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釋卷第八

ABC_IT_K0595_T_008
017_0232_c_01L
섭대승론석 제8권
017_0232_c_01L攝大乘論釋卷第八


무성보살 지음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김치온 개역
017_0232_c_02L 無性菩薩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8. 증상심학분(增上心學分)
017_0232_c_04L增上心學分第八

【論】이와 같이 매우 높은 계의 뛰어남에 대해서 이미 설하였다.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의 뛰어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1) 간략하게 여섯 가지 차별에 의한다. 첫째는 인식대상의 차별에 의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여러 가지[種種]의 차별에 의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다스림의 차별에 의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감당 능력[堪能]의 차별에 의하기 때문이고, 다섯째는 이끌어 내는 것[引發]의 차별에 의하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작업(作業)의 차별에 의하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32_c_05L論曰:如是已說增上戒殊勝,增上心殊勝,云何可見?略由六種差別應知,一由所緣差別故`二由種種差別故`三由對治差別故`四由堪能差別故`五由引發差別故`六由作業差別故.
【釋】매우 높은 계에 있어서 성문과 다름이 있는 것과 같이, 그 매우 높은 마음 또한 마땅히 다름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여섯 가지 차별은 간략하게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것이다. 후에 낱낱이 해석하는 것과 같다.
【論】인식대상의 차별이란 말하자면 대승법을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釋】‘대승법’이라 하는 것은 보살장(菩薩藏)의 모든 깊고 깊으며 넓고 큰 가르침이다. 성문 등의 선정에서 능히 반연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뛰어난 것이다.
017_0232_c_10L釋曰:如增上戒與聲聞異,其增上心亦應有異,故爲此問.六種差別略答此問,如後別釋.論曰:所緣差別者,謂大乘法,爲所緣故.釋曰:大乘法者,菩薩藏中,所有甚深廣大教等,聲聞等定,非所能緣,是故殊勝.
【論】여러 가지의 차별이란 말하자면 대승광명(大乘光明)ㆍ집복정왕(集福定王)ㆍ현수(賢守)ㆍ건행(健行) 등의 삼마지2)는 갖가지로 한량없기 때문이다.
【釋】보살이 얻게 되는 모든 삼마지의 차별은 한량없다. 여기에서 간략하게 상수(上首)로 하는 것을 설하며, 나머지 모든 것을 동등하게 한다. 성문승 등은 오히려 명칭조차 듣지 못했는데 어찌 하물며 얻을 수 있겠는가?
017_0232_c_17L論曰:種種差別者,謂大乘光明`集福定王`賢守`健行等三摩地,種種無量故.釋曰:菩薩所得諸三摩地,差別無量,此中略說,爲上首者,等餘一切聲聞乘等,尚不聞名何況能得.
017_0233_a_01L【論】다스림의 차별이란 말하자면 일체법의 총체적인 양상[總相]을 반연하는 지혜는 쐐기[楔]로써 쐐기를 빼는 도리여서 아뢰야식 가운데 모든 장애의 추중(麤重)을 없애기 때문이다.
【釋】무분별지가 반연하게 되는 진여는 즉 모든 법의 공상(共相)이 나타난 바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총체적인 양상을 반연하는’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선정은 이러한 능히 다스리는 지혜를 낼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다스림[對治]’이라고 이름한다. 성도(聖道)는 미묘하기 때문에 가느다란 쐐기와 같고, 다스려지는 종자는 그 성품이 거칠고 무겁기[麤重] 때문에 거친 쐐기와 같다.
017_0232_c_22L論曰:對治差別者,謂一切法摠相緣智,以楔出楔道理,遣阿賴耶識中,一切障麤重故.釋曰:無分別智,所緣眞如,是一切法共相所顯,故說此智,名摠相緣.定能發此能對治智,亦名對治.聖道微妙,故如細楔所治種子其性麤重,故如麤楔.

