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충허대사유집(沖虛大師遺集) / 冲虛大師文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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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허대사유집虛大師遺集
충허대사문집 서冲虛大師文集序
충허 대사 책공册公1)이 남방에 교종을 열자 남방의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 귀의하였으며, 명성이 자자해 용상대덕들의 교초翹楚2)가 되고 그 문장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다는 칭찬이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공자의 무리라, 길이 같지 않으면 함께 도모하지 않는다.3) 그러나 문장을 좋아하는 성정이라, 일찍이 그 문장을 한번 읽어 보고 싶었지만 여태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러다 이제 스님의 문도인 보한普閑이 스님의 유집을 들고 나를 찾아와 교정하는 일을 부탁하였고 더불어 권두에 붙일 서문을 청하였다. 그렇게 우리 집 문턱을 밟은 것이 한 달에 30일이었으니, 그의 정성은 진실로 가상하였다. 결국 그의 뜻을 외롭게 할 수 없어 수락하여 읽고 나서는 간단히 바로잡고 다듬고 삭제하고 교정하였으며, 드디어 시 한 수와 서書ㆍ서序ㆍ기記ㆍ잡저雜著ㆍ제문祭文ㆍ모연문募緣文 등에서 빼어난 것들을 약간만 선택해 2권으로 만들었다.
대저 시는 문장만 못했으니, 스님 역시 영남 사람이기에 습관 때문에 그랬으리라. 그는 문장에 있어서는 재주가 뛰어나고 기상이 거침없으며 선택한 소재가 넓고 부리는 힘도 깊었으니, 역시 기원祇垣4)의 거벽巨擘5)이요 선림禪林의 일보逸步6)라 하기에 충분하였다.
내 듣기로, 부도인浮屠人7)은 환술에 능하고 기예가 많다8)고 하였다. 그래서 동한東漢에서 시작된 이래로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무본無本9)의 시와 회소懷素10)와 고한高閑11)의 초서가 있게 되어 유가의 칭찬을 받았고, 송나라 때에는 육일옹六一翁12)이 역시 비연祕演의 문집에 서문을 쓴 일이 있고13) 종고宗杲14)의 『서장書狀』이 겨우겨우 교문敎門에 전해져 오고 있다. 동방에서는 불씨의 가르침이 승국勝國15) 때 가장 왕성하였다. 그런데도 도선道詵16)이 감여堪輿17)로 명성을 떨치고, 선탄禪坦18)의 무리가 시에 능한 것으로 칭찬받았을 뿐이다. 우리 조선에서는 400년 동안 문교文敎가 크게 밝고

010_0324_c_01L[冲虛大師遺集]

010_0324_c_02L1)冲虛大師文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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冲虛大師册公闢敎宗於南方南方之
010_0324_c_05L學佛者咸歸其門名聲盖蔚然爲龍
010_0324_c_06L象之翹楚其文章亦有鉅麗之稱云吾
010_0324_c_07L孔子徒也道不同不相謀然性喜文
010_0324_c_08L嘗欲一讀者文而未果焉今師之
010_0324_c_09L徒普閑謁余以師之遺集旣託以校讎
010_0324_c_10L之役又請其弁卷之文踵吾門者
010_0324_c_11L五六其誠誠可嘉也竟不可以孤其意
010_0324_c_12L則受而卒業略加櫽括删校遂取詩一
010_0324_c_13L首書序記雜著祭文募緣文凡若干首
010_0324_c_14L釐之爲二卷大抵詩不如文師亦嶺人
010_0324_c_15L習使之然歟其於文也才俊而氣逸
010_0324_c_16L材博而用力深亦足爲祇垣之巨擘
010_0324_c_17L林之逸步也吾聞浮屠人幻而多藝
010_0324_c_18L然自東漢以來至唐始有無本之詩
010_0324_c_19L素高閑之草書見稱於儒家在宋六一
010_0324_c_20L亦有秘演文集序而宗杲之書狀
010_0324_c_21L僅傳於敎門東方則佛氏之敎㝡盛於
010_0324_c_22L勝國然道詵以堪輿鳴禪坦之徒
010_0324_c_23L能詩稱而已我國家四百年來文敎鴻
010_0324_c_24L{底}丁巳春窩主人書跋本(高麗大學校所藏)

010_0325_a_01L불씨의 도는 갈수록 쇠약해져 연화대에서 불자를 세우고 교의 바다에서 구슬을 찾는 자들이 거의가 다 여염집 볼품없는 집안 출신들이다. 그러다 유독 광릉光陵(세조) 치세에 명문가 출신의 신미信眉19)와 학조學祖20)라는 자가 있어 비록 선종을 자칭하기는 했지만 역시 문장을 후대에 전한 업은 없었다. 그들은 적멸로 도를 삼고 청정으로 종을 삼아 기예를 달가워하지 않은 자들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책공만이 명현의 후예로서 저 집안의 임제 종풍을 계승하고 법의 강물에 자비의 배를 띄우고는 교단에서 소의 귀를 잡아당기고 양초梁楚의 명성21)을 능히 차지하였다. 제생諸生22) 시절에 이미 육경六經23)ㆍ사자四子24)와 백가의 서적을 엿보았고, 승려가 된 이후에는 경첨瓊籖 및 옥급玉笈25)의 비밀과 패엽貝葉26) 및 단서丹書27)의 문장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마땅히 그가 성취한 바는 벙어리 염소나 소대가리 같은 부류28)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처럼 그는 문장이 탁월하면서도 무미건조한 태나 소순蔬筍의 기미29)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고의로 그런 것이겠는가. 오래도록 익힌 것을 잊기 어려워 옛 전철을 따라 밟은 자가 아닐까? 또한 퇴지退之30)가 말한 ‘이름은 승려지만 행실은 유자인 자’31)가 아닐까?
