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허정집(虛靜集) / 虛靜大師詩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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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집虛靜集
허정대사시집 서虛靜大師詩集序
나는 등산하고 청담을 나눌 때면1) 왕왕 납자들의 문이나 승당을 찾곤 한다. 그러다 우연히 선상에서 총림의 새로운 원고 하나를 보게 되었으니, 곧 (허정) 대사의 진실한 게송과 남기신 필묵이었다. 책을 손에 들고서 며칠 동안 잠시도 놓지 못했던 것은 그가 월저月渚2)의 법을 본받고 설암雪庵3)의 종지를 이은 점을 훌륭히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삼승 문호의 개사開士4) 중에 또한 시인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기 집안의 그윽한 취향을 모두 천석泉石 가운데 쏟아냄에 있어서는 저 월저와 풍담楓潭5)의 시가 유독 한층 높은 경지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스님의 시는 체법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태도가 평상하고 담담하다. 오온이 모두 공하고, 모든 번뇌가 이미 사라졌으며, 자비의 구름이 뭉게뭉게 아롱지고, 지혜의 태양이 산뜻하고 밝으니, 이것이 어찌 시의 근본 성정이 아니겠는가. 이 문집의 어떤 작품도 맑고 원만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진실로 창해의 승보라 하겠다. 또한 그가 국애國哀(국상)를 당했을 때 지은 몇 편의 절구를 보면 일념이 오로지 임금과 백성에게 있었으니, 이것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울러 〈사실四室을 애도하다〉라는 한 편의 시에서는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하고 지극하니, 조종祖宗을 존경하지 않은 자라 할 수 있겠는가? 스승과 벗을 애도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모함에 있어서도 걸핏하면 시를 써 추모하는 슬픔을 그치지 않았으니, 저 속세를 여의고 법의 문중에 귀의하기로 마음먹은 자에게도 이와 같이 사람으로서 행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단 말인가? 더욱이 청명에 쓴 시6)의 쇄洒ㆍ맥麥ㆍ반飯 세 글자에서는 상로출척霜露怵惕7)의 심정까지 볼 수 있으니, 곧 스님께서 한식을 맞아 선영의 묘소를 그리워했던 마음이다. 그러한즉 스님의 훌륭한 깨달음과 현량하고 아름다운 덕을 붓을 휘두르고 먹을 희롱한 곳에서 하나하나 증명하고 확인할 수 있으니, 내가 스님의 시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이것일 뿐이다. 다음으로, 스님께서 선문의 법을 전한 사실은 우리 해동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

009_0487_b_01L[虛靜集]

009_0487_b_02L1)虛靜大師詩集序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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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487_b_04L
余繄以蠟屐談麈徃徃敲推於衲門緇
009_0487_b_05L堂間矣偶從禪案上得一叢林新稿
009_0487_b_06L即大師眞偈餘墨也因手卷數日
009_0487_b_07L亹不釋者善爲其法月渚宗雪庵故也
009_0487_b_08L於伊時乘門開士亦不能無詩而自
009_0487_b_09L家幽趣都是泉石中做出來則其月
009_0487_b_10L什風韻只見一倍高處耳若師之詩
009_0487_b_11L軆法柔艶態度平淡五緼皆空
009_0487_b_12L漏已盡慈雲靄和慧日鮮朗斯豈
009_0487_b_13L非詩本性情者耶集中諸作无不淸
009_0487_b_14L亶可謂滄海僧寶也且觀其國哀
009_0487_b_15L時數絕則一念猶在君民非憂愛而
009_0487_b_16L曁夫悼四室一什意頗切至得不
009_0487_b_17L爲尊祖敬宗者歟至若悼師友慕父母
009_0487_b_18L動輙有詩追哀不已豈意離塵境歸
009_0487_b_19L法門者有如是在人難行者乎且如
009_0487_b_20L淸明詩洒麥飯三字上尤可見霜露怵
009_0487_b_21L惕之心則師得其寒食思先墓之意
009_0487_b_22L然則師之善覺賢懿一一證嚮於
009_0487_b_23L揮毫弄墨處余所以貴師詩者是耳
009_0487_b_24L師之禪門傳法已著吾東何必復加

009_0487_c_01L굳이 글 중에 찬양을 재차 보탤 필요가 있겠는가.
아! 스님의 시가 선림의 한 뿌리로 삼기에 충분한데도 권미에 오히려 우리 당파8)의 한마디 말이 결여되어 있으니, 나는 이것이 너무도 애석하다. 또한 윗대의 지도림支道林9)으로부터 아래로 철 상인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노래, 청아한 글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만 임금과 부모와 스승과 벗에게 정성을 다한 자는 본 적이 없는데 스님께서는 이를 겸하셨으니, 스님은 진실로 방외의 선인이라 하겠다. 옛날 한문공韓文公10)은 여러 사대부들이 문창文暢11)에게 우리의 도(유교)로써 일러 주지 않는 것을 항상 근심하면서도 서문을 써서 주었는데, 이제 내가 어찌 유독 무심할 수 있으리오.
그리하여 오늘 문소聞韶12)의 김정대金鼎大가 서문을 짓고 쓴다.

