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釋卷第九

ABC_IT_K0595_T_009
017_0243_c_01L
섭대승론석 제9권
017_0243_c_01L攝大乘論釋卷第九


무성보살 지음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김치온 개역
017_0243_c_02L 無性菩薩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10. 과단분(果斷分)
017_0243_c_04L果斷分第十

【論】이와 같이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의 뛰어남에 대해서 이미 설하였다. 저 증과인 단멸[果斷]의 뛰어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1) 단멸[斷]이란 보살의 무주열반을 말하며, 잡염을 버리고 생사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두 가지 의지처의 전의(轉依)2)를 특징[相]으로 한다. 여기에서 생사는 의타기성의 잡염분을 말하며, 열반은 의타기성의 청정분을 말한다. 두 가지 의지처는 두 가지 부분에 통하는 의타기성을 말한다. 전의는 즉 의타기성의 다스림이 일어날 때 잡염분을 전환하여 버리고 청정분을 전환하여 얻는 것을 말한다.
017_0243_c_05L論曰:如是已說,增上慧殊勝,彼果斷殊勝,云何可見?斷謂菩薩無住涅槃,以捨雜染`不捨生死二所依止轉依爲相.此中生死,謂依他起性雜染分.涅槃,謂依他起性淸淨分.二所依止,謂通二分依他起性.轉依,謂卽依他起性,對治起時,轉捨雜染分,轉得淸淨分.
【釋】무분별지의 능히 다스림[能治]이 이미 생겨나면 모든 다스려져야 할 것[所治]을 결정적으로 반드시 끊기 때문에, 저기에서 끊임없이 단멸의 뛰어남을 설하는 것이다.
‘무주열반’이라 하는 것은 세간과 성문과 독각이 안주하는 생사나 열반과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잡염을 버리고 생사를 버리지 않음으로써’라고 하는 것은 저3) 세력을 해치는 것은 주술을 받은 뱀4)과 같아서 비록 버리지 않더라도 잡염이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의지처의 전의를 특징으로 한다’는 어떤 경우에는 의주석(依主釋)이고, 어떤 경우에는 지업석(持業釋)이다. 이 전의에 머무르면 무색계와 같아서,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이익과 뛰어난 지혜[慧]와 함께 상응함에 의지하기 때문에 번뇌를 인정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이익과 대비(大悲)가 함께 상응함에 의지하기 때문에 현전에 생사에 처해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017_0243_c_13L釋曰:無分別智能治旣生,一切所治決定應斷,故彼無閒說斷殊勝.無住涅槃者,不同世閒`聲聞`獨覺安住生死或涅槃故.以捨雜染,不捨生死者,害彼勢力,如彼呪蛇,雖不棄捨,而無染故.二所依止轉依爲相者,或依主釋,或持業釋.住此轉依,如無色界,若依自利,與殊勝慧共相應故,不容煩若依利他,由與大悲共相應故,現處生死而不棄捨.
017_0244_a_01L여기에서 어떤 이가 생사와 열반을 의지하고 전의하는가? 모두 마땅히 나타내 설명해야만 한다.
‘생사는 의타기성의 잡염분을 말하며’란 심ㆍ심법의 번뇌에 헷갈려 어지럽게[迷亂] 되어 생사에 과실이 끊임없이 상속되는 변계소집성을 말한다.
‘열반은 의타기성의 청정분을 말한다’란 결국 변계소집을 전환한 원성실분을 말한다.
‘두 가지 의지처는 두 가지 부분에 통하는 의타기성을 말한다’란 두 가지의 의지처인 의타기성을 말한다.
017_0244_a_01L此中何者.生死`涅槃,依止轉依,皆應顯說.生死,謂依他起性雜染分者,謂心`心法,煩惱迷亂,生死過失,相續不絕,遍計所執分.涅槃,謂依他起性淸淨分者,謂畢竟轉遍計所執,圓成實分.二所依止,謂通二分依他起性者,謂二所依依他起性.
‘전의는 즉 의타기성……을 말한다’란 심ㆍ심법의 의타기성은 모든 잡염이 전환하여 멸하는 의지처라는 것이다. 또한 일체 불법의 의지처이다. “이것은 일체 불법이며 모든 지위[地]의 바라밀다의 증과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 것과 같다. 의지처 등을 어떻게 전의하며 누가 전의하는가? 말하자면 즉 이 의타기성에서 ‘다스림이 일어날 때’란 무분별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잡염분을 전환하여 버리고’란 모든 소취와 능취의 헷갈려 어지럽게 하는 부분을 전환하여 없앤다는 것이다.
‘청정분을 전환하여 얻는 것’이란 저 소취와 능취의 성품을 버리기 때문에 소취와 능취를 멀리 여의어서 자내소증(自內所證)5)하여 모든 희론을 끊은 가장 청정한 부분을 전환하여 얻는다는 것이다.
017_0244_a_08L轉依,謂卽依他起性者,謂心`心法依他起性,是諸雜染轉滅所依,又是一切佛法所依.如有說言:此是一切佛法,諸地波羅蜜多果.所依等,云何轉依?何者轉依?謂卽於此依他起性對治起時者,無分別智起時.轉捨雜染分者,轉滅一切所取`能取諸迷亂分.轉得淸淨分者,捨彼所取`能取性故,轉得遠離所取`能取,自內所證,絕諸戲論,最淸淨分.
017_0244_b_01L【論】또한 전의에는 간략하게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력을 감소시키고 능력을 증성하게 하는 전의[損力益能轉]이다. 6) 말하자면 뛰어나게 이해하는 힘과 문훈습(聞薰習)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수치심이 있어서 모든 번뇌를 조금만 현행시키거나 현행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통달의 전의[通達轉]이다. 7)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이미 큰 지위8)에 들어가서 이에 제6지(地)에 이르기까지 진실ㆍ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 나타나고 나타나지 않으면서 현전에 머물기 때문이다.
셋째는 수습의 전의[修習轉]이다. 9) 말하자면 아직 장애가 있으며, 모든 차별상이 나타나지 않고 진실만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이에 제10지에 이르기까지이다.
넷째는 증과가 원만한 전의[果圓滿轉]이다. 10) 말하자면 영원히 장애가 없고, 모든 차별상이 나타나지 않으며, 가장 청정한 진실만이 나타나서 모든 차별상에 대하여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017_0244_a_17L論曰:又此轉依,略有六種:一損力益能轉,謂由勝解力,聞熏習住故,及由有羞恥,令諸煩惱,少分現行`不現行二通達轉,謂諸菩薩,已入大地,於眞實非眞實`顯現不顯現,現前住故,乃至六地三修習轉,謂猶有障一切相不顯現,眞實顯現故,乃至十地果圓滿轉,謂永無障,一切相不顯現,最淸淨眞實顯現,於一切相,得自在故.
다섯째는 낮고 열등한 전의[下劣轉]이다. 11) 말하자면 성문은 오직 보특가라의 공(空)ㆍ무아성(無我性)만을 능히 통달하여 한결같이 생사를 등지고, 한결같이 생사를 버리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광대한 전의[廣大轉]이다. 12)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법공(法空)과 무아성을 아울러 통달하고 생사가 곧 적정이라고 보니 비록 잡염을 끊지만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보살이 낮고 열등한 전의에 머무르면 어떠한 과실이 있는가? 모든 유정에게 이익되고 안락한 일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모든 보살의 법에 어긋나고 벗어나기 때문에, 낮고 열등한 교법의 수행자와 해탈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과실이 된다.
017_0244_b_04L五下劣轉,謂聲聞等,唯能通達補特伽羅空無我性,一向背生死`一向捨生死故.六廣大轉,謂諸菩薩,兼通達法空無我性,卽於生死,見爲寂靜,雖斷雜染,而不捨故.若諸菩薩,住下劣轉,有何過失?不顧一切有情利益安樂事故,違越一切菩薩法故,與下劣乘,同解脫故,是爲過失.
만약 모든 보살이 광대한 전의에 머무르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가? 생사의 법 가운데 스스로의 전의를 의지처로 삼아 자재를 얻기 때문에, 모든 윤회의 세계[趣]에서 모든 유정의 몸을 나타내 보이고 갖가지로 조복시키는 방편선교에 의해서 교화할 대상인 모든 유정을 가장 뛰어난 생과 3승(乘) 가운데 안립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공덕이 된다.
017_0244_b_11L若諸菩薩,住廣大轉,有何功德?生死法中,以自轉依,爲所依止,得自在故,於一切趣,示現一切有情之身,於最勝生及三乘中,種種調伏,方便善巧安立所化諸有情故,是爲功德.
【釋】‘세력을 감소시키고 능력을 증성하게 하는 전의’ 등이란, 말하자면 뛰어나게 이해하는 힘과 들어서 훈습하는 힘에 의해서 이숙식 가운데에 의지하여 붙어 있는 번뇌의 훈습을 손감하고 익힌 정법의 공능을 증익한다. 또한 뛰어난 이해와 문훈습의 머무름에 의해서 수치심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조금만 현행하게 하거나 혹은 현행하지 않게끔 한다.
‘통달의 전의’ 등이란 말하자면 이미 보살의 큰 지위에 증득해 들어가도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 어떤 경우에는 나타나고 어떤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무분별지는 사이[間]가 있거나 사이 없이 현행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이 나타나니, 말하자면 관(觀)에 들어갈 때이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이 아닌 것이 나타나니, 말하자면 관에서 나올 때이다.
017_0244_b_16L釋曰:損力益能轉等者,謂由勝解力及聞熏習力,損減依附異熟識中,煩惱熏習,增益所習淨法功能.又由勝解聞熏習,住有羞恥故,令諸煩惱,少分現行,或不現行.通達轉等者,謂已證入菩薩大地,於眞`非眞,或現`不現,無分別智,有閒`無閒,而現行故.或時眞現,謂入觀時.或非眞現,謂出觀時.
017_0244_c_01L진실이 아닌 것과 진실은 두 가지 때에 있어서 그 차례와 같이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고 설한다. 이러한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은 내지 제6지까지에 해당한다.
‘수습의 전의’ 등이란 소지장에 의해서 장애가 있다[有障]고 설하는 것이다. 이 전의의 지위는 내지 제10지까지이며, 모든 차별상[相]은 나타나지 않고 오직 진실만이 나타난다.
‘증과가 원만한 전의’ 등이란 모든 장애에 대해서 장애가 없다[無障]고 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장애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차별상은 모두 나타나지 않게 되고 가장 청정한 진실이 나타나게 된다. 이 전의에 의해서 모든 차별상에 대해서 대자재를 얻는다. 모든 상(相)에 대해서 자재를 얻기 때문에, 그 좋아하는 바에 따라서 유정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한다.
017_0244_c_01L非眞與眞於此二時,如其次第,說現`不現.此現`不現,乃至六地.修習轉等者,由所知障說名有障.此轉依位乃至十地,諸相不現,唯眞顯現.果圓滿轉等者,由一切障,說名無障,以一切障,永無有故,得一切相,皆不顯現,得最淸淨眞實顯現.依此轉依,於一切相,得大自在,以於諸相,得自在故,隨其所樂,利樂有情.
‘낮고 열등한 전의’ 등이란 그 말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번거롭게 거듭 해석할 필요가 없다.
‘광대한 전의’ 등이란 말하자면 잡염을 끊지만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사 가운데 무아를 통달하기 때문이다. 모든 잡염을 끊는 것이 바로 거기에서 적정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리지 않는다.
‘낮고 열등한 전의에 머무르면 어떠한 과실이 있는가?’ 등의 그 문장은 이해하기 쉽다.
‘광대한 전의에 머무르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가?’ 등이란 모든 법에 대해서 자재를 얻기 때문에, 모든 윤회의 세계에서 모든 동분(同分)의 몸을 시현하여 갖가지 조복시키는 방편선교에 의해서 교화할 대상인 감응이 있는 유정을 가장 뛰어난 생 또는 3승(乘) 가운데 안립한다.
‘가장 뛰어난 생’이란 말하자면 모든 세간의 안락한 생처(生處)이다. 이러한 것은 법의 공덕에 대해 설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論】이에 대하여 많은 게송이 있다.
017_0244_c_10L下劣轉等,其言易了,無煩重釋.廣大轉等者,謂於雜染,斷而不捨,於生死中,達無我故.斷諸雜染,卽於其中,見寂靜故,而不棄捨.住下劣轉,有何過失等,其文易解.住廣大轉,有何功德等者,於一切法,得自在故,於一切趣,示顯一切同分之身,種種調伏,方便善巧,安立所化有感有情,置最勝生,及三乘中.最勝生者,謂諸世閒安樂生處.應知此是說法功德.論曰:此中有多頌:

모든 범부는 진실을 덮고
한결같이 허망을 나타내며
모든 보살은 허망을 버리고
한결같이 진실을 나타내네.
017_0244_c_21L諸凡夫覆眞,
一向顯虛妄,
諸菩薩捨妄,
一向顯眞實.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을 마땅히 알지니,
진실한 대상[眞義]과 진실하지 않은 대상[非眞義]임을.
전의하는 것은 곧 해탈이며
바라는 바에 따라 자재하게 행하네.
017_0244_c_23L應知顯不顯,
眞義非眞義,
轉依卽解脫,
隨欲自在行.
017_0245_a_01L
생사와 열반에 대해서
만약 평등한 지혜를 일으키면
이때 이것에 의해서 증득하니,
생사가 곧 열반임을.
017_0245_a_01L於生死涅槃,
若起平等智,
爾時由此證,
生死卽涅槃

이것에 의해 생사에 대해서
버리는 것도 아니고, 버리지 않는 것도 아니니
또한 열반에 대해서도, 즉
얻는 것도 아니고, 얻지 않는 것도 아니네.
017_0245_a_02L由是於生死,
非捨非不捨,
亦卽於涅槃,
非得非不得.

【釋】전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많은 게송을 설한다.
‘모든 범부는 진실을 덮고’ 등이란, 말하자면 범부와 같은 경우는 무명을 아직 끊지 못하고 진실한 대상[眞義]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덮는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무명의 힘 때문에 모든 허망은 모두 다 현현한다.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무명을 끊기 때문에 허망은 모두 다 없다고 통달하기 때문에 ‘허망을 버린다’라고 한다. 오직 진실한 대상만이 한결같이 현현하는 것은 이러한 도리에 의하는 것이다.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을 마땅히 알지니, 진실한 대상과 진실하지 않은 대상[非眞義]임을’이란, 말하자면 원성실의 진실한 대상은 현현하고 변계소집의 진실하지 않은 대상은 모두 현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017_0245_a_04L釋曰:爲顯轉依,復說多頌.諸凡夫覆眞等者,謂如凡夫無明未斷`眞義不顯,故說名覆.無明力故,一切虛妄皆悉顯現.菩薩不爾,無明斷故,通達虛妄,皆無所有,故名捨妄,唯有眞義一向顯現.由此道理,應知顯`不顯,眞義`非眞義者,謂圓成實眞義顯現,遍計所執非眞實義,皆不顯現.
‘전의’라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진실하지 않은 대상은 모두 현현하지 않고, 모든 진실한 대상은 모두 다 현현하기 때문에 ‘전의’라고 이름한다.
‘곧 해탈이며’란 말하자면 전의가 바로 해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바라는 바에 따라 자재하게 행하네’란 말하자면 이 전의의 해탈은 자재하여 모든 세간에 있어서 바라는 바에 따라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라는 바에 따라 짓는 것이 자재하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이름한다. 목을 베는 것과 같이 몸과 목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을 ‘해탈’이라고 이름한다.
017_0245_a_12L言轉依者,謂非眞義,皆不顯現,所有眞義,皆悉顯現,故名轉依.卽解脫者,謂卽轉依,名爲解脫.隨欲自在行者,謂此轉依解脫自在,於諸世閒,得隨欲行,由隨所欲,所作自在,故名解脫,非如斬首捨離身命名爲解脫.
017_0245_b_01L‘생사와 열반에 대해서 만약 평등한 지혜를 일으키면’ 등에서 말하자면 변계소집자성을 생사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곧 성품이 없는 것이며 성품이 없는 것은 공(空)이다. 공은 곧 열반이고 원성실성이다.
‘이것에 의해 생사에 대해서 버리는 것도 아니고, 버리지 않는 것도 아니니’ 등이란 말하자면 즉 생사는 열반이기 때문에 ‘버리는 것도 아니고’라고 설하며, 다시 생사의 명상(名想)이 전전하지 않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고 설하는 것이다. 생사를 떠나서 달리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얻는 것도 아니고’라고 설하며, 이 가운데 즉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에 ‘얻지 않는 것도 아니네’라고 설하는 것이다.
017_0245_a_18L於生死`涅槃,若起平等智等者,謂遍計所執自性,名爲生死,此卽無性,無性卽空,空卽涅槃,圓成實性.由是於生死,非捨非不捨等者,謂卽生死是涅槃,故說名非捨,無復生死,名想轉故,名非不捨.非離生死別得涅槃故名非得,卽於此中,證涅槃故,名非不得.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①
017_0245_b_02L攝大乘論釋彼果智分第十一之一

