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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_0032_a_01L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 제3권 상
지엄 지음
박서연 번역
[제6회 타화천회(他化天會)]
22) 십지품(十地品) ⓛ
이 회상의 처음 네 가지 문은 앞과 똑같이 분별한다. 첫째는 명칭을 변별한 것이다. 타화자재천회(他化自在天會)는 처소를 따라서 명칭을 얻은 것이다. 「십지품」이란 것은 수(數)의 뜻으로써 명칭을 밝힌 것이다.
둘째, 온 뜻인데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회상이 온 뜻이니, 앞은 아함이고, 다음은 증득에 들어가기 때문에 온 것이다. 두 번째는 품(品)이 온 뜻이다. 앞은 방편이 행을 돌려 보리를 향하는 것이고, 지금은 행상(行相)이 더욱 밝아져서 10지(地)에 전입(轉入)하는 것이니, 뜻의 차례[次第]이기 때문이다.
셋째, 종지라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회상이고, 두 번째는 품이다. 회상이라는 것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스리는 바를 밝힌 것이니, 이른바 정사 번뇌(正使煩惱)의 업보와 성품의 세 가지 장애 위의 마음 종자이다. 둘째는 능히 다스리는 것이니, 이른바 올바른 무분별지(無分別智)와 보현의 성기지(性起智)이다. 셋째는 성취한 바의 덕인데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사람[人]과 법[法]이다. 사람에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정화(正化)와 조화(助化)이다. 각기 체(體)ㆍ상(相)ㆍ용(用)이 있는데 모두 성기(性起) 등을 통틀은 것이다. 법이란 것은 이른바 이교(理敎)와 행과(行果)이니, 모두 성기와 수생(修生) 등을 통틀은 것이다. 준거하여 생각하고 섭수하면 알 수 있다. 넷째는 성취한 지위를 밝힌 것이니, 이른바 10지의 지위와 보현 성기의 무루 법문 등이다. 만약 품의 종지를 논함에 네 가지 뜻을 준한다면 오직 수생(修生)을 취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또 이 품은 설하지 않는 것으로써 설함을 삼으니 그 뜻은 곧 보현의 덕위(德位)를 증득하는 것이고, 설하는 것으로써 설함을 삼으니 삼승의 종지이다.
넷째, 경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문】이 회상은 위의 2ㆍ3ㆍ4ㆍ5회상과 어떻게 다른가?
【답】우선 네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는 누(漏)와 무루(無漏)가 다른 것이고, 둘째는 본말(本末)이 다른 것이며, 셋째는 공(共)과 불공(不共)이 다른 것이니, 10지의 인천(人天)과 성문 등은 공통으로 채택되기 때문이다. 『지론(地論)』에서는 “또한 능히 인천 도를 성취함을 낳으니, 나머지를 행하면 그렇지 않다”고 했으니, 준거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는 지위가 다른 것이니, 이것이 전부이다.
【문】어째서 이 회상만이 홀로 개별적인 처소와 저 체용(體用)이 서로 융화해서 광명을 놓아 오고 가면서 온갖 장엄구를 모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인가?
【답】이 회상에서 법에 둘이 없음을 증득해 요달하고, 체용의 멀고 가까움이 모두 다름[別異]이 없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니, 반드시 개별적인 처소 등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 또 이 회상 등은 증법(證法)이라서 사(事)로써 현취(玄趣)를 따로 표방하지 않고, 다만 총상(總相)을 얻어 나타낼 뿐이니, 위를 준거해서 생각하라.
이 회상에는 11품이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에 있는 9품은 연(緣)이 덕용(德用)을 성취함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에 있는 2품은 성기(性起)의 체용을 밝힘으로써 모든 회상에서 배우는 법으로 삼은 것이다. 처음의 9품 안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에 있는 6품은 인행(因行)의 만족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으로 「부사의품」 이하에 있는 3품의 경문은 인(因)이 얻을 바의 과(果)를 성취함을 변별한 것이다.
【문】어째서 과(果)를 개별적인 처소에 설하지 않았는가?
【답】이 경의 상하는 법을 나타내서 이(理)를 궁진한 것이니, 높은 불지(佛地)를 추구하는 데는 불가설(不可說)이 올바름이 된다. 이 가운데서 설한 것은 동일하게 증득함을 밝히기 위한 것인데, 간략히는 과(果)를 들어서 인(因)을 나타냈기 때문에 설한 것이다.
처음 6품의 내용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1품은 행위(行位)의 체(體)를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5품은 덕용을 변별한 것이다. 체문(體門)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는데, 혹은 다시 여섯 가지가 되고, 혹은 아홉 가지로 나누기도 하며, 혹은 열 가지로 판단하기도 하고, 혹은 다시 분리해서 48가지가 되기도 한다. 또 이 중에서 변별한 것은 논(論) 중의 어려운 경문을 통틀어 풀이한 것이다. 그러한 까닭은 이 해석에서 공통으로 논한 것이 합쳐져 하나의 소(疏)를 이루기 때문이다.
세 가지라는 것은 이른바 서(序)와 정(正)과 유통(流通)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나아가면 변별한 바의 법요(法要)는 오직 증교(證敎)뿐이다. 증교가 이미 다르므로 세 가지로 나눈 것도 역시 다르다.
세 가지를 가르치는 데 나아가서 처음의 기분(起分)에 이르기까지는 그 말미암는 서[由序]이니, 이 기(起)로써 올바른 설[正說]을 발하기 때문이다. 본분 이후는 그 정종(正宗)이다. 그 중에서 비록 다시 자세함이 있고 간략함이 있더라도 지법(地法)을 똑같이 설하였으니, 구분하면 정종이 된다. ‘지(地)의 이익’ 이하는 믿고 전해서 지니길 권유하여 넘쳐서 말대(末代)에까지 미치는 것이니, 구분하면 유통이 된다. 역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후분(後分)은 게송을 거듭 읊은 것이다.
세 가지를 증득함에 나아가면 처음의 하나는 서분(序分)인데 구분하면 유서(由序)가 된다. 삼매에 들어감은 정종을 증득한 것인데, 삼매에 들어감을 인(因)하여 실다운 증득을 올바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지론』에서는 이 삼매를 법체(法體)라고 말하였다. 유통의 뜻을 해석한 것에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미 덕이 흐른 것으로 신지(信地)를 입어 설함이 유통이 된다. 만약 이 뜻을 따른다면 가분(加分) 이후는 모두 유통이니, 자득(自得)을 설함으로써 신(信)의 보살로 하여금 지(地)를 증득해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둘은 말대(末代)에까지 흐르는 것을 이름하여 유통이라고 말하니, 만약 이 뜻을 따른다면 지(地)의 이익분(利益分)을 이름하여 유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섯이 된다고 말한 것은 행하는 바를 따라서 나눈 것이다. 처음의 기분(起分)에 이르기까지는 기화(起化)의 말미암음이니, 물의 믿음[物信]을 낳기 때문이다. 제2의 본분(本分)은 지법(地法)을 간략히 설한 것이니, 그 뛰어남을 찬탄해서 온갖 낙욕(樂欲)을 일으킨 것이다. 제3의 청분(請分)은 지(地)의 출언(出言)을 밝혀서 올바른 이해를 낳게 한 것이다. 제4의 설분(說分)은 수행의 상(相)을 자세히 밝힌 것이니, 물(物)로 하여금 행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제5의 영상분(影像分)은 비유에 의탁해서 덕을 나타낸 것이다. 제6의 지(地)의 이익은 덕이 이미 성취되어서 지법(地法)에 계합해 증득함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론』에서는 “법력(法力)을 얻음으로써 대지가 진동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홉이 된다고 말한 것은 처음의 서분에서부터 나아가 청분에 이르기까지는 여섯이 되고, 설분 이후는 구분하면 제7이 되며, 지(地)의 영상분의 설은 제8이 된다. 지(地)의 이익분은 제9이다.
또한 10으로 나눌 수도 있으니, 거듭 읊음을 덧붙인 것이다. 이 열 가지 가운데 나아가면 변별한 바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상(化相)에 나아감이니, 통틀어서 기설(起說)이 된다. 둘째는 화의(化意)에 나아감이니, 통틀어서 현증(顯證)이 된다. 셋째는 종요(宗要)를 따르는 것이니, 증(證)과 교(敎)를 쌍으로 변별하는 것이다.
기설(起說)이라는 말은 여래께서 장차 설하시는 것이다. 먼저 때와 처소에 의탁해 상(相)을 나타내서 대중을 모으고는 설할 바를 발기하니, 이로써 서(序)를 삼는다. 서(序)가 이미 흥기함을 말미암아서 장차 대중을 위해 설하는데, 이 때 금강장(金剛藏)이 묵묵히 삼매에 들어가서 자기의 자증(自證)을 나타내 능히 대중을 위해 설하니, 또한 가(加)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는 삼매분을 밝힌 것이니, 삼매에 들어감을 말미암아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해서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세 번째는 그 가분(加分)을 밝힌 것이니, 이미 거룩한 힘을 얻어서 대중을 위해 설하고자 하나, 다만 정(定)의 말 없음은 마땅히 고요함[寂]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네 번째는 그 기분(起分)을 밝힌 것이니, 정(定)으로부터 일어난 뒤에 간략히 지의 상[地相]을 선설하여 나중의 자세히 설함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는 그 본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그 본(本)중에서는 간략히 지(地)의 명칭을 설했을 뿐 자세히 분별하지는 않았으니, 대중이 명성을 듣고 의(義)를 맺고자 애타게 우러러서 서로 함께 머리 숙여 청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여섯 번째는 그 청분(請分)을 밝힌 것이니, 대중이 이미 청한 뒤에야 올바로 자세히 진술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일곱 번째는 그 설분(說分)을 밝힌 것이니, 나아가 10지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이 설법은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마땅히 비유로써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여덟 번째는 지(地)의 영상분(影像分)을 밝힌 것이니, 설함을 이미 마치고 나서 마땅히 뛰어난 이익을 나타내 믿고 전하여 유통하길 권하기 위함 때문이다.
다음으로 아홉 번째는 지(地)의 이익분을 밝힌 것이니, 그 법을 나타내고 나서 마땅히 게송으로 설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열 번째는 게송으로 찬탄하여 앞을 매듭 지은 것이다.
현증(顯證)이라는 말은 교화를 위한 뜻이니, 종지가 현증이 된다. 그 중에서 초분(初分)의 현증은 서(序)를 말미암고, 나머지 아홉은 올바로 나타냄이다. 아홉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상(相)에 나아간 현증이고, 다음에 있는 네 가지 분(分)은 설(說)에 나아간 현증이며, 다음에 있는 1분은 섭화(攝化)할 바에 나아간 현증의 이익이고, 다음의 1분은 증득한 덕을 거듭 서술한 것이다.
앞의 세 가지 중에서 처음의 삼매분은 들어감에 의탁해서 증득함을 나타낸 것이고, 두 번째의 가분(加分)은 가(加)를 인(因)해서 증득을 얻는 상(相)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지론』에서는 “어째서 가(加)인가? 대승의 광명법을 얻음을 말미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세 번째의 기분(起分)은 나옴에 의탁해서 적멸을 나타낸 것이다. 설함이 반드시 기(起)함이니, 곧 들어간 바의 적멸이 말을 여윔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지론』에서는 “정(定)에는 언설이 없으니, 이 때문에 마땅히 기(起)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의 네 가지 중에서 처음의 본분(本分)이라는 것은 간략히 설해서 증득을 나타낸 것이다. 두 번째의 청분(請分)은 상(相)을 물리쳐서 적(寂)을 나타낸 것이며, 설(說)과 영상(影像)은 상(相)에 의탁해서 덕을 나타낸 것이다. 설분(說分) 중에서는 수행에 의탁해서 덕을 나타낸 것이고, 지(地)의 영상분은 비유를 빌려서 덕을 나타낸 것이다. 지(地)의 이익분은 섭화(攝化)할 바에 나아가서 지(地)의 이익을 나타낸 것이니, 그러므로 아래의 경문에서는 법력을 얻음으로써 대지가 진동하고 꽃비가 내린다고 말한 것이다. 게송은 앞과 같다. 이 같은 차별은 똑같이 증득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종요(宗要)를 따라서 증(證)과 교(敎)를 쌍으로 변별한다고 말한 것은 이 품의 요체가 증과 교를 벗어남이 없는 것이다.
아홉 가지 중에서 처음의 하나는 바로 그 유서(由序)이고, 나중의 여덟은 증교(證敎)의 상을 올바로 나타낸 것이다. 여덟 중에서 처음의 하나는 삼매분에 들어가서 올바로 증득함을 나타낸 보인 것이며, 나중의 일곱은 차례대로 언교(言敎)를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차례대로 뜻을 말한 것은 초문(初門)과 같다. 말한바 10이라는 것은 지(地)의 동일하지 않음을 따라서 10으로 나눈 것이다. 이상의 세 회상은 모두 이와 동일하게 준거하면 생각해 거둘 수 있다.
48가지라 말한 것은 초지(初地)의 8분과 2지의 양분(兩分)과 나아가 10지의 8분의 차별이니, 1품에 합계 48분이 있다. 이 경문과 『지론』의 경본(經本)은 더하거나 줄인 것이 많이 있다. 동일하지 않은 경문에 나아가면 네 가지 법으로 간추리니, 나중에 경문에 이르러 마땅히 알라.
첫째, 모든 경문 안에 누(漏)가 적은 것은 마땅히 늘어난 것이니, 좌상(左相)에선 수획(竪畫)을 안립하고, 각(脚) 중에선 소구(少句)의 수(數)를 점찍어서 기재한 것이다. 모든 경문이 배치되면서도 뜻은 수순하는 것은 구(句) 속의 첫째 글자 사이에 점을 찍고, 모든 10구(句) 속에서 함께 전후를 논한 것은 해당 구의 좌상(左相)에 일제히 동등하게 수(數)를 점찍어서 기재한 것이다. 모든 구가 많이 증가한 것은 좌상의 상하가 서로 구애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논(論)을 기준으로 하여 정(定)을 취했을 뿐이다. 만약 변별하지 않음을 논한 것이라면 모든 것도 역시 논하지 않은 것이다. 또 논(論) 중에서 늘어난 것은 이에 의거해서 아는 것이다. 또 이 48단락의 경문이라는 것은 단지 1지(地)가 곧 48을 이루는 것이며, 나머지 지(地)도 그러한 유(類)이니, 이와 같이 준거하라. 그런 줄 아는 이유는 그 논주(論主)가 스스로 모든 지(地)를 나누는데, 전후와 은몰(隱沒)과 폐흥(廢興)이 동일하지 않아서 뜻으로써 추구하면 이(理)가 구유(俱有)에 합친다. 처음의 서(序)에 나아가면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설하는 때를 밝힌 것이고, 둘째는 화주(化主)를 변별한 것이며, 셋째는 법을 설해서 의탁할 바의 처소를 밝힌 것이고, 넷째는 똑같이 들음을 변별한 것이다. 머무는 처소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처소를 통틀어 밝힌 것이고, 둘째 ‘마니보전’ 이하는 그 개별적인 처소를 밝힌 것이다.