【論】감당 능력의 차별이란 말하자면 정려의 즐거움에 머물러서 그 욕구하는 바에 따라 생(生)을 받기 때문이다.
【釋】그 정려의 그 성품이 조순(調順)함으로 감당하는 능력이 있게 된다. 모든 유정을 요익하게 하려는 곳에 따라서 정려에서 물러나지 않고도 가서 생을 받는다. 성문승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없다. 이것이 뛰어난 까닭이다.
【論】이끌어 내는 차별이란 말하자면 모든 세계에 장애 없는 신통을 능히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釋】이 선정의 힘에 의해 갖가지 모든 세계에 장애 없는 신통을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017_0233_a_08L論曰:堪能差別者,謂住靜慮樂,隨其所欲,而受生故.釋曰:由此靜慮,其性調順有所堪能,隨欲饒益諸有情處,不退靜慮而往受生.聲聞乘中,無如是事,所以殊勝.論曰:引發差別者,謂能引發一切世界無㝵神通故.釋曰:由此定力,引發種種一切世界無㝵神通.
【論】작업의 차별이란 말하자면 능히 진동시키고, 맹렬히 타오르며, 두루 가득하고, 나타내 보이며, 전변하고 왕래하며, 감고 펴며[卷舒], 모든 물질의 모습[色像]을 모두 다 몸 안에 들이며, 가는 곳은 부류를 같이하여 혹은 드러내고 혹은 숨으며, 하는 바가 자재하여 다른 이의 신통을 조복하며, 말과 생각과 즐거움을 보시하며, 큰 광명을 비춘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큰 신통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017_0233_a_17L論曰:作業差別者,謂能振動`熾然`遍滿`顯示`轉變`往來`卷舒,一切色像,皆入身中,所往同類,或顯或隱,所作自在,伏他神通,施辯念樂,放大光明,引發如是大神通故.
017_0233_b_01L【釋】이 선정의 힘에 의해서 갖가지 신통으로 짓게 되는 것을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드러내고’란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하고, ‘숨으며’란 숨어 갈무리[隱藏]하는 것을 말한다.
‘하는 바가 자재하여’란 마왕을 변화시켜 불신으로 만드는 것 등을 말한다.
‘다른 이의 신통을 조복하며’란 능히 다른 이의 신통력을 영탈(映奪)하는 것을 말한다. 변재(辯才)가 없는 자에게는 변재를 보시하고, 생각의 즐거움이 없는 자에게는 생각의 즐거움을 보시한다. 다른 지방에 멀리 머무르는 이를 초대하기 위해서 보살은 큰 광명을 비춘다.
‘이와 같은 큰 신통을 끌어당긴다’란 앞에서 설한 바 갖가지 신통을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부류는 성문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뛰어난 것이다.
017_0233_a_22L釋曰:由此定力,引發種種神通所作.顯謂顯現,隱謂隱藏.所作自在,謂變魔王,作佛身等.伏他神通,謂能映奪他神通力.無辯才者,施以辯才,無念樂者,施以念樂.爲召他方遠住菩薩放大光明.引發如是大神通者,引前所說,種種神通.如是等類,聲聞等無,是故殊勝.
【論】또한 모든 난행(難行)을 섭수하는 열 가지 난행을 능히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열 가지 난행이란, 첫째는 스스로 맹세하는[自誓] 난행으로서, 무상보리의 원을 맹세[誓受]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물러나지 않는[不退] 난행으로서, 생사의 뭇 고통에서 능히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등지지 않는[不背] 난행으로서, 모든 유정이 비록 삿된 행을 행할지라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현전(現前)의 난행으로서, 원한이 있는 유정에게도 나타나서 모든 요익한 일을 짓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오염되지 않는[不染] 난행으로서, 세간에 있으면서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뛰어난 이해[勝解]의 난행으로서, 대승에 대해 비록 요달하지 못했지만 모든 광대함과 깊고 깊음에 대해서 믿고 이해함을 내기 때문이다.
017_0233_b_07L論曰:又能引發攝諸難行,十難行故.十難行者:一自誓難行,誓受無上菩提願故二不退難行,生死衆苦,不能退故三不背難行,一切有情,雖行邪行,而不棄故四現前難行,怨有情所現,作一切饒益事故五不染難行,生在世閒,不爲世法所染污故六勝解難行,於大乘中,雖未能了,然於一切廣大甚深,生信解故
일곱째는 통달(通達)의 난행으로서 보특가라와 법의 무아에 모두 통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수순하여 깨닫는[隨覺] 난행으로서, 모든 여래께서 설하신 깊고 깊은 비밀스러운 말씀에 대해 능히 수순하여 깨닫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여의지 않고 오염되지 않는[不離不染] 난행으로서, 생사를 버리지 않으면서 물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열째는 가행(加行)의 난행으로서, 능히 모든 부처님의 안주를 닦아서 모든 장애로부터 벗어나고 생사의 끝을 궁구하며 의식적인 노력을 짓지 않고도 항상 모든 유정의 모든 의리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017_0233_b_16L七通達難行,具能通達補特伽羅法無我故八隨覺難行,於諸如來所說,甚深秘密言詞,能隨覺故九不離不染難行,不捨生死,而不染故十加行難行,能修諸佛安住,解脫一切障㝵,窮生死際,不作功用,常起一切有情,一切義利行故.
017_0233_c_01L【釋】설한 것과 같이 보살은 여러 가지 난행을 닦는다. 모든 난행은 열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스스로 맹세하는 난행으로서, 무상보리의 원을 맹세한다’란 스스로의 즐거움을 돌아보지 않고 모든 유정을 요익하기를 맹세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물러나지 않는 난행으로서, 생사의 뭇 고통에서 능히 물러나지 않는다’란 오래도록 생사에 처해서 바람과 추위 등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능히 물러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등지지 않는 난행으로서, 모든 유정이 비록 삿된 행을 행할지라도 버리지 않는다’란 부모 등이 사악한 행을 행하는데, 혹은 쓸데없는 놀이에 눈동자를 돌리고 두 다리로 밟는다 하여도 그러한 과실을 관하지 않고 요익한 일을 짓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017_0233_b_22L釋曰:如說菩薩修諸難行,一切難行,十種所顯.自誓難行,誓受無上菩提願者,不顧自樂,誓受饒益一切有情,甚爲難故.不退難行,生死衆苦,不能退者,久處生死,風寒等苦,所不能退,甚爲難故.不背難行,一切有情,雖行邪行,而不棄者,於父母等,行邪惡行,或無所用,戲求眼睛,雙足踐蹹,不觀其過,而作饒益,甚爲難故.
‘현전의 난행으로서, 원한이 있는 유정에게도 나타나서 모든 요익한 일을 짓는다’란 심한 원한이 있다 해도 나타나서 요익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오염되지 않는 난행으로서, 세간에 있으면서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다’란 항상 세간의 이로움 등의 8법3)에 처해도 능히 물들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뛰어난 이해의 난행’ 등이란 미묘한 대상의 뛰어난 신통력에 대해서 비록 아직은 요달하지 못했는데도 깊이 믿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통달의 난행’ 등이란 현관(現觀)에 통달하여 동등하게 하나의 대상을 깨닫고 두루 계탁하여 집착하는 보특가라와 모든 법성은 모두 있는 바가 없다고 능히 갖추어 통달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017_0233_c_08L現前難行,怨有情所現,作一切饒益事者,雖有重怨,而現饒益,甚爲難故.不染難行,生在世閒,不爲世法所染污者,常處世閒,利等八法,所不能染,甚爲難故.勝解難行等者,於微妙義,殊勝神力,雖未能了,而深信解,甚爲難故.通達難行等者,通達現觀等覺一義,能具通達,遍計所執,補特伽羅,一切法性,皆無所有,甚爲難故.
‘수순하여 깨닫는 난행’ 등이란 부처님께서 설하신 비밀스러운 말씀에 대해서 들은 의미를 따르는 것을 버리고 듣지 않은 의미를 깨닫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여의지 않고 오염되지 않는 난행’ 등이란 생사를 버리지 않고 저 허물에 물들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가행의 난행’ 등이란 모든 번뇌와 소지장을 이미 끊어 버렸고 이미 벗어나서 항상 현전하여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지으며, 모든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항상 휴식함 없이 이러한 행을 흔쾌히 닦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017_0233_c_17L隨覺難行等者,於佛所說秘密言詞,捨隨聞義,覺不聞義,甚爲難故.不離不染難行等者,不捨生死,不染彼過,甚爲難故.加行難行等者,已斷已脫一切煩惱及所知障,而恒現前,起作一切利有情事,盡未來際,常無休息,欣修此行,甚爲難故.
017_0234_a_01L【論】또한 수순하여 깨닫는 난행에서 부처님의 어떤 비밀스러운 말씀에 대해서 저 모든 보살은 능히 따라서 깨닫게 되는가? 말하자면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釋】제8난행의 그 뜻에 대해서 아직 요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듭 해석하는 것이다.
017_0234_a_01L論曰:復次隨覺難行中,於佛何等秘密言詞,彼諸菩薩能隨覺了?謂如經言.釋曰:第八難行,其義未了,故須重釋.
【論】보살은 어떻게 능히 은혜로운 보시[惠施]를 행하는가? 모든 보살은 조금이나마 보시 받은 바가 없으나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널리 은혜로운 보시를 행할 경우이다.
보살은 어떻게 즐겨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는가? 모든 보살이 모든 보시에 대해서 다 바라는 것과 즐거워함이 없는 경우이다.
보살은 어떻게 은혜로운 보시에 대해서 깊은 믿음과 이해를 내는가? 모든 보살이 여래를 믿지 않고도 보시를 행하는 경우이다.
보살은 어떻게 보시에 대해서 책려하는가? 모든 보살이 은혜로운 보시에 대해서 스스로 책려하지 않는 경우이다.
보살은 어떻게 보시에 대해서 탐닉하고 즐거워하는가? 모든 보살이 잠시라도 조금이나마 보시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이다.
보살은 어떻게 그 보시가 광대한가? 모든 보살이 은혜로운 보시에 대해서 사락상(娑洛想)을 여읜 경우이다.
017_0234_a_04L論曰:云何菩薩,能行惠施?若諸菩薩,無少所施,然於十方無量世界,廣行惠施.云何菩薩,樂行惠施?若諸菩薩,於一切施,都無欲樂.云何菩薩,於惠施中,深生信解?若諸菩薩,不信如來,而行布施.云何菩薩,於施策勵?若諸菩薩,於惠施中,不自策勵.云何菩薩,於施耽樂?若諸菩薩,無有暫時,少有所施.云何菩薩,其施廣大?若諸菩薩,於惠施中,離娑洛想.
보살은 어떻게 그 보시가 청정한가? 모든 보살이 인색함[慳]을 온파타(殟波陀)4)한 경우이다.
보살은 어떻게 그 보시가 구경(究竟)인가? 모든 보살이 구경에 머무르지 않는 경우이다.
보살은 어떻게 그 보시가 자재한가? 모든 보살이 은혜로운 보시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하지 않는 경우이다.
보살은 어떻게 그 보시가 다하지 않는가? 모든 보살이 다하지 않음에 머무르지 않는 경우이다.
보시에 있어서와 같이 계율을 처음으로 하고 지혜[慧]를 마지막으로 하여 그 상대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또한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017_0234_a_14L云何菩薩,其施淸淨?若諸菩薩,殟波陁慳.云何菩薩,其施究竟?若諸菩薩,不住究竟.云何菩薩,其施自在?若諸菩薩,於惠施中,不自在轉.云何菩薩,其施無盡?若諸菩薩,不住無盡.如於布施,於戒爲初,於慧爲後,隨其所應,當知亦爾.
017_0234_b_01L【釋】‘모든 보살이 조금이나마 보시 받은 바가 없으나’ 등이란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모든 유정을 섭수하여 자기의 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과 남의 평등성을 통달하기 때문이고, 저들이 보시를 행할 때가 곧 보살이 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보시 받는 것이 없는 것을 능히 보시를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일체 모든 재물을 모든 이에게 보시한다. 그러므로 ‘조금이나마 보시 받는 바가 없으나’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보시한 물건도, 보시한 자도, 받는 자도, 모두 얻을 수 없어서 3륜(輪)이 청정하다. 그러므로 ‘조금이나마 보시 받는 바가 없으나’라고 설하는 것이다.
‘모든 보살이 일체 보시에 대해서 다 바라는 것과 즐거워함이 없는 경우이다’란 이것은 이미 부정하는 말로서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미래에 보시를 구하는 것[來求施)5)과 보시해야만 내가 보시하는 것[當施我施]과 먼저 보시했으므로 내가 보시하는 것[先施我施]에 대해서 이와 같은 일체 모두에 대해서 바라는 것과 욕구가 없다. 오직 열반에 안주하는 것에 반연하여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는 것만을 즐긴다.
017_0234_a_20L釋曰:若諸菩薩,無少所施等者,謂諸菩薩,一切有情攝,爲己體,通達自他平等性故.彼行施時,卽菩薩施,故無少施,名能行施.又以一切所有財物,施於一切,是故說名無少所施.又所施物`施者`受者,皆不可得,三輪淸淨,是故說名無少所施.若諸菩薩,於一切施,都無欲樂者,此旣遮言,是不樂義.於來求施,當施我施,先施我施,此等一切,皆無欲樂,唯樂攀緣,安住涅槃,而行惠施.
‘모든 보살이 여래를 믿지 않고도 보시를 행하는 경우이다’란 말하자면 법성을 증득하여 스스로 알고 스스로 믿어서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는 것이지 다만 남을 믿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보살이 은혜로운 보시에 대해서 스스로 책려하지 않는 경우이다’란 말하자면 능히 자유자재로 항상 보시를 행하기 때문에 스스로 책려할 필요가 없고, 능히 다른 사람을 책려해서 권하여 보시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이 잠시라도 조금이나마 보시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이다’란 모든 때에 모든 것을 보시한다는 것이다.
‘모든 보살이 은혜로운 보시에 대해서 사락상을 여읜 경우이다’에서 이 ‘사락(娑洛)’6)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교에서는 견실(堅實)을 일컬으며 , 밀교에서는 유산(流散)을 나타낸다. 지금은 밀교의 뜻을 취하여 흩어져 버린다는 생각[流散想]을 여의는 것이다. 즉 삼마지로써 이것은 곧 마음이 선정에 머물러서 보시를 행한다는 뜻이다.
017_0234_b_08L若諸菩薩,不信如來而行布施者,謂證法性自了自信而行惠施,非唯信他.若諸菩薩,於惠施中,不自策勵者,謂能任運常行施故,不須自策,而能策他勸令施故.若諸菩薩,無有暫時,少有所施者,是一切時,一切施義.若諸菩薩,於惠施中,離娑洛想者,此娑洛言,顯目堅實`密詮流散,今取密義,離流散想,卽三摩地,是心住定,而行施義.
‘모든 보살이 인색함을 온파타한 경우이다’에서 ‘온파타’라고 하는 것은 현교에서는 생기(生起)를 일컫고, 밀교에서는 발족(拔足)을 나타낸다. 지금은 밀교의 뜻을 취해서 인색함[慳足]을 뽑아내 없애어 은혜로운 보시를 행한다는 것이다.
‘모든 보살이 구경에 머무르지 않는 경우이다’는 한결같이 적정에 나아가 성문이 구경에 안주하는 무여열반과 같지 않다.
‘모든 보살이 은혜로운 보시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하지 않는 경우이다’란 말하자면 인색함 등 보시로 다스려지는 장애로 하여금 자재하게 전전하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017_0234_b_17L若諸菩薩,殟波陁慳者,殟波陁言,顯目生起`密詮拔足,今取密義,拔除慳足,而行惠施.若諸菩薩,不住究竟者,不同一向趣寂聲聞安住究竟無餘涅槃.若諸菩薩,於惠施中,不自在轉者,謂令慳等,施所治障,不自在轉.
017_0234_c_01L‘모든 보살이 다하지 않음에 머무르지 않는 경우이다’란 말하자면 원만하고 다함이 없는 매우 높은 구경의 불과(佛果)를 얻어도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변화를 일으켜 다른 사람을 요익하게 하기 위해서 항상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기 때문이다.
‘보시에 있어서와 같이 계율을……마땅히 또한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란 이러한 부류가 나머지 다섯 가지 경우에도 통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은 어떻게 능히 시라를 구족하는가? 모든 보살이 작은 계[少戒]를 지키지 않는 경우이니 말하자면 자타가 평등한 성품을 보기 때문에 다른 이가 청정한 계를 지키는 것은 곧 자기의 시라를 구족하는 것이다.”
017_0234_b_23L若諸菩薩,不住無盡者,謂得圓滿無盡增上究竟佛果而不安住.何者起化?爲饒益他,常行惠施.如於布施,於戒乃至,當知亦爾者,類通餘五.謂如經言:云何菩薩,能具尸羅?若諸菩薩,不護少戒,謂見自他平等性故,他護淨戒,卽是自己具足尸羅.
【論】어떻게 능히 살생하는가? 중생의 생사유전을 끊는 경우이다.
어떻게 주지 않는데 취하는가[不與取]? 모든 유정들은 주는 자가 없는데도 자연히 섭취하는 경우이다.
어떻게 삿된 행을 하고자[欲邪行] 하는가? 모든 욕심에 대해서 이것은 삿됨이라고 요지하고 바른 행을 닦는 경우이다.
어떻게 능히 망어(妄語)를 하는가? 허망에 대해서 능히 허망이라고 설하는 경우이다.
어떻게 패술니(貝戌尼)7)를 하는가? 항상 최고로 뛰어난 공(空)에 머무르는 경우이다.
017_0234_c_07L論曰:云何能殺生?若斷衆生生死流轉.云何不與取?若諸有情,無有與者,自然攝取.云何欲邪行?若於諸欲,了知是邪,而修正行.云何能妄語?若於妄中,能說爲妄.云何具戍尼?若能常居最勝空住.
어떻게 파로사(波魯師)8)를 하는가? 잘 알아야 할 바의 피안에 안주하는 경우이다.
어떻게 교묘한 말[綺間語]을 하는가? 올바르게 법의 품류의 차별을 설하는 경우이다.
어떻게 능히 탐욕하는가? 자주 자주 스스로 위없는 정려를 증득하고자 하는 경우이다.
어떻게 능히 성냄[瞋恚]이 있는가? 그 마음에서 능히 바르게 모든 번뇌를 증오하여 해치는 경우이다.
어떻게 능히 삿된 견해를 내는가? 모든 곳에 두루 행하는 삿된 성품을 모두 여실하게 보는 경우이다.
017_0234_c_13L云何波魯師?若善安住所知彼岸.云何綺閒語?若正說法品類差別.云何能貪欲?若有數數欲,自證得無上靜慮.云何能瞋恚?若於其心,能正憎害一切煩惱.云何能邪見?若一切處,遍行邪性,皆如實見.
017_0235_a_01L【釋】경에서 “필추여, 나는 능히 죽일 수 있다” 등이라고 설하는 것과 같은 것은 여기에서는 저 설한 바 취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중생의 생사유전을 끊는다’에서 ‘끊는다’는 것은 살생의 뜻으로 질문과 상응한다.
‘주는 자가 없는데도 자연히 섭취한다’란 다른 이가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섭수하여 이익하게 한다는 뜻이다.
‘모든 욕심에 대해서 이것은 삿됨이라고 요지하고 바른 행을 닦는다’란 말하자면 경계에 대한 욕심이거나, 분별에 대한 욕심이거나 오직 삿되어 혼란스러운 것임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다음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7_0234_c_18L釋曰:如經中說,苾芻我是能殺等者,此中顯彼所說意趣.若斷衆生生死流轉者,斷是殺義,與問相應.無有與者,自然攝取者,是無他求自攝益義.若於諸欲,了知是邪,而修正行者,謂如實知,若境界欲,若分別欲,唯是邪亂.如有頌言: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탐ㆍ진ㆍ치는
모든 분별로부터 일어나며
깨끗함과 깨끗하지 않음의 전도
이것 역시 연생(緣生)이라 하네.
017_0235_a_02L佛說貪恚癡,
皆從分別起,
淨不淨顚倒,
此亦爲緣生.

깨끗함과 깨끗하지 않음의 전도를
연(緣)으로 삼아서 존재하는 것은
자성이 모두 없으며
그러므로 욕심은 진실하지 않네.
017_0235_a_04L淨不淨顚倒,
爲緣而有者,
彼自性皆無,
故欲非眞實.

‘허망에 대해서 능히 허망이라고 설한다’란 허망을 허망이라고 설하기 때문에 망어(妄語)라고 이름한다. 다음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7_0235_a_05L若於妄中,能說爲妄者,說妄爲妄,故名妄語.如有頌言:

모든 허망법을
세존께서는 여실하게 설하셨으니,
허망법 가운데
제행(諸行)은 가장 허망하네.
017_0235_a_07L一切虛妄法,
世尊如實說,
於虛妄法中,
諸行最虛妄.