【論】이와 같이 저 증과인 단멸[果斷]의 뛰어남에 대해서 이미 설하였다. 저 증과인 지혜[果智]의 뛰어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13)
말하자면 세 가지 불신에 의해서 저 증과인 지혜의 뛰어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자성신(自性身)에 의하고,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에 의하며,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에 의한다.
여기에서 자성신이란 모든 여래의 법신을 말한다. 일체의 법이 자재하게 전전하는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수용신이란 말하자면 법신에 의지하여 갖가지 모든 부처님의 여러 가지 모임에 나타나는 것[所顯]이다. 청정한 불국토에서 대승의 법락을 수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변화신이란 또한 법신에 의지하는 것으로 도사다천궁(覩史多天宮)14)으로부터 나투어 생을 받고, 하고자함을 수용하여 성을 넘어 출가하고, 외도의 처소로 가서 여러 가지 고행을 닦고, 대보리를 증득하고, 대법륜을 굴리고, 대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017_0245_b_03L論曰:如是已說,彼果斷殊勝,彼果智殊勝,云何可見?謂由三種佛身,應知彼果智殊勝:一由自性身`二由受用身`三由變化身.此中自性身者,謂諸如來法身,一切法自在轉所依止故.受用身者,謂依法身,種種諸佛衆會所顯,淸淨佛土,大乘法樂,爲所受故.變化身者,亦依法身,從睹史多天宮現沒`受生`受欲`踰城出家`往外道所修諸苦行`證大菩提`轉大法輪`入大涅槃故.
【釋】끊어야 할 것[所斷]을 끊음에 의해서 무구(無垢)ㆍ무가애(無罣礙)의 지혜를 획득하기 때문에 단멸의 뛰어남에 이어서 증과인 지혜의 뛰어남을 설하는 것이다. 자성신 가운데 자성이라 이름하는 것은 짐짓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 자성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신(身)’이라고 이름한다. 법성은 곧 신(身)이기 때문에 법신(法身)이라고 이름하며, 혹은 이것은 제법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법신이라고 이름한다.
‘일체의 법이 자재하게 전전하는 의지처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일체의 법에서 자재하게 전전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한 의지처이기 때문에 ‘일체의 법이 자재하게 전전하는 의지처’라고 하는 것이다. 혹은 지업석에 의하는 것이다.
017_0245_b_14L釋曰:由斷所斷獲得無垢無罣㝵智故,斷殊勝無閒次說果智殊勝.自性身中,非假所立,故名自性,是所依止,故名爲身,法性卽身,故名法身.或是諸法,所依止處,故名法身.言一切法自在轉所依止者,謂於一切法,得自在轉,亦所依止,故名一切法自在轉所依止.或依持業釋.
017_0245_c_01L수용신 가운데 ‘법신에 의지하여’란 저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갖가지 모든 부처님의 여러 가지 모임에 나타나는 것[所顯]이다’란 말하자면, 어떤 불국토에서 모든 대보살의 무리가 구름처럼 모인다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요지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것은 서방의 극락토(極樂土) 등이다.
‘청정한 불국토에서 대승의 법락을 수용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청정한 불국토에서 갖가지 대승의 법락을 수용하여 대상[義]을 깨닫기 때문이다. 혹은 청정한 불국토에서 갖가지 금ㆍ은 등의 보배를 수용하며, 모든 불보살은 전전하여 아름다운 색신(色身)을 수용하고, 경전 등의 갖가지 법의(法義)를 수용하며,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안립하기 때문이다.
017_0245_b_22L受用身中,依法身者,由有彼故,而得有此.種種諸佛衆會所顯者,謂有佛土諸大菩薩衆所雲集,由此了知,故名所顯,卽是西方極樂土等.淸淨佛土大乘法樂,爲所受故者,謂於淸淨佛國土中,受用種種大乘法樂,領解義故.或於淸淨佛國土中,受用種種金銀等寶,諸佛菩薩,展轉受用妙色身等,及受經等,種種法義,安立自相及共相故.
무엇이 소의인가? 다시 이것은 누가 의지하는가? 말하자면 앞의 무구ㆍ무가애의 지혜이다. 이 묘지(妙智)의 증상력으로 인해서 능히 불가사의 해탈에 안주하게 된다. 이미 큰 지위에 들어간 모든 대보살은 청정한 불국토에서 대승의 법락의 모습이 나타나는 지혜를 생기게 한다.
변화신 가운데 ‘법신에 의지하는’이란 앞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이, 말하자면 증과인 지혜의 뛰어난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도사다천궁으로부터 나투어 내지……열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능히 나머지 상속 가운데 동분(同分)의 사람과 동분인 식상(識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論】이것에 대하여 하나의 올타남 송을 설한다.
017_0245_c_08L何者所依?復是誰依?謂前無垢無罣㝵智,由此妙智增上力故,能令安住不可思議解脫.已入大地諸大菩薩,淸淨佛土大乘法樂相現智生.變化身中,依法身者,如前已說,謂由果智殊勝力故,從睹史多天宮現沒乃至涅槃.此卽能令餘相續中,與人同分識相生起.論曰:此中說一嗢拕南頌:

양상[相]과 증득(證得)과 자재(自在)와
의지(依止)와 그리고 섭지(攝持)와
차별(差別)과 덕(德)과 매우 심오함[甚深]과
생각[念]과 업(業)으로 모든 부처님을 밝히네.
017_0245_c_17L相證得自在,
依止及攝持,
差別德甚深,
念業明諸佛.
017_0246_a_01L
【釋】종합적인 뜻을 간략하게 드러내는 것을 올타남이라고 이름한다. 양상과 증득 등은 드러나게 되는 뜻이다.
【論】모든 부처의 법신은 무엇을 양상[相]으로 삼는가? 법신에는 간략하게 다섯 가지 양상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처음 종합적으로 드러난 양상에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며, 아래에서 전의 등으로 구별하여 다섯 가지 양상을 해석한다.
【論】첫째는 전의를 양상으로 삼으니, 말하자면 모든 장애의 잡염분의 의타기성을 전환하여 멸하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전환하여 해탈을 얻어서 법을 자재하게 굴려 청정분의 의타기성을 현전하기 때문이다.
017_0245_c_19L釋曰:略標摠義,名嗢拕南,相證得等,是所標義.論曰:諸佛法身,以何爲相?應知法身,略有五相.釋曰:初摠標相,復有五種,下轉依等,別釋五相.論曰:一轉依爲相,謂轉滅一切障雜染分依他起性故,轉得解脫一切障,於法自在轉,現前淸淨分依他起性故.
【釋】‘모든 장애의 잡염분의 의타기성을 전환하여 멸하기 때문이며’란 잡염분의 의타기성을 전환하여 소취의 양상과 능취의 양상에 흡사한 것을 영원히 생겨나지 않게끔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장애를 전환하여 해탈을 얻어서 법을 자재하게 굴려 청정분의 의타기성을 현전하기 때문이다’란 소취와 능취의 성품 없음이 드러낸 이구진여(離垢眞如)의 원성실성을 전환하여 얻고, 모든 법을 자재하게 굴리는 것을 얻어서 극히 청정한 부분에 인한 의타기성을 현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017_0246_a_05L釋曰:轉滅一切障雜染分依他起性故者,謂轉雜染分依他起性,似所取相及能取相,令永不生故.轉得解脫一切障,於法自在轉現前淸淨分依他起性故者,謂轉得所取`能取無性所顯離垢眞如圓成實性,及得於一切法自在而轉,現在前因極淸淨分依他起性故.
【論】둘째는 백법(白法)15)을 이루는 것을 양상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6바라밀다를 원만히 하여 열 가지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수명[壽]의 자재와 마음[心]의 자재와 여러 도구[衆具]의 자재는 보시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며, 업(業)의 자재와 태어남[生]의 자재는 계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고, 뛰어난 이해[勝解]의 자재는 인욕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다. 서원[願]의 자재는 정진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며, 신통력[神力]의 자재는 다섯 가지 신통을 포함하는 것이며, 정려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다. 지혜[智]의 자재와 법(法)의 자재는 반야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다.
017_0246_a_13L論曰:二白法所成爲相,謂六波羅蜜多圓滿,得十自在故.此中壽自在`心自在`衆具自在,由施波羅蜜多圓滿故.業自在`生自在,由戒波羅蜜多圓滿故.勝解自在,由忍波羅蜜多圓滿故.願自在,由精進波羅蜜多圓滿故.神力自在,五通所攝,由靜慮波羅蜜多圓滿故.智自在`法自在,由般若波羅蜜多圓滿故.
017_0246_b_01L【釋】‘백법을 이루는 것을 양상으로 삼는다’란 말하자면 모든 성문이 얻게 되는 전의는 오직 번뇌만을 영원히 끊어 나타나는 것이며 백법을 이루는 것을 양상으로 하지 않지만, 모든 보살이 얻게 되는 전의의 경우는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수습하여 매우 원만히 하기 때문에 백법의 자성인 열 가지 자재를 그 양상으로 삼는다. 이때에는 한 생각이라도 무기분(無記分)이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염오분(染汚分)이겠는가?
‘이 가운데’ 이하는 열 가지 자재를 해석하는 것이다.
‘수명의 자재’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서 능히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다.
017_0246_a_22L釋曰:白法所成爲相等者,謂諸聲聞所得轉依,唯是煩惱,永斷所顯,無有白法所成爲相.若諸菩薩,所得轉依,修習六種波羅蜜多,極圓滿故,白法自性,十種自在,以爲其相,於此時中,無有一念,是無記分,況染污分.此中已下,釋十自在.壽自在者,謂隨所欲,能捨命故.
‘마음의 자재’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생사에 대해서 염오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의요에 따라서 능히 바르게 남을 위해서 여러 도구를 끌어당겨 섭수하여 거기에서 자재하게 그 마음을 운전하는 것을 ‘마음의 자재’라고 한다.
‘여러 도구의 자재’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음식 등의 여러 가지에 생을 돕는[資生] 도구들을 좋아하는 뜻대로 능히 모으기 때문이다. 여러 도구와 자재(資財)는 그 뜻이 같다. ‘보시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며’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법시ㆍ무외시ㆍ재시에 의해서 원만히 하고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이 결과를 얻기 때문이다.
‘업의 자재’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모든 업에 대해서 대자재를 얻어서 오직 선업만을 짓고 악업과 무기업은 짓지 않으며, 그 선업을 남에게 권하여 짓게끔 하기 때문이다.
017_0246_b_07L心自在者,謂於生死,無染污故.又隨意樂,能正爲他,引攝衆具,於中自在,運轉其心,名心自在.衆具自在者,謂飮食等,諸資生具,隨意所樂,能積集故.衆具`資財其義是一.由施波羅蜜多圓滿故者,謂由法施`無畏施`財施圓滿,如其所應,得此果故.業自在者,謂於諸業,得大自在,唯作善業,非惡無記,及於其中,勸他作故.
017_0246_c_01L‘태어남의 자재’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모두가 태어날 곳에 상응하여 그 바라는 바에 따라 생을 받는 것[受生]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계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고’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두 가지 자재는 시라의 결과이니, 계를 구족하는 이는 오직 선업만을 짓기 때문이며, 또한 계를 구족한 이는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기 때문이다.
‘뛰어난 이해의 자재’란 지(地) 등에서 뛰어난 이해를 일으켜서 금 등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뛰어난 이해와 같이 하는 바에 따라서 지 등과 금 등은 뛰어난 이해에 따라 전환된다. ‘인욕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다’란 말하자면 이 자재는 이 인욕의 결과라는 것이다. 마치 옛날에 인시(因時)16)에 즐겨 인욕을 닦았기 때문에, 모든 유정의 마음이 좋아하는 바에 따라서 전환하였기 때문에, 지금 지 등과 금 등을 획득하는 것은 뛰어난 이해에 따라서 전환하는 것이다.
017_0246_b_15L生自在者,謂於一切應所生處,如其所欲,現受生故.由戒波羅蜜多圓滿故者,謂二自在是尸羅果,由具戒者,唯造善業故,又具戒者,所願皆成故.勝解自在者,謂於地等,發起勝解,令成金等,如所勝解地等金等,隨勝解轉.由忍波羅蜜多圓滿故者,謂此自在,是其忍果,如昔因時,樂修忍故,隨諸有情心所樂轉故,今獲得地等金等,隨勝解轉.
‘서원의 자재’란 말하자면 원하는 바에 따라서 모든 일을 이루는 것이다. ‘정진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며’란 이 자재는 정진의 결과라는 것이다. 옛날 인시에 정진을 닦았기 때문에, 모든 유정의 모든 이롭고 안락한 일에 대해서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원하는 바대로 자재한 것이다.
‘신통력의 자재는 다섯 가지 신통을 포함하는 것이며’란 의요에 따라서 갖가지 가장 뛰어난 신통을 낸다는 것이다. ‘정려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다’란 이 자재는 정려의 결과라는 것이다. 옛날 인시에 즐겨 선정을 닦았기 때문에, 모든 유정이 마땅히 지어야 할 바의 일에 따라서 갖가지 정려와 등지(等至)에 깨달아 들어가게 하였기 때문에, 지금에 선정에서 짓게 되는 신통의 자재를 얻는 것이다.
017_0246_c_02L願自在者,謂隨所願,一切事成,由精進波羅蜜多圓滿故者,謂此自在,是精進果,由昔因時,修精進故,於諸有情,諸利樂事,無有懈廢,故於今時,所願自在.神力自在五通所攝者,謂隨意樂引發種種最勝神通.由靜慮波羅蜜多圓滿故者,謂此自在,是靜慮果,由昔因時,樂修定故,隨諸有情,所應作事,證入種種靜慮等至,故於今時,得定所作神通自在.
‘지혜의 자재’라고 하는 것은 모든 갖가지 언음(言音)에 따라 지혜가 현전하기 때문이다.
‘법의 자재’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의요에 따라서 계경ㆍ응송 등을 잘 설하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기 때문이다’란 이 자재는 반야의 결과라는 것이다. 옛날 인시에 즐겨 혜(慧)를 닦았기 때문에, 그 부류의 언음에 따라서 그들을 위해서 정법을 설해 주었기 때문에, 지금 수승한 반야를 증득하고 오묘한 언음에 통달하여 솜씨 있게 정법을 설한다.
017_0246_c_11L智自在者,謂隨所有種種言音,智現前故.法自在者,謂隨意樂,宣說契經,應頌等故.由般若波羅蜜多圓滿故者,謂此自在,是般若果,由昔因時,樂修慧故,隨其類音,爲說正法故,今證得殊勝般若,妙達言音,巧說正法.
【論】셋째는 두 가지가 없음[無二]을 양상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유(有)와 무(無)의 두 가지가 없음을 양상으로 삼는다. 모든 법은 무소유에 의하기 때문이며 공(空)으로 드러나게 되는 양상은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유위와 무위의 두 가지가 없음을 양상으로 삼는다. 업번뇌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자재하게 유위의 양상을 현시하기 때문이다. 다른 성품과 동일한 성품의 두 가지가 없음을 양상으로 삼는다. 모든 부처님의 의지처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한량없이 상속하여 등각을 나타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게송이 있다.
017_0246_c_17L論曰:三無二爲相,謂有無無二爲相,由一切法,無所有故,空所顯相,是實有故.有爲`無爲,無二爲相,由業煩惱非所爲故,自在示現有爲相故.異性`一性,無二爲相,由一切佛所依無差別故,無量相續,現等覺故.此中有二頌:
017_0247_a_01L
아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는 별도의 의지가 없으며
앞에 능히 증득하는 것의 차별에 따르니
그러므로 다름이 있음을 시설하네.
017_0246_c_23L我執不有故,
於中無別依,
隨前能證別,
故施設有異.

종성(種性)이 다르기 때문에, 허망이 아니기 때문에,
원만하기 때문에, 처음이 없기 때문에,
무구(無垢)의 의지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도 아니다.
017_0247_a_02L種性異非虛,
圓滿無初故,
無垢依無別,
故非一非多.

