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釋卷第六

ABC_IT_K0595_T_006
017_0211_c_01L
섭대승론석 제6권
017_0211_c_01L攝大乘論釋卷第六


무성보살 지음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김치온 개역
017_0211_c_02L 無性菩薩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017_0211_c_04L入所知相分第四

【論】이와 같이 알아야 할 바의 양상[所知相]에 대해서 이미 설하였다. 1)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가는 것[入所知相]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많이 듣는 훈습[多閣熏習]에 의지하는 것이며 아뢰야식에 의해 섭수되는 것이 아니다. 아뢰야식이 종자를 이루는 것과 같이 이치 그대로[如理]의 작의에 섭수되어서 법과 흡사하며, 대상[義]과 흡사하게 생겨나서 소취의 현상[事]과 흡사하며 유견(有見)의 의언(意言)2)이다.
017_0211_c_05L論曰:如是已說所知相,入所知相,云何應見?多聞熏習所依,非阿賴耶識所攝,如阿賴耶識成種子,如理作意所攝似法`似義而生似所取事有見意言.
017_0212_a_01L【釋】보살은 이와 같이 업을 닦고 나서 마치 현관(現觀)의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인 양상에 들어가는 것임을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많이 듣는 훈습에 의지하는 것’이 대승에 대해서 많이 들음을 일으켜서 법의(法義)를 듣고 나서 심과 심법을 훈습하고 상속하는 것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 적게 들은 자는 이것의 현관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박가범께서는 존자 라호라(羅怙羅)3)에게 교수하는 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과 같다.
“‘오직 원컨대 세존이시여, 저에게 현관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니, 세존께서 ‘너는 정법장(正法藏)을 수지하였더냐?’라고 물으셨다. 라호라가 아뢰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니,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지금 우선 마땅히 법장(法藏)을 수지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것들이다.
‘아뢰야식에 의해 섭수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 소의는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에, 그리고 저것4)을 대치하기 때문에 저것의 성품에 섭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것과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이 종자를 이루는 것과 같이’란, 아뢰야식은 능히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되는 것과 같이 이 소의의 성품은 능히 일체 청정법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오직 원인으로서의 성품이 같기 때문에 아뢰야식과 비유할 수 있는 것이지 일체종(一切種)은 아니다. 다음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7_0211_c_10L釋曰:菩薩修習如是業已,如入現觀所應知相,今當顯說.多聞熏習所依者,謂於大乘,而起多聞,聞法義已熏心`心法相續所依,其少聞者,無容得入此現觀故.如薄伽梵,教授尊者,『羅怙羅經』說,如是言:唯願世尊教我現觀.世尊告曰:汝已受持正法藏耶?羅怙羅言:不也.世尊!世尊告曰:汝今且應受持法藏.如是等,非阿賴耶識所攝者,謂此所依從最淸淨法界流故`對治彼故,非彼性攝,彼相違故.如阿賴耶識成種子者,如阿賴耶識,能爲一切雜染法因.此所依性,能爲一切淸淨法因,唯因性同故得爲喩,非一切種.如有頌言:

항상 방일하는 색맹인 자는
스스로의 즐거움을 보지 못하니, 그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강령하시어 세간에 나타나셔서
저들을 위해서 미묘한 법을 잘 설하시네.
비유하면 값을 매길 수 없는 마니보와 같아서
능히 여러 가지 악을 제거하심이 불가사의하네.
017_0212_a_03L爲欲利益常放逸,
生盲不觀自樂者,
諸佛降靈現世閒,
爲彼宣說微妙法,
譬如無價末尼寶,
能除衆毒不思議.

‘법과 흡사하게’라고 말하는 것은 『십지경』 등과 같은 계경들을 말하는 것이다.
‘대상과 흡사하며’라고 하는 것은 저 소전5)에 나타나는 무아의 성품 등을 말한다. 저 행상과 흡사하게 생겨나기 때문에 ‘법과 흡사하게, 대상과 흡사하게 생겨서’라고 설하는 것이다. ‘소취의 현상과 흡사하며’라고 하는 것은 저 소취와 같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유견’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식(耳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의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른바 의식(意識)이다. 혹은 견분과 함께 하는 소취와 능취의 성품이다. 이것은 곧 소취와 능취의 소의의 자성을 안립한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017_0212_a_06L言似法者,謂契經等,如『十地』等.言似義者,謂彼所詮,無我性等,似彼行相,而生起故,說爲似法似義,而生似所取事者,如彼所取,而顯現故.言有見者,謂耳識俱.言意言者,所謂意識.或與見分俱所取`能取性,此卽安立所取`能取所依自性,如前已說.
【論】이 가운데 누가 능히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깨달아 들어가는가?6) 대승에 대해서 많이 들은 훈습을 상속하고, 이미 세간에 출현하신 한량없는 부처님들을 받들어 모시고, 이미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이해를 얻어서, 이미 모든 선근을 잘 쌓았기 때문에 좋은 복과 지혜의 자량을 갖추게 된 보살이다.
017_0212_a_13L論曰:此中誰能悟入所應知相?大乘多聞熏習相續,已得逢事無量諸佛出現於世,已得一向決定勝解,已善積集諸善根故,善備福智資糧菩薩.
017_0212_b_01L【釋】작용[用]과 작용의 도구[用具]는 모두 작자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들어가는 자를 ‘누가 능히……깨달아 들어가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여 ‘대승에 대해서 많이 들은 훈습을 상속하고’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대승법에 의지하여 많이 들은 훈습을 일으켜서 상속하는 것이다.
‘이미 세간에 출현하신 한량없는 부처님들을 받들어 모시고’란, 이러한 상속에 말미암았기 때문에 현전에서 세간에 출현하신 모든 부처님들을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이해를 얻어서’란 부처님을 받들어 모셨기 때문에 대승법에 대해서 깊은 믿음과 이해를 내었으며 모든 나쁜 벗을 이끌어 유예(猶豫)하지 않도록 한다. 이와 같은 대승에 대한 많이 들음 등의 세 가지 인연7)에 말미암기 때문에 능히 잘 한량없는 선근을 적집하는 것이다. 이를 곧 ‘좋은 복과 지혜의 자량을 갖추게 된 보살’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212_a_17L釋曰:用及用具皆待作者.故問入者,誰能悟入?答此問言:大乘多聞熏習相續等,謂依大乘法,而起多聞熏習相續,已得逢事無量諸佛出現於世者,由此相續故,得現前逢事諸佛出現於世.已得一向決定勝解者,由逢事佛於大乘法深生信解,非諸惡友引令猶豫.由此大乘多聞等,三因緣故,能善積集無量善根,是則名爲善備福智資糧菩薩.
【論】어떤 곳으로 능히 들어가는가? 말하자면 즉 저 유견(有見)의 법과 흡사하고 대상과 흡사한 의언에서, 대승법의 양상과 똑같이 생겨나게 되는 승해행지(勝解行地)ㆍ견도(見道)ㆍ수도(修道)ㆍ구경도(究竟道)이다. 모든 법에 대해서 오직 식의 성품만이 있다고 들은 것에 따라서 뛰어나게 이해하기 때문이며, 이치 그대로 통달하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여의기 때문이다.
017_0212_b_04L論曰:何處能入?謂卽於彼有見似法似義意言,大乘法相等所生起勝解行地,見道`修道`究竟道中,於一切法,唯有識性,隨聞勝解故`如理通達故`治一切障故`離一切障故.
【釋】‘어떤 곳으로 능히 들어가는가?’란 들어가게 되는 경계[所入境]와 능히 들어가는 위치[能入位]를 묻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 유견의’ 등이란 말하자면 대승법의 양상에서 생겨난 결정적인 행상의 법과 흡사하고 대상과 흡사한 의언에서 능히 이것의 경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능히 들어간다는 것은 작용이며, 들어가게 되는 경계는 업(業)이며 지(持)이다.
이 의언에서 어떤 사람은 능히 들어가서 승해행지에 있으니, 모든 법의 유식성 중에서 단지 들은 바에 따라서 뛰어난 이해를 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능히 들어가 견도8) 중에 있으니, 이치 그대로 이 의언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치 그대로 통달하기 때문이며’란 말하자면 저것의 법이 아닌 것과 대상이 아닌 것을 통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취도 아니고 능취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능히 들어가 수도(修道)9) 가운데에 있으니, 이것을 말미암아서 번뇌장과 소지장을 다스리는 것을 수습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능히 들어가 구경위10)에 있으니, 가장 청정하여 모든 장애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가 능히 들어가는 위치인 것이다.
017_0212_b_09L釋曰:何處能入者,問所入境及能入位.謂卽於彼有見等者,謂於大乘法相所生,決定行相,似法似義意言,能入於此境界.能入是用,所入境界,是業是持.於此意言,或有能入,在勝解行地,於一切法,唯識性中,但隨聽聞,生勝解故.或有能入,在見道中,如理通達此意言故.此中如理而通達者,謂通達彼非法`非義,非所取非能取故.或有能入在修道中,由此修習對治煩惱`所知障故.或有能入在究竟道中,最極淸淨,離諸障故.如是四種是能入位.
017_0212_c_01L【論】무엇에 의해서 능히 들어가는가? 선근의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 가지 양상으로 마음을 연마하기 때문이며, 네 곳을 끊기 때문이며, 법과 대상의 경계를 반연하여 지관(止觀)을 닦고, 항상 그리고 은근하고 진중하게 가행하며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212_b_22L論曰:由何能入?由善根力所任持故,謂三種相,練磨心故`斷四處故`緣法義境止觀恒常慇重加行無放逸故.
【釋】‘무엇에 의해서 능히 들어가는가?’란 들어가는 원인을 묻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원인에 의해서 여기에 능히 들어가는가를 묻는 것이다.
‘선근의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란, 말하자면 비록 선근의 힘이 있으나 그 마음은 어떤 경우는 퇴굴(退屈)하기 때문에 ‘세 가지 양상으로 마음을 연마하기 때문이며’ 등이 라고 설하는 것이다.
017_0212_c_02L釋曰:由何能入者,此問入因,謂由何因於此能入.由善根力所任持故等者,謂雖有善根力,而心或退屈,故說三種相練磨心故等.
【論】한량없는 세계에 한량없는 인간유정이 찰나마다 무상정등보리를 증각(證覺)한다. 이를 첫째로 그 마음을 연마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요로 말미암아 능히 보시 등의 바라밀다를 행하고, “나는 이미 이와 같은 의요를 획득하고, 나는 이것에 말미암아 조그마한 공력으로써 보시 등의 바라밀다를 수습하면 마땅히 원만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이를 둘째로 그 마음을 연마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장애가 있는 선들을 성취하게 되면 목숨이 끝날 때 곧 사랑할 만한 모든 자체가 원만하게 생겨나서, “나에게 묘한 선[妙善]과 장애가 없는 선이 있는데, 어떻게 이때 모든 원만을 획득하지 못하겠는가”라고 한다. 이를 셋째로 그 마음을 연마한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12_c_06L論曰:無量諸世界,無量人有情,剎那剎那,證覺無上正等菩提,是爲第一練磨其心.由此意樂,能行施等波羅蜜多,我已獲得如是意樂,我由此故,少用功力,修習施等波羅蜜多,當得圓滿,是爲第二練磨其心.若有成就諸有障善,於命終時,卽便可愛一切自體圓滿而生.我有妙善無障㝵善,云何爾時,不當獲得一切圓滿,是名第三練磨其心.
017_0213_a_01L【釋】‘한량없는 세계’ 등이란 이 말은 처음에 연마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다른 예를 인용하여 이미 마음으로 하여금 더하고 치성하게 하여 퇴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요로 말미암아’란 둘째로 그 마음을 연마하는 것을 나타낸다.
‘나는 이미 이와 같은 의요를 획득하고’란 이 의요는 모든 계박을 여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의요는 인색함을 멀리 여의고, 욕심(欲尋)11)을 멀리 여의고, 에심(恚尋)12)을 멀리 여의고, 게으름[懈怠]를 멀리 여의고, 혼침과 수면을 멀리 여의고, 무명(無明)을 멀리 여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조그마한 공력으로써 보시 등의 바라밀다를 수습하면 마땅히 원만하게 될 것이다’란, 말하자면 이미 뛰어난 의요를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곧 능히 자기 마음대로 보시 등을 수행하여 속히 원만해진다.
‘만약 어떤 사람이……성취하게 되면’ 등이란 셋째로 그 마음을 연마하는 것을 나타낸다.
‘장애가 있는 선들’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세간의 선들을 성취하였지만 아직은 능히 다스려야 할 장애[所治障]를 영원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장애가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나에게 묘한 선이 있고’ 등이란 나는 능히 다스려야 할 장애를 영원히 끊고 장애가 없는 선에 의해서 그 선을 성취하였는데, 어찌하여 미래에 원만한 불과를 증득할 수 없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을 연마한다’란 마음을 책려하여 그 마음으로 하여금 맹리(猛利)하게 하고 퇴굴을 다스리는 것이다.
017_0212_c_16L釋曰:無量諸世界等者,此言顯示初練磨心,引他例已令心增盛,無有退屈.由此意樂者,顯示第二練磨其心.我已獲得如是意樂者,顯此意樂離諸弊縛,謂此意樂遠離慳悋`遠離欲尋`遠離恚尋`遠離懈怠`遠離惛沈及以睡眠`遠離無明.我由此故,少用功力,修習施等波羅蜜多,當得圓滿者,謂已獲得殊勝意樂,便能任運修行施等,速令圓滿.若有成就等者,顯示第三練磨其心.諸有障善者,謂有成就諸世閒善,未能永斷所治障故,說名有障.我有妙善等者,謂我能永斷所對治障,由無障善,而成其善,云何當來,而不證得圓滿佛果.練磨心者,謂策擧心,令其猛利,對治退屈.
【論】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213_a_09L論曰:此中有頌:

인간세계[人趣]의 모든 유정은
처소도 수량도 모두 한량없다네.
생각마다 등각(等覺)을 증득하기 때문에
마땅히 퇴굴하지 말아야 하네.
017_0213_a_10L人趣諸有情,
處數皆無量,
念念證等覺,
故不應退屈.

모든 청정한 마음의 의요를 가지고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하니
이와 같은 뛰어난 자[勝者]는 이미 얻었기 때문에
능히 보시 등을 닦네.
017_0213_a_12L諸淨心意樂,
能修行施等,
此勝者已得,
故能修施等.

착한 사람은 죽을 때에
좋아하는 것대로 스스로 원만해질 수 있나니
뛰어난 선[勝善]은 영원히 장애를 끊었는데
원만함이 어찌 없겠는가?
017_0213_a_13L善者於死時,
得隨樂自滿,
勝善由永斷,
圓滿云何無

【釋】다시 게송으로써 이와 같은 뜻을 섭수하는 것이다.
‘인간세계의 모든 유정’들 중에 그 마음에 겁이 많고 나약한 것을 퇴굴이라고 하는 것이다. 저 게송에서는 마음에 퇴굴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나는 무상정등보리를 증각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겁이 많고 나약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저 게송에서는 자신에게 공능이 없다고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굴함이 없다.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7_0213_a_14L釋曰:復以伽他,攝如是義.人趣諸有情等者,其心怯弱,名爲退屈,勸彼不應心生退屈.謂我不能證覺無上正等菩提,名心怯弱.今勸進彼不應於己謂無功能,故無退屈.如有頌言:

한량없는 시방의 모든 유정은
생각마다 선서(善逝)의 과를 이미 증득하였으니
저 사람이 이미 장부라면 나 또한 그러하니
스스로 가벼이 퇴굴하지 말라.
017_0213_a_19L無量十方諸有情,
念念已證善逝果,
彼旣丈夫我亦爾,
不應自輕而退屈.
017_0213_b_01L
‘모든 청정한 마음의 의요를 가지고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하니’란, 말하자면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의 마음을 가지고 보시 등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착한 마음만이 있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세간에서는 불선과 무기의 산란심 속에 있으면서 보시 등을 행하는 양 하니, 모든 소유와 재산의 지위를 바라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와 같지 않아서 오직 무상정등보리만을 구한다. ‘의요’라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능히 장애 없이 보시 등의 원인[因]을 닦는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뛰어난 자는 이미 얻었기 때문에 능히 보시 등을 닦네’에서는 모든 보살을 일러 뛰어난 자라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이러한 뛰어난 의요를 얻으면 이 보시 등의 바라밀다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전전하게 된다고 설한 것과 같이 닦기 때문에 ‘이미 얻었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할 것을 버리며 다스려져야 할 것을 버렸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功用]에 의하지 않고 그 보시 등에서 자유자재로 전전하는 것이다. ‘등’이란 계(戒) 내지 혜바라밀다(慧波羅蜜多)를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착한 사람은 죽을 때에’란 말하자면 세간의 선에 의해서 선을 성취하는 자도 목숨이 끝날 때에는 이라는 것이다.
017_0213_a_21L諸淨心意樂,能修行施等者,謂非不善及無記心,而行施等,唯是善心,故名淨心.如有世閒不善`無記散亂心中,亦行施等,希願諸有及財位故薩不爾,唯求無上正等菩提.言意樂者,謂能無㝵修施等因,如先已說.此勝者已得.故能修施等者,謂諸菩薩,名爲勝者,先已得此殊勝意樂,由此施等波羅蜜多,任運而轉,如說而修故名已得.由此決定捨所對治,捨所治故,不由功用,於其施等,任運而轉.等者,等取戒乃至慧波羅蜜多.善者於死時者,謂由世閒善而成善者,於命終時得.
‘좋아하는 것대로 스스로 원만해질 수 있네’란 말하자면 세간의 좋아하는 바에 따라서 스스로 과를 원만하게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아가 유정(有頂)에 태어나게 된다는 뜻이다.
‘뛰어난 선은 영원히 장애를 끊었는데’란 저 영원히 장애를 끊는 선에 의해서 선을 성취했다는 뜻이다.
‘원만함이 어찌 없겠는가’란 좋아하는 것대로 불과를 원만히 하는 것이 어찌 없겠는가라고 하는 뜻이다.
017_0213_b_12L隨樂自滿者,謂得世閒隨所愛樂自圓滿果,是乃至得有頂生義.勝善由永斷者,卽是由彼永斷障善而成善義.圓滿云何無者,是隨所樂圓滿佛果,云何無義.
【論】성문과 독각의 작의를 여의는 것에 의해서 작의를 끊기 때문이며, 대승에 관한 여러 의심에 대해 의심을 여의는 것에 의해서 능히 다른 견해[異慧]13)와 의심을 영원히 끊기 때문이며, 듣고 생각한 법에서 나[我]ㆍ나의 것[我所]이라는 집착을 여의는 것에 의하여 법집(法執)을 끊기 때문이다. 현전에서 현재 머무르고 안립하는 모든 양상에 대해 작의하는 바 없고 분별하는 바 없음에 의해서 분별을 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213_b_16L論曰:由離聲聞`獨覺作意,斷作意故由於大乘諸疑,離疑以能永斷異慧疑故由離所聞`所思法中,我`我所執,斷法執故由於現前現住,安立一切相中,無所作意,無所分別,斷分別故.此中有頌:

