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釋卷第十三

ABC_IT_K0590_T_013
016_1230_a_01L
섭대승론석 제13권
016_1230_a_01L攝大乘論釋卷第十三


세친 해석
진제 한역
변상섭 번역
016_1230_a_02L世親菩薩釋
陳天竺三藏眞諦譯


9. 석학과적멸승상(釋學果寂滅勝相)
016_1230_a_04L釋學果寂滅勝相第九

【論】이와 같이 의지해야 할 혜학의 차별을 이미 설명하였다. 적멸의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釋】보살의 도는 도가 멸(滅)을 얻으므로 2승의 도와는 이미 차별이 있다. 보살의 멸은 2승(乘)의 멸과는 역시 차별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016_1230_a_05L論曰如此已說依慧學差別云何應知寂滅差別釋曰菩薩道與二乘道旣有差別由道得滅菩薩滅與二乘滅亦應有差別云何可知
【論】모든 보살의 혹(惑)이 멸하는 것이 곧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다.
【釋】2승은 보살과 똑같이 혹을 멸한 것으로써 멸제(滅諦)를 삼는다. 2승이 혹을 멸하는 것은 한결같이 생사를 등지고 열반을 향한다. 보살이 혹을 멸한 것은 생사를 등지지 않으며 열반도 등지지 않기 때문에 2승과는 다르다.
보살은 네 가지 열반 가운데서 이것을 멸하므로 머무는 곳이 없음[無住處]이다. 첫째는 본래 청정한 열반이고, 둘째는 무주처열반이며, 셋째는 유여(有餘)이며, 넷째는 무여(無餘)이다. 보살은 생사와 열반이 다르다는 것을 보지 않는다. 반야로 말미암아 생사에 머물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만약 생사를 분별하면 생사에 머물고, 만약 열반을 분별하면 열반에 머문다. 보살은 무분별지를 얻어서 분별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머무는 대상이 없다.
016_1230_a_09L論曰菩薩惑滅卽是無住處涅槃釋曰二乘與菩薩同以惑滅爲滅諦二乘惑滅一向背生死趣涅槃菩薩惑滅不背生死不背涅槃故異二乘菩薩此滅於四種涅槃中是無住處一本來淸淨涅槃二無住處涅槃三有餘四無餘菩薩不見生死涅槃異由般若不住生死由慈悲不住涅槃若分別生死則住生死若分別涅槃則住涅槃菩薩得無分別智無所分別故無所住
【論】이것의 모습은 어떠한가?
【釋】무주처열반은 무슨 인식현상으로써 상을 삼는가?
016_1230_a_20L論曰此相云何 釋曰住處涅槃以何法爲相
016_1230_b_01L【論】혹을 버리고 떠나면서 생사를 버리고 떠나지 않으며, 둘이 의지하는 것이 전의(轉依)로써 상이 된다.
【釋】만약 보살이 전의의 위계에 있다면 모든 혹이 연기하는 곳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혹을 버리고 떠난다고 말한다. 출관위(出觀位)에 있어서는 반드시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에 생사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약 앞과 뒤의 것을 한쪽에서만 치우쳐서 두 가지 정의(定義)를 밝힌다고 하더라도 역시 동시에 두 가지 정의를 갖출 수 있다. 만약 두 정의를 함께 관한다면, 반드시 이 두 정의는 동시에 모두 의타성(依他性)을 의지로 삼는다.
무주처열반은 전의로써 상을 삼는다. 곧 두 가지 집착을 바꾼다. 범부는 생사를 집착하고 2승은 열반을 집착한다. 보살은 무분별지를 얻어서 생사와 열반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보지 않는다. 비록 혹을 멸하였다 하더라도 열반에 머물지 않고 비록 분별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생사에 머물지 않는다. 따라서 이 열반은 전의로써 상을 삼는다. 이 전의는 곧 의타성을 근거로 한다.
016_1230_a_21L論曰捨離惑與不捨離生死二所依止轉依爲釋曰若菩薩在轉依位不與諸惑緣起處故名捨離惑在出觀位起分別故名不捨離生死若偏觀前後明此二義亦得一時具二義若雙觀二義必在一時此二義竝以依他性爲依止無住處涅槃以轉依爲相卽轉二著凡夫著生死二乘著涅槃菩薩得無分別智不見生死涅槃有差別雖滅惑不住涅槃雖起分別不住生死故此涅槃以轉依爲相此轉依卽依止依他性
【論】이 가운데 생사는 의타성의 부정품인 한 부분으로 체가 되며, 열반은 의타성의 정품(淨品)인 한 부분으로 체가 된다.
【釋】이것은 두 가지가 의지하는 것의 정의를 해석한다. 본식(本識)을 의타성이라고 한다. 본식이 만약 분별을 일으킨다면 곧 부정품이며, 이 한 부분이 생사의 체를 이룬다고 설한다. 분별과 같이 의타성인 이 자성이 이와 같이 있지 않다. 이 분별은 있는 것이 없어서 곧 정품이다. 이 한 부분을 의거하여 열반의 체가 된다.
016_1230_b_11L論曰此中生死是依他性不淨品一分爲體涅槃是依他性淨品一分爲體釋曰此釋二所依止義本識名依他性本識若起分別卽是不淨品說此一分爲生死體如分別依他性此性不如此有此分別無所有卽是淨品依此一分爲涅槃體
【論】본의(本依)란 정품과 부정품의 두 부분을 갖춘 의타성이다.
【釋】분별성이 생사이고 진실성이 열반이다. 본래부터 이 두 가지 품류는 의타성으로써 의지를 삼으므로 곧 의타성이 본의가 된다.
016_1230_b_18L論曰本依者是具淨不淨品二分依他性釋曰分別性是生死眞實性是涅槃從本以來此二品以依他性爲依止卽說依他性爲本依
016_1230_c_01L【論】전의(轉依)란 대하여 다스림을 일으킬 때에 이 의타성은 부정품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본성을 영원히 바꾸며, 정품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본성을 영원히 이룬다.
【釋】전의는 역시 의타성에 속한다. 3승의 도(道)가 대하여 다스림이다. 이 의타성은 도가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견제(見諦) 등과 같이 혹은 모든 업감(業感)과 악도의 보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부정품이라고 한다.
도가 이미 일어난 뒤에는 이와 같은 부정품이 멸하여 다시 생하지 않기 때문에 본성을 영원히 바꾼다고 말한다. 이 의타성의 도와 도의 과를 정품이라고 한다. 도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이다. 도의 과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이다. 유위는 해탈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이며, 무위는 곧 본혹(本惑)이 멸하고 미래의 혹이 생하지 않는 것이다. 도가 일어나지 못한 때에는 계율 등의 정품이 성립하지 못하고 단지 본성의 청정만이 있다. 도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다섯 부분의 법신과 무구청정(無垢淸淨)과 더불어 서로 응한다. 이러한 상응은 곧 부처를 얻음에 도달하여 변이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본성을 이룬다고 말한다.
016_1230_b_22L論曰轉依者對治起時此依他性由不淨品分永改本性由淨品分永成本性釋曰轉依亦屬依他三乘道是對治此依他性道未起如見諦等或能起諸業感惡道報名不淨品道起已後如此不淨品滅不更生故言永改本性此依他性道及道果名淨品道卽戒定慧道果有二種謂有爲無爲有爲卽解脫解脫知見無爲卽本惑滅及未來惑不生道未起時戒等淨品未成立但有本性淸淨由道起故與五分法身及無垢淸淨相應如此相應乃至得佛有變異故言永成本性
【論】이 전의를 만약 간략하게 설한다면 여섯 가지의 전변이 있다.
【釋】만약 3승의 도와 도과에 있어서 자세히 설한다면 많은 전의의 정의가 있지만, 지금은 간략히 설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가 있다.
016_1230_c_12L論曰此轉依若略說有六種轉釋曰若約三乘道及道果廣說則有多轉依義略說故但有六種
016_1231_a_01L【論】첫째는 힘을 더하고 혹의 공능을 줄이는 전변이다. 신락위(信樂位)를 좇아서 문훈습(聞熏習)의 힘에 머물기 때문이다.
【釋】3승의 성스러운 도로 말미암아 아리야식 가운데 일어난 문훈습의 공능이 계속 증가하는 것을 설하여 힘을 더한다고 한다. 아리야식 가운데 있는 모든 혹의 훈습은 대하여 다스림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본래의 작용이 없는 것을 설하여 공능을 줄인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일은 무슨 위계에서 무슨 원인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만약 사람이 원락위(願樂位) 가운데 머물러서 여래께서 설하신 넓고 크고 깊고 깊은 바른 가르침을 듣는다면 그 가운데서 세 가지 믿음을 일으켜서 수행하기를 원하고 즐거워하며 뒤좇아서 어기지 않는다. 이 줄이고 늘리는 것은 문훈습의 힘으로써 원인을 삼는다. 문혜와 사혜가 문훈습의 체이다. 이 두 가지 지혜로 인하여 수혜(修慧)를 생한다. 수혜는 문훈습의 힘이다. 만약 수혜가 없다면 본의는 전변할 수 없다. 이러한 힘으로 말미암아 줄이고 늘린다는 정의가 성립한다. 만약 사람이 이미 이와 같은 전의를 얻었다면 이 사람의 번뇌의 행(行)은 어떠한가?
016_1230_c_15L論曰一益力損能由隨信樂位住聞熏習力故釋曰由三乘聖道起阿黎耶識中熏習功能更增說名益力於阿黎耶識中所有諸惑熏習由對治起故無復本用說名損能此二事何位何因得成若人住願樂位中聞如來說廣大甚深正教於中起三信願樂修行隨順不違此損益以聞熏習力爲因聞思慧爲聞熏習體因此二慧生修修慧是聞熏習力若無修慧本依則不得轉由此力故損益義成若人已得如此轉依煩惱行於此人云何
【論】번뇌가 있으니 부끄러워하고,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으로 말미암아 약하게 행하거나 혹은 영원히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釋】만약 사람이 이미 이 전의를 얻어 번뇌가 만약 일어난다면 곧 부끄러움이 생하므로 일어나더라도 역시 오래 가지 않거나 또한 다시 미세하고 약해지거나 혹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모든 과오를 깊이 살펴보기 때문이다.
016_1231_a_04L論曰由煩惱有羞行慚弱行或永不行故釋曰若人已得此轉依煩惱若起卽生慚羞起亦不久又復微弱或永不起何以故能羞自身深見諸過故
【論】둘째는 통달의 전변이니, 이미 지(地)에 오른 모든 보살을 말한다. 진실과 허망이 드러나는 것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釋】무분별지를 얻고 진여를 증득하기 때문에 통달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통달로 말미암아 지(地) 이전과는 다른 전변이 있다. 만약 이미 지에 오르면 어느 때는 관에 들어가므로 이 통달은 진실이 현현하는 원인이 된다. 왜냐 하면 처음에 통달한 것처럼 진여를 밝게 증득하고 뒤에 관(觀)에 들어갈 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느 때는 관에서 나오니, 이 통달은 허망(虛妄)이 현현하는 원인이 된다. 왜냐 하면 먼저 관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이 산란한 마음으로써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세속의 행을 닦기 때문이다. 지금 관에서 나오는 것도 역시 이러하다.
016_1231_a_09L論曰二通達轉謂已登地諸菩薩由眞實虛妄顯現爲能故釋曰得無分別智證眞如故名通達由此通達有別轉異於地前若已登有時入觀此通達爲眞實顯現因何以故如初通達明證眞如後入觀亦爾有時出觀此通達爲虛妄顯現何以故如先未入觀以散心修自利利他俗行今出觀亦爾
【論】이 전변은 초지로부터 6지까지이다.
【釋】이 가운데 똑같이 관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에 다름이 있기 때문에 6지로써 그 위계를 삼는다.
016_1231_a_17L論曰轉從初地至六地釋曰此中同有出入觀異故以六地爲其位
016_1231_b_01L【論】셋째는 수습(修習)의 전변이니, 아직 장애를 떠나지 못한 사람으로 말미암으며 모든 상이 현현하지 않고 진실이 현현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釋】앞의 위계에서의 닦고 익히는 것은 상에 의거하여 일어나지만 이 위계의 닦고 익히는 것은 상이 없음에 의거하여 일어난다. 이미 혹장은 떠났지만 모든 지장을 떠나는 것을 아직 다하지 못한 대승을 공부하는 사람은 이 전변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상이란 상의 상과 생하는 상 그리고 진실의 상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상의 체가 현현하지 않음이 이 전의에 의지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세 가지 상이 없음이 현현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이 전의를 의지하여 얻을 수 있다.
