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唐西域記卷第三

ABC_IT_K1065_T_003
032_0388_c_01L대당서역기 제3권
032_0388_c_01L大唐西域記卷第三 八國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032_0388_c_02L三藏法師玄奘奉詔譯
大摠持寺沙門辯機撰


4. 북인도8개국
032_0388_c_04L烏仗那國
鉢露羅國
呾叉始羅國
僧訶捕羅國
烏剌尸國
迦濕彌羅國
半笯奴故反嗟國
遏羅闍補羅國

1)오장나국(烏仗那國)
오장나국1)의 둘레는 5천여 리에 달하며 산과 계곡이 서로 이어져 있고 하천과 늪과 초원이 이어진다. 비록 씨를 뿌려 곡식을 심기는 하지만 땅이 기름지지 않다. 포도가 많이 나고 사탕수수가 적게 수확된다. 금과 쇠가 토산품이며 울금향이 자라기에 좋은 토양이다. 나무와 숲이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무성하다. 기후가 온화하고 비와 바람도 때를 맞춰 적당하다.
032_0388_c_07L烏仗那國周五千餘里山谷相屬澤連原穀稼雖播地利不滋多蒱萄少甘蔗土產金宜鬱金香林樹蓊花果茂盛寒暑和暢風雨順序
사람들의 성격은 겁약하며 풍속은 속임수를 잘 쓴다. 학업에 힘쓰기를 좋아하지만 공을 들이지 않는다. 주문을 외거나 주술을 부리는 것이 예업(藝業)이 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얀 모포를 입는데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옷차림을 한다. 언어2)는 다르기는 하지만 인도와 대체로 같으며, 문자와 예의는 인도와 서로 관계가 있다.
032_0388_c_11L性怯懦俗情譎詭好學而不功禁呪爲藝業多衣白㲲少有餘服語言雖大同印度文字禮儀頗相參預
이 나라는 부처님의 법을 숭앙하고 존중하며 대승을 믿고 경배한다. 소파벌솔도하(蘇婆伐窣堵河)를 끼고서 옛날에는 1천 4백 개의 가람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무너져 황폐해졌다. 옛날에는 승려들의 수가 1만 8천 명에 달하였지만 지금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승을 익히고 있으며 선정에 잠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능히 글을 잘 외지만, 심오한 뜻을 깊이 궁구하지는 않는다. 계행이 맑고 깨끗하며 특히 금주(禁呪)3)에 능하다.
032_0388_c_14L重佛法敬信大乘夾蘇婆伐窣堵河有一千四百伽藍多已荒蕪昔僧徒一萬八千今漸減少竝學大乘寂定爲業善誦其文未究深義戒行淸潔特閑禁呪
율의(律儀)가 전하는 가르침에는 5부가 있으니 첫째는 법밀부(法密部), 둘째는 화지부(化地部), 셋째는 음광부(飮光部), 넷째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다섯째는 대중부(大衆部)이다. 천사(天祠)는 10여 곳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견고한 성이 4~5개 있고 그 왕은 대부분 몽게리성(瞢偈釐城)4)을 다스리고 있는데 성의 둘레는 16~17리이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032_0388_c_19L律儀傳訓有五部焉一法密部二化地部三飮光部四說一切有部五大衆部天祠十有餘所異道雜居堅城四五其王多治瞢揭釐城城周十六七里居人殷盛
032_0389_a_02L몽게리성의 동쪽으로 4~5리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상서로운 징조가 매우 많이 일어나고 있다. 옛날 부처님께서 인욕선인(忍辱仙人)이셨을 때 이곳에서 갈리왕(羯利王)당나라 말로는 투쟁(鬪爭)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가리(哥利)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위하여 자신의 신체를 잘랐던 곳이다.
032_0388_c_23L瞢揭釐城東四五里有窣堵波極多靈瑞是佛在昔作忍辱仙於此爲羯利王唐言鬪諍舊云哥利訛也割截支體
몽게리성의 동북쪽으로 250~260리를 가다 보면 큰 산에 들어가게 되며 이곳에서 아파라라용천(阿波邏羅龍泉)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바로 소파벌솔도하(蘇婆伐窣堵河)의 원천이다. 샘의 물줄기는 서남쪽으로 흘러내리는데 봄과 여름에도 얼음이 얼고 저녁 무렵이면 눈발이 날린다. 눈은 5색을 띄면서 내리고 빛은 4방으로 퍼진다.
032_0389_a_04L瞢揭釐城東北行二百五六十里大山至阿波邏羅龍泉卽蘇婆伐窣堵河之源也派流西南春夏含涷夕飛雪雪霏五彩光流四照
이 용은 본래 가섭파(迦葉波)부처님 시절에 인간으로 태어나 그 이름을 긍기(殑祇)라고 하였다. 그는 주술에 아주 달통해 있었으므로 사악한 용을 다스리고 제어하여 폭우를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 나라의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여분의 식량을 비축할 수 있었으며 누구나 할 것 없이 그의 은덕에 감동하여 집집마다 한 말의 곡식을 세금으로 거두어서 그에게 바쳤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세금을 제때에 내지 못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그러자 긍기는 분노를 품고서 사악한 용이 되어서 비바람을 마구 일으켜 농작물을 손상시킬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목숨을 마친 후에 이 못의 용이 되었으며 샘에서 백수(白水)를 흘려보내 지리(地利)를 상하게 하였다.
032_0389_a_08L此龍者迦葉波佛時生在人趣名曰殑祇閑呪術禁禦惡龍不令暴雨國人賴以稸餘糧居人衆庶感恩懷德稅斗穀以饋遺焉旣積歲時或有逋殑祇含怒願爲毒龍暴行風雨傷苗稼命終之後爲此池龍泉流白損傷地利
이때 석가여래께서 대비(大悲)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계셨는데 이 나라 사람들만이 홀로 이런 재난을 당하는 모습을 가엾게 여기셨다. 그리하여 이곳으로 집금강신(執金剛神)을 내려보내 포악한 용을 교화시키고자 하셨다. 집금강신이 금강신저(金剛神杵)를 들어서 절벽을 내리치니 용왕이 크게 놀라 밖으로 뛰쳐나와서 귀의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 마음이 깨끗해졌으며 믿고 깨닫게 되었다.
032_0389_a_15L釋迦如來大悲御世此國人獨遭斯難降神至此欲化暴執金剛神杵擊山崖龍王震懼出歸依聞佛說法心淨信悟
여래께서는 이어서 농사일을 망치지 못하도록 제지하시니 용이 말했다.
“제가 먹는 것은 모두 사람들의 밭에서 거둔 것입니다. 이제 성스러운 가르침을 입었지만 장차 어떻게 먹고 살아가야 할지 두렵습니다. 그러니 원하옵건대 12년에 한 번씩은 식량을 받아둘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여래께서는 그의 뜻을 받아들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지금도 12년에 한 번씩은 백수(白水)의 재난을 입고 있다.5)
032_0389_a_18L如來遂制勿損農稼龍曰凡有所食賴收人今蒙聖敎恐難濟給願十二歲一收糧儲如來含覆愍而許焉故今十二年一遭白水之災
032_0389_b_02L아파라라용천에서 서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백수의 북쪽 기슭에 커다란 반석이 있는데 그 위에 여래께서 발로 밟으신 흔적이 있다. 사람들 각자의 복덕의 힘에 따라 그 흔적이 짧거나 길게 보인다. 이곳은 여래께서 이 용을 항복시키고 나신 뒤에 떠나시면서 흔적을 남기셨던 곳이다. 후에 사람들이 그 위에 돌을 쌓아서 방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4방에서 잇달아 찾아와 꽃과 향을 공양한다. 강물을 따라서 아래로 30여 리 가다 보면 여래께서 옷을 빨았던 돌이 있는데 가사의 무늬가 마치 조각한 것처럼 지금도 또렷하다.
032_0389_a_22L阿波邏羅龍泉西南三十餘里水北岸大磐石上有如來足所履迹隨人福力量有短長是如來伏此龍已迹而去後人於上積石爲室遐邇相花香供養順流而下三十餘里如來濯衣石袈裟之文煥焉如鏤
몽게리성의 남쪽으로 4백여 리 가다 보면 혜라산(醯羅山)6)에 이른다. 계곡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내리다가 역류하여 동쪽으로 거슬러 오른다. 온갖 이름 모를 꽃과 열매들이 산골짝을 뒤덮고 있으며 벼랑을 장식하고 있다. 산봉우리들과 바위들이 가파르고 위험하며 계곡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어떤 때는 이 물소리가 말다툼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음악 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032_0389_b_05L瞢揭釐城南四百餘里至醯羅山水西派逆流東上雜花異果被㵎緣峯巖危險谿谷盤紆或聞諠語之聲或聞音樂之響
네모반듯한 평상과도 같은 돌이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과 같다. 이런 돌이 서로 이어져서 벼랑의 골짜기까지 깔려 있다. 이곳은 옛날 여래께서 반송(半頌)구역에서는 가(伽)라고 하는데 범문(梵文)의 약어(略語)이다. 어떤 이는 게타(偈他)라고 하는데 범음(梵音)이 잘못된 것이다. 이제 올바른 음을 따라서 가타(伽他)라고 한다. 가타라는 것은 당나라 말로는 송(頌)이라고 하는데 송은 32언(言)이다의 법을 듣기 위해 목숨을 버린 곳이다.7)
032_0389_b_09L方石如塔宛若工成連延相屬接布崖谷是如來在昔爲聞半頌舊曰伽梵文略也或曰偈他梵音訛也今從正音宜云伽伽他者唐言頌頌三十二言也之法於此捨身命焉
몽게리성의 남쪽으로 2백여 리 가다 보면 큰 산 옆으로 마하벌나(摩訶伐那)당나라 말로는 대림(大林)이라고 한다가람에 이른다. 여래께서 옛날에 보살행을 닦으셨을 때 그 이름을 살박달지왕(薩縛達之王)당나라 말로는 일체시(一切施)라고 한다이라고 하셨는데 적들을 피하여 나라를 버리고 잠행하여 이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굶주린 바라문들이 다가와서 구걸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왕위를 잃은 뒤라 아무것도 베풀 것이 없었다. 결국 자신을 묶어서 적군의 왕에게 끌고 가도록 하여 포상금을 타도록 하는 보시를 베푸신 곳이다.
032_0389_b_12L揭釐城南二百餘里大山側至摩訶伐那唐言大林伽藍是如來昔修菩薩行號薩縛達之王唐言一切施避敵棄國潛行至此遇貧婆羅門方來乞丐旣失國無以爲施遂令羈縛擒往敵王以賞財迴爲惠施
032_0389_c_02L마하벌나가람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내려가 30~40리를 가다 보면 마유(摩愉)당나라 말로는 두(豆)이다가람에 이르는데 이곳에도 솔도파가 있다.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그 옆에 커다랗고 네모반듯한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여래께서 발로 밟으신 흔적이 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이 돌을 밟으시고 구지(拘胝)8)의 광명을 놓으셔서 마하벌나가람을 비추셨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과 하늘에게 본생(本生)의 일을 들려주셨다. 이 솔도파의 기단 아래에 돌이 있는데 황백색을 띠고 있고 언제나 습기를 머금고 있으며 매끄럽다. 옛날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에 정법을 듣기 위하여 이곳에서 뼈를 부러뜨려서 경전을 서사(書寫)한 곳이다.9)
032_0389_b_18L摩訶伐那伽藍西北下山三四十里至摩愉摩言豆伽藍有窣堵波高百餘其側大方石上有如來足蹈之迹是佛昔蹈此石放拘胝光明照摩訶伐那伽藍爲諸人天說本生事其窣堵波基下有石色帶黃白常有津膩是如來在昔修菩薩行爲聞正法此析骨書寫經典
마유가람에서 서쪽으로 60~70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에 이르는데 이것은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여래께서 옛날 보살행을 닦으실 때 시비가왕(尸毘迦王)당나라 말로는 여(與)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시비왕(尸毘王)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라 이름하셨다. 그때 불과(佛果)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서 스스로의 몸을 갈라서 비둘기를 대신하여 매의 먹이가 되셨던 곳이다.
032_0389_c_03L摩愉伽藍西六七十里至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是如來昔修菩薩行毘迦王唐言與舊曰尸毘王爲求佛果於此割身從鷹代鴿
비둘기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린 곳에서 서북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산니라사천(珊尼羅闍川)10)으로 들어가서 살부살지(薩裒殺地)당나라 말로는 지약(地藥)이라고 한다승가람에 이른다. 이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가 80여 척에 달한다. 여래께서 옛날에 제석(帝釋)이셨을 때 기아와 전염병이 유행하는 흉년을 만나셨다. 백 가지 처방이 아무런 효과도 없어 길에는 죽은 자가 발길에 채일 정도로 속출하였다. 제석께서 이것을 슬퍼하고 가엾게 여겨서 구제하고자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곧 커다란 이무기로 몸을 변화시켜서 그 시체를 산과 계곡에 눕힌 뒤에 공중에서 널리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기뻐하며 서로 앞다투어 달려갔으며 그 살점을 베어먹는 대로 활력을 되찾아서 기아와 질병을 치료하게 되었다.11)
032_0389_c_07L代鴿西北二百餘里入珊尼羅闍川至薩襃殺地唐言地藥僧伽藍有窣堵波高八十餘尺是如來昔爲帝釋時遭飢歲疾疫流行醫療無功道死相屬帝釋悲愍思所救濟乃變其形爲大蟒身僵屍川谷空中遍告聞者感慶相率奔赴隨割隨生療飢療疾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소마대솔도파(蘇摩大窣堵波)가 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옛날에 제석이셨을 때에 세상에 전염병이 돌자 모든 중생들을 가엾게 여겨서 자신의 몸을 커다란 소마뱀[蘇摩蛇]으로 변화시켜서 모두에게 먹인 곳으로, 이것을 먹은 자들은 건강해졌으며 병고에서 벗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032_0389_c_14L其側不遠有蘇摩大窣堵波是如來昔爲帝釋時世疾疫愍諸含識自變其身爲蘇摩蛇凡有噉食莫不康豫
산니라사천의 북쪽 암벽 가에 솔도파가 있는데 병든 자가 와서 정성을 다해 병이 낫기를 기도하면 치유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래께서 옛날에 공작왕(孔雀王)이셨을 때에 그 무리들과 함께 이곳에 이르셨다. 찌는 듯한 더위로 목이 말라 괴로움을 당하여 물을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자 공작왕이 부리로 벼랑을 쪼았다. 그 결과 샘이 솟아 흘렀는데 지금에는 연못이 되었다고 한다. 그 물을 마시거나 목욕을 하면 질병이 쾌유되는데 돌 위에는 지금도 공작의 발자국이 남아있다.