‘항상 최고로 뛰어난 공(空)에 머무른다’란 세간의 문사(文詞)를 해석하는 도리에 의해서 위에서 질문한 패술니(貝戌尼)9)라는 말에 답하는 것이다. 이 패술니는 현교에서는 이간하는 말[離間語]을 지칭하고, 밀교에서는 항상 뛰어난 공[常勝空]을 나타낸다. 패(貝:pai)는 뛰어남[勝]의 의미를 나타내고, 술(戌:śu)은 공(空)의 의미를 나타내며, 니(尼:nī)는 상(常)의 의미를 나타낸다. 지금 밀교의 의미를 취하면 질문과 대답이 상응하며 현교는 그렇지 않다.
파노사 등의 문사를 해석하는 도리 또한 이와 같다. 이 파노사는 현교에서는 추악어(麤惡語)를 지칭하고, 밀교에서는 피안에 머무르는 것을 나타낸다. 지금은 밀교를 취하기 때문에 ‘잘 알아야 할 바의 피안에 안주한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잘 알아야 할 바의 피안’이란 일체지(一切智)이며 부처님께서는 거기에 능히 잘 안주하시기 때문에 파노사라고 이름한다.
017_0235_a_09L若能常居最勝空住者,依世訓釋文詞道理,答上所問,具戍尼言.此具戍尼,顯目離閒語`密詮常勝空.具表勝義,戍表空義,尼表常義,今取密義,問答相應,顯則不爾.波魯師等,訓釋文詞,道理亦爾.此波魯師,顯目麤惡語`密詮住彼岸,今取密義,是故說言:若善安住所知彼岸.所知彼岸,是一切智,佛於其中,能善安住,名波魯師.
017_0235_b_01L‘올바르게 법의 품류의 차별을 설한다’란 교묘한 말[綺間語]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 뜻은 알기 쉽다.
‘자주 자주 스스로 위없는 정려를 증득하고자 한다’란 위에서 문사의 도리를 해석하는 것과 같다. 모든 불신(佛身)이 소유한 정려를 ‘무상(無上)’이라고 설한다.
‘그 마음에서 능히 바르게 모든 번뇌를 증오하여 해친다’에서 ‘증오하여 해친다’는 것은 이미 멸하였고 이미 끊었다는 뜻이다.
‘모든 곳에 두루 행하는 삿된 성품을 모두 여실하게 본다’란 말하자면 모든 허망분별은 삿되고 어지러움을 성품으로 함을 본다는 것이다.
017_0235_a_18L若正說法品類差別者,釋綺閒語,其義易了.若有數數欲,自證得無上靜慮者,如上訓釋文詞道理,諸佛身中,所有靜慮,說爲無上.若於其心,能正憎害一切煩惱者,已滅已斷是憎害義.若一切處,遍行邪性,皆如實見者,謂見一切虛妄分別邪亂爲性.
【論】깊고 깊은 불법은 어찌하여 깊고 깊은 불법이라고 이름하는가? 여기에서 마땅히 해석해야 한다.
말하자면 상주하는 법이 곧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그 법신은 상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단멸하는 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일체의 장애를 영원히 끊어서 소멸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기하는 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변화신을 나투어서 생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득이 있는 법[有所得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8만 4천의 모든 유정의 행과 저 다스림을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탐욕이 있는 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탐욕이 있는 유정을 섭수하여 자기의 몸으로 삼기를 스스로 서원하기 때문이다.
017_0235_b_02L論曰:甚深佛法者,云何名爲甚深佛法?此中應釋:謂常住法,是諸佛法,以其法身,是常住故.又斷滅法,是諸佛法,以一切障,永斷滅故.又生起法,是諸佛法,以變化身,現生起故.又有所得法,是諸佛法,八萬四千諸有情行,及彼對治,皆可得故.又有貪法,是諸佛法,自誓攝受有貪有情,爲己體故.
또한 성냄이 있는 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며, 또한 어리석음이 있는 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또한 범부가 있는 법[異生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인 것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잡염이 없는 법[無染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원만하게 성취된 진여는 모든 장애의 번뇌에 능히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오염이 없는 법[無汚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세간에 있어도 모든 세간법에 능히 더렵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깊고 깊은 부처님의 법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017_0235_b_10L又有瞋法,是諸佛法,又有癡法,是諸佛法,又異生法,是諸佛法,應知亦爾.又無染法,是諸佛法,成滿眞如,一切障垢,不能染故.又無污法,是諸佛法,生在世閒,諸世閒法,不能污故.是故說名甚深佛法.
【釋】깊고 깊은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 계경에서 설한 그 뜻은 어떠한가? 말하자면 다른 경에서 설하기를, “상주하는 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또한 오염이 없는 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에 대한 비밀스러운 뜻을 지금 나타내 보이겠다.
‘그 법신은 상주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법신은 곧 전의(轉依)를 특징[相]으로 하고, 모든 장애를 여읜 항상 머무르는 진여로서 변역(變易)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번뇌[垢]의 더러움이 없고 장애[罣礙]가 없는 위없는 묘지(妙智)이다. 무색계와 같아서 이숙이 아니니, 이것은 무루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주하는 법신에 섭수되는 것이니,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업번뇌에 의해서 능히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17_0235_b_16L釋曰:甚深佛法,契經所說,其義云何?謂餘經說,若常住法,是諸佛法,廣說乃至,又無污法,是諸佛法.此中密意,今當顯示.以其法身,是常住者,法身卽是轉依爲相,離一切障,常住眞如,無變易故.或無垢穢,無有罣㝵,無上妙智,如無色界,而非異熟,是無漏故.此亦常住法身所攝,無差別故,非業煩惱,所能爲故.
017_0235_c_01L‘8만 4천의 모든 유정의 행과 저 다스림을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8만 4천의 법온(法蘊)은 능히 탐욕이 있는 것ㆍ성냄이 있는 것ㆍ어리석음이 있는 것과 등분(等分)10)의 유정의 행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네 가지에 각각 2만 천이 있다.
‘잡염이 없는 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하는 것은 선정(善淨)의 진여는 모든 장애의 번뇌에 능히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 뜻은 알기 쉽기 때문에 거듭 해석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비밀스러운 말씀을 설하셨는데, 다시 어떤 결과가 있는가? 말하자면 설하는 자[說者]로 하여금 안립하기 쉽도록 하셨으니, 뜻을 총괄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쉽게 설하셨으니, 곧 이것의 원인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017_0235_c_02L八萬四千諸有情行,及彼對治皆可得者,八萬四千法薀,能治有貪有瞋有癡等分有情行故,四種各有二萬一千.又無染法,是諸佛法者,善淨眞如,一切障垢,不能染故.餘義易了,不須重釋.佛說如是秘密言詞,復有何果?謂令說者,易可安立,摠括義故,易爲他說卽此因故
능히 듣는 자로 하여금 받아 지니기 쉽도록 하셨으니, 자량을 쉽게 채우며 가르침을 받아 지니기 때문이다. 법성에 통달하기 쉬우니 자량이 꽉 찼기 때문이다. 불(佛)을 얻고 깨끗함을 증득하니 대아(大我)를 얻었기 때문이다.
법(法)과 승(僧) 또한 이와 같다. 아울러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현법낙주(現法樂住)를 증득한다. 저것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 앞에서 논의를 결택하여 총명하고 민첩한 수(數)에 들어간다. 열 가지 이로움을 위해서 비밀의 말을 설하는 것이다. 성문승에서도 또한 부모를 살해하는 등의 비밀스러운 말을 설하며 열 가지 이로움 또한 이와 같다.
017_0235_c_09L令聞者,易可受持資糧易滿,受持教易達法性,資糧滿故得佛證淨,得大我故.法僧亦爾,竝最勝故.由此證得現法樂住,覺知彼故,於智者前論義決擇,入聰敏數,爲斯十利,說秘密言.聲聞乘中,亦說殺害於父母等,密意言詞,ㅡ十利亦爾.
017_0236_a_01L【論】또한 능히 이끌어 내어 바라밀다[到彼岸]를 닦으며, 유정을 성숙시키며, 불국토를 깨끗이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보살 삼마지[等持]의 작업의 차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보살이 얻는 모든 삼마지에는 다시 네 가지 작업의 차별이 있다. 말하자면 이 선정에 의지하여 능히 모든 바라밀다를 닦고 모든 유정의 부류들을 성숙시킨다. 신통 등의 방편을 일으켜서 정법에 들어가게끔 하기 때문에, 그리고 능히 불국토를 깨끗이 하려는 욕구에 따라 능히 금 등의 보배를 성취하기 때문에, 능히 바르게 10력ㆍ4무외 등의 모든 부처님 말씀을 닦고 모은다. 이와 같이 설한 바 삼마지[等持]를 떠나서는 능히 바라밀다[到彼岸]를 닦고 모으는 것 등을 갖출 수 없다. 네 가지 작업은 성문 등과 같다.
017_0235_c_16L論曰:又能引發修到彼岸,成熟有情`淨佛國土,諸佛法故,應知亦是菩薩等持作業差別.釋曰:菩薩所得諸三摩地,復有四種,作業差別,謂依此定,能修一切波羅蜜多,成熟一切諸有情類,發神通等方便,引令入正法故,能淨佛土,隨欲能成金等寶故,能正修集力無畏等,一切佛法.非離如是所說等持,能辦修集到彼岸等,四種作業,如聲聞等.


9. 증상혜학분(增上慧學分)
017_0236_a_03L攝大乘論釋,增上慧學分第九

【論】이와 같이 이미 매우 높은 마음의 뛰어남에 대해서 설하였다.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의 뛰어남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11) 말하자면 무분별지의 자성, 또는 의지처, 또는 인연, 또는 인식대상, 또는 인식작용[行相], 또는 맡아 지님[任持], 또는 돕는 짝[助伴], 또는 이숙, 또는 등류(等流), 또는 벗어남[出離], 또는 궁극에 이름[至究竟], 또는 가행의 지혜ㆍ무분별의 지혜12)ㆍ후득지혜13)의 뛰어난 이익[勝利], 또는 차별, 또는 무분별 지혜ㆍ후득 지혜의 비유, 또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 짓는 사업[無功用作事], 또는 매우 심오함[甚深]이다. 무분별지를 매우 높은 지혜의 뛰어남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36_a_04L論曰:如是已說,增上心殊勝,增上慧殊勝,云何可見?謂無分別智,若自性`若所依`若因緣`若所緣`若行相`若任持`若助伴`若異熟`若等流`若出離`若至究竟`若加行無分別後得勝利`若差別`若無分別後得譬喩`若無功用作事`若甚深,應知無分別智,名增上慧殊勝.
【釋】마음이 이미 선정에 있으면 능히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끊임없는 삼마지[等持]를 매우 높은 지혜의 학[增上慧學]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인가? 이러한 앎[明]을 거두어 취하는 것을 곧 학(學)이라고 이름한다. 지혜[慧]와 학(學)이란 마땅히 차이가 있지 않다. 만약 이와 같다면 말하자면 매우 높은 지혜는 곧 그것의 학이라고, 같은 처[同處]에 의지하여 해석해야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여기에서 말하자면 나머지 지혜에 의지하여 학(學)을 일으킨다고 하는 의지의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매우 높은 지혜의 학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 학은 계에 의지하여 배우며 정에 의하여 배우는 것과 같이, 여기에서는 지혜에 의지하여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지혜가 곧 학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한다. 즉 이 가행의 지혜는 근본의 지혜에 의지하여 배우며, 그 근본의 지혜는 후득에 의지하여 배운다. 그 후득의 지혜는 끊임없는 두 가지에 의지하여 일어나 닦고 배운다.
017_0236_a_12L釋曰:心旣在定,能如實知故,等持無閒說增上慧學,爲不爾耶?攝取其明,卽名爲學,慧之與學,應無有異.若如是者,依同處釋,謂增上慧,卽是其學.若爾,此中應無依義,謂依餘慧,而起於學,是故說名增上慧學.如前二學,依戒而學`依定而學,非於此中,依慧而學,慧卽學故.應如是說:其加行慧,依根本學,其根本慧,依後得學,其後得慧,依二無閒,而起修學.
017_0236_b_01L어떤 것들을 매우 높은 지혜의 학이라고 이름하는가? 말하자면 무분별지이다. 지금 여기에서 자성(自性)을 최초로 하고 매우 깊음을 최후로 하여 이 지혜에 대해서 자세히 해석한다.
【論】여기에서 무분별지는 다섯 가지 특징을 여의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첫째는 작의가 없음을 여의기 때문이며, 둘째는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14)를 지나쳐 여의기 때문이고, 셋째는 표상작용[想]과 감수작용[受]이 멸한 적정을 여의기 때문이며, 넷째는 색의 자성을 여의기 때문이고, 다섯째는 진실한 의미[眞義]에 대해서 다른 계탁을 여의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특징을 여의는 것을 무분별지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36_a_22L何等名爲增上慧學?謂無分別智.今於此中,最初自性`最後甚深,廣釋此智.論曰:此中無分別智,離五種相,以爲自性:一離無作意故`二離過有尋有伺地故`三離想受滅寂靜故`四離色自性故`五離於眞義異計度故,離此五相,應知是名無分別智.
【釋】무분별지[智]의 자성에 의지하여 다섯 가지 특징을 여의는 것을 설하는 것은 전문(詮門)을 부정함으로써 지의 체상(體相)을 설하는 것이다. 전문을 표현하는 것은 가히 설할 수 없기 때문에 분별문을 보내서 무분별지의 그 특징을 가히 요별하는 것이다.
만약 이 지와 다를 경우에는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것들이 분별인가? 말하자면 뒤에서 자세히 설하는 작의가 없음 등이다.
만약 작의가 없음이 무분별지라면 숙면(熟眠)과 취함[醉] 등에는 작의하는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무분별지를 성취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노력을 떠나 마땅히 무전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만약 심사지(尋伺地)를 지나치는 것을 무분별지라고 한다면, 제2정려 이상의 여러 지위에 있는 모든 이생(異生)과 성문 등은 마땅히 무분별지를 성취해야 한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무분별지가 없다.
017_0236_b_06L釋曰:依智自性,說離五相,由遮詮門,說智體相,以表詮門,不可說故.遣分別門,無分別智,其相可了,若異此智,應有分別.何等分別?謂後廣說.無作意等,若無作意,是無分別智,熟眠醉等,無所作意,應成無分別智,然不應許,由離功用,應得無顚倒故.若過尋伺地,是無分別智,第二靜慮已上諸地,一切異生,及聲聞等,應成無分別智,然彼無有無分別智.
만약 표상작용과 감수작용이 멸하는 것이 무분별지라면 이 지의 체상(體相)은 성립하기 어렵다. 무상(無想) 등에서는 심(心)을 여의고 모든 심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이 멸하는 것에 의해서 저 무심(無心)을 설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다.
만약 그 색이 무분별지와 같다면 마땅히 무분별지를 성립시킬 수 없게 된다. 비유하면 대종(大種)과 소조색(所造色)의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만약 진실한 의미[眞義]에 대해서 다른 특징으로 계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분별지라고 말하면, 이 지혜는 무분별성을 성립할 수 없다. 진의에 대한 다른 특징을 계탁하여 이것은 진실이며 무분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017_0236_b_16L若想受滅,是無分別智,此智體相,難可成立,無想等中,離心無有諸心法故,由意識滅,說彼無心,如前已說.若如其色,是無分別智,應不得成無分別智,譬如大種所造色故.若於眞義,異相計度,是無分別智,此智不成無分別性,以於眞義,異相計度,言此是眞,是無分別,有分別故.
017_0236_c_01L【論】설한 바와 같은 무분별지를 성립하는 특징에 대해서 다시 여러 가지 게송을 설한다.
【釋】앞에서 설한 바에 의지하여 무분별지는 간략하게 특징[相]을 성립하고 자세하게 많은 게송을 설하여 순서대로 낱낱이 나타내는 것이다.
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처음 게송을 설한다. 15)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6_c_01L論曰:於此所說,無分別智,成立相中,復說多頌.釋曰:依前所說,無分別智,略成立相,廣說多頌,次第別顯.爲顯自性,故說初頌.論曰:

모든 보살의 자성은
다섯 가지 특징[相]을 멀리 여의네.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진실에 대해서 다르게 계탁하지 않네.
017_0236_c_07L諸菩薩自性,
遠離五種相,
是無分別智,
不異計於眞.