현전에 자연히 머물며
안립하는 모든 양상을
지혜 있는 이는 분별하지 않으므로
최상의 보리를 얻네.
017_0213_b_22L現前自然住,
安立一切相,
智者不分別,
得最上菩提.
017_0213_c_01L
【釋】지금부터 네 곳을 끊어 제거하는 것을 나타내겠다.
‘작의를 끊기 때문이며’란 2승(乘)의 분별하는 작의를 끊어 제거한다는 것이다.
‘능히 다른 견해와 의심을 끊기 때문이며’란 매우 깊고 방대한 대승에 대해서 다른 견해의 전도와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집을 끊기 때문이다’란 듣고 생각한 법에 대해서 능히 아(我)와 아소(我所)의 집착을 영원히 끊어 제거한다는 것이다. 나는 능히 들을 수 있고, 나는 능히 생각할 수 있으니, 내가 들은 것이 문장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집착은 모두 다 없어지게 된다. 그 뛰어난 대상[勝義]에 대해서 현관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017_0213_c_01L釋曰:今當顯示斷除四處.斷作意故者,斷除二乘分別作意.以能永斷異慧疑故者,謂於大乘甚深廣大,不起異慧顚倒及疑.斷法執故者,謂於所聞`所思法中,能永斷除我`我所執,謂我能聞`我能思覺`我所聽文`我所思義,如是執著一切皆無,於其勝義,證現觀故.
‘분별을 끊기 때문이다’란 현전에서 자유자재로 전전하는 색 등이 현재 머무르고 공용을 짓는 것14)과 모든 골쇄(骨鎖)15) 등 깨끗한 선정이 안립한 모든 인식대상의 경계의 모습에 대한 작의 분별을 모두 다 능히 영원히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불보살의 바라밀다는 이와 같은 등의 모습과 집착 분별을 모두 다 능히 영원히 여읜다. 저 게송의 뜻은 분명하므로 거듭 해석할 필요가 없다.
017_0213_c_09L斷分別故者,謂於現前,任運而轉色等,現住及作功用,諸骨鎖等淨定安立一切所緣諸境界相,作意分別,悉能永斷,乃至一切諸佛菩薩,波羅蜜多,如是等相,執著分別,悉能永離.其頌義顯,不須重釋.
【論】무엇에 의해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16)
【釋】여기에서는 짓는 도구[作具]와 짓는 것[所作]을 쌍으로 묻는 것이다. 짓는 자[作者]가 있기 때문에 짓는 행위[業]에 들어간다. 반드시 능히 들어가는 도구가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현관하는 모습[相]은 짓는 것의 현상이다. 반드시 이러이러한 짓는 것의 방편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두 가지 모두를 해석하겠다.
【論】들어서 훈습되는[聞熏習] 종류에 의하고 이치대로의 작의에 섭수되는 법과 흡사하고 대상과 흡사한 유견의 의언(意言)17)이다.
【釋】여기에서는 먼저 능히 들어가는 도구18)를 분별한다. 종류라는 것은 곧 원인으로서의 언설이며 이것은 원인의 뜻이다.
017_0213_c_14L論曰:由何云何而得悟入?釋曰:此中雙問作具`所作.由有作者,入所作業,應知定有能入之具.自現觀相是所作事,決定應有如是如是所作方便.是故今當二俱解釋.論曰:由聞熏習種類,如理作意,所攝似法`似義有見意言.釋曰:此中先辨能入之具種類之聲,卽因言說,是爲因義.
017_0214_a_01L【論】네 가지 사색[尋思]에 의하니,19) 말하자면 명칭[名]과 대상[義]과 자성과 차별에서 짐짓 세워진 사색에 의한다. 그리고 네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지혜[如實遍智]에 의하니,20) 말하자면 명칭과 사물[事]와 자성과 차별에서 짐짓 세워진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지혜에 의한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여실하게 유식에 들어가기 위해서 부지런히 닦고 가행함으로써 곧 문자와 흡사하고 대상과 흡사한 의언(意言)에 대해서 문자[文]와 명칭[名]은 단지 의언일 뿐이라고 추구하고, 이 문자와 명칭에 의지한 대상도 역시 의언일 뿐이라고 추구한다. 명칭과 대상과 자성과 차별은 오직 짐짓 세워진 것이라고 추구한다. 만약 이때 오직 의언만 있다고 증득할 때에는 명칭이나 대상의 자성과 차별은 모두 짐짓 세워진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자성과 차별에는 대상의 양상이 없기 때문에 동일하게 얻을 수 없다.
네 가지 사색에 의하고, 또 네 종류의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지혜에 의해서, 이와 같은 문자에 흡사하고 대상에 흡사한 의언에 대해서 곧 능히 오직 식만이 있는 성품이라고 깨달아 들어간다.
017_0213_c_23L論曰:由四尋思,謂由名義自性差別假立尋思,及由四種如實遍智,謂由名事自性差別假立如實遍智,如是皆同不可得故.以諸菩薩,如是如實爲入唯識勤修加行,卽於似文似義意言,推求文名,唯是意言,推求依此文名之義,亦唯意言,推求名義自性差別,唯是假立.若時證得唯有意言,爾時,證知若名`若義自性差別,皆是假立,自性差別義相無故,同不可得.由四尋思,及由四種如實遍智,於此似文似義意言,便能悟入唯有識性.
【釋】‘네 가지 사색에 의하고’와 ‘네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지혜에 의한다’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도구에 의지하여 여실하게 짓는 방편을 일으키는 것이다. 가행(加行)할 때에 작용의 견해[行見]인 짐짓 있으며 실제로는 없다라는 방편의 원인의 모습[因相]을 추구하는 것을 ‘사색’이라고 설한다. 짐짓 있으며 실제로는 없음을 요지하여 작용의 지혜[行智]인 방편의 결과의 모습[方便果相]을 결정적으로 얻는 것을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지혜라고 한다.
017_0214_a_12L釋曰:由四尋思,及由四種如實遍智者,依如先說,能悟入具發起如實所作方便,於加行時,推求行見假有實無方便因相,說名尋思,了知假有實無所得決定行智,方便果相,名如實智.
017_0214_b_01L여기에서 ‘명칭(名)21)’이란 말하자면 색(色)ㆍ수(受) 등이며, 또한 명칭(名)의 원인과 명칭의 결과인 문구[句] 등의 사색을 포함한다. 이 명칭은 오직 의언의 성품만이 있고 단지 짐짓 있는 것이며 실제가 아니다. 의언을 여의지 않는 것을 명칭의 사색이라고 한다. 대상의 사색이란 명칭[名身] 등이 나타내는 대상과 같이 온(蘊)ㆍ처(處)ㆍ계(界) 등을 얻는 것이다. 이 성품을 추구하면 오직 짐짓 있을 뿐이며 실제가 아니다. 종류와 종류의 상응에서 차별을 가히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소전과 능전의 상응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자[文]와 명칭[名]에 의지한 대상도 역시 의언일 뿐이라고 추구한다’란 명칭에 의지하여 표현된 바깥의 사물은 오직 의언의 성품이라고 사색하며, 이 대상은 바깥의 모습과 흡사하게 전전하여도 실제로는 오직 안에 있다고 사유하는 것이다.
017_0214_a_18L此中名者,謂色受等,亦攝名因名果句等,尋思此名唯意言性`唯假非實,不離意言名名尋思.義尋思者,如名身等所詮表,得薀`界`處等,推求此性,唯假非實.如有種類種類相應,差別可得,如是所詮`能詮相應,不應理故.推求依此文名之義,亦唯意言者,尋思依名所表外事,唯意言性,思惟此義似外相轉,實唯在內.
‘명칭과 대상과 자성과 차별은 오직 짐짓 세워진 것이라고 추구한다’란 명칭과 대상의 두 가지 자성은 오직 짐짓 세워진 모습이라고 사색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색ㆍ수 등에 명칭과 대상의 차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도 짐짓 자성을 세운다. 비유하면 짐짓 보특가라(補特伽羅)를 세우는 것과 같다. 명칭과 대상의 두 가지의 차별도 또한 짐짓 세워진 모습이라고 사색한다. 말하자면 무상(無常) 등의 명칭과 대상의 차별은 오직 짐짓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명칭과 대상과 자성과 차별은 오직 짐짓 세워진 것’이란 네 가지는 허망에서 현현하고 의타기(依他起)에 포섭됨을 깨달아야 안다.
017_0214_b_03L推求名義自性差別,唯是假立者,尋思名義二種自性,唯假立相,謂色受等名義自性,實無所有假立自性,譬如假立補特伽羅,尋思名義二種差別,亦假立相,謂無常等名義差別,唯假立故.若名若義自性差別,皆是假立者,證知四種虛妄顯現依他起攝
‘자성과 차별에는 대상의 양상이 없기 때문에 동일하게 얻을 수 없다’란 네 가지는 두루 계탁하여 집착한 것으로써 모두 얻을 수 없음을 요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네 가지의 방편을 사색[尋思]이라고 설명하고, 네 가지 과지(果智)를 네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지혜라고 설명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명칭은 단지 짐짓 세워진 것으로서 실제로는 얻을 수 없다고 추구하는 것을 심사(尋思)라고 설명하며, 만약 곧 여기에서 과지가 생겨날 때 반드시 짐짓 있고 실제로는 없다고 요지하는 것을 여실지(如實智)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事]의 자성과 차별에서 짐짓 있으며 실제로는 없음을 추구하고 결정적으로 설하는 것도 마땅히 이와 같다.
017_0214_b_10L自性差別義相無故.同不可得者,了達四種遍計執義,皆不可得.應知此中四種方便說,名尋思,四種果智說,名四種如實遍智.謂推求名唯是假立,實不可得說名尋思,若卽於此果智生時,決定了知假有實無名如實智.如是於事自性差別,假有實無,推求決定說亦應爾.
017_0214_c_01L【論】이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데에 있어, 어느 곳으로 깨달아 들어가는가?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가? 유식성과 상분[相]ㆍ견분[見]의 두 성품과 갖가지 성품에 깨달아 들어간다. 명칭이나 대상 그리고 자성과 차별, 가유(假有)의 자성 및 차별의 대상,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도리는 모두 없기 때문에, 소취와 능취의 성품이 현전하기 때문에, 일시에 현재 갖가지 양상과 대상이 흡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새끼줄이 뱀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과 같다. 비유하면 새끼줄 위의 뱀은 진실이 아닌 것과 같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저 대상이 없다고 요지하면 뱀이라고 하는 지각은 멸할지라도 새끼줄이라는 지각은 여전히 남는다. 만약 미세한 품류로써 분석하면 이것 또한 허망이다. 왜냐하면 색깔과 냄새와 맛과 촉감이 그것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각에 의거하게 되면 새끼줄이라는 지각도 멸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저 문자와 흡사하고 대상과 흡사한 여섯 가지 양상의 의언에 대해서 실제가 아닌 여섯 가지 양상의 대상을 제거할 때에, 유식성이라는 지각도 마치 뱀에 대한 지각의 경우와 같이 또한 제거되어야 한다. 원성실자성의 지각에 의하기 때문이다.
017_0214_b_18L論曰:於此悟入唯識性中,何所悟入?如何悟入?入唯識性,相見二性,及種種性,若名`若義`自性`差別假`自性差別義,如是六種義皆無故`所取能取性現前故`一時現似種種相義而生起故,如闇中繩顯現似蛇.譬如繩上蛇非眞實,以無有故.若已了知彼義無者,蛇覺雖滅,繩覺猶在.若以微細品類分析,此又虛妄,色`香`味`觸爲其相故,此覺爲依繩覺當滅.如是於彼似文似義六相意言,伏除非實六相義時,唯識性覺,猶如蛇覺,亦當除遣,由圓成實自性覺故.
【釋】이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데에 들어가는 대상[所入]과 들어가는 비유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다. 만약 대상이 없다면 이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데에 어떤 곳으로 들어가는가? 이러한 뜻은 힐난하는 말이다. 이 유식성은 곧 그 대상이다. 어떻게 대상이 없다고 하는가? 이러한 힐난을 차단하기 위해서 먼저 유식성에 들어간다고 설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식의 대상 또한 대상이 없는 성품이다. 오직 바깥의 대상만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대상이 없는 성품이라면 어떻게 12처(處)의 가르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세간에 대상이 있다고 말하는가? 이러한 비난을 차단하기 위해서 다음에 상분(相)ㆍ견분(見)의 두 가지 성품을 설하는 것이다. 실제의 대상은 없지만 식은 내외의 두 가지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한다. 왜냐하면 아득한 옛적부터 언설의 훈습력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017_0214_c_08L釋曰:於此悟入唯識性中,欲顯所入及入譬喩,故爲此問.若義無有,於此悟入唯識性中,爲何所入?此意難言:此唯識性,卽是其義,云何義無?爲遮此難,故先說言,入唯識性.謂此識義,亦無義性,非唯外義,是無所有.若無義性,云何得有十二處教?云何世閒有義言說?爲遮此難,故次說言,相`見二性,雖無實義,識似內外,二義顯現,無始言說,熏習力故,
017_0215_a_01L식은 대상과 흡사하게 전전하며 요별과 흡사하게 작용하는 것을 견분[見]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상분[相]과 흡사하게, 견분[見]과 흡사하게 깨달아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다. 식과 다른 종류는 이와 같지 않은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갖가지 성으로 깨달아 들어간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직 하나의 식의 소취와 능취의 성품의 차별로 인해 한 시간에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또한 하나의 식에 세 가지 모습과 흡사하게 현현한다. 소취ㆍ능취ㆍ자증분(自證分)을 세 가지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세 가지 모습은 하나의 식의 대상 부분으로서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다른 곳에서 분별하는 것과 같다.
017_0214_c_18L識似義轉似了別用說名爲見,故不相違.爲唯悟入似相`似見,識別種類,爲不爾耶?爲答此問,故說悟入及種種性,謂唯一識,所取`能取性差別故,於一時閒分爲二種.又於一識,似三相現,所取`能取及自證分,名爲三相.如是三相,一識義分,非一非異,如餘處辨.
하나의 식 위에서 많은 모습이 현현하므로 ‘갖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명칭 등의 여섯 가지 모습은 대상 등이 존재하지 않으니 앞에서 세 가지 종류를 해석하였다.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가?’라고 하는 앞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다시 ‘어둠 속에서 새끼줄이 뱀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과 같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로 말미암아 3종자성을 성립하여 통달시키는 것이다. 비유하면 새끼줄에 대해서 뱀과 같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은 명칭과 흡사하고, 대상과 흡사한 의언이다. 의타기에 대한 명칭 등의 여섯 가지22)는 변계소집이며 또한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서 새끼줄에 의지하여 뱀이라고 하는 지각을 버리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유식이 현현하는 의타기의 지각에 의지하여 여섯 가지 대상에 대한 변계소집의 지각을 버린다. 색 등의 세분한 지각에 의지하여 새끼줄이라는 지각을 제거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원성실의 지각에 의지하여 의타기의 미혹한 지각을 없앤다. 다음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7_0215_a_02L於一識上,有多相現,故名種種.名等六相,無有義等,釋前三種.爲答前問,如何悟入,故復說言,如闇中繩顯現似蛇,由此譬喩成立通達三種自性.譬如繩上蛇非眞實,以無有故.如是似名似義意言,依他起上名等六種遍計所執,亦非眞實,以無有故.又於此中,如依繩覺,捨於蛇覺,如是依止唯識顯現依他起覺,捨於六義遍計執覺.如依色等細分之覺,除遣繩覺,如是依止圓成實覺,遣依他起迷亂之覺.如有頌言:

새끼줄에 대해서 뱀이라고 말하는 지혜는
새끼줄을 보면 대상이 없다고 안다네.
저 부분을 깨달아 볼[證見] 때에
뱀과 같다고 하는 지혜에 미혹함이 있음을 아네.
017_0215_a_14L於繩謂蛇智,
見繩了義無,
證見彼分時,
知如蛇智亂.