032_0389_c_17L珊尼羅闍川北石崖邊有窣堵波者至求多蒙除差如來在昔爲孔雀與其群而至此熱渴所逼求水不孔雀王以嘴啄崖涌泉流注今遂爲池飮沐愈疾石上猶有孔雀蹤迹
032_0390_a_02L몽게리성의 서남쪽으로 60~70리를 가면 큰 강이 있는데 동쪽에 솔도파가 있다. 높이는 60여 척이며 상군왕(上軍王)이 세운 것이다.12) 옛날 여래께서 장차 입멸하려 하실 때 모든 대중에게 고하셨다.
“내가 열반에 든 후에 오장나국의 상군왕에게도 마땅히 사리를 나누어주어야 한다.”
032_0389_c_22L瞢揭釐城西南行六七十里大河東有窣堵波高六十餘尺上軍王之所建也昔如來之將寂滅告諸大衆涅槃後烏仗那國上軍王宜與舍利之分
그런데 여러 왕들이 사리의 양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려 하는 중에 뒤늦게 상군왕이 오자 왕들은 깔보고 업신여기는 말을 던졌다. 이때 하늘과 인간의 대중이 거듭 여래의 유언을 일러주니 이에 상군왕까지 포함하여 그 몫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 나라로 가지고 돌아간 뒤에 법식에 의거하여 솔도파를 세웠던 것이다.
032_0390_a_04L及諸王將欲均量上軍王後來遂有輕鄙之議是時天人大衆重宣如來顧命之言乃預同分持歸本國式遵崇建
솔도파 옆의 거대한 강가에 큰 돌이 있는데 모습이 마치 코끼리와도 같다. 옛날 상군왕이 크고 흰 코끼리에게 사리를 싣고서 돌아오는데, 이곳에 도착하자 코끼리가 느닷없이 발에 무언가 걸린 듯 넘어졌다. 이로 인하여 숨을 거두게 된 코끼리는 그대로 돌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그 곁에 솔도파를 세웠던 것이다.13)
032_0390_a_07L窣堵波側大河濱有大石狀如象昔上軍王以大白象負舍利至於此地象忽蹎仆因而自斃遂變爲石卽於其側起窣堵波
몽게리성의 서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큰 강을 건너서 노혜달가(盧醯呾迦)당나라 말로는 적(赤)이라고 한다솔도파에 이르게 된다. 그 솔도파의 높이는 50여 척이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옛날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 자력(慈力)이라는 이름을 지닌 큰 나라의 왕이셨다. 이곳에서 몸을 찔러 흘러나온 피로 다섯 명의 야차(藥叉)구역에서는 야차(夜叉)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를 먹이셨다고 한다.
032_0390_a_10L瞢揭釐城西五十餘里渡大河至盧醯呾迦唐言赤窣堵波高五十餘尺無憂王之所建昔如來修菩薩行爲大國王號曰慈力於此刺身血以飤五藥叉舊曰夜叉訛也
몽게리성의 동북쪽으로 30여 리를 가다보면 알부다(遏部多)14)당나라 말로는 기특(奇特)이라고 한다라는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에 이른다. 이것의 높이는 40여 척이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 계시면서 모든 인간과 천상을 위하여 법을 설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셨다. 여래께서 떠나신 후 땅에서 솟아 나온 것이니, 모든 백성들이 높이 숭앙하였으며, 향과 꽃이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032_0390_a_14L瞢揭釐城東北三十餘里至遏部多唐言奇特石窣堵波高四十餘尺在昔如來爲諸人天說法開導如來去後地踊出黎庶崇敬香花不替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의 서쪽으로 큰 강을 건너서 30~40리를 가다 보면 어떤 정사(精舍)에 이르게 된다. 그 속에는 아박로지저습벌라(阿縛盧枳低濕伐羅)당나라 말로는 관자재(觀自在)라고 하는데 글자를 합하여 연달아 소리를 내어 발음하면 범어(梵語)는 위와 같아진다. 단어를 나누어 하나씩 발음을 내어볼 때 아박로지다(阿縛盧枳多)는 번역하면 관(觀)이고, 이습벌라(伊濕伐羅)는 번역하면 자재(自在)이다. 구역에서는 광세음(光世音)이라고 하거나 또는 관세음(觀世音)이라고 하거나 또는 관세자재(觀世自在)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보살상이 있는데 위력 있고 신령스러운 가피가 은밀하게 내려지고 있으며 신비스러운 자취가 밝게 비치고 있으므로 재가자나 출가자가 앞다투어 끊임없이 공양을 올리고 있다.
032_0390_a_18L石窣堵波西渡大河三四十里至一精舍中有阿縛盧抧低濕伐羅菩薩唐言觀自在合字連聲梵語如上分文散音卽阿縛盧枳多譯曰觀伊濕伐羅譯曰自在舊譯爲光世音或云觀世音或觀世自在皆訛謬也威靈潛被神迹昭明法俗相趍供養無替
032_0390_b_02L관자재보살상의 서북쪽으로 150리를 가다 보면 남발로산(藍勃盧山)15)에 이른다. 산봉우리에 용이 살고 있는 못이 하나 있는데 둘레가 30여 리에 달한다. 맑은 물이 못에 가득 넘치도록 차있고 깨끗한 물줄기가 거울같이 맑다.
032_0390_a_23L觀自在菩薩像西北百五十里至藍勃盧山山嶺有龍池周三十餘里淥波浩汗淸流皎
옛날 비로택가왕(毘盧擇迦王)16)이 앞장서서 여러 석가족[釋種]17)을 정벌하였을 때 네 사람이 군(軍)에 저항하였다. 왕이 그들의 일가친척을 모두 내쫓자 그들은 각각 흩어졌다. 그 가운데 석가족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의 도성을 벗어난 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두루 돌아다니다가 피로에 지쳐서 도중에 주저앉고 말았다.
032_0390_b_03L昔毘盧釋迦王前伐諸釋四人拒軍者宗親擯逐各事分飛其一釋種旣出國都跋涉疲弊中路而止
이때 기러기 한 마리가 그 앞으로 날아왔는데 길이 잘 들여진 것이었다. 그가 기러기 위에 올라타자 기러기는 날아올라서 이 연못 옆에 내려앉았다. 석가 종족인 이 사람은 허공을 타고 날아와 멀리 이국에 내려앉았으며 지리에 어두워 길도 잃었으므로 헤매다가 나무 그늘에서 잠시 잠에 빠져들었다
032_0390_b_05L時有一鴈飛趣其前旣以馴狎因卽乘焉其鴈飛翔下此池側釋種虛遊遠適異國迷不知路假寐樹陰
마침 연못에 사는 용의 딸이 물가에서 노닐다가 문득 석가족 사람을 발견했는데, 용의 모습으로는 그와 마주 대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사람으로 모습을 바꾼 뒤에 그에게 다가가 어루만지니, 석가족 사람이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서 인사를 하였다.
“먼 여행길에 지친 사람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다정하게 어루만지시는 것입니까?”
급기야 사랑의 감정이 은근하여져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032_0390_b_08L池龍少女遊覽水濱忽見釋種恐不得當也爲人形卽而摩拊釋種驚寤因卽謝羈旅羸人何見親拊遂款殷勤逼野合
여자가 말하였다.
“지금까지 부모님의 훈계를 공경하여 받들어왔으며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그대의 정을 받게 되었습니다만 아직 부모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032_0390_b_12L女曰父母有訓祇奉無違蒙惠顧未承高命
그러자 석가족 사람이 말하였다.
“산골이 깊고 깊은데 그대의 집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032_0390_b_13L釋種曰山谷杳冥爾家安在
여자가 말하였다.
“나는 이 연못에 사는 용의 딸입니다. 그대의 종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난을 피하여 유랑한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마침 이리저리 물가를 노닐던 덕택에 감히 피로한 그대를 위로해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관계를 맺게 된 것도 운명이기는 합니다만, 아직 부모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재앙을 쌓아서 이렇게 용의 몸을 받았습니다. 사람과 축생은 길이 다르니 이렇게 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032_0390_b_14L我此池之龍女也敬聞聖族流離逃難幸因遊覽敢慰勞弊命有宴私未聞來旨況乎積禍受此龍身人畜殊途非所聞也
석가족 사람이 말하였다.
“그 한 마디 말로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지난 세상의 마음은 이미 끝났습니다.”
032_0390_b_17L釋種曰言見允宿心斯畢
용의 딸이 말하였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오직 당신의 뜻대로 행하소서.”
032_0390_b_18L龍女曰敬聞命矣唯所去就
그러자 석가족 사람이 마음으로 맹세하며 말하였다.
“내가 지닌 모든 복덕의 힘으로 이 용의 딸의 몸이 사람으로 변할지어다.”
032_0390_b_19L釋種乃誓心曰凡我所有福德之力令此龍女擧體成人
복력의 감응을 받아서 용은 마침내 모습을 바꾸어 곧 사람의 몸을 얻었으며 이에 그녀는 매우 기뻐하면서 석가족 사람에게 인사하였다.
“저에게는 재앙의 운이 쌓여 악한 갈래[惡趣]를 떠돌았는데 이제 다행히도 돌보아주시는 은혜를 입어 그 복력의 가피를 입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흉한 모습이 하루아침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덕에 보답하고 싶으나 몸이 부수어져라 보답하여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마음으로 바라는 일은 당신을 곁에서 모시는 일이지만, 이 일은 많은 이들의 구애를 받습니다. 원하옵건대 부모에게 말씀드린 뒤에 예를 갖추고 싶습니다.”
032_0390_b_20L福力所感龍遂改形旣得人身深自慶悅乃謝釋種曰我積殃運流轉惡趣蒙垂顧福力所加曠劫弊身一旦改欲報此德糜軀未謝心願陪遊拘物議願白父母然後備禮
032_0390_c_02L용의 딸은 연못으로 돌아가서 부모에게 말하였다.
“지금 밖에서 노닐다가 문득 석가족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복력에 감응 받아 저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이미 맞으니 이제 감히 사실대로 말씀드립니다.”
032_0390_c_02L龍女還白父母曰今者遊覽忽逢釋種力所感變我爲人情存好合敢陳事
용왕의 마음은 인간계[人趣]를 좋게 여기고 있었으며 성스러운 석가족을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곧 딸의 간청을 따라 연못에서 나와서 석가족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하였다.
“비류(非類)18)인데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존귀한 데에서 내려오셔서 비천한 데에 나와 주셨습니다. 원하건대 제가 사는 곳에 임하시어 저의 극진한 접대를 받아주소서.”
032_0390_c_05L龍王心欣人趣情重聖族遂從女乃出池而謝釋種曰不遺非類尊就卑願臨我室敢供灑掃
석가족 사람은 용왕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마침내 그의 궁궐로 갔다. 이에 용궁 안에서는 친영(親迎)의 예식이 준비되었는데 연회가 떠들썩하게 베풀어졌고 즐기고 환대하는 것이 지극하였다. 하지만 석가족 사람은 용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언제나 마음이 꺼림칙했기 때문에 이내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용왕이 말리면서 말하였다.
“바라건대 먼 곳에 살지 마시고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사소서. 그러면 마땅히 이 강토(疆土)에 웅거하여 대왕의 칭호를 받게 될 것이며, 신하와 백성을 총괄하여 왕조가 언제까지라도 이어지게 되리이다.”
032_0390_c_07L釋種受龍王之請遂卽其居於是龍宮之中親迎備禮燕爾樂會肆極歡娛釋種睹龍之形心常畏惡乃欲辭出龍王止曰幸無遠舍鄰此宅居當令據疆稱大號摠有臣庶祚延長世
석가족 사람이 고마움을 표하면서 말하였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032_0390_c_12L釋種謝曰此言非冀
그러자 용왕은 보배 검을 상자 속에 넣고 진귀하고 질이 좋은 하얀 모직을 그 위에 덮은 뒤 석가족 사람에게 건네주며 말하였다.
“부디 이 천을 국왕에게 바치소서. 왕은 틀림없이 먼 곳에서 온 사람의 헌상물이라면 친히 받을 것이니, 바로 그 때를 틈타 왕을 해치소서. 이로 인하여 그 나라에 웅거하게 된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032_0390_c_13L龍王以寶劍置篋中妙好白㲲而覆其上謂釋種曰幸持此㲲以獻國王王必親受遠人之貢可於此時害其王也因據其國不亦善乎
석가족 사람은 용의 지시를 받고서 곧 오장나왕에게 가서 천을 바쳤다. 왕이 친히 그 천을 들어올리는 순간 석가족 사람이 왕의 소매를 잡고 그를 찔렀다. 그러자 좌우에서 왕을 모시던 신하들과 호위병 사이에서는 대혼란이 벌어지며 계단으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석가족 사람은 칼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가 들고 있는 이 칼은 신룡(神龍)이 내려 준 것이다. 뒤늦게 복종하는 자는 이 칼에 베일 것이요, 신하되기를 거부하는 자는 목이 잘릴 것이다.”
032_0390_c_17L釋種受龍指誨便往行獻烏仗那王躬擧其㲲釋種執其袂而刺之侍臣衛兵諠亂階陛釋種麾劍告曰我所杖劍神龍見授以誅後伏以斬不臣
그러자 모두들 신령스러운 무력에 겁을 먹고 그를 받들어 왕위에 모셨다. 그리하여 나쁜 제도는 개혁하고 정치를 바로 세우고 어진 이를 표창하고 불행한 이를 구제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중들을 움직여서 왕의 수레를 준비하게 하여 곧 용궁에 알려서 용의 딸을 맞아들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032_0390_c_21L咸懼神武推尊大位於是沿弊立政表賢恤患已而動大衆備法駕卽龍宮而報命迎龍女以還都
032_0391_a_02L그런데 용의 딸에게는 지난 세상의 업이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과보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래서 관계를 가질 때마다 머리에서 아홉 개의 용의 머리가 나왔다. 석가족 사람은 이것이 꺼림칙하였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녀가 잠든 틈을 타서 예리한 칼로 머리를 베어 버렸다. 그러자 용녀가 놀라서 깨어나 말하였다.
“이것은 후손에게 좋지 못한 일입니다. 지금 저에게 조그마한 상처를 낸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신의 자손들이 이 일로 인하여 두통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032_0390_c_23L龍女宿業未盡餘報猶在每至宴私首出九龍之頭釋種畏惡莫知圖計伺其寐也利刃斷之龍女驚寐曰斯非後嗣之利非徒我命有少損傷而汝子孫當苦頭痛
그리하여 이 나라의 종족들은 언제나 이런 우환을 겪게 되었는데, 계속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따금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석가족 사람이 죽고 나자 그 아들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 사람이 올달라서나왕(嗢呾羅犀那王)19)당나라 말로는 상군(上軍)이라 한다이다.
032_0391_a_05L故此國族常有斯患雖不連緜時一發動釋種旣沒其子嗣位是嗢呾羅犀那王唐言上軍
상군왕이 왕위를 이은 뒤 그 어머니가 시력을 잃었다. 여래께서 아파라라용(阿波邏羅龍)을 제도하시고 하늘을 날아서 돌아오시다가 그 궁전으로 내려가셨다. 상군왕은 이때 마침 사냥을 하러 나가 있었다. 여래께서 그 어머니를 위하여 간략하게 법의 요체를 설하셨다. 어머니는 성인을 만나 법을 듣게 되자 마침내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여래께서 물으셨다.