【釋】이 게송에서는 앞의 세 구절에 의해서 다섯 가지 특징을 부정하고 방편으로 무분별지를 현시한다. 네 번째 구절에 의해서 바르게 자성을 설한다.
‘진실에 대해서 다른 계탁을 하지 않네’란 말하자면 진의에 대해서 다르게 계탁하지 않는 것을 자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자성과 자체는 뜻에 차별이 없다. 팔찌는 금을 자성으로 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뒤의 한 게송은 지혜[智]의 의지처를 설한다.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6_c_09L釋曰:於此頌中,由前三句,遮五種相,方便顯示無分別智,由第四句,正說自性.不異計於眞者,謂於眞義,不異計度,以爲自性,自性自體,義無差別,如說環釧金爲自體.次後一頌,說智所依論曰:

모든 보살의 의지처는
마음이 아니면서도 마음이라네.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사량[思義]의 종류가 아니라네.
017_0236_c_16L諸菩薩所依,
非心而是心,
是無分別智,
非思義種類.
017_0237_a_01L
【釋】지혜[智]는 심법이기 때문에 마땅히 마음을 의지해야 한다. 마음을 의지하면서도 무분별인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이라는 것은 곧 사량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아닌 것에 의지하면, 비유하면 뭇 색[衆色]과 같아서 지혜[智]를 성취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결론적인 과실을 해결하기 위해서 절반의 게송을 설하는 것이다.
‘사량의 종류가 아니라네’란 말하자면 무분별지의 의지처는 사량[思義]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心]이 아니다. 또한 마음의 종류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닌 것을 의지처로 삼지 않는다. 마음을 원인[因]으로 삼아 자주 수습하는 세력이 이 지위[位]를 인득(引得)한다. 마음의 종류라고 하는 것은, 곧 지혜[智]가 의지하는 마음은 모든 사량 분별을 벗어난다는 것을 현시한다.
다음으로 지혜[智]의 인연을 나타내는 한 게송이 있다. 16)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6_c_18L釋曰:智是心法,故應依心,依止於心,而無分別,不應道理,心聲卽是思量相故.若依非心,譬如衆色,不應成智.爲解如是雙結過失,故說半頌.非思義種類者,謂無分別智所依非心,非思義故.亦非非心爲所依止,心種類故.以心爲因,數習勢力,引得此位,名心種類.此卽顯示智所依心,出過一切思量分別.次有一頌,顯智因緣.論曰:

모든 보살의 인연은
남의 말을 들어서 훈습이라네.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이치 그대로 작의[如理作意]하는 것이네.
017_0237_a_05L諸菩薩因緣,
有言聞熏習,
是無分別智,
及如理作意.

【釋】인연과 능작(能作)의 인연은 하나의 뜻이다.
‘남의 말을 들어서 훈습[聞薰習]’이란 말하자면 다른 대승에 대한 언음[言音]이 있기 때문에 ‘남의 말’이라고 이름하며, ‘들어서[聞]’란 청문(聽聞)을 말하고, 곧 다른 것이 아닌 저것을 말한다. 이것에 의해서 끌어당긴 공능의 차별을 ‘훈습’이라고 설한다.
그리고 ‘이치 그대로 작의하는 것’이란 말하자면 이것17)을 원인으로 하여 생기게 되는 의언(意言)인 여리작의이다. 이치에 따라서 청정하기 때문에 ‘여리’라고 이름한다.
지혜[智]에는 반드시 경(境)이 있기 때문에 다음으로 한 게송에서 지의 인식대상[所緣]을 설한다. 18)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7_a_07L釋曰:因緣與能作因緣義一.有言聞熏習者,謂有於他大乘言音,故名有言.聞謂聽聞,卽彼非餘,由此所引,功能差別,說名熏習.及如理作意者,謂此爲因,所生意言,如理作意,順理淸淨,故名如理,智必有境故.次一頌,說智所緣.論曰:

모든 보살의 인식대상
가히 말할 수 없는 법성이네.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무아성(無我性)의 진여이네.
017_0237_a_15L諸菩薩所緣,
不可言法性,
是無分別智,
無我性眞如.
017_0237_b_01L
【釋】‘가히 말할 수 없는 법성이네’란 말하자면 가히 말할 수 있는 법은 무자성의 성품이며 이것은 가히 말할 수 있는 변계소집자성을 여읜 성품이라는 뜻이다. ‘무아성의 진여이네’란 이것의 뜻을 성립시키기 위해 그것으로 하여금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모든 보특가라와 모든 법의 무성(無性)이 드러나게 되는 진여로서 증익과 손감의 2변을 벗어나며 무분별지의 인식대상의 경계이다.
인식대상이 있으면 반드시 인식작용[行相]19)이 있기 때문에, 다음으로 한 게송에서 지혜[智]의 인식작용[行相]을 나타낸다. 20)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7_a_17L釋曰:不可言法性者,謂可言法,無自性性,是離可言,遍計所執自性性義.無我性眞如者,爲成此義,令其明了,卽是一切補特伽羅諸法無性,所顯眞如,解脫增益,損減二邊,無分別智,所緣境界,有所緣法,定有行相故.次一頌顯智行相.論曰:

모든 보살의 인식작용은
다시 인식대상 안에서이네.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저 알아야 할 바[所知]는 무상(無相)이네.
017_0237_b_02L諸菩薩行相,
復於所緣中,
是無分別智,
彼所知無相.

【釋】인식대상 가운데 그 모습과 흡사하게 행하기 때문에 ‘인식작용[行相]’이라고 이름한다. 무분별지는 진여의 경계에서 그 모습과 흡사하게 행하는 것이다.
‘저 알아야 할 바는 무상(無相)이네’란 말하자면 이 지혜가 진여의 경계에 대해서 짓는바 행상을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설명하면 무분별지는 진여의 경계를 반연하여 모든 모습[一切相]과 작의행상(作意行相)을 여읨으로써 행상을 삼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두 게송을 설하는 것은 위의 인식대상과 지혜의 인식작용에 대해 해석하여 의심스러운 비난을 대변하는 것이다.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7_b_04L釋曰:於所緣中,相似而行,故名行相.無分別智,於眞如境,相似而行.彼所知無相者,謂說此智,於眞如境,所作行相,此意說言,無分別智,緣眞如境,離一切相,作意行相,以爲行相.次說二頌,於上所緣,及智行相,釋通疑難.論曰:

상응(相應)은 자성의 뜻이며
분별되는 것[所分別]은 다른 것이 아니네.
글자가 전전하여 상응하니
이것을 상응의 뜻이라고 하네.
017_0237_b_11L相應自性義,
所分別非餘,
字展轉相應,
是謂相應義.

저 능전(能詮)을 떠나서
지혜[智]는 소전(所詮)에 대해서 전전하지 않네.
나타남[詮]이 아니고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은 말할 수 없네.
017_0237_b_13L非離彼能詮,
智於所詮轉,
非詮不同故,
一切不可言.
017_0237_c_01L
【釋】만약 실제로 분별되는 것의 대상이 없다면, 어떤 분별되는 것으로 인해서 이러한 말을 설하는가? ‘상응은 자성의 뜻이며 분별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네’란 말하자면 모든 문자는 전전하면서 상응하여 끊이지 않고 드러난다. 두루 계탁하는 마음 등은 이 가립을 반연하여 두루 계탁함의 대상을 이루어 분별되는 것이 된다. 특별하고 진실한 대상을 분별되는 것이라고 하지는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네’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문자가 상속하여 드러나는 것이 없다면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든 법은 다 가히 말할 수 없는가? 이 이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저 능전을 떠나서 지혜[智]는 소전에 대해서 전전하지 않네’ 등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만약 진실한 대상에 대해 가히 언설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능전의 명칭을 여의고도 저것에 대해서 마땅히 말과 흡사한 지혜가 일어남이 있어야 한다. 아직 능전의 명언(名言)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았다면 소전의 대상에서 이러한 지혜가 일어남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히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37_b_14L釋曰:若實無有所分別義,何所分別?故說是言:相應自性義所分別非餘等,謂諸文字,展轉相應,宣唱不絕,遍計心等,緣此假立,成遍計義,爲所分別,無別實義,爲所分別,故言非餘.若無文字,相續宣唱,分別無故,云何諸法,皆不可言?爲顯此理,故說是言:非離彼能詮智於所詮轉等.若實有義可言說者,離能詮名,於彼應有似言智起.非未解了能詮名言於所詮義有此智起,故不可言.
혹자는 바깥의 대상은 비록 반드시 실제로 있지만 요컨대 능전을 기다려서 소전의 지혜가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나타남이 아니고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설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 능전이 아닌 것이다. 능전의 명칭과 소전의 대상은 별도의 모습[別相]을 취하기 때문에 그 모습은 각각 다르다.
어떻게 반드시 실제의 전표(詮表)를 성립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말할 수 없네’란 이러한 도리에 의해서 모든 일체의 능전과 소전은 모두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분별지는 누가 맡아 지니는[任持] 것인가?21)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7_c_02L或謂外義,雖定實有,要待能詮`所詮智起.爲遮此故,說如是言:非詮不同故.謂相異故,非實能詮,以能詮名與所詮義別相取故,其相各異,云何得成定實詮表?一切不可言者,由此道理,所有一切能詮`所詮,皆不可言.無分別智,何所任持?論曰:

모든 보살이 맡아 지니는 것이니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후득지혜의 모든 행을
나아가게[進趣] 하고 증장시키기 때문이네.
017_0237_c_09L諸菩薩任持,
是無分別智,
後所得諸行,
爲進趣增長.

【釋】‘후득지혜의 모든 행’이란 말하자면 무분별후득지에서 얻은바 갖가지 보살의 모든 행이다. 이 행은 모두 지혜를 의지처로 삼는다.
‘나아가게 하고 증장시키기 때문이네’란 말하자면 보살의 모든 행을 증장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맡아 지녀서 반드시 쓸 곳이 있음을 설하는 것이다. 전도가 없기 때문에 능히 모든 행을 지닌다.
무분별지는 무엇을 돕는 짝[助伴]으로 삼는가? 만약 오직 하나만이 있다면 마땅히 쓸데없게 된다. 22)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7_c_11L釋曰:後所得諸行者,謂無分別後得智中,所得種種菩薩諸行,此行皆以智爲所依.爲進趣增長者,謂爲增長菩薩諸行,此說任持有要所用,無顚倒故,能持諸行.無分別智,誰爲助伴?若唯有一,應無所能.論曰:

모든 보살의 돕는 짝[助件]을
두 가지 도라고 설하며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다섯 가지 바라밀다[到彼岸]의 성품이라네.
017_0237_c_18L諸菩薩助伴,
說爲二種道,
是無分別智,
五到彼岸性.
017_0238_a_01L
【釋】‘두 가지 도’란 첫째는 자량도(資糧道)이며, 둘째는 의지도(依止道)이다. 다섯 가지 바라밀다를 자성으로 삼는다. 이 가운데 앞의 네 가지 바라밀다는 자량도이며, 다섯 번째 정려바라밀다는 의지도이다. 만약 선정의 마음[定心] 가운데 있다면 앞에서 설한 네 가지 바라밀다의 모든 선(善)이 잘 도와서[資助] 곧 무분별지를 능히 키운다. 이러한 지혜를 혜바라밀다라고 한다.
나아가 아직 불과를 얻지 못한 이래로 무분별지는 미래에 어떤 곳에서 이숙과(異熟果)를 초감[感]하는가?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7_c_20L釋曰:二種道者,一資糧道`二依止道,五到彼岸,以爲自性.此中前四波羅蜜多,是資糧道,第五靜慮波羅蜜多,是依止道.若在定心,前說四種波羅蜜多,諸善資助,便能生長無分別智,此智名慧波羅蜜多.乃至未得佛果已來,無分別智,當於何處,感異熟果?論曰:

모든 보살의 이숙은
부처님의 두 모임[二會] 중에 있네.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가행과 증득에 말미암네. 23)
017_0238_a_05L諸菩薩異熟,
於佛二會中,
是無分別智,
由加行證得.

【釋】‘이 두 모임 중’이란 말하자면 모든 부처님의 변화신과 수용신의 모임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가행과 증득에 말미암네’란 말하자면 능히 이숙과를 초감하는 뜻을 나타내며, 이것은 이숙의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능히 저것24)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즉 증상과(增上果)를 짐짓 이숙이라고 이름할 뿐이며 이것에 의해서 도와 훈습하여 나머지 유루의 업으로 하여금 이숙을 초감하게끔 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세우는 것이다.
만약 가행의 무분별을 닦을 경우에는 모든 부처님께서 나투시게 되는 변화신의 여러 모임에서 태어나게 된다. 만약 무분별지를 증득할 경우에는 곧 모든 부처님께서 나투시게 되는 수용신의 여러 모임에서 태어나게 된다.
무분별지는 무엇을 등류(等流)로 삼는가?25)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8_a_07L釋曰:二會中者,謂於諸佛變化`受用二身會中.由加行證得者,謂顯能感異熟果義.此非異熟因,能對治彼故,卽增上果,假名異熟.由此資熏,餘有漏業,令感異熟,故立此名.若修加行無分別時,生在諸佛所現變化身衆會若時證得無分別智,便生諸佛所現受用身衆會中.無分別智,誰爲等流?論曰:

모든 보살의 등류는
다음다음 생 가운데 있으며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자체가 전전하며 더욱더 수승해지네.
017_0238_a_16L諸菩薩等流,
於後後生中,
是無分別智,
自體轉增勝.

