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釋卷第十二

ABC_IT_K0590_T_012
016_1218_c_01L
섭대승론석 제12권
016_1218_c_01L攝大乘論釋卷第十二


세친 해석
진제 한역
변상섭 번역
016_1218_c_02L世親菩薩 釋
陳天竺三藏眞諦譯


8. 석의혜학차별승상(釋依慧學差別勝相)
016_1218_c_04L釋依慧學差別勝相第八

【論】이와 같이 의지해야 하는 정학(定學)의 차별을 이미 설하였다. 의지해야 하는 혜학(慧學)의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釋】보살의 선정은 2승의 선정과는 이미 차별이 있다. 선정은 지혜의 의지가 되며 지혜는 선정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으니, 보살의 지혜와 2승의 지혜는 역시 차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법을 의지해야 하는 혜학[依慧學]이라고 말하는가? 무분별지를 의지해야 하는 혜학이라고 한다. 무분별지의 차별이 곧 의지해야 하는 혜학의 차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무분별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로 심사(尋思) 등의 지혜를 말하며, 곧 도의 원인이다. 둘째는 무분별지이며, 곧 도의 바른 체이다. 셋째는 무분별후지이며, 곧 관에서 나온 지혜[出觀智]이며 도의 과보이다. 이러한 세 가지 지혜가 모두 의지해야 하는 혜학의 체이다.
016_1218_c_05L論曰如此已說依定學差別云何應知依慧學差別釋曰菩薩定與二乘定旣有差別定爲慧依止慧依定得成菩薩慧與二乘慧亦應有差別云何可知以何法名依慧學無分別智名依慧學是無分別智差別應知卽是依慧學差別此無分別智有三一加行無分別智謂尋思等智卽是道因二無分別智卽是道正體三無分別後智卽是出觀智謂道果此三智悉是依慧學體
016_1219_a_01L심사의 지혜가 의지해야 하는 혜학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관을 행하는 사람은 내세의 무분별지에 의지하기 때문에 방편지를 닦으며 미래의 무분별지의 과보를 구하기 때문에 현세의 방편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의지(依止)의 주체[能依]이기 때문에 의지해야 하는 혜학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방편지가 내세의 무분별지를 끌어당길 수 있고 무분별지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이러한 방편에 의지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의지처[所依]이기 때문에 의지해야 하는 혜학이라고 말한다.
도의 바른 체가 의지해야 하는 혜학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내면[內]에 의지하여 지혜를 일으키며 관에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산동(散動)을 떠났기 때문에 이름하여 의식의 내면[內]이라고 한다. 이 지혜는 관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의지해야 하는 혜학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스스로의 체가 있으므로 속이 된다. 원인[因]은 이미 물러갔으나 과보[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아 도의 체가 스스로 서로 이어지므로 곧 스스로의 체를 설하여 의식의 내면이라고 한다. 스스로의 체를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의지해야 하는 혜학이라고 일컫는다.
016_1218_c_16L尋思智爲依慧學觀行人依當來無分別智故修方便智由求未來無分別智果故現世方便得成以是能依故名依慧學此方便智能引當來無分別智無分別智起必依此方便得成以是所依故名依慧學道正體爲依慧學者依內起智在觀離散動故名爲內智依觀起故名依慧學又有自體爲因已謝果未起道體自相續卽說自體爲內依自體起故名依慧學
관(觀)에서 나온 지혜가 의지해야 하는 혜학이라고 하는 것은 무분별지에 의지하여 이 지혜를 이루기 때문에 의지해야 할 혜학이라고 말한다. 왜냐 하면 뒤에 얻는 지혜[後得智]는 관에 들어 있을 때에 연하여지는 경계를 연하여 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지혜는 무슨 지혜를 이루는가? 마땅히 단지 무분별지를 이룬다. 만약 이 지혜를 이룬다면 곧 나머지 지혜를 이룬다. 만약 앞의 지혜가 이루어진다면 단지 원인의 정의[義]만이 드러나고 과보의 정의는 드러나지 않으며, 자성 등의 열아홉 가지 차별적인 정의[差別義]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뒤의 지혜가 성립한다면 단지 과보의 정의만이 드러나고, 역시 원인의 의는 드러나지 않는다. 자성 등의 열아홉 가지의 차별적인 정의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지혜는 심사의 지혜로써 원인을 삼으니 이 지혜는 심사의 지혜의 과보이다. 이 지혜는 뒤의 지혜의 원인이며, 뒤의 지혜는 이 지혜의 과보이다. 이 지혜가 성립함으로 말미암아 앞과 뒤의 지혜가 역시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단지 이 지혜를 성립하여야 한다. 성립된 가운데서 먼저 무분별지의 자성을 설하여야 한다. 자성이 곧 체의 모습이다.
016_1219_a_04L觀智爲依慧學者依無分別智成此名依慧學何以故如(씨베타에는 如라는 글자가 없고 교감주도 없어 지워야 할 것 같습니다)入觀時所緣境後得智緣此生故此三智中應成立何智應但成立無分別智若成立此智卽成立餘智若成立前智但因義顯果義不顯自性等十九差別義亦不成若成立後智但果義顯因亦不顯自性等十九差別義亦不成以故此智以尋思智爲因此智是尋思智果此智是後智因後智是此智由此智成立前後智亦得成立故但應成立此智於成立中先應說無分別智自性自性卽是體相
016_1219_b_01L【論】무분별지의 자성ㆍ의지ㆍ연기ㆍ경계ㆍ상모(相貌)ㆍ입구난(立救難)1)ㆍ섭지ㆍ반류(伴類)ㆍ과보ㆍ등류(等流)ㆍ출리(出離)ㆍ구경(究竟)ㆍ행선(行善)ㆍ가행ㆍ무분별지 뒤에 얻는 지혜의 공덕, 무분별한 차별의 가행, 무분별지와 후득지의 비유, 위덕 그리고 공용 없이 짓는 사(事)의 매우 깊은 의미로 말미암아 마땅히 의지해야 할 혜학의 차별을 알아야 하며, 의지해야 할 혜학의 차별로 말미암아 무분별지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釋】무분별지의 자성으로 말미암아 의지해야 할 혜학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의지해야 할 혜학의 차별로 말미암아 무분별지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차례로 설한 열아홉 가지 정의가 모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간략하게 살펴보기 위하여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하나로써 처음을 표시하고 다음에 열아홉 가지의 정의를 늘어 내놓아 마친다. 뒤에 의지해야 할 혜학의 차별을 알아야 하고, 의지해야 할 혜학의 차별로 말미암아 무분별지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고 총체적으로 말한다. 열아홉 가지의 정의로써 무분별지를 성립시킨다. 이 지혜가 곧 혜학의 체이다. 혜학의 차별이 곧 이 지혜의 차별이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무분별지의 자성은 어떠한가?
016_1219_a_17L論曰由無分別智自性依止緣起境界相貌立救難攝持伴類果報等流出離究竟行善加行無分別智後得智功德無分別差別加行無分別智及後得智譬威德無功用作事甚深義故應知依慧學差別由依慧學差應知無分別智差別釋曰謂由無分別智自性應知依慧學差別依慧學差別應知無分別智差別者若是次第說十九義悉須作此語爲存略故以一由無分別智標初列出十九義竟後摠云應知依慧學差別由依慧學差別應知無分別智差別以十九義成立無分別智此智卽是慧學體慧學差別卽是此智差應作如此知無分別智自性云何
【論】무분별지의 자성은 다섯 가지의 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釋】만약 다섯 가지 상을 모두 떠난다면 곧 무분별지이고, 만약 다섯 가지의 상을 모두 여의지 않는다면 곧 무분별지가 아니다.
016_1219_b_10L論曰無分別智自性應知離五種相釋曰若具離五相則是無分別智不具離五相則非無分別智
【論】다섯 가지 상이란 첫째는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둘째는 각관지(覺觀地)가 아니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셋째는 멸상수정(滅想受定)의 적정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넷째는 색(色)의 자성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진실의(眞實義)2)에서의 다른 분별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016_1219_b_13L論曰五相者一離非思惟故二離非覺觀地故三離滅想受定寂靜故四離色自性故五於眞實義離異分別故
016_1219_c_01L【釋】이 지혜는 사유를 떠나기 때문에 무분별지라고 일컫는다. 깊이 잠을 자고 방일하고 미친 듯 술에 취하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를 떠나야 무분별지를 얻게 된다. 각관지를 지나기 때문에 무분별지라고 말한다. 2정(定) 이상은 이미 각관지를 지나므로 마땅히 무분별지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에 의거한다면 범부도 역시 무분별지를 얻을 수 있다. 이곳은 심과 심법을 떠날 수 있으므로 마땅히 설하여 무분별지라고 한다. 만약 사람이 상수멸정 등에 있다면 무분별지를 이룰 수 있으나, 이는 곧 지혜를 이루지 못한다. 상수멸정 등의 위계에 있어서는 심과 심법 등이 없기 때문이다. 색의 자성 또는 지(智)의 자성과 같다고 말한다면 역시 이와 같다. 색이 무디어서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 지혜도 마땅히 무디어서 알지 못한다. 진실의에 있어서는 이미 분별이 드러나 나타나므로3) 이 분별이 마땅히 무분별지를 이룬다. 왜냐 하면 이 분별은 진실의를 분별할 수 있어서 이 의가 진실이라고 말한다.
016_1219_b_16L釋曰此智若由離思惟故名無分別熟眠放逸狂醉同離思惟應得無分別智若由過覺觀地故名無分別智從二定以上已過覺觀地應得無分別智若依此二義凡夫應得無分別是處能離心及心法應說名無分別智謂想受滅定等若人在此位中得無分別智此則不成智何以故滅定等位無心及心法故若言如色自性智自性亦如此如色鈍無知此智應鈍無知若於眞實義由已分別顯現是分別應成無分別智何以故此分別能分別眞實義謂此義眞實
【論】이러한 다섯 가지 상을 떠난 지혜 가운데서, 무분별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釋】만약 지혜가 다섯 가지 상을 떠나서 진실의(眞實義)를 연하여 일어난다느니, 진실의를 분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느니 하는 것은 이 인식현상의 진실4)이 단지 진실의를 연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안식(眼識)이 분별로써 자성을 삼지 않는 것이 무분별지의 상이다.
016_1219_c_06L論曰是五相所離智此中應知是無分別智釋曰若智離五相緣眞實義起若不異分別眞實義謂此法眞實但緣眞實義如眼識不以分別爲是名無分別智相
【論】이 가운데 설하여진 무분별지의 자성 가운데서 게송으로 읊어 말한다.
【釋】이러한 의지해야 할 혜학 가운데서 앞에서 설한 열아홉 가지의 의미에 의해 드러난 것과 같이 무분별지의 자성을 다시 게송으로 설하여 이 정의를 세운다. 이 게송은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가? 무분별지가 가장 수승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닦아가는 많은 수행 가운데 가장 수승하므로 우두머리가 된다.
016_1219_c_11L論曰於此中如所說無分別智性中故說偈言釋曰於此依慧學中如前說十九義所顯無分別智性更說偈成立此義此偈欲何所顯欲顯無分別智最勝於所修衆行中最爲上首

【論】모든 보살의 자성인
다섯 가지의 상을 떠난
무분별지의 자성은
진실의에서 분별이 없다.
016_1219_c_16L論曰
諸菩薩自性
五種相所離
無分別智性
於眞無分別
016_1220_a_01L【釋】보살은 무분별지로써 체를 삼기 때문에 무분별지는 보살과 더불어 다르지 않다. 무분별지의 자성은 보살의 자성이다. 무분별지는 다섯 가지 상을 떠나므로 곧 보살은 다섯 가지 상을 떠난다. 진실의에 있어서 분별이 없기 때문에 다섯 가지 상을 떠나므로 무분별하다는 이름을 얻는다. 중생은 거짓 이름이며, 인식현상[法]5)은 실제로 존재한다. 만약 이러한 지혜을 떠난다면 무분별한 인식현상이 마땅히 보살의 이름이며, 다하여 생함이 없는 지혜가 보리(菩提)이다. 이 중생이 보리로써 체를 삼으니 보리가 곧 무분별지이며, 무분별지가 곧 보살이다.
016_1219_c_18L釋曰菩薩以無分別智爲體無分別智與菩薩不異無分別智自性卽是菩薩自性無分別智離五相卽是菩薩離五相由於眞無分別故離五相得無分別名衆生是假名法是實有若離此智無有別法應菩薩名盡無生智是菩提此衆生以菩提爲體提卽是無分別智無分別智卽是菩
무분별지가 곧 보살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까닭에 보살의 자성이 다섯 가지 상을 떠난다고 말한다. 무분별지 뒤에 얻는 사례[例]가 이러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보살의 자성을 이미 설명하였다. 이러한 근거로 말미암아 이 자성이 생할 수 있다.
이제 마땅히 이 근거를 설명한다. 앞에서 이 앎을 설명하여 무분별이라고 말했다. 이 지혜를 근거로 삼아 마음이 생하니, 마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생하게 된다. 만약 마음을 의지하여 생한다면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하며, 사유는 곧 분별이다. 이 앎이 만약 분별에 의하여 생한다면 무분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마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생한다면 곧 색(色) 등의 인식현상6)과 같으며, 또한 지혜라고 이름하여서는 안 된다. 이러한 두 가지 과실을 떠나는 것을 드러내고자 거듭 게송으로 설한다.
016_1220_a_04L欲示無分別智卽是菩薩故說菩薩自性離五相不言無分別智後得例爾如此說菩薩自性已由此依止是性得生今當說此依止前說此智名無分別此智爲依止心生爲不依止心生若依止心生能思故名心卽是分別此智若依分別生非謂無分別若不依止心生則同色等法不應名智欲顯離此二失故重說偈

