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釋卷第十

ABC_IT_K0595_T_010
017_0256_c_01L
섭대승론석 제10권
017_0256_c_01L攝大乘論釋卷第十


무성보살 지음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김치온 개역
017_0256_c_02L 無性菩薩造三藏法師玄奘奉 詔譯


11. 과지분 ②
017_0256_c_04L果智分第十一之餘

【論】또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깊고 깊으며[甚深], 가장 깊고 깊다. 이 깊고 깊은 상(相)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1) 이에 대한 많은 게송이 있다.
017_0256_c_05L論曰:復次諸佛法身甚深,最甚深,此甚深相,云何可見?此中有多頌.
【釋】‘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깊고 깊으며’란 이 법신의 자성은 깨닫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세간의 총명한 이가 가지고 있는 각혜(覺慧)로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깊고 깊다’란 이 법신의 차별은 깨닫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모든 성문 등이 가지고 있는 각혜로는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깊고 깊음은 열두 게송으로써 간략히 보일 것이다.
017_0256_c_07L釋曰:諸佛法身甚深者,說此法身自性難覺,世聰明者,所有覺慧,尚不解故.最甚深者,說此法身,差別難覺,諸聲聞等,所有覺慧,不能行故.如是甚深,以十二頌,略當顯示.

【論】부처님께서는 태어남 없음[無生]을 태어남[生]으로 삼고 또한 머무르지 않음[無住]을 머무름[住]으로 삼고 모든 일에 대해서 의식적인 노력[功用]이 없으며 제4식(第四食)을 음식[食]으로 삼는다.
017_0256_c_12L論曰:佛無生爲生,
亦無住爲住,
諸事無功用,
第四食爲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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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이 게송은 생주(生住)ㆍ업주(業住)의 깊고 깊음을 나타낸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남 없음[無生]을 태어남[生]으로 삼고’란 모든 부처님께서는 태어남 없음으로 태어남이 있음을 나타내니, 이를 태어남의 깊고 깊음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머무르지 않음[無住]를 머무름[住]으로 삼고’란 생사와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 것을 머무름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무주열반을 안립하는 것이며, 머무름의 깊고 깊음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일에 대해서 의식적인 노력[功用]이 없으며’란 의식적인 노력에 의하지 않고도 모든 일을 짓는 것을 말한다. 마치 세간의 마니주와 하늘의 음악 같은 것을 업의 깊고 깊음이라 이름한다.
‘제4식(第四食)을 음식으로 삼는다’에서 음식[食]에는 네 가지 종류2)가 있다.
첫째는 불청정의 의지로서 머무는 음식[不淸淨依止住食]으로서 욕계에 얽매인 자[具縛者]3)가 단(段) 등4)의 식에 의해서 몸을 안주시키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청정과 부정이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淨不淨依止住食]으로서 색계 또는 무색계에 태어나면 촉과 의사(意思)와 식(識)의 음식[食]에 의해서 안주함을 말한다. 이미 탐욕을 여의었기 때문에 단식(段食)은 없다. 예류향(預流向) 등도 유학(有學)이기 때문에 역시 청정과 부정이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이다. 저 예류향은 4식에 의해서 자신의 몸[自體]을 안주한다.
셋째는 한결같이 청정한 것이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一向淨依止住食]으로서 4식에 의하여 아라한 등이 자신의 몸을 안주하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오직 시현하고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唯示現依止住食]으로서 불세존께서 단식 등의 4식을 시현하여 수용하지만, 여래께서 식사하실 때 실로 음식을 수용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또한 음식을 빌리지 않아도 자신의 몸을 안주할 수 있지만 세간에 따라서 음식을 받아먹는 것을 시현하고 음식을 빌려서 그 몸이 안주함을 보인다.
제4음식[食]을 수용함을 나타내어 머무름을 얻기에 머무름[住]의 깊고 깊음이라 이름한다.
017_0256_c_15L釋曰:此頌顯生住業住甚深.佛無生爲生者,諸佛無生,而現有生,名生甚深.亦無住爲住者,生死`涅槃無住爲住,此卽安住無住涅槃,名住甚深.諸事無功用者,不由功用作一切事,猶如世閒末尼`天樂,名業甚深.第四食爲食者,食有四種:一不淸淨依止住食,謂具縛者,由段等食令身安住淨不淨依止住食,謂若生在色`無色界,由觸意思識食安住,已離欲故,無有段食.預流向等是有學故,亦淨不淨依止住食,彼由四食,自體安住一向淨依止住食,謂由四食,阿羅漢等自體安住四唯示現依止住食,謂佛世尊示現受用段等四食.如來食時,實不受食,亦不假食,自身安住,然順世閒,示現受食,示現假食,其身安住.現受第四食得住故,名住甚深.

【論】다름이 없으면서[無異] 또한 무량하며 수량이 한량없으면서도[無數量] 하나의 업[一業]이며 견고하지 않은 업[不堅業]과 견고한 업[堅業]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3신(身)을 구족하네.
017_0257_a_11L論曰:無異亦無量,
無數量一業,
不堅業堅業,
諸佛具三身.

【釋】이 게송은 안립(安立)과 숫자[數]와 업의 깊고 깊음을 보인다.
‘다름이 없음[無異]’이란 안립의 깊고 깊음을 나타낸다. 차별 없이 안립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량하며’란 숫자의 깊고 깊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것을 안립하는 숫자가 무량함을 나타낸다.
‘수량이 한량없으면서도 하나의 업이며’란 비록 무량할지라도 차별적인 업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업이기 때문이다. 변화와 수용의 업에는 차별이 없으니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견고하지 않은 업과 견고한 업으로서’란 자성신(自性身)의 업은 견고하게 머무는 것이며 나머지 두 가지 불신(佛身)의 업은 견고하지 않은 머무름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업의 깊고 깊음이라 이름한다.
017_0257_a_14L釋曰:此頌顯示安立數業甚深.無異者,顯安立甚深,以無差別,而安立故.亦無量者,顯數甚深,此顯安立其數無量.無數量一業者,雖有無量而無別業.何者?一業變化受用業無差別,成他利故.不堅業堅業者,自性身業,是其堅住,餘二身業,是不堅住.如是一切,名業甚深.
017_0257_b_01L
【論】등각(等覺)을 나투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깨달음[一切覺]은 없는 것도 아니네. 하나하나의 생각에 무량하며 있음[有]과 있지 않음[非有]으로 드러나는 것이네.
017_0257_a_22L論曰:現等覺非有,
一切覺非無,
一一念無量,
有非有所顯.

【釋】이 게송은 등각을 나타내는 깊고 깊음을 현시한다.
‘등각을 나투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라는 것은 의타기 가운데 변계소집성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깨달음은 없는 것도 아니네’라는 것은 의타기 가운데 원성실성은 진실로 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의 생각에 무량하며’란 말하자면 무량한 긍가강의 모래 숫자보다 많은 모든 세계에서 생각하는 찰나마다 무량한 부처님께서 계시어 등각을 나투시기 때문이다.
‘있음과 있지 않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네’란 말하자면 모든 여래께서는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공성(空性)이 드러나는 것으로 존위(尊位)를 이루기 때문이다.
017_0257_b_02L釋曰:此頌顯示現等覺甚深.現等覺非有者,依他起中,遍計所執性,非有故.一切覺非無者,依他起中,圓成實性,是眞有故.一一念無量者,謂過無量殑伽沙數,諸世界中,念念俱時,有無量佛現等覺故.有非有所顯者,謂諸如來,是有非有,空性所顯,成尊位故.

【論】염오도 아니며 염오를 떠난 것도 아니니
탐욕[欲]에 의해서 벗어남[出離]을 얻네.
탐욕이 탐욕 없음[無欲]이라고 알면
탐욕의 법성으로 깨달아 들어가게 되네.
017_0257_b_09L論曰:非染非離染,
由欲得出離,
了知欲無欲,
悟入欲法性.

【釋】이 게송은 탐욕을 벗어남[離欲]의 깊고 깊음을 현시한다.
어찌하여 ‘염오도 아니며’라고 하는가? 탐욕의 속박을 끊기 때문이다.
‘염오를 떠난 것도 아니니’라는 것은 속히 탐욕의 수면(隨眠)을 영원히 끊지 않기 때문이다.
‘탐욕에 의해서 벗어남을 얻네’란 이와 같은 수면의 탐욕에 머무르기 때문에 대보리를 얻는다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탐욕의 수면을 끊으면 마땅히 성문 등이 빨리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탐욕이 탐욕 없음이라고 알면’이라는 것은 변계소집의 탐욕은 탐욕 없음의 성품임을 알기 때문이다.
‘탐욕의 법성으로 깨달아 들어가게 되네’라는 것은 탐욕법[欲法]이 진여임을 깨달아 들어가서 증득한다는 것이다.
017_0257_b_12L釋曰:此頌顯示離欲甚深.云何非染?斷貪纏故.非離染者,非速永斷貪隨眠故.由欲得出離者,由留如是隨眠貪故,得大菩提若斷如是貪隨眠者,應同聲聞等,疾入涅槃故.了知欲無欲者,了知遍計所執貪欲無欲性故.悟入欲法性者,悟入作證欲法眞如.

【論】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든 온(蘊)을 초월하셨지만 모든 온 가운데 안주하시네. 저것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저버리지 않고도 매우 고요[善寂]하시네.
017_0257_b_19L論曰:諸佛過諸薀,
安住諸薀中,
與彼非一異,
不捨而善寂.
017_0257_c_01L
【釋】이 게송은 온[蘊]을 끊음의 깊고 깊음을 현시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든 온을 초월하셨지만’이란 모든 여래께서는 모든 변계소집의 색(色) 등등의 여러 모임[聚]5)을 초과했다는 것이다. 여실하게 변계소집의 불가득(不可得)을 관하여 보시기 때문이다.
‘모든 온 가운데 안주하시네’란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성의 온[法性蘊] 가운데 안주하신다는 것이다.
‘저것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란 법성의 온과 저 변계소집의 여러 온들은 다르다고 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변계소집성은 본래부터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같다고도 설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변계소집은 잡염을 따르기 때문이다. 법과 법성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저버리지 않고도 매우 고요[善寂]하시네’란 법성의 여러 온들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니, 곧 이것은 묘선(妙善)이면서 영원한 적멸이기 때문이다.
017_0257_b_22L釋曰:此頌顯示斷薀甚深.諸佛過諸薀者,謂諸如來,超過一切遍計所執,色等諸聚,如實觀見遍計所執,不可得故.安住諸薀中者,謂佛安住法性薀中.與彼非一異者,謂法性薀與彼遍計所執諸薀不可說異,遍計所執性本無故不可說一,遍計所執順雜染故.法與法性,非一非異.不捨而善寂者,謂不棄捨法性諸薀,卽是妙善,永寂滅故.

【論】모든 불사(佛事)가 서로 섞이니 마치 큰 바다의 물과 같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있어서‘나는 과거ㆍ현재ㆍ미래에 행위[作]한다’라는 이와 같은 생각이 없네.
017_0257_c_09L論曰:諸佛事相雜,
猶如大海水,
我已現當作,
他利無是思.

【釋】이 게송은 성숙(成熱)의 깊고 깊음을 현시한다.
‘모든 불사(佛事)가 서로 섞이니’란 말하자면 모든 여래께서 지으신바,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사업은 전전(展轉)하고 한 가지로 화합하여 한 가지 맛[一味]을 이루며 가히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업은 어떠한 것들과 같은가라고 물으면 ‘마치 큰 바다의 물과 같으며’라고 대답한다. 말하자면 큰 바다의 여러 가지 흐름으로 되돌아가는 물은 동일한 한 가지 맛으로서 가히 분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동일하게 고기 등에게 요익을 짓는 것[作]과 같다.
‘남을 이롭게 하는 데에 있어서 나는 과거ㆍ현재ㆍ미래에 행위[作]한다라는 이와 같은 생각이 없네’란, 공용심(功用心)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있어 3시(時)의 차별을 사유하는 것을 떠나 능히 자유자재[任運]로 남을 이롭게 하는 사업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제석천 등의 마니주와 하늘의 음악과 같이 비록 사려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
017_0257_c_12L釋曰:此頌顯示成熟甚深.諸佛事相雜者,謂諸如來所作,一切利益,安樂有情事業,展轉和同,合成一味,不可分別.問:此事如何等?答:猶如大海水.謂如大海,衆流所歸,水同一味,不可分別,一切同作魚等饒益.我已現當作他利無是思者,離功用心思惟他利三時差別,而能任運起利他事,如帝釋等末尼天樂,雖無思慮而有作用.