넷째의 똑같이 들음을 밝힌 것 중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그 사람을 가려내서 정(定)한 것이며, 두 번째 ‘이 모든 보살’ 이하는 그 사람의 덕을 찬탄한 것이고, 세 번째 ‘그 명칭은……라 한다’ 이하는 덕자(德者)의 명칭을 열거한 것이며, 네 번째 ‘한량없음’ 이하는 명자(名者)의 수(數)를 변별한 것이고, 다섯째는 온 곳을 밝힌 것이며, 여섯 번째는 상수(上首)를 열거함을 표방한 것이다.
경에서는 제5구가 빠지고 앞의 네 가지만 있으니, 첫째는 대(大)가 소(小)와 다름을 간별한 것이고, 둘째 ‘아뇩(阿耨)’ 이하는 종(終)이 시(始)와 다름을 간별한 것이며, 셋째는 주(住)가 퇴(退)와 다름을 간별한 것이고, 넷째 ‘타방(他方)으로부터’ 이하는 신(新)이 구(舊)와 다름을 간별한 것이다.
전자 중에서 먼저는 열거한 바의 사람을 정(定)한 것이고, 다음은 모든 경(經)이 사람의 뜻을 변별함을 밝힌 것이다. 사람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성화(聖化)를 입은 해당되는 기틀의 대중인, 가령 논(論)에서 설한 신지(信地)의 사람 등과 같다. 둘째는 성화가 상대하여 영향(影響)을 끼친 사람이니, 여기서 열거한 모든 보살 등과 같다.
사람의 뜻을 변별한다는 것은 모든 경에서 사람을 열거하는데 일반적으로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교화의 이익된 바를 밝힌 것이니, 가령 『열반경』에서 무상(無常)의 모든 학인(學人)들을 열거해서 변별한 것과 같다. 둘째는 사람을 대해서 결정(決定)을 설함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러므로 경에서는 비록 공지(空地)에서 설한 바가 많이 있더라도 참된 사자후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이제 이 같은 대지(大智)의 사람 중에서 선설(宣說)한 바가 있어야 비로소 참된 사자후라는 이름을 얻는다. 셋째는 사람에 의탁해서 그 법을 구별함을 밝힌 것이니, 가령 10신(信)을 설해서 모든 수(首) 등을 널리 상대한 것과 같다. 넷째는 똑같이 들음을 들어서 믿을 만한 것을 증득하여 성취하는 것이다. 지금 이 대중을 열거한 뜻은 나중의 셋을 겸한다.
주(住)가 퇴(退)와 다름을 간별한 것에서 일반적으로 퇴를 논하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얻고서 퇴하는 것이니, 이른바 먼저 얻은 것을 나중에 다시 퇴실(退失)하는 것이다. 둘째는 얻지 못하고 퇴하는 것이니, 이른바 승진에서 퇴주(退住)하여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셋째는 습행(習行)의 퇴이니, 먼저 많은 행을 익혀서 똑같이 성취하고 나서 나중에 하나가 나타날 때 나머지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나타나지 않는 곳을 이름하여 퇴라 하는 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로써 지위(地位)를 준거해 기준하면 이 뜻이 없지 않으니, 해행(解行) 이전은 분(分)이 아직 견고하지 않아서 그 얻은 바에 따라 퇴실(退失)을 용납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모두 3퇴(退)가 있다. 초지(初地) 이상에서부터 6지를 다하기까지는 차례대로 도를 닦을 뿐 돈기(頓起)하지 못하기 때문에 습행이 있으며, 아울러 얻지 못하고 퇴한다. 7지 이상은 지위의 분[位分]이 아직 궁진하지 못해서 얻지 못하고 퇴함이 있다. 퇴상(退相)이 이와 같으니, 여의는 처소를 따르는 것이 곧 불퇴(不退)이다.
그러나 저 3퇴를 자세히 나누면 다섯이 된다. 처음의 얻고서 퇴함에 나아가서 뜻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면 첫째는 멸퇴(滅退)이니, 이른바 범부가 소유한 선근이 저 사견(邪見)이 되어서 단멸할 바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실퇴(失退)이니, 선취(善趣)의 사람으로 믿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자는 퇴실(退失)해서 이승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용납할 수 있다. 마치 사리불 등이 비록 퇴멸(退滅)해서 일천제(一闡提)를 짓지 않더라도 보리심은 능히 다시 나타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셋째는 폐퇴(廢退)이니, 종성(種性) 이상이 잠시 번뇌 업의 자취를 일으켜 그 익힌 바를 폐(廢)하여 현전(現前)치 않게 한 것을 이름하여 폐퇴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와 나머지 두 퇴를 통틀어서 합계가 다섯이 된다고 설한 것이다.
이 다섯 종류는 외범(外凡)도 갖추고 있다. 선취(善趣)의 신위(信位)는 오직 멸퇴(滅退)가 없을 뿐 나머지 네 가지는 있으니, 선(善)을 끊어서 천제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종성(種性) 이상은 멸(滅)도 없고 실(失)도 없어서 나머지 세 가지가 있게 된다. 초지(初地) 이상은 앞의 세 종류는 없고 나머지 둘이 있게 된다. 7지 이상은 오직 미득(未得)이 있을 뿐 나머지 네 가지는 모두 없다. 제10지(地) 중에선 급하게 인위(因位)에 나아가서 5퇴가 모두 없다. 만약 불과(佛果)를 조망한다면 퇴상(退相)이 이와 같음을 얻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불퇴(不退)임을 알 수 있다. 또 만약 이 경에 의거한다면 신행(信行)과 해위(解位) 이후는 다만 얻지 못하고 퇴(退)함이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없으니, 이는 일상(一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약 보현 자체를 기준으로 한다면 모든 퇴(退)가 아울러 없으니, 위를 준거해서 생각해 섭수하라. 지법(地法)은 깊고 은밀해서 거친 지혜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는 지(地)의 교법을 위해서 저 모든 승(乘)과 세간의 선사(善事)에 의탁하여 아함 법의(法義)의 분제를 나타내는 것이니, 비록 일승의 이(理)에 의탁해서 나타낸다 하더라도 삼승과 소승은 해당되는 종지에 스스로 머물러서 자기 종지를 잃지 않는다. 마치 소금이 국을 이루는 것과 같아서 소금이 스스로 성품에 머물러 있어도 국의 뜻은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아래 경문의 뜻은 마땅히 이에 준거해서 알아야 한다.
보리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성지(性地)에 들어가는 것이니, 그 명칭이 보리가 된다. 둘째는 초지(初地)이고, 셋째는 불지(佛地)이다. 그러므로 열반에서 수다원은 8만 겁에 도달하고 나아가 벽지불은 십천(十千) 겁에 도달한다고 설한 것은 성지(性地)에 도달함을 일컫는 것이다.
【문】아뇩보리(阿耨菩提)는 과(果)에 있는데 어째서 인(因)에도 통하는가?
【답】이것 역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품경(大品經)』에서는 5보리를 설했으니, 이른바 발심(發心)ㆍ복심(伏心)ㆍ여명(與命)ㆍ출도(出到)ㆍ무상(無上)의 보리이다. 일승에는 10보리가 있으니, 아래의 「이세간품」에서 설한 것과 같다.
생(生)이란 것에는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법성의 생(生)함이니, 6입(入)의 뛰어남과 무시(無始)의 법이(法爾)이다. 둘째는 실보(實報)의 생함이니, 이른바 먼저 도래한 것을 따라서 선(善)을 닦아 얻는 것이다. 셋째는 생멸의 변역법신(變易法身)이니, 이른바 반연해서 비추어 무루(無漏)를 얻는 것이다. 넷째는 분단신(分段身)이니, 이른바 저 범부일 때 삼계의 업을 얻은 것이다. 다섯째는 응화신(應化身)이니, 물(物)에 따라서 수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삼승의 이해를 기준으로 한 것이지 일승이 아니다. 어째서 이 회상의 첫머리는 삼승을 기준으로 해서 밝힌 것이 많은가? 「지품(地品)」이 삼승을 통틀어서 믿어 향하기 때문이다.
덕을 찬탄한 경문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개별적인 것이고, 둘째는 총체적인 것이다. 보살의 공덕은 단박에 밝힐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개별적으로 찬탄하였으나, 개별적으로는 능히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개별 속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간략히 찬탄한 것이고, 둘째 ‘잘 능히 교화하며[善能化]’ 이하는 덕에 따라서 자세히 찬탄한 것이다. 보살의 광대한 덕은 단박에 밝힐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간략히 찬탄하였으며, 간략함으로 능히 갖추질 못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자세히 찬탄한 것이다.
간략함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분(自分)을 찬탄한 것이고, 두 번째 ‘모든 부처님 여래’ 이하는 그 승진을 찬탄한 것이다.
둘째의 자세히 찬탄한 경문에는 20구가 있다. 앞의 12구는 위의 자분을 자세히 한 것이며, 두 번째의 여덟 구는 앞의 승진을 자세히 하고 자분을 자세히 하는 가운데 섭수하여 두 가지가 된다. 처음의 여섯 구는 그 행을 닦음이 구족함을 든 것이며, 다음에 있는 여섯 구는 덕용(德用)이 원만히 갖추어졌음을 밝힌 것이다. 행의 닦음이 구족함 중에서 처음의 세 구는 이타이고, 나중의 세 구는 자리(自利)이다. 앞 경문의 초구(初句)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중의 두 구는 개별적인 것이니, 경에 의거하면 두 구 중에서 한 구는 빠져 있다. 두 번째의 자리의 경문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원(願)이고, 다음은 수(修)이며, 나중은 행의 성취를 밝힌 것이다. 두 번째의 원만히 갖춘 경문에는 여섯 구가 있으니, 앞의 세 구는 이타이고, 나중의 세 구는 자리이다. 이타 중에서 처음은 신업(身業)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의업(意業)을 밝힌 것이며, 나중은 구업(口業)을 밝힌 것이다. 두 번째의 자리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행의 닦음이 뛰어난 것이고, 둘째는 모든 덕이 원만히 갖추어짐이며, 셋째 ‘모든 처소’ 이하는 묘용이 자재한 것이다.
둘째의 앞의 승진을 자세히 한 경문에서 구는 따로 여덟 가지가 있다. 앞에 네 구는 그 뛰어난 3업이 행할 바를 섭수해서 닦는 것이며, 나중의 네 구는 그 광대한 3업이 온갖 덕을 갖추었음을 밝힌 것이다. 전자 중에서 처음의 세 구는 뛰어난 3업을 밝힌 것이고, 나중의 한 구는 행할 바를 섭수해서 닦음을 밝힌 것이다. 후자의 네 구도 마찬가지이니, 처음의 세 구는 그 광대한 3업을 밝힌 것이며, 나중의 한 구는 모든 덕을 갖추었음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뛰어난 3업 중에서 처음은 신업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구업이며, 나중은 의업이다. 후자의 네 구 경문에 나아가면 처음에 있는 세 구는 3업을 자세히 밝힌 것이니, 그 몸이 널리 나타나는 것이 넓은 신업이며, 그 음성이 두루 들리는 것이 넓은 구업이고, 그 마음이 통달하는 것이 넓은 의업이다. 제4의 한 구는 모든 덕을 갖춘 것이다.
이 처소에서 과(果)에 감응한다는 것에서 감응은 근(根)이고 과(果)는 욕(欲)이다. 또 아래 지(地)의 사람의 과(果)는 결정코 능히 이루는 것이니, 나머지는 논에서 변별한 바와 같다.
또 함께 하지 않음을 밝힌다는 것은, 첫째는 외도와 함께 하지 않음이며, 둘째는 이승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또 두 법을 금강에 비유한 것 중에서 법은, 앞은 능파(能破)이고 뒤는 견고함이다. 비유에서 전자의 나무는 마음의 견고함을 취한 것이고, 자식을 잉태함은 자식의 능파를 취한 것이다.
삼매분 중에서 힘을 이어받아 정(定)에 들어가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화가 여래에게 있음을 미루기 위함 때문에 힘을 이어받음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비록 자득(自得)하더라도 부처님과 같은 뛰어난 사람을 대해서는 자재로움을 얻지 못하니, 반드시 우러러 이어받아야 한다. 셋째, 이 정(定)에서 비록 분에 맞는 증득을 얻더라도 원만함을 궁구함은 부처님에게 있다. 지금 여기서는 부처님의 뛰어난 교화를 욕구하기 때문에 반드시 힘을 이어받는다. 과(科)의 경문은 알 수 있다.
가분(加分) 중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삼매에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 동일하게 가(加)함이다. 둘째 ‘모든 보살에게 펴고자 한다[欲宣一切]’ 이하는 가(加)의 하는 바[所爲]를 밝힌 것이며, 셋째 ‘금강장이여, 그대는 마땅히 설해야 한다’ 이하는 가(加)의 상(相)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을 가(加)하셔서 똑같이 다 몸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이며, 둘째 ‘똑같은 소리로 찬탄한다’ 이하는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찬탄하셔서 앞의 입정(入定)에 감응하시어 능히 설함을 증득함을 나타낸 것이다. 셋째 ‘이처럼 시방에서’ 이하는 부처님께서 이미 가(加)함을 밝혀서 앞의 입정에 감응하여 불력(佛力)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가(加)를 얻는 까닭을 해석한 것이다. 또 ‘많은 부처님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라는 것은 많은 부처님께서 똑같이 이 법을 증득하시는 것이다. 나머지 경문은 논(論)과 같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둘째는 소위(所爲)의 경문이다. 첫째는 지법(地法)에 대해서 가(加)의 소위를 밝힌 것이고, 둘째 ‘이른바 지혜에 들어가게 해서’ 이하는 교화받는 사람을 대해서 가(加)의 소위를 밝힌 것이다. 또 견지(見智)가 증득을 얻는다는 것에서 앞의 둘은 관해(觀解)이고 나중의 둘은 행해(行解)이다. 견(見)은 시작이고 지(智)는 마지막이니, 시작을 얻어서 마지막을 증득하는 것이다. 또 신락(信樂)이 증득을 얻는다는 것은 역시 앞과 같다. 다만 미득(未得)이 득(得)을 향하기 때문에 신락(信樂)의 명칭을 안립한 것이다.
사람을 대해서 소위를 밝힌 것 가운데 20구가 있으니, 전자의 열 가지 입(入)은 자리의 행이고, 후자의 열 가지 시종(始終)은 이타의 행이다.
【문】어째서 자리의 명칭은 입(入)이 되고, 이타의 행은 시종이 된다고 설하는가?