009_0487_c_01L賛揚於文字間㦲師之詩足可
009_0487_c_02L爲禪林一根柢而卷尾尙欠吾黨中一
009_0487_c_03L余甚惜之抑又上自支道林下至
009_0487_c_04L澈上人佳吟淸製不知其幾許而未
009_0487_c_05L甞見慻慻於君親師友間者師則兼之
009_0487_c_06L師實方外善人也昔韓文公常患諸
009_0487_c_07L搢紳不以吾道告文暢作序而贈之
009_0487_c_08L余烏獨無心然㦲是日聞韶金鼎大序
009_0487_c_09L而書

009_0487_c_10L{底}雍正十年香山普賢寺開刊本 (서울大學校
009_0487_c_11L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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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등산하고 청담을 나눌 때면(蠟屐談麈) : 납극蠟屐은 시를 지으며 산천을 유람한다는 뜻이다. 남조南朝 송宋의 사영운謝靈運이 밀랍을 발라 반질반질한 나막신을 신고 등산을 하며 시를 지었던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담주談麈는 고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이다. 옛날에 청담淸談을 하던 사람들이 고라니 꼬리털로 만든 먼지떨이를 들고 다녔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2. 2)월저月渚(1638~1715) : 조선 후기 승려로 법명은 도안道安이다. 9세에 출가하여 천신天信의 제자가 되었고, 금강산에 들어가 풍담 의심楓潭意諶(1592∼1665) 문하에서 휴정休靜의 밀전密傳을 참구하였으며, 화엄학華嚴學과 삼교三敎에 두루 통하였다. 1664년(현종 5) 묘향산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자 화엄종주華嚴宗主라 찬양하며 수많은 청중이 모였다. 『조선불교통사』 상편 2 p.408에 따르면 허정 법종虛靜法宗은 스무 살 무렵에 묘향산으로 월저 대사께 참례하고 대장경을 섭렵하였다고 한다.
  3. 3)설암雪庵(1651∼1706) : 조선 후기 승려로 법명은 추붕秋鵬이며, 대흥사大興寺 13대종사大宗師 중 제5 대종사다. 10세에 출가하여 종안宗安의 제자가 되었고, 구이 선사九二禪師에게서 경론經論을 배웠다. 이후 월저 도안을 찾아가 의기투합하여 여러 날을 담론한 뒤, 도안의 의발을 전수하였다. 대흥사 백설당白雪堂에 주석하며 화엄학을 강의하였다. 『조선불교통사』 상편 2 p.408에서 “(허정 법종은) 월저 대사의 상수제자인 설암으로부터 현묘한 지의旨意를 듣고 인가를 받았다.”라고 하였다.
  4. 4)개사開士 : ⓢ bodhisattva의 의역이다. 정도正道를 열어 중생을 인도하는 사부士夫란 뜻이다. 고승이나 훌륭한 재가자의 호칭으로도 쓰인다.
  5. 5)풍담楓潭(1592~1665) : 조선 후기 승려로 법명은 의심義諶이다. 편양鞭羊에게 입실하여 청허의 법맥을 이었다.
  6. 6)청명에 쓴 시 : 〈한식寒食〉이란 제목의 시가 2편 수록되어 있다.
  7. 7)상로출척霜露怵惕 : 가을에 서리가 내려 초목의 잎이 모두 떨어지면 이것을 보고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서글피 사모함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서 “가을에 서리가 내려 군자가 이것을 밟으면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8. 8)우리 당파(吾黨) : 유가儒家를 뜻한다.
  9. 9)지도림支道林(314~366) : 도림道林은 자이고, 법명은 지둔支遁이다. 중국 동진東晋 스님으로 당시의 명사들과 두루 교류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진 애제哀帝가 즉위하자 동안사로 가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을 강하고, 태화 1년에 오산塢山에서 53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10. 10)한문공韓文公 : 당唐나라의 문장가인 한유韓愈를 말한다. 문공文公은 시호다. 당시 대표적인 배불론자였다.
  11. 11)문창文暢 : 한유와 같은 시대 승려이다. 한유가 문창에게 써 준 서문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가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에 수록되어 있다.
  12. 12)문소聞韶 : 의성義城의 옛 이름이다.
  1. 1){底}雍正十年香山普賢寺開刊本 (서울大學校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