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釋論卷第三

ABC_IT_K0593_T_003
017_0015_c_01L
섭대승론석론 제3권
017_0015_c_01L攝大乘論釋論卷第三


세친 지음
수 천축삼장 급다ㆍ행구 등 한역
김묘주 번역
017_0015_c_02L世親菩薩造
隋天竺三藏笈多共行矩等譯


1. 응지의지승상승어 ③
017_0015_c_04L應知依止勝相勝語第一之三

14) 세간정장(世間淨章)
017_0015_c_05L世閒淨章第十四
【論】어째서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가?1) 아직 욕계의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색계의 마음을 얻지 못한 자는, 욕계의 선심으로써 수행하여 욕계의 탐욕을 없앤다. 이 욕계의 수행하는 마음과 색계의 마음은 함께 생멸할 수 없기 때문에 훈습이 없다. 따라서 종자가 성립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다.
색계의 마음은 과거의 수많은 생에서 다른 마음에 의해 끊어지기 때문에 그 고요한 마음의 종자가 성취되지 못한다.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색계의 고요한 마음을 성취함은 일체종자의 과보식이 차례로 전래하여 인연이 되고, 수행의 선심을 증상연으로 삼는다. 이처럼 욕락을 떠난 모든 지위에서도 그 상응하는 바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세간의 청정은 일체종자의 과보식을 떠나서는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017_0015_c_06L論曰:云何世閒淨不成?如未離欲界欲`未得色界心,卽以欲界善心修行,除欲界欲.此欲界修行心與色界心,不得俱生俱滅,故無熏習,種子不成.無有色界心,爲過去無量生中餘心隔故,彼靜心種子,不得成就.已無有故,是故成就彼色界靜心,由一切種子果報識次第傳來,得爲因緣,修行善心,爲增上緣.如是一切離欲地,如其相應知.如是世閒淨,離一切種子果報識亦不成.
017_0016_a_01L【釋】저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음욕을 여의기 위해서 수행을 일으킬 때와 같이 욕계의 선심을 수행함은 색계의 마음에 훈습이 없다.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색계의 마음은 곧 종자가 없이 생겨남이 된다.
그 과거세의 색계의 마음은 수많은 생에서 다른 식에 의해 끊어져서 이미 과거이고 존재하지 않으며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고요한 마음의 종자가 인연이 된다’는 것은, 아리야식 안의 자신2)의 종자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방편의 선심은 작용의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증상연이 되어 작용의 힘이 되고 다만 인연은 아니다. 그것의 증상력으로 인하여 색계의 마음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색계의 탐욕을 없앨 때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017_0015_c_17L釋曰:如世閒淨不成,今當顯示.如爲離婬欲,起修行時,修行欲界善心,於色界心,無有熏習,以不同生同滅故,彼色界心,卽是無種子而生,以彼過去色界心,無量生中餘識所隔,已過去無有,不成故.彼靜心種子,爲因緣者,從阿梨耶識中,自種子生故.彼方便善心非無功力,得爲增上緣,則爲功力,但非因緣,由彼增上故,色界心得生.如是破色欲時,亦爾故.