‘실제가 아닌 여섯 가지 양상의 대상을 제거할 때’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섯 가지
실재하지 않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음을 양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017_0215_a_16L伏除非實六相義時者,是非有義,六種非實義非有爲相故.
017_0215_b_01L【論】이와 같이 보살은 의언의 대상과 흡사한 양상에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변계소집성에 깨달아 들어간다.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간다. 어떻게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가? 만약 의언인 법을 들어서 훈습한 종류의 유식의 표상[想]을 제거하면, 이때 보살은 이미 대상의 표상[義想]을 없애고, 모든 대상과 흡사한 것이 생겨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오직 식과 흡사한 것 또한 생겨날 수 없다.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모든 대상에 대해서 명칭의 분별이 없이 머무르고, 법계 중에서 곧 현전에 보는 것[現見]과 상응하여 머무르게 된다. 이때 보살에게는 평등하고 평등한 인식대상[所緣]과 인식주체[能緣]의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생기하게 된다. 이것에 의해서 보살을 이미 원성실성
(圓成實性)에 깨달아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15_a_18L論曰:如是菩薩,悟入意言似義相故,悟入遍計所執性悟入唯識故,悟入依他起性.云何悟入圓成實性?若已滅除意言聞法熏習種類唯識之想,爾時菩薩已遣義想,一切似義無容得生,故似唯識亦不得生.由是因緣,住一切義無分別名,於法界中,便得現見相應而住.爾時菩薩,平等平等所緣能緣無分別智,已得生起,由此菩薩,名已悟入圓成實性.
【釋】‘의언의 대상과 흡사한 양상에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변계소집성에 깨달아 들어간다’란, 말하자면 의언의 대상에 흡사한 양상이 나타나도 변계소집에서는 실제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요지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미암기 때문에 변계소집 자성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다.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간다’란, 말하자면 유식은 없다고 확실히 이해하기 때문에 대상이 없는 것에서 대상과 흡사한 양상이 현현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안다. 이것에 의해서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간다.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이미 대상의 표상을 없애고’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이는 이미 대상의 표상의 대상을 능히 제거하는 것이다.
017_0215_b_05L釋曰:悟入意言似義相故,悟入遍計所執性者,謂了知意言似義相現,無有遍計所執實義,由此故名悟入遍計所執自性.悟入唯識故,悟入依他起性者,謂了知唯識無明解故,於無義中,似義相現,由此悟入依他起性.爲顯悟入圓成實性,故復說言,已遣義想,卽是已能除義想義.
‘모든 대상과 흡사한 것이 생겨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란 즉 능히 대상과 흡사한 것[能似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뜻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오직 식과 흡사한 것 또한 생겨날 수 없다’란 소취가 없기 때문에 능취 또한 없으니, 즉 유식으로 이루어진 대상 또한 전전하지 않는 대상이다.
‘모든 대상에 대해서 명칭의 분별이 없이 머무르고’에서 모든 법은 계경 등이며 명칭이 의지하여 작용하는 곳을 ‘모든 대상’이라고 한다. 명칭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앞의 아홉 가지 명칭에는 분별하는 것이 있다. 그 열 번째 명칭에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 분별하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이 모든 대상에 대해서 명칭의 분별이 없음에 안주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단지 그 명칭만이 있다고 설하는 것과 같이, 즉 이와 같이 명칭은 능히 모든 것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명칭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식 등을 짐짓 명칭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017_0215_b_13L一切似義無容得生者,卽是都無有能似義而生起義.故似唯識,亦不得生者,所取無故,能取亦無,卽是唯識所成之義,亦不轉義.住一切義無分別名者,謂一切法,是契經等,名所依行處,名一切義.名有十種,前九種名有所分別,其第十名,於一切義,無所分別.安住如是於一切義無分別名,如說一切唯有其名.卽如是名.能起一切者,此中似名顯現識等,假說爲名.
017_0215_c_01L‘법계 중에서 곧 현전에 보는 것[現見]과 상응하여 머무르게 된다’란 말하자면 법계에 내증(內證)과 상응하여 뛰어난 이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평등하고 평등
한’이란 말하자면 인식대상[所緣]이 모두 다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인식주체[能緣]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연과 능연의 두 가지는 평등하고 평등한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보살을 이미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다’란, 변계소집자성에 깨달아 들어가도 의타기성은 남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짓는 자[作者]가 있어서 작용이 아직 쉬지 않으면 단지 깨달아 들어간다고만 하고, 지금 여기에서 작자와 작용이 쉬고 멸하여 구경(究竟)하면 ‘이미 깨달아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15_b_23L於法界中,便得現見相應,而住者,謂於法界,內證相應,而起勝解.平等平等者,謂如所緣都無所有,如是能緣,亦無所有,是故所緣`能緣二種,平等平等.由此菩薩名已悟入圓成實性者,悟入遍計所執自性,依他起性,是有餘故,猶有作者,作用未息,但名悟入.今於此中,作者作用息滅究竟,名已悟入.
【論】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215_c_08L論曰:此中有頌:

법과 보특가라와
법과 대상과 간략함과 자세함과 성품과
깨끗하지 못함과 깨끗함과 구경은
명칭이 행해지는 차별이라네.
017_0215_c_09L法補特伽羅,
法義略廣性,
不淨淨究竟,
名所行差別.

【釋】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모든 대상에 대한 명칭의 분별없음에 안주하는 것은 지금 게송으로써 이 명칭 스스로의 경계 차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처음의 ‘법’이라는 명칭은 색ㆍ수 등을 말하는 것이다.
‘보특가라’의 명칭은 천수(天授)23) 등과 수신행(隨信行)24) 등의 불교의 명칭을 지칭한다.
뒤에 있는 ‘법’의 명칭은 계경과 응송(應頌) 등을 지칭한다.
‘대상’의 명칭은 위25)에서와 같이 드러낸바 부모를 살해하고 국가를 치고 수행(隨行) 등을 지칭한다.
017_0215_c_11L釋曰:如前所說,住一切義無分別名,今以伽他,顯示此名自境差別.初法名者,謂色受等.補特伽羅名者,謂天授等`隨信行等,佛教中名.後法名者,謂契經`應頌等.義名者,謂此所詮,殺害於父母`誅國及隨行等.
‘간략함’의 명칭은 일체법은 모두 무아이다 등을 지칭한다.
‘자세함’의 명칭은 색ㆍ무아 등을 지칭한다.
‘성품’의 명칭은 아(阿)26) 등의 글자들을 지칭하니, 이것은 글귀[詞句]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깨끗하지 못함’의 명칭이란 모든 이생(異生)27)을 지칭하니, 모든 번뇌와 더러움에 오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끗함’의 명칭이란 모든 현성(賢聖)을 가리키니, 번뇌와 더러움을 영원히 끊었기 때문이다.
‘구경’의 명칭은 모든 소연을 지칭한다. 즉 반야바라밀다와 10지 등을 말하니, 총체적인 것과 간략한 대상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017_0215_c_17L略名者,謂一切法,皆無我等.廣名者,謂色無我等.性名者,謂阿等諸字,是詞句因故.不淨名者,謂諸異生,爲諸煩惱垢所染故.淨名者,謂諸賢聖,垢永斷故.究竟名者,謂摠所緣,卽般若波羅蜜多,及十地等,以摠略義,爲所緣故.
017_0216_a_01L【論】이와 같이 보살은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깨달아 들어간다. 이것에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극희지(極喜地)28)에 들어가고, 법계를 잘 통달하고,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고 모든 유정과 평등한 심성을 얻으며, 모든 보살과 평등한 심성을 얻으며,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심성을 얻으니, 이것을 곧 보살의 견도(見道)라고 이름한다.
017_0215_c_23L論曰:如是菩薩,悟入唯識性故,悟入所知相.悟入此故,入極喜地,善達法界,生如來家,得一切有情平等心性,得一切菩薩平等心性,得一切佛平等心性,此卽名爲菩薩見道.
【釋】‘법계를 잘 통달하고’란 이 법계에 대해서 깊게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고’란 말하자면 부처님의 법계를 여래의 가문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증회(證會)하기 때문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소연에서 뛰어난 지혜가 생기기 때문이며, 먼저의 의지처를 바꾸어 나머지 의지를 생하기 때문이며, 불종(佛種)간을 이어서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속생(續生)29)의 나머지 중동분(衆同分)30)은 생겨나는 대상과 생겨나는 주체가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는다. 태어나는 대상인 가문에 의탁하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에서 부처님의 법계를 중득하는 것을 ‘거기에서 태어난다’라고 이름하고, 진정한 불자라고 이름한다. 이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부처님의 법계에서 능히 바르게 증득하고 스스로의 상속을 심어서 자재하게 현전하기 때문에 ‘태어난다’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7_0216_a_05L釋曰:善達法界者,於此法界,深作證故.生如來家者,謂佛法界,名如來家,於此證會,故名爲生,於此所緣,勝智生故,轉先所依,生餘依故,紹繼佛種,令不斷絕.如餘續生,餘衆同分,所生`能生相續不斷,託所生家,如是般若波羅蜜多,證佛法界,名於中生`名眞佛子.由此般若波羅蜜多,於佛法界,能正作證,樹自相續自在現前故,名爲生.如有說言:

모든 웅장함과 맹리(猛利)함을 가지고
남을 이롭게 하기를 즐기는 사람은
생모(生母)와 양모(養母)에 의해서
태어나게 되고 길러지네.
017_0216_a_15L一切雄猛,
樂利他者,
生母養母,
所生所育.