【답】다만 입과 시종은 뜻이 하나로서 차별이 없다. 입을 말하면 기필코 시작부터 마지막에까지 이르게 되므로 그 시종을 논한 것이니, 반드시 들어가는 바가 있어 두 행을 나누게 되므로 각기 하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입과 시종의 20구 내용에 나아가면 각각 처음의 한 구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머지 구(句)는 개별적인 것이다. 일곱째 중에서 ‘다시 선근이 있어 능히 출세간의 인(因)이 된다’는 것은 지(地) 중의 가행선근(加行善根) 등이다. 또 시종 안의 경문은 제2구가 빠져 있다.
또 논(論)에서 아함이라 말한 것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
첫째는 행(行)과 교(敎)의 상대(相對)이다. 음성으로 말한 가르침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며, 일체 공덕의 설로 증득을 삼으니, 마치 아래의 설(說) 중에서 자의(字意)의 양장(兩藏)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는 위(位)와 지(地)의 상대이다. 해행(解行) 이전에 가르침에 의거해서 수행하는 것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고, 초지(初地) 이상에서 설하는 것은 증득이 된다. 마치 아래 해탈의 두 번째 청함 중에서 대중을 찬탄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지(地) 이전에 일으킨 바의 듣고[聞] 사유하고[思] 수행하는[修] 것 등을 이름하여 아함정(阿含淨)이라 하고, 초지 이상의 일체 행덕은 통틀어서 증정(證淨)이라 이름 붙인다.
셋째는 수행[修]과 성취[成]의 상대이다. 일체의 지(地) 가운데 문사(聞思)와 수혜(修慧)와 보생(報生)과 식지(識智) 등과 같은 네 가지 마음이 반연하여 비춘 이해를 이름하여 아함이라 말하고, 참지혜[眞智]는 언설을 벗어난 것으로 증득을 삼는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논하여 말하길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등이라면 설할 수 있으며, 설할 수 있기 때문에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고, 지지(地智)가 경문을 여읜 것을 이름하여 증득이라 한다”고 했다.
넷째는 참[眞]과 거짓[僞]의 상대이다. 일체의 지(地)에서 참과 거짓을 합쳐 수행함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고, 거짓을 버리고 실다움[實]에 계합하는 것을 이름하여 증득이라 하니, 마치 아래에서 밝힌 의(義)와 설(說)의 2대(大)가 대아함 방편의 수행을 설한 것과 같다. 의대(義大)는 행의 성취를 증득한 것이다.
다섯째는 상(相)과 실(實)의 상대이다. 세간의 수행 중에서 저 증상(證相)을 얻은 것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고, 근본 실상에 계합한 것을 이름하여 증득이라 하니, 마치 아래에서 설한 증상 묘법(增上妙法)의 광명 법문과 같다. 증상은 증득이고, 광명은 가르침이다.
여섯째는 체(體)와 덕(德)의 상대이다. 저 상(相)을 여의어서 성취한 행 중에 나아가면 비롯됨이 없는 법성이 본래는 숨어 있다가 지금은 나타나는 것을 이름하여 증득이라 하고, 근본에 의거해서 성취한 방편행의 덕과 가르침에 의거해서 생(生)을 닦는 것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니, 마치 아래 경문에서 연금(鍊金)에 비유한 것과 같다. 금의 체(體)는 증득을 비유한 것이고, 반지나 팔지 같은 장엄구는 아함에 비유한 것이다.
일곱째는 체(體)와 용(用)의 상대이다. 앞의 체와 덕이 서로 따르는 것은 증득이 되고, 이 일어난 바에 의거해서 세간을 수순하는 교지(敎智)의 작용을 이름하여 아함이라 하니, 마치 아래의 경문에서 구슬의 광명 등에 비유한 법이 이것이다. 주륜(珠輪) 등의 청정함은 증체(證體)를 비유한 것이고, 광염(光焰) 등은 아함에 비유한 것이다.
여덟 째는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의 상대이다. 자분에서 성취한 체덕(體德)과 용(用)은 모두 이름하여 증득이라 하고, 능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아함이라 일컬으니, 마치 아래의 경문에서 금강장과 두 힘을 찬탄한 것이 이것이다. 묘지(妙智)와 변재는 이름하여 증력(證力)이라 하고, 부처님의 교법에서 견고하고 청정한 슬기를 염(念)하는 것을 이름하여 아함력(阿含力)이라 한다.
아홉째는 언전을 기준으로 한 것과 실(實)에 나아가는 것의 상대이다. 진지(眞智)의 체(體)를 설하는 것으로써 증득을 삼으니, 곧 이 증체(證體)가 말을 열 가지로 나누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아함이라 이름한다. 마치 아래의 경문에서 허공의 적처(跡處)에서 비유한 바의 법이 이에 해당된다. 허공의 평등은 지(地)의 증지(證智)를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아래의 논(論)에서는 자신(字身)의 머무는 처소가 증지(證智)의 섭수하는 바라고 말한 것이다. 공(空) 가운데 자취는 지(地)의 아함을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아래의 논에서는 지지(地智)의 명구자신(名句字身)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명구가 바로 아함의 법이다. 이 아함과 증득이 위와 아래에 통하니, 준거해서 생각하여 섭수할 수 있다. 나머지 상(相)은 아는 것이다.
셋째1)는 가상(加相)이니, 경문 안의 이른바 구(口)와 의(意)와 신(身)에서 구(口)는 설하길 권유함으로써 힘을 증대하는 것이고, 의(意)는 은밀히 가(加)의 위세를 입는 것이며, 신(身)은 정수리를 어루만져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어째서 먼저는 구(口)이고, 다음은 의(意)이며, 나중은 신(身)으로서 앞의 모든 부처님께서 나타내신 가(加)의 소위(所謂)를 탄 것인가? 인(因)의 경우는 설하길 권유했기 때문에 먼저 구(口)를 밝힌 것이고, 신(身)을 만지면 일어나므로 이치로는 마땅히 나중에 있는 것이며, 의(意)는 이런 뜻이 없어서 중간에 의거해서 설한 것이다.
구가(口加)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또 신정(身淨) 중의 경문에 불진(佛盡)의 한 구가 빠져 있다. 두 번째 의가(意加)의 경문에 20구가 있다. 처음의 열 구는 의가를 올바로 밝힌 것이고, 나중의 열 구는 편가(偏加)의 까닭을 해석한 것이다. 어째서 뜻에 나아가서만 편가를 해석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 것인가? 의(意)는 가(加)의 근본이기 때문에 나아가 해석한 것이다. 또 앞의 구가에는 자타(自他)의 두 가지 힘의 변재가 있는데 의가도 마찬가지이다.
앞의 열 가지 올바른 가(加)는 그 타력(他力)을 밝힌 것이고, 뒤의 열 가지 가(加)의 해석은 그 자력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앞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처음은 무외신(無畏身)이니 총체적이기도 하고 개별적이기도 하다. 10구를 통틀어 섭수하는 것이 무외신이 되고, 통틀은 바는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있다. 이 중에서 개별적인 것의 처음 한 구는 색신(色身)의 뛰어남을 나타낸 것이니, 이 때문에 개별이라 이름한다. 나머지 아홉 구는 한결같이 개별이다. 또 이 중에서 법의 성취를 논한 것은 상속에 의거한 것이니, 『해탈경(解脫經)』 중에는 네 종류의 성취가 있다. 첫째는 유(有)로써 성취하는 것이니, 인연의 명상(名相)과 언설의 모든 법이 성취를 얻는다. 둘째는 소작(所作)의 성취이니, 일체의 소작이 각기 변재를 성취함이 있다. 셋째는 법의 성취이니, 일체 모든 법의 성품과 상(相)이 성립하는 것이다. 넷째는 도와서 성취하는 것이니, 지(智)의 언설로써 모든 법의 성취를 도운 것이다.
이제 연(緣)이라고 말한 것은 저것을 유(有)로써 성취하는 것이다. 인연이 있는 모든 법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에 이름하여 연이라 한다. 법이란 것은 곧 저 가운데의 법이니, 지음을 성취한다는 것은 저 지을 바를 이루는 것이다. 성취라는 것은 곧 그 가운데서 도와서 이루는 것이다. 또 세 가지 동일한 상(相)의 지(智)라는 것은 한 종류가 아님을 해석한 것이니, 『금강선론(金剛仙論)』에 의거하면 일체의 법이 모두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임을 아는 것이다. 다른 번역의 논(論)에 의거하면 일체법의 자상(自相)은 동일한 상으로서 둘이 아닌 상(相)이니, 이른바 세제(世諦)와 진제(眞諦)가 하나의 참된 진리[實諦]임을 아는 것이요, 또 공(空)ㆍ무상(無相)ㆍ원(願)을 아는 것이다.
또 6정견(正見)이란 능히 아는 지혜이다. 『금강선론』에 의거하면 첫째는 진실지(眞實智)의 정견이니 능히 이법(理法)을 아는 것이고, 둘째 행(行)의 정견이니 능히 행법을 아는 것이다. 이 둘은 교지(敎旨)이다. 셋째 교(敎)의 정견이니, 능히 교법을 아는 것이다. 넷째 두 변(邊)을 여읜 정견이니, 앞의 이법(理法)을 알아서 정(情)으로 취하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다섯째 부사의의 정견이니, 앞의 행법을 알아서 덕을 성취해 정을 벗어나는 것이다. 여섯째 근욕성(根欲性)의 정견이니, 앞의 교법을 알아서 물심(物心)에 따라 설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소위(所爲)를 해석함 중에서 처음의 ‘왜냐하면’은 따지는 것이고, 다음은 답의 경문인데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중의 아홉은 개별적인 것이다. 또 ‘불법이 무너지고자 할 때 나머지 존귀한 법을 빌려서 송지(誦持)한다’는 것은 무너지는 때를 따르는 것이니, 무엇이 존귀한 가르침이겠는가?
세 번째, 신가(身加)의 경문에 네 구가 있다. 첫째는 근본을 여의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신력(神力)을 쓰는 것이며, 셋째는 오른손을 펴는 것이며, 넷째는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경문에는 처음의 두 구가 빠져 있다.
본분(本分)을 해석하는 데 나아가면 경문의 내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告)하는 것이고, 다음은 서술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선(願善)을 밝히는 것으로 지(地)의 체(體)를 삼는 것이고, 둘째는 열 가지 명칭을 열거해서 그 지(地)의 상(相)을 나타내는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께서 똑같이 찬탄하심을 들어서 지(地)의 요체와 뛰어남[要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셋은 모두 각각 두 가지가 있다. 첫째인 지(地)의 체(體) 안에서 처음의 한 구는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의 ‘허물도 없고[無有過]’ 이하는 개별적인 것이니, 나머지는 논(論)에서 변별한 것과 같다. 둘째인 상(相) 중의 경문에는 따로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질문이고 다음은 답인데 답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건립에 두 가지가 있고, 다음의 열거함에 두 가지가 있으며, 셋째는 매듭 지음이다. 세 번째 단락의 경문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니, 처음의 ‘나는 보지 못했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똑같이 찬탄하심을 들어서 지(地)의 요체와 뛰어남을 나타낸 것이며, 둘째 ‘왜냐하면’ 이하는 지(地)의 요체와 뛰어남을 밝힘으로써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찬탄하심의 말미암는 바를 해석해 나타낸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질문이고 다음은 답이다. 답의 경문에 네 구가 있다. 초구(初句)는 이 증행(證行)을 들어서 부처님께서 똑같이 찬탄하심을 해석한 것이며, 제2구는 다만 저 출세간의 소증(所證)뿐만 아니라 역시 세간 방편의 소행(所行)이기도 하다. 제3의 이른바 한 구는 앞의 제2 광명 법문을 나타낸 것이며, 제4의 ‘모든 불자여’ 이하는 앞의 제1의 증상 묘법(增上妙法)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논(論) 중의 경본(經本)을 기준으로 하여 과목별로 나눈 것이며,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논(論)에서 결정(決定)이라고 말한 것은 『지지(地持)』에 의거하면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종성(種性)의 결정은 부처님의 종자를 정한 것이고, 둘째 해행(解行)의 결정은 발심을 정한 것이며, 셋째 증(證)의 결정은 정(定)이 법을 얻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세 번째이다.
또 선(善) 결정이란 것에서 처음은 선을 변별하고 결정이 따라서 온 것이며, 다음으로 결정이란 것은 결정의 뜻을 변별하고 선자(善字)가 따라서 온 것이니, 선에 나아가서 결정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세 번째, 승선(勝善)의 결정 중에서 논에 의거하면 합계 네 가지의 뜻풀이가 있으니,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중의 셋은 개별적인 것이다. 셋 중에서 이른바 증조(證助)는 머물지 않는 것이다. 또 풀이하면 처음은 이(理)이고 다음은 지(智)이며, 세 번째는 지위와 교법이다.
넷째, 상(相)을 기준으로 하면 곧 무루에 즉하는 것이며, 또한 조도(助道)에 즉하는 것이니, 준거하여 생각해서 섭수하라.
『대품경론(大品經論)』에 의거하면 삼승 10지의 명칭이 있다. 첫째는 간혜지(乾慧地)이며, 둘째는 성지(性地)이며, 셋째는 8인지(人地)이며, 넷째는 견지(見地)이며, 다섯째는 박지(薄地)이며, 여섯째는 이욕지(離欲地)이며, 일곱째는 이작지(已作地)이며, 여덟째는 벽지불지(辟支佛地)이며, 아홉째는 보살지(菩薩地)이며, 열째는 불지(佛地)이다. 이 10지는 일승의 쓰는 바[所用]이며, 삼승의 들어가는 바[所入]이다. 이 중에서 본분(本分)은 자의(自義)에 의지한 아함의 설이다.
청분(請分)의 경문에 나아가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금강장이 설하고 나서 침묵으로 머무는 것과 보살과 부처님께서 다 함께 공통으로 청하는 것이며, 둘째 ‘관찰’ 이하는 설분(說分)의 제등함을 제시해서 대중으로 하여금 올바로 알게 하는 것이다.
전자 중에서 사람에 따라 청(請)을 나눈 것이 세 가지가 된다. 첫째는 해탈월(解脫月)이 청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중이 청하는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의 가(加)로 청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나아가면 처음의 해탈월이 청한 내용의 경문은 3대(對)로 구별한다. 모두 처음에는 설한 자가 침묵하여 어기면서 설하지 않는 것이고, 나중은 계청(啓請)을 밝힌 것이다.
제1대(對) 중에서 처음은 금강장이 설하고 나서 침묵으로 머무는 것이며, 나중은 해탈월이 대중의 의심하는 마음을 알아서 이를 위해 물어 청하는[問請] 것이다. 인자(仁者)는 설함을 감당하고 대중은 능히 들을 수 있는데, 어찌 설하지 않겠는가?
제2대(對) 중에서 처음은 금강장이 앞의 청문(請問)함을 타고서 이미 침묵한 뜻을 나타냄으로써 수답(酬答)을 삼았으니, 법은 설하기 어렵고 증신(證信)은 얻기 어렵기 때문에 내가 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탈은 이를 타고서 대중을 찬탄하면서 거듭 청한 것이니, 나[我]는 이른바 인자(仁者)이니 다시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래서 증신을 얻기가 어려워서 설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이제 이 보살이 훌륭하고 청정하게 대중을 모으는 것에는 증(證)도 있고 신(信)도 있으니, 인자는 마땅히 설해야 한다. 이는 제2대(對)이며, 이상의 양대(兩對)는 사람을 찬탄함으로써 청한 것이다.