15) 출세간정장(出世間淨章)
017_0016_a_04L出世閒淨章第十五
【論】어째서 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가?3)
세존께서 “남의 말과 스스로 바르게 사유함에 의하며, 이 두 가지 원인으로 해서 바른 견해가 생겨날 수 있다”고 말씀한 바와 같다. 이 남의 말과 바르게 사유함은 이식(耳識)에 훈습되는가? 의식에 훈습되는가? 아니면 이식과 의식의 두 식에 훈습되는가? 그 법에 대해서 사유를 일으킬 때 이식은 생기하지 않으며, 의식도 역시 다른 식의 갖가지 반연에 의해 중단된다.
만약 바르게 사유함과 상응해서 마음이 생기할 때는, 그 의식이 오래전에 멸하여 과거로 된다. 들어서 훈습된 바와 훈습은 다 있을 수 없는데, 어느 곳에서 종자가 나중에 바른 사유와 상응하는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바른 사유와 상응하는 것은 세간의 마음이고, 바른 견해와 상응하는 것은 출세간의 마음이다. 함께 생멸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것의 훈습처가 아니다. 이미 훈습을 받지 않으면 종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출세간의 청정은 일체종자의 과보식을 떠나서는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문훈습(聞熏習)을 섭지하는 종자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016_a_05L論曰:云何出世淨不成?如世尊說:從他聞音及自正思惟,由此二因,正見得生.此他音聲及正思惟,爲熏耳識`爲熏意識`爲熏耳意二識?於彼法中,起正思時,耳識不生,意識亦爲餘識別攀緣所閒.若於正思惟,相應心生時,彼意識久滅過去,聞所熏及熏習,皆不得有,何處得種子?於後時生正思惟相應心,與正思惟相應者,是世閒心,與正見相應者,是出世閒心,無有共生共滅義故,不爲彼所熏.旣不被熏,則爲種子不成.是故出世閒淨,離一切種子果報識亦不成,彼中攝持聞熏習種不成故.
017_0016_b_01L【釋】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남의 말과 바르게 사유함’이란 이른바 말과 바르게 상응하는 사유이다. 이 ‘의식이 다른 식의 갖가지 반연에 의해 중단된다’는 것은 바른 견해와 상응하는 출세간의 마음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바른 사유와 상응하는 마음이 생기한다면’이란 이후 시기에 바르게 사유함을 말한다. ‘그것이 오래전에 멸하여 과거가 된다’는 것은, 이전의 의식이 지나가 버려서 수많은 시간이 흘러갔기 때문에 문훈습된 것과 훈습이 모두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어떻게 이것을 다시 원인으로 삼아서 나중에 바른 사유와 상응하는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그 중에서’는 출세간의 의식 중에서를 말한다. ‘문훈습’은 남의 말을 들어서 의식 가운데 훈습함이다. 만약 이렇게 생각하면 그 종자를 섭지함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고, 출세간의 청정한 종자를 섭지함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종자가 있으면 생기하는 의미가 성립될 수 있다.
017_0016_a_19L釋曰:如出世淨不成,今當顯示.於他音聲及正思惟者,謂正與聲相應思惟.此意識,爲餘識別攀緣所閒者,謂與正見相應出世心隔絕故.若正思惟,相應心生者,謂於後時正思惟.彼久滅過去者,謂前意識已謝滅經無量時,聞所熏及熏習,皆不得有,云何得以此,爲因生後,正思惟相應意識?彼中者,謂世閒意識中.聞熏習者,由聞他音聲,熏習意識中.若作是念,彼攝持種子不成故,謂攝持出世淨種子不成故,若有種子生義可成.
【論】또한 어떻게 일체종자의 과보식이 잡염법의 원인이 되며, 또한 그 다스리는 출세간의 마음의 종자가 되는가? 또한 이 출세간의 마음은 예전에 아직 없었기 때문에 훈습이 없다. 이미 훈습이 없는데 무슨 종자로부터 생겨나는가? 그대는 지금 마땅히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한다.
“매우 청정한 법계로부터 흘러나온 것의 문훈습을 종자로 삼아서 생겨난다.”
017_0016_b_08L論曰:復次此一切種子果報識,旣爲染法因,云何復成彼對治出世心種子?又此出世心,昔未曾有故,無熏習,旣無熏習,從何種子而生?汝今應答:善淸淨法界,所流津液聞熏習,爲種子得生.
017_0016_c_01L【釋】이 과보식은 이미 장애의 원인 자체이므로 그 다스림의 원인 자체가 되지 못한다. ‘또한 이 출세간의 마음은 처음에 아직 없었다’는 것은 예전에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훈습이 없다’는 것은 예전에 아직 그 출세간의 마음의 훈습이 생겨나지 않아서 결정적으로 아직 없기 때문이다.
‘매우 청정한 법계로부터 흘러나오는 문훈습을 종자로 삼아서 생겨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성문과 다르기 때문에 ‘매우 청정한 법계로부터 흘러나오는 문훈습’이라고 말한다. 매우 청정한 법계가 지장과 번뇌장을 소멸하기 때문에 ‘매우 청정한 법계’라 이름한다. ‘흘러나온 것’이란 설해진 법이니, 계경 등을 말한다. 이 법계로부터 흘러나온 계경을 듣기 때문에 ‘법계로부터 흘러나온 것을 듣는다’고 한다. 이것의 문훈습이기 때문에 ‘법계로부터 흘러나온 것의 문훈습’이라고 부른다. 또한 들음이 곧 훈습이기 때문에 ‘문훈습’이라고 이름한다. 그 문훈습이 아리야식에 머물러 원인이 되어서 출세간의 마음을 일으킨다.
017_0016_b_14L釋曰:此果報識,旣爲障㝵因體,卽不成,彼對治因體.又此出世心,初未曾有者,謂昔來未生故.無熏習者,由昔來未生,彼出世心,熏習決定未有故.善淸淨法界,所流津液聞熏習,爲種子得生者,爲別異聲聞故,言善淸淨法界,所流津液聞熏習.由善淸淨法界滅智障`煩惱障故,名善淸淨法界.所流津液者,卽是所說法,謂修多羅等.於此法界所流津液修多羅聽聞故,名法界所流津液聞.卽此聞熏習故,名法界所流津液聞熏習.又復聞卽是熏習故,名聞熏習.彼聞熏習住阿梨耶識中爲因,生起出世心.
【論】이 문훈습은 아리야식의 자성인가, 아닌가? 만약 아리야식의 자성이라면 어떻게 다스림의 종자를 이루겠는가? 만일 아리야식의 자성이 아니라면 이 문훈습의 종자의 의지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아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훈습은 어느 신체에 있는가? 과보식과 양상을 같이해서 생기하나니, 마치 물과 우유와 같다. 그러나 문훈습은 아리야식은 아니다. 그 다스림의 종자를 이루기 때문이다.
017_0016_c_05L論曰:此聞熏習爲是阿梨耶識自性`爲非?若是阿梨耶識自性,云何得成對治種子?若非彼識自性,此聞熏習種子依止,云何可見?乃至佛菩提位,所有聞熏,隨在何身中,與果報識,同相而生,猶如水乳,然非阿梨耶識,以成彼對治種子故.
【釋】이 문훈습은 아리야식의 자성인가, 아닌가? 설사 그렇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만약 아리야식의 자성이라면 어떻게 아리야식이 다시 스스로 다스림의 종자가 되겠는가? 만일 그 식의 자성이 아니라면 이 문훈습은 마땅히 별도로 의지처가 있어야 한다.
‘나아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훈습’이란 매우 청정한 법계로부터 흘러나온 것의 훈습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어느 신체에 있는가?’라는 것은 ‘어느 신체에서 자체를 같이해서 생겨나는가?’이다. 그러나 그것의 자성은 아니다. 마치 물과 우유와 같아서 비록 하나의 자체로 생기하지만 이 문훈습은 아리야식은 아니다. 아리야식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017_0016_c_12L釋曰:所有聞熏習,爲是阿梨耶識自性爲非?設爾何失?若是阿梨耶識自性,云何阿梨耶識,還自成對治種子?若非彼識自性,此聞熏習應別有依止.乃至佛菩提位,所有聞熏習者,卽是善淸淨法界,所流津液,熏習力故.隨在何身中者,隨於何身中,同體而生,然非彼自性,猶如水乳,雖復一體而生,然此聞熏習,非阿梨耶識,以對治阿梨耶識故.
【論】이 중에서 하품의 훈습에 의지해서 중품의 훈습을 이루고, 중품의 훈습에 의지해서 상품의 훈습을 이룬다. 듣고 사유하고 닦음에 의해서 누누이 익히기 때문이다.
017_0016_c_22L論曰:於中依下熏習,成中熏習,依中熏習,成上熏習,由聞思修數習故.
017_0017_a_01L【釋】마땅히 알라. 여기서 하품ㆍ중품ㆍ상품은 들어서 이루는 지혜ㆍ사유해서 이루는 지혜ㆍ닦아서 이루는 지혜4)의 하나하나에 세 단계가 있다.5) 또한 다른 견해가 있다. 들어서 이루는 지혜는 하품이고, 사유해서 이루는 지혜는 중품이며, 닦아서 이루는 지혜는 상품이다.
‘듣고 사유하고 닦음에 의해서 누누이 익힌다’는 것은, 듣는 것 등에 있어서 뛰어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하품을 원인으로 삼아서 중품을 이룰 수 있고, 중품을 원인으로 삼아서 상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017_0017_a_01L釋曰:於中下`中上者,應知聞慧`思慧`修慧一一各有三等.復有別義:聞慧爲下,思慧爲中,修慧爲上.聞思修數習者,於聞等中,增上修行,以下品爲因得中品,中品爲因得上品故.
【論】마땅히 알라. 그 문훈습의 종자는 하품ㆍ중품ㆍ상품에 따라서 모두 법신의 종자이다. 아리야식의 다스림이기 때문이고, 아리야식에 포섭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출세간의 매우 청정한 법계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세간이지만 출세간의 마음 종자의 자체이다. 출세간의 마음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때이지만, 번뇌를 일으킴을 다스리기 때문이고, 살기 괴로운 세계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모든 악업을 쇠퇴시켜서 다스리기 때문이고, 능히 모든 불보살을 수순하고 가까이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 이것은 세간이긴 하지만 처음 수행하는 보살이 증득한 것은 모두 법신에 포섭된다. 성문과 독각이 증득한 것은 해탈신에 포섭된다.
017_0017_a_06L論曰:彼聞熏習種子,隨下中上,應知皆是法身種子,是阿梨耶識對治故`非阿梨耶識所攝故`出世善淸淨法界所流津液故.雖是世閒,爲出世心種子體,出世心未生時,爲現起煩惱對治故`惡趣對治故`一切惡業朽壞對治故`能隨順得親近諸佛菩薩故.雖是世閒初修行菩薩所得,應知皆法身攝聲聞`緣覺所得,解脫身攝.
【釋】‘번뇌를 일으킴을 다스린다’는 것은 탐욕 등이 생겨남을 없애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번뇌를 없앰으로써 살기 괴로운 세계에서 장차 받아야 할 과보의 업을 다스려서 쇠퇴시키는 원인으로 삼는다. 요점을 말하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악업을 다스리기 때문이고, 미래세에 자신이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원인을 얻기 때문이다. ‘처음 수행하는 자’란 범부를 말한다. ‘법신에 포섭된다’는 것은 법신의 종자의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해탈신에 포섭된다’는 것은 모든 성문은 해탈의 원인의 자체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문은 오직 해탈신을 얻고 법신을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6)
017_0017_a_15L釋曰:現起煩惱對治者,謂欲等出生,爲除滅因故.由除滅煩惱故,對治惡趣應受後報惡道業,爲彼朽壞因. 要言之,過去`未來`現在,一切惡業對治故,於未來世,自身得親近善友因故.初修行者,謂凡夫.法身攝者,爲法身種子體故.解脫身攝者,謂爲諸聲聞解脫因體故.何以故?由聲聞,唯得解脫身,不得法身故.
017_0017_b_01L【論】이것은 아리야식이 아니고, 법신과 해탈신에 포섭된다. 하품ㆍ중품ㆍ상품의 순서로 증가되고, 이와 같이7) 과보식이 점차 의지처를 감소한다. 곧 의지처가 전환되어 일체가 전환된다. 이 일체종자의 과보식은 모두 종자가 없어지므로 일체가 다 멸한다.
또한 아리야식이 아닌 것과 아리야식이 동일한 곳에서 생기함이 마치 물과 우유와 같은데, 어떻게 일체가 다 멸하는가? 마치 거위가 물 속의 우유를 마시는 것과 같다.
또한 세간의 욕락을 여의는 것과 같아서 선정이 아닌 지위의 훈습은 감소하고 선정의 지위의 훈습은 증가하여 의지처가 전환된다.
017_0017_b_01L論曰:此非阿梨耶識,法身解脫身所攝.隨下中上次第增,如是果報識,漸減依止,卽轉依止.一切轉已,此一切種子果報識,悉無種子,卽一切皆滅.復次非阿梨耶識,與阿梨耶識同處而生,猶如水乳,云何一切皆滅?如鵝飮水中乳.又如世閒離欲不靜地熏習滅,靜地熏習增依止卽轉.
【釋】아리야식과 아리야식이 아닌 것이 동일한 곳에서 생기하지만, 아리야식은 멸진해도 아리야식이 아닌 것이 존재함은 다음과 같다. 마치 거위가 물 속의 우유를 마실 때 우유는 다 없어지고 물만 남음과 같다. 마땅히 알라. 이로써 나타낸다.
또한 세간의 욕락을 여읠 때에 하나의 아리야식 안에서 선정이 아닌 지위의 번뇌의 훈습은 감소하고 선정인 지위의 선법의 훈습은 충만하여 의지처가 전환함과 같다. 마땅히 알라. 출세간의 훈습도 역시 그러하다.
017_0017_b_09L釋曰:如阿梨耶識,與非阿梨耶識,同處而生,然阿梨耶識盡,非阿梨耶識在.如鵝飮水中乳,乳盡水在,以此顯示應知.又如世閒離欲,於一阿梨耶識中,不靜地煩惱熏習滅,靜地善法熏習充滿,依止得轉出世熏習,亦爾故應知.