016_1231_a_19L論曰三修習轉由未離障人是一切相不顯現眞實顯現依故釋曰前位修習依相起此位修習依無相起已離惑障離一切智障未盡是有學大乘人能得此轉一切相謂相相生相眞實相此三相體不顯現依止此轉依得成三無相得顯現亦依止此轉依得成
【論】이 전변은 7지부터 10지까지이다.
【釋】이 가운데서 똑같이 상이 없는 행을 닦기 때문에 이 네 가지 지가 그 위계이다.
016_1231_b_04L論曰此轉從七地至十地釋曰此中同修無相行故以四地爲其位
【論】넷째는 과가 원만한 전변이다. 이미 장애를 떠난 사람으로 말미암으며 모든 상이 현현하지 않고 청정한 진여가 드러나니, 모든 상의 자재에 도달하여 얻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釋】세 가지 덕이 구족한 것을 과가 원만하다고 한다. 이미 모든 장애를 떠난 사람은 곧 모든 부처님이며, 이 전변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상이 현현하지 않는 것이 곧 단덕(斷德)이며, 모든 상이 멸하였기 때문에 청정한 진여가 현현하는 것이 곧 지덕(智德)이며, 여리여량지가 원만하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갖추어 모든 상의 자재에 이르러 얻었다고 말하니, 곧 은덕(恩德)이다. 모든 상에 의지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자재, 이 자재를 얻음으로써 뜻대로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지을 수 있다. 세 가지 덕이 모두 이 전변을 근거로 삼는다.
016_1231_b_06L論曰四果圓滿轉由已離障一切相不顯現淸淨眞如顯現得一切相自在依故釋曰三德具足名果圓滿已離一切障人卽是諸能得此轉一切相不顯現卽是斷以一切相滅故淸淨眞如顯現是智德如理如量智圓滿故謂具一切智及一切種智至得一切相自在卽是恩德依止一切相中所得自在由得此自在如意能作一切衆生利益事三德竝以此轉爲依止
016_1231_c_01L【論】다섯째는 하열한 전변이다. 성문은 인식 주관의 무자성[人無我]를 통달하였기 때문이며, 한결같이 생사를 배척하여 영원히 생사를 버리고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釋】인식 주관과 경계와 공능, 이 세 가지의 정의가 모두 하열하다. 성문인이기 때문에 인식 주관이 하열하고, 단지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음[人無我]만을 관하기 때문에 경계가 하열하여 마음은 생사를 면하고 떠나기를 구하여 스스로 삼계를 벗어나지만, 구경을 얻지 못한다. 또한 중생을 겸하여 제도할 수 없기 때문에 공능이 하열하다. 신견이 성문의 속박이므로 이 신견을 제거하기 위하여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는 관[人無我觀]을 닦는다. 고제[苦]와 집제[集]1)를 통틀어 생사라고 한다. 만약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음을 얻는다면, 곧 고제를 등지고 집제를 버린다.
016_1231_b_16L論曰五下劣轉由聲聞通達人無我故一向背生死爲永捨離生死故釋曰人境功能三義皆下劣是聲聞人故人下劣但觀人無我故境下劣心求免離生死自出三界未得究竟又不能兼濟衆生故功能下劣身見是聲聞繫縛爲除此見故修人無我苦集通名生死若得人無我則能背苦捨集
【論】여섯째는 넓고 큰 전변이다. 보살은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法無我]을 통달하기 때문이다.
【釋】인식 주관과 경계와 공능의 세 가지의 정의가 모두 넓고 크다. 보살인이기 때문에 인식 주관이 넓고 크다.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을 관하기 때문에 경계가 넓고 크다. 스스로를 제도하고 남을 제도하며 또한 구경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공능이 넓고 크다. 분별은 보살의 속박이니, 이 속박을 제거하기 위해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다는 관(觀)을 닦는다.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다는 것이 근본이며,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다는 것은 말단이다. 만약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을 얻는다면 반드시 먼저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음을 얻어야 한다. 비록 다시 먼저 얻는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청정하지 못하다. 근본을 제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을 증득한 뒤에 바야흐로 청정을 얻는다.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의 경계는 네 가지 덕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이 경계를 관하여 여덟 가지의 전도를 떠날 수 있다.
016_1231_c_02L論曰六廣大轉由菩薩通達法無我故釋曰人境功能三義皆廣大是菩薩人故人廣大觀法無我故境廣大自度度他又能究竟故功能廣大分別是菩薩繫縛爲除此繫縛故修法無我觀法無我是本人無我是末若得法無我必先得人無我雖復先得猶未淸淨以根本未除故證法無我後方得淸淨法無我境能顯四德故觀此境得離八倒
【論】그 가운데서 적정의 공덕을 관하기 때문이며,
【釋】생사 가운데서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을 관하기 때문에 적정의 공덕이라고 일컫는다.
016_1231_c_11L論曰於中觀寂靜功德故釋曰於生死中觀法無我故稱寂靜功德
【論】버리고 버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釋】이것은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을 관하는 공능을 드러낸다. 생사 가운데서 적정을 관함으로 해서 분별을 떠날 수 있다. 혹에 물들게 되지 않기 때문에 번뇌를 버린다. 생사와 적정이 진여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기 때문에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016_1231_c_13L論曰爲捨不捨故釋曰此顯法無我觀功能於生死中由觀寂靜能離分別不爲惑染故捨煩惱由見生死寂靜與眞如不異故不捨生死
【論】만약 보살이 하열한 전변의 위계에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釋】세 가지 과실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016_1231_c_17L論曰若菩薩在下劣轉位有何過失釋曰欲顯有三失故爲此問
【論】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釋】이것은 보살의 은덕을 상실한다는 것을 밝힌다.
016_1231_c_19L論曰不觀衆生利益事故釋曰此明失菩薩恩德
【論】보살의 인식현상을 지나쳐 떠나며,
【釋】여리여량지와 지혜를 따라 일으켜지는 복덕이 보살의 인식현상이다. 보살의 지혜와 인식현상을 행하지 않으므로 과실이 된다. 보살의 복덕과 인식현상을 버리고 멀리하니, 떠남이 된다. 이것은 지혜와 덕을 상실하는 것을 밝힌다.
016_1231_c_21L論曰過離菩薩法釋曰如理如量智及隨智所起福德是菩薩法不行菩薩智慧法爲過遠菩薩福德法爲離此明失智德
016_1232_a_01L【論】낮은 승(乘)의 사람들과 똑같은 해탈을 얻는다. 이것이 과실이 된다.
【釋】단지 혹장만을 멸하고 지장을 멸하지 못한다. 이것은 단덕(斷德)을 상실하는 것을 밝힌다.
016_1232_a_01L論曰與下乘人同得解脫此爲過失釋曰但滅惑障不滅智障此明失斷
【論】모든 보살이 넓고 큰 전변의 위계에 있다면 무슨 공덕이 있는가?
【釋】세 가지 덕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이 질문을 한다.
016_1232_a_04L論曰諸菩薩若在廣大轉位何功德釋曰欲顯有三德故更爲此問
【論】생사의 인식현상 가운데에서 스스로 전의하여 의지가 되기 때문에 모든 자재를 얻으며,
【釋】무분별지를 얻어서 지장(智障)의 종자를 멸한다. 이 멸함이 곧 전의이다. 이 전의로써 의지를 삼아, 보살은 모든 인식현상 가운데서 열 가지 자재를 얻는다.
016_1232_a_06L論曰於生死法中由自轉依爲依故得諸自在釋曰得無分別滅智障種子此滅卽是轉依以此轉依爲依止菩薩於一切法中得十種自在
【論】모든 도 가운데서 모든 신(身)을 드러낼 수 있으며,
【釋】자재로써 의지를 삼으니 6도(道) 가운데서 그 형상의 품류를 따라 갖가지 몸을 드러낸다.
016_1232_a_10L論曰於一切道中能現一切身釋曰以自在爲依止於六道隨彼形類現種種身
【論】세간의 부유함과 즐거움, 그리고 3승에서 갖가지 교화의 방편인 승능(勝能)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바른 가르침에 안립할 수 있다. 이것이 넓고 큰 전변의 공덕이다.
【釋】부유함과 즐거움은 삼계의 선도(善道)이다. 먼저 세간의 선도를 얻게 하고 뒤에 3승의 성스러운 도를 얻게 한다. 3륜(輪)2)으로써 교화하고 제도하여 바른 법에 머물게 한다. 무슨 법이 큰 보리의 자성의 전의가 되는가? 2승과는 다르다는 것이 큰 보리의 자성이다. 이 전의에는 네 가지 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생하여 일어나는 의지가 상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영원히 생하지 않는 의지가 상이 되는 것이며, 셋째는 성숙한 사량으로 알게 되는 과가 상이 되는 것이며, 넷째는 법계의 청정이 상이 되는 것이다.
016_1232_a_12L論曰於世閒富樂及於三乘由種種教化方便勝能能安立彼於正教是廣大轉功釋曰富樂是三界善道先令得世閒善道後令得三乘聖道以三輪化度令住正法何法爲大菩提自性轉依異二乘是大菩提自性此轉依應知有四相一生起依止爲相二永不生依止爲相三成熟思量所知果爲相四法界淸淨爲相
016_1232_b_01L생하여 일어나는 의지가 상이 된다는 것은 부처님에 의해 서로 이어서 섭지되는 출세간의 도의 의지이다.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이 전의에 도달하지 못하여 부처님의 성스로운 도(道)도 성립하지 않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부처님의 도가 이 전의를 떠나서 이루어진다면 전변하지 아니하고서도 먼저 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영원히 생하지 않는 의지가 상이 된다는 것은 모든 혹과 습기가 영원히 생하지 않는 의지이다.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인연이 이미 모여서 이 전의에 이르지 못하므로 모든 혹과 습기가 영원히 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다. 성숙한 사량에 의해 인식되는 과의 의지가 상이 된다는 것은 성숙한 심사(尋思)와 바른 통달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며, 진여에 의하여 인식되는 실제적인 과(果)이다.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모든 부처님의 자성을 다시 심사하여야 하고 다시 장애를 멸하여야 한다.
법계의 청정이 상이 된다는 것은 모든 상을 굴복하여 멸한 가장 청정한 법계에 의해 드러내어지는 것이다.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모든 부처님의 자성은 마땅히 항상하지 않아야 하며, 부처님의 자성이 항상 머문다고 사량할 수 있거나 사량할 수 없거나 간에 상이 되니 역시 설할 수 없다.
016_1232_a_21L生起依止爲相者是佛相續所攝出世道依止不爾未至此轉依佛聖道不成不應道理若佛道離此轉依成依未轉道應先成永不生依止爲相者一切惑及習氣永不生依止若不爾因緣已聚集未至此轉依諸惑及習氣永不生不成不應道理成熟思量所知果依止爲相者成熟尋思及善通達所眞如所知實際果若不爾諸佛自性應更尋思應更滅障法界淸淨爲相者伏滅一切相最淸淨法界所顯若不爾諸佛自性應無常應可思佛自性常住不可思爲相亦不可說
【論】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釋】이 전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거듭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32_b_11L論曰此中說偈釋曰爲顯此轉依重說偈

