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월봉집(月峰集) / 月峯集卷之一

ABC_BJ_H0179_T_001
월봉집月峯集
월봉 책헌月峯策憲
이종수 (역)

009_0017_a_02L
월봉집 제1권(月峯集 卷之一)
총목차總目次
월봉집 제1권(月峯集 卷之一)
문文-10편
경론의 대덕에게 보이는 말(示經論大德語)
심공 스스로 경계하는 설(心公自警說)
대각의 정혜에 관한 설(大覺定慧說)
무위진인 서문(無位眞人序)
종오 선사에게 보이는 법어(示宗悟禪師法語)
또(又)
또(又)
또(又)
구암당 방인 대사에게 보이는 선교총결(示龜巖堂印大師禪敎揔訣)
선객에게 보이는 결의론(示禪客決疑論)
월봉집 제2권(月峯集 卷之二)
오언송五言頌-7편
구 스님에게 보임(示球師)
오 스님에게 보임(示悟師)
주인공을 찾아서(訪主人公)
응 대사에게 보임(示膺大師)
문 상인에게 보임(示文上人二首)
혜 스님에게 보임(示慧師二首)
해 선사에게 보임(示海禪)
오언율시(五言律)-8편
참선하고 염불하며(叅念)
기 선사에게 보임(示機禪)
천오 스님에게 드림(贈天悟)
광헌 스님에게 드림(贈廣軒)
영 대사에게 드림(贈英大師)
깊은 곳에 거처함(幽㞐)
객에게 보임(示客)
언 사미에게 보냄(贈彦沙彌)
오언五言-11편
홀로 띠풀 암자에 앉아 만 가지로 공을 생각함(獨坐茅庵萬慮空)
다만 일상생활에서 진공을 배움(但於日用學眞空)
망념이 도무지 일정한 곳 없음을 안다면(若知妄念都無所)
일성의 허공에서 자유롭게 노닐다(任運騰騰一性空)
위없는 진인(無位眞人)
응 대사에게 받들어 보임(奉示膺大師)
다시 차운하여 기 스님에게 드림(復次贈機師)
현진 주인에게 부치며(寄玄眞主人)
깊은 곳에 거처하며(幽居)
술회하여 대중에게 보임(述懷示衆)
좌우명座右銘
칠언七言-22편
성 스님의 물음에 답함(答性師問)
응 판사에게 보임(示膺判事)
또 응 판사에게 보임(又示膺判事)
일선에게 보임(示一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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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017_a_02L1)月峯集 [1] 卷之一

009_0017_a_03L

009_0017_a_04L2)總目次

009_0017_a_05L
卷一

009_0017_a_06L
十篇

009_0017_a_07L
示經論大德語心公自警說大覺
009_0017_a_08L定慧說無位眞人序示宗悟禪師
009_0017_a_09L法語
示龜巖堂印大師禪敎揔訣
009_0017_a_10L示禪客決疑論

009_0017_a_11L
卷二

009_0017_a_12L
五言頌七篇

009_0017_a_13L
示球師示悟師訪主人公示膺
009_0017_a_14L大師示文上人
示慧師

009_0017_a_15L海禪

009_0017_a_16L
五言律八篇

009_0017_a_17L
叅念示機禪贈天悟贈廣軒
009_0017_a_18L贈英大師幽㞐示客贈彥沙彌

009_0017_a_19L
五言十一篇

009_0017_a_20L
獨坐茅庵萬慮空但於日用學眞空
009_0017_a_21L若知妄念都無所任運騰騰一性空
009_0017_a_22L無位眞人奉示膺大師復次贈機
009_0017_a_23L寄玄眞主人幽居述懷示衆
009_0017_a_24L座右銘

009_0017_a_25L
七言十五篇

009_0017_a_26L
答性師問示膺判事
示一禪

009_0017_b_01L무적당원 수좌에게 부침(寄無迹堂圓首座)
또(又)
또(又)
또(又)
심선에게 보임(示心禪二首)
또(又)
세상의 부질없는 칭찬을 탄식하며(歎世浮譽四首)
법명 대사에게 보임(示法明大師)
염불게念佛偈
참선송叅禪頌
원 수좌에게 부침(寄元首座)
원 수좌에게 답함(答元首座)
행각승에게 보임(示行脚僧)
오 스님에게 보임(示悟師)
또(又)
우 스님에게 보임(示愚師)
참선하고 염불하는 노래(叅念頌)
흠 수좌가 풍악산으로 가는 길을 전송하며(送欽首座歸楓岳山)
월봉집 제3권(月峯集 卷之三)
부賦-16편
담 스님이 금강산에 가는 길을 전송하며(送湛師之金剛山)
깊은 곳에 은거하여 술회함(幽居述懷)
풍악산으로 돌아가는 흠 선자에게 줌(贈欽禪子歸楓岳)
세 번 주인공을 부르다(三喚主人公)
주인공이란(疑主人公)
일출암에 깊이 은거함(幽居日出庵)
민 스님에게 드리는 시 서문(贈示敏師序敏即雙敏)
술회하여 대중에게 보임(述懷示衆)
또(又)
또(又)
또(又)
세상의 잘못과 허물을 생각하며(念世過患)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律詩七首
자심을 관하며(自心觀)
참학하여(말씀을 구함 叅學求語二十四首)
월봉 무주암 소연자가 출가하여 선의 이야기를~(月峯無住昭然子預出家聞~)
문文-10편
경론의 대덕에게 보이는 말(示經論大德語)
월봉月峯 무주암無住庵의 소연자昭然子1)인 나는 어려서 공문空門2)에 들어와 젊은 시절에 선관禪觀을 배웠다. 경론의 언어문자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겉으로는 교학을 배척하는 것처럼 보였고, 오직 종교宗敎3)의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였기 때문에 안으로는 철저히 깨달은 바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가짐은 질박하고 솔직하여 숨김없이 드러났으며, 말은 빨라서 즉시 답하고 질문하였다.
어떤 객이 나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대중들에게 비난하며 말하기를, “무주암에 있는 소연자는 스스로 뽐내며 ‘삼승의 분교分敎라면 내가 익힌 바가 아니지만, 일미一味의 선지禪旨라면 밝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제방諸方의 어떤 사람이 높이 묻고 자세히 따질 수 있겠는가?’라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어떤 좌주座主가 그 헛된 언설을 듣고 나의 지혜를 시험하고자 무주암에 있는 나를 찾아와 말을 듣고자 하였다.

009_0017_b_01L寄無迹堂
示心禪
歎世浮
009_0017_b_02L
示法明大師念佛偈
009_0017_b_03L禪頌寄元首座答元首座
009_0017_b_04L行脚僧示悟師
示愚師
009_0017_b_05L念頌送欽首座歸楓岳山

009_0017_b_06L
卷三

009_0017_b_07L
十三篇

009_0017_b_08L
送湛師之金剛山幽居述懷贈欽
009_0017_b_09L禪子歸楓岳三喚主人公疑主人
009_0017_b_10L幽居日出庵贈示敏師序
009_0017_b_11L懷示衆
念世過患大方廣佛華
009_0017_b_12L嚴經
自心觀參學求語二十
五首

009_0017_b_13L峯無住…謹述詘序十七

009_0017_b_14L

009_0017_b_15L3)

009_0017_b_16L示經論大德語

009_0017_b_17L
月峯無住庵昭然子幼入空門少學
009_0017_b_18L禪觀不滯經論之名言故外似斥敎
009_0017_b_19L唯窮宗敎之至理故內似徹悟其爲心
009_0017_b_20L也質直不隱自見其爲言也遄速
009_0017_b_21L答問難有客不肯譏毁衆中曰某山
009_0017_b_22L昭然子自矜云三乘分敎非吾所習
009_0017_b_23L一味禪旨無不洞曉諸方若有人高
009_0017_b_24L問廣詰者否有一座主聞其虛說
009_0017_b_25L驗其智詣于无住庵求語昭然昭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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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요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곧바로 게송을 드러내 보였다. “누런 잎사귀 계단 가득 어지럽고, 시내 소리 문에 들어와 차갑구려. 나의 종지宗旨를 알고자 하는가? 가을바람에 만산이 취하도다.”
좌주는 깊이 음미하고 한참 후에 말하였다. “색깔 색깔이 여래의 색깔이 아니겠으며, 소리 소리가 부처님의 음성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소. 만약 소리와 색깔을 우리 불가의 종지로 삼는다면 소리를 따르고 색깔에 집착하는 삿된 견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만약 색으로 나를 보려 하고 음성으로 나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4)라고 하는 것입니다.”
좌주는 게송으로 나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스님의 말씀이 분수에 넘치며 지나친 점이 많고, 나의 의심도 아직 해결되지 않아서 질문하고자 하는데 어떠합니까?”
나는 게송으로 답하였다. “나 역시 전하는 말을 들었는데, 시비가 근래에 가장 많다고 합니다. 의심이 있다면 물어서 해결해야 하리니, 연못에 비친 달을 가지고 노는 것이 어떻겠소.”
(좌주가) 물었다. “스님께서 불법을 돈오하였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그렇지 않소. 누가 그런 망설을 한단 말이오. 육조대사께서도 ‘나는 불법을 알지 못한다.’5)고 하였고, 옛사람들도 게송에서 ‘석가도 알지 못하거늘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겠는가.’6)라고 하였소. 부처님과 조사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나와 같은 자이겠습니까.”
(좌주가) 물었다. “견성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나는 놀라며 답하였다. “이 말은 또 누구의 말입니까. 가벼이 말하지 마십시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을까 걱정됩니다. 경전에서 ‘이 성性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7)고 하였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갖추고 있어서 내가 성을 볼 수 있다면 그대도 스스로 볼 수 있는 것이니 성을 본다고 한들 어떻습니까.”
좌주가 물었다. “성은 일정한 방향과 처소가 없는데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그대가 보지 못한다면 내가 어찌 홀로 보겠습니까. 미친 소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좌주가) 물었다. “자기 마음을 돈오한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경전에서 ‘마음이 곧 성이고

009_0017_c_01L子莫逆其請即以偈示之曰滿階黃
009_0017_c_02L葉亂入戶澗聲寒欲識吾宗敎秋風
009_0017_c_03L醉萬山座主沉吟久之曰无乃色色如
009_0017_c_04L來色聲聲是佛聲麽昭然子曰不然
009_0017_c_05L若以聲色爲吾家宗敎猶是隨聲着色
009_0017_c_06L之邪見故經云若以色見我以音聲
009_0017_c_07L求我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座主
009_0017_c_08L以頌謂昭然曰聞說吾師語過頭越分
009_0017_c_09L吾疑猶未決欲問意如何昭然偈
009_0017_c_10L答曰我亦聞傳語是非近最多若疑
009_0017_c_11L須問決潭月撮摩何問曰聞師頓悟佛
009_0017_c_12L法是否答曰不然是誰之妄說耶
009_0017_c_13L祖云我不會佛法古人頌云釋迦猶
009_0017_c_14L不會迦葉豈能傳佛祖尙爾而況如
009_0017_c_15L我者乎問曰憑聞見性云是否昭然驚
009_0017_c_16L此亦誰言也輕莫出口恐聞多口
009_0017_c_17L者也經云此性平等无有高下人人
009_0017_c_18L具有我若能見汝亦自見見之何也
009_0017_c_19L座主曰性無方所何有得見昭然曰
009_0017_c_20L汝若不見我何獨見不得狂說也
009_0017_c_21L頓悟自心云是否答曰經云心則4)
009_0017_c_22L{底}康熙四十二年全羅道潭陽龍湫寺開刊本(海
009_0017_c_23L印寺所藏)
目次編者作成補入「文」編者
009_0017_c_24L補入
「性性則心心性」六字底本二行小文字
009_0017_c_25L編者作本文活字

009_0018_a_01L성이 곧 마음이므로 마음과 성이 한 몸’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성에 미혹하고서 마음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망령된 설입니다.”
(좌주가) 물었다. “선교禪敎의 경전 가운데 개인적으로 이해한 특별한 뜻이 있어서 남들과 많이 다릅니까?”
(나는) 답하였다. “내가 교敎의 글과 선禪의 말에서 어찌 별도로 세운 특별한 견해가 있겠습니까. 다만 글에 의거해 뜻을 이해하여 말씀마다 자기를 돌이켜 보고 구절마다 근본종지에 합치되도록 할 뿐입니다. 만약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하나하나 자세히 묻고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하니, 어찌 상쾌하지 않겠습니까.”
(좌주가) 물었다. “스님은 참선하는 자를 보면 반드시 자주 붙잡고 여러 가지로 시험하여 깨뜨리려고 하면서 ‘사구死句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는데,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그 이유는 나 역시 참선하는 사람으로서 알고자 하여 묻는 것일 뿐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을 붙잡고서 시험해 보려는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경전에 ‘누런 잎사귀는 결코 돈이 아니고,8) 달을 보거든 손가락을 잊어야 한다.9)’라는 구절이 있습니다만, 이는 아마도 말에 집착하는 자들을 경각시키고자 설하였기 때문에 사구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좌주가) 물었다. “또 염불하는 사람을 보면 매번 ‘명호만 외우지 말고 자성미타自性彌陁를 염해야 한다’고 한다는데,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운 방편이니 필경 돌아갈 바가 있습니다. 만약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한갓 명호만을 외운다면 급할수록 느려지고 구할수록 멀어지는 꼴입니다. 그래서 다만 명호만을 외우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초심자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좌주가) 물었다. “만약 종사나 학인을 만나면 경론의 오묘한 뜻을 따져 묻고 논쟁에서 이기려고 한다는데,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경전 가운데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해결을 구하고자 남에게 묻는 것이지 어찌 승부와 투쟁을 근본으로 삼겠습니까. 이것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할 바가 아닙니다.”
(좌주가) 물었다. “스님은 경전의 법을 강설할 때 ‘나는 이해했다’라든지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자랑하는 말을 자주 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병으로 여깁니다. 어째서 스스로 알아서 고치지 않는 것입니까?”
(나는) 답하였다. “내가 총림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말에 집착하는 자는 많고 종지를 이해한 자는 적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격발하는 말을 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그 잘못을 돌이켜 보도록 한 것인데

009_0018_a_01L性則心心性 [1] 一體何有迷性而悟心耶
009_0018_a_02L此亦妄說也問曰禪敎經中私解異旨
009_0018_a_03L逈異他人是否答曰我於敎詮禪談
009_0018_a_04L有別立奇特之見耶但依文解義而言
009_0018_a_05L言回就自己句句冥合本宗也若有
009_0018_a_06L未審一一詳問自決其疑有何不快
009_0018_a_07L問曰師見叅禪者必須頻頻援着
009_0018_a_08L種種勘破云莫執死句是否答曰所以
009_0018_a_09L然者吾亦禪者要知爲問耳豈以援
009_0018_a_10L人勘他爲心哉經有黃葉竟非錢見月
009_0018_a_11L忘指之言愚以謂警覺執言者而說
009_0018_a_12L云莫着死句也問曰又見念佛人每云
009_0018_a_13L但莫誦名須念自性彌陁是否答曰
009_0018_a_14L佛祖所立方便竟有所歸若不知
009_0018_a_15L所以徒誦名言轉急轉遲逾求逾遠
009_0018_a_16L故云莫誦唯名而不爲初機者說也
009_0018_a_17L若遇宗師學人詰問經論之妙旨
009_0018_a_18L以勝爲得是否答曰此是不然吾於經
009_0018_a_19L中有疑求決故問他何以勝負鬪諍爲
009_0018_a_20L本哉此非釋子之所爲也問曰師於經
009_0018_a_21L法講說時我解我能之誇言頻出於口
009_0018_a_22L人皆病焉何不自知必改也答曰我徧
009_0018_a_23L歷叢林久閱多人執言者衆秉旨者
009_0018_a_24L故頻說激發之言欲令聽者反察

009_0018_b_01L자신의 과오는 살피지 않고 도리어 나의 잘못을 비방하니, 병으로써 병을 공격하고 결박으로써 결박을 풀어 주려는 꼴이로구려. 이미 한 치의 공도 없고 장척丈尺의 잘못이 있는 줄 알았으니, 어찌 그대의 말을 빌려서야 비로소 알겠습니까.”
(좌주가) 물었다. “스님은 스스로 수승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과장하고 스스로 세상을 초월한 재주를 얻었다고 자랑하니,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나는 천 권의 경전을 암송하지도 못하고 만 권의 책을 읽지도 못했으며 여러 스님의 논소도 깊이 연구하지 못했고 백가百家의 편장篇章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문장으로는 한유韓愈10)와 유종원柳宗元11)만 못하고 시詩로는 이백李白12)과 두보杜甫13)를 본받지 못했으며 글씨로는 왕희지王羲之14)와 장지張芝15)의 필법을 익히지도 못했는데 어찌 세상을 초월한 재주를 자랑하겠습니까. 게다가 지혜는 신자身子16)에게 미치지 못하고 변설로는 만자滿慈17)보다 못하며 도道로는 도안道安18)과 구마라집鳩摩羅什19)에 비하지 못하고 덕으로는 혜능慧能20)과 신수神秀21)에게 미치지 못하며 견해로는 마명馬鳴22)과 용수龍樹23)만 못한데 어찌 수승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과장하겠습니까. 비록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는 묘술이 있고 하늘 사람을 제도할 수 있는 뛰어난 재주가 있다고 한들 어찌 미쳤다고 남들에게 자랑하다가 도리어 비방을 받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지난 을유년(1645) 겨울에 취암翠岩에게 법문을 청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십법계도」의 ‘부처를 염하여 마음을 염하고 마음을 염하여 부처를 염한다.’라는 말과 대혜 종고大慧宗杲24)가 여呂 사인舍人에게 ‘그대가 공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데 능히 두려움을 아는 것은 공한가, 공하지 않은가.’25)라고 한 말에 대해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 후 송파松坡 대사26)가 반야진공의 뜻에 대해 강설한 것을 듣고 이로부터 후회하여, 세간은 무상하여 즐거워할 만한 것도 하나 없음을 혼자 생각하였고, 많은 병이 있는 허깨비 이 몸은 오래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없음을 통렬히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신묘년(1651)에 혼자서 지리산 서대西臺에 들어가 이 문제에 대해 전심으로 궁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게 벽암碧巖 대사27)에게 부름을 받고 속리산 법주사에서 겨울을 지냈습니다. 임진년(1652) 봄에는 곧장 치악산에 들어가 새벽 아침에 면벽수행 하였습니다. 1년 후 계사년(1653) 봄에 멀리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가서 풍담風潭 대사28)에게 선을 묻고 『전등록』과 『선문염송』을 열람하여 선에 두 맛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화엄경』을 보고자 하였지만

009_0018_b_01L其非而不察其過反誹吾非所謂以
009_0018_b_02L病攻病以縛解縛已知功無分寸
009_0018_b_03L有丈尺豈假汝說始自知耶問曰
009_0018_b_04L也自誇有勝大之解自逞得超世之才
009_0018_b_05L云何如答曰若予者經不誦千軸
009_0018_b_06L不讀萬卷未窮諸師之䟽論不繹百家
009_0018_b_07L之篇章文不齊韓柳詩不效李杜
009_0018_b_08L不習王張豈逞超世之才況又智不
009_0018_b_09L及身子辯不能滿慈道不幷安什
009_0018_b_10L不侔能秀見解不齊馬龍何誇勝大之
009_0018_b_11L解耶雖得動乾坤之妙術濟天人之英
009_0018_b_12L何狂自矜於人反招毁譏耶窃念
009_0018_b_13L昨於乙酉之冬請益於翠岩忽於一日
009_0018_b_14L疑着十法界圖云念佛念心念心念佛
009_0018_b_15L之言密領妙喜謂呂舍人云公怕落
009_0018_b_16L能知怕者是空耶不空耶之言
009_0018_b_17L後深聞松坡大師講般若眞空之義
009_0018_b_18L此改悔自念无常世間无一可樂
009_0018_b_19L思多病幻身不可久住辛卯年之間
009_0018_b_20L獨入智異西臺專心欲究此事不期被
009_0018_b_21L召於碧岩大師俗離之行過冬法住

009_0018_b_22L壬辰之春直入雉岳日出壁觀朞年
009_0018_b_23L癸巳春遠入金剛正陽問禪於風潭大
009_0018_b_24L尋閱傳燈拈頌禪无二味也欲覽華

009_0018_c_01L병으로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치악산 금선사金僊寺로 가서 하나하나의 문제에 깊이 몰두하여 부처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법은 성性 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기해년(1659)에 상원사上院寺에서 여름 결재하였는데 우리나라 명승지를 유람하던 선납禪衲들이 운집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시비가 남북으로 전해졌으니 그것을 한탄한들 어찌하겠습니까.”
좌주가 듣고 웃음을 숨기면서 게송으로 비꼬아 말하였다. “면벽을 오래 했다고 한다면 어찌 경서를 배울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경전 장구의 말씀을 널리 설하지만 처음과 끝의 말이 같지 않습니다.”
나는 그의 비웃음을 알았지만 게송으로 답하였다. “본래 정해진 법을 설함이 없고 헛된 말을 드러내지도 않으니 유무 밖을 초월한 것이 원래 나의 선이라오.”
(좌주가) 물었다. “자심이 선이고 자성이 법이라고 한다는데,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달마는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고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29)라고 하였고, 마조는 ‘마음이 곧 부처다.’30)라고 하였으며, 『능가경』에서는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을 으뜸으로 삼는다.’31)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자심이 선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경전에서 ‘진성은 만법의 근원이다.’32)라고 하였으니 모든 성인의 어머니입니다. 이 때문에 자성이 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나의 억지스런 말이겠습니까.”
(좌주가) 물었다. “선교의 부사의不思議한 말을 스님이 통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는데,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이것은 가소로운 말입니다. 가령 부사의한 말은 부처와 조사도 의론하지 않는데 하물며 나 같은 범부가 어찌 생각하여 의론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나무하는 초동과 가축 기르는 목동이라도 부사의한 설을 듣는다면 어찌하지 못함을 알 터인데 내 나이 40이 되어 어찌 그것도 모르고 선과 교 사이에서 함부로 생각하여 의론하겠습니까.”
(좌주가) 물었다. “능히 화두와 공안을 이해한다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화두는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상두上頭이고, 공안은 세간과 출세간의 공문公文입니다. 부처와 조사가 상상上上 근기인을 만났을 때 형용하는 언어 밖의 뜻으로 철을 끊어 내는 언구입니다. 언어는 이를 수 있지만 뜻이 이르지 않고, 입은 비록 말하지만 마음이 측량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계산하고 비교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009_0018_c_01L以病未果再入雉岳金僊深窮箇
009_0018_c_02L佛非心外法非性外也己亥年
009_0018_c_03L夏上院吾東方形勝地遊翫禪衲雲集
009_0018_c_04L由是是非傳於南北恨如之何也
009_0018_c_05L主聞之匿笑以頌譏之曰若云面壁久
009_0018_c_06L何暇學經書廣說典章語始終言不
009_0018_c_07L昭然雖知彼笑以偈答曰本无說
009_0018_c_08L定法亦不虛言宣超出有无外元來
009_0018_c_09L是我禪問曰自心是禪自性是法
009_0018_c_10L答曰是也達摩云以心傳心不立
009_0018_c_11L文字馬祖云即心是佛楞伽云佛語
009_0018_c_12L心爲宗以是云自心是禪也經云眞性
009_0018_c_13L萬法之源諸聖之母也是以云自性是
009_0018_c_14L法也豈余之臆說也問曰禪敎不思議
009_0018_c_15L之言師能通達無不知是否答曰是乃
009_0018_c_16L可笑之說也若是不思議之言佛祖亦
009_0018_c_17L必不議況我凡夫豈容思議乎設使
009_0018_c_18L撨童牧兒聞不思議之說則亦知不奈
009_0018_c_19L我年四旬何爲不知妄容思議於其
009_0018_c_20L間哉問曰能解話頭公案云是否答曰
009_0018_c_21L話頭者言語不及之上頭也公案者
009_0018_c_22L出世之公文也佛祖對上上根人形容
009_0018_c_23L言外之旨截鐵言句也言能及而意不
009_0018_c_24L口雖說而心不測然則計較得麽