16) 순도리장(順道理章)
017_0017_b_16L順道理章第十六
【論】또한 멸진정에 들어가도 식은 신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함과 같다.8) 이것은 과보식이 신체를 떠나지 않음을 성립시킨다. 멸진정은 이 식을 다스리기 위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역시 선정에서 나올 때 이 식이 다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 과보식은 중단되고서 다른 생을 맺음이 아니면 다시 생길 수 없다.
017_0017_b_17L論曰:如入滅盡定,說識不離身.此成立果報識不離身,以滅盡定,不爲對治此識故生.亦非出定時,此識復生,此果報識,斷已非結,餘生不得更生.
017_0017_c_01L【釋】‘멸진정에서 식이 신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함’은 아리야식이 존재함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세존께서 “식이 신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과보식이 아니면 다른 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멸진정은 생기식을 다스리기 위해서 생기며, 이 선정을 관하여 고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 집착해서 “선정에서 나올 때 식이 다시 생기하며, 이런 뜻에서 식이 신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런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정에서 나올 때 식이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이 과보식의 상속이 단절되고서 만일 생을 맺을 때가 아니면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017_0017_b_21L釋曰:滅盡定說,識不離身者,此爲成就有阿梨耶識.由世尊說,識不離身者,若離果報識,餘識不成.何以故?以滅盡定,對治生起識故生,見此定寂靜故.若復執言出定時識更生,由此意故,名爲識不離身者,此義不成.何以故?以出定時識不更生,此果報識,相續斷已,若離託生時,不得更生.
【論】어떤 이가 집착해서 “의식이 있기 때문에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집착한 마음은 성립되지 않는다. 선정의 의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고,9) 반연(攀緣)의 양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선근과 상응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고, 불선과 무기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상작용[想]10)과 감수작용[受]11)의 심소가 함께 현행함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고, 접촉[觸]의 심소가 있기 때문이며, 삼마제에서 이것이 세력이 있기 때문이고, 오직 표상작용의 심소만을 멸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며, 사유가 믿음의 심소 등의 선근과 함께 일어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능히 의지하는 것이 의지처12)를 여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고, 비유가 있기 때문이며, 일체행심소[一切行者]13)가 아닌 것은 역시 없기 때문이다.
017_0017_c_06L論曰:若人執以意識故,說滅盡定有心者,彼人所執心不成,定義不成故,攀緣相不可得故,善根相應過故,不善無記不相應故,想受共行過故,則有觸故,三摩提中此有力故,唯滅想是過故,思惟卽與信等善根俱起過故,能依離所依不可得故,有譬喩故,非一切行者亦不有故.
017_0018_a_01L【釋】어떤 이가 집착해서 “의식이 있기 때문에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집착한 마음은 성립되지 않는다. 선정의 의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자체 양상의 아리야식을 떠나서 생기식 중에서 어느 하나의 식으로써 멸진정에 이 마음이 있다고 하면 이런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정의 의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14) 일찍이 심왕[心]이 심소[心法]를 여읨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15) 나머지 심소가 심왕을 여읨을 보지 못함과 같다. 만약 표상작용과 감수작용이 멸하지 않으면 멸진정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 선정은 다시 선정을 이루지 못한다.
만일 아리야식이 존재한다면 이런 과실이 없다. 고요히 머무는 것을 구하기 때문에 그 원수 같은16) 나머지 심왕과 심소를 다스리기 위해서 멸진정이 생겨난다. 아리야식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17) 이 식을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선정에는 다른 심왕이 없다.18) 왜냐하면 반연의 양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왕과 심소가 상속해서 단절되지 않으면 반드시 인식대상의 양상이 있다. 멸진정에 만일 심왕이 있다면 역시 마땅히 인식대상의 양상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이 두 가지가 함께함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선정에는 다른 심왕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아리야식이 존재한다고 안립하면 이런 과실이 없다. 이 식은 신체를 섭지함으로써 명칭을 붙이기 때문이다.
017_0017_c_14L釋曰:若人執以意識故,說滅盡定中有心,彼人所執不成心,以定義不成故.若欲令離如先所說,自相阿梨耶識,於生起識中,隨一識滅盡定中,有此心者,此義不成.何以故?定義不成故.未曾見心,離於心法,如餘心法,未曾離心.若想受不滅,不得滅名,則此定不復成定.若存有阿梨耶識,則無此過.爲寂靜住故,對治彼怨,其餘心及心法,故滅定生阿梨耶識,不分明故,不對治此識故生.是故此定不得有餘心.何以故?攀緣相不可得故.心及心法若相續不斷,必有所緣相.滅定若有心,亦應不離所緣相.此二俱不可得故,此定無有餘心.若立有阿梨耶識,則無此過,此識以攝持身得名故.
또한 만약 멸진정에 다른 식이 생겨난다면19) 다른 식에는 반드시 선 등의 차이가 있어야 하니, 이른바 선ㆍ불선ㆍ무기(無記)이다. 그렇다면 이 심왕은 선이 될 수 없다. 만일 선이라면 마땅히 선근과 상응해야 하고, 이것은 위배되기 때문이다. 역시 식의 자성이 선인 것은 아니다. 선근과 상응함을 여의면 선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선정의 마음이 선이라면,20) 의도하지 않았던 바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함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인정될 수 없다. 모든 곳에서 나머지 선심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21)
또한 불선ㆍ무기도 될 수 없다.22) 불선과 무기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욕계의 탐욕을 여읠 때에 모든 불선근이 이미 단멸되어서23) 불선을 이루지 못한다. 역시 무기도 아니다. 이 선정은 선(善)이기 때문이다.24)
또한 이 마음을 선으로 안립할 수도 없다. 표상작용과 감수작용의 심소가 함께 작용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선근을 여의면 선이 될 수 없다. 다만 선은 반드시 선근과 상응한다. 마치 선근과 상응하듯이 반드시 표상작용ㆍ감수작용의 심소와 상응함이 별도의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스림의 대상이 현행하는데 다시 능히 다스리는 것이 있다면 이런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25) 마치 탐욕 등이 바로 현행하면 부정관이 있을 수 없음과 같다.
017_0018_a_08L復次若滅定中,有餘識生者,餘識必有善等分,謂善`不善`無記.此心不得爲善,若善應與善根相應,此卽相違故.亦非識自性是善,以離善根相應,無得善義.故若定心是善,則不許義至,與無貪等,善根相應.此不可許,卽與一切處,餘善心不異故.亦不得爲不善及無記,與不善`無記不相應故.離欲界欲時,一切不善根已滅,不成不善.亦非無記,以此定是善故.又不可以此心爲善,與想受共行過故.若離善根,不得爲善,但善必與善根相應.如與善根相應,必與想受相應,無有別因故.所治現行,復有能治,此義不成.如欲等現行,不得有不淨觀.
017_0018_b_01L또한 이 선정 중에 아리야식을 떠나서 다른 심왕이 있다면26) 곧 접촉[觸]의 심소가 생겨나는 과실이 있다. 이제 마땅히 다른 선정에 머무는 것으로써 예를 들겠다. 다만 다른 선근과 상응하는 선정에서 심왕이 생기할 때, 반드시 접촉의 심소가 함께하고, 선정에 의해 편안함[猗]27)을 일으킴을 양상으로 삼는다. 즐거움의 감수작용에 접촉하거나,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수작용에 접촉하여 이 접촉의 심소를 조건으로 삼아서 곧 즐거움의 감수작용이나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수작용을 일으킨다. 무슨 까닭인가?28) 이 접촉의 심소는 선정에서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29)
017_0018_a_23L復次定中,若離阿梨耶識,有餘心者,則有觸生過.今當以住餘定爲例,但有其餘善根,相應定心生時,必與觸俱,謂因定生猗爲相.若樂受觸`若不苦不樂受觸,以此觸爲緣故,則有樂受及不苦不樂受生.何以故?此觸於定中有力故.
다른 선정에서 이 접촉30)의 심소가 두 가지 감수작용31)을 생기게 하는 데 세력이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멸진정에서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니, 별도의 장애의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접촉의 심소가 감수작용을 반연해야 한다. 이런 의미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오직 표상작용만을 멸하는 것은 과실이기 때문이다.32)
017_0018_b_06L以見此觸於餘定中,生二受有力故,於滅定中,亦應爾,無別障㝵因故.若爾,觸緣受則至,此義不成.何以故?唯滅想是過患故.
만약 접촉의 심소가 감수작용을 반연한다고 말하면, 이 선정을 수행함은 오직 표상작용만을 멸해야 한다. 이것은 인정될 수 없다. 감수작용과 표상작용이 함께 멸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선정 중에서 접촉의 심소가 다른 식에 있어서도 안 된다. 만일 접촉의 심소가 있다면 곧 상응함이 있게 되고, 사유33)ㆍ믿음의 심소 등의 선근이 함께 생기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만약 식이 접촉의 심소와 상응해서 생기한다면 곧 사유의 심소가 함께 생기한다”고 말씀하기 때문에 선정에서 사유의 심소가 현행하는 의미가 성립된다. 만일 사유의 심소가 현행한다면 곧 조작하는34) 선심을 일으키고, 이것은 반드시 믿음 등의 선근과 함께 생기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인정될 수 없다.