【論】범부에 있어서는 진실을 덮어버리고,
그들에게서는 허망이 드러난다.
016_1232_b_13L論曰
於凡夫覆眞
於彼顯虛妄

【釋】범부에 있어서의 견제(見諦)인 무명이 모든 인식현상과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는 진공(眞空)을 그들에게서 덮어버린다. 즉 범부에 있어서 이 무명이 그 마음을 전도시켜 아상(我相)과 중생상(衆生相)들과 6진(塵)의 상인 허망한 인식현상을 보게 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무명을 드러내어 그 의지가 된다.
016_1232_b_14L釋曰見諦無明於凡夫覆一切法人無我眞空於彼謂於凡夫此無明倒彼心令見我相衆生相等及六塵相諸虛妄法因此顯現無明爲其依止

【論】보살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드러낸다.
016_1232_b_18L論曰
於菩薩一向
捨虛顯眞實

【釋】보살의 무분별지는 무명을 멸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허망한 인식현상, 즉 아상 등을 버리고 2공(空)의 진여를 드러낸다. 무명이 생하는 것은 범부의 의지이며, 무명이 멸하는 것은 보살의 의지이다. 이 게송은 전의(轉依)의 상이 되는 멸함을 밝힌다.
016_1232_b_20L釋曰菩薩無分別智由滅無明故一切虛妄法謂我相等顯二空眞如無明生是凡夫依無明滅是菩薩依此偈明滅爲轉依相
016_1232_c_01L
【論】드러내지 않고, 드러낸다.
허망과 진실을
016_1232_c_01L論曰
不顯現顯現
虛妄及眞實

【釋】허망은 분별성이다. 분별이 일어나지 않으니 곧 허망이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은 3무성(無性)이다. 허망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진실이 드러난다.
016_1232_c_02L釋曰虛妄是分別性分別不起卽虛妄不顯現眞實是三無性虛妄不顯故眞實顯現

【論】보살의 전의이며,
뜻과 같이 해탈하기 때문에
016_1232_c_05L論曰
是菩薩轉依
解脫如意故

【釋】드러내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 보살의 전의이다. 이 전의는 곧 보살의 해탈이다. 해탈을 이미 얻으면 곧 다시 속박되지 않는다. 남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6도(道) 가운데 뜻대로 두루 행한다. 2승의 해탈이 영원히 멸하여 남을 이익되게 한다는 의미가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마치 목이 베여서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게송은 허망을 해탈한 청정한 법신을 밝힌다. 이 둘은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으니, 세 가지 덕을 들어 전의를 밝힌다.
016_1232_c_06L釋曰不顯現顯現是菩薩轉依此轉依卽菩薩解脫得解脫已無復繫縛爲利他故如意遍行於六道中不同二乘解脫永滅無利他義如被斬首命必不續此偈明解脫虛妄淸淨法此二由無分別智得成卽就三德明轉依

【論】생사와 열반에서
지혜를 일으킨다면 평등하다.
016_1232_c_13L論曰
於生死涅槃
若智起平等

【釋】생사와 열반은 모두 분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일한 진여이다. 만약 무분별지를 얻는다면 이것을 연하여 평등이 일어난다.
016_1232_c_14L釋曰生死涅槃竝是分別所作同一眞如若得無分別智緣此平等起

【論】생사가 곧 열반이니,
이 둘에는 이것과 저것이 없기 때문이다.
016_1232_c_16L論曰
生死卽涅槃
二無此彼故

【釋】부정품을 생사라고 하며, 정품은 열반이라고 한다. 생사인 허망은 인식 주관과 인식현상의 두 가지 자성이 없으니 곧 열반이다. 무분별지를 얻으면 생사가 있지 않다는 것을 본다. 곧 열반이 있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없다. 만약 이 지혜를 얻는다면 무슨 공능이 있는가?
016_1232_c_18L釋曰不淨品名生死淨品名涅槃死虛妄無人法二我卽是涅槃得無分別智見生死無所有卽是見涅槃無所有故無此彼之異若得此智有何功能

【論】따라서 생사에서
버리지 않고 버리지 않음도 없다.
016_1232_c_23L論曰
是故於生死
非捨非非捨
016_1233_a_01L
【釋】비록 자성이 없음을 관하더라도 생사를 떠나지 않으니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비록 생사에 있어서 자성이 없음을 항상 관하니 버리지 않음이 없다. 만약 이러하다면 열반에서는 어떠한가?
016_1233_a_01L釋曰雖觀無我不離生死是非捨義雖在生死常觀無我是非非捨若爾於涅槃云何

【論】열반에서도 이와 같으니,
얻음이 없고 얻지 않음도 없다.
016_1233_a_04L論曰
於涅槃亦爾
無得無不得

【釋】생사를 떠나서 다른 법이 없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보살이 이미 생사를 얻지 않으며 역시 열반도 얻지 않는다. 이것이 얻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보살은 생사에서 항상 승묘한 적정을 관하는 것이 얻지 않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016_1233_a_05L釋曰離生死無別法名涅槃菩薩旣不得生死亦不得涅槃是無得義薩於生死常觀勝妙寂靜是無不得義

10. 석지차별승상(釋智差別勝相) ①
016_1233_a_09L攝大乘論釋釋智差別勝相第十之初

【論】이와 같이 이미 적멸의 차별을 설하였다. 지혜의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釋】앞에서 이미 보살의 해탈과 2승의 해탈과의 차별을 설하였다. 보살의 해탈지견과 2승의 해탈지견과는 역시 차별이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016_1233_a_10L論曰如此已說寂滅差別云何應知智差別釋曰前已說菩薩解脫與二乘解脫差別菩薩解脫知見與二乘解脫知見亦應有差別云何可知
【論】부처님의 세 가지 신(身)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차별을 안다.
【釋】지혜의 차별은 보살의 해탈지견(解脫知見)이며, 곧 보리도(菩提道)의 구경의 과이다. 2승의 도의 구경의 과를 해탈지견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2승의 해탈지견 가운데는 세 가지 신이 없으나 보살의 해탈지견에는 세 가지 신의 차별이 있다. 왜냐 하면 2승은 지장(智障)을 멸할 수 없으므로 일체지(一切智)가 없기 때문에 원만한 청정법신을 얻지 못하며, 대자비(大慈悲)가 없어서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응(應)과 화(化)의 두 몸이 없다. 보살은 이러한 두 가지 정의를 갖추었기 때문에 세 가지 몸이 있다. 따라서 세 가지 몸으로써 지혜의 차별을 드러낸다. 무슨 법을 세 가지 몸이라고 하는가?
016_1233_a_14L論曰由佛三身應知智差別釋曰智差別是菩薩解脫知見卽菩提道究竟果如二乘道究竟果名解脫知二乘解脫知見中無三身菩薩解脫知見中有三身差別何以故二乘不能滅智障無一切智故不得圓滿淸淨法身無大慈悲不行利益他事無應化兩身菩薩具此二義故有三身故以三身顯智差別何法名三
016_1233_b_01L【論】첫째는 자성의 몸이며, 둘째는 수용(受用)하는 몸이며, 셋째는 변화하는 몸이다.
【釋】몸은 의지로써 정의를 삼는다. 모든 법을 지닐 수 있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이 몸을 따르기 때문에 이룰 수 있다. 따르지 않으면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신은 모든 법의 의지가 된다. 비유하건대 신근이 모든 근의 의지가 되기 때문에 신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법신도 역시 이러하여 응신과 화신 그리고 여래의 모든 공덕이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신은 실제적인 것[實]으로써 정의를 삼는다.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이라고 한다. 신은 곧 체이다. 체는 성(性)으로써 정의를 삼는다. 이 성은 모든 위계 가운데서 바뀌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이라고 말한다. 실제적이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는다.
016_1233_b_01L論曰一自性身二受用身三變化身釋曰身以依止爲義由能持諸法諸法隨身故得成不隨則不成身爲諸法依止譬如身根爲餘根依止故得身名法身亦爾應化身及如來一切功德所依故名爲身又身以實爲義不破壞故名實身卽是體體以性爲義此性於一切位中不改故名實實故不破壞
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연히 얻음이고, 둘째는 사람의 공능(功能)으로 얻는 것이다. 자연히 얻는다는 것은 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거나 세상에 나오시지 않거나 간에 법성은 항상 그대로이다. 즉 모든 인식현상은 2공(空)으로 말미암은 불공(不空)이다. 2공은 허망으로 말미암은 불공이다. 이 두 가지 법은 모두 자연히 얻기 때문에 설하여 자성이라고 일컫는다. 사람의 공능으로 얻는다는 것은 6도의 신을 말한다. 혹에 의거함으로 말미암아 선업과 악업과 부동업(不動業)을 일으키고, 업으로 말미암아 일곱 가지 과를 얻으며, 과에 의거하여 다시 혹을 생하는 것을 사람의 공능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016_1233_b_09L身有二種一自然二人功得自然得者如經言若佛出世若不出世法性常然謂一切法由二空不空二空由虛妄不空此二法皆自然得故說名自性人功得者謂六道身由依惑起善惡不動業業得七種果依果更生惑是名人功所得
여래의 신(身)도 역시 두 가지 얻음이 있으니, 첫째는 자성의 얻음으로 법신이며, 둘째는 사람의 공능이 얻는 것으로 응신과 화신의 두 가지 신이다. 사람의 공능으로 얻어지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성신(自性身)을 세운다. 자성신을 의지하여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행을 일으킨다. 두 가지 행에 의해 얻어지는 과를 정토청정(淨土淸淨)과 대법락(大法樂)이라고 말한다. 두 가지 과를 받아 쓸 수 있기 때문에 수용신(受用身)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수행하는 지 가운데서 부처님의 본원적인 자재력으로 말미암아 그 식(識)이 중생과 같이 변이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변화신이라고 일컫는다.