009_0019_a_01L천착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동으로 된 혀가 있고 철로 된 부리가 있는 자가 설법을 하여 하늘 꽃이 어지러이 떨어지고 돌이 고개를 끄덕이더라도 이 화두는 의론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벽 위에 입을 걸어 두고, 역대 조사들이 풀 속에 몸을 숨긴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좌주가) 물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스님은 법에 잘못 집착해 있다고 하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눈은 가로 놓여 있고 코는 곧으며 머리는 하늘로 향하고 다리는 땅을 향하고 있으니, 상하上下에 잘못 집착하지 않습니다. 밝음은 낮이고 어둠은 밤이며 앞은 남쪽이요 뒤는 북쪽이니, 사연四緣에 잘못 집착하지 않습니다. 꽃이 피면 봄인 줄 알고 낙엽이 지면 가을인 줄 아니, 사시四時에 잘못 집착하지 않습니다. 불법에 있어서는 유무중도有無中道33)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무주무위無住無爲34)에 집착하지 않으니, 불법에 잘못 집착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 밖에 선의 길과 부처의 법이 있다고 하여 공적空寂에 막히거나 언어에 집착하여 밖을 향해 내달려 구한다면 이런 사람을 잘못 집착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견해가 없으니 어찌 잘못 집착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실제實際에 의거하여 관찰한다면 원교圓敎 이외에 잘못 집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함의 사유四有35)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반야회般若會에 이르러서도 유有에 집착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며, 반야의 입공入空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법화ㆍ열반회에 이르러서도 공에 집착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원교의 보살에 이르러서도 능히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말하건대, 누가 잘못이며 누가 잘못이 아닌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좌주가) 물었다. “풍문에 스님은 외도법을 설한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몸은 불교에 들어와 처신이 벗어나지 않았고, 마음은 부처님 마음에 있으므로 마음을 씀이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해는 바른 지혜에 합치하여 이해가 벗어나지 않았고, 행동은 계율에 계합하였으므로 행동이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도에 있어서는 정도正道의 길을 갔으니 도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법에 있어서는 진법眞法에서 본받았으니 법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말은 경전에서 나왔으니 말이 벗어나지 않았고, 교敎는

009_0019_a_01L穿鑿得麽雖是銅舌鐵觜之漢說法
009_0019_a_02L花亂墜頑石點頭惟此話頭難可擬
009_0019_a_03L故云三世諸佛口掛壁上歷代祖
009_0019_a_04L潜身草裡也問曰人傳師於法誤執
009_0019_a_05L云何爲其然答曰我從生至老眼橫鼻
009_0019_a_06L頭天脚地上下不誤也明晝暗夜
009_0019_a_07L前南後北四緣不誤也花開知春
009_0019_a_08L落爲秋四時不誤也至於佛法不着有
009_0019_a_09L無中道亦不着無住無爲佛法亦不誤
009_0019_a_10L若有人以謂心外妄有禪道佛法
009_0019_a_11L或滯於空寂或執於言語向外馳求者
009_0019_a_12L是可謂誤執而我無如是之見何言誤
009_0019_a_13L執耶若據實而觀圓敎之外無非誤
009_0019_a_14L執也何也聞阿含四有之人至般若
009_0019_a_15L未免執有之責聞般若入空之人
009_0019_a_16L至法華湼槃會未免執空之責乃至圓
009_0019_a_17L敎菩薩未免不能度生之責以此言之
009_0019_a_18L不知誰誤誰不誤也問曰風聞師說外
009_0019_a_19L道法是否答曰我自幼至今身入空門
009_0019_a_20L處身不外也心在佛心中用心不
009_0019_a_21L外也解合正智中解不外也行契戒
009_0019_a_22L律中行不外也道則道於正道中
009_0019_a_23L不外也法則法於眞法中法不外也
009_0019_a_24L言則涉於典章中言不外也敎則宗於

009_0019_b_01L본심을 곧장 설하는 원돈圓頓을 으뜸으로 삼았으니 교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선에 있어서만큼은 이심전심의 격외선을 숭상하였는데 이것이 외도란 말입니까? 만약 이것이 외도법이라면 내가 이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을 것입니다. 만약 어떤 승려가 속된 법을 익혀 유교와 도교를 배웠는데, 견해는 치우쳐 삿되고 행동은 계율을 어기며 마음 씀이 굽어 있고 처신이 바르지 못하다면, 이것을 괜찮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법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나에게는 그러한 행이 없으니, 어찌 외도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실제에 의거해 논한다면 묘각妙覺36)에 이르기 전에는 외도법 아닌 경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속제世俗諦를 닦는 것은 진제眞諦의 밖이고 진제를 닦는 것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밖이기 때문입니다. 십신十信은 삼현三賢의 밖이오, 삼현은 십성十聖의 밖이며, 십성은 등각과 묘각의 밖이기 때문입니다. 묘각이라는 말은 실제 이치의 밖입니다. 이로써 논하건대, 역시 무엇이 밖이고 무엇이 밖이 아닌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좌주가) 물었다. “스님은 다만 돈오의 이치만 설하고 수행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어찌 그리도 우매하십니까. 만약 종사 같은 선지식이라면 병에 따라 약을 주고 근기에 맞게 설법하여, 마치 구슬이 쟁반 위에 굴러다니는 것 같고 거울이 대臺에 알맞게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하나의 법에만 국한되겠습니까. 수행이 없는 자에게는 계율 수행을 설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돈오의 이치를 설하며, 방일한 자에게는 근면히 수행할 일에 대해 설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위로부터 부처님과 조사 중에 그 누가 아직 깨닫지도 않았는데 먼저 수행하라고 설했습니까. 그 많은 경론 중에 다만 수행만을 설하고 돈오를 설하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근거 없이 떠돌아다니는 말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좌주가) 물었다. “돈오라는 것이 어찌 헛되이 앉아 있다가 스스로 깨닫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응당 부지런히 공부해서 그 공력이 지극해져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니, 마치 부스럼의 농이 가득 차서 저절로 터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답하였다. “먼저 닦고 뒤에 깨닫는 것은 삼승교三乘敎 권점權漸의 근기37)이고, 의리선

009_0019_b_01L直說本心之圓頓中敎不外也惟有禪
009_0019_b_02L則崇於以心傳心之格外禪此爲外耶
009_0019_b_03L若以此爲外法則吾何爲於此人雖譏
009_0019_b_04L我則甘受也若有僧習俗法釋學
009_0019_b_05L儒道見解偏邪行犯禁戒用心紆曲
009_0019_b_06L處身不軌則是可謂麽外法我無如此
009_0019_b_07L之行何言外道法耶若據實而論
009_0019_b_08L覺之前無非外道也何也修世俗諦
009_0019_b_09L眞諦之外也修眞諦者第一義諦
009_0019_b_10L之外也十信者三賢之外也三賢者
009_0019_b_11L十聖之外也十聖者等妙覺之外也
009_0019_b_12L妙覺之言亦實理之外也以此論之
009_0019_b_13L亦不知誰外誰不外也問曰吾師但說
009_0019_b_14L頓悟之理不言修行之事可乎答曰
009_0019_b_15L不見道若是宗師知識應病與藥
009_0019_b_16L機說法如珠走盤如鏡當臺何局一
009_0019_b_17L法耶對無行者說戒律之行對未悟
009_0019_b_18L說頓悟之理對放逸者說勤修之
009_0019_b_19L爲可也從上佛祖誰說未悟而先
009_0019_b_20L修也瀚漫經論何處但說修行而不說
009_0019_b_21L頓悟莫信妄傳之浮言也問曰頓悟者
009_0019_b_22L豈有空坐自悟應有勤做工夫功極得
009_0019_b_23L如瘡膿滿自綻也答曰先修後悟者
009_0019_b_24L三乘敎中權漸之機也義理禪中

009_0019_c_01L점삼대漸三隊의 근기이니, 북종의 점수라면 그대가 아는 바입니다. 규봉은 (신수 대사의 게송에 대해) ‘염染과 정淨이 연기하는 모습이고 흐름을 거슬러 습기를 등지는 문으로 아직 깨달음이 투철하지 않은 것이니, 그 수행이 어찌 진실하다고 하겠습니까.’38)라고 평가하였는데, 우리 돈종頓宗에서는 본래 그대의 설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종사들은 법에 의거하여 말을 떠나서 곧장 진실한 법을 보여 줍니다. 혹은 한참 후에 몽둥이로 때리거나 할喝을 하고, 혹은 탁자를 치거나 불자를 들어올리며, 혹은 지극한 이치를 설하거나 본심을 가르칩니다. 만약 과량過量39)의 큰 놈이라면 하나하나의 언구와 하나하나의 기경機境40)에서 그 이면의 소식을 투철하게 깨닫고 시간을 뛰어넘는 무생법인無生法忍41)을 철저히 증득하여 모든 부처님의 과덕과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깨달음에 의거한 후에 닦아 증득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고 나서야 차가운지 따뜻한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규봉이 ‘이 마음을 깨닫고 난 후에도 만약 혼침惛沉이 두터워 공부할 마음을 일으키기 어렵고, 도거掉擧가 맹렬하여 억제시켜 항복받을 수 없으며, 탐심과 성냄이 치성하여 경계를 접할 때 마음을 제어하기 어려운 자는 공교空敎와 상교相敎의 여러 방편을 사용하여 병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 만약 번뇌가 미약하고 지혜가 밝은 자라면 본종本宗 본교本敎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거한다.’42)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아직 깨닫지도 않았는데 먼저 수행할 것을 논한다면 마치 맹인이 동쪽으로 가고자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고, 자심을 깨닫지 못했다면 설령 염불하고 참선하여 진겁塵劫이 지나더라도 헛되이 괴로운 수행만을 일삼는 것이고 공은 있지만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도 이에 대해 밝힌 글들이 있지만 번거로워 자세히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좌주가) 물었다. “스님이 설하는 범부의 견성법은 가능한 것입니까?”
(나는) 답하였다. “가능합니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가 범부를 위해 백 천 가지 방편을 개설하였지, 제불諸佛을 위해 개설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범부가 우매하게도 자성을 돌이키지 않고 망령되이 온갖 경계를 쫓아다녀 헛되이 윤회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이 자비심으로 진실한 법을 설하되 방편으로 견성의 법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이른바 ‘천 개의 경전, 만 개의 논서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견성하여 성불하게 하는 법을 설하였다.’라는 것입니다.”
(좌주가) 물었다. “고금에 성품을 보고 도를 깨달은 사람은 제일 처음에

009_0019_c_01L三隊之根也至於北宗漸修是汝之所
009_0019_c_02L解也圭峯判云染淨緣起之相反流
009_0019_c_03L背習之門悟旣未徹修豈稱眞哉
009_0019_c_04L之頓宗中本無如汝之說也盖宗師據
009_0019_c_05L法離言直示眞法或良久棒喝或擊
009_0019_c_06L床擧拂或說至理或敎本心若是過
009_0019_c_07L量大漢於一言一句下一機一境上
009_0019_c_08L透得那邊消息徹證劫外無生與諸佛
009_0019_c_09L果德分毫不謬後依悟修證如人飮
009_0019_c_10L冷煖自知也圭峯云悟此心已
009_0019_c_11L惛沉厚重難可策發掉擧猛利不可
009_0019_c_12L抑伏貪嗔熾盛觸境難制者即用空相
009_0019_c_13L敎中種種方便随病對治若煩惱微薄
009_0019_c_14L慧解明利者依本宗本敎一行三昧也
009_0019_c_15L若論未悟先修者譬如盲者欲行東方
009_0019_c_16L而向西行也未悟自心設有念佛叅禪
009_0019_c_17L歷於塵劫徒勞苦行有功無益經有
009_0019_c_18L明文不煩細擧也問曰師說凡夫之
009_0019_c_19L見性法可乎答曰可也諸佛諸祖
009_0019_c_20L千方便爲凡夫而設不聞爲諸佛而設
009_0019_c_21L凡夫昧却自性妄逐諸境枉隨轉
009_0019_c_22L輪故諸佛乘悲出眞權設見性之法
009_0019_c_23L謂千經萬論無非令諸衆生見性成佛
009_0019_c_24L之法也問曰古今見性悟道之人最初

009_0020_a_01L좋은 벗(善友)을 만나 화두를 직접 받았으며 스스로 공부하여 그 공력이 지극해져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스승의 여러 가지 지시가 능히 제자들을 견성하도록 한다.’라고 하니, 망령된 것 같습니다.”
(나는) 답하였다. “고금에 견성한 사람이 만약 스승을 통하지 않고 깨달았다면 부처님과 조사로부터 스승과 제자가 전수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늘 아래 만 가지 형상은 모두가 모범模範에 의거하여 성질을 이루듯이, 고금의 성현들은 모두 스승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도를 이루었습니다. 『전등록』에 실린 1,721인 가운데 누가 스승 없이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현책玄策 선사는 일숙각一宿覺43)에게 ‘위음왕 이후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자는 모두 자연히 외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좌주가) 물었다. “듣자 하니, 스님은 ‘진실로 성실하게 공부할 자는 좋은 벗에 의지하여 그 가르침대로 닦고 지녀야 한다’고 하는데, 날마다 스승 앞에 왔을 때 스승이 배우는 자로 하여금 답변하도록 한다면 공부가 어떻겠습니까? ‘병에 따라 약을 주어서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한다.’44)라는 것이지만, 내 생각에는 도리어 그 마음을 착란되고 혼란되게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답하였다. “근기가 낮고 늦게 배운 자가 아직 법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마음의 근원을 통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홀로 거처하면서 공부한다면 마치 아기가 부모를 잃은 꼴이고 맹인이 지팡이를 잃은 꼴입니다. 비유하자면, 어려서 부모를 잃고 멀리 타향살이하던 눈먼 아이가 사방에 아무런 친척도 없이 가난하고 추운 고통에 살면서 하소연할 곳도 없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모와 친척이 어느 나라 어느 지방에 부자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매우 기쁜 마음으로 고향을 아는 사람이 있는 곳에 나아가 수없이 찾아가서 지성으로 묻고 바르게 믿을 것입니다. 직접 그 말을 듣고서 비록 친척의 이름과 고향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더라도 스스로 밝은 눈이 없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름을 한탄하고, 항상 고향을 아는 사람을 가까이하면서 고향에 인도해 주기를 부지런히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고향을 아는 사람은 마침내 대비심을 내어 그 지극한 정성을 보고, 그 의지할 데 없음을 애처롭게 여기며 그 가난함을 불쌍히 여겨, 고향으로 인도해 가되 손을 잡고 이끌 때에는

009_0020_a_01L遇善友親受話頭自做工夫功極自
009_0020_a_02L憑聞吾師云師家種種指示能令弟
009_0020_a_03L資見性疑是妄也答云古今見性之人
009_0020_a_04L若不因師而悟則從上佛祖師資傳授
009_0020_a_05L爲何事也天下萬形皆依模範而成質
009_0020_a_06L古今賢聖皆因師敎而成道傳燈所載
009_0020_a_07L一千七百二十一人誰得無師之悟耶
009_0020_a_08L玄策禪師謂一宿覺曰威音王已後
009_0020_a_09L無師自悟者皆是自然外道也問曰
009_0020_a_10L說吾師所敎云眞誠做工者須依善友
009_0020_a_11L如敎修持而日日上來師前師令學
009_0020_a_12L者供吐做工之如何隨病與藥不涉
009_0020_a_13L他途云吾疑反使其心錯亂混澆也
009_0020_a_14L答曰初機晩學未曉法理未達心源
009_0020_a_15L獨處做工如兒失母如盲失笻也
009_0020_a_16L如盲兒早失父母遠在他鄕四向無
009_0020_a_17L貧寒困苦無處伸訴也一夕忽聞
009_0020_a_18L人語父母親戚富居某國某鄕云
009_0020_a_19L甚欣然躬詣知鄕人處無數拜謁至誠
009_0020_a_20L謹問正信親聞其語雖知親戚之姓名
009_0020_a_21L鄕國之遠近自恨無目不知何徃
009_0020_a_22L近知鄕人頻禱率去勤勤不已知鄕
009_0020_a_23L之人遂生大悲心見其至誠哀其無
009_0020_a_24L憫其貧寒將領歸鄕携手牽引

009_0020_b_01L 산과 냇물을 잘 건너도록 해주고, 험한 곳을 안전하게 지나도록 해 줄 때에는 자애롭고 부드럽게 이끌어 주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며 질타하기도 하여 물러날 생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고, 서두르다가 잘못 가지 않도록 하여 긴장시키기도 하고 풀어 주기도 하면서, 중도를 얻어 곧장 고향에 도달하여 직접 그 부모를 만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각각 남북으로 헤어지면서도 서로 아무런 회한이 없는 것입니다. 초심자의 공부 역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법을 듣고 믿음을 일으켜 돈오하며, 그리고 마지막의 닦고 증득하는 대사大事를 물어본 연후에 홀로 거처하면서 인연 따라 자유롭게 수용한다면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옛날에 고봉 선사도 설암을 만나지 못하고서 헛되이 3년을 보낸 후에 설암이 격발해 주어 대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다양한 근기가 있고 법에도 다양한 뜻이 있어서 일정한 법이나 일정한 수행의 설은 없습니다.”
(좌주가) 물었다. “견성한 사람은 곧 여여불如如佛입니다. 그런데 지금 견성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신통을 드러내지 못하고 담 너머의 일도 알지 못하니 헛된 줄 알겠습니다.”
(나는) 답하였다. “비록 견성하였더라도 아직 신통 변화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규봉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병이 아직 회복되지 못한 것과 같다고. 옛사람이 ‘도력이 아직 충족되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경전에서 ‘견성하면 곧 부처와 같다.’라고 말한 것은 성구문性具門45)에 의거한 설이고 공행功行을 갑자기 마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공행문에 의거한다면 어찌 숙성시키는 것이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공력이 아직 성인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널리 일체중생을 보니 여래의 지혜 덕상德相을 갖추지 않은 이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어찌 다만 깨닫고 난 후라야 부처와 같다고 말하겠습니까. 대개 범부의 견성은 모든 부처와는 매우 다릅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는 수 겁의 세월 동안 견성이 명료하여 망상이 이미 끊어져 신통 변화가 자연히 드러납니다. 마치 물이 맑으면 그림자가 드러나고 구름이 사라지면 달이 밝게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범부는 비록 자성청정과 자성해탈을 얻더라도 아직 이구청정離垢淸淨46)과 이장해탈離障解脫47)을 얻지 못하여 망상이 아직 있고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으며, 성품에 비록 신통묘용이 있지만 막혀서 통하지 못하고 숨어서 드러나지 못합니다. 마치 구름 가운데 있는 달과 같고

009_0020_b_01L渡山川護經險夷愛軟誘之嚬伸吼
009_0020_b_02L勿令生懈思退不使欲速錯過
009_0020_b_03L緩得中直到其鄕自見其親然後各
009_0020_b_04L分南北彼此無悔也初心做工者
009_0020_b_05L叅明師聞法發信頓悟更問末後修證
009_0020_b_06L大事然後獨處隨緣任運受用有何
009_0020_b_07L咎哉昔高峰未遇雪岩空過三年限
009_0020_b_08L後蒙雪岩之激發成辦大事然人有多
009_0020_b_09L法有多義無有定法定行之說也
009_0020_b_10L問曰見性之人即如如佛今云見性者
009_0020_b_11L不現神通不知隔壁吾知虛頭也
009_0020_b_12L雖有見性者即未神變圭峯不云乎
009_0020_b_13L如病未平復也古人云道力未充足
009_0020_b_14L經云見性即如佛者此約性具門說
009_0020_b_15L不言功行頓畢也若約功行門
009_0020_b_16L無生熟故云功未齊於諸聖也經云普
009_0020_b_17L見一切衆生具有如來智慧德相何獨
009_0020_b_18L言悟後如佛大槩凡夫見性與諸佛逈
009_0020_b_19L異也何也諸佛曩劫見性明了妄想已
009_0020_b_20L所有神變自然現發如水澄影現
009_0020_b_21L如雲盡月明也凡夫之人雖得自性淸
009_0020_b_22L淨自性解脫而未得離垢淸淨離障解
009_0020_b_23L妄想猶在煩惱未斷性上雖有神
009_0020_b_24L通妙用碍而不通隱而不現如雲中

009_0020_c_01L흐르는 물 가운데 있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얼음이 있는 연못이 온전히 물인 줄 알면 따뜻한 양기를 빌려 점차 녹이고, 범부가 곧 부처인 줄 알면 수행을 빌려 점차 이룬다.’48)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신통 변화는 성인의 하찮은 일이니 비록 간혹 신통을 드러낼 때에도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세상을 현혹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근기에 맞게 모습을 드러낸 성현들은 보통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오묘하게 만물을 쓰고 상황에 따라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니 이것을 ‘평상시의 진실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신통 변화를 드러내는 경우는 마군에게 항복 받고 삿됨을 꺾으며 귀신을 두렵게 하기 위해서이니, 절대로 봄에 밭에서 씨를 거두어들이지 말며 또한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쫓아서도 안 됩니다.”
(좌주가) 물었다. “어떤 사람이 기이한 일을 드러낸다면 어떻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만약 기괴한 일을 가지고 부처의 신통이라고 한다면, 천마외도天魔外道나 신선환사神仙幻士도 기이하고 특별한 술수가 있다면 부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용은 비를 내리는 능력이 있고, 이무기는 성城을 변화시키는 상서를 가지고 있으며, 자석은 철을 당기는 신령함이 있고, 나무는 밤을 밝히는 빛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도 기이한 것이어서 부처의 신통 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신통으로써 정正을 삼는다면 우두 법융牛頭法融49)이 4조 도신道信50)을 본 후에 ‘꽃을 머금은 백조百鳥가 오지 않고 완석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고 하겠습니까. 운거 도응雲居道膺51)은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았으니 희유한 일인데도 동산 양개洞山良价가 어찌하여 질책했겠습니까.”
(좌주가) 물었다. “부처님이 신통 변화가 있다면 범부도 그러할 터인데 사邪와 정正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정법안장 열반묘심에서는 사와 정이 본래 공하고 범부와 성인이 없으며 나와 남이 모두 사라지고 능能과 소所가 함께 없어져 제법이 본래부터 항상 적멸한 모습이고, 티끌 티끌의 모든 세상이 원래 비로자나 화장세계며 색깔 색깔 소리 소리가 모두 본래 공겁 이전의 법신입니다. 별도로 염화미소를 전한 선종은 삼라만상에 펼쳐 드러나고, 영축산 법회에서 설하신 방광方廣52)의 진실한 법문은 삼라만물에 널리 퍼졌습니다. 그래서 정명淨明(유마거사)이 ‘밝고 밝은

