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초엄유고(草广遺稿) / 草广遺稿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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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엄유고草广遺稿>
초엄유고草广遺稿 서문
대략 선가禪家와 시문詩文의 관계를 개관하여 말하자면, 불교가 처음 전해진 한위육조漢魏六朝1) 시대는 번역의 시기에 해당되며, 혹 저작물이 있더라도 당당히 한 분야로 자리 잡기보다는 단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적 역할(羽翼)에 불과했다. 대체로 서축西竺(인도)의 경론經論이 불교의 전파와 함께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독립된 저작물로서 그 가치가 뛰어나다고 평가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삼당三唐2)에 이르러 선가의 작품들이 양적으로 크게 증가하여 비로소 풍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문(文)을 면밀히 살펴보면, 소초疏抄와 같이 불경 연구의 연장선(餕饀)3)이나 이수理藪4)와 같이 설명하는 방식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시詩로 말할 것 같으면 학문 중에 가장 높은 수준의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저산杼山5)ㆍ낭선浪仙6)ㆍ서악西岳7)ㆍ제기齊己8) 등의 무리는 특히 심오한 경지에 이르러 시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래서 가령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한유韓愈ㆍ백거이白居易 등과 그들의 뛰어난 재주를 함께 겨루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송초宋初에 들어서자, 구승九僧9)이 일제히 출현하여 성당盛唐10)의 뒤를 이을 수 있었다. 이어서 북송과 남송(北南)의 시기에는 뛰어난 시승(詩家)들이 별처럼 늘어섰을 뿐만 아니라, 심진숭鐔津嵩11)ㆍ석문범石門範12)ㆍ온릉환溫陵環13)ㆍ경산고徑山杲14) 등과 같은 경우에는 문단文壇을 이끄는 위치(赤幟)15)까지 이르렀으며,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ㆍ주돈이周敦頤ㆍ육상산陸象山 등과 비교해도 우열을 구별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선가의 저작이 위대하고 융성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또 원元나라 때에는 중봉中峰16)과 팔사八思17)가 있었고, 명明나라 때(朱明)18)에는 자백紫柏19)ㆍ감산憨山20)ㆍ우익蕅益21)ㆍ일우一雨 등이 있었는데, 모두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재능과 풍모를 잃지 않았다. 이어서 청초淸初에는 멸망한 명나라의 옛 신하들이 홀연히 출가하여 유불儒佛을 하나로 통합하였으니, 팔대산인八大山人22)ㆍ약지 화상藥地和尙23)ㆍ변행 상인徧行上人24) 등이 가장 뛰어나고 가장 아름다운 저작을 남겼다. 그 나머지는 이른바 볼만한 것이 없다(自鄶以下)25)고 할 수 있으니, 어찌 논할 거리가 있겠는가.

012_0304_c_01L[草广遺稿]

012_0304_c_02L1)草广遺稿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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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言禪家與詩文之關係佛敎初渡之
012_0304_c_05L漢魏六朝且屬飜譯時期有或著作
012_0304_c_06L直不過羽翼夫西竺經論致鵠於傳敎
012_0304_c_07L不足論烜赫著作之價値沿及三唐
012_0304_c_08L家之作方成蔚然大家然篤論其文
012_0304_c_09L則猶未脫疏抄之餕饀理藪之窠窟
012_0304_c_10L能無異辭若其詩學之最著曰杼山
012_0304_c_11L曰浪仙曰西岳曰齊己之軰脫然自
012_0304_c_12L皷吹一代縱與李杜韓白揚鑣并
012_0304_c_13L亦無遜色矣入宋之初九僧齊出
012_0304_c_14L能接盛唐之踵武曁于北南之際不惟
012_0304_c_15L詩家星羅至若鐔津嵩石門範溫陵
012_0304_c_16L徑山杲等能豎文壇之赤幟可與
012_0304_c_17L歐蘇朱陸不相上下則是謂禪家之作
012_0304_c_18L偉矣盛矣且有元朝之中峰與八思
012_0304_c_19L明之紫柏憨山蕅益一雨之倫俱不失
012_0304_c_20L作者之度觀於淸初則勝朝遺老幡然
012_0304_c_21L出家一合儒佛若八大山人藥地和尙
012_0304_c_22L徧行上人作最秀最雅之觀其餘可謂
012_0304_c_23L自鄶以下何足論哉然統論古今禪家
012_0304_c_24L{底}東國大學校所藏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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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고금의 선가 저작을 통합하여 논한다면, 한마디로 시의 수준은 보통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으나, 산문은 일정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승려들이 세상과 동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에 기거하면서, 천하국가의 일에 대해서는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선가에 대해 말하자면,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에는 인도와 중국에 출입하며 교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가라고 할 수 있는 뛰어난 작가(巨擘)26)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불교의 교풍敎風과 사조詞藻가 모두 점차 퇴락하는 추세였으므로, 조선왕조 5백 년 동안의 작품을 살펴볼 때, 문단에 세울 수 있는 것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시단 또한 그러하니, 더구나 다시 대가의 면모를 갖춘 인물을 흔히 볼 수 있겠는가.