‘모든 유정과 평등한 심성을 얻으며’라고 하는 것은 두루 모든 것과 동등한 무아를 보기 때문이다. 어떤 설에서 “일체의 제법은 모두 여래장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것들이다.
‘모든 보살과 평등한 심성을 얻으며’라고 하는 것은 저 의요와 평등한 성을 얻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심성을 얻으니’라고 하는 것은 저 법신과 평등한 성품을 얻기 때문이다.
‘이것을 곧 보살의 견도라고 이름한다’란 앞서 미처 보지 못한 뛰어난 법계를 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성문과 독각의 견도(見道)31)와 같다.
017_0216_a_17L得一切有情平等心性者,遍見一切等無我故.如有說言:一切諸法,皆如來藏,如是等.得一切菩薩平等心性者,得彼意樂平等性故.得一切佛平等心性者,得彼法身平等性故.此卽名爲菩薩見道者,見先未見勝法界故,譬如聲聞`獨覺見道.
017_0216_b_01L【論】또한 어떤 대상으로 인하여 유식성으로 들어가는가? 총체적인 법[總法]을 반연하는 출세간의 지관(止觀)의 지혜에 의하기 때문이며, 이 후득(後得)의 갖가지 양상의 식[相識]의 지혜에 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가지 양상[三相]을 갖춘 아뢰야식의 모든 양상32)의 종자를 끊기 위해서, 능히 법신에 감촉하는 종자를 증장시키기 위해서, 의지처를 전환하기 위해서, 모든 불법을 증득하기 위해서,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위해서 유식성에 들어간다. 또한 후득지(後得智)는 모든 아뢰야식이 일으키는 모든 요별과 양상 중에서 환(幻) 등의 성품과 같다고 전도됨이 없이 전변함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비유하면 마술가가 마술로 빚어낸 사물과 같이 모든 양상 중에서 그리고 인과를 설하는 중에서 항상 전도됨이 없다.
017_0216_b_01L論曰:復次爲何義故,入唯識性?由緣摠法出世止觀智故`由此後得種種相識智故,爲斷及相阿賴耶識諸相種子`爲長能觸法身種子`爲轉所依`爲欲證得一切佛法`爲欲證得一切智智,入唯識性.又後得智,於一切阿賴耶識,所生一切了別相中,見如幻等性,無倒轉.是故菩薩,譬如幻師,於所幻事,於諸相中,及說因果,常無顚倒.
【釋】‘또한 어떤 대상으로 인하여’ 등이란 유식에 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것을 묻는 것이다. 다음에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위해서라고 마땅히 대답해야 하는데도 먼저 방편으로써 설하게 되는 것은, 다음의 말을 나타내고자 그리고 이와 같은 교화될 대상의 부류를 유익하고 섭수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총체적인 법을 반연하는’이란 모든 법의 총상(總相)이 현현하는 진여를 반연하여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승의 가르침에서 설한 일체의 법은 모두 진여를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진여를 반연하는 것은 곧 모든 법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무분별지 또한 마땅히 생겨나지 않게 된다.
017_0216_b_10L釋曰:復次爲何義故等者,問入唯識所須.次應答言,爲欲證得一切智智,而先方便,如所說者,爲欲開示次第言故`爲欲饒益堪受如是所化類故.由緣摠法者,緣一切法摠相,所顯眞如爲境,謂大乘教中,所說一切法,皆眞如爲性故.緣眞如,卽是解了一切法性,若不爾者,雖經多時,無分別智,亦應不生.
017_0216_c_01L‘출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루이기 때문이며 무분별이기 때문이다.
‘지관의 지혜에 의하기 때문이며’란 전도가 없는 삼마희다(三摩呬多)33)의 지혜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갖가지 양상의 식’이란 말하자면 제법의 인성(因性)과 과성(果性)을 안립하는 유상(有上)ㆍ무상(無上) 등으로서, 즉 소취와 능취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세 가지 양상[三相]을 갖춘 아뢰야식의 모든 양상의 종자를 끊기 위해서’란 아뢰야식 중에 색과 흡사한 양상인 모든 법종자와 능훈(能薰)의 양상을 끊기 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종자의 인과(因果)를 끊는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능히 법신에 감촉하는 종자를 증장시키기 위해서’란 모든 대승의 많이 들음의 훈습을 증장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 얻은 법신으로 인하기 때문이다.
017_0216_b_19L言出世者,是無漏故`無分別故.止觀智故者,由三摩呬多無顚倒智故.種種相識者,謂安立諸法因性果性`有上無上等,卽是所取`能取分義.爲斷及相阿賴耶識諸相種子者,爲斷阿賴耶識中似色等相諸法種子及能熏相,此卽說斷種子因果.爲長能觸法身種子者,爲欲增長一切大乘多聞熏習,由此爲先得法身故.
‘의지처를 전환하기 위해서’란 진여를 통달하는 것이다. 모든 심과 심법에 더러움[垢]의 여읨이 생기기 때문이며, 혹은 다시 진여는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을 증득하기 위해서’란 역(力)ㆍ무외(無畏) 등 모든 불법을 일으키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일체지지를 증득하기 위해서’란 무구무애(無垢無礙)의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또한 후득지’란 후득지의 모든 작용을 나타낸 것이다.
‘모든 아뢰야식이 일으키는’이란 이것은 일으키는 것[所生]을 들어 그 원인을 취하는 것이다.
‘모든 요별의 양상 중에서’란 이것은 그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즉 능취와 소취분 중에 있다.
017_0216_c_05L爲轉所依者,通達眞如,諸心`心法,離垢生故,或復眞如,善淸淨故.爲欲證得一切佛法者,爲欲生起力無畏等諸佛法故.爲欲證得一切智智者,爲欲證得無垢無㝵諸佛智故.又後得智者,顯後得智有所作用.於一切阿賴耶識所生者,此擧所生,爲取其因.一切了別相中者,此顯其果,卽是能取`所取分中.
‘환 등의 성품과 같다고 전도됨 없이 전변함을 보는 것이다’란 여실하게 의타기성을 관견(觀見)하는 데에 환의 현상과 같은 미혹됨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술가가 마술로 빚어낸 사물과 같이’란 초목 등의 환혹(幻惑)34)의 원인 중에서 전도함이 없이 여실하게 보기 때문이며, 코끼리ㆍ말 등의 환혹의 양상에서도 또한 전도 없이 여실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실을 보는 보살은 여실하게 소취와 능취의 자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현전에 보고, 원성실성을 이미 일으켜서 후득에서 능히 말을 하며, 세속의 깨끗한 지혜에서 인과의 시간과 설법의 시간을 알아서 항상 전도됨이 없다. 그 법을 듣는 자에게는 비록 전도됨이 있을지라도 들음의 훈습[聞薰習]의 훈습된 양상[熏相]을 상속하기 때문에 다음에 점차 전도가 없음을 얻는다. 저것은 마땅히 지어야 할 바를 성취하였기 때문이며, 이 후득지 또한 차별이 없고 염오가 없기 때문이다.
017_0216_c_13L見如幻等性,無倒轉者,如實觀見依他起性如幻事等,無迷亂故.譬如幻師,於所幻事者,於草木等幻惑因中,無有顚倒,如實見故於象馬等幻惑相中,亦無顚倒,如實見故.如是菩薩,見眞實者,如實現見無有所取`能取自性圓成實已,起於後得,能發語言世俗淨智,知因果時及說法時,常無顚倒.其聽聞者,雖有顚倒,而聞熏習熏相續故,次第漸漸得無顚倒.由彼成辦所應作故,此後得智,亦無差別,無染污故.
017_0217_a_01L【論】이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갈 때에 네 가지 삼마지가 있다. 이것은 네 가지 순결택분(順決擇分)35)의 의지이다.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네 가지 사색[四尋思]에 의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품(下品)의 대상 없는[無義] 인(忍) 중에서 명득삼마지(名得三摩地)36)가 있으며 이것은 난위(煖位)37)의 순결택분[煖順決擇分]의 의지이다. 상품(上品)의 대상없는 인(忍) 중에는 명증삼마지(明增三摩地)38)가 있으며 이것은 정위(頂位)39)의 순결택분[頂順決擇分]의 의지이다.
017_0217_a_01L論曰:於此悟入唯識性時,有四種三摩地,是四種順決擇分依止,云何應知?應知由四尋思,於下品無義忍中,有明得三摩地,是煖順決擇分依止.於上品無義忍中,有明增三摩地,是頂順決擇分依止.
다시 네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지혜[如實遍知]에 의해서 유식에 들어간다. 대상이 없음에 대해서 이미 결정을 얻고 진실한 대상[眞儀]40)의 일부분으로 들어가는 삼마지가 있다. 이것은 진리[諦]로서 순인(順忍)41)의 의지이다. 이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유식의 표상[想]을 없애는 무간삼마지(無間三摩地)가 있으며, 이것은 세제일법(世第一法)42)의 의지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삼마지는 현관43)의 궁극[邊]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17_a_07L復由四種如實遍智,已入唯識,於無義中,已得決定,有入眞義一分三摩地,是諦順忍依止.從此無閒,伏唯識想,有無閒三摩地,是世第一法依止.應知如是諸三摩地:是現觀邊.
【釋】모든 곳에서 현관에 들어갈 때 모두 네 가지 순결택분이 있으니, 이것은 앞의 양상[前相]이기 때문이다. 현관은 이미 드러내었기 때문에 거듭 해석하지 않는다.
‘네 가지 사색에 의함을’이란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명칭과 대상과 자성과 차별을 추구하여 짐짓 세우는 것을 자체로 하는 것이다.
‘하품의 대상 없는 인(忍) 중에서’란 말하자면 하품의 각혜(覺慧)와 애락(愛樂)에 있어서 모든 대상은 모두 다 없는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
‘명(明)’이란 능히 대상이 없음을 비추는 지혜[智]를 말한다.
‘득’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구하는 결과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定)은 처음으로 대상 없음의 지명(智明)을 얻기 때문에 명득삼마지라는 명칭을 얻는 것이다. 비유하면 최초에 불 등을 구하여 얻는 것과 같다.
017_0217_a_12L釋曰:於一切處,入現觀時,皆有四種順決擇分,是前相故.現觀已顯,故不重釋.由四尋思者,謂如前說,推求名義自性差別假立爲體.於下品無義忍中者,謂於下品覺慧愛樂,諸義無所有中.明謂能照無有義智,所求果遂,故名爲得.此定創得無義智明,故得明得三摩地名,譬如最初求得火等.
017_0217_b_01L‘난’이란 즉 난품(煖品)의 선근이다. 비유하면 불을 끌어서 따뜻함을 앞의 양상[前相]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이와 같아 진지(眞智)의 앞의 양상이다.
‘의지’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원인의 뜻이다.
‘결택’이라고 하는 것은 즉 현관이다. 이 순결택분은 즉 법무아의 인(忍)이다. 이 선근을 이끄는 것을 설하여 ‘순(順)’이라고 이름한다. 가장 그 위에 있기 때문에 ‘정(頂)’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시 네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지혜에 의해서’란,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명칭 등 가히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미 결정을 얻고, 이와 같이 전변할 때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 명칭 등과 흡사한 것들에 대해서 현전에 결정하여 모든 대상은 존재하지 않음을 요지하는 것이다.
017_0217_a_21L煖者,卽是煖品善根,譬如鑽火煖爲前相,此亦如是眞智前相.言依止者,謂是因義.言決擇者,卽是現觀.此分卽是法無我忍,引此善根說名爲順,最居其上故名爲頂.復由四種如實遍智者,謂如先說,於名事等不可得中,已得決定,如是轉時,悟入唯識,似名等現決定了知都無有義.
‘진실한 대상의 일부분으로 들어가는 삼마지’에서 일부분에 들어간다는 것은 소취가 없음만을 능히 통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대상이 없음을 요달할지라도 저 능취 행상의 유식을 조복하여 없애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를 진리[諦]로서 순인의 의지[順忍所依止]의 정(定)이라고 이름한다.
‘순’이란 말하자면 소취가 없는데 의지하여 능취를 얻게끔 하는 데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삼마지는 현관의 궁극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란 즉 저 전의(轉依)의 대상에 가까이 가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017_0217_b_05L入眞義一分三摩地者,唯能通達所取無故,名入一分.由於此中,了達義無,未能伏彼能取行相唯識令無,是故說此名諦順忍所依止定.順謂親近依所取無,令能取無.應知如是諸三摩地,是現觀邊者,當知卽是近彼轉義.
【論】이와 같이하여 보살은 10지[地]에 들어가고 나서 견도44)를 얻고 유식에 들어간다. 수도에서 어떻게 수행하는가? 설한 바와 같이 안립한 10지에서 모든 경전을 섭수하여 모두 현전하는 가운데에 총체적인 법[總法]을 반연하는 출세간의 후득지관의 지혜[止觀智]에 의지하고, 한량없는 백천(百千) 구지(俱胝)45) 나유다(那庾多)46)의 겁(劫)을 지나서 자주 수습함으로써 전의(轉依)를 얻어서 세 가지 불신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한다.
017_0217_b_11L論曰:如是菩薩,已入於地`已得見道`已入唯識,於修道中,云何修行?於如所說安立十地,攝一切經,皆現前中,由緣摠法,出世後得止觀智故,經於無量百千俱胝那庾多劫,數修習故,而得轉依,爲欲證得三種佛身,精勤修行.
017_0217_c_01L【釋】‘설한 바와 같이 안립한 10지에서’란 말하자면 저것들 희론 언설에 따른 자상과 공상의 열 가지 지에서라는 뜻이다.
‘총체적인 법을 반연하는’이란 서로 섞인 연이기 때문에 별도의 법을 반연하지 않고 정지(正智)를 닦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무분별지가 모은 자량은 마땅히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출세간’이란 무분별지이다.
‘후득’이란 청정한 세간을 능히 안립하는 지혜47)이다. 이 후득으로 말미암으면 청정이고 유상(有相)의 경계로 말미암으면 세간이다. 48)
‘전의를 얻어서’란 많은 겁을 지나서 무분별지와 후득지를 닦기 때문에 그래서 전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심ㆍ심법을 청정하게 상속한다는 것이다.
‘세 가지 불신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한다’란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017_0217_b_18L釋曰:於如所說安立十地者.謂隨彼彼戲論言說自相`共相十種地中.由緣摠法者,相雜緣故,無緣別法,而修正智.若不爾者,無分別智,所集資糧,不應得有.出世者.是無分別智,後得卽是淸淨世閒,能安立智,此後得故淸淨,有相境故世閒.而得轉依者,謂經多劫,修無分別後得智故,而得轉依,謂心`心法相續淸淨.爲欲證得三種佛身,精勤修行者,後當廣說.
【論】성문의 현관과 보살의 현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49) 말하자면 보살의 현관과 성문의 차이는 열한 가지 차별에 의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인식대상[所緣]의 차별에 의하니 대승법으로써 인식대상을 삼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량을 지니는 것[資持]의 차별에 의하니 큰 복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깨달음의 밑거름으로 삼기 때문이다. 셋째는 통달의 차별에 의하니 능히 보특가라[人無我]와 법의 무아[法無我]를 통달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열반의 차별에 의하니 생사와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 대열반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지위[地]의 차별에 의하니 10지에 의지하여 벗어나기 때문이다. 여섯째와 일곱째는 청정의 차별에 의하니 번뇌와 습관을 끊고 불국토를 깨끗이 하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자타에 대한 평등심을 얻는 차별에 의하니 유정을 성숙시키는 가행은 휴식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태어남의 차별에 의하니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열째는 생을 받는 차별에 의하니 항상 모든 부처님의 대집회에서 생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열한째는 증과의 차별에 의하니 10력(力)50)ㆍ무외(無畏)51)ㆍ불공(不共)52)이라는 불법의 무량한 공덕의 증과를 원만히 성취하기 때문이다.
017_0217_c_05L論曰:聲聞現觀`菩薩現觀,有何差別?謂菩薩現觀,與聲聞異,由十一種差別應知.一由所緣差別,以大乘法,爲所緣故二由資持差別,以大福智二種資糧,爲資持故三由通達差別,以能通達補特伽羅法無我故四由涅槃差別,攝受無住大涅槃故五由地差別,依於十地,而出離故六`七由淸淨差別,斷煩惱習,淨佛土故八由於自他得平等心差別,成熟有情,加行無休息故九由生差別,生如來家故十由受生差別,常於諸佛大集會中,攝受生故十一由果差別,十力無畏不共佛法,無量功德果成滿故.
017_0218_a_01L【釋】성문과 보살의 현관의 차별에는 열 가지 혹은 열한 가지가 있다.
‘인식대상의 차별’ 중에서 보살의 현관은 대승법으로써 문혜(聞慧) 등의 세 가지53) 인식대상으로 삼고 성문의 현관은 성문승의 법을 그 인식대상으로 삼는다.
‘자량을 지니는 것의 차별’ 중에서 ‘복의 자량’이란 보시ㆍ지계ㆍ인욕의 세 가지 가행을 말하고, ‘지혜의 자량’이란 정진ㆍ정려 그리고 문혜 등을 말한다. 자량이라 말하는 것은 무량겁을 지나서 운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달의 차별’ 중에서 성문의 현관은 단지 보특가라[人]의 공ㆍ무아의 이치에 능히 통달할 뿐이지만, 보살의 현관은 보특가라와 법의 공ㆍ무아를 능히 모두 다 통달한다.
017_0217_c_19L釋曰:聲聞`菩薩,現觀差別,略有十種,或十一種.所緣差別中,菩薩現觀,以大乘法,爲聞慧等,三種所緣,聲聞現觀,聲聞乘法,爲其所緣.資持差別中,福資糧者,謂施戒忍三種加行,智資糧者,謂精進靜慮,及聞慧等.言資糧者,經無量劫,所運集故.通達差別中,聲聞現觀,唯能通達補特伽羅空無我理,菩薩現觀,俱能通達補特伽羅`法空無我.
‘열반의 차별’ 중에서 보살의 현관은 비(悲)와 혜(慧)의 방편 자량을 섭수하고 생사와 열반에 머물러 집착함이 없는 것으로써 열반을 삼지만, 성문의 현관은 오직 무위에 머무르는 것으로써 열반을 삼는다.
‘지위의 차별’ 중에서 보살의 현관은 10지에 의지하여 벗어나게 되지만 성문승에서는 이와 같은 여러 지위들을 건립하지 않는다.
‘청정의 차별’ 중에서 보살의 현관은 영원히 번뇌와 아울러 모든 습기를 끊으며 능히 여러 가지 보배로써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지만, 성문의 현관은 번뇌를 끊을지라도 아직 습기를 제거하지 못하여 모든 갖가지 보배로써 불토를 깨끗하게 할 수 없다. 습기라고 말하는 것은 비록 번뇌는 없지만 그 소작은 번뇌가 있는 것과 흡사한 것이다.
017_0218_a_06L涅槃差別中,菩薩現觀,攝受悲慧方便資糧,生死`涅槃無所住著以爲涅槃,聲聞現觀,唯住無爲以爲涅槃.地差別中,菩薩現觀,依於十地,而得出離,聲聞乘中,無有如是諸地建立.淸淨差別中,菩薩現觀,永斷煩惱幷諸習氣,及能淸淨衆寶佛土聲聞現觀,雖斷煩惱,未除習氣全,不能淨衆寶佛土.言習氣者,雖無煩惱,然其所作似有煩惱.
017_0218_b_01L‘자타에 대한 평등심을 얻는 차별’ 중에서 보살의 현관은 자타가 평등한 법성을 증득하여 유정을 성숙하게 하는 가행을 끊지 않지만, 성문의 현관은 자타를 분별하여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닦고 남의 이익은 닦지 않는다.
‘태어남의 차별’ 중에서 보살의 현관은 진정한 부처님의 자식으로서 여래의 가문인 법계에 태어나며, 마치 상호를 갖추고 전륜성왕의 가문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성문이라 하는 하천하고 지혜가 없는 노비의 자식과는 같지 않다.
‘생을 받는 차별’ 중에서 보살의 현관은 항상 모든 부처님의 대집회의 연화대 위에 결가부좌하고 내지 성불에 이를 때까지 항상 화생(化生)을 받는다. 언급한 바, 모든 부처님의 대집회란 말하자면 무루계의 모든 부처님의 국토로서 성문이 모태 등에 있는 것과 같지 않다.
‘증과의 차별’ 중에서 보살의 현관은 10력ㆍ4무외 등의 한량없는 공덕의 증과로 장엄되고, 능히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도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일으키며, 법신을 증득하여 이로써 뛰어난 증과로 삼지만, 나머지는 무루의 전생(轉生)을 증과로 삼는다.
017_0218_a_15L自他平等心差別中,菩薩現觀,證得自他平等法性,成熟有情,加行無絕聲聞現觀,分別自他,唯修自利,不修他利.生差別中,菩薩現觀,於如來家法界中生,是佛眞子,如輪王家生有相子,非如聲聞同於下賤無智婢子.受生差別中,菩薩現觀,常於諸佛大集會中,蓮花臺上,結加趺坐,乃至成佛,恒受化生,所言諸佛大集會者,謂無漏界諸佛國土,非如聲聞處母胎等.果差別者,菩薩現觀,力無畏等,無量功德衆所莊嚴,能無功用,起作一切利有情事,證得法身以爲勝果,餘用無漏轉生爲果.
【論】여기에 두 게송이 있다.
017_0218_b_05L論曰:此中有二頌:

명칭[名]과 사물[事]은 서로 객이 되니,
그 성품을 마땅히 사색[尋思]해야 하네.
두 가지에 있어서 또한 마땅히 추구해야 하리니,
오직 사량[量]과 가립[假]뿐이라고.
017_0218_b_06L名事互爲客,
其性應尋思,
於二亦當推,
唯量及唯假.

진실한 지혜는 대상[義]이 없음을 관하고
오직 세 가지 분별만이 있음을 관하네.
저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으니,
이것이 곧 세 가지 자성[三性]으로 들어가는 것이네.
017_0218_b_08L實智觀無義,
唯有分別三,
彼無故此無,
是卽入三性.

【釋】두 가타로써 사색[尋思]과 사색의 결과를 모두 거두어서 이해하기 쉽도록 한다. ‘명칭과 현상은 서로 객이 되니, 그 성품을 마땅히 사색해야 하네’란 명칭은 현상에 대해서 객이 되고 현상은 명칭에 대해서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이다. 하나의 부류와 같지 않으니 말하자면 소리와 대상은 서로 칭합하여 생기고 상호 서로 결속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에 있어서 또한 마땅히 추구해야 하리니, 오직 사량과 가립뿐이라고’란 말하자면 자성과 차별에서도 마땅히 분별만이 있고 단지 짐짓 세워진 것[假立]만이 있다고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어떠한 것인가?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종류는 오직 분별만이 있으며 오직 짐짓 세운 차별적인 언설만이 있어서 모두 진실한 자성과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017_0218_b_09L釋曰:以二伽他,摠攝尋思及尋思果,令易解了.名事互爲客其性,應尋思者,謂名於事爲客,事於名亦爾.非如一類,謂聲與義相稱而生互相繫屬.於二亦當推唯量及唯假者,謂於自性及差別中,亦當推尋唯有分別唯有假立.其事云何?謂此二種,唯有分別`唯有假立差別言說,都無眞實自性差別.
‘진실한 지혜’라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사색으로부터 생기게 되는 네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지혜[如實遍智]이다.
‘대상이 없음을 관하고’란 말하자면 그 대상은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관하는 것이다.
‘오직 세 가지 분별만이 있음을 관하네’란 오직 세 가지 분별, 즉 명칭의 분별과 자성가립의 분별, 차별가립의 분별이 있음을 관견(觀見)한다는 것이다.
‘저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으니’란 말하자면 대상이 없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분별 또한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017_0218_b_18L言實智者,謂從尋思,所生四種如實遍智.觀無義者,謂觀其義本來無有.唯有分別三者,觀見唯有三種分別,謂名分別`自性假立分別`差別假立分別.彼無故此無者,謂義無故,觀此三種分別亦無.
017_0218_c_01L‘이것이 곧 세 가지 자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네’란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이 삼종자성으로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 게송의 전반은 명칭과 사물이 번갈아 서로 객이 됨을 관하는 것이니, 즉 이것은 변계소집자성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처음 게송의 후반은 저 두 가지 자성과 차별에는 오직 분별만이 있고 가립만이 있음을 관하는 것이니, 즉 이것은 의타기자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두 번째 게송은 즉 원성실자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단지 변계소집을 없앨 뿐이고 각각 다른 마음의 경계[境]는 분별을 제거하더라도 그 사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계박과 해탈은 모두 성립되지 않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청정과 청정하지 않음이 모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218_b_23L是卽入三性者,如上所說,卽是悟入三種自性.謂初頌前半,觀名與事更互爲客,卽是悟入遍計所執自性.初頌後半,觀彼二種自性差別,唯有分別`唯有假立,卽是悟入依他起自性.第二頌中,卽是悟入圓成實自性.此中但遣遍計所執各別心境,伏除分別,不無其事.若不爾者,繫縛`解脫,俱不應成,淨與不淨,皆無有故.
【論】다시 가르침을 주는[敎授] 두 가지 게송이 있다.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18_c_09L論曰:復有教授二頌,如『分別瑜伽論』說:

보살은 선정의 지위[定位]에서
영상은 오직 마음이라 관하고
대상의 표상[義想]을 이미 없애 버려서
오직 자신의 표상[自想]만이 있다고 자세히 관하네.
017_0218_c_10L菩薩於定位,
觀影唯是心,
義想旣滅除,
審觀唯自想.

이와 같이 내심에 머무르면
인식대상[所取]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며
다음에 인식주체[能取] 또한 없는 것이라고 아니,
이후에 무소득(無所得)에 이르네.
017_0218_c_12L如是住內心,
知所取非有,
次能取亦無,
後觸無所得.

【釋】누가 이와 같이 사색[尋思]에서 증과를 얻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는 것은 마땅히 누가 다시 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두 게송을 설하는 것이다.
‘보살은 선정의 지위에서 영상은 오직 마음이라고 관하고’란, 법과 흡사하고 대상과 흡사한 선정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영상은 오직 내심일 뿐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경에서 “나는 식의 인식대상[識所緣]은 오직 식이 드러난 것이라고 설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기 때문이다.
‘보살’이라고 말하는 것은 즉 관하는 주체를 설하는 것이다. ‘선정의 지위에서’란 마음이 하나의 경계에 머무르는 것이다. ‘대상의 표상을 이미 없애 버려서’란 말하자면 저 영상은 그 대상의 표상을 없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017_0218_c_13L釋曰:誰能如是尋思得果?如是教授,當復爲誰?爲答此問,說於二頌.菩薩於定位,觀影唯是心者,謂觀所有似法似義,定所行影唯是內心.如經言:我說,識所緣,唯識所現故.言菩薩者,卽說能觀.於定位者,心住一境.義想旣滅除者,謂由彼影遣其義想.
017_0219_a_01L‘오직 자신의 표상만이 있다고 자세히 관하네’란 말하자면 이와 같이 법과 흡사하고 대상과 흡사한 양상은 오직 나의 선정의 마음[定心]이 변현한 것이라고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심에 머무르면’이란 이 마음은 이때에 곧 스스로의 마음에 머무른다는 뜻이다.
‘인식대상[所取]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며 다음에 인식주체[能取] 또한 없는 것이라고 아니’란, 말하자면 앞에서 이미 소취는 없다고 알았으므로 소취의 성품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소취의 성품에 대한 능취의 성품 또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에 무소득에 이르네’란 말하자면 이것에 의해 후에 두 가지 성품이 얻는 바 없는 진여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017_0218_c_20L審觀唯自想者,謂審觀察,如是似法似義之相,唯我定心之所變現.如是住內心者,是心於爾時,卽住自心義.知所取非有,次能取亦無者,謂先已了所取是無,如所取性,旣無所有,所取性上能取之性,亦不得成.後觸無所得者,謂從此後證無二性所得眞如.
【論】다시 별도로 현관에 관한 다섯 가지 게송이 있으니,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에서 설한 바와 같다.
017_0219_a_04L論曰:復有別五現觀伽他,如『大乘經莊嚴論』說: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자량을
보살은 잘 갖추어서 끝[邊際]이 없네.
법에 대하여 사량하여 잘 결택하였으니
그러므로 대상의 취지[義趣]는 오직 말의 부류임을 아네. 54)
017_0219_a_06L福德智慧二資糧,
菩薩善備無邊際,
於法思量善決已,
故了義趣唯言類.
만약 모든 대상이 단지 말이라고 알면
곧 저것과 흡사한 것은 유심(唯心)이라는 도리에 안주하네. 55)
곧 능히 진실한 법계를 현재에 증득하니,
그러므로 두 가지 양상을 모두 제거하네.
017_0219_a_08L若知諸義唯是言,
卽住似彼唯心理,
便能現證眞法界,
是故二相悉蠲除.