제3대(對) 중에서 처음은 금강장이 앞의 청하는 말을 타고서 손해를 들어서 어기는 것이니, 비록 이 대중이 청정하더라도 나머지 즐거움이 작은 것은 듣고서도 의혹을 일으켜 길이 쇠뇌(衰惱)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손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탈월은 이를 타고 법을 찬탄함으로써 거듭 청하는 것이니, 인자(仁者)는 다만 설할 뿐 온갖 의심은 생각지 말라. 모든 부처님의 호념(護念)은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이해시키는 것이라서 그 설함에 많은 이익이 있으니 쇠뇌를 두려워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탈월의 청함에는 뜻에 남음이 있다. 저 금강장이 청함을 어긴 것은 이(理)가 여기서 궁진하여 말이 끊긴 것이나 다만 법을 중시하기에 침묵으로 나머지 청함을 기다린 것이니, 처음 대(對)의 경 가운데 처음에 금강장이 설하고 나서 침묵에 머문 것이다. ‘이 때 일체’ 이하는 중생의 마음을 해탈하고자 해서 청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전자 중의 두 구절에서 첫째 금강장이 지(地)의 명칭을 설하고 난 것은 앞을 거듭 들어서 나중을 일으킨 것이고, 둘째 침묵하고 설하지 않은 것은 나중의 청함을 올바로 기다린 것이니, 아래의 대중은 이를 대해서 욕(欲)을 낳고 의심을 낳는 것이다. 아래의 청함에 나아가면 처음은 대중이 명칭을 듣고 뜻을 욕구하였으나 침묵함을 보고 의심을 낳음을 밝힌 것이다. ‘그 때 대보살’ 이하는 해탈월이 의심함을 알아 청함을 밝힌 것이다.
다시 전자에 나아가면 처음에 명칭을 설함에 대(對)한 것은 듣고 나서 뜻을 욕구하는 것이다. ‘각기 이렇게 생각한다[各作是念]’ 이하는 분별하지 않음을 대한 것이니, 침묵함을 보고 의심을 낳는 것이다. 하인(何因)이라는 것은 저 설하는 사람을 대함으로써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하연(何緣)이라 말한 것은 그 청중을 대함으로써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둘째의 해탈이 의심함을 알아 청하는 가운데 세 가지로 그 구(句)를 구별한다. 첫째는 청주(請主)인 해탈보살을 표방하는 것이고, 둘째는 온갖 의심을 아는 것을 계청(啓請)으로 삼는 것이며, 셋째는 청하는 말을 드는 것이다.
청하는 말의 게송 중에서는 경문을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두 문으로 분별되니, 징(徵)과 청(請)의 분별이다. 징이란 침묵을 따져서 온갖 의심을 떨쳐 버리는 것이며, 청이란 설하길 청해서 대중 마음의 욕구를 따르는 것이다. 게송 중에서 처음의 두 구는 침묵의 뜻을 따져 묻는 것이며, 세 번째의 한 게송은 그 설을 베풀기를 청하는 것이다. 나중의 두 게송은 간략해서 징과 청이 없지만 이치로는 마땅히 제등(齊等)함이 있다.
둘째, 찬탄한 바 설하고 들음의 분별에 나아가면 처음의 게송은 저 설하는 자가 설함을 감당함을 찬탄한 것이니, 대중의 무엇을 인하여 의심하는지 버리게 하기 위함 때문이다. 나중의 네 게송은 대중이 들음을 감당함을 찬탄하는 것이니, 대중이 어떤 연(緣)으로 의심하는지 버리게 하기 위함 때문이다. 듣는 자의 네 게송 가운데 나아가면 처음의 두 게송은 동일한 법의 대중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다른 법의 대중을 찬탄한 것이며, 나중의 한 게송은 두 대중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명칭이 동생이생(同生異生)인 것이다. 또 논(論)에서 ‘현전(現前)의 결정이 아닌 것에는 현전 등이 없다’고 말한 것은 증(證)과 교(敎)의 두 결정이 현욕(現欲)의 결정이 아닌 것이다. 또 제1행의 혜(慧)자는 논 가운데 각(覺)에 해당하며, 제4행 중의 하(瑕)자는 곧 불욕(不欲)을 논한 것이며, 예(穢)자는 곧 논 가운데 위의탁(威儀濁)이며, 실(實)이란 곧 논 가운데 다른 상[異想]을 제외한 것이니, 나머지는 준거해서 알 수 있다.
두 번째 청함의 내용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금강장은 앞의 계청(啓請)을 타고서 이미 침묵한 뜻을 나타낸 것이며, 나중의 해탈월은 말[言]을 타고서 거듭 청한 것이다.
전자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긴 행은 나중의 설하는 뜻을 낳는 것이며, 제2의 게송은 해석이다. 게송에는 여섯 게송이 있으니, 처음의 두 게송은 법의 설하기 어려움을 밝힌 것이며, 다음에 있는 두 게송은 법의 듣기 어려움을 밝힌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설하고 들음의 어려움을 비유한 것이며, 나중의 한 게송은 어려움을 들어서 침묵을 매듭 지은 것이다.
또 비유에서 경문의 뜻은 공(空)은 증지(證地)의 체(體)를 비유한 것이고, 풍획(風畫)은 자구(字句)의 언설을 비유한 것이며, 풍획의 머무는 처소는 설한 바 차별된 10지(地)를 비유한 것이다.
【문】이것과 아래의 비유는 어떻게 다른가?
【답】아래에서는 새의 자취가 있는 곳을 취해서 비유로 삼은 것이며, 이를 정황으로 삼아 증명한 것이다. 이 중에선 붓을 움직인 획이 몰아치는 바람임을 선설(宣說)함으로써 비유를 삼았기 때문에 이를 정황으로 삼아서 설한 것이니, 이것의 좌우가 있을 뿐이다. 또 이 획과 새의 발과 아울러 아래의 실담장(悉曇章)의 비유와 아래의 「보현품」은 총체적으로 한 부류이니, 이는 현증(顯證)의 10지를 말한 것이다. 아래의 새 자취의 처소 등은 현증의 10지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10지의 명칭을 설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 역시 준거해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10지의 총체적인 명칭은 또한 삼승 숙교(熟敎)의 명칭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두 게송 중에서 법에는 4중(重)이 있다. 첫째는 법의 어려움을 총체적으로 드는 것이며, 둘째 ‘제1’ 등은 그 어려움의 상(相)을 나타낸 것이며, 셋째는 보살행이 어려운 법의 체(體)를 벗어난 것이며, 넷째 ‘미묘해서 보기 어렵다’ 이하는 어려움의 까닭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논의 경[論經]에 의거한 것이니, 준거해 취해서 생각하여 섭수할 수 있다.
두 번째의 해탈이 청함을 타는 경문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긴 행이고 다음은 게송이다.
긴 행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탈월이 금강장의 어김을 듣고서 거듭 청하는 것이며, 둘째 ‘이 대보살 대중은 직심(直心)이 청정하여’ 이하는 대중의 청정함을 자세히 찬탄한 것이며, 셋째 ‘그러므로[是故]’ 이하는 청해서 설하게 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두 번째인 대중의 청정함을 자세히 찬탄하는 경문에서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아함의 청정함 안의 개별적인 경문 속의 제2구는 제4구를 논하는 데 있고, 경문 속의 제5구는 제2구를 논하는 데 있으며, 또한 경문에 의거해서 정할 수 있으니 반드시 사유해서 준거하라.
둘째, 게송을 거듭함의 경문 내용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긴 행은 생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게송이다. 게송 중에서 처음의 한 게송은 위에서 청함을 매듭 지음을 읊은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위의 청하는 경문을 읊은 것이다.
세 번째의 청하는 내용에서 처음은 금강장이 손해를 들어서 어기는 것이고, 다음은 해탈월이 이익을 찬탄해서 거듭 청하는 것이다. 처음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누니, 처음은 긴 행이고 다음은 게송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앞에서 찬탄한 바를 끌어와서 얻음이 잃음을 겸함을 든 것이며, 두 번째 ‘그 나머지 작은 법을 좋아하는’ 이하는 찬탄하지 않은 바를 가려내어 손해를 들어서 어기는 것이다.
이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선(善)을 망친 손해이고, 두 번째 ‘이 사람’ 이하는 길이 쇠뇌(衰惱)를 받아서 즐거움을 잃는 손해이며, 세 번째 ‘내가 불쌍히 여겨서’ 이하는 침묵하는 까닭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의 게송을 거듭하는 경문에서 처음은 설하는 뜻을 밝힌 것이고, 두 번째는 올바른 게송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한 행 반은 앞의 경문을 거듭함을 매듭 지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 반은 위에서 잃음을 밝힌 것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두 번째의 해탈의 청함 중에서 처음은 긴 행이고 다음은 게송이다. 긴 행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자기 마음을 선포해서 거듭 청하고자 함을 밝힌 것이고, 둘째 ‘바라건대 불력(佛力)을 받들어서’ 이하는 올바로 청해서 설하게 한 것이며, 셋째 ‘그러므로’ 이하는 청해서 설하게 함을 매듭 지은 것이니, 처음의 단락 중에 나아가면 알 수 있다. 둘째의 올바로 청하는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종지를 세워서 부사의법(不思議法)을 설하길 청하는 것이며, 두 번째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신 바’ 이하는 모든 부처님 법이 호념에 응함을 변별한 것이다. 이 경문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호념이니 세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고, 두 번째 ‘왜냐하면’ 이하는 요체와 뛰어남을 변별한 것이며, 세 번째 ‘비유하면’ 이하는 비유의 정황이며, 네 번째 ‘이처럼 불자여’ 이하는 법(法)과 합(合)이다.
두 번째의 게송을 거듭하는 경문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한 게송 반은 설하길 청하는 경문을 밝힌 것이며, 둘째의 한 게송은 앞의 첫 번째 호(護)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두 번째 요체와 뛰어남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비유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네 번째 합하는 비유[合喩]를 읊은 것이다.
두 번째의 대중이 청하는 경문에서 이상은 해탈이 대중을 위해 먼저 청하는 것인데 청하길 비록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허(虛)와 실(實)을 알지 못하니, 대중이 마땅히 스스로 자기의 능력을 밝혀서 앞에서 청한 언사를 이루어야 한다. 또 설함을 일으켜서 법의 존중을 나타내도록 하기 때문에 아래에서 공통으로 청한 것이다. 청하는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동일한 소리로 생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올바른 게송이다. 모든 게송의 경문에는 다섯 행 반이 있으니, 처음의 네 행 반은 사람을 찬탄함으로써 청하는 것이고, 나중의 한 게송은 법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단락에 나아가면 처음의 두 게송은 그 설하는 자를 찬탄한 것이고, 나중의 두 게송 반은 대중이 들음을 감당함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에 있는 다섯 구는 금강장이 스스로 증력(證力)과 아함력(阿含力)을 성취함을 찬탄한 것이며, 아래의 세 구는 금강장이 능히 듣는 자로 하여금 증득과 아함에 들어가게 함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에 있는 네 구는 증력을 성취함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에 있는 한 구는 아함을 성취함을 찬탄한 것이다. 듣는 자를 찬탄함 중에 나아가면 처음의 한 게송 반은 대중이 지단덕(智斷德)을 갖춤과 아울러 먼저 근(根)이 있음을 스스로 찬탄한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감당해서 사유해 유지함을 찬탄한 것이다.
세 번째,2) 부처님의 가(加)로써 청(請)한 내용에서 이상은 비록 다시 보살 대중이 청하더라도 감응을 따름이 미약함으로 말미암아 법을 나타냄이 아직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청하신 것이다. 또 보살이 청함은 법을 나타내는 것이 아직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부처님의 가(加)로써 청한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신가(身加)를 밝힌 것이고 나중은 구가(口加)를 밝힌 것이다.
신가는 경 속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시어 널리 시방을 비추시는 것이며, 둘째는 시방의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시어 이것을 비추시는 것이며, 셋째는 이 대중이 광명을 찾아서 저것을 보는 것이며, 넷째는 저 대중이 광명을 찾아서 이것을 보는 것이며, 다섯째는 광명 구름 대[光臺]가 게송을 설하는 것이다. 광명 구름 대(臺)가 게송을 설하는 것은 마땅히 구가(口加)에 속해야 하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그러나 나오는 바의 소리는 구가에 섭수되는 바이지만 지금 여기서는 능히 소리의 업[聲業]을 발함을 올바로 취한 것이니 판단하면 신(身)에 속하는 것이다. 만약 경본(經本)에 의거한다면 이것이 저것을 보는 것과 저것이 이것을 보는 것이 없으니, 둘 모두 없는 것이다. 또 경에서는 제5의 업을 조복함[降伏業]이 빠져 있다. 또 이 광명은 불력(佛力)의 분제와 가(加)로써 설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지 모인 대중 등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머지 경문은 논(論)과 같다.
두 번째 구가(口加)의 경문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긴 행은 생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게송이다. 게송 중에는 일곱 게송 반이 있는데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청(敎請)의 분별이니, 앞의 여섯 게송은 그 청설(請說)이고, 나중의 한 게송 반은 교설(敎說)이다. 청(請)함은 법의 뛰어남을 밝혀서 사람으로 하여금 깊게 공경토록 하고, 교(敎)는 설함의 진(眞)을 나타내서 대중으로 하여금 깊게 믿게 한 것이다. 둘째는 가청(加請)의 분별이니, 이 게송에 나아가면 앞의 여섯 게송 안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한 게송 반은 정가(正加)이고, 두 번째에 있는 한 게송은 가(加)의 소위(所爲)이며, 셋째에 있는 세 게송 반은 이익을 얻음을 밝힌 것인데 이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한 게송은 들음의 이익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닦을 때의 이익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더욱더 생겨나는[轉生] 이익이다. 또 이 전생(轉生)의 경문 가운데 게송은 이해하기 어려움에 봉착한 것이다.
경문의 의취(意趣)라는 것은 그 경법(經法)의 뛰어난 힘이 그 듣는 자를 가(加)하고, 나아가 화겁(火劫)이 다할 때라면 경(經)을 듣게 됨을 말미암는 것이다. 논(論)에서 동등하다고 말한 것은 나머지 2재(災)도 모두 듣게 되는 것과 동등한 것이다.
【문】저것은 무엇을 듣는다고 말하는가?