【論】모든 보살의 의지(依止)는
마음도 아니고 마음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 무분별지는
사유가 빠른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016_1220_a_12L論曰
諸菩薩依止
非心非非心
是無分別智
非思疾類故

【釋】이 무분별지는 사의(思議)하지 않기 때문에 이 지(智)는 마음으로써 근거를 삼지 않는다. 역시 마음의 빠르고 예리한 종류가 서로 이어짐으로써 의지를 삼기 때문에 마음이 아닌 것으로써 의지를 삼지 않는다. 빠르고 예리한 종류는 마음의 종성(種性)이다. 이미 이것이 의지가 되기 때문에 마음이 아닌 것이 의지가 된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지혜를 생하여 일으키는 인연을 밝히기 위하여 거듭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20_a_15L釋曰此智不以心爲依止由此智不思議故亦不以非心爲依止由以心疾利類相續爲依止故疾利類是心種旣以此爲依止故不可說非心爲依止爲顯因緣生起此智故重說偈

【論】모든 보살의 인연은
언어가 있는 문훈습(聞熏習)으로,
무분별지이며,
이치에 맞는 바른 사유이다.
016_1220_a_20L論曰
諸菩薩因緣
有言聞熏習
是無分別智
如理正思惟
016_1220_b_01L
【釋】네 가지 연(緣) 가운데 세 가지를 제거하고 단지 인연만을 취한다. 인연은 어떠한 모습인가? 원인이 과보와 더불어 같은 종류를 인연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앞선 선심(善心)이 뒤에 선심을 짓는 원인이 되는 것과 같이, 남에게서 들은 법음(法音)에 의하여 문훈습의 원인을 일으킨다. 이 훈습이 뒤에 정사유(正思惟)를 일으킨다. 이 정사유가 남의 바른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일어나기 때문에 언어가 있다고 말한다. 이 지혜의 인연은 곧 언어가 있는 문훈습과 정사유로써 체를 삼는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무분별지는 말이 있으므로 인하여 생하지 않았으면 생하게 하고, 이미 생하였으면 견고하게 머물게 한다. 만약 이러한 훈습이 없다면 무분별지는 생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이 인연이 된다고 설한다. 이 지혜는 문훈습으로 인하여 일어나는데 무슨 인식현상을 연하여 경계로 삼는가?
016_1220_a_23L釋曰四緣中除三緣但取因緣因緣有何相若因與果同類名因緣譬如先善心爲後善心作因依從他所聞法起聞熏習因此熏習後生正思惟是正思惟從聞他正說起故稱有言此智因緣卽以有言聞熏習及正思惟爲體由此因緣無分別智因有言未生令生已生令堅住若無此熏習無分別智不得生是故說此爲因緣此智因聞熏習起緣何法爲境

【論】모든 보살의 경계는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법성(法性)7)이다.
이 무분별지는
두 가지의 자성이 없는 진여이다.
016_1220_b_10L論曰
諸菩薩境界
不可言法性
是無分別智
二無我眞如

【釋】앞의 게송은 보살의 인연을 설하였다. 이 게송은 보살의 연연(緣緣)을 설한다. 경계가 곧 연연이니, 연연은 어떤 모습인가? 법이 이것을 연하여 생하는 것은 마치 병약한 사람이 지팡이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이 법을 관하면 저 법을 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저것의 연이 된다. 마치 다섯 가지 차별적 대상[塵]이 다섯 가지 식[五識]을 생하는 것과 같다. 이 경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의지하는 연연이고, 둘째는 견주어 계탁하는 연연이다. 사람의 마음에 항상한 모습이 없듯이 견주어 계탁하는 색(色) 등의 나머지 인식현상들도 모두 무상하다.
말할 수 없는 법성이 보살의 연연이다. 모든 인식현상은 분별성으로 말미암아 언설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모든 인식현상은 스스로의 체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분별로 말미암아 드러나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인식현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역시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나타나 드러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있지는 않다. 따라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016_1220_b_12L釋曰前偈說菩薩因緣此偈說菩薩緣緣境界卽是緣緣緣緣有何相法緣此生猶如羸人因杖得起若觀此法彼法得生故此爲彼緣如五塵生五識此境有二義一依止緣緣比度緣緣如人依止心無常相比度色等餘法皆是無常不可言法性是菩薩緣緣一切法由分別性不可言何以故諸法由自體無所有由心分別顯現故一切法不可說有亦不可說無如此顯現不如此有是故不可說有
016_1220_c_01L이와 같이 있지 않은 것이 없지 않음을 드러내 나타내기 때문에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식(識)에 연하여지는 인식현상과 같이 있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분별이 없음이 체(體)의 상이다. 이 분별의 체가 없는 모습은 당연히 있음도 되고, 당연히 없음도 된다. 만약 체가 없음이 체가 없다면 곧 돌이켜 있다. 만약 체가 없음이 있다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법성은 진제[眞]와 속제[俗]에서 모두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법성은 두 가지의 자성이 없는 진여로써 체를 삼는다. 분별성으로 말미암아 의타성은 인식주관도 없고 인식현상도 없으므로 두 가지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단견(斷見)을 떠나기 위해서는 이 자성이 없음이 없지 않기 때문에 설하여 진여라고 한다. 이 진여가 보살의 경계이다. 왜냐 하면 이 무분별지가 일어난다면 반드시 이러한 경계를 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이 지혜는 말할 수 없는 진여를 연하여 일어난다. 그 취하는 경계의 상모(相貌)는 어떠한가?
016_1220_c_01L如此不有不無顯現故不可說無如識所緣法不如此有故是故分別無體相是分別無體相爲當有爲當無若無無體體則還有若有無體不可言無由此義故法性約眞俗皆不可言有無法性以二無我眞如爲體由分別性故依他性無人無法名二無我爲離斷見此無我不無說名眞如此眞如是菩薩境何以故是無分別智若起必緣此境起故智緣不可言眞如起其取境相貌云

【論】모든 보살의 상모는
진여의 경계 가운데에서
이 무분별지는
상(相)이 없고 차별이 없다.
016_1220_c_12L論曰
諸菩薩相貌
於眞如境中
是無分別智
無相無差別

【釋】이 지혜는 진여의 경계 가운데에서 평등하다. 평등하게 생하여 다름이 없고, 상이 없음이 상이 되니 곧 그 상이다. 안식이 차별적 대상성[色]8)을 취하여 푸른 색 등이 나타나므로, 푸른 색 등의 차별적 대상성[色]과 다르지 않다. 이 지혜도 진여의 경계와 더불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안식이 차별적 대상성과 함께 같지 않으니, 색은 체가 없지만 색이 있으며, 안식은 체가 있지만 색이 없다. 이 지혜는 진여의 경계와 더불어 서로 칭합하니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모든 인식현상이 언설할 수 없다는 것을 자성으로 삼는다면, 무슨 인식현상이 분별된 것9)인가?
016_1220_c_14L釋曰是智於眞如境中平等平等生無異無相爲相卽是其相譬如眼識取色如靑等相顯現不異靑等色智與眞如境亦爾又不同眼識與色色無體有色眼識有體無色此智與眞如境相稱不可說異若一切法不可言說爲性何法是所分別

【論】상응하는 자성인 실체적 대상[義]이
분별의 대상이며, 다른 것은 없다.
016_1220_c_21L論曰
相應自性義
所分別非他
016_1221_a_01L
【釋】모든 언설은 세 가지 상응이 있으니, 거듭 익힘과 서로 이어짐과 순서이다. 이 셋은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상응한다고 말하며, 또한 세 가지 인식현상이 화합하여, 실체적 대상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에 상응한다고 말한다. 이 상응함이 자성의 실체적 대상이다. 이 실체적 대상이 곧 분별의 대상이다. 만약 이 실체적 대상을 떠난다면 달리 나머지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식현상은 언설할 수 없다. 이러한 성품을 떠나서는 달리 나머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러한 의미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016_1220_c_22L釋曰一切言說有三種相應謂數習相續次第此三不相離故名相應三法和合能目義故名相應此相應是自性義此義卽是所分別若離此義無別餘義是故一切法不可言說云何知離此性無別餘義爲成立此義故

【論】문자들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실체적 대상과 상응함이 성립하므로
016_1221_a_06L論曰
字字相續故
由相應義成

【釋】문자들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 곧 첫 번째의 상응이며, 이 상응함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두 가지 상응함이 갖추어진다. 이 세 가지 상응함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체적 대상을 지목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상응함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실체적 대상이 성립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유하건대 안근(眼根) 등과 같이 언사(言辭)가 서로 이어져 말하는 가운데에서 거듭 집착함이 일어남으로써 실체적 대상이 되기 때문에 설하여 상응한다고 말한다. 실체적 대상은 분별되는 것이므로 분별되는 것은 단지 언설만이 있다. 실체적 대상은 역시 단지 언설만 있을 뿐이다.
만약 모든 인식현상이 언설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실체적 대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016_1221_a_07L釋曰字字相續卽第一相應由此相應卽餘二相應具此三相應故得目義由相應說此義得成譬如眼根等言辭相續說中衆生執以爲義故說名相應此義是所分別是故所分別但有言說義亦但有言說若一切法不可言說此義云何成

【論】지혜가 언설을 떠나서는
인식된 것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016_1221_a_14L論曰
離言說智慧
於所知不起

【釋】만약 사람이 방언(方言)을 요별하지 못한다면 말하여진 경계에서 지혜가 생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언설 가운데서 말하여진 것의 지혜가 생한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의미는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016_1221_a_15L釋曰若人未了別方言於所言境慧不生若汝言於言說中所言智生此義不然何以故

【論】언어에 있어서 같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은 언설할 수 없다.
016_1221_a_18L論曰
於言不同故
一切不可言

【釋】이 언설은 말하여진 것과 같지 않다. 상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의 상이 다르고 말하여진 것의 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언어와 말하여진 것이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무슨 법이 무분별지에 섭지되는가?
016_1221_a_19L釋曰是言說與所言不同以相貌異故言相異所言相異是故一切言及所言同不可言何法是無分別智所攝
016_1221_b_01L
【論】모든 보살이 섭지하는 것은
무분별지이다.
이후로 얻는 행을 지켜서
궁극에까지 생장하게 된다.
016_1221_a_23L論曰
諸菩薩攝持
是無分別智
此後得行持
爲生長究竟

【釋】이 무분별지 뒤에 얻어지는 지혜로 보살의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행을 얻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행을 의지하여 이 지혜는 생장하고 서로 이어져 구경(究竟)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무분별후지는 보살의 바른 행을 생장할 수 있다. 무분별후지가 섭지하는 주체이며, 보살이 섭지되는 대상이다.
무슨 인식현상이 무분별지가 의지하는 종류[伴類]인가?
016_1221_b_02L釋曰是無分別智後所得智能得菩薩福慧二行二行依止此智得生長相續乃至究竟故無分別後智能生長菩薩正行無分別後智是能攝持菩薩是所攝持何法是無分別智伴

【論】모든 보살의 반려가 되는 것들은
설하여 두 가지 도이며,
이 무분별지는
다섯 가지 바라밀의 품류이다.
016_1221_b_08L論曰
諸菩薩伴類
說是二種道
是無分別智
五度之品類

【釋】의지하는 종류라는 것은 서로 돕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서로 도와 하나의 일을 이루기 때문에 서로 돕는다고 말한다. 하나의 일이란 보리의 과보이며, 두 가지 도란 보살의 반류이며, 자량도(資粮道)와 의지도(依止道)를 말한다. 보시 등의 네 가지 바라밀이 자량도이며, 선정바라밀이 의지도이다. 왜냐 하면 네 가지 바라밀로부터 생하여지는 선법이 반야바라밀을 생하고 이 반야바라밀을 의지하여 선정이 생한다. 반야바라밀은 곧 무분별지이지만, 아직 위없는 보리를 얻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서 항상 무분별지 내지는 궁극의 과보를 생하여 일으킬 수 있다. 떠나면 곧 다섯 바라밀이 있고, 합하면 곧 두 가지 도를 이루어 여섯 번째의 바라밀을 도울 수 있어서, 함께 하나의 궁극적인 과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설하여 반류(伴類)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무분별지가 두 가지 도에 의하여 성립된다면 무슨 과보를 얻는가?
016_1221_b_10L釋曰伴類以相助爲相相助共成一事故名相助一事是菩提果二種道是菩薩伴類謂資糧道及依止道等四波羅蜜是資糧道定波羅蜜是依止道何以故從四波羅蜜所生善此善法生般若波羅蜜此般若波羅蜜依止定生般若波羅蜜卽是無分別智未得無上菩提於其中閒常能生起無分別智乃至極果離則有五度合則成二道能助第六度共成一極果故說爲伴類若無分別智依二道成得何果報