이제 그가 다른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 보니, 그 말이 가히 서글펐다. 보한 역시 나에게 “스승께서는 평생 해타咳唾32)를 아끼지 않으시어 제방을 유행하는 그의 문도와 환속한 자들이 각자 보배로 삼고 있습니다. 다만 보한이 수집한 것은 이처럼 보잘것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뜻을 살펴보니 개탄스러움이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면 스님의 문장을 충분히 전할 수 있다. 등림鄧林33)의 가지 하나이고 솥(禁鼎)의 고기 한 점34)임을 역시 알아보는 자가 있을 것이다. 보한이여, 돌아가 이것을 판각하라. 그대 스승이 잊히지 않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유년(1789) 여름에 강재剛齋 이승연李承延35) 쓰다.

010_0325_a_01L佛氏之道愈益衰微竪拂蓮臺
010_0325_a_02L珠敎海者率皆閭閻緇柩之族而獨在
010_0325_a_03L光陵之世有信眉學祖者出於名家
010_0325_a_04L稱禪宗亦無文章傳後之業彼以寂滅
010_0325_a_05L爲道淸淨爲宗不屑於萟 [1] 者邪是未
010_0325_a_06L可知也惟册公以名賢之裔襲渠家臨
010_0325_a_07L濟之宗泛慈航於法水執牛耳於敎壇
010_0325_a_08L克擅梁楚之聲而在諸生時已窺六經
010_0325_a_09L四子百家之書薙緇以後瓊籖玉笈之
010_0325_a_10L貝葉丹書之文無不涉獵宜其所
010_0325_a_11L成就異乎啞羊牛頭之流也然其爲文
010_0325_a_12L無枯澹之態蔬筍之氣此曷故焉
010_0325_a_13L熟處難忘而舊轍循蹈者邪抑亦退之
010_0325_a_14L所謂墨名而儒行者耶今讀其與人徃
010_0325_a_15L復書其言可悲也閑又爲余言師之
010_0325_a_16L平生不惜咳唾其徒之遊于方變于俗
010_0325_a_17L各自以爲寶惟閑之所裒輯若是
010_0325_a_18L草草觀其意若有慨然于斯者使師
010_0325_a_19L之文章如可傳也鄧林之一枝禁鼎
010_0325_a_20L之片臠亦有知者焉閑乎歸而剞劂之
010_0325_a_21L爾師之不朽其在斯也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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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夏剛齋李承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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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충허 대사 책공册公 : 지책旨冊(1721~1785)을 말한다. 조선 후기 승려로 흥양興陽 이李씨이며, 자는 응문應文이고, 충허冲虛는 호이다. 자세한 행장은 이 문집의 「충허당 기실」에 수록되어 있다.
  2. 2)교초翹楚 : 무리 가운데 뛰어난 인재를 일컫는 말이다. 『詩經』 「周南」 ≺漢廣≻의 “삐죽삐죽 솟은 잡목 중에서 특별히 가시나무를 벤다.(翹翹錯薪。 言刈其楚。)”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3. 3)길이 같지~도모하지 않는다 : 『論語』 「衞靈公」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4. 4)기원祇垣 : 기원祇園이라고도 한다. 중인도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舍衞城 남쪽에 있던 정사로 석존 재세在世 시의 대표적 정사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는 불가佛家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5. 5)거벽巨擘 : 으뜸이 되는 엄지손가락처럼 무리에서 빼어난 자를 일컫는 말이다.
  6. 6)일보逸步 :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주를 지닌 대가를 일컫는 말이다. 남조 송나라 유협劉勰의 『文心雕龍』에서 사부辭賦의 대가인 굴원屈原과 그의 제자 송옥宋玉을 칭해 “굴송의 거침없는 걸음은 아무도 뒤따를 자가 없다.(屈宋逸步。 莫之能追。)”라고 하였다.
