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道行般若經卷第一

ABC_IT_K0006_T_001
005_0677_a_01L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제1권
005_0677_a_01L道行般若經卷第一

후한(後漢) 월지국(月支國) 삼장 지루가참(支婁迦讖) 한역
김수진 번역
005_0677_a_02L後漢月支國三藏支婁迦讖譯

1. 도행품(道行品)
005_0677_a_03L摩訶般若波羅蜜道行品第一

부처님께서 나열기성(羅閱祇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계시니, 사리불과 수보리(須菩提) 등을 비롯한 큰 비구승의 숫자도 헤아릴 수 없고, 미륵보살과 문수사리보살 등을 비롯한 마하살보살(摩訶薩菩薩)의 숫자도 헤아릴 수 없었다.
005_0677_a_04L佛在羅閱祇耆闍崛山中摩訶比丘僧不可計諸弟子舍利弗須菩提等摩訶薩菩薩無央數彌勒菩薩文殊師利菩薩等
매월 보름마다 계(戒)를 설할 때였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모든 보살들이 모였으니 반야바라밀을 설하여 보살들로 하여금 마땅히 배워서 이루도록 하여라.”
005_0677_a_08L月十五日說戒時佛告須菩提今日菩薩大會因諸菩薩故說般若波羅蜜菩薩當是學成
그때에 사리불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수보리가 모든 보살들을 위해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한 것일까?’
005_0677_a_10L舍利弗心念言今使須菩提爲諸菩薩般若波羅蜜自用力說耶持佛威神說乎
수보리가 곧 사리불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꿰뚫어 보고 사리불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제자가 설하는 법과 성취하는 법은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법 안에서 배우는 것으로서 한결같이 깨달음이 있고 법에 어긋남이 없으며 널리 펼치어 서로 가르치고 널리 펼치어 서로 성취하니 끝내 이 법안에서 서로 다투는 일이 없으며, 법을 설할 때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스스로 뉘우치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005_0677_a_13L須菩提知舍利弗心所念便語舍利弗言敢佛弟子所說法所成法皆持佛威神何以故佛所說法法中所學皆有證皆隨法展轉相教展轉相成法中終不共諍何以故時而說法莫不喜樂者自恣善男子·善女人而學
005_0677_b_02L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저로 하여금 모든 보살들을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설하여 보살들로 하여금 반드시 배워서 이루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저로 하여금 보살들에게 법을 설하도록 하셨습니다만 보살이라는 이름에 집착하기가 쉽습니다. 보살이라는 이름에는 실체가 없으니 어떤 대상에서도 보살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어서 보살이라는 존재는 끝내 보이지 않으며, 보살이라는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도 없고 보살도 보이지 않고 그 장소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보살들에게 반야바라밀을 가르치고 반야바라밀을 설해서 보살들이 이를 듣고 마음이 게으르지 않게 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며 무서워하지 않게 하고 어려워하지 않게 하며 놀라워하지 않게 하고 보살들로 하여금 반드시 이를 배우게 하고 여기에 머무르게 하며, 반드시 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내도록 하되 마음속으로는 정작 이러한 것을 보살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원래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005_0677_a_19L須菩提白佛言佛使我爲諸菩薩說般若波羅蜜菩薩當從中學成佛使我說菩薩菩薩有字便著菩薩有字無字何而法中字菩薩了不見有法菩薩菩薩法字了無亦不見菩亦不見其處何而有菩薩當教般若波羅蜜作是說般若波羅蜜菩薩聞是心不懈怠不恐不怯不難不畏菩薩當念作是學當念作是住當念作是學入中心不當念是菩薩何以有心無心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원래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십니까?”
005_0677_b_08L舍利弗謂須菩提云何有心無心
수보리가 말했다.
“마음이란 있다고 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고, 붙잡을 수도 없고, 있는 곳을 알 수도 없습니다.”
005_0677_b_09L須菩提言心亦不有亦不亦不能得亦不能知處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마음은 있다고 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고, 붙잡을 수도 없고, 있는 곳도 알 수 없습니까? 그리고 이와 같이 있다고 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라면 유심(有心)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심(無心)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005_0677_b_10L舍利弗謂須菩提何而心亦不有亦不無亦不能得亦不能知處者如是亦不有不無亦不有有心亦不無無心
수보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유심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심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005_0677_b_13L須菩提言亦不有有心亦不無無心
사리불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부처님을 위하고 부처님을 배우면서도 정작 육신과 지혜가 공(空)하다고 설한 사람은 없었는데, 육신과 지혜가 공함을 설하시니, 최고이시고 제일이십니다. 보살이 이 가르침을 따라 아유월치(阿惟越致:不退轉位)1)를 얻고 공(空)한 이치를 배우는데, 마침내 반야바라밀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아라한법(阿羅漢法)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지니고, 반드시 지켜야 하고, 벽지불법(辟支佛法)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지니고, 반드시 지켜야 하며, 보살법(菩薩法)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지니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해서 보살은 그대로 따라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005_0677_b_14L舍利弗言善哉須菩提爲佛學佛而學者不說空身慧空身慧而說最第一薩從是中已得阿惟越致學字終不復失般若波羅蜜如是菩薩以在般若波羅蜜中住欲學阿羅漢法當聞般若波羅蜜當學當持當守欲學辟支佛法當聞般若波羅蜜當學當持當守欲學菩薩法當聞般若波羅蜜當學當持當守何以故般若波羅蜜法甚深菩薩如學
005_0677_c_02L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보살의 마음은 붙잡을 수도 없고, 있는 곳을 알 수도 없으며 어느 곳에서도 볼 수가 없습니다. 보살의 반야바라밀은 말로 미칠 수가 없고, 보살이라는 이름은 말로 미칠 수가 없으며, 또한 보살은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에 끝내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나오는 일도 없고 들어가는 일도 없고 머무르는 일도 없고 멈추어 서는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라는 이름에서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머무르는 일도 없고 멈추어 서는 일도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설할 적에 보살이 듣고서 마음이 게으르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으며,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신속히 아유월치(阿惟越致)의 지위(地位)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다 알아 다시는 반야바라밀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005_0677_b_24L須菩提白佛言熟念菩薩心不可得亦不可知處不可見何所是菩薩般若波羅蜜不能及說亦不能逮說菩薩字菩薩無有處處了不可得亦無而出亦無如入亦無如住亦無如止何以故薩字了不可得故無如住無如止是說般若波羅蜜菩薩聞是心不懈不難不恐不畏以入阿惟越致中悉了知不可復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색(色)에 머무르는 것도 온당치 않고, 통상(痛痒:受)과 사상(思想:想)과 생사(生死:行)와 식(識)에 머무르는 것도 온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색에 머물러서 행하는 정신 작용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머물러서 행하는 정신 작용은 온당한 정신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니, 혹시 그 가운데에 머무르는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당치 못한 정신 작용 때문이니, 이렇게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며,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보살은 살운야(薩芸若:一切智)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005_0677_c_10L菩薩行般若波羅蜜色不當於中住痛痒思想生死識不當於中住何以住色中為行識住痛痒思想生死識中為行識不當行識設住其中者為不隨般若波羅蜜教何以故行識是為不行般若波羅蜜不行者薩不得薩芸若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005_0677_c_17L舍利弗謂須菩提薩當云何行般若波羅蜜得般若波羅蜜
005_0678_a_02L수보리가 말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색을 받아들이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색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식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느냐 하면 그림자처럼 붙잡을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어떤 이름이나 존재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며, 이러한 까닭에 삼매(三昧)에는 끝이 없고 바른 형태도 없어서 아라한과 벽지불로서는 미칠 수가 없습니다.
005_0677_c_19L須菩提言菩薩行般若波羅蜜色不受痛痒思想生死識不受不受色者為無色不受痛痒思想生死識爲無識般若波羅蜜不受何以故不受如影無所取無所得故不受薩行般若波羅蜜一切字法不受故三昧無有邊無有正諸阿羅漢支佛所不能及
사리불이시여, 살운야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생각을 가지고 살운야를 바라보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가령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은 끝내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떤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살운야조차도 믿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6근(根)의 신상(身相)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떤 수도하는 사람이 불법을 믿고, 불법을 믿은 뒤로도 소승도(小乘道)를 지녔습니다. 그러므로 불도(佛道)에 들어와서 그 가르침대로 어떤 대상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색도 받아들이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또한 깨닫지도 않고 도를 이루지도 않고 지혜도 보지 않았으며, 안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밖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그 밖의 어떤 것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았으며, 또한 안의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밖의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또한 어떤 곳에서도 벗어나지 않고 배움으로써 불법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속속들이 깨달은 뒤에는 정작 이 법으로부터 물러나서 어떤 존재도 열반과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
보살은 어떤 존재에도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안과 밖에서도 존재를 보지 않아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거나 따르는 일이 없으니, 어느 누구도 존재를 붙잡을 수 없으며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며, 또한 열반이라는 생각도 할 수도 없습니다.