만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갖가지 과실과 아함에 위배되는 과실을 피하기 위해서 심소법35)을 부정하여 심소가 없고 오직 심왕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도 역시 옳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의지처로부터 의지하는 것을 없애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36)
017_0018_b_09L若言有觸緣受,修行此定唯爲滅想,此不可許,以說受想俱滅故.又復不應有觸,於餘識中,若有觸,則有相應共有思惟,信等善根共生過故.經說:若有識,與觸相應生,則有思惟俱生.是故於定中,思惟現行義得成.若有思惟現行,則是起作善心,此必應與信等善根俱生,此義不可許.若欲離如前所說過失,及離阿含相違過失,故言拔去心法,無有心法,唯有心在爲是.此亦不成.何以故?從所依中,拔除能依,不可得故.
017_0018_c_01L 심왕이 의지처이고, 심소가 의지하는 것이다. 이 의지하는 것과 의지처인 심왕과 심소는 아득한 옛적부터 윤회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일찍이 서로 여의지 않는다. 이것은 서로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정은 마땅히 무탐(無貪) 등의 선근과 상응해야 한다. 만약 그대가 “선정과 선정의 방편이 아울러 그것37)과 서로 거스르기 때문에 무탐 등이 생기하지 않고 오직 선심만이 생기한다”고 말하면, 다른 곳에서는 일찍이 이런 도리를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만일 법이 상응하여 생겨나면 반드시 흘러나온 과보가 상응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다시 성립되지 않음이 있다.38)
017_0018_b_21L心是所依,心法是能依,此能依`所依心及心法,無始生死已來,更互相依,未曾相離,由此相引故,必應與無貪等,善根相應.若汝言定及定方便,竝與彼相違故,無貪等不生,唯善生者,餘處未曾見此道理.何以故?若法相應生,必有津液果相應生,是故彼義不成.復次更有不成.
세존께서 “신체의 작용이 멸하고, 나아가 언어 작용ㆍ의지 작용이 멸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신체 작용은 들숨과 날숨을 말하고, 언어 작용은 대략적 인식[覺]과 세밀한 인식[觀]의 심소39)를 말하며, 의지작용은 사유ㆍ표상작용의 심소 등을 말한다. 살핌과 관찰의 심소가 멸하면 언어가 생겨나지 않듯이, 이와 같이 의지 작용이 멸하면 의식이 생기할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신체 작용이 멸해도 선정 중에 안주하는 신체는 존재하여 멸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록 의지 작용이 멸해도 의식은 오히려 머물 수 있다”고 말하면, 이런 의미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인연이 있으므로 다시 별도의 신체 작용이 있어서 신체가 머무는 원인이 된다. 세존께서 “음식ㆍ명근(命根)ㆍ식 등”이라고 말씀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들숨과 날숨이 없어도 신체는 안주한다. 그러나 의식은 그렇지 않으니, 다시 다른 의지 작용이 지니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 선정 중에 의식으로써 마음이 머물게 할 수 없다.
세존께서 “식이 신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한 바와 같다. 이것은 과보식을 말한다. 왜냐하면 종자가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선정에서 나올 때 생기식이 이로부터 나온다. 이 의지하는 것과 의지처는 언제나 이렇게 생기한다. 비록 의식적인 노력을 가해도 그것을 능히 서로 여의게 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비유가 있기 때문이다.
017_0018_c_05L世尊說,身行滅乃至言意行滅.於中身行者,謂出入息.語言行者,謂覺觀.意行者,謂思惟及想等.如覺觀滅,則語不得生,如是意行滅,則意不得生.若汝言如身行,滅住於定中,身得不如是意行雖滅,意猶得在.此義不然.何以故?有因緣故.更有別身行,爲身得住因.如世尊說:由飮食`命根及識等故,雖無出入息身亦得住.意則不爾,更無餘意行所持故,於彼定中,不得以意識爲心住.如世尊說:識不離身.此說果報識.何以故?由有種子故,後出定時,生起識從此而生.此能依`所依一切時,如是而生,雖加功用不能,令其相離.何以故?有譬喩故.
017_0019_a_01L이것은 세간에서 생겨남에서 소멸에 이르기까지 서로 여의지 않고 언제나 함께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의지하는 것을 부정하여 의지처를 떠나게 할 수 없으니, 비유하면 4대와 4대로 이루어진 물질과 같다. 심소도 역시 그러하다. 그것을 서로 여의게 해서 심왕만 홀로 있게 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다시 “의지처로부터 의지하는 것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표상작용과 감수작용의 심소는 허물이기 때문에 오직 두 가지는 작용하지 않지만 다른 심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이것도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처행심소[一切處行者]40)가 아닌 것41)은 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017_0018_c_20L於世閒中,從生至終,更互不相離,一切時共生,無有能拔其能依,令離所依.譬如四大,及四大所造,心法亦爾,無有道理令其相離`留心獨在.若言從所依拔除能依不可得,但以想受是過患故,唯此二法,不現行非餘.此亦不成.何以故?非一切處行者,此中不有故.
경전에서 “멸진정 가운데 식이 신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은 곧 아리야식이 존재함을 성취한다. 세존께서 “식이 신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과보식이 아니면 다른 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멸진정은 생기식을 다스림으로써 생겨난다. 이것은 고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이가 집착해서 “선정에서 나오고서 식이 다시 신체에서 생기하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하면, 이것도 역시 옳지 않다. 선정에서 나올 때에 식이 다시 생기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과보식은 만일 상속이 단절되면, 다음 생을 맺는 경우가 아니면 다시 생기하는 의미가 없다.
만일 다시 아리야식이 없어도 의식으로써 집착해서 “멸진정 중에서 심왕이 있다”고 말하면, 그 심왕은 선ㆍ불선ㆍ무기가 될 수 없다.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선정은 선이므로 불선이 될 수 없고, 역시 위의무기ㆍ공교무기ㆍ변화무기42)도 될 수 없다. 만일 과보무기라고 말하면 곧 아리야식이다. 다섯 번째 무기는 없기 때문이다.
017_0019_a_05L經說:滅盡定中,識不離身者,卽是成就阿梨耶識是有,以世尊說識不離身故,若離果報識,餘識不成.何以故?由滅盡定,對治生起識生,以是寂靜故.若有執從定起已,識還從身生,故言不離者,此亦不成,以出定時,識無更生義.以彼報識,若相續斷已,離結後生無更生義.若復執離阿梨耶識,以意識故,言滅盡定中,有心者,彼心不得爲善`不善`無記,竝不成故.由此定善故,不可爲不善,亦不得爲威儀`工巧`變化等無記.若言是果報無記,卽是阿梨耶識,以無第五無記故.
만약 이 심왕이 선이라면 마땅히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해야 한다. 또한 이 심왕이 머물 때에 염오의는 이미 멸하니, 다만 선 가운데 머물기 때문이다. 이 선한 심왕은 의지처와 인식대상이 있어서 세 가지가 화합한다. 그런데 어째서 접촉의 심소를 일으키지 않는가?43) 이미 접촉의 심소가 있으면 감수작용 등의 심소가 어째서 생겨나지 않는가? 이렇게 되면 멸진정의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선정에서 심왕과 심소가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019_a_18L若言此心是善,卽應與無貪等,善根相應.又此心在時,染污意已滅,但住善中.此善心,卽有所依止,及有所緣三事和合,云何不生觸?旣生觸,云何不生受等?若爾,則滅盡定義不成,於中心及心法不滅故.
017_0019_b_01L또한 만약 그대가 집착하여 “선한 심왕의 세력이 이 선정을 이끌어 생겨나게 한다. 방편의 선한 심왕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 선정이 비록 선이지만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하지는 않는다. 만약 화합이 능력이 있으면 화합이라고 이름한다. 따라서 이 선정은 비록 선이지만 세 가지의 화합에 대해서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마치 흐름의 결과처럼 생기하기 때문에 그 방편의 심왕은 선이다. 따라서 이 선정은 선근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017_0019_a_23L若汝執言善心勢力引此定生,由方便善心勢力故,此定雖善,然不與無貪等善根相應.若和合有能,得名和合.是故此定雖善,於三和合無有能故.此不爾,如津液果生故,以彼方便心是善,是故此定卽與善根相應故.
【論】만약44) 다시 집착해서 “신체의 물질과 마음이 차례로 생겨나서 모든 법의 종자가 된다”고 말하면,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무색계나 무상천에서 죽거나 멸진정에서 나오는 이런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이 역시 성립될 수 없다. 오직 차제연(次第緣)의 의미가 성립될 뿐이다.
이와 같이 만일 일체종자의 과보식을 떠나면 잡염과 청정이 모두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양상과 같은 아리야식이 존재함이 성취된다.
017_0019_b_06L論曰:若復執色,心次第生爲諸法種子,此破如前,復有不成.於無色界,及無想天退墮,從滅盡定起,此義不成.阿羅漢最後心,亦不得成,唯除次第緣義得成.如是若離一切種子果報識,染污淸淨,皆不得成.是故如前所說相,阿梨耶識,成就是有.
017_0019_c_01L【釋】만약 집착해서 “신체의 물질과 마음이 상속해서 모든 법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 전찰나의 신체의 물질이 후찰나의 물질의 원인이 되어 종자가 되고, 첫찰나의 식이 다음 찰나의 식을 생겨나게 함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하면, 또한 무색계에서 죽어서 그 신체의 물질이 오래전에 단멸했는데 어떻게 종자가 다시 물질에서 생겨나겠는가?
만일 무상천에서 죽거나 멸진정에서 나오면, 이 마음이 오래도록 단멸했는데 어떻게 이후의 마음이 생기하는 원인이 되겠는가? 만약 이렇게 되면 아라한은 무여열반을 증득할 수 없다. 신체와 마음의 원인이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 이 전찰나의 물질이 후찰나의 물질에 대해서, 또한 전찰나의 식이 후찰나의 식에 대해서는 오직 차제연이 될 뿐이고 인연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리야식이 존재함이 성취된다.
만약 생기식에 머물면 전의(轉依)의 의미가 성립될 수 없다. 이런 의미를 이제 세 게송으로 나타낸다.
017_0019_b_13L釋曰:若執色心相續生諸法,前剎那色,爲後剎那色因,得爲種子.初剎那識生後剎那識亦爾.若從無色界退,彼色久已斷絕,云何得種子,復生於色?若從無想天退,及從滅定起,此心久滅,云何得爲後心生因?若如是,阿羅漢無有得無餘涅槃,以色心因不盡故.此前剎那色,於後剎那色,前剎那識,於後剎那識,應知但得爲次第緣,不得爲因緣,是故成就阿梨耶識爲有.若住生起識中,轉依義不得成.此義今以三偈顯之.
【論】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19_c_02L論曰:此中有偈:

보살은 착한 마음 가운데
5식을 여의고
다시 다른 식이 없는데
전의가 어느 마음에서 이루어지는가?
017_0019_c_03L菩薩善心中,
則離於五識,
無復有餘識,
轉依何心作.

다스림이 전의가 되면
아직 단멸이 아니므로 성립되지 않네.
결과와 원인이 차별이 없어서
단멸함에 대해서 과실이 있도다.
017_0019_c_05L對治爲轉依,
未滅故不成,
果因無差別,
於滅則有過.

종자가 없고 자체가 없음을
인정해서 이것을 전의로 삼으면
그 두 가지의 비존재는 없기 때문에
전의가 성립되지 않도다.
017_0019_c_06L無種子無體,
許此爲轉依,
彼無二無故,
轉依則不成.
017_0020_a_01L
【釋】‘보살이 착한 마음 가운데’라는 것은 착한 의식을 가리킨다. 출세간의 다스림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5식을 여의고’라는 것은 안식 등 5식을 여의는 것이다. ‘다른 식이 없는데’라는 것은 잡염을 여읜 의식과 번뇌 있는 착한 식을 말한다. 번뇌 있는 착한 식을 부정하기 위해서 착한 마음 이후에 다시 다른 식을 말한다.
‘전의가 어느 마음에서 이루어지는가?’라는 것은, 아리야식에 모든 염오종자가 다시는 종자가 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짓기 때문이다. 만일 다스림이 생겨서 전의가 된다고 말하면, 다스림이 전의가 됨은 단멸이 아니므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가 단멸되기 때문에 전의라고 이름한다. 다스림이 단멸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스림은 다만 단멸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결과와 원인이 차별이 없어서 그 단멸은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단멸을 말하며 열반이라 이름하고, 원인은 다스림을 말하고 수도[道]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다스림과 단멸이 곧 하나의 자체를 이루어 다스림이 생겨날 때 곧 열반이기 때문에 과실이 있다.
만일 그대가 종자가 없고 자체가 없음을 인정해서 이것을 전의로 삼는다면, 생기식에 종자가 없고 자체가 없는 이러한 것을 전의로 삼는다. 그런데 그곳에 두 가지의 비존재는 없기 때문에 전의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과실이 있다. 출세간의 선정에 머물 때 식과 생기식이 모두 없기 때문이다. 그때는 종자가 없음도 없고, 자체가 없음도 없기 때문에 전의의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아리야식이 있다면 모든 생기식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종자가 아리야식에 머물러서 능히 종자도 없고 자체도 없을 수 있다. 그대가 말하는 전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알라. 아리야식은 존재한다.
017_0019_c_07L釋曰:菩薩善心中者,謂善意識中,卽是出世對治相應故.則離於五識者,謂離眼識等五識.無餘識者,謂離染污意識,及有流善識.爲離有流善識故,說善心已,復說無餘識.轉依何心作者,謂於阿梨耶識中,一切染污種子,無復種子,如此作故.若言對治,生爲轉依者,對治爲轉依,非滅不成故.煩惱滅故,名爲轉依,非對治卽是滅.何以故?對治但是滅因故.若爾則是果因無差別,彼滅卽有過故.果者謂滅,名爲涅槃.因者謂對治,名爲道.彼對治與滅則成一體.又對治生時,卽是涅槃故.若汝以無種子無體許此爲轉依者,於生起識無種子及無體,如此爲轉依,彼無二無故,轉依則不成故.於住出世定時,諸生起識竝不有故,爾時無種子無及無體無,是故轉依義不成.若有阿梨耶識,諸生起識雖不在,彼種子在阿梨耶識中住,則能作無種子及無體.由轉依不成故,應知有阿梨耶識.