  7. 7)부도인浮屠人 : 불교인과 같은 뜻이다. 부도浮屠는 ⓢBuddha의 음역이다.
  8. 8)내 듣기로~기예가 많다 : 한유韓愈의 「送高閑上人序」에서 “내 듣기로 부도인은 환술을 잘하고 기능도 많다고 하였는데, 한 상인도 그런 환술을 통달했는지는 내가 알 수 없다.(吾聞浮屠人善幻多技能。 閑如通其術則吾不能知矣。)”라고 하였다.
  9. 9)무본無本 :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승려였을 때의 법명이다. 자字는 낭선浪仙이며, 한유의 권유로 환속하여 장강주부長江主簿를 지냈으므로 가장강賈長江이라 부르기도 한다.
  10. 10)회소懷素(725~785) : 당나라 승려.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연구하여 동시대의 장욱張旭과 함께 초서草書로 이름이 높았다. 술에 취하여 흥이 오르면 붓을 놀려 물이 흐르듯이 유연한 초서, 즉 광초狂草를 즐겨 썼다고 한다. 필적으로 『自敍帖』ㆍ『聖母帖』ㆍ『藏眞帖』 등의 법첩이 남아 있다.
  11. 11)고한高閑 : 당나라 승려로 역시 초서에 능하였다. 한유가 쓴 「送高閑上人序」가 있어 그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다.
  12. 12)육일옹六一翁 : 구양수歐陽脩의 별호이다. 육일이란 곧 장서藏書 1만 권, 『集古錄』 1천 권, 거문고 1장張, 바둑 1국局, 술 1호壺와 노인老人 1인을 합해서 붙인 호칭이다.
  13. 13)비연祕演의 문집에~일이 있고 : 구양수가 「釋祕演詩集序」를 썼다.
  14. 14)종고宗杲(1088~1163) : 송나라 승려로 자는 담회曇晦, 호는 묘희妙喜이다. 17세에 출가하여 담당 무준湛堂無準의 시자가 되었고, 담당 선사가 입적하자 원오 극근圓悟克勤을 찾아가 대오하고 분좌설법分座說法을 하였다. 우승상 여공呂公의 주청으로 자의紫衣와 불일대사佛日大師라는 호를 받았고, 1162년 대혜선사大慧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시호는 보각선사普覺禪師이다. 저서로 『正法眼藏』 6권을 비롯한 『廣錄』 80권이 전하며, 서간을 모은 『書狀』이 있다.
  15. 15)승국勝國 : 멸망한 전대의 왕조, 즉 고려를 가리킨다.
  16. 16)도선道詵(827~898) :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이다. 영암 출신으로 동리산桐裏山 혜철惠徹의 법을 이었고,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우리나라 음양풍수설陰陽風水說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도선의 설에 따라 산천의 지세를 점쳐서 결정한 자리에 세워진 절이나 탑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 한다. 『道詵祕記』ㆍ『松岳明堂記』ㆍ『道詵踏山歌』ㆍ『三角山明堂記』 등이 저서로 알려져 있다.
  17. 17)감여堪輿 : 풍수를 보는 지리술地理術을 말한다.
  18. 18)선탄禪坦 : 고려 승려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호는 환옹幻翁이며, 시를 잘 지었고 거문고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사대부들과 교류가 많았으며, 이제현李齊賢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저술로는 권수 미상의 『海東釋禪坦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東文選』 권94에 강석덕姜碩德이 찬한 시집의 서序가 수록되어 있으며, 시 5수가 전해지고 있다.
  19. 19)신미信眉 : 조선 승려로 본명은 수성守省이며, 본관은 영동이다. 아버지는 옥구진沃溝鎭 병사였던 김훈金訓이며, 동생이 김수온金守溫이다. 세종을 도와 내원당內願堂을 궁 안에 짓고 법요法要를 주관하였으며, 한글 창제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종은 선왕의 뜻을 이어 그를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를 경애하였고, 왕위에 오르자 그를 왕사처럼 존경하였다. 1461년 6월 세조의 명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전佛典을 언해하여 간행할 때 이를 주관하였고, 1464년 세조가 속리산으로 행차하였을 때는 사지斯智ㆍ학열學悅ㆍ학조學祖 등과 함께 대설법회를 열었다. 세조가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20. 20)학조學祖 : 조선 승려로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등곡燈谷ㆍ황악산인黃岳山人이다. 김영추金永錘의 형이자 김계행金係行의 조카이다. 신미ㆍ학열 등과 함께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미 등과 함께 간경도감의 언해 작업에 참여하였고 당대에 웅문거필雄文巨筆의 문호로 칭송되었다. 왕실의 귀의를 받아 세조 이후 중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불사를 일으켰다.