【釋】‘유와 무의 두 가지가 없음을 양상으로 삼는다’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유상(有相)이 아닌 것은 모든 법이 변계소집성에서는 모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무상(無相)이 아닌 것은 공으로 드러나게 되는 자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위와 무위의 두 가지가 없음을 양상으로 삼는다’란 업번뇌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위의 양상이 아니며, 능히 유위법과 흡사하게 시현하여 대자재를 얻고 자주자주 유위와 흡사하게 시현하기 때문에 무위의 양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성품과 동일한 성품의 두 가지가 없음을 양상으로 삼는다’란 부처님의 법신의 체는 바로 하나이기 때문에 다른 성품[異相]이 아니며, 한량없는 의지는 각각 따로따로 증득하기 때문에 동일한 성품[一相]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도 하나도 없기 때문에 무위의 양상이라고 이름한다.
017_0247_a_03L釋曰:有`無無二爲相者,謂非有相,以一切法,遍計所執,皆無有故亦非無相,以空所顯,自性有故.有爲`無爲,無二爲相者,以業煩惱,非所爲故,非有爲相於能示現,似有爲法,得大自在,數數示現,似有爲故,非無爲相.異性一性,無二爲相者,以佛法身體是其一,故非異相無量依止,各別證得,故非一相.俱一無故,名無二相.
또한 두 게송, 이른바 ‘아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등으로써 이와 같은 의미를 섭수하여 그것을 쉽게 알게끔 한다. 만약 이곳에 그 아집이 있어서 스스로를 계탁하여 아(我)라 하고, 외부의 것을 집착하여 타(他)라고 하면, 즉 거기에서 자신과 타인, 이것과 저것은 각각 다르다고 분별한다. 법신에서는 아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에 다름이 있다고 분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많은 부처님이 있다고 설하는가? 앞에 능히 증득하는 것의 차별이 있음을 따르기 때문에 다름이 있음을 시설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살의 능히 증득하는 위[能證位]의 차별에 따라서 다름이 있음을 시설하고, 세간의 명언(名言)에 수순하기 때문에 “이것은 석가모니불이다”, “이것은 승관불(勝觀佛)이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017_0247_a_12L復以二頌,攝如是義,令其易了,所謂我執,不有故等.若於是處,有其我執,計自爲我,執外爲他,卽於其中,分別自他,此彼各異.於法身中,無有我執,故無分別,此彼有異.若爾,云何說有多佛?隨前能證,有差別故,施設有異.謂隨菩薩,能證位別,施設有異,隨順世閒,名言故說,此是釋迦牟尼`此是勝觀佛等.
017_0247_b_01L‘종성이 다르기 때문에’란 말하자면 원래의 인성(因性)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부처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성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본성주종성(本性住種性)으로서, 말하자면 아득한 옛적부터 6처의 뛰어남을 전전 상속하여 법이(法爾)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습소성종성(習所成種性)으로서, 말하자면 원래부터 좋은 벗의 힘 등을 자주 익혀서 성취되는 것이다. 본성주종성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습소성종성에 그러한 많은 종류가 있는 것이다. 종성이 많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부처님만을 집착하여 다시 나머지 부처님은 없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017_0247_a_21L種性異故者.謂本因性,有差別故,非唯一佛.種性有二:一本性住種性,謂無始來,六處殊勝,展轉相續,法爾所得二習所成種性,謂從先來,善友力等,數習所成.本性住性,有差別故,習所成性,有其多種.種性多故,執唯一佛,更無餘佛,不應道理.
‘허망이 아니기 때문에’란 많은 보살이 있어서 앞의 종성에 의지하여 각각 따로따로 보리의 자량을 닦고 모은다는 것이다. 만약 오직 한 부처님만이 있다면 하나만이 보리를 증득하고 나머지는 증득한 것이 없어서 저 자량을 모으는 것은 마땅히 헛되어 결과가 없어야만 한다. 이러한 도리는 맞지 않는다.
‘원만하기 때문에’란 말하자면 모든 여래께서는 두루 각각 다른 곳에서 유정을 교화하고 이익되고 안락한 올바른 일을 이룬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3승에 대해서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안립한다. 만약 오직 한 부처님만이 있다면 곧 유정을 안립하여 불승(佛乘)에 둘 수 없다. 다시는 제2의 부처님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곧 여래가 짓는 불사는 마땅히 원만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많은 부처님이 있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017_0247_b_04L非虛故者,有多菩薩,依前種性,各別修集菩提資糧.若唯一佛,一證菩提,餘無所證,彼集資糧,應空無果,不應道理.圓滿故者.謂諸如來,遍於各別,所化有情,成立利益安樂正事,謂於三乘,如應安立.若唯一佛,是則不可安立有情置於佛乘,以更無有第二佛故,是則如來所作佛事應不圓滿,是故定應許有多佛.
‘처음이 없기 때문에’란 말하자면 모든 여래께서는 전전(前前)에 세상에 나와 마치 생사에 최초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자량을 모으는 것을 떠나서 자연히 성불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떠나서 능히 자량을 모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하나의 부처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많은 부처님이 있다고 집착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무구(無垢)의 의지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무구의 법계를 ‘무구의 의지’라고 이름한다. 지혜의 뛰어남에 의해서 결국 객진의 더러움[垢]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이 무루의 진법계(眞法界) 가운데 모든 부처님은 반드시 차별이 있다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은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도 아니다.
017_0247_b_13L無初故者,謂諸如來,前前出世,猶如生死,無有最初,離集資糧,自然成佛,不應理故,離逢事佛,能集資糧,不應理故,由此決定,非唯一佛.又不應執定有多佛,無垢所依,無差別故.無漏法界,名無垢依,由智殊勝,畢竟遣除客塵垢故.於此無漏眞法界中,不可定執諸佛有異,是故諸佛,非一非多.
【論】넷째는 상주(常住)를 양상으로 삼으니, 말하자면 진여의 청정한 양상이기 때문이며, 본원(本願)에 의해서 이끌리게 되기 때문이며, 마땅히 지어야 할 바의 일은 구경의 기간이 없기 때문이다.
017_0247_b_21L論曰:四常住爲相,謂眞如淸淨相故`本願所引故`所應作事無竟期故.
017_0247_c_01L【釋】항상 변역(變易) 없이 상속하여 끓어짐이 없다. 그러므로 ‘상주를 양상으로 삼는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세 가지 인연에 의해서 이러한 양상을 성립시킨다.
‘진여의 청정한 양상이기 때문이며’란 이것은 진여의 성품이 항상 변화됨이 없음을 나타내고, 성불의 결과는 법신이라고 설함을 나타낸다. 성품이 만약 변역하면 곧 진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므로 상주이다.
017_0247_b_23L釋曰:恒無變易,相續無斷,是故說言,常住爲相,由三因緣,成立此相.眞如淸淨相故者,此顯眞如,性常無變,顯成佛果,說爲法身,性若變易,卽非眞如,是故常住.本願所引故者,謂諸如來,皆先發起,如是大願:我當度脫無量有情,令般涅槃.諸有情類,未般涅槃,願所引果,相續不絕,是故常住.
‘본원에 의해서 이끌리게 되기 때문이며’란 말하자면 모든 여래께서는 다 먼저 대원을 일으키기를, “나는 마땅히 무량한 유정을 건져서 반열반에 들게 하리라”고 한다. 모든 중생의 부류가 아직 반열반에 들지 못했으면, 원에 의해 이끌리게 되는 결과는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상주이다. 이 원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 상속을 여의면 상주의 도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마땅히 지어야 할 바의 일은 구경의 기간이 없기 때문이다’란 말하자면 앞서 대원에 의해 마땅히 지어야 할 바의 일은 구경의 기간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유정의 부류는 그 양이 끝이 없기 때문에 내지 유정은 상속하여 끊임없어 부처님께서 지은바 일은 항상 끊임없기 때문에 설하여 항상[常]이라고 이름한다.
017_0247_c_08L願所引,離相續常,道理不成.所應作事,無竟期故者,謂先大願,所應作事無究竟期,諸有情類,量無邊故,乃至有情,相續不斷,佛所作事,恒無斷故,說名爲常.
【論】다섯째는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양상으로 하니, 말하자면 진여의 청정을 자신 안으로 증득했기 때문이며, 세간의 비유로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며, 모든 사유 분별이 행해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釋】‘사의(思識)’라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도리에 의해서 진리를 관찰하여 사유하는 것[審諦思惟]이다. 분별을 일으킨 지(智)는 심사(尋思)에 의해 포섭되는 것이며, 비유에 의해 나타나는 것인데 모든 부처님은 이러한 곳이 행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불가사의이다. 모든 심사의 지위를 초월하기 때문에 오직 신해(信解)해야만 하고 사의해서는 안 된다.
017_0247_c_13L論曰:五不可思議爲相,謂眞如淸淨自內證故`無有世閒喩能喩故`非諸尋思所行處故.釋曰:言思議者,謂依道理,審諦思惟,起分別智,尋思所攝`譬喩所顯.諸佛非此所行處故,不可思議.超過一切尋思地故,唯應信解,不應思議.
017_0248_a_01L【論】또한 어떻게 이와 같은 법신을 최초로 증득하는가? 말하자면 총체적인 양상[總相]의 대승법의 경계를 반연하는 무분별지와 후득지를 다섯 가지 양상으로 잘 닦고, 모든 지위에서 자량을 잘 모아서, 금강유정에서 미세하여 파괴하기 어려운 장애를 파멸함으로써 이 선정 다음 찰나에 모든 장애를 여읜다. 그러므로 전의를 증득한다.
017_0247_c_20L論曰:復次云何,如是法身,最初證得?謂緣摠相,大乘法境,無分別智,及後得智,五相善修,於一切地,善集資糧,金剛喩定,破滅微細難破障故,此定無閒,離一切障.故得轉依.
【釋】신해도 또한 처음 얻은 법신[初得法身]이라고 이름하며, 법행(法行) 또한 이와 같다. 저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현재의 증득을 설하는 것이다. 단지 증득을 말해도 생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체가 항상하기 때문이다.
‘총체적인 양상……반연하는’ 등은 그 뜻을 이해하기 쉽다.
‘다섯 가지 양상으로 잘 닦고’란 말하자면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본래적정(本來寂靜)ㆍ자성열반(自性涅槃) 그리고 무자성(無自性)을 다섯 가지 양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집총수(集總修) 등의 다섯 가지 양상17)을 잘 닦아서 다섯 가지 결과를 성취한다.
017_0248_a_02L釋曰:信解亦名初得法身.法行亦爾,爲簡彼故,說現證得.但言證得非生起者,體是常故,緣摠相等,其義易了.五相善修者,謂無生`無滅`本來寂靜`自性涅槃,及無自性,名爲五相.又集摠等,五相善修,成辦五果
하지면 생각생각 가운데 모든 추중의 의지처를 없애고, 갖가지 생각[想]을 여의어 법원(法苑)의 즐거움을 얻으며, 두루하고 무량한 분한(分限) 없는 양상[相]을 능히 바르게 요지하며, 대법의 광명으로 청정분에 따라서 분별하는 바 없는 무상(無相)을 현행하고, 법신을 원만하게 성취시키기 위해서 후후(後後)의 뛰어난 원인을 능히 바르게 섭수한다는 것이다.
‘미세하여 파괴하기 어려운 장애를 파멸함으로써’란 금강에 비유한 이 선정의 원인[因]을 현시한 것이다. 비유하면 금강은 그 성품이 견고하여 능히 파괴하기 어려운 것을 파괴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이 선정은 모든 하류(下類)를 초월하여 능히 파괴하기 어려운 불염무지(不染無知)를 파괴하고 능히 무상청정(無上淸淨)의 지혜의 도[智道]를 내기 때문에 금강에 비유한다.
‘이 선정 다음 찰나에 모든 장애를 여의기 때문에 전의를 증득한다’란 무분별지와 후득지에 의하기 때문에 전의를 증득하고[證] 부처님의 법신을 얻는다[得]는 것이다.
017_0248_a_08L謂念念中,銷融一切麤重依止,離種種想,得法苑樂,能正了知周遍無量無分限相,大法光明,順淸淨分,無所分別,無相現行,爲令法身,圓滿成辦,能正攝受後後勝因.破滅微細難破障故者,顯示此定喩金剛因,譬如金剛,其性堅固,能破難破.如是此定,超諸下類,能破難破,不染無知,能發無上淸淨智道,故譬金剛,此定無閒,離一切障故.得轉依者,由無分別及後得智,故證轉依,得佛法身.
017_0248_b_01L【論】또한 법신은 몇 가지 자재에 의해서 자재를 얻는가?18) 간략히 다섯 가지에 의해서이다.
첫째는 불국토와 자신(自身)과 상호와 가없는 음성[無邊音聲]과 머리를 볼 수 없는 광대한 모습[無見頂相]의 자재에 의하니, 색온(色蘊)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죄가 없고 한량없으며 광대한 즐거움에 안주함[樂住]의 자재에 의하니, 수온(受蘊)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모든 명칭[名身]ㆍ문구[句身]ㆍ글자[文身]를 잘 설하는[辯說] 자재에 의하니, 상온(想蘊)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현화(現化)19)와 변역(變易)과 대중을 끌어당김과 청정법[白法]을 끌어당김의 자재에 의하니, 행온(行蘊)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원경(圓鏡)과 평등(平等)과 관찰(觀察)과 성소작(成所作)의 지혜의 자재에 의하니, 식온(識薀)의 의지처를 전변하기 때문이다.
017_0248_a_19L論曰:復次法身,由幾自在,而得自在?略由五種:一由佛土`自身`相好`無邊音聲`無見頂相自在,由轉色薀依故二由無罪無量廣大樂住自在,由轉受薀依故三由辯說一切名身`句身文身自在,由轉想薀依故四由現化`變易`引攝大衆`引攝白法自在,由轉行薀依故五由圓鏡`平等`觀察`成所作智自在,由轉識薀依故.
【釋】5온의 의지를 전환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자재를 얻는다.
모든 성문 등은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나환자가 스스로 신명(身命)을 끊은 것과 같이 모든 온을 끊는다. 모든 보살의 경우는 교묘한 방편[巧方便]을 섭수하여 지혜 있는 나환자가 모든 좋은 약을 구하여 병 있는 몸을 바꾸어 병 없는 몸을 성취하는 것과 같이, 죄 있는 색 등의 모든 온을 바꾸어 멸하고 죄 없는 색 등의 모든 온을 바꾸어 일으킨다.
이 가운데 색온의 의처지를 전환하기 때문에 능히 불국토를 현시하는 자재를 얻으니, 그 하고자 하는 바대로 금ㆍ은 등의 모든 불국토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017_0248_b_05L釋曰:由轉五薀依故,得五自在.諸聲聞等,怖畏苦故,永斷諸薀,如愚癩人自捨身命.若諸菩薩,攝巧方便,轉滅有罪,色等諸薀,轉起無罪色等諸薀.如智癩人,求諸良藥,轉有病身,成無病身.此中由轉色薀依故,得能示現佛土自在,如其所欲,現金銀等,諸佛土故.
능히 자신(自身)을 현시하는 자재를 얻으니, 마음에서 생각하는 바대로 모두 능히 시현하고 그 갖가지 대집회에서 교화될 유정의 모든 근기의 정도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능히 상호(相好)를 시현하는 자재를 얻으니, 사랑하고 좋아하는 바에 따라서 갖가지 오묘한 상호를 시현하기 때문이다.
능히 가없는 음성과 머리를 볼 수 없는 광대한 모습의 두 가지를 시현하는 자재를 얻으니, 부처님 음성은 한량없고 가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머리의 모습[頂相]은 능히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수온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에 죄가 없고 한량없는 광대한 즐거움에 안주함의 자재를 얻는다. 여기에서 번뇌를 여의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많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한량없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모든 삼계의 즐거움을 초과하기 때문에 ‘광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248_b_13L得能示現自身自在,隨心所思,皆能示現,於其種種,大集會中,隨諸所化有情機宜,各別現故.得能示現相好自在,隨所愛樂,示現種種妙相好故.得能示現無邊音聲`無見頂相二種自在,現佛音聲量無邊故`現佛頂相無能見故.由轉受薀依故,得無罪無量廣大樂住自在,應知此中,離煩惱故,名爲無罪,有衆多故,名爲無量,超過一切三界樂故,名爲廣大.
017_0248_c_01L상온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에 능히 모든 명칭ㆍ문구ㆍ글자를 잘 설하는 자재를 얻는다. 능취의 양상이 바로 상(想)의 자성이며 이와 같은 자량을 섭수하는 것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이와 같이 공능의 차별을 전환하여 얻는다. 이것에 의해서 능히 명칭 등의 대상에 대해서 그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서 자재하게 능히 머문다.
이 행온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에 능히 현화(現化)하고 변역하며 대중을 이끌어 포섭하고 청정법을 이끌어 포섭하는 자재를 얻는다. 말하자면 행온 중에서는 사량[思]을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이 사량에 의해서 현화 등에서 자재하는 것이다.
‘능히 현화의 자재를 전환한다’란 그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능히 현화하기 때문이다.
‘변역의 자재’란 그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땅 등을 전변하여 금 등으로 이루기 때문이다.
017_0248_b_22L轉想薀依故,得能辯說一切名身`句身`文身自在,以能取相,是想自性,由攝如是資糧爲因,轉得如是功能差別,由此能於名身等事,隨其所欲,自在能住.由轉行薀依故,得能現化變易引攝大衆引攝白法自在,謂行薀中,思最爲勝,由此思故,於現化等自在.能轉現化自在者,如其所欲,能現化故.變易自在者,如其所欲,轉變地等,成金等故.
‘대중을 끌어당기는 자재’란 좋아하는 뜻대로 천(天) 등의 모든 대중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청정법을 끌어당기는 자재’란 좋아하는 뜻대로 무루법으로 하여금 현전시키기 때문이다. 아뢰야식 등 여덟 가지의 식온을 전환함에 의해서 대원경지 등의 네 가지 묘지를 얻는다. 수의 순서대로 혹은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아뢰야식을 전환하기 때문에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얻는다. 비록 인식의 대상인 경계는 현전하지 않지만 시간[時]ㆍ장소[處]를 잊지도 않고 한정하지도 않는다. 모든 경계에 대해서 항상 우매하지 않으며 무분별의 행을 능히 일으켜 불지(佛智)의 영상을 수용한다.
017_0248_c_09L引攝大衆自在者,如意所樂引攝天等諸大衆故.引攝白法自在者,如意所樂,令無漏法,現在前故.由轉阿賴耶識等,八事識薀,得大圓鏡智等,四種妙智,如數次第,或隨所應.當知此中,轉阿賴耶識故,得大圓鏡智,雖所識境不現在前,而能不忘不限時處,於一切境,常不愚迷,無分別行能起受用佛智影像.
017_0249_a_01L염오의 말나를 전환하기 때문에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얻는다. 비로소 현관할 때 먼저 이미 증득하였으나 수도위에서 전환하여 다시 청정해진다. 이것에 의해서 무주열반에 안주하고 대자대비와 항상 더불어 상응하며 능히 좋아하는 바에 따라서 부처님의 영상을 나타낸다.
의식을 전환하기 때문에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얻는다. 모든 다라니문과 삼마지문을 구족하는 것이 마치 보배로운 창고와 같아서 대회 가운데 능히 모든 자재의 작용을 나타내고 능히 모든 의심을 끊어 버려 능히 법우(法雨)를 내리게 한다.
5식(識)을 전환하기 때문에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얻는다. 두루 시방의 모든 세계에서 능히 변화를 나타내고 도사다천궁에서 몰하여 내지 열반하고 능히 모든 유정을 주지(住持)하여 이롭고 즐거운 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017_0248_c_17L轉染污末那故,得平等性智,初現觀時,先已證得,於修道位,轉復淸淨,由此安住無住涅槃,大慈大悲,恒與相應,能隨所樂,現佛影像.轉意識故,得妙觀察智,具足一切陁羅尼門三摩地門,猶如寶藏,於大會中,能現一切自在作用,能斷諸疑,能雨法雨.轉五識故,得成所作智,普於十方一切世界,能現變化,從睹史多天宮而沒乃至涅槃,能現住持一切有情,利樂事故.
【論】또한 법신은 몇 가지 처소[處]에 의해서 의지가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가?20) 간략하게 세 가지 처소에 의한다.
첫째는 부처님의 갖가지 머무름의 의지처가 된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게송이 있다.
017_0249_a_04L論曰:復次法身,由幾種處應知依止?略由三處:一由種種佛住依止.此中有二頌: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 성품의 환희[喜]를 증득하시니
모두 평등하게 자신의 세계[自界]를 증득하기 때문이네.
환희를 여의는 것은 모두 이것을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환희를 구하는 자는 마땅히 평등하게 증득해야 하네.
017_0249_a_07L諸佛證得五性喜,
皆由等證自界故,
離喜都由不證此,
故求喜者應等證.