【論】모든 보살의 과보는
부처님의 두 가지 원만한 모임[圓聚]에 있어서
이 무분별지를
가행함으로 말미암아 이르러 얻는다.
016_1221_b_22L論曰
諸菩薩果報
於佛二圓聚
是無分別智
由加行至得
016_1221_c_01L
【釋】단지 과(果)일 뿐이고 보(報)가 아닌 것이 있으며, 과이면서 보인 것이 있다. 인으로부터 생하여 함께 쓰는 것을 과라고 한다면 인으로부터 생하여 홀로 쓰는 것을 과보라고 한다. 과는 생한다는 의미이고, 보는 익숙하다는 의미이다. 화신과 응신의 두 가지 신을 부처님의 두 가지 원만한 모임이라고 한다. 무분별지의 과보가 성숙하여져서 부처님의 두 가지 원만한 모임 가운데 있다. 만약 과가 무분별지의 가행 가운데 있어서 생한다면 이 과는 화신에 속한다. 만약 과가 무분별지를 증득한 가운데 있어서 생한다면 이 과는 응신에 속한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016_1221_c_01L釋曰有但果非報有是果是報若從因生共用者名果若從因生獨用者名果報果是生義報是熟義化應二身名佛二圓聚無分別智果報成熟在佛二圓聚中若果在無分別智加行中生此果屬化身若果在無分別智至得中生此果屬應身云何知耶
【論】가행으로 말미암아 이르러 얻는다.
016_1221_c_08L論曰
由加行至得
【釋】앞에서 설한 무분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행이고, 둘째는 바른 체[正體]이며, 셋째는 뒤에 얻음이다. 가행무분별에는 스스로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지(地)의 앞에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 이상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두 곳의 가행에 의거한다면 얻어지는 과는 화신이며, 바른 체인 무분별이다. 초지로부터 불과(佛果)까지의 모든 것을 이르러 얻는다고 말한다. 만약 바른 체인 분별지에 의거한다면 얻어지는 과보는 응신이다.
과보과(果報果)가 만약 이러하다면 이 등류과(等流果)는 무엇인가?
016_1221_c_09L釋曰前說無分別有三種一加行二正體三後得行無分別自有二種一在地前二在登地以上若依此二處加行所得果是化身正體無分別從初地乃至佛皆名至得若依正體無分別所得果報是應身果報果若爾此等流果云何

【論】보살의 등류과는
뒤에 생하는 가운데서
이 무분별지가
점차 수승하게 바뀜으로 말미암는다.
016_1221_c_16L論曰
菩薩等流果
於後後生中
是無分別智
由展轉增勝
016_1222_a_01L
【釋】과(果)는 혹(因)은 인과 동등하고, 혹은 인보다 수승하다. 이 과는 같은 품류로써 인을 삼는다. 이것을 등류과라고 한다. 무분별지의 등류과는 두 가지 원만한 모임 가운데서 초지(初地)를 바꾸어 2지가 되고, 내지는 10지를 바꾸어 부처를 이룬다. 뒤의 위계 가운데서 점차 늘어나고 점차 수승하여진다. 초지가 2지(地)의 동류인(同類因)이 되는 것처럼 2지는 초지의 등류과이다. 모든 지가 다 이러하여 남을 이익되게 함에 있어서 늘어나게 되고, 스스로를 이익되게 함에 있어서 수승하게 되고, 또한 배움의 위계가 늘어나게 되고, 배움이 없는 위계[無學位]가 수승하게 된다.
무분별지에서 벗어나 떠나는 것[出離]이 성취한다는 의미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016_1221_c_18L釋曰果或等因或勝因此果以同類爲因是名等流果無分別智等流果於二圓聚中轉初地爲二地乃至轉十地成佛於後後位中轉增轉勝初地爲二地同類因二地是初地等流果諸地悉爾於利他爲增於自利爲勝又學位爲增無學位爲勝無分別智出離得成就義云何

【論】모든 보살의 벗어나 떠나는 것이
얻음과 성취함과 상응하기 때문에
이 무분별지가
10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1222_a_03L論曰
諸菩薩出離
得成相應故
是無分別智
應知於十地

【釋】혹(惑)과 업을 없애는 것이 벗어남이 되고, 과보를 멸하는 것이 떠남이 되니 곧 유여(有餘)와 무여(無餘)의 두 가지 열반이다. 벗어남이 떠남의 의미이고, 떠남이 벗어남의 의미이다. 어찌하여 중복하여 설하는가? 떠남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중복된 이름을 짓는다. 첫째는 영원히 떠남이고, 둘째는 위로 떠남이며, 셋째는 결정하여 떠남이다. 무분별지는 벗어나 떠남 가운데서 두 가지 의미와 더불어 상응한다.
첫 번째는 얻음과 더불어 상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취함과 더불어 상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응은 10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초지에서 처음으로 무분별지를 얻으니 얻음과 상응한다고 말하고, 초지로부터 뒤에 10지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겁에서 무분별지를 닦아 곧 구경에 도달하는 것을 성취함과 상응한다고 말한다. 이 무분별지는 두 가지 도를 빌려서 3아승기겁에서 배움을 닦는다.
무슨 법으로써 구경(究竟)을 삼는가?
016_1222_a_05L釋曰滅惑業爲出滅果報爲離卽是有餘無餘二種涅槃出是離義離是出義何故重說由離有三義故作重一永離二上離三決離無分別智於出離中與二義相應一與得相應二與成就相應此二相應應知不出十地初地始得無分別智名得相應從初地後乃至十地於無數劫修無分別智乃至究竟名成就相應此無分別智藉二道於三阿僧祇劫修學以何法爲究竟

【論】모든 보살의 구경은
청정한 세 가지 신(身)을 얻음으로 말미암으니
이 무분별지가
지극히 수승하고 자재(自在)하기 때문이다.
016_1222_a_16L論曰
諸菩薩究竟
由得淨三身
是無分別智
至勝自在故

【釋】구경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청정의 구경이고, 둘째는 자재의 구경이다. 청정의 구경이란 초지에서 처음으로 청정함을 얻어 뒤에 각각의 지 가운데서 점차 청정하게 변하여 10지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청정한 것이다. 비유하건대 금을 정련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청정으로 말미암아 보살이 얻게 된 세 가지 신(身)이 뒤에 점차 청정하게 변한다.
016_1222_a_18L釋曰究竟有二種一淸淨究竟二自在究竟淸淨究竟者初地始得淸淨後於地地中轉轉淸淨至十地究竟淸淨譬如練金由此淸淨菩薩所得三身後後轉淸淨
016_1222_b_01L자재의 구경이란 단지 세 가지 청정한 신을 얻는 것이 구경이 아니다. 다시 다른 구경이 있으니 논서의 뒷부분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은 열 가지 자재를 말한다. 이 열 가지 자재는 뒤에 점차 수승하게 변한다. 이 두 가지 법이 최후에 궁극적으로 수승한 것이 무분별지에 의해 얻어지는 구경이니, 증상과(增上果)라고 말한다. 무분별지의 공덕은 어떠한가? 무분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행의 무분별이고, 둘째는 근본적인 무분별이며, 셋째는 뒤에 얻은 무분별이다. 어찌하여 가행이 무분별이라는 이름을 얻는가? 먼저 남으로부터 무분별지를 듣는 것이 참다운 보살이다. 보살은 스스로 참다운 도리를 증득하지 못하고 단지 이것에 대하여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이렇게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뒤에 마침내 이 무분별지의 도리를 헤아리는 것에 들어갈 수 있다. 무분별지가 이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생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이 믿고 즐거워함이 가행의 무분별이 된다. 이 가행의 무분별의 공덕을 물들지 않음[無染]이라고 한다. 그 비유는 무엇인가?
016_1222_a_23L自在究竟者不但得三種淸淨身究竟復有別究竟十自在如論後說此十自在後後轉此二種法最後極勝是無分別智所得究竟名增上果無分別智功德云何無分別有三種一加行無分別二根本無分別三後得無分別云何加行得無分別名先從他聞無分別智是眞菩薩菩薩自未證眞道理於此智起信樂心由依止此信樂心方得入度此無分別智理無分別智從此信樂生起故說此信樂爲加行無分別此加行無分別功德謂無染其譬云何

【論】허공과 같이 더럽혀지지 않는
이 무분별지는
갖가지 무거운 악업에 물들지 않는다.
오직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016_1222_b_13L論曰
不染如虛空
此無分別智
種種重惡業
由唯信樂故
016_1222_c_01L
【釋】이 무분별지는 청정하여 물들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허공이 네 가지 차별적 대상[塵]에 물들여지지 않는 것과 같다. 무슨 인식현상이 물들지 않을 수 있는가? 신ㆍ구ㆍ의업으로부터 생하는 갖가지 무거운 악업을 말한다. 견도와 수도에 다름이 있고, 열 가지 악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갖가지라고 말한다. 극히 무거운 번뇌가 연기하게 되어 항상 일어나니, 만약 참회하는 마음을 짓지 않고서 다스리지 않는다면 도와주는 품류들이 있기 때문에 무겁다고 말한다. 이러한 악업으로 인하여서도 오염시킬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바른 설법을 들으면 무분별지에 대하여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생하며, 이렇게 믿고 즐거워함으로 말미암아 네 가지 악도의 업을 파괴한다. 왜냐 하면 악업은 도리가 아닌 것[非理]에 의하여 일어나고, 믿고 즐거워함은 참다운 도리로부터 생한다. 도리가 아닌 것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허망하고 참다운 도리로부터 생하기 때문에 진실하다. 허망함은 진실함을 짝할 수 없기 때문에 깨뜨려 무너진다. 이 게송은 가행의 무분별지가 네 가지 악도의 업을 대하여 다스릴 수 있다. 악업과 더불어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가행의 공덕이다.
근본적인 무분별지의 공덕과 청정은 어떠한가?
016_1222_b_15L釋曰此無分別智淸淨無染譬如虛空不爲四塵所染何法不能染謂種種重惡業從身口意生有見修道異有十惡差別故名種種極重煩惱爲緣起恒作若作無悔心無對治有伴類故名重因此惡業不能染污若人從聞正說於無分別智生信樂由此信樂破壞四惡道業何以故惡業依非理起信樂從是理生依非理起故從是理生故實虛不能對實是故破壞此偈顯加行無分別智能對治四惡道業由與惡業不相雜故此卽加行功德根本無分別智功德及淸淨云何

【論】허공과 같이 청정한
이 무분별지는
모든 장애를 해탈한다.
얻음과 성취함으로 말미암아서.
016_1222_c_06L論曰
淸淨如虛空
此無分別智
解脫一切障
由得及成就

【釋】허공이 연기와 구름 등의 네 가지 장애를 떠난 것을 세간에서는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무분별지의 청정도 역시 이러하다. 무슨 인식현상을 떠나기 때문에 청정함을 얻는가?
016_1222_c_08L釋曰如虛空離煙雲等四障世閒說爲淸淨無分別智淸淨亦爾離何法故得淸淨
【論】모든 장애를 해탈한다.
論曰
解脫一切障
【釋】모든 장애란 가죽[皮煩惱]ㆍ살[肉煩惱]ㆍ마음[心煩惱]의 세 가지 장애, 혹은 일천제ㆍ외도ㆍ성문ㆍ독각의 네 가지 덕의 장애[德障]를 말한다. 이와 같은 장애를 해탈하기 때문에 청정하다.
이 해탈은 무슨 원인으로 얻을 수 있는가?
016_1222_c_11L釋曰一切障謂皮肉心三障或一闡提外道聲聞獨覺四德障由解脫如此障故淸淨此解脫何因得成
【論】얻음과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016_1222_c_14L論曰
由得及成就
【釋】모든 지들과 더불어 지극한 덕과 상응하고, 열 번째의 지 가운데서 인을 성취하고, 불지 가운데서 과를 성취하기 때문에 모든 장애를 해탈할 수 있다. 이 게송은 근본적인 무분별지가 모든 장애를 대하여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곧 근본의 공덕이다.
무분별후득지의 공덕과 물들지 않음은 어떠한가?
016_1222_c_15L釋曰由與諸地至德相應由於第十地中因成就由於佛地中果成就故得解脫一切障此偈顯根本無分別智能對治一切障卽根本功德無分別後得智功德無染云何

【論】허공과 같이 물들지 않는
이 무분별지는
만약 세간에 출현한다고 하더라도
세간의 인식현상에 물들여지지 않는다.
016_1222_c_20L論曰
如虛空無染
是無分別智
若出現於世
非世法所染
016_1223_a_01L
【釋】허공은 물이 적실 수 없고, 불이 태울 수 없으며, 바람이 움직일 수 없다. 무분별지가 물들지 않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다르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물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 하면 보살은 이 지혜를 의지하여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관한다. 이 지혜의 힘에 의하여 보살은 삼계에 들어가려는 마음을 일으켜서 갖가지 본생을 일으킨다. 비록 세간 속에 생하여 있다고 하더라도 세간의 여덟 가지 법에 의하여 달리 변하지 않는다. 여덟 가지 인식현상[八法:八風]이란 얻음과 얻지 못함, 좋은 이름과 나쁜 이름, 칭찬하고 헐뜯는 것, 즐거움과 고통을 말한다. 이 여덟 가지 인식현상으로 인하여 탐욕과 성냄을 일으키지만 탐욕과 성냄이 달리 변화시킬 수 없으며, 탐욕과 성냄의 근본무명이 움직이게 할 수도 없다. 왜냐 하면 허망한 것은 진실한 것을 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무분별지로부터 생하기 때문에 무분별이라고 말한다.
016_1222_c_22L釋曰虛空水不能濕火不能然風不能動無分別智無染亦爾無變異故說無染何以故菩薩依此智觀一切衆生利益事由此智力菩薩故作心入三界現種種本生雖生在世中爲世閒八法之所變異八法謂得不好名惡名讚毀樂苦因此八法故起欲瞋欲瞋不能變異欲瞋根本無明不能令動何以故虛妄不能對眞實故此智從無分別智生故名無分
이 게송은 후득지(後得智)가 보(報)의 장애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생사와 열반의 두 곳에 머물지 않고 단지 남을 이익되게 하기만을 위하는 것, 이것이 곧 후득지의 공덕이다.
이 세 가지 무분별의 차별은 무엇인가? 이 차별이 서로 넘치지 않게 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비유를 세운다.
016_1223_a_10L此偈爲顯後得智能免報障於生死涅槃二處不住但爲利他此卽後得智功德此三種無分別差別云何爲顯此差別令不相濫是故立譬