17) 차별장(差別章)
017_0020_a_06L差別章第十七
【論】또한 이 아리야식의 차별은 어떠한가?45) 마땅히 알라.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 혹은 네 가지가 있다. 여기서 세 가지란 세 가지 훈습의 차별 때문이다. 첫째는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차별이고, 둘째는 아견훈습(我見熏習)의 차별이며, 셋째는 유분훈습(有分熏習)의 차별이다. 네 가지란 첫째는 이끌어 내는 것의 차별[引生差別]이고, 둘째는 과보의 차별[果報差別]이며, 셋째는 반연되는 양상의 차별[緣相差別]이고, 넷째는 양상의 차별[相貌差別]이다.
이 중에서 이끌어 내는 것의 차별은 새롭게 훈습을 일으킴을 말한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행이 식을 반연하고, 취(取)가 유(有)를 반연함이 성립될 수 없다. 과보의 차별은 행과 유의 지분을 조건으로 삼아서 모든 윤회세계에서 성숙함을 말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곧 종자가 없게 되므로 다음 존재의 모든 법이 생겨날 수 없어야 한다.
형상을 반연함의 차별이란 말나식[意]이 집착한 아상이다. 만일 이것이 없으면 말나식의 자아 집착의 인식대상이 성립될 수 없다.
017_0020_a_07L 論曰:復次此阿梨耶識,差別云何?略說或三種或四種.應知於中三種者,由三種熏習差別故,一名言熏習差別`二我見熏習差別`三有分熏習差別.四種者,一引生差別`二果報差別`三緣相差別`四相貌差別.於中引生差別者,謂新生熏習.若無此,行緣識`取緣有不得成.果報差別者,以行有爲緣,於諸趣成熟.若無此,則無種子,後有諸法,生不得成.緣相差別者,此卽是意所取我相.若無此,則我取意念,所緣不得成.
017_0020_b_01L【釋】이상과 같이 아리야식이 존재함을 성취하였다. 이제 마땅히 이 식의 품류의 차별을 나타내야 한다. 이 세 가지 훈습의 차별 중에서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차별’은 다음과 같다. 마치 눈[眼]이라는 명칭의 훈습이 과보식 중에 있으면서 그 눈이 생기하는 원인이 되고, 나중에 과보인 안근이 생겨날 때 이 눈의 명칭을 원인으로 삼아서 생겨남과 같다. 귀 등 여러 감각기관의 모든 명칭의 차별도 역시 이와 같다.
‘아견훈습의 차별’은 염오의(染汚意) 가운데 신견(身見)의 세력으로 인하여 아리야식을 집착해서 자아로 삼고 훈습이 생겨나서, ‘이것은 나[我]이고 그것은 남이다’라는 차별이 있게 된다. ‘유분훈습(有分熏習)의 차별’은 선ㆍ불선ㆍ부동행의 세력으로 인하여 여러 윤회세계 가운데 생을 받아서 이러한 차별이 있다. 이 의미는 나중에 알아야 할 것의 양상[應知相]의 서두에서 마땅히 자세히 말하기로 한다.
‘이끌어 내는 것의 차별’이란 종류를 섭취하는 차별이다. ‘새롭게 훈습한다’는 것은 처음 훈습을 일으킬 때를 말한다. 만약 이 아리야식의 이끌어 내는 것의 차별이 없다면, 모든 행(行)의 지분이 생멸하고 훈습하여 식의 지분을 이루고 취의 지분의 섭수로 인하여 유의 지분을 생겨나게 해서 현전케 해도 이 유의 지분은 성취될 수 없다.
017_0020_a_19L釋曰:如此成就阿梨耶識已,今當顯示此識品類差別.於此三種熏習差別中,名言熏習分者,所謂如眼,名熏習在果報識中,爲彼眼生因後果報眼根生時,由此眼名言說爲因故生.耳等諸根一切,名言差別,亦如是.我見熏習差別者,由染污意中,身見力故,取阿梨耶識爲我,熏習生已,則有此我彼他差別.有分熏習差別者,由善`不善不動行力故,於諸趣中,受生如此差別,此義如後應知相初廣說.引生差別者,謂攝聚種類差別所有.新生熏習者,謂初起熏習時,若無此阿梨耶識,引生差別,則諸行生滅,所熏習識,由取所攝持故,生有現起,此有不成.
능히 다음 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유(有)라고 하고, 이 유는 선ㆍ불선 취를 자주 익힌 것이다.
‘과보의 차별’은 행과 유의 지분을 섭취하여 조건으로 삼아서 모든 윤회세계에서 성숙된 것이다. 만약 이 아리야식이 이끌어 섭취된 것이 없으면, 곧 원인이 없게 되어 다음 존재의 모든 법과 안근 등 감각기관이 생겨남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은 과보이기 때문이다.
‘반연되는 양상의 차별’이란, 이 아리야식이 그것을 의지처로 하는 염오의(染汚意)에 대해서 아견ㆍ아취(我取)라는 반연의 양상이 됨을 말한다. 만약 이 반연되는 양상이 없다면, 아리야식은 염오의와 함께하는 신견이 원인이 되는 이 아집의 인식대상이 성립될 수 없다. 마땅히 알라. 이것은 등류과[津液果]이다.
017_0020_b_12L能有後生故,名此爲有,此有卽是善`不善取之數習.果報有差別者,由攝聚行有爲緣,於諸趣中成熟.若無此阿梨耶引攝分,則無有因,於後有中,諸法眼等,色根生起不成,此卽是報果故.緣相差別者,卽此阿梨耶識分,與彼依止染污意,我見爲我取緣相.若無此緣相,阿梨耶識與染污意,意俱身見爲因,此我執所緣境不成,此卽是津液果.
017_0020_c_01L【論】이 중에서 양상의 차별이란, 이 식에 공통된 양상과 공통되지 않은 양상이 있고,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종자의 양상과 감각ㆍ지각 작용이 있는 종자의 양상 등이다. 공통된 양상은 자연계[器世界]의 종자이기 때문이고, 공통되지 않은 양상은 각각의 내부의 종자이기 때문이다. 이 공통된 양상은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종자이다. 공통되지 않은 양상은 감각ㆍ지각 작용이 있는 종자이다. 만약 다스림이 생겨날 때는 공통되지 않은 양상의 장애가 멸하기 때문이다. 공통된 양상은 남의 분별에 섭지되어 관행을 닦는 자가 거기서 청정을 본다. 마치 모든 사물에 대해서 갖가지 즐거움과 소견이 성립됨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20_b_21L論曰:於中相貌差別者,此識有共相`有不共相,無受生種子相`有受生種子相.共相者,是器世界種子故.不共相者,是各別內入種子故.此共相是無受生種子,若對治起時,不共相障㝵滅故.共相者,他分別所持,觀行者,於中見淸淨,如於一切物中,種種樂欲`種種見成故.此中有偈:

단멸하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것을
공통된 양상의 속박이라 이름하네.
관행을 닦는 사람은 외부의 모습에 대해서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네.
017_0020_c_05L難滅及難知,
所謂共相結,
觀行者心異,
於外大相中.

청정한 사람은 단멸하지 않아도
그 안에서 청정함을 보네.
모든 부처님은 청정을 보고
청정 불국토를 장엄하네.
017_0020_c_07L淸淨者不滅,
於中見淸淨,
諸佛見淸淨,
成嚴淨佛剎.