헌종에서 철종 시기에 복초 상인復初上人이 호남과 영남(湖嶺) 사이에 태어났으니,27) 초엄草广은 그의 호이다. 작가의 기풍을 떨쳐 일으켜 한 시대를 풍미하였으니, 당시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의 깨달음의 근원을 살펴보면, 대략 그가 자술한 「삼화전三花傳」의 내용과 같으니, 아는 이들과 함께 한번 웃을 만하다. 도는 여러 분야에 널리 통하였으니, 경사經史는 박만성朴晩惺【이름은 치복致馥】28)에게 배우고, 시도詩道는 강고환姜古懽【이름은 위瑋】29)에게 배웠다. 차츰 학문의 넓고 뛰어남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 만년에는 불도의 깨달음을 얻었다. 다른 학문을 좇아 파고 들어간 자는 우리 불도의 핵심인 공안公案30)을 알지 못하는데, 초엄은 힘든 가운데도 꿋꿋하게 홀로 길을 만들어, 우뚝하게 초엄 자신만의 일가를 이루었으니, 근래 5백 년 사이의 작가 중 첫 손가락에 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상인上人은 집착함이 없는 마음을 늘 품고, 선禪ㆍ강講ㆍ율律의 삼사三師를 표준으로 삼는 것을 꺼리며, 맑고 호탕하게 한산寒山31)과 습득拾得,32) 태전太顚,33) 임제臨濟34)의 기풍이 있었으니, 어찌 그 시와 문장을 손수 엮어낼 수 있었겠는가. 또 그 당시 불교계는 상인이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호탕하게 생활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문자에 대한 안목도 부족하였다. 이 때문에 상인의 시와 문장들은 연기가 흩어져 사라지듯이 인간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봉황의 깃털 중에 한두 개만 남을 정도로 희귀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 약간의 글을 엮어서 내는 것도 또한 오랜 세월을 소비하며 겨우 문인文人들의 버려진 낡은 상자(敗簏) 속에서 수습한 것으로, 수십 편에 지나지 않는다.
