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충허대사유집(沖虛大師遺集) / 冲虛大師遺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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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허대사유집 서冲虛大師遺集序
내가 예전에 기목군基木郡44) 수령으로 있을 때 군내 명봉산鳴鳳山의 절집을 유람하면서 괄허括虛 상인上人과 친하게 지냈다. 상인은 탁 트인 가슴이 맑고 넓으며 폐부를 훤히 들여다보고 비백飛白45)이 훌륭하며 문사가 거침없는 것이 작자作者46)의 기상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인재가 났다고 탄복하며 장차 세상에 쓰이리라 여겼었다. 그런데 죽어서 목석과 함께 묻혀 버렸으니, 퇴지退之의 말처럼 물에 빠진 부처와 노자라 돌아오지 못할 자이기에 참으로 한스럽다.
금년 여름, 내가 병으로 서울에 체류하고 있을 때였다. 보한과 성여性如라는 두 스님이 상산商山47)에서 그들의 스승 충허 대사의 유집을 가져와 나의 친구 이태보李台甫48)의 글을 받고는, 그의 소개로 나에게 찾아와 문집에 붙일 한마디를 청하였다. 그 문집을 대강 훑어보았더니 그의 문장은 일찍이 일정한 법도에 따라 이리저리 다듬은 적이 없음에도 연원이 깊어 샘물이 널리 퍼지는 듯하고 폭풍이 몰아치고 번개가 내려치듯 하였으며, 답답함에 분개할 때는 산마루 피리, 들판의 젓대가 목이 메어 중도에 끊기듯 하였다. 이 무슨 기이한 곡조와 거침없는 기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공적 가운데서 나왔기에,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대략 그의 선파禪派를 고찰해 보면 괄허 상인이 바로 그의 동문이자 법질法姪로서 일찍이 스님에게 수학하였으니, 그 문장의 원류에는 다 유래가 있었던 것이다.49) 나는 이에 인재가 묻혀 버린 한스러움뿐 아니라 매우 불쌍히 여기는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구나.
신라와 고려 때에는 성도聖道(유교)가 미약하고

010_0325_c_06L冲虛大師遺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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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徃宰基木郡甞遊郡內鳴鳳山僧舍
010_0325_c_09L與括虛上人相善上人恢踈淸曠
010_0325_c_10L見肺腑善飛白文辭宏放有作者氣
010_0325_c_11L余竊歎人才之生若將爲世用而卒之
010_0325_c_12L石木俱晦如退之所謂淪溺佛老而不
010_0325_c_13L返者誠可恨今年夏余病滯京師
010_0325_c_14L普閑性如二僧自商山携其師冲虛大
010_0325_c_15L師遺集受吾友李台甫書介來請余
010_0325_c_16L爲弁卷一言盖閱其集則其爲文
010_0325_c_17L甞賛之於繩尺剪栽之間而淵深而泉
010_0325_c_18L博也颷馳而電擊也感憤欝塞則山
010_0325_c_19L笳野笛之幽咽而中斷也是何奇調逸
010_0325_c_20L出之跌坐空寂之中而能動人若是
010_0325_c_21L盖考其禪派則括虛上人乃其同
010_0325_c_22L門法侄而嘗受學於師宜其文辭源流
010_0325_c_23L有自來也余於是不但爲人才淪溺之
010_0325_c_24L而抑有所甚悲者焉羅麗之際

010_0326_a_01L불교가 치성하였다. 그래서 세족의 큰 집안에서도 왕왕 관면冠冕을 훼손하고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고아하게 여겼으며 사람들 역시 그런 이들을 부러워하였으니, 그 습속이 점점 더러워져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조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대부라면 모두 선왕의 도를 밝게 닦고, 삼척동자까지도 우리 유가를 존숭하고 이단을 몰아내야 함을 모르지 않았다. 저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고서 공문空門에 자취를 의탁하는 자들은 간간이 궁색한 시골 볼품없는 백성들의 어리석은 무리들 가운데서나 나왔지, 비녀를 찌르고 띠를 두른 높은 집안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스님은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가훈을 복습하였으며, 또한 일찍이 정문程文50)을 다듬어 과거에 응시하였고 당세에 발탁되어 벼슬하려는 뜻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의관을 훼손하고 모습을 바꿔 인륜 상도를 저버리고 공허空虛로 도피한 것이 어찌 그가 그러고 싶어서였겠는가. 아마도 어찌할 수 없는 바가 있어서 그리했으리라. 그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부모님을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고 의탁할 곳 없는 신세를 서글퍼하였으니, 결국은 죽지 않을 방도로 그리했으리라. 또한 산 사람으로 자처한 적이 없다고 한 것에서 그의 슬픔과 고통, 상심과 두려움을 엿볼 수 있으니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심정이었으리라. 아, 상고시대에는 사민四民51)이 그 업에 안주하며 그 음식을 즐겼고, 거두지 못한 백성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더라. 이제 스님으로 하여금 이런 극단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의 재앙을 책임질 자가 어찌 없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선종에 들어간 이후에는 고결한 계행과 넓고 아득하며 현묘한 가르침으로 종풍을 널리 드날려 그 문도들에게 사모하고 기뻐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그가 후진을 인도했던 규범과 인용했던 의법義法이 대부분 우리 유가의 올바른 윤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이른바 이름은 승려지만 행실은 유자인 자가 아니겠는가. 내가 이미 스님의 뜻을 불쌍히 여겼고, 또 진중한 태보台甫의 편지가 있었기에 그를 위해 이와 같이 말한다.