“그대의 아들은 나의 종족이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032_0391_a_07L上軍王嗣位之後其母喪明如來伏阿波邏羅龍還也從空下其宮中軍王適從遊獵如來因爲其母略說法要遇聖聞法遂得復明如來問曰汝子我之族也今何所在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아침에 사냥하러 나갔으니 이제 돌아올 것입니다.”
032_0391_a_12L母曰旦出畋遊今將返駕
여래께서 여러 대중들과 함께 곧바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러자 왕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다행히 저는 운이 좋아서 성스러운 종족을 낳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여래께서는 이런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또 친히 이곳에 와 주셨습니다. 제 아들이 이제 돌아올 터이니 부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032_0391_a_13L如來與諸大衆尋欲發引王母曰我惟福遇生育聖族來悲愍又親降臨我子方還願少留
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나의 종족이오. 가르침을 들으면 믿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오. 친히 일러주지 않아도 발심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갈 것이나 아들이 돌아오면 이렇게 말하시오. ‘여래가 이곳에서 구시성(拘尸城) 사라수(娑羅樹) 사이로 가서 열반에 들 것이니 마땅히 사리를 거두어 공양하도록 하라’고 말이오.”
032_0391_a_16L世尊曰斯人者我之族也可聞敎而信悟非親誨以發心我其行矣語之曰如來從此往拘尸城娑羅樹閒入涅槃宜取舍利自爲供養
여래께서는 대중들과 함께 허공을 타고 떠나가셨다. 한편 상군왕은 사냥을 즐기고 있다가 멀리서 궁중을 바라보니 광명이 번쩍이고 있었다. 불이라도 난 것이 아닐까 의아하게 생각하여 서둘러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서 자신의 어머니가 시력을 되찾은 것을 보았다. 왕은 기뻐하면서 물었다.
“제가 궁궐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떤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났기에 능히 어머니로 하여금 다시 예전처럼 광명을 되찾게 하였습니까?”
032_0391_a_19L如來與諸大衆凌虛而去上軍王方遊獵遠見宮中光明赫弈疑有火災罷獵而返乃見其母復明慶而問曰我去幾何有斯祥感能令慈母復明如昔
032_0391_b_02L그러자 어머니가 말하였다.
“그대가 나간 후에 여래께서 이곳에 도착하셨소. 나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침내 다시 빛을 되찾은 것이오. 여래께서는 이곳에서 구시성의 사라나무숲 사이로 가셔서 장차 열반에 드실 것이오. 여래께서는 그대에게 빨리 와서 사리를 나누어 가지도록 명하셨소.”
032_0391_a_23L母曰汝出之後如來至此聞佛說法遂得復明如來從此至拘尸城娑羅樹閒當取涅槃召汝速來分取舍利
왕은 이 말을 듣고 나서 비통하게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그리고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뒤 가마를 빨리 몰도록 명하여 사라쌍수 사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미 열반에 드신 뒤였다. 이때 여러 나라 왕들은 상군왕을 변방의 왕이라 하여 경멸하면서 사리를 보배처럼 중히 여기며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하늘과 인간의 대중들이 부처님의 뜻을 거듭 일러 주었다. 여러 왕들은 이 말을 듣고 나서 마침내 본래대로 균등하게 나누어주었다.
032_0391_b_03L時王聞已悲號頓躄久而醒悟命駕馳赴至雙樹閒佛已涅槃時諸國王輕其邊鄙寶重舍利不欲分與是時人大衆重宣佛意諸王聞已遂先均授
몽게리성의 동북쪽으로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서 신도하(信度河)를 거슬러 올라가면 길이 몹시 험하고 산골짜기가 깊은 곳이 있는데, 어떤 곳은 그물을 밟고 올라야 하고 또 어떤 곳은 쇠줄을 끌어 당겨서 올라야 하는 것도 있다. 잔도(棧道)20)가 허공에 매달려 있고, 비량(飛梁)21)이 위태롭게 걸쳐져 있다. 나무 사다리를 기어올라 그렇게 천여 리를 가다 보면 달려라천(達麗羅川)22)에 이른다. 이곳은 바로 오장나국의 옛 도읍지23)로서 황금24)과 울금향이 많이 난다.
032_0391_b_08L瞢揭釐城東北踰山越谷逆上信度河途路危險山谷杳冥或履緪或牽鐵鎖棧道虛臨飛梁危構杙躡蹬行千餘里至達麗羅川卽烏仗那國舊都也多出黃金及鬱金香
달려라천의 큰 가람 옆에는 나무로 새긴 자씨보살상(慈氏菩薩像)이 있다. 이 보살상은 금색이 눈부시게 찬란하며, 신령스러운 감응이 은밀하게 통하는데 그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한다. 말전저가(末田底迦)25)구역에서는 말전지(末田地)라고 하는데 잘못 줄여진 말이다아라한이 만든 것이다. 아라한이 신통력으로 장인(匠人)을 데리고 도사다천(覩史多天)26)구역에서는 도솔타(兜率他)라고 하거나 또는 도술타(兜術他)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에 올라가 미묘한 모습을 직접 보여 주었으며, 그 이후에도 세 번이나 거듭 보여 준 다음에 일을 마쳤다고 한다. 이 보살상이 생겨난 이후부터 부처님의 법이 동쪽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032_0391_b_12L達麗川中大伽藍側有刻木慈氏菩薩像金色晃昱靈鑑潛通高百餘尺末田底迦舊曰末田地訛略也阿羅漢之所造也羅漢以神通力攜引匠人升睹史多舊曰兜率他也又曰兜術他訛也親觀妙相三返之後功乃畢焉自有此像法流東派
이로부터 동쪽으로 가면 산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신도하를 거슬러 올라가 비량과 잔도를 위태롭게 밟고서 험한 길을 건너면 5백여 리를 지나 발로라국(鉢露羅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032_0391_b_18L從此東行踰嶺越谷逆上信度河飛梁棧履危涉險經五百餘里至鉢露羅北印度境
032_0391_c_02L
2) 발로라국(鉢露羅國)
발로라국27)의 둘레는 4천여 리이며 대설산의 산간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보리와 콩이 많이 나고 금과 은도 난다. 금을 캔 이익으로 인해 국고는 풍요롭다. 기후는 매섭게 추운 날씨만이 이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의 성품도 포악스럽다. 인의(仁義)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고 예절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없다. 생김새는 추하고 초라하며, 모피나 거친 옷을 입는다. 문자는 인도와 대체로 같고 언어28)는 다른 나라들과 차이가 있다. 가람은 수백 곳이 있으며 승도는 수천 명이 된다. 학문은 오롯하게 전문으로 익히는 것이 없으며 계행은 아주 많이 어지럽혀져 있다.
032_0391_b_21L鉢露羅國周四千餘里在大雪山閒東西長南北狹多麥出金資金之利國用富饒時唯寒烈人性獷暴薄於仁義無聞禮節形貌麤弊衣服毛褐文字大同印度言語異於諸國伽藍數百所僧徒數千人學無專習戒行多濫
이곳으로부터 다시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으로 돌아와서 남쪽으로 신도하를 건넌다. 이 강의 폭은 3~4리이며 남쪽으로 흐른다. 물은 비할 데 없이 맑아서 거울처럼 비치고 세차게 흘러 내려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독룡과 사악한 짐승들이 그 속에 굴을 파서 살고 있는데, 진귀한 보배나 꽃과 열매의 씨앗이나 부처님의 사리를 지니고 건너는 자들의 배가 많이 침몰하기도 한다.29) 강을 건너면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30)[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032_0391_c_05L從此復還烏鐸迦漢荼城南渡信度河河廣三四里南流澄淸皎鏡汨淴漂流毒龍惡獸窟穴其中若持貴寶奇花果種及佛舍利渡者舩多飄沒渡河至呾叉始羅國北印度境

3)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
달차시라국의 둘레는 2천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31)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각 세력 집단의 우두머리들이 힘을 겨루고 있지만 왕족의 후사는 끊겨졌다. 옛날에는 가필시국에 속해 있었으나 근래에는 또다시 가습미라국에 복속되어 있다.32)
032_0391_c_09L呾叉始羅國周二千餘里國大都城周十餘里酋豪力競王族絕嗣往者役屬迦畢試國近又附庸迦濕彌羅
토지는 비옥하며 농사의 수확물도 매우 많다. 샘이 많고 꽃과 풀이 무성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풍속은 경박하며 용맹스럽다. 3보를 받들고 있으며, 가람의 수는 비록 많지만 아주 많이 황폐해졌다. 승도는 아주 적은데 모두 대승을 공부하고 있다.
032_0391_c_13L地稱沃壤稼穡殷盛泉流多花草氣序和暢風俗輕勇崇敬三寶藍雖多荒蕪已甚僧徒寡少竝學大
큰 성의 서북쪽으로 70여 리를 가다 보면 의라발달라용왕지(醫羅鉢呾羅龍王池)33)가 있다. 연못의 둘레는 백여 걸음 정도이고 물이 아주 맑으며 온갖 색의 연꽃이 동시에 피어나 이채로움을 더하고 있다. 이 용은 바로 옛날 가섭파부처님 시절에 의라발라(醫羅鉢羅) 나무를 망가뜨린 필추(苾蒭:비구)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우제를 모시거나 맑은 날씨를 빌 경우에는 반드시 사문과 함께 이 연못으로 와서 손가락을 튀기며 위로하는데 그러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게 된다.
032_0391_c_16L大城西北七十餘里有醫羅鉢呾羅龍王池周百餘步其水澄淸雜色蓮花同榮異彩此龍者卽昔迦葉波佛時壞醫羅鉢羅樹苾芻者也故今彼土請雨祈晴必與沙門共至池所彈指慰問隨願必果
용의 연못에서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두 산 사이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에 솔도파가 있다. 이 솔도파는 무우왕이 지은 것으로 높이는 백여 척34)이다. 이것은 석가여래께서 ‘장차 자씨(慈氏)세존이 세상에 날 때 저절로 4대보장(大寶藏)35)이 생겨날 것인데, 이곳이 바로 그 승지(勝地) 가운데 한 곳이 될 것이다’라고 기별하셨던 곳이다.
032_0391_c_21L龍池東南行三十餘里入兩山閒有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高百餘尺是釋迦如來懸當來慈氏世尊出興之時自然有四大寶藏卽斯勝地當其一所
032_0392_a_02L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때는 지진이 일어나서 모든 산들이 흔들리지만 보장(寶藏) 주위로 백여 걸음 안에서는 기울어지거나 흔들리는 것이 없었다. 또 어떤 어리석은 자가 망령되게 발굴하려 했다가 땅이 흔들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두 넘어지고 말았다고도 한다.” 곁에 또 가람이 있는데 허물어진 정도가 매우 심하였으며 승도의 자취는 오래 전에 끊어지고 말았다.
032_0392_a_02L聞諸先志曰或時地震諸山皆動周藏百無所傾搖諸有愚夫妄加發掘爲震動人皆蹎仆傍有伽藍圯損已夂絕僧徒
성에서 북쪽으로 12~13리 떨어진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지은 것이다. 어떤 때는 재일(齋日)에 간혹 빛을 발하거나 신기한 꽃과 하늘의 음악을 듣거나 보는 사람도 있었다.
032_0392_a_06L城北十二三里有窣堵無憂王之建也或至齋日時放光神花天樂頗有見聞
선지(先志)의 말에 의하면, “근래에 어떤 부인이 몸에 악성 종기가 생겼는데 몰래 솔도파에 와서 자신의 행동을 참회하고 예경하였다. 그리고 그 정원에 오물더미가 있는 것을 보고 말끔히 소제하고 향을 바르고 꽃을 뿌렸으며, 푸른 연꽃을 따다가 그 땅에 겹겹으로 깔자 악성질환은 씻은 듯이 나았고 그 모습은 이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뿐만 아니라 몸에는 빼어난 향기가 풍겨 나왔으니 마치 푸른 연꽃 향과도 같은 향이었다. 이곳은 승지(勝地)로서 바로 여래께서 옛날에 이곳에서 보살행을 닦으셨던 곳이다. 대국의 왕이셨을 때 그 호를 전달라발랄파(戰達羅鉢剌婆)당나라 말로는 월광(月光)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왕이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여 머리를 잘라서 베풀었는데, 이와 같이 무려 천 번의 생을 지내오면서 제 몸을 베풀었다고 한다.36)
032_0392_a_08L聞諸先志曰近有婦人身嬰惡癩竊至窣堵波躬禮懺見其庭宇有諸糞穢掬除灑塗香散花採靑蓮重布其地惡疾除愈形貌增姸身出名香靑蓮同馥斯勝地也是如來在昔修菩薩行大國王號戰達羅鉢剌婆唐言月光志求菩提斷頭惠施若此之捨凡歷千生
머리를 베푼 솔도파 옆에 승가람37)이 있는데, 정원은 황폐해지고 황량하며 승도들은 그 수가 줄어들었다. 옛날 경부(經部)38)의 구마라라다(拘摩羅邏多)39)당나라 말로 동수(童受)라고 한다논사가 이곳에서 여러 가지 논을 지었다.40)
032_0392_a_15L捨頭窣堵波側有僧伽藍庭宇荒涼僧徒減少昔經部拘摩羅邏多唐言童受論師於此製述諸論
성의 외곽에서 동남쪽으로 남산(南山)의 북쪽에 탑이 있는데 높이가 백여 척에 달한다. 이것은 무우왕의 태자인 구랑나(拘浪拏)가 계모의 무고(誣誥)로 인하여 눈이 도려내어진 곳으로, 솔도파는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눈이 먼 사람이 기도하고 청하면 시력을 되찾게 되는 일이 많다.
032_0392_a_18L城外東南南山之陰有窣堵波高百餘尺是無憂王太子拘浪拏爲繼母所誣抉目之處無憂王所建也盲人祈請多有復明
이 태자는 정후(正后)의 소생이었는데 풍모가 아름답고 우아하며 어질고 인자하여 그 이름이 어려서부터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정후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후실을 맞아들였는데 그녀는 교만하고 음란하였다. 계모는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었으며 제멋대로 여서 사사로이 태자에게 접근하였다. 태자는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몸을 피하며 사죄하였지만 계모는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태자를 보자 더욱 분노가 치솟았다.
032_0392_a_21L此太子正后生也儀貌姸雅慈仁夙正后終沒繼室憍婬縱其惛愚逼太子太子瀝泣引責退身謝罪母見違彌增忿怒
032_0392_b_02L그리하여 왕이 한가한 틈을 타서 투정을 부리며 말하였다.
“달차시라(呾叉始羅)는 나라의 중요한 영토입니다. 왕의 친지가 아니라면 어찌 맡길 수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태자는 어질고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널리 소문이 나있습니다. 부친께서 어지시기 때문에 항간의 소문이 이렇게 나있는 것입니다.”