【論】벙어리가 차별적 대상[塵]을 받아들이고자10) 구하는 것과 같고,
벙어리가 차별적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 차별적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016_1223_a_13L論曰
如瘂求受塵
如瘂正受塵
如非瘂受塵
三智譬如此

【釋】비유하건대 벙어리가 모든 대상을 구하여 찾지만 대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가행의 무분별도 역시 이렇다. 방편도 가운데 있으면서 진여를 심사(尋思)하지만 언설할 수 없다. 비유하여 벙어리가 모든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여서 이미 대상을 얻었지만 대상을 언설할 수 없다.
근본적인 무분별도 역시 이러하여 바르게 진여관에 있지만 증득하여 본 것을 역시 언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비유하건대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 모든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이며 또한 대상을 언설할 수 있는 것처럼, 후득지도 역시 이러하다. 보여지는 것 그대로 바른 가르침을 세울 수 있고 남을 위하여 풀어서 설명한다.
016_1223_a_16L釋曰譬如瘂人求覓諸塵不能說塵加行無分別亦爾在方便道中尋思眞如而不能說譬如瘂人正受諸塵雖已得塵不能說塵根本無分別亦正在眞如觀如所證見亦不能說譬如非瘂人正受諸塵又能說塵後得智亦爾如其所見能立正教爲他解說
016_1223_b_01L처음에는 얻지 못하였으나 분별을 떠난 것을 얻고자 구하며 인연을 설함이 없기 때문에 언설할 수 없다. 다음에는 분별을 떠난 것을 바르게 얻으나 인연을 설함이 없기 때문에 언설할 수 없다. 뒤에는 이미 얻어 관(觀)에서 나오기 때문에 앞에서 본 그대로 언설할 수 있으며 전도됨이 없다. 이 게송은 세 가지의 언설이 없음과 언설이 있음이 다르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016_1223_b_01L初未得向得離分別無說因緣故不能說次正得離分別無說因緣故不能說後已得由出觀故如前所見能說無倒此偈顯三種無言說有言說異故有差別

【論】어리석은 사람이 대상을 받아들이고자 구하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이 바르게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차별적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016_1223_b_05L論曰
如愚求受塵
如愚正受塵
如非愚受塵
三智譬如此

【釋】사물의 품류를 식별하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이름한다. 어리석음의 비유는 앞에서 해석하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의미를 차례로 비유한다. 이 게송은 분별이 없음과 있음이 다르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언설이 없음은 분별이 없음을 인으로 삼는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언설이 없다. 언설이 있음은 분별이 있음을 인으로 삼으니 분별이 있기 때문에 언설이 있다. 어리석음의 비유는 곧 무분별을 드러낸다. 이 세 가지 지혜의 경계의 허망함과 진실함은 어떠한가?
016_1223_b_07L釋曰未識物類名之爲愚愚譬次第三義如前釋此偈顯無分別有分別異故有差別無言說以無分別爲由無分別故無言說有言說以有分別爲因由有分別故有言說愚譬卽顯無分別此三智境虛實云何

【論】다섯 가지 식이 차별적 대상을 받아들이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다섯 가지 식이 차별적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며,
다섯 가지 식이 아닌 것이 차별적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016_1223_b_13L論曰
如五求受塵
如五正受塵
如非五受塵
三智譬如此
016_1223_c_01L
【釋】다섯은 분별이 없는 안(眼) 등의 5식(識)을 이름하여 가리킨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5식 가운데 있으면서 다섯 가지 대상을 구하여 찾는 것과 같아서 의식이 서로의 사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혹은 진실을 연하고 혹은 허망함을 연한다. 가행의 무분별지도 역시 이러하다. 혹은 한 부분을 증득하여 진실이 되고, 혹은 증득하지 못하여 허망함이 된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5식 가운데 바르게 있는 것처럼 진실한 경계를 연하여 분별이 없고 언설이 없다.
근본적인 무분별지도 역시 이러하여 진실한 경계를 얻어서 분별이 없고 언설도 없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의식 가운데 있는 것처럼 단지 먼저 받아들여진 대상을 연하므로 허망한 경계를 연하여 분별이 있고 언설이 있다고 말한다.
무분별후득지(無分別後得智)도 역시 이와 같아서 허망한 경계를 연하여 분별이 있고 언설이 있다. 이 게송은 세 가지 지혜가 연하여지는 경계가 진실하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016_1223_b_16L釋曰五名目無分別眼等五識譬如人在五識中求覓五塵或緣實或緣意識與五識相閒起故加行無分別智亦爾或證一分爲實或不證爲譬如人正在五識中得眞實境無分別無言說根本無分別智亦爾眞實境無分別無言說譬如人在意識中但緣先所受塵名緣虛境有分別有言說無分別後智亦爾緣虛境有分別有言說此偈顯三種所緣境有實有虛故有差別

【論】식별하지 못하면서 이해하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읽어서 바르게 인식현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며
받아들인 인식현상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같으니,
차례로 세 가지 지혜를 비유한다.
016_1223_c_04L論曰
如未識求解
如讀正受法
如解受法義
次第譬三智

【釋】비유하건대 사람이 논문을 식별하지 못하고 단지 문자를 식별하기를 구하는 것과 같이 가행의 무분별지도 역시 이러하다. 진여를 식별하지 못하면서도 단지 진여를 보는 방편만을 배운다. 이것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이미 문자를 식별하지만 문자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여 문자를 바르게 읽어서 단지 법(法:교법)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의미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근본적인 무분별지도 역시 이러하다. 자신을 이익되게 하는 공용은 이미 이루었지만 남을 이익되게 하는 공용은 아직 없다. 이것은 이미 이해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016_1223_c_06L釋曰譬如人未識論文但求識文字加行無分別智亦爾未識眞如但學見眞如方便此顯未解譬如人已識文字未了文字義正讀文字但能受未能受義根本無分別智亦爾利功用已成未有利他功用此顯已
비유하건대 사람이 이미 문자를 식별하고 또한 의미도 깨우쳐서 사유함에 바르게 있다. 이 사람은 두 가지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문자를 식별할 수 있고 또한 의미도 깨우칠 수 있다. 공용의 구경이기 때문이다. 무분별후지도 역시 이러하다. 이미 진여를 통달하였고 또한 관(觀)에서 나왔다. 앞에서 본대로 해설하여 전도됨이 없으니, 이것은 구경을 이미 드러내 풀이한다. 이 게송은 배움의 공능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차별이 있음을 드러낸다. 앞에서 이미 세 가지를 순서대로 밝혔으니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이미 이해하는 것, 그리고 구경을 이해하는 것을 일컫는다. 앞의 하나는 경계가 없고 뒤의 둘, 즉 인식현상과 실체적 대상은 경계가 있다. 다른 모습은 무엇인가?
016_1223_c_13L譬如人已識文字又已了義正在思中是人具有二能能識文字又能了義以功用究竟故無分別後智亦已通達眞如又已出觀如前所見解說無倒此顯解已究竟此偈顯學功有異故有差別前已明三種次第謂未解己解及解究竟前一無境後二有境謂法及義後二有境異相云何

【論】사람이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처럼
무분별도 역시 이러하다.
사람이 눈을 바르게 뜨고 있는 것처럼
후득지도 역시 이러하다.
016_1223_c_20L論曰
如人正閉目
無分別亦爾
如人正開目
後得智亦爾
016_1224_a_01L
【釋】이 게송은 단지 근본지와 후득지만을 드러낸다. 근거가 다르기 때문에 차별이 있으니, 근본지의 근거는 마음도 아니고 마음이 아님도 아니며, 후득지는 곧 마음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지혜는 경계에 있어서 다름이 있다. 근본지는 경계를 취하지 아니하여 경계와 지혜가 다름이 없기 때문이며, 후득지는 경계를 취하니 경계와 지혜가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근본지는 경계를 연하지 아니하여 눈을 감는 것과 같고, 후득지는 경계를 연하여 눈을 뜬 것과 같다. 이 게송은 경계를 취하지 않고 경계를 취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두 지혜의 위덕의 차별은 무엇인가?
016_1223_c_23L釋曰此偈但顯根本智及後得智依止不同故有差別根本智依止非心非非心後得智則依止心故二智於境有異根本智不取境以境智無異故後得智取境以境智有異故本智不緣境如閉目後得智緣境開目此偈顯不取境取境有異故有差別此二智威德差別云何

【論】무분별은 허공과 같아서
물듦ㆍ장애ㆍ변이ㆍ변제(邊際)가 없다.
허공 가운데 차별적 대상성[色]이 드러나듯이
후득지도 역시 이러하다.
016_1224_a_08L論曰
如空無分別
無染礙異邊
如空中色現
後得智亦爾

【釋】비유하건대 허공에는 네 가지 덕이 있는 것과 같다. 첫째는 물들지 않고, 둘째는 장애가 없으며, 셋째는 분별이 없으며, 넷째는 변제가 없다. 근본지도 역시 이와 같아서 모든 세간의 여덟 가지 법과 일곱 가지 흐름에 물들여질 수 없다. 그것들을 대하여 다스리기 때문에 물듦이 없다고 설한다. 모든 경계에서 이치에 맞고 양에 맞고[如理如量], 장애가 없으며, 집착이 없기 때문에 장애가 없다고 설한다. 모든 인식현상에서 한결같이 진여인 공(空)이 두루 가득하기 때문에 분별이 없다고 설한다. 모든 가장자리를 떠나서 중도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변제가 없다고 설한다. 비유하여 공 가운데에 색이 드러나 나타나는 것처럼 공은 분별할 수 없고 색은 분별할 수 있다. 후득지도 역시 이러하다. 인(因)을 분별할 수 없으면서 이 지혜는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분별의 주체이면서 역시 분별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한다.
만약 불과(佛果)가 무분별지에 의해 드러내어지는 것이라면 분별을 떠난 중생은 어떻게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이치에 맞게 전도됨이 없이 지을 수 있는가? 공용이 없이 일을 짓는 것[無功用作事]을 드러내기 위하여 거듭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24_a_10L釋曰譬如虛空有四種德一無染無礙三無分別四無邊根本智亦一切世閒八法七流等所不能染由是彼對治故故說無染於一切境如理如量無障無著故說無㝵於一切法一味眞如空遍滿故故說無分離一切諸邊中道不可量故故說無邊譬如色於空中顯現空不可分色可分別後得智亦爾因不可分此智可分別謂此是能分別亦是所分別若佛果是無分別智所顯離分別衆生云何得作衆生利益事如理不倒爲顯無功用作事故重說偈
016_1224_b_01L
【論】비유하건대 마니(摩尼)와 하늘의 북[天鼓]11)
사유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을 이루듯이,
이와 같이 분별하지 아니하고
갖가지 불사(佛事)를 이룬다.
016_1224_a_23L論曰
譬摩尼天鼓
無思成自事
如此不分別
種種佛事成

【釋】비유하건대 여의보주[如意寶]가 분별 없이도 중생이 원하고 구하는 것처럼 일을 행할 수 있는 것과 같고, 비유하건대 하늘의 북이 사람 없이 두드리고 매달려 있어서 저 중생이 바라는 뜻에 따라 네 가지 소리, 즉 원망이 오고 가고 욕구하는 것을 받고 싫어함을 일으키는 것을 낼 수 있다. 모든 부처님도 이러하시니, 이미 분별을 떠나서 갖가지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일으킬 수 있다. 이익되게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신의 이익이니, 여의보주와 같고, 둘째는 법을 설하는 이익이니, 마치 하늘의 북과 같다.
016_1224_b_03L釋曰譬如如意寶無有分別能作如衆生所願求事譬如天鼓無人扣擊能隨彼衆生所欲之意出四種聲怨來怨去受欲生厭諸佛亦爾已離分別能起種種利益衆生事利益事有二種一化身利益如如意寶二說法利益猶如天鼓
이 무분별지가 매우 깊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지혜는 당연히 분별의 대상[所分別]을 연하여 의타성이 일어나게 되는가? 당연히 나머지 경계를 연하여 일어나게 되는가? 만약 이렇다면 무엇이 방해되는가? 만약 분별의 대상을 취하여 의타성이 경계가 된다면 이 지혜는 분별이 없다는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그 밖의 다른 경계를 연하여 일어난다면 이 경계를 떠나서는 그 밖의 다른 경계가 없으니 그 밖의 다른 경계를 연한다는 의미가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만약 그 밖의 다른 경계를 연하여 일어난다면 경계와 지혜가 차별이 없다는 의미가 곧 성립하지 않는다.
016_1224_b_10L此無分別智甚深義云何約境立甚深義此智爲當緣所分別依他性起爲當緣餘境起爾何妨若取所分別依他性爲境智無分別義不成若緣餘境起離此境則無別餘境緣餘境義亦不成次若緣餘境起境智無差別義則不