【論】중생의 죄로 인하여 현현하지 않으니 마치 깨진 그릇 속의 달과 같으며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하니 법의 광명이 태양과 같기 때문이네.
017_0257_c_21L論曰:衆生罪不現,
如月於破器,
遍滿諸世閒,
由法光如日.
017_0258_a_01L
【釋】이 게송은 현현(顯現)의 깊고 깊음을 현시한다.
만일 여래의 몸이 상주한다면 모든 때에 무슨 까닭으로 현현하지 않는가라고 물으면 ‘중생의 죄로 인하여 현현하지 않으니 마치 깨진 그릇 속의 달과 같으며’라고 대답한다. 깨진 그릇 속에는 물이 머무를 수 없기에 달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은 달의 허물이 아니라 그릇의 과실이다. 중생의 몸 가운데 사마타의 청정하고 윤택한 선정이라고 하는 물[定水]이 없다면 부처님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여래의 과실이 아니라 중생의 과실인 것이다. 물은 삼마지[等持]의 깨끗하고 윤택한 성품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여래께서는 실로 묘선(妙善)인 무루법의 그림자라서 감응[感]이 있으면 그에 나타나고 감응이 없으면 마치 색맹인 자가 전혀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하니 법의 광명이 태양과 같기 때문이네’란 말하자면 모든 부처님의 태양과 같은 광명[佛日]은 계경 등의 정법(正法)의 말씀의 빛[言光]을 발하여 모든 유정 세간을 두루 비추어 연이 있는 자에게는 나타난다. 나머지 보지 못하는 자는 그 자신의 과실이지 여래의 과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간의 햇빛[日流光]이 눈이 있는 자에게는 보이지만 색맹인 자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017_0258_a_01L釋曰:此頌顯示顯現甚深.問:若如來身,是常住者,於一切時,何故不現?答:衆生罪不現,如月於破器.如破器中,水不得住,月影不現,此非月過,是器之失.衆生身中,無奢摩他,淸潤定水,佛影不現,非如來過,是衆生失.水喩等持,淸潤性故.如說如來,是眞妙善,無漏法影,有感斯現,若無感者,猶如生盲不能睹見.遍滿諸世閒,由法光如日者,謂諸佛日放契經等正法言光,遍照一切有情世閒,有緣斯見不見者,是其自過,非如來失.如世閒日流光遍照,有目者睹,盲者不見.
【論】혹은 등정각을 나투고 혹은 열반함이 불[火]과 같으며 이것은 일찍이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니니[未曾非有]모든 불신이 상주하기 때문이네.
017_0258_a_14L論曰:或現等正覺,
或涅槃如火,
此未曾非有,
諸佛身常故.

【釋】이 게송은 등각ㆍ열반을 시현하는 깊고 깊음을 현시한다.
‘혹은 등정각을 나투고 혹은 열반함이 불과 같으며’란, 세간의 불은 어느 곳에서는 치성하게 타오르고 어느 곳에서는 꺼져 버리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이다. 모든 선근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등정각을 나투어 그로 하여금 성숙시키고 속히 해탈을 얻게 한다. 모든 선근이 성숙하여 이미 해탈한 자에게는 반열반을 나툰다. 왜냐하면 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찍이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니니’ 등의 그 의미는 이해하기 쉽다.
017_0258_a_17L釋曰:此頌顯示示現等覺涅槃甚深.或現等正覺,或涅槃如火者,如世閒火,有處燒燃`有處息滅.諸佛亦爾,於諸善根,未成熟者,現等正覺,令其成熟,速得解脫於諸善根,已得成熟,已解脫者,現般涅槃,無所爲故.此未曾非有等,其義易了.
017_0258_b_01L
【論】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법[非聖法]과 인간세계[人趣]와 살기 괴로운 세계[惡趣]와 청정한 행이 아닌 법[非梵行法]에서 가장 뛰어난 자체(自體)로 머무르시네.
017_0258_b_01L論曰:佛於非聖法,
人趣及惡趣,
非梵行法中,
最勝自體住.

【釋】이 게송은 머무름의 깊고 깊음을 현시한다.
‘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법에 가장 뛰어난 자체로 머무르시네’란 말하자면 불선(不善)에 가장 뛰어난 자체에 의해서 머무른다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머무름이란 곧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의 머무름이며 불선법을 연하여 안주하기 때문이다.
‘인간세계[人趣]와 살기 괴로운 세계[惡趣]에서 가장 뛰어난 자체에 머무르시네’란 말하자면 인간세계와 그리고 모든 살기 괴로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자체에 의해서 머무른다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머무름은 곧 모든 정려와 모든 등지(等至)에 머무르는 것이며 저 세계[趣]를 연하여 안주하기 때문이다.
‘청정한 행이 아닌 법에서 가장 뛰어난 자체로 머무르시네’란 말하자면 청정한 행이 아닌 법에서 가장 뛰어난 자체에 의해서 머무른다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머무름은 4무량이며 범주(梵住)라고도 한다. 청정한 행이 아닌 것을 연하여 안주하기 때문이다.
017_0258_b_04L釋曰:此頌顯示住甚深.於非聖法,最勝自體住者,謂於不善,由最勝自體住最勝住,卽空`無願及無相住,緣不善法,而安住故.於人趣及惡趣,最勝自體住者,謂於人趣及諸惡趣,由最勝自體住最勝住,卽諸靜慮`諸等至住,由緣彼趣而安住故.非梵行法中,最勝自體住者,謂於非梵行法中,由最勝自體住最勝住,卽四無量,名爲梵住,緣非梵行,而安住故.

【論】부처님께서는 모든 곳에서 행하시지만 또한 한곳도 행하시지 않으며 모두에게 몸을 나투시지만 6근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네.
017_0258_b_14L論曰:佛一切處行,
亦不行一處,
於一切身現,
非六根所行.
017_0258_c_01L
【釋】이 게송은 자체의 깊고 깊음을 현시한다. 자체라고 하는 것은 즉 여래의 상주법신과 이루어진 덕을 모두 자체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곳에서 행하시지만’이란 후득지는 모든 곳을 두루 행한다는 것이다. 어느 곳에 두루 행하는가? 선ㆍ불선ㆍ무기ㆍ유루ㆍ무루ㆍ유위ㆍ무위 등의 차별적인 경계를 말한다.
‘또한 한곳도 행하시지 않으며’란 무분별지는 분별이 없기 때문에 모든 차별적인 경계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몸을 나투시지만’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변화신은 모든 곳에서 생을 받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6육근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네’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제일의(第一義)의 상주법신은 모든 생처(生處)와 나락가(那落迦) 등의 동분유정(同分有情)6)에 의해 능히 취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017_0258_b_17L釋曰:此頌顯示自體甚深.言自體者,卽是如來,常住法界,及所成德,摠名自體.佛一切處行者,謂後得智遍行一切.於何遍行?謂善不善無記`有漏無漏`有爲無爲等,差別境界.亦不行一處者,謂無分別智無分別故,不行一切差別境界.於一切身現者,謂變化身,於一切處,現受生故.非六根所行者,謂第一義,常住法身,非諸生處那落迦等,同分有情,所能取故.

【論】번뇌를 조복하여도 멸하지 않으니 마치 독이 주문에 의해서 없어지는 것과 같다. 미혹[惑]7)에 머무르고 미혹이 다함에 이르러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하네.
017_0258_c_04L論曰:煩惱伏不滅,
如毒呪所害,
留惑至惑盡,
證佛一切智.

【釋】이 게송은 번뇌를 끊는 깊고 깊음을 현시한다.
‘번뇌를 조복하여도 멸하지 않으니’란 보살의 지위에서는 모든 번뇌를 조복했지만 아직은 영원히 끊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독이 주문에 의해서 없어지는 것과 같다’란 비유하면 여러 가지 독은 신령스럽고 영험한 주문으로 인하여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그 본체는 아직 멸하지 않을지라도 근심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이 번뇌 또한 이와 같아서 염지력(念智力)에 의해 현행의 번뇌[纏]를 조복할지라도 수면(隨眠)은 오히려 있다.
017_0258_c_07L釋曰:此頌顯示斷煩惱甚深.煩惱伏不滅者,謂菩薩位中,伏諸煩惱,而未永斷.如毒呪所害者,譬如衆毒爲神驗呪之所損害,體雖未滅,而不爲患.煩惱亦爾,由念智力,伏現行纏,隨眠猶在.
무슨 까닭에 번뇌인 수면이 오히려 있는가?
성문승이 속히 반열반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 도리에 의해서 번뇌를 원인[因]으로 삼으며 번뇌가 다함에 이르러 일체지(一切智)를 얻는 것이다.
다음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58_c_13L何故煩惱隨眠猶在?恐同聲聞乘速般涅槃故,由此道理,煩惱爲因,至煩惱盡,得一切智.如有頌言:

염지력에 의해서 제어되어
번뇌는 보리를 증득하며
독이 주문에 의해 좌지우지[所持]되는 것은
과실(過失)이 공덕을 이루는 것과 같네.
017_0258_c_15L念智力所制,
煩惱證菩提,
如毒呪所持,
過失成功德.

【論】번뇌는 각분(覺分)을 이루고 생사는 열반이 되며 대방편을 갖추기 때문에모든 부처님께서는 부사의(不思議)하시네.
017_0258_c_17L論曰:煩惱成覺分,
生死爲涅槃,
具大方便故,
諸佛不思議.
【釋】이 게송은 불가사의의 깊고 깊음을 현시한다. 모든 번뇌는 전환하여 각분을 이루고 생사의 번뇌는 곧 열반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과는 세간의 이치로 가히 사의(思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017_0258_c_20L釋曰:此頌顯示不可思議甚深.謂諸煩惱轉成覺分,生死苦惱,卽爲涅槃,如是因果,非世閒理,可得思議.
017_0259_a_01L【論】이와 같이 설한 바 깊고 깊음[甚深]에는 열두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생주(生住)ㆍ업주(業住)의 깊고 깊음, 안립ㆍ숫자[數]ㆍ업의 깊고 깊음, 등각을 현현하는 것의 깊고 깊음, 탐욕을 여의는 것의 깊고 깊음, 5온을 단멸하는 것의 깊고 깊음, 성숙의 깊고 깊음, 현현의 깊고 깊음, 등각과 열반을 시현하는 깊고 깊음, 머무름의 깊고 깊음, 자체를 현시하는 깊고 깊음, 번뇌를 끊는 깊고 깊음, 불가사의의 깊고 깊음이다.
017_0258_c_23L論曰:應知如是所說甚深有十二種,謂生住業住甚深`安立數業甚深`現等覺甚深`離欲甚深`斷蘊甚深`成熟甚深`顯現甚深`示現等覺涅槃甚深`住甚深`顯示自體甚深`斷煩惱甚深`不可思議甚深.
【釋】이 열두 가지는 모두 깨달아 알기 어렵기 때문에 깊고 깊다고 이름한다. 하나하나의 차별의 특징은 앞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다.
017_0259_a_06L釋曰:此十二種,皆難覺了,故名甚深.一一別相,如前已說.
【論】만약 모든 보살이 부처님의 법신을 생각[念]할 경우에는 몇 가지 생각에 의해서 이 생각을 닦아야 하는가?
보살이 부처님의 법신을 생각하는 것을 간략히 설하면 일곱 가지 생각에 의해서 마땅히 이 생각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법에 대해서 자재하이 굴리심[自在轉]을 얻으셨다는 이런 생각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세계에 대해서 걸림없는 신통[無礙通]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259_a_08L論曰:若諸菩薩,念佛法身,由幾種念,應修此念?略說菩薩,念佛法身,由七種念,應修此念.一者諸佛於一切法,得自在轉,應修此念,於一切世界,得無㝵通故.此中有頌:

유정계에 두루 편만하셔서
장애를 갖추셔도 원인[因]을 없애며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전전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는 자재가 없네.
017_0259_a_13L有情界周遍,
具障而闕因,
二種決定轉,
諸佛無自在.
017_0259_b_01L
둘째는 여래의 몸이 상주한다는 이러한 생각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여는 끊임없이 번뇌[垢]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여래께서는 가장 뛰어나서 무죄(無罪)이다라는 이러한 생각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의 계박을 아울러 여의게[離繫]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여래께서는 의식적인 노력[功用]이 있을 수 없다는 이러한 생각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노력을 짓지 않고도 모든 불사(佛事)는 그칠 날[休息]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여래께서는 큰 부귀와 즐거움을 받는다는 이러한 생각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청정한 불국토는 매우 부귀하고 즐겁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여래께서는 모든 염오를 여읜다는 이러한 생각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간에 태어나도 모든 세간법에 능히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여래께서는 능히 큰 사업을 이루신다는 이러한 생각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등각ㆍ반열반 등을 현시하여 아직 성숙하지 않은 모든 유정들을 능히 성숙하게 하고, 이미 성숙한 모든 유정들을 해탈시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두 게송이 있다.
017_0259_a_15L二者,如來其身常住,應修此念,眞如無閒解脫垢故三者,如來最勝無罪,應修此念,一切煩惱及所知障,竝離繫故四者,如來無有功用,應修此念,不作功用一切佛事無休息故五者如來受大富樂,應修此念,淸淨佛土大富樂故六者如來離諸染污,應修此念,生在世閒,一切世法,不能染故七者如來能成大事,應修此念,示現等覺般涅槃等,一切有情,未成熟者,能令成熟,已成熟者,令解脫故.此中有二頌:

원만(圓滿)은 스스로의 마음에 속하고
상주(常住)와 청정을 구족하고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
능히 유정에게 큰 법락[大法樂]을 보시하고
017_0259_b_04L圓滿屬自心,
具常住淸淨,
無功用能施,
有情大法樂.