작용의 힘[能]21)이 한량없음, 그리고 사업의 성취
법의 맛[法味]과 이익과 덕(德)이 모두 원만하기 때문이네.
환희가 가장 뛰어나서 과실이 없음을 얻으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다함없음[無盡]을 보시기 때문이라네.
017_0249_a_09L由能無量及事成,
法味義德俱圓滿,
得喜最勝無過失,
諸佛見常無盡故.

둘째는 갖가지 수용신(受用身)의 의지처가 되니, 단지 모든 보살을 성숙시키기 위함이다.
셋째는 갖가지 변화신(變化身)의 의지처가 되니, 성문 등을 널리 성숙시키기 위함이다.
017_0249_a_11L二由種種受用身依止,但爲成熟諸菩薩故三由種種變化身依止,多爲成熟聲聞等故.
017_0249_b_01L【釋】‘몇 가지 처소에 의해서 의지가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가?’란 이것은 법신은 몇 가지 법과 함께 의지처가 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간략하게 세 가지 처소에 의한다’란 자세하게 설하면 무량한 공덕의 의지처가 있지만, 지금은 우선 간략하게 단지 세 가지 처소에 의해서 설한다.
‘부처님의 갖가지 머무름의 의지처가 된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여래께서 얻은바 법신은 안주하는 곳인 여러 가지 하늘에 안주함ㆍ성스러움에 안주함ㆍ청정에 안주함과 함께 의지하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하늘에 안주함 가운데 여래께서는 대개 제4정려에 머무르시며, 모든 성스러움에 안주함 가운데 여래께서는 공해탈문에 머무르시고, 모든 청정에 안주함 가운데 여래께서는 대개 그 자비[悲]에 머무르신다. 이와 같이 여래께서 머무르시는 곳이 다양한 것은 성문 등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증득한 열반은 성문 등이 얻은 열반보다 뛰어남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 성품의 환희를 증득하시니’ 등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017_0249_a_14L釋曰:由幾種處應知依止者,此問法身與幾種法,爲所依止.略由三處者,廣卽無量功德依止,今且略說,但由三處.由種種佛住依止者,由諸如來所得法身,與所安住種種天住`聖住`梵住,爲所依止.諸天住中,如來多住第四靜慮諸聖住中,如來多住空解脫門諸梵住中,多住其悲.如是種種,如來所住,勝聲聞等,爲顯如來所證涅槃勝聲聞等所得涅槃,故說諸佛證得五性喜等.
‘자신의 세계를 증득한다’란 스스로의 법계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닦고 다스림에서 바르게 증득하기 때문에 ‘평등하게 증득한다’라고 이름한다.
‘환희를 여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모든 여래께서는 스스로 법계를 증득하여 다섯 가지 환희에 안주한다. 모든 성문 등의 증득은 목을 베는 것과 같이 영원히 멸하는 열반이니 이와 같은 것을 멀리 여의어 가장 뛰어난 환희이기 때문이다.
‘환희를 구하는 자는 마땅히 평등하게 증득해야 하네’란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다섯 가지 환희를 부지런히 구하며 마땅히 바르게 구해서 이러한 진법계를 증득해야 한다.
어떤 것들을 다섯 가지 구하는바 가장 뛰어난 환희라고 하는가?
그러므로 다음에 설하여 ‘작용의 힘[能]이 한량없음, 그리고 사업의 성취’ 등이라고 하는 것이다.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그와 같이 환희하는 것도 다르다. ‘작용의 힘[能]’이란 감능(堪能)을 말한다. ‘한량없음’이라 말하는 것은 무량한 긍가(殑伽)의 모래수를 넘는다는 것이다.
017_0249_b_02L證自界者,證自法界.於此修治,正作證故,名爲等證.言離喜者,謂諸如來,證自法界,安住五喜.諸聲聞等證,如斬首永滅,涅槃遠離.如是最勝歡喜,故求喜者,應等證者,謂諸菩薩,勤求五喜,應正求證此眞法界.何等爲五?所求勝喜,故次說言:由能無量及事成等,由因別故,爾所喜異.能謂堪能.言無量者,謂過無量殑伽沙數.
모든 불ㆍ여래께서 가지고 있는 감능은 똑같이 법신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섞어 놓아 다름이 없이 평등하다. 이와 같은 감능이 무량함을 보기 때문에 대환희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及]’란 모은다는 뜻이다. ‘사업’이란 지은바 일체 유정의 모든 이롭고 즐거운 일이다. 저들의 감능하는 바에 따라서 전도 없이 3승 등에 안립시킨다. ‘성취’란 성판(成辦)을 말한다. 무량한 시간을 경과하더라도 이와 같이 지은 일이 장애 없이 전환하기 때문이다. 감능을 봄에 의해서 마땅히 지어야 할 일 또한 무량하기 때문에 대환희를 내는 것이다.
‘법의 맛’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계경 등의 무상(無上)한 법의 맛으로서 진제(眞諦)를 증득하여 얻은 이치의 맛[理味]을 말한다.
017_0249_b_11L諸佛如來,所有堪能,同依法身,一切和雜平等無異.由見如是能無量故,生大歡喜.及者集義,事者所作,一切有情,諸利樂事,隨彼所能無倒安立於三乘等.成謂成辦,經無量時,此所作事無㝵轉故.由見堪能,所應作事,亦無量故,生大歡喜.言法味者,謂契經等,無上法味,謂證眞諦,所得理味.
017_0249_c_01L‘이익[義]의 원만’이란 말하자면 계경 등의 법에 의해 나타나는 뜻은 모두 원만함을 얻고 자신의 의요에 따라 현전하기 때문이다.
‘덕의 원만’이란 말하자면 신통 등의 공덕이 원만하다는 것이다. 법의 맛 또한 무량함을 보기 때문에, 이익의 원만함 또한 무량함을 보기 때문에, 덕의 원만함 또한 무량함을 보기 때문에 대환희를 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익[義]이란 열반을 말하고, 덕이란 즐거움에 따라서 일어나게 되는 공덕을 말한다. 모두 원만하기 때문에 아울러 대환희를 낸다”라고 설한다.
‘환희가 가장 뛰어나서 과실이 없음을 얻으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다함없음[無盡]을 보시기 때문이라네’란, 말하자면 모든 여래께서는 자신 속에서 진여일미(眞如一味)로서 능히 무량 등으로 생겨나게 되는 대환희를 보고 비록 열반에 들지라도 또한 항상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가장 뛰어나서 과실이 없는 것이다. 삼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이라고 하며,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 습기를 모두 다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017_0249_b_19L義圓滿者,謂契經等法所詮義,皆得圓滿,隨自意樂,現在前故.德圓滿者,謂神通等,功德圓滿,由見法味,亦無量故,見義圓滿,亦無量故,見德圓滿,亦無量故,生大歡喜.復有說言,義謂涅槃,德謂隨樂,所起功德,俱圓滿故,竝生大喜.得喜最勝無過失,諸佛見常無盡故者,謂諸如來,見自身中,眞如一味,能無量等,所生大喜,雖入涅槃,亦常無盡,是故最勝,無有過失.出三界故,名爲最勝,煩惱`所知二障幷習,皆永斷故,名無過失.
‘갖가지 수용신(受用身)의 의지처가 되니’ 등이란 말하자면 법신을 증상연으로 함에 의해서 저것을 전환할 수 있기 때문에 ‘의지처’라고 설하는 것이다. 햇빛이 해를 의지하는 도리와 같지 않다. 변화신과 함께 의지처가 되는 그 뜻 또한 이와 같다.
‘널리(성숙시키기)위함이다’란 승해행지(勝解行地)의 보살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신해가 약한 모든 성문 등은 불신을 볼지라도 마땅히 성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업(初業) 보살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미 큰 지위(地位)에 들어간 모든 보살 대중은 화신에 의하지 않아도 반드시 성숙할 수 있으니 깊고 깊으며 크고 넓은 법에 대하여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017_0249_c_07L種種受用身依止等者,謂由法身,爲增上緣,彼得轉故,說名依止.非如日光依日道理.與變化身,爲所依止,其義亦爾.言多爲者,攝取勝解行地菩薩,以劣信解諸聲聞等,雖見佛身,不應成熟,初業菩薩,當知亦爾.已入大地諸菩薩衆,不由化身,方得成熟,通達甚深廣大法故.
017_0250_a_01L【論】법신은 몇 가지 불법에 의해서 섭지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가?22) 간략하게 여섯 가지에 의해서이다.
첫째는 청정에 의해서이니, 말하자면 아뢰야식을 전환하여 법신을 얻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숙에 의해서이니, 말하자면 색근을 전환하여 이숙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셋째는 안주에 의해서이니, 말하자면 탐욕의 행[欲行] 등의 머무름을 전환하여 무량한 지혜의 머무름을 얻기 때문이다.
넷째는 자재에 의해서이니, 말하자면 갖가지 섭수의 업의 자재를 전환하여 모든 세계의 걸림 없는 신통지혜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언설에 의해서이니, 말하자면 모든 견문(見聞)ㆍ각지(覺知)ㆍ언설(言說)ㆍ희론(戱論)을 전환하여 모든 유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변설지혜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구제[拔濟]에 의해서이니, 말하자면 모든 재횡(災橫)과 과실을 구제하는 것을 전환하여 모든 유정의 모든 횡액과 과실을 구제하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법신은 여기에서 설한 여섯 가지 불법에 의해서 섭지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49_c_15L論曰:應知法身,由幾佛法之所攝持?略由六種:一由淸淨,謂轉阿賴耶識,得法身故二由異熟,謂轉色根,得異熟智故三由安住,謂轉欲行等住,得無量智住故四由自在,謂轉種種攝受業自在,得一切世界無㝵神通智自在故五由言說,謂轉一切見聞覺知言說戲論,得令一切有情心喜辯說,智自在故六由拔濟,謂轉拔濟一切災撗過失,得拔濟一切有情一切災撗過失智故.應知法身由此所說六種佛法之所攝持.
【釋】자성의 섭지에 나아가서 법신의 자성을 섭지함을 나타낸 것이다.
‘청정에 의해서이니’란 말하자면 청정에 의해서 불법은 법신의 자성을 섭지한다는 것이다. 그 법신의 체성은 청정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청정하게 하며 무엇을 전환하여 청정을 얻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말 ‘아뢰야식을 전환하여 법신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은 모든 잡염의 종자를 집지(執持)하기 때문에 다스림이 일어날 때 위와 같은 모든 잡염의 종자를 전환하여 멸하고 모든 무죄(無罪)에 수순하여 원만한 공덕을 전환하여 얻는다.
017_0250_a_04L釋曰:就自性攝,以顯攝持法身自性.由淸淨者,謂由淸淨,佛法攝持法身自性,以其法身體淸淨故.淨誰轉誰而得淸淨?爲答此問,說如是言,轉阿賴耶識,得法身故.由阿賴耶識執持一切雜染種子,對治起時,轉滅如是一切染種,轉得隨順一切無罪圓滿功德.
비유하면 세간의 아게타(阿揭陀)약이 능히 독성 있는 것을 변화시켜 독이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전환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숙에 의해서이니’란 이숙에 의해서 불법은 법신의 자성을 섭지한다는 것이다.
‘색근을 전환하여’란 말하자면 안근 등 모든 감각기관을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숙의 지혜를 얻다’란 말하자면 전환하여 버려야 할 것이 이숙이기 때문에 짐짓 전환하여 얻음을 설하여 또한 이숙이라고 하는 것이다. 옛날에 얻은바 이숙의 모든 감각기관과 같이 지금 얻은 선지(善智)를 짐짓 이숙이라고 이름한다. 23)
‘안주에 의해서이니’란 말하자면 안주에 의해서 불법은 법신의 자성을 섭지한다는 것이다.
017_0250_a_12L譬如世閒阿揭陁藥,能變有毒,令成無毒,故說名轉.由異熟者,謂由異熟,佛法攝持.法身自性,轉色根者,謂轉眼等,有色諸根.得異熟智者,謂所轉捨,是異熟故,假說轉得,亦名異熟.如昔所得,異熟諸根,今得善智,假名異熟.由安住者,謂由安住,佛法攝持法身自性.
017_0250_b_01L‘탐욕의 행 등을 전환한다’란 말하자면 승해행(勝解行) 등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것을 전환하기 때문에 모든 유정의 여러 가지 재환(災患)을 멸하는 지(智)를 증득한다.
‘자재에 의해서이니’란 말하자면 자재에 의해서 불법은 법신의 자성을 섭지한다는 것이다.
‘섭수의 업’이란 말하자면 모든 세간의 상거래와 농사짓기와 왕을 모시는 등의 업이다. 저것을 전환하기 때문에 걸림없는 신통의 자재를 증득한다.
‘언설에 의해서이니’란 말하자면 언설에 의해서 불법은 법신의 자재를 섭지한다는 것이다. 세간의 견(見) 등의 언설을 전환하기 때문에 ‘견ㆍ문ㆍ각ㆍ지’의 자재를 증득한다. 이것에 의해서 모든 유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묘지를 체득한다.
017_0250_a_19L轉欲行等者,謂等取勝解行等,由轉彼故,證得息滅一切有情諸災患智.由自在者,謂由自在,佛法攝持法身自性.攝受業者,謂諸世閒商賈`營農`事王等業,由轉彼故,證得無㝵神通自在.由言說者,謂由言說,佛法攝持法身自性.由轉世閒見等言說,證得見聞覺知自在,由此逮得一切有情心喜妙智.
‘구제의 의해서이니’란 말하자면 구제에 의해서 불법은 법신의 자성을 섭지한다는 것이다.
‘재횡’ 등이란 말하자면 세간과 국왕과 가정 등에서 생기게 되는 근심 및 고통과 같은 것, 혹은 친구의 힘이나 재산이 능히 없어져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전환하기 때문에 모든 유정(有情)의 모든 재횡과 과실을 없애는 묘지를 증득한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세간의 법을 전환하여 버리고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불법을 전환하여 얻는다.
017_0250_b_04L由拔濟者,謂由拔濟,佛法攝持法身自性.災撗等者,謂如世閒`國王`家等,所生憂苦,或親友力`或財寶力而能息除.由轉此故,證得息除一切有情一切災撗過失妙智,轉捨如是六種世法,轉得如是六種佛法.
【論】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마땅히 차이가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마땅히 차이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가?24)
의지와 의요와 업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차이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무량한 의지신[依身]25)은 등각(等覺)을 나타내기 때문에 마땅히 차이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의 법신을 설하는 경우와 같이 수용신 또한 마찬가지이다. 의요와 그리고 업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차이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의지신의 무차별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이고, 무량한 의지신은 차이가 있으면서 전환하기 때문에 변화신도 또한 수용신의 경우와 같이 설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50_b_10L論曰:諸佛法身,當言有異`當言無異?依止`意樂`業無別故,當言無異無量依身現等覺故,當言有異.如說佛法身,受用身亦爾,意樂及業,無差別故,當言無異不由依止無差別故,無量依止差別轉故.應知變化身,如受用身說.
017_0250_c_01L【釋】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의지와 의요와 작업에 있어서 차별이 없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 모든 부처님의 진여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의지에 차별이 없다. 모든 것이 다 모든 유정을 이익하게 하고 안락하게 하는 의요가 같기 때문에 의요에는 차별이 없다. 모든 것이 다 남을 이롭게 하고 뛰어난 현등정각(現等正覺)ㆍ반열반 등의 갖가지 작업으로 인해서 업에 차별이 없다.
‘무량한 의지신은 등각을 나타내기 때문에 마땅히 차이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란 말하자면 무량한 갖가지 의지신에 의해서 보리살타는 성불을 나타내기 때문에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법신을 설하는 경우와 같이 수용 또한 이와 같다. 여기에서는 의요와 업에 차별이 없음을 설하는 것이지 의지에 차별이 없음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017_0250_b_17L釋曰:諸佛法身,依止意樂作業無別,故無有異.諸佛眞如,無有異故,依止無別.一切皆爲利益安樂一切有情,意樂同故,意樂無別.一切皆同利他爲勝,現等正覺,般涅槃等,種種作業,故業無別.無量依身,現等覺故,當言有異者,謂由無量,別別依身,菩提薩埵,現成佛故,非無有異,如前廣說.如說法身,受用亦爾,此說意樂及業無別,不說依止無有差別