【論】이것이 아니며 이것이 아님도 아니다.
지혜가 아니며 지혜가 아님도 아니다.
경계와 더불어 차별이 없으니,
이 지혜를 무분별이라고 일컫는다.
016_1224_b_17L論曰
非此非非此
非智非非智
與境無差別
智名無分別
016_1224_c_01L
【釋】이 지혜는 의타성을 연하지 아니하고 경계가 된다. 왜냐 하면 이 지혜는 분별로써 경계를 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역시 그 밖의 다른 경계를 연하지도 않는다. 왜냐 하면 이 지혜는 단지 의타성12)을 연하여 법여(法如)13)가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법과 법여는 하나이라거나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청정한 경계가 아니면서 청정한 경계이기 때문이며, 통상이 되면서 통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식(識)을 연하지 않음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아님도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다시 이 지혜는 당연히 참다운 지혜가 되기도 하고 지혜가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만약 이렇다면 무엇을 거리끼는가? 만약 지혜가 성품이 된다면 어찌하여 분별하지 않는가? 지혜가 분별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혜가 아닌 것이 성품이 된다면 어찌하여 지혜라고 부르는가? 분별이 없음은 지혜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무분별지라고 설하는가?
016_1224_b_19L釋曰此智不緣依他性爲境何以故此智不以分別爲境故故言非此不緣餘境何以故此智但緣依他性法如爲境故法及法如不可說一異非淸淨淸淨境故爲通相不通相故非不緣識故言非非此復次此智爲當是智爲當非智若爾何妨若智爲云何不分別以智是分別性故非智爲性云何稱智無分別非智性云何說爲無分別智
【論】지혜가 아니고 지혜가 아님도 아니다.
016_1224_c_06L論曰
非智非非智
【釋】어찌하여 지혜가 아니라고 말하는가? 가행과 후득지 가운데서는 생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가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이러하다면 어찌하여 지혜가 아닌 혹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러한 의미는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지혜가 아닌 혹은 바르지 못한 사유로부터 생하여 탐욕 등의 흐름을 일으킬 수 있다. 무분별가행지로부터 생하고 무분별후득지를 생할 수 있기 때문에 지혜가 아님이 아니다.
또한 다시 이 지혜는 분별 가운데서는 생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지혜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생하지 아니하고, 단지 분별의 법여(法如) 가운데서만 생하기 때문에 지혜가 아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게송의 앞 구절은 곧 뒤의 구절을 설명한다.
016_1224_c_07L釋曰云何說非智於加行及後得智中不生故言非智若爾云何不成非智惑此義亦不成何以故非智惑從不正思惟生能起欲等流此從無分別加行智生能生無分別後得智故說非非智復次由此智於分別中不生故說非智由此智不於餘處生但於分別法如中生故說非非智此偈前句卽釋後句
【論】경계와 더불어 차별이 없으니, 이 지혜를 무분별이라고 일컫는다.
016_1224_c_15L論曰
境無差別
智名無分別
【釋】만약 지혜가 인식 주관[能取]과 인식 객관[所取]의 두 가지 상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면 분별이 있는 것이다. 가행지(加行智)를 무분별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지혜가 인식 객관과 다르지 않고 평등하고 평등하게 일어난다면 이것을 무분별지라고 일컫는다. 그 밖의 다른 경전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인식현상의 자성은 분별이 없다고 설하셨다. 이러한 도리를 드러내기 위하여 거듭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24_c_16L釋曰若智由能取所取二相起有分別如加行智不名無分別若智與所取不異等平等起是名無分別智於餘經中佛說一切法自性無分別欲顯此道理故重說偈

【論】부처님께서는 모든 인식현상14)의 자성이
무분별하다고 설하셨다.
분별의 대상[所分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분별도 없다.
016_1224_c_21L論曰
佛說一切法
自性無分別
所分別無故
彼無無分別
016_1225_a_01L
【釋】모든 인식현상의 자성은 분별이 없다. 이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러한 의미를 증득하기 위해서 세 번째 구절을 세운다. 분별할 수 있는 품류의 것은 실제로 실체적 대상[義]15)이 없다. 무분별한 인식현상에 이르러서 진실로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의 자성은 분별이 없다고 말한다.
만약 분별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인식현상의 자성이 무분별하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중생은 자성으로 해탈하지 못하는가?
016_1224_c_23L釋曰一切法自性無分別此義云何可知爲證此義故立第三句由可分別類實不有義至無分別法眞實是有故說一切法自性無分別若由所分別不有故一切法自性無分別者云何衆生不自性解脫
【論】그것들이 없으므로 분별이 없다.
016_1225_a_06L論曰
彼無無分別
【釋】모든 인식현상의 자성이 무분별하므로 지혜는 경계와 같이 분별이 없다. 만약 이러하다면 어째서 자성으로 해탈하지 않는가? 실제로 이러해서 모든 인식현상의 자성이 분별이 없고 지혜가 경계와 같이 자성이 무분별하지만 자성으로 해탈할 수는 없다. 닦아서 지혜를 얻음으로써 이 인식현상을 증득할 수 있다.16) 지혜가 아닌 장애로 말미암아 지혜가 일어날 수 없으니, 반드시 지혜를 닦아 장애를 멸하여야만 바야흐로 해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성으로 해탈한다는 의미는 없다. 자성이 무분별한 가운데 분별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지혜가 아니고 곧 무명이다.
이제 자성이 무분별한 인식현상 가운데 있는 무분별지의 차별을 설하여야 할 것이다.
016_1225_a_07L釋曰由諸法自性無分別智如境無分別若爾何故不自性解實爾諸法自性無分別智如境亦自性無分別而不得自性解脫修得智能證此法由非智障故智不得起必須修智滅障方得解脫故無自性解脫義於自性無分別中若起分別此爲非智卽是無明於自性無分別法中所有無分別智今當說其差別
【論】이 가운데의 무분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행의 무분별지이고, 둘째는 무분별지이며, 셋째는 무분별후지이다.
【釋】자성(自性)의 무분별 가운데에서 만약 총괄적으로 설한다면 이 세 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는 곧 도의 방편과 도의 바른 일과 도의 구경(究竟)을 드러내니, 방편에 들어감과 방편에 머묾과 방편에서 나옴을 말한다. 만약 인(因)에 있어서, 인식 주관[人]에 있어서, 그리고 사(事)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설명한다면 곧 열한 가지가 있다.
016_1225_a_15L論曰此中無分別有三種一加行無分別智二無分別智三無分別後智釋曰於自性無分別中若摠說有此三種此三種卽顯道方便道正事道究竟謂入方便住方便出方便若約因約人約事別說則有十一種
016_1225_b_01L【論】가행의 무분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인연(因緣)과 인통(引通)과 수습(數習)의 힘이 차별을 생하여 일으키기 때문이다.
【釋】이 세 가지는 인(因)에 있어서 차별이 있다. 가행의 무분별은 세 가지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혹은 인연의 힘으로 말미암아, 혹은 이끌어 꿰뚫는 힘[引通力]으로 말미암아, 혹은 거듭 익힌 힘[數習力]으로 말미암아 이 세 가지 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에 차별이 있음이 생하여 일어난다. 인연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은 곧 자성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끌어 꿰뚫는 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은 곧 오래 묵은 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거듭 익힌 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은 곧 현재에 짓는 공력(功力)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016_1225_a_21L論曰加行無分別有三種謂因緣引通數習力生起差別故釋曰此三約因有差別加行無分別由三力成或由因緣力或由引通力或由數習由此三力成故生起有差別若由因緣力成卽是由性力成若由引通力成卽是由宿生力成若由數習力卽於現在由作功力成
【論】무분별지(無分別智)에도 역시 세 가지가 있으니, 지족(知足)ㆍ무전도(無顚倒)ㆍ무희론(無戱論)의 무분별의 차별 때문이다.
【釋】이 세 가지는 사람에 있어서 차별이 있으니, 곧 범부와 2승(乘) 그리고 보살이다. 만족함을 아는[知足] 무분별은 문혜와 사혜, 두 가지 지혜의 구경(究竟)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족함을 알기 때문에 분별이 없다. 따라서 만족함을 아는 무분별이라고 한다. 만약 범부와 보살이 문혜와 사혜의 궁극적인 일에 도달한다면 마땅히 얻어지는 것이 있으니, 이미 모두 다 얻어서 만족함을 아는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분별이 없다. 또한 세간의 중생은 만족함을 아는 무분별을 가지고 있으니 이 만족함을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 중생들 위에 생하여 그 가운데서 꼭대기에 있다. 출리(出離)의 구경을 이루기를 꾀하나 이것을 지나 다시 행할 곳이 없다. 만족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다시 나아가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이 없다.
016_1225_b_06L論曰分別智亦有三種謂知足無顚倒無戲論無分別差別故釋曰此三約人有差別卽凡夫二乘菩薩知足無分別應知由得聞思二慧究竟故知足故無分別故說知足無分別凡夫菩薩至聞思慧究竟事有所應得皆悉已得生知足心故無分別次世閒衆生有知足無分別由此知彼衆生上生有頂於中計爲出離究竟過此更無行處起知足心不復進修故無分別
016_1225_c_01L전도가 없는 무분별은 즉 2승이다. 그들이 이미 무상(無常) 등의 네 가지 전도가 없는 상인 진경(眞境)을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상(常)17) 등의 네 가지 전도가 없는 상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다시는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이 없다.
희론이 없는 무분별은 모든 보살을 말한다. 모든 보살은 모든 법을 분별하지도 않고 나아가 위없는 보리도 분별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언설이 없기 때문이다. 언설이 없는 가운데서 억지로 언설을 세우기 때문에 희론이라고 한다. 언설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곧 네 가지 비방[四謗]이다. 만약 있다고 말한다면 곧 증익의 비방이며, 만약 없다고 말한다면 곧 손감의 비방이다. 만약 있기도 하고 역시 없기도 하다고 말한다면 곧 서로 어긋나는 비방이다. 만약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한다면 곧 희론의 비방이다. 보살은 무분별지를 얻어서 언설로써 드러내 보일 수 없기 때문에 희론이 없는 무분별이라고 일컫는다. 왜냐 하면 세간의 지혜를 벗어나 초월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16_1225_b_17L無顚倒無分別謂二由彼已通達眞境無常等四種無倒相由常等四無倒相永不更分別故無分別無戲論無分別謂諸菩薩諸菩薩不分別一切法乃至不分別無上菩提何以故諸法無言說故無言說中强立言說故名戲論言說有四種卽是四謗若說有卽增益謗若說無卽損減謗若說亦有亦無相違謗若說非有非無卽戲論謗薩得無分別智不可以言說顯示故稱無戲論無分別何以故出過世閒智故又非世閒智所知故
【論】무분별후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통달(通達)ㆍ억지(憶持)ㆍ성립(成立)ㆍ상잡(相雜)ㆍ여의(如意)의 드러내보임의 차별 때문이다.
【釋】이 다섯 가지는 사(事)에는 차별이 있다. 후득지는 드러내보일 수 있음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 가운데 드러내보인다는 것은 깨달아 마치는 것으로써 의미를 삼는다. 이 지혜로 말미암아 통달한 뒤에 이와 같은 사(事)를 드러내보인다. 나는 관(觀) 가운데서 이러이러한 일을 알아 살펴본다고 말하기 때문에 통달의 드러내보임이라고 일컫는다.
이 지혜로 말미암아 관에서 나온 뒤에 통달한 것과 같이 기억하고 지녀서 물러나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억지의 드러내보임이라고 부른다.
이 지혜로 말미암아 스스로 통달한 것과 같이 바른 가르침을 세워 남에게 수행하게 하기 때문에 성립의 드러내보임이라고 일컫는다.
016_1225_c_06L論曰分別後智有五種謂通達憶持成立相雜如意顯示差別故釋曰此五約事有差別後得智以能顯示爲性此中顯示以覺了爲義由此智於通達後時顯示如此事云我於觀中見如此如此事故稱通達顯示由此智出觀後時如所通達憶持不退失故稱憶持顯示由此智如自所通達能立正教令他修行故稱成立顯示
이 지혜로 말미암아 보살은 앞에서와 같이 모든 법을 연하여 경계를 삼으니 앞에서의 잡된 경계와 같이 지혜가 이 경계를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 관찰로 말미암아 곧 전의(轉依)를 얻기 때문에 상잡의 드러내보임이라고 말한다. 이 지혜로 말미암아 보살은 이미 전의를 얻는다.
보살이 생각하고 바라는 대로 뜻과 같이[如意] 모든 것을 이루므로 땅[地] 등의 모든 요소[大]가 바뀌어 금 등을 이루기 때문에 여의의 드러내보임이라고 말한다.
016_1225_c_15L由此智菩薩如先緣一切法爲境如先雜境界智觀察此境由此觀察卽得轉依故稱相雜顯示由此智菩薩已得轉依如菩薩所思欲如意皆謂於地等諸大轉爲金等故稱如意顯示
【論】무분별지를 이루어 세우기 위하여 다시 다른 게송을 읊는다.
【釋】이미 무분별지의 차별의 의미를 설하였다. 다시 무분별의 의미를 이루어 세우고자 거듭 게송을 읊는다.
016_1225_c_21L論曰爲成立無分別智說別偈釋曰已說無分別智差別更欲成立無分別義故重說偈
016_1226_a_01L
【論】아귀(餓鬼)ㆍ축생(畜生)ㆍ인간과
그리고 모든 하늘[天] 등이 응하는 것과 같이
경계는 하나이나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 경계들이 성립하는 것을 허용한다.
016_1225_c_23L論曰
餓鬼畜生人
諸天等如應
一境心異故
許彼境界成