오호라,

012_0305_a_01L之著作蔽諸曰詩有餘而文不足
012_0305_a_02L多居白雲幽石外視天下國家焉耳
012_0305_a_03L若就我邦之禪家在三國羅麗間能出
012_0305_a_04L入梵漢故屈其大家之巨擘不爲不多
012_0305_a_05L降及漢陽之期敎風與詞藻俱漸
012_0305_a_06L日下之勢故夷攷五百年作品能立文
012_0305_a_07L壇者不過數人詩壇亦然况復多見
012_0305_a_08L具軆大家哉當於憲哲朝之際復初上
012_0305_a_09L生於湖嶺間草广其號也有振作
012_0305_a_10L者之風靡然一世可不希有哉原其
012_0305_a_11L悟達之本領槪如自述之三花傳可與
012_0305_a_12L知者一笑而道及其旁通諸門聽經史
012_0305_a_13L於朴晩惺
聞詩道於姜古懽稍藉
012_0305_a_14L博雅之聲晩年乃覺從他門入者
012_0305_a_15L識自家珍之公案戞戞獨造超然成
012_0305_a_16L草广之一家得不爲後五百年作者之
012_0305_a_17L一位乎然上人以無住爲懷難可以
012_0305_a_18L禪講律三師爲標準澹宕有寒拾顚濟
012_0305_a_19L之風豈堪手編其詩若文且一時禪流
012_0305_a_20L不屑上人之坦蕩又少文字眼以故
012_0305_a_21L上人之詩若文隨烟散滅所存乎人間
012_0305_a_22L寔惟鳳毛之一二然則玆編之略干
012_0305_a_23L亦消許多歲月僅收揑合於文人敗簏
012_0305_a_24L之餘不過是數十殘篇而已嗚呼

012_0305_b_01L상인의 훌륭한 자질로도 크게는 세상을 구제할 보배로운 뗏목(寶筏)35)을 짓지 않고, 작게는 한림원(金馬玉堂)36)에 시험을 쳐 관리가 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빛 바래고 깨어진 구슬과 같은 글들로만 남겨져, 후진들이 따로 글을 모으는 존경도 받지 못했으니, 잘 보존하는 것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 한스럽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그치질 않아 견딜 수 없노라. 또 여러 나이 든 스님(禪老)들에게 들으니, 상인의 말로가 몹시 고달프고 외롭고 쓸쓸하여 단 하루도 따뜻한 방에서 편안함을 누릴 수 없었으며, 그저 산과 바다를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더러는 풍악楓嶽(금강산)의 정상에 올라 새벽에 아침 해가 떠오르는 넓은 바다(滄瀛)를 바라보고, 또 홀로 장백長白(백두산)의 천지天池에 올라 석장을 짚고 발을 천지에 담근 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으며, 가고 또 멈추기를 반복하여 멀리 떨어진 변방(絶塞)과 사막沙漠37)의 바람 몰아치는 바위에서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세속을 벗어났다고 한다. 상인의 이러한 신비로운 유랑(神遊)은 과연 현상 세계(有物)를 벗어나서 노닐었던 것이었으니, 어찌 잔재주로 노래하는 천박한 문인들의 자질로 상인의 고아한 아름다움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상인과 같은 시대에 해양海陽38) 출신 초의 존자艸衣尊者39)라는 분이 있었는데, 깊이 풍아風雅40)의 정취를 얻어 지위가 높고 학식이 큰 사람들과 시나 글을 서로 주고받았는데, 여러 사람이 칭찬을 하여 원 공遠公(혜원)41)과 요 공寥公(참료자)42)에 비견될 만큼 높은 평가를 들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시詩는 상인과 같은 위치에 둘 수 있으나 문장은 상인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러하니 근고近古 선가의 문장가들(詞壇) 중에서 상인을 우두머리로 삼는다고 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을축乙丑년(1925) 음력 2월 보름(花朝)에 석전石顚43) 후학 정호鼎鎬가 한북소림漢北小林에서 글을 짓다.