자체[體]는 마음을 떠나서 별도의 사물이 없음을 아니
이것에 의해서 곧 마음은 존재하지 않음을 아네.
지혜로운 이[智者]는 두 가지가 모두 없다고 요달하고
평등하게 두 가지가 없는 진실한 법계에 머무르네.
017_0219_a_10L體知離心無別物,
由此卽會心非有,
智者了達二皆無,
等住二無眞法界.

지혜로운 이[慧者]는 무분별지의 힘으로써
두루하고 평등하게 항상 순행하니,
의지처의 무성하여 막힌 듯한 과실의 무더기[聚]를 멸하는 것은
마치 훌륭한 양약이 여러 가지 독을 없애는 것과 같네. 56)
017_0219_a_12L慧者無分別智力,
周遍平等常順行,
滅依榛梗過失聚,
如大良藥銷衆毒.

부처님께서 설한 묘법은 잘 성립하여
지혜를 아울러 근본과 법계에 안주하고
생각의 취지[念趣]는 오직 분별뿐이라고 요지하니,
용맹하게 빨리 공덕 바다의 언덕에 이르네. 57)
017_0219_a_14L佛說妙法善成立,
安慧幷根法界中,
了知念趣唯分別,
勇猛疾歸德海岸.
017_0219_b_01L
【釋】‘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자량을 보살은 잘 갖추어서 끝이 없네’란, 말하자면 보시 등의 세 가지 바라밀다는 복의 자량이라고 이름하며, 여섯 번째 반야바라밀은 지혜[智]의 자량이라고 이름한다. 정진은 모두를 닦기 때문에 두 가지에 다 통하고 정려 또한 이와 같다. 만약 무량(無量)을 반연하면58)
복의 자량에 속하며 그 나머지는 지혜의 자량에 속한다. 복과 지혜를 쌓기 때문에 ‘자량’이라고 이름한다.
‘잘 갖추어서’라고 하는 말은 원만의 뜻이다.
셀 수 없는 시간의 차별을 지나쳐서 원만하게 하는 것을 ‘끝이 없네’라고 하는 것이다. ‘법에 대하여 사량하여 잘 결택하였으니’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모든 계경 등의 법에 대해서 선정 이후의 지혜에 의해 매우 잘 결택하여 유예(猶豫)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017_0219_a_16L釋曰:福德`智慧二資糧,菩薩善備無邊際者,謂施等三波羅蜜多,名福資糧,第六般若波羅蜜多,名智資糧,精進俱修,故通二種,靜慮亦爾.若緣無量,屬福資糧,其餘屬智,福智積集,故名資糧.言善備者,是圓滿義.經無數時,差別圓滿,名無邊際.於法思量.善決已者,謂於一切契經等法,由定後智極善決定,得無猶豫故.
‘대상의 취지는 오직 말의 부류임을 아네’란 그러므로 능히 모든 대상의 취지는 오직 의언분별(意言分別)을 원인으로 삼음을 안다는 것이다.
‘만약 모든 대상이 단지 말이라고 알면 곧 저것과 흡사한 것은 유심이라는 도리에 안주하네’란, 말하자면 만약 모든 대상의 모습이 오직 의언일 뿐이라고 요지하면, 곧 능히 마음을 편안하게 머무니 대상과 흡사하게 갖가지로 변현하는 양상은 오직 마음[唯心]의 도리에서 결정을 얻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게송의 초반은 보살이 순결택분위에 있음을 나타내고, 처음 게송은 이 지위의 가행을 나타낸다.
‘곧 능히 진실한 법계를 현전에 증득하니, 그러므로 두 가지 양상을 모두 제거하네’란 앞에서 대상은 없다고 요달하여 유심에 머무르기 때문에 능히 소취와 능취의 두 가지 양상을 제거하고 두 가지가 없는 진실한 법계를 현전에 증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 결정한 지혜는 이것에 의지하여 생기기 때문이다. 이 앞의 반 게송과 뒤의 세 번째 게송은 견도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현전에 증득하는 것과 같은 것은 다음에 나타내 보이겠다.
017_0219_b_02L了義趣唯言類者,是故能了一切義趣,唯用意言分別爲因.若知諸義唯是言,卽住似彼唯心理者,謂若了知一切義相唯是意言,卽能安心住似義相,種種變現,唯心理中,得決定故.此第二頌初半,顯示菩薩在順決擇分位,初頌顯示此位加行.便能現證眞法界是故,二相悉蠲除者,由先了達義無所有,住唯心故,能除所取`能取二相,現證無二眞實法界,善決定智,依此生故.此前半頌及後第三,顯見道位,如所現證次當顯示.
‘자체는 마음을 떠나서 별도의 사물이 없음을 아니 이것에 의해서 곧 마음은 존재하지 않음을 아네’란 말하자면 마음을 떠나서 별도로 모든 인식대상[所緣]의 경계는 없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저것이 없기 때문에 인식주체[能緣]에 심성 또한 성립될 수 없다.
‘지혜로운 이[智者]는 두 가지가 모두 없다고 요달하고’란 뛰어난 지혜[勝慧]와 상응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라 이름하고, 두 가지가 없는 성품에 대해서 능히 결정하여 알기 때문에 변계소집을 요달한다고 하는 것이다. 인식대상[所緣]과 인식주체[能緣]는 본래부터 성품이 없기 때문에 ‘두 가지가 모두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017_0219_b_14L體知離心無別物,由此卽會心非有者,謂知離心無別一切所緣境界,由彼無故,能緣心性,亦不得成.智者了達二皆無者,勝慧相應,故名智者.於二無性,能決定知,故名了達遍計所執,所緣`能緣,本來無性,名二皆無.
017_0219_c_01L‘평등하게 두 가지가 없는 진실한 법계에 머무르네’란 평등하게 안주하기 때문에 ‘평등하게 머무른다’고 하는 것이다. 소취와 능취를 모두 다 멀리 여의기 때문에 ‘두 가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전에 증득된 법계가 허망하지 않음을 ‘진실한 법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이[慧者]는 무분별지의 힘으로써’란 모든 보살의 무분별지가 가지고 있는 공덕을 말한다.
‘두루하고 평등하게 항상 순행하니’란 말하자면 내외를 종합하기 때문에 ‘두루하고’라고 하며, 소취가 없는 것과 같이 능취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평등하게’라고 하는 것이다. 계경 등의 법에 대해서 그 성품이 평등하다고 수순하여 관찰하는 것은 비유하면 허공과 같기 때문에 ‘순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항상하기 때문에 ‘항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017_0219_b_20L等住二無眞法界者,平等安住,故名等住,所取`能取,悉皆遠離,故言二無.如是現證法界非虛,名眞法界.慧者,無分別智力者,謂諸菩薩,無分別智,所有功能.周遍平等,常順行者,謂摠內外,故名周遍.如所取無,能取亦爾,故名平等.隨順觀察契經等法其性平等,譬如虛空,故名順行.時恒故常.
‘없애는’이란 제거한다는 것이다.
‘의지처’란 모든 잡염법의 원인을 말한다.
깨달아 들어가기 어려움을 ‘무성하여 막힌 듯한’에 비유하며, 모든 잡염법을 ‘과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습기가 모아지기 때문에 ‘무더기’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훌륭한 양약이 여러 가지 독을 없애는 것과 같네’는 그 뜻을 이해하기 쉽다. 여러 가지 과실에 들어가는 것을 능히 없애 버리기 때문에 아게타(阿揭陀)와 같다.
위의 네 번째 게송은 수도(修道)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한 묘법은 잘 성립하여’란 말하자면 모니존(牟尼尊)께서 설하신 정법은 매우 잘 성립한다는 것이다.
017_0219_c_05L滅者除也.依謂一切雜染法因,難可悟入,喩於榛梗.諸雜染法,名爲過失.習氣積集,故名爲聚.如大良藥銷衆毒者,其義易了.能除遠入諸過失,故如阿揭陁.此第四頌,顯示修道.佛說妙法善成立者,謂牟尼尊所說,正法極善成立.
‘지혜를 아울러 근본과 법계에 안주하고’란 말하자면 그 지혜에 안주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잘 성립한 법과 아울러 그 근본과 진실한 법계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것은 깨달음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혹은 총체적으로 법을 반연하는 것을 근본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모든 경은 모두 10지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법은 저것을 의지하여 전전하기 때문에 ‘법계’라고 이름하며 곧 모든 법은 공(空)이다.
017_0219_c_11L安慧幷根法界中者,謂安其慧置佛所說,善成立法,幷其根本,眞法界中.根者,謂此是覺因故.或摠緣法,名爲根本,謂一切經,皆以十地,爲根本故.法依彼轉,故名法界,卽諸法空.
017_0220_a_01L‘생각의 취지는 오직 분별뿐이라고 요지하니’란 말하자면 후득지는 법계에 의지하여 전변하고, 생각의 취지[念趣]는 오직 분별임을 요지한다는 것이다. 분별을 떠나서 외계에 생각하는 대상[所念]인 법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 생각하는 대상인 계경 등의 법과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대상인 바라밀다와 아울러 저 결과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변계소집성은 모두 없기 때문이다.
‘용맹하게 빨리 공덕 바다의 언덕에 이르네’란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먼저 점차로 수습하는 현관인 무분별지와 후득지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 공덕이 원만한 불과를 속히 증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래지(如來地)에 의해서 건너는 가없는 인위(因位)의 공덕을 ‘공덕 바다의 언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19_c_16L了知念趣唯分別者,謂後得智,依法界轉,了知念趣唯是分別,離分別外,無所念法.謂彼所念契經等法,及所應念波羅蜜多,幷彼果等,遍計所執性皆無故.勇猛疾歸德海岸者,謂諸菩薩,由先漸次修習現觀無分別智後得智故,速能證獲一切功德圓滿佛果.謂如來地,超度無邊因位功德,名德海岸.如有頌言:

3보리를 증득할 때
단박에 원만한 과를 성취하며
가없는 덕의 바다를 건너서
무등등위(無等等位)에 이르네.
017_0220_a_02L證三菩提時,
頓成圓滿果,
度無邊德海,
至無等等位.

‘빨리’란 속히라는 뜻이다. 무량겁을 지나야 비로소 불과를 성취할 수 있어서 시간이 이미 긴데, 어떻게 ‘빨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뜻은 옳지 않다. 길고 먼 시겁(時劫)은 단지 분별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20_a_04L疾者速也.經無量劫,乃成佛果,時旣長久,云何言疾?此義不然.時劫長遠,唯分別故.如有頌言:

꿈속에서 한 해가 지났다고 말해도
꿈에서 깨어나면 이에 잠깐 동안의 순간[頃]이라네.
그러므로 시간은 한량없지만
한 찰나에 포함되네.
017_0220_a_07L處夢謂經年,
寤乃須臾頃,
故時雖無量,
攝在一剎那.

또한 부처님의 정진은 매우 치열하므로 많은 겁이 지났다고 해도 적은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20_a_09L又佛精進極熾然故,雖經多劫,而謂少時.如有頌言:

어리석은 이는 적은 시간을 닦을지라도
게으른 마음에서 이미 오래되었다고 의심하며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겁 동안
부지런히 닦고도 잠깐 동안[須臾]이라고 말씀하시네.
017_0220_a_11L愚修雖少時,
怠心疑已久,
佛於無量劫,
勤勇謂須臾.