005_0678_a_03L復次舍利弗薩芸若不受何以故薩不當持想視薩芸若設想視者為不了為如餘道人不信薩芸若何以反謂有身[6]正使餘道人信佛信佛反持小道入佛道中入佛道中已不受色痛痒思想生死識不受不受已亦未曉尚未成亦不見慧亦不於內見慧亦不於外見慧亦不於餘處見慧亦不於內痛痒思想生死識見亦不於外痛痒思想生死識餘處見慧亦不於餘處脫以學成就佛了從法中以脫去謂法等一泥洹薩莫作是行莫內外視法吁與般若波羅蜜等一切無所受無所從誰得無所持無所收亦無所泥洹想
005_0678_b_02L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반야바라밀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색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받아들이지 않고, 중도(中道)도 받아들이지 않고, 완전한 열반과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18불공법(不共法)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보살이 이미 반야바라밀에 들어가서 행할 때는 ‘반드시 어느 곳을 보고 있는지, 이 반야바라밀은 어느 곳에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며, 또한 반야바라밀 안에서는 어떤 존재도 붙잡을 수 없고 있는 처소도 알 수 없다.이러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이라고 일컫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듣고도 게으르지 않고 겁내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이와 같이 깨달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005_0678_a_18L故菩薩般若波羅蜜亦不受色痛痒思想生死識亦不受亦不中道般泥悉具十種力四無所畏佛十八事是故菩薩般若波羅蜜菩薩已入般若波羅蜜中行當作是視何所是般若波羅蜜在何所般若波羅蜜中法了不能得了不能知處是故般若波羅蜜菩薩當作是念聞是不懈不却不恐不畏不難知是菩薩不離般若波羅蜜菩薩當了知如是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어떤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을 깨닫는가 하면 색은 본래 색을 여의었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본래 식을 여의었으며, 반야바라밀도 본래 반야바라밀을 여의었다는 사실을 알면 됩니다.”
005_0678_b_05L舍利弗謂須菩提菩薩何因曉般若波羅蜜色離本色痛痒思想生死識離本識般若波羅蜜離本般若波羅
수보리가 말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須菩提言如是
사리불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설사 이들로부터 벗어나 있더라도 살운야에 스스로 다가섭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보살은 설사 이들로부터 벗어나 있더라도 살운야에 스스로 다가섭니다. 왜냐하면 살운야는 태어남과 죽음에도 의지하지 않고 이를 벗어남에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보살은 성불(成佛)에 빨리 다가섭니다. 그리고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살운야의 안에서 아무런 걸림도 없습니다.”
005_0678_b_09L舍利弗言善哉菩提菩薩設使出是中便自致薩芸若須菩提言如是菩薩出是中便自致薩芸若何以故薩芸若無所從生無所從生如是菩薩疾近作佛菩薩行般若波羅蜜於薩芸若中無所罣
사리불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보살이 정진하면서 그러한 말을 한다면 설사 색을 따라가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색이라는 마음을 내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색을 관찰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색이라는 마음을 없애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색이 텅 비었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인식하여 붙잡고자 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행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인식하는 마음을 내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인식함을 관찰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인식함을 없애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인식함이 텅 비었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니, 이러한 보살은 도리어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며, 이름에 움직이는 이는 반야바라밀을 지키지 못하고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못하니, 만약에 생각을 움직이는 사람이 보살을 수호한다면 결코 그 뒤를 좇아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005_0678_b_15L舍利弗言善哉菩薩精進作是語設使行色為行想設生色行為行想設觀色行為行想設滅色行為行設空色行為行想設識行立欲得為[14]行想痛痒思想生死識行為行想生識行為行想觀識行為行想滅識行為行想空識行為行想如是菩薩為反行想作是守行者為不守般若波羅蜜為不行般若波羅蜜若想行菩薩護行當莫隨其中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005_0678_b_24L舍利弗謂須菩提菩薩當云何行般若波羅蜜
005_0678_c_02L수보리가 말했다.
“색을 따라가는 일도 하지 않고, 색이라는 마음을 내는 일도 하지 않고, 색을 관찰하는 일도 하지 않고, 색을 없애려는 일도 하지 않고 색이 텅 비었다고 하는 일도 하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인식하는 일도 하지 않고, 인식함을 내는 일도 하지 않고, 인식함을 관찰하는 일도 하지 않고, 인식함을 없애는 일도 하지 않고, 인식함이 텅 비었다고 하는 일도 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보는 일도 없고 실행하는 일도 없고 또한 보는 일이 없이 실행하며, 실행하는 일이 없다고 보는 일이 없어야 하고, 또한 실행하는 일도 없으며, 실행하는 일을 그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유래하는 근본이 없어서 그 실체를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이름자와 존재에 대해서 이름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러한 까닭에 삼매는 끝이 없고, 바로 잡으려는 일이 없으며,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이라도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보살마하살로서 삼매를 따르는 이는 하루 빨리 성불(成佛)하여 부처님의 위신력을 가집니다.”
005_0678_c_02L須菩提言不行色不生色行不觀色不滅色行不空色行不痛痒思想生死識行不生識行不觀識行不滅識行不空識行不行色不色想行色生行不色觀行不識滅行不識空亦無見亦無行亦無見行無行無亦復無行亦無止行如是為無見何以故一切法無所從來亦無所持菩薩摩訶薩一切字法不受字是故三昧無有邊無有正諸阿羅漢辟支佛所不能及知菩薩摩訶薩隨三昧疾得作佛持佛威神
수보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보살들은 모두 아유월치라는 이름자를 얻었으니, 앞의 과거불(過去佛) 때에 이미 성불하여 삼매를 따르면서도 정작 삼매를 보지도 않고 삼매라는 생각도 갖지 않고 짐짓 삼매를 지어내지도 않고 삼매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지도 않고 삼매에 앉아 있다는 생각도 있지 않고 나의 삼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러한 법을 따르는 이에게는 아무런 의심도 없습니다.”
005_0678_c_14L須菩提說是菩薩皆得阿惟越致字前過去佛時得作佛隨三昧亦不見三昧亦無有三昧想亦不作三昧亦不念識三亦不想識坐三昧亦不言我三昧已隨是法者無有疑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느 곳에선가 삼매를 따라 실행하여 보살이 이미 아유월치라는 이름자를 얻어 앞의 과거불 때에 성불하였다면 삼매가 있는 곳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005_0678_c_19L舍利弗謂須菩何所三昧隨行菩薩已得阿惟越致字前過去佛時得作佛可得見三昧處不
수보리가 말했다.
“볼 수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선남자라 해도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005_0678_c_22L須菩提言不可得見也舍利善男子亦不知亦不了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왜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까?”
005_0678_c_23L舍利弗謂須菩提何以故不知不了
수보리가 말했다.
“삼매란 붙잡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고 또한 그 이름자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005_0678_c_24L須菩提言亦不得三昧亦無有三昧亦不得字
005_0679_a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내가 말한 것처럼 육신과 지혜가 공(空)한 것이 모든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며,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반야바라밀을 배운다고 한다.”
005_0679_a_02L佛言善哉須菩提如我所說空身慧作是為諸菩薩為隨般若波羅蜜教菩薩作是學為學般若波羅蜜也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천중천(天中天:부처님)이시여,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가리켜 반야바라밀을 배운다고 합니다.”
005_0679_a_05L利弗白佛言天中天菩薩學如是學般若波羅蜜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이와 같이 배우되 어떤 법을 배웁니까?”
005_0679_a_07L舍利弗問佛言如是為學何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배울 것이 없는 법을 배운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에도 정작 붙잡아 얻을 것이라고는 없기 때문이니, 결코 어린아이가 배울 때처럼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005_0679_a_08L佛言如是菩薩為學無所學法何以故法無所逮得莫癡如小兒學
사리불이 말씀드렸다.