‘무량한 의지는 차이가 있으면서 전환하기 때문에’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모든 차별적인 세계에서 모든 불국토ㆍ중회(衆會)ㆍ명호(名號)ㆍ신량(身量)ㆍ상호(相好)ㆍ법락을 수용하는 등이 각기 같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변화신 또한 위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50_c_04L無量依止差別轉故.謂於一切別世界中,諸佛國土`衆會名號`身量相好`受法樂等,各不同故.佛變化身,應知亦爾.
【論】법신은 몇 가지 덕과 상응하는지 마땅히 알아야 한다. 26)
말하자면 가장 청정한 4무량(無量)ㆍ해탈ㆍ뛰어난 곳[勝處]27)ㆍ두루하는 곳[遍處]28)ㆍ번뇌가 없는 것[無諍]29)ㆍ서원대로 아는 것[願智]30)ㆍ4무애해(無礙解)31)ㆍ6신통(神通)ㆍ서른두 가지 대사의 모습[三十二大士相], 여든 가지 훌륭한 모습[八十隨好], 네 가지 일체상청정(一切相淸淨)ㆍ10력(力)ㆍ4무외(無畏)ㆍ세 가지 지킬 필요가 없음[三不護]32)ㆍ3염주(念住)33)ㆍ습기를 없앰[拔除習氣]ㆍ법을 잃어버리지 않음[無忘失法]ㆍ대비(大悲)ㆍ18불공불법(不共佛法)ㆍ모든 모습의 승묘한 지혜[一切相妙智] 등의 공덕과 상응한다.
017_0250_c_07L論曰:應知法身幾德相應?謂最淸淨四無量`解脫`勝處`遍處`無諍`願智`四無㝵解`六神通`三十二大士相`八十隨好`四一切相淸淨`十力`四無畏`三不護`三念住`拔除習氣`無忘失法`大悲`十八不共佛法`一切相妙智等功德相應.
【釋】여기에서는 모든 불세존이 성문 등과 함께 가지고 있는 청정하고 수승한 공덕을 들어내 설명하는 것이다.
‘가장 청정한’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공덕은 영원히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는 몸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한 ‘가장 청정한’이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공덕에 두루 존재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4무량’이란 말하자면 무량한 유정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는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이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8해탈(解脫)34)을 말한다. 이른바 유색(有色)에서 여러 가지 색을 관하는 등등이다.
‘뛰어난 곳’이라고 하는 것은 8승처(勝處)35)를 말한다.
017_0250_c_14L釋曰:此中顯說,諸佛世尊,共聲聞等,所有淸淨殊勝功德.最淸淨者,顯此功德,永斷煩惱,及所知障,身中起故.如是所說,最淸淨言,應知遍在一一功德.四無量者,謂緣無量有情爲境,慈悲喜捨.言解脫者,謂八解脫,所謂有色觀諸色等.言勝處者,謂八勝處.
017_0251_a_01L‘두루하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10변처(遍處)36)를 말한다. 번뇌가 없는 것[無諍]37)과 서원대로 아는 것[願智]에는 다시 차별이 없다.
‘4무애해’란 법무애해(法無礙解)ㆍ의무애해(義無礙解)ㆍ훈사무애해(訓詞無礙解)ㆍ변설무애해(辯說無礙解)를 말한다.
‘6신통’이란 여의통(如意通)을 처음으로 하고 누진통(漏盡通)을 마지막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서른두 가지 대사의 모습’이란 묘륜상인수족(妙輪相引手足) 등을 말한다.
‘여든 가지 훌륭한 모습’이란 코가 곧고 등을 말한다.
‘네 가지 일체상청정’이란 소의청정(所依淸淨)ㆍ소연청정(所緣淸淨)ㆍ심청정(心淸淨)ㆍ지청정(智淸淨)을 말한다.
‘10력’이라고 하는 것은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ㆍ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ㆍ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說等持等至智力)ㆍ근승렬지력(根勝劣智力)ㆍ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ㆍ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ㆍ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ㆍ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ㆍ사생지력(死生智力)ㆍ누진지력(漏盡智力)을 말한다.
017_0250_c_21L言遍處者,謂十遍處.無諍`願智更無差別.四無㝵解者,謂法無㝵解`義無㝵解`訓詞無㝵解`辯說無㝵解.六神通者,謂如意通爲初,漏盡智爲後.三十二大士相者,謂妙輪相印手足等.八十隨好者,謂鼻脩直等.四一切相淸淨者,謂所依淸淨`所緣淸淨`心淸淨`智淸淨.言十力者,謂處非處智力`業異熟智力`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根勝劣智力`種種勝解智力`種種界智力`遍趣行智力`宿住隨念智力`死生智力`漏盡智力.
‘4무외’란 말하자면 불세존께서 스스로 진실한 말로써 “나는 진실로 정각자이다. 만약 이와 같은 법에서 정등각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말이 있다면 나는 저 비난에 대해서 바르게 근거 없음을 본다”라고 한다. 이것이 제1무외이다.
또한 진실한 말로써 “나는 진실로 모든 번뇌를 다하였다. 만약 이렇게 이렇게 모든 번뇌를 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말이 있다면 나는 저 비난에 대해서 바르게 근거 없음을 본다”라고 한다. 이것이 제2무외이다.
또한 진실한 말로써 “나는 제자를 위해서 출리(出離)의 도를 설한다. 만약 이와 같은 도를 닦는 것이 바르게 고통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비난하는 말이 있더라도 나는 저 비난에 대해서 바르게 근거 없음을 본다”라고 한다. 이것이 제3무외이다.
017_0251_a_10L四無畏者,謂佛世尊,自發誠言:我是眞實正等覺者.若有難言:於如是法,不正等覺.我於彼難正見無緣,是第一無畏.又發誠言:我是眞實諸漏盡者.若有難言:如是如是諸漏未盡.我於彼難正見無緣,是第二無畏.又發誠言:我爲弟子,說出離道.若有難言:修如是道,非正出苦.我於彼難正見無緣,是第三無畏.
017_0251_b_01L또한 진실한 말로써 “나는 제자를 위해서 법을 장애하는 잡염은 반드시 장애라고 설한다. 만약 저 법을 물들일지라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저것에 대해서 바르게 근거가 없음을 본다”라고 한다. 이것이 제4무외이다.
이 네 가지에 대해서 모두 자세히 설해야 한다. 저 비난에 대해서 바르게 근거 없음을 보기 때문에, 크게 안온함을 얻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하는 바가 없다.
‘세 가지 지킬 필요가 없음’이란 말하자면 모든 여래가 가지고 있는 신업은 청청하게 현행하여 청정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현행하는 신업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이 걱정스러우면 가히 장호(藏護)를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제1불호라고 이름한다. 신업을 설하는 경우와 같이 어업과 의업 또한 이와 같이 설한다. 이것이 세 가지 지킬 필요가 없음이다.
017_0251_a_19L又發誠言:我爲弟子,說障㝵法染必爲障.若有難言:雖染彼法,不能爲障.我於彼難正見無緣,是第四無畏.於此四中,皆應廣說,正見彼難無有緣故,得大安隱,得安隱故,都無所畏.三不護者,謂諸如來,所有身業,淸淨現行,無不淸淨現行身業,慮恐他知可須藏護,如是名爲第一不護.如說身業`語業`意業,亦如是說,是三不護.
‘3념주’란 말하자면 모든 여래가 정법을 설할 때 한 부류의 제자는 공경하여 가르침을 받드는 마음에 머무르며 정진 수행하고 법과 법에 따라 행하여도 여래께서는 저 사람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고 환희하지 않으며 마음이 들뜨지도 않는다. 한 부류의 제자는 공경심을 내지 않으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반대의 경우라도 여래께서는 저 사람에 대해서 화내거나 분하게 여기지 않으며 참지 않는 것도 일으키지 않으며 지키지 아니하지도 않는다. 한 부류의 제자는 공경하기도 하고 공경하지 않기도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여래께서는 저 사람에 대해서 마음에 두 가지가 없다. 말하자면 환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화내거나 분하게 여기지 않으며 저 모든 것에 대해서 두루 묘한 평등[妙捨]에 머무른다.
‘습기를 없앰’이란 말하자면 영원히 뽑아 없애서 비록 번뇌가 없지만 번뇌의 모습과 흡사한 소작인 뛰어 오름[騰躍] 등의 현상이 있는 것이다.
017_0251_b_05L三念住者,謂諸如來,說正法時,一類弟子,恭敬屬耳`住奉教心`精進修行`法隨法行,如來於彼,無悅無喜,心不踊躍.一類弟子,不生恭敬,翻前廣說,如來於彼,不生恚恨`不生不忍,非不保任.一類弟子,亦生恭敬,亦不恭敬,乃至廣說,如來於彼,其心無二,謂不喜悅,亦不恚恨,於彼一切,遍住妙捨.拔除習氣者,謂永拔除,雖無煩惱,而有煩惱,相似所作,騰躍等事.
‘법을 잃어버리지 않음’이란 말하자면 모든 유정을 이익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알아서 시분(時分)을 초과하지 않는 것이다.
‘대비’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유정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의요에 대해서 대의(大義)로써 마땅히 설하는 것이다.
‘18불공불법’이란 말하자면 같지 않다는 뜻이 불공의 의미이다.
즉 모든 여래께서는 과실이 없다. 아라한과 같은 경우는 비록 같은 번뇌를 다할지라도 걸식하기 위해서 성읍으로 나가 유행하고, 혹은 어떤 때에는 나쁜 코끼리와 나쁜 말과 나쁜 소와 나쁜 개 등과 함께 유행하며, 혹은 어떤 때에는 다리로 모든 가시를 밟고 여러 가지 나쁜 뱀 등과 같이 뛰어다니고 걸어 다닌다. 혹은 어떤 때에는 이와 같은 집에 들어가 모든 모읍(母邑)과 바른 이치에 의하지 않고 말을 한다. 혹은 임야에서 좋은 길을 버리고 나쁜 길로 간다.
017_0251_b_14L無忘失法者,謂於利樂諸有情事,正念正知,不過時分.言大悲者,謂於有情,利樂意樂,大義當說.十八不共佛法者,謂不同義是不共義.卽諸如來無有誤失.如阿羅漢,雖盡諸漏,爲乞食故,出遊城邑,或於一時,與惡象`惡馬`惡牛`惡狗等,共同遊止,或於一時,足踐叢刺,諸惡蛇等齊足跳躑,或於一時,入如是舍,與諸母邑,不依正理,而作語言,或於林野,捨棄好道,而行惡路
017_0251_c_01L혹은 원적 사자나 맹수 그리고 다른 사람의 부인 등과 함께 유행한다. 위와 같은 등의 부류의 아라한들은 과실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 다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모든 여래께서는 졸렬하고 난폭한 음성이 없으며 아라한의 경우에는 어떤 때에는 임야로 유행하여 길을 잃고 어떤 때에는 빈 집에 들어가 소리를 질러 매우 난폭한 음성을 낸다. 어떤 때에는 물들지 않는 습기의 과실로 인해서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내어 크게 웃는다. 이와 같은 부류는 모든 아라한의 졸렬하고 난폭한 음성이지만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 다 가지고 있지 않다.
017_0251_c_01L或與怨賊`師子`猛獸及他妻等,同共遊止如是等類,諸阿羅漢,所有誤失,諸佛皆無.又諸如來,無卒暴音.如阿羅漢,或於一時,遊行林野,迷失道路,或入空宅,揚聲叫喚,發大暴音,或因不染習氣過失,聚脣露齒,而現大笑如是等類諸阿羅漢,卒暴音聲,諸佛皆無.
또한 모든 여래께서는 생각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 아라한의 경우에는 불염오의 영원한 소작과 영원한 소설(所說)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지만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 다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모든 여래께서는 갖가지 생각이 없으며 아라한의 경우에는 유여생사(有餘生死)에 대해서 한결같이 매우 혐오하는 생각을 일으키고 무여열반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매우 적정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만, 여래께서는 저 유여생사와 무여열반에 대해서 차별적인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가장 뛰어난 평등[捨]에 머무른다.
또한 모든 여래께서는 부정심(不定心)38)이 없으며 아라한의 경우에는 바라면 마음이 반드시 일정하지만 나오면 곧 일정하지 않다. 여래께서는 저 모든 분위에 있어서 부정심이 없으며 또한 모든 여래께서는 평등[捨]을 택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아라한의 경우에는 지혜로써 유정의 모든 이익과 안락한 일들을 간택하지 않고 곧 버리지만 여래께서는 이와 같은 등의 부류를 간택하지 않아서 버리는 일이 없다.
017_0251_c_09L又諸如來無忘失念.如阿羅漢,有不染污,久遠所作,久遠所說,諸忘失念諸佛皆無.又諸如來,無種種想.如阿羅漢,於有餘生死,一向起極厭逆想,於無餘涅槃,一向起極寂靜如來於彼,有餘生死,無餘涅槃,無差別想,住最勝捨.又諸如來,無不定心.如阿羅漢,斂心方定`出卽不定來於彼,一切分位,無不定心.又諸如來,無不擇捨.如阿羅漢,不以智慧蕑擇有情諸利樂事而便棄捨如來無有如是等類不擇而捨.
017_0252_a_01L또한 모든 여래께서는 욕(欲) 등의 여섯 가지 퇴실(退失)이 없다. 아라한의 경우에는 능히 소지장을 영원히 깨끗이 하였는데도 아직 얻지 못한 퇴실이 있다. 말하자면 지욕퇴(志欲退)ㆍ정진퇴(精進退)ㆍ염퇴(念退)ㆍ정퇴(定退)ㆍ혜퇴(慧退)ㆍ해탈퇴(解說退)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퇴실은 모든 부처님께는 모두 없다. 또한 모든 여래의 신업ㆍ어업ㆍ의업은 지혜를 앞의 인도자[前導]로 삼으며 지혜에 따라서 전환한다. 아라한의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는 일시에 착한 신업을 전환하고 어떤 경우에는 일시에 무기업을 전환한다. 어업과 의업의 경우도 마땅히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여래의 3업은 지혜를 앞의 인도자[前導]로 삼기 때문에, 지혜에 따라서 전환하기 때문에 무기는 있을 수 없다. 지혜 등이 일어나기 때문에 지혜가 앞을 인도한다라고 이름하며 지혜와 함께 가기 때문에 지혜에 따라서 전환한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51_c_20L又諸如來,無有欲等六種退失.如阿羅漢,於能永淨所知障中有未得退,謂志欲退`精進退`念退`定退`慧退`解脫退如是六退諸佛皆無.又諸如來身`語`意業,智爲前導,隨智而轉.如阿羅漢,或於一時,善身業轉`或於一時,無記業轉,語業`意業,當知亦爾如來三業,智前導故`隨智轉故,無有無記.智等起故,名智前導,智俱行故,名隨智轉.
또한 모든 여래께서는 3세의 경계에 대해서 알거나 보더라도 애착이 없고 장애도 없다. 아라한의 경우에는 3세의 현상[事]에 대해서 잠시라도 마음을 일으키면 곧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지견(知見)에 대해서 탐착하게 된다. 모든 것을 다 요지할 수 없기 때문에 지견에 장애가 있다. 여래는 저 3세의 현상에 대해서 잠시라도 마음을 일으켰을 때 곧 모든 경계를 두루 이해하고 안다. 그러므로 지견에 대해서 탐착도 없고 걸림도 없다. 이와 같은 인연에 의해서 이 열여덟 가지 하나하나를 모두 불공불법(不供佛法)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모습의 승묘한 지혜’란 말하자면 모든 온ㆍ계ㆍ처에 대해서 모든 행상을 능히 잘 요지하는 것이다.
‘등’이란 나머지 무량공덕의 법신과 상응하는 것을 똑같이 취한다는 것이다.
017_0252_a_06L又諸如來,於三世境,若知若見,無著無㝵.如阿羅漢,於三世事,非暫起心,卽能解故,知見有著,不能一切悉了知故,知見有㝵如來於彼,三世事中,暫起心時,卽遍解知一切境界,是故知見無著無㝵.由是因緣,此十八種,一一皆名不共佛法.一切相妙智者,謂於一切薀`界`處中,善能了知.一切行相等者,等餘無量功德法身相
【論】여기에 대해서 많은 게송이 있다.
【釋】이 법신에 능히 의지하는 불공(不共)의 많은 공덕에 대해서 찬송문(讚頌門)으로써 구절을 맺어서 그 도리를 분별하여 드러내 보인다.
017_0252_a_15L論曰:此中有多頌.釋曰:於此法身能依不共諸功德中,以讚頌門,結句道理,分別開示.