012_0305_b_01L若上人之良材大不作濟世寶筏小不
012_0305_b_02L試金馬玉堂和此零綠殘瓊不復見後
012_0305_b_03L進之蒐存存亦何所用尤不勝感惋無
012_0305_b_04L且聞諸禪老則上人之末路崎嶮
012_0305_b_05L蒼凉不能安於一日之燠室落拓海山
012_0305_b_06L而周流或登楓嶽之絕頂曉觀浴日之
012_0305_b_07L滄瀛獨步長白之天池振錫濯足以浩
012_0305_b_08L且行且止於絕塞沙漠蟬蛻於天
012_0305_b_09L風石上云爾上人之神遊果能逍遙於
012_0305_b_10L有物之表豈足以雕蟲吟露之淺淺詩
012_0305_b_11L品其雅量也哉上人之并世有海陽
012_0305_b_12L艸衣尊者深得風雅之致酬唱於搢紳
012_0305_b_13L碩學間嘖嘖聞遠公寥公之高評然以
012_0305_b_14L吾觀之詩可與上人同壇而文不與上
012_0305_b_15L人同日則近古禪家詞壇當以上人爲
012_0305_b_16L主盟無愧矣

012_0305_b_17L
乙丑之花朝石顚後學鼎鎬書于漢
012_0305_b_18L北小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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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한위육조漢魏六朝 : 한나라부터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한漢은 고조 유방이 세운 나라이고, 여기서는 전한前漢, 후한後漢을 모두 가리킨다. 위魏는 후한이 망하고 삼국시대 조조가 세운 나라로, 후한 이후 중국을 지배한 대표적 나라이다. 육조六朝는 오吳·동진東晋·송宋·제齊·양梁·진陳 여섯 나라를 가리키는 용어로, 보통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의 남북조 시기를 가리킨다.
  2. 2)삼당三唐 : 중국의 시詩가 가장 왕성했던 당대唐代를 초당初唐·성당盛唐·만당晩唐으로 구분한 말이다.
  3. 3)연장선(餕饀) : 준도餕饀의 준餕은 먹다 남은 밥을 말하고, 도饀는 떡 속에 넣는 재료를 가리킨다. 본질상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다.
  4. 4)이수理藪 : 수학과 역학曆學에 관한 학문 분야로, 여기서는 경문의 내용과 이치를 따지고 해설하는 것을 말한다.
  5. 5)저산杼山 : 중국 저장성(浙江省) 후저우시(湖州市)에 위치한 산으로, 여기서는 중국 당나라 중기의 선승禪僧 겸 시인인 교연皎然을 말한다. 그는 고체시古體詩나 악부樂府에 뛰어났으며, 제기齊己·관휴貫休와 함께 당의 3시승詩僧으로 꼽힌다. 주요 저서에는 『詩式』, 『詩評』 등이 있다.
  6. 6)낭선浪仙 : 중당中唐의 시인으로, 자字는 낭선浪仙, 호號는 갈석산인碣石山人, 승명僧名은 무본无本이다. 하북성河北省 범양氾陽 사람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뒤에 환속하여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후에 문서를 맡는 하급관리인 장강주부長江主簿를 역임하여, 가장강賈長江이라 별칭했다.
  7. 7)서악西岳 : 중국 오악五岳의 하나로, 화산華山의 별칭이다. 여기서는 화산을 무대로 활동했던 승려들을 가리키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8. 8)제기齊己 : 당말오대唐末五代 때의 시승詩僧이다. 담주潭州 장사長沙 사람이다. 속성俗姓은 호胡씨고, 자호自號는 형악사문衡嶽沙門이다. 그의 시는 기조氣調가 청담淸淡하여 동시대 선배 시승인 관휴貫休와 함께 당나라 시승 가운데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9. 9)구승九僧 : 시를 잘 지었던 9인의 승려를 총칭하는 말로서, 회남淮南의 혜숭惠崇, 검남劍南의 희주希晝, 금화金華의 보섬保暹, 남월南越의 문조文兆, 천태天台의 행조行肇, 여주汝州의 간장簡長, 청성靑城의 유봉維鳳, 강동江東의 우소宇昭, 아미峨眉의 회고懷古를 말한다.
  10. 10)성당盛唐 : 당나라 개원開元에서 대력大曆 연간에 이르는 기간에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고적高適, 잠삼岑參 등이 활동한 당시唐詩의 전성 시기를 말한다.
  11. 11)심진숭鐔津嵩 : 송나라 때 운문종雲門宗의 승려이다. 등주藤州 심진鐔津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이李씨고, 자는 중령仲靈이며, 자호自號는 잠자潛子이다.
  12. 12)석문범石門範 : 송나라 때의 승려로, 덕홍德洪으로도 불린다. 속성俗姓은 창彰씨고, 서주瑞州 사람이며, 자는 각범覺範이다.