009_0020_c_01L之月動水之影也故云識氷池而全水
009_0020_c_02L借陽氣而漸消悟凡夫而即佛假修行
009_0020_c_03L而漸成盖神通變化猶是聖人末邊事
009_0020_c_04L雖或現時不可要同只是驚人惑世之
009_0020_c_05L事故應化賢聖現相人中妙用萬物
009_0020_c_06L隨流度生是可謂平常眞實方便也
009_0020_c_07L現神變者爲降魔摧邪怖鬼也切莫春
009_0020_c_08L田要收顆粒亦不棄本逐末也問曰
009_0020_c_09L人現奇異之事何也答曰若以奇恠之
009_0020_c_10L爲佛神通之事天魔外道神仙幻
009_0020_c_11L亦有奇特之術可謂佛乎乃至龍有
009_0020_c_12L降雨之能蜃有化城之瑞石有引鐵之
009_0020_c_13L木有夜明之光此亦奇異可謂佛
009_0020_c_14L之神變乎若以神通爲正牛頭見四祖
009_0020_c_15L含花百鳥不來頑石不點頭以爲
009_0020_c_16L非耶雲居膺常受天供希有之事
009_0020_c_17L洞山何爲責耶問曰佛有神通凡亦爾
009_0020_c_18L邪正如何明辨耶答曰正法眼藏湼槃
009_0020_c_19L妙心中邪正本空凡聖亦無自他普
009_0020_c_20L能所俱亡諸法從本來常自寂滅
009_0020_c_21L塵塵刹刹元是毘盧華藏境界
009_0020_c_22L色聲聲本來空劫已前法身也拈花微
009_0020_c_23L笑之別傳禪宗頭頭披露靈鷲覺塲之
009_0020_c_24L方廣眞說物物宣揚故淨明云明明

009_0021_a_01L온갖 풀잎은 분명하고 분명한 조사의 뜻이오, 백억 겁토록 활발한 석가는 봄바람에 취해서 춤추도다.’53)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방龎 거사는 ‘일상에 별다른 일 없이 오직 스스로에게 합치할 뿐, 이것저것 취하거나 버리지 않으니 어디서든지 어긋나지 않는다.’54)라고 하였으며, 영가 현각은 ‘대천세계의 바다 거품이요, 모든 성현은 번갯불처럼 번쩍하고 사라지는 것이다.’55)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마다 본래부터 이와 같은 이치를 가지고 있으니, 만약 이렇게 설하고 이렇게 들으며,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깨달으며, 이렇게 닦고 이렇게 증득한 종사를 만난 후에 여러 지방의 선지식에게 나아간다면 선사와 강주도 이러한 법으로써 각자 이해하는 바에 따라 각각 자신의 생각을 설할 것입니다. 그 언설은 비록 다르더라도 의미는 이러한 이치에 함께 돌아갈 것이니, 이러한 이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투철하여 금강왕보검金剛王寶釼의 말후대사末後大事56)를 얻었거든 다시 산속에 들어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면서 푸른 물 푸른 산에서 자유로이 소요하고, 가을 달 봄바람 속에서 마음대로 편안히 쉬며 무위자연을 즐기고 걸림 없음을 담연히 여긴 후에, 널리 유교와 불교를 섭렵하여 두루 경서를 열람하고 만법의 근원을 궁구하여 천성千聖의 골수를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와 정의 옳고 그름과 범과 성의 높고 낮음과 나와 남의 같고 다름과 선과 교의 근원과 지류와 만법의 이理와 사事가 천차만별로 분명하게 마음과 눈 사이에 드러나서, 마치 밝은 해가 하늘에 걸려 있는 것과 같고, 밝은 거울이 대臺에 있는 것과 같으며, 아름답고 추함을 속이지 못하고 한 터럭도 숨기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스스로 구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오묘한 깨달음, 이러한 진정한 수행을 다만 범부의 알음알이에 집착하여 성인의 영역을 의심한다면,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일어나 눈 속에 먼지 풍뎅이가 생기고 가슴속에 연기가 일어나 궁겁토록 없애기 어려울 것이니, 비유하자면 허공을 헤집지만 스스로를 더욱 힘들게 할 뿐입니다.”
(좌주가) 물었다. “사자는 여우와 살쾡이의 무리와 놀지 않고 까마귀는 봉황의 울음소리로 울지 않습니다. 범부의 설은 범부의 말이고 성인이 있는 곳은 성인의 영역입니다.서로 문자를 드러낸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009_0021_a_01L百草頭明明祖師意百億活釋迦
009_0021_a_02L舞春風端龎公云日用事無別唯吾
009_0021_a_03L自偶諧頭頭非取捨處處勿張乖云云
009_0021_a_04L永嘉云大千沙界海中漚一切聖賢如
009_0021_a_05L電拂人人箇箇自有如是之理若遇
009_0021_a_06L宗師如是說如是聞如是思如是悟
009_0021_a_07L如是修如是證然後徧叅諸方則禪
009_0021_a_08L師講主將如是法各隨所解各說其
009_0021_a_09L言說雖殊意則同歸於如是之理
009_0021_a_10L如是之理透頂透底盡獲金剛王寶釼
009_0021_a_11L末後大事再入林巒如是弄來弄去
009_0021_a_12L逍遙自在於綠水靑山任意安閑於秋
009_0021_a_13L月春風快然無爲湛然無累然後愽
009_0021_a_14L涉儒釋歷覽經書窮萬法源徹千聖
009_0021_a_15L則邪正之是非凡聖之高下自他
009_0021_a_16L之異同禪敎之源派萬法之理事
009_0021_a_17L差萬別昭昭於心目之間如杲日麗天
009_0021_a_18L明鏡當臺姸媸不逃微毫不隱也
009_0021_a_19L不自求如是妙悟如是眞修但執凡
009_0021_a_20L夫之情識以疑聖域則千疑萬疑
009_0021_a_21L蜚於眼裡烟揚於胷中窮劫難盡
009_0021_a_22L如撮摩虛空者只益自勞耳問曰獅不
009_0021_a_23L遊狐狸之群烏不鳴鳳凰之聲凡說凡
009_0021_a_24L聖在聖域1)互現文字 [2] 而今有人

009_0021_b_01L성언량聖言量57)을 끌어다가 자기의 견해라고 하니, 범용한 사람이 함부로 제왕을 칭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큰 죄가 없겠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성인은 범인의 무리에 섞여 있어서 쉽게 구별하기 어렵고 범인이 성인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니, 용과 뱀이 섞여 있는 것처럼 범인과 성인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사람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물고기가 아닌 것이 물고기를 알기 어려운 것처럼.’58)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지만 그 비늘을 고치기는 어렵고, 범인이 변하여 성인이 되지만 그 얼굴을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성현이 아니니 어찌 성현이 성현 된 이유를 알겠습니까. 『법화경』에 ‘부처님은 스스로 연등불에게 수기를 받아 성불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삼세제불을 내가 모두 교화하여 성불하게 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재남유기善財南遊記」59)에는 ‘오십삼 선지식은 모두 관세음보살의 응신이다.’라고 하였고, 『신선통감神仙通鑑』60)에는 ‘역대 제왕의 스승과 속세 밖에 있는 많은 신선은 모두 한 명의 노자가 내려온 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논해 본다면, 누가 범인이고 성인인 줄 알아서 그 지견과 행동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군자는 3일 동안만 헤어져 있어도 눈을 비비고 마주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현재의 인간 세상사도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천만 겁 가운데 윤회하면서 살아온 인연들의 업보를 부처님 같은 지견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밝게 알겠습니까. 사자와 봉황 등의 금수는 서로 두려워하므로 피차가 조화를 이루며 살지 못하고, 일반 백성과 제왕은 평소 귀천으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상하를 범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법과 축생의 무리로써 함부로 ‘범인이 변하여 성인이 되는 오묘한 뜻’을 논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좌주가) 물었다. “서로 힐난하는 것을 우선 멈추고, 감히 청하건대, 나에게 선禪에 대해 설하여 오묘한 뜻을 깨닫게 해 주기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 곳의 사람들 역시 믿고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답하였다. “나에게는 본래 설할 선이 없고, 또한 오묘한 뜻도 없습니다. 그러나 보여 주기를 요구하면 보여 주고, 설하기를 바라면 설합니다. 그대가 뜻이 굳센 사람이 아니라면 설하고 보여 준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는 격외의 현묘한 문으로 그대가 절벽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바람 소리만 듣고도 도망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대는 배운 바의 경론으로 다만

009_0021_b_01L取聖量以爲己見猶如凡庸妄稱帝王
009_0021_b_02L豈無大罪歟答曰聖混凡流難可易辨
009_0021_b_03L轉凡成聖在毫釐之間龍蛇混雜
009_0021_b_04L聖交叅故云人間人兮孰知渠如非魚
009_0021_b_05L兮難知魚魚變成龍不改其鱗轉凡
009_0021_b_06L成聖不改其面吾非聖賢豈知聖賢
009_0021_b_07L之所以爲聖賢耶法華云佛自受燃燈
009_0021_b_08L記成佛又云三世諸佛我皆敎化成佛
009_0021_b_09L善財南遊記云五十三善知識
009_0021_b_10L一觀音之應身也神仙通鑑云歷代帝
009_0021_b_11L王之師物外多小之神仙皆一老子之
009_0021_b_12L降神也以此論之誰知是凡是聖之知
009_0021_b_13L見所行耶君子辭別三日括目相對
009_0021_b_14L現世人事難得枚知而況千萬劫中
009_0021_b_15L轉轉生來之因緣業報如非佛見誰能
009_0021_b_16L明了耶獅鳳禽獸相懷恐怖彼此不
009_0021_b_17L凡民帝王素分貴賤上下不僭
009_0021_b_18L以世法及畜類妄議於轉凡成聖之妙
009_0021_b_19L義也問曰相與詰難且止敢請爲我說
009_0021_b_20L令得妙旨則諸方之人亦信不譏
009_0021_b_21L答曰我這裡本無說禪亦無妙旨
009_0021_b_22L然要示即示欲說即說汝非鐵漢
009_0021_b_23L示奚爲吾之格外玄門知汝望崖
009_0021_b_24L得聞風而退矣唯汝所習經論但執言

009_0021_c_01L언어문자에 집착하는 것을 이해라 여기고 언어 밖의 현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니, 죽을 때까지 의리에 구애되어 남의 보배만을 헤아리고 헛되이 옳고 그름을 다투며, 아만我慢을 증대시키고 기쁨과 분노가 빈번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그대의 참선이라면 더 이상 어찌 선을 설하겠습니까. 다만 그대를 위해 선을 설할 만한 것이라면 고봉高峯 선사가 이통 상인理通上人에게 보여 주었던 말,61) 대혜 선사가 여呂 사인舍人에게 답했던 글,62) 본정本淨이 양가兩街의 선승에게 했던 말,63) 우두 선사가 박릉왕에게 대답했던 말,64) 규봉 선사가 사史 산인山人에게 했던 말,65) 달마가 육종六宗을 깨뜨렸던 일66)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그대에게 설할 만한 것이지만 그대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므로 번거롭게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그대는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좌주가) 물었다. “이렇게 천시하고 비난하면서 선학禪學에 대해 설해주지 않는다면 후인들이 어디서 조사의 뜻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한마디 설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답하였다. “나는 자주 그대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 물음에 따라 설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름과 모습에 집착하는 견해로써 제멋대로 언설을 해석하면서 빈 메아리 같은 소리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의 견해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느 산 어느 스님의 지견과 행동이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전하면 빈 소리에 불과하지만 만 사람이 전하면 실제가 되어 대중의 입이 금金을 벗겨 내는 것입니다. 후회한들 어쩌겠습니까. 그대가 만약 진심으로 선에 대해 듣고자 한다면 조용한 곳으로 가서 면벽하여 마음을 궁구하십시오. 그렇게 30년이 지난 후라야 나의 돈증頓證에 대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다시 와서 재차 요청한다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몸이 없어도 몸을 드러내고 설이 없어도 설을 드러내어, 허공을 입으로 삼고 번개를 소리로 삼으며, 바람과 비를 언어로 삼고 강과 바다를 뜻으로 삼으며, 진흙 뭉치로 큰 광명을 발하고 초목 그릇으로 주변을 장엄하며, 수없이 많은 성현들을 증명법사로 삼고 미진수의 중생을 권속으로 삼은 후에, 법신의 저 위와

009_0021_c_01L語文字爲解不知言外之玄理終年竟
009_0021_c_02L拘於義理數他珍寶空諍是非
009_0021_c_03L益我慢喜怒頻起是汝之叅禪復何
009_0021_c_04L說禪但有爲汝說禪高峯示理通上
009_0021_c_05L人之語妙喜答呂舍人之書本淨降兩
009_0021_c_06L街禪僧之說牛頭對愽陵王之問圭峯
009_0021_c_07L謂史山人之言達摩破六宗之事迹
009_0021_c_08L爲汝說而汝亦甞見故不復煩擧
009_0021_c_09L自思之問曰如是輕賤譏弄而不說禪
009_0021_c_10L則後之人何得聞祖意歟願聞一
009_0021_c_11L說焉答曰吾頻遇如汝之軰随問爲說
009_0021_c_12L彼以認名執相之見妄逐言說承虛接
009_0021_c_13L猶將自見向謂人曰某山某師之
009_0021_c_14L知見所行若此也一人傳虗萬人傳實
009_0021_c_15L衆口爍金悔之何及汝若眞信欲聞
009_0021_c_16L禪話汝歸寥處面壁窮心三十年後
009_0021_c_17L聞我頓證大覺云更來再請則我亦
009_0021_c_18L不得已無身現身無說現說以虛空
009_0021_c_19L爲口以雷霆爲音以風雨爲言以江
009_0021_c_20L海爲義以泥團土塊放大光明以草
009_0021_c_21L木瓦礫莊嚴圍繞以恒沙聖賢爲證明
009_0021_c_22L以微塵衆生爲眷屬然後法身向上
009_0021_c_23L「互現文子」四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
009_0021_c_24L文活字

009_0022_a_01L위음왕의 저쪽에 있는 본분의 소식을 궁겁토록 설하되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대 역시 들음이 없는 가운데 들음을 일으켜 무심의 마음과 무념의 생각으로 듣고 사량해 보십시오. 즉 들음이 곧 설함이고, 설함이 곧 들음이며, 듣고 설함을 함께 잊는다는 것도 잊어버린다면,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빨리 말해 보시오, 빨리 말해 보시오. 설했습니까, 설하지 않았습니까. 진중하기 바랍니다.”
좌주는 듣고 망연히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일어나 사례하며 두 번 절하고 나갔다. 그 후로 더 이상 좌주는 나의 거처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좌주가 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스스스 솔바람 소리, 괄괄괄 시냇물 소리, 어렴풋한 두 늙은이의 오묘한 담론이로다.
심공 스스로 경계하는 설(心公自警說)
기이하구나! 심공이여. 그대는 본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 마음에 그 마음을 마음에 두고, 생각 생각에 그 생각을 생각하여 생각이 그 생각을 보존하고 마음이 그 마음을 편안히 해야 한다. 마음은 다른 마음이 없고 생각은 다른 생각이 없으니 생각 생각과 마음 마음에 깨어 있어서 미혹하지 않고 마음 마음과 생각 생각에 알고 있어서 우매하지 않아서, 우매하지도 않고 미혹하지도 않은 마음과 생각이 마음 마음의 마음이고 생각 생각의 생각이다. 자주자주 사邪와 정正의 마음을 잘 관찰하고 마음이 혼산昏散할 때에는 그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려서 다만 자성의 진심밝고 밝게 알아서 항상 그대로 변하지 않는 마음을 지키고 경계를 반연하는 망심경계를 반연하고 분별하여 경계를 따라 생멸하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적절히 마음을 쓸 때에는 적절히 무심無心을 쓰고, 무심을 적절히 쓸 때에는 항상 적절히 무無를 쓰면, 무심이 곧 유심이고 유심이 곧 무심이다. 무심과 유심은 모두 임시로 붙인 이름이지만, 오직 하나의 진심은 신령하고 오묘하며 자재하면서도 자성을 지키지 않아서, 뒤집으면 망심이 되어 경계를 따라 떠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온갖 업을 짓고 여러 가지 고통을 받으니, 괴이하고

009_0022_a_01L音那邊本分消息窮劫談揚無始1)
009_0022_a_02L [3] 汝亦無聞之中起聞以無心之心
009_0022_a_03L無念之念聽之思之則聽即說說即
009_0022_a_04L聽說俱亡者亦亡是箇什麽速道
009_0022_a_05L速道是說耶不說耶伏惟珍重座主
009_0022_a_06L聞之茫然不識杜口起謝再拜俄然
009_0022_a_07L座主不見昭然之住昭然不見座主之
009_0022_a_08L蕭蕭松籟決決溪聲依俙二老之
009_0022_a_09L談玄也

009_0022_a_10L

009_0022_a_11L心公自警說

009_0022_a_12L
奇哉心公汝有本心之心莫忘其心
009_0022_a_13L心心心其心念念念其念念存其念
009_0022_a_14L心安其心心無異心念無異念念念心
009_0022_a_15L覺而不迷心心念念知而不昧
009_0022_a_16L昧不迷之心念是爲心心之心念念之
009_0022_a_17L念也頻頻覺察邪正之心旋旋抖擻昏
009_0022_a_18L散之心但守自性之眞心了了自知而
如如不變心

009_0022_a_19L生緣境之妄心緣境分別而隨
境生滅念也
恰恰用心
009_0022_a_20L恰恰無心用無心恰恰用常用恰
009_0022_a_21L恰無無心即有心有心即無心無心
009_0022_a_22L有心揔是假名唯一眞心靈妙自在
009_0022_a_23L不守自性翻爲妄心流逸奔境自作
009_0022_a_24L種種業自受種種苦可疑可恠可哀

009_0022_b_01L애통해할 만하도다.
심공이여! 심공이여!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내 지금 그대에게 두 번 세 번 간곡히 부탁하노니, 그대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훗날 언젠가 만약 마음이 생각을 일으키거든 생각이 곧바로 마음으로 돌아가고, 생각이 마음에 움직이거든 마음이 곧바로 생각으로 돌아가, 생각이 그 마음에 있고 마음이 그 생각에 있으면, 생각 생각이 무념이고 마음 마음이 무심이어서, 무심이 도리어 무념이 되고 무념이 도리어 무심이 된다. 마음과 생각은 하나라고 말하고 싶지만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둘이 아니어서,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마음과 생각은 비어 있으면서도 신령스럽게 알고, 고요하면서도 신령스럽게 오묘하여, 신묘한 심체를 마음이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으며, 측량하지 못하는 마음을 더 이상 어찌하겠는가. 마치 물로써 물을 씻는 격이요, 눈으로써 눈을 보는 격이니, 본래 능能과 소所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경계에서 그 마음을 거두지 않고 그 마음을 흩뜨리지 않아서 그 마음이 허공과 같아지면 흩뜨려도 흩뜨려지지 않고 거두어도 거두어지지 않는다. 마음에 생각이 없으면, 그 마음은 본래의 머무름 없음이 되고, 머무름 없는 심체가 신령스럽게 알고 우매하지 않아서 대지혜의 광명이 청정하게 법계에 가득 찬다. 그러므로 ‘허공이 분쇄되고 대지가 가라앉아 남과 내가 함께 없어진다.’67)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이 옳다면 진실로 옳겠지만, 이같이 이같이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에서 이 말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아는 마음에서 이같이 이같이 스스로 알고 스스로 안다. 가령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보거나 듣거나, 한가하거나 바쁘거나, 기쁘거나 화나거나, 탐내고 성내거나, 자애롭고 착하거나 한 것은 다만 밝고 밝게 항상 아는 하나의 신령스러운 진심이다. 그 마음은 시방세계에 두루 있으니 어찌 빈 공간이 있겠으며, 과거ㆍ현재ㆍ미래에 뻗쳐 있으니 어찌 끊어진 시간이 있겠는가.
그 마음은 더러움과 깨끗함을 꿰고 있고 범인과 성인을 관통하여, 만상에 드러나고 만물에 뚜렷하며, 있는 곳곳마다 소리 소리마다 색깔 색깔마다, 하나하나 원만히 구족되어 있고 하나하나 두루두루 청정하며, 하나하나 스스로 완성되어 있고 하나하나 모자람이나 남음이 없으며,

009_0022_b_01L可痛心公心公是誰之過耶我今爲
009_0022_b_02L再三叮寧汝亦返思而知之他時後
009_0022_b_03L若有心起於念念即歸心念動於
009_0022_b_04L心即歸念念在其心心在其念
009_0022_b_05L念無念心心無心無心却是無念
009_0022_b_06L念却是無心心與念欲言其一而非
009_0022_b_07L欲言其二而非二非二非一之心念
009_0022_b_08L虛而靈知寂而神妙神妙心體心何
009_0022_b_09L測度不測之心更欲何爲如以水洗
009_0022_b_10L以眼見眼本無能所故也於諸境
009_0022_b_11L不收其心不散其心其心如虛空
009_0022_b_12L散之不散收之不收心若無念其心
009_0022_b_13L本來無住無住心體靈知不昧大智
009_0022_b_14L慧光明淸淨彌滿充塞法界故云虛
009_0022_b_15L空粉碎大地平沉物我俱亡此言是
009_0022_b_16L則固是亦不容是言於如是如是靈知
009_0022_b_17L之心如是如是自知自知於自知之心
009_0022_b_18L至於坐臥也見聞也閑忙也喜怒也
009_0022_b_19L貪嗔也慈善也但是了了常知之一靈
009_0022_b_20L眞心其心也橫遍十方何有空缺處
009_0022_b_21L竪窮三際何有間斷時貫於染淨
009_0022_b_22L於凡聖頭頭上現物物全彰在在處
009_0022_b_23L聲聲色色一一圓滿充足一一周
009_0022_b_24L徧淸淨一一自在成就一一無欠無餘

009_0022_c_01L하나하나 천진한 자연이고 하나하나 연꽃처럼 물들지 않으며, 하나하나 그대로 변하지 않고 하나하나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하나하나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서, 이같이 원대하고 수승하여 끝없이 넓고 끝없이 현묘하다. 불가사의하고 불가사의한 것이 불가사의한 마음을 굴리고 있으니 어찌 멀리 있겠는가. 심공이여! 심공이여! 다만 그대가 이 마음이고 마음이 바로 그대이니, 날마다 순간순간 일상생활의 행동하는 사이에 그것을 알아채 우매하지 않고 알아채 우매하지 않아야 한다.
대각의 정혜에 관한 설(大覺定慧說)
무릇 만물은 오행에서 생겨나고 오행은 이기二氣에서 생겨나며, 이기는 태극에서 생겨나고 태극은 무극에서 생겨나며, 무극은 태허에서 생겨나고 태허는 대각에서 생겨난다. 대각은 위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 땅강아지에 이르기까지 본래 영각靈覺의 진성眞性68)을 가지고 있다. 이 진성이 크게는 밖 없는 것을 포괄하여 넓고도 크기 때문에 ‘대大’라 하고, 흐름을 따라 자재하면서도 신령스럽게 밝고 분명히 알기 때문에 ‘각覺’이라고 하였다.
이 대각의 심왕心王은 지극히 비어 있고 지극히 오묘하여 명상名相69)을 끊고 언어를 초월해 있다. 저 태허의 이치를 넘어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바깥으로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믿는 자가 적었다. 그것을 듣고 진실로 믿는 자가 많았다 하더라도 믿고 깨닫는 자 적었고, 믿고 투철히 깨닫는 자 많았다 하더라도 깨닫고 수행하는 자 적었으며, 깨닫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자 많았다 하더라도 수행하여 증득하는 자 적었고, 깨닫고 수행하여 밝게 증득하는 자 비록 있었다 하더라도 정과 혜를 함께 운용하고 대각의 심왕에 그윽이 합치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깨닫고 증득하는 성현들은 각각 그 이해하는 바에 따라 어떤 이는 신해信解의 이치를 설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수증修證의 뜻을 설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성과 상, 공과 유, 돈과 점을 설하는 등 무수한 방편으로