【論】모든 유정을 불쌍히 여기어
화합과 멀리 여읨과
항상 버리지 않음과 이롭게 함[利樂]의
네 가지 의요를 일으키시니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2_a_18L論曰:憐愍諸有情,
起和合遠離,
常不捨利樂,
四意樂歸禮.
017_0252_b_01L
【釋】지금 이 게송에서는 4무량을 나타낸다. ‘모든 유정을 불쌍히 여기어’란 총괄적인 구절이다. ‘화합의 의요를 일으킨다’란 자무량(慈無量)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유정으로 하여금 화합을 즐겨하게 하기 때문이다.
‘멀리 여윔의 의요를 일으킨다’란 비무량(悲無量)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유정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멀리 여의게 하기 때문이다.
‘항상 버리지 않는 의요를 일으킨다’란 희무량(喜無量)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유정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버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017_0252_a_21L釋曰:今此頌中,顯四無量.憐愍諸有情者,是摠句.起和合意樂者,顯慈無量,欲令有情樂和合故.起遠離意樂者,顯悲無量,欲令有情遠離苦故.起常不捨意樂者,顯喜無量,欲令有情不捨樂故.
‘이롭게 함의 의요를 일으킨다’란 사무량(捨無量)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유정으로 하여금 이익과 안락을 획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捨)’란 기사(棄捨)를 말한다. 유정으로 하여금 낙수(樂受) 등의 번뇌수면을 버리게끔 하여도 유정을 버리지는 않는다. 또한 그 가운데 처하여 머무르는 것을 설하여 사라고 이름한다.
이 공덕에 의해서 제불의 법신에 귀의하고 예경하기 때문에 ‘귀의하여 예배합니다[歸禮]’라고 한다. 나머지 게송은 이에 준하여 모두 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52_b_04L起利樂意樂者,顯捨無量,欲令有情獲得利益及安樂故.捨謂棄捨,欲令有情捨樂受等煩惱隨眠不捨有情.又處中住,說名爲捨.緣此功德,歸依敬禮諸佛法身,故名歸禮.餘頌准此,一切應知.

【論】모든 장애에서 해탈하시는
모니께서는 세간에 뛰어나시며
지혜는 알아야 할 바에 두루하며
심해탈하시니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2_b_09L論曰:解脫一切障,
牟尼勝世閒,
智周遍所知,
心解脫歸禮.

【釋】‘모든 장애에서 해탈하시는’이란 이 구절은 모든 부처님의 해탈은 성문승보다 뛰어남을 현시한 것이다.
‘모니께서는 세간에 뛰어나시며’란 이 구절은 모든 부처님의 뛰어난 곳[勝處]은 성문승보다 뛰어남을 현시한 것이다.
‘지혜는 알아야 할 바에 두루하며’란 이 구절은 모든 부처님의 두루하는 곳[遍處]은 성문승보다 뛰어남을 현시한 것이다. 성문승과 같이 단지 여덟 가지 해탈과 여덟 가지 뛰어난 곳과 열 가지 두루하는 곳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해탈을 우선으로 하여 뛰어난 곳이 있으며 뛰어난 곳을 우선으로 하여 두루하는 곳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門)에 말미암기 때문에 작의 사유하여 일체의 장애에서 해탈하고 모든 세간보다 뛰어나며 지혜는 모든 경계에 두루한다.
‘심해탈’이란 위의 세 가지 덕을 갖추며 마음에서 계박을 여의는 것이다.
017_0252_b_12L釋曰:解脫一切障者,此句顯示諸佛解脫勝聲聞等.牟尼勝世閒者,此句顯示諸佛勝處勝聲聞等.智周遍所知者,此句顯示諸佛遍處勝聲聞等,非如聲聞乘等,唯有八種解脫`八種勝處`十種遍處.解脫爲先,而有勝處,勝處爲先,而有遍處,由此門故,作意思惟解脫一切障,勝一切世閒.智周一切境,心解脫者,具上三德,心離繫縛.

【論】능히 모든 유정의
모든 미혹을 남김없이 멸하며
번뇌를 해치며 염오가 있어도
항상 불쌍히 여기시니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2_b_21L論曰:能滅諸有情,
一切惑無餘,
害煩惱有染,
常哀愍歸禮.
017_0252_c_01L
【釋】이 게송은 번뇌가 없음[無諍]을 나타낸다. 세간의 지(智)를 성품으로 삼는다. 성문이 얻게 되는 무쟁은 장차 성읍에 들어가려고 먼저 자세히 관찰하고, 만약 하나의 유정이라도 마땅히 나의 몸을 반연하여 한 가지 번뇌의 투쟁을 일으킨다면 곧 다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지 않다. 여래께서는 관찰하여 보고서 모든 유정이 마땅히 불신(佛身)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를 일으킬지라도 만약 저 사람이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서 감인할 수 있는 자라면 곧 다시 저 사람에게 가서 방편을 써서 조복하게 한다. 번뇌를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017_0252_c_01L釋曰:此頌顯無諍,世俗智爲性.不同聲聞所得無諍,將入城邑,先審觀察,若一有情,當緣我身,隨起一種煩惱諍者,卽便不入.如來觀見,雖諸有情,當緣佛身,起諸煩惱,若彼堪任受佛化者,卽便往彼,方便調伏,令滅煩惱.
‘능히 모든 유정의 모든 미혹을 남김없이 멸하며’란 성문은 무쟁의 선정[定]에 머물러서 방편을 멀리 여의고 자신으로 하여금 조그마한 유정이라도 번뇌를 생하게 하는 반연을 짓지 않으며 오직 욕계의 유사번뇌(有事煩惱)를 조복할 뿐이며 나머지 번뇌는 그렇지 않은 것과 같지 않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지 않아서 방편을 써서 능히 모든 유정의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능히 멸한다.
‘번뇌를 해치며’란 오직 번뇌를 해치고 유정을 해치지 않는다.
‘염오가 있어도 항상 불쌍히 여기시니’란 만약 모든 유정에게 번뇌의 염오가 있어도 부처님께서는 항상 불쌍히 여겨서 가해(訶害)하시지 않으신다. 다음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52_c_07L能滅諸有情一切惑無餘者,非如聲聞住無諍定,方便遠離,不令自身作少有情生煩惱緣,唯伏欲界有事煩惱,非餘煩惱.諸佛不爾,方便能滅一切有情一切煩惱令無有餘.害煩惱者,唯害煩惱,不害有情.有染常哀愍者,若諸有情,有煩惱染,佛常哀愍,而不訶害.如有頌言:

귀신에게 주술을 거는 좋은 의사가
모든 귀신에게 매혹당한 이들을 치료하는데
단지 귀신을 가해하고
귀신에게 매혹당한 이들은 가해하지 않는 것과 같이
017_0252_c_15L如呪鬼良醫,
治諸鬼所魅,
但訶害鬼魅,
非鬼所魅者.

이와 같이 대비존(大悲尊)께서는
번뇌에 매혹당한 이들을 치료하는데
단지 번뇌만을 가해하고
유정을 가해하지 않네.
017_0252_c_17L如是大悲尊,
治煩惱所魅,
但訶害煩惱,
不訶害有情.

【論】의식적인 노력이 없어도 집착함이 없으며
장애가 없어서 항상 적정하며
일체 어려운 질문에
능히 해석하시니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2_c_18L論曰:無功用無著,
無㝵常寂定,
於一切問難,
能解釋歸禮.
017_0253_a_01L
【釋】이 게송은 서원대로 아는 것[願智]이 성문승보다 뛰어남을 나타낸다. 다섯 가지 양상에 의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며, 집착함이 없기 때문이며, 장애가 없기 때문이며, 항상 적정하기 때문이며, 모든 의심을 지닌 힐난[疑難]을 능히 해석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문 등이 얻게 되는 원지는 그 원하는 바에 따라서 선정에 들어가며 오직 이것만을 알 수 있고 그 나머지는 모른다. 부처님께서는 즉 이와 같지 않아서 무공용지(無功用智)에 의해서 의식적인 노력을 짓지 않으며 마니주와 하늘의 음악과 같아서 원에 따라서 능히 모든 경계를 아시니, 집착함이 없는 지혜에 의해서 알아야 할 바의 경계에 대해서 모두 막힘이 없기 때문에, 장애 없는 지혜에 의해서 번뇌장과 아울러 습기를 끊기 때문에, 항상 적정에 의해서 선정의 장애를 끊기 때문이다. 다음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52_c_21L釋曰:此頌顯願智勝聲聞等,由五相故,謂無功用故`無著故`無㝵故`常寂定故`一切疑難,能解釋故.諸聲聞等,所得願智,隨其所願,而入於定,唯能知此,不知其餘.佛卽不爾,由無功用智,不作功用,如末尼`天樂,隨願能知一切境界,由無著智於所知境皆無滯故`由無㝵智斷煩惱障幷習氣故`由常寂定定障斷故.如有頌言:

나가(那伽)39)께서는 행하셔도 적정,
나가께서는 머무르셔도 적정,
나가께서는 앉으셔도 적정,
나가께서는 누우셔도 적정이라네.
017_0253_a_07L那伽行寂定,
那伽住寂定,
那伽坐寂定,
那伽臥寂定.

이와 같이 발원한바 미묘한 원지는 모든 때에 모든 어려운 질문을 능히 잘 해석한다.
017_0253_a_09L由此所發微妙願智,於一切時,善能解釋一切問難.

【論】의지처[所依]와 의지하는 것[能依]의
말해진 것[所說]과 말씀과 그리고 지혜의
능히 말함[能說]에 대해서 장애가 없는 혜(慧)로써
항상 잘 설하시니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3_a_11L論曰:於所依能依,
所說言及智,
能說無㝵慧,
常善說歸禮.

【釋】이 게송은 4무애해를 현시한다.
‘의지처[所依]’라고 하는 것은 모든 교법, 즉 계경 등을 말한다.
‘의지하는 것[能依]’이라고 하는 것은 소전(所詮)의 뜻을 말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를 모두 ‘말해진 것[所說]’이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소작(所作)의 업이기 때문이다.
‘말씀과 그리고 지혜’의 두 가지는 모두 ‘능히 말함[能說]’이다. 왜냐하면 작자(作者)와 작구(作具) 등을 동등하게 일으키기 때문이다.
‘장애가 없는 혜’란 말하자면 여기에서 불퇴전의 지혜이다.
‘항상 잘 설하시니’란 네 가지 무애해를 갖추기 때문에 항상 잘 설하신다는 것이다. 소의에 있어서 장애 없는 깨달음의 지혜일 경우에는 법무애(法無礙)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법의 이문(異門)에 대해서 걸림과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능의에 있어서 장애 없는 깨달음의 지혜일 경우에는 의무애(義無礙)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에 대하여 걸림과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혹은 모든 법의 차별적 대상[別義]의 의취(意趣)에 대해서 걸림과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017_0253_a_14L釋曰:此頌顯示四無㝵解.言所依者,謂諸教法,卽契經等.言能依者,謂所詮義.如是二種,皆名所說,所作業故.言智二種,皆是能說,作者`作具等所起故.無㝵慧者,謂於此中,無退轉智.常善說者,由具四種無㝵解故,常能善說.若於所依,無㝵覺慧,名法無㝵,於法異門,無罣㝵故.若於能依,無㝵覺慧,名義無㝵,於一切法,自相`共相,無罣㝵故,或於諸法,別義意趣,無罣㝵故.
017_0253_b_01L만약 그 말씀에 있어서 걸림이 없는 깨달음의 지혜일 경우에는 훈사무애(訓詞無礙)라고 이름한다. 모든 국토의 각기 다른 경계의 갖가지 언사에서 스스로 전전하는 다른 생각에 따라서 설하여도 걸림과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혹은 모든 법의 언사를 훈석하는 데 걸림과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을 분석하는 지혜에 있어서 걸림 없는 깨달음의 지혜일 경우에는 변설무애(辯說無礙)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능히 제법을 말하고 분석하는 지혜에 있어서 걸림과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017_0253_b_02L若於其言,無㝵覺慧,名訓詞無㝵,於諸國土,各別境界,種種言詞,隨自展轉,異想隨說,無罣㝵故,或於諸法,訓釋言詞,無罣㝵故.若於分析諸法智中,無㝵覺慧,名辯說無㝵,於能辯析諸法智中,無罣㝵故.

【論】저 모든 유정을 위해서
일부러 나투며 말[言]과 행(行)과
머무름[住]와 옴[來] 그리고 벗어남[出離]을 알아서
잘 교화하시는 이에게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3_b_07L論曰:爲彼諸有情,
故現知言行,
往來及出離,
善教者歸禮.

【釋】이 게송은 여섯 가지 신통을 현시한다. ‘저 모든 유정을 위해서’란 이것은 종합적인 구절이며 ‘잘 교화하시는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에 모두 있다.
‘잘’이라는 것은 오묘함이다.
‘교화하시는 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가리킨다. 승진시키기 위해서 미묘한 말을 설하는 것을 ‘잘 교화하시는 이’라고 이름한다.
‘일부러 나투며 교화하는 이’란 여의통(如意通)을 가리킨다. 마땅히 교화할 대상에 따라서 일부러 그곳에 머무르며 대신력(大神力)을 나투어 잘 저들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말을 알아서 교화하는 이’란 천이통(天耳通)을 가리킨다. 멀리 머무르는 뜻이 있는 언사의 모든 음성을 들어서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그들을 위해서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
‘행을 알아서 잘 교화하는 이’란 심차별통(心差別通)을 가리킨다. 마음의 뛰어남과 열악함을 알아서 그들을 잘 교화하기 때문이다.
017_0253_b_10L釋曰:此頌顯示六種神通.爲彼諸有情者,此是摠句.善教者,言一一皆有.善者妙也.教者言也.爲令勝進說微妙言,名善教者故.現善教者,是如意通,隨所應化,故往其所,現大神變善教彼故.知言善教者,是天耳通,聽聞遠住有義言詞一切音聲,如其所應,爲說法故.知行善教者,是心差別通,知心勝劣,善教彼故.
‘머무름을 알아서 잘 교화하는 이’란 숙주수념지통(宿住隨念智通)을 가리킨다. 과거에 잘 능통하여 저들을 잘 교화하기 때문이다.
‘옴[來]을 알아서 잘 교화하는 이’란 사생지통(死生智通)을 가리킨다. 미래에 잘 통달하여 저들을 잘 교화하기 때문이다.
‘벗어남[出離]을 알아서 잘 교화하는 이’란 누진지통(漏盡智通)을 가리킨다. 번뇌를 끊는 것을 알아서 저들을 잘 교화하기 때문이다.
017_0253_b_19L知往善教者,是宿住隨念智通,了達過去善教彼故.知來善教者,是死生智通,了達未來善教彼故.知出離善教者,是漏盡智通,知斷煩惱善教彼故.
017_0253_c_01L
【論】모든 중생은 세존[尊]을 보고
모두 살피어 훌륭한 스승[善士]이라고 알며
잠시 보아도 곧 깊이 믿으니
열어서 이끄는[開導] 이에게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3_b_23L論曰:諸衆生見尊,
皆審知善士,
暫見便深信,
開導者歸禮.

【釋】이 게송은 여러 가지 모습[相]과 수호(隨好)를 현시한다.
법신은 상호를 나타내는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상호에 대해서 법신에 귀의하여 예배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은 세존을 보고 모두 살피어 훌륭한 스승[善士]이라고 알며’란 모든 세간은 세존께서 모습과 수호를 갖추었음을 보고서 모두 다 살피어 대선사(大善士)임을 안다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란 당시와 후시에 교화를 받는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잠시 보아도 곧 깊이 믿으니’란 잠시 세존께서 모습과 수호를 갖추었음을 보고 깊고 깨끗한 믿음을 내어 이 분은 세간을 잘 열어서 이끄시는 분이라고 안다는 것이다.
017_0253_c_03L釋曰:此頌顯示諸相隨好,法身是現相好所依故,就相好歸禮法身.諸衆生見尊,皆審知善士者,一切世閒,由見世尊具相隨好,皆悉審知是大善士.諸衆生者,通攝當時,及於後時,堪受化者.暫見便深信者,暫見世尊具相隨好,便深淨信,知是世閒善開導者.

【論】섭수(攝受)와 맡아 지님[住持]과
버림[捨]과 현화(現化)와 그리고 변역(變易)과
삼마지[等持]와 지혜[智]에 자재하며
따라서 증득함에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3_c_10L論曰:攝受住持捨,
現化及變易,
等持智自在,
隨證得歸禮.
017_0254_a_01L
【釋】이 게송은 네 가지 일체 모습의 청정을 현시한다.
‘섭수와 맡아 지님과 버림’이란 소의(所依)의 청정을 나타낸다. 정려에 의지하여 그 바라는 바 즐거움에 따라 길고 짧음을 능히 자신 가운데 자재하게 섭수하고 맡아 지니며 기사(棄捨)하신다.
‘현화와 그리고 변역’이란 소연의 청정을 나타낸다. 아직 생기지 않은 갖가지 색을 변화하여 만드는 것을 ‘현화’라고 이름하며, 이미 생긴 갖가지 색을 전환시켜서 금ㆍ은 등으로 만드는 것을 ‘변역’이라고 이름한다. 이 모든 변화의 품류에 대해서 모두 자재를 얻는다.
‘삼마지 자재’란 마음의 청정을 나타낸다. 그 바라는 바에 따라 삼마지문에 자재하게 전전하며 하나하나의 찰나에서 그 의요에 따라 능히 모든 선정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지혜 자재’란 지의 청정을 나타낸다. 그 바라는 바에 따라 다라니문을 자재하게 주지한다.
‘따라서 증득함에’란 수순하여 위의 네 가지 청정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017_0253_c_13L釋曰:此頌顯示四一切相淸淨.攝受住持捨者,顯所依淸淨,依止靜慮,如其所欲,隨樂長短,能於自身攝受住持棄捨自在.現化及變易者,顯所緣淸淨.化作種種未曾生色,名爲現化.轉變種種,已曾生色,成金銀等,名爲變易.於此一切變化品類,皆得自在.等持自在者,顯心淸淨,隨其所欲,三摩地門自在而轉,一一剎那,如其意樂,能入諸定.智自在者,顯智淸淨,如其所欲,陁羅尼門,任持自在.隨證得者,隨順證得上四淸淨.

【論】방편과 귀의와 깨끗함과
그리고 대승의 벗어남
이것에 대해서 중생을 속이는
마군을 꺾는 이에게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4_a_02L論曰:方便歸依淨,
及大乘出離,
於此誑衆生,
摧魔者歸禮.