“누가 이 법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舍利弗言誰能得是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까닭에 얻을 수 있는 법은 없으니, 결코 어린아이가 배울 때처럼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이름자에 의해서는 얻을 수가 없으며, 비록 배우고 익혀서 이 법으로 들어가고자 해도 거듭 어리석음에 빠질 뿐, 역시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법을 이루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이름자를 배우는 것은 색이어서 얻고자 한다면 얻을 수 있지만 정작 그러한 까닭에 생각대로 법을 깨닫거나 붙잡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깨닫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기 때문에 결국 법에 머무르지 못하고 오히려 육신이 있다고 주장하니 어린아이가 배울 때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005_0679_a_10L佛言所得是故得無所得法莫癡如小兒學者謂有字不能得欲學習入法中適為兩癡耳亦不知亦不曉亦不了何以故學字是色欲得是致是故不了法所念亦不逮如是不曉不信不於法中住[5]反呼有身是故癡如小兒學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가리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005_0679_a_17L舍利弗白佛言菩薩作是學為不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가리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고 한다. 부처는 이와 같이 배우지 않는 것으로 배움을 삼아 마침내 부처가 되는 것이다.”
005_0679_a_18L佛言作是學為不學佛不作是學為學佛得作佛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천중천이시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요술로 만들어낸 허깨비가 배운다면 부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
005_0679_a_19L須菩提言天中天若有問者是幻學佛得作佛或作是問當何以教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오히려 그대에게 묻겠으니 이에 답해 보거라. 수보리 그대가 생각하기에 허깨비와 색은 다르겠느냐, 다르지 않겠느냐? 허깨비와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다르겠느냐, 다르지 않겠느냐?”
005_0679_a_21L佛言我故自問若隨所報之於須菩提意云何幻與色有異無幻與痛痒思想生死識有異無
005_0679_b_02L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허깨비와 색은 다르지 않습니다. 색이 곧 허깨비이고 허깨비가 곧 색입니다. 그러므로 허깨비와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다르지 않습니다.”
005_0679_a_24L須菩提報佛言爾天中天幻與色無異也色是幻是色幻與痛痒思想生死識等無異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수보리여, 5음(陰)의 존재를 좇지 않고 생각을 일으킨다면 보살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005_0679_b_03L佛言云何須菩提所想等不隨法從五陰字菩薩
수보리가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천중천이시여, 보살이 배워서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곧 허깨비를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허깨비는 어떤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5음의 허깨비는 색과 같고, 색과 6쇠(衰)2)와 5음은 허깨비와 같습니다.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6쇠와 5음과 마찬가지입니다.”
005_0679_b_05L須菩提言如是天中天菩薩學欲作佛為學幻耳何以故者當持此所有當如持五陰幻如色六衰五陰如幻痛痒思想生死識作是語字六衰五陰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에 처음 배우는 보살[新學菩薩]이 이러한 말을 듣는다면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005_0679_b_09L須菩提白佛言若有新學菩薩聞是得無恐怖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에 처음 배우는 보살이 나쁜 스승을 따라 배운다면 겁내고 두려워하겠지만 훌륭한 스승을 따라 배운다면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005_0679_b_11L佛言設使新學菩薩惡師相得相隨或恐或怖與善師相得相隨不恐不怖
수보리가 아뢰었다.
“보살의 나쁜 스승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005_0679_b_13L須菩提言何所菩薩惡師者當何以知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존중하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보살의 마음을 버리고 아주 떠나가도록 가르치며 반대로 온갖 잡된 경전을 배우기를 마음에 즐거워하고, 잡된 경전을 따르도록 한다. 또한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법(道法)을 가르쳐서 이에 관한 것을 따르고 읊조리도록 권하며, 악마의 일을 설하여 이로 하여금 보살을 무너뜨리고 물러나도록 하며, 온갖 말로 나고 죽는 일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설하여 보살도(菩薩道)를 얻지 못하도록 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나쁜 스승이라고 한다.”
005_0679_b_14L佛言其人不尊重摩訶般若波羅蜜者教人棄捨去遠離菩薩心反教學諸雜經隨雜經心喜樂復教學餘經若阿羅漢·辟支佛道法教學是事勸乃令諷誦說魔事魔因行壞敗菩薩爲種種說生死勤苦菩薩道不可得是故菩薩惡師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보살의 훌륭한 스승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005_0679_b_21L須菩提白佛言何所菩薩善何行從知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존중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꾸준히 배워서 가르침을 이루도록 하며 악마에 관하여 말하되 악마를 물리치고 보호받는 방법을 알도록 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훌륭한 스승이라고 한다.”
005_0679_b_22L佛言其人尊重摩訶般若波羅蜜稍稍教人令學成教魔事令覺知令護魔是故菩薩善師也
005_0679_c_02L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천중천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보살이 되며, 보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005_0679_c_02L須菩提白佛言天中天何因爲菩薩何故正字呼菩薩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경전과 법을 빠짐없이 배우고 깨달아서 모두 다 아는 까닭에 보살이라고 부른다.”
005_0679_c_04L佛言諸經法悉學悉曉了知諸經法爾故字爲菩薩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모든 경전과 법을 빠짐없이 배우고 깨달아서 모두 다 아는 까닭에 보살이라고 부른다면 다시 마하살(摩訶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005_0679_c_05L菩提言悉曉了知諸經法爾故字菩何以故復呼摩訶薩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하살이란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가장 존귀한 까닭에 부르는 이름이다.”
005_0679_c_07L佛言摩訶薩天上天下最尊爾故字摩訶薩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듣기를 좋아합니다. 마하살이란 무슨 뜻입니까?”
005_0679_c_08L利弗白佛言我亦樂聞何以故爲摩訶薩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듣기를 좋아한다면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마하살의 뜻을 설명해 주리라. 마하살이란 스스로 모든 것을 분명히 보고 분명히 알아서 하늘 아래 온 시방의 중생과 대상들을 다 밝게 알고 있으니, 곧 사람들의 수명이 긴지 짧은지, 악한지 악하지 않은지, 즐거운지 즐겁지 않은지, 하고자 하는지 하고자 하지 않는지를 모두 알아보고 법을 설하되, 정작 여기에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마하살이라고 하느니라.”
005_0679_c_10L佛語舍利弗若樂聞者佛當爲若說之摩訶薩者悉自了見悉了知十方天下人十方所有悉曉了知人壽命知有惡無惡樂不樂有志無悉曉了知見爲說法如是無所著爾故字爲摩訶薩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도 마하살을 왜 마하살이라고 하는지 말해 보겠습니다. 이 보살의 마음과 같은 이는 어디에도 없고 어느 누구도 그 마음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도 이 마음에 도달할 수는 없으니 부처님의 마음이 곧 이것입니다.
마음에 집착이 없어서 마음에는 나가는 것도 없고 들어오는 것도 없으며, 설사 부처님의 마음이 나가는 것도 없고 들어오는 것도 없다고 해도 마하살은 거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마하살이라고 하며, 이와 같이 거룩한 이는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005_0679_c_15L須菩提白佛言請問摩訶薩者何所字摩訶薩設是菩薩心無有與等者無有能逮心者諸阿羅漢·辟支佛所不能及心佛心如是心無所著心無所出無所入設佛心無所出無所入爲無所著心爾故復爲摩訶薩正上無有與等者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의 마음에는 집착이 없습니까?”
005_0679_c_22L舍利弗問須菩提何因菩薩心無所著
수보리가 말했다.
“마음이 생겨난 적이 없기 때문에 집착이 없습니다.”
005_0679_c_23L須菩提言心無所生爾故無所著
005_0680_a_02L그때 빈기문타불(邠祁文陀弗)3)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마하승나승녈(摩訶僧那僧涅)4)과 대승(大乘)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도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러한 까닭에 마하승나승녈과 대승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005_0679_c_24L邠祁文陁弗白佛言何因呼菩薩摩訶僧那僧涅摩訶衍三拔致佛說號如是爾故爲摩訶僧那僧涅摩訶衍三拔致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무슨 까닭으로 보살마하살은 마하승나승녈을 실천하며, 보살마하살이 마하승나승녈을 실천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005_0680_a_05L須菩提復白佛言何因菩薩摩訶薩爲摩訶僧那僧涅何從知菩薩摩訶薩爲摩訶僧那僧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마음속으로 나는 반드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본래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요술쟁이가 요술을 부려 널찍한 빈터에 두 곳의 큰 성(城)을 세우고 그 안에 요술로 만든 사람들을 가득 채운 다음 이들의 목을 모두 자르는 것과 같으니, 수보리 그대가 생각하기에는 그 가운데 실제로 다치거나 죽는 이가 있겠느냐, 없겠느냐?”