016_1233_b_16L如來身亦有二種得一自性得是法身二人功得是應化兩身爲顯異人功所得故立自性身依止自性起福德智慧二行二行所得之果謂淨土淸淨及大法樂能受用二果故名受用身於他修行地中由佛本願自在力故彼識似衆生變異現故名變化身
016_1233_c_01L【論】이 가운데 자성신이란 모든 여래의 법신이다.
【釋】이 세 가지 신 가운데 자성으로써 법신을 삼는다면 자성에는 두 가지의 규정이 있다. 무슨 자성으로써 법신을 삼는가? 모든 장애가 멸하기 때문에, 모든 순백의 인식현상[白法]이 원만하기 때문에, 오직 진여와 진지(眞智)가 홀로 존재하는 것을 설하여 법신이라고 한다. 신은 의지로써 정의를 삼는다. 무슨 법을 의지하는가?
016_1233_b_23L論曰此中自性身者諸如來法身釋曰此三身中若以自性爲法身自性有二種定以何自性爲法身一切障滅故一切白法圓滿故唯有眞如及眞智獨存說名法身以依止爲義何法爲依止
【論】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자재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釋】모든 인식현상의 자재란 열 가지 자재를 말한다. 또한 인 가운데의 10바라밀이며, 과 가운데의 모든 불공법이다. 모두 이미 얻어서 상실하지 않고 뜻대로 운용하기 때문에 자재라고 일컫는다. 자재는 세어 헤아릴 수 없다. 모든 법의 수량을 따르니 자재도 역시 이러하다. 이 법의 의지인 법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청정과 원지(圓智)를 떠나지 않으니 곧 여여하고 여여한 지혜[如如如如智]이기 때문이다.
016_1233_c_05L論曰於一切法自在依止故釋曰一切法自在謂十種自在又因中十波羅蜜果中一切不共法皆得已不如意運用故名自在自在不可數隨諸法數量自在亦爾云何知此法依止法身不離淸淨及圓智卽如如如如智故
【論】수용신이란 모든 부처님의 갖가지 토(土)와 대인집륜(大人集輪)에 의지하여 드러내어지며,
【釋】토(土)에는 많은 보물의 차별이 있으며 헤아려 셀 수 없기 때문에 갖가지라고 말한다. 이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의 토는 부처님의 응신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모든 보살을 대인집(大人集)이라고 이름하며, 보살의 대중이 친하게 가까이하는 선우(善友)이다. 바르게 듣고, 바르게 사유하고, 바르게 수행하는 것들이 윤의 체이다.
성스러운 왕의 금륜이 이곳으로부터 저곳에 이를 수 있듯이,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이미 얻은 것은 잃지 않게 하여 위와 아래로 평등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윤(輪)의 작용[用]이다. 보살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응신을 떠나면 곧 두 가지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일은 응신으로써 의지를 삼는다. 의지의 주체가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의지의 대상이 현현(顯現)한다.
016_1233_c_12L論曰受用身者諸佛種種土及大人集輪依止所顯現釋曰土有衆寶差別不可數量故稱種種此無量寶土依佛應身得成菩薩名大人集是菩薩衆親近善友正聞正思正修等是輪體如聖王金輪能從此至彼未得令得已得令不能上下平行此是輪用菩薩亦爾若離應身則二事不成故此二事以應身爲依止由能依止成故所依止顯現
016_1234_a_01L【論】이것은 법신으로써 의지를 삼으며,
【釋】법신은 의지가 없으나 이 신은 의지가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자재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응신이 법신을 의지하기 때문에 두 신에는 다름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
016_1233_c_22L論曰此以法身爲依止釋曰法身無依止此身有依止如前言於一切法自在依止故此卽明應身依止法身故二身有異
【論】모든 불토의 청정한 대승의 인식현상이 즐거움을 받고 씀을 받는 인이기 때문이다.
【釋】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정토 가운데서 스스로 대승법을 듣고 받아들이며 법의 즐거움을 받는다. 타인을 위해서 대승법을 설하고 역시 법의 즐거움을 받는다. 보살은 이 두 가지 법의 즐거움을 받아들여 쓰는 것을 갖춘다. 만약 응신이 없다면 이 두 가지 법락을 받아들여 씀이 없다. 따라서 응신은 이 두 가지 법락을 받아들여 쓰는 것의 인(因)이 된다. 또한 받아들여 쓰는 것에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 첫째는 차별적 대상[塵]을 받아들여 쓰는 것이니, 곧 정토를 받아들여 쓰는 것이다. 둘째는 법락을 받아들여 쓰는 것이니 곧 대승의 법락을 받아들여 쓰는 것이다. 만약 응신이 없다면 이 두 가지 받아들여 씀은 없다. 따라서 응신은 이 두 가지 수용의 인이다. 변화신이 법신과 응신과 다른 모습은 무엇인가?
016_1234_a_02L論曰佛土淸淨大乘法受樂受用因故釋曰菩薩於諸佛淨土中自聽受大乘法受法樂爲他說大乘法亦受法菩薩備受用此二法樂若無應身則無此二受用法樂故應身爲此二受用法樂因又釋受用有二義一受用塵卽受用淨土二受用法樂卽受用大乘法樂若無應身則無此二受故以應身爲此二受用因變化身與法身應身異相云何
【論】변화신이란 법신으로써 의지를 삼는다.
【釋】법신은 의지가 없지만 이 신은 의지가 있다. 앞에 말한 것처럼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자재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변화신이 법신을 의지하기 때문에 두 가지 신이 다름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
016_1234_a_12L論曰變化身者以法身爲依止釋曰法身無依此身有依止如前言於一切法自在依止故此卽明變化身依止法身故二身有異
【論】도솔타천(兜率陀天)3)에 머무는 것으로부터 물러나 생을 받으며,
【釋】이 아래로는 화신의 체가 응신과 다르다는 것을 밝힌다. 응신은 큰 지혜와 큰 선정과 대비(大悲)로써 체를 삼으나, 화신은 단지 색형(色形)으로써 체를 삼는다. 드러내는 색형은 먼저 도솔타천 가운데 머물다가 뒤에 사람 가운데 생하여 먼저 20년을 중음(中陰)을 받아 생하기 때문에 물러난다고 말한다. 뒤에 석가의 가문에서 생을 받는다.
016_1234_a_16L論曰從住兜率陁天及退受生釋曰此下明化身體異應身應身以大智大定大悲爲體身但以色形爲體所現色形先住兜率陁天中後生人中先二十年受中陰生故言退後於釋迦家受生
【論】배움을 받고 탐욕의 대상을 받으며,
【釋】납비(納妃)4) 등을 배워 받아들이고 탐욕의 대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왕의 비밀한 기교인 예순네 가지의 능력 등을 닦아 익힌다.
016_1234_a_21L論曰受學受欲塵釋曰修習王秘密巧六十四能等爲受學納妃等受欲塵
016_1234_b_01L【論】출가하여 외도(外道)에게 가서 닦게 된 고행과
【釋】왕위를 버리고 울타아라라(鬱陀阿羅羅)선인의 처소에 가서 외도의 모든 고행을 갖추어 닦았다.
016_1234_b_01L論曰出家往外道所修苦釋曰捨王位往鬱陁阿羅羅仙人所備修外道一切苦行
【論】위없는 보리를 얻어 법륜을 굴리고 큰 반열반(般涅槃) 등의 사(事)에 의해 드러내어지기 때문이다.
【釋】뒤에 외도의 법을 버리고 불고불락행(不苦不樂行)을 닦아 견줄 데 없는 각[無等覺]을 이룬다는 것은 3승의 가르침을 설명한다. 뒤에 바야흐로 사화(捨化)하는 것과 변화하는 일이 하나가 아니며, 내지는 멸한 뒤에 오히려 형(形)이 남음이 있다. 불사(佛事)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등의 사(事)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사는 화신에서 현현한다.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먼저 도솔타천에 머물다가 뒤에 사람 속에 태어나시는가? 자신이 하늘 사람의 종류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늘 사람은 성스러운 도의 그릇이기 때문이며, 하늘 사람의 스승이 되어 같은 부류를 이롭게 섭지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며, 외도의 비방을 끊기 위함이다.
016_1234_b_03L論曰無上菩提轉法輪大般涅槃等事顯現故釋曰後捨外道法修不苦不樂行成無等覺說三乘教後方捨變化事非一乃至滅後猶有遺形爲佛事故言等事以此等事顯於化佛何故先住兜率陁天後生人中欲顯自身是天人類以天人是聖道器故欲示爲天人師攝利同類故斷外道毀謗故
【論】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갖는 법신은 어떤 모습인가?
【釋】상(相) 등의 열 가지 정의를 이끌어서 법신을 이루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법신이 만약 이루어지면 나머지 두 신도 역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위하여 묻는다.
016_1234_b_12L論曰諸佛如來所有法身其相云何釋曰欲引相等十義證成法身法身若成餘二身亦故爲此問
【論】만약 그 모습을 간략하게 설한다면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釋】만약 자세히 설한다면 생함이 없고 멸함이 없다는 등과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상이 있다. 이제 간략하게 설하여 다섯 가지 상이 있다고 말한다. 즉 열 가지 정의 가운데 첫 번째인 상의 정의이다.
016_1234_b_15L論曰若略說其相知有五種釋曰若廣說如無生無滅等有無量相今略說故言有五相卽十義中第一相義
【論】이 가운데 울타나(鬱陀那)의 게송을 읊는다.
【釋】산만한 의미를 섭지하기 위하여 이 게송으로 읊는다. 게송 가운데의 열 가지 정의는 뒤에 차례로 설명한다.
016_1234_b_18L論曰此中說鬱陁那偈釋曰爲攝持散義故說此偈偈中十義後次第釋

