迦葉을 가리키는데, 마하가섭摩訶迦葉·대음광大飮光으로도 번역한다.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 한 분으로 본래는 바라문으로 석존이 성도한 지 3년쯤 뒤에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는 제자 가운데서도 의식주를 극도로 검박하게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두타행頭陀行이 제일이었으며, 부처님의 의발衣鉢을 받은 상수제자上首弟子로서 부처님이 입멸한 뒤 500 아라한을 데리고 제1 결집第一結集을 하면서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부처님 이후의 법통法統을 말할 때에는 그가 초조初祖가 된다.
  50. 50)총령葱嶺 : 중국 신강성의 산맥으로 파미르 고원을 말한다.
  51. 51)신광씨神光氏 : 선종의 제2대 조사인 혜가慧可를 가리킨다. 달마達摩 대사가 중국에 최초로 선종을 창시한 이래 그 가르침은 혜가에게 전해진다. 신광은 혜가 대사의 법명으로, 그는 낙양 사람인데 어려서 노장학에 능통하였고 현리 찾기에 정진하다가 달마를 찾아 가르침을 청한 뒤 훗날 제2조사로서 인가를 얻는다.
  52. 52)오종五宗 : 선종禪宗이 분파된 것을 말한다. 초조初祖 달마達摩로부터 5조 홍인弘仁에 이르러 홍인의 밑에서 북종北宗 신수神秀와 남종南宗 혜능慧能의 두 파로 나뉘어졌다. 북종은 북지北地에 행하여 후세에 분파가 없고, 남종은 남지에서 행하여 오가五家·칠가七家의 구별이 있는데, 오가는 위앙종潙仰宗·임제종臨濟宗·조동종曹洞宗·운문종雲門宗·법안종法眼宗이요, 칠가는 이에 황룡黃龍과 양기楊岐를 더한 것이다.
  53. 53)법윤法胤 : 불가에서 법통을 계승하는 사람을 말한다.
  54. 54)백조白兆 : 지원志圓 선사를 가리킨다. 백조는 안주安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55. 55)조양鳥養 : 『莊子』에 바닷새(海鳥) 앞에서 종과 북으로 음악을 아뢰니 새가 걱정하였다는 말이 있다. 새를 새로 대접해야지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은 새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 37 참조.
  56. 56)호중壺中 : 인간 세상과 구별되는 아름다운 세계를 말한다.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선인인 호공壺公의 총애를 얻어 그의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다가 그 안에 별천지別天地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는 설화에서 나온 말이다. 『後漢書』 권82하 「方術列傳」 ≺費長房≻.
  57. 57)적오赤烏 : 길조吉鳥를 가리킨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기 위해 맹진孟津을 건너간 뒤에 불기운이 왕의 막사에 흘러들어 와 붉은 까마귀로 변했는데, 다리가 셋으로 변했으며 또 붉은 까마귀가 단서丹書를 물고 토지신을 제사 지내는 주나라의 사社에 모인 일이 있었다고 한다. 『尙書大傳』 「周書」 ≺泰誓 上≻, 『呂氏春秋』 「有始覽」 ≺應同≻, 『史記』 권4 「周本紀」.
  58. 58)개사開士 : 주 19 참조.
  59. 59)안치鴈齒 : 기러기의 행렬이나 이(齒)의 모양과 같이 나란히 이어진 것을 말한다.
  60. 60)분성盆城 : 현재의 김해를 가리킨다.
  61. 61)용상龍象 : 고승高僧을 뜻하는 불가의 용어이다.
  62. 62)전금前襟 : 전금후거前襟後裾에서 나왔다. 형제들이 부모님 슬하에서 함께 자랄 때, 하나가 부모의 앞가슴에 매달려 옷깃을 끌어당기고 다른 하나가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긴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63. 63)대방大方 : 주 47 참조.
  64. 64)오엽五葉 : 다섯 갈래 선종禪宗의 교파를 가리킨다.
  65. 65)일하日下 : 여기서 해는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일하는 임금이 있는 신라를 말한다.
  66. 66)부당왕찰浮幢王刹 : 『楞嚴經要解』에 따르면 세계 바깥의 향수해香水海를 통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찰토刹土의 뜻으로 쓰였다.
  67. 67)망양지탄望洋之歎 : 작은 일에 만족해하다가 자기보다 한층 뛰어난 상대를 만나,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한다는 말이다.
  68. 68)구류九流 : 선진先秦 시대의 아홉 개 학술 유파를 가리킨다.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잡가雜家·농가農家가 이에 해당된다.
  69. 69)정시正始 :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 제왕방齊王芳의 연호.
  70. 70)정관貞觀 : 당唐나라 태종의 연호.
  71. 71)범게梵偈 : 불가에서 지어지는 시와 송 따위를 가리킨다.
  72. 72)화택火宅 : 걱정·근심으로 덮여 있는 이 세상을 비유하는 말이다.
  73. 73)법희法喜 : 법을 듣고 환희歡喜한 마음을 가리킨다.
  74. 74)무외無畏 : 무외시無畏施를 가리킨다. 사람들에게 무서움이 없음을 전하는 것으로 부처가 무외의 덕으로 대중들에게 설법을 베푼 데서 나온 말이다.
  75. 75)우탕禹湯 : 상고 시대의 성군으로 알려진 우禹임금과 탕湯임금을 가리킨다.
  76. 76)소도蘇塗 : 삼한三韓 시대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특정 장소를 일컫는다. 그곳에는 큰 나무를 세워 영고鈴鼓를 달았다. 죄인이 달아나 그곳으로 들어가면 잡아가지 못하는 등 불가침의 성스러운 장소였다. 『三國志』 권30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77. 77)겸상縑緗 : 담황색 비단으로, 책을 포장하는 데 쓰이는데, 전하여 책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1. 1)「觀時而來」五字。欄外板刻曰「來觀時而」編者改爲「觀時而來」移置於此。
  2. 1)「楊」通「揚」{編}次同。
  3. 2)「郵」疑「陲」{編}。
  4. 1)「態」疑「熊」{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