032_0392_b_02L候王閑隙從容言夫呾叉始羅國之要領非親子弟其可寄乎今者太子仁孝著聞親賢之故物議斯在
왕은 새 왕비에게 미혹되어 있던 터라 그녀의 말을 듣고서 간사한 꾀에 매우 기뻐하며 즉시 태자에게 명하였다.
“나는 혈통[餘緖]을 이어서 나라를 다스리고 조상의 업을 잇고 있다. 그르쳐서 선왕의 위력에 누(漏)가 되지 않을까 오직 그것만을 염려하고 있다. 달차시라는 나라의 금대(襟帶)41)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 그 나라를 진정시킬 것을 명한다. 국사는 대단히 막중하며 사람의 정은 잡스럽게 어긋나는 것이니 망령되게 행동하여 국가의 기틀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무릇 부르는 명이 있을 때에는 나의 치아 도장[齒印]을 조사하라. 도장이 내 입 안에 있으니 어찌 오류가 있겠느냐?”
032_0392_b_05L王或聞說雅悅奸謀卽命太子而誡之曰吾承餘緖垂統繼業唯恐失墜忝負先王呾叉始羅國之襟帶吾今命爾作鎭彼國國事慇重人情詭雜無妄去就有虧基緖凡有召命驗吾齒印印在吾口其有謬乎
이에 태자는 명을 받아서 진정시키러 갔다. 세월이 오래 지났으나 계모의 분노는 더욱 커져가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조서(詔書)를 꾸며내어 자니(紫泥)42)로 봉인하고서 왕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치아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는 사자를 시켜서 문책서를 보내었다.
032_0392_b_11L於是太子銜命來鎭歲月雖淹繼室彌怒詐發制書紫泥封記候王眠睡竊齒爲印馳使而往賜以責書
태자를 보좌한 신하는 꿇어앉아서 그 문서를 읽다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하였다.
태자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가?”
032_0392_b_13L輔臣跪讀相顧失圖太子問曰何所悲乎
신하가 말하였다.
“대왕께서 칙서를 내리셨는데 태자를 꾸짖고 계십니다. 태자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산골짝으로 추방해 버려서 태자 부부의 생사를 시간에 맡겨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런 명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 믿을 만하겠습니까? 지금은 의당 다시 한번 여쭈어 보시고 두 손을 뒤로 묶고서 죄를 기다리고 계셔야 할 것입니다.”
032_0392_b_15L大王有命書責太子抉去兩逐棄山谷任其夫妻隨時生死有此命尚未可依今宜重請面縛待
태자가 말하였다.
“부친이 죽음을 내리셨는데 어찌 고사할 수 있겠느냐? 치아 도장으로 봉인되어 있으니 이는 실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전다라43)에게 명하여 이 눈을 도려내게 하여라.”
032_0392_b_18L太子曰父而賜死其可辭乎齒印爲誠無謬矣
눈을 도려내자 태자는 이내 실명하고 말았다. 태자 부부는 걸식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정처없이 떠다니다 이윽고 아버지의 도성에 이르게 되었다.
032_0392_b_19L命旃荼羅抉去其眼旣失明乞貸自濟流離展轉至父都
태자의 아내가 일러 주었다.
“이곳은 왕성입니다. 아아, 배고픔과 추위는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옛날에는 왕자이시더니 지금은 걸인이 되었군요. 부디 이 사실을 알리시어 다시 한번 지난번의 질책을 말할 수 있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032_0392_b_21L其妻告曰此是王城嗟乎飢寒良昔爲王子今作乞人願得聞知申先責
이에 꾀를 내어서 궁궐 안에 있는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하여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소리를 길게 빼고 울고 구슬프게 흐느끼면서 공후(箜篌)와 북으로 화음을 이루었다.
032_0392_b_23L於是謀計入王內廏於夜後泣對淸風長嘯悲吟箜篌鼓和
032_0392_c_02L이때 왕은 높은 누각에 있다가 원통하고 비탄에 잠긴 노래 가사의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서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공후와 함께 들려오는 노래 소리는 내 아들의 음성과 비슷한데 지금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가?”
032_0392_b_24L在高樓聞其雅唱辭甚怨悲怪而問箜篌歌聲似是吾子今以何故而來此乎
그리하여 누가 노래하고 탄식을 하는지 마구간으로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마침내 앞을 못 보는 태자가 불려왔고 그리하여 왕과 대면하게 되었다.
032_0392_c_04L卽問內廏誰爲歌嘯遂將盲而來對旨
왕은 태자를 보고 슬픔에 잠겨서 물었다.
“누가 너의 몸을 다치게 했으며 이런 환난을 만나게 하였느냐? 사랑하는 아들이 앞을 못 보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구나. 이런 내가 만백성들을 어찌 살피겠느냐. 오,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제 나의 덕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까?”
032_0392_c_05L王見太子銜悲問曰害汝身遭此禍舋愛子喪明猶自不凡百黎元如何究察天乎天乎德之衰
그러자 태자가 슬피 울면서 절을 하고 답하였다.
“실로 저의 불효를 하늘에 물었습니다.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일에 느닷없이 아버님의 명이 내려왔으니 거절할 이유도 없어 감히 문책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032_0392_c_08L太子悲泣謝而對曰誠以不負責於天某年日月忽奉慈旨由致辭不敢逃責
왕은 마음속으로 후첩의 소행임을 깨닫고서는 자세히 살펴볼 필요도 없이 곧 바로 형벌을 가하였다. 이때 보리수 가람에 구사(瞿沙)44)당나라 말로는 묘음(妙音)이라고 한다대아라한이 있었는데 그는 네 가지 걸림 없는 말솜씨와 3명(明)45)을 갖춘 자였다. 왕은 곧 앞을 못 보는 아들을 데리고 가서 사정을 말하며 오직 바라는 것은 아라한이 자비를 내려 아들이 예전처럼 앞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032_0392_c_10L其王心知繼室爲不軌也無所究察便加刑辟時菩提樹伽藍有瞿沙唐言妙音大阿羅漢者辯無礙三明具足王將盲子陳告其唯願慈悲令得復明
그러자 그 아라한은 왕의 청을 받고서 즉시 그날로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영을 내렸다.
“내가 훗날에 미묘한 이치를 설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모두 그릇 하나씩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법을 들으며 그 그릇에 눈물을 담도록 하라.”
032_0392_c_14L時彼羅漢受王請已卽於是日宣令國人吾於後欲說妙理人持一器來此聽法盛泣淚也
이에 그 나라의 백성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모여들었다. 아라한은 12인연46)을 설하였는데 무릇 이 법을 들은 자로서 슬피 울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던 그릇에 눈물을 담았다.
032_0392_c_17L於是遠近相趍士女雲集是時阿羅漢說十二因緣凡厥聞法莫不悲耿以所持器盛其瀝泣
설법이 끝난 뒤 사람들의 눈물을 모두 모아서 이것을 금쟁반에 담아 두고 아라한은 스스로 맹세하였다.
“무릇 내가 설한 것은 모든 부처님의 지극한 이치입니다. 만일 이 이치가 진실하지 않은 설법이었고 잘못된 것이었다면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부디 이 눈물들이 저 사람의 어두운 눈을 씻어 주어서 다시 광명을 되찾아 예전과 같은 시력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032_0392_c_19L說法旣已摠收衆淚置之金盤而自誓曰凡吾所說諸佛至理理若不眞說有紕繆斯則已矣如其不爾願以衆淚洗彼盲眼眼得復明明視如昔
032_0393_a_02L이렇게 말한 뒤에 눈물을 가져다 그의 눈을 씻게 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마침내 광명을 되찾았다.47) 왕은 이에 그를 보좌하던 신하들을 질책하여 관직에서 내쫓거나 국외로 추방하거나 좌천시키거나 죽였다. 그리고 이 사건과 연루된 모든 호족들은 설산의 동북쪽에 있는 사막으로 이주해 살게 하였다.
032_0392_c_23L發是語訖持淚洗眼眼遂復明王乃責彼輔臣詰諸僚佐或黜或放或遷或死諸豪世俗移居雪山東北沙磧之中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여러 산과 계곡을 지나 7백여 리를 가면 승가보라국(僧訶補羅國)북인도의 경계에 이르게 된다.
032_0393_a_03L從此東南越諸山谷行七百餘里僧訶補羅國北印度境

4) 승가보라국(僧訶補羅國)
승가보라국48)은 둘레가 3천 500~3천 600리에 달하며 서쪽으로는 신도하에 접하고 있다.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14~15리이다. 산과 산봉우리에 의거하고 있으며 견고하고 험준하다. 농사일은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땅에서 수확을 많이 한다. 날씨는 춥고 사람들의 성품도 용맹스럽다. 풍속은 굳세고 용감한 것을 숭상하나 또 속임수가 많다. 나라에는 우두머리가 없으며 가습미라국에 복속되어 있다.
032_0393_a_05L僧訶補羅國周三千五六百里西臨信度河國大都城周十四五里依山據嶺堅峻險固農務少功地利多獲氣序寒人性猛俗尚驍勇又多譎詐國無君長主位役屬迦濕彌羅國
성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장식에 손상이 있기는 하나 예사롭지 않은 기적이 잇달아 일어난다. 곁에는 가람이 있는데 텅 비었으며 승려가 살고 있지 않다. 성의 동남쪽으로 40~50리를 가다 보면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에 이르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높이는 2백여 척에 달한다.
032_0393_a_10L南不遠有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莊飾有虧靈異相繼傍有伽藍空無僧侶城東南四五十里至石窣堵波無憂王建也高二百餘尺
연못이 열 곳 정도 있는데 좌우에서 빛과 경치가 물에 서로 비치며 어우러진다. 돌을 새겨서 둑을 쌓았는데 그 모양이 특이하여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맑은 물살이 세차게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급하게 흘러간다. 용이나 물고기 그 밖의 수족(水族)들이 동굴에 살고 있는데 이 물에서 자맥질하고 헤엄치며 노닌다. 네 가지 색의 연꽃들이 맑은 연못에 가득하게 피어나 있고, 온갖 과일이 풍성하게 영글어 있으며 이채롭다. 숲과 연못이 서로 비치니 참으로 노닐 만하다. 옆에는 가람이 있는데 오래 전에 승려의 자취가 끊겼다.
032_0393_a_14L池沼十數映帶左右雕石爲岸殊形異類激水淸流汩淴漂注龍魚水族窟穴潛泳四色蓮花彌漫淸潭百果具繁同榮異色林沼交映誠可遊玩傍有伽藍久絕僧侶
솔도파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백의외도(白衣外道)의 개조(開祖)49)가 자신이 추구하던 이치를 깨닫고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이 있다. 지금도 그 봉기(封記)가 있으며 곁에 천사(天祠)를 세웠다. 그의 무리들은 밤낮으로 정근(精勤) 고행하며 잠시도 쉬거나 한가하게 노닐지 않는다. 그들의 스승이 설한 법의 대부분은 불경의 뜻을 훔쳐온 것이며, 청법(聽法)의 대상에 따라서 법을 만들고, 궤의도 모방하였다.
032_0393_a_19L窣堵波側不遠有白衣外道本師悟所求理初說法處今有封傍建天祠其徒苦行晝夜精勤遑寧息本師所說之法多竊佛經之隨類設法擬則軌儀
032_0393_b_02L나이든 사람을 필추라고 하고 어린 사람을 사미라고 부르며, 위의와 율행이 자못 승가의 법과 비슷했다. 머리털을 조금 남겨둔 점과 거기에 더하여 벌거벗었다는 점, 어떤 자들은 흰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들 부류의 차이에 의거하여 구분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 천사상(天師像)은 여래의 상을 모방한 것으로 의복에 차이가 있을 뿐 상호(相好)에는 차이가 없다.
032_0393_a_23L大者謂苾芻小者稱沙彌威儀律行頗同僧法留少髮加之露形或有所服白色爲據斯流別稍用區分其天師像類如來衣服爲差相好無異
이로부터 다시 달차시라국의 북쪽 경계로 돌아와서 신도하를 건너 남동쪽으로 2백여 리 가다 보면 큰 돌문을 지나게 된다. 옛날 마하살타 왕자가 이곳에서 제 몸을 던져 굶주린 까마귀[烏擇]에게 먹인 곳이다. 그 남쪽으로는 140~150걸음쯤 걸어가다 보면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다.
032_0393_b_04L從此復還呾叉始羅國北界渡信度河南東行二百餘里度大石門昔摩訶薩埵王子於此投身飤餓烏擇音徒其南百五十步有石窣堵波
이 마하살타는 동물이 너무 굶주린 나머지 먹을 힘마저도 없어진 것을 가엾게 여겼다. 그리하여 걷다가 이곳에 이르러 마른 대나무로 제 몸을 찔러 피를 내어 동물에게 먹였다. 피를 마신 동물들은 그제야 힘을 되찾고 그를 삼켰다고 한다. 이곳의 땅에는 초목들에 이르기까지 엷게 붉은색을 띠고 있는데 이 광경은 마치 피에 얼룩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 땅을 밟으면 마치 뭔가 가시에 찔린 듯한 느낌을 받는데, 의심하는 자이거나 믿는 자이거나 가릴 것 없이 그들은 한결같이 슬픔에 잠기고 처연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032_0393_b_08L摩訶薩埵愍餓獸之無力也行至此地乾竹自刺以血啗之於是乎獸乃噉焉其中地洎諸草木微帶絳色猶血染也履其地若負芒刺無云疑信莫不悲愴
마하살타 왕자가 몸을 베푼 곳으로부터 북쪽에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에 달하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돌을 새긴 솜씨가 매우 빼어나고 때때로 신령스러운 빛을 비치기도 하며 작은 솔도파와 여러 석감(石龕)들은 백여 차례씩 움직이면서 이 유적지50)를 둘러싸고 있는데 병든 사람이 이곳을 빙빙 돌면 대부분 쾌유하게 된다.
032_0393_b_12L捨身北有石窣堵波高二百餘尺憂王之所建也雕刻奇製時燭神光小窣堵波及諸石龕動以百數周此塋域其有疾病旋繞多愈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의 동쪽에 가람이 있는데51) 승도가 백여 명 살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외따로 떨어진 산이 하나 있다. 그 속에는 가람이 있는데 승도가 2백여 명 살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꽃과 열매가 풍성하고 연못이 거울처럼 드맑다. 곁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가 2백여 척에 달한다. 여래께서 옛날 이곳에서 사악한 야차를 교화하여 살코기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
032_0393_b_16L石窣堵波東有伽藍僧徒百餘人學大乘敎從此東行五十餘里至孤中有伽藍僧徒二百餘人竝學大乘法敎花菓繁茂泉池澄鏡傍有窣堵波高二百餘尺是如來在昔於此化惡藥叉令不食肉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5백여 리 가다 보면 오랄시국(烏剌尸國)북인도의 경계에 이른다.