【論】상(相)ㆍ증득(證得)ㆍ자재(自在)와
의지(依止)ㆍ섭지(攝持)와
차별(差別)ㆍ덕(德)ㆍ심심(甚深)와
억념[念]ㆍ업(業) 등이 부처님의 신(身)을 밝힌다.
016_1234_b_20L論曰
相證得自在
依止及攝持
差別德甚深
念業明佛身

다섯 가지 상이란 첫째는 법신인 전의(轉依)가 상이 된다.
【釋】법신은 곧 보살의 전의이다.
016_1234_b_22L五相者一法身轉依爲相釋曰身卽是菩薩轉依
016_1234_c_01L【論】모든 장애와 부정품분의 의타성이 이미 멸하여
【釋】장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부분의 장애이고, 둘째는 한 부분의 장애이다. 보살에 의해 끊어진 모든 지장(智障)은 삼계의 안과 밖을 꿰뚫기 때문에 모든 부분이라고 말하며, 곧 모든 장애이다. 셋째는 2승에 의해 끊어진 혹장이니 오직 삼계의 안에 있으며, 한 부분의 장애라고 한다. 곧 부정품의 부분이다. 둘 다 의타성으로써 의지를 삼는다. 다스리는 도를 일으킬 때 곧 이 두 가지 장애를 끊기 때문에 이미 멸하였다고 말한다.
016_1234_c_01L論曰一切障及不淨品分依他性滅已釋曰障有二種一具分障二一分障菩薩所斷一切智障通三界內外故名具分是一切障二二乘所斷惑障唯在三界內名一分障卽是不淨品分竝以依他性爲依止治道起時卽斷此二故言滅已
【論】모든 장애를 해탈한다.
【釋】두 부분의 장애가 이미 멸함으로 말미암아 의타성 한 부분은 모든 장애를 해탈한다.
016_1234_c_08L論曰解脫一切障釋曰由二分障已滅依他性一分脫一切障
【論】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자재를 얻어 능(能)5)이 되며,
【釋】이 의타성의 한 부분은 모든 법을 통달할 수 있어서 동일한 무성(無性)이다.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기 때문에 자재라고 한다.
016_1234_c_10L論曰於一切法得自在爲能釋曰此依他性一分能通達一切法同一無性已得無失故名自
【論】청정성인 부분의 의타성인 전의가 상이 되기 때문이다.
【釋】무분별후지(無分別後智)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모든 분별을 떠났기 때문에 청정성인 부분이라고 한다. 이 무분별지는 또한 의타성의 한 부분이다. 의타성에는 두 부분이 있다. 앞에서는 장애를 멸하여 무분별한 경계를 밝히고, 뒤에는 모든 법에 있어서 자재를 얻는 것을 밝혀 무분별지를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이 두 부분이 전의이다. 전의는 법신의 상이다.
016_1234_c_13L論曰淸淨性分依他性轉依爲相故釋曰欲顯異無分別後智一切分別故言淸淨性分此無分別智又是依他性一分依他性有二分前明滅障顯無分別境後明於一切法得自在爲能顯無分別智此二分是轉依轉依爲法身相
【論】둘째는 희고 맑은 법이 상이 된다.
【釋】모든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검은 것이고, 둘째는 흰 것이다. 검은 것은 악이며, 흰 것은 선이다. 선 가운데는 스스로 네 가지가 있다. 법신은 진실한 선이기 때문에 희고 맑은 법이 상이 된다고 말한다.
016_1234_c_19L論曰二白淨法爲相釋曰一切法有二種二白黑卽是惡白卽是善善中自有四種法身是眞實善故言白淨法爲相
016_1235_a_01L【論】6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법신에서 열 가지 자재를 얻기에 이르러 승능(勝能)이 상이 되기 때문이다.
【釋】6바라밀의 구경을 닦음으로 말미암아 법신에 있어서 열 가지 자재를 얻는다. 이 열 가지 자재가 법신의 승능이다. 곧 법신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6바라밀의 구경으로 말미암아 열 가지 자재를 얻는다는 이 의미는 무엇인가?
016_1234_c_23L論曰由六度圓滿於法身至得十種自在勝能爲相故釋曰修六度究竟於法身得十自在此十自在是法身勝能卽以法身爲性六度究竟得十自在其義云何
【論】무엇이 열이 되는가? 첫 번째는 명(命)의 자재이며,
【釋】수명 가운데서 짧음과 버림을 닦아서 뜻대로 이룰 수 있다.
016_1235_a_04L論曰何者爲十一命自在釋曰壽命中脩短及捨如意得成
【論】두 번째는 심(心)의 자재이며,
【釋】생사에서 생을 받아도 생사에 물들지 않는다.
016_1235_a_06L論曰二心自在釋曰於生死受生不爲生死染污
【論】세 번째는 재물의 자재이니,
【釋】열 가지 재물 중에 음식이 첫 번째가 된다. 때에 따라서, 곳에 따라서 뜻대로 얻을 수 있다.
016_1235_a_08L論曰三財物自在釋曰十種財物飮食爲初隨時隨處如意能得
【論】이 세 번째는 보시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釋】만약 사람이 모든 곳에서 베풀고, 모든 물건을 베풀고, 대비(大悲)로써 베푼다면 곧 보시가 원만하다. 대비로 말미암아 보시를 행하는 것이 인이 되어 심의 자재를 얻으며, 모든 곳에서의 보시가 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명의 자재를 얻으며, 모든 재물의 보시가 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재물의 자재를 얻는다.
016_1235_a_10L論曰此三由施度圓滿得成釋曰若人一切處施一切物以大悲施則施圓滿由大悲行施爲因得心自在由一切處施爲因命自在由一切物施爲因得財物自
【論】네 번째는 업(業)의 자재이며, 다섯 번째는 생(生)의 자재이니, 이 둘은 지계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다.
【釋】업은 인이 되고 생함은 과가 되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응한다. 신업과 구업을 바로잡을 수 있음으로 말미암아 업의 자재를 얻으며, 내지는 만약 몸과 마음을 조각조각 나눈다면 신업과 구업을 다르게 변화시키는 것이 없다. 이러한 마음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계바라밀이 원만하다. 지계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만약 그 밖의 다른 생을 받고자 한다면 이 업을 뜻대로 끌어당길 수 있어서 모두 눈앞에 드러나게 하기 때문에 업의 자재라고 한다. 업의 자재로 말미암아 업의 과가 생하는 가운데서도 역시 자재를 얻으며, 6도의 품류를 뜻대로 따라 가서 이익을 생한다. 만약 궁극에 뜻대로 버릴 수 있다면 취함과 버림의 두 가지 일의 공능에 장애가 없기 때문에 생의 자재라고 말한다.
016_1235_a_15L論曰四業自在五生自在此二由戒度圓滿得成釋曰業爲因生爲果故此二相應由能制身口業故得業自在乃至若分分斷身心無變異身口業由此心成故戒度圓滿戒度圓滿若欲受餘生如意能引業悉令現前故名業自在由業自在於業果生中亦得自在隨六道類如意往生利益若竟如意能捨取捨二事功能無㝵故名生自在
016_1235_b_01L【論】여섯 번째는 욕락(欲樂)의 자재이니, 인욕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釋】인(忍)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욕의 인이며, 둘째는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인이며, 셋째는 통달의 인이다. 남이 비방하여 낮추는 일에 대하여 마음이 병들지 않으니 인욕의 인이라고 하며, 스스로 고통스러운 일에 대하여 마음이 달리 변하지 않으니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인이라고 하며, 바른 법과 깊고 깊은 도리에 대하여 마음이 밝게 증득할 수 있으니 통달(通達)의 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인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이 마음을 좇아 뒤따른다. 뒤에 모든 법 가운데서 욕락하는 것을 따라 뜻대로 이룰 수 있다.
016_1235_b_01L論曰欲樂自在由忍度圓滿得成釋曰忍有三種一忍辱忍二安受忍三通達忍於他毀損事心不壞名忍辱忍於自苦事心無變異名安受忍於正法甚深道理心能明證名通達忍此三忍諸法皆隨逐心後於諸法中隨所欲樂如意得成
【論】일곱 번째는 원의 자재이니, 정진바라밀로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釋】정진바라밀로 말미암아 모든 행하여진 일을 헤아려 잴 수 있어서 미래에 원하는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원(願)의 자재라고 말한다.
016_1235_b_08L論曰七願自由精進度圓滿得成釋曰由精進波羅蜜能度一切所作事於未來一切所願如意得成故名願自在
【論】여덟 번째는 통혜(通慧)의 자재이니, 이 5신통(神通)6)에 의하여 섭지되며, 선정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釋】5신통 가운데서 얻지 못한 것은 얻고 이미 얻은 것은 잃지 않기 때문에 자재라고 말한다. 또한 5신통에서 스스로 쓸 수 있으니 역시 내가 쓰는 것과 같이 남에게도 쓸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재라고 한다. 보살은 모든 보살의 깊고 깊은 정심(定心)을 얻을 수 있음으로 말미암아 사(事)를 따라 조복(調伏)한다. 만약 5신통의 처(處)를 자신과 남에 대하여 끌어당긴다면 뜻과 같이 모든 것을 이룬다.
016_1235_b_11L論曰八通慧自在此五通所攝由定度圓滿得成釋曰於五通中未得得已得不失故名自在又於五通能自用亦能令他如我所用故名自在由菩薩能得諸菩薩諸甚深定心事調伏若引五通處於自他如意皆
016_1235_c_01L【論】아홉 번째는 지혜의 자재이고, 열 번째는 법의 자재이니, 이 둘은 반야바라밀이 원만해짐으로 해서 이룰 수 있다.
【釋】보살이 반야바라밀이 원만하여짐으로 해서 무분별지로써 음(陰) 등의 법문에 있어서 마음을 통달하여 남음이 없으므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는 것을 지혜의 자재라고 말한다. 무분별후지로써 모든 법의 품류를 통달하여 모든 지혜를 얻으니 지혜의 자재라고 한다. 무분별후지로써 스스로 증득한 것과 같이 남을 위하여 법문을 이치에 맞게 안립할 수 있으므로 법의 자재라고 말한다.
016_1235_b_18L論曰九智自在十法自在此二由般若波羅蜜圓滿得成釋曰薩由般若波羅蜜圓滿以無分別智於陰等法門心通達無餘得一切種名智自在以無分別後智通達一切法品類得一切智名智自在以無分別後智如自所證爲他安立法門如理得成名法自在
【論】셋째는 둘이 없음이 상이 되니, 두 가지 상이 없기 때문이다.
【釋】둘이 없다는 것은 있음이 없고, 없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있다는 것은 상(常)이며 없다는 것은 단(斷)이다. 있음이 없고 없음도 없다는 것은 곧 상도 아니고 단도 아닌 것이어서 2변(邊)을 떠난다.
016_1235_c_02L論曰三無二爲相由無有無二相故釋曰無二謂無有無無有爲常無爲斷無有無無卽是不常不斷離於二邊
【論】모든 인식현상이 있는 바가 없으며, 공(空)한 상이 없지 않아서 상이 되기 때문이다.
【釋】다시 위의 말을 해석한다. 모든 인식현상은 다 분별이 만든 것이므로 모두 있는 바가 없으니, 곧 2공(空)의 상이기 때문이다. 있음이 없고 없음이 없는 2공의 상이기 때문이며, 법신이 없지 않으니 곧 2공이기 때문이다. 이변이 없음으로써 법신의 상을 삼는다.
016_1235_c_05L論曰一切法無所有空相不無爲相故釋曰更釋上語一切法皆分別所作悉無所有卽是二空相故無有不無二空相故無無法身卽是二空故無二邊爲法身相
【論】또한 다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두 가지가 없음이 상이 된다.
【釋】두 가지가 없다는 것은 유위가 없고 무위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유류법(有流法)은 반드시 유위로써 상이 되며, 모든 무류법(無流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만약 도(道) 등이 유위로써 상을 삼고, 택멸(擇滅) 등이 무위로써 상을 삼는다면 법신은 유위와 무위와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 따라서 유위나 무위로써 한쪽으로 치우쳐서 상을 삼을 수 없다. 진여가 유위와 무위에 꿰뚫는 상이므로 다르다고 설할 수 없으며, 진여는 청정한 경계이며 유위와 무위는 청정하지 않은 경계이니 하나라고 말할 수 없다. 법신은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님을 상으로 삼는다. 유위와 무위가 아님도 아닌 것을 상으로 삼는다. 왜냐 하면
016_1235_c_10L論曰復次有爲無爲無二爲相釋曰無二謂無有爲無無爲一切有流法必以有爲爲一切無流法有二種若道等以有爲爲相擇滅等以無爲爲相法身與有爲無爲不一不異是故不得偏以有爲無爲爲相由眞如是有爲無爲通相不可說異眞如是淸淨境有爲無爲非淸淨境不可說一法身非有爲無爲爲相非非有爲無爲爲相以故
【論】혹과 업의 모임에 의해 생하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釋】모든 유위법은 혹(惑)과 업(業)으로부터 생한다. 법신은 혹과 업으로부터 생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가 아니다.
016_1235_c_20L論曰非惑業集所生故釋曰一切有爲法皆從惑業生法身不從業惑生故非有爲
016_1236_a_01L【論】자재를 얻음으로 해서 유위의 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釋】법신은 자재를 얻음으로 해서 거듭거듭 유위의 상을 드러낼 수 있다. 즉 응신과 화신 때문에 무위가 아니다.
016_1235_c_22L論曰由得自在能顯有爲相故釋曰法身由得自在能數數顯有爲相謂應化二身故非無爲
【論】또한 하나이다, 다르다는 두 가지가 없음이 상이 된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의지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釋】둘이 없다는 것은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는 것을 말한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법신으로 말미암아 다르지 않다. 법신은 곧 의지이므로 따라서 다르지 않다.
016_1236_a_02L論曰復次一異無二爲相諸佛如來依止不異故釋曰無二謂無一無異三世諸佛由法身無異法身卽是依止是故不異
【論】헤아릴 수 없는 의지로 말미암아 이것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釋】이 법신이 헤아릴 수 없음으로 해서 이미 선근을 성숙시킨 모든 보살에 의해 끊임없이 입증되기 때문에 하나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하나라면 나머지 사람은 수행하여도 곧 소용이 없어야 한다.
016_1236_a_05L論曰由無量依止能證此故釋曰由此法身無量已成熟善根諸菩薩無閒所證故不可說一若一餘人修行則應無用
【論】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釋】법신이 하나가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거듭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36_a_09L論曰此中說偈釋曰爲顯法身不一異義故重說偈

【論】아집이 없기 때문에
그 가운데 의지의 다름이 없다.
016_1236_a_10L論曰
我執不有故
於中無依別

【釋】세간에서는 아집의 분별을 따르기 때문에 중생의 의지는 차별이 있다. 법신에는 아집의 분별이 없기 때문에 여래의 의지는 차별이 없다. 만약 이러하다면 어찌하여 많은 부처님을 세우는가?
016_1236_a_12L釋曰於世閒由隨我執分別衆生依止有差別於法身無有我執分別故如來依止無差別若爾云何立有多
【論】앞에서 많은 의지를 증명하였듯이
거짓 이름으로 설하니 하나가 아니다.
016_1236_a_16L論曰
如前多依證
假名說不一

【釋】앞에서와 같이 지(地)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는 의지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하나의 세간의 몸에 법신이 없다면 보살은 곧 입증되지 않는다. 보살은 각각이 자신에 의하여 이 법신을 증득하기 때문에 거짓 이름에 있어서는 하나라고 말할 수 없다.
016_1236_a_17L釋曰如前因地無量依止能證故一一世閒身無有法身菩薩則無所由菩薩各各依自身證此法身故約假名不可說一