005_0680_a_07L佛言菩薩摩訶薩心念如是我當度不可計阿僧祇人悉令般泥洹如是悉般泥洹是法無不般泥洹一人也何以本無故譬如幻師於曠大處化作二大城作化人滿其中悉斷化人頭於須菩提意云何寧有所中傷死者
수보리가 아뢰었다.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여 한결같이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니,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보살이 이러한 말을 듣고도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버리지 않고 그밖에 가르침마저 그대로 따른다면 이것이 마하승나승녈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005_0680_a_14L須菩提言菩薩摩訶薩度不可計阿僧祇人悉令般泥洹無不般泥洹一人也菩薩聞是不恐不畏不悉不捨去就餘道知是則爲摩訶僧那僧涅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건대 이러한 일은 결코 마하승나승녈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행하는 이는 살운야를 이룰 수도 없고 공양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생마저도 생겨난 적이 없다면 어떻게 마하승나승녈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색 그 자체는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으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 그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고 매여 있지 않고 풀려 있지 않습니다.”
005_0680_a_18L須菩提白佛言如我從佛聞念其中事如是不爲摩訶僧那僧涅何以故作是爲者無有作薩芸若無所供養人無作者爲何等所人作摩訶僧那僧涅色無著無縛無脫痛痒思想生死識無著無縛無脫
005_0680_b_02L빈기문타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색 그 자체는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으며, 토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 그 자체도 집착하지 않고 매여 있지 않고 풀려 있지 않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005_0680_a_24L邠祁文陁弗謂須菩提色無著無縛無脫痛痒思想生死識無著無縛無脫何謂
수보리가 말했다.
“색 그 자체는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으며, 사상과 생사와 식, 그 자체도 집착하지 않고 매여 있지도 않으며 풀려 있지도 않습니다.”
005_0680_b_03L須菩提色無著無縛無脫痛痒思想生死識無著無縛無脫
빈기문타불이 말했다.
“무엇 때문에 색 그 자체에는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으며 풀려 있지도 않다고 말씀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 그 자체도 집착하지 않고 매여 있지 않고 풀려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
005_0680_b_05L邠祁文陁弗言謂色無著無縛無脫何謂痛痒思想生死識無著無縛無脫
수보리가 빈기문타불에게 말했다.
“색 그 자체는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으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 그 자체도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집착하지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으며, 아득히 끝이 없는 까닭에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허공에는 집착함도 없고 매여 있음도 없고 풀려 있음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생겨나게 하지 않는 까닭에 집착함도 없고 매여 있음도 없으며 풀려 있음도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마하살의 마하승나승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005_0680_b_07L須菩提語邠祁文陁弗色如幻無著無縛無脫痒思想生死識如幻無著無縛無脫無有邊無著無縛無脫譬如空無著無縛無脫無所生無著無縛無脫故菩薩摩訶薩摩訶僧那僧涅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무엇을 가리켜 대승을 실천한다고 합니까? 그것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그 가운데에 머무르고 어떻게 그로부터 나오며 누가 그것을 완성할 수 있습니까?”
005_0680_b_12L須菩提白佛言何因爲摩訶衍三拔何所是摩訶衍從何所當住衍中何從出衍中誰爲成衍者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대승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어서 그 넓이와 끝을 알 수가 없다.”
005_0680_b_15L佛語須菩摩訶衍摩訶衍者無有正也不可得邊幅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대승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승은 과거의 세계와 현재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를 훌쩍 벗어나서 살운야의 가운데에 머무르니, 이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없고 이로부터 유래하는 것도 없다.”
“왜 그렇습니까? 천중천이시여.”
005_0680_b_17L須菩提問佛言我欲知衍從何所出生從三處出自致薩芸若中亦無有從中出生者亦無有甫當來出者何以故天中天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느 곳으로부터 생겨났다거나 또는 어디서부터 왔다느니 하는 두 가지 모두는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데, 대승이 생겨난 곳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
005_0680_b_20L佛言正使生甫當來出者假令有兩法者不可得法設不從得者復從何法出
005_0680_c_02L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승은 하늘 아래와 하늘 위의 모든 사람들을 훌쩍 벗어났기에 그 가운데 이에 비교될 만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승은 허공과 같으니 허공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많은 중생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승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많은 중생들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까닭에 대승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대승은 오는 때도 볼 수 없고, 가는 때도 볼 수 없으며 머무르는 곳도 볼 수 없고 끝간 곳도 볼 수 없으며, 귀로 들어 알 수도 없고, 눈으로 보아 알 수도 없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볼 수도 없으니 곧 천중천과 같으며, 이러한 까닭에 대승이라고 부릅니다.”
005_0680_b_22L須菩提白佛言摩訶衍於天上天下人中正過上無有與等者衍與空等如空覆不可復計阿僧祇人摩訶衍覆不可復計阿僧祇人爾故呼摩訶衍訶衍者亦不見來時亦不見去時不見住處亦不中邊見亦不於是聞亦無所見亦不於三處見字如是天中天爾故爲摩訶衍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바로 그러한 까닭에 대승이라고 한다.”
005_0680_c_07L佛言善哉菩提爾故爲摩訶衍
빈기문타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는 앞에서 수보리 존자를 시켜 반야바라밀을 설하게 하시더니 지금은 대승을 말하도록 하시는군요.”
005_0680_c_08L邠祁文陁弗白佛言尊者須菩提使說般若波羅蜜乃至說摩訶衍事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천중천이시여, 혹시 제가 반야바라밀에 대해 잘못 말한 것은 없습니까?”
005_0680_c_11L須菩提白佛言須菩提說般若波羅蜜得無過天中天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잘못이 없다. 핵심을 잘 말했다.”
005_0680_c_12L佛言若說般若波羅蜜不過也適得其中
005_0681_a_02L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보살은 이곳도 염두에 두지 않고 저곳도 염두에 두지 않고 중앙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색이 끝이 없기에 보살도 끝이 없으며, 색과 마찬가지로 보살도 미칠 수가 없고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보살도 미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데 어떻게 보살들에게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보살이란 그 모양을 편리한 대로 일컫는 이름인데 어떻게 천중천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다만 글자를 따라서 분별할 뿐이니 그 본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본래의 의미란 처소가 없는 것으로 처소를 삼고, 모양이 없는 것으로 모양을 삼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가 형상이 있는 존재라면 어떻게 색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색은 볼 수도 없고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디에 색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볼 수 없으며 보살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보살도 찾을 수가 없고 어떤 보살도 있지 않기에 끝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보살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보살은 결코 볼 수도 없고 있는 곳도 없고 끝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대상을 향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단지 글자만을 일컬어 보살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005_0680_c_13L須菩提言菩薩亦不念彼閒亦不於是閒念不無中央念色亦無有邊菩薩亦無有邊色與菩薩不可逮不可得一切菩薩不可得不可逮何所是菩薩般若波羅蜜當何從說菩薩都不可得亦不可知處當從何所說般若波羅蜜菩薩轉復相呼菩薩云何天中想如字耳何如爲意意無處處無形形意本是形法何等爲色色不可得見亦無有身是中何所有色者痛痒思想生死識識不可得見菩薩亦不可得見菩薩識了不知處處不可見一切菩薩了無有處了不可何所爲菩薩般若波羅蜜如是說菩薩都不可得見亦不可知處處無所有當從何所法中說般若波羅爾故字爲菩薩
이와 같이 글자와 모양은 원래부터 있지 않으며 글자의 모양 또한 원래부터 있지 않으니, 무엇을 가리켜 본래의 의미라고 할 것이며 뉘라서 글자의 의미만을 가지고 근본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본래의 의미에서 생겨난 의미에도 원래부터 모양이 없는데 무슨 까닭에 인식함을 붙잡을 수 없다고 합니까? 근본에 이르러도 역시 붙잡을 것은 없는데 무슨 까닭에 인식함이 있다고 합니까?