032_0393_b_22L從此東南行五百餘里至烏剌尸國北印度境
032_0393_c_02L
5) 오랄시국(烏剌尸國)
오랄시국52)의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산이 잇달아 이어져 있고 경작지가 매우 좁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7~8리이며 우두머리가 없고 가습미라국에 복속되어 있다.
032_0393_b_23L烏剌尸國周二千餘里山阜連接疇隘狹國大都城周七八里無大君役屬迦隰彌羅國
농사를 짓기에 좋으나 꽃과 열매가 적다. 기후는 온화하고 눈과 서리가 조금 내린다. 풍속은 예의가 없고 사람들의 성품은 강건하고 용맹스럽다. 속임수를 많이 행하고 부처님의 법을 믿지 않는다. 큰 성의 서남쪽으로 4~5리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이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곁에는 가람이 있는데 승려는 아주 적으며 그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032_0393_c_03L宜稼穡少花果氣序溫和微有霜雪俗無禮義人性剛猛多行詭詐不信佛法大城西南四五里有窣堵波高二百餘尺無憂王所建也傍有伽藍僧徒寡少竝皆學大乘法敎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산을 올라가 험난한 길을 걸어서 철교를 건너 천여 리 가다 보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구역에서는 계빈(罽賓)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032_0393_c_08L從此東南登山履險鐵橋行千餘里至迦濕彌羅國舊曰罽賓訛也北印度境

6)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가습미라국53)의 둘레는 7천여 리이며 4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들은 매우 가파르고 험하다. 산을 거쳐 도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또한 매우 좁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웃나라의 적들이 침공하여 정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큰 도성54)은 서쪽으로는 큰 강55)에 접해 있고, 남북으로 12~13리이고 동서로 4~5리이다.
032_0393_c_10L迦濕彌羅國周七千餘里四境負山山極陗峻雖有門徑而復隘狹自古鄰敵無能攻伐國大都城西臨大河南北十二三里東西四五里
농사짓기에 적합하며 꽃과 열매가 풍성하다. 품종이 좋은 말과 울금향, 화주(火珠), 약초가 많이 난다. 기후는 추위가 심하며 눈이 많고 바람이 적다. 모갈(毛褐)을 입으며 흰 모포를 두른다. 풍속은 경박하고 사람들의 성품은 겁약하다. 나라는 용의 보호를 받으며 이로써 마침내 인근 국가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032_0393_c_14L宜稼穡多花果出龍種馬及鬱金香火珠氣序寒勁多雪少風服毛褐衣白土俗輕僄人多怯懦國爲龍護雄鄰境
사람들의 용모는 아름다우나 성품은 속임수를 많이 쓴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많이 들으며,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같이 믿는다. 가람의 수는 백여 곳이고 승도의 수도 5천여 명이다. 네 기의 솔도파가 있는데 모두 무우왕이 세운 것이며, 각각 여래의 사리가 한 되[升] 남짓 안치되어 있다. 『국지(國志)』에 의하면 이 나라는 본래 용이 사는 연못이었다.
032_0393_c_18L容貌姸美情性詭詐好學多邪正兼信伽藍百餘所僧徒五千餘人有四窣堵波竝無憂王建也有如來舍利升餘『國志』曰國地本龍池也
032_0394_a_02L옛날 불세존께서 오장나국으로부터 사악한 신에게 항복받고 나신 뒤 중국(中國)으로 돌아오고자 허공을 타고 오시던 중에 이 나라 상공에 이르셨다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열반에 든 후에 말전저가(末田底迦)아라한이라는 이가 있을 것이니, 장차 이 땅에 나라를 세워 백성들을 안위하게 하고 불법을 널리 펼치리라.”
032_0393_c_22L昔佛世尊自烏仗那國降惡神已欲還中國乘空當此國上告阿難曰我涅槃之後末田底迦阿羅漢當於此地建國安弘揚佛法
여래께서 적멸에 드신 후 50년 되던 해에 아난의 제자인 말전저가아라한은 6신통(神通)을 얻고 8해탈(解脫)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께서 기별하신 것을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곧 이곳의 큰 산꼭대기에 이르러 숲 속에서 참선에 들어 있었다. 그러던 중 커다란 신통력을 나타내니, 용이 이것을 보고 깊은 믿음을 내어 원하는 것을 해드리겠노라고 청하였다.
032_0394_a_03L如來寂滅之後第五十阿難弟子末田底迦羅漢者得六神通具八解脫聞佛懸記心自慶悅便來至此於大山嶺宴坐林中現大神變龍見深信請資所欲
그러자 아라한이 말하였다.
“부디 연못 안에 내 무릎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주시오.”
032_0394_a_07L阿羅漢曰願於池內惠以容膝
그러자 용왕은 물을 조금 덜어내어서 그만한 자리를 마련하여 아라한에게 바쳤다. 하지만 아라한은 이에 신통력을 내어 몸을 좀 더 크게 불렸다. 그러자 용왕은 힘껏 물을 더 덜어냈다. 결국 연못은 텅 비어버리고 물은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용이 자신의 못을 달라고 청하게 되었다. 아라한은 이에 서북쪽에 연못 하나를 남겨두었는데 둘레가 백여 리에 달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권속들에게는 따로 작은 연못에서 살게 해 주었다.
032_0394_a_08L龍王於是縮水奉施羅漢神通廣身龍王縱力縮水池空水盡龍翻請地阿羅漢於此西北爲留一池周百餘里自餘枝屬居小池
용왕이 말하였다.
“연못의 땅을 모두 베풀어 드렸습니다. 부디 언제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龍王曰池地摠施願恒受供
말전저가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 머지않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 것이다. 그대의 청을 받고 싶기는 하나 어찌 가능하겠는가?”
032_0394_a_12L末田底迦曰我今不久無餘涅槃欲受請其可得乎
용왕이 거듭 청하였다.
“5백 나한은 언제나 저의 공양을 받을 것이며 법이 다하는 날까지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법이 다한 뒤에는 이 나라를 다시 거두어들여서 제가 사는 연못으로 만들겠습니다.”
032_0394_a_14L龍王重請五百羅漢常受我供乃至法盡法盡之後取此國以爲居池
말전저가는 그 용의 청을 따랐다. 그리하여 아라한은 그 땅을 얻고 난 뒤에 큰 신통력을 부려서 5백 개의 가람을 세웠는데, 다른 여러 나라에서 천민을 사서 부역을 시켰다. 그리하여 이로써 승가 대중을 공양하였다. 말전저가가 적멸에 든 후 천민들은 스스로 우두머리를 세웠다. 그러나 인근의 여러 나라들은 이들의 비천한 종족을 경멸하며 글리다(訖利多)56)당나라 말로는 매득(買得)이라고 한다라고 부르면서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따금 샘의 물이 많아져서 범람하는 일이 있다.
032_0394_a_16L末田底迦從其所請時阿羅漢旣得其地運大神通力五百伽藍於諸異國買鬻賤人以充役使以供僧衆末田底迦入寂滅後彼諸賤人自立君長鄰境諸國鄙其賤種莫與交親謂之訖利多唐言買得今時泉水已多流濫
032_0394_b_02L마게타국(摩揭陀國)은 무우왕이,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지 백 년째 되던 해에 군왕의 자리에 올라 백성을 다스렸는데 그 위력은 다른 나라에까지도 미쳤다. 그는 3보를 깊이 믿고 4생(生)을 자애롭게 길렀다. 이때 오백 나한승(羅漢僧)과 오백 범부승(凡夫僧)57)이 있었는데, 왕은 이들을 공경하고 받들면서 차별을 두지 않고 공양을 올렸다. 범부승 가운데 마하제바(摩訶提婆)당나라 말로는 대천(大天)이라고 한다라고 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지혜로웠으며, 조용하게 명실(名實)의 이치를 추구하며 깊이 사유하여 논을 지었지만, 그 이치는 성스러운 가르침에 어긋나 있었다. 무릇 다소의 지식이 있는 자들이 무리지어 이 이론(異論)을 따랐다.
032_0394_a_22L摩揭陁國無憂王以如來涅槃之後第一百年命世君臨威被殊俗深信三寶愛育四生時有五百羅漢僧百凡夫僧王所敬仰供養無差有凡夫僧摩訶提婆唐言大天闊達多智幽求名實潭思作論理違聖敎凡有聞知群從異議
한편 무우왕은 범부와 성현의 구별을 하지 못하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좋아하였는데, 친한 자들의 역성을 들어 주려고 승도들을 모두 불러 모아 긍가하로 몰고 가 깊은 강물에 빠뜨려 죽여버리려고 하였다. 나한들은 목숨이 위태로움을 알고 나서 모두 신통력을 부려서 허공을 타고 올라 이 나라(가습미라국)에 와서 산골 깊숙이 은거하였다.58) 그러자 무우왕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몸소 찾아와서 허물을 사죄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나한들은 요지부동하여 왕의 청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무우왕은 나한들을 위하여 5백 곳의 승가람을 지었으며 이 나라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중승들을 공양하게 하였다.
032_0394_b_06L無憂王不識凡同情所黨援所親召集僧徒赴殑伽河沈深流摠從誅戮時諸羅漢旣逼命咸運神通凌虛履空來至此國棲谷隱時無憂王聞而懼躬來謝過請還本國彼諸羅漢礭不從命無憂王爲羅漢建五百僧伽藍摠以此國持施衆僧
건타라국의 가니색가왕은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4백년 째 되던 해에 천운(天運)을 타고 군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왕의 위풍은 멀리에까지 미쳤으며 모든 나라들이 복속하게 되었다. 왕은 나라 일을 돌보는 틈틈이 언제나 불경을 익혔으며 날마다 승려 한 사람을 청하여 궁 안으로 모셔다 법을 설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논의들이 난립하여 부파마다 같지 않자, 왕은 깊은 의혹에 빠졌으나 미혹을 제거할 길이 없었다.
032_0394_b_13L健馱邏國迦膩色迦王如來涅槃之後第四百年應期撫運王風遠被殊俗內附機務餘暇每習佛經日請一僧入宮說法而諸異議部執不同王用深疑無以去惑
이때 협존자가 말하였다.
“여래께서 세상을 버리신 지 세월이 아득하게 흘렀습니다. 제자들은 부파를 만들었고 스승과 제자는 다른 주장을 하며 제각기 보고들은 바에 의거하니 한결같이 모순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032_0394_b_17L時脅尊者曰如來去世歲月逾邈弟子部師資異論各據聞見共爲矛楯
그러자 왕이 이 말을 듣고 나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오래도록 비탄에 잠겨 있다가 존자에게 말하였다.
“외람되게도 여복(餘福)이 있어 선조의 유업을 이어 받고 있소. 부처님께서 비록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으나 아직은 행운이 있었소.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법의 가르침을 잇고자 하니, 그 부파에 따라서 자세하게 3장을 해석하시오.”
032_0394_b_19L王聞已甚用感傷悲歎良久謂尊者猥以餘福聿遵前緖去聖雖遠爲有幸敢忘庸鄙紹隆法敎隨其部具釋三藏
협존자가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지난 세상에 선의 근본을 심으셔서 참으로 많은 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법에 마음을 두시니 이것은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032_0394_b_23L脅尊者曰大王宿殖善多資福祐留情佛法是所願也
032_0394_c_02L왕은 곧 4방에 널리 영을 내려서 모든 성현과 철인들을 불러모았다. 이에 4방 만 리 밖에서도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으니 뛰어난 지혜를 가진 자나 빼어난 성현들 할 것 없이 모두가 모여들었다. 왕은 이들에게 7일 동안에 걸친 4사공양(事供養)59)을 마치고 난 뒤에 법에 관한 의논을 하고자 하였지만 어수선한 소란이 일어날 것이 걱정스러웠다.
032_0394_b_24L乃宣令遠近召集聖哲於是四方輻萬里星馳英賢畢萃睿聖咸集七日之中四事供養旣欲法議恐其諠雜
왕은 곧 세심하게 생각하고 나서 승려들에게 말하였다.
“성과(聖果)를 증득한 사람은 남고 번뇌에 얽매여 있는 자는 돌아가시오.”
032_0394_c_05L王乃具懷白諸僧曰證聖果者具結縛者還
이렇게 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다시 명을 내렸다.
“무학인(無學人)은 남고 유학인(有學人)은 돌아가시오.”
032_0394_c_06L如此尚衆又重宣令無學人住有學人還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또다시 명을 내렸다.
“3명(明)을 갖추고 6통(通)을 지닌 자는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가시오.”
032_0394_c_07L猶復繁多又更下令具三明備六通者住自餘各還
하지만 사람들은 줄어들 줄 몰랐다. 그래서 또다시 명령을 내렸다.
“이 중에 안으로는 3장(藏)을 궁구하고 밖으로는 5명(明)에 통달한 자는 남고 그렇지 않은 자는 돌아가시오.”
032_0394_c_08L然尚繁多又更下令其有內窮三藏外達五明者住自餘各還
그리하여 마침내 499명이 남게 되었다. 왕은 본국에서 이 일을 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덥고 습기가 많아 고생스러웠다.
032_0394_c_10L於是得四百九十九人王欲於本國苦其暑濕
또 왕은 왕사성의 대가섭파가 결집한 석실60)에서 하고 싶어서 협존자 등과 상의하였지만 그들이 말하였다.
“안 됩니다. 그곳에는 외도들이 많고 이론(異論)들이 난립하여 그들과 대론하여 답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터인데 어떻게 논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대중들은 이 나라(가습미라국)에서 할 것을 뜻에 두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4방이 산으로 견고하게 둘러싸여 있고 또 야차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지가 비옥하며 생산물도 풍성합니다. 또한 성현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신선들이 노니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뜻도 이럴 것입니다.”
032_0394_c_11L又欲就王舍城大迦葉波結集石室脅尊者等議曰不可彼多外道異論糾紛酬對不暇何功作論衆會之心屬意此國此國四周山固藥叉守衛土地膏腴物產豐盛聖賢之所集往靈仙之所遊止
그러자 모두들 말하였다.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衆議斯在僉曰允諧
이에 왕은 여러 나한들과 더불어 그곳(건타라국)으로부터 가습미라국에 와서 가람을 세우고 3장을 결집하고 『비바사론』을 짓고자 하였다.
032_0394_c_17L其王是時與諸羅漢自彼而至建立伽藍結集三藏欲作『毘婆沙論』
이때 존자 세우(世友)는 문 밖에서 옷을 깁고 있었는데 아라한들이 세우에게 말하였다.
“번뇌가 아직 제거되지 못한 자는 청정한 논의를 일그러뜨린다. 너는 여기서 멀리 가거라. 이곳에 있지 말라.”
032_0394_c_19L是時尊者世友戶外納衣諸阿羅漢謂世友曰結使未除淨議乖謬爾宜遠迹勿居此也
세우가 말하였다.