해좌산인海左散人 정범조丁範祖52) 짓다.

010_0326_a_01L道微佛敎熾世族大家徃徃毁冠冕
010_0326_a_02L入山林自視以爲高而人亦爲之艶羨
010_0326_a_03L其習俗漸瀆所使然也我朝則不然
010_0326_a_04L大夫皆脩明先王之道而三尺童子
010_0326_a_05L不知吾儒之爲尊異端之可黜彼薙髮
010_0326_a_06L被緇托跡空門者間出窮閭小民蚩蚩
010_0326_a_07L之類而簪縷顯族則無是焉師以爲
010_0326_a_08L名門遺裔服襲家訓亦嘗治程文應擧
010_0326_a_09L有進取當世之志一日毁服變形棄倫
010_0326_a_10L常而逃空虛豈其所欲哉盖有所不得
010_0326_a_11L已而爲之者矣觀其與人徃復書哀怙
010_0326_a_12L [2] 之早喪 [3] 身世之靡托畢竟爲救死
010_0326_a_13L之計而亦未甞以生人自處云者可見
010_0326_a_14L其悲苦恫怛不能自己之心矣嗟夫
010_0326_a_15L古之世四民安其業樂其食無一夫
010_0326_a_16L之不獲今也師使 [4] 至於此極者豈無
010_0326_a_17L任其咎者歟雖然入禪以後戒行高潔
010_0326_a_18L玄敎弘長闡揚宗風爲其徒所慕悅
010_0326_a_19L而其規誨後進動引義法率不出吾儒
010_0326_a_20L倫理之正豈所謂墨名而儒行者非耶
010_0326_a_21L余旣悲師之志又有台甫之書之重
010_0326_a_22L爲之言如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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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左散人丁範祖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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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허대사유집 후서冲虛大師遺集後叙
부도씨浮屠氏에 충허 대사 책공이 있으니, 그의 선조는 흥양興陽 사람이다. 스님은 명현의 후예로서 시詩와 예禮의 문호에서 생장하여 주공周公과 중니仲尼의 도를 수십 년이나 배우다가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고서 유가를 버리고 불가에 귀의한 자이다. 이것이 어찌 스님이 좋아서 한 것이겠는가. 아마도 어쩔 수 없어서였으리라.
스님은 불교를 배우고 나서는 현묘한 가르침을 드리우고 법의 종지를 천명하며 서쪽에서 온 가르침을 펼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았다. 그의 문도는 일찍이 수백 명을 헤아렸고, 성품이 문장을 좋아하여 대가들의 문장 연구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저술은 성현의 글을 근본으로 하고 부도의 말씀을 사이사이에 섞었는데, 환술에 능하고 기예가 많다고 명성이 자자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원근의 문사들이 모두 그와 교류하기를 좋아하였다. 당시 우리 선친 역시 스님과 서로 좋게 지냈으니, 그 오고 간 편지와 주고받은 작품이 모두 문집에 실린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스님께서 선친께 답장한 편지를 보고는 그의 명성과 행적을 사랑해 그 문장을 여러 차례 익힌 지 오래였는데, 얼마 전 스님의 문도인 보한 상인이 스님의 문집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교정해 주기를 청하고는 또 서문 한마디를 부탁하였다. 내가 이에 비로소 그의 원고 전부를 살펴볼 수 있었는데, 그 재주가 준수하고 빼어나며 문사가 웅장하고 거침없어 이름난 승려나 시 잘하는 석씨들과 비견할 바가 아닌 점이 있었으니, 소위 기원秪園의 거벽巨擘이요 법문의 종장宗匠이라던 말이 진실로 허황되지 않았다. 게다가 강재 이장李丈53)과 해좌 정 공54)께서 또 그를 위해 권두에 서문을 써 주셨으니, 스님은 분명 후세에 잊히지 않으리라.