두루 행[遍行]하여 의지가 없으며
평등하게 많은 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부처님에 대해 지혜로운 이는
마땅히 모든 생각을 닦아야 하네.
017_0259_b_06L遍行無依止,
平等利多生,
一切佛智者,
應修一切念.

【釋】이것은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법신공덕에 대한 생각을 닦아야 함을 현시한다.
‘일체의 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굴림을 얻으셨다’란 모든 여래께서는 모든 법에 대해서 닦아 익히기 때문에 자재한 굴림을 얻는다는 것이다. 잠시라도 욕락을 일으키면 모든 공덕은 모두 다 원만하게 현전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여래께서 일체의 무량하고 무변인 모든 세계에 대해서 두루 신통하여 장애가 없다면 무슨 인연으로 모든 유정은 반열반에 들지 못하는가?
저들에게는 장애가 있고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총괄적으로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굴림을 얻으셨음을 밝히고 지금은 개별적으로 부처님께서는 유정에 대해서 자재를 얻지 못하셨음을 현시하기 때문에 가타를 설하는 것이다.
017_0259_b_07L釋曰:此顯菩薩修念諸佛法身功德.於一切法,自在轉者,謂諸如來,於一切法,由串習故,得自在轉,暫起欲樂,一切功德,皆能圓滿現在前故.若諸如來,普於一切無量無邊諸世界中,神通無㝵,何因緣故,一切有情,不般涅槃?由彼有障,及無因故.前摠明佛,於一切法,得自在轉,今別顯示佛於有情不得自在,故說伽他.
017_0259_c_01L‘유정계에 두루 편만하셔서 장애를 갖추셔도 원인을 없애며’란 말하자면 번뇌ㆍ업ㆍ이숙ㆍ장애를 갖추기 때문에 ‘장애를 갖추셔도’라고 하는 것이다. 매우 날카로운 번뇌와 모든 무간업(無間業)과 어리석음과 완고하여 도리에 어두운 것은 위의 차례와 같다. 열반에 원인이 없고 종성이 없기 때문에 그 게송에 ‘원인을 없애며’라고 한다.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전전하면’이란 중업(重業)을 짓는 결정과 이숙을 받는 결정을 말한다. 중업을 짓는 결정이란 수시로 닦아서 동류인과 등류과를 결정적으로 상속시키는 것이다. 미생원(未生怨)8)이 부왕 등을 해치는 것과 같다. 이숙을 받는 결정이란 결정적으로 감수하는 이숙업을 지으면 결정적으로 미래에 모든 이숙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017_0259_b_16L有情界周遍具障而闕因者,謂具煩惱業異熟障,故名具障,猛利煩惱,諸無閒業,愚戇頑嚚,如其次第.無涅槃因,無種性故,名爲闕因.二種決定轉者,謂作重業決定`受異熟決定.作重業決定者,謂數串習,令同類因,與等流果,決定相續,如未生怨害父王等.受異熟決定者,謂作決定感異熟業,決定當受諸異熟果.
모든 석종(釋種)이 결정적으로 비로택가(毘盧宅迦)왕9) 때문에 살해되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위에서 설한바 유정에 대해서 모두 자재하게 열반을 얻게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앞에서 총괄적으로 여래께서는 일체의 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굴림을 얻으셨다고 설할지라도 지금 개별적으로 자재를 얻지 못함을 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래의 몸이 상주한다’라고 하는 것은 가장 청정한 진여를 자체로 삼기 때문에, 바꿔 전환함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변이(變異)가 없기 때문이다.
‘여래께서는 가장 뛰어나서 무죄이다’란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의 죄를 영원히 끊었기 때문이다.
‘여래께서는 의식적인 노력[功用]이 있을 수 없다’란 하늘의 음악과 같은 것을 말하며 그 뜻은 이해하기 쉽다.
017_0259_c_02L如諸釋種決定,應爲毘盧宅迦王所殺害.諸佛於上所說有情,皆無自在,令得涅槃.是故前雖摠說,如來於一切法,得自在轉,今須別說不得自在.如來身常住者,最淸淨眞如,爲自體故`無改轉故`無變異故.如來最勝無罪者,謂諸煩惱及所知障罪永斷故.如來無功用者,謂如天樂,其義易了.
‘여래께서는 큰 부귀와 즐거움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넓고 크며 청정한 불국토를 공덕으로 장엄하는 큰 법락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여래께서는 모든 염오를 여읜다’라고 하는 것은 홍련화와 같음을 말하며 그 뜻은 이해하기 쉽다.
‘여래께서는 능히 큰 사업을 이루신다’라고 하는 것은 등각과 반열반 등을 나투어 유정의 광대한 이익을 성취하고 감능하는 바대로 그로 하여금 성숙하여 해탈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로 닦게 되는 염불(念佛)에 대해서 다시 두 게송으로 간략하게 그 뜻을 섭수한다.
017_0259_c_10L如來受大富樂者,受用廣大淸淨佛土功德莊嚴大法樂故.如來離染污者,如紅蓮花,其義易了.如來能成大事者,謂現等覺般涅槃等,成辦有情廣大義利,如所堪能,令彼成熟,得解脫故.如是七種所修念佛,復以二頌,略攝其義.
017_0260_a_01L처음의 ‘원만’이라는 말은 모든 게송을 관통한다.
‘스스로의 마음에 속하는 원만’이란 이것은 첫 번째 일체의 법에 대하여 자재하게 굴리는 모습을 섭수한다.
‘상주를 구족하는 원만’이란 이것은 두 번째의 법신상주의 모습을 섭수한다.
‘청정을 구족한 원만’이란 이것은 세 번째 가장 뛰어나서 무죄의 모습을 섭수한다.
‘의식적인 노력 없는 원만’이란 이것은 네 번째 의식적인 노력이 없음의 모습을 섭수한다.
‘능히 유정에게 큰 법락을 보시하는 원만’이란 이것은 다섯 번째 큰 법락의 모습을 섭수한다.
‘두루 행하여 의지가 없는 원만’이란 이것은 여섯 번째 세간법에 능히 물들지 않는 모습을 섭수한다.
‘평등하게 많은 생을 이롭게 하는 원만’이란 이것은 일곱 번째 능히 대사업을 이루는 모습을 섭수한다. 왜냐하면 능히 넓고 큰 이락의 사업을 짓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이란 모든 여래의 원만한 공덕을 말한다.
‘지혜로운 자’라고 말하는 것은 대보살을 말한다.
‘마땅히 모든 생각을 닦아야 하네’라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갈은 일곱 가지 수념(隨念)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하고 명기(明記)하며 망실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 ‘생각[念]’의 뜻이다.
017_0259_c_16L初圓滿言,貫通一切.屬自心圓滿者,此攝第一於一切法自在轉相.具常住圓滿者,此攝第二身常住相.具淸淨圓滿者,此攝第三最勝無罪相.無功用圓滿者,此攝第四無功用相.能施有情大法樂圓滿者,此攝第五大法樂相.遍行無依止圓滿者,此攝第六一切世法不能染相.平等利多生圓滿者,此攝第七能成大事相,能作廣大利樂事故.一切佛者,謂諸如來圓滿功德.言智者者,謂大菩薩.應修一切念者,應修如是七種隨念.憶持明記,令不忘失,是其念義.
【論】또한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불국토의 양상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10)
보살장백천계경(菩薩藏百千契經)11)의 서품에서 설한 것과 같다.
“박가범께서는 가장 뛰어난 빛을 내는 7보로 장엄되고, 대광명을 내어 두루 모든 끝없는 세계[無邊世界]를 비추고, 무량한 방위 공간[方所]을 연이어 묘하게 장식하며, 둘레는 끝이 없고 그 양은 헤아리기 어려우며, 삼계에서 행하는[三界所行] 곳을 벗어나고12), 뛰어난 출세간의 선근에 의해 일어나는 곳으로서, 가장 자재한 청정식[淨識]을 모습으로 삼는다. 여래가 계신 곳이며, 모든 대보살 대중이 운집한 곳으로, 무량한 천(天)ㆍ용(龍)ㆍ약차(藥叉)ㆍ건달박(健達縛)ㆍ아소락(阿素洛)ㆍ게로다(揭路茶)ㆍ긴날락(緊捺洛)ㆍ막호락가(莫呼洛伽)ㆍ인비인(人非人)13) 등이 좌우에서 받든다. 넓고 큰 법의 맛인 희락에 의해 유지되는 곳으로서 모든 중생에게 모든 이익을 지으며, 모든 번뇌의 재난을 없애고, 여러 마(魔)14)를 멀리 여의며, 모든 장엄보다 뛰어난 여래장엄의 의지처이다.
017_0260_a_06L論曰:復次諸佛淸淨佛土相,云何應知?如菩薩藏,百千契經序品中說.謂薄伽梵住最勝光曜七寶莊嚴放大光明普照一切無邊世界,無量方所妙飾閒列,周圓無際,其量難測,超過三界所行之處,勝出世閒善根所起,最極自在淨識爲相.如來所都,諸大菩薩衆所雲集,無量天`龍`藥叉`健達縛`阿素洛`揭路茶`緊捺洛`莫呼洛伽`人非人等,常所翼從,廣大法味喜樂所持,作諸衆生一切義利,蠲除一切煩惱災撗,遠離衆魔過諸莊嚴.如來莊嚴之所依處.
017_0260_b_01L크게 기억하고 판별하며 수행함[大念慧行]을 노니는 길[遊路]로 삼고, 크게 그침과 미묘한 관찰[大止妙觀]을 교법[乘]으로 삼으며, 큰 공[大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해탈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고, 무량한 공덕중(功德衆)으로 장엄되어지고 대보화왕에 의해 건립된 곳인 대궁전에 머무르신다.”
이와 같이 청정한 불국토는 빛깔[顯色]의 원만ㆍ형체[形色]의 원만ㆍ분량(分量)의 원만 방위와 처소의 원만ㆍ원인[因]의 원만ㆍ결과[果]의 원만ㆍ주(主)의 원만ㆍ보익(輔翼)의 원만ㆍ권속의 원만ㆍ맡아 지님[住持]의 원만ㆍ사업의 원만ㆍ섭익(攝益)의 원만ㆍ두려움 없음[無畏]의 원만ㆍ머무는 곳[住處]의 원만ㆍ길[路]의 원만ㆍ교법[乘]의 원만ㆍ문(門)의 원만ㆍ의지(依持)의 원만을 현시한다.
또한 이와 같은 청정한 불토를 수용하는데 한결같이 청정하고 미묘하며 한결같이 안락하며 한결같이 죄가 없으며 한결같이 자재하다.
017_0260_a_19L大念慧行,以爲遊路,大止妙觀,以爲所乘,大空無相無願解脫,爲所入門,無量功德衆所莊嚴,大寶花王之所建立大宮殿中.如是顯示淸淨佛土,顯色圓滿`形色圓滿`分量圓滿`方所圓滿`因圓滿`果圓滿`主圓滿`輔翼圓滿`眷屬圓滿`任持圓滿`事業圓滿`攝益圓滿`無畏圓滿`住處圓滿`路圓滿`乘圓滿`門圓滿`依持圓滿.復次受用,如是淸淨佛土,一向淨妙`一向安樂`一向無罪`一向自在.
【釋】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불토에 의지하여 ‘박가범께서는 가장 뛰어난 빛을 내는 7보로 장엄되고……머무르신다’라고 설한다.
‘가장 뛰어난 빛을 내는 7보로 장엄되고’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부처님의 정토의 빛은 가장 뛰어나서 일곱 가지 오묘한 보배를 써서 장식하고 장엄한다는 것이다. 또는 즉 이 7보는 가장 뛰어난 빛이라는 것이다.
7보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금, 둘째는 은, 셋째는 유리, 넷째는 모사락(牟娑洛) 보배15), 다섯째는 알습마게사(遏濕摩揭娑) 보배16)로서 이것은 다시 무엇인가 하면 이른바 제청(帝靑)ㆍ대청(大靑) 등의 보배이며, 여섯째는 적진주 보배로서 말하자면 적충(赤蟲)에서 나온 것을 적진주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갈계달약가(獦鷄怛若迦) 보배17)이다.
017_0260_b_06L釋曰:此依諸佛淸淨佛土,說薄伽梵住最勝光曜七寶莊嚴等言.最勝光曜七寶莊嚴者,謂佛淨土光曜最勝,用七妙寶綺飾莊嚴,或卽七寶最勝光曜.言七寶者,一金二銀三瑠璃牟娑洛寶五遏濕摩揭娑寶,此復何等?所謂帝靑大靑等寶六赤眞珠寶,謂赤虫所出,名赤眞珠七羯雞怛諾迦寶.
017_0260_c_01L‘대광명을 내어 두루 모든 끝없는 세계[無邊世界]를 비추고’라고 하는 것은 즉 가장 뛰어나게 빛을 비추는 7보는 대광명을 내어 두루 모든 끝없는 세계를 비추며, 혹은 부처님의 정토에 대광명을 내어 두루 모든 끝없는 세계를 비춘다는 것이다. 그에 또한 끝없는 세계에 두루한다. 이 위에 있는 두 구절은 부처님 정토의 빛깔의 원만을 나타낸다.
‘무량한 방위공간[方所]을 연이어 묘하게 장식하고’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정토의 무량한 방위공간에 연이어 오묘하게 장식한다는 것이다. 지혜를 으뜸으로 삼아서 안포(安布)하고 그 사이를 장식하는 것과 같다. 이 구절은 형체의 원만을 현시한다.