“여러 현자들께서는 법에 대해서 의심이 없으셔서 부처님을 대신해서 교화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이제 바야흐로 대의(大義)를 모으셔서 바른 논을 짓고자 하시는군요. 비록 제가 명민하지는 못하나 부처님의 미묘한 말씀을 대충이나마 터득하였으며, 3장의 현묘한 문장과 5명(明)의 지극한 이치까지도 자못 깊이 연구하여 그 취지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032_0394_c_22L世友曰諸賢於法無疑佛施化方集大義欲製正論我雖不粗達微言三藏玄文五明至理亦沈硏得其趣矣
032_0395_a_02L여러 나한들이 말하였다.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너는 은둔하여 하루 빨리 무학(無學)을 증득하라. 그 후에 이곳에서 만나자. 그래도 때는 아직 늦지 않을 것이다.”
032_0395_a_02L諸羅漢曰言不可以若是汝宜屛居疾證無學已而會時未晩也
세우가 말하였다.
“나는 무학을 마치 눈물이나 콧물과 같다고 봅니다. 뜻을 불과(佛果)에 두고 구하였지만 작은 길을 달리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이제 이 실 꾸러미[縷丸]를 공중에 던지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반드시 무학의 성과(聖果)를 증득할 것입니다.”
032_0395_a_04L世友曰我顧無學其猶涕唾志求佛果不趍小徑擲此縷丸未墜于地必當證得無學聖果
그러자 아라한들은 거듭 이를 질책하며 말하였다.
“증상만(增上慢)61)에 가득 찬 사람이란 바로 이 자를 두고 하는 말이로다. 무학과(無學果)란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바이니 마땅히 속히 증득해서 대중들의 의심을 풀어야 할 것이다.”
032_0395_a_06L時諸羅漢重訶之曰增上慢人斯之謂也無學果者諸佛所讚宜可速證以決衆疑
이에 세우가 실 꾸러미를 공중에 던졌다. 그러자 여러 천신들은 실 꾸러미를 받고서 청하였다.
“바야흐로 불과를 증득하실 것이며, 다음에 자씨보살(미륵보살)을 이어 삼계에서 가장 존귀하고 4생(生)의 의지처가 되실 분이 어찌하여 이곳에서 소과(小果)를 증득하시고자 합니까?”
032_0395_a_09L於是世友卽擲縷丸空中諸天接縷丸而請曰方證佛果次補慈氏三界特尊四生攸賴如何於此欲證小果
이에 모든 아라한들은 이 일을 보고 나서 자신의 허물을 사과하고 그 덕을 추앙하여 상좌로 모셨으며 의심나는 모든 내용을 결정하도록 하였으니, 이들이 바로 5백 명의 현성들이다.
032_0395_a_12L時諸羅漢見是事已謝咎推德請爲上座凡有疑議咸取決焉是五百賢聖
먼저 『십만송오바제삭론(十萬頌鄔波第鑠論)』구역에서는 『우바제사론(優波提舍論)』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지어서 소달람장(素呾纜藏)구역에서는 수다라장(修多羅藏)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해석하였고, 이어서 『십만송비나야비바사론(十萬頌毘奈耶毘婆沙論)』을 지어서 비나야장(毘奈耶藏)구역에서는 비나야장(毘那耶藏)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해석하였으며, 나중에 『십만송아비달마비바사론(十萬頌阿毘達磨毘婆沙論)』을 지어서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또는 아비담장(阿毘曇藏)이라고 하는데 간략히 말한 것이다을 해석하였다.
032_0395_a_15L先造十萬頌『鄔波第鑠論』舊曰『優波提舍論』訛也釋『素呾纜藏』舊曰『修多羅藏』訛也次造十萬頌『毘奈耶毘婆沙論』釋『毘奈耶藏』舊曰『毘那耶藏』訛也後造十萬頌『阿毘達磨毘婆沙論』釋『阿毘達磨藏』或曰『阿毘曇藏』略也
대략 30만 송(頌) 960만 어(語)로써 자세하게 3장을 풀이하여 이것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였다. 지엽적인 면까지 궁구하였고 깊은 부분과 얕은 부분[深淺]을 두루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대의(大義)가 거듭 밝혀졌고 미묘한 말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그리하여 두루 널리 유포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에 의거하게 되었다.
032_0395_a_18L凡三十萬頌九百六十萬言備釋三藏諸千古莫不窮其枝葉究其淺深義重明微言再顯廣宣流布後進賴
032_0395_b_02L가니색가왕은 적동(赤銅)으로 철판을 만들어서 논장의 글을 베껴 새기고 석함(石函)에 넣어서 봉하여 솔도파를 세워 그 속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야차에게 명하여 이 나라를 호위하여 이학(異學)들로 하여금 이 논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도록 명하였으며, 배우고 익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곳에서 학업을 배우고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성공리에 마친 뒤 본국의 수도로 돌아온 뒤 이 나라의 서문(西門) 밖으로 나가 동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어앉으니, 다시 한번 이 나라를 승도(僧徒)에 보시하게 된 것이다.62)
032_0395_a_22L迦膩色迦王遂以赤銅爲鍱鏤寫論文石函緘封建窣堵波藏於其中命藥叉神周衛其國不令異學持此論出欲求習學就中受業於是功旣成畢還軍本都出此國西門之外面而跪復以此國摠施僧徒
가니색가왕이 죽고 난 뒤에 글리다 종족이 다시 스스로 왕을 칭하며 승도들을 내쫓고 불법을 무너뜨렸다. 한편 도화라국(都貨邏國)의 희마달라왕(呬摩呾羅王)당나라 말로는 설산하(雪山下)라고 한다의 선조는 석가 종족이다. 그는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6백 년째 되었을 때 크게 강토(疆土)를 장악하고 왕업을 이었는데, 마음을 부처님 땅에 심었고 정(情)은 법의 바다로 흐르게 하였다. 그런데 글리다가 부처님의 법을 훼멸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온 나라의 용감한 병사 3천 명을 모았다. 그리하여 무역을 위해 여행하는 것처럼 속여 보배와 재물을 많이 지니고 그 속에 무기를 숨겨서 이 나라로 들어왔다.
032_0395_b_04L迦膩色迦王旣死之後訖利多種復自稱王斥逐僧徒毀壞佛法睹貨邏國呬摩呾羅王唐言雪山下其先釋種也以如來涅槃之後第六百年光有疆土嗣膺王樹心佛地流情法海聞訖利多毀滅佛法招集國中敢勇之士得三千詐爲商旅多齎寶貨挾隱軍器入此國
이 나라의 군주는 특별히 극진하게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었다. 장사꾼 행렬 중에서 또다시 5백 명의 용맹하고 꾀가 많은 자들을 특별히 선발하였는데, 그들은 각자 예리한 칼을 소매에 숨기고는 귀중한 보배를 갖고 갔다. 그리하여 몸소 진상 올릴 것을 가져가 그것을 왕에게 헌상하였다. 이때 설산하왕이 그 덮개를 없애고 곧 자리에 오르니 글리다왕이 이것을 보고 놀라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산하왕은 마침내 글리다왕의 목을 베고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바로 도화라국의 설산하왕이다. 이 비천한 종족이 공공연하게 학정을 자행하는 것에 분노하여 이제 그 죄인을 주살한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다.”
032_0395_b_12L此國之君特加賓禮商旅之又更選募得五百人猛烈多謀䄂利刃俱持重寶躬齎所奉持以獻時雪山下王去其帽卽其座訖利多王驚懾無措遂斬其首令群下曰是睹邏國雪山下王也怒此賤種公行虐政故於今者誅其有罪凡百衆非爾之辜
그 나라의 신하들은 다른 나라로 유배를 보냈다. 이 나라가 평정되자 승도들을 불러 모으고 가람을 세워 예전과 같이 평안을 찾았다. 또한 다시 이 나라 서문(西門) 밖에서 동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승려들에게 보시를 베풀었다. 하지만 이 글리다 종족은 여러 차례 승도들이 종문(宗門)을 뒤덮고 제사를 없애자 대대로 원한이 쌓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법을 혐오하게 되었다. 세월이 오래 지나자 다시 왕이라고 스스로 일컫는 자가 나왔다. 그러므로 지금 이 나라에는 부처님의 법을 숭앙하고 믿는 자가 거의 없으며 외도와 천사(天祠)에 특히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다.
032_0395_b_19L然其國輔宰臣遷於異旣平此國召集僧徒式建伽藍堵如故復於此國西門之外東面而持施衆僧其訖利多種屢以僧徒覆宗滅祀世積其怨嫉惡佛法歲月旣遠復自稱王故今此國不甚崇信外道天祠特留意焉
032_0395_c_02L새로운 성63)의 동남쪽으로 10여 리 가다 보면 옛 성의 북쪽에 큰 산이 있는데 그 산의 남쪽에 승가람이 있고 승도는 3백여 명 있다. 그 솔도파 속에는 부처님의 치아가 있는데 길이는 1촌 반은 됨직하고 황백색이다. 어떨 때는 재일(齋日)이 되면 때때로 광명을 발하기도 한다. 옛날 글리다 종족들이 불법을 파괴시키자 제각기 형편에 맞는 거처를 찾아 흩어졌다.
032_0395_c_02L新城東南十餘故城北大山陽有僧伽藍僧徒三百餘人其窣堵波中有佛牙長可寸其色黃白或至齋日時放光明訖利多種之滅佛法也僧徒解散隨利居
이때 한 사문이 인도 곳곳을 옮겨다니면서 부처님의 유적을 참배하였다. 그는 지극한 정성을 올리다가 후에 본국이 평정되었다는 소문을 듣고서 즉시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런데 도중에 코끼리 떼들이 늪지를 제멋대로 오가고 성난 듯이 달리거나 울부짖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사문은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가 피신하였다. 그러자 코끼리떼들은 경주하듯이 달려가 연못의 물을 앞다투어 빨아 마시고서 사문이 피신해 있는 나무 뿌리를 적시더니 흙을 파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나무가 쓰러지자 코끼리들은 사문을 싣고 큰 숲 속으로 들어갔다.
032_0395_c_07L有一沙門遊諸印度觀禮聖申其至誠後聞本國平定卽事歸遇諸群象撗行草澤奔馳震吼門見已昇樹以避是時群象相趨奔競吸池水浸漬樹根互共排掘遂蹎仆旣得沙門負載而行至大林
그곳에는 병든 코끼리가 있었는데 상처로 고통스러워 하며 누워있었다. 그의 손을 이끌어 상처에 올려놓았더니 그곳에는 마른 대나무가 박혀 있었다. 사문은 곧 대나무를 뽑고 약을 발라준 뒤 옷을 찢어서 그 상처가 난 발을 싸매 주었다. 그러자 다른 큰 코끼리가 금 궤짝을 가지고 오더니 병든 코끼리에게 주었다. 코끼리는 그것을 받아들고 다시 사문에게 주었다. 사문이 궤짝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부처님의 치아가 들어있었다. 코끼리들이 호위하고 있어 스님은 그곳을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032_0395_c_13L有病象瘡痛而臥引此僧手至所苦處乃枯竹所刺也沙門於是拔竹傅藥裂其裳裹其足別有大象持金函授與病象象旣得已轉授沙門門開函乃佛牙也諸象圍繞僧出無
다음날 밥 먹을 때가 되자 코끼리들은 제각기 다양한 과일을 가지고 와 그것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친 다음 코끼리들은 스님을 싣고 숲을 빠져나가 수백 리 떨어진 곳에 내려 주더니 각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뒤에 떠나갔다.
032_0395_c_18L明日齋時各持異果以爲中饌載僧出林數百里外方乃下之跪拜而去
이윽고 나라의 서쪽 경계에 도착한 사문은 급류를 건너게 되었다. 그런데 강 중류쯤에 이르렀을 때 배가 전복되려고 하였다. 같이 배에 탔던 사람들이 저마다 서로 말하였다.
“지금 배가 뒤집어지려는 것은 사문이 탔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틀림없이 여래의 사리가 있을 것이다. 용들이 이것을 가지려고 다투기 때문에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032_0395_c_20L沙門至國西界渡一駃河濟乎中流舩將覆沒同舟之人互相謂曰今此舩覆禍是沙門必有如來舍利諸龍利之
선장이 조사해 보니 과연 부처님의 치아가 있었다. 그러자 사문은 부처님의 치아를 들고서 몸을 구부려 용에게 말하였다.
“내가 지금 이것을 너에게 맡기나 오래지 않아서 가지러 올 것이다.”
032_0395_c_23L舩主撿驗果得佛牙時沙門擧佛牙俯謂龍曰吾今寄汝不夂來取
그러나 끝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배는 방향을 돌려서 돌아갔다.
遂不渡河迴舩而去
032_0396_a_02L사문은 강을 돌아보며 한탄하여 말하였다.
“내게는 용을 막을 주술이 없구나. 용이라는 축생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다시 인도로 가서 용의 해악을 막는 법을 배워야겠다.”
032_0396_a_02L顧河歎曰吾無禁術龍畜所欺
3년이 지난 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그 강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단을 설치하자 그 용이 나타나 부처님의 치아가 든 궤짝을 사문에게 바쳤다. 마침내 사문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이에 이 가람에 공양을 올리게 된 것이다.
032_0396_a_03L重往印度學禁龍法三歲之後復還本國至河之濱方設壇場其龍於是捧佛牙函以授沙門沙門持歸於此伽藍而修供養
가람의 남쪽으로 14~15리 가다 보면 작은 가람이 있다. 그곳에는 관자재보살의 입상(立像)이 있는데 만일 단식을 하고 죽기를 맹세하며 보살을 보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상에서 묘한 색의 자태가 나온다.
032_0396_a_07L伽藍南十四五里有小伽藍中有觀自在菩薩立像其有斷食誓死爲期願見菩薩者卽從像中出妙色身
작은 가람의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큰 산에 이른다. 그곳에는 옛가람이 있는데 그 제작법과 모습은 아주 장엄하지만 잡초만 심하게 우거져 있으며 현재는 다만 한 편에 작은 중각이 서 있는데 승도의 수는 30여 명이다. 그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옛날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64)당나라 말로는 중현(衆賢)이다논사가 이곳에서 『순정이론(順正理論)』을 지었다. 가람의 좌우에는 여러 솔도파가 있는데 그 속에는 모두 대아라한의 사리가 들어있다.