  13. 13)온릉환溫陵環 : 송나라 때의 승려로, 월越 소흥紹興 사람이다. 온릉溫陵 개원련사開元蓮寺에 있어서 온릉 대사溫陵大師로 불린다.
  14. 14)경산고徑山杲 : 중국 남송시대의 선승으로,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의 5대 전인傳人이다. 묵조선黙照禪을 비판하고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하여 선종 불교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 15)적치赤幟 : 붉은 깃발을 세운다는 뜻으로, 영수領袖가 되는 인물이나 그 지위를 비유하는 말이다.
  16. 16)중봉中峰(1263~1323) : 원나라 때의 승려로, 이름은 명본明本이다. 속성은 손孫씨며, 항주杭州 전당錢塘 사람이다. 지각 선사智覺禪師 또는 보응 국사普應國師로도 불린다.
  17. 17)팔사八思 : 라마교의 승려로, 팔사파八思巴·발사팔發思八·발합사파拔合思巴라고도 한다. 티베트에서 출생하였고, 쿠빌라이의 최초 스승이 되어 라마교를 국교로 하여 여러 종파를 통할하였다.
  18. 18)주명朱明 : 명明나라를 창건한 사람인 주원장朱元璋의 성씨를 따서 명조明朝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19. 19)자백紫柏 : 명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진可眞, 호는 달관達觀이다. 연경燕京에다 법당을 크게 세웠으나, 뒤에 무고誣告에 걸려 세상을 마쳤다. 『紫柏老人集』이 세상에 전한다.
  20. 20)감산憨山 : 명나라 때의 승려로, 안휘安徽 전초全椒 사람이다. 속성은 채蔡씨고, 이름은 덕청德淸이며, 자는 징인澄印이고, 호가 감산이다.
  21. 21)우익蕅益 : 명나라 때의 학승學僧으로, 소주부蘇州府 오현吳縣 사람이다. 속성은 종鐘씨고, 자는 우익(蕅益·藕益) 또는 소화素華이며, 자칭 팔불도인八不道人이라 불렀다. 이름은 제명際明 또는 성聲이고, 자는 진지振之다.
  22. 22)팔대산인八大山人(1624~1703) : 중국 청나라 초기의 승려·문인·화가. 명 왕실의 후손이다. 속칭은 주답朱耷, 자는 설개雪個이다. 명조 멸망과 더불어 승려가 되어 망국의 정한을 표현하였다.
  23. 23)약지 화상藥地和尙 : 명말 청초 시기의 인물인 방이지方以智를 가리킨다.
  24. 24)변행 상인徧行上人 : 명말 청초 시기의 인물인 금보金堡를 말한다.
  25. 25)볼만한 것이 없다(自鄶以下) : 『左傳』 양공襄公 29년에 춘추시대 오나라의 계찰季札이 노나라에 갔을 때 주나라의 음악을 들려 달라고 청하여 악공에게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연주하게 하자, 계찰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 뒤에 작은 나라인 회鄶의 음악을 연주하자, “회 이하는 평론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自鄶以下。 無譏焉。)”라고 하였다.
  26. 26)거벽巨擘 : 학식이나 어떤 전문 분야에서 남달리 뛰어난 사람이나 작품을 말한다.
  27. 27)복초 상인復初上人이~사이에 태어났으니 : 초엄의 출생지는 미상이다. 석전 박한영의 「輯草广上人遺稿序」(『石林抄』)에는 초엄의 출생지를 경남 고성이라 하였다.
  28. 28)박만성朴晩惺(1824~1894) : 조선 말기의 학자·문인. 자는 동경董卿, 호는 만성晩醒이고, 함안咸安 출신이다. 그는 조선 말기 경상우도의 학문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이 지역에 미친 영향이 크며, 특히 성재性齋 허전許傳을 통해 기호노론계의 성리설 등을 받아들여 이곳에 소개하였다. 그는 문학 방면에서도 「大東續樂府」로 일찍부터 주목받은 바 있다.