009_0022_c_01L一一天眞自然一一如蓮花不着水
009_0022_c_02L一如如不變一一無去無來一一不生
009_0022_c_03L不滅如是高遠勝大廣愽無邊玄玄
009_0022_c_04L妙妙不可思議不可思議轉不可思
009_0022_c_05L議之心豈遠乎在心公心公只汝是
009_0022_c_06L心是只汝日日時時動容周旋之間
009_0022_c_07L覺之不昧覺之不昧也

009_0022_c_08L

009_0022_c_09L大覺定慧說

009_0022_c_10L
原夫萬物生於五行五行生於二氣
009_0022_c_11L二氣生於太極太極生於無極無極生
009_0022_c_12L於太虛太虛生於大覺大覺者上自
009_0022_c_13L諸佛下至螻蟻本有靈覺之眞性也
009_0022_c_14L此性大包無外宏廓廣邈故云大也
009_0022_c_15L随流自在靈明了知故云覺也此大
009_0022_c_16L覺心王至虛至妙絕名相超言詞
009_0022_c_17L彼太虛之理逈出思議之外故古今之
009_0022_c_18L聞而信之者少聞而諦信者雖多
009_0022_c_19L而悟之者少信而徹悟者雖多悟而修
009_0022_c_20L之者少悟而勤修者雖多修而證之者
009_0022_c_21L悟修明證者雖有定慧雙運冥合
009_0022_c_22L大覺心王者最難故悟證此心之賢聖
009_0022_c_23L各随所解或說信解之理或說修證之
009_0022_c_24L或說性相空有頓漸乃至無數方便
009_0022_c_25L「終無」疑「無終」{編}

009_0023_a_01L널리 언교言敎를 펼쳤다. 가령 미혹하여 방향을 잃은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심왕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좋은 가르침을 인정하게 할 수 있겠지만, 일을 마친 뛰어난 과량過量의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지말적인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무릇 대각의 마음을 믿고 이해하는 자로서 닦아 증득하고자 한다면, 먼저 정혜로써 닦고 뒤에 무심으로써 증득해야 한다. 요즘 범범하게 심법을 배우는 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진심은 공적空寂하여 불변不變한다’고 여기고 다만 본체를 지키려고만 하는 자가 있는데, 이런 사람은 마치 동의 본질은 보았지만 거울의 밝게 비추는 모습은 보지 못한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진심은 영지靈知하여 수연隨緣한다’고 여기고 상용相用에 집착하려는 자가 있는데, 이런 사람은 거울의 밝게 비추는 성품은 알지만 동의 본질은 알지 못한 것이다. 마침내 이들은 원만히 대각의 본심을 증득하여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굽은 길을 가도록 하여 삿된 견해의 굴에 떨어지도록 하면서도 자신이 바르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니 어떻게 그 삿됨을 알겠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되겠는가.
가령 근기가 뛰어난 선비라면 처음에 선지식이 두 가지 이익을 가지고 심인心印을 곧장 전하는 자를 선지식이라고 하고, 다만 문자와 언어에만 집착하면서 이것을 법이라고 여기는 자를 악지식이라고 한다.을 만나 한마디 말에, 원각의 본심이 원래 청정하고 본래 해탈하였으며, 없지도 않고 있지도 않으며, 치우쳐 있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으며, 갠지스강 모래알만큼 많은 공덕과 한량없는 오묘한 작용을 본디 구족해 있음을 돈오頓悟한 후에, 순간순간 망념을 깨닫고 살펴서 성품 바다에 그윽이 합치될 것이다. 『수능엄경』의 대정大定으로써 반연하는 마음을 끊으면서도 완악한 공空에 빠져들지 않고, 반야의 대혜大慧로써 혼란한 마음을 없애지만 광란하지 않아, 적적寂寂한 곳에서도 성성惺惺하고 우매하지 않으며, 성성할 때에도 적적하고 미혹하지 않아서 성惺과 적寂이 함께 있고 정定과 혜慧가 원만히 밝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각의 본심이다.
혜는 자기 마음의 큰 작용이고, 정은 자기 마음의 본체이며, 본체와 작용은 원래 일심一心이다. 일심이라는 이름 역시 임시로 설한 것이니, 능能과 소所가 함께 고요해지면 시끄러운 곳에 있어도 시끄러운 곳으로 여기지 않고 고요한 곳에 있어도 고요한 곳으로 여기지 않아,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한곳이 되고 나와 남이 하나의 이치가 되며,

009_0023_a_01L廣演言敎若使迷之失之者自覺心王
009_0023_a_02L雖可如是善說若於了事過量漢如許
009_0023_a_03L支說不足爲貴也夫信解大覺心者
009_0023_a_04L若欲修證先以定慧爲修後以無心爲
009_0023_a_05L今時泛學心法者或以謂眞心空寂
009_0023_a_06L不變但守本體則如見銅之本質
009_0023_a_07L不見鏡之明像也或以謂眞心靈知随
009_0023_a_08L惟執相用則如識鏡之明性而不
009_0023_a_09L識銅之本質遂令圓證大覺本心之正
009_0023_a_10L解者未免紆曲墮於邪見窟中自謂
009_0023_a_11L爲正豈知是邪然則如之何而可也
009_0023_a_12L若是筋骨之士其初遇善知識直傳心印
以此二利

009_0023_a_13L但執文言以此爲法者
之善知識者謂之惡知識
[1] 一言之下頓悟圓
009_0023_a_14L覺本心元淸淨本解脫非空非有
009_0023_a_15L偏不正恒沙功德無量妙用自在具足
009_0023_a_16L然後時時覺察妄念冥符性海之中
009_0023_a_17L首楞大定雖絕心之緣慮不着於頑空
009_0023_a_18L以般若大慧雖遣心之昏住不拘於狂
009_0023_a_19L寂寂處惺惺不昧惺惺時寂寂不
009_0023_a_20L惺寂等持定慧圓明方是大覺本
009_0023_a_21L心也慧是自心之大用定是自心之本
009_0023_a_22L體用元是一心一心之名亦假說
009_0023_a_23L能所俱寂則處閙而不爲閙底閙也
009_0023_a_24L靜而不爲底靜也靜閙一處自他一

009_0023_b_01L심정에 생각하는 바가 없고 의식에 작위하는 바가 없어서, 마음에 생겨나는 바가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무엇이 정혜이고 무엇이 대각의 마음이겠는가.
맑고 고요하며, 우뚝하고 드높으며, 고상하고 아득히 멀도다. 험준하고 험준한 산이 평지가 되고 평지보다 더 평평한 땅이 험준한 산이 되는 그 가운데 한 놈이 배울 만한 법이 없고 참구할 만한 선禪이 없으며, 벗어 버릴 생사가 없고 증득할 만한 열반이 없는 경지에서 자유롭게 노닐고 자유롭게 노닐어, 계수나무가 있는 바위에서나 흰 돌이 깔린 시냇가에서, 달 보고 바람 맞으며, 세 갈래 서까래 아래의 일곱 자 방석 앞에서 앉거나 눕거나 하면서 배고프면 금우金牛 화상의 밥을 씹고,70) 목마르면 조주趙州 스님의 차를 마시며, 속세의 바깥에서 자유로이 소요하고, 눈 내리는 밤의 밝은 달과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소요하며 날을 보낸다면, 무심한 도인이며 일을 마친 범부이며 측량할 수 없는 큰 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놈의 얼굴 앞에 십지의 성현과 십주ㆍ십행ㆍ십회향의 보살이라도 간담이 서늘하며 달마와 석가라도 몸을 용납할 땅이 없을 것이며, 삿된 스님과 마군의 무리들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심장이 서늘할 것이고 천룡팔부도 의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범부로서 그 누가 의심하거나 비난하지 않겠는가. 이 사람은 팔풍八風71)의 경계에서도 마치 산봉우리 위의 구름이 무심하게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 같고, 물 위의 바람이 무정하게 오고 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경산 스님이 말하기를 “도를 증득한 선비는 자기를 가득 채운 이후에 그 나머지를 미루어 근기에 맞게 상대를 대면한다. 마치 밝은 거울이 대에 있고 밝은 구슬이 손바닥에 있을 때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를 비추고 중국 사람이 오면 중국 사람을 비추듯이 집착하는 의식이 없어야 한다. 만약에 집착하는 의식이 있게 된다면 남에게 줄 법이 실재하게 될 것이다.”72)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지극히 옳도다.
무위진인 서문(無位眞人序)
관찰해 보니, 저 무위진인은 명자名字가 없어서 어떤 형태도 없지만 항상 사람들의 생활하는 가운데 있고, 고금에 걸쳐

009_0023_b_01L情無所念意無所爲心無所生
009_0023_b_02L此則誰爲定慧何者大覺心耶澄澄湛
009_0023_b_03L卓卓巍巍孤孤逈逈崎嶇崎嶇處
009_0023_b_04L平坦平坦甚平坦處甚崎嶇於中有一
009_0023_b_05L漢子無法何學 [2] 無禪可叅無生死可
009_0023_b_06L無湼槃可證任運騰騰騰騰任運
009_0023_b_07L桂樹岩畔白石溪邊看月瞻風三條
009_0023_b_08L椽下七尺單前或坐或臥飢則咬金
009_0023_b_09L牛飯渴來飮趙州茶寰中物外自在優
009_0023_b_10L雪月風花逍遙度日是可謂無心
009_0023_b_11L道人了事凡夫沒量大漢此漢面前
009_0023_b_12L十聖三賢膽喪魂驚碧眼黃頭容身
009_0023_b_13L無地邪師魔徒竪毛寒心天龍八部
009_0023_b_14L擬議不得而況凡夫之人孰不狐疑而
009_0023_b_15L毁謗哉此人當於八風之境一如無心
009_0023_b_16L嶺上雲舒卷一如無情水上風去來
009_0023_b_17L山云得道之士自己旣充足推己之
009_0023_b_18L應機接物如明鏡當臺明珠在掌
009_0023_b_19L胡來胡現漢來漢現非是着意若着
009_0023_b_20L意則有實法與人矣此言至冝哉

009_0023_b_21L

009_0023_b_22L無位眞人序

009_0023_b_23L
觀夫無位眞人者無名無字沒形容而
009_0023_b_24L常在於人人動容之中貫古貫今非新

009_0023_c_01L새로워지거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항상 삼라만상에 드러나 있다.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걸쳐 생멸하지 않고, 시방十方에 걸쳐 어느 쪽에도 치우쳐 있지 않으며, 위로는 하늘을 떠받쳐서 그 정상이 보이지 않고, 아래로는 땅을 지탱하고 있어서 그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주위 한 번 도는 사이에 좌우가 없지만 동서에 드러나 있고, 허리 한 번 굽혔다 펴는 사이에 앞뒤가 없지만 남북에 밝게 나타나 있다. 크게는 천지의 바깥을 포괄하고, 작게는 티끌이나 터럭 안에도 숨어 있을 수 있다. 가슴에 서려 있는 무량한 경론의 설은 삼천대천세계만큼 있고, 인간과 하늘 세상에 온축되어 있는 예술 능력은 모든 존재에 대해 뻗쳐 있으니, 오직 진인의 도덕과 문장만이 고원하고 심원하다고 할 만하다.
대개 세상의 높고 깊은 것으로 ‘산이나 바다’를 말한다. 산의 높음으로 말하면 태화산보다 높은 산이 없지만 진인의 도덕에는 미치지 못하고, 바다의 깊이로 말하면 창해보다 깊은 바다가 없지만 역시 진인의 문장에는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창해의 깊이는 측량할 수 있지만 진인의 문장은 측량할 수 없고, 태화산의 높이는 그 높이를 우러러볼 수 있지만 진인의 도덕은 우러러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저 진인의 도덕과 문장은 우러러볼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 진인의 문장과 도덕은 세상의 문장과 도덕이 아니므로 진인은 공자ㆍ맹자의 문장과 도덕을 부러워하지 않으니, 공자ㆍ맹자의 문장과 도덕은 진인에게서 처음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출세의 도덕과 문장이 아니므로 진인은 석가ㆍ노자의 도덕과 문장을 돌아보지 않으니, 석가ㆍ노자의 도덕과 문장 또한 진인에게서 처음 배웠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때로는 범인이나 성인으로서 거주하면서 염染과 정淨에 모두 통하기 때문에 능히 팔만사천의 법문을 설하기도 하고

009_0023_c_01L舊而恒徧于物物萬緣之上竪窮三際
009_0023_c_02L而不生不滅橫遍十方而不中不邊
009_0023_c_03L上柱天而不見其頂下柱地而不見其
009_0023_c_04L周旋之際沒左右而顯現於東西
009_0023_c_05L俯仰間絕前後而昭明於南北大包天
009_0023_c_06L地之外細隱塵毛之內胷蟠無量經論
009_0023_c_07L之說量廓沙界蘊在人天藝術之能
009_0023_c_08L心窮萬有顧惟眞人之道德文章可謂
009_0023_c_09L1) [4] 深者也盖世之高與深者惟曰
009_0023_c_10L山海也山之高高莫過於太華之高
009_0023_c_11L能不及於眞人之道德也海之深深莫
009_0023_c_12L過於滄海之深而滄海之深亦不及於
009_0023_c_13L眞人之文章也何也惟滄海之深
009_0023_c_14L可度也眞人之文章不可度也抑太
009_0023_c_15L華之高高可仰也眞人之道德不可
009_0023_c_16L仰也夫眞人之道德文章不可仰而難
009_0023_c_17L可度也則其爲文章道德非世之文章
009_0023_c_18L道德故眞人不羡於孔孟之文章道德
009_0023_c_19L盖孔孟之文章道德始出乎眞人也
009_0023_c_20L非出世之道德文章故眞人不顧於釋
009_0023_c_21L老之道德文章且釋老之道德文章
009_0023_c_22L學于眞人也是人也或居凡聖之位
009_0023_c_23L通於染淨故能說八萬四千法門亦起
009_0023_c_24L「遠」下底本有一字空白{編}

009_0024_a_01L팔만사천의 번뇌를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유有와 무無에 거처하면서 이理와 사事를 관통하기 때문에 산하대지의 삼라만상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백천세계의 큰 허공을 만들기도 한다. 신통변화가 끝이 없고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과 하늘 사람 가운데 믿고 이해하는 자가 적은 것이다.
아! 진인의 양量은 태허로도 추량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태화산의 높이나 창해의 깊이로 비교하여 헤아릴 수 있겠는가. 밝기로는 해와 달보다 밝아서 귀신도 그 도덕을 흠모하고, 덕으로는 대천세계를 덮고 있어서 인간과 하늘 사람도 그 높은 풍모를 우러러본다. 성현도 측량하지 못하는데 어찌 인간과 하늘 사람이 헤아리겠는가. 넓고 크며 밝고 밝아서 멀리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이른바 진인은 옛날 사람인가, 지금 사람인가, 보통 사람인가, 성인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위대하고 웅장하며 이처럼 수승하고 위대한가.
내 생각에, 진인은 만법의 왕이고 천성의 주인이며, 뭇 생명의 아버지이며 중생의 어머니이다. 그렇다면 진인의 의용義用과 공덕功德은 비록 천성千聖이 함께 세상에 나와서 천만 억겁토록 모두 그 신통력을 발휘하여 종횡으로 설하고 낱낱이 설하며 성대히 설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추론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인간과 하늘 사람이 믿고 이해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말법 세상에 만약 믿고 이해하는 자가 있어서 진인의 공덕과 묘용을 설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고 믿지 않을 것이니,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당연한 것이리라. 나는 후세 학자들이 ‘벌레 같은 이해와 좁은 소견으로 감히 무위진인의 도덕과 문장을 설했다’고 비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찌 연실(藕絲)로 수미산을 매달고 반딧불로 허공을 태우는 것과 같은 것인 줄 모르겠는가. 다만 아직 깨닫지 못한 자를 위해 말할 뿐이다.
종오 선사에게 보이는 법어(示宗悟禪師法語)

009_0024_a_01L八萬四千塵勞或處有無之中貫乎理
009_0024_a_02L事故能變山河大地萬像森羅亦爲百
009_0024_a_03L千世界太虛空也神通無碍變化莫測
009_0024_a_04L人天之人罕能信解者也嗚呼
009_0024_a_05L人之量以太虛難可比量而況太華之
009_0024_a_06L滄海之深其可比而度也乎明逾
009_0024_a_07L日月鬼神欽其道德德覆大千人天
009_0024_a_08L仰其高風聖賢猶不測人天豈量
009_0024_a_09L恢焉愰愰焉逈出思議者也所謂眞人
009_0024_a_10L古之人耶今之人耶凡耶聖耶
009_0024_a_11L是何人者偉偉雄雄若此之勝大乎
009_0024_a_12L予謂萬法之王千聖之主群靈之父
009_0024_a_13L衆庶之母也若然則眞人之義用功德
009_0024_a_14L雖千聖同出于世千萬億劫盡其神力
009_0024_a_15L橫說竪說塵說刹說熾然常說難可
009_0024_a_16L擬議於小分矧有人天之人其可信解
009_0024_a_17L而言論乎由是末法若有信解者
009_0024_a_18L眞人之功德妙用則人多毁謗不信
009_0024_a_19L得恠耶其亦冝矣予不懼後世學者誹
009_0024_a_20L以蠡解管見敢說無位眞人之道德
009_0024_a_21L文章豈不自知如藕絲懸須彌螢火燒
009_0024_a_22L虛空者也但爲未曉者而言之

009_0024_a_23L

009_0024_a_24L示宗悟禪師法語

009_0024_b_01L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법에 들어가는 문은 천 개이지만 구경究竟에 돌아가는 곳은 하나이다.”73)라고 하였고,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은 다만 하나의 의심이다.”74)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특별히 큰 믿음을 일으켜 견고히 큰 뜻을 세웠고, 결연히 큰 의심을 일으켜 그 의심이 자신에게 붙어 있어서, 한번 깨달은 주인공이 언제나 의심하고 궁구하여 항상 우매하지 않고 생각 생각에 이어져서 하루 종일 잠시도 끊어지지 않으며, 화두를 들고서 항상 깨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주인공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깊이 명상하다가 혼침하여 눈이 몽롱해지면 일어나 몸을 움직여 수십 보를 걷기도 하고, 들뜨는 마음이 들어오면 자리로 돌아와 방석에 정좌합니다. 그렇게 가고 머무를 때에 의정疑情75)이 하나같이 되면, 공부가 점차 익숙해져서 마음에 의지할 데가 없게 될 것이니, 어찌 알맞은 때를 얻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기본이니, 버리지도 말고 취하지도 말며 이해하려거나 계탁하려는 생각도 내지 말고 억지로 사량四量하지도 말아서 반드시 칠통柒桶76)을 깨뜨려야 큰 지혜가 해처럼 밝아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래부터 있던 주인공입니다. 원컨대 스님께서는 이와 같이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 깨달음 이후의 일에 대해 다시 설하시기 바랍니다. 진중하십시오.
또(又)
대개 공부가 익숙해지고 익숙해지지 못함과 깨닫고 깨닫지 못함은 다만 그 사람이 힘을 덜어 내느냐, 힘을 덜어 내지 못하느냐, 힘을 얻느냐, 힘을 얻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스님이 의심을 일으킨 그 주인공은 스스로 깨닫습니까? 그 주인공은 무슨 물건입니까? 한번 설해 보겠습니다.
2조 혜가가 달마 대사의 물음에 답하기를, “분명히 항상 알기 때문에 언어가 미치지 못한다.”77)라고 하였고, 옛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면 눈길이 마주친다.”78)라고 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스님도 고인古人 및 2조 혜가와 같은 경지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진실이 스스로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를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등불을 기둥이라고 여기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이 내뱉은 말을 취하여

009_0024_b_01L
古德云入法千門究竟歸宿處一也
009_0024_b_02L千疑萬疑只是一疑也吾師特發大信
009_0024_b_03L堅立大志決起大疑疑着自己一覺
009_0024_b_04L主人公疑來疑去窮來窮去常常不
009_0024_b_05L念念相續十二時中密密綿綿
009_0024_b_06L撕擧覺云我這主人公是甚麽如是
009_0024_b_07L沉究時昏沉籠眼起而運身數十步
009_0024_b_08L擧入心歸而靜坐蒲團上行住之際
009_0024_b_09L情如一則工夫漸熟心無所倚奈何
009_0024_b_10L他不得時正好底此是成佛作祖之基
009_0024_b_11L不得放捨不得撮取不得生解計
009_0024_b_12L不得着意思量必有打破柒桶
009_0024_b_13L智如日只是本有主人公也願師如此
009_0024_b_14L做工悟後更說悟後事珍重

009_0024_b_15L

009_0024_b_16L

009_0024_b_17L
大槩工夫熟與不熟悟與不悟只在
009_0024_b_18L當人省力不省力得力不得力也
009_0024_b_19L師所疑主人公自悟否主人公是甚麽
009_0024_b_20L試說看二祖對達摩問云了了常
009_0024_b_21L知故言之不可及古人云覿面相呈
009_0024_b_22L何言吾師亦如古人及二祖否若也如
009_0024_b_23L眞實自到不疑之地若不如是
009_0024_b_24L免喚燈籠作露柱但取他人口頭說底

009_0024_c_01L이로써 ‘스스로 깨달았다’고 여긴다면, 이른바 ‘반야를 비방하면 반드시 무간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일 테니, 신중하고 신중하십시오.
또(又)
이 일은 지극히 쉽지 않으니, 마치 백척간두를 걸어가다가 실족하면 목숨을 잃는 것과 같고, 또 외나무다리 위를 걸어가다가 마음을 늦추면 성명性命79)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대혜 종고는 “여의如意한 가운데 모름지기 여의하지 못했던 시절을 순간순간 염두에 두어 절대로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80)라고 하고, “이 한 가지는 얻기 쉬우나 지키기 어려우니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81)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눈앞에 두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면서 설익은 것은 익게 하고 익은 것은 설게 해야 비로소 조금이라도 이 일과 상응할 뿐입니다. 언제나 망념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려 항상 우매하지 않도록 하고 이를 넓히고 채운 후에, 자신에게 넉넉한 것을 가지고 남에게까지 이르러 가야 할 것입니다.
또(又)
방 공龎公은 “마음이 여여하면 경계도 여여하여 실實도 없고 허虛도 없으며 유有에도 관계치 않고 무無에도 구애되지 않으니, 이는 성현이 아니라 일을 마친 범부이다.”82)라고 하였고, 영가 현각은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없애지도 않고 진실을 구하지도 않는다.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이고 허깨비 같은 공신空身이 곧 법신이다.”83)라고 하였습니다. 쌍봉雙峰은 “영리靈利한 사람은 자기의 안신입명처를 보았다면 주장자를 꺾어 버리고 바랑을 높이 걸어 두고 세 가닥 서까래 밑의 칠 척이 되는 자리 앞에서 맛없는 밥을 씹고 물기 없는 국을 마시며 다리 뻗고 잠자면서 유유자적하게 세월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84)라고 하였고, 또 “여기 한 사람은 돌아가서 해야 할 집안일이 없고 배울 선도禪道가 없으며 벗어야 할 생사도 없고