【釋】이 게송은 10력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선취ㆍ악취의 방편의 여러 가지 업ㆍ귀의(歸依)ㆍ세간과 출세간의 깨끗함과 대승의 벗어남이라는 네 가지 의미에 대해서 마군은 중생을 속인다. 여기에서는 능히 저 마군을 꺾는 10력의 업용(業用)을 나타내 설한다.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선취의 방편은 모든 선업을 말하고 악취의 방편은 모든 불선업을 말한다. 이와 같은 취의 방편을 잘 설할 때 마군은 그 가운데 속이고 미혹하여 머물러 말하기를 “이와 같지 않다”라고 한다. 이것과 서로 다른 불선업을 선취의 방편이라 설하고 이 선업을 악취의 방편이라고 설한다. 혹은 모든 것은 다 원인이 있지 않다고 설하고 혹은 모든 것은 자재천 등으로써 그 원인으로 삼는다고 설하지만 부처님의 처비처력(處非處力)으로써 능히 저 설을 꺾는다.
017_0254_a_05L釋曰:此頌顯十力.謂於善趣`惡趣,方便諸業,歸依世`出世淨.大乘出離四種義中,魔誑衆生,此中顯說,能摧彼魔十力業用.言方便者,善趣方便,謂諸善業,惡趣方便,謂不善業.宣說如是,趣方便時,魔於其中,誑惑而住,言不如是,與是相違,說不善業,爲善趣方便,說諸善業,爲惡趣方便,或說一切皆無有因,或說一切自在天等,以爲其因處非處力,能摧彼說.
017_0254_b_01L언사를 해석하면 처는 소이(所以)를 이름하고 수용하는 곳이다. 만약 소이가 없고 수용하는 곳이 없다면 비처라고 설한다. 말하자면 처소[處]가 없어서 수용할 곳이 없는 것이다. 모든 중생의 부류는 무인(無因)과 악인(惡因)으로 인해 마땅히 존재를 얻는다. 이것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니 무명을 연하는 행 등을 말하는 것이지, 자재천 등의 순서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귀의’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여러 가지 업이다. 세간은 모두 스스로의 업에 의한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이 업이 의지가 되고 업이 귀의가 된다. 이 업을 설할 때 마군은 그 가운데서 속이고 미혹하여 머무른다. 자세히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제2의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에 의해서 능히 저 마군의 설을 꺾어서 걸림과 장애가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모든 유정의 업에 의해 분별되는바 높고 낮고 뛰어나고 모자람은 무인(無因)과 자재천 등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017_0254_a_15L訓釋詞者,處名所以,有所容受.若無所以,無所容受,說名非處.謂無處無容,諸衆生類,無因惡因,而當得有.此復云何?由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緣行等,非自在天等,令次第得生.言歸依者,所謂諸業.如說世閒,皆由自業,業爲依止`業作歸依.說此業時,魔於其中,誑惑而住,廣如前說.由第二業,異熟智力,能摧彼說,無所罣㝵,謂諸有情,業所分別,高下勝劣,不由無因自在天等,廣如前說.
‘깨끗함’이라고 하는 것은 세간의 깨끗함과 출세간의 깨끗함을 말한다. 잠시에 또는 결국에 모든 번뇌를 항복시키고 수면을 영원히 해치는 것은 모든 정려와 등지(等持)와 등지(等至) 그리고 성도(聖道)에 의하기 때문이다. 이 깨끗함을 설할 때 마군은 그 가운데 속이고 미혹하면서 머무른다.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정려와 등지와 등지의 지력에 의해 능히 저 마군의 설을 꺾어서 걸림과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승의 벗어남’이란 이것은 나머지 힘에 의해서 짓는바 업용(業用)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대승의 구경인 벗어남[出離]의 부처님의 과덕을 설할 때 마군은 그 가운데에서 속이고 미혹하면서 머물러 “이 무상정등보리는 매우 얻기 어렵다”라고 말하며 성문의 구경인 벗어남을 구하도록 한다. 나머지 7력에 의해서 저 마군의 설을 능히 꺾어서 걸림과 장애가 되지 않는다.
017_0254_b_03L所言淨者,謂世閒淨及出世淨,暫時畢竟,伏諸煩惱,永害隨眠,由諸靜慮`等持`等至及聖道故.說此淨時,魔於其中,誑惑而住,廣如前說.由靜慮等持等至智力,能摧彼說,無所罣㝵.及大乘出離者,此顯餘力,所作業用.謂說大乘究竟,出離佛果德時,魔於其中,誑惑而住,言此無上正等菩提,極難可得,宜求聲聞究竟出離.由餘七力,能摧彼說,無所罣㝵.

【論】지혜[智] 그리고 단멸[斷]과
벗어남[出離]과 능히 장애함[能障礙]을 능히 설하시어
자타를 이롭게 하시고 나머지 외도에 의해
조복되는 것이 아니니 귀명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4_b_13L論曰:能說智及斷,
出離能障㝵,
自他利非餘,
外道伏歸禮.

【釋】이 게송은 4무소외 (無所畏)를 현시한다.
‘지혜를 능히 설하시어’란 부처님께서는 진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진실한 정등각자이며, 즉 모든 법을 두루 안다”라고 하신다.
‘능히 단멸을 설하시어’란 말하자면 부처님께서는 진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진실로 모든 번뇌를 다하였으며, 즉 번뇌의 모든 누(漏)를 영원히 다하였다”라고 하신다. 이와 같은 두 가지는 자리(自利)에 의거하여 설하시는 것이다.
‘벗어남[出離]을 능히 설하시어’란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진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제자를 위해서 벗어남의 법을 설하여 진실로 벗어남[出離]이라고 한다”라고 하신다.
017_0254_b_16L釋曰:此頌顯示四無所畏.能說智者,謂佛誠言:我是眞實正等覺者.卽是遍知一切法.智能說斷者,謂佛誠言:我是眞實諸漏盡者.卽是煩惱諸漏永盡.如是二種,依自利說.能說出離者,謂佛誠言:我爲弟子說出離法.眞實出離.
017_0254_c_01L‘능히 장애함을 능히 설하시어’란 말하자면 부처님께서는 진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제자를 위해서 능장법(能障法)을 설하여 진실로 능애(能礙)라고 한다”라고 하신다. 이와 같은 두 가지는 이타(利他)에 의지하여 설하시는 것이다.
위와 같은 네 가지를 ‘자타를 이롭게 하시고’라고 하는 것이다.
‘나머지 외도에 의해 조복되는 것이 아니니’란 두려움을 여읨을 나타내어 무외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나머지 외도에 의해서 능히 조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외이다.
017_0254_b_23L能說能障㝵者,謂佛誠言:我爲弟子說能障法.眞實能㝵.如是二種,依利他說.如是四種,名自他利.非餘外道伏者,顯離怖畏,釋無畏義.非餘外道,所能降伏,是故無畏.

【論】대중에 처해서 능히 말[說]을 조복하고
두 가지 잡염을 멀리 여의며
보호함이 없고[無護] 잃어버림이 없이[無忘失]
대중을 거두어 보호하시니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4_c_04L論曰:處衆能伏說,
遠離二雜染,
無護無忘失,
攝御衆歸禮.

【釋】이 게송은 불호(不護)와 염주(念住)를 현시한다.
‘대중에 처해서 능히 말을 조복하고’란 말하자면 대중에 처해서 능히 다른 말을 조복한다는 것이다. 신업 등과 그리고 모든 위의(威儀)는 모두 가히 장호(藏護)가 필요할 만큼 추악해서 저들에게 혐오감을 줄까봐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대중에 처해서 능히 다른 사람의 말을 조복한다. 이와 같은 것은 곧 세 가지 지킬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
‘두 가지 잡염을 멀리 여의며’란 말하자면 공경하여 듣고 공경하지 않고도 듣는 제자 무리 가운데에서 잘 머물러 생각하기 때문에 애에(愛恚)를 멀리 여읜다. 이와 같은 것은, 즉 세 가지 염주를 밝히는 것이다. 이 지킬 필요가 없음과[無護] 잃어버리지 않음[無忘失]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모든 제자 무리를 잘 거두어 보호하신다.
017_0254_c_07L釋曰:此頌顯示不護念住.處衆能伏說者,謂處大衆,能伏他說.以身業等及諸威儀,皆無醜惡,可須藏護,恐彼譏嫌,是故處衆,能伏他說,如是卽明三種不護.遠離二雜染者,謂恭敬聽`不恭敬聽,弟子衆中,善住念故,遠離愛恚,如是卽明三種念住.由此無護無忘失故,能善攝御諸弟子衆.

【論】두루 모든 것에 작용하여 안주하고
대원경지[圓智]의 경계[事]가 아님이 없으시며
모든 때에 두루
진실한 의미[實義]를 아시는 이에게 귀명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4_c_15L論曰:遍一切行住,
無非圓智事,
一切時遍知,
實義者歸禮.
017_0255_a_01L
【釋】이 게송은 습기를 없앰[拔除習氣]을 현시한다.
‘두루 모든 것에 작용하여 안주하고’란 말하자면 취락에서 혹은 성읍에서 걸식을 하시기 때문에 가고 오시며 나무 아래에서 경행하시는 등 몸의 네 가지 위의는 적연하게 머무르신다는 것이다.
‘대원경지의 경계가 아님이 없으시며’란 말하자면 성문 등은 번뇌를 다할지라도 오히려 습기가 있어서 결박[縛]에 의해 짓게 되는 도거(掉擧) 등의 경계에 따른다. 저 존자 대목건련과 같은 사람은 오백 생 동안 항상 원숭이가 되었으니 저 습기에 의해서 속박되었기 때문이다. 번뇌를 여읠지라도 사이사이에 즐길 때에는 큰 원숭이가 되어 뛰어다닌다.
017_0254_c_18L釋曰:此頌顯示拔除習氣.遍一切行住者,謂於聚落,或於城邑,爲乞食故,往返經行,於樹下等,身四威儀寂然而住.無非圓智事者,謂聲聞等,雖盡煩惱,猶有習氣,隨縛所作掉擧等事.如彼尊者,大目揵連,五百生中,常作獼猴,由彼習氣,所隨縛故,雖離煩惱,而聞樂時,作獼猴跳躑.
한 독각이 있었는데 옛날 많은 생 가운데 일찍이 음녀가 되었다. 지금은 남은 습기 때문에 때때로 얼굴을 장식한다. 이와 같은 부류는 일체지(一切智)에서 마땅히 지어야 할 경계가 아니므로 세존께는 모두 없다. 이를 여래의 불공공덕이라 이름한다.
‘모든 때에 두루 진실한 의미를 아시는 이에게’란 외도 부자나(掊刺拏)40) 등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즉 진실한 일체지자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그러한 진실한 의미 일체를 아는 자[一切智者]라고 설하는 것이다. 결론에 따르면 게송의 법이기 때문에 전도(顚倒)로써 설하는 것이다. 혹은 이 구절의 의미는 앞과 뒤가 각각 다르다.
‘모든 때에 두루 아시니’란 이것은 부처님께서는 바로 일체지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진실한 의미를 아시는 이’란 이것은 부처님께서 바로 진실한 의미가 있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이 주장자를 가지고 있음을 설하여 장자(杖者)라고 하는 것과 같다.
017_0255_a_03L有一獨覺,昔多生中,曾作婬女,今餘習故,時莊飾面.如是等類,非一切智所應作事,世尊皆無,是名如來不共功德.一切時,遍知實義者者,非如外道掊剌拏等,非是眞實一切智者,故說如來,是其實義,一切智者.順結頌法,故顚倒說,或此句義,前後各別.一切時遍知者,此顯佛是一切智者.實義者者,此顯佛是有實義者,如人有杖說,爲杖者.

【論】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는
해야 할 바는 때를 지나치지 않으며
짓는 바가 항상 헛됨이 없고
잃어버림이 없으시니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5_a_12L論曰:諸有情利樂,
所作不過時,
所作常無虛,
無忘失歸禮.

【釋】이 게송은 법을 잃어버리지 않음[無忘失法]을 현시한다.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는 해야 할 바는 때를 지나치지 않으며’란 말하자면 불세존께서는 만약 교화할 대상이 있거나 이때에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곧 저들을 위해서 그리고 곧 그때에 마땅히 지어야 할 바를 짓고 끝내 때를 놓치지 않는다. 다음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55_a_15L釋曰:此頌顯示無忘失法.諸有情利樂所作不過時者,謂佛世尊,若有所化,若於爾時,應有所作,卽便爲彼,卽於爾時,作所應作,終不失時.如有頌言:

비유하면 큰 바닷물이
빨리 흘러들어가 반드시 때에 상응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감응에 달려가 항상 잃지 않으시네.
017_0255_a_19L譬如大海水,
奔潮必應時,
佛哀愍衆生,
赴感常無失.

‘짓는 바가 항상 헛됨이 없고’란 말하자면 부처님의 짓는 것이 헛되이 결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잃어버림이 없으시니’란 짓는 것은 때에 상응하여 항상 잃어버림이 없다는 것이다.
017_0255_a_21L所作常無虛者,謂佛所作,不空無果.無忘失者,所作應時,常無忘失.
017_0255_b_01L
【論】밤낮으로 항상 여섯 번 반복하여
모든 세간을 관찰하시고
대비와 상응하시며
이익과 안락의 뜻에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5_a_23L論曰:晝夜常六返,
觀一切世閒,
與大悲相應,
利樂意歸禮.

【釋】이것은 대비를 나타내며 이익과 안락의 의요를 체로 삼는다.
여기에서 ‘대’라고 하는 것은 복과 지혜의 자량을 원만하게 증득하기 때문에, 그리고 세 가지 고통을 벗어나게끔 하는 것을 행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리고 삼계의 유정을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모든 유정에 대하여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이것보다 뛰어난 자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항상 여섯 번 반복하여 모든 세간을 관찰하시고’란 이것은 대비소작의 업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세존께서는 낮과 밤 부분에서 각각 3삼시에 모든 세간을 관찰하시어 “누가 선법을 증장하고, 누가 선법을 감손하며, 누구의 선근이 성숙하며, 누구의 선근이 성숙하지 못하며, 누가 뛰어난 생을 받을 수 있는 법기(法器)인가, 누가 뛰어난 선정을 받을 수 있는 법기인가, 누가 불승(佛乘)의 법기인가, 누가 나머지 승의 법기[器]인가?” 이와 같은 등을 하신다.
017_0255_b_03L釋曰:此顯大悲,利益安樂意樂爲體.此言大者,福智資糧圓滿證故,令脫三苦,爲行相故,三界有情,爲所緣故,於諸有情,心平等故,決定無有勝此者故.晝夜常六返觀一切世閒者,此顯大悲所作業用.謂佛世尊於晝夜分,各三時,觀一切世閒,誰善法增`誰善法減?誰善根熟`誰根未熟?誰是堪受勝生法器`誰是堪受定勝法器?誰是佛乘器`誰是餘乘器?如是等.

【論】작용[行]에 의하고 증득에 의하고
지혜에 의하고 업에 의하며
모든 3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에게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5_b_13L論曰:由行及由證,
由智及由業,
於一切三乘,
最勝者歸禮.
017_0255_c_01L
【釋】이것은 18불공불법을 나타낸다.
‘작용[行]에 의하고’라는 이것은 행할 때의 모든 사업을 설하는 것이다. 즉 여래께서는 과실이 있지 않으며 내지 택하지 않아서 버리는 것이 없다.
‘그리고 증득에 의하고’란 즉 머무를 때 여섯 가지 퇴전하지 않음을 말한다. 욕무퇴(欲無退) 내지 여섯 번째 해탈무퇴(解脫無退)를 말한다.
‘지혜에 의하고’라는 것은 말하자면 3세에 있어서 집착 없고 장애 없는 지견(智見)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업에 의하며’란 즉 여래의 신업ㆍ어업ㆍ의업은 지혜를 앞의 인도[前導]로 삼고 지혜에 따라서 전환한다는 것이다.
‘모든 3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에게’란 이것은 부처님께서는 모든 성문과 독각승보다 가장 뛰어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18불공공덕과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다.
017_0255_b_16L釋曰:此顯十八不共佛法.言由行者,此說行時,一切事業,卽是如來,無有誤失,乃至無有不擇而捨.及由證者,卽是住時,六種無退,謂欲無退乃至第六解脫無退.言由智者,謂於三世,無著無㝵,智見而轉.及由業者,卽是如來,身`語`意業,智爲前導,隨智而轉.於一切三乘最勝者者,此顯佛於一切聲聞及獨覺乘,最爲殊勝,由與十八不共功德具相應故.

【論】세 가지 불신[三身]에 의하고
모습을 구족하는 대보리를 얻는 데 이르러
모든 곳에서 다른 이의 의심을 끊으시는
가장 뛰어난 이에게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017_0255_c_03L論曰:由三身至得,
具相大菩提,
一切處他疑,
最勝者歸禮.