【釋】앞에 앞의 생 가운데 무분별지는 다음다음의 태어나는 곳[生處]에 전전하며 더욱더 수승해진다. 이것이 등류과이다.
무분별지의 벗어남[出離]은 어떠한가?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8_a_18L釋曰:前前生中,無分別智,後後生處,展轉增勝,是等流果.無分別智,出離云何?論曰:
모든 보살은 벗어나서[出離]
증득[得]과 성취[成辯]에 상응하니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10지에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38_a_22L諸菩薩出離,
得成辦相應,
是無分別智,
應知於十地.
017_0238_b_01L
【釋】처음 극희지에서 견도에 들어갈 때 모든 지위[一切地]의 무분별의 이치를 보아서 처음으로 벗어남[出離]을 얻고, 후에 수도 중에서 드디어 모든 지위를 얻어 성취와 상응하게 된다.
무분별지는 무엇을 구경(究竟)으로 삼는가?26)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8_b_01L釋曰:初極喜地,入見道時,見一切地,無分別理.初得出離,後修道中,方得諸地,成辦相應,無分別智.誰爲究竟?論曰:
모든 보살은 궁극적으로
청정한 3신(身)을 얻으며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최상의 자재를 얻는 것이네.
017_0238_b_05L諸菩薩究竟,
得淸淨三身,
是無分別智,
得最上自在.

【釋】‘청정한 3신’이란 초지에서 비록 3신을 얻지만 아직 청정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제10지에 이르러 마침내 청정을 얻게 되니, 드디어 구경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이때를 청정한 3신을 얻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최상의 자재를 얻는 것이네’란 말하자면 이때 무분별지는 단지 청정한 3신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또한 최상의 열 가지 자재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분별지는 무엇과 같아서, 무엇에 따라서, 무엇에 의해서 잡염이 없는가?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8_b_07L釋曰:淸淨三身者,謂初地中,雖得三身,而未淸淨,至第十地,乃得淸淨,方名究竟,故說爾時,得淨三身.得最上自在者,謂於爾時,無分別智,非但獲得淸淨三身,亦得最上十種自在,故名究竟無分別智.如何從何由何無染?論曰:

허공과 같아서 잡염이 없으며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갖가지 매우 심한 악과
오직 믿고 뛰어나게 이해하는 것27)에 의하네. 28)
017_0238_b_14L如虛空無染,
是無分別智,
種種極重惡,
由唯信勝解.

【釋】처음의 무엇과 같아서 잡염이 없음을 얻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허공과 같아서 잡염이 없으며’라고 답하는 것이다.
다음의 무엇에 따라서 잡염이 없음을 얻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갖가지 매우 심한 악’이라고 답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무엇에 의해서 잡염이 없음을 얻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오직 믿고 뛰어나게 이해하는 것에 의하네’라고 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직 믿음으로써 그리고 혜(慧)의 뛰어난 이해로써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잡염이 없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8_b_16L釋曰:初問如何得無染者,答如虛空無染.次問從何得無染者,答種種極重惡.後問由何得無染者,答曰唯信勝解,謂唯由信由慧勝解,以爲因故,而得無染.論曰:

허공과 같아서 잡염이 없으며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모든 장애를 벗어나서
증득과 성취에 상응하네. 29)
017_0238_b_22L如虛空無染,
是無分別智,
解脫一切障,
得成辦相應.
017_0238_c_01L
【釋】‘모든 장애를 벗어나서’란 번뇌장과 소지장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증득과 성취에 상응하네’란 말하자면 초지에 있어서는 증득과 상응하고 내지 불지[佛地]에 있어서는 성취와 상응한다는 것이다.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8_c_01L釋曰:解脫一切障者,解脫煩惱,及所知障.得成辦相應者,謂在初地,與得相應,乃至佛地,成辦相應.論曰:

허공과 같아서 잡염이 없으며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항상 세간에 행해도
세간법에 물들게 되지 않네.
017_0238_c_05L如虛空無染,
是無分別智,
常行於世閒,
非世法所染.

【釋】‘항상 세간에 행해도 세간법에 물들게 되지 않네’란 이것은 모든 생처(生處)에 두루 태어나도 이로움[利] 등의 세간의 8법에 물들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치 홍련화가 출세간에 포함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세 게송은 세 가지 지혜[智]에 의해 얻게 되는 뛰어난 이로움을 현시하였다.
가행과 근본과 후득의 세 가지 무분별지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30)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8_c_07L釋曰:常行於世閒,非世法所染者,此顯遍生一切生處,利等世閒八法不染,如紅蓮華,出世閒攝.如是三頌,顯示三智所得勝利.加行`根本`後得三種無分別智,有何差別?論曰:

벙어리가 대상[義]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고
벙어리가 바르게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며
벙어리가 아닌 이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니
세 가지 지혜[智]의 비유는 이와 같네
017_0238_c_13L如瘂求受義,
如瘂正受義,
如非瘂受義,
三智譬如是.

어리석은 이가 대상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이가 바르게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며
어리석지 않은 이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니
세 가지 지혜[智]의 비유는 이와 같네
017_0238_c_15L如愚求受義,
如愚正受義,
如非愚受義,
三智譬如是.

5식(識)이 대상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고
5식이 바르게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며
말나(末那)31)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니
세 가지 지혜[智]의 비유는 이와 같네.
017_0238_c_16L如五求受義,
如五正受義,
如末那受義,
三智譬如是.

아직 논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논을 구하는 것과 법과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네.
차례대로 세 가지 지혜를 비유하니
가행의 지혜 등임을 마땅히 알라.
017_0238_c_17L如未解於論,
求論受法義,
次第譬三智,
應知加行等.

【釋】세 가지 지혜의 행상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와 같은 비유를 설하는 것이다.
‘벙어리가 대상[義]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고’란 비유하면 벙어리가 경계를 받아들이려고 해도 아직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또한 능히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가행의 무분별지는 진여를 증득하려 해도 아직은 증득할 수 없으며, 고요하여 언설이 없음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38_c_19L釋曰:爲顯三智行相差別,說如是喩.如瘂求受義者,譬如瘂人求受境界,而未能受,亦不能說如是加行無分別智,求證眞如,而未能證,寂無言說,當知亦爾.
017_0239_a_01L‘벙어리가 바르게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며’란 비유하면 벙어리가 바르게 경계를 받아드려도 말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근본의 무분별지는 바르게 진여를 증득하여 모든 희론을 여읨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벙어리가 아닌 이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니’란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 모든 경계를 받아들이고 또한 말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후득의 무분별지는 진여현증(眞如現證)의 경계를 반조(反照)하여 능히 언교(言敎)32)를 일으킴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도리에 의해서 ‘어리석은 이……이와 같네’의 게송을 해석하는 것이다.
017_0239_a_01L如瘂正受義者,譬如瘂人正受境界,無所言說,如是根本無分別智,正證眞如,離諸戲論,當知亦爾.如非瘂受義者,如不瘂人,受諸境界,亦起言說如是後得無分別智,反照眞如,現證境界,能起言教,當知亦爾.由此道理,釋如愚頌.如五求受義者,譬如五識求受境界,雖有所求,而無分別,如是加行無分別智,當知亦爾.
‘5식이 대상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고’란 비유하면 5식(識)이 경계를 받아들여서 비록 구하는 바가 있어도 분별이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행의 무분별지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5식이 바르게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며’란 비유하면 5식이 바르게 경계를 받아들여서 모든 분별을 여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근본의 무분별지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말나(末那)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니’란 비유하면 의식이 능히 경계를 받아들여서 또한 능히 분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후득의 무분별지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239_a_09L如五正受義者,譬如五識正受境界,離諸分別,如是根本無分別智,當知亦爾.如末那受義者,譬如意識能受境界,亦能分別,如是後得無分別智,當知亦爾.
‘아직 논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논을 구하는 것과 법과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네’란 아직 논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니, 논을 외우려고 해도 아직은 외울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행의 무분별지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논을 복습하고 문자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근본의 무분별지도 또한 이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미 듣고 익혀서 법과 대상을 통달하는 것과 같이, 후득의 무분별지 또한 이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여러 가지 비유에 의해서 수(數)의 순서대로 가행 등의 세 가지 지혜의 차별을 비유한다.
다음으로 근본과 후득의 두 가지에 대한 비유의 차별을 나타낼 것이다. 33)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9_a_14L如未解於論求論受法義者,如未解論,求誦於論,而未能誦是加行無分別智,當知亦爾.如溫習論,領受文字,如是根本無分別智,當知亦爾.如已聽習通達法義,如是後得無分別智,當知亦爾.由如是等,衆多譬喩,如數次第,喩加行等三智差別.次顯根本`後得二智,譬喩差別.論曰:

사람이 바르게 눈을 감는 것과 같은 것
이것이 무분별지이며
곧 저 사람이 다시 눈을 뜨니
후득지 또한 이와 같다네
017_0239_a_22L如人正閉目,
是無分別智,
卽彼復開目,
後得智亦爾.
017_0239_b_01L
마땅히 알지니, 허공과 같은 것
이것이 무분별지이며
거기에서 물질의 모습[色相]을 보니
후득지 또한 이와 같다네.
017_0239_b_01L應知如虛空,
是無分別智,
於中現色像,
後得智亦爾.

【釋】이 두 가지 게송에 의해서 근본과 후득의 차별을 현시한다. 눈을 감는 것과 눈을 뜨는 것, 허공과 색상, 두 가지 지혜는 모두 무분별이고 유분별이며, 평등이고 불평등임을 모두 나타내는 것이다. 가행의 지혜는 아직 증득한 것이 있지 않기 때문에 생략하여 설하지 않는다. 또한 가행의 지혜는 근본 무분별지[本智] 원인이며, 그 후득지는 근본 무분별지[本智]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선 무분별지가 짓는바 일[所作事]을 이루는 것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다. 무분별지는 닦아서 불과(佛果)를 성취했으니 이미 무분별이다. 어떻게 능히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지을 수 있는가?34)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9_b_02L釋曰:由此二頌顯示根本`後得差別.閉目開目,虛空色像,俱顯二智,是無分別`是有分別?是其平等,是不平等,其加行智,未有所證,故略不說.又加行智,是本智因,其後得智,是本智果,是故且辨無分別智,成所作事.無分別智,修成佛果,旣無分別,云何能作利有情事?論曰:

여의주[末尼]35)와 하늘의 음악[天樂]과 같이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일을 이루네.
갖가지 불사(佛事)를 이루는 데에
항상 생각을 여의는 것도 이와 같네.
017_0239_b_11L如末尼天樂,
無思成自事,
種種佛事成,
常離思亦爾.

【釋】지금 이 게송에서 저 여의주와 하늘의 음악의 두 가지 비유를 인용하여 소득의 무분별지를 성립시킨다. 비록 무분별지는 의식적인 노력을 짓지 않지만 갖가지 일을 이루니, 마치 여의주와 하늘의 음악과 같다. 비록 ‘나는 마땅히 빛을 내겠다. 나는 마땅히 소리를 내겠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울러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저 유정에 생기는 복업과 의요의 세력에 의해서 두드리고 연주[擊奏]를 기다리지 않고 갖가지 빛을 내며 갖가지 소리를 낸다.
모든 불보살의 무분별지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비록 분별을 여의고 의식적인 노력을 짓지 않는다고 해도 능히 저 교화해야 할 유정의 복의 힘과 의요에 따라서 갖가지 이롭고 즐거운 일을 현전에 갖가지로 짓는다.
017_0239_b_13L釋曰:今此頌中,引彼末尼`天樂兩喩,成立所得無分別智.雖無分別不作功用,成種種事,如如意珠,及以天樂,雖無是念:我當放光`我當出聲,竝無思故.然由生彼有情福業意樂勢力,不待擊奏放種種光`出種種聲.諸佛菩薩,無分別智,當知亦爾,雖離分別,不作功用,而能隨彼所化有情福力意樂,現作種種利樂事轉.
017_0239_c_01L다음에 마땅히 무분별지의 모든 깊고 깊음[甚深]을 현시해야 한다. 36) 무분별지의 경계는 어떠한가? 분별의 의타기성을 반연하는 것인가, 다른 경계를 반연하는 것인가? 자체(自體) 또한 이와 같아서 지혜인가, 지혜가 아닌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만약 분별의 의타기성을 반연한다면 어떻게 무분별지를 이룰 수 있겠는가? 만약 다른 경계를 반연한다면 다른 경계는 반드시 없는데, 마땅히 어떤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겠는가? 만약 이것이 그 지혜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무분별지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모든 과실을 떠나기 위해서 게송을 설하는 것이다.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9_b_22L次當顯示無分別智,所有甚深.無分別智境界云何?爲緣分別依他起性`爲緣餘境,自體亦爾?爲智非智?若爾何失?若緣分別依他起性,云何得成無分別智?若緣餘境,餘境定無,當何所緣?若是其智,應有所知.若是非智,云何得名無分別智?爲離如是一切過失,故說頌言.論曰:

이것이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지혜가 아니면서도 이것은 지혜이네
경계와 차별이 없으면
지혜는 무분별을 이루네.
017_0239_c_08L非於此非餘,
非智而是智,
與境無有異,
智成無分別.

【釋】무분별지는 분별의 의타기성을 반연하지 않으니, 왜냐하면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별을 반연하여 무분별을 성취하지도 않으니, 또한 다른 것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지 않는다. 즉 이 분별의 법성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법과 법성은 어떤 경우에는 하나이고, 어떤 경우에는 달라서 모두 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일정하게 설할 수 없다. 분별의 경계를 반연하여도 분별의 경계가 아니다. 자체 또한 이와 같아서 결정적으로 지혜라고 말할 수 없다. 가행의 지와 후득의 지와 같은 것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지혜가 아니라고 설할 수 없다. 가행의 지혜를 선인(先因)으로 삼기 때문이다.
017_0239_c_10L釋曰:無分別智,不緣分別依他起性,無分別故.非緣分別,成無分別,亦不緣餘以爲境界,以卽緣此分別法性,爲境界故.法與法性,若一若異,俱不可說,是故此智,不可定說,緣分別境`非分別境.自體亦爾,不可說言,決定是智,如加行智,及後得智分別無故.亦不可說,決定非智,以加行智,爲先因故.
017_0240_a_01L‘경계와 차별이 없으면 지혜는 무분별을 이루네’란 이것은 능지(能知)이고 이것은 소지(所知)라고 분별할 수 없으니,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혜와 경계는 차별의 모습이 없으니, 비유하면 허공과 허공 속에 있는 광명과 같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무분별이 성취된다.
나머지 계경에서 “모든 법성은 무분별이다”라고 설하는 것을 지금 마땅히 해석해야 한다.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39_c_19L與境無有異智成無分別者,不可分別此是能知`此是所知.能取`所取分別無故.此智與境無差別相,譬如虛空與虛空中,所有光明,是故此智成無分別.餘契經中,說一切法性無分別,今當解釋.論曰: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 모든 법은
본성이 무분별이라네.
분별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지도 없네.
017_0240_a_02L應知一切法,
本性無分別,
所分別無故,
無分別智無.