009_0024_c_01L以謂自悟則所謂謗般若之必入無間
009_0024_c_02L愼之愼之

009_0024_c_03L

009_0024_c_04L

009_0024_c_05L
此事極不容易如步竿頭跌足則喪身
009_0024_c_06L失命又如獨木橋上行心若放緩
009_0024_c_07L命能不保也妙喜云在如意中須時
009_0024_c_08L時以不如意中時節在念切不可暫忘
009_0024_c_09L遮一著子得易守難切不可忽
009_0024_c_10L在目前弄來弄去生處放敎熟熟處
009_0024_c_11L放敎生始與此事少分相應耳時中
009_0024_c_12L念起即覺常常不昧擴而充之然後
009_0024_c_13L推己之餘以及物

009_0024_c_14L

009_0024_c_15L

009_0024_c_16L
龎公云心如境亦如無實亦無虛
009_0024_c_17L亦不管無亦不拘不是賢聖了事凡夫
009_0024_c_18L永嘉云君不見無爲閑道人不除妄
009_0024_c_19L想不求眞無明實性即佛性幻化空身
009_0024_c_20L即法身雙峰云靈利漢便見自己安
009_0024_c_21L身立命處抝折拄扙高掛鉢囊三條
009_0024_c_22L椽下七尺單前咬無味飯飮不濕美 [3]
009_0024_c_23L伸脚打眠逍遙度日又云有一漢子
009_0024_c_24L無家業可歸無禪道可學無生死可脫

009_0025_a_01L증득해야 할 열반도 없어서 종일토록 자유롭게 노닐고, 하늘 세상이나 인간 세상에서 유유자적하며 즐겁게 지내며, 호랑이굴과 마군의 굴에서도 종횡으로 걸림 없다.”85)라고 하였습니다. 영명 연수는 “헤아림이 법계의 끝까지 이르고 마음이 허공의 이치에 합하면 팔풍八風이 움직이지 않고 삼수三受86)가 고요해져 종현種現87)이 다 사라지고 근수根隨88)가 다 없어진다.”89)라고 하였고, 규봉 종밀은 “색깔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이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다고 스스로 생각하는가.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일으킬 때 부처님 법에 합당한지를 스스로 따지는가. 좋은 음식과 거친 밥을 먹을 때 싫어하거나 좋아함이 없는지를 스스로 살피는가. 뜨겁거나 차며 춥거나 따뜻할 때 피하거나 다가가려고 함이 없는지를 스스로 알아차리는가. 더 나아가 이익과 손해, 훼방과 명예, 칭찬과 비난, 괴로움과 즐거움에 이를 때 하나하나 살펴서 실로 하나의 정의情意가 되고 있는지를 반조返照하고 있는가.”90)라고 하였습니다. 원컨대, 모든 도道를 얻으려는 선비는 각자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견해와 행동이 위에서 인용한 말과 합치한다면 ‘일을 마친 범부이며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암당 방인 대사에게 보이는 선교총결(示龜巖堂印大師禪敎揔訣)
마음이라는 것은 텅 비어 오묘히 순수하고, 환하여 신령하게 밝으며, 아무리 올라가도 정상이 없고, 아무리 내려가도 밑바닥이 없다. 고금에 걸쳐 있지만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십허十虛91)를 포함하지만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색깔로 밝게 드러나고,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소리로 분명하게 들린다. 작은 것으로 말하자면 지극히 미미하여 형상하기 어렵고, 큰 것으로 말하자면 지극히 광대하여 헤아리기 어렵다. 능히 사람과 하늘이 되기도 하지만 하늘이 아니고, 능히 더러움과 깨끗함이 되기도 하지만 깨끗함이 아니다. 유교와 불교의 내부를 관통하면서 경서經書의 밖을 탐구하고, 범인과 성인의 도를 관통하면서 위아래의 일을 다스리니, 법의 그윽하고 그윽함과 도의 오묘하고 오묘함은 모두 이 마음이 허령虛靈92)하여 우매하지 않음이 없지 않은 것이다. 또한 깊이 실제의 이치 영역을 궁구하고 향상뇌관向上牢關93)의 끝까지 이르더라도 그것을 의론하고 계탁하기 어려우니,

009_0025_a_01L無湼槃可證終日騰騰任運任運騰騰
009_0025_a_02L天上人間逍遙快樂虎穴魔宮縱橫
009_0025_a_03L無碍永明云量窮法界之邊心合虛
009_0025_a_04L空之理八風不動三受寂然種現雙
009_0025_a_05L根隨俱盡圭峯云見色聞聲自思
009_0025_a_06L如影響否動身擧意自料爲佛法否
009_0025_a_07L美饌糲飡自想無嫌愛否炎凉凍煖
009_0025_a_08L自看免避就否乃至利衰毁譽稱譏苦
009_0025_a_09L一一審自返照實得情意一種否
009_0025_a_10L願諸得道之士各自觀察心念自己知
009_0025_a_11L見所行若合如上所引之言則可謂了
009_0025_a_12L事凡夫無爲閑道人也

009_0025_a_13L

009_0025_a_14L示龜巖堂印大師禪敎揔訣

009_0025_a_15L
夫心也者冲虛妙粹炳煥靈明上而
009_0025_a_16L無頂下而無底亘古今而無始無終
009_0025_a_17L十虛而不有不無欲言不見昭昭於色
009_0025_a_18L欲言不聞歷歷於聲言其小則至微難
009_0025_a_19L語其大則極廣難量能爲人天而非
009_0025_a_20L能作染淨而非淨貫於儒釋之內
009_0025_a_21L探於經書之外通於凡聖之道理於上
009_0025_a_22L下之事法之玄玄道之妙妙莫非此
009_0025_a_23L心之虛靈不昧也深窮於1)實際 [5] 理地
009_0025_a_24L極至於向上牢關難容擬議計較於其

009_0025_b_01L이 마음이 넓고 커서 형상하기 어렵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성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은미하니, 만약 정일精一하지 않으면 그 중도를 잡기 어렵다.”94)라고. 고덕古德이 “이름으로 이름 붙일 수 없고 형상으로 형상 지을 수 없다.”95)라고 하였는데, 대개 이 마음을 말한 것이다. 이 마음은 위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 땅강아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완전히 갖추어 있고 모두 구족하고 있어서 갠지스강 모래알같이 많은 성덕性德과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한 작용을 평등히 본래 가지고 있다. 다만 중생이 지견으로 알음알이를 세우고 마음을 일으켜 망념을 움직이며 육도를 윤회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이 마음을 열어 보여 주어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아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들이 애욕에 구속되고 온갖 경계에 집착하여 심법의 한 문으로 이끌어 들이기 어렵다. 이 때문에 부처님과 조사들이 갖가지 중생 제도의 방편문을 설립하였다.
큰 지혜를 가진 상근기를 만나면 곧장 진법眞法을 보여 주고, 중ㆍ하근기를 만나면 묘지妙旨를 설하되 이理가 곧 사事이고, 체體가 곧 용用이라고 설하기도 하고, 혹은 비유와 인연과 업과, 그리고 지범개차持犯開遮96)와 미세한 조목에 이르기까지 설하여 근성이 다른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문空門97)에 들어가 필경에는 실제진실본제로서 자심을 말한다.에 돌아가도록 한다. 만약 헤아림을 넘어선 큰 근기의 사람을 만난다면 은밀히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을 부촉하리니, 이것이 바로 교외별전의 선종이다. 이 선종에서 많은 명칭들이 마침내 나왔으니 ‘심’과 ‘성’, ‘정’과 ‘혜’, ‘선’과 ‘교’, ‘돈’과 ‘점’이다. 이에 범부와 성인의 법이 천차만별로 나뉘어 모두 다 설명하기 어렵게 되었다. 아! 코끼리를 그리려고 하면서 손가락만 문지르는 저 말세의 무리들이 문구를 배우되 명상名相에만 집착하고, 말에 따라 이해하되 나와 합치되면 찬성하여 따르고 나와 위배되면 비방하여 버리는구나. 이러한 투쟁뇌고鬪爭牢固98)의 시대에 무슨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만, 나는 세상 사람들이 말에 집착하고 뜻에 미혹한 것을 한탄하다가 비로소 세존의 회삼귀일會三歸一99)과 규봉 종밀의 화회삼종和會三宗100)의 뜻을 알았으니

009_0025_b_01L則亦莫非此心之浩然難狀者也
009_0025_b_02L不云乎人心惟危道心惟微若不精
009_0025_b_03L則難執厥中也古德云名不名狀
009_0025_b_04L不狀盖謂此心也此心上自諸佛
009_0025_b_05L至螻蟻無不圓成無不具足恒沙性
009_0025_b_06L無量妙用平等本有但以衆生知
009_0025_b_07L見立知起心動念輪轉六道故諸佛
009_0025_b_08L諸祖出現于世開示此心欲令衆生
009_0025_b_09L悟入其有衆生愛欲所纒樂着諸境
009_0025_b_10L難以心法一門引入由是佛祖設種種
009_0025_b_11L度生方便門遇上根大智直示眞法
009_0025_b_12L對中下根或說妙旨而即理即事
009_0025_b_13L體即用或說比喩因緣業果乃至持犯
009_0025_b_14L開遮微細條章能令差別根性皆入
009_0025_b_15L空門竟歸實際眞實本際
謂自心也
若遇過量大
009_0025_b_16L則密付正法眼藏湼槃妙心此乃
009_0025_b_17L敎外別傳禪宗也因此名數遂出曰心
009_0025_b_18L曰性曰定曰慧曰禪曰敎曰頓
009_0025_b_19L乃至凡聖等法千差萬別難可盡
009_0025_b_20L嗟夫末世模象撫指之輩惟學文言
009_0025_b_21L但執名相随語生解合我者讃而從
009_0025_b_22L違我者毁而棄之當此鬪諍牢固之
009_0025_b_23L何得恠也以余慨恨世人之執言迷
009_0025_b_24L方知世尊會三歸一圭山和會三

009_0025_c_01L그 뜻이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나는 계사년(1653) 가을 포천군에 있는 천주산 신륵암新勒庵에서 우연히 자신을 구암龜岩이라고 부르는 방인方印 장로를 만나 대화하였는데, 그 말이 선의 지취旨趣에서 나왔고 교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이 스님은 능히 언어 밖의 지취를 얻었고 방편의 권술에 막히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얼마나 다행인가. 우연히 지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이 컸도다. 방인 대사 스스로 말하기를, “어려서 제월霽月ㆍ춘파春坡ㆍ풍담風潭 세 대사의 높은 법회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오대산ㆍ금강산ㆍ묘향산의 명승지에 머물렀는데 지금은 중풍으로 병이 나서 홀로 궁벽한 곳에 있은 지 여러 해 되었으니 누구와 더불어 도를 이야기하겠습니까. 지난번에 마침 도상道祥 스님이 제가 있는 곳을 지나는 길에 스님의 훌륭한 명성을 들은 적이 있어 한 번 만나 보고자 하였는데 어찌 오늘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하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스님은 근래 선경禪經을 보았습니까?”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물었다. “선경은 무엇으로 종지를 삼습니까?”
답하였다. “열반묘심으로 종지를 삼습니다.”
다음으로 사집과四集科와 사교과四敎科의 글을 들어 물었고 나는 일일이 답하였는데, 말과 말이 자심自心으로 돌아가고 구절과 구절이 선의 본종本宗에 그윽이 합치하였다. 이렇게 문답을 50여 번 하고 나서 방인 대사가 마음에 편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용모에도 수긍하지 못하는 기색을 드러내더니, 또 물었다. “원돈교는 무엇을 종지로 삼습니까?”
답하였다. “사람 사람이 스스로 보광명지普光明智를 가지고 있음을 종지로 삼습니다. 원圓은 만법을 융통하는 것이고 돈頓은 자심을 밝히는 것이니 이理를 통하지 않음이 없고 사事를 꿰뚫지 않음이 없는 것을 원돈이라고 합니다. 종宗은 근원이고 원源은 마음이니, 마음은 만법의 종원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돈오하여 범인과 성인이 한 가지 이치로 일제히 평등해짐을 안다면 이것이 원돈의 종지입니다. 옛사람이 ‘끝없는 국토 경계에서 나와 남이

009_0025_c_01L宗之意其意豈徒然哉余於癸巳之秋
009_0025_c_02L抱川郡中天柱新勤 [4] 忽遇方印長老
009_0025_c_03L自號龜岩與之打話語自禪旨不樂
009_0025_c_04L敎詮余私謂此師能得言外之旨不滯
009_0025_c_05L方便之權何幸忽逢知音喜之甚印師
009_0025_c_06L自言自幼受業於霽月春坡風潭三大
009_0025_c_07L師之高會捿遲於五臺金剛妙香三山
009_0025_c_08L之勝地今以中風所病獨在僻處
009_0025_c_09L有年矣與誰談道向者適仍道祥師之
009_0025_c_10L經過聞師聲華欲一見之豈意今日
009_0025_c_11L邂逅談論耶乃問余曰吾師近着 [5] 禪經
009_0025_c_12L曰然曰禪經以何爲宗曰以湼槃
009_0025_c_13L妙心爲宗也次擧四集四敎之言問之
009_0025_c_14L余一一答之言言回趣自心句句冥合
009_0025_c_15L本宗如是問答五十餘言印師心含未
009_0025_c_16L便之意容現不肯之色又問曰圓頓
009_0025_c_17L敎以何爲宗答曰以人人自有普光明
009_0025_c_18L智爲宗也圓者融萬法頓者明自心
009_0025_c_19L無理不通無事不徹曰圓頓也宗者
009_0025_c_20L源也源者心也心爲萬法之宗源也
009_0025_c_21L若頓悟此心知其凡聖一理齊平則是
009_0025_c_22L爲圓頓宗也古人云無邊刹境自他
009_0025_c_23L「實際」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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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026_a_01L한 터럭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고, 십세十世101)의 고금에 시작과 끝이 바로 이 생각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102)라고 하였던 것과 4조 도신道信이 우두 법융牛頭法融 선사에게 설했던 이야기도 역시 원돈의 종지입니다. 만약 실로 철저하게 심성을 깨닫는다면 어디에 원돈이라는 이름이 있겠습니까. 일체의 명상名相은 임시로 붙인 명상일 뿐이고, 선을 말하든 교를 말하든 역시 그렇습니다. 만약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름을 들으면 이름에 집착하고 형상을 보면 형상에 집착하여,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여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 여기고 교만심이 높아져 서로 자신을 높이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선지식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눈 밝은 달인을 만나면 비단 스스로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르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달인을 비방하며 ‘어느 산 아무개는 삿됨을 훈습하고 마군에게 붙어 항상 외도법을 설하니 원컨대 참학하는 사람들은 그 설을 믿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괴롭게도, 삿됨을 가지고 올바름을 기만하여 도리어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비방하니 한 사람의 말은 빈말이 되지만 대중의 말은 사실이 되어 ‘마군은 강하고 법은 약한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방인 대사가 이 말을 듣고 격분하며 “눈 밝은 달인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도를 깨달은 사람을 전혀 보지 못하였습니다. 스님은 범부이면서 말로는 도를 통달한 듯이 하니 견해가 얼마나 잘못되었겠습니까? 선과 교를 섞어서 그 두 갈래의 길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모두 일심一心이라고 하니 저는 허망하다고 의심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웃으며 천천히 말하였다. “대사는 화내지 마십시오. 먼저 성냄을 경계해야 하니 저의 견해를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선과 교는 하나의 이치이고 만법은 일심이거늘, 방인 대사는 어째서 각각 다른 단서를 붙잡고 굳이 선과 교를 구별하는 데 집착하는 것입니까? 만약 이것을 고집한다면 비단 자신만 삿된 굴에 들어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저 제월ㆍ춘파ㆍ풍담의 가풍에 누를 끼치는 것이고, 아울러 부처님과 조사들을 욕보이는 것이며 후학의 안목을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세 분의 대사는 결코 스님처럼 편벽되이 망집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는 선과 교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방인 대사는 그 뜻을 모르니 저는 방인 대사가 홀로 잘못된 줄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를 잘못되었다고 하니,

009_0026_a_01L不隔於毫端十世古今始終不離於當
009_0026_a_02L乃至四祖爲說牛頭融禪師之事蹟
009_0026_a_03L亦是圓頓宗也若實徹悟心性則何處
009_0026_a_04L有圓頓之名一切名相假名相言禪言
009_0026_a_05L敎亦爾若未悟心源則聞名認名
009_0026_a_06L相着相堅執己見以己爲是以人爲
009_0026_a_07L憍慢貢高人我崢嶸自稱知識者
009_0026_a_08L若遇明眼達人非特自不信向到處逢
009_0026_a_09L人毁謗云某山某人熏邪着魔常說
009_0026_a_10L外法只願叅學之人不信其說云云
009_0026_a_11L苦哉以邪欺正反誹他非一口傳虛
009_0026_a_12L衆口傳實可謂魔强法弱之時也印大
009_0026_a_13L師聞之憤起曰明眼達人何處現在
009_0026_a_14L全不見悟道之人吾師全是凡夫語似
009_0026_a_15L達道而見解何誤耶禪敎混迷道不分
009_0026_a_16L皆謂一心吾疑虛妄也余笑而徐
009_0026_a_17L大師不得憤起第一戒嗔憤也
009_0026_a_18L見解錯誤故禪敎一理萬法一心
009_0026_a_19L大師如何各執異端禪敎別執爲定耶
009_0026_a_20L若必如此非徒自入邪窟亦累他霽月
009_0026_a_21L春坡風潭之家風兼辱佛祖亦瞎後學
009_0026_a_22L之眼目也如之何也三大師必不如師
009_0026_a_23L之偏局妄執也佛祖不言禪敎各異
009_0026_a_24L大師不知其意吾知印師獨誤而推我

009_0026_b_01L어찌 천착 만착 됨이 이와 같습니까. 원컨대 대사는 다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서 공부하고, 다시 진실한 법을 깨닫고 진실한 수행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연후에 오늘 자신의 견해를 돌이켜 생각한다면 반드시 크게 웃을 것이니 어찌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대사가 만약 타심통을 얻지 못했다면 어찌 저의 지혜의 깊고 얕음과 지해知解의 삿되고 올바름과 선교의 알고 모름을 알겠습니까. 대사는 매번 교의 담론을 배척하고 선의 어록만을 찬탄하지만 『전등록』과 『선문염송집』의 말은 보지도 않고 다만 조주趙州의 무無 자 화두에만 구애되어 있습니다. 실로 깨달은 바 없이 다만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써 자기의 견해를 과시하고 남의 칭찬을 구하는 꼴이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대사의 뜻이 선을 높이고 교를 낮추는 데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의 내용이 모두 스님의 생각과 합치된다면 스님은 분명히 기쁘게 여기실 것입니다.”
방인 대사가 화가 나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그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말하기를 “교가敎家에서 어찌 선의 지취를 말하겠으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어찌 모두 호랑이 소리이겠으며, 말이 유창하다고 해서 어찌 선禪의 말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흔들고 손을 휘저으며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 나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방인 대사에게 말하였다. “선문의 말이 어찌 모두 높기만 해서 반연할 바가 없겠으며, 교가의 말이 어찌 모두 천근하고 쉬운 것이겠습니까. 선에도 세 근기로 나누어 보이는 법이 있고, 교에도 곧장 보이는 진법眞法이 있습니다. 『반야경』에서 ‘부처의 등불과 조사의 불꽃은 이 경을 벗어나지 않는다.’103)라고 하였으니, 삼승분교三乘分敎104)에서 이치와 교묘한 작용을 체득한다면 어찌 다시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의 화두가 필요하겠으며, 황매黃梅105)가 조계曺溪를 위해 반야를 설하여 마음을 전하겠습니까. 달마 대사는 ‘『금강경』과 『능가경』은 내 마음의 요체이다.’106)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언어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위로 부처님과 조사로부터 여러 가지 방편으로 근기에 맞게 법을 베풀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집착을 깨뜨리고 종취를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오직 방인 대사만이 편벽되게 한마디 말에 집착하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방인 대사가 나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목우자牧牛子는 청량淸凉의

009_0026_b_01L歸誤何爲千錯萬錯如是耶願大師更
009_0026_b_02L尋明師1)更做 [6] 工夫更悟眞法更求眞
009_0026_b_03L然後返思今日自己所解必發大笑
009_0026_b_04L豈不自愧乎大師若未得他心通何知
009_0026_b_05L余之智慧之深淺知解之邪正禪敎之
009_0026_b_06L知不知耶大師每斥敎談偏讃禪語
009_0026_b_07L而不看傳燈拈頌之語只拘於趙州無
009_0026_b_08L字之話實無悟處但以口誦誇於己
009_0026_b_09L求於人讃可乎吾知大師之意
009_0026_b_10L高敎卑也若佛說經中皆叶師意之言
009_0026_b_11L則師必喜歟印大師憤憤悱悱不勝其
009_0026_b_12L怒曰敎家何言禪旨吼吼之聲豈皆虎
009_0026_b_13L灑灑之言何爲禪話掉頭揮手而回
009_0026_b_14L坐面壁也余盡力抗聲謂印師曰
009_0026_b_15L門之語豈盡高逈莫攀敎家之言
009_0026_b_16L皆淺近容易禪有三根示法敎有直示
009_0026_b_17L眞法也般若經云佛燈祖㷔不外乎
009_0026_b_18L斯經三乘分敎2)體理 [7] 得妙何處更有
009_0026_b_19L西來意黃梅爲曺溪談般若而傳心
009_0026_b_20L達摩云金剛楞伽是我心要故云禪
009_0026_b_21L是佛心敎是佛語從上佛祖種種方
009_0026_b_22L便爲機施設令諸衆生破執現宗而
009_0026_b_23L唯有印師偏執一言爲是可乎
009_0026_b_24L大師謂我曰然則何故牧牛子引淸凉

009_0026_c_01L『화엄소華嚴䟽』를 인용하여 선교가 다르다는 것을 논변하였으며, 청허淸虛는 사명四溟을 위해 선과 교의 다른 종취를 서술하였습니까?”
나는 답하였다. “이 역시 근기에 따른 방편설입니다. 청량이 어찌 선과 교의 같지 않음을 몰랐겠습니까. 다만 종지에 미혹하여 길을 잃은 자들에게 오로지 정혜定慧를 닦아서 보리를 증득하도록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목우자가 어찌 선교의 같음을 몰랐겠습니까. 다만 의리에 막혀 망회허랑忘懷虛朗107)하지 못하는 자로 하여금 출신활로出身活路108)를 알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109) 옛날의 종사에게 좋은 방편이 있었다면 오늘날의 선지식에게 어찌 선교방편이 없겠습니까. 사명이 비록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기의 일을 통달하지 못하여 청허의 지견이 제방의 납자와 다르다는 말을 듣고 항의하고자 했기 때문에 서산에게 나아가 먼저 이해한 바를 말하였는데, 모두 명교名敎에 막히고 본지를 통달하지 못하였기에 서산이 듣고 한심하게 여기며 즉시 『선교석禪敎釋』을 서술하여 보여 주었고, 이에 사명이 은밀한 뜻을 곧장 알아차렸으니 어찌 말에 집착하는 것을 깨뜨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방인 대사가 또 이 말에 집착한다면 ‘말을 따라 계속 집착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고승들의 행적을 보았는데, 여실한 언교를 통해 도를 깨닫고 성불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이로써 생각하건대, 만약 부처님이 먼저 방편적인 언어로 설하지 않았다면 응당 후세에 성불한 자도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 방인 대사가 이해한 바를 보니 ‘선조의 경론 문자가 후인들에게 쟁론을 일으켜 도리어 번뇌를 증장시키고 있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는 견해를 보이셨는데, 아! 방인 대사는 부디 알기 바랍니다. 일법一法을 돈오하면 부처님의 설이 묘법일 뿐만 아니라 제비와 앵무새 소리도 실상을 노래하는 진담眞談이 되고 삼라만상이 모두 조사의 활구가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말에 집착하여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외우더라도 모두 마군의 설일 뿐입니다.