  29. 29)강고환姜古懽(1820~1884) : 조선 말기의 학자·개화사상가. 본관은 진양晉陽, 이명은 호浩·성호性澔이며, 자는 중무仲武·요장堯章·위옥韋玉, 호는 추금秋琴·자기慈屺·청추각聽秋閣·고환당古懽堂이다.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4년간 수학하였고, 민노행이 사망하자 그의 유촉에 따라 제주도에 있던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 5년 남짓 사사하였다. 실학자로부터 개화사상가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두 번의 중국 여행을 통해서였다. 이 두 차례의 여행을 통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를 절감하고,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었다.
  30. 30)공안公案 : 선종禪宗에서 도를 터득하게 하기 위하여 생각하게 하는 문제를 말한다.
  31. 31)한산寒山 : 당나라 승려 시인. 늘 한암寒岩 굴속에 살아 한산이라 부른다. 몸은 바싹 마르고 미친 사람 같은 행동을 하며, 국청사國淸寺에 자주 와서는 승려 습득拾得과 함께 대중이 먹고 남은 밥을 얻어 대통에 넣어서 둘이 함께 한암으로 들어가곤 했다고 한다.
  32. 32)습득拾得 : 당나라 때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있던 승려. 풍간 선사豊干禪師가 산에 갔다가 적성도赤城道 곁에서 주워 온 작은 아이여서 이렇게 이름이 붙었다.
  33. 33)태전太顚 :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禪僧이다. 석두石頭 화상의 법을 이었고, 조주潮州에서 살았다. 한유韓愈와 깊은 교류를 나누었다.
  34. 34)임제臨濟 : 중국 당대唐代 임제종의 시조始祖 의현義玄(?~867)의 법호이다. 조주祖州 남화현南華縣 출생으로, 속성은 형刑이다. 황벽산黃璧山의 희운希運을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이며 저서로는 『臨濟慧照禪師語錄』 1권이 있다.
  35. 35)보배로운 뗏목(寶筏) : 고통의 세상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건져 주는 부처의 법이라는 의미이다.
  36. 36)한림원(金馬玉堂) : 한漢나라 때 금마문金馬門 옥당전玉堂殿은 문학하는 선비가 출사하는 관아를 말하는데, 후세에 한림원翰林院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37. 37)사막沙漠 : 원뜻은 중국 서역의 사막(고비사막)이다. 다만 초엄이 실제로 서역까지 가서 입적했다는 상황과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자전적 기록인 「三花傳」의 결말에도 중국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남으로 향하여 방장산에 깊이 들어가 생을 마감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사막이라기보다는 일반적 의미의 변방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38. 38)해양海陽 : 넓게는 전라도를, 좁게는 현재의 광주광역시 일원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39. 39)초의 존자艸衣尊者 : 초의 의순艸衣意恂(1786~1866)을 말한다. 조선 후기 대표적 선승으로, 다도의 이론과 실제를 생활화하면서 우리 전통차 문화를 꽃피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조로부터 ‘대각등개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宗師’라는 사호賜號를 하사받았다.
  40. 40)풍아風雅 : 『詩經』의 육의六義 가운데 ‘풍風’과 ‘아雅’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뜻하는 말이다.
  41. 41)원 공遠公 : 진晉의 고승高僧으로, 법명은 혜원慧遠이며, 여산廬山의 용천정사龍泉精舍와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白蓮社를 만들고 30여 년간 지내면서 산을 나온 일이 없었다고 한다.
  42. 42)요 공寥公 : 송나라 때 소식蘇軾과 친분이 두터웠던 시승詩僧인 참료자參廖子.
  43. 43)석전石顚 : 일제강점기 때 승려이자 불교 지도자인 박한영朴漢永(1870~1948)으로, 법명은 정호鼎鎬, 자는 한영漢永, 호는 영호映湖 또는 석전石顚이다. 일제강점기 불교 유신에 힘썼으며, 1931년 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정읍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1. 1){底}東國大學校所藏筆寫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