【釋】‘분별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란 분별되는 것인 변계소집성의 대상은 영원히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계경에서 모든 법성은 무분별이라고 설한다. 만약 모든 법의 본래 자성이 무분별이라면, 어째서 모든 유정의 부류는 본래부터 의식적인 노력을 짓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탈할 수 없는가? 무분별지가 저들에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유정에게는 모든 법의 무분별의 성품에 대한 진지(眞智)를 현증(現證)하는 것이 본래부터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 등은 모든 법의 무분별의 성품에 대한 종성(種性)을 원인으로 삼아 증지(證智)가 이미 생겨났다. 이러한 도리에 의해서 모든 보살 등은 능히 해탈을 얻어도 나머지 유정은 그렇지 않다. 다음으로 마땅히 가행의 지혜 등에 각각 세 가지, 다섯 가지 차별이 있음을 현시해야 한다.
017_0240_a_04L釋曰:所分別無故者,由所分別遍計所執義永無故,餘契經中說,一切法性無分別.若一切法本來自性無分別者,何不一切有情之類,從本已來,不作功用,自然解脫?無分別智,彼無有故.由彼有情,於一切法無分別性,現證眞智,本來未生,諸菩薩等,於一切法無分別性,種性爲因,證智已生,由此道理,諸菩薩等,能得解脫,非餘有情.次當顯示,加行智等,各有三種`五種差別.
017_0240_b_01L【論】이 가운데 가행(加行)의 무분별지에 세 가지가 있으니,37) 말하자면 인연(因緣)과 이끌어 냄[引發]과 자주 익힘[數習]으로 인한 차별 때문이다.
【釋】이 가행의 지혜가 생겨나는 차별은 세 가지 힘에 의한다. 첫째는 인연의 힘이고, 둘째는 이끌어 내는 힘이며, 셋째는 자주 익히는 힘이다. “인연의 힘”이란 종성의 힘을 말한다. 어떤 종성은 강한 반연을 만나면 속히 가행을 일으키니, 이와 같은 가행은 종성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게 된다고 한다. 종성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아득한 옛적부터 6처가 뛰어나서 능히 불과(佛果)를 얻는 법이(法爾)의 공능이다.
“이끌어 내는 힘”이란 말하자면 전생에 이미 닦은 것을 원인으로 하여 가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자주 익히는 힘”이란 말하자면 현재 생에서 자주자주 수습하여 사용의 힘[士用力]38)에 의해서 가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017_0240_a_15L論曰:此中加行無分別智,有三種,謂因緣`引發`數習生差別故.釋曰:此加行智,生起差別,由三種力:一因緣力`二引發力`三數習力.因緣力者,謂種性力.或有種性,會遇强緣,速起加行,如是加行,種性爲因,而得生起.言種性者,謂無始來,六處殊勝,能得佛果,法爾功能.引發力者,謂前生中,已習爲因,發起加行.數習力者,謂現在生數數修習,由士用力,發起加行.
【論】근본의 무분별지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기쁘게 만족함[喜足]과 전도되지 않음[無顚倒]과 희론이 없음[無戱論]의 무분별지의 차별 때문이다.
017_0240_b_03L論曰:根本無分別智,亦有三種,謂喜足`無顚倒`無戲論無分別差別故.
【釋】기쁘게 만족함의 무분별이란 말하자면 하열한 대상에 대해서 기뻐 만족함[喜足]을 내며 나중의 승진(勝進)에 대해서 희구하지 않기 매문에 무분별이라고 이름한다. 세간의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의 두 가지 지혜를 얻어 조그마한 대상에 대해서 어떤 경우에는 이미 믿고 이해하며, 어떤 경우에는 이미 결정적으로 알아서 곧 기쁨을 내는 것과 같다. 어떤 경우에는 세간의 수혜(修慧)를 이미 얻어서 제1유(有)를 증득하고 거친 번뇌가 쉬는 것을 거기에서는 구경의 해탈이라고 집착하여 곧 기쁨을 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부류를 모두 기쁘게 만족함의 무분별지라고 이름한다.
017_0240_b_05L釋曰:喜足無分別者,謂於下劣義,而生喜足,於後勝進,不悕求故,名無分別.如得世閒,聞思兩智,於少分義,或已信解,或已決了,便生喜足.或如已得,世閒修慧,證第一有,麤煩惱息,於中執,爲究竟解脫,便生喜足.如是等類,皆名喜足無分別智.
전도되지 않음의 무분별이란 성스러운 제자 등이 수혜에 의해서 고(苦) 등의 제(諦)에 대해 무상(無常) 등의 네 가지 전도가 없는 행을 일으키고 상(常) 등의 전도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전도되지 않음의 무분별지라고 이름한다.
희론이 없음의 무분별이란 말하자면 모든 보살이 무상(無常) 등에 대해서 또한 분별하지 않고, 이에 보리에 이르러 또한 희론을 여읜다는 것이다. 모든 법은 무분별의 이치에 의해서 모든 명언의 도(道)를 벗어나기 때문이며, 모든 세간 지혜의 경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희론이라는 명칭은 세속의 소리이며 세속의 지혜에 포함된다. 이것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희론이 없음의 무분별지라고 이름한다.
017_0240_b_12L無顚倒無分別者,謂聖弟子等,彼由修慧,於苦等諦,起無常等,四無倒行,不起常等,顚倒分別,名無顚倒無分別智.無戲論無分別者,謂諸菩薩,於無常等,亦不分別,乃至菩提,亦離戲論,由一切法無分別理,出過一切,名言道故`超度一切世智境故.由戲論名是世俗聲`世俗智攝,遠離此故,名無戲論無分別智.
【論】후득의 무분별지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통달(通達)ㆍ수념(隨念)ㆍ안립(安立)ㆍ화합(和合)ㆍ여의 사택(如意思擇)의 차별 때문이다.
017_0240_b_21L論曰:後得無分別智,有五種:謂通達`隨念`安立`和合`如意思擇差別故.
017_0240_c_01L【釋】이 후득지가 짓는 것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 다섯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통달 등이며 사택이라는 말은 그 하나하나에 모두 해당된다.
‘통달사택’은 진리를 결정하고 진리를 현관하기 때문에 통달이라고 이름한다. 후득지에 의해서 이와 같이 얻게 되는 통달을 사택한다. 말하자면 즉 거기에서 스스로 이와 같은 일은 이러하다고 안으로 관찰한다. 그러므로 통달사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수념사택’이란 말하자면 나중에 통달을 수념하고, 나는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을 통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념사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017_0240_b_23L釋曰:此後得智所作別故,有其五種,謂通達等.思擇之聲,一一皆有.通達思擇者,於眞決定`於眞現觀,故名通達.由後得智思擇,如是所得通達,謂卽於中,自內審察,此事如是,是故說名通達思擇.隨念思擇者,謂於後時,隨念通達,念言:我曾通達是事.是故說名隨念思擇.
‘안립사택’이란 여기39)에서 나와서 통달한 바대로 남을 위해서 선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립사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화합사택’이란 말하자면 총상관(總相觀)으로 모든 법을 반연하며 이 관에 의하여 진취(進趣)하여 전의(轉依)하는 것이다. 혹은 전의하고 나서 거듭 이 관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화합사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여의사택’이란 말하자면 지혜가 현전하여 사유하는 대로 모든 것이 뜻대로 되어 땅들을 금 등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의사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 사택이라는 소리는 뜻에서 그 지혜를 설한다. 앞에서는 ‘모든 법은 본성이 무분별이라네. 분별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네’라고 설하였다. 어떻게 분별되는 것인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바가 없는지 알 수 있는가? 저기에 존재하는 바가 없음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여러 게송을 설하는 것이다.
017_0240_c_08L安立思擇者,謂從此出,如所通達,爲他宣說,是故說名安立思擇.和合思擇者,謂摠相觀緣一切法,由此觀故,進趣轉依`或轉依已,重起此觀,是故說名和合思擇.如意思擇者,謂智現前,隨所思惟一切如意,如令地等,變成金等,是故說名如意思擇.此思擇聲,意說其智.前說一切法本性無分別,所分別無故.云何得知所分別義實無所有?爲欲成立彼無所有,故說多頌.

【論】게송으로 논한다.
017_0240_c_18L論曰:

아귀와 축생과 사람과 하늘은
각기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똑같은 현상[事]에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대상[義]은 진실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하네.
017_0240_c_19L鬼傍生人天,
各隨其所應,
等事心異故,
許義非眞實.

과거의 일들과
꿈속의 형상과 두 가지 영상40)에서
인식대상은 실제로 있지 않지만
경계의 모습은 성취하네.
017_0240_c_21L於過去事等,
夢像二影中,
雖所緣非實,
而境相成就.

만약 대상에서 대상의 성품을 성취하면
무분별지는 없으며
이것이 만약 없다면 불과를
증득함이 도리에 맞지 않네.
017_0240_c_22L若義義性成,
無無分別智,
此若無佛果,
證得不應理.
017_0241_a_01L
자재를 얻은 보살은
뛰어난 이해의 힘에 말미암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대로 땅 등을 성취하니
선정을 얻은 이 또한 이와 같네.
017_0240_c_23L得自在菩薩,
由勝解力故,
如欲地等成,
得定者亦爾.

간택(簡擇)을 성취한 이와
지혜[智]가 있는 이와 선정을 얻은 이는
모든 법을 사유하여
뜻과 같이 모두 현현하네.
017_0241_a_02L成就簡擇者,
有智得定者,
思惟一切法,
如義皆顯現.

무분별지가 행하면
모든 대상은 모두 나타나지 않으니
마땅히 대상은 없으며
이것에 의해 또한 식(識)도 없다고 알아야 하네.
017_0241_a_03L無分別智行,
諸義皆不現,
當知無有義,
由此亦無識.