‘둘레는 끝이 없고 그 양은 헤아리기 어려우며’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정토의 그 양과 둘레는 끝이 없어서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혹은 다시 그 양이 변제(邊際)가 없기 때문에 둘레는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분량의 원만을 현시한다.
017_0260_b_15L放大光明普照一切無邊世界者,謂卽最勝光曜七寶放大光明遍照一切無邊世界.或淨佛土放大光明,普照一切無邊世界,其體亦遍無邊世界.此上二句,顯佛淨土,顯色圓滿.無量方所妙飾閒列者,謂佛淨土無量方所妙飾閒列,如慧爲先安布閒飾,此句顯示形色圓滿.周圓無際其量難測者,謂佛淨土其量周圓無際難測,或復其量無邊際故,周圓難測,此句顯示分量圓滿.
‘삼계에서 행하는[三界所行] 곳을 벗어나고’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정토의 방처(方處)는 삼계의 행처(行處)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계의 애(愛)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업을 묶는 이숙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방위와 처소의 원만을 현시한다.
‘뛰어난 출세간의 선근에 의해 일어나는 곳으로서’라고 하는 것은 출세간의 선근을 원인으로 삼고 후득의 뛰어난 선근을 원인으로 삼아 정토가 생기한다는 것이며, 자재천 등을 정토의 원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원인의 원만을 현시한다.
‘가장 자재한[最極自在] 청정식[淨識]을 모습으로 삼는다’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정토는 가장 자재한 청정한 심식을 체상(體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오직 식만이 있기 때문에 식을 떠나서 외부의 특별한 보배 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깨끗한 심식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보물 등과 비슷하게 변현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결과의 원만을 현시한다.
017_0260_c_02L超過三界所行之處者,謂佛淨土方處超過三界行處,非三界愛之所行故`非諸繫業異熟果故,此句顯示方所圓滿.勝出世閒善根所起者,謂出世閒善根爲因,及後得勝善根爲因,淨土生起非自在等爲淨土因.此句顯示因圓滿.最極自在淨識爲相者,謂佛淨土最極自在淸淨心識,以爲體相,唯有識故,非離識外別有寶等,卽淨心識,如是變現似衆寶等,此句顯示果圓滿.
‘여래께서 계신 곳이며’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부처님을 주인으로 삼는 곳이며 이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주(主)의 원만을 현시한다.
‘모든 대보살 대중이 운집하는 곳으로’라고 하는 것은 오직 대지(大地)에 들어간 보살만이 있어서 그 중간에 머물러 여래를 보좌하고 성문승이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보익의 원만을 현시한다.
‘무량한 천ㆍ용ㆍ약차’ 등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천 등이 그 중간에 머물러서 권속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화신으로서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18) ‘막호락가(莫呼洛伽)19)’라고 하는 것은 큰 이무기를 포함한다. 이 구절은 권속의 원만을 현시한다.
‘넓고 큰 법의 맛인 희락에 의해 유지되는 곳으로서’라고 하는 것은 정토에서는 대승의 법의 맛인 희락을 음식[食]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맡아 지님[任持]의 원만을 현시한다. 식(食)은 모든 신명(身命)을 능히 맡아 지니기 때문이다.
017_0260_c_13L如來所都者,謂佛爲主都此非餘,此句顯示主圓滿.諸大菩薩衆所雲集者,唯有已入大地菩薩,止住其中,輔翼如來,非聲聞等,此句顯示輔翼圓滿.無量天龍藥叉等者,謂諸天等止住其中,以爲眷屬,此化非實.莫呼洛伽者,此攝大蟒.此句顯示眷屬圓滿.廣大法味喜樂所持者,謂淨土中,大乘法味喜樂爲食,此句顯示任持圓滿,食能任持諸身命故.
017_0261_a_01L‘모든 중생에게 모든 이익을 지으며’라고 하는 것은 이 식(食)을 먹고 나서 모든 유정에 대해서 모든 이롭고 즐거운 사업을 짓는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사업의 원만을 현시한다.
‘모든 번뇌의 재난을 없애고’라고 하는 것은 정토에서는 모든 번뇌에서 짓게 되는 재난이 없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섭익(攝益)의 원만을 현시한다.
‘여러 마군을 멀리 여의며’라고 하는 것은 번뇌마ㆍ온마(蘊魔)ㆍ사마(死魔)ㆍ천마(天魔)의 네 가지 원적(怨敵)을 여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두려움 없음의 원만을 현시한다.
‘모든 장엄보다 뛰어난 여래장엄의 의지처이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보살의 장엄보다 뛰어난 여래 장엄의 의지처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머무는 곳의 원만을 현시한다. 모든 머무는 곳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017_0260_c_22L作諸衆生一切義利者,食此食已,作諸有情諸利樂事,此句顯示事業圓滿.蠲除一切煩惱災撗者,謂淨土中,無諸煩惱所作災撗,此句顯示攝益圓滿.遠離衆魔者,謂離煩惱`薀`死`天魔,四種怨敵,此句顯示無畏圓滿.過諸莊嚴,如來莊嚴之所依處者,謂過一切菩薩莊嚴如來莊嚴之所依處,此句顯示住處圓滿,於諸住處,最爲勝故.
‘크게 기억하고 판별하며 수행함[大念慧行]을 노니는 길[遊路]로 삼고’라고 하는 것은 사유함으로써 이루어지는[思所成] 혜를 대염(大念)이라고 이름하며, 들음으로써 이루어지는[聞所成] 혜를 대혜(大慧)라고 이름하며, 닦음으로써 이루어지는[修所成] 혜를 대행(大行)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길[路]의 원만을 현시한다. 노니는 길[遊路]이란 즉 도(道)의 다른 이름이다.
‘크게 그침과 미묘한 관찰[大止妙觀]을 교법[乘]으로 삼고’라고 하는 것은 사마타ㆍ비발사나에 올라서 3혜(慧)라고 하는 길에서 놀며 나아가야 하는 동산으로 간다. 모든 성문ㆍ독각ㆍ보살이 타는 지관(止觀)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대(大)라고 이름한다. 이 구절은 교법[乘]의 원만을 현시한다.
‘큰 공[大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해탈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고’라고 하는 것은 3해탈문20)을 취입(趣入)의 처소로 삼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이란 통(通)이며 ‘큰’이란 뜻은 앞의 경우와 같다. 이 구절은 문(門)의 원만을 현시한다.
017_0261_a_08L大念慧行以爲遊路者,思所成慧,名爲大念,聞所成慧,名爲大慧,修所成慧,名爲大行.此句顯示路圓滿,遊路卽是道之異名.大止妙觀以爲所乘者,乘奢摩他`毘鉢舍那,遊三慧路往所趣園,勝諸聲聞`獨覺`菩薩所乘止觀,故名爲大.此句顯示乘圓滿.大空無相無願解脫,爲所入門者,三解脫門,爲趣入處.門者通也,大義如前.此句顯示門圓滿.
017_0261_b_01L‘무량한 공덕중(功德衆)으로 장엄되어지고 대보화왕21)에 의해 건립된 곳인’이라고 하는 것은 비유하면 세간에서는 보배로 장엄을 갖추는 것과 같이 여러 가지 보배로써 이 부처님의 정토를 장엄한다는 것이다. 의지할 바 대보흥련화왕은 무량한 공덕중에 의해서 장엄된다. 지륜(地輪) 등이 풍륜(風輪)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것과 같이 정토는 무량한 공덕중에 의해 장엄되어지고 대보화왕에 의해 건립된 곳이다. 이 흥련화는 여러 가지 꽃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설하기를 대보화왕이라고 이름한다. 혹은 즉 여래를 설하여 대왕ㆍ대법왕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이 흥련화는 부처님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주인을 따라서 명칭을 짓는 것이다. ‘건립된 곳’이란 부처님의 정토는 이 화왕(花王)에 의지하여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상속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의지(依持)의 원만을 현시한다.
017_0261_a_18L無量功德衆所莊嚴大寶花王之所建立者,譬如世閒寶莊嚴,具衆寶莊嚴此佛淨土所依大寶紅蓮花王,無量功德衆所莊嚴,如地輪等依風輪住.如是淨土無量功德,衆所莊嚴大寶花王之所建立,此紅蓮花於衆花中,最爲殊勝,是故說名大寶花王.或卽如來說名大王大法王故,此紅蓮花,是佛依處,從主爲名.所建立者,謂佛淨土,依此花王,長時相續,無有閒絕.此句顯示依持圓滿.
‘이와 같은 청정한 불국토를 수행하는데 한결같이 청정하고 미묘하며’라고 하는 것은 부정(不淨)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똥의 더러움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안락하며’라고 하는 것은 고수(苦受)와 처중수(處中受)22)가 없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죄가 없으며’라고 하는 것은 불선 및 무기가 없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자재하다’라고 하는 것은 바깥의 조건[外緣]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잠시라도 마음에 일어나면 여러 가지 일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017_0261_b_05L受用如是淸淨佛土一向淨妙者,無不淨故,離糞穢故.一向安樂者,無有苦受及處中受故.一向無罪者,無有不善及無記故.一向自在者,不待外緣故,暫起於心衆事辦故.
【論】또 다음에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의 법계는 모든 때에 능히 다섯 가지 업을 지을 수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모든 유정의 재난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잠시 볼 때에도 곧 눈멀고 귀먹고 미친 등의 여러 재난[災橫]을 능히 구제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살기 괴로운 세계를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모든 유정을 불선의 장소[不善處]로부터 뽑아내어 선한 장소[善處]에 두기 때문이다.
셋째는 방편 아닌 것을 구제하여 업으로 삼는다. 모든 외도로 하여금 방편 아닌 것을 버리게 하고 해탈행을 구하도록 하여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 가운데에 두기 때문이다.
넷째는 유신견[薩迦耶見]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능히 삼계를 초월한 도를 수여(授與)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교법[乘]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다른 교법에 나아가려고 하는 보살과 부정종성(不定種性)의 성문들을 구제하여 편안한 곳에서 대승의 행을 닦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업에서 모든 부처님의 작용[業用]은 평등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261_b_10L論曰:復次應知如是諸佛法界,於一切時,能作五業:一者救濟一切有情災撗爲業,於蹔見時,便能救濟盲聾狂等,諸災撗故二者救濟惡趣爲業,拔諸有情出不善處置善處故三者救濟非方便爲業,令諸外道捨非方便求解脫行,置於如來聖教中故者救濟薩迦耶爲業,授與能超三界道故五者救濟乘爲業,拯拔欲趣餘乘菩薩及不定種性諸聲聞等,安處令修大乘行故.於此五業,應知諸佛業用平等.此中有頌:

원인[因]과 의지신[依止身]과 사업[事] 그리고 성품[性]과 행(行)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하네.
세간의 이러한 차별적 힘이
도사(導師)에게는 없기 때문에 이와 같지 않네. 23)
017_0261_b_22L因依事性行,
別故許業異,
世閒此別力,
無故非導師.
017_0261_c_01L
【釋】모든 부처님의 법계는 곧 법신이다. 항상 법신이며 항상 다섯 가지 업을 지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유정의 재난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는 인연으로 생겨나는 병 등의 근심과 고통을 재난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잠시 볼 때에도 곧 눈멀고 귀먹고 미친 등의 여러 재난(災橫)을 능히 구제한다’란 계경에서 “만약 부처님을 볼 때에 눈먼 자는 눈을 얻고 귀먹은 자는 귀를 얻으며 미친 자는 생각을 얻는다” 등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묻기를, 설한 바와 같이 법신은 6근의 경계가 아닌데 어떻게 지금 눈먼 이가 눈 등을 얻어서 법신을 보는 것을 법신의 업이라고 설하는가?
법신을 보는 것은 옛날 대원(大願)이 끌어당기는 힘으로 말미암아 법신을 원만히 성취하고 다음으로 변화신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능히 눈먼 사람이 눈을 얻게 된다. 옛날 자량이 끌어당긴 세력으로 말미암아 법신을 증득하고 자유자재로 작용을 일으킨다. 어떤 기관의 끝의 바퀴로써 본래의 바퀴를 돌리는 것과 같다. 법신을 본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오직 화신을 볼 뿐이다.
017_0261_c_01L釋曰:諸佛法界卽是法身,應知恒時能作五業.救濟一切有情災撗爲業者,因緣所生病等憂苦,說名災撗.於暫見時,便能救濟盲聾狂等諸災撗者,如契經言:若見佛時,盲者得眼`聾者得耳`狂者得念,如是等.問:如說法身非六根境,云何今說盲得眼等,能見法身,爲法身業.答:見法身者,由昔大願引發勢力,成滿法身,次第發起變化身用,由此能令盲得眼等.由昔資糧引發勢力,證得法身,任運起用,如機關輪,以末歸本,言見法身,實唯見化.
‘살기 괴로운 세계를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란 불선의 장소에서 빼어내어 선의 장소에 두는 것을 비로소 구제라고 한다. 그 원인[因]이 없으면 결과[果] 또한 없기 때문이다.
‘방편 아닌 것을 구제하여 업으로 삼는다’ 등의 말은 그 문장이 분명하다.
‘유신견[薩迦耶見]를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에서 ‘가야’란 신(身)을 이름하고, ‘살’이란 허(虛)를 말한다. 그 몸이 허하기 때문에 살가야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가운데 신견(身見)의 전전이 되는 것은 곧 삼계의 모든 유루법이다. 저것에 대해서 벗어나는 법을 설해 주기 때문에 구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교법[乘]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란 부정종성의 보살과 성문 등으로 하여금 대보리를 얻게 하여 저들을 대승의 바른 행에 안립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017_0261_c_14L救濟惡趣爲業等者,拔不善處,置於善處,方名救濟,其因若無,果亦無故.救濟非方便,爲業等言,其文顯了.救濟薩迦耶爲業等者,迦耶名身,虛爲名薩,其身虛爲名薩迦耶.謂於其中,爲身見轉,卽是三界,有漏諸法.於彼說授出離法故,名爲救濟.救濟乘,爲業等者,爲令不定種性菩薩及聲聞等證大菩提,安立彼於大乘正行.
017_0262_a_01L이 다섯 가지 업에서 모든 부처님의 작용[業用]은 평등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시 게송으로 설하기를 ‘원인[因]과 의지신(依止身)과 사업[事] 등이 세간의 원인과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하네’라고 하며 천인(天人)의 원인[因]은 사람과 귀신 등의 원인[因]과 달라서 각각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업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지 않아서 원인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업에 차별이 있지 않다.
‘의지신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하네’에서 의지신(依止身)이란 신체를 말하고 이것의 차별 때문에 그 업에 차별이 있다. 그 천수(天授)와 사수(祠授)24)가 의지하는 몸[依身]이 다르기 때문에 그 업도 각각 다른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지 않아서 법신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 업에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017_0261_c_23L應知諸佛於此五業悉皆平等,爲顯此義,復說頌言.因依事等,世閒因別故,許業異者,謂天因別,人鬼等因,各各差別,故業有異.諸佛不爾,因無別故,非業有異.世閒依別故,許業異者,依謂身體彼差別故,其業有異.如彼天授與彼祠授,依身別故,其業各異.諸佛不爾,法身無別,故業非異.
‘사업[事]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하네’에서 사업이란 하게 되는 일[所作]을 말한다. 하게 되는 일의 차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 업에도 차별이 있다. 범부가 경영하는 농사일이 각기 다르고 상업일이 각기 다른 것과 같은 것인데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지 않아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업의 차이가 있지 않다.
‘성품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하네’에서 성품이란 의요(意樂)를 말한다. 세간을 이롭게 하는 의요와 안락하게 하는 의요는 그 경계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업에도 차이가 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지 않아서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의요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업에도 차이가 없다.
‘행(行)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하네’에서 행이란 의식적인 노력[功用]을 말한다. 작은 공용은 작은 업을 일으키고 만약 큰 공용일 경우에는 큰 업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공용이 다르기 때문에 그 업에 차이가 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지 않아서 일체 짓는 것 모두에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에 업의 차이가 없다.
‘세간의 이러한 차별적 힘이 도사(導師)에게는 없기 때문에 이와 같지 않네’란 이 다섯 가지 원인[因] 등 다섯 가지 차별적 힘이 없기 때문에 세간의 도사[世導師)25)에는 다섯 가지 업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017_0262_a_07L閒事別故,許業異者,事謂所作所用差別,事各別故,其業有異.如彼凡夫營農事別`商賈事別,如是一切.諸佛不爾,利衆生事,無差別故,非業有異.世閒性別故,許業異者,性謂意樂.如彼世閒利益意樂`安樂意樂,境界差別,故業有異.諸佛不爾,利益安樂一切有情,意樂無別,故業非異.世閒行別故,許業異者,行謂功用,如小功用能起小業,若大功用便起大業,功用別故,其業有異.諸佛不爾,一切所作,皆無功用,故業非異.此別力無故,非導師者,此因等五別力無故,非世導師五業差別.
【論】만약 이러한 공덕의 원만과 상응하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성문, 독각과 함께 하지 않는다. 어떤 의도로 부처님께서는 1승(乘)을 설하시는가? 여기에 대해서 두 게송이 있다.
017_0262_a_21L論曰:若此功德圓滿相應,諸佛法身不與聲聞`獨覺乘共,以何意趣佛說一乘?此中有二頌:
017_0262_b_01L
한 무리[一類]를 이끌어 섭수하시고
그리고 그 나머지를 맡아 지니기 위해서[任持]
부정종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께서는
1승을 설하시네.
017_0262_b_01L爲引攝一類,
及任持所餘,
由不定種性,
諸佛說一乘.

법과 무아와 해탈이
같기 때문이고 성품의 같지 않음과
두 가지 의요를 얻음과 변화[化]와
구경 때문에 1승을 설하시네.
017_0262_b_03L法無我解脫,
等故性不同,
得二意樂化,
究竟說一乘.

【釋】이 비밀한 뜻에 의지하여 부처님께서 1승을 설하심을 두 게송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한 무리[一類]를 이끌어 섭수하시고’란 부정종성의 성문을 요지(了知)하여 저들을 해탈로 가게 하기 위하여 방편을 끌어 섭수하시고 대승에 의지하여 반열반시키고자 1승을 설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를 맡아 지니기 위해서[任持]’란 그 밖의 부정종성의 보살을 맡아 지니기 위해서, 대승의 정진에서 물러날까 걱정하여서 1승을 설하여 맡아 지녀 머물게끔 하시고, 저 보살이 성문승에 의지하여 반열반에 들지 않게끔 한다는 것이다.
‘법이 같기 때문이고’란 법은 진여를 말한다. 모든 성문 등은 교법[乘]은 다르지만 모두 진여를 취한다. 취하는바 진여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1승이라고 설한다.
017_0262_b_04L釋曰:依此密意佛說一乘,二頌顯示.爲引攝一類者,了知不定種性聲聞,趣彼解脫,方便引攝,令依大乘,而般涅槃,故說一乘.及任持所餘者,爲欲任持其餘,不定種性菩薩,恐於大乘精進退壞,故說一乘任持令住,勿彼菩薩依聲聞乘,而般涅槃.法等故者,法謂眞如,諸聲聞等,乘雖差別,同趣眞如,所趣眞如,無有差別,故說一乘.
‘무아가 같기 때문이고’라고 하는 것은 보특가라무아26)가 같기 때문이다. 만약 실로 차이가 있다면 보특가라에 이 사람은 성문이고 저 사람은 보살이라는 교법[乘]의 차별이 있어야 한다. 이미 실제로는 차별이 없는 보특가라이기 때문에 1승이라고 설한다.
‘해탈과 같기 때문이고’란 저 3승은 번뇌장에서 해탈하는데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세존께서 “해탈과 해탈에는 차별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러한 의도로써 1승을 설하신다.
‘성품의 같지 않음과’란 말하자면 모든 성문들의 부정종성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리에 회향하는 성문신(聲聞身) 가운데 성문종성과 불종성(佛種性)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도리로서 1승을 설하신다.
017_0262_b_13L無我等故者,補特伽羅無我同故.若實有異,補特伽羅可有乘別,此是聲聞`此是菩薩旣無實異補特伽羅,故說一乘.解脫等故者,謂彼三乘於煩惱障,解脫無異.如世尊言:解脫解脫無有差別.由此意趣,故說一乘.性不同故者,謂諸聲聞,不定種性,有差別故.謂迴向菩提聲聞身中,具有聲聞種性及佛種性,由此道理,故說一乘.
017_0262_c_01L‘두 가지 의요를 얻음과’란 말하자면 두 가지 의요를 얻는 것이니,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든 유정에 대하여 자체를 동일시하는 의요를 얻고 ‘저 사람은 나다, 나는 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인연에 의해서 이 사람이 이미 성불하면 저 사람 또한 성불한다. 그러므로 제일의의 의요를 얻는다고 이름한다. 둘째는 세존께서 법화회상(法花會上)에서 사리자 등의 모든 성문들에게 부처님의 수기를 주시고[記別] 섭수시키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의요를 얻고 ‘우리들과 부처님은 둘이 아닌 평등이다’라고 말한다. 또 이 회상에서 모든 보살과 저 명칭에 동일함이 있어서 수기를 주는 것을 얻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하나를 말씀하셔도 두 가지 종류의 이익을 포함하신다. 말하자면 모든 성문을 섭수하여 부처님의 자신의 몸과 동일한 의요를 얻게끔 하고 모든 보살에게는 수기를 얻게끔 한다는 것이다. 이런 도리로써 1승을 설하신다.
017_0262_b_22L得二意樂故者,謂得二種意樂.一者諸佛於一切有情,得同自體意樂,言彼卽是我,我卽是彼.由是因緣,此旣成佛,彼亦成佛.是故名得第一意樂.二者世尊法花會上,與諸聲聞舍利子等,授佛記別,爲令攝得如是意樂:我等與佛平等無二.又此會上,有諸菩薩與彼名同,得授記別故.佛一言含二種益,謂諸聲聞攝得同佛自體意樂,及諸菩薩得授記別,由此道理,故說一乘.
‘변화[化]와’라고 말하는 것은 세존께서 “비구들[苾芻]이여, 옛날에 나는 백 번이나 반복하여 성문승에 의지하여 반열반에 들었다. 이미 성불하였는데 어찌 다시 성문에 의지하여 반열반에 들 것인가?”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기에 특별한 의도가 있으니 말하자면 성문종성을 조복하기 위해서 교화 받을 유정에게 스스로 그 몸을 변화하여 그 교법[乘]의 부류와 같은 반열반을 나투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인해 성문승이나 독각승은 곧 대승이므로 1승을 성취한다.
‘구경 때문에’란 구경의 이치에 의하기 때문에 1승을 설하시는 것이다. 돌아가는 것에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이것을 뛰어넘어 그 밖의 특별하게 뛰어난 교법[乘]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 1승만이 가장 뛰어나기에 부처님께서는 1승을 설하신다.
017_0262_c_10L言化故者,如世尊言:汝等苾芻!我憶往昔無量百返,依聲聞乘,而般涅槃.云何已成佛,復依聲聞,而般涅槃?是故此中,有別意趣,謂爲調伏聲聞種性所化有情,自化其身,同彼乘類,現般涅槃.由此義故,若聲聞乘,若獨覺乘,卽是大乘故.成一乘究竟故者,依究竟理,故說一乘,非無歸別.由過此外,無別勝乘,唯此一乘,最爲勝故,佛說一乘.
【論】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께서는 하나의 법신과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 많이 존재하시는 것은 어떤 연유로 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262_c_19L論曰:如是諸佛同一法身,而佛有多,何緣可見?此中有頌:

하나의 세계에 둘이 없으면서
동시에 무량한 원만[圓]이네.
차례로 전전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그러므로 많은 부처님께서 계심이 성립하네.
017_0262_c_21L一界中無二,
同時無量圓,
次第轉非理,
故成有多佛.
017_0263_a_01L
【釋】‘하나의 세계에 둘이 없으면서’란 하나의 세계에는 두 부처님께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의 부처님만이 계신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무량한 원만[圓]이네’란 무량한 보살이 닦아 모은 자량은 동시에 원만하여 많은 세계에서 불과(佛果)를 현성(現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은 많다고 마땅히 말해야 한다.
또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한 세계에 전후를 차례로 하여 무량한 보살이 등정각을 성취하니 많은 세계에 동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을 타파하기 위해서 다시 ‘차례로 전전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연이 있으면 무량한 보살이 수습하는 자량은 동시에 원만한 것이지 전전하여 서로 기다려 순서대로 성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동시에 많이 계신다.
017_0262_c_23L釋曰:一界中無二者,一世界中,無有二佛,是故當言,唯有一佛.同時無量圓者,無量菩薩,修集資糧,同時圓滿,多世界中,現成佛果,是故諸佛,當言有多.或有說言,一世界中,前後次第,無量菩薩,成等正覺,非多世界同時多佛.爲破此執,復言次第轉非理故.無有因緣,無量菩薩,修集資糧,同時圓滿,展轉相待,次第成佛,是故諸佛,同時有多.
【論】법신 가운데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결국 들지 않으시고 또한 결국 열반에 들지 않음도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마땅히 알아야 하는가?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263_a_10L論曰:云何應知於法身中,佛非畢竟入於涅槃,亦非畢竟不入涅槃?此中有頌:

모든 장애를 해탈하셨기에
지어야 할 바가 끝이 없으시기에
부처님께서는 결국 열반하셨으면서도
결국 열반에 들지 않으셨네.
017_0263_a_13L一切障脫故,
所作無竟故,
佛畢竟涅槃,
畢竟不涅槃.