또한 별도의 게송이 있다.
017_0020_c_08L復有別偈:

갖가지 즐거움에 따라서
갖가지 견해가 이루어지네.
관행을 닦는 이는 모두 한 사물에 대해서
갖가지 즐거움에 따라
갖가지 견해가 이루어지나니
인식대상은 오직 식만이 존재하도다.
017_0020_c_09L隨種種欲樂,
種種見得成,
觀人於一物,
隨種種欲樂,
種種見得成,
所取唯有識.

이 공통되지 않은 양상은 감각ㆍ지각 작용이 있는 종자이다. 만일 이것들이 없다면 자연계와 중생세계가 생겨나는 차별이 성립될 수 없다.
017_0020_c_11L此不共相,是有受生種子.此等若不有,器世界及衆生世界轉生差別不成.
【釋】‘양상의 차별’은 많은 종류가 있다. 이른바 공통된 양상과 공통되지 않은 양상이 있고,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종자의 양상과 감각ㆍ지각 작용이 있는 종자의 양상이다.
이 아리야식이 모든 중생의 공통된 자연계의 원인 자체가 된다면, 곧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종자이다. 공통되지 않은 양상의 아리야식이 각각 자신의 빛깔의 포섭처[色處] 등 12처의 원인 자체가 된다면 곧 감각ㆍ지각 작용이 있는 종자이다. 만일 이와 같은 품류의 아리야식을 떠나면, 모든 중생이 공통적으로 수용하는 원인인 모든 자연계는 성립될 수 없다. 이와 같이 만약 두 번째46) 아리야식을 떠나면 중생세계도 성립될 수 없다. 마치 고목(枯木)이 인식작용이 없음과 같다.
017_0020_c_14L釋曰:相貌差別者,有多種,於中謂共相`不共相,有受生種子相`無受生種子相.此阿梨耶識,爲一切衆生所共器世界因體,卽是無受生種子.不共相阿梨耶識者,卽是各各自身色等,諸入因體,卽是有受生種子.若離如是相類阿梨耶識,則一切衆生,所共受用因器世界則不成.如是若離第二阿梨耶識,衆生世界不成,卽如枯木,無所覺知.
017_0021_a_01L【論】또한 거칠고 악한 양상과 가볍고 평안함의 양상이 있다. 거칠고 악함의 양상이란 번뇌ㆍ소번뇌47)의 종자이다. 가볍고 평안함의 양상은 유루 선법의 종자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과보의 신체 가운데 감당 능력이 없음과 감당 능력이 있는 차별이 성립될 수 없다.
017_0020_c_24L論曰:復有麤惡相`輕安相.麤惡相者,是煩惱小煩惱種子.輕安相者,是有流善法種子故.若無此,於果報身中,有堪能無堪能差別不成故.
【釋】‘거칠고 악한 양상’은 신체에 감당 능력이 없기 때문이고, ‘가볍고 평안함의 양상’은 신체에 감당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017_0021_a_04L釋曰:麤惡相者,謂身無堪能故.輕安相者,謂身有堪能故.
【論】또한 수용의 양상과 수용이 없는 양상이 있다. 수용의 양상은 과보가 이미 성숙된 선ㆍ불선의 종자이기 때문이다. 수용이 없는 양상은 언설훈습(言說熏習)의 종자이다. 아득한 옛적부터 희론에 의해 생기된 종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누누이 지은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수용하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이 새로운 언설훈습이 생겨남도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017_0021_a_06L論曰:復有受用相`不受用相.受用相者,謂果報已熟,善不善種子故.不受用相者,謂言說熏習種子,無始時戲論生起種子故.若無此,數數所作善`惡業,得果受用此義不成,此新言說熏習出生,亦不成.
【釋】‘수용의 양상’이란, 만일 이 아리야식이 없다면 누누이 지어진 선업ㆍ악업이 과보를 받아서 다함이 성립되지 않는다. ‘수용이 없는 양상’은 언설훈습의 종자를 말한다. 언설훈습의 차별 중에서 말한 바와 같다. ‘아득한 옛적부터 희론에 의해 생기된 종자이기 때문’이란, 아득한 옛적부터 세속에서 자주 유포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수용이 없는 양상의 아리야식이 없다면, 본래 새롭게 언설훈습이 생기함이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간에서 현재의 언설이 본래의 것을 떠나서 성립될 수는 없다. 본래 없다면 지금도 역시 없기 때문이다.
017_0021_a_12L釋曰:受用相者,若離此阿梨耶識,數數所作善`惡業,得果而盡不得成.無受用相,謂言說熏習種子者,如言說熏習差別中說.無始時,戲論生起種子故者,謂無始已來,俗數流布因故.若無此不受用相,阿梨耶識,則無本新言說熏習,生起不成.何以故?於世閒中,無有現在言說離本得成,若本不有今亦不有故.
【論】또한 비슷함의 양상이 있다. 이른바 요술ㆍ불꽃ㆍ꿈ㆍ흐리고 어두움 등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비슷한 양상인 아리야식이 없다면, 허망된 분별의 종자로 인해 전도됨의 양상이 이루어지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017_0021_a_21L論曰:復有相似相,謂似幻`焰`夢`翳等故.若無此相似相阿梨耶識,由虛妄分別種子故,成顚倒相,此義不成.
017_0021_b_01L【釋】‘비슷함의 양상’이란 마치 요술 등의 원인으로 인해서 허망되게 코끼리 등48)을 보는 양상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아리야식의 비슷함의 양상으로 인한 허망분별의 종자 때문에 전도된 양상이 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그 전도됨의 양상도 성립되지 않는다.
017_0021_a_24L釋曰:相似相者,如幻事爲因故,卽得妄見象等相.如是如是,由阿梨耶識相似相,虛妄分別種子故,有顚倒相若無此,彼顚倒相不成.
【論】또한 갖춤과 갖추지 않음의 양상이 있다. 속박을 갖추는 것이 갖춤의 양상이다. 세간의 욕망을 여의는 것을 감소가 있는 양상이라고 부른다. 유학의 성문과 모든 보살은 일부분 소멸의 양상이고, 아라한ㆍ벽지불ㆍ여래는 번뇌장을 모두 소멸한 양상과 번뇌장ㆍ지장을 모두 소멸한 양상이다. 그 상응하는 바와 같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차례로 번뇌를 소멸하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무슨 까닭에 선법과 악법의 과보는 오직 장애가 없는 무기인가? 이 과보는 장애가 없는 무기49)이기 때문에 선ㆍ악과 서로 거스르지 않는다. 선과 불선이 서로 거스르는데 만일 이숙과가 선ㆍ악의 성품이라면 번뇌를 소멸하는 도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과보식은 오직 장애가 없는 무기이다.
017_0021_b_04L論曰:復有具相`不具相.具縛者,是具世閒離欲者,損減相有學聲聞及諸菩薩一分拔離相阿羅漢`辟支佛`如來煩惱障具拔離相,煩惱障智障具拔相者,如其所應.若無此,次第滅煩惱義不成.何因緣故,善惡法果報,唯是無障無記?此果報,是無障無記故,與善`惡不相違善`惡更互相違,若果報是善惡,無有道理得滅煩惱,是故果報識,唯是無障無記.
【釋】‘장애가 없는 무기’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장애가 없다’는 것은 잡염이 없음이다. 잡염이 없는 무기이기 때문에 장애가 없는 무기라고 부른다. 색계에서 번뇌의 불선을 무기로 삼는 것과는 다르다.50) 만일 이 과보가 선ㆍ불선이라면 번뇌의 소멸이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선이라면 다시 선을 일으키고, 만약 불선이라면 다시 불선을 일으켜서 생사가 다하는 의미가 없게 된다. 생사란 곧 번뇌와 유류선(有流善) 등이다.51)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의지처를 해석하였다.
017_0021_b_14L釋曰:無障無記者,於中無障者謂無染,由無染無記故,名爲無障無記,非如色界生,以煩惱不善爲無記.此果報若是善`不善,則煩惱滅不得成.何以故?若是善,更生善若是不善,更生不善,則生死無有盡義.生死者,卽是煩惱及有流善等.釋應知依止竟.