  21. 21)양초梁楚의 명성 : 지역 명사를 칭하는 말이다. 양초梁楚는 한나라 때의 지방 이름이다. 『史記』 「季布列傳」에서 조구曹丘가 계포季布에게 읍을 하고 “초인楚人들의 속담에 ‘황금 1백 근을 얻는 것이 계포에게 한 번 승낙을 얻는 것만 못하다’고 하니, 족하足下께서는 어떻게 양초 지방에서 이런 명성을 얻었습니까?(楚人諺曰。 得黃金百。 不如得季布一諾。 足下何以得此聲於梁楚閒哉。)”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22. 22)제생諸生 :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명ㆍ청 때 성省에서 실시하는 각종 시험에 합격한 다음 부府, 주州, 현縣의 교육 기관에 들어가 공부하는 자들을 제생이라 하였다.
  23. 23)육경六經 : 유가의 기본 경서인 『詩經』ㆍ『書經』ㆍ『周易』ㆍ『禮記』ㆍ『春秋』ㆍ『樂記』를 말한다. 『樂記』 대신에 『周禮』를 꼽기도 한다.
  24. 24)사자四子 : 사서四書, 즉 『論語』ㆍ『孟子』ㆍ『大學』ㆍ『中庸』을 말한다.
  25. 25)경첨瓊籖 및 옥급玉笈 : 옥 상자에 담긴 귀중한 예언과 비밀이라는 뜻으로 흔히 도교 전적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26. 26)패엽貝葉 : 패貝는 ⓢpattra의 음역으로 패다라貝多羅ㆍ패다貝多라고 하며, 다라수多羅樹의 잎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 종이 대신에 글자를 쓰는 데 사용하였다. 패엽은 범어의 음역과 그 번역이 중복 사용된 단어이다. 전하여 불경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27. 27)단서丹書 : 주나라 문왕文王이 출생할 때 붉은 새가 물고 왔다는 신서神書이다. 후대에는 단사丹砂로 쓴 귀중한 책이라는 뜻으로 흔히 신선술의 비방이나 진언眞言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28. 28)벙어리 염소나~같은 부류 : 제대로 변론도 못하는 무지한 승려들을 비하한 표현이다.
  29. 29)소순蔬筍의 기미 : 야채와 죽순을 먹고 고기는 섭취하지 않는 승려들의 시문이나 언사에 나타나는 특유의 말투와 분위기를 말한다. 소식蘇軾이 도잠陶潛의 시를 평하여 “한 점 소순의 기미도 없다.”라고 하였다. 『宋人軼事彙編』.
  30. 30)퇴지退之 : 한유韓愈의 자이다.
  31. 31)한유의 「送浮屠文暢師序」에서 “사람 중에는 실로 이름은 유자이지만 행실은 승려인 자가 있다. 이름을 물어보면 (유자가) 맞지만 그 행실을 따져 보면 (유자가) 아니니, 이런 자와 어울려 노닐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이름은 승려지만 행실은 유자인 자가 있다. 이름을 물어보면 (유자가) 아니지만 그 행실을 따져 보면 (유자가) 맞으니, 이런 자와는 어울려 노닐 수 있다.(人固有儒名而墨行者。 問其名則是。 校其行則非。 可以與之遊乎。 如有墨名而儒行者。 問其名則非。 校其行則是。 可以與之遊乎。)”라고 하였다.
  32. 32)해타咳唾 : 뛰어난 시문詩文을 일컫는 말이다. 신선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침이나 가래가 모두 구슬이 되는 것처럼 내뱉는 대로 아름다운 문장이 된다는 뜻한다. 『莊子』 「秋水」에서 “그대는 기침하며 내뱉는 저 침을 보지 못하는가. 큰 것은 주옥처럼 작은 것은 안개처럼 뿜어 나오곤 한다.(子不見夫唾者乎。 噴則大者如珠。 小者如霧。)”라고 하였다.
  33. 33)등림鄧林 : 고대 신화 속에 나오는 신령스러운 복숭아나무 숲 이름이다. 과보夸父가 태양과 경주를 하려고 해의 그림자를 쫓아다니다가 지친 나머지 쓰러져 죽었는데, 그가 내버린 지팡이 위에 시체의 썩은 물이 흘러내려 지팡이가 복숭아나무로 변하면서 사방 천 리에 복숭아나무 숲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列子』 「湯問」.
  34. 34)솥(禁鼎)의 고기 한 점 : 큰 솥에 끓인 국은 고기 한 점만 맛보아도 전체 맛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淮南子』 「說林訓」.
  35. 35)이승연李承延(1720~1806) : 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연안이고, 초자初字는 태보台甫, 자는 석여錫予이다. 조부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에게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다. 문집으로 『剛齋遺稿』가 전한다.
  1. 1){底}丁巳春窩主人書跋本(高麗大學校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