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충허대사유집(沖虛大師遺集) / 冲虛大師集後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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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허대사집 후서冲虛大師集後叙
나는 부도浮屠36)와 노는 것을 좋아해 부도인들과 서로 술잔을 돌린 일이 많았다. 게다가 괄허 취여括虛取如37)나 남악 영오南嶽永旿, 춘파 탄일春坡綻一, 응허 민관應虛僶官 같은 이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횟수가 잦았던 자들이다. 여러 사람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시대 선교의 종장과 웅장하고 화려한 솜씨를 가진 문사치고 한결같이 충허 대사 지책에게 사양하고 귀의하지 않는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나는 나이 열아홉에 천주산天柱山38)에서 스님을 한번 만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너무 어려서 그분의 온축한 바를 두드려 그분이 가진 바를 드러낼 수 없었기에 책공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다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홀연히 다시 망연자실하였으니, 마치 완사종阮嗣宗이 반령 꼭대기에서 나무꾼의 휘파람 소리를 들은 것과 같았다.39) 그렇게 매일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경계로 마음만 달려가다가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말았으니, 나는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기유년(1789) 여름에 스님의 문도 보한普閑이 스님의 글을 가지고 찾아와 집안 어른을 뵙고는 교정과 윤문, 증의를 부탁하고 더불어 서문으로 삼을 한마디를 구하였다. 집안 어른께서는 보한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그 문집에서 시 한 수와 약간의 문장을 선별해 2권으로 분류하셨다. 또 거기에서 잘못된 곳은 바로잡고, 넘치는 부분은 삭제하고, 그 글자와 문장을 윤색하고는 서문을 써서 돌려보내면서 “보한이여, 『충허집』은 전해질 것이고 사라지지 않으리라.”라고 하셨다.
무릇 유엄惟儼40)과 비연祕演은 송나라 고승이시다. 그리고 두 분 모두 문집이 있고 구양자歐陽子41)의 서문을 얻어 후세에 전해졌다. 아, 유엄과 비연의 시와 문장이 비록 웅장하기는 하나 만약 석만경石曼卿42)을 벗하지 않고 구양자의 서문을 얻지 못했다면, 송나라 강정康定(1040~1041)ㆍ경우景祐(1034~1038) 연간에 유엄과 비연이라는 고승이 있었고 볼만한 문집이 있다는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어찌 알았으리오. 이제 충허 대사의 문집

010_0325_b_02L冲虛大師集後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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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好與浮屠遊多與浮屠人相酧復如
010_0325_b_05L括虛取如南嶽永旿春坡綻一應虛
010_0325_b_06L僶官㝡其尤者也數人者甞爲余言
010_0325_b_07L當世禪敎宗師文士鉅麗者莫不一辭
010_0325_b_08L歸之於冲虛大師旨册余年十九時
010_0325_b_09L遇師於天柱山中時尙少未得叩其所
010_0325_b_10L發其所有固不識册公爲何人
010_0325_b_11L聞數人者之言忽復惘然自失若阮嗣
010_0325_b_12L宗聞樵者嘯於半領之上日馳想於水
010_0325_b_13L流花開之境而師已示寂矣余未甞不
010_0325_b_14L爲不爲之恨焉己酉夏師之徒普閑
010_0325_b_15L以師之卷來謁余家大人請校讎删證
010_0325_b_16L仍乞一言爲序家大人嘉閑之誠選其
010_0325_b_17L獨詩一文若干分爲二卷又正其
010_0325_b_18L删其衍潤色其字句序而歸之
010_0325_b_19L冲虛集之可傳而不朽矣夫惟儼秘演
010_0325_b_20L宋之高僧而俱有集得歐陽子序
010_0325_b_21L傳於後世惟儼秘演者詩文雖鉅
010_0325_b_22L若不友石曼卿而不得不得歐陽子之
010_0325_b_23L則後世何以知宋之康定景祐間
010_0325_b_24L高僧惟儼秘演者有集可觀哉今冲虛

010_0325_c_01L역시 후세에 전하기에 충분해졌으니, 어찌 스님에게 행운이 아니고 보한에게도 행운이 아니겠는가. 이를 서문으로 삼는다.
기유년(1789) 여름에 연성延城 이경유李敬儒43) 쓰다.

010_0325_c_01L之集亦足以傳後世豈非爲師之幸
010_0325_c_02L而爲閑之幸也耶是爲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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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夏延城李敬儒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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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36)부도浮屠 : ⓢBuddha의 음역으로 원래는 부처님을 뜻하였으나 후대에는 승려, 불교도, 승려들의 유골을 모신 석탑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2. 37)괄허 취여括虛取如(1720~1789) : 조선 승려로 속성은 여余씨이다. 14세 때 문경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乘寺에서 능파凌波를 은사로 삭발하였고, 진속 선사眞俗禪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환암幻庵에게 선을 배우고, 담숙曇淑의 법을 이었다. 나이 69세, 법랍 57세로 경상북도 운봉사雲峯寺(현 김룡사金龍寺) 양진암養眞庵에서 입적하였다. 저서로 『括虛集』 1권이 있다.
  3. 38)천주산天柱山 :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에 소재한다.
  4. 39)완사종阮嗣宗이 반령~것과 같았다 : 상대의 진가를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뜻이다. 사종嗣宗은 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의 자字이다. 완적이 소문산蘇門山에서 은사隱士 손등孫登을 만나 옛날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사항과 서신도기栖神導氣의 방법 등을 물었다. 손등은 대꾸도 하지 않고 길게 휘파람만 불며 떠나갔는데 그 휘파람 소리가 너무도 청아하여 난鸞ㆍ봉鳳의 소리와 같았다고 한다. 『晉書』 ≺阮籍傳≻.
  5. 40)유엄惟儼(751~834) : 당나라 승려로 석두 희천石頭希遷의 법을 이었다. 본문에서 송나라 고승이라 한 것은 착오이다. 또한 구양수와 교류한 일도, 문집을 낸 일도, 문집의 서문을 유자가 쓴 일도 없다. 유엄과 교류한 유자로는 한유의 제자인 상서尙書 이고李翶가 유명하다. 『景德傳燈錄』 권7에 그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6. 41)구양자歐陽子 : 구양수를 지칭한다.
  7. 42)석만경石曼卿 : 만경曼卿은 석연년石延年의 자이다. 송나라 진종 때 대리시승大理寺丞을 지냈으며, 문장이 기운이 넘치고 시에 뛰어났다고 한다. 승려 석비연釋祕演과 막역한 시우詩友가 되어 함께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湘山野錄』 권하.
  8. 43)이경유李敬儒(1750~1821) : 조선 후기 시인ㆍ문장가. 자는 덕무德懋이고, 호는 임하林河이다. 본관은 연안이며, 출신지는 경상북도 상주군이다. 1792년(정조 16) 음보蔭補로 참봉이 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박천博泉 이옥李沃―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강재剛齋 이승연李承延으로 이어진 가학의 계보를 전승하고 평생 문학에 뜻을 바쳤다. 그리고 추수사秋水社와 죽우사竹雨社라는 시화詩話 동인회를 만들고, 시계詩契를 형성하여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향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시 비평집인 『滄海時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