【釋】어떤 대승인(大乘人)은 “부처님께서는 결국 열반에 들지 않으셨다”라고 말하는데, 무여열반계에 취해서 설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시 “부처님께서는 결국 열반에 드셨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유여열반계에 취해서 설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취지는 정녕 이치가 아닌 것에 집착한 것이다. 만약 바르게 설한다면 마땅히 모든 부처님께서는 정녕 열반에 드신 것도 아니며 또한 열반에 드시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장애에서 해탈을 얻으셨기에 필경 열반에 드신 것이며 마땅히 지어야 할 일에 끝나는 시기가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결국 열반에 드시지 않으신 것이다.
017_0263_a_15L釋曰:有大乘人,謂佛畢竟不般涅槃,就無餘依涅槃界說.餘復謂佛畢竟涅槃,就有餘依涅槃界說.此二意趣定執非理.若正說者,應言諸佛非定畢竟入於涅槃,亦非畢竟不入涅槃.佛一切障得解脫故,畢竟涅槃所應作事無竟期故,諸佛畢竟不入涅槃.
017_0263_b_01L【論】무슨 이유로 수용신은 곧 자성신이 아닌가?27)
여섯 가지 이유에 의하기 때문이다.
첫째, 색신을 가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무량한 부처님의 여러 모임[衆會]에서 차별을 가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뛰어난 이해에 따라서 볼 경우에 자성을 일정하지 않게 가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따로따로[別別] 볼 경우에 자성을 변동(變動)해서 가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보살과 성문, 그리고 모든 천 등의 갖가지 여러 모임 사이에 섞여서 가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아뢰야식과 모든 전식(轉識)의 전의(轉依)는 도리가 아닌 것을 가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수용신은 곧 자성신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017_0263_a_22L論曰:何故受用身,非卽自性身?由六因故,一色身可見故`二無量佛衆會差別可見故`三隨勝解見自性不定可見故`四別別而見自性變動可見故`五菩薩聲聞及諸天等種種衆會閒雜可見故`六阿賴耶識與諸轉識轉依非理可見故,佛受用身卽自性身,不應道理.
【釋】‘색신은 가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란 말하자면 수용신은 가히 볼 수 있는 색이 있으나 자성신에는 가히 볼 수 있는 색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수용신은 무량한 여러 가지 모임에서 수용한 색법의 차별을 가히 볼 수 있지만, 자성신에서는 이러한 차별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수용신은 뛰어난 이해[勝解]에 따라서 자성을 보는데 일정하지 않다. 계경에서 “어떤 한 부류는 수용불(受用佛)을 보고, 다른 부류는 이 부처님을 소년이라고 본다. 또 어떤 한 부류는 동자라고 본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자세히 설해진다. 자성신에는 이러한 일정하지 않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017_0263_b_07L釋曰:色身可見故者,謂受用身,有色可見,非自性身,有色可見,故受用身,非自性身.又受用身,無量衆會,受用色法,差別可見,非自性身,有此差別,故受用身,非自性身.又受用身,隨勝解見,自性不定,如契經言:或有一類,見受用佛,或有一類,見是少年,或有一類,見爲童子,如是廣說.非自性身有此不定,故受用身,非自性身.
017_0263_c_01L또한 수용신에서는 자성변동의 차별을 가히 볼 수 있다. 능히 보는 자가 먼저 한때에 수용신의 다른 형상을 보고 뒷날의 한때에 다시 달라짐을 보지만, 자성신의 체성은 변동하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수용신은 보살, 성문 그리고 여러 천 등의 갖가지 여러 모임에서 항상 그 사이에 섞이는 것이지만, 자성신은 이 같은 여러 모임 사이에서 마땅히 섞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전의는 도리가 아님을 가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란 아뢰야식을 전환하여 자성신을 얻고28) 여러 전식(轉識)을 전환하여 수용신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이 여섯 가지는 바른 도리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017_0263_b_16L又受用身,自性變動,差別可見,一能見者,先於一時,見受用身,形相別異,後於一時,復見別異,非自性身,其體變動,故受用身,非自性身.又受用身,菩薩`聲聞,及諸天等,種種衆會,常所間雜,非自性身應有如是衆會閒雜,故受用身,非自性身.又見轉依,非道理故,謂轉阿賴耶識,得自性身,轉諸轉識,得受用身,故受用身,非自性身.由此六種,不應正理,故受用身,非自性身.
【論】어떤 이유로 변화신은 자성신이 아닌가?29)
여덟 가지 이유에 의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옛날부터 퇴전하지 않는 선정[不退定]을 얻고도 도사다(都史多)와 인간 가운데 태어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 모든 보살은 옛날부터 마땅히 전생의 일[宿住]을 기억하여 글씨[書]ㆍ산수(算數)ㆍ조각[印]ㆍ공교론(工巧論) 그리고 욕락의 경계[欲塵]을 수용하는30) 행에 대해서 바르게 알 수 없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 보살은 옛날부터 이미 나쁜 설과 좋은 설의 법교(法敎)를 알았기 때문에 외도의 처소에 갔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017_0263_c_03L論曰:何因變化身,非卽自性身?由八因故.謂諸菩薩,從久遠來,得不退定,於睹史多,及人中生,不應道理.又諸菩薩,從久遠來,常憶宿住,書筭數印工巧論中,及於受用欲塵行中,不能正知,不應道理.又諸菩薩,從久遠來,已知惡說,善說法教,往外道所,不應道理.
또한 모든 보살은 옛날부터 능히 3승의 바른 도리를 잘 알았기 때문에 삿된 고행을 닦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모든 보살은 백 구지(拘胝)31)의 많은 염부주를 버리고 단지 한곳에서 등정각을 이루어 바른 법륜을 굴렸다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등정각의 성취를 시현하는 것과 관계없이 오직 화신으로서만 그 밖의 곳에서 불사(佛事)를 베풀어 짓는다면, 응당 도사다천에서만 등정각을 성취해야 한다. 어째서 모든 염부주에 동시에 부처님의 출현을 시설하지 않는가? 이미 시설하지 않으며, 가르침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다. 32)
017_0263_c_11L又諸菩薩,從久遠來,已能善知三乘正道,修邪苦行,不應道理.又諸菩薩,捨百拘胝,諸贍部洲,但於一處,成等正覺,轉正法輪,不應道理.若離示現成等正覺,唯以化身,於所餘處,施作佛事卽應.但於睹史多天成等正覺,何不施設遍於一切贍部洲中,同時佛出?旣不施設,無教無理.
비록 많은 화신이 있지만 저 두 분의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할 수 없다는 말과 위배되지 않는다. 하나의 4주(洲)에 세계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두 법륜왕이 동시에 한 세계에 출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263_c_18L雖有多化,而不違彼無二如來出現世言,由一四洲攝世界故,如二輪王,不同出世.此中有頌: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은
수없이 모태 가운데 처해도 평등하네.
모든 종류의 등각을 성취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전전하네.
017_0263_c_21L佛微細化身,
多處胎平等,
爲顯一切種,
成等覺而轉.
017_0264_a_01L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발원하고 수행하여 대보리를 증득하신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열반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발원과 수행의 결과가 없다는 과실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017_0263_c_23L爲欲利樂一切有情,發願修行,證大菩提,畢竟涅槃,不應道理,願行無果,成過失故.
【釋】여덟 가지 이유에 의거하여 변화신은 곧 자성신이라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음을 증명한다.
모든 보살은 옛날부터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얻어서 일찍이 퇴실(退失)함이 없다는 것이다. 욕계의 도사다천에 태어나도 오히려 이치에 맞지 않는데 하물며 인(人) 중에 태어나는 것이겠는가? 수많은 겁을 경과하도록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닦아서 욕계의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변화신은 자성신과 다른 도리를 성취한다.
또한 모든 보살은 옛날부터 전생의 일을 항상 기억하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삿된 고행을 수행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 문장은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번거롭게 다시 해석하지 않는다.
017_0264_a_03L釋曰:由八因故,證變化身,卽自性身,不應正理.謂諸菩薩,從久遠來,得不退定,曾無退失,生於欲界,睹史多天,尚不應理,況生人中?非經多劫修不退定得欲界果,應正道理.故變化身,異自性身,道理成就.又諸菩薩,從久遠來,常憶宿住,廣說乃至修邪苦行,不應道理,其文易了,無煩重釋.
‘또 모든 보살은 백 구지의 모든 염부주를 버리고 단지 한 곳에서 등정각을 성취하여 바른 법륜을 굴렸다’는 것은 도리에 의해서 맞지 않는다. 이 모든 곳은 모두 서로 비슷하기[相似] 때문이다. 이런 도리로 변화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만약 나머지 염부주에 나투어서 등각을 성취함을 멀리 여의고 오직 홀로 이 염부주에서만 실로 정각을 증득하고 그 변화신으로 다른 곳에서 두루 불사를 베풀어 짓는다고 말한다면, 무슨 까닭에 도사다천에서 실로 등각을 증득하고 그 화신은 모든 4대주에 와서 불사를 베풀어 짓는다고 인정하지 않는가? 만약 너희가 주장하기를 ‘하나의 염부주에서 등정각을 성취하고 나머지 곳에서 화신을 나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만약 도사다천에서만 머물러 있으면서 등정각을 성취하고 일체 4주(洲)의 염부주 안에서 화신을 시현한 것은 어째서 도리에 맞지 않는가? 만약 일체의 4주 중에서 등정각을 나투는 것을 반드시 인정하지 않으면 가르침에 맞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설하지 않아야 한다.
017_0264_a_11L又諸菩,薩捨百拘胝諸贍部洲,但於一處,成等正覺,轉正法輪,不應道理,此一切處,皆相似故.由此道理,是變化身,非自性身.若謂遠離餘贍部洲,現成等覺,唯獨於此贍部洲中,眞證正覺,以變化身,遍於餘處,施作佛事何故不許睹史多天眞證等覺,化身來此諸四大洲,施作佛事?若汝意謂一贍部洲,成等正覺,餘處現化,非不應理若唯住在睹史多天成等正覺,一切四洲贍部洲內示現化身,何不應理?若定不許一切四洲,現等正覺,無教無理,故不可說.
017_0264_b_01L어떤 염부주에 부처님 출현이 없다 하여도 계경과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처소도 없고 허용되지도 않고 전후(前後)가 아니라서 하나의 세계에 두 여래께서 출현할 수 있다”라고 설하신 것과 같다.
만약 모든 염부제에서 동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인정하면 저것과 서로 어긋난다. 이러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다시 ‘비록 많은 화신이 있지만 저 두 분의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할 수 없다는 말과 위배되지 않는다’ 등이라고 말한다.
저 계경에서는 한 4대주를 한 세계라고 설하고 천주(天洲) 등은 아니다. 계경에서는 두 법륜왕은 동시에 출현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만약 부처님께서 많은 4대주에 동시에 함께 나타난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또한 많은 법륜왕이 있어서 많은 4대주에 동시에 함께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017_0264_b_01L有贍部洲,無佛出世,爲不與彼契經相違,如契經說:無處無容,非前非後於一世界有二如來出現於世.若許一切贍部洲中,同時多佛出現於世,與彼相違.爲避此難,是故復言,雖有多化,而不違彼無二如來出現世等.彼契經說,一四大洲,名一世界,非千洲等.卽彼經說,如二輪王,不同時出.若不許佛多四大洲同時俱出,亦不應許有多輪王多四大洲同時俱出.
단지 한 4대주에서만 두 법륜왕이 동시에 함께 출현할 수 없으며 천주(千洲) 등은 아니라고 인정하면 또한 부처님도 한 4대주에 두 분이 함께 출현할 수 없으며 천주 등은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또한 가타(伽他)로서 많은 화신을 나타내고 모습[相]을 갖춘 깨달음을 드러낸다.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 등이란 부처님의 화신은 나투어 모태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사리자 등의 많은 성문들을 화작(化作)하여 그 모습은 각기 다를지라도 스스로 모태에 들어가는 것은 동시에 평등하다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깨달음은 존귀하고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화신을 지으신다.
다음으로 여래께서는 결국 열반에 들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낸다.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발원하고 수행하여 대보리를 증득했다는 것이다. 이런 발원과 이런 수행은 오직 모든 유정을 이익하고 안락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그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곧 다시 열반에 의지하여 결국 반열반에 드셨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수행과 발원의 두 가지는 마땅히 결과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열반을 나타내는 것은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니다.
017_0264_b_11L若許唯一四大洲中,無二輪王,同時竝出,非千洲等,亦應許佛一四洲中,無二竝出,非千洲等.復以伽他,現多化身,顯具相覺.佛微細化身等者,如佛化身現入母胎,如是化作舍利子等,多聲聞衆,其相各異,入自母胎,同時平等,爲欲顯發一切種覺是尊勝故,佛作是化.次顯如來,畢竟涅槃,不應道理,謂爲利樂一切有情,發願修行,證大菩提.此願此行,唯欲利樂一切有情,事猶未訖,卽便依彼畢竟涅槃,而般涅槃,不應道理,行願二種,應無果故.現涅槃者,是變化身,非自性身.
017_0264_c_01L【論】부처님의 수용신과 변화신은 이미 무상(無常)한 것인데 경에서는 어째서 여래의 몸이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 두 가지의 의지처인 법신[所依法身]은 항상하기 때문이며, 또한 등류신(等流身)33)과 변화신은 항상 수용하여 쉬거나 폐함이 없기 때문이며, 영원히 끊임없이 수시로 현화(現化)하기 때문이다.
항상 즐거움을 수용하는 것과 같고 항상 음식을 베푸는 것과 같다고 여래의 몸이 상주함 또한 이렇게 알아야 한다.
017_0264_c_01L論曰:佛受用身,及變化身,旣是無常,云何經說,如來身常?此二所依,法身常故.又等流身,及變化身,以恒受用無休廢故`數數現化不永絕故,如常受樂`如常施食,如來身常應知亦爾.
【釋】어떤 계경에서는 여래의 몸은 항상한다고 설한다. 부처님의 수용신과 변화신은 이미 무상한 것인데 어떻게 여래의 그 몸은 상주한다고 하는가?
이 두 몸은 비록 무상이지만 법신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법신은 상주하기에 또한 상주한다고 설한다. 법신이 상주한다고 하는 경우에는 혹은 체가 상주하는 것이며, 혹은 상주하는 법신에 의지하기에 몸이 상주한다고 한다.
이것은 등류신과 변화신은 다른 부문[異門]에서 상주라고 하지만 자성이 상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수용신은 항상 수용하여 쉬거나 폐함이 없기에 늘 즐거움을 수용하는 것과 같다. 마치 세간에서 “항상 즐거움을 수용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비록 끊임없이 항상 즐거움을 수용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항상 즐거움을 수용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017_0264_c_06L釋曰:有契經說,如來身常.佛受用身,及變化身,旣是無常,云何如來,其身常住?謂此二身,雖是無常,然依法身,法身常故,亦說爲常.言身常者,或體是常`或依常身,故名身常.此顯等流,及變化身,是異門常,非自性常.又受用身,以恒受用,無休廢故,如常受樂.猶如世閒,言常受樂,雖非受樂常無閒斷,而得說言,此常受樂.
부처님의 수용신도 마땅히 이와 같아서 비록 상주하지 않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상주라고 말한다. 저 보살대중 가운데서 대법락을 수용하여 쉬거나 폐함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변화신은 영원히 단절됨 없이 수시로 현화(現化)한다. 특별한 뜻에서 항상한다고 말한다. 항상 음식을 베푸는 것과 같다. 마치 세간에서 “항상 음식을 베푼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비록 음식을 베푸는 것이 끊임없이 항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도 수시로 베풀고 그 마음을 정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변화신도 마땅히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생멸이 없음을 항상한다고 설하는 것이 아니다. 화생하는 것에 따라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수시로 시현하기 때문에 비밀한 뜻으로서 항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017_0264_c_15L佛受用身,當知亦爾,雖非常住,而或言常,以於彼彼菩薩衆中,受大法樂,無休廢故,佛變化身,數數現化,不永斷絕,別意言常,如常施食.猶如世閒,言常施食,雖非施食能常無閒,然數數施,期心不絕,名常施食.佛變化身,當知亦爾,非無生滅說名爲常,隨所化生,數數示現,不永絕故,密意言常.
017_0265_a_01L【論】여섯 가지 이유에 의해 모든 불세존께서 나투신 화신은 결국 머무르지 않는다. 첫째는 해야 할 바를 마쳤으니[究竟] 유정을 성숙하게 하여 해탈시켰기 때문이다. 둘째는 열반을 즐기지 않음을 버리게 하기 위함이니 여래의 상주법신을 구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기고 훼손하는 것을 버리게끔 하기 위함이니 깊고 깊은 정법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부처님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渴仰]을 생기게끔 하기 위함이니 자주 보는 자가 싫어하고 게으른 마음을 낼까 두렵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자신에 대해서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게끔 하기 위함이니 바르게 설하는 자[正說者]는 가히 얻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모든 유정을 매우 빠르게 성숙시키기 위함이니 스스로 정진하여 멍에[軛]를 버리지 않게끔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두 게송이 있다.
017_0264_c_23L論曰:由六因故,諸佛世尊,所現化身,非畢竟住.一所作究竟,成熟有情,已解脫故二爲令捨離不樂涅槃,爲求如來常住身故三爲令捨離輕毀諸佛,令悟甚深正法教故四爲令於佛深生渴仰,恐數見者生厭怠故五令於自身,發勤精進,知正說者,難可得六爲諸有情,極速成熟,令自精進不捨軛故.此中有二頌:

해야 할 바를 마치고
열반을 즐기지 않음을 버리고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기고 훼손하는 것을 버리고
깊은 존경심을 낸다네.
017_0265_a_09L由所作究竟,
捨不樂涅槃,
離輕毀諸佛,
深生於渴仰.

안으로 스스로의 바른 정진을 내고
매우 빠르게 성숙시키기 때문에
그러므로 부처님의 화신을 인정함에
결국 머무르는 것이 아니네.
017_0265_a_11L內自發正勤,
爲極速成熟,
故許佛化身,
而非畢竟住.

【釋】‘열반을 즐기지 않음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여래의 상주법신을 구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여래께서 열반에 드는 의미를 나타낸다. 여래의 몸은 무상(無常)이기에 마땅히 열반을 즐겨야 한다. 만약 여래의 상주신(常住身)을 구할 때에는 곧바로 열반을 등진다. 세존께서 멸을 보이시어 몸의 무상함을 나타내신 것은 결국 항상한 열반을 즐기게끔 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기고 훼손하는 것을 버리게끔 하기 위함이니 깊고 깊은 정법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란 만약 모든 부처님의 그 몸은 상주한다고 말하면 곧 깊고 깊은 교법을 깨닫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방편에 부지런하지 않아서 지금 깨닫지 않았지만 후에 반드시 깨달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017_0265_a_12L釋曰:爲令捨離不樂涅槃,爲求如來常住身故者,此顯如來入涅槃意.以如來身,是無常故,應樂涅槃,若求如來,常住身時,便背涅槃,世尊現滅,顯身無常,令樂畢竟常涅槃故.爲令捨離輕毀諸佛,令悟甚深正法教故者,若謂諸佛,其身常住,便於悟解,甚深法教,不勤方便,謂今不悟,後定當悟.
017_0265_b_01L만약 자주 검문(檢問)할 경우에 모든 제자 대중이 곧바로 가볍게 여기고 훼손하는 마음을 내어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집착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것으로 인해 정녕 저 질문을 면할 수 있다”라고 한다. 만약 세존께서 세상에 머무르시지 않는다면 저들은 어떤 처소에서 가벼이 여기고 훼손하는 마음을 내겠는가? 모두 말하기를, “우리들은 아직 저 뜻을 얻지 못했는데 세존은 열반하셨으니 누가 능히 전도 없이 우리들을 깨닫게[開悟] 해주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 부지런히 각오(覺悟)를 구한다.
‘자신에 대해서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게끔 하기 위함이니 바르게 설하는 자[正說者]는 가히 얻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란 말하자면 세존께서는 장차 반열반에 들 것을 아시고 곧 자신에 대해서 부지런히 정진하게끔 하시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세간의 바른 설법자인데 그 분이 만약 없다면 세간에 의지할 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알고 나면 부지런히 정진을 행한다.
017_0265_a_20L若數撿問,諸弟子衆,便生輕毀,自執己見,作如是言:我由此故,定免彼問.若不住世,彼於何處,當生輕毀?咸言:我等未得彼意.世尊涅槃,誰能無倒開悟我等?是故於法,勤求覺悟.令於自身,發勤精進,知正說者,難可得故者,謂知世尊將般涅槃,便於自身,發勤精進.佛是世閒正說法者,彼若無有,世閒無依.如是知已,發勤精進.
‘모든 유정을 매우 빠르게 성숙시키기 위함이니 스스로 정진하여 멍에[軛]를 버리지 않게끔 하기 때문이다’란 정진을 닦고 좋은 멍에를 버리는 것을 떠나기 위해 “내지 세존이 멸도에 이르지 않을 때까지 나는 모든 선근을 반드시 성숙시켜야만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 이유에 의해서 부처님의 변화신은 결국 머무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앞에서 설한 뜻을 섭수하기 위해서 ‘해야 할 바……’ 등이라고 가타를 설하는 것이다.
017_0265_b_06L諸有情極速成熟,令自精進不捨軛故者,爲修精進離捨善軛,乃至世尊未滅度來,我諸善根,定須成熟.由是六因,佛變化身,非畢竟住.爲攝如是上所說義,故說伽他,由所作等.
【論】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無始時來] 차별이 없고 한량없다. 마땅히 얻기 위해서 다시 의식적인 노력[功用]을 짓지 않는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265_b_11L論曰: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不應爲得更作功用.此中有頌:

부처님의 증득[得]은 차별이 없고 한량없는 원인[因]이네.
유정이 만약 부지런한 공용을 버리면
증득은 항상 원인을 성취하지 못하니
이와 같은 원인을 끊는 일은 도리에 맞지 않네.
017_0265_b_13L佛得無別無量因,
有情若捨勤功用,
證得恒時不成因,
斷如是因不應理.
017_0265_c_01L
【釋】이에 대한 비난이 있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한량없이 증득의 원인[因]을 짓는데 불과를 구하기 위해서 무슨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단 말인가.”
다시 비난하는 말이 있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한량없다면 일불(一佛)은 곧 일체 유정의 모든 이익과 안락을 구족하고 성취하였으니, 얻기 위해서 다시 의식적인 노력을 지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러한 비난에 답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증득……’ 등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 없고 한량없지만 만약 유정이 불과를 구하는 데 있어서 정근(正勤)의 원인[因]을 버리면 이와 같은 증득은 항상 원인[因]을 성취하지 못한다. 부처님의 증득에 의지하여 모든 유정은 불과를 구하는 데 있어서 정근의 원인[因]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비난은 없다.
017_0265_b_15L釋曰:此中有難: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作證得因,爲求佛果,何須功用? 復有難言: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一佛卽能具足成辦一切有情諸利樂事,不應爲得更作功用.爲答此難,說佛得等.諸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若是有情,爲求佛果,捨正勤因,如是證得,恒不成因.由佛證得,非諸有情爲求佛果捨正勤因,故無此難.
만약 정근을 떠나서 불과를 얻으면 모든 유정은 본래부터 모두 다 얻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정근의 원인[因]을 마땅히 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부처님의 법계는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 없고 한량없이 두루 모든 것을 위해서 증득의 원인[因]을 짓지만, 모든 보살로 하여금 자비와 서원으로 마음을 얽매이게 하여 불과를 부지런히 구하게끔 하고 일체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짓게 하기 위해서 불과를 구하는 데 부지런한 공용을 일으키게 한다.
017_0265_c_02L若離正勤,得佛果者,一切有情本應皆得,是故不應斷正勤因.又佛法界,無始時來,無別無量,普爲一切作證得因,令諸菩薩,悲願纏心,勤求佛果.爲作一切有情利樂,故求佛果,發勤功用.
【論】『아비달마대승경』 가운데 「섭대승품」을 나 아승가(阿僧伽)34)는 간략히 해석하여 마친다.
017_0265_c_07L論曰:『阿毘達磨大乘經』中,「攝大乘品」,我阿僧伽,略釋究竟.
【釋】나는 이미 섭대승을 간략히 해석하여 마쳤다는 뜻이다. 다시 게송으로 설한다.
017_0265_c_09L釋曰:我已略釋攝大乘竟.復說頌曰:

나, 무성(無性)은 이미
불과를 구하는 묘원(妙願)을 내어
청정한 경계[淨境]의 이치와 교설[理敎]에 대해서
자비와 지혜를 마음에 쌓으며.
017_0265_c_10L我無性已發,
求佛果妙願,
於淨境理教,
悲慧積于心.

여러 스승을 따라서 바른 법을 듣고
여실하게 깊이 믿고 이해하며
오롯한 생각[專念]으로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이미 그러한 해석을 저술하였네.
017_0265_c_12L從諸師正聞,
如實深信解,
專念現前故,
已述造斯釋.

깊고 깊으며 넓고 큰
열 가지 도리에 의해서 부지런히 복을 만드니
원컨대 일체세간이여,
상호(相好)를 갖추신 이의 묘지(妙智)를 얻으소서.
017_0265_c_13L於甚深廣大,
十義勤生福,
願一切世閒,
得具相妙智.
攝大乘論釋卷第十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이하 법신의 매우 심오한 양상을 열두 가지로 설명한다.
  2. 2)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이다.
  3. 3)번뇌에 계박된 욕계의 유정을 말한다.
  4. 4)범어 piṇḍa의 역으로서 4식 중의 하나로 단식(段食, 團食)이라고도 한다. 국수ㆍ밥ㆍ나물ㆍ간장 같은 형체가 있는 음식을 말한다.
  5. 5)5온을 말한다.
  6. 6)동분(同分)은 범어 sabhāga의 번역으로 유분(有分), 등분(等分)으로도 번역한다. 근ㆍ경ㆍ식이 서로 교섭하면서 각각 자기의 작용을 실현하고 자기의 역할을 완수하는 길을 말한다. 예를 들어 동분안(同分眼)이란 어느 때인가 색을 볼 수 있는 분(分)을 가진 눈이라는 뜻이다. 동분색(同分色)이란 어느 때인가 안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분을 가진 색이라는 뜻이다. 이에 반해 단순히 가능성에 그칠 뿐 그 작용에 실현이 없는 근ㆍ경ㆍ식을 피동분(被動分)이라고 한다.
  7. 7)번뇌를 말한다. 번뇌는 우리의 마음을 의혹하는 것이기 때문에 혹이라고 한다.
  8. 8)범명(梵名) 아자타샤트루(Ajātaśatur)의 한역어이다. 아사세(阿闍世)왕으로 음사된다. 데바닷타의 부처님 살해 음모에 동조하여 부왕인 빔비사라(Bimbisāra)를 죽게 한 마가다국의 왕이다. 그러나 후에 참회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고 제1결집 때 교단의 최대지원자가 되었다고 한다.
  9. 9)범명(梵名)은 비루다카(Virūḍhaka)의 음사어로서 비류리(毗流離)왕이라고도 음사한다. 인도 사위국 바사닉왕의 아들이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뒤 42년째 부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으며 뒤에 마가다국과 싸워 이기고 석가족에게 원한을 품어 카필라성까지 멸망시켰다.
  10. 10)이하 청정한 불국토의 양상을 열여덟 가지 원만상으로 나타낸다.
  11. 11)진역(陳譯)의 『섭대승론석』에서는 보살장 가운데 정토경의 한 종류, 『화엄경』에서 정토상을 광설하는 문장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경문은 『불지경(佛地經)』 「서품」ㆍ『해심밀경』 「서품」에 나온다.
  12. 12)삼계는 미혹의 업으로 초감(招感)된 유루의 과보이고, 정토는 이런 경계를 초월한 곳이다.
  13. 13)인비인(人非人)의 뜻에는 첫째로 긴나라의 별명, 둘째로 천룡팔부중과 그 종속자의 총칭, 셋째로 사람과 사람 아닌 이를 일컫는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대승경전 서두에서 법회대중 가운데 천ㆍ용 등 8부중에 이어져 나오는 인비인의 경우는 8부중과 그 종속자의 총칭이다. 그들은 원래 사람이 아니지만 법회석상에서 원래의 모습대로 나타나면 법회에 모인 사람들이 놀랄 것이므로 사람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14. 14)번뇌마ㆍ온마(蘊魔)ㆍ사마(死魔)ㆍ천마(天魔) 등 네 가지 마군이다.
  15. 15)범어 musāragalva의 음역(音譯)으로서 차거(車渠, 唓磲)로 번역하며, 보통 자거라고 읽는다. 그 색깔이 말의 뇌와 같기 때문에 마뇌(馬腦)라고도 한다.
  16. 16)aśmagarbha의 음역으로서 적색보(赤色寶)로 번역한다.
  17. 17)karketana의 음역으로서 매괴(玫瑰)로 번역된다.
  18. 18)천ㆍ용ㆍ약차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화신일 뿐이다.
  19. 19)mahoraga의 음역으로서 큰 구렁이[大蛇] 또는 대복행(大腹行)으로 번역된다.
  20. 20)해탈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세 가지 선정[三解脫門]이다. 공해탈문은 보특가라[人]와 법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조하는 것이다. 무상해탈문은 차별상을 떠나는 것이고, 무원해탈문은 원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21. 21)대(大)는 뛰어남[勝]의 뜻이고, 보배꽃 중의 왕[大寶華王]은 붉은 연꽃을 가리키며, 중(衆)은 그 연꽃잎이 많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첫째로 깨달음의 경지ㆍ원각(圓覺)ㆍ진여ㆍ원성실성의 뛰어나고 미묘한 공덕, ② 그러한 경지는 연꽃과 같은 보살 수행으로 이룬 것임을 상징한다.
  22. 22)비고비락(非苦非樂)의 사수(捨受)를 의미한다.
  23. 23)문장이 이해하기 어렵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隋本]에는 ‘세간에는 이런 차이가 있지만 스승에게는 그런 차이가 없네’로 되어 있다. 스승[導師], 즉 부처님에게는 업의 차이가 없이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24. 24)인명(人名)으로 Yajñadatta를 말한다. 데바닷타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보통으로 사용되는 인명이다. 우리에 비교하자면 흥길동이나 장삼이사(張三李四) 정도에 해당하는 어구이다.
  25. 25)부처님을 말한다.
  26. 26)인무아(人無我)를 말한다.
  27. 27)이하 수용신이 자성신과 다른 점을 여섯 가지로 말한다.
  28. 28)자성신은 진여와 진지(眞智)가 독존하는 이지명합성(理智冥合性)의 불신이다. 이것은 진여 그 자체가 지성(智性)을 띄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성신이 단순히 진여법성 그 자체만을 가리키지 않고 진여가 ‘현현(顯現)된’ 상태로서, 전의(轉依)에 의해 아공ㆍ법공의 2공소현(空所顯)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신과 5법[眞如ㆍ四智]의 포섭관계에 있어서 자성신은 이지명합의 성격이므로 진여와 대원경지에 포섭시킨다.
  29. 29)이하 변화신이 자성신과 다른 점을 여덟 가지로 설명한다.
  30. 30)가무(歌舞)ㆍ음식(飮食) 등을 말한다.
  31. 31)범어 koṭi의 음사어로 구지(俱祗) 또는 구치(俱致)라고도 음사한다. 번역하면 억(億)이라 하는데 인도에서 쓰이던 숫자 단위로서 천만에 해당한다.
  32. 32)교증(敎證)과 이증(理證)이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33. 33)4종법신(種法身) 중의 하나이다. 등류의 법신으로서 부처님의 몸이 변화하여 사람ㆍ천인ㆍ귀신ㆍ짐승과 같은 모양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 「보문품」의 33신은 관음보살의 등류신이다.
  34. 34)무착(無着)으로 범어 Asaṅga의 번역어이다. 세친의 형으로 전설상으로는 미륵보살로부터 유식이론을 배웠다 한다. 저서로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아비달마집론(阿毘達磨集論)』이 있고,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대승장엄론(大乘莊嚴論)』은 미륵보살의 설법을 옮긴 것이라고 전승되어 오지만 학계에는 이 논서들의 작자에 대한 이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