아, 당나라 전顚 장로는 창려昌黎가 있어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났고55) 송나라 연演 스님56)은 구양수를 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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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326_c_01L그 문장이 크게 전해졌다. 그렇다면 지금 스님께서는 살아서는 당세 문장 잘하던 선비들과 벗하고 죽어서는 두 어른의 웅장하고 화려한 필적을 얻은 것이 거의 창려에게 있어서의 태전이나 구양수에게 있어서의 비연과 같은데, 나같이 지리멸렬한 이가 어찌 그 틈에 군더더기를 붙일 수 있겠는가. 그저 보한의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보한의 청을 존중하여 그저 몇 마디 붙여 돌려보낸다.
갑인년(1794) 여름에 진산晉山 강봉흠姜鳳欽 짓다.
  1. 44)기목군基木郡 : 지금의 영주와 풍기 일대를 말한다. 신라 때에는 기목진基木鎭이라 하고, 고려 초에는 기주基州라 부르다가 현종이 길주吉州에 귀속시켰고, 명종이 감무監務를 두어 뒤에 안동부安東府에 다시 귀속시켰고, 공양왕이 다시 감무를 두어 안동부의 속현 은풍殷豐을 예속시켰다. 조선 시대에 다시 기천현감基川縣監으로 고쳤고, 뒤에 문종의 태胎를 은풍현殷豐縣에 안치하게 되자 마침내 두 현의 이름을 따서 풍기豐基라 하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新增東國輿地勝覽』.
  2. 45)비백飛白 : 팔서체八書體의 하나로 필세가 나는 듯하고 필획이 비로 쓴 것처럼 보이는 서체이다. 후한 때 채옹蔡邕이 만들었다고 한다.
  3. 46)작자作者 : 전인미답의 경지를 창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禮記』 「樂記」에서 “작자를 성聖이라 하고, 술자述者를 명明이라 한다.(作者之謂聖。 述者之謂明。)”라고 하였다.
  4. 47)상산商山 : 상주尙州를 말한다.
  5. 48)이태보李台甫 : 강재 이승연을 지칭한다.
  6. 49)대략 그의~있었던 것이다 : 이 부분이 정범조의 문집인 『海左先生文集』 권19에는 “그의 스승과 벗을 고찰해 보면 괄허 상인과 법문의 같은 파였으니, 그 문사의 거침없음이 거의 비슷한 것이 이상할 게 없었다.(考其師友。 則與括虛上人爲法門同派。 無怪其文辭宏放畧相似也。)”로 되어 있다.
  7. 50)정문程文 : 과거 볼 때 쓰던 일정한 법식의 문장을 말한다.
  8. 51)사민四民 :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을 말한다.
  9. 52)정범조丁範祖(1723~1801) :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이다. 시율과 문장에 뛰어나 사림의 모범으로 명성을 얻었고, 또 이로 인하여 영조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1759년(영조 35)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176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공조참의ㆍ풍기군수ㆍ양양부사ㆍ풍천부사를 역임하였고, 1792년 대사헌에 임명되고 예조참판ㆍ개성유수ㆍ이조참판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다. 1800년 정조가 죽자 정종행장찬술당상正宗行狀撰述堂上으로 차정差定되었고, 이듬해 실록청찬집당상으로서 『正宗(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으로 『海左集』 39권이 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0. 53)강재 이장李丈 : 강재 이승연을 지칭한다.
  11. 54)해좌 정 공 : 해좌 정범조를 지칭한다.
  12. 55)전顚 장로는~더욱 드러났고 : 전 장로(顚老)는 태전 선사太顚禪師를 지칭하고, 창려昌黎는 한유의 봉호이다. 배불론자였던 한유는 원화 14년(819)에 「論佛骨表」를 상소하여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을 때 태전 선사와 깊은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13. 56)연 스님(演師) : 석비연釋祕演을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