【답】저 천(天)이 먼저 부처님으로부터 듣고, 지금은 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극(極)에 있으면서 말하는 것이지 이 때에 국한한 것은 아니다. 용(龍) 중에서 먼저 경에 있기 때문에 인용했을 뿐이다. 또 세 가지 점차(漸次)라는 것은 곧 가행(加行)과 정체(正體)와 후득(後得)의 3지(智)이니, 이는 준거해 생각해서 섭수할 수 있으며, 또한 가르침과 증득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의 ‘이 때 금강장보살’ 이하는 설분(說分)의 제등함을 보여서 대중으로 하여금 올바르게 알게 한 것이다. 이 경에 나아가면 처음의 집경(集經)이란 금강장이 장차 설하는 상(相)과 아울러 설하는 뜻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고, 나중은 그 설하는 바의 게사(偈辭)를 올바르게 밝힌 것이다. 앞의 경문에 나아가면 처음은 설하는 상(相)을 보인 것이니, 관찰이 설함을 표현한다. 내심(內心)으로 비추어 관찰함을 이름하여 관(觀)이라 하고, 또한 눈으로 흘깃 돌아보고서 설하는 것을 관이라 하니, 이미 치우침이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시방을 관한다’ 이하는 설하는 뜻을 밝힌 것임을 알 수 있다.
금강장에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게송을 설하니, 첫째는 지혜가 설함을 감당함을 스스로 나타냄으로써 대중이 무엇으로 인하여 의심하는지를 떨쳐버리는 것이며, 둘째는 이미 대중이 청문(聽聞)을 감당치 못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밝힘으로써 대중이 무엇을 연하여 의심하는지를 떨쳐버리는 것이다.
【문】대중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답】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이익이다. 첫째는 의대(義大)의 이익이니, 실제로 말을 내서 오직 깊은 것만이 즐거움이기 때문에 이익을 얻음을 밝힌 것이다. 둘째는 설교대(說敎大)이니, 듣게 된 것이 지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환열(歡悅)의 깊음이 올바른 믿음을 낳은 것이다.
게송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13게송 반이 있다. 처음의 일곱 게송 반은 그 의대(義大)를 밝힌 것이고, 나중에 있는 여섯 게송은 그 설대(說大)를 밝힌 것이다. 의대의 경문 속에 나아가면 경문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처음의 세 게송 반은 그 불법(佛法)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의 네 행 게송은 저 불법을 들어서 지(地)가 말을 냄을 나타낸 것이다. 지금은 지(地)를 밝히기 위한 것인데, 어째서 저 불법의 미묘함을 나타낼 필요가 있는가? 지(地)가 인(因)에 있음으로써 깊은 뜻의 은밀함을 변별하고, 불법이 과(果)에 있음으로써 깊은 뜻의 나타남을 밝히기 때문에 불법을 밝혀서 지(地)의 깊고 미묘함을 나타낸 것이다. 인(因)은 과(果)와 더불어서 높고 낮은 천(天)이 다른데 어떤 상(相)이 나타난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이것이 비록 다시 사람에 따라 높고 낮더라도 법체(法體)는 다르지 않으니, 마치 허공이 자[尺]를 기준하여 차이를 나누더라도 그 차이가 그대로 공(空)인 것과 같으니, 지법(地法)도 이를 본받은 것이다.
처음의 경문3) 내용에 나아가면 처음의 한 게송 반은 곧바로 법의 미묘함을 밝힌 것이고, 나중의 두 게송은 미묘함의 체상(體相)을 낸 것인데 이른바 두 가지 열반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미묘함을 총체적으로 변별한 것이고, 둘째 ‘오직 지혜 있는 자만이[唯智者]’ 이하는 상(相)을 해석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미묘함이고, 둘째는 알기 어려운 도(道)이며, 셋째는 사량으로 논할 것이 아님을 비분별(非分別)이라 이름 붙인 것이며, 넷째는 이름하여 무구탁(無垢濁)이라 하는데 경에는 이 구(句)가 없으며 아래의 세 구는 있다. 또 무구탁 이하에 네 가지 뜻이 있는 것도 역시 옳다고 하겠으니, 난득(難得)은 위에 속하고 무구(無垢)는 아래를 향한다. 또 두 향(向)에 모두 속하는 것이니, 생각하여 준거할 수 있다. 첫째는 관해(觀解)의 청정이고, 둘째 ‘지자(智者)’ 이하는 행증(行證)이 진(眞)에 계합하는 것이고, 셋째 ‘자성 등(自性等)’ 이하는 체성(體性)의 청정이고, 넷째 ‘불멸 등(不滅等)’ 이하는 덕용(德用)의 자재로움이다. 이상은 논(論)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인데 경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 세간의 지혜가 있으면 듣는 데 따라서 명료히 아는 것이니, 아래에서는 세간의 지혜가 경문에 따름을 들어서 진지(眞智)는 들음을 따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 논에서 매듭 짓기를 ‘관해(觀解)는 매우 미묘하다’고 한 것은 불탁(不濁)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 지(止)에 의지하여 지자(智者)를 매듭 지은 것 등은 이(理)와 지(智)가 의거함이 되는 것이다.
셋째, 청정의 매우 미묘함은 자성의 멸(滅) 등을 매듭 짓는 것이며, 공덕 등은 불생불멸 등을 매듭 짓는 것이다.
또 첫 번째는 세간을 벗어났기 때문에 세간의 정(定)과는 동일치 않은 것이며, 두 번째는 실다움을 성취하기 때문에 외도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며, 세 번째는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처음으로 청정한 존자(尊者)와는 동일치 않은 것이며, 네 번째는 정(靜)에 즉해서 항상 쓰기 때문에 성문 등과 동일치 않은 것이니, 나머지 뜻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래의 두 게송에 나아가면 미묘한 체상(體相)을 낸 것이니, 경문을 나누면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 있는 두 구는 그 동상(同相)이고, 나중의 한 게송 반은 동일하지 않은 상(相)이다. 동일하지 않은 상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어느 처소든 해탈하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취(趣)를 여의는 것이며, 둘째의 다섯 구는 ‘무엇이 해탈인가’를 말한 것이다. 다섯 구를 그대로 나누면 다섯이 되는데, 첫째는 관해(觀解)가 여(如)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른바 열반의 상(相)과 동등한 것이며, 둘째는 대치(對治)해서 장애를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체(體)와 덕(德)이 원만히 갖추어졌음을 밝힌 것이고, 넷째는 그 법신이 항상하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고, 다섯째의 한 구는 해탈 자체의 걸림 없음이다.
또 논에서 “오직 처음과 중간과 나중만이 아니라, 앞에서 뒤를 취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지(智)의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 지(智)의 사(事)를 기준으로 한 뜻은 아니다. 지(智)가 일어나고 미혹이 다음으로 멸하는 것인가, 또는 지(智)가 생기고 미혹이 멸하는 것이 동시인가? 이것을 중간이라 이름할 뿐이다. 또는 미혹이 멸한 다음에 지(智)가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런 것들은 다 옳지 않으니, 모두 항상 생(生)하고 항상 불생(不生)하며 항상 멸(滅)하고 항상 불멸(不滅)하는 등의 과오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과 중간과 나중은 연기의 성품대로 취한 것이다. 또 ‘이 같은 관지(觀智)’ 등이란 것은 차례대로 앞의 동일하지 않은 상(相)의 방편이 열반을 무너뜨림을 매듭 지은 것이니, 다섯 가지 뜻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앞의 불법을 들어서 지(地)가 말을 여읨을 나타낸 내용에서 그 가운데 네 게송이 있으니, 처음의 한 게송 반은 앞의 두 가지 열반을 듦으로써 지법(地法)을 유비(類比)한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 반은 지체(地體)의 설하기 어렵고 듣기 어려움을 올바로 밝힌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설하기 어렵고 듣기 어려움을 비유한 것이다. 앞 가운데 세 구는 앞서 불법의 적멸(寂滅)이 말을 내는 것을 거듭 든 것이며, 아래에 있는 세 구는 지(地)의 설하기 어려움과 다시 듣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이다. 또 논에서 지(地)라고 말한 것은 경계이고, 관(觀)이라 한 것은 혹은 이름하여 분제(分齊)라 하고, 혹은 소연(所緣)일 뿐이다.
둘째,4) 설대(說大)의 경문 중에는 여섯 행의 게송이 있는데 뜻은 다섯 가지로 나눈다. 처음 한 게송의 세 구는 설함의 분제를 밝힌 것이고, 다음의 세 구는 이미 허물 없는 것으로써 대중에게 권하여 잘못을 없앰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 반은 그 설상(說相)이 간략하여 자세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대중에게 공경히 듣기를 권하여 이미 훌륭하게 설함을 밝힘으로써 대중의 공경과 사랑을 낳는 것이며, 다음에 있는 한 게송은 이미 얻은 힘을 나타내서 설함의 분제를 매듭 지은 것이다. 또 논에서 ‘단지 1분(分)을 설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인분(因分)이다.
지(地)에는 두 가지 분(分)이 있으니, 하나는 인(因)이고 둘은 과(果)이다. 인은 이른바 세간의 방편행을 닦는 것이니, 곧 가행지(加行智)의 분제이다. 과(果)는 이른바 세간을 벗어나고, 상(相)을 여읜 참다운 증득이니, 곧 정증(正證)의 분제이다. 참다운 증득은 말을 벗어난 것이다. 인상(因相)은 논할 수 있는데, 지금은 오직 인(因)만을 설하기 때문에 1분을 설한 것이며, 또한 지위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른바 듣고 사유하는 등이 돈(頓)이 아닌 점진적 성취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또 자량하여 성취하는 뜻을 기준으로 하면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그 인(因)을 자량하여 성취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증(證)을 자량하여 성취하는 것이다. 교설(敎說)을 닦는 것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참마음의 구경(究竟)이 덕을 성취해서 만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며, 둘째 ‘관수(觀修)’라는 것은 참마음이 허망함을 여의어서 안으로 법계를 비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이 두 가지와 나중에 얻은 정설(正說)이 상응하기 때문에 교설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불상응의 뜻은 의대(義大)에 속할 뿐이다.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설분(說分)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여섯 문으로 분별한다. 첫째는 명칭을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제거할 바의 장애를 밝힌 것이며, 셋째는 나타난 바의 이(理)를 변별한 것이며, 넷째는 성취한 바의 행을 밝힌 것이며, 다섯째는 얻은 바의 과(果)이며, 여섯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인데, 모든 지(地)가 이와 동일하다.
첫째, 명칭을 해석한 것에서 처음을 이름하여 환희(歡喜)라 하니, 위없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성취하여 처음으로 성처(聖處)를 증득해서 환희를 낳음이 많기 때문에 환희지라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 장애를 제거하는 것에서 『지론』에 의거하면 범부아상(凡夫我相)의 장애라 이름하고, 『섭론(攝論)』에 의거하면 범부성무명(凡夫性無明)이라 이름한다. 또 두 가지 장애로 나누니, 첫 번째는 법(法)과 아(我)를 분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악도(惡道)의 업이다. 또 두 종류의 업과 한 종류의 보(報)를 다스리는 것이니, 이른바 방편의 생사(生死)이다. 무엇을 다스린다고 말하는가? 허공 등과 같으니, 자세히는 논(論)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셋째, 나타난 바를 밝힌 것은 이른바 법계의 두루 하고 원만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 성취한 바를 밝힌 것은 단도(檀度:단바라밀)와 10원(願) 등을 성취한 것이다.
다섯째, 얻은 바의 과(果)를 밝힌 것에서 만약 과에 국한하여 취한다면 오직 공(空)을 가로막는 뜻을 통달하는 것만이 일체의 장애가 소멸하는 과와 지위 등을 얻는 것이고, 만약 통틀어서 과를 판단한다면 유식(唯識)의 세 가지 무성(無性)의 이(理)를 얻는 것과 사마타(奢摩他)ㆍ비발사나(毘鉢舍那) 등을 얻는 것이다.
여섯째, 경문을 해석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긴 행이고 나중은 게송이다. 긴 행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앞을 매듭 짓고 나중을 낳는 것이며, 둘째 ‘만약 중생이’ 이하는 지체(地體)의 상(相)을 변별한 것이다. 이 경문의 상(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설분(說分)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의 ‘보살이 이같이 안주해서’ 이하는 승분(勝分)을 교량(校量)한 것이다.
설분(說分)의 경문에 1백 구가 있으니, 처음의 40구는 주분(住分)이라 이름하고, 다음의 30구는 명분(名分)을 해석함이라 이름하며, 나중의 30구는 안주(安住)가 됨을 설한 것이다. 전자의 40구는 논(論)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처음의 10구 중에서 경에는 정심집(淨心集)이 빠져 있다. 명칭을 해석함에 나아가서 30구 중 처음의 10구는 기쁨이 많은 것인데, 이 중에서 경에는 경희(慶喜)의 문장이 빠져 있다. 논(論)에 의지하는 가운데 ‘심희(心喜)’라 말한 것은 심체(心體)가 기쁜 것이 아니라 기쁨을 섭수해서 마음을 좇는 것이다. 체(體)의 기쁨도 역시 이와 같다. ‘근희(根喜)’라는 것은 체(體)가 나중을 성취하는 것으로써 근(根)을 삼는 것이지 근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10념(念)은 미래에 얻을 것이고, 나중의 10념은 현재에 얻을 것이니, 염현(念現)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소념(所念)의 현득(現得)을 올바로 밝힌 것이고, 둘째 ‘왜냐하면’ 이하는 다섯 가지 두려움[怖畏]을 멀리 여읨을 자세히 해석한 것이며, 또한 제10 중에 나아가서 나눈 것이라 할 수 있다.
포외를 해석한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따지는 것이고 다음은 답이다. 답의 내용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여읜 바의 과(果)를 밝힌 것이고, 둘째 ‘왜냐하면’ 이하는 여의는 상(相)을 해석하여 이룬 것이며, 셋째 ‘이와 같이 보살은’ 이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또 논(論)에서 ‘앞에서는 신외(身畏)를 설하였고, 나중은 이신(異身)의 두려움이다’라고 말한 것은 먼저 총체적으로 밝히고 나중에 개별적으로 변별한 것이기 때문에 이신(異身)이라 한 것이지 신(身)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안주(安住)함에 나아가서 경문을 나누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안주를 밝힌 것이고, 둘째 ‘이른바 신심(信心)’ 이하에 있는 30구는 개별적으로 안주를 밝힌 것이며, 셋째 ‘보살이 이같이 성취해서’ 이하는 총체적으로 안주를 매듭 지은 것이다. 30구를 자세히 변별함에 나아가면 처음은 10신(信)이고, 다음은 10수행(修行)이며, 다음은 10회향이니,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둘째, 원교량(願校量)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교량의 뛰어남이고, 둘째는 행교량(行校量)의 뛰어남이며, 셋째는 과교량(果校量)의 뛰어남이다.
10원(願)이라 말한 것에서 첫째는 부처님을 공양하는 원(願)이며, 둘째는 정법을 수호하는 원이며, 셋째는 법을 섭수하는 것을 제일[上首]로 하는 원이며, 넷째는 중생의 마음을 아는 것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교화함이라 이름하며, 여섯째는 세계를 아는 것이라 이름하며, 일곱째는 정토(淨土)이며, 여덟째는 동심행(同心行)이며, 아홉째는 3업(業)의 불공(不空)이며, 열째는 보리를 성취하는 것이다.