【釋】비유하건대 하나의 강을 네 중생이 분별하는 것과 같이 네 가지 경계를 이룬다. 아귀는 이른바 고름과 피가 되고, 물고기 등의 축생은 이른바 머무는 곳이 되고, 사람은 이른바 물이 된다. 하늘은 이른바 땅이 된다. 분별되는 것에 따라 각기 하나의 경계를 이룬다. 만약 경계가 진실한 것이라면 마땅히 서로간에 방해가 되어야 한다. 마땅히 한 곳에서 동시에 함께 네 가지 경계를 이루지는 않는다. 모두 다 의식이 분별하여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네 가지 식(識)을 함께 연하게 한다면 식은 경계를 떠나지 않으므로 너는 역시 한 곳에서 동시에 함께 네 가지 경계가 있다는 것을 허락하여야 한다. 만약 함께 네 가지 경계가 있다는 것을 허락한다면 곧 모든 분별이 실제로 있지 않다는 것을 마땅히 믿어야 한다. 만약 실제의 경계가 없다면 식은 마땅히 스스로 생하여 경계를 연하지 않고 일어나야 한다. 만약 이렇다면 유식(唯識) 가운데 네 가지 난제가 다시 성립한다. 네 가지 정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난제는 그들이 논하고 풀이하는 것처럼, 식(識)은 있지만 경계는 없다. 이것에는 무슨 과실이 있는가? 이러한 정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거듭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26_a_03L釋曰譬如一江約四衆生分別則成四境餓鬼謂爲膿血魚等畜生謂爲住處人謂爲水天謂是地隨所分別各成一境若境是實應互相妨不應一處一時竝成四境當知皆是意識分別所作若汝許四識竝緣識不離汝亦應許一時一處竝有四境許竝有四境則應信一切分別皆非實有若無實境識應自生不緣境起若爾唯識中四難還成四義不成難如彼論釋有識無境斯有何失顯此義故重說偈

【論】과거와 미래에
꿈과 두 가지 그림자 가운데서
지혜는 있지 않는 경계를 연한다.
이것은 변하지 아니하고 경계가 된다.
016_1226_a_15L論曰
於過去未來
於夢二影中
智緣非有境
此無轉爲境

【釋】과거와 미래의 사(事)는 단지 이름만 있고 체가 없다. 만약 마음이 이 두 시각을 연한다면 단지 식만이 있고 경계는 없다. 꿈 가운데서 연하여지는 것도 역시 이러하다. 그림자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거울 속의 그림자이고, 둘째는 선정 속의 그림자이다. 정심(定心)이 일으키는 파란 색과 노란 색 등의 상은 마음을 떠나서 달리 이 법이 없기 때문에 설하여 그림자라고 이름한다. 만약 마음이 이 두 가지 그림자를 연한다면 역시 단지 식만이 있고 경계는 없다. 만약 이러한 네 가지 경계가 없다면 식은 무엇에 의하여 연하여지는가?
016_1226_a_17L釋曰過去未來事但有名無體若心緣此二世但有識無境夢中所緣亦影有二種一鏡中影二定中影心所起靑黃等相離心無別此法故說名影若心緣此二影亦但有識無若無此四境識何所緣
【論】이것은 변하지 아니하고 경계가 된다.
016_1226_a_23L論曰
無轉爲境
016_1226_b_01L【釋】바깥의 대상은 본래 없다. 식이 변이(變異)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식은 곧 이것을 연하여 경계를 삼기 때문에 바뀌지 아니함을 경계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가 이미 성립하여 마땅히 다시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만약 이러한 이치를 없애 버린다면 성불(成佛)이라는 의미도 없다.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하여 거듭 게송으로 설한다.
016_1226_b_01L釋曰外塵本來是無變異所作識卽緣此爲境故言無轉爲境此義已立不應復疑何以故撥無此理無成佛義爲顯此義故重說偈

【論】만약 차별적 대상이 성립하여 경계가 된다면
무분별지는 없다.
016_1226_b_05L論曰
若塵成爲境
無無分別智

【釋】만약 차별적 대상에 체가 있어서 경계가 된다는 의미가 이루어진다면 곧 무분별지는 없다. 왜냐 하면 분별되는 경계가 실제로 있다면 분별하는 인식 주관은 이미 전도를 이루지 않으며, 무분별이 곧 전도를 이룬다. 만약 이렇다면 모든 범부가 다 전도를 떠나고 모든 성인이 다 전도를 이룬다. 이것은 무슨 과실이 있는가?18)
016_1226_b_06L釋曰若塵有體爲境義成則無有無分別智何以故所分別境若實有分別則不成倒無分別則成倒若爾一切凡夫皆離顚倒一切聖人皆成顚倒斯有何失

【論】만약 이것이 없다면 불과(佛果)가
마땅히 얻어지는 이러한 처(處)는 없다.
016_1226_b_11L論曰
若此無佛果
應得無是處

【釋】무분별지는 바른 도이다. 만약 이러한 지혜가 없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불과를 얻는다고 설하는 이런 처(處)는 없다. 이러한 집착은 아함과 도리에 어긋남이 된다. 따라서 모든 차별적 대상은 체가 없이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분별할 수 있는 체가 없으므로 분별도 역시 없다. 따라서 무분별지는 이치에 맞고 전도가 없다. 또한 다른 도리가 있어서 모든 대상이 체가 없이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득한다.
016_1226_b_12L釋曰無分別智是正道若言無此智而說應得佛果無有是處此執爲阿含及道理所違是故應知諸塵無體可分別由可分別體無故分別亦無故無分別智如理無倒復次有別道證諸塵無體可分別

【論】자재를 얻은 보살은
원요(願樂)의 힘으로 말미암아
여의지(如意地) 등을 이룬다.
선정을 얻은 사람도 역시 이러하다.
016_1226_b_18L論曰
得自在菩薩
由願樂力故
如意地等成
得定人亦爾
016_1226_c_01L
【釋】보살은 선정에서 자재함을 얻고, 머무르며, 나온다. 통혜(通慧)에서 변이(變異)가 꺾이고 굴복하는 것을 얻어서 자재를 통달하여 모든 지에서 열 가지 자재를 얻는다. 보살은 먼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행하기를 발원하고 무분별지를 얻은 뒤에 관에서 나오며 뜻에 따라 현재의 원으로 말미암아서, 혹은 본원으로 말미암아서, 행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원(願)은 원인이 되고 낙(樂)은 결과가 된다. 먼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행하기를 발원하고, 뒤에 마음이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을 좇아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지(地) 등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만약 보살이 행하기를 바랐던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얕게 행한다면, 현재에 먼저 발원(發願)하고, 그 발원이 마침내 곧 진관에 들어가서, 관에서 나온 뒤에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을 좇아서 바야흐로 성취함을 이룰 수 있다.
016_1226_b_20L釋曰菩薩於定得入住出自在於通慧得變異折伏通達自在於諸地得十自在菩薩先發願作衆生利益事得無分別智後出觀隨菩薩意欲有所作一切皆成或由現在願或由本願爲因樂爲果先發願作衆生利益事後隨心所欲樂無不皆成謂轉變地等
만약 보살이 원했던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깊이 행한다면, 현재에 반드시 발원하지 않고서도 관에 들어가고 관에서 나온다. 단지 본원력(本願力)으로 말미암아 원하는 것을 좇아 행하여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만약 성문 등이 아홉 가지 정의 자재를 얻었다면 이 선정의 자재로 인하여 6신통의 자재를 얻는다. 한 물건 가운데서 원락의 힘을 좇아서 각기 변이할 수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가지 수가 된다. 만약 모든 대상이 실제로 자성이 있다면 이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비유하건대 두 개의 공(空)과 같이 모든 자재가 변이될 수 없다. 왜냐 하면 진실 때문이다. 이 게송은 바깥의 경계에 있어서 모든 차별적 대상이 자성이 없으며, 내면의 경계에서도 자성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016_1226_c_05L若淺行菩薩欲作衆生利益於現在先發願發願竟卽入眞觀出觀後隨所欲樂方得成遂若深行菩薩欲作衆生利益事現在不須發及入觀出觀但由本願力隨所欲一切皆成若聲聞等得九定自在因此定自在得六通自在於一物中隨願樂力各能變異爲無量種若諸塵實有自性此事則不得成譬如二空一切自在所不能變異何以故眞實故此偈約外境顯諸塵無自性於內境無自性其義云何

【論】간택(簡擇)을 성취한 사람은
지혜가 있고 선정을 얻은 사람이다.
내면에서 모든 인식현상을 사유하여
실체적 대상[義]과 같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016_1226_c_16L論曰
成就簡擇人
有智得定人
於內思諸法
如義顯現故
016_1227_a_01L
【釋】간택은 곧 비바사나이다. 세 가지 무류(無流)의 근을 얻는 것을 성취라고 한다. 수다원(須陀洹)으로부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향하여 도달하므로 간택을 성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지혜가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하며, 문혜와 사혜의 위계로써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수혜의 위계에 들어가는 것만을 취하여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선정을 얻은’이라고 말한다. 성문과 보살은 내면에서 모든 인식현상을 사량할 때, 이 두 사람은 여여하게 12부 경전의 법(法:교법)에 의해 드러내어진 실체적 대상이 이와 같다는 것을 사유한다. 이와 같은 그 실체적 대상은 이 두 사람에 있어서 현현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이 부처님이라는 실체적 대상[佛義]을 사유한다면 갖가지 인식현상 가운데 부처님이라는 실체적 대상이 드러난다. 부처님이라는 실체적 대상이 현현하듯이 색(色:대상성) 등의 5음(陰)과 무상(無常) 등의 10상(想)도 역시 이와 같이 드러난다. 이 게송은 내면의 경계에 있어서 모든 차별적 대상[塵]이 자성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깥 경계와 내면의 경계가 모두 자성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016_1226_c_18L釋曰簡擇卽是毘婆舍那得三無流根名成就從須陁洹向乃至阿羅漢名成就簡擇人有智人謂菩薩顯不以聞思位爲智人但取入修爲智人故言得定聲聞及菩薩於內思量一切法時如如二人思惟十二部經法所顯義如此如此其義於此二人得顯現若其思惟佛義於種種法中佛義顯現如佛義顯現色等五陰及無常等十想亦如此顯現此偈約內境顯諸塵無自性云何知外內皆無自性

【論】무분별을 닦을 때에
모든 실체적 대상마저 드러나지 않으니,
차별적 대상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식(識)도 없다.
016_1227_a_07L論曰
無分別修時
諸義不顯現
應知無有塵
由此故無識