이와 같이 모든 존재의 모양에는 원래부터 근본이 있지 않고 근본이 없이 펼쳐져 있으며 어떤 존재도 이를 지어낸 이가 없고 근본이 없습니다. 본래부터 근본이 있지 않은데 마땅히 무엇에 근거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반야바라밀 역시 어느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며 보살 또한 붙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 혹시 보살의 길을 닦는 어떤 사람이 이러한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반야바라밀법을 실천하고 있는 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때에는 색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색은 생겨난 곳이 없으니 더 이상 색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통 색이 아닌 것들뿐이라면 이미 색은 없는 것이니, 이 역시 생겨난 곳이 없으며 그로부터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글자라는 것도 색이라는 존재로서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니,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색을 생각하여 그 안에 깊이 들어가는 일도 없고, 또한 이때에는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도 들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식도 생겨난 곳이 없으니 더 이상 식이라고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식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없고 식으로 들어가는 것도 없으며 색을 모두 살펴보아도 소유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005_0681_a_07L如是如是字想亦無字亦無想何所爲意意誰字意至本本意生意是無何因是識不可得持至本亦無所何因有識如是法形形亦無有本設無有本法亦無誰作亦無有本無有本當何從說般若波羅蜜亦無有異處亦無有本菩薩法亦無所得有行菩薩聞是不恐不畏不難則爲行般若波羅蜜行般若波羅蜜法熟思惟如是是時爲不入色何以故色無所生爲非色設爾非色爲無色亦無有生從其中無所得字爲色法中本無無是菩薩行般若波羅蜜法思惟深入法是時亦不入痛痒思想生死識何以故識無所生爲非識故亦不出識中亦不入識中法中計了無所有
005_0681_b_02L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수보리가 존재에 대해서 말한 것을 제가 들으니, 보살은 생겨난 곳이 없습니다. 보살이 실제로 생겨난 곳이 없다면 보살이 굳이 보살의 길에 나서서 고행을 감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설사 온 시방의 하늘 아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고 해도 어떻게 이러한 고통을 견디며 참을 수 있겠습니까?”
005_0681_a_24L舍利弗謂須菩提我聽須菩提所說法中事如是菩薩無所出生設菩薩無所出生者菩薩如用何等故謙苦行菩薩道設用十方天下人故何能忍是謙苦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나도 역시 보살이 이와 같은 고통을 감수하며 참아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보살의 길을 닦고자 한 것은 보살이 스스로 결심한 것이지, 내가 그러한 고통을 감수하도록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마음속으로 ‘내가 고통스러운 마음을 감수하며 참아내고자 하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이와 같이 온당치 않은 마음을 내게 되면 헤아릴 수 없이 아득히 많은 중생들을 이롭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을 평안하게 하고자 하거든 아비처럼 돌보고 어미처럼 늘 생각하고 자식처럼 여기고 자신의 육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돌보아야 하니, 보살은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지녀야만 합니다.
어떤 보살도 볼 수 없고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니 안팎의 어떤 존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하고 반드시 이와 같이 행해야 하니, 보살은 비록 이와 같이 행하더라도 고통을 감수하거나 참아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리불이시여,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살이 생겨난 것을 볼 수는 없으니, 보살은 결코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실제로 생겨난 곳이 없다면 살운야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말씀대로 살운야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설령 보살이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보살이 생겨난 것을 볼 수는 없으니, 보살은 결코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005_0681_b_06L須菩提語舍利弗我亦不使菩薩忍是謙苦也行菩薩之道者菩薩自念我不錄是謙苦行何以故菩薩心不當作是念言我忍謙苦心未曾有念是不當作是念爲用不可計阿僧祇人故欲令安隱念之如父念之如母念之如子念之如身無異常當慈念之菩薩當作是持心一切菩薩不見亦不知處如是內法外法當作是念當作是行菩薩作是行爲忍謙苦舍利弗設使如是所語薩不見出生菩薩爲無所出生舍利弗謂須菩提設使菩薩無所出生芸若亦無所出生須菩提言如是薩芸若無所出生舍利弗謂須菩提使菩薩如是所語菩薩不見出生薩爲無所出生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가령 보살이 실제로 생겨난 적이 없다면 살운야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005_0681_b_22L舍利弗謂須菩提使菩薩無所出生薩芸若亦無所出
수보리가 말했다.“말씀대로 살운야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須菩提言如是薩芸若無所出生
005_0681_c_02L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살운야가 생겨난 적이 없다면 모든 것을 얻는 선법(禪法)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005_0681_b_24L舍利弗謂須菩提設使薩芸若無所出生悉逮得禪亦無所生
수보리가 말했다.
“말씀대로 모든 것을 얻는 선법(禪法)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005_0681_c_03L須菩提言如是悉逮得禪亦無所生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살도 생겨나지 않으니 보살은 결코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살운야도 생겨난 적이 없으니 살운야의 가르침 역시 생겨난 적이 없으며, 모든 것을 얻는 완전한 선법(禪法)도 생겨난 적이 없으니 모든 것을 얻는 선법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살을 얻는다고 하고,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 살운야를 얻는다고 합니다.”
005_0681_c_04L舍利弗謂須菩提是中菩薩無所生菩薩爲無所生薩芸若亦無所生薩芸若法爲無所生悉逮得禪具足亦無所生逮得禪法亦無所生是爲無所逮得菩薩爲無所逮得薩芸若
수보리가 말했다.
“생겨남이 없는 법은 생겨난 적이 없으니 이로써 생겨남이 없는 법을 얻으며, 또한 생겨남이 없는 법은 아무것도 얻지 않습니다.”
005_0681_c_09L須菩提言無所生法逮得無所生無所生法逮得亦無無無所生逮得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가령 생겨남이 없는 법은 생겨남이 없음을 얻으며, 또한 생겨남이 없는 법은 아무것도 없는 것까지도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생겨남이 없음을 얻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가령 생겨남이 없음에 의해 생겨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생겨남이 없는 법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겨남이 없다고 합니다.”
005_0681_c_11L舍利弗謂須菩提設使無無無所生逮得無所生法是故無所生逮法
수보리가 말하였다.
“가령 생겨남이 없는 법이 아무것도 없으면 생겨남이 없을 터이니 그런 까닭에 생겨남이 없다고 합니다.”
005_0681_c_13L菩提言設使無所生法生復無無所生是故無所生逮得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수보리여, 가령 생겨남이 없는 것은 생겨남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겨남이 없으니, 수보리여, 이것이 생겨남이 없는 것입니다.”
005_0681_c_15L舍利弗謂須菩設使須菩提無所生無無所生故無所生須菩提無所生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생겨남이 없는 것은 곧 생겨남이 없는 것을 즐겨 듣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생겨남이 없이 즐기는 것이 바로 즐기는 것입니다.”
005_0681_c_17L須菩提語舍利弗無所生無所生樂聞舍利弗無所生樂是故爲樂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생겨남이 없이 듣는 것이 곧 듣는 것입니다.”
005_0681_c_19L須菩提語舍利無所生聞是爲聞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005_0681_c_20L舍利弗謂須菩聞是語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말하는 바가 없는 것까지 없앤 것을 말하는 바 없이 말한다고 하며, 이것을 즐기는 바 없이 즐긴다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까닭에 즐기는 것입니다.”
005_0681_c_21L須菩提語舍利弗無無所語是爲語無所語是爲樂無所樂故語是故樂
사리불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법에 있어 제일이십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질문을 받는 즉시 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005_0681_c_23L舍利弗言善哉須菩提於法中第一尊何以故如尊者須菩提隨所問則報
005_0682_a_02L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제자가 설하는 법은 온 시방 어디에도 변화하여 온 곳을 모르지만 질문에 대해 바로 답합니다. 왜냐하면 온 시방의 어떤 존재도 그것이 생겨나는 곳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005_0682_a_02L須菩提謂舍利弗弟子所說法十方亦不知所化來隨所問則解何以故十方法亦不知所生
사리불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그렇다면 보살은 어떤 법에 의해 태어납니까?”
005_0682_a_05L舍利弗言善哉須菩提從何所法中度菩薩
수보리가 말했다.
“반야바라밀에 의해 태어납니다. 만약에 이 법을 설할 때나 경을 읽을 때 보살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 보살은 마땅히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법을 따르더라도 이 법은 불어나지 않으며, 설령 따르지 않더라도 이 법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005_0682_a_06L須菩提言從般若波羅蜜中生說是法時若讀時菩薩信不菩薩當知之有隨是法不增不隨是法不減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 법을 따르더라도 이 법은 불어나지 않고, 설령 따르지 않더라도 이 법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 법을 따르면 모든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며, 이 법을 따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모두 보살마하살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법을 배워 그 법을 여의지 않기 때문입니다.”