攝大乘論釋論卷第三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이하 아리야식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다.
  2. 2)색계의 고요한 마음을 가리킨다.
  3. 3)이하 아리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설명한다.
  4. 4)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慧]를 하품(下品)으로 하고, 사유해서 이루는 지혜를 중품으로 하며, 닦아서 이루는 지혜를 상품으로 한다는 뜻이다.
  5. 5)세 가지 지혜의 하나하나에 다시 하품ㆍ중품ㆍ상품이 있음을 말한다.
  6. 6)성문ㆍ연각의 과신(果身), 즉 아라한과 벽지불은 번뇌장의 계박은 벗어났지만 아직 지장(智障)에 가리워 있기 때문에 해탈신이라고만 부른다. 불과(佛果)는 큰 적정(寂靜)을 성취했기 때문에 번뇌장뿐만 아니라 소지장의 계박도 소멸되고 10력ㆍ4무외(無畏) 등 뛰어난 공덕으로 장엄되므로 해탈신의 차원을 넘어서 법신으로 불린다.
  7. 7)훈습이 순서대로 증가함에 따라서 반대로 이숙식은 순서대로 점차 멸해감을 이렇게 표현한다.
  8. 8)이하 도리에 수순함을 말한다.
  9. 9)멸진정은 의식의 작용이 멸하는 선정이기 때문이다.
  10. 10)상(想, sanjā)은 표상작용(表象作用), 즉 대상의 형상을 취하여 명칭을 붙이는(언어와 일치할 수 있는) 개념화 작용을 한다.
  11. 11)수(受, vedanā)의 심소는 감수작용(感受作用)이다. 심왕으로 하여금 대상에 따라 수순(隨順)ㆍ거스름[違逆]ㆍ수순도 거스름도 아닌 것[非順非逆] 중에서 어느 하나를 취하도록 한다. 이에 고(苦)ㆍ낙(樂)ㆍ사(捨)의 3수(受), 또는 고수(苦受)ㆍ우수(憂受)ㆍ낙수(樂受)ㆍ희수(喜受)ㆍ사수(捨受)의 5수(受)가 있다.
  12. 12)여기서 능의(能依)는 표상작용[想] 등의 여러 심리작용[心所]을, 소의(所依)는 그 심소법이 수반되는 심왕을 가리킨다.
  13. 13)현장의 역본에는 변행심소(遍行心所)로 되어 있다.
  14. 14)이하 멸진정에 생기식(生起識)이 있다고 안립함의 과실을 11가지 이유를 들어서 논파한다. 이것은 그 첫 번째 과실이다.
  15. 15)정신세계를 식별작용의 주체[心王]와 그에 수반되는 심리작용[心所]으로 나눈다. 심왕은 정신작용의 주체로서 구체적으로 8식(識)이고, 심소는 심왕에 종속된 심리작용이다. 심왕과 심소는 체(體)를 달리하며 상응(相應)하여 함께 일어난다.
  16. 16)고요히 선정에 머무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다.
  17. 17)아리야식의 체성(體性)은 선도 악도 아닌 무기성(無記性)이다.
  18. 18)이하 두 번째 과실을 든다.
  19. 19)이하 세 번째 과실을 든다.
  20. 20)앞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선정의 마음이 선성(善性)이라고 안립한다든가, 혹은 그것이 무탐(無貪) 등의 선근과도 상응한다고 해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21. 21)선심(善心)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서 동일한 과실이 있어야 한다. 이 선정에 선심이 있다면 멸진정의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22. 22)이하 네 번째 과실을 든다.
  23. 23)멸진정은 욕계의 욕망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그때 불선은 다 멸진된다.
  24. 24)멸진정에 선심(善心), 즉 선의 심소법은 없지만 이 선정 자체는 선(善)이다.
  25. 25)선심이 있다면 선근이 있어야 하고, 선근이 있다면 표상작용[想]과 감수작용[受]도 역시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스려지는 마음이 곧 감수작용과 표상작용이 있기 때문에 능히 다스리는 선정은 없게 된다는 뜻이다.
  26. 26)이하 여섯 번째 과실을 든다.
  27. 27)선심소(善心所)의 하나로서 선정 중에서 몸과 마음이 평안하고 쾌적한 상태이다. 현장의 역본에는 경안[安]으로 되어 있다.
  28. 28)촉(觸, sparśa)의 심소는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의 3사화합(事和合), 즉 이 셋의 최초의 접촉에 해당된다. 심왕과 심소로 하여금 대상에 접촉케 하며, 이 결과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감수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29. 29)이하 일곱 번째 과실을 든다.
  30. 30)즐거움의 접촉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접촉이다.
  31. 31)즐거움의 감수작용[樂受]과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수작용[非苦非樂受]이다.
  32. 32)이하 여덟 번째 과실을 든다.
  33. 33)사(思, cetanā)의 심소를 가리킨다. 5변행심소(遍行心所) 중의 하나로서 의식적인 의지작용을 한다. 심왕ㆍ심소로 하여금 선ㆍ악의 대상에 대해서 선ㆍ악의 마음의 작업을 일으키게 해서 업도(業道)의 근원이 된다.
  34. 34)의지[思] 심소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35. 35)앞에서 말한 접촉[觸]ㆍ감수작용[受]ㆍ표상작용[想]ㆍ의지[思]의 심소를 가리킨다.
  36. 36)무탐(無貪) 등의 선근을 가리킨다.
  37. 37)이하 열 번째 과실을 든다.
  38. 38)이하 열한 번째 과실을 든다.
  39. 39)여기서 대략적 인식[覺]과 세밀한 인식[觀]의 심소는 부정심소(不定心所)이다. 현장의 역본에는 각각 심구(尋求)ㆍ사찰(伺察)로 되어 있다. 전자는 대상에 대하여 그 뜻과 이치를 대강 살피는 것[尋求]이다. 후자는 전자에 의해 대강 파악된 대상을 세밀하게 분별해서 사찰(伺察)하는 것이다.
  40. 40)현장의 역본에는 변행심소(遍行心所)로 되어 있다. 이 심소는 8식에 언제나 상응하여 함께 작용하는 보편적인 심리작용이다. 이에 접촉[觸]ㆍ작의(作意)ㆍ감수작용[受]ㆍ표상작용[想]ㆍ의지[思]의 다섯 심소가 있다.
  41. 41)51가지 심소법 가운데 변행심소 이외의 별경심소(別境心所)ㆍ선심소ㆍ번뇌심소ㆍ수번뇌심소ㆍ부정심소이다.
  42. 42)네 가지 무기(無記) 중에서 과보무기를 제외한 나머지 무기이다. 위의무기(威儀無記)는 앉고 서는 등의 동작을 일으키는 마음의 성품이 선도 악도 아님을 말한다. 공교무기(工巧無記)는 그림을 그리고 물건을 만드는 신공교(身工巧)와 노래 부르는 등의 언어공교[語工巧]를 일으키는 마음의 성품이 선도 악도 아닌 것을 말한다. 변화무기는 선정의 힘으로 여러 가지를 변화시켜서 만드는 마음이 선도 악도 아님을 말한다.
  43. 43)접촉[觸]의 심소는 근(根)ㆍ경(境)ㆍ식(識)의 3사화합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44. 44)이하 신체의 물질과 마음이 중단됨이 없이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는 견해를 논파한다.
  45. 45)이하 아리야식의 품류의 차이를 논한다.
  46. 46)공통되지 않은 양상을 가리킨다.
  47. 47)현장의 역본에는 수번뇌(隨煩惱)로 되어 있다.
  48. 48)요술로 나타난 코끼리처럼 요술ㆍ불꽃ㆍ꿈 등에서 나타난 영상을 말한다.
  49. 49)현장의 역본에는 무부무기(無覆無記)로 되어 있다.
  50. 50)유부무기(有覆無記)가 아님을 말한다.
  51. 51)유루의 선은 유전의 원인인 잡염에 포섭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