『섭론』에 의거해서도 10원(願)이 있다. 첫째는 공양의 원(願)이니, 뛰어난 연(緣)의 복전(福田)인 사법주(師法主)를 공양하길 원하는 것이며, 둘째는 수지(受持)의 원이니, 뛰어나고 미묘한 정법을 수지하길 원하는 것이며, 셋째는 법륜을 굴리는 원이니, 대집륜(大集輪) 중에서 미증유의 법륜을 굴리길 원하는 것이며, 넷째는 수행의 원이니, 설한 대로 일체 보살의 올바른 행을 수행하길 원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성취의 원이니, 이 기세계(器世界) 중생이 삼승의 선근을 성취하길 원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승사(承事)의 원이니, 모든 불국토에 가서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뵙고 항상 공경하고 섬기면서 정법을 듣고 받아들이길 원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정토의 원이니, 청정한 스스로의 땅이 정법에 안주하고 아울러 능히 중생을 수행하길 원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여의지 않는 원이니, 일체 중생처(衆生處)에서 항상 모든 불보살을 여의지 않고서 똑같은 뜻의 행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이익의 원이니, 모든 때[時]에 항상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지으면서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며, 열째는 정각의 원이니, 모든 중생과 더불어 똑같이 위없는 보리를 얻어서 항상 불사(佛事)를 짓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 이 열 가지 원은 앞의 열 가지 원과 더불어 뜻이 똑같아서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경문의 내용에 나아가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을 매듭 지어서 나중을 낳는 것이고, 둘째는 원(願)의 체(體)를 올바로 밝힌 것이다. 그리고 처음의 원에선 두 구가 빠져 있고, 아홉째의 원에선 여의보신(如意寶身)이 빠져 있다. 셋째 ‘모든 불자’와 나아가 ‘대원(大願)’ 등에 이르기까지는 원(願)의 방편을 닦음을 밝힌 것이다. 넷째 ‘10불가(不可)로써’ 이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만약 논본(論本)에 의거한다면 10무진(無盡)이 앞의 대원(大願)을 성취함을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고, 만약 경본(經本)에 의거한다면 이 네 번째가 원(願)의 다함 없음을 매듭 지은 것이다.
이 경문 속에 나아가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과 원(願)을 들어서 종지를 세운 것이고, 둘째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하는 10진법(盡法)을 열거한 것인데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만약 중생이 다한다면[若衆生盡]’ 이하는 법을 가지고 원(願)을 대함으로써 다함을 성취함을 역(逆)으로 나타낸 것이다. 넷째 ‘그러나 중생[而衆生]’ 이하는 다함 없음을 순(順)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또 여섯 번째 원(願) 가운데 논에서 ‘추(麤)와 세(細)를 변별한다’고 한 것에서 모두 “어떤 의(意)ㆍ식(識)ㆍ신(身)ㆍ색(色)ㆍ심(心)의 추세(麤細)를 따른다”고 말했기 때문에 땅도 역시 추세이니, 나머지 상(相)은 논과 같다.
또 세 가지 3전(轉)이란 것은, 10진(盡)의 구(句)에 나아가면 개별 중에서 중생계ㆍ세계ㆍ공계(空界) 및 심연계(心緣界) 등의 네 가지는 세간전(世間轉)이고, 법계ㆍ열반계ㆍ불지입계(佛智入界)의 이 세 가지는 이름하여 법전(法轉)이라 한다. 불출세계(佛出世界)와 여래지계(如來智界)의 이 두 가지는 지전(智轉)이 된다.
둘째, 행교량(行校量)의 승분(勝分)의 경문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앞을 거듭 들어 나중을 일으킨 것이고, 둘째는 행의 체(體)를 올바로 해석한 것이며, 셋째 ‘모든 불자가 다 안다’ 이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의 행을 해석한 경문 내용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원이 마음을 훈(熏)해서 이안(利安) 등의 이익을 성취한 것이며, 둘째 ‘이와 같다면 성취한다’ 이하는 사람이 믿음을 성취하는 것이며, 셋째 ‘즐거이 믿음으로써 분별한다’ 이하는 믿음의 상(相)을 자세히 밝힌 것이다.
이 경문의 10행은 곧 열 가지 단락이 된다. 처음 믿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종지를 총체적으로 세운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셋째는 요체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아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 자비를 해석한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 3문(門)을 든 것은 소관(所觀)이 되고, 둘째는 대(對)해서 자비를 일으킨 것이다. 전자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는데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논(論)에서 “제일의(第一義)의 즐거움을 멀리 여읨을 변별한 것 중에서 3공(空)은 세 가지 장애를 여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분별상의 취하고 버리는 것 등이 곧 세 가지 성품의 장애이다. 나머지 행은 논과 같으니 이해할 수 있다.
셋째, 과교량(果校量)의 승분의 경문에 네 가지 과(果)가 있는데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 조유과(調柔果)의 내용에서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법 중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많은 부처님을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며, 둘째 ‘마음이 크게 환희해서’ 이하는 능련(能練)의 행을 밝힌 것이며, 셋째 ‘많이는 두 가지 섭수로써[多以二攝]’ 이하는 앞에서 수련한 행을 타고서 개별적인 지(地)의 덕을 밝힌 것이며, 넷째 ‘이 보살’ 이하는 수련한 바[所練]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다.
둘째, 발취과(發趣果)의 경문 내용은 두 가지로 나누는데 처음은 해석이고 나중은 매듭 지음이다. 전자의 경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이고, 둘째는 비유이며, 셋째는 합(合)이고, 넷째는 매듭 지음이다. 법과 비유와 합 중에는 모두 네 구가 있으니, 첫 번째는 지(地)의 법을 묻는 것이고, 두 번째 ‘이 보살이 잘 알아서’ 이하는 지해법(智解法)을 밝힌 것이고, 세 번째 ‘모든 불자여’ 이하는 능행(能行)의 행을 밝힌 것이고, 네 번째 ‘모든 지의 지혜를 얻는다[得諸地智]’ 이하는 그 능히 도달함을 밝힌 것이다. 비유와 합의 네 구(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셋째, 섭보과(攝報果)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재가(在家)의 과(果)이고, 둘째는 출가(出家)의 과이다. 재가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상승과(上勝果)이고, 둘째 ‘능히 큰 보시로써[能以大施]’ 이하는 이른바 왕의 과보[王報]에 의거해서 뛰어난 행을 일으킨 것이다.
원지과(願智果)는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둘째, 게송 중에는 45행 반이 있다. 처음의 22게송은 위의 설분(說分)을 읊은 것이며, 다음 ‘보살이 이와 같이’ 이하의 21게송 반은 교량의 승분(勝分)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총체적으로 매듭 지어서 찬탄한 것이다.
처음 경문의 내용에서 처음의 11게송은 지(地)의 방편과 주지(住地)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이 보살’ 이하의 다섯 행 반의 게송은 저 명칭을 해석함과 다섯 가지 두려움[怖畏]을 읊은 것이며, 다음 ‘언제나 행하며[常行]’ 이하의 다섯 행 반의 게송은 안주(安住)의 경문을 읊은 것이다. 다음 21행 반의 게송 경문 내용에서 처음의 다섯 행 반 게송은 10원(願)의 매듭 지음과 다함 없음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 여섯 행의 게송은 신(信) 등 10행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 ‘지자(智者)가 밤낮으로’ 이하의 열 행 게송은 과교량을 읊은 것인데 그 중에서 처음의 한 게송은 조유과를 읊은 것이고, 다음의 세 게송은 발취과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다섯 게송 반은 섭보과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만약 원력으로써 하면’의 반 게송은 원지과를 읊은 것이다.
제2지(地)의 내용에서 여섯 문은 앞과 같다.
명칭을 해석한 것에서 능히 마음을 그르치고 계율을 범해서 일으킨 번뇌의 더러움 등을 여의어서 청정한 계(戒)를 구족하기 때문에 이구지(離垢地)라 이름한다.
둘째, 여의는 바를 밝힌 것이다. 『지론』에 의거하면 중생신(衆生身) 등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장애이며, 『섭론』에 의거하면 신업(身業) 등에 의지해서 모든 중생에 대해 삿된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명은 또한 두 가지 장애를 다스리니, 첫째는 미세(微細)의 과오를 범함이며, 둘째는 갖가지 상(相)의 업행(業行)이다. 또 두 가지 업의 장애와 하나의 보(報)의 방편 생사를 다스린다.
셋째, 나타낸 바라는 것은 가장 뛰어난 뜻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 성취한 바라는 것은 계도(戒度:계바라밀)를 성취하는 것이다.
다섯째, 얻는 바의 과(果)라는 것은 만약 법계의 가장 뛰어난 공덕을 통달하면 일체 중생의 가장 뛰어나고 비길 바 없는 보리의 과(果)를 얻는 것이니, 전체적인 과(果)는 초지(初地)와 동일하다.
여섯째, 경문을 해석하는 것이니,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게송은 생기하는 것이고, 둘째의 긴 행은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의 게송은 앞을 매듭 지은 것이다.
처음의 게송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세 게송은 대중이 이익을 얻는 것이니, 3업의 공양이 곧 세 가지가 된다. 다음에 있는 두 게송은 해탈월이 청해서 후지(後地)의 경문을 낳는 것이다.
둘째의 올바로 해석하는 경문 내용에 두 단락의 경문이 있으니, 하나는 발기(發起)의 청정함이고, 둘은 자체(自體)의 청정함이다. 발기라는 것은 지(地)의 방편에 취향하는 것이다. 후지(後地)를 낳음 중에서 3취정계(聚淨戒)를 발기의 청정함이라 이름하고, 3취정계가 지(地) 중의 올바른 행이기 때문에 자체의 청정함이라 이름한다.
처음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금강보살은 앞을 매듭지어서 나중을 낳는 것이며, 둘째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하는 발기를 올바로 해석한 것이며, 셋째 ‘보살이 이로써’ 이하는 이익을 성취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의 자체의 경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행의 체(體)를 밝힌 것이고, 두 번째는 지(地)의 과(果)를 변별한 것이다.
첫 번째인 행의 체(體)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먼저는 율의(律儀)를 해석한 것이고, 다음은 선(善)을 섭수함을 해석한 것이며, 나중은 중생을 섭수함을 변별한 것이다.
이 10지 안의 과문(科文)은 일정하지 않다. 초지와 제10지는 똑같이 나누어서 여덟이 되고, 이 지(地)는 둘이 되며, 3지와 4지와 9지는 넷이 되고, 5지와 6지는 똑같이 셋이며, 제7지는 다섯이 되고, 8지는 일곱이 되니, 각기 하나의 법을 따를 뿐이다. 이는 지법(地法)이 매우 깊기 때문에 방편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지, 오직 하나의 지(地)에만 이러한 1문(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율의에 나아가면 크게 판단해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계(性戒)가 성취되어서 모든 허물을 단박에 여읨을 밝힌 것이고, 둘째 ‘보살이 이와 같이’ 이하는 필경에는 호지(護持)하는 것이다. 처음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다시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은 자성의 성취를 밝힌 것이고, 둘째 ‘일체를 멀리 여의어서’ 이하는 모든 허물을 단박에 여의는 것이다. 또 논(論)에서 ‘이 두 종류의 친구’라고 말한 것은 2가(家)의 말을 기억하여 그 2가에게 가서 거짓으로 친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또 경에서 ‘이것의 들음이 저것을 향하지 않고 이것의 무너짐을 설하기 때문에 등’이란 것은 이것의 유지하는 뜻을 변별한 것이니, 피차가 서로 무너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설하지 않은 것이다.
또 제10의 사견(邪見) 중에서 일곱 가지 사견의 이상(異相)이란, 첫째 이승(異乘)의 사견이 개별적으로 출세간의 행에 의거하는 것이며, 다음의 둘은 유사한 법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니, 그리하여 기(記)와 무기(無記)의 두 가지로 나눈다. 다음의 하나는 무(無) 중의 허망한 계교에 의지하는 것이며, 다음의 둘은 은복(隱伏)의 법에 의지해서 생기하는 것이니, 그리하여 하나는 용(用)의 안이요 하나는 용의 밖이니 두 가지로 나눈다. 다음의 하나는 세간법에 의지해서 생기하는 것이다. 경에서는 제1구와 제3구 등의 경문이 빠져 있다. 또 결정(決定)의 깊은 믿음은 이승(異乘)이고, 죄와 복의 인연은 복장견(覆藏見)이다. 경문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의당 사유해서 준거해야 한다.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둘째5)는 섭선법계(攝善法戒)의 경문인데 경문은 다섯 가지로 구별하며, 뜻으로는 네 가지로 구별하는데 요약해 섭수하면 두 가지가 된다. 경문의 다섯 가지라고 말한 것은 아래의 경문과 같으니, 다섯 처소는 경론을 들어서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뜻을 네 가지로 구별하는 것에서 첫째는 지(智)이고, 둘째는 원(願)이며, 셋째는 관(觀)이고, 넷째는 행(行)이다. 첫째, 중생이 일체의 악(惡)을 따르는 것은 모두가 열 가지 불선도(不善道)를 말미암기 때문이라고 사유하는 것이 바로 지(智)이다. ‘나는 마땅히 스스로 머문다’ 등은 그 원(願)이니, 이 경문에 세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깊이 사유한다’ 이하부터 ‘여래’에 이르기까지는 그 관(觀)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이하는 그 행이다. 요약하면 두 가지가 된다는 것은 처음의 둘이 하나로서 지(智)를 대해서 방편이 되어 뒤의 올바른 원(願)을 일으키는 것이며, 나중의 둘이 하나로서 관(觀)을 대해서 방편이 되어 뒤의 올바른 행(行)을 일으키는 것이니,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셋째6)는 섭중생계(攝衆生戒)의 경문인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중생을 섭수함[攝生]을 자세히 밝힌 것이며, 둘째 ‘모든 불자여, 이 보살은 이처럼’ 이하는 중생을 섭수함을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니, 나머지 뜻은 논과 같다.
살생 등은 두 종류의 사람 가운데 과(果)를 얻는데 무엇인가?