005_0682_a_09L舍利弗謂須菩提隨是法亦不增不隨是法亦不減隨法教一切人隨法者不失一切人皆使得菩薩摩訶薩何以故一切人悉學法法俗如故
수보리가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사리불이여, 존재란 사리불께서 말씀하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생각을 여읨으로써 오히려 이것을 다 압니다. 중생의 성품이 텅 빈 까닭에 그 생각의 성품도 텅 비었으니 중생들을 다 알기는 어려우며 그 생각도 다 알기가 어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고 이와 같이 행해야만 합니다.”
005_0682_a_13L須菩提言善哉舍利弗所解法如舍利弗言無異何以故人身當諦念當作是了知人身若干種空其念亦若干種空當了知是人身難了知所念難了知舍利弗菩薩當作是學當作是行

2. 난문품(難問品)
005_0682_a_18L摩訶般若波羅蜜難問品第二
005_0682_b_02L
이때에 석제환인(釋提桓因)은 4만 명의 천자(天子)와 함께 이 모임에 앉아 있었고, 사천왕(四天王)들은 2만 명의 천자와 함께 이 모임에 앉아 있었으며, 범가이천(梵迦夷天)5)은 1만여 명의 천자와 함께 이 모임에 앉아 있었고, 범다회천(梵多會天)은 5천 명의 천자와 함께 이 모임에 앉아 있었다. 모든 천자들은 지난 세상의 공덕으로 인하여 그 광명이 눈부셨고, 부처님의 위신력과 부처님의 능력 덕분에 모든 천자들의 광명도 눈부시게 비추었다.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현명하신 수보리여, 이 모임에 가득 모인 천만 명의 천자들은 한결같이 수보리께서 설하시는 반야바라밀을 듣고 싶어합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005_0682_a_19L爾時釋提桓因與四萬天子相隨俱來共會坐四天王與天上二萬天子相隨來共會坐梵迦夷天與萬天子相隨來共會坐梵多會天與五千天子相隨來共會坐諸天子宿命有德光明巍巍持佛威神持佛力諸天子光明徹照釋提桓因白須菩提言者須菩提是若干千萬天子大會聽須菩提說般若波羅蜜云何菩薩於般若波羅蜜中住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구익[拘翼:석제환인(釋提桓因)의 다른 이름]이여, 천만 명의 천자들이 기꺼이 듣고자 한다니 나는 당연히 설할 것입니다.
005_0682_b_06L須菩提語釋提桓因言拘翼是若干千萬天子樂者聽我當說
나 수보리는 부처님의 위신력과 능력에 의지하여 모든 천자들에게 널리 반야바라밀을 설할 것입니다. 혹시 천자들 가운데 아직도 보살도를 닦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그러한 이들은 이제 빠짐없이 보살의 길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수다원(須陀洹)의 도(道)를 얻었다면 다시 보살도를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나고 죽는 길에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러한 이에게 보살의 길을 행하게 한다면 나는 크게 기뻐할 것이고, 끝내 공덕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며, 나는 그들로 하여금 바르고 존귀한 법인 중도(中道)를 얻어서 부처님의 자리에 오르도록 할 것입니다.”
005_0682_b_08L須菩提持佛威神持佛力廣爲諸天子說般若波羅蜜何所天子未行菩薩道其未行者今皆當行以得須陁洹道不可復得菩薩道以故閉塞生死道故正使是輩行菩薩道者我代其喜我終不斷功德法我使欲取中正尊法正欲使上佛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모든 보살들에게 권유하여 이와 같이 기꺼이 배우도록 하다니.”
005_0682_b_14L善哉須菩提勸樂諸菩薩學乃爾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 수보리는 당연히 부처님의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은혜를 갚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세상의 달살아갈(怛薩阿竭:如來)ㆍ아라하(阿羅呵:應供]ㆍ삼야삼불(三耶三佛:正徧智)들께서는 한결같이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여러 보살들을 위해 반야바라밀을 설하도록 하셨으며, 달살아갈께서도 그 가운데서 배워 스스로 부처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작용하는 까닭에 반드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오니, 저도 반야바라밀을 거듭 설할 것입니다. 보살은 마땅히 보살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니, 저는 또 기꺼이 이를 권유할 것입니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받았고 모두에게 기꺼이 권유할 것이니, 보살들은 머지않아 부처가 될 것입니다.”
005_0682_b_15L須菩提白佛言須菩提當報恩不得不報恩何以故過去時怛薩阿竭阿羅呵三耶三佛皆使諸弟子爲諸菩說般若波羅蜜怛薩阿竭時亦在其中學如是中法令自致作佛用是故當報佛恩我亦復作是說般若波羅蜜菩薩亦當復受菩薩法我復勸我皆受已皆勸樂已菩薩疾逮作佛
005_0682_c_02L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보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는지, 어떻게 공(空)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반야바라밀에 머무는지를 물었으니, 이제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구익이여, 보살마하살은 마하승나승녈과 대승[摩訶衍]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색에도 마땅히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성인(聖人)의 맨 처음 단계인 수다원(須陀洹)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사다함(斯陀含)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아나함(阿那含)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아라한(阿羅漢)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벽지불(辟支佛)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부처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색이든 색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수다원이든 수다원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사다함이든 사다함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아나함이든 아나함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아라한이든 아라한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벽지불이든 벽지불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부처이든 부처가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005_0682_b_23L須菩提言拘翼當所問者聽所問薩云何住般若波羅蜜中持空法菩薩於般若波羅蜜中住拘翼菩薩摩訶薩摩訶僧那僧涅摩訶衍三拔致色不當於中住痛痒思想生死識不當於中住須陁洹不當於中住斯陁含不當於中住阿那含不當於中住阿羅漢不當於中住辟支佛不當於中住佛不當於中住有色無色不當於中住有痛痒思想生死識無痛痒思想生死識不當於中住有須陁洹無須陁洹不當於中住有斯陁含斯陁含不當於中住有阿那含無阿那含不當於中住有阿羅漢無阿羅漢不當於中住有辟支佛無辟支佛不當於中住有佛無佛不當於中住
색이 무상하지 않다고 함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통상과 생사와 식이 무상하지 않다고 함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색이 고통스럽든 즐겁든 마땅히 거기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색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고통스럽든 즐겁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색이 내 것이 있든 없든 거기에는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내 것이 있든 없든 내 것이라는 데에는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005_0682_c_16L色無·無常不當於中住痛痒思想生死識無·無常不當於中住色若苦樂不當於中住色若好若醜不當於中痛痒思想生死識若苦若樂不當於中住痛痒思想生死識若好若醜不當於中住色我所非我所不當於中住痒思想生死識我所非我所不當於中住
005_0683_a_02L수다원의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성취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수다원의 가르침을 이미 성취했어도 거기에는 머무르지 않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수다원의 도는 아직도 일곱 번 태어나고 일곱 번 죽는 일을 되풀이하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수다원의 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다함의 도를 흔들림 없이 성취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고, 사다함의 도를 이미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다함의 도에는 아직도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 일을 되풀이하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사다함의 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나함의 도를 흔들림 없이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고, 아나함의 도를 이미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나함의 도를 성취하고 나면 문득 천상의 완전한 열반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아나함의 도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라한의 도를 흔들림 없이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고, 아라한의 도를 이미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의 도를 성취하고 나면 간단함이 없는 처소인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아라한의 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벽지불의 도를 흔들림 없이 성취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고 벽지불의 도를 이미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벽지불의 도를 성취하고 나면 문득 아라한의 도를 넘어 미처 부처의 도에 이르기도 전에 도중에서 완전한 열반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벽지불의 도에도 머무르지 않고, 부처의 도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헤아릴 수 없이 아득히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짓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나는 헤아릴 수 없이 아득히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완전한 열반에 들어 부처의 도에 머무르도록 할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의 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005_0682_c_24L須陁洹道不動成就不當於中須陁洹道成已不當於中住何以須陁洹道七死七生便度去是故須陁洹道不當於中住斯陁含道不動成就不當於中住斯陁含道成已不當於中住何以故斯陁含道一死一生便度去是故斯陁含道不當於中住阿那含道不動成就不當於中阿那含道成已不當於中住何以阿那含道成已便於天上般泥洹是故阿那含道不當於中住阿羅漢道不動成就不當於中住阿羅漢道成已不當於中住何以故阿羅漢道成已便盡是閒無處所於泥洹中般泥洹是故阿羅漢道不當於中住支佛道不動成就不當於中住何以辟支佛道成已過阿羅漢道不能及佛道便中道般泥洹是故辟支佛道不當於中住佛道不當於中住以故用不可計阿僧祇人故作功德以不可計阿僧祇人我皆當令般泥正於佛中住是故佛道不當於中住
사리불이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머무시는가?’