009_0026_c_01L華嚴䟽辨禪敎逈異淸虛爲四溟述
009_0026_c_02L禪敎異宗耶余答曰此亦對機方便也
009_0026_c_03L淸凉豈不知禪敎不類但引迷宗失旨
009_0026_c_04L專修定慧將證菩提故也牧牛子
009_0026_c_05L豈不知禪敎一體只爲滯於義理未能
009_0026_c_06L忘懷虛朗者令知出身活路故也古之
009_0026_c_07L宗師若有善權今之知識豈無善巧
009_0026_c_08L四溟雖稱偉人然未達己事得聞
009_0026_c_09L淸虛知見異於諸方欲見降伏故
009_0026_c_10L于西山先吐所解皆滯名敎未達本
009_0026_c_11L西山聞之慨然即述禪敎釋示之
009_0026_c_12L四溟頓領密旨豈非破執談柄耶印大
009_0026_c_13L師又執此言可謂随言轉執者也余見
009_0026_c_14L傳迹所載因如實言敎悟道成佛者
009_0026_c_15L比比有之以謂若無先佛方便言語
009_0026_c_16L無後世成佛者今見印師之所解先祖
009_0026_c_17L經論文字起諍後人還增煩惱何有
009_0026_c_18L利益哉嗟呼印師切須知之若頓悟
009_0026_c_19L一法則非徒佛說妙法乃至鷰語鶯音
009_0026_c_20L眞談實相頭頭物物無非活底祖意
009_0026_c_21L若執言迷義則雖誦八萬經藏盡爲魔
009_0026_c_22L「更做」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
009_0026_c_23L
「體理」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
009_0026_c_24L文活字

009_0027_a_01L그러므로 규봉 종밀이 ‘만약 자심을 요달하지 못하고 다만 명교에 집착하여 부처님의 도라고 여긴다면, 어찌 보지 못하였는가? 글자나 알아서 경전을 보는 것만으로는 원래 증오證悟하지 못하고, 조금 글자 뜻을 알아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탐진치의 사견을 치성하게 할 뿐110)이라는 것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물며 선교에 각각 집착하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어찌 선교의 같고 다름을 모르겠습니까. 사견에 막힐 것을 염려하여 같고 다름을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덕古德이 ‘이 법이 마음에 있으면 선이라 하고, 입에 있으면 교라 하며, 몸에 있으면 율이라 하고, 정情에 있으면 불성이라 하며, 무정無情에 있으면 법성이라 하고, 원인에 있으면 보리반야라 하며, 과에 있으면 열반묘각이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가령 조주趙州의 차와 금우金牛의 반飯, 운문의 병餠과 일경一莖의 채菜는 그 말은 비록 다르지만 그 뜻은 같습니다. 비유하건대, 하나의 물방울은 있는 곳에 따라 이름이 달라져서 삼강三江, 오호五湖, 동명東溟, 서해西海라고 합니다. 가령 동서의 짠 바닷물과 남북의 담백한 강물은 그 물은 비록 다르지만 그 습기는 같습니다. 대개 듣건대, 선과 교는 가섭과 아난으로부터 나누어 흘렀다고 하는데, 가섭은 높고 아난은 낮은 것입니까. 방인 대사는 불법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무간지옥에 들어갈까 걱정됩니다.”
방인 대사가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다음날 내가 있는 처소를 방문하여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이제서야 처음으로 불법의 대의를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순치順治 계사년(1653) 8월, 경기도 포천군 천주산 신륵암에서 쓰다.
선객에게 보이는 결의론(示禪客決疑論)
강희康熙 2년 계묘년(1663) 8월, 어떤 선객이 오대산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나서 미륵산 고자암高自庵111)에 있던 나를 방문하였다. 달빛이 가을밤 창가에 스며드는 가운데 서로 담화를 나누다가 참학參學의 문제에 이르렀다. 객이 일어나 정색하더니 무릎을 꿇고 나에게 말하였다. “풍문에 들으니, 서산 대사의

009_0027_a_01L故圭山云若不了自心但執名敎
009_0027_a_02L以爲佛道者豈不顯見識字看經
009_0027_a_03L不證悟銷文釋義唯熾貪嗔邪見
009_0027_a_04L況禪敎各執耶余亦豈不知禪敎異同
009_0027_a_05L恐滯邪見不必偏執是同是異也
009_0027_a_06L古德云此法在心曰禪在口曰敎
009_0027_a_07L身曰律1)有情 [8] 曰佛性在無情曰法
009_0027_a_08L在因曰菩提般若在果曰湼槃妙覺
009_0027_a_09L至於趙州茶金牛飯雲門餅一莖菜
009_0027_a_10L言雖殊其旨一也譬如一水随處立
009_0027_a_11L名曰三江五湖東溟西海至於東西
009_0027_a_12L醎海南北淡河其水雖殊其濕一也
009_0027_a_13L盖聞禪敎自迦葉阿難分流云迦葉高
009_0027_a_14L阿難卑耶印師印師莫謗佛法恐入
009_0027_a_15L無間印師合掌頓首翌日訪余寓所旅
009_0027_a_16L再拜曰今日始知佛法大義也
009_0027_a_17L維順治癸巳八月日在京畿抱川天柱
009_0027_a_18L新勒庵述

009_0027_a_19L

009_0027_a_20L示禪客決疑論

009_0027_a_21L
康熙二年癸卯仲秋日適有禪客遊翫
009_0027_a_22L五臺金剛而來訪余于彌勒高自庵
009_0027_a_23L窓夜月相與談話語及叅學之事
009_0027_a_24L起而歛容正色跪坐謂余曰風聞西山

009_0027_b_01L문도들이 한담을 나누다가 월봉月峯의 지견과 이해에 대한 논란이 성대하게 일어나서 시비가 자자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의심을 품는 데 그치지 않고 산과 강도 꺼려하지 않고 만나러 왔습니다. 원컨대 대사의 이해와 수행의 깊고 얕음을 들려 주어 저의 의심을 해결해 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나는 한참 생각하고 나서 선객에게 말하였다. “예나 지금의 사람들이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며 선한 것을 선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는 것은 천하에 통하고 유교와 불교에 관통하는 공공의 말입니다. 설하거나 설하지 않거나, 듣거나 듣지 않건 간에 무슨 의심하고 의심하지 않으며 해결하고 해결하지 않는 뜻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객께서 나의 이해와 수행, 삿되고 바름의 허실을 듣고자 하시니 어찌 자세히 설하여 그 의심을 해결해 주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선객은 잘 들어 주기 바랍니다.
월봉 무주암의 소연자昭然子는 12세 때 출가하여 15세 때 승려가 되었으며 17세 때 송파松坡 대사에게 수업하였고 25세 때 두류산의 벽암碧巖 대사에게 교학을 배웠으며 30세 때 금강산의 풍담楓潭 대사에게 선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학문의 뜻을 이루었고 참방參訪112)의 서원 역시 이루었습니다. 이에 오직 취암翠巖이 보여 준 밀지密旨를 나의 이해로 삼고, 또 계율에서 설한 자인慈忍으로 수행을 삼았으며, 다시 치악산에 들어가 조용히 금선대金僊臺에 머물렀습니다. 병신년(1656)에 소백산에서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마침 송파 대사의 부름을 받고 황악산에서 머물렀습니다. 경자년(1660)에 공덕산에서 봄과 여름을 보내고 구球 스님의 권청을 받아 상원암에 머무르며 혜공慧公에게 『원각경』을 강의하였고 준准 노인에게 활구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본래 질직하고 자신의 견해를 숨기지 못해 비록 남의 비난을 받을 줄 알면서도 힘을 다해 토론하였습니다. 강석에서 법을 묻는 무리들과 멀리서 찾아와 법을 청하는 사람들이 혹은 의심하는 바를 묻기도 하고, 혹은 자기의 견해를 결론지으며 자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오직 법을 아끼면 허물이 된다는 것만 생각하고 말조심하라는 계율은 생각하지 않고서 평소대로 설하였습니다.
그 처음에는 본분을 곧장 드러내는 가운데 간화와 염불의 법을 설하고, 나중에 자인慈忍과 수치修治의 행을 권하였습니다. 모두 성인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009_0027_b_01L禪流之閑話盛論月峯之知見解會
009_0027_b_02L非藉藉不止聞之懷疑不憚山水
009_0027_b_03L得來見願聞大師之解行深淺以決客
009_0027_b_04L如何昭然子良久謂客曰古今之人
009_0027_b_05L是是非非善善惡惡之說通天下貫儒
009_0027_b_06L釋之公言也說不說聞不聞之間
009_0027_b_07L何疑不疑決不決之意耶然吾客欲
009_0027_b_08L聞昭然之解行邪正虛實何不細陳以
009_0027_b_09L決其意乎願客審聽焉月峯無住庵昭
009_0027_b_10L然子十二出家十五爲僧十七受業
009_0027_b_11L於松坡二十五聽敎於頭流之碧巖
009_0027_b_12L十歲問禪於金剛之楓潭學問之志已
009_0027_b_13L叅訪之願亦畢於是唯以翠巖所示
009_0027_b_14L密旨爲己解又以毘尼所說慈忍爲
009_0027_b_15L自行再入雉岳靜居金僊丙申之秋
009_0027_b_16L過冬小伯適蒙松坡之寵召依住黃岳
009_0027_b_17L庚子之春結夏功德幸被球師之勸請
009_0027_b_18L忝住上院爲慧公講圓覺爲准老示活
009_0027_b_19L而性本質直不諱己見雖知人譏
009_0027_b_20L盡力激揚也講下問法之徒方來請益
009_0027_b_21L之人或問所疑或結己解頻頻問難
009_0027_b_22L而唯念慳法之咎不思賤賣之戒尋常
009_0027_b_23L說示其初直示本分中說看話念佛之
009_0027_b_24L後勸慈忍修治之行皆依聖訓

009_0027_c_01L근기를 보고 가르침을 주어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게 하였습니다. 비록 선의 화두를 담론하더라도 어찌 억지 이해를 용납했겠습니까. 다만 선으로 허세 부리는 무리들이 널리 어지러이 시비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모상무지摸象撫指113)의 견해로써 시호군봉市虎裙蜂114)의 설에 미혹되어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이고 망설을 전하는 놈들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난날 나의 문하에 있던 자들 중에 다만 설하는 것만 들을 뿐 스스로 돌이켜 비추는 공력이 없어서 아마도 공망空亡115)에 떨어진 자들이 문득 풍문에서 말하는 의문을 듣게 되면 마침내 그 말에 동의했던 것입니다.
나는 자주 승려나 재가자를 만나는데,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머리의 영리하고 노둔함을 따지지 않으며 오래 참선하였는지 초심자인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자심이 부처이니 마음 밖에 이룰 만한 부처가 없다. 자성이 법이니 성품 밖에 구할 만한 법이 없다. 심성 이외에 염불하고 참선을 말한다면 모두 사도邪道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화두를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언구에 집착하지 말라.’라고 하고, 염불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성의 부처님을 염불하라.’라고 합니다. 선을 말할 때는 철저하게 깨달은 경지가 있는 것처럼 설하고, 경전을 강의할 때는 말할 때마다 자심으로 돌아가라고 설합니다. 이런 말은 듣는 사람이 생각하는 경지를 넘어 있고 그 이해는 제방의 스님들과는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의문을 가진 자들이 이를 듣고 박장대소하며 ‘과연 틀렸도다.’라고 말하는데 어떤 객이 또 다른 스님의 부질없는 말을 듣고 나에게 그 말을 전하였습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들 시비가 없겠습니까. 모든 설하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어서 꿈속의 꿈을 설하는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겠습니까. 남이 나를 칭찬하더라도 나는 기뻐하지 않고, 남이 나를 비난하더라도 나는 화내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객이 객의 말을 듣고서한 객이 다른 객의 말을 들은 것이다. 이식耳識이 소리를 따르고, 객이 객의 말을 전하여 구업口業이 오염되어, 그 마음 부처를 변하게 할까 걱정될 뿐입니다.’ 그 객이 살짝 비웃으며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다른 사람과 생각이 같지 않다고 하여 스스로 시비를 일으키고

009_0027_c_01L根逗敎令無過欠雖談禪話豈容臆
009_0027_c_02L但是虛頭之禪流漫興是非之紛拏
009_0027_c_03L多以摸象撫指之見惑於市虎裙蜂之
009_0027_c_04L不辨菽麥之者傳言妄說之漢
009_0027_c_05L是昔日雖在昭然之門者但聽說底
009_0027_c_06L自無返照功故疑落空亡之際忽逢聞
009_0027_c_07L風疑問者遂與共說昭然子頻遇緇素
009_0027_c_08L不問老少利鈍不辨久叅初機皆云自
009_0027_c_09L心是佛心外無佛可成自性是法
009_0027_c_10L外無法可求心性之外若言念佛叅禪
009_0027_c_11L則盡是邪道若見看話者不着言句
009_0027_c_12L若見念佛者須念自性佛其說禪也
009_0027_c_13L似有徹悟處其講經也言言歸自心
009_0027_c_14L其語也越分過頭其解也逈異諸方
009_0027_c_15L疑問者聞之拊掌大笑曰果然誤
009_0027_c_16L有客又聞二客之浮說傳於昭然
009_0027_c_17L昭然完爾而言曰人生斯世誰無是非
009_0027_c_18L凡所有說皆是虛妄夢中說夢何是
009_0027_c_19L何非人若讃吾吾不喜也人若毁我
009_0027_c_20L我不怒也但恐客聞客語一客聞二
客之言也
耳識
009_0027_c_21L随聲客傳客說口業染汚變其心佛
009_0027_c_22L其客微哂曰何不如他人而自興是
009_0027_c_23L「有情」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
009_0027_c_24L

009_0028_a_01L남의 비난을 불러들이는 것입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나 역시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오랜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러자 그 객의 얼굴에 냉소하는 기색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또 어떤 선객이 남북으로 다니며 공부하고 스스로 자랑하며 말하였습니다. ‘수행이 높은 수좌首座들을 두루 찾아가 참구하고 이름난 종장宗匠들을 모두 찾아가 질문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교의 경론을 남김없이 널리 열람하였다.’ 그 객은 다만 문자와 언어에 집착할 뿐 실제로는 재주가 없으면서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 생각하는 자로서, 나(소연자)의 이러한 점을 범범하게 듣고서는 분을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소연자를 만나면 말문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대의를 물어서 한마디 말로 항복시킬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다시는 헛된 말과 분수를 넘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그 객이 하루는 나를 찾아왔습니다. 내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객은 어디서 왔습니까?’ 객이 답하였습니다. ‘금강산과 오대산으로부터 왔는데, 오는 길에 수좌와 종장들을 참방하였습니다.’ 나는 물었습니다. ‘무슨 법을 보여 주었습니까?’ 객이 답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운문雲門의 화두를 보여 주고, 어떤 이는 왕상시王常侍의 구절116)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물었습니다. ‘그 화두와 구절 외에 무슨 법을 설하였습니까?’ 객이 갑자기 얼굴빛을 바꾸며 답하였습니다. ‘그 화두와 구절 이외에 무슨 수승한 법이 있어서 보여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교의 가르침과 선의 담론을 보았습니다.’ 또 내게 물었습니다. ‘선사와 강주들은 이른바 무無 자 화두는 종문 중에 제일의 관문으로, 이 무 자를 떠나서는 보일 만한 선이 없고 이 무 자를 떠나서는 배울 만한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무 자 이외에 참구하고 배울 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망법일 것이니 내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무슨 법을 전수받았기에 남들과 다른 선을 설하는 것입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나는 전수받은 법이 없습니다. 객이 선사와 강주의 말에 견고히 집착하여 말 밖의 진선眞禪을 알지 못하고, 다만 ≺언구를 의심하지 않으면 큰 병이 된다.≻117)라는 말만 알고 ≺방편을 지키기만 하고 버릴 줄 모르면 병이 된다.≻118)라는 말은 듣지 않은 것입니다. 옛사람의 게송을 보지 못했습니까.

一兔橫身當古路       다니던 길에서 자유롭던 토끼 한 마리
蒼鷹一見便生擒       참매가 한 번 보고 곧장 생포하도다

009_0028_a_01L招得人譏耶昭然曰我亦能知如
009_0028_a_02L不改舊習奈如之何其客似有冷
009_0028_a_03L笑之色也其後又有禪客遊學南北
009_0028_a_04L自矜曰高行首座我已徧叅名現宗
009_0028_a_05L我亦盡問所有禪敎經論愽覽無餘
009_0028_a_06L其客也但執文言無實伎倆自是
009_0028_a_07L人非爲心者也泛聞昭然之如此不勝
009_0028_a_08L其曰我見昭然則渠未出言緊問大義
009_0028_a_09L一言之下能降令見自愧更不出虛頭
009_0028_a_10L之說越分之言也其客一日訪於昭然
009_0028_a_11L昭然遽問曰客從何來客曰從金剛五
009_0028_a_12L臺而來來時叅某首座某宗匠余問
009_0028_a_13L示何法客曰或示雲門之話或示王常
009_0028_a_14L侍之句問曰話句外說何法客忽然變
009_0028_a_15L色曰話句之外有何勝法示人耶
009_0028_a_16L見敎詮禪談又問禪師講主所謂無字
009_0028_a_17L宗門中第一關離此無禪可示
009_0028_a_18L此無法可學無字外若言有叅有學
009_0028_a_19L則定是妄法吾疑耶徒吾師傳受何法
009_0028_a_20L別說禪耶昭然曰我無傳法也吾客
009_0028_a_21L堅著語下不識言外之眞禪唯知不疑
009_0028_a_22L言句是爲大病之言不聞守方便不捨
009_0028_a_23L則爲病之言也不見古人之頌乎一兔
009_0028_a_24L橫身當古路蒼鷹一見便生擒後來獵

009_0028_b_01L後來獵狗无靈性       뒤늦게 온 사냥개 미련하여
猶向枯椿舊處尋       공연히 마른 작대기만 찾아 헤매네119)

말세에 언구만 집착하는 자는 대부분 사냥개라는 소리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무 자라는 말에 의거하여 모두 성불하는 것이라면 조주 이전에 부처와 조사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객이 크게 노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근래 들었던 이와 같은 잘못된 말이 실제로 빈말이 아니었군요. 그렇다면 무無 자 화두를 참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만약 참상하지 않는다면 무사갑无事匣120)에 떨어져 헛되이 일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참구해도 안 되고 버려도 안 된다면 결국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옳은 것 또한 있지 않습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스님은 공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까?’ 답하였습니다. ‘객이 공에 떨어진 것이고 나는 공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어찌 공에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근본지의 보광普光이 예나 지금이나 비추고 있으니 어찌 스스로 공망空亡에 떨어진 것을 모르겠습니까.’ 객이 물었습니다. ‘나는 경전과 교학의 가르침에 의거하고 있으니 어찌 공망에 떨어졌다고 하겠습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경전의 가르침은 언어문자이고 지묵紙墨 위에 건립한 명구일 뿐 공망 아닌 것이 없습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문자에 의거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문자에 의거하지 않으면 ≺문자가 곧 해탈≻121)이라는 말과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본다≻122)는 말과 어긋날까 염려됩니다. 만약 의거하고 의거하지 않음을 말한다면 반드시 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못할 것이고 나도 본분의 종지를 잃을 것입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원컨대, 종지에 대해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답하였습니다. ‘원종圓宗의 묘지妙旨가 모두 객에게 있지만 객이 알지 못하니, 비록 설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객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는 물었습니다. ‘무슨 법을 알고 있습니까?’ 객이 되물었습니다. ‘자심이 종지가 아닙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자성이 아닙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도 우매하십니까. 2조 혜가는 처음에 달마 대사가 보여 준 요문要門을 알지 못하고 인가를 구하고자 하여 심心과 성性을 설하였지만 달마 대사가 하나하나 열거하여 내려놓게 했으니, 어찌 자심과 자성의 말로써 우리 불가佛家의 종지로 삼을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것은 귀신 집안의 살아갈 계책123)일 뿐입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같은

009_0028_b_01L狗无靈性猶向枯椿舊處尋末世唯着
009_0028_b_02L句下者多未免獵狗之稱也若依无字
009_0028_b_03L言皆成佛道則趙州之前无佛祖耶
009_0028_b_04L客大怒抏聲曰頃聞若此之誤實不虛
009_0028_b_05L然則無字不叅可乎昭然曰若不
009_0028_b_06L叅詳則恐落无事匣裡虛棄一生也
009_0028_b_07L客曰叅不得棄不得畢竟如何即是
009_0028_b_08L然曰是亦不存也客曰吾師莫是落空
009_0028_b_09L客自落空吾不落空客曰何不
009_0028_b_10L落空昭然曰本智普光照古今如何
009_0028_b_11L自昧落空亡客曰吾依經敎所說何謂
009_0028_b_12L落空亡昭然曰經之所詮是言語文字
009_0028_b_13L是紙墨上建立名句无非空亡也
009_0028_b_14L然則不依文字可乎昭然曰若不依
009_0028_b_15L文字則恐違文字即解脫之言與因指
009_0028_b_16L見月之言也若言依不依則必使客心
009_0028_b_17L不安吾亦失本分宗旨也客曰願聞宗
009_0028_b_18L昭然曰圓宗妙旨都在客也客自
009_0028_b_19L不知雖說何益客曰我已領領昭然
009_0028_b_20L領底何法客曰自心是宗旨否
009_0028_b_21L然曰1)然也 [9] 客曰自性是否又不
009_0028_b_22L豈不見道二祖初不識達摩所示要
009_0028_b_23L欲求印可說心說性達摩一一2)
009_0028_b_24L [10] 何以自心自性之言思惟爲吾家宗