【답】이것의 습(習)이란 것은 기(氣)의 습이 아니니, 이는 잔습(殘習)이라 이름 붙인다. 인도(人道)를 수순하는 업이란 것은 사람 속에 있으면서 따로 과보를 받는 것이며, 정보(正報)가 단(斷) 등을 수순한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람 가운데 정해지지 않은 과보이니, 마땅히 준거할 수 있다. 만약 명언(名言)으로써 구한다면 두 가지 과보도 역시 우열이 있고 유(有)와 무(無)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이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3도(道)를 거치는 것도 그 뜻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자세히는 『대론(大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2도(倒)의 악의(惡意)와 전념(專念)의 행이란 것은 연(緣)을 살펴서 뜻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상락(常樂)의 2도(倒)가 연(緣) 가운데서 현기(現起)하기 때문에 뜻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이(理)를 어긴 것을 악(惡)이라 이름 붙이니 이것은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고, 뜻을 지어서 낳는 것을 전념의 행이라 이름한다. 2도(倒)의 악심이 전념이 아니라는 것은 근본의 집기(集起)가 그 마음의 뜻이고, 아정(我淨)의 2도는 앞의 상락(常樂)을 조망하는 것이니, 근본의 집기이기 때문에 마음이라 설하는 것이다. 아(我)는 상(常)의 근본이고 정(淨)은 낙(樂)의 근원이니, 이 둘은 성품이 이루어진 것이지 작의(作意)로 생긴 것이 아니라서 전념이 아니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 나중의 과보를 추적하는 중에서 경에는 장(障) 중의 제8구와 실(失) 가운데 제1구가 빠져 있다. 또 계(界)의 차별의 내용에서 제2 개별적인 구(句) 안의 경의 제1구는 논의 제3구이며, 제2 지과(地果)의 경문 안에서 3과(果)는 앞과 같다.
조유(調柔)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조유의 상(相)이고, 둘째 ‘보살은 이 때’ 이하는 개별적인 지(地)의 행상(行相)이며, 셋째 ‘불자여, 이 명칭이’ 이하는 과상(果相)을 설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전자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법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부처님을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며, 둘째는 능련(能練)의 행이며, 셋째는 소련(所練)의 청정함이다. 행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공양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회향을 밝힌 것이며, 나중은 열 가지 선법(善法)의 행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경에 의거하면 회향이 생략되고 없다.
과보의 섭수는 초지(初地)와 동일한데, 『섭론』에 의거하면 2지(地) 이후에는 여덟 가지 청정이 있다. 여기서 많은 부처님을 보는 것은 곧 저기서 부처님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며, 여기서 옷을 입는 것과 나아가 공경하는 마음은 곧 저기서 신(信)의 청정함이고, 여기서 청정한 계율은 곧 저기서의 바라밀이고, 여기서 왕을 짓는 것은 곧 저기서 제6의 중생을 성취함이고, 여기서 부처님을 염(念)하는 것은 곧 저기서 마음의 청정이고, 여기서 수(首) 등이 되는 것은 곧 저기서의 자비이고, 여기서 천 겁 등에 머무는 것은 곧 저기서 중생의 청정함이고, 여기서 대지가 흔들리는 등은 곧 저기서의 위덕(威德)이니, 나머지 지(地)는 이에 준거하라.
셋째,7) 게송을 거듭함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설하는 뜻을 밝히는 것이고, 둘은 올바른 게송이다. 게송에는 26게송이 있는데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두 게송은 발기(發起)이고, 다음의 16게송은 자체의 청정함이며, 다음에 있는 일곱 게송은 과(果)의 이익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찬탄을 매듭 지은 것이다. 자체의 경문 중에서 처음에 있는 네 게송은 여의는8) 계의 청정함[離戒淨]을 읊은 것이고, 다음에 있는 네 게송은 선법을 섭수함을 읊은 것이며, 다음에 있는 여덟 게송은 중생을 섭수하여 이롭게 함을 읊은 것이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경문 내용에서 처음에 있는 세 게송은 원행(願行)의 집(集) 등을 읊은 것이며, 다음에 있는 다섯 게송은 집과(集果)의 경문을 읊은 것이다. 과(果)의 이익 중에서 처음의 두 게송은 조유(調柔)를 읊은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섭보(攝報)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원지(願智)를 읊은 것이다.
제3지(地) 안의 여섯 문은 앞과 같다.
첫째는 명칭을 해석한 것이니, 듣고[聞] 사유하고[思] 수행하는[修] 등을 따라서 법을 비추어 현현하기 때문에 명지(明地)라고 이름한다.
둘째, 여의는 바라는 것은 『지론』에 의거하면 암상(闇相)은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등에서 모든 법을 망령되게 장애하는 것이고, 『섭론』에 의거하면 심지(心遲)와 고(苦)와 무명은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무명에 다시 두 가지 무명이 있으니, 하나는 욕애(欲愛)의 무명이고, 둘은 구족문지다라니(具足聞持陀羅尼)의 무명인데, 2업(業)의 장애와 1보(報)의 방편 생사가 있다.
셋째, 나타낸 바를 밝힌다는 것은 승류(勝流)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넷째, 성취한 바를 밝히는 것은 곧 인행(忍行)과 4정(定)을 성취하는 것이다.
다섯째, 얻은 바의 과(果)를 밝히는 것이니, 법계의 승류(勝流)의 문구와 공덕을 통달해서 가없는 법음(法音)을 얻는 것과 아울러 일체 중생의 의욕과(意欲果)와 3지위(地位)를 능히 채우는 것인데, 전체적인 과(果)는 초지(初地)와 같다.
여섯째, 경문을 해석하는 것인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게송을 발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주지(住地)의 체(體)를 올바로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게송을 거듭 읊는 것이다.
처음 게송의 경문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 있는 여섯 게송은 대중의 3업이 앞의 설을 공경하면서 찬탄하는 것이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한 게송은 기뻐하는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꽃비가 내리는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덕을 찬탄하는 것이다. 둘째의 네 게송은 나중에 청함을 생기한 것인데, 이 중에서 처음의 세 게송은 대중이 청하는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해탈월이 청하는 것이다.
제2지(地)의 체(體)의 경문에 나아가면 그 차별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염행(厭行)을 일으키는 분(分)이고, 둘째는 염행분이며, 셋째는 염분(厭分)을 밝힌 것이고, 넷째는 염과분(厭果分)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앞을 맺어 뒤를 낳는 것인데 닦아서 향해 들어가길 권한 것이다. 두 번째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하는 염(厭)을 일으킴을 올바로 변별한 것이며, 세 번째 ‘보살이 이로써’ 이하는 행의 능입(能入)을 매듭 지은 것이다.
염행(厭行)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번뇌를 수호하는 행을 닦는 것이며, 두 번째는 소승을 수호하는 행을 닦는 것이며, 세 번째는 방편의 섭수하는 행을 수행하는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10구는 무상(無常)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10구는 구원할 자가 없는 것이다. 소승을 수호하는 데 나아가면 30구가 있는데, 처음에 있는 10구는 부처님의 지혜를 구해서 저 소심(小心)을 수호함을 밝힌 것이고, 나중의 20구는 중생을 이롭게 함을 염(念)해서 저 협심(狹心)을 수호한 것이다.
전자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후자의 협심을 수호함 중에 있는 처음의 10구는 비(悲)를 일으킨 것이고, 나중의 10구는 구도(救度)하는 것이다. 도(度)는 비(悲)의 이익인데, 또한 처음의 10구는 그 비심(悲心)이고 나중의 10구는 자심(慈心)이라 할 수도 있다.
전자 중에서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며, 나중의 구도(救度)의 10심(心) 중에서 처음은 전자를 거듭 들어 나중을 일으킨 것으로서 제도하는 마음을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둘째는 제도하는 마음을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다. 개별적인 것 속에 아홉 구가 있으니, 처음의 세 구는 제도하는 처소이고, 다음의 두 구는 제도의 행이며, 다음의 세 구는 앞의 것을 변별한 것이고, 나중의 한 구는 제도의 과(果)이다.
셋째,9) 방편의 섭수 중에서 이 안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관(觀)을 일으키는 방편이니, 위의 세 가지 마음을 거듭 들어 나중의 관구(觀求)를 일으키는 것이며, 두 번째 ‘즉시욕구(卽時欲具)’ 이하는 표취(標趣)의 방편이니, 그 부처님 슬기를 표방해서 그 취향하는 바를 밝힌 것이며, 세 번째 ‘이렇게 사유한다’ 이하는 관구(觀求)의 방편이니, 중생을 제도하는 법을 관찰하고 추구하는 것이며, 네 번째 ‘즉시지주(卽時知住)’ 이하는 정지(正知)의 방편이며, 다섯 번째 ‘보살이 이같이 알고 나서’ 이하는 전수(轉修)의 방편이니, 법을 듣는 행을 닦아서 올바른 법을 섭취하는 것이다.
네 번째의 정지(正知) 방편이란 전념(前念)에서 중생이 번뇌업의 고(苦) 속에 떨어져 있을 때 모종의 방편으로써 건져 올려서 열반의 궁극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다. 곧 장애가 없는 지(智)를 여의지 않는 것이 여래지(如來智)임을 아는 것이니, 지(智)는 무엇을 말미암아서 생기하는가? 곧 8지 이상의 실다운 각(覺)을 여의지 않고서 일어남을 아는 것이니, 각은 무엇을 말미암아서 생기하는가? 곧 4지 이상의 남이 없는 행혜[無生行慧]를 여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니, 혜(慧)는 무엇을 말미암아서 얻는가? 곧 3지의 선정(禪定)을 여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니, 정(定)은 무엇을 말미암아서 생기하는가? 법을 들음[聞法]을 여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보살은 먼저 정법을 구한다. 이미 법을 듣고 나면 고요한 처소에서 사유하고, 사유하고 나서는 닦아 익혀 선(禪)의 무색(無色)에 들어가며, 이 선정에 의거해서 법의 무생(無生)을 관하여 출세간의 혜를 일으키고, 무생의 혜에 의거해서 실답게 각(覺)하며, 저 실다운 각에 의거해서 걸림 없는 지(智)를 얻고, 이미 지를 얻었다면 문득 와서 중생을 구제하니, 지상(智相)이 이와 같은 것이다.
다섯째의 중생을 섭수하는 방편의 경문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을 구하나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서 능히 외부의 재물을 버리는 것을 밝힌 것인데,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어렵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고, 두 번째 ‘다만 법을 설하는 자에 대해[但於說法者]’ 이하는 사람을 중시하고 보배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니 다섯 구가 있다. 이것이 곧 한 구가 되니 법을 구하기 위해서이며, 이 제2구는 법을 위해 버리고 보시하는 것이며, ‘또 법을 구하기 위해[又爲求法]’ 이하의 법을 위해 주사(走使)하는 것은 제3구가 되고, 교만을 타파하고 없애서 고(苦)를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는 것이 제4구가 되니 위로는 공경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 되고 아래로는 나를 집착하는 것을 아만(我慢)이라 이름하며 동등함에서는 스스로 크게 여기는 것을 대만(大慢)이라 이름하며, ‘만약 한 구를 얻는다면[若得一句]’ 이하에서 승재(勝財)의 마음을 얻는 것이 곧 제5구가 된다. 이 중에서 교량(校量)에 들어가서는 총체적으로 세 구가 있음을 성취하니, 이것이 처음의 한 구를 이룬다. ‘한 게송만 들어도[得聞一偈]’ 이하는 제2 교량이고, ‘이 보살에게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이하는 제3 교량이니,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의 ‘또한 들은 바와 같이[又如所聞]’ 이하는 경문에 따라 능히 행하는 것이다.
염분(厭分)을 해석하는 가운데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앞에서 법을 듣고 나서 고요한 처소에서 사량하는 것을 거듭 들어 나중의 설(說)을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는 염(厭)의 체(體)를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들어가는 뜻을 밝히는 것이니, 법행을 수순함으로써 집착을 즐겨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의 경문 내용 중 초선(初禪) 안에서 욕망과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는[離欲惡不善法] 것은 장애를 여의는 것인데, 그 해석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총상(總相)의 해석인데, 욕계의 악과 착하지 않음을 없애기 때문에 욕망과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는 용수(龍樹)에 의거한 것인데 5욕(欲)을 멀리 여의는 것을 욕망을 여읜다고 이름하고, 5개(蓋)를 끊어서 없애는 것을 착하지 않음을 여읜다고 이름한다. 그래서 용수는 “초선(初禪)에 취향해서 5법을 멀리 여의고 5법을 끊는다”고 한 것이다. 셋째는 비담(毘曇)에 의거한 것인데 5욕을 여의기 때문에 욕망을 여읜다고 이름하고, 10악을 끊기 때문에 악을 여읜다고 이름하며, 5개(蓋)를 없애기 때문에 불선(不善)을 여읜다고 이름한다. 넷째는 성실(成實)에 의거한 것인데 탐욕의 마음을 끊는 것을 욕망을 여읜다고 이름하고, 또한 살생 등을 버리는 것을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읜다고 이름한다.
각이 있고 관이 있다[有覺有觀]는 것은 대치(對治)이다. 거친 사유[麤思]를 각이라 이름하고, 세밀한 사유[細思]를 관이라 이름하니, 이 때문에 용수는 “비유하자면 방울을 흔들 때 거친 소리는 각에 비유되고 세밀한 소리는 관에 비유된다”고 말한 것이다. 여의어서 기쁨[喜]과 즐거움[樂]을 내는 것이 바로 그 이익이다. 욕망과 악을 가려 등지기 때문에 기쁨을 내는 것이고, 허물을 여의어서 쉼[息]에 의지하기 때문에 즐거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선행(禪行)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그 정체(定體)의 일심지(一心支)이다. 어째서 유독 이것만을 선행이라 이름하는가? 일심의 선체(禪體)이기 때문에 선행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2선(禪) 속에 나아가서 각관(覺觀)을 멸한다는 것은 바로 장애를 멸하는 것이다. 장애를 멸함 중의 각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定)에 즉(卽)한 마음이고, 둘째는 정(定)에서 나올 때이며, 셋째는 식신(識身) 중에서 거칠게 움직이는 각(覺)이다. 이 셋은 모두 동란(動亂)의 마음인데, 2선(禪)의 뛰어난 고요함은 모두 똑같이 이것들을 멸한다.
내정(內淨)이라 말한 것은 대치(對治)의 지(支)이다. 만약 각관(覺觀)이 있다면 혼탁하고 산란해서 고요하지 않은데, 이 선(禪)의 뛰어난 고요함은 저 외부의 산란함을 여의기 때문에 내정(內淨)이라 말한 것이다.
일처(一處)라고 말한 것은 그 다스리는 상(相)을 밝힌 것이니, 저 안으로 청정한 마음이 하나의 경계에 머물러서 다시 나머지 반연이 없기 때문에 일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저 사리아비담(舍利阿毘曇)에서는 “욕계의 지(地) 속에서 마음은 6처(處)에 행하니, 6식(識)의 몸으로써 6진(塵)을 취하기 때문이다. 초선(初禪)의 지(地) 속에서 마음은 4경(境)에 행하니, 4식(識)의 몸으로써 4경에 행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초선 위에서는 비식(鼻識)과 설식(舌識)이 없기 때문에 단지 네 가지를 말했을 뿐이다. 2선(禪) 이상에선 마음이 일처(一處)에 행하니, 오직 의식(意識)의 몸만이 법진(法塵)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상속하여 사이도 없고 끊어지지도 않는 것을 일처라고 이름하니, 아래의 논석(論釋) 중에서는 이 두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
각관(覺觀)이 없다는 것은 그 능히 다스림을 나타내는 것이니, 능히 각관을 다스리는 것이다. 앞에서는 각관을 멸함으로써 곧바로 허물을 여읨을 밝힌 것이니, 가령 멸제(滅諦)를 설하는 것으로 무루(無漏)를 삼은 것과 같다. 이제 능히 다스림에 나아가서는 각관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마치 도제(道諦)를 설하는 것으로 무루를 삼은 것과 같다. 정(定)이 희락(喜樂)을 냄은 그 이익이다. 앞의 초선 중에선 처음으로 욕망과 악을 등져서 여읨을 기뻐하기 때문에 기쁜[喜] 것이다. 지금의 이 선(禪) 중에선 법이 안으로부터 생기하면서 얻음을 기뻐하기 때문에 기쁜 것이니, 즐거움[樂]은 앞서의 해석과 같다. 2선의 행에 들어가는 것은 선체(禪體)의 일심지(一心支)이다. 3선 중에 나아가서 희(喜)를 여읜다고 말한 것은 장애를 멸하는 것이다. 2선의 희심(喜心)은 분별하여 서로 동란(動亂)을 낳아서 허물이 많은데, 이 선정에서 마음이 전(轉)하여 고요하기[寂] 때문에 멸(滅)이다.