005_0683_a_22L舍利弗心念言佛當云何住
수보리가 사리불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바로 사리불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머무시고 어디에 머무십니까?”
005_0683_a_23L須菩提知舍利弗心所念便問舍利弗言何佛在何所住
005_0683_b_02L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머무시는 곳이 없습니다.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의 마음은 머무시는 곳이 없이 머무시니, 일체 현상이 서로 원인이 되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단계에도 머물지 않으시고, 일체 현상의 원인이 끊어져 더 이상 되풀이되는 일이 없는 단계에도 머물지 않으십니다.”
005_0683_b_02L舍利弗謂須菩提無所住怛薩阿竭阿羅呵三耶三佛心無所住止不在動處止亦無動處
수보리가 말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머물되 머문다고 할 수 없는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처럼 반드시 이와 같이 머물되 머물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005_0683_b_05L須菩提言如是如是菩薩當作是如怛薩阿竭阿羅呵三耶三佛住亦不可住當作是住學無所住
그때에 모든 천자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열차(閱叉:야차)들의 생각을 충분히 알 수 있어서 크든 작든 그 말을 모두 이해할 수가 있지만 수보리 존자의 말씀은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005_0683_b_07L是時諸天子心中作是念諸閱叉輩尚可知所念閱叉若大若小所語悉可了尊者須菩提所語了不可知
수보리가 이를 알아차리고 모든 천자들에게 말했다.
“이 말은 참으로 알기 어려우니 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005_0683_b_10L須菩提知諸天子心中所念謂諸天子言是語難了亦不可聞亦不可知
여기에서 모든 천자들은 다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무슨 뜻인지 알고는 싶지만 수보리 존자의 지금 말씀은 더욱 깊고 미묘하구나.’
005_0683_b_12L諸天子心中復作是念是語當解今尊者須菩提深入深知
수보리가 다시 이를 알아차리고 모든 천자들에게 말했다.
“이미 수다원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물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사다함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물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아나함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물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아라한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무르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벽지불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무르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부처님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무르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005_0683_b_14L須菩提復知諸天子心中所念語諸天子言已得須陁洹道證若於中住不樂因出去已得斯陁含道證若於中住不樂因去得阿那含道證若於中住不樂因去已得阿羅漢道證若於中住不樂因已得辟支佛道證若於中住不樂因去以得佛道證若於中住不樂因去
여기에서 모든 천자들은 다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수보리 존자의 설법이 이러하시니 도대체 어느 곳에서 수보리 존자와 같은 법사(法師)를 찾을 수 있을까?’
005_0683_b_21L諸天子心中復作是念尊者須菩提所說乃爾當復於何所更索法師如須菩提言者
005_0683_c_02L수보리가 이를 알아차리고 모든 천자들에게 말했다.
“법사라는 것은 허깨비와 같으니 내게서 법을 듣고자 한다면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005_0683_b_24L須菩提知諸天子心中所念語諸天子言法師如幻欲從我聞法亦無所聞亦不作證
이에 모든 천자들은 다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도대체 어떤 법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005_0683_c_03L諸天子心中復作是念云何法作是聞人如是
수보리가 다시 이를 알아차리고 모든 천자들에게 말했다.
“허깨비는 사람과 같고 사람은 허깨비와 같으니 나는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道)도 모두 허깨비와 같다고 말하며, 나아가 부처님의 도까지도 나는 허깨비와 같다고 말합니다.”
005_0683_c_04L須菩提知諸天子心中復作是念諸天子言幻如人人如幻乎我呼須陁洹·斯陁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悉如幻正使佛道我呼亦如幻
천자들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도조차도 허깨비와 같습니까?”
005_0683_c_08L天子語須菩提乃至佛道亦復呼如
수보리가 말했다.
“열반까지 허깨비와 같습니다.”
須菩提言乃至泥洹亦復如幻
천자들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열반까지도 허깨비와 같습니까?”
005_0683_c_10L天子問須菩提乃至泥洹泥洹及泥洹亦復如幻
수보리가 천자들에게 말했다.
“설령 열반을 초월하는 어떤 법이 있더라도 이 역시 허깨비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허깨비나 사람이나 열반이나 모두 허공과 같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005_0683_c_12L須菩提語諸天子設復有法出於泥洹亦復如幻何以故人泥洹賜如空無所有
사리불과 빈기문타라불(邠祁文陀羅弗:부루나)과 마하구사(摩呵拘私:마하구치라)와 마하가전연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떤 것이 반야바라밀의 모양이고 어떤 법들이 이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005_0683_c_14L舍利弗·邠祁文陁羅弗·摩呵拘私·摩呵迦旃延須菩提何等爲般若波羅蜜相從何等法中出
수보리가 말했다.
“이 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유월치의 보살이니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모양입니다. 이러한 설법을 들은 모든 제자들은 모든 것을 갖추어 신속히 아라한을 이룹니다.”
005_0683_c_17L須菩提報言從是法中出阿惟越致菩薩是爲般若波羅蜜相如是諸弟子聞法悉具足疾成阿羅
수보리가 말했다.
반야바라밀에서 말하는 모양은 이와 같으니 이 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 가운데에는 있는 것도 없고 들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기 때문이니, 가르침에 충실한 비구에게는 듣고자 하는 법이 없고 얻고자 하는 법도 없기에 이 법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005_0683_c_20L須菩提言般若波羅蜜中說相如從法中無所出何以故法中無所無所聞無所得如法比丘無所聞無所得法從是法中無所受
이에 석제환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수보리 존자께서는 설법으로 법보(法寶)의 비를 내려 주셨으니, 나는 차라리 꽃을 만들어 수보리 존자님의 머리 위에 뿌려드려야겠다.’
005_0683_c_23L釋提桓因心念言尊者須菩提所說爲雨法寶我寧可作華持散尊者須菩提
005_0684_a_02L석제환인은 곧 요술로 꽃을 만들어 수보리 존자의 머리 위에 흩뿌렸다.
수보리는 이를 알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꽃은 도리천(忉利天)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나는 전에도 이러한 꽃을 본 적이 있다. 이 꽃을 나의 머리 위에 흩뿌린 이는 이것을 요술로 만들어 냈음이 분명하다. 이 꽃은 요술로 만든 꽃이며 나무에서 피어난 것이 아니다. 석제환인이 만들어내어 나의 머리 위에 흩뿌린 이 꽃은 마음의 나무에서 피어난 것이지 나무에서 피어난 것은 아니다.’
005_0684_a_03L釋提桓因則化作華散須菩提上須菩提心則了知言是華不出忉利天上我曾見是華是華所出生散我上者化作耳化成耳此華化華亦不從樹出釋提桓因所作華用散我上從心樹出不從樹生也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수보리 존자여, 이 꽃은 비롯하는 곳 없이 생겨났습니다. 마음의 나무에서 피어난 것도 아닙니다.”
005_0684_a_08L釋提桓因謂須菩提言此華無所從出生尊者須菩提不從心樹出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께서는 이 꽃이 비롯한 곳 없이 생겨났고 또한 마음의 나무에서 피어난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꽃이라고 할 수가 없겠군요.”
005_0684_a_10L須菩提言拘翼說言是華無所從出生亦不從心樹爲非華
석제환인이 말했다.
“깊이 알고 설하시는 수보리 존자의 말씀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은 법을 설하시다니, 존자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배워야만 합니다.”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구익이여, 그 말씀은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법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배워야만 하니, 보살이란 바로 이러한 것을 배우는 이로서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는 배우지 않나니, 이것을 가리켜 불도를 배우고 살운야를 배운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배우는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많은 경전을 배운다고 하니, 색이 생겨나게 하는 것은 배우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생겨나게 하는 것도 배우지 않고, 다른 법을 받아들이는 것도 배우지 않으며, 받는 것도 배우지 않고 잃는 것도 배우지 않나니, 이를 가리켜 살운야를 배운다고 하고, 살운야를 낸다고 합니다.”
005_0684_a_12L釋提桓因言尊者須菩提深知說不增不減作是說法如尊者須菩提教也菩薩當作是學須菩提語釋提桓因拘翼是語無有異菩薩當作是學入法中菩薩作是學者不學須陁洹·斯陁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道爲學佛道爲學薩芸若道作是學者爲學不可計阿僧祇經卷不生色學不生痛痒思想生死識學不學受餘法亦不學受亦不學失學失爲學薩芸若爲出薩芸若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러한 것을 배우면 받아들이는 일도 없고 잃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살운야를 배운다고 하고 살운야를 낸다고 합니다.”