【論】성정(性情)과 가행(加行)이 다르지만 허망함이 없고
원만하며, 시작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며, 다르지도 않기 때문에
많지도 않으며, 진여에 의지한다.
016_1236_a_21L論曰
性行異非虛
圓滿無初故
不一無異故
不多依眞如
016_1236_b_01L
【釋】모든 보살이 발심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성정이 다르다고 하고, 성정이 다르기 때문에 가행도 역시 같지 않다. 가행이 다르기 때문에 공력(功力)이 있고, 공력이 있기 때문에 과를 얻을 수 있다. 인이라는 정의가 있기 때문에 허망하지 않다. 만약 단지 한 분의 부처님만 계시다면 나머지 보살은 수행하여도 곧 공허하여 얻는 것이 없다.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지으시기 때문에 원만하지 않음이 없다. 3승에서 그것7)을 안립하기 때문에 만약 모든 부처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없는 보리에 안립하지 않는다면 곧 행하여지는 부처님의 일이 원만하지 않다. 이익되게 하는 일이 원만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한 분이 아니다.
016_1236_a_23L釋曰諸菩薩發心多故名性異由性異故加行亦不同由加行異故有功由有功力故能得果有因義故非若但有一佛諸餘菩薩修行則空無所得諸佛作衆生利益事無不圓滿由安立彼於三乘故若諸佛不安立他於無上菩提則所作佛事不圓滿由利益事圓滿故佛不一
생사가 시작함이 없는 것처럼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도 역시 이러하여 시작함이 없고 헤아릴 수 없다. 만약 오직 한 분의 부처님만이 이루어진다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부처님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곧 한 분의 부처님에게서 시작함을 세우고 끝남을 세운다는 의미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의미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께서는 한 분이 아니다.
016_1236_b_08L如生死無初無量諸佛亦爾無初無量若唯一佛成前後佛不成則於一佛立始立終義則可成由此五義故諸佛不
【論】다름이 없기 때문에 많지 않다.
【釋】의지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많지 않다. 많지 않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 무엇이 의지인가?
016_1236_b_12L論曰無異故不多釋曰依止不異故諸佛不多不多故無異何者爲依止
【論】진여에 의지한다.
【釋】진여는 청정한 법계이다. 법계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의지는 차별이 없다. 이 두 게송은 법신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는 모습을 드러낸다.
016_1236_b_14L論曰依眞如釋曰眞如卽淸淨法界法界無異故諸佛依止無差別此二偈顯法身無一異相
【論】넷째는 항상 머무는 것이 상이 된다. 진여의 청정한 상이기 때문이며,
【釋】이 밑으로는 세 가지 증거를 이끌어 법신이 항상 머문다는 정의를 세운다. 진여가 만약 모든 더러움[垢]을 벗어나 떠난다면 더러움이 없는 청정함을 부처님의 과라고 설하여 일컫는다. 이 진여는 항상 머무르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청정한 진여가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법신은 항상 머무른다.
016_1236_b_16L論曰四常住爲相眞如淸淨相故釋曰此下引三證立法身常住義如若出離一切垢無垢淸淨說名佛此眞如常住諸佛是淸淨眞如所故法身常住
016_1236_c_01L【論】예전의 원(願)을 끌어당기고 꿰뚫어서 가장 궁극8)이 되기 때문이며,
【釋】초발심부터 8지(地)에 이르기까지 27대겁 아승기를 지나는 가운데 여래께서는 법계에 의하여 발원하며, 원을 성취한다. 원을 잡아 지니는 것을 끌어당긴다고 이름하고 모든 곳에서 장애가 없기 때문에 꿰뚫는다고 한다.
생사제(生死際)를 다하였기 때문에 가장 궁극이라고 일컫는다. 법계에 의거하여 이 원을 일으키기 때문에 법계가 만약 항상함이 없다면 원은 곧 다함이 있다. 원이 이미 다함이 없기 때문에 법계가 항상 머문다는 것을 안다. 또한 이 원을 끌어당기고 꿰뚫음으로 해서 가장 궁극에 공허하지 않고 과가 없지 않기 때문에 법신을 얻는다. 원이 이미 다함이 없기 때문에 법신이 항상 머문다.
016_1236_b_21L論曰昔願引通最爲極故釋曰從初發心乃至八地經二十七大劫阿僧祇於中如來依法界發願成就願秉持願是名引一切處無㝵故名通窮生死際故名最極由依法界起此願故法界若無常願則有盡願旣無盡故知法界常又由此願引通最極不空無果故得法身願旣無盡故法身常住
【論】마땅히 바른 일을 행하여 끝마치지 않기 때문이다.
【釋】만약 부처님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행하여 끝마친다고 말한다면 먼저의 원이 끝나야 하므로 원으로써 법신이 상주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이 의미는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바른 일로 말미암아 끝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다함이 없는 세상에 이르기까지 바른 일은 끝이 없다. 만약 중생이 모두 부처님을 얻지 못하여 다 열반에 들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이 바른 일은 쉬지 않는다. 바른 일은 법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므로 바른 일이 다하지 않기 때문에 법신은 항상 머문다.
016_1236_c_06L論曰應作正事未究竟故釋曰言佛作衆生利益事竟先願應窮可以願證法身常住者是義不然以故由正事未究竟故從今時乃至無窮世正事無邊若衆生未皆得佛悉般涅槃此正事無息正事由法身正事不盡故法身常住
【論】다섯째는 사의(思議)할 수 없음이 상이 된다. 이 진여의 청정은 스스로 증득한 지혜에 의하여 아는 것이기 때문이며, 비유(譬喩)할 수 없기 때문이며, 각관(覺觀)이 행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釋】법신에는 세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사의할 수 없다. 첫째는 3혜(慧)9)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사의할 수 없다. 각관이 행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문혜의 경계가 아니고, 비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혜의 경계가 아니며, 스스로 증득한 지혜에 의해 아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과 2승(乘)의 수혜의 경계가 아니다. 따라서 사의할 수 없다.
016_1236_c_13L論曰不可思議爲相是眞如淸淨自證智所知故無譬喩故非覺觀行處故釋曰法身有三因緣故不可思議非三慧境界故不可思議非覺觀行處故非聞慧境無譬喩故非思慧境自證智所知故非世閒及二乘修慧境是故不可思議
016_1237_a_01L둘째는 무분별한 최상의 진실이기 때문에 사의할 수 없다. 무분별하다는 것은 보살이 스스로 증득한 지혜에 의해 아는 것이지, 범부의 분별의 경계가 아니다. 범부는 선천적인 맹인이 일찍이 색상(色相)10)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색상을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역시 2승의 분별의 경계가 아니다. 이 경계는 가장 궁극적인 것이어서 2승에 의해 증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 2승(乘)은 마치 갓 태어난 영아가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근(根)이 약하기 때문이고, 최상이란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신은 모든 법 가운데 가장 궁극적이어서 비길 데가 없어 비유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법이 없기 때문에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언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언설할 수 없다면 일찍이 진실을 본 적이 없어서 중생은 분별할 수 없다. 모든 각관(覺觀)이 언설을 따라 일어나므로 이미 언설이 없기 때문에 각관이 행하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사의할 수 없다.
016_1236_c_20L二無分別最上眞實故不可思議無分別者菩薩自證智所知非凡夫分別境界凡夫如生盲不能分別色以未曾見色故亦非二乘分別境界此境最極非二乘所證故不能分別二乘如新生嬰兒不見日輪以根弱故最上者無譬喩法身於一切法中最極無等無餘法可爲譬喩故非有上人所能知實者不可言說故若不可言說未曾見眞實衆生不能分別一切覺觀隨言說起旣無言說故非覺觀行處故不可思議
셋째는 법신은 모든 부처님이 증득한 지혜에 의해 아는 것이지, 세간의 총명한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간 가운데는 법신에 비교할 만한 물건이 있어서, 이 물건을 봄으로 말미암아 법신을 비량으로써 알 수 있는 물건이 없다. 법신 가운데서는 모든 마음의 행이 다 끊어진다. 경계와 지혜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의할 수 없다.
016_1237_a_09L三法身是諸佛證智所非世閒聰慧人所能分別於世閒中無物可等法身由見此物以比知法身於法身中一切心行皆絕以境智無差別故是故不可思議
【論】또한 다시 이 법신을 깨우쳐[證] 얻는[得] 것은 어떠한가?
【釋】깨우치고[證] 얻지[得] 못함이 있고, 얻고 깨우치지 못함이 있으며, 역시 깨우치고 역시 얻음이 있고, 깨우치지 못하고 얻지 못함이 있다. 이제 역시 깨우치고 역시 얻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모든 중생은 생사에 있으며, 본래 법신이 없는 중생은 없다. 항상 법신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상응이 시작함이 없는 법을 자연히 이룬다. 이와 같은 상응을 설하여 얻음이라고 한다. 이 얻음은 촉(觸)하여 얻는 것이 아니며, 근(根)과 식(識)에 의해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상응함을 떠나서 얻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세운다.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중생의 무리[聚] 가운데에서 법신 밖에 있는 중생은 없다. 마치 허공 밖에 있는 차별적 대상[色]11)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중생은 법신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법신은 중생에 있어서 본래로 얻음이다. 얻음의 정의는 이와 같다. 깨우친다는 의미는 어떠한가?
016_1237_a_13L論曰復次此法身證得云何釋曰有證不得有得不證有亦證亦得有不證不今欲顯亦證亦得一切衆生在於生死無有衆生本無法身恒與法身相應故此相應無始法自然成如此相應說名爲得此得非觸得非根識所證故爲離相應得故立此問如經言於衆生聚中無衆生在法身外無一色在虛空外以一切衆生皆不離法身故法身於衆生本來是得義如此證義云何
016_1237_b_01L【論】처음으로 얻어진 것으로부터의 촉인가?
【釋】촉하여 얻어서 시작함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니, 방편으로 말미암아 이익을 이루어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눈이 대상을 깨우쳐 보는 것에는 반드시 다섯 가지 정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과 같다. 첫째는 근(根)에 대한 실제의 경계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근이 병들지 않아야 하고, 셋째는 각관(覺觀)이 있어야 하고, 넷째는 식이 어지럽지 않아야 하고, 다섯째는 어둠 등의 장애가 없어야 한다. 다섯 가지 정의를 갖추지 않는다면 곧 대상성을 깨달을 수 없다. 법신을 깨달아 아는 것도 역시 이러하다. 반드시 다섯 가지 정의를 갖추어야 한다.
016_1237_b_01L論曰是觸從初所得釋曰爲顯觸得有始由方便成利益無窮故如眼證見色必具五一有實境對根二根不壞三有覺四識不亂五無闇等障五義若不具則不能證色證知法身亦爾必須具五義
【論】서로 섞인 대승의 인식현상을 연하여 경계가 되는
【釋】진여는 대승의 인식현상이다. 대승의 12부 경전에 설하여진 법문은 모두 공통적으로 이 진여를 드러낸다. 진여의 인식현상에 대한 바른 설명은 곧 동일한 맛이기 때문에 서로 섞인다고 말한다. 많은 시냇물이 바다로 돌아가는 것처럼 서로 섞여서 함께 한 맛이 된다. 지혜와 경계가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연한다고 말한다. 보살은 서로 섞인 대승 가운데 진여의 인식현상을 연하여 경계로 삼는다. 이것은 첫 번째의 경계가 실제로 있다는 가장 수승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016_1237_b_07L論曰由緣相雜大乘法爲釋曰眞如是大乘法大乘十二部經所說法門皆共顯此眞如一切正說於眞如法則同一味故名相雜如衆流歸海相雜共爲一味智與境無差別故言緣菩薩緣相雜大乘中眞如法爲境此卽第一顯境實有最
【論】무분별지와 무분별 뒤에 얻어지는 지혜를
【釋】깨달은 지혜는 무분별로써 상을 삼는다. 진여의 경계에서 이 지혜가 일어남으로 해서 분별을 떠나기 때문에 청정함이 깨달은 지혜를 이룬다. 이것은 곧 두 번째 지혜의 청정함이 근이 병들지 않음과 같아서, 무분별 뒤에 얻어지는 지혜는 앞과 뒤의 돕는 인식현상[助法]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지혜는 뒤에 다시 진관(眞觀)에 들어감으로 해서 나중에 수승함으로 전변한다. 이것은 곧 세 번째의 돕는 인식현상이 각관(覺觀)과 같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만약 비발사나만 있고 사마타가 없다면 깨달아 얻는다는 의미는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마타를 닦아야 한다. 사마타를 닦는 것은 세 가지 상이 있다. 첫째는 인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돕는 것들[伴類]을 얻는 것이며, 셋째는 공능을 얻는 것이다.
016_1237_b_14L論曰無分別智無分別後所得釋曰證智以無分別爲相由此智於眞如境起離分別故淸淨成證此卽第二顯智淸淨如根不壞分別後所得智是前後助法由此智後更入眞觀後後轉勝此卽第三明助法如覺觀若有毘鉢舍那無奢摩他無證得義故須修奢摩他修奢摩他有三相一得因二得伴類三得功能
016_1237_c_01L【論】5상수(相修)12)를 성숙(成熟)하게 닦고 익혀서