009_0028_c_01L말세 중생이 논하거나 행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염불과 관상觀像의 법만이 삼세에 통하고 승속에 흡족한 것입니다. 참경懺經에서 ≺십념十念에 왕생한다.≻124)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일들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모두 염불한다면 괜찮겠습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되는 면도 있고 안 되는 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방편은 근기에 맞게 베푸신 것으로 마치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과 같아서, 참선할 만한 자에게는 선을 설하고, 염불할 만한 자에게는 염불을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염불해도 되는 측면입니다. 그러나 근기가 아닌데 법을 설하는 것은 마치 둥근 구멍에 네모난 막대기를 꽂는 것과 같고, 감초를 구하는 자에게 황색 연꽃을 주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염불해서는 안 되는 측면입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무엇이 참선의 근기이며, 무엇이 염불의 근기입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 도를 증득하지 못하고 실로 방편법문에도 우매하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위해 설하겠습니까. 비록 설하는 법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여우의 울음소리일 뿐입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지금 제방의 설법하는 여러 사람들이 우매하다고 생각하여 모두를 여우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도道에 대해 얻었는지 얻지 못했는지, 우매한지 우매하지 않은지는 물을 마셔 봐야 차갑고 따뜻한지를 아는 것과 같아서 도道 역시 그와 같이 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타심통을 얻었습니까? 옛날 대이大耳 삼장125)은 비록 타심통을 얻었지만 남양 혜충南陽慧忠(?~775) 국사의 세 번째 물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126) 무식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객이 물었습니다. ‘염불과 참선에 관한 말은 우선 그만두고,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이 있으니 대사는 답하겠습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물음이 있으면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공에 있는 큰 종을 힘을 다해 치고, 맑은 연못에 비친 달을 마음대로

009_0028_c_01L旨耶是爲鬼家活計也客曰此非如我
009_0028_c_02L末世衆生之所論所行唯念佛觀像之
009_0028_c_03L通於三世愜於僧俗懺經云十念
009_0028_c_04L3)生者 [11] 比比有之皆爲念佛可乎
009_0028_c_05L然曰有可不可也何也諸佛方便
009_0028_c_06L機施設如對病設藥也可爲於叅禪
009_0028_c_07L者說禪可爲於念佛者說佛此則可也
009_0028_c_08L非機說法如圓鑿方枘又如求甘草者
009_0028_c_09L施黃蓮此則不可也客曰何者是叅禪
009_0028_c_10L何者是念佛機耶昭然曰若人自
009_0028_c_11L未得道實昧方便法門何爲人說
009_0028_c_12L有說法皆是野干鳴也客曰如今諸方
009_0028_c_13L多小說法之人想應悉昧者皆謂野干
009_0028_c_14L可乎昭然曰他人於道得不得昧不
009_0028_c_15L如人飮水冷煖自知亦同道方知
009_0028_c_16L吾客得他心通否昔大耳三藏雖得他
009_0028_c_17L心通不知國師第三問也莫說無識之
009_0028_c_18L言也客曰念佛叅禪之言且止吾有一
009_0028_c_19L大師答否昭然曰有問不可4)無答 [12]
009_0028_c_20L在虡洪鍾随力扣擊淸潭水月任意
009_0028_c_21L「然也」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
009_0028_c_22L
「列下」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
009_0028_c_23L文活字
「生者」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
009_0028_c_24L作本文活字
「無答」二字底本二行小文字
009_0028_c_25L編者作本文活字

009_0029_a_01L가지고 놀 것입니다.’
객이 이에 몸을 바로 세우고 단정히 앉아서 물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무슨 물건과 무슨 법이 가장 광대하고 견고합니까? 바다와 산이 가장 크고 견고합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하늘과 땅입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달이 가장 크고 견고합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객이) 물었습니다. ‘태허가 천지를 함유하고 만유를 포함하여 일찍이 무너진 적이 없으니 태허의 공空이 가장 크고 견고합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객이 놀라며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크고 견고합니까?’ 나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조용히 답하였습니다. ‘원각묘심이 가장 크고 견고합니다.’ 객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비록 불가佛家에 참여하였지만 오직 명교名敎의 헛된 말만 배웠을 뿐 아직 원각묘심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대사를 만난 것이 비록 이렇지만 유령臾嶺의 만남127)과 용담龍潭의 만남128)이 어찌 오늘의 만남보다 낫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 절하고 말하였습니다. ‘광대하고 견고한 원각묘심에 대해 저에게 설해 주십시오. 원컨대 듣고 싶습니다.’ 나는 불자를 들고 보여 주며 말하였다. ‘이렇게 하면 자색 터럭의 불자拂子이고, 저렇게 하면 원각묘심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게송을 들어 보시오.

相對禪床談話是       서로 마주 앉아 선禪을 담론하는 자리
本來無物贈君看       본래 물건 없음을 그대에게 보여 주었노라
箇中何事淸人骨       그 가운데 무엇이 그대를 맑게 하였는가
山色溪聲入戶寒       산 색깔 시냇물 소리 궁핍한 집 안으로 들어오도다

객은 알겠습니까?’ (객이) 답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말하였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아는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앎은 아는 것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문제점을 거듭 설하였고 객은 마음을 비우고 잘 듣더니 한참 후에 손으로 무릎을 치며 ‘듣는 자 누구인가. 바로 객의 주인공이며, 역시 원각묘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또 말하였습니다. ‘열반의 오묘한 성품, 이 성품은 천지만물의 근원이며 또한 범부와 성인, 더럽고 깨끗함의 근본입니다. 본원의 심성이 시방의 허공을 머금고 토해 내므로 ≺허공이 대각에서 생겨나는 것이 마치 바다가 하나의 거품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129)라고 하였으니, 원각묘심이 어찌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원각의 심광心光이 법계에 청정히 가득 차 있으므로

009_0029_a_01L摸摩客於是聳身危坐而問曰天地之
009_0029_a_02L何物何法最廣最大而堅實乎
009_0029_a_03L嶽爲大而堅乎答曰非也問曰天地日
009_0029_a_04L月爲大而堅乎答曰非也問曰太虛含
009_0029_a_05L天地包萬有未甞成壞以大虛空爲大
009_0029_a_06L而堅乎答曰非也客驚曰然則誰爲
009_0029_a_07L大而堅乎昭然子默然而坐動容而言
009_0029_a_08L圓覺妙心爲大而堅也客曰予生乎
009_0029_a_09L兩間雖預空門唯學名敎之空言
009_0029_a_10L曉圓覺之妙心今遇大師雖是臾嶺之
009_0029_a_11L龍潭之逢豈過於今日之遇再拜
009_0029_a_12L廣大堅固圓覺妙心爲我宣說
009_0029_a_13L欲聞之昭然子擧拂子示曰這箇是紫
009_0029_a_14L毫拂子那箇不是圓覺妙心聽吾偈言
009_0029_a_15L相對禪床談話是本來無物贈君看
009_0029_a_16L箇中何事淸人骨山色溪聲入戶寒
009_0029_a_17L知歟不知昭然曰不知者知之
009_0029_a_18L可謂眞知也眞知不可以知知也重說
009_0029_a_19L葛藤虛懷諦聽良久以手拍膝云
009_0029_a_20L1)聽者 [13] 是誰即客之主人公亦是圓覺
009_0029_a_21L妙心又曰湼槃妙性此性爲天地萬物
009_0029_a_22L之源亦爲凢聖染淨之本本源心性
009_0029_a_23L吐十方虛空故云空生大覺中如海一
009_0029_a_24L漚發豈不謂大乎圓覺心光淸淨彌

009_0029_b_01L≺허공이 분쇄되고 대지가 무너지며 너와 내가 모두 없어진다.≻130)라고 하였고, 육진六塵은 더럽힐 수 없고 만상萬像은 무너뜨릴 수 없으므로 ≺만 가지 변화에 처해도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큰 재난에 빠지더라도 완연히 그대로다.≻131)라고 하였으니, 어찌 견고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저 큰 원각묘심은 넓고 넓어 끝이 없고 태허를 초월해 있으므로 ≺허공도 그 넓이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신령스러운 빛으로 환하게 비춤은 해와 달보다 뛰어나서 ≺해와 달도 그 밝음을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132) 깊고 깊어 밑바닥이 없어서 풍륜風輪133) 보다 더 아래 있으므로 ≺깊어서 측량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높고 높아 정상이 없어서 모든 하늘보다 위에서 누르고 있으므로 ≺높아서 우러러볼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능히 작아져서 인허鄰虛134)에 쏙 들어가서 그보다 더 작은 것이 없고, 능히 커져서 법계를 널리 포괄하여 그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 체體의 측면에서는 텅 비고 텅 비며 고요하고 고요하여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그 용用의 측면에서는 밝고 분명하여 보고 들을 수 있으며 태허太虛와 수명을 나란히 합니다.
원각묘심은 다만 객이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있으므로 배고픈 줄 알고 목마른 줄 알며 추운 줄 알고 따뜻한 줄 알며, 더 나아가 갠지스강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공덕과 한량없는 오묘한 작용이 본래 원만히 성취되어 있어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돌이켜 비추지 못한다면 항상 육진六塵을 쫓고 헛되이 윤회의 과보를 받아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철한鐵漢135)이 이 원각묘심을 들으면 단박에 깨닫고 그 자리에서 수용하여 자기의 남은 것을 미루어 만물에 미칠 것입니다. 혹시 아직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인연을 뽑아 버리고 집착을 제거하여 특별히 큰 믿음을 발하고 분지憤志를 견고하게 세우며, 반드시 진의眞疑를 일으키며 가르침대로 수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선우善友를 부지런히 참예參詣하여 언제나 묻고 해결하며 날마다 걸러 내어, 점점 더 닦아 빛내고 점점 더 궁극의 현묘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혹 3일이나 5일이나 7일에 이르거나 아홉 달에 이르면 반드시 입처入處가 있을 것입니다. 입처를 얻은 후에 깨달은 스승의 허가를 받아서 다시 깊은 산속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그윽이 머물러 깨달음에 의거하여 수행한다면

009_0029_b_01L滿於法界故云虛空粉碎大地平沉
009_0029_b_02L物我俱亡也六塵不能染汚萬像不能
009_0029_b_03L侵壞故云處萬變而如如不動淪浩劫
009_0029_b_04L而宛爾常存豈不是堅也且夫大圓覺
009_0029_b_05L妙心者廣愽無邊越彼太虛故云虛
009_0029_b_06L空讓其廣也靈光炳煥逾乎日月
009_0029_b_07L云日月漸 [6] 彼明也深深無底過於風輪
009_0029_b_08L故云深不可窺也高高無頂壓於諸天
009_0029_b_09L故云高不可仰也能小也細入鄰虛而
009_0029_b_10L無內能大也廣包法界而無外其爲
009_0029_b_11L體也空空寂寂不生不滅其爲用也
009_0029_b_12L明明歷歷能見能聞與太虛齊壽之
009_0029_b_13L圓覺妙心只在客之日用中知飢知渴
009_0029_b_14L知寒知熱乃至恒沙功德無量妙用
009_0029_b_15L本來圓成無欠無餘而自不返照
009_0029_b_16L逐六塵枉受輪廻無由出離何不自
009_0029_b_17L哀乎若是鐵漢此圓覺妙心聞即頓悟
009_0029_b_18L現成受用推己之餘以及萬物其或
009_0029_b_19L未然擺撥萬緣除去執着特發大信
009_0029_b_20L堅立憤志決起眞疑如敎修持始終
009_0029_b_21L勤叅善友時時問決日日陶汰輾轉
009_0029_b_22L磨光轉輾窮玄或至三日五日七日
009_0029_b_23L乃至九旬必有入處得入然後明師
009_0029_b_24L許可也再入林巒幽居靜室依悟修

009_0029_c_01L자유롭게 노닐게 될 것이니, 어찌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배우는 사람이 처음에 선지식이 있는 곳에서 화두를 받아서 가르침대로 힘써 참구하되 겨울 석 달(동안거)과 여름 90일(하안거)이 지나도록 투철히 깨닫지 못한 경우는 배우는 자가 신근信根과 입지立志와 의정疑情이 없는 것이고, 종사 또한 선교방편으로 깨달음에 들어가게 하는 좋은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객이 말하였습니다. ‘엎드려 듣건대, 원각묘심의 돈법頓法과 돈종頓宗의 공부하는 가르침은 우리 같은 초급생의 하근기 중생은 헤아리지 못하므로 부처님의 글을 읽고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다가 죽어서 서방 극락세계의 백성이 되어 직접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무생법을 들은 후에 성불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니, 그것이 더 쉽지 않겠습니까. 대사께서는 하필 말세에 태어나 믿음 없는 범부들에게 공연히 깨닫기 어렵고 수행하기 어려운 묘심妙心을 설하시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비방을 불러들여 타인까지 무간지옥에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어찌 스스로 수행하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 ‘천 개의 경전과 만 개의 논서에 있는 글은 다만 마음을 깨달아 성품을 보는 법을 설하고 있을 뿐이고, 삼세제불 시방여래는 모두 마음을 깨달아 성품을 본 사람들입니다. 서방의 백색의 백은 금이고 금은 황이며, 황색은 중도를 나타내고 중도는 중생과 부처의 평등한 자심입니다. 아미타는 한자로 무량수無量壽라고 하거나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하니, 사람마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지혜의 무량광명으로서 자심불이고, 또한 사람마다 생멸하지 않는 무량수로서 자심불입니다. 무생의 법은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는 생멸함이 없는 자심법입니다. 목우자 지눌은 ≺사람마다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분명하고 분명하게 능히 알고 있는 마음은

009_0029_c_01L任運騰騰騰騰任運豈非大丈
009_0029_c_02L夫耶若有叅學之人初於善知識處
009_0029_c_03L授受話頭如敎窮究三冬九夏未透
009_0029_c_04L當人自無信根立志疑情而宗師亦
009_0029_c_05L無善巧方便令人悟入之善法故也
009_0029_c_06L伏聞圓覺妙心之頓法及頓宗做功
009_0029_c_07L之說如我初生下根衆生擬議不及
009_0029_c_08L不如誦佛之文念佛之名死爲西方之
009_0029_c_09L親見彌陁之佛親聞無生之法
009_0029_c_10L後成佛豈不容易耶大師何爲當於末
009_0029_c_11L對於無信凢夫空說難悟難修之妙
009_0029_c_12L有何利益非徒無益自招毁謗之
009_0029_c_13L令他人入無間之獄豈不害於自
009_0029_c_14L修之道乎昭然子答曰千經萬論之文
009_0029_c_15L只是悟心見性之法三世諸佛十方如
009_0029_c_16L皆是悟心見性之人西方白色
009_0029_c_17L即是金金即是黃黃色表中道中道
009_0029_c_18L生佛平等之自心也阿彌陁此云無量
009_0029_c_19L亦云無量光此是人人本智無量光
009_0029_c_20L亦是人人不生滅無量壽自心佛也
009_0029_c_21L無生法者人人本有無生滅自心法也
009_0029_c_22L牧牛子云人人日用了了能知之心
009_0029_c_23L「聽者」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
009_0029_c_24L

009_0030_a_01L시절의 운행과 관련이 없다.≻136)라고 하였고, 마명보살은 ≺법이라는 것은 중생심이다.≻137)라고 하였으며, 『금강반야경』에서는 ≺비록 말세중생이라고 하더라도 신심이 견고하면 능히 실상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138)라고 하였고, 운문은 ≺이 마음은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어서 항상 행주좌와하면서 보고 듣고 지각하고 인식하는 곳에 드러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가까이에 분명하게 있으니 어찌 이해하기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이러한 말들은 부처와 조사의 진실되고 간절한 말씀이니 어찌 사람들을 속이는 말이겠습니까.
우리 선객들이 스스로 신심이 없고 스스로 게으름을 내며, 스스로 물러서려 하고 스스로 어렵다는 생각을 내며, 스스로 분간 없는 데에 떨어져, 멀리 여러 성인에게 미루기 때문에, 자심自心과 자성自性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의미가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서방미타를 들으면 수준이 낮아 이해하기 쉽다고 여기니, 이를 지혜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혜 종고가 ≺사대부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곧바로 공에 빠진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은 흡사 배가 아직 뒤집어지지도 않았는데 먼저 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139)라고 말한 것이니, 이러한 선객들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평소에 배운 경서를 어디에 활용하려고 하였기에 과문하고 무식함이 이와 같이 심합니까. 조사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자심의 돈법을 들으면 금생에 비록 철저히 깨닫지 못하더라도 내생에 태어나서 받아들여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140)라고. 만약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면 비록 염불하고 참선하며 여러 가지 고행을 진겁塵劫토록 하더라도 한갓 고행만 할 뿐이어서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또 마치 진흙으로 만든 구슬은 마침내 진흙이 되지만 금은으로 만든 구슬은 마침내 금은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의 망정은 어리석음으로 어짊을 속이고, 삿됨으로 바름을 기만하는 것이니, 비록 비방하는 자가 있더라도 무슨 부끄러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객이 자심돈법을 비방하는 것은 손해만 있고 이익이 없으며 내가 심법을 설하는 것은 이익만 있고 손해가 없는 것입니다. 제방의 사람들이 나의 옳고 그름을 말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살피지 않으니 가소롭지 않겠습니까.
어떤 산의 어떤 수좌首座는 어려서부터 본래 실제의 깨달음이 없이 오랫동안

009_0030_a_01L關時運馬鳴菩薩云所言1)法者 [13] 衆生
009_0030_a_02L金剛般若經云雖是2)末世 [15] 衆生
009_0030_a_03L心堅固能生實相雲門云此心人人
009_0030_a_04L具有常現於行住坐臥見聞覺知處
009_0030_a_05L近分明何有難解耶此等言佛祖誠實
009_0030_a_06L貇苦之說豈欺人哉吾之禪客自無
009_0030_a_07L信心自生懈怠自生退屈自生艱阻
009_0030_a_08L自墮無分遠推諸聖故聞自心自性
009_0030_a_09L則以謂深遠難解聞西方彌陁則以謂
009_0030_a_10L淺近容易可謂智慧人乎妙喜云士大
009_0030_a_11L夫聞恁麽說話便道莫落空否喩似舟
009_0030_a_12L未翻時先自跳下水去指吾客而言也
009_0030_a_13L平生所學經書要求何用寡聞無識
009_0030_a_14L若此之甚耶祖師不云乎若聞自心頓
009_0030_a_15L今生雖未徹悟來生出頭來現成
009_0030_a_16L受用若未悟心源則雖有念佛叅禪
009_0030_a_17L乃至種種苦行歷於塵劫徒勞苦行
009_0030_a_18L如蒸沙作飯又如泥土3)作珠終成泥
009_0030_a_19L金銀作珠終是 [16] 金銀也衆生之妄
009_0030_a_20L以愚欺賢以邪譏正雖有毁謗
009_0030_a_21L可恠耶客毁自心頓法有害無益
009_0030_a_22L說心法有益無害也諸方有人說昭
009_0030_a_23L然之是非而不察自己之非不亦可笑
009_0030_a_24L某山某首座自少本無實悟者

009_0030_b_01L헛되이 적묵寂默만을 지켜 오다가 때를 잘 만나 이름이 높지 않은데도 세상에서 귀의하는 이가 있어, 스스로 선지식이라고 칭하고 마음 착한 남녀를 잘못되게 이끌고 있습니다.
어떤 사찰의 어떤 종장宗匠은 어려서부터 문자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관행觀行하여 속세로부터 벗어나려는 마음을 끝내 품지 못하고 말년에 이르도록 글줄만 찾고 문자만을 헤아리다가 심인心印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잠시 숙덕夙德이 있어서 귀의하는 자가 있어, 스스로 법왕이라고 칭하니 스스로 잘못되는 것은 괜찮지만 남의 눈을 멀게 함이 적지 않습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은 마음 다스림이 자유자재하고 몸가짐이 정결하며 세상의 이익을 탐내지 않고 사람 일에 구애되지 않으며 밥그릇 하나와 옷 한 벌로 정해진 거처가 없고 도인 같은 모습이지만 본래 정견正見이 없고 다만 세상의 지혜로써 변설이 좋고 괴이한 담론을 잘하여, 경전을 읽지 않았으면서도 종장들을 제멋대로 평가하고, 선을 참구하지 않았으면서도 수좌들을 평가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자인慈忍하지 않지만 얼굴은 온순하여 겉으로 위의를 갖추고서 세속 사람들을 속여서 미혹시키는 자이니, ≺무지하고 방일하여 마치 거꾸로 매달린 원숭이 같은 자≻141)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은 본디 영웅의 기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만 호걸의 마음만을 기르고, 지나치게 남을 항복시키려는 마음을 품고서 어리석게도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내며, 자신은 마군 외도의 정념情念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저 도력 있는 높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자입니다. 괴롭습니다. 이런 사람은 ≺뱃속은 비어 있고 마음만 높아서 마치 굶주린 호랑이 같은 자≻142)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 세상에서는 준걸俊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출세간에서는 어리석은 범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이 바른 앎과 바른 견해를 가진 선인善人을 비난합니다. 비유하자면, 우물 안에 앉아 바라보면서 태산에서 바라보는 것에 빗대고, 당나귀의 느린 걸음이면서 준마의 나는 듯이 달리는 것에 빗대며, 참새나 뱁새의 병든 날개를 곤새와 붕새의 힘찬 날개와 같다고 여기는 꼴입니다. 또한 모기나 등에가 태허太虛를 쳐서 움직이려는 것과 같고, 땅강아지나 개미가 철기둥을 흔들어 뽑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선객이 머리를 숙이고 듣더니 일어나 절하고 합장(叉手)하며 말하였다. “어찌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내가 바로 어리석은 객입니다.” 나는 웃으며 말하였다. “미혹한 사람인 체하여 남의 삿됨과 바름을 시험하려 하고,

009_0030_b_01L年空守寂默適時名而不高世或歸依
009_0030_b_02L自稱知識誤他善心男女者也
009_0030_b_03L寺某宗匠自幼文字解學爲業觀行出
009_0030_b_04L終不掛懷終年竟歲尋行數墨
009_0030_b_05L得心印暫有夙德人或依付故自稱
009_0030_b_06L法王自誤猶可瞎人眼不少者也
009_0030_b_07L有一類人治心灑灑持身潔潔不貪
009_0030_b_08L世利不拘人事單瓢一衲居無㝎處
009_0030_b_09L形似道人本無正見但以世智辯聦
009_0030_b_10L能說恠談不讀經而高下宗匠不叅禪
009_0030_b_11L而褒貶首座心不慈忍面行温恭
009_0030_b_12L現威儀誑惑世俗者可謂無知放逸似
009_0030_b_13L顚猿也又有一類人自有英雄之氣
009_0030_b_14L但養豪傑之心狂抱降人之念愚出度
009_0030_b_15L生之心昧自魔外之情念譏他有道之
009_0030_b_16L高人苦哉可謂空腹高心如餓虎也
009_0030_b_17L此四類雖曰人世之俊傑可謂出世之
009_0030_b_18L愚夫也如是四流譏毁正知正見之善
009_0030_b_19L譬如坐井之見擬泰山之望跂驢
009_0030_b_20L之鈍步追駿馬之飛行若雀鷯之病翼
009_0030_b_21L並鵾鵬之逸翮又如蚊䗈鼓太虛而令
009_0030_b_22L螻蟻撼鐵柱而欲拔也禪客俛首聽
009_0030_b_23L起拜叉手曰豈異人乎如我愚客是
009_0030_b_24L昭然子笑曰佯似迷人欲驗人之