005_0684_a_22L舍利弗謂須菩提學是學亦不受亦不失爲學薩芸若爲出薩芸若
005_0684_b_02L수보리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이러한 것을 배우면 받아들이는 일도 없고 잃는 일도 없습니다. 이렇게 배우는 것을 가리켜 살운야를 배운다고 하고 살운야를 낸다고 합니다.”
005_0684_a_24L須菩提言如是舍利弗作是學亦不受亦不失學是爲學薩芸若爲出薩芸若
석제환인이 사리불에게 물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행해야만 합니까?”
005_0684_b_03L釋提桓因問舍利弗般若波羅蜜薩當云何行
사리불이 말했다.
“이러한 것은 수보리 존자께 여쭙는 것이 온당합니다.”
005_0684_b_05L舍利弗言當問尊者須菩提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떤 위신력을 의지해서 배워야 알 수 있습니까?”
005_0684_b_06L釋提桓因問尊者須菩提持何威神恩當學知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의 위신력을 의지해서 배워야 알 수 있습니다. 구익이여, 그대가 질문하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라고 했는데, 반야바라밀은 색을 따라서 행해도 안 되고 색을 떠나서 행해도 안 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따라서 구해서도 안 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인식함을 떠나서 구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반야바라밀이 아니지만 동시에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떠난 것도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005_0684_b_07L須菩提言持佛威神恩當學知拘翼所問般若波羅蜜薩云何行亦不可從色中行亦不可離色行亦不可從痛痒思想生死識中行亦不可離痛痒思想生死識行何以故般若波羅蜜亦非痛痒思想生死識般若波羅蜜亦不離痛痒思想生死識
석제환인이 말했다.
“마하바라밀(摩訶波羅蜜)은 끝도 없고 밑바닥도 없는 바라밀이라고 하는데 무슨 까닭입니까?”
005_0684_b_14L釋提桓因言摩訶波羅蜜無有邊無有底波羅蜜云何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마하바라밀은 가없는 바라밀이고 밑바닥이 없는 바라밀이니, 마하바라밀은 끝내 얻을 수가 없고 밑바닥이 없는 바라밀은 끝내 볼 수가 없으며 밑바닥이 없는 바라밀은 끝내 그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그 밑바닥도 없고 밑바닥을 여의지도 않습니다. 바라밀도 밑바닥이 없고 밑바닥을 여의지도 않고 중간이나 가장자리도 없고 가지도 없어서 끝내 헤아려 알 수 없고 체달하여 알 수 없습니다.
구익이여, 법(法)이 밑바닥이 없는 것처럼 바라밀도 밑바닥이 없으며 동시에 바라밀은 밑바닥을 여의지도 않습니다.
또 구익이여, 법에는 밑바닥도 없고 가지도 없으니 그 깊은 곳에는 중간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고 끝나는 때도 없어서 밑바닥을 찾아도 밑바닥이 없으며, 밑바닥이 없는 것까지도 없는 바라밀입니다.”
005_0684_b_15L須菩提拘翼摩訶波羅蜜無有邊波羅蜜無有底波羅蜜摩訶波羅蜜了不可無有邊波羅蜜了不可見無有底波羅蜜了不可得底人無底復無無無底復無無底波羅蜜等無底復無無底波羅蜜無底復無無底亦無有中邊亦無有本端了不可量了不可逮知拘翼從法中底波羅蜜底無底復無無底復次拘翼法無底復無底無有中邊無有盡時底索無底復無無底波羅蜜
005_0684_c_02L석제환인이 말했다.
“수보리 존자시여, 무슨 까닭에 중생도 밑바닥이 없고 바라밀도 밑바닥이 없습니까?”
005_0684_c_03L釋提桓因言云何尊者須菩提何以故人無底波羅蜜無底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이것은 전혀 헤아릴 수가 없으니 설령 셈하고 또 셈하더라도 중생도 밑바닥이 없고 바라밀도 밑바닥이 없습니다.”
005_0684_c_05L須菩提謂釋提桓因是事都盧不可計正使計倍復倍人無底波羅蜜無底
석제환인이 말했다.
“어떤 까닭에 중생도 밑바닥이 없고 바라밀도 밑바닥이 없습니까?”
005_0684_c_07L釋提桓因言何緣爾人無底波羅蜜無底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어떤 법 가운데에서든 중생들에게 본래 생겨남이 있다고 가르친 적이 있던가요?”
005_0684_c_08L須菩提言於拘翼意云何所法中作是教人本所生
석제환인이 말했다.
“어떤 법도 그렇게 가르친 적은 없으며 어떤 법도 중생이 생겨나서 머물러 있다고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설령 생겨난 것이 있다면 단지 그것은 이름자일 뿐이고 머물러 있는 것도 이름자일 뿐이어서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는 끝내 없으니, 다만 그 이름자에 집착하여 말이 많을 뿐입니다. 중생 또한 처음도 끝도 모두 텅 비어서 있는 것이 없습니다.”
005_0684_c_09L釋提桓因言無有法作是教者亦無法作是教住置設使有出者但字耳設有住止者但字耳但以字字著言耳所住止處但字耳了無所有但以字字著言耳人復人所本末空無所有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그대의 생각에는 중생을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005_0684_c_14L須菩提言於拘翼意云何人可得見
석제환인이 말했다.
“중생을 볼 수는 없습니다.”
釋提桓因言人不可得見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어디에 중생의 작의(作意)6)가 있고, 어디에 중생의 밑바닥이 있겠습니까? 실제로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께서는 항하(恒河)의 모래알만큼 수많은 수명이 다하도록 오랜 세월 동안 중생들을 제도하시니, 중생들은 모양대로 생겨나고 모양을 따라 제도되지만 이로부터 생겨난 이들이 어찌 끊어지는 때가 있겠습니까?”
005_0684_c_16L須菩提拘翼何所有作意者何所人底使怛薩阿竭阿羅呵三耶三佛壽如恒邊沙劫盡度人人展轉自相度所生者寧有斷絕時不
석제환인이 말했다.
“끊어지는 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다하는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005_0684_c_20L釋提桓因言無有斷絕時何以故人無有盡時
수보리가 말했다.
“중생도 밑바닥이 없고 반야바라밀도 밑바닥이 없습니다.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배우고 이와 같이 깨닫고 이와 같이 알아야만 하며,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법을 행해야만 합니다.”
005_0684_c_21L菩提言人無有底般若波羅蜜無底菩薩學當作是了當作是知行般若波羅蜜法如是
道行般若波羅蜜經卷第一
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범어(梵語) avinivartanīya의 음역(音譯). 불퇴(不退)ㆍ불퇴위(不退位)ㆍ불퇴전(不退轉)이라 번역한다. 불도(佛道)를 구하는 마음이 견고하여 악도(惡道)에 퇴전(退轉)하지 않는 것. 아비발치(阿鞞跋致)ㆍ아비발치(阿毘跋致)라 음역한다.
  2. 2)색(色) 등 6진(塵)이 능히 사람의 진성(眞性)을 쇠퇴시키기 때문에 6쇠(衰)라 한다. 6적(賊)이라고도 한다.
  3. 3)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 Pūrṇa-maitrāyṇṇīutra)를 말한다. 부처님의 10대제자 중에서 설법제일(說法第一)이다. 일반적으로 부루나 존자라고 한다.
  4. 4)범어 saṃnāha-saṃnaddha. 승나(僧那)는 홍서(弘誓)ㆍ대서(大誓)라 번역하고, 승녈(僧涅)은 자서(自誓)라 번역한다. 다 같이 보살(菩薩)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말하며,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스스로 맹서하는 것을 승나승녈(僧那僧涅)이라 한다. 마하(摩訶)는 대(大)이고, 승나(僧那)는 갑옷[鎧]이고, 승녈(僧涅)은 입는 것[著] 혹은 장엄(莊嚴)으로 비유하여 번역했다. 그러므로 사홍서원을 매우 견고한 큰 갑옷을 입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5. 5)범어 Brahma-kāyika-deva.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통칭(通稱). 정신천(淨身天)이라 번역한다.
  6. 6)006)범어 manaskāra, 심소(心所:마음의 작용)의 이름. 한 방향으로 마음을 이끌어 주의를 주는 정신 작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