032_0396_a_10L小伽藍東南三十餘里至大山有故伽藍形製宏壯蕪漫良甚今唯一隅起小重閣僧徒三十餘人竝學大乘法敎昔僧伽跋陁羅唐言衆賢論師於此製『順正理論』伽藍左右諸窣堵波阿羅漢舍利竝在
들짐승이나 산원숭이들이 꽃을 따다가 공양을 하는데 해마다 마치 명령을 받아서 하는 것처럼 변함없이 공양을 올린다. 그런데 이 산 속에는 여러 가지 신령스러운 기적이 많이 일어나는데 어떤 때는 석벽(石壁)이 가로로 쪼개지기도 하고 봉우리에 말의 자취가 남겨져 있기도 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그 형태가 괴이하였다. 모두가 바로 아라한과 사미들이 무리를 이루어 노닐다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말을 타고 오간 것이다. 이와 같은 유적들은 자세하게 기술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032_0396_a_16L野獸山猿採花供歲時無替如承指命然此山中多諸靈迹或石壁撗分峯留馬迹凡厥此類其狀譎詭皆是羅漢沙彌群從遊戲手指麾畫乘馬往來遺迹若斯難以詳述
부처님의 치아가 모셔진 가람에서 동쪽으로 10여 리를 가다 보면 북쪽 산 낭떠러지 사이에 작은 가람이 있는데 옛날 색건지라(索建地羅) 대논사65)가 이곳에서 『중사분비바사론(衆事分毘婆沙論)』을 지었다.
032_0396_a_21L佛牙伽藍東十餘里北山崖間有小伽藍是昔索建地羅大論師於此『衆事分毘婆沙論』作
032_0396_b_02L작은 가람 안에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50여 척이다. 이곳에는 아라한의 유신사리(遺身舍利)가 안치되어 있다. 옛날에 어떤 아라한이 있었는데 그의 몸집은 매우 컸고 그가 먹는 음식은 코끼리의 양과 똑같았다.
032_0396_a_23L小伽藍中有石窣堵波高五十餘尺是阿羅漢遺身舍利也先有羅漢量偉大凡所飮食與象同等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며 말하였다.
“하릴없이 포식할 줄만 아니 어찌 옮고 그름을 가리겠느냐?”
032_0396_b_03L時人譏徒知飽食安識是非
그 아라한이 장차 적멸에 들게 되자 사람들에게 일렀다.
“내가 이제 오래지 않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들게 되니 내 몸이 증득한 묘법(妙法)을 설하고자 한다.”
032_0396_b_04L羅漢將入寂滅也告諸人曰吾今不夂當取無餘欲說自身所證妙法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서로 비웃음치며 모두들 과연 그 말대로 이루어질지 보려고 모여들었다. 그러자 아라한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본생인연(本生因緣)을 설하겠다. 이 몸의 전신은 코끼리 몸이었고 동인도의 한 왕궁의 코끼리 우리에 살고 있었다. 마침 이 나라에 어떤 사문이 있었는데 그는 멀리에서부터 인도로 유행하면서 성스러운 가르침과 여러 경전과 논서를 두루 찾아다녔다. 이때 왕이 나를 사문에게 보시하면서 불경을 짊어지고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을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032_0396_b_06L衆人聞之相更譏笑咸來集會共觀得失時阿羅漢告諸人曰吾今爲汝說本因緣此身之前報受象身在東印度居王內廏是時此國有一沙門遠遊印度尋訪聖敎諸經典論時王持我施與沙門載負佛經而至於此
그 후 오래지 않아 나는 목숨을 마쳤고, 경을 싣고 간 복덕의 힘으로 마침내 인간의 몸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복덕을 심은 덕에 일찍이 법복을 입게 되었으며 부지런히 해탈을 구하여 잠시도 편하게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6신통을 얻고 삼계의 탐욕을 끊었다. 하지만 먹는 것은 이전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었으므로 언제나 스스로 몸을 조절하여 3분의 1만을 먹었다.”
032_0396_b_12L是後不久尋卽命終乘其載經福力所致遂得爲人復鍾餘慶早服染衣勤求出離不遑寧居得六神通斷三界欲然其所食餘習尚然每自節身三分食一
이렇게 말하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문은 허공으로 올라가 화광정(火光定)66)에 들어서 몸에서 연기와 불꽃을 내뿜더니 적멸에 들었다. 남은 유해가 아래로 떨어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거두어서 솔도파를 세운 것이다.
032_0396_b_16L雖有此說人猶未信卽昇虛空入火光定身出煙焰而入寂滅餘骸墜下起窣堵波
왕성의 서북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상림(商林)가람에 이른다. 포라나(布剌拏)67)당나라 말로는 원만(圓滿)이라고 한다논사가 이곳에서 『석비바사론(釋毘婆沙論)』을 지었다.
032_0396_b_19L王城西北行二百餘里至商林伽藍布剌拏唐言圓滿論師於此作『釋毘婆沙論』
성의 서쪽으로 140~150리를 가다 보면 큰 강이 나오는데 북쪽으로 산을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가다 보면 대중부(大衆部)가람에 이른다. 승도는 백여 명 있으며 옛날 불지라(佛地羅)논사68)가 이곳에서 『대중부집진론(大衆部集眞論)』을 지었다.
032_0396_b_21L城西行百四五十里大河北接山南至大衆部伽藍僧徒百餘人昔佛地羅論師於此作大衆部『集眞論』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산을 넘고 험한 길을 지나서 7백여 리 가다 보면 반노차국(半笯奴故反嗟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032_0396_b_23L從此西南踰山涉險行七百餘里半笯奴故反嗟國北印度境
032_0396_c_02L
7) 반노차국(半笯嗟國)
반노차국69)의 둘레는 2천여 리이며 산과 강이 많고 경작지는 좁다. 농사는 때에 맞추어 씨 뿌리며 꽃과 열매는 풍성하다. 사탕수수가 많이 나고 포도가 없다. 집집마다 암몰라과(菴沒羅菓)ㆍ오담발라(烏淡跋羅)ㆍ무차(茂遮) 등의 과일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는데 그 맛은 매우 진기하다.
032_0396_c_02L半笯嗟國周二千餘里山川多疇壟穀稼時播花菓繁茂多甘蔗無蒱菴沒羅菓烏淡跋羅茂遮等菓植成林珍其味也
기후는 따뜻하고 더우며 풍속은 용맹하고 강렬하다. 의복의 재료로 대부분 모포를 사용하여 입는다. 사람들의 성품은 질박하고 솔직하며 3보를 깊이 믿는다. 가람은 다섯 곳 있으며 대부분 황폐해졌다. 군주가 없으며 가습미라국에 복속되어 있다. 성의 북쪽에 가람이 있는데 승도는 아주 적다. 가람의 북쪽에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실로 신령스러운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032_0396_c_06L氣序溫暑風俗勇裳服所製多衣㲲布人性質直信三寶伽藍五所竝多荒圯無大君役屬迦濕彌羅國城北伽藍少有僧徒伽藍北有石窣堵波寔多靈異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4백여 리를 가다 보면 갈라사보라국(曷邏闍補羅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032_0396_c_10L從此東南行四百餘里至曷邏闍補羅國北印度境

8) 갈라사보라국(遏70)邏闍補羅國)
갈라사보라국71)의 둘레는 4천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매우 험하고 견고하며 산이 많다. 강의 원천은 매우 좁고 지리(地利)는 풍요롭지 못하다. 토양과 기후는 반노차국과 같고 풍속은 용맹하고 강렬하며 사람들의 성품은 경박하고 용맹스럽다. 나라에는 군주가 없으며 가습미라국에 복속되어 있다.
032_0396_c_12L曷邏闍補羅國周四千餘里國大都城周十餘里極險固多山阜川原隘地利不豐土宜氣序同半笯嗟國風俗猛烈人性驍勇國無君長役屬迦濕彌羅國
가람은 열 곳이 있으며 승도는 매우 적다. 천사(天祠)가 한 곳 있는데 외도는 매우 많다. 남파국으로부터 이 땅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사람들의 생김새는 초라하고 초췌하며 성품은 난잡하고 거칠다. 말도 비천하고 예의가 경박하니 인도의 바른 경계라 할 수 없으며 변방 오랑캐의 비뚤어진 풍속인 것이다.
032_0396_c_17L伽藍十所僧徒寡少祠一所外道甚多自濫波國至於此形貌麤弊情性猥暴語言庸鄙義輕薄非印度之正境乃邊裔之曲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산을 내려가 물을 건너 7백여 리를 가다 보면 책가국(磔迦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72)
032_0396_c_21L從此東南下山渡水行七百餘里至磔迦國北印度境
大唐西域記卷第三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범어로는 Uḍḍiyāna, Oḍḍiyāna이며 지금의 스와트강 유역 지방이다. 간다라 지방과는 하나의 산맥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Malakand, Karakar의 두 산 고개로만 다닐 뿐이며 이웃 국가와의 예속 관계도 거의 없는 폐쇄적인 국가였다.
  2. 2)『법현전』에는 “오장나국은……모두 중천축국(中天竺國)의 말을 쓴다. 중천축국이란 중국(中國)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혜초전』에는 “오장나국……의식주와 풍속은 건타라국과 비슷하지만 언어는 같지 않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스와트강 근변의 Swāt Kohistan은 근린의 Gilgit, Kashmir, Chitral, Kafiristan과 함께 Dardistan이라 불리며, 그 방언은 언어상 Dardic어파(語派)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것은 고래로 고립적인 상황이면서도 언제나 서쪽 인접 지역인 이란어와 교섭을 가져왔던 본질적으로는 인도 아리야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3. 3)3)) 4세기 동진(東晋)의 『법현전』에는 이 나라에 관해서 “부처님의 법이 매우 치성하고 있으며 5백 곳의 승가람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소승을 익히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8세기의 『혜초전』에는 “모두 대승법을 행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오장나의 승려들이 금주(禁呪), 즉 다라니에 능하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현장이 다녀 본 나라에서 다라니를 외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곳은 이 나라뿐이다.
  4. 4)몽게리는 종래 Mangalor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최근 이탈리아 조사대에 의하면 Mangalor의 서남쪽으로 약 5마일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Mingora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 도시는 지금도 그 지방에서 가장 번영하고 있는데 그 남쪽 교외에 도시 유적이 있으며 불교사원 유적지인 Butkara를 발굴하였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서장(티벳)으로 들어가는 성지(聖地)였는데, 또한 출토품을 보면 이곳도 간다라 미술권의 중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5. 5)소파벌솔도하(Śubhavasṭu)강의 상류에 있던 산과 계곡에서, 매년 우기 때마다 흰색의 토사가 붕괴되어 흘러 나와 강물에 유입되곤 하였는데, 심할 때에는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 같은 일을 주민들이 용왕의 전설로 이해한 것이다.
  6. 6)이 산은 Mingaora의 남쪽으로 약 15마일에 위치한 현재 Ilām이라고 하는 이란어화(語化)한 이름을 가진 9,250피트의 높은 산으로 추정된다.
  7. 7)이 일화는 북본(北本)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실려있는데 그 줄거리는, 설산에 사는 바라문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석이 나찰로 변하여 게송의 전반부인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의 두 구절을 외웠다. 그러자 바라문은 기뻐하면서 후반부를 들려 준다면 자신의 몸을 나찰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이라는 후반부를 듣자마자 나무 위에 올라가서 몸을 던졌다. 순간 여러 천신들이 와서 그 몸을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해주었으며 앞서의 그 나찰은 본래의 제석으로 변하여 그에게 예배하였다고 한다.
  8. 8)구지(俱胝)라고도 하며 수의 단위인 범어 koṭi의 음역이다. 10의 7승이라고 하는데 경전마다 천만ㆍ억ㆍ만억 등 다양하게 쓰인다.
  9. 9)이 본생담은 『현우경(賢愚經)』 권1, 『지도론(智度論)』 권16과 권49,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 하(下) 등에서 볼 수 있다. 『현우경』에 기술되어 있는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과거에 파라내국(波羅㮈國)의 선인사(仙人師)인 울다라(鬱多羅)라는 사람이 언제나 정법을 얻고자 생각하여 4방으로 수학하였지만 얻지 못하였다. 때마침 어떤 바라문이 자기에게 정법이 있다고 하면서 “만일 그대가 살갗을 벗겨서 종이로 삼고, 뼈를 부수어서 붓으로 삼고, 피를 먹으로 삼아서 나의 법을 받아쓰겠다고 한다면 곧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라고 말하였다. 선인은 바라문이 명한 대로 그가 설하는 게송을 받아썼고, 그 이후 모든 사람들이 그 게송을 독송하고 수행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10. 10)범어로는 sani-rāja이며 이 강은 Chakdara이고 스와트강으로부터 들어가는 Adinzai 협곡에 해당하며 그곳에는 지금까지도 Suma라고 하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커다란 솔도파가 있다.
  11. 11)이 본생담은 『현우경』 권7, 『보살본행경』 하 등에 같은 종류의 본생담이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이무기 대신 대어(大魚)로 몸을 변하였다고 한다.
  12. 12)이 탑은 Mingaora로부터 약 20킬로미터 남하(南下)한 스와트강 동안(東岸)의 Shankardar의 낮은 구릉 기슭의 길가에 현존하고 있다.
  13. 13)흰 코끼리가 돌로 변하였다는 이 거대한 돌은 앞서 상군왕탑으로부터 반 마일 못 미친 상류의 Ghalagai 마을 부근에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코끼리의 머리 부분과 코와 아주 닮은꼴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크샨의 화폐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조각이 있다.
  14. 14)범어로는 adbhuta이며 ‘희유한, 기특(奇特)한’이라는 의미이다.
  15. 15)Darora에 가까운 Panjkora강으로 유입하는 Aushiri계곡의 정상에 위치해 있다고 하며 그곳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고 한다.
  16. 16)코살라국의 왕인 Virūḍhaka를 가리킨다. 히말라야 산록의 샤카족을 침공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인데, 그 샤카족이 오장나국에 숨어 들어갔다는 것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17. 17)석가의 종족이란 뜻이다. 석가족은 인도에서 귀족이므로 예부터 존중되었고, 후세에 바뀌어 불제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18. 18)인간이 아닌 존재를 말한다.
  19. 19)범어로는 uttarasenā이며 uttara는 무상(無上)ㆍ상(上)의 뜻이며 senā는 부(部)ㆍ군(軍)의 뜻이다. 전설상의 인물이어서 다른 서적에는 나오지 않는다.
  20. 20)험한 산길에 널빤지를 늘어놓아 선반처럼 만든 길이다.
  21. 21)높이 건너질러 매단 다리를 말한다.
  22. 22)범어로는 darada이며 현재 이 지방의 이름인 Dardistan, Darel의 유래도 옛 이름인 Darada에서 기원하고 있다. 예로부터 아주 유명한 지명이었으며 동서양의 서적에 자주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는 다라다(陀羅陀), 『공작왕경(孔雀王經)』에는 달리다(達利陀),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는 달라다(達剌陀), 『방광대장엄경(放光大莊嚴經)』에는 달라다(達羅陀)라고 하고 있다.
  23. 23)옛 도읍지인 Daratpuri는 오늘날의 Gurez(지도상의 Goorais)로 추정되고 있다.
  24. 24)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금은 예로부터 아주 유명한데, 특히 “개보다는 작지만 여우보다는 큰 개미가 서식하고 있는데 이 개미는 모래를 파헤쳐 쌓은 뒤 그 땅 밑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이 개미가 파올린 모래가 금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인은 이 모래를 구하기 위하여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지역으로 나가고 있다”고 그리이스의 사서(史書)인 『헤로도투스』에도 등장하고 있다.