009_0030_c_01L자신의 지혜를 숨기고 남의 허실을 간파하려 하며, 일부러 어눌한 말을 하여 남의 말이 우매한지 지혜로운지를 들으려 하고, 자신의 기술을 드러내지 않고 남의 기술이 교묘한지 졸렬한지를 보려 하는 자는 인자하고 지혜로운 자로서 현자와 성인이 중생을 제도하는 훌륭한 임시방편이지, 그대 같은 어리석은 객이 할 바가 아닙니다. 나의 게송을 들으시오. ‘석두 스님을 찾아가는 미끄러운 길143)이 어찌 빈말이겠으며, 사자의 허리 꺾음144) 또한 실제의 말이로다. 이제부터 객은 눈 밝은 이를 찾아야 하리니, 큰 도는 말에 의거하지 않음을 알라.’” 선객은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고 입을 닫고 주저주저하며 물러났다.
『월봉집』 제1권 끝

009_0030_c_01L邪正隱匿自智勘破人之虛實暗吐
009_0030_c_02L拙言聽彼言之愚智微現自述看他
009_0030_c_03L藝之巧拙者此乃仁人智者賢士聖流
009_0030_c_04L度生濟人之善權方便非汝愚客之所
009_0030_c_05L爲也聽吾偈曰石頭路滑豈虛言
009_0030_c_06L子腰摧亦實言從此客尋明眼漢須知
009_0030_c_07L大道不依言禪客不敢仰視杜口逡巡
009_0030_c_08L而退

009_0030_c_09L
月峯集卷之一終

009_0030_c_10L「法者」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
009_0030_c_11L
「末世」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
009_0030_c_12L文活字
「作珠…終是」十二字底本二行小
009_0030_c_13L文字編者作本文活字
  1. 1)소연자昭然子 : 이 글에서 ‘소연자’는 글을 쓴 저자를 말한다. 이는 뒤쪽에 나오는 「선객에게 보이는 결의론」에서 확인된다.
  2. 2)공문空門 : 불교의 다른 표현이다.
  3. 3)종교宗敎 : 불교의 종취宗趣, 즉 핵심적인 가르침을 의미한다.
  4. 4)만약 색으로~못할 것이다 : 『金剛般若波羅密經』(T8, 752a).
  5. 5)나는 불법을 알지 못한다 : 『六祖大師法寶壇經』(T48, 358a).
  6. 6)석가도 알지~수 있겠는가 : 청허 휴정淸虛休靜(1520~1604), 『禪家龜鑑』(H5, 61a).
  7. 7)이 성性은~낮음이 없다 : 『金剛般若波羅密經』(T8, 751c); 『大方廣佛華嚴經』 권18(T10, 96a).
  8. 8)누런 잎사귀는~돈이 아니고 : 『大般涅槃經』 권18(T12, 729a).
  9. 9)달을 보거든~잊어야 한다 : 규봉 종밀圭峰宗密(780~841),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 권2(T39, 555c).
  10. 10)한유韓愈(768~824) : 당송팔대가 중의 한 명이며,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중국 성리학의 시조로 여겨질 만큼 유학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당시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의 변려문을 배격하고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11. 11)유종원柳宗元(773~819) : 당송팔대가 중의 한 명이며, 자는 자후子厚이다. 한유와 함께 고문운동을 제창하여 당시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의 변려문을 배격하고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12. 12)이백李白(701~762) : 두보와 함께 당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자는 태백太白이고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 불린다. 그가 지은 1천여 수의 시가 전한다.
  13. 13)두보杜甫(712~770) : 이백과 함께 당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자는 자미子美이고, ‘두릉杜陵의 포의布衣’ 또는 ‘소릉少陵의 야로野老’라고 자칭하였다. 그가 지은 1천 5백여 수의 시가 전한다.
  14. 14)왕희지王羲之(307~365) : 동진東晉의 서예가로서 자는 일소逸少이며, 351년에 우군장군에 임명되어 왕우군王右軍이라고도 불린다. 한漢나라 때 성립된 해서楷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의 실용적인 글자를 예술적인 서체로 승화시켜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다.
  15. 15)장지張芝(?~192) : 후한後漢의 서가書家로서 자는 백영伯英이다. 장초章草에 뛰어나 초성草聖이라고 일컬어졌다.
  16. 16)신자身子 :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지혜 제일인 사리불을 가리킨다.
  17. 17)만자滿慈 :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설법 제일인 부루나를 가리킨다.
  18. 18)도안道安(312~385) : 오호십육국 시대의 승려로 속성은 위衛이고 하북성 기현冀縣 출신이다. 불도징佛圖澄의 제자가 되어 공부했다. 이후 양양襄陽에서 반야학을 강론했는데, 전진前陳 왕 부견符堅이 도안을 곁에 두기 위해 양양을 공격하자 전진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이주하여 불경을 번역하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19. 19)구마라집鳩摩羅什(344~413) : 실크로드에 있는 구자국龜玆國 출신으로, 후진後秦의 장안長安으로 와서 약 300여 권의 불전을 번역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당나라 현장과 함께 중국 2대 역경가로 평가받는다.
  20. 20)혜능慧能(638~713) : 중국 선종의 제6조로서 ‘육조대사’라고 불리며 남종선의 시조이다. 그의 법문을 엮은 『六祖大師法寶壇經』이 전한다.
  21. 21)신수神秀(605?~706) : 중국 선종에서 북종선의 시조이다. 당나라 측천무후ㆍ중종ㆍ예종 3대에 걸쳐 국사를 지냈고 6년간 장안과 뤄양의 법주를 지냈다.
  22. 22)마명馬鳴 : 5세기 인도의 불교학자로서 『大乘起信論』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23. 23)용수龍樹 : 2~3세기 인도의 불교학자로서 대승불교 중관학파의 창시자이다. 그의 저술로는 『中論』, 『大智度論』, 『十住毘婆沙論』, 『十二門論』 등이 전한다.
  24. 24)대혜 종고大慧宗杲(1089~1163) :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臨濟宗 승려로서 속성俗姓은 해奚, 자字는 담회曇晦, 호號는 묘희妙喜 또는 대혜大慧이다. 간화선看話禪의 창시자이며 그의 저서 『大慧普覺禪師語錄』 가운데 권25~30에 해당하는 부분이 『書狀』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어 조선 후기에 크게 유통되었다.
  25. 25)그대가 공에~공하지 않은가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5(T47, 917c).
  26. 26)송파松坡 대사 : 송파 각민松坡覺敏(1596~1675).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한계 스님에게 출가하고, 사명대사 유정의 법손인 송월 응상松月應祥(1572~1645)의 법을 이었다.
  27. 27)벽암碧巖 대사 : 벽암 각성碧巖覺性(1575~1660).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설묵 스님에게 출가하고, 부휴 선수浮休善修(1543~1615)의 법을 이었다. 임진왜란 의승병으로 참전하였고, 팔도도총섭으로서 남한산성 축성을 지휘하였다. 이때 그 공로를 인정받아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을 하사받았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승군 3천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진격하였으나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듣고 회군하였다. 화엄사, 쌍계사, 법주사 등을 중수하였다.
  28. 28)풍담楓潭 대사 : 풍담 의심楓潭義諶(1592~1665). 16세 때 성순性淳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편양 언기鞭羊彦機(1581~1644)의 법을 이었다. 금강산 표훈사, 김포 문수사, 영변 보현사, 해남 대흥사에 탑비가 세워졌다.
  29. 29)마음으로 마음을~세우지 않는다 : 장수 자선長水子璿(964~1064), 『起信論疏筆削記』 권2(T44, 307b).
  30. 30)마음이 곧 부처다 : 진각 혜심眞覺慧諶(1178~1234), 『禪門拈頌集』 권5(K46, 74b).
  31. 31)부처님의 말씀과~으뜸으로 삼는다 : 화정 염상華亭念常(1282~?), 『佛祖歷代通載』 권14(T49, 608c).
  32. 32)진성은 만법의 근원이다 : 규봉 종밀, 『禪源諸詮集都序』 권1(T48, 399a).
  33. 33)유무중도有無中道 : 있음, 없음, 그리고 그 중간의 길을 말한다.
  34. 34)무주무위無住無爲 : 머무름도 없고 작위도 없음을 말한다.
  35. 35)사유四有 : 유有란 ⓢ bhava의 번역으로 중생의 생존을 말한다. 윤회하는 중생의 생존에는 생유生有ㆍ본유本有ㆍ사유死有ㆍ중유中有가 있다. 생유는 태내에 있다가 태어남이고, 본유는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사유는 임종할 때이고, 중유는 새로 태어나기 이전까지 생존하는 것을 말한다.
  36. 36)묘각妙覺 :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향한 52위의 단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묘각은 그 최종 단계를 말한다. 50위는 십신十信ㆍ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十廻向ㆍ십지十地의 각 10단계이고, 십지에 이른 이후에 등각等覺과 묘각의 최종 단계에 도달한다.
  37. 37)권점權漸의 근기 : 방편에 의거하여 점차 깨닫는 근기를 말한다.
  38. 38)염染과 정淨이~진실하다고 하겠습니까 : 보조 지눌普照知訥(1158~1210),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H4, 741c).
  39. 39)과량過量 :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
  40. 40)기경機境 : 계기契機와 경계境界를 말한다.
  41. 41)무생법인無生法忍 : 모든 존재하는 것은 태어난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42. 42)이 마음을~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거한다 : 규봉 종밀, 『禪源諸詮集都序』 권1(T48, 405b).
  43. 43)일숙각一宿覺 : 영가 현각永嘉玄覺(665∼713)을 말한다. 육조대사 혜능에게 깨달음의 인가를 받고 하룻밤 지내고 갔다고 하여 일숙각이라고 부른다.
  44. 44)병에 따라~않도록 한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5(T47, 916c).
  45. 45)성구문性具門 : 성구性具란 모든 중생은 진여법성을 본래 갖추고 있다는 의미로, 천태종에서 성구설을 주장하였다.
  46. 46)이구청정離垢淸淨 : 티끌을 없앤 청정함이라는 의미이다. 『究竟一乘寶性論』 권4에서 ‘본래자성청정本來自性淸淨’을 ‘자성청정自性淸淨’과 ‘이구청정’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47. 47)이장해탈離障解脫 : 장애를 벗어난 해탈이라는 의미이다.
  48. 48)얼음이 있는~점차 이룬다 : 보조 지눌, 『牧牛子修心訣』(H4, 709b).
  49. 49)우두 법융牛頭法融(594~658) : 중국 선종의 조사로 우두종牛頭宗의 종조宗祖이다.
  50. 50)도신道信(580~651) : 중국 선종의 제4조祖로서 동산법문東山法門을 개창하였다.
  51. 51)운거 도응雲居道膺(835?~902) : 당나라 때 승려로서 동산 양개의 법을 이었으며 운거산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52. 52)방광方廣 : 대방광大方廣의 줄임말로 부처님의 깨달음이 방정方正하고 광대廣大함을 말한다.
  53. 53)밝고 밝은~취해서 춤추도다 : 진각 혜심, 『禪門拈頌集』 권8(K46, 135a).
  54. 54)일상에 별다른~어긋나지 않는다 : 진각 혜심, 『禪門拈頌集』 권5(K46, 76b).
  55. 55)대천세계의 바다~사라지는 것이다: 고봉 원묘高峰原妙(1238~1295), 『禪要』 권1(X70, 707c).
  56. 56)금강왕보검金剛王寶釖의 말후대사末候大事 : 『緇門警訓』 권3(T48, 1054b) 참조.
  57. 57)성언량聖言量 : 성언聖言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량量은 인식 작용의 표준을 말한다. 즉 성언량은 표준이 되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흔히 현량現量ㆍ비량比量ㆍ성언량의 삼량三量을 말한다.
  58. 58)사람 가운데~어려운 것처럼 : 허응 보우虛應普雨(1515~1565), 『虛應堂集』 상(H7, 541c).
  59. 59)「선재남유기善財南遊記」 : 『華嚴經』 「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유행하면서 오십삼 선지식을 만난 이야기를 ‘선재남유기’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60. 60)『신선통감神仙通鑑』 : 『歷代神仙通鑑』. 청나라 서도徐道가 찬술하고 장계종張繼宗(1667~1715) 등이 교정하였다. 역대 신선神仙과 조사祖師 및 성현聖賢들의 사적을 총22권으로 엮었다.
  61. 61)고봉高峯 선사가~주었던 말 : 『禪要』 「示理通上人」(X70, 708c) 참조.
  62. 62)대혜 선사가~답했던 글 :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8 「答呂舍人」(T47, 930a) 참조.
  63. 63)본정本淨이 양가兩街의~했던 말 : 『佛祖歷代通載』 권13 「三十癸未」(T49, 595c) 참조.
  64. 64)우두 선사가~대답했던 말 : 『景德傳燈錄』 권4 「金陵牛頭山六世祖宗」(T51, 227b) 참조.
  65. 65)규봉 선사가~했던 말 : 『景德傳燈錄』 권13 「前遂州道圓禪師法嗣」(T49, 720a) 참조.
  66. 66)달마가 육종六宗을 깨뜨렸던 일 : 『佛祖歷代通載』 권22 「六」(T49, 720a) 참조.
  67. 67)허공이 분쇄되고~함께 없어진다 : 고봉 원묘, 『禪要』 권1(X70, 703b).
  68. 68)영각靈覺의 진성眞性 : 신령스럽게 깨달음을 이루는 진여의 성질을 말한다.
  69. 69)명상名相 : 명名은 귀로 들을 수 있는 사물의 이름이고 상相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의 모습을 말한다.
  70. 70)금우金牛 화상의 밥을 씹고 : 『碧巖錄』 권8의 제74칙(T48, 201c) 참조.
  71. 71)팔풍八風 : 이익과 손해, 훼방과 명예, 칭찬과 비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말한다.
  72. 72)도를 증득한~될 것이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5(T47, 920b).
  73. 73)법에 들어가는~곳은 하나이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9(T47, 935b).
  74. 74)천 가지~하나의 의심이다 : 고봉 원묘, 『禪要』 권1(X70, 707a).
  75. 75)의정疑情 : 화두話頭를 들고 있는 마음을 말한다.
  76. 76)칠통柒桶 : 옻칠이 되어 있는 나무통의 경우 안쪽이 깜깜하여 보이지 않으므로, 번뇌가 불성을 뒤덮고 있는 상태를 비유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77. 77)분명히 항상~미치지 못한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7(T47, 925b).
  78. 78)서로 얼굴을~눈길이 마주친다 : 진각 혜심, 『禪門拈頌集』 권30(K46, 493a).
  79. 79)성명性命 : 인성人性과 천명天命을 말한다.
  80. 80)여의如意한 가운데~안 된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7(T47, 925a).
  81. 81)이 한~안 된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7(T47, 925a).
  82. 82)마음이 여여하면~마친 범부이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7(T47, 925a).
  83. 83)그대는 보지~곧 법신이다 : 영가 현각, 『永嘉證道歌』 권1(T48, 395c).
  84. 84)영리靈利한 사람은~있을 것이다 : 고봉 원묘, 『禪要』 권1(X70, 703a).
  85. 85)여기 한~걸림 없다 : 고봉 원묘, 『禪要』 권1(X70, 707a).
  86. 86)삼수三受 :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말한다.
  87. 87)종현種現 : 의식의 종자와 현재의 의식을 말한다.
  88. 88)근수根隨 :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육근과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息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의 육식을 말한다.
  89. 89)헤아림이 법계의~다 없어진다 : 보조 지눌,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H4, 754c).
  90. 90)색깔을 보고~반조返照하고 있는가 : 규봉 종밀, 『禪源諸詮集都序』 권2(T48, 411b).
  91. 91)십허十虛 : 시방허공十方虛空의 준말로 시방세계의 모든 공간을 의미한다.
  92. 92)허령虛靈 : 잡된 생각이 없는 신령한 마음을 말한다.
  93. 93)향상뇌관向上牢關 : 사량분별로 이를 수 없는 경지를 말한다.
  94. 94)사람의 마음은~잡기 어렵다 : 『書經』에는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은미하니, 다만 정밀하고 한결같이 행동하여 진실로 그 중도를 잡아야 한다.(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라고 되어 있다.
  95. 95)이름으로 이름~수 없다 : 『道德經』에 “이름을 붙일 수 있으나 그것은 진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라고 되어 있다.
  96. 96)지범개차持犯開遮 : 불교의 계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지키고 범할 수 있다는 대승의 가르침이다.
  97. 97)공문空門 : 공空을 설한 불교의 다른 표현이다.
  98. 98)투쟁뇌고鬪爭牢固 :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다섯 번의 500년 중에서 첫 번째 500년은 해탈뇌고解脫牢固, 두 번째 500년은 선정뇌고禪定牢固, 세 번째 500년은 다문뇌고多聞牢固, 네 번째 500년은 탑사뇌고塔寺牢固, 다섯 번째 500년은 투쟁뇌고라고 한다.
  99. 99)회삼귀일會三歸一 : 『法華經』의 요지를 드러낸 말로 성문ㆍ연각ㆍ보살의 삼승三乘에 대한 가르침은 방편설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진여의 가르침인 일승一乘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100. 100)화회삼종和會三宗 : 규봉 종밀은 『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禪의 삼종을 제시했는데, 즉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ㆍ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ㆍ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이다.
  101. 101)십세十世 :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三世에 각각 삼세가 있어 구세九世가 되고, 구세가 융합되어 일세一世를 이루어, 모두 합하면 십세가 된다.
  102. 102)끝없는 국토~있지 않다 : 고봉 원묘, 『禪要』 권1(X70, 704c).
  103. 103)부처의 등불과~벗어나지 않는다 :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 권상(H7, 12c~13a) 참조.
  104. 104)삼승분교三乘分敎 : 성문ㆍ연각ㆍ보살, 즉 삼승三乘의 가르침을 말한다.
  105. 105)황매黃梅 : 중국 선종의 제5조 홍인弘忍(602~675)을 가리킨다. 황매현 쌍봉사 동산사에서 출가하여 후학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오조황매’라고도 부른다.
  106. 106)『금강경』과 『능가경』은~마음의 요체이다 : 규봉 종밀, 『禪源諸詮集都序』 권1(T48, 400b).
  107. 107)망회허랑忘懷虛朗 : 마음속에 품은 것을 잊어서 텅 빔으로써 밝힌다는 의미이다.
  108. 108)출신활로出身活路 : 자유자재하게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109. 109)목우자가 어찌~하였기 때문입니다 :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H4, 741a) 참조.
  110. 110)탐진치의 사견을~할 뿐 : 규봉 종밀, 『禪源諸詮集都序』 권1(T48, 400a)에는 “唯熾貪嗔耶(탐진만이 치성할까.)”라고 되어 있으나, 조선 시대 판본에는 마지막의 ‘耶’가 ‘邪見’으로 되어 있어서 ‘탐진치의 사견을 치성하게 할 뿐’으로 번역하였다.
  111. 111)미륵산 고자암高自庵 : 원주 미륵산에 있던 사찰이다. 현재는 삼층석탑만이 남아 있는 폐사지이다.
  112. 112)참방參訪 : 선사들을 찾아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113. 113)모상무지摸象撫指 : 맹인이 코끼리를 그리려고 더듬는 것을 말한 것이다.
  114. 114)시호군봉市虎裙蜂 : 근거 없는 말은 믿기 쉬움을 말한 것이다.
  115. 115)공망空亡 : 실제가 없는 것을 말한다.
  116. 116)왕상시王常侍의 구절 : 『景德傳燈錄』 권7 「鄂州無等禪師」(T51, 255c) 참조.
  117. 117)언구를 의심하지~병이 된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7(T47, 883a); 청허 휴정, 『禪家龜鑑』(H7, 636c).
  118. 118)방편을 지키기만~병이 된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7(T47, 919a).
  119. 119)다니던 길에서~찾아 헤매네 : 『禪門拈頌說話會本』 권1(H5, 354a).
  120. 120)무사갑无事匣 : 일없는 것을 궁극의 경지로 삼는 것을 말한다.
  121. 121)문자가 곧 해탈 :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H7, 42c).
  122. 122)손가락을 통해 달을 본다 : 규봉 종밀,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 권2(T39, 555c); 지소智昭, 『人天眼目』 권6(T48, 333b).
  123. 123)귀신 집안의 살아갈 계책 :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덧없고 허망한 일이라는 의미이다.
  124. 124)십념十念에 왕생한다 : 『禮念彌陁道場懺法』 권4(K47, 309a).
  125. 125)대이大耳 삼장 : 당나라 시대의 스님으로, 타심통에 능해서 혜충 국사와 타심통에 관한 문답을 했다고 한다.
  126. 126)옛날 대이~알지 못하였습니다 : 진각 혜심, 『禪門拈頌集』 권4(K46, 61a).
  127. 127)유령臾嶺의 만남 : 『六祖大師法寶壇經』(T48, 349b) 참조.
  128. 128)용담龍潭의 만남 : 고봉 원묘의 『禪要』(X70, 710a) 참조.
  129. 129)허공이 대각에서~것과 같다 : 『首楞嚴經』 권6(T19, 130a).
  130. 130)허공이 분쇄되고~모두 없어진다 : 고봉 원묘, 『禪要』 권1(X70, 703b).
  131. 131)만 가지~완연히 그대로다 : 허응 보우, 「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H7, 604b).
  132. 132)원각묘심은 넓고~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 영명 연수永明延壽(904~975), 『唯心訣』 권1(T48, 995a).
  133. 133)풍륜風輪 : 이 세계를 받치고 있는 맨 밑층을 말한다.
  134. 134)인허鄰虛 : 인허진鄰虛塵. 극미.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 허공과 가깝다고 하여 붙인 이름.
  135. 135)철한鐵漢 : 뜻이 굳센 남자.
  136. 136)사람마다 일상생활을~관련이 없다 : 보조 지눌,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H4, 741b).
  137. 137)법이라는 것은 중생심이다 : 『大乘起信論』(T32, 575c).
  138. 138)비록 말세중생이라고~수 있다 : 『金剛般若經疏論纂要刊定記會編』 권6(J31, 713a).
  139. 139)사대부들이 이러한~것과 같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7(T47, 917c).
  140. 140)만약 자심의~있을 것이다 : 대혜 종고, 『大慧普覺禪師語錄』 권27(T47, 932a).
  141. 141)무지하고 방일하여~같은 자 : 야운, 『自警文』(H6, 765c).
  142. 142)뱃속은 비어~같은 자 : 야운, 『自警文』(H6, 765c).
  143. 143)석두 스님을~미끄러운 길 : 진각 혜심, 『禪門拈頌集』 권9(K46, 138) 참조.
  144. 144)사자의 허리 꺾음 : 청허 휴정, 『禪家龜鑑』(H7, 645a) 참조.
  1. 1){底}康熙四十二年全羅道潭陽龍湫寺開刊本(海印寺所藏)。
  2. 2)目次。編者作成補入。
  3. 3)「文」編者補入。
  4. 4)「性性則心心性」六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5. 1)「互現文子」四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6. 1)「終無」疑「無終」{編}。
  7. 1)「遠」下底本有一字空白{編}。
  8. 1)「實際」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9. 1)「更做」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10. 2)「體理」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11. 1)「有情」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12. 1)「然也」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13. 2)「列下」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14. 3)「生者」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15. 4)「無答」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16. 1)「聽者」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17. 1)「法者」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18. 2)「末世」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
  19. 3)「作珠…終是」十二字。底本二行小文字。編者作本文活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