【釋】만약 보살이 무분별한 관(觀) 가운데 있다면 모든 실체적 대상은 내면에도 혹은 바깥에도 혹은 내면과 바깥에도 다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차별적 대상이 모두 실재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바깥의 차별적 대상이 없다면 내면의 식도 없다. 왜냐 하면 인식의 대상이 이미 없으니 인식하는 주체도 어떻게 있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의미는 실제로 이러하다. 인식의 대상이 없으니 인식의 주체도 역시 없다. 인식의 수승한 모습[應知勝相] 가운데서 이미 이러한 의미를 갖추어 나타냈다. 이러한 지혜는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016_1227_a_09L釋曰若菩薩在無分別觀中一切義或內或外或內外不復顯現是故應知諸塵皆實非有若無外塵則無內何以故所識旣不有能識云何有此義實爾所識非有故能識亦非有應知勝相中已具顯此義此智與般若波羅蜜爲一爲異
【論】이 무분별지는 곧 반야바라밀이다. 이름이 다를 뿐 실체적 대상은 같다.
【釋】이름이 같지 않아서 다름이 되고, 실체가 동일하므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곧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름이 다르다면 어찌하여 실체가 같은가?
여래께서는 자성인 실체적 대상에 있어서 인식현상을 세운다. 모든 인식현상을 섭지하므로 동일하다. 이름으로써 섭지하여 동일함이 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름은 모든 지방에서 같지 않으나, 실체적 대상은 모든 지방에서 동일하다. 이름은 거짓으로 세운 것이며, 이 실체적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지방에 따라 같지 않더라도 실체적 대상은 정하여진 성품이 있기 때문에 실체적 대상은 동일하다. 행(行)19)은 실체적 대상에 의거하여 이루어지지, 이름에 의거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실체적 대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가?
016_1227_a_16L論曰此無分別智卽是般若波羅蜜名異義同釋曰不以名不同爲異以義同爲一以一故言卽是若名異義云何同來立法約自性義攝諸法爲同不以名攝爲同何以故名於諸方不同於諸方則同名是假立爲目此義故隨方不同義有定性故義是同行依義成不依名成云何知義是同
016_1227_b_01L【論】경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문다면 처에 머물지 않는 수행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바라밀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다.
【釋】무분별지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경을 인용하여 증득하게 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닦아 물러나 잃지 않기 때문에 머문다고 말한다. 또한 보살은 나머지 바라밀을 닦고자 하여 먼저 닦은 반야바라밀을 방편으로 삼는다. 나머지 바라밀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머물러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머문다고 말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무르며, 다섯 가지의 처를 떠나서 나머지 바라밀을 수행한다. 하나하나의 바라밀 가운데서 약간의 시간을 경과하여 닦아 익혀서 성취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원만하다고 일컫는다.
016_1227_b_01L論曰如經言若菩薩住般若波羅蜜由非處修行能圓滿修習所餘波羅釋曰欲成就無分別智與般若波羅蜜不異故引般若波羅蜜經爲菩薩修般若波羅蜜無退失故名又菩薩欲修餘波羅蜜先修般若波羅蜜爲方便餘波羅蜜住般若波羅蜜中成故言住菩薩住般若波羅蜜中離五處修行餘波羅蜜於一一波羅蜜中經若干時修習令得成就故稱圓滿
【論】무엇이 처에 머물지 않는 수행이며, 나머지 바라밀을 원만하게 수행하게 하는가? 다섯 가지 처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외도의 아집처(我執處)를 떠나는 것이며,
【釋】저 외도들은 그들의 반야에 머물러서 아집을 일으켜, 나는 지금 반야에 머물고 반야는 곧 나의 것[我所]이라고 말한다. 모든 보살은 반야에 머물러도 이러하지 않기 때문에 아견이 집착하는 처(處)를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한 곳에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1227_b_12L論曰何者非處修行能圓滿修習所餘波羅蜜謂離五種處一離外道我執處釋曰如外道住彼般若起我執謂我今住般若般若卽是我所諸菩薩住般若則不如是故言離我見執處以不應彼處故
【論】둘째는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의 분별의 처(處)를 떠남이며,
【釋】지(地) 이전의 보살은 진여를 보지 못하고 무분별을 분별하여 반야바라밀로 삼아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라고 일컫는다. 만약 보살이 이미 진여를 본다면 반야바라밀 가운데 있어서 곧 이러한 분별이 없기 때문에 분별의 곳을 떠났다고 말한다. 그런 곳에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1227_b_17L論曰二離未見眞如菩薩分別處釋曰如地前菩薩未見眞如分別無分別爲般若波羅蜜謂此是般若波羅蜜若菩薩已見眞如在般若波羅蜜中則無此分別故言離分別處不應彼處故
016_1227_c_01L【論】셋째는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극단의 처[二邊處]를 떠남이며,
【釋】범부와 중생이 생사의 극단에 머물듯이, 성문승은 열반의 극단에 머문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난다. 따라서 두 가지 극단의 처(處)를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한 처에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1227_b_23L論曰三離生死涅槃二邊處釋曰如凡夫衆生住生死邊聲聞人住涅槃邊菩薩住般若波羅蜜離此二邊故言離二邊處以不應彼處故
【論】넷째는 오직 혹장(惑障)만을 없애고 만족함을 아는 행[知足行]의 처(處)를 떠남이다.
【釋】성문은 혹장을 멸한 곳에서 만족함을 아는 것을 생한다. 다른 그 밖의 처, 즉 지장(智障)을 멸한 처에 대한 욕락은 다시 없다. 보살은 곧 이러하지 않다. 지장을 멸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닦기 때문에 지족행처를 떠난다고 말한다. 그런 곳에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1227_c_04L論曰四離唯滅惑障知足行處釋曰如聲聞於惑障滅處生知足於餘處無復欲樂謂智障滅處菩薩則不如是爲滅智障修學般若波羅蜜故言離知足行處不應彼處
【論】다섯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관하지 않고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머무는 것을 떠남이다.
【釋】독각승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관하지 않고 무여열반에 머무는 것과 같다. 보살은 곧 이러하지 않고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버리지 않는다. 열반에 드는 것은 유여(有餘)이면서 역시 무여(無餘)이다. 법신(法身)에 있어서는 무여이며, 응신(應身)과 화신(化身)에 있어서는 유여이기 때문에 무여열반의 곳을 떠난다고 말한다. 그러한 처(處)에는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분별지에는 다섯 가지 차별이 있어서 앞에서 떠난 다섯 곳과 다르다. 첫째는 전도가 없는 차별이니, 이것은 전도가 없고 저것은 전도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분별의 차별이니, 이것은 분별이 없고 저것은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머무는 곳이 없는 차별이니, 이것은 머무는 곳이 없고 저것은 머무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바른 행의 차별이니, 이 바른 행은 혹장과 지장을 없앨 수 있다. 그들의 바른 행은 단지 혹장만을 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이르러 얻음[至得]의 차별이다. 이 얻음은 항상 3신에 머무르는 것을 과(果)로 삼으나, 저들의 얻음은 영원히 끊는 열반을 과로 삼기 때문이다.
016_1227_c_09L論曰五離不觀利益衆生事無餘涅槃處釋曰如獨覺不觀衆生利益事住無餘涅槃菩薩則不如住般若波羅蜜不捨衆生利益事般涅槃亦有餘亦無餘於法身是無於應化身是有餘故言離住無餘涅槃處以不應彼處故無分別智有五種差別異前所離五處一無倒差此無倒彼有倒故二無分別差此無分別彼有分別故三無住處差別此無住處彼有住處故四正行差別此正行能滅惑智二障彼正行但能滅惑障故五至得差別此得常住三身爲果彼得永斷涅槃爲果故
016_1228_a_01L【論】성문승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의 차별은 어떠한가?
【釋】무분별지와 반야바라밀이 하나라는 것은 이미 설명하였다. 이제 무분별지인 반야바라밀과 2승(乘)의 지혜에는 차별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016_1227_c_22L論曰聲聞智慧與菩薩智慧差別云釋曰已說無分別智與般若波羅蜜是一今欲更顯無分別智般若波羅蜜與二乘智有差別
【論】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분별의 차별로 말미암아
【釋】성문은 분별이 있고, 보살은 분별이 없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1228_a_03L論曰知由無分別差別釋曰聲聞有分菩薩無分別應知由此義故有差
【論】음(陰) 등의 모든 법문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며,
【釋】성문은 지혜로 말미암아 음 등의 모든 법문을 취하여 경계로 삼으므로 분별이 있는 상(相)이 일어난다. 보살은 음 등의 모든 법문을 분별하지 않으므로 분별이 없는 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
016_1228_a_06L論曰不分別陰等諸法門故釋曰聲聞由智慧取陰等諸法門爲有分別相起菩薩不分別陰等諸法門無分別相起故有差別
【論】한 부분이 아닌 차별로 말미암아 두 가지 공(空)의 진여를 통달하여 모든 인식되는 상[所知相]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釋】부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식되는 부분이며, 둘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부분이다. 인식되는 부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인식 주관과 인식현상의 두 가지 공(空)이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부분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으니, 자신과 남[他身]이다. 성문은 인식되는 부분 가운데서 단지 인식 주관의 공[人空]만을 통달하여 고(苦) 등의 4제(諦)에서 생하는 무류의 지혜에 그치며,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부분 가운데서도 단지 자신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만 의지(依止)해 발원하여 수행하므로 이 두 부분 가운데의 각각 한 부분만을 가지고 있다.
016_1228_a_09L論曰非一分差別通達二空眞如入一切所知相故依止一切衆生利益事故釋曰分有二種一所知分二利益衆生分所知分中復有二種謂人法二利益衆生分中亦有二種謂自身他身聲聞於所知分中但通達人空止於苦等四諦生無流智於利益衆生分中但依止自身利益事發願修於此二分中各有一分
보살은 인식되는 부분 가운데 인과 법, 두 가지 공을 갖추어 통달하며, 모든 생하여지는 여리여량지(如理如量智)에서, 그리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부분 가운데서 모든 중생 즉 자신과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의거하여 발원하여 수행한다. 이 두 부분 가운데서 각각 두 부분을 갖추었다. 두 부분은 한 부분과는 다르기 때문에 한 부분이 아닌 차별이라고 일컫는다.
016_1228_a_18L菩薩於所知分中具通達人法二空於一切所生如理如量智於利益衆生分中一切衆生利益事謂自他身發願修於此二分中各具二分二分異一分故言非一分差別
016_1228_b_01L【論】머묾이 없는 차별로 말미암아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에 머물기 때문이며,
【釋】범부가 생사에 머물러 집착하듯이 성문은 열반에 머물러 집착한다. 보살은 이러하지 않다.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은 모두 분별이 지어내는 것이다. 상이 없는 자성과 같기 때문에 두 곳에 머물지 않는다.
016_1228_a_23L論曰由無住差別住無住處涅槃故釋曰聲聞住著涅槃如凡夫住著生死菩薩不見生死涅槃俱是分別所作同無相性故不住二處
【論】항상하다는 차별로 말미암아, 무여열반에서 끊어지고 다하는 변제(邊際)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釋】두 사람은 무여열반에 있어서 차별이 있기 때문에 지혜에 차별이 있다. 2승은 무여열반에서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헤아려보지 않기 때문에 응신과 화신이 없다. 응신이 없기 때문에 끊어짐에 떨어지고, 화신이 없기 때문에 다함에 떨어진다. 보살은 무여열반에서 항상 응신과 화신을 일으키기 때문에 변제가 없다. 어찌 하물며 법신에 있어서랴. 자신을 이익되게 하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원만하기 때문에 응신이 있으므로 끊어짐에 떨어지지 않고, 화신이 있으므로 다함에 떨어지지 않는다.
016_1228_b_03L論曰由恒差別於無餘涅槃不墮斷盡邊際故釋曰二人於無餘涅槃有差別故慧有差別二乘於無餘涅槃無應化二身以不觀他利益事故無應身故墮斷無化身故墮盡菩薩於無餘涅槃恒起二身無有邊際何況法身自利利他圓滿故有應身故不墮斷有化身故不墮盡
【論】위없는 차별로 말미암아 실제로 이보다 수승한 다른 승(乘)은 없기 때문이다.
【釋】성문승과 독각승은 대승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위가 있다. 보살승은 대승보다 수승한 다른 승이 없기 때문에 위가 없다. 승은 지혜로써 체를 삼는데, 대승 가운데의 지혜를 우두머리로 삼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의미로 말미암아 2승의 지혜는 보살의 지혜와 차별이 있다.
016_1228_b_11L論曰由無上差實無異乘勝此故釋曰聲聞獨覺乘有上以不及大乘故菩薩乘無以無別乘勝大乘故乘以智爲體於大乘中智爲上首故由此五義故二乘智與菩薩智有差別
【論】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釋】앞의 다섯 가지 의미를 포섭하고, 다섯 가지 의미의 공덕을 드러내기 위하여 거듭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28_b_16L論曰中說偈釋曰爲攝前五義及顯五義功德故重說偈

【論】지혜의 다섯 가지 수승한 차이로 말미암아
대비(大悲)에 의거하여 복을 닦는다.
016_1228_b_18L論曰
由智五勝異
依大悲修福
016_1228_c_01L【釋】모든 보살의 지혜는 다섯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2승보다 수승하다. 단지 수승한 지혜에 있어서 만족함을 알지 아니하고 다시 지혜에 의거하여 복덕을 닦는다. 복덕은 곧 나머지 다섯 바라밀이다. 이 구절은 스스로를 이익되게 함이 2승보다 수승하여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시 수승하여 다르다는 의미가 있으니, 남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대비에 의거하여 복덕을 닦는 것을 말한다. 복덕은 곧 나머지 다섯 바라밀이다. 만약 이러한 두 가지 능력을 갖춘다면 무슨 과보가 있는가?
016_1228_b_19L釋曰諸菩薩智慧由五種差別故勝二乘不但於勝智慧知足復依智慧修福德福德卽餘五度此句顯自利勝異二乘復有勝異義謂爲利他依大悲修福德福德卽餘五度若人具此二能得何果報