  25. 25)범어로는 madhyāntika이며 부법장(付法藏)의 제3조이다. 아난의 제자로 알려지고 있으며 아쇼카왕과 동시대인이다. 카시미르, 간다라 지방에 도착하여 용왕에게 항복받고 불법을 널리 퍼뜨렸으므로 이 나라 불교의 개조(開祖)로 추앙받게 되었다.
  26. 26)범어로는 Tuṣita-deva의 음역으로 욕계 6천의 넷째 하늘에 해당한다. 수미산 꼭대기로부터 12만 유순 위에 있는 하늘이라 한다.
  27. 27)범어로는 balūra, 또는 balōra이며 오늘날의 발루티스탄에 해당한다. 서장문서(西藏文書)에는 Sbal-ti(ti는 ‘지방’이라는 뜻의 접미사로서 발루티족이 사는 지방이란 뜻이다).
  28. 28)이 지역의 언어는 티벳어를 쓰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아주 고형(古形)의 티벳어를 보존하고 있다.
  29. 29)현장의 귀로에 인더스강을 건넜을 당시의 재난을 『자은전』 권5에는 “신도대하(信度大河)에 이르렀다. 강은 너비가 5~6리이다. 경상(經像)과 함께 동료들이 나란히 배에 올라타고 앞으로 나아갔는데 법사는 코끼리를 타고 건넜다. 그때 어떤 사람에게 배에 남아서 경(經)과 인도의 여러 진귀한 과일의 종자를 지키고 있게 하였다. 그런데 막 중류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풍파가 어지럽게 일어나더니 뱃머리가 요동하였고, 배가 뒤집혀서 침몰하려 하였다. 경을 지키던 사람이 놀라서 물 속에 빠졌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그를 구해냈지만 끝내 50상자의 경본(經本)과 꽃과 과일의 종자들을 잃고 말았다. 그 나머지만을 겨우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30. 30)범어로는 takṣaśilā이며 『현우경』에는 특차시리(特叉始利), 『병사왕오원경(蓱沙王五願經)』에는 덕차이라(德差伊羅), 『아육왕전(阿育王傳)』 권3에는 득차시라(得叉始羅), 『아육왕경(阿育王經)』 권10에는 덕차시라(德叉尸羅), 『법현전』에는 축찰시라(竺刹尸羅), 『불본행집경』 권38에는 특차시라(特叉尸羅)라고 되어있다. 그리스 문헌에는 탁실라 Taxila로 표기되어 있다. 탁실라는 고대로부터 인도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잇는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로서 여러 지방에 그 명성을 널리 알렸다. 알렉산더 대왕 동정(東征)시에는 동방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 가운데 한 곳으로 유명하였고 또한 북인도에서 최고(最高)의 학술도시로서도 유명하였다. 그 후 마우리야왕조에 복속되었으며 아수가왕(阿輸迦王)이 즉위하기 전에 잠시 총독으로서 이곳에 부임하였던 사실은 이 지역이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기원전 2세기에는 Indo-Greeks 계속해서 색(塞, Saka), 안식(安息, Parthia), 쿠샨 등의 치하에 들어갔지만 이 시기에 간다라 미술의 하나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5세기에 백(白) 훈(Hephtalites)의 침입 파괴 이래로는 역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31. 31)지금의 Rāwalpindi로부터 북서쪽으로 21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탁실라 (Taxila)이다.
  32. 32)현장이 방문할 당시 카쉬미르의 왕은 아마도 Kārkoṭa 왕조(7세기 초~855)의 시조인 Durlabhavardhana이었고, 이 왕이 다스리던 시기에 그 세력은 4방에 널리 퍼졌던 것 같다.
  33. 33)범어로는 elāpattra이며 이 연못은 옛 도읍지에서 10마일 남짓한 지금의 Bâbâ-Wali 혹은 Panja-Sahib라고 하며, Hasan Abdal의 어떤 구릉 기슭의 사원 유적지에 에워싸여 지금도 남아있다.
  34. 34)이 탑은 현재 Baotī Piṇḍ 상방에 위치한 산마루에 있는 무너진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35. 35)『증일아함경』 권49에 급고독장자는 미륵부처의 세상에 태어나서 선보(善寶)라고 하는 전장인(典藏人)이 되며, 네 명의 대용왕이 받치는 대보장(大寶藏)의 보물을 받고서 이것을 전륜성왕에게 바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4대보장은 건타위국(乾陀衛國)의 이라발용(伊羅鉢龍用)의 대보장(大寶藏), 밀체라국(蜜締羅國, Mithila)의 반조(斑稠, Pāṇḍuka) 대보장, 수뢰타국(須賴吒國, Surāṭa)의 빈가라(賓伽羅, Piṅgala) 대보장, 파라내국(婆羅㮈國, Vārānaṣi)의 상거(蠰佉, Saṅkha) 대보장이다.
  36. 36)『불설월광보살경(佛說月光菩薩經)』에 등장하는 일화로, 부처님께서 과거에 현석(賢石)이라는 나라의 월광(月光)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었는데, 나라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보시하였다. 어느 날 왕의 머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악안(惡眼)이라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월광왕은 기꺼이 자신의 머리를 잘라내 주었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월광왕은 후에 부처님으로, 악안은 데바달다로, 왕의 충직한 두 신하는 각각 사리불과 목건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37. 37)머리를 보시한 탑으로 추정되고 있는 지금의 Bhallạar Stūpa가 있는 정원에는 탑을 둘러싸고 지금도 많은 건축물의 유적지가 있다.
  38. 38)경부(經部)는 경량부(經量部)를 말하며 소승 20부파 가운데 하나로서 상좌부에 속한다. 설일체유부가 논(論)을 중시하는 것에 반해서 경부는 경(經)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39. 39)kumāralāta 또는 동수(童首)ㆍ동수(童壽)ㆍ동호(童豪)라고도 옮기고 있다. 부법장(付法藏)의 제18조(또는 제19조라고 함)라고 하며 3세기 무렵의 인물이다.
  40. 40)그의 저작은 상당히 양이 많아서 어떤 이는 수십 부라고 하고 어떤 이는 5백의 논을 지었다고도 하지만 한역된 것은 한 권도 없다.
  41. 41)옷깃과 허리띠라는 뜻으로 지세가 험조하여 지키기에 편하고 공격하기에 힘든 곳의 의미이다.
  42. 42)자주빛 진흙인데 인주로 사용한다.
  43. 43)범어로는 caṇḍāla이며 전다라(旃陀羅)ㆍ진다라(眞陀羅)라고도 쓴다. 도가(屠家)ㆍ주살인(主殺人) 등으로 번역한다. 인도의 종성(種姓)의 하나로 수다라 아래에 위치하는 제일 천한 계급이다.
  44. 44)범어로는 ghoṣa라고 하며 음(音)ㆍ성(聲)ㆍ향(響)ㆍ묘음(妙音)ㆍ어(語) 등으로 번역하는데 동명이인이 몇 사람 있다.
  45. 45)불타와 아라한이 얻는 3종의 신통(神通)이다. 지혜의 광명을 가지고 어둡고 어리석음을 깨뜨리기 때문에 3명이라 하고 , 3달(達)이라고도 한다. 숙주지증명(宿住智證明:宿命明)ㆍ사생지증명(死生智證明:天眼明)ㆍ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漏盡明)을 말한다.
  46. 46)12연기(緣起)라고도 한다. 중생이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걸쳐 무상변천하는 원인의 차례를 12가지로 설명한 것이다.
  47. 47)이 전설은 『잡아함경』 권22, 『아육왕경』 권4, 『아육왕전』 권3, 『아육왕식괴목인연경(阿育王息壞目因緣經)』 등에 보인다. 또한 이 전설과 그리스신화의 Hippolytus와 Phaedra의 전설의 유사성을 통해서 서북인도에 있어서 Indo-Greeks의 교류를 생각하게 해준다.
  48. 48)범어로는 siṃhapura이며 지금의 Salt Range의 북쪽에 해당하며, Jhelam 강 북안(北岸)의 Pind Dādan Khan으로부터 16마일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는 Ketāksh이다. 이곳에는 신성한 목욕터와 사원도 있으며, 지금도 매년 인도 각지로부터 이 성지(聖池)에서 목욕하려고 참배객들이 줄지어 찾아 오고 있다.
  49. 49)쟈이나교에는 백의(白衣)외도와 노형(露形)외도의 두 파가 있다. 현장이 말하는 백의외도의 개조란 이 두 파의 개조인 마하비라를 의미한다. 그는 부처님과 같은 지방 사람이며 기원전 470년을 전후로 72세에 사망하였다. 그는 서북인도로는 가지 않았으므로 이곳에 있는 성지도 간다라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후세 사람들이 끌어다 붙인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50. 50)원문에는 맑은 곳, 빛나는 곳[瑩域]으로 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묘역ㆍ유적지[塋域]의 오자로 보인다.
  51. 51)이곳은 현재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 미상이다. 그런데 북량(北凉)의 고창국(高昌國) 사문인 법성(法盛)이 번역한 『보살투신사아호기탑인연경(菩薩投身飼餓虎起塔因緣經)』 권말(卷末)에는 그가 이곳을 방문하였을 당시의 상황에 즈음하여 “이곳에 거대한 탑을 세웠으니 이름하여 보살투신아호탑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남아있다. 탑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산 아래에는 승방이나 강당, 정사가 있고 항상 5천 명의 승도들이 살면서 4시(時) 공양을 올린다”라고 하고 있으며 이어서 병자들이 사르는 향과 등불이 끊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법현(法顯)이나 송운(宋雲)도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기록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승도들은 법현 무렵부터 송운의 시기를 거쳐 현장이 방문할 당시까지 차츰 감소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2. 52)또는 오랄차(烏剌叉)라고 하며 범어로는 uraśā, uragā, uraśa라고 하며 지금의 Hazara 지방에 해당된다. 그리이스 문헌(Ptolemy)에 등장하는 Arsa가 이곳에 해당한다고 한다.
  53. 53)범어로는 kaśmira, kāśmīra 등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오늘날 이 지역의 주민들은 kaśīr라고 말하고 있다. 의정(義淨)은 갈습미라(羯濕彌羅), 『혜초전』에는 가섭미라(伽葉彌羅), 『신당서(新唐書)』 「서역전(西域傳)」에는 개실밀(箇失蜜)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현장이 본문 중에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계빈(罽賓)이라는 표기는 당나라 이전에는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다.
  54. 54)당시 카시미르의 수도는 지금의 스리나가라(Śrinagara)이다. 이 도시는 6세기 초엽에 당시 왕이었던 Pravarasena 1세에 의해 창시되었다. 현장은 이 왕이 즉위하자마자 입국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55. 55)큰 강이란 Jhelum강을 말한다. 현재는 강의 양안(兩岸)에 스리나가라 시가(市街)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중 동안(東岸)이 주요한 지구이다.
  56. 56)범어로는 Krīta이며 ‘매매된’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이 종족은 보통 Kritya라고 쓰여진다 카쉬미르의 어느 한 곳에 이주했다고 하는 Kiras의 종족명을 가진 천종(賤種)으로도 추측되고 있다. 또한 글리다를 카쉬미르의 왕조명과 관련 맺어서 Karkoṭa, karkoṭaka라고 하는 설도 있다.
  57. 57)승려들을 이런 방식으로 구분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에는 나한승(羅漢僧)은 후에 상좌부(上座部)에, 범부승(凡夫僧)은 후에 대중부(大衆部)에 속하는 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58. 58)이 일은 나한승(상좌부)이 범부승(대중부)과 분리한 것을 말하며 이른바 근본분열이라 불리는 교단의 분열을 가리키는 사건이다. 보수파인 상좌부가 계율을 고집한 것에 반해서 진보파인 대중부는 가벼운 율은 무시해도 좋다고 한 것에 기인하여 소수파였던 보수파가 가습미라국으로 숨어 들어가 상좌부를 결성하고, 다수파였던 진보파는 마게타국에 남아서 대중부라 불리게 되었다.
  59. 59)음식ㆍ의복ㆍ와구(臥具)ㆍ탕약의 네 가지 공양을 말한다.
  60. 60)제1차 결집이 일어난 장소이다.
  61. 61)4만(慢)의 하나로, 내가 증상(增上)의 법을 얻었다고 만심(慢心)을 일으키는 것이다. 곧 성도(聖道)를 얻지 못하고서 이미 얻었다고 잘난 체 하는 것을 말한다.
  62. 62)이상이 제4결집의 전설인데, 남방 불교에서는 이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63. 63)새로운 성은 지금의 스리나가르이며 그 남쪽에 Takht-i-Sulaiman(Throne of Solomon)이라 불리는 더할 나위 없이 전망이 빼어난 산이 있다. 그 동남쪽으로 2마일 떨어진 지점에 Pāndrēthān이라 불리는 옛 도읍지의 유적이 있다. 이곳에 있다는 승가람은 오늘날에는 가람의 이름이나 장소에 관해 전혀 알 수 없다.
  64. 64)범어로는 saṁghabhadra이며 중현 또는 승현(僧賢)이라고도 번역한다. 이 논사에 대해서는 권4 말저보라국에 자세하게 나온다.
  65. 65)범어로는 skandhila이며 색건타(塞建陀)ㆍ색건다라(色建陀羅)ㆍ색건지라(塞建地羅)로 옮긴다. 오입(悟入)으로 번역하며, 이 사람은 가습미라국 사람이다. 설일체유부의 학장(學匠)으로서 중현(衆賢)의 스승이다. 세친도 이 사람에게 나아가서 비바사를 배웠다. 그의 저서인 『입아비달마론(入阿毗達磨論)』 2권은 입문서로서 널리 읽혀지고 있다.
  66. 66)몸에서 갖가지 빛을 내는 화염을 내뿜으며 들어가는 삼매로서 화광삼매(火光三昧)ㆍ화계정(火界定) 등이라고도 말한다. 여기에서는 스스로의 몸을 다비에 부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67. 67)범어로는 pūrṇa이며 이 논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68. 68)이 논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알 수 없다.
  69. 69)범어로는 parṇotsa라고 한다. 스리나가르로부터 서진(西進)하여 Bāramūla, Rāmpur를 거쳐 Uri로부터 약 40킬로미터 정도 남하한 지점인 현재의 푼치(Pūnch)를 말한다.
  70. 70)갈(曷)의 오자인 듯하다. 본문에는 ‘갈’로 되어 있다.
  71. 71)반노차국(Pūnch)으로부터 동남쪽으로 4백여 리 떨어진 갈라사보라(범어로는 rājapura)는 지금의 Rajaori이다.
  72. 72)갈라사보라국으로부터 책가국(磔迦國)에 이르는 여정의 2일째에 사야보라성(闍耶補羅城, Jayapura)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그곳을 출발하였지만 도중의 울창한 숲 속에서 현장 등의 일행은 50여 명의 도적을 만나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을 모두 털리고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다. 이것에 관해서는 『자은전』 권2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