‘용맹하게’라고 말하는 것은 즉 지혜의 힘이다. 무분별과 후득의 지혜를 성취하기 때문에 겁내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용맹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게송은 제일의(第一義)의 가장 뛰어난 것으로서 존귀하고 높은 구경도위에 도달함을 나타내 보인다.
017_0220_a_13L言勇猛者,卽智慧力,成無分別後得智故,無所怯憚,故名勇猛.此頌顯示至第一義最勝尊高究竟道位.
攝大乘論釋卷第六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이상에서 알아야 할 바의 양상[所知相]으로서 심식론과 삼성설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유식학의 이론문(理論門)이다. 이제는 그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행문에 들어간다.
  2. 2)의언(意言)은 뜻 속의 말, 즉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3. 3)범어 Rāhula의 음사어로서 부처님의 실제 아들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고 10대 제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 밀행제일(密行第一)로 유명하다.
  4. 4)아뢰야식을 가리킨다.
  5. 5)계경 등의 교법을 말한다.
  6. 6)이하 유식학에서 보살의 수행과정인 5위(位) 중에서 제1위인 자량위(資糧位)의 수행을 설명한다. 이것은 길고 긴 수행의 도정에서 재산이 될 정신적인 양식을 저장하는 단계이다. 여기서 자량(資糧)은 복덕과 지혜를 가리킨다. 37보리분법과 6바라밀다를 닦는 과정이다. 10주ㆍ10행ㆍ10회향(제10회향의 住心)까지이다.
  7. 7)본문에서 말한 다문훈습,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김, 선근을 쌓는 것이다.
  8. 8)통달위라고 하며, 10지 중에서 초지의 입심(入心)의 수행이다. 이 지위에 오르면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진여의 1분(分)을 관찰하게 된다. 후천적인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는 한꺼번에 소멸되지만, 선천적인 구생기(俱生起)의 번뇌는 아직 요지부동이다.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의 1분이 각각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9. 9)수습위(修習位)라고 하며, 초지의 주심(住心)부터 제10지의 끝까지의 지위이다.견도에서 일부 증득된 진여의 도리를 반복적으로 닦아 익혀서 번뇌장과 소지장을 정화해 나간다. 3혜(慧)에 의해 아집과 법집을 정화하는 아공관(我空觀)과 법공관(法空觀)을 닦아서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제7지에서 번뇌장이 정화되어 아집이 단절되고, 제10지에서 금강유정을 수행하여 소지장을 정화해서 법집이 단절된다.
  10. 10)구경위(究竟位)라고 하며 불과(佛果)를 증득한 지위이다. 대보리[四智]와 대열반[無住涅槃]을 증득한다.
  11. 11)욕(欲)에 상응해서 일어나는 거친 사고[尋]를 말한다.
  12. 12)진에(恚)에 상응해서 일어나는 거친 사고[尋]를 말한다.
  13. 13)삿된 견해를 말한다.
  14. 14)산란된 마음의 외부에서 현재 눈앞에 머무는 모든 법을 가리킨다.
  15. 15)선정 중에 관찰되는 인식대상이다. 골쇄관은 부정관(不淨觀)의 하나로서 신체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해서 신체가 죽어서 백골(白骨)이 되는 모습을 관찰한다.
  16. 16)이하 제2위인 가행위에서의 수행을 설명한다. 이것은 수행심을 더욱 경책하여 정진을 가행하도록 하는 단계이다. 제10회향의 만심(滿心)에서 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위(世第一位)의 네 가지 가행을 닦는 단계이다.
  17. 17)유견(有見)만 말하고 유상(有相)을 들지 않은 것은, 이 관법이 내부의 식을 반연하고 외부 대상을 제외하기 때문이다.
  18. 18)‘어떻게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를 가리킨다.
  19. 19)이하 가행위에서 닦는 4심사관(尋思觀)과 4여실지관(如實智觀)에 대해서 설명한다. 네 가지 심사관은 인식의 대상인 명칭[名]ㆍ대상[義]ㆍ자성(자체의 體性)ㆍ차별(모습과 작용의 차별성)의 네 가지 법이 임시적인 존재[假有]이고 실무(實無)라고 심구(尋求)하여 사찰(思察)하는 관법이다.
  20. 20)4여실지관(如實智觀)이다. 이것은 네 가지 심사관 다음에 다시 명확히 인가(認可) 결정하고 또한 이렇게 관찰하는 마음[能取心]까지도 가유실무(假有實無)라고 인가 결정하는 관법이다.
  21. 21)명칭[名, nāman]은 어떤 의미를 갖는 최소단위의 단어. 명칭이라는 뜻이다. 사물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언어표현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문구[句, pada]는 단어로 구성된 문구ㆍ문장 전체를 가리킨다. 글자[文ㆍ味, vyañjana]는 단어나 문구ㆍ문장을 구성하는 낱낱의 글자[음절]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이 논서는 『섭대승론석』이다”라고 할 때에 ‘이’, ‘논’, ‘서’ 등 한 자 한 자가 글자[文]이고, ‘논서’, ‘섭대승론석’이 명칭[名]이며, 이들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전체가 문구[句]이다.
  22. 22)명칭과 대상, 자성과 차별, 가유(假有)의 자성과 차별의 대상을 말한다.
  23. 23) 범어 Devadatta의 한역어로서 보통 제바달다(提婆達多)라고 음사한다. 곡반왕(斛飯王)의 아들로 아난의 형이며 부처님의 종제(從弟)이다. 출가하여 5신통과 32상을 갖추고 6만 송의 법장을 읊었으나, 이양(利養)을 위하여 3역죄(逆罪)를 짓고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24. 24)열여덟 가지 유학(有學)의 하나이며 27현성(賢聖)의 하나. 수신행은 부처님께서 설한 교법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그대로 믿어서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수법행(隨法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옳은 교법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25. 25)여기서 가리키는 대상은 앞에서 말한 법의 명칭에서 언급한 내용을 말한다.
  26. 26)범어의 자모(字母) a자를 말한다. 또한 여기에 성품이라는 것은 원인의 뜻이므로 모든 글귀는 ‘아’라고 하는 자모로부터 성립되기 때문에 4구의 인이 되는 것이다.
  27. 27)범어 pṛthagjana의 음사로서, 여러 가지 견해와 번뇌에 의해서 여러 가지 과를 받고 여러 가지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이라는 뜻이다.
  28. 28)극희지(極喜地)는 범어 pramuditābhūmi의 음사로서, 10지 중의 초지를 말하며 일반적으로는 환희지(歡喜地)라고 한다. 처음으로 참다운 중도지(中道智)를 내어 불성의 이치를 보고 견혹을 끊으며 능히 자리이타 하여 진실한 희열에 가득한 지위이다.
  29. 29)다시 태어나 생존을 계속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유정을 뜻한다.
  30. 30)nikāya-sabhāga의 번역으로 줄여서 동분(同分)이라고도 한다. 구사종과 유식종에서는 심불상응행법의 하나라고도 한다. 많은 유정 상호간에 각각 서로 닮은 상류사적(相類似的)인 힘이 있는 것을 말한다.
  31. 31)수행의 한 계위로서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를 합쳐 3도라고 한다. 견제(見諦), 견제도(見諦道)라고도 말하며 비로소 무루지를 얻어 4제를 현관하는 위이다. 그러므로 견도에 도달하기 이전은 범부이고 견도에 들어간 후는 성자이다.
  32. 32)여기서 상(相)이란 아뢰야식의 자상ㆍ과상ㆍ인상의 3상 가운데 인상의 측면을 말한다.
  33. 33)범어 Samāhita의 음사어로서 등인(等人)으로 한역된다. 선정의 명칭이다.
  34. 34)환술에 의해서 지각을 미혹시키는 것을 말한다.
  35. 35)순결택분은 여기서 말하는 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의 네 가지 선근의 지위이다. 5위(位:자량위ㆍ가행위ㆍ통달위ㆍ수습위ㆍ구경위) 중에서 가행위는 통달위[見道]에 수순하고 그것을 이끌어내는 단계이므로 순결택분이라 이름한다. 또한 진실결택분에 수순하고, 또한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진리를 보는 통달위에 가까이 준비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36. 36)보통 명득정(明得定)이라고 부른다. 4선근위(善根位) 중의 난위(煖位)에서 하품(下品)의 심사관(尋思觀)을 일으켜서 취할 대상의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는 선정이다. 이 선정에 의해서 처음으로 무루지혜의 전상(前相)을 얻으므로 명득정이라고 한다.
  37. 37)난(煖)은 따뜻함을 느끼는 것처럼 견도무루지화(見道無漏智火)의 전상(前相)으로 뛰어난 유루의 지혜가 일어남을 말한다. 지혜를 증득하려고 준비하는 단계이다.
  38. 38)명증정(明增定)이라고 하며, 정위(頂位)에서 상품(上品)의 심사관을 발하여 취할 대상의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는 선정이다. 이 선정에서 지혜의 밝은 양상이 점점 더해지므로 명증정이라고 부른다.
  39. 39)네 가지 선근 중에서 난위ㆍ정위를 동선(動善)이라 하고 인위ㆍ세제일위를 부동선(不動善)이라고 한다. 정위는 동선 중에서 최극위(最極位)이므로 마치 사람의 정수리와 같다고 해서 정위라고 부른다.
  40. 40)소취를 공(空)으로 볼 뿐 아니라, 능취도 공으로 보아 대상도 식도 모두 공임을 아는 것을 말한다.
  41. 41)보통 인위(忍位)라고 한다. 보살이 인순정(印順定)으로부터 하품의 여실변지(如實遍智)를 내어서 능취(能取)가 공함을 관찰하여 인가(認可) 결정하는 지위이므로 인위라고 부른다.
  42. 42)보살의 수행계위인 52위(位) 가운데 10회향(回向)의 만심(滿心)에서 무간정(無間定)에 의해 상품의 네 가지 여실변지(如實遍智)를 내어서, 인식의 대상뿐만 아니라 관하는 식 그 자체를 공무(空無)라고 분명하게 결택한다. 이 지위에서 일어나는 선근은 유루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고 부른다.
  43. 43)범어 abhisamaya의 한역으로서 현전에 명료하게 진리를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44. 44)견도는 무루(無漏)의 바른 지혜[正智]가 처음으로 진리를 비추는 때를 말한다. 초지(初地)의 입심(入心)에서 존재한다.
  45. 45)범어 koṭi의 음역어로서 억(億)이라고 번역한다. 인도에서 쓰던 숫자의 단위이다.
  46. 46)범어 nayuta의 음역으로서 매우 큰 수를 나타낸다. 천만(千萬)이라고도 하고 천억(千億)이라고도 한다.
  47. 47)후득지(後得智)가 일체법의 차별상을 능히 성립하는 지혜임을 말한다.
  48. 48)후득지는 세간의 지혜라거나 출세간의 지혜라고 어느 한 가지로 결정하여 말할 수 없다.
  49. 49)이하 성문과 보살의 현관(現觀)의 차이를 열한 가지로 설명한다.
  50. 50)부처님만이 갖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지혜의 힘이다. 첫째는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변별하는 지혜의 힘이다. 둘째는 선악업과 그 과보를 여실하게 아는 지혜의 힘이다. 셋째는 4선(禪)ㆍ8해탈(解脫)ㆍ 3삼매(三昧)ㆍ8등지(等持) 등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넷째는 중생의 근기의 고하(高下) 우열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다섯째는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 성향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여섯째는 중생계와 그 성류(性類)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일곱째는 어떤 수행에 의해서 어떤 도에 나가는가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여덟째는 중생의 숙명(宿命)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아홉째는 중생의 미래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열째는 모든 번뇌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51. 51)부처님께서 10력(力)을 갖추셨으므로 다음과 같이 아무런 두려움이 없음을 말한다. ① 모든 것을 아는 분[一切智者]으로서의 자신감, ② 모든 번뇌를 극복했다는 자신감, ③ 수행에 장애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모든 장애를 극복했기 때문), ④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모든 괴로움이 소멸되었기 때문).
  52. 52)불공법(不共法)이라 함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ㆍ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공통되지 않는 부처님 특유의 법이란 뜻이다. 이에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3염주(念住)ㆍ대비(大悲)의 열여덟 가지가 있다.
  53. 53)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所成慧], 사유하여 이루는 지혜[思所成慧], 닦아서 이루는 지혜[修所成慧]를 말한다.
  54. 54)이 게송은 자량위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55. 55)이 두 문구는 가행위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56. 56)이 게송은 수습위[修道]에 대해서이다.
  57. 57)이 게송은 구경위에 관한 내용이다.
  58. 58)여기서 무량(無量)을 연한다는 것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4무량을 연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