【釋】이것은 인을 얻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다섯 가지 닦음[五修]과 다섯 가지 닦음에 의해 얻어지는 다섯 가지 과(果)가 인과수차별(因果修差別) 가운데에서 설한 것처럼 물러나 잃지 않음을 얻으므로 숙(熟)이라고 하고, 최상상품을 얻는 것을 성(成)이라 한다. 거듭거듭 관찰하는 것을 닦아 익힌다고 말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인을 밝힌다. 첫째는 잃지 않는 인이며, 둘째는 원만한 인이다. 따라서 인을 얻는다고 일컫는다.
016_1237_b_22L論曰五相修成熟修習釋曰此明得因五修及五修所得五果如因果修差別中說得無退失名熟得最上上品名成數數觀察名修習此明二種因一不失因二圓滿因故名得因
【論】모든 지(地)에서 자량(資粮)을 잘 모으며,
【釋】이것은 초지부터 10지까지의 돕는 것들을 얻는 것을 밝힌다. 복덕과 지혜를 모아서 자량이 되기 때문에 돕는 것들을 얻는다고 말한다.
016_1237_c_04L論曰於一切地善集資糧釋曰明得伴類從初地乃至十地聚集福德智慧行爲資糧故名得伴類
【論】미세하여 깨뜨리기 어려운 장애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釋】이것은 공능을 얻는 것을 밝힌다. 앞의 두 가지 정의로 말미암아 지장(智障)을 깨뜨릴 수 있다. 이러한 번뇌와 2승의 무류도(無流道)가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미세하다고 말하고, 2승의 도에 의해 깨뜨려질 수 없기 때문에 깨뜨리기 어렵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능을 얻는다고 일컫는다. 이것은 곧 네 번째의 정(定)을 얻는 것이 식이 어지럽지 않음과 같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016_1237_c_07L論曰能破微細難破障故釋曰明得功能由前二義故能破智障煩惱與二乘無流道俱起故名微細非二乘道所能破故名難破故名得功能此卽第四明得定如識不亂
【論】금강(金剛)을 삼마제에 비유한다.
【釋】네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금강으로써 삼마제를 비유한다. 첫째는 번뇌의 산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남음이 없는 공덕을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이고, 셋째는 견실하여 훼손하고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이며, 넷째는 이익을 사용하여 지혜로 하여금 모든 법을 통달하여 걸림이 없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016_1237_c_12L論曰金剛譬三摩提釋曰有四義以金剛譬三摩提一能破煩惱山二能引無餘功德三堅實不可毀壞四用利能令智慧通達一切法無㝵
【論】다시 이 삼마제는 뒤에 모든 장애를 멸하여 떠나기 때문에
【釋】이 선정을 얻어 마침내 모든 장애를 멸하여 다한다. 이것은 곧 다섯 번째의 혹을 멸하는 것이 어둠 등의 장애가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016_1237_c_16L論曰次此三摩提後滅離一切障故釋曰得此定竟滅一切障方盡此卽第五明滅惑如無闇等障
【論】이때에 의지가 전변함으로 말미암아 깨달아 얻음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釋】금강심을 멸한 때를 이 때라고 한다. 이때 열 번째의 지(地)의 의지가 변하여 부처님의 의지를 이루는 것을 깨달아 얻음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016_1237_c_19L論曰時由依止轉成證得應知釋曰剛心滅時名是時是時第十地依止轉成佛依止名證得應如此知
016_1238_a_01L【論】이 법신은 몇 가지의 자재(自在)가 있어서 그 가운데서 자재하는가?
【釋】5음(陰)의 전의에 있어서 법신의 자재를 밝힌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이 질문을 한다.
016_1237_c_22L論曰此法身有幾自在於中得自在釋曰欲顯約五陰轉依明法身自在故爲此問
【論】간략하게 설한다면 다섯 가지 자재가 있으며, 그 가운데서 자재를 얻는다.
【釋】자세히 설한다면 헤아릴 수 없는 자재가 있지만, 지금은 간략하게 설하여 다섯 가지를 밝히는 데 그친다.
016_1238_a_02L論曰若略說有五自在於中得自在釋曰若廣說有無量自在今略說止明五種
【論】첫째는 정토(淨土), 자신을 드러내 보임, 상호(相好)13)와 변제(邊際)가 없는 음성 그리고 정수리를 볼 수 없는 자재이니,
【釋】뜻하는 대로 파리가(頗梨珂:水晶) 등의 정토를 드러낼 수 있으며, 중생의 품류를 따라 뜻대로 몸을 나툰다. 큰 집회 가운데서 모두 중생을 대하나 등지는 사람이 없다. 또한 중생이 보고자 하는 것에 맞추어 여러 가지 몸을 나툰다. 중생이 보고자 하는 것에 맞추어 여러 가지 상호를 드러낸다. 설하여지는 법의 음성이 뜻과 같이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하며, 하나의 음성 가운데서 모든 중생이 듣고자 하는 법을 따라 각각 들을 수 있다. 모든 범천(梵天) 등이 부처님을 볼 때에는 여래의 신량(身量)이 그들보다 배로 높아지기 때문에 정수리를 볼 수 없다. 이러한 일들에서 모두 뜻과 같음을 얻기 때문에 자재라고 일컫는다. 이와 같은 자재는 무슨 인으로 얻을 수 있는가?
016_1238_a_04L論曰一淨土顯示自身相好無邊音不可見頂自在釋曰如意能現頗梨珂等淨隨衆生類如意現身於大集中對衆生無有背者又稱衆生所樂見現種種身稱衆生所樂見現種種相所說法音如意遍滿十方世界一音中隨諸衆生所欲聞法各各得諸梵天等見佛之時如來身量倍高於彼故頂不可見於此等事皆得如意故名自在如此自在何因能得
【論】색음(色陰)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釋】하나하나의 음은 모두 멸의 차별 가운데 설한 것처럼 앞의 네 가지 전의를 갖고 있다. 색식(色識)을 색음이라고 한다. 형상적인 장애가 색의 체이다. 대하여 다스림을 일으킬 때에 분별성의 부정품의 부분이 영원히 서로 떠나는 것을 얻음으로 해서 정품의 한 부분이 항상 상응함을 얻으니 곧 색음의 전의이다. 이 전의 가운데서 정토 등의 자재를 얻는다.
016_1238_a_14L論曰由轉色陰依故釋曰一一陰皆有如滅差別中所說前四轉依識名色陰形礙是色體對治起時分別性不淨品一分永得相離淨品一分恒得相應卽是色陰轉依於此轉依中得淨土等自在
016_1238_b_01L【論】둘째는 상실하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큰 안락함에 머무는 자재이니,
【釋】모든 혹과 습기에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에 상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래의 안락한 머묾은 헤아려 셀 수 없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삼계의 즐거움을 넘어서서 가장 수승하고 비길 데가 없기 때문에 큰 안락한 머묾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뜻과 같음을 얻기 때문에 자재라고 일컫는다.
016_1238_a_20L論曰二無失無量大安樂住自在釋曰不爲諸惑及習氣染污故名無失如來安樂住不可數量故言無量過三界樂最勝無等故名大安樂住於此等事皆得如意故名自在
【論】수음(受陰)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釋】수식(受識)을 수음이라고 한다. 고통과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受)의 체이다. 수음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에 이 자재를 얻는다.
016_1238_b_02L論曰由轉受陰依故釋曰受識名受陰領苦樂是受體由轉受陰依故得此自在
【論】셋째는 모든 명자(名字)와 문구(文句)의 모임[聚] 가운데 모두 갖추어서 바르게 설하는 자재이니,
【釋】일 장(章)과 일 품(品)에 불과한 게송으로부터 일 부(部)14)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의 명자와 언설로 가르치는 것의 모든 문구를 일컬어 모임이라고 한다. 모두 뜻대로 바른 설법을 깨우쳐 알 수 있기 때문에 자재라고 한다.
016_1238_b_04L論曰三具足一切名字文句聚等中正說自在釋曰一切諸法名字及諸言教文句從偈以去一章一品至一部皆名爲聚悉能了知如意正故名自在
【論】상(相)의 차별을 집착하는 상음(想陰)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釋】상식(想識)이 상음(想陰)이다. 상의 차별을 집착하는 것이 상(想)의 체이다. 상음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에 이 자재를 얻는다.
016_1238_b_09L論曰由轉想陰執相差別依故釋曰想識爲想陰執相差別爲想體由轉想陰依故得此自
【論】넷째는 변화시킴[變化]과 고쳐서 바꿈[改易]과 큰 모임을 이끌어 섭지함과 하얗고 깨끗한 품류를 끌어당김의 자재이니,
【釋】없었던 것이 현재에 있고, 하나를 나누어 여럿이 되는 것이 변화시킴이며, 그 본성을 바꾸는 것이 고쳐서 바꿈이 된다. 보고자 소원하는 중생을 그 멀고 가까움에 따라 뜻대로 인도하고, 천인과 야차들이 그들에게 마땅한 곳을 따라 큰 집회에 오니 4섭(攝)에 의해 섭지하여 교화한다. 유류(有流)의 선(善)이 하얗다는 것이 되고, 무류(無流)의 선이 깨끗함이 된다. 이 하얗고 깨끗한 품류의 인식현상을 끌어당겨 서로 이어지는 가운데에 생한다. 이러한 일들에서 모두 뜻과 같음을 얻기 때문에 자재라고 한다.
016_1238_b_12L論曰四變化改易引攝大集白淨品自在釋曰未有現有及分一爲多是變化轉其本性爲改易欲見衆生隨其遠近如意引導天人夜叉等來大集中隨彼所宜以四攝攝化有流善爲白無流善爲淨牽此白淨品法生相續中於此等事皆得如意故名自在
【論】행음(行陰)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다.
【釋】행식(行識)이 행음이 된다. 뜻을 짓는 것이 행의 체이다. 행음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에 이 자재를 얻을 수 있다.
016_1238_b_19L論曰由轉行陰依釋曰行識爲行陰作意爲行體由轉行陰依故得此自在
016_1238_c_01L【論】다섯째는 현료지(顯了智)ㆍ평등지(平等智)ㆍ회관지(廻觀智)ㆍ작사지(作事智)의 자재이니,
【釋】여래께서는 모든 인식현상에서 과실이 없다. 깨달아 앎[證知]이 현전하지 않는 경계에서도 마치 현전하는 것을 대하는 것과 같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문구를 기억하고 익숙하게 익히는 것과 같다. 이것을 현료지라고 한다.
진여를 통달한 뒤로는 모든 중생에 대하여 평등한 마음을 얻는다. 평등하고 청정한 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평등지라고 한다.
삼마제다라니문을 지킬 수 있어서 이 법문 가운데서 취하고자 하는 법이 뜻과 같고 걸림이 없다. 마치 재물의 주인이 그 창고를 지키면서 취하여 쓰는 데 걸림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을 회관지라고 한다.
도솔타천에 생함과 열반에 드는 것을 얻을 수 있어서 성문과 하지의 보살에게 무류의 선근을 세우기 위하여 여래의 일을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을 작사지라고 한다.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모두 뜻과 같음을 얻기 때문에 자재라고 한다.
016_1238_b_21L論曰顯了平等迴觀作事智自在釋曰如來於一切法無有過失證知非現前境如對現前譬如人憶持熟習文是名顯了智從通達眞如以來一切衆生得平等心由證平等淸淨法故是名平等智能守三摩提陁羅尼門於此法門中所欲取法如意無譬如財主守其庫藏取用無㝵名迴觀智能受兜率陁天生及般涅爲立聲聞及下地菩薩無流善根能顯如來事是名作事智於此等事皆得如意故名自在
【論】식음(識陰)이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다.
【釋】식식(識識)이 식음이 된다. 깨우쳐 구분하는 것이 식의 체가 되기 때문이다. 식음의 의지를 전변하여 이 자재를 얻는다.
016_1238_c_10L論曰由轉識陰依故釋曰識識爲識陰了別爲識體故轉識陰依得此自在
【論】이 법신은 몇 가지 인식현상의 의지가 되는가?
【釋】여래의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모두 법신으로부터 생하니 법신으로써 의지를 삼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러한 질문을 한다.
016_1238_c_12L論曰此法身應知爲幾法依止釋曰顯如來無量功德皆從法身生以法身爲依止故爲此問
【論】간략하게 설한다면 오직 세 가지이니,
【釋】만약 자세히 설한다면 헤아릴 수 없는 인식현상의 의지가 되지만 지금 간략하게 설하여 오직 셋이다.
016_1238_c_15L論曰若略說唯三釋曰若廣說爲無量法依止今略說唯三
016_1239_a_01L【論】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여러 가지 머무는 곳[住處]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釋】머무는 곳에는 네 가지가 있다. 즉 천주(天住)ㆍ범주(梵住)ㆍ성주(聖住)ㆍ불주(佛住)이다. 모든 머무는 곳 가운데 이 네 가지 인식현상에서 여래께서 많이 머물기 때문에 치우쳐 설한다. 이 넷을 얻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재를 얻는 것이고, 둘째는 현전(現前)을 얻는 것이다. 처음 성불할 때에는 모든 여래의 법을 충분히 갖추어 모두 얻으므로 자재를 얻음이라고 하고, 뒤에는 바르게 쓰는 것을 따르는 것을 현전을 얻음이라고 한다.
만약 법신을 깨달았다고 한다면 모든 여래의 법을 자재하여 얻기 때문에 법신은 머묾[住] 등의 인식현상의 의지가 된다. 왜냐 하면 법신을 떠나서는 이 인식현상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016_1238_c_17L論曰諸佛如來種種住處依止故釋曰住有四種謂天住梵住聖住佛住於諸住中如來多住此四法故偏說此四得有二種自在得二現前得初成佛時一切如來法具足皆得名自在得後時隨所正用者名現前得若證法身一切如來法皆自在得故法身爲住等法依何以故無離法身得此法故
【論】이 가운데 게송을 읊는다.
【釋】법신이 머묾[住] 등의 인식현상의 의지가 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거듭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39_a_02L論曰此中說偈釋曰欲顯法身爲住等法依止故重說偈
【論】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다섯 가지 기쁨을 받는다.
016_1239_a_04L論曰
諸佛如來受五喜
【釋】보살은 역시 다섯 가지 덕이 있다. 단지 원만하지 못하고 오직 부처님만이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여래라고 말한다. 기쁨의 체는 오직 하나이다. 단지 잃지 않는 가장 수승함으로써 체를 삼는다. 다섯 가지 인에 의하여 얻어지기 때문에 다섯 가지 기쁨이라고 말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해탈을 얻고, 화신으로써 2승(乘)의 사람을 가르쳐서 해탈을 얻게 한다. 왜냐 하면 여래께서는 스스로 다섯 가지 기쁨을 받지만 2승은 얻지 못한다.
016_1239_a_05L釋曰菩薩亦有此五德但未圓滿唯佛具足故言諸佛如來喜體唯一但以無失最勝爲體由五因所得故言五諸佛自得解脫以化身教二乘人令得解脫何故如來自受五喜而二乘不得