【釋】‘아귀와 축생과 사람과 하늘은’ 등이란 말하자면 사람 등은 물이 있다고 보는 곳에 대해서 아귀는 육지나 고원이라고 보며, 사람이 똥이 있는 더러운 곳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서 축생은 깨끗하고 맛있다고 보며, 사람이 깨끗하지 못한 물건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서 아귀와 축생은 청정한 것이라고 보며, 사람이 깨끗하고 맛있다고 보는 음식에 대해서 모든 천(天)은 냄새나고 더러워서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서로 다른 현상[事]이 동일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변계소집의 대상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경계가 없는데 식이 현행할 수 있는가?
무엇 때문에 힐난하여 묻는가? 너희 경부사(經部師)는 과거와 미래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떻게 거기에 지혜가 있어서 전변할 수 있는가?
017_0241_a_04L釋曰:鬼`傍生`人`天等者,謂於人等,見有水處,餓鬼見,是陸地高原於人所見,有糞穢處,傍生見,爲淨妙飮食人所見,不淨物中,餓鬼`畜生見,爲淸於人所見,淨妙飮食,諸天見,爲臭穢不淨.非相違事同一處有,故知遍計所執義無.若無有義,云何無境,識得現行?何故詰問?汝經部師,過去`未來境界非有,云何於中,得有智轉?
또한 꿈속에서 꿈의 형상은 실제로 없는데 어떻게 지혜가 일어나는가?
좁은 실내에 엎드려 자는데 한곳에서 꿈속의 지혜[智]의 인식대상인 진실한 산하(山河)의 형상 등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
또한 아직 일찍이 스스로 머리를 베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꿈에서 보는가?
전생의 숙주(宿主)의 일을 종합적으로 기억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거울[鏡] 등과 삼마지 중에서 행해지는 두 가지 영상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확실하게 마음에 현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스스로 마음의 영상을 반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경계의 모습은 성취하네’란 과거와 미래 등의 경계를 종합적으로 맺어 비록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마음에서 경계의 모습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017_0241_a_13L於夢中,夢像實無,云何智起?非隘室中,偃臥一處,容有夢智所緣眞實山河象等.又未曾經自斷其首,云何夢見,非不得通憶宿住事?又於鏡等三摩地中,所行二影,非眞實有,云何了然,當心顯現?故知自緣心之影像.而境相成就者,摠結過去`未來等境,雖非實有,而於自心,境相成就.
017_0241_b_01L‘만약 대상에서 대상의 성품을 성취하면 무분별지는 없으며’란 만약 모든 경계인 대상에서 대상의 성품을 진실로 성취하면 무분별지는 마땅히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불과를 증득함이 도리에 맞지 않네’란 이 무분별지의 체가 만약 없다면 불과를 증득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근본을 해치는 과실을 마땅히 성취한다. 그러므로 분별되는 것인 대상은 반드시 진실을 성취하지 못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이 경계인 대상은 반드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자재를 얻은 보살’이란 대자재를 얻은 보살들을 말한다.
017_0241_a_21L若義義性成無無分別智者,若諸境義,義性成實,無分別智,應不得成,分別有故.此若無,佛果證得,不應理者,此無分別智體若無,證得佛果,不應道理,是則應成害本過失.是故應知所分別義,定非成實.又此境義,定非實有.何以故?得自在菩薩者,謂諸菩薩,得大自在.
‘뛰어난 이해의 힘에 말미암기 때문에’란 의해(意解)의 힘에 말미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대로 땅 등을 성취하니’란 말하자면 땅 등을 변화시켜 금 등으로 만드는 것이다.
‘선정을 얻은 이 또한 이와 같네’란 말하자면 보살을 제외한 나머지 성문들로서 정려를 얻은 자이다.
‘간택을 성취한 이’란 말하자면 혜(慧)를 완벽하게 이룬 자이다.
‘지혜[智]가 있는 이’란 말하자면 원만한 정지(正智)를 성취하는 것과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보살을 지혜가 있는 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선정을 얻은 이’란 삼마지를 얻은 자이다.
‘모든 법을 사유하여’란 말하자면 바르게 모든 계경의 응송(應頌) 등의 법을 사유하는 것이다.
017_0241_b_06L由勝解力故者,由意解力.如欲地等成者,謂變地等,令成金等.得定者亦爾者,謂除菩薩,餘聲聞等,得靜慮者.成就簡擇者者,謂慧成滿者.言有智者,謂與成滿正智相應,是故菩薩,名有智者.得定者者,得三摩地.思惟一切法者,謂正思惟,一切契經,應頌等法.
‘뜻과 같이 모두 현현하네’란 말하자면 갖가지 무아 등의 행으로서 계경 등의 법을 여여하게 사유하듯 이와 같이 그 뜻을 현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즉 이러한 여리작의의 마음은 그 소취와 능취의 양상과 흡사하게 나타나며 모든 밖의 대상은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분별지가 행하면 모든 대상은 모두 나타나지 않으니’란 여기에서 마땅히 앞에 설한 것을 이어서 대상은 진실이 아닌 말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보살의 무분별지가 현전에 일어나서 행할 때 모든 경계인 대상은 모두 현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존재하는 바, 경계인 대상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땅히 대상은 없으며 이것에 의해 또한 식(識)도 없다고 알아야 하네’란 경계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에 의해서 능식(能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적으로 권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의 대상[所識]이 없기 때문에 인식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바른 도리에 합당하다. 앞에서 자세히 해석한 알아야 할 양상[所知相]에서 이미 이와 같은 도리를 모두 논하고 분석하였다.
017_0241_b_13L如義皆顯現者,謂以種種無我等行,如如思惟,契經等法,如是如是,其義顯現.是故應知,卽此如理作意之心,似其所取`能取相現,一切外義,都無所有.無分別智行,諸義皆不現者,此中應續前說,許義非眞實言,由諸菩薩,無分別智,現起行時,一切境義,皆不顯現,是故應知,所有境義,皆非實有.當知無有義,由此亦無識者,結勸應知無有境義,由此能識,亦無所有,非無所識,而有能識,應正道理.前於廣釋,所知相中,已具辯析,如是道理.
017_0241_c_01L【論】반야바라밀다와 무분별지에는 차별이 없다. 41)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하고 반야가 아닌 곳[非處]42)과 상응하여 능히 나머지 바라밀다에 대해 수습하여 원만하게 된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무엇을 반야가 아닌 곳과 상응하여 수습하여 원만하게 된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다섯 가지 처소[處]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첫째는 외도가 아집하는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둘째는 아직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이 분별하는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고, 셋째는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변(邊)의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넷째는 오직 번뇌장만을 끊었음에도 기쁨을 내는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고, 다섯째는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돌보지 않고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 머무르는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017_0241_c_02L論曰:般若波羅蜜多,與無分別智,無有差別,如說菩薩,安住般若波羅蜜多,非處相應,能於所餘波羅蜜多,修習圓滿.云何名爲非處相應修習圓滿?謂由遠離五種處故,一遠離外道我執處故`二遠離未見眞如菩薩分別處故`三遠離生死涅槃二邊處故`四遠離唯斷煩惱障生喜足處故`五遠離不顧有情利益安樂住無餘依涅槃界處故.
【釋】‘반야바라밀다와 무분별지에는 차별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성품과 모습[性相]이 같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든 무분별지는 즉 반야바라밀다이기 때문이다. 저 경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안주하고 반야가 아닌 곳과 상응하여 능히 나머지 바라밀다에서 수습하여 원만하게 된다”라고 한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다섯 가지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외도가 아집하는 처소 등의 다섯 가지 처소의 차별을 멀리 여읜다는 것이다. 여기에 거주할 수 있기 때문에 처소라고 하는 것이다.
017_0241_c_12L釋曰:般若波羅蜜多,與無分別智,無有差別者,性相等故.謂諸所有無分別智,卽是般若波羅蜜多故.彼經中,作如是說:菩薩安住般若波羅蜜多,非處相應,能於所餘波羅蜜多,修習圓滿.此義云何?謂由遠離五種處故,卽是遠離外道我執處等五處差別.此中可居,故名爲處.
017_0242_a_01L‘외도가 아집하는 처소를 멀리 여읜다’란 말하자면 모든 외도는 아집에 안주하여 이러한 생각을 지어서 말하기를 “나는 능히 알았다. 이것은 나의 지혜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처소를 멀리 여의어서 ‘나[我]’ 와 ‘나의 것[我所]’을 계탁하여 집착하지 않고 반야를 일으킨다.
보살은 이와 같은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반야가 아닌 곳과 상응하여’라고 설하는 것이다.
‘아직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이 분별하는 처소를 멀리 여읜다’란 말하자면 아직 진리를 보지 못한 모든 보살 대중은 그 반야바라밀다인 무분별지에서 모든 분별을 일으켜서 “이것은 반야바라밀다이다”라고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은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반야가 아닌 곳과 상응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의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7_0241_c_20L遠離外道我執處者,謂諸外道安住我執,作是念言:我能了知,此是我慧.菩薩遠離如是處所,不計執我及以我所,而起波若.菩薩遠離如是處所,是故說名非處相應.遠離未見眞如菩薩分別處者,謂未見眞諸菩薩衆,於其般若波羅蜜多無分別智,起諸分別,此是般若波羅蜜多.菩薩遠離如是處所,是故說名非處相應.如有頌曰:

만약 소견(所見)이 있으면
너는 저것으로 인해서 계박되며
만약 소견이 없으면
곧 해탈을 얻네.
017_0242_a_06L若有所見,
汝爲彼縛,
若無所見,
便得解脫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변의 처소를 멀리 여읜다’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가령 세간은 생사의 변에 머무르니, 왜냐하면 아집이 있기 때문이며, 가령 성스러운 제자는 열반의 변에 머무르니, 왜냐하면 번뇌를 끊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두 변을 멀리 여의고 반야가 아닌 곳과 상응한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번뇌장만을 끊었음에도 기쁨을 내는 처소를 멀리 여읜다’란 말하자면 성문 등은 수습력으로 번뇌장을 끊고서, 즉 “모든 지어야 할 것을 이미 성취하였다”라고 계탁하지만, 보살은 이와 같은 처소를 멀리 여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정을 이익하게 하고 안락하게 하는 것을 능히 장애하기 때문이다. 다음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42_a_08L遠離生死涅槃二邊處者,謂如世閒住生死邊,有我執故如聖弟子,住涅槃邊,煩惱斷故.菩薩不爾,是故說名遠離二邊非處相應.遠離唯斷煩惱障生喜足處者,謂聲聞等,計修習力,斷煩惱障,卽爲一切所作已辦.菩薩遠離如是處所,以能障㝵利益安樂諸有情故.如有頌言:

모든 살기 괴로운 세계에 머물러도
극히 대보리를 장애하지 않으니,
마치 성문에 머무르고
독각의 지위에 머무르는 것과 같지 않네.
017_0242_a_16L非往諸惡趣,
極障大菩提,
如住於聲聞,
及以獨覺地.
017_0242_b_01L
보살은 이와 같은 처소를 멀리 여읜다. 그러므로 ‘반야가 아닌 곳과 상응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돌보지 않고 무여의열반계에 머무르는 처소를 멀리 여읜다’란 성문 등과 같을 경우에는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돌보지 않고 무여의열반계에 머물러 마치 불이 땔감을 태우는 것과 같이 필경에 적멸하지만, 보살은 반야와 대비를 모두 구족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처소를 멀리 여의고 능히 바르게 무주열반(無住涅槃)에 안주한다. 이러한 처소를 버리기 때문에 그러므로 “반야가 아닌 곳과 상응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017_0242_a_18L菩薩遠離如是處所,是故說名非處相應.遠離不顧有情利益,安樂住無餘依涅槃界處者,如聲聞等,不顧有情利益安樂,住無餘依涅槃界中,如火燒薪,畢竟寂滅.菩薩遠離如是處所,般若大悲,皆具足故,能正安住無住涅槃.由捨此處,是故說名非處相應.
【論】성문 등의 지혜와 보살 등의 지혜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43)
다섯 가지 특징[相]에 의해 차별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무분별의 차별에 의하니, 말하자면 온(蘊) 등의 법에 대해서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적지 않은 것의 차별에 의하니, 말하자면 진여에 통달하고, 모든 종류의 알아야 할 경계에 들어가고, 두루 모든 유정을 건너게 하는 데에 있어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무주의 차별에 의하니, 말하자면 무주열반을 머무르는 곳으로 삼기 때문이다. 넷째는 필경의 차별에 의하니, 말하자면 무여의열반계에서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무상(無上)의 차별에 의하니, 말하자면 이것 위에 그 밖의 교법[乘]이 이보다 뛰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242_b_02L論曰:聲聞等智,與菩薩智,有何差別?由五種相,應知差別.一由無分別差別,謂於薀等法,無分別故二由非少分差別,謂於通達眞如,入一切種所知境界,普爲度脫一切有情,非少分三由無住差別,謂無住涅槃,爲所住故四由畢竟差別,謂無餘依涅槃界中,無斷盡故五由無上差別,謂於此上,無有餘乘勝過此故.此中有頌:

모든 대비를 체로 삼고
다섯 가지 특징의 뛰어난 지혜에 의해서
세간과 출세간이 원만한 가운데
이것을 가장 높고 멀다고 설하네.
017_0242_b_11L諸大悲爲體,
由五相勝智,
世出世滿中,
說此最高遠.

【釋】여기에서 성문 등의 지혜와 보살 등의 지혜에는 다섯 가지 특징의 차별이 있음을 나타낸다.
‘무분별의 차별’이란 말하자면 성문 등의 지혜는 4전도에 대해서 무분별이라 이름하고, 모든 보살의 지혜는 일체법과 이에 보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분별이다.
‘적지 않은 것의 차별’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여를 통달하는 데에 적지 않은 차별이 있으니, 말하자면 성문 등이 진관(眞觀)에 들어갈 때는 오직 보특가라의 공ㆍ무아의 이치에만 통달할 수 있지만 모든 보살이 진관에 들어갈 때는 보특가라와 일체법의 공ㆍ무아의 이치를 구족하여 통달한다.
017_0242_b_13L釋曰:此中顯示,聲聞等智,與菩薩智,五相差別.無分別差別者,謂聲聞等智,就四顚倒,名無分別,諸菩薩智,於一切法,乃至菩提,皆無分別.非少分差別,復有三種:一通達眞如,非少分差別,謂聲聞等入眞觀時,唯能通達補特伽羅空無我理是諸菩薩,入眞觀時,具足通達補特伽羅及一切法空無我理.
017_0242_c_01L둘째는 알아야 할 경계에 대한 적지 않은 차별이 있으니, 말하자면 성문 등은 오직 고(苦) 등의 제(諦)에 대해서만 지혜를 내고 곧 “수습의 소작을 이미 성취하였다”라고 하지만, 모든 보살은 모든 알아야 할 경계에 대해서 전도 없는 지혜를 내고 이에 “수습의 소작을 이미 성취하였다”라고 한다.
셋째는 유정을 제도하는 데에 적지 않은 차별이 있으니, 말하자면 성문 등은 오직 자기만의 이익을 구하여 무생지(無生智)를 다하고 정근하며 수행하지만, 모든 보살은 두루 모든 유정을 제도하기 위해서 대보리를 구한다. 이 세 가지 적지 않은 것에 성문과 보살의 지혜의 차별이 있다.
017_0242_b_22L二所知境界,非少分差別,謂聲聞等,唯於苦等諦中智生,卽名修習所作已辦是諸菩薩,普於一切所知境界,無倒智生,乃名修習所作已辦.三所度有情,非少分差別,謂聲聞等,唯求自利,盡無生智,正勤修行是諸菩薩,普爲濟度一切有情,求大菩提.於此三種,非少分別,聲聞`菩薩智,有差別.
‘무주의 차별’이란 말하자면 성문 등은 오직 열반에만 머무르지만, 모든 보살은 비(悲)와 혜(慧)의 증상력을 구족하기 때문에 무주열반을 머무르는 곳으로 삼는다.
‘필경의 차별’이란 성문 등과 모든 보살은 열반에 커다란 차별이 있음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성문 등은 몸과 지혜가 모두 다하여 마치 불꽃이 꺼지는 무여의열반계에 머무르지만, 모든 보살은 성불을 얻을 때 증득한바 법신은 생사의 끝을 궁구하여 다함이 없어서 무색계에 상속하여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차별에 의해서 지혜에도 차별이 있다.
017_0242_c_07L無住差別者,謂聲聞等,唯住涅槃是諸菩薩,具足悲`慧增上力,故,無住涅槃,以爲住處.畢竟差別者,顯聲聞等,與諸菩薩,於涅槃中,有大差別.謂聲聞等,住無餘依涅槃界中,身智永盡,如燈焰滅是諸菩薩,得成佛時,所證法身,窮生死際,無有斷盡,如無色界,相續不壞.由此差別,智有差別.
‘무상(無上)의 차별’이란 말하자면 성문승 위에 독각이 있고 독각승 위에 다시 대승이 있으나, 그 보살승은 즉 불승(佛乘)이어서 다시 그 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 특징에 의해서 성문과 모든 보살의 지혜에는 차별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가타로써 이와 같은 뜻을 섭수한다.
‘다섯 가지 특징’이라고 말하는 것은 즉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다섯 가지 특징의 차별이다.
‘세간과 출세간이 원만한 가운데’란 정려와 무색을 세간의 원만함이라고 하며, 성문승 등이 얻은바 열반을 출세간의 원만함이라고 한다. 이것은 모두 저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높고 멀다’고 설하는 것이다.
017_0242_c_15L無上差別者,謂聲聞乘上,有獨覺,獨覺乘上,復有大乘其菩薩乘,卽是佛乘,更無有上.由此五相,應知聲聞與諸菩薩智有差別.復以伽陁攝如是義.言五相者,卽前所說,五相差別.世`出世滿中者,靜慮無色,名世閒滿,聲聞乘等,所得涅槃,名出世滿,此皆勝彼,故說高遠.
017_0243_a_01L【論】만약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매우 높은 시라(尸羅)와 매우 높은 질다(質多)44)와 매우 높은 반야를 성취하여 공덕이 원만해지면, 모든 재물과 지위[財位]에서 대자재를 얻는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모든 유정은 재물과 지위에서 궁핍함이 있음을 보는가?
저 유정에게는 모든 재물과 지위에 무거운 업장이 있음을 보기 때문이며, 저 유정에게 만약 재물과 지위를 보시하면 선법을 생기게 하는 데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저 유정에게 만약 재물과 지위가 궁핍하게 되면 혐오해서 떠나는 것[厭離]이 현전한다고 보기 때문이며, 저 유정에게 만약 재물과 지위를 보시하면 곧 불선법의 원인을 적집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며, 저 유정에게 만약 재물과 지위를 보시하면 곧바로 나머지 무량한 유정을 감손하고 괴롭히는 원인을 짓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정은 재물과 지위에서 궁핍하게 됨을 현전에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242_c_22L論曰:若諸菩薩,成就如是增上尸羅`增上質多`增上般若,功德圓滿,於諸財位,得大自在,何故現見有諸有情匱乏財位?見彼有情於諸財位,有重業障故見彼有情,若施財位,障生善法故見彼有情,若乏財位,厭離現前見彼有情,若施財位,卽爲積集不善法因故見彼有情,若施財位,卽便作餘無量有情損惱因故.是故現見有諸有情匱乏財位.此中有頌:

업과 장애와 현전과
적집과 손뇌(損惱)를 보기 때문에
현전에 모든 유정은
보살의 보시를 감수하지 못하네.
017_0243_a_09L見業障現前,
積集損惱故,
現有諸有情,
不感菩薩施.

【釋】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보살은 비록 재물과 지위의 자재함이 있더라도 남에게 보시하지 않음을 지금 마땅히 드러내 설하겠다.
‘저 유정에게는 모든 재물과 지위에서 무거운 업장이 있음을 보기 때문이며’란,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저 유정의 그 재물과 지위에 무거운 업장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시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혜로운 보시[惠施]를 공하게 하여 결과가 없게끔 해서는 안 된다. 설사 다시 저들에게 보시해도 또한 받을 수 없는데 무슨 소용으로 보시를 하겠는가? 다음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43_a_11L釋曰:今當顯說,由是因緣,菩薩雖有財位自在,而不施他.見彼有情,於諸財位,有重業障故者,謂諸菩薩,見彼有情,於其財位,有重業障,故不施與,勿令惠施空無有果設復施彼,亦不能受,何用施爲?如有頌言: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주는 것과 같이
한 달이 지나도 게으르지 않네.
아기의 목구멍이 만약 막히면
어머니가 젖을 주려 해도 무슨 소용 있겠는가.
017_0243_a_17L如母乳嬰兒,
一經月無倦,
嬰兒喉若閉,
乳母欲何爲?

‘저 유정에게 만약 재물과 지위를 보시하면 선법을 생기게 하는 데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며’란,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저 유정이 비록 재물과 지위에 대하여 무거운 업장은 없지만, 저 유정이 만약 재물과 지위의 원만을 얻으면 곧 매우 방일하여 선법을 일으키지 않게 될 것임을 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즉 “정녕 저 사람의 현법(現法)은 작은 시간 동안 빈천해도, 저 사람의 미래의 많은 시간 동안은 빈천하지 말기를”이라고 사유하기 때문에, 저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과 지위를 보시하지 않는다.
017_0243_a_19L見彼有情,若施財位,障生善法故者,謂諸菩薩,見彼有情,雖於財位,無重業障,而彼若得財位圓滿,便多放逸,不起善法,作是思惟:寧彼現法少時貧賤,勿彼來生多時貧賤.故不施彼所有財位.
017_0243_b_01L‘저 유정에게 만약 재물과 지위가 궁핍하게 되면 혐오해서 떠나는 것이 현전한다고 보기 때문이며’란,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저 유정에게 만약 재물과 지위가 궁핍하면 생사를 싫어하여 마음이 곧 현전하여 출리[出離]를 구하려고 하지만, 만약 부귀를 얻으면 곧 교만과 방일을 일으킬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유정에게 모든 재물과 지위를 보시하지 않고 이와 같이, 즉 “차라리 저 유정이 빈천할 경우에는 생사를 혐오해서 떠나는 마음을 항상 현전하기를, 저 유정이 부귀할 경우에는 방일을 일삼으며 생사를 싫어하지 않아 선법을 일으키지 않게끔 하지 말기를”이라고 사유한다.
017_0243_b_02L見彼有情,若乏財位,厭離現前故者,謂諸菩薩,見彼有情,若乏財位,厭生死心,便現在前,求欲出離,若得富貴,卽生憍逸.故不施彼所有財位,作是思惟:寧彼貧賤,厭離生死心常現前,勿彼富貴,受樂放逸,不厭生死,不起善法.
‘저 유정에게 만약 재물과 지위를 보시하면, 곧 불선법의 원인을 적집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며’란,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저 유정에게 만약 저 만족한 재물과 지위를 마땅히 보시하면 곧 방일하여 갖가지 악업과 불선업을 적집한다고 보기 때문에 저 유정에게 가지고 있는 재물과 지위를 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243_b_08L見彼有情,若施財位,卽爲積集不善法因故者,謂諸菩薩,見彼有情,若當施彼滿足財位,卽便放逸,積集種種惡不善業,故不施彼所有財位.如有頌言:

차라리 재물과 지위가 빈천하고 궁핍하게 만들더라도
살기 괴로운 세계의 모든 악행을 멀리 여의어라.
저들을 부귀하게 하여 모든 감각기관[根]을 어지럽혀
미래에 여러 가지 고통을 담는 그릇으로 감수하지 말게 하라.
017_0243_b_12L寧使貧乏於財位,
遠離惡趣諸惡行,
勿彼富貴亂諸根,
令感當來衆苦器.

‘저 유정에게 만약 재물과 지위를 보시하면, 곧바로 나머지 무량한 유정을 감손하고 괴롭히는 원인을 짓는다고 보기 때문이다’란,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저 유정이 부귀를 얻으면 곧 무량한 중생을 감손하고 괴롭힌다고 보기 때문에 저 유정에게 모든 재물과 지위를 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즉 “차라리 저 유정의 한 몸은 빈천함의 고통을 받을지라도 나머지 많은 유정이 감손하고 괴롭혀지지 말기를”이라고 사유한다. 다시 가타로써 이와 같은 의미를 섭수한다.
그러므로 ‘업과 장애와 현전……을 본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 문장은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번거롭게 거듭 해석할 필요가 없다.
017_0243_b_14L見彼有情,若施財位,卽便作餘無量有情損惱因故者,謂諸菩薩,見彼有情,若得富貴,卽便損惱無量有情,故不施彼所有財位,作是念言:寧彼一身,受貧賤苦,勿令損惱餘多有情.復以伽他,攝如是義,故說見業障現前等,其文易了,無煩重釋.
攝大乘論釋卷第八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이하 매우 높은 선정[增上心學]에 관하여 설명한다. 계율은 선정을 의지(依止)로 삼고 선정에 의지해서 계율을 이루기 때문에, 다음으로 뛰어난 계율이 의지해서 일어나는 선정의 뛰어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증상심학이라고 이름한다.
  2. 2)진제 역본에는 이들 삼마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3. 3)이(利)ㆍ예(譽)ㆍ칭(稱)ㆍ낙(樂)의 4순(順)과 쇠(衰)ㆍ훼(毁)ㆍ기(譏)ㆍ고(苦) 등의 4위(違)를 말한다.
  4. 4)범어 utpāda의 음사어이다.
  5. 5)수역(隋譯)에서는 유소득(有所得)의 보시로 되어 있다. 세친 역을 참조하면 탐욕으로 오염된 보시로서 내구시(來求施)를 설명하고 있다.
  6. 6)범어 sāra의 음사어이다.
  7. 7)범어 paiśunī의 음사이이다.
  8. 8)범어 pāruṣī의 음사어이다.
  9. 9)신수장경에는 구(具)로 되어 있지만 송본(宋本)ㆍ원본(元本)과 궁본(宮本)에는 패(貝)로 되어 있다.
  10. 10)삼독등분(三毒等分)에 있는 것을 말한다.
  11. 11)이하 매우 높은 지혜의 뛰어남[增上慧殊勝]을, 무분별지혜의 자성ㆍ의지처ㆍ인연ㆍ인식대상ㆍ인식작용ㆍ맡아 지님ㆍ돕는 짝ㆍ이숙ㆍ등류ㆍ벗어남ㆍ궁극에 이름ㆍ가행의 지혜와 무분별지혜와 후득지혜의 뛰어난 이익ㆍ차이ㆍ무분별지혜와 후득지혜의 비유ㆍ의식적인 노력이 없이 짓는 사업ㆍ매우 심오함의 순서로 설명한다.
  12. 12)근본지(根本智)ㆍ여리지(如理智)ㆍ정체지(正體智)ㆍ진지(眞智) 등이라고도 한다. 진여에 계합(契合)하여 분별을 여의고, 모든 현상계의 본질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아는 지혜이다.
  13. 13)후득지(後得智)ㆍ여량지(如量智)ㆍ권지(權智)ㆍ속지(俗智)라고도 한다. 근본지(根本智)에 의해 진리를 깨달은 뒤에, 다시 분별하는 얕은 지혜를 일으켜서 의타기성의 속사(俗事)를 아는 지혜이다. 붓다가 대비를 일으켜서 중생을 구제함은 바로 이 후득지에 의해서이다.
  14. 14)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는 선정의 마음속에 심구(尋求)와 사찰(伺察)의 심소가 모두 있는 것을 말한다. 색계 초선천(初禪天)의 선정이다. 이로부터 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가 있고, 제2선(禪) 이후는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이다.
  15. 15)이하 무분별지혜의 의지처[所依]에 관하여 설명한다.
  16. 16)다음으로 무분별지혜의 인연에 대한 내용이다.
  17. 17)문훈습을 말한다.
  18. 18)다음으로 무분별지혜의 인식대상에 대해서 말한다.
  19. 19)여기서 행상(行相)은 심식(心識)의 고유한 성능(性能)으로서, 특히 주관의 인지(認知)하는 작용을 말한다. 마음에 비친 객관의 영상을 인식하는 주관의 작용이다.
  20. 20)이하 무분별지혜의 인식작용에 대하여 설명한다.
  21. 21)이하 무분별지혜의 맡아 지님[任持]에 대한 내용이다.
  22. 22)다음으로 무분별지혜의 돕는 짝[助伴]에 대해서 말한다.
  23. 23)무분별지혜의 가행과 증득으로 인하여 다른 이숙과를 얻는다.
  24. 24)이숙의 인(因)을 말한다.
  25. 25)다음으로 무분별지혜의 등류(等流)에 대하여 말한다.
  26. 26)이하 무분별지혜의 궁극에 이른 것에 관하여 설명한다. 앞에서는 무분별지혜를 순서대로 획득하는 것만을 말했고 아직 그 구경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그 구경을 질문한다.
  27. 27)가행도(加行道)이기 때문이다.
  28. 28)이 게송은 가행의 무분별지혜가 악도(惡道)의 업을 능히 다스림을 그 공덕으로 함을 나타낸다.
  29. 29)이 게송은 근본의 무분별지혜가 모든 장애를 다스리는 공덕이 있음을 나타낸다.
  30. 30)이하 세 가지 무분별지혜의 차이를 설명한다.
  31. 31)여기서 말나(末那)는 manovijña을 가리킨다.
  32. 32)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을 의미한다.
  33. 33)이하 근본지와 후득지의 차이를 비유로 설명한다.
  34. 34)이하 무분별지혜에 의거해서 의식적인 노력 없이[無功用] 짓는 사업에 대하여 말한다.
  35. 35)마니(摩尼, 末尼)는 범어 maṇi의 음역으로서 보주(寶珠)로 번역되며, 마니보주로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보배구슬의 총칭인데, 여기서는 특히 여의보주(如意寶珠)를 가리킨다.
  36. 36)이하 증상혜학(增上慧學)의 양상 중에서 끝으로 무분별지혜의 매우 심오함에 관하여 설명한다.
  37. 37)이하 증상혜학의 양상 중에서 다시 세 가지 무분별지혜의 차이를 말한다. 가행지와 근본지는 세 가지로, 후득지는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38. 38)사람의 수행 세력의 의미이다. 현재 짓는 바에 있어서 정진하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39. 39)선정을 말한다.
  40. 40)꿈속의 영상과 선정에 나타난 영상을 말한다.
  41. 41)이하 반야바라밀다가 곧 무분별지혜임을 밝히고, 보살은 이 반야에 의지하며, 외도와 소승이 오인해서 반야로 삼는 처소에 대해서 나머지 다섯 가지 바라밀다를 닦아서 그것을 원만히 성취함을 밝힌다.
  42. 42)여기서 비처(非處)는 반야가 아닌 것을 반야로 오인(誤認)하는 개처(個處)를 말한다. 그 반야가 아닌 곳에 의지한다는 의미이다.
  43. 43)이하 2승(乘)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의 차이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44. 44)범어 citta의 음사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