【釋】이 게송은 모든 모습의 승묘한 지혜[一切相妙智]의 성품을 현시한다. 모든 행상을 다 바르게 묘지하는 것을 일체상묘지라고 이름한다. 이 묘지의 자체를 일체상묘지의 성품이라고 이름하며, 이는 곧 일체 알아야 할 바의 경계인 모든 행상의 뛰어난 지혜의 체이다.
‘세 가지 불신’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신 등을 말한다. 이 3신에 의해서 모습을 갖추는 무구ㆍ무애의 묘지의 자성인 대보리의 과를 얻는 데 이른다.
‘모습을 구족하는’이라는 것은 일체의 모습을 구족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상(無常) 등의 열여섯 가지 행상을 일체의 모습이라고 설한다. 보리는 저것을 선인(先因)으로 삼기 때문이다.
017_0255_c_06L釋曰:此頌顯示一切相妙智性.一切行相,皆正了知,名一切相妙智.此妙智體,名一切相妙智性,卽是一切所知境界,一切行相,殊勝智體.言三身者,謂自性等,由此三身,至得具相,無垢無㝵,妙智自性,大菩提果.言具相者,具一切相.有說無常等,十六種行相,名一切相,菩提用彼,爲先因故.
어떤 사람은 나머지를 다시 설하여 곧 이것과 나머지 모든 법들은 다 무자성이라서 무생ㆍ무멸ㆍ본래적정ㆍ자성열반ㆍ무소득상을 일체의 모습이라고 이름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나머지를 다시 설하여 이 가운데 다스림[治]ㆍ다스려지는 것의 모든 품류의 모습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익[義利]과 원만함이 마치 여의주가 일체의 모습을 구족하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나는 지금 이 일체의 모습은 즉 모든 장애를 끊는 품류임을 관한다. 왜냐하면 영원히 모든 장애의 품류를 끊기 때문이다. 이른바 모든 소지장의 품류를 끊고 모든 습기의 품류를 끊기 때문이다.
017_0255_c_14L餘復說,卽此及餘一切諸法,皆無自性,無生`無滅,本來寂靜自性涅槃,無所得相,名一切相.有餘復說,非於此中說治所治諸品類相,然說一切義利圓滿,如如意珠,具一切相.我今觀此一切相者,卽是一切障斷品類.所以者何?永斷一切障品類故,謂斷一切所知障品,及斷一切習氣品故.
017_0256_a_01L또한 이 ‘모습을 구족하는 대보리’란 즉 모든 경계의 모습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타인의 의심을 능히 끊는다.
‘모든 곳‘이란 모든 세간을 말한다.
‘다른 이의 의심’이란 곧 모든 인(人)ㆍ천(天)의 모든 의혹을 말한다. 이와 같은 다른 이의 의혹을 모두 다 능히 끊는다. 이러한 능히 모든 인ㆍ천의 의혹을 끊는 작용에 의해서 모든 모습의 승묘한 지혜의 뛰어남[殊勝]을 나타낸다.
017_0255_c_22L此具相大菩提者,卽是正知一切境相,是故能斷一切他疑.一切處者,一切世閒他疑,卽是所有人`天一切疑惑,於此他疑,皆悉能斷.由此能斷一切人`天疑惑作用,顯一切相妙智殊勝.
【論】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이와 같은 공덕과 상응한다. 다시 그 나머지 자성과 원인과 결과와 업과 상응과 전변[轉]의 공덕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의 최상의 공덕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두 게송이 있다.
017_0256_a_04L論曰:諸佛法身,與如是等,功德相應,復與所餘自性`因`果`業`相應`轉功德相應,是故應知諸佛法身無上功德.此中有二頌:

세존[尊]께서는 진실로 승의(勝義)를 이루시며
모든 지위[一切地]에서 다 벗어나고
모든 중생에 이르러
모든 유정을 해탈시키네.
017_0256_a_08L尊成實勝義,
一切地皆出,
至諸衆生上,
解脫諸有情.

가없고 견줄 데 없는[無盡無等] 덕과
상응하여 세간과
그리고 여러 법회[衆會]에 나투어 가히 볼 수 있으니
보지 못하는 것은 인(人)과 천(天) 등이라네.
017_0256_a_10L無盡無等德,
相應現世閒,
及衆會可見,
非見人天等

【釋】법신은 이러한 공덕과 상응한다. 또한 나머지 여섯 가지 공덕과 상응한다.
이것들에 대해 간략하게 뜻을 드러내어 두 게송으로 자세히 해석한다.
‘세존[尊]께서는 진실로 승의를 이루시며’란 말하자면 부처님의 법신은 진실로 승의(勝義)를 이루시며 진여가 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법신은 자성의 공덕과 상응함을 선설하는 것이다. 힘[十力]의 차별을 설해도 상응에는 과실이 없다. 비유하면 불은 따뜻한 성질[煖德]과 상응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56_a_11L釋曰:法身與此功德相應,復與餘六功德相應,此略摽義.二頌廣釋.尊成實勝義者,謂佛法身,成實勝義,眞如所顯,此卽宣說法身自性功德相應,說力差別,相應無失,譬如說火,煖德相應.
017_0256_b_01L‘모든 지위[一切地]에서 다 벗어나고’란 극희지(極喜地) 등의 일체 모든 10지를 다 벗어난다[出離]는 뜻이며 진실한 승의의 원인[因]을 이룬다는 것이다.
‘모든 중생에 이르러’란 일체지성(-切智性)은 모든 유정을 가장 뛰어남으로 삼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곧 진실로 승의의 결과(果)를 이룬다는 것이다.
‘모든 유정을 해탈시키네’란 곧 진실한 승의의 업(業)을 이룬다는 것이다.
‘가없고 견줄 데 없는[無盡無等]의 덕과 상응하여’란 모든 공덕과 서로 연결되어 상응한다는 것이다. 무변(無邊)ㆍ불공(不共)ㆍ역(力)ㆍ무외(無畏) 등의 가없고 견줄 데 없는 덕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세간과 그리고 여러 법회[衆會]에 나투어 가히 볼 수 있으니’란 말하자면 변화신이 세간에 출현하는 것과 수용신이 대중법회에 머무는 두 가지는 모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017_0256_a_17L一切地皆出者,是極喜等,一切十地,皆出離義,此則成實勝義之因.至諸衆生上者,一切智性於諸有情,最爲殊勝,此卽成實勝義之果.解脫諸有情者,卽是成實,勝義之業.無盡無等德相應者,與諸功德相屬相應,無邊不共力無畏等無盡,無等德相應故.現世閒及衆會可見者,謂變化身出現世閒,及受用身,處大衆會,二皆可見.
‘보지 못하는 것은 인(人)과 천(天) 등이라네’란 말하자면 부처님의 법신은 인과 천 등에 의해서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존의 3신(身)의 차별을 설하여 전변의 뜻을 나타낸다. ‘전(轉)’이란 체성(體性)의 전변하는 차별을 말하며, 3신 가운데 2신(身)은 가히 볼 수 있고 1신(身)은 볼 수 없다.
017_0256_b_03L非見人天等者,謂佛法身非人`天等之所能見.此說世尊三身差別,以顯轉義.轉謂體性,轉變差別,於三身中,二身可見`一非可見.
攝大乘論釋卷第九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이하 증과인 단멸의 뛰어난 양상, 즉 구경위(究竟位)에서 전의(轉依)에 의해 대열반과 대보리를 성취함에 관하여 설명한다. 우선 전의에 대한 내용이다.
  2. 2)전의(轉依, āśraya-parivṛtti)는 ‘의지처[所依]를 전환시켜서 얻어진 것’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의지처는 제8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을 가리킨다. 전환은 전사전득(轉捨轉得), 즉 번뇌장ㆍ소지장(所智障)의 종자를 전사하고, 보리와 열반을 전득함을 말한다. 따라서 전의는 소의(所依)인 자기 존재의 기체(基體)를 허망한 상태(변계소집성)에서 진실한 상태(원성실성)로 변혁시키는 과정, 또는 그 과정의 결과로 증득된 보리와 열반을 가리킨다.
  3. 3)‘저’가 가리키는 것은 잡염이다.
  4. 4)주술을 받은 뱀이란, 주술의 힘에 의해서 독기가 빠진 뱀을 말한다.
  5. 5)자기 속에서 감득(感得)되어야 할 것을 말한다.
  6. 6)자량위와 가행위에서의 수행의 힘을 말한다.
  7. 7)통달위를 말한다.
  8. 8)10지 중의 초지(初地)를 가리킨다.
  9. 9)수습위를 말한다.
  10. 10)구경위를 말한다.
  11. 11)2승의 지위를 말한다.
  12. 12)대승의 지위를 말한다.
  13. 13)이하 그 증과인 지혜의 뛰어남을 3신(身:자성신ㆍ수용신ㆍ변화신)에 의거해서 설명한다.
  14. 14)범어 Tuṣita-deva의 음역으로 욕계의 6천 중 넷째 하늘에 해당하는 도솔천(兜率天)을 말한다. 투슬타(鬪瑟陀)ㆍ도솔타(兜率陀)ㆍ도술(兜術)이라고도 쓰며 상족(上足)ㆍ묘족(妙足)ㆍ희족(喜足)ㆍ지족(知足)이라고 번역한다. 수미산 꼭대기로부터 12만 유순 위에 있는 하늘이라고 한다. 7보로 만든 아름다운 궁전이 있고 한량없는 하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내원과 외원이 있는데, 외원에는 일반 천중(天衆)의 욕락처(欲樂處)이며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를 말한다. 미륵보살은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하여 성불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15. 15)결백, 청정한 법으로서 선법을 말한다. 계(戒)ㆍ정(定)ㆍ혜(慧)의 3학과,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의 6바라밀다의 선근공덕을 말한다.
  16. 16)수행하고 있는 시기를 말한다.
  17. 17)‘집총 등의 다섯 가지 상’에 대해서는 석7권 피수차별분(彼修差別分) 제6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다섯 가지 상[五相]이란 집총수(集總修)ㆍ무상수(無相修)ㆍ무공용수(無功用修)ㆍ치성수(熾盛修)ㆍ무희족수(無喜足修)를 말하며, 이것들은 보살이 10지 가운데에서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는 데 수습하는 상(相)이다. 그 가운데 집총수란 모든 것을 모아서 긴요한 것을 가려서 한 무더기로 하여 수습하는 것이라고 한다.
  18. 18)이하 법신이 5온(蘊)의 의지처를 전환하여 다섯 가지 자재를 얻음을 밝힌다.
  19. 19)불보살이 교화하려는 상대에 맞추어 몸을 변해 나타내는 것, 즉 화신(化身)을 말한다.
  20. 20)이하 법신이 세 가지의 의지처가 됨을 설명한다.
  21. 21)여기서 능(能)은 공능(功能)의 의미이다.
  22. 22)이하 법신은 청정ㆍ이숙ㆍ안주ㆍ자재ㆍ언설ㆍ구제의 여섯 가지 법에 의해 섭지(攝持)를 설명한다.
  23. 23)이숙(異熟)은 이숙의 과보로서 5근(根) 등의 신체를 말한다. 여기서는 5식의 의지처인 5근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기 때문에 이숙이라고 부른다. 이숙은 수행단계[因位]에서의 명칭이지만 우선 예전의 5근에 의지해서 이숙의 명칭을 가설한다.
  24. 24)제불의 법신의 불일불이성(不一不異性)을 말한다.
  25. 25)마음의 작용이 의지할 곳을 말한다.
  26. 26)이하 산문과 게송에서 법신의 공덕을 밝힌다. 현장 역본은 게송에 대한 해석이 없지만 진제 역본에는 게송 하나하나를 해석하고 있다. 또한 무성석(無性釋)에는 산문과 게송이 모두 자세하게 해석되어 있다.
  27. 27)승처(勝處)는 제입(制入)ㆍ제입(除入)ㆍ제처(除處)라고도 한다. 대경(對境)을 제복(制伏)하여 자재를 얻는 차이에 따라 여덟 단계로 나누어 8승처라고 한다. 즉, 욕계의 색처(色處:볼 수 있는 대상, 즉 色想)를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내서 탐욕을 제거하는 다음과 같은 여덟 단계이다. ① 색상(色想)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색처(色處)의 일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서 탐욕을 없앤다. ② 다시 색처의 대부분에도 이겨낸다. ③ 마음속에 색처가 멸했으나 다시 색처의 일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낸다. ④ 다시 색처의 대부분도 이겨낸다. 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색상이 없고 다시 대경(對境)의 색채의 청(靑)ㆍ⑥ 황(黃)ㆍ⑦ 적(赤)ㆍ⑧ 백(白)을 관찰하여 이것도 이겨낸다. 이 중에서 ①②③④는 초선(初禪)과 제2선에 의하고, ⑤⑥⑦⑧은 제4선에 의한다. 또한 ①②는 8해탈(解脫)의 제1, ③④는 제2, ⑤⑥⑦⑧은 제3에 해당한다. 참고로 8해탈은 탐심은 버리지만 아직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28. 28)변처(遍處)는 변입(遍入)ㆍ일체입(一切入)ㆍ변처정(遍處定)이라고도 한다. 구체적으로 지(地)ㆍ수(水) 등 열 가지 법이 온갖 장소에 널리 퍼져서 틈이 없다고 관찰하는 열 가지 관법(觀法)ㆍ관상(觀想)이다. 열 가지는 지ㆍ수ㆍ화ㆍ풍ㆍ청ㆍ황ㆍ적ㆍ백ㆍ공(空)ㆍ식(識)이며, 각기 지변처(地遍處)ㆍ수변처(水遍處) 등으로 말한다. 이 관법은 8해탈ㆍ8승처를 닦은 다음에 행한다.
  29. 29)여기서 쟁(諍)은 다툰다는 의미로서 번뇌의 이명(異名)이다. 무쟁은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탐욕ㆍ성냄 등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이다. 또한 남의 번뇌를 쉬게 하는 힘이므로 부처님과 아라한만 갖고 있을 뿐, 다른 이는 아무도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뛰어난 덕력(德力)의 하나이다.
  30. 30)서원대로 대상을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아는 것이다. 세속지(世俗智)를 그 본성으로 하고 제4정려(靜慮)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일어난다고 한다.
  31. 31)4무애지(無碍智)ㆍ4무애변(無碍辯)이라고도 한다. 마음의 측면에서는 지(智)ㆍ해(解)라고 하며, 입의 방면에서는 변(辯)이라고 한다. 첫째, 모든 교법에 통달한 법무애(法無礙)이다. 둘째, 모든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의무애(義無礙)이다. 셋째, 여러 가지 말을 알아서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사무애(辭無礙)이다. 넷째, 일체 교법을 말하는 데 자재한 요설무애(樂說無礙)이다.
  32. 32)여래의 신업ㆍ구업ㆍ의업은 청정하여 과실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처럼 감추어 지킬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33. 33)부처님께서는 바른 생각ㆍ바른 지혜에 머물러서 중생의 신봉(信奉)과 비방에 흔들림이 없다. 이에 세 가지가 있으니 제일념주(第一念住)는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해도 희심(喜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正念)에 머무는 것이다. 제2념주(第二念住)는 중생이 부처님을 불신해도 우심(憂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무는 것이다. 제3념주(第三念住)는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하거나 비방해도 희심과 우심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무는 것이다.
  34. 34)여덟 가지 정(定)의 힘으로 탐착심을 버리는 것. 또한 8배사(背捨)라고도 한다. 첫째 색상(色想)이 내심에 있으므로 제거하기 위해서 외경에 있는 부정관을 수련한다. 둘째 내심의 색상은 사라졌으나 다시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부정관을 계속하는 것이다. 셋째 앞의 부정관의 마음을 버리고 외경의 색상에서 청정한 면을 관하여 탐욕이 생기지 않고 정해탈(淨解脫)을 몸으로 깨닫고 고적하게 머무르는 것이다. 넷째 물질적인 상을 다 멸하여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섯째 공무변의 마음을 버리고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섯째 식무변의 마음을 버리고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곱째 무소유의 마음을 버리고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덟째 수(受)와 상(想)을 버리고 멸진정(滅盡淨)에 들어가는 것이다.
  35. 35)8제입8제처(八除入八除處)라고도 한다. 욕계의 색처를 관하고 이것을 이겨내서 탐심을 제거하는 여덟 단계의 과정을 말한다. 첫째 색상(色想)이 내심에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색처의 일부분을 관하여 이것을 이겨내어 탐욕을 멸한다. 둘째 다시 색처의 많은 부분에서도 이러한 것을 이겨낸다. 셋째 내심의 색처가 멸하였으나 다시 색처의 일부분을 관하여 이것을 이겨낸다. 넷째 다시 이와 같은 색처의 많은 부분도 이겨낸다. 다섯째 이와 같이 내심의 색상이 없어졌으면 다시 색상의 청(靑)의 색상을 관하여 이겨낸다. 여섯째 이와 같이 황(黃)의 색상을 이겨낸다. 일곱째 이와 같이 적(赤)의 색상을 이겨낸다. 여덟째 이와 같이 백(白)의 색상을 이겨낸다. 8해탈은 탐욕을 버릴 뿐 자재를 얻지 못하지만 8해탈은 대상을 제압하여 자재를 얻는 차이가 있다.
  36. 36)10일체입(一切入)ㆍ10변입(邊入)ㆍ10변처정(邊處定)이라고도 한다.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공(空)ㆍ식(識)의 열 가지 법이 온갖 장소에 널리 퍼져서 틈이 없다고 관하는 법을 말한다. 이 관법은 8해탈과 8승처를 닦고서 그 다음에 닦는다.
  37. 37)범어 araṇā의 번역으로 아란나(阿蘭那)라고 음사하기도 한다. ‘쟁’이란 다툰다는 뜻이며 번뇌의 이명이다.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탐과 진 등의 번뇌를 일어나지 않게끔 하는 지혜를 말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번뇌를 쉬게 하는 힘이므로 부처님과 아라한만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38. 38)산란한 마음을 말한다.
  39. 39)범어 nāga의 음사어로서 대개 용(龍)이라고 번역된다. 여기에서는 부처님을 의미한다.
  40. 40)범어 Puruṇakāśyapa의 음사어로서 육사외도 증의 한 사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