【論】모든 인(因)은 스스로의 계(界)를 얻기 때문에
2승은 깨닫지[證] 못함으로 해서 기쁨이 없다.
016_1239_a_11L論曰
皆因證得自界故
二乘無喜由不證

【釋】인에는 다름이 있기 때문에 과를 얻음이 같지 않다. 스스로의 계를 깨닫는 것으로써 인을 삼으며, 다섯 가지 기쁨은 과가 된다. 과는 여래의 자성이니, 곧 자성이 청정한 법신이다. 여래께서 스스로 깨닫는 큰 공능은 인이 없음으로 말미암지 않고, 남이 얻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의 계(界)를 깨닫는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계를 깨닫기 때문에 다섯 가지 기쁨의 과를 얻는다. 2승은 이 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기쁨이 없다.
016_1239_a_12L釋曰由因有異故得果不同以證自界爲因五喜爲果界是如來性卽性淨法身如來自大功能所證不由無不由他得故言證自界由證自界故得五喜果二乘不證此界故無五
【論】기쁨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불계(佛界)를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016_1239_a_18L論曰
求喜要須證佛界
【釋】만약 사람이 다섯 가지 기쁨 등의 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도를 닦음으로써 법신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 하면 과는 인을 떠나서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게송은 법신이 다섯 가지 기쁨의 의지가 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법신을 깨달음으로 해서 다섯 가지 기쁨을 얻는다. 법신을 깨닫지 못하면 다섯 가지 기쁨은 없다.
016_1239_a_19L釋曰若人欲求五喜等法必須修道以證法身何以故以果無離因得故此偈顯法身爲五喜依止由證法身故得五喜不證法身則無五喜

【論】공능이 무량함과 행하여야 하는 일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인식현상의 훌륭한 맛과 바라던 덕(德)을 이루는 것으로 말미암아,
016_1239_a_23L論曰
由能無量作事立
由法美味欲德成
016_1239_b_01L
【釋】이 게송은 다섯 가지 인으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 기쁨과 칭합하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스스로의 공능이 헤아릴 수 없음으로 인하여 기쁨을 생한다.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법신을 깨달아서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수승한 공능[勝能]을 얻는다. 모든 부처님의 수승한 공능은 곧 한 부처님의 수승한 공능이다. 한 부처님의 수승한 공능은 모든 부처님의 수승한 공능과 동등하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동일한 법신을 체로 삼으며, 체는 이미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부처님의 수승한 공능은 곧 한 부처님의 수승한 공능이다. 모든 부처님의 수승한 공능은 헤아릴 수 없고, 한 부처님의 수승한 공능도 역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한 부처님의 수승한 공능은 모든 부처님의 수승한 공능과 동등함을 얻는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똑같이 수승한 공능을 얻는다. 따라서 기쁨을 생한다. 스스로의 계를 보고 깨달음으로 해서 이 수승한 공능을 얻는다. 따라서 기쁨을 생한다.
016_1239_b_01L釋曰此偈示由五因故稱五喜何者爲五一因自能無量故生喜一切佛同覺了法身一切佛同得勝能一切佛勝能卽是一佛勝能一佛勝能等一切佛勝能何以故諸佛同一法身爲體體旣是一故餘佛勝能卽是一佛勝能諸佛勝能無量一佛勝能亦無量故一佛勝能得等諸佛勝能佛法身同得勝能是故生喜由見證自界得此勝能是故生喜
둘째는 행하여야 할 일을 세움으로 인하여 기쁨을 생한다. 한 부처님에 의해 행하여지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은 모든 부처님의 바른 일이며,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이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에 의해 행하여지는 정토 등의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바른 일은 곧 한 부처님에 의해 행하여지는 바른 일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설령 모두 바른 일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 부처님에 의해 행하여지는 바른 일은 모든 부처님에 의해 행하여지는 바른 일과 꿰뚫어 동등하다. 만약 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면 곧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만약 한 중생이 부처를 이루었다면 이 중생이 다시 모든 중생을 교화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옮기어 서로를 이익되게 한다. 만약 모든 부처님께서 이미 스스로의 계를 깨달았다면 곧 이러한 바른 일을 성립시킨다. 스스로의 계를 보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행하여야 할 바른 일을 세운다. 따라서 기쁨을 생한다.
016_1239_b_11L二因作事立故生喜一佛所作衆生利益事一切佛正事是一切衆生利益事以故一切佛所作淨土等利益衆生正事卽是一佛所作正事諸佛設皆不作正事一佛所作正事通等諸佛所作正事若利益一衆生卽是利益一切衆生若一衆生成佛此衆生復能教化一切衆生如此轉相利益諸佛已證自界則成立此正事由見證自界作正事立是故生喜
016_1239_c_01L셋째는 인식현상의 훌륭한 맛으로 인하여 기쁨을 생한다. 여래께서는 옛날에 3승의 12부경을 배워서 뒤에 부처를 이룰 때에 각기 모든 인식현상이 이 법신으로부터 생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관하여 돌이켜 이 법신을 깨닫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문은 동일하게 법신을 맛으로 삼는다. 수다라와 기야(祇夜) 등의 경전이 동일한 법신의 맛임을 봄으로 해서 기쁨을 생한다.
넷째는 바라던 덕(德)에 도달함으로 인하여 기쁨을 생한다. 얻고자 했던 것을 이루고 공덕도 역시 이룬다. 이루고자 했던 것은 부처님께서 생각하던 것과 같이 성취되지 않음이 없다. 즉 정토와 큰 집회 등의 일이다. 공덕을 이룬다는 것은 10력(力)과 4무외(無畏) 등을 말한다. 모든 여래의 불공법(不共法)은 원만하지 않음이 없다. 이 두 가지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봄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생한다.
016_1239_b_21L三因法美味故生喜由如來昔時學三乘十二部經後成佛時各觀一切法無不從此法身生無不還證此法身故切法門同一法身爲味由見修多羅祇夜等經同一法身味是故生喜因欲德成故生喜所欲得成功德亦所欲成者如佛所思無不成就淨土及大集等事功德成者謂十力四無畏等一切如來不共法無不圓滿由見此二事成是故生喜

【論】가장 수승한 기쁨을 얻어 잃지 않으며,
016_1239_c_08L論曰
得喜最勝無有失

【釋】삼계의 희락(喜樂)을 넘어서기 때문에 가장 수승하고 모든 혹 내지는 습기(習氣)가 다하여 남음이 없기 때문에 잃지 않는다.
016_1239_c_09L釋曰過三界喜樂故最勝一切惑乃至習氣皆盡無餘故無失

【論】모든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가 다함이 없음을 항상 보신다.
016_1239_c_11L論曰
諸佛恒見四無盡

【釋】또한 다시 여래께서는 앞의 네 가지 기쁨을 보아 궁생사제(窮生死際)에 이르기까지 멸하여 다함이 없다. 설령 무여열반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역시 멸하여 다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쁨을 생한다. 이 기쁨은 어떤 모습인가? 첫째는 삼계와 2승의 기쁨을 넘어서기 때문에 가장 수승함이 상이 되며, 둘째는 잃지 않음이 상이 되어 모든 혹 내지는 습기를 멸하여 없어져서 남음이 없다. 이것은 가장 원만하고 가장 청정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첫 번째의 스스로에게 이익됨의 의지라고 한다.
016_1239_c_12L釋曰復次如來見前四喜乃至窮生死際無有滅盡設入無餘涅槃亦無滅盡是故生喜此喜何相一最勝爲相以過三界及二乘喜故二無失爲一切惑乃至習氣滅盡無餘此顯最圓滿及最淸淨是名第一自利依
016_1240_a_01L【論】여러 가지 수용신(受用身)의 의지가 모든 보살의 선근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며,
【釋】모든 부처님의 응신(應身)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라고 말한다. 또한 부처님의 응신의 품류를 하나하나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라고 말한다. 이 법신(法身)이 응신의 의지이다. 무엇 때문에 의지라고 하는가? 이 신을 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응신을 떠난다면 지(地)에 오른 보살의 선근은 곧 성숙하여질 수 없기 때문에 응신이 필요하다. 응신은 법신으로 말미암아 세우기 때문에 법신은 응신의 의지가 된다. 이것이 두 번째로 보살을 이익되게 하는 의지이다.
016_1239_c_19L論曰種種受用身依止爲成熟諸菩薩善根故釋曰諸佛應身無量故言種種又一一佛應身品類不可說故言種種此法身爲應身依止何故爲依止爲生此身故若離應身登地菩薩善根則不得成熟故須應應身由法身立故法身爲應身依此卽第二利益菩薩依止
【論】여러 가지 화신의 의지는 성문과 독각의 선근을 많이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釋】이 법신은 단지 응신의 의지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역시 화신의 의지이다. 왜냐 하면 화신을 떠나서는 낮은 원[下願]의 중생, 즉 성문과 독각이 갖는 선근을 성숙시킬 수 없다. 많다고 말하는 것은 2승의 원락(願樂)을 이익되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지 가운데의 보살의 선근은 역시 화신으로 인하여 성숙하여지기 때문에 법신은 화신의 의지가 된다. 이것은 세 번째로 2승을 이익되게 하는 의지이다.
016_1240_a_03L論曰種種化身依止爲多成熟聲聞獨覺善根故釋曰此法身不但爲應身依止亦是化身依止何以故若離化身下願衆生謂聲聞獨覺所有善根不得成熟多言顯不止利益二乘願地中菩薩善根亦因化身成熟故法身爲化身依止此卽第三利益二乘依止
攝大乘論釋卷第十三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4성제 중의 고제와 집제를 말한다.
  2. 2)하나는 신(身)ㆍ구(口)ㆍ의(意)의 3업이고, 다른 하나는 기세간을 떠받치는 풍륜(風輪)과 수륜(水輪)과 금륜(金輪)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첫 번째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3. 3)Tuṣita의 음사(音寫). 욕계의 여섯 천(天) 가운데 네 번째의 천. 이 하늘의 내원궁은 장래 부처가 될 보살의 주처라고 한다.
  4. 4)석존의 결혼을 말한다.
  5. 5)공능(功能) 또는 승능(勝能)의 능이다. 소(所)에 대하여 주체라는 의미와 능력이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6. 6)6신통에서 누진통을 뺀 나머지 다섯 가지 신통을 말한다.
  7. 7)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말한다.
  8. 8)원문에는 인통최위극(引通最爲極)으로 되어 있으나 인통위최극(引通爲最極)으로 번역하였다.
  9. 9)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를 말한다.
  10. 10)차별적인 대상성의 상(相).
  11. 11)여기에서의 색은 색음이 아니고, 안식에 상응하는 유형적인 대상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6진의 하나이기 때문에 진(塵)과 같이 차별적 대상이라고 번역한다.
  12. 12)석입인과수차별승상(釋入因果修差別勝相)의 수상장(修相章) 참조.
  13. 13)lakṣaṇa와 anuvyañjana로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말한다.
  14. 14)대승 12부 중의 한 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