【論】세간과 출세간의 부유함과 즐거움,
이것이 멀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016_1228_c_02L論曰
世出世富樂
說此不爲遠
【釋】전륜왕은 욕계 위에 다섯 천왕(天王)과 욕계의 범왕(梵王) 내지는 무색계의 선정 그리고 보살만이 홀로 얻어지는 세간의 선정을 세워서, 세간의 부유함과 즐거움이라고 이름하고, 2승의 해탈과 위없는 보리를 출세간의 부유함과 즐거움이라고 일컫는다. 이와 같은 과(果)가 뜻대로 쉽게 얻어지기 때문에 멀지 않다. 모든 보살은 이미 지극한 자재위(自在位)에 이르러서 항상 세간의 빈곤하고 고통스러운 중생에게 자비를 행한다. 보살은 이러한 의지로 말미암아 재물을 보시하지 않는다. 이 의지의 씀[用]은 어떠한가?
016_1228_c_03L釋曰作轉輪王欲界上五天王色界梵王乃至無色界定及菩薩獨所得世閒定名世富樂二乘解脫及無上菩提名出世富樂如此果如意易得故不爲遠諸菩薩已至極自在位行慈悲於世閒貧苦衆生菩薩由此意不施財物此意用云何
【論】만약 보살이 세간에 실제로 있다면 역시 다시 알 수 있다.
【釋】이것은 보살이 체가 있고 은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체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있다고 하고, 은혜가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고 말한다.
016_1228_c_10L論曰菩薩於世閒實有亦復可知釋曰此顯菩薩有體有恩有體故言實有有恩故言可知
【論】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계학과 정학과 혜학의 공덕의 모임[聚]에 의거하여 상응한다면 열 가지 자재에 도달하여 모든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비길 데 없는 수승한 능력을 얻는다.
【釋】3학은 10바라밀과 세간의 모든 공덕을 포섭하기 때문에 공덕의 모임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보살이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는다면 상응한다고 말한다. 곧 원인이 원만하여 열 가지 자재에 도달하므로 곧 결과가 원만하다.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은 혹은 두 가지가 있고 혹은 네 가지가 있다.
두 가지란 먼저 사유하고 뒤에 행함을 말하며,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곧 뒤의 두 가지 무외(無畏)이다.
혹은 네 가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길 데 없는 수승한 능력을 얻으니, 곧 은덕이 원만하다. 이 세 가지 덕 가운데 원인과 결과의 두 가지 덕은 자신의 이익을 드러내고, 은덕은 남을 이익되게 함을 드러낸다. 이미 3학을 설하여 마쳤다. 보살의 세 가지 덕의 원만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의미를 밝힌다.
016_1228_c_13L論曰若菩薩如此依戒定慧學功德聚相應至十種自於一切利他事得無等勝能釋曰三學攝十度及世閒一切功德故名功德聚若菩薩未得得已得不失名相應卽因圓滿至十種自在卽果圓滿利益他事或有二種或有四種二種謂先思後行復有二種卽後二無畏或有四種如前說得如此無等勝能卽恩德圓滿此三德中因果二德顯自利恩德顯利他已說三學竟欲顯菩薩三德圓滿故明此義
016_1229_a_01L【論】어찌하여 세간 가운데서 중생이 무거운 고통과 어려움을 당함이 있는가?
【釋】이것은 다시 힐난을 세운다. 만약 보살의 이와 같은 세 가지 덕 모두가 모든 중생을 빼내어 구제한다면 어찌하여 중생은 세간의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는가? 만약 고통을 보고서 구제하지 않는다면 수승한 능력이 없는 것이고, 만약 수승한 능력이 없다면 보살이 없다. 고통과 어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안과 밖을 말한다. 안과 밖의 이 두 가지 고통과 어려움에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있다. 만약 대하여 다스릴 수 있다면 가벼운 것이 되고, 만약 대하여 다스릴 수 없다면 무거운 것이 된다.
016_1229_a_01L論曰云何於世閒中見有衆生遭重苦難釋曰此次立難若菩薩如此三德皆爲拔濟一切衆生云何衆生遭世苦難若視苦不救則無勝能無勝能亦無菩薩苦難有二種謂內及外內外此二苦難有輕有重若可對治爲輕若不可對治爲重
【論】보살은 그 중생들에게 업(業)이 있어서 수승하고 즐거운 과(果)를 장애하며, 고통스러운 보(報)를 감수(感受)할 수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釋】보살은 어떤 중생이 업장을 가지고 있어서 보살의 수승한 능력을 장애하고 고통스러운 보를 받아들임을 본다. 보살은 그들에 대해서 이러한 업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비록 수승한 능력을 깨뜨려 버려서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보살의 업력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강에 여덟 가지 공덕의 물이 있어서 중생이 마시고 싶은 대로 마셔도 지키는 사람이 없는데도 아귀는 업장 때문에 얻어 마실 수 없다. 보살은 강과 같고 재물은 물과 같으며 업장이 있는 중생은 마치 아귀와 같다. 업(業)의 장애로 말미암아 보살의 재물을 받아 쓸 수 없다.
016_1229_a_08L論曰由菩薩見彼衆生有業能感苦報障勝樂果故釋曰菩薩見有衆生有業障菩薩勝能能感苦報菩薩於彼有此業智雖懷勝能捨而不用此卽菩薩業力譬如有江有八功德水衆生飮無人遮護餓鬼由業障故不能得飮菩薩如江財物如水有業障衆生猶如餓鬼由業障故不得受用菩薩財物
【論】보살은 이와 같이 비록 그들에게 즐거움을 모두 베풀더라도 곧 그들이 선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한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釋】보살은 어떤 중생이 업(業)의 장애는 없으나 가난하고 궁하더라도 선법(善法)을 생하여 키울 수 있고, 부유하고 즐겁더라도 곧 방일하여 죄를 짓는 것을 본다. 보살은 그들이 현세에서 가난하고 궁한 고통을 받더라도 뒤좇아 선법을 생하여 일으킴을 성취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보살은 그 즐거움을 모두 베풀지 않는다. 이것이 곧 보살이 머물면서 머물지 않는 힘[處非處力]이다.
016_1229_a_17L論曰由菩薩見如此施彼樂具則障其生善釋曰菩薩見有衆生無業障若貧窮能生長善若富樂則放逸造罪菩薩願彼於現在世受貧窮苦隨順成就生起善是故菩薩不施其樂具此卽菩薩處非處力
016_1229_b_01L【論】보살은 그들이 즐거움을 갖추지 않아도 생사를 싫어하고 미워함을 눈앞에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釋】보살은 어떤 중생이 가난하고 궁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항상 눈앞에 드러내는 것을 본다. 보살은 그들이 즐거움을 갖추지 않아도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성취하여 선행을 뒤좇아 따르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모두 베풀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의 근기와 욕심과 자성의 힘이다.
016_1229_a_23L論曰由菩薩見彼無樂能現前厭惡生死釋曰菩薩見有衆生由貧窮苦厭惡生死心恒現菩薩願彼無樂具成就厭惡心隨順善行故不施其樂具此卽菩薩根欲性力
【論】보살은 그들에게 즐거움의 도구를 모두 베푼다고 하더라도 모든 악법을 생하여 키우는 인연이라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釋】보살은 어떤 중생이 항상 가난하고 궁한 보(報)를 받아도 그러한 시간 가운데서 악법을 키우지 않는 것을 본다. 보살은 그들이 항상 가난하고 궁한 보를 받기를 원하지, 그들이 한 순간에 부유하고 즐거운 보를 받아서 모든 악법의 인연, 즉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증오함을 짓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인연이 악법을 생하여 키울 수 있다. 보살이 만약 그들에게 재물을 베풀면 곧 그 사랑함과 증오함을 성취하기 때문에 보살은 그 즐거움의 도구를 모두 베풀지 않는다. 이것도 역시 보살이 두루 행하는 도의 지혜의 힘[遍行道智力]이다.
016_1229_b_05L論曰由菩薩見若施彼樂則是生長一切惡法因緣釋曰菩薩見有衆生乃至恒受貧窮報此時中不長惡法菩薩願彼恒受貧窮報不願彼於一剎那中受富樂報而作諸惡法因緣謂自愛憎他此二因緣能生長惡法菩薩若施彼財物則成就彼愛憎是故菩薩不施其樂此卽菩薩遍行道智力
【論】만약 그들에게 즐거움의 도구를 모두 베푼다면 곧 나머지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핍박하고 해치는 인연이 된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釋】보살은 어떤 중생이 만약 큰 재산을 얻어 멈추지 않으면 스스로 손해를 보고 다시 헤아릴 수 없는 중생에게 손해를 끼치고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본다. 보살은 그들이 가난하고 궁한 고통을 받기를 원하지, 그들이 큰 부유함과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몸과 마음과 선근을 괴롭히고 손해를 입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살은 그 즐거움의 도구를 모두 베풀지 않는다. 이것도 역시 보살이 두루 행하는 도의 지혜의 힘이다.
016_1229_b_13L論曰菩薩見若施彼樂具則是逼害餘無量衆生因緣釋曰菩薩見有衆生若得大富非止自損復能損惱無量衆生菩薩願彼受貧窮苦不願彼由大富樂損惱衆生身心及以善根故菩薩不施其樂具此亦是菩薩遍行道智力
016_1229_c_01L【論】따라서 보살은 이와 같은 수승한 능력이 없지 않다. 세간에서도 역시 이러한 중생이 나타남이 있다.
【釋】수승한 능력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곧 세 가지 덕이다. 첫째는 인을 얻을 수 있음이니, 3학처(學處)이다. 둘째는 과를 얻을 수 있음이니, 열 가지 자재를 말한다. 셋째는 남을 이익되게 할 수 있음이니, 중생의 근기와 탐욕과 성품 등을 깨우쳐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베풀어서 이익이 있음을 본다면 곧 베풀고, 만약 베풀지 않아서 이익이 있음을 본다면 곧 베풀지 않는다. 보살은 이익으로써 정(定)을 삼지, 베풀고 베풀지 않음으로써 정을 삼지 않는다. 베풂에 이익이 없기 때문에 세간에 고통을 받는 중생이 있다.
016_1229_b_20L論曰是故菩薩不無如此勝能世閒亦有如此衆生顯現釋曰勝能有三卽是三德一能得因謂三學處二能得果謂十自在三能利他謂了別衆生根欲性等若見施有利益則施若見不施有利益則不菩薩以利益爲定不以施不施爲由施無利益故世閒有受苦衆生
【論】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釋】앞의 다섯 가지 의미를 포섭하기 위하여 거듭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29_c_04L論曰此中說偈釋曰爲攝前五義故重說偈

【論】업(業)이 선을 장애하는 것,
싫어함을 나타냄, 악법이 늘어남,
그리고 남을 해치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 중생은 보살의 보시를 감수(感受)할 수 없다.
016_1229_c_06L論曰
見業障礙善
厭現及惡增
害他彼衆生
不感菩薩施

【釋】어떤 중생은 업장이 있어서 보살의 보시를 감수하지 못한다. 어떤 중생은 즐거움의 도구를 갖추고 있어서 선을 장애하고, 어떤 중생은 가난하고 궁함으로 말미암아 생사의 마음이 항상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고, 어떤 중생은 즐거움의 도구를 갖추고 있어서 악법을 생하여 키우고, 어떤 중생은 큰 재산과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남을 핍박하고 해친다. 보살은 이러한 일들을 보고서 스스로를 손상하고 남을 손상하는 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그 즐거움의 도구를 모두 베풀지 않는다. 따라서 그 중생들은 보살의 보시를 받지 못한다.
016_1229_c_08L釋曰有衆生有業障不感菩薩施衆生有樂具則㝵善有衆生由貧窮厭惡生死心恒現前有衆生有樂具生長惡法有衆生由大富樂能逼害菩薩見如此事欲令離自損損他不施其樂具是故彼衆生不感菩薩施
攝大乘論釋卷第十二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범어로는 codya-parihāra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답변이라는 의미(長尾雅人, 『攝大乘論 和譯と注解』 하권, p.241, 講談社, 동경, 1987 참조).
  2. 2)진실의(眞實義)는 무분별후득지에 의해 드러나는 실체적 대상이 진실성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진실의라고 표현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3. 3)진실의가 무분별지가 아니고 출관지이기 때문에 분별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뒤에 무분별지는 눈을 감고 있는 것과 같고 무분별후득지는 눈을 뜨고 있는 것과 같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4. 4)제법의 진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5. 5)무위법(無爲法)를 말한다.
  6. 6)유류법(有流法)를 말한다.
  7. 7)여기에서는 dharmatā를 법이(法爾)라고 번역하지 않고 법성으로 번역하고 있다. 세속제가 아니고 승의제이기 때문이다.
  8. 8)색을 차별적 대상성이라고 한 것은 뒤에 색음(色陰)의 전의에서 색음은 색식(色識)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상성을 취하여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인식작용이 일어난다.
  9. 9)여기에서 분별되어진 것은 무슨 인식현상이냐고 묻는 것은 앞에 입구난(立救難)의 항목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체적 대상[義]이 어떻게 인식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6권에서 명과 의의 문제를 논하는 부분과 연관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10. 10)수(受)는 범어로 anubhava로 개별적인 대상을 받아들이는 지각작용을 말한다. 진(塵)을 받아들여 지각한다는 것은 대상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진은 대상의 대상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1. 11)도리천 선법당에 있다는 북으로 치지 않아도 스스로 울린다고 한다.
  12. 12)여기에서는 의타성을 세속제의 의타성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고, 의타성의 5사(事) 가운데 정지(正智)의 작용인 의타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13. 13)현장 역에서는 법성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법성과 같은 의미로 읽어야 할 것 같다.
  14. 14)여기에서의 법은 무류법(無流法)을 말하고 있다.
  15. 15)의(義)의 용례가 의미 또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실재적 대상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의를 실재적 대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진(塵)과 비교하여 의미를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진(塵)은 분별에 상응하는 차별적 대상이고, 의(義)는 무분별에 상응하는 실재적 대상이다. 즉 진은 식에 상응하는 대상이고 의는 사(事)에 상응하는 대상이다.
  16. 16)택멸무위를 말하고 있다.
  17. 17)바로 앞에서는 무상(無常)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 부분에서는 무(無)자가 결여되어 있다.
  18. 18)분별되어진 경계가 실재한다면 곧 중생이 무분별지를 얻었고 이것이 허망한 상임을 보는 성인이 오히려 전도된다. 이것은 불교가 현상론이나 모사설(模寫說)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모사설이나 현상론의 과오를 지적하고 있다.
  19. 19)행음(行陰)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