사(捨)를 행해서 혜(慧)를 염(念)하는 것은 그 대치(對治)이다. 사(捨)를 행한다고 말한 것은 그 사지(捨支)이다. 마음의 조정(調停)을 행해서 저 희(喜)의 허물을 버리기 때문에 사(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사(捨)의 수(數)로서 다른 사(捨)의 수용을 가려내기 때문에 행을 밝힌 것이다.
억념(憶念)을 말한 것은 바로 그 염지(念支)이다. 앞에 있는 희(喜)의 허물을 염(念)해서 마음의 한 경계를 지키기 때문에 염이라 칭하는 것이다. 염과 억(憶)은 모두 짝을 통틀어서 설하기 때문에 억념이라 말한 것이다. 억(憶)이 능히 깨달음을 발해서 염력(念力)이 강해지도록 도우니, 이 때문에 통틀어서 든 것이다. 이는 또한 염을 즉설(卽說)하는 것으로써 억을 삼는다고 할 수 있으니, 가령 4념처(念處)는 체성(體性)이 혜(慧)이면서도 그 이름을 염이라 한 것과 같으니, 이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안혜(安慧)를 말한 것은 안혜지(安慧支)이다. 희(喜)의 허물을 분별해서 혜(慧)를 설하니, 혜의 고요함을 안(安)이라 이름한다. 몸이 즐거움[樂]을 수용하는 것은 그 이익이니, 열(悅)을 해석해서 낙이라 이름 붙인다.
신수(身受)를 말한 것에서 수(受)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른바 몸과 마음인데 두 가지로 분별한다. 첫째는 근(根)을 기준해서 분별한 것이다. 5식 중의 수(受)는 색근(色根)에 의지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신수(身受)라 이름하고, 의식 중의 수는 의근(意根)을 따라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심수(心受)라 이름한다. 둘째는 이익된 바를 기준해서 몸과 마음을 분별한다. 하품(下品)의 수는 창달함이 마음에 있음을 해석해서 심수(心受)라 이름하며, 상품(上品)의 수는 몸과 마음에 두루 함을 해석한 것인데 두루한 처소에 나아가 말(末)을 따라서 이름을 삼았기 때문에 신수(身受)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후자의 뜻을 따른다. 낙처(樂處)의 심법은 이 처소의 증상(增上)이 몸과 마음에 두루 원만하기 때문에 신수를 설한 것이며, 낙(樂)의 증상을 나타냄은 이 심법을 즐기는 것이니, 마음속의 수(受)의 뜻은 언론(言論)을 기다리지 않는다.
모든 현성(賢聖)이 능히 설한다고 말한 것은, 이 즐거움의 깊고 뛰어남은 오직 현성만이 능히 설할 수 있음을 허물로 삼아서 능히 버리어 여읨[捨離]을 감당할 뿐 범부가 능한 바가 아니니, 이는 즐거움의 깊음을 밝힌 것이다.
염(念)이 즐거움을 수용해서 3선(禪)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은 그 선체(禪體)의 일심지(一心支)이다. 이른바 스스로의 지(地)에서 즐거움을 수용하는 허물을 염(念)함으로서 일심에 들어가는 것이다. 4선(禪)에 나아가서 고통을 끊고 즐거움을 끊어서 걱정[憂]과 기쁨[喜]을 멸한다는 것은 장애를 멸하는 것이니, 4수(受)를 끊어서 선(禪)의 부동(不動)을 밝힌 것이다.
고통을 끊는다고 말한 것은 고통의 실재(實在)를 2선(禪) 중에서 멸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선(禪)에서 움직이지 않고 4수(受)를 끊어서 벗어남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에 끊는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저 3선의 즐거움을 가리켜서 고통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3선의 즐거움을 끊는 것을 고통을 끊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와 같은가? 저 3선의 즐거움은 거친 마음의 사람을 조망해서 설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나중의 고요한 마음을 조망하는 것은 곧 대고(大苦)이니, 마치 세간에서 손뼉을 치고 나무를 때려서 저 깨어 있는 자에게 설하는 것은 즐거움이 되지만 잠이 든 사람에겐 큰 고통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즐거움을 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즐거움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3선의 즐거움을 끊는 것이니, 저 즐거움이 거칠게 움직이기 때문에 여기서 끊는 것이다. 먼저 걱정을 멸하는 것은 초선의 멸함이고, 먼저 기쁨을 멸하는 것은 3선의 멸함이니, 모두 앞에서 멸하기 때문에 ‘먼저’라고 말한 것이다. 이미 여기서 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이를 논했는가? 이는 또한 이 부동선(不動禪)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걱정과 기쁨이 앞의 지(地)에서 끊어지게 하기 때문에 먼저 멸함을 밝힌 것이라면 고통[苦] 역시 먼저 멸하는데 어째서 먼저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석언(釋言)은 ‘먼저’를 밝힌 것이니, 이(理) 역시 손상이 없다. 다만 여기서 고통이 비록 먼저 끊어지더라도 고통을 대(對)한 즐거움이 이 속에서 끊어짐을 밝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즐거움을 대한 고통을 ‘먼저’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먼저 고통을 끊은 자를 반드시 말해야 한다면 남들이 저 즐거움도 역시 먼저 끊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걱정과 기쁨의 능대(能對)와 소대(所對)가 먼저임을 밝히지 않은 것이니, 모두 먼저 끊음이기 때문에 먼저 멸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고통과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은 그 이익이다. 나머지 선(禪) 중에선 모두가 먼저 다스림을 밝힌 것인데 지금 여기선 어째서 먼저 이익을 설하고 나서 앞서 밝힌 바인 고통을 끊고 즐거움을 끊음을 탄 것인가? 이를 대한 것이 곧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님[不苦不樂]을 밝힌 것인데, 이익의 뜻을 밝힘이 편하기 때문에 먼저 논한 것이며 행실(行實)은 나중에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사수(捨受)가 고통과 즐거움과는 동일치 않은 것이니, 이 때문에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고 이름한 것이다.
어째서 걱정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라고 이름 붙이지 않는 것인가? 세 가지 뜻의 해석이 있다. 첫째는 이 선(禪)이 즐거움의 수(受)를 올바로 끊어서 다시는 고통이 없어 저 둘을 뒤집어 대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다. 둘째는 앞의 경문에선 먼저 고통과 즐거움을 끊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를 치우치게 대함으로써 고통도 즐거움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셋째 5수(受) 중에선 걱정과 기쁨의 명칭을 구별하며, 3수의 분별에선 걱정과 기쁨의 두 명칭은 고통과 즐거움에 섭입(攝入)한다. 고통과 즐거움이 관대하기 때문에 사수(捨受)로써 이를 대하는 것을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고 이름한다.
사념정(捨念淨)이란 대치(對治)이니, 사(捨)는 사지(捨支)이고, 염(念)은 염지(念支)이다. 앞의 3선 중에선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사념(捨念)이 청정치 못한데 지금 여기선 없기 때문에 사념(捨念)이 청정하다.
4선(禪)의 행에 들어가는 것은 그 선체(禪體)의 일심지(一心支)이다. 4공정(空定)의 뜻은 자세히는 별장(別章)과 같으니, 이는 마땅히 논해야 한다. 4공정의 경문은 논(論)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법행(法行)을 수순한 것은 선정에 의거해서 한량없는 신통 등을 수순해서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선정에 들어간 것이지 애착이 아니니,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염과(厭果)를 해석함 중에서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한량없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신통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자재로움을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나머지 뜻은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4무량(無量) 중의 경문에선 불이(不二) 및 청정과 무념 중의 두 구가 빠져 있다. 또 신통(身通) 중의 경문에선 제6의 주수구(注水句)가 빠져 있고, 타심(他心) 중의 경문에선 제7의 망행정행구(妄行正行句)가 빠져 있다.
지과(地果)를 해석함에 나아가선 경문을 세 가지로 나눈다. 3과(果)는 앞과 같다. 조유과(調柔果)에선 크게 네 가지로 판별하는데, 첫째는 조유의 행이고, 둘째는 인욕행의 덕이며, 셋째는 별지(別地)의 행을 밝힌 것이며, 넷째는 설상(說相)을 매듭 지은 것이다.
전자 중에서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법 중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많은 부처님을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며, 둘째 ‘공양하다’ 이하는 능련(能練)의 행을 밝힌 것이며, 셋째 ‘백천 겁에서’ 이하는 때[垢]의 장애가 희박함을 밝힌 것이며, 넷째 ‘다시 적집(積集)하지 않다’ 이하는 소련(所練)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니,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셋째,10) 게송을 거듭하는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올바른 게송이다. 게송에는 35게송이 있는데 처음의 두 게송은 열 가지 깊은 마음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24게송은 염행(厭行)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염분(厭分) 및 과분(果分)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조유(調柔)의 3과(果)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염(厭)의 24게송에 나아가면 처음의 네 게송은 번뇌를 수호함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소승을 수호함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14게송은 방편의 섭수를 읊은 것이다.
제4지(地) 중에서 여섯 문은 앞과 같다.
명칭을 해석한다고 말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 번뇌의 장작을 지혜의 불이 능히 태우기 때문에 염지(焰地)라고 이름한 것이다.
둘째, 여의는 바라는 것은 『지론』에 의거하면 법을 이해하는 교만의 장애를 여의는 것이며, 『섭론』에 의거하면 미세한 번뇌의 행이니, 다 함께 신견(身見) 등을 낳는다. 무명에는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삼마발제애(三摩跋堤愛)이고, 두 번째는 행법애(行法愛)이다. 또는 두 가지 업의 장애와 한 가지 방편의 생사를 멸하는 것이다.
셋째, 나타난 바라는 것은 섭수함이 없는 뜻이다.
넷째, 성취한 바를 밝히는 것은 정진행(精進行)과 도품(道品) 등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섯째, 얻은 바의 과(果)라는 것은 만약 법계의 섭수함이 없는 공덕을 통달한다면 감응하는 바가 일체 중생의 이익사과(利益事果)와 네 가지 지위와 같음을 얻는 것이니, 전체적인 과(果)는 초지와 동일하다.
여섯째는 경문을 해석하는 것인데 경문의 내용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게송이 나중을 낳는 것이고, 둘째는 지체(地體)를 올바로 변별하는 것이며, 셋째는 게송으로 앞을 매듭 짓는 것이다.
처음에 여덟 게송이 있는데 첫째의 두 게송은 보살의 공양이고, 다음은 천녀(天女)의 공양이며, 다음의 세 게송은 천왕이 만남을 축하해서 공양을 일으키는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대중이 청하는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해탈이 청하는 것이다. 여기서 왕과 여인이 청한 까닭은 이 지(地)의 정체지(正體智)와 외적인 용(用)을 둘 다 성취함을 밝히기 때문이다.
체(體)의 경문 속에 나아가면 크게 네 가지로 판별한다. 첫째는 청정의 대치(對治)로 수행이 증장(增長)하는 인분(因分)이며, 둘째는 청정분(淸淨分)이며, 셋째는 대치하는 수행의 증장분이며, 넷째는 저 과분(果分)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앞을 거듭 들어서 나중을 낳음으로써 닦아서 향해 들어가길 권유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행의 체(體)를 밝힌 것이며, 세 번째 ‘보살이 이로써’ 이하는 이익을 행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또 논(論)에서 ‘두 곳을 순행(順行)한다’고 말한 것은 지(地) 이전에선 방편이 올바른 지(地)를 사량하더라도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이고 지(地) 속에 올바로 있는 것은 이름하여 ‘이미 증득함’이라 말하는데, 이 두 처소의 행이 똑같이 설한 바에 의거하기 때문에 순행(順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나머지 경문은 논한 바와 같다.
청정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며, 나중은 매듭 지음이다. 총체적인 것 속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불가(佛家)가 더욱 세력이 있음을 밝힌 것이며, 두 번째는 내법(內法)을 얻는 것이며, 세 번째는 이른바 10지(智)의 교화를 성취하는 것이다. 또 논에서 ‘여래 자신이 소유한 모든 법은 이 모든 법으로써 여래를 나타내 보인다’고 말한 것은 사람과 법이 서로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을 나타내면 도로 뛰어난 법으로써 여래를 나타내 보인다는 것이다.
수행이 증장하는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번뇌를 수호함은 바로 자리(自利)의 행이고, 둘째 소승을 수호함은 이타(利他)의 행이다. 이 두 가지는 각기 둘이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또 번뇌를 수호함 중에서 신념(身念) 가운데 나아가면 먼저는 내신(內身)을 관한 것이고, 다음은 외신(外身)을 관한 것이며, 나중은 둘을 합쳐서 관한 것이다. 내신이라 하면서도 다시 외(外)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저 12입(入) 가운데 나아가서 내외를 나눈다면 자(自)이든 타(他)이든 6근(根)은 안이고 6진(塵)은 밖이 된다. 이제 4념(念) 중에선 자신(自身)을 안이라 이름하고, 타신(他身)은 밖이 된다.
어째서 처음은 개별적이고 나중은 총체적인가? 해석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병을 타파함이 동일치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정(內情)을 집착함은 많고 외정(外情)을 집착함은 적다면 마치 사람이 자신을 위해 처자와 모든 재물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 안을 집착함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안을 관함을 가르쳐야 한다. 어떤 사람이 외정을 집착함은 많고 내정을 집착함은 적다면 마치 사람이 재물 때문에 몸을 잃고 욕망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과 같으니, 밖을 집착함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밖을 관함을 가르쳐야 한다. 어떤 사람은 안과 밖을 모두 집착하기 때문에 반드시 합쳐서 관해야 한다.
둘째, 관(觀)의 시종을 따라서 행하는 것은 본래 자신 속에서 청정한 상(相)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안을 관해야 하고, 안에서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이른바 밖에 있다고 하기 때문에 반드시 밖을 관해야 한다. 향(向)이라는 것은 안을 관하면 그 밖을 미치지 못하고, 밖을 관할 때는 다시 안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에서는 안과 밖을 합쳐서 관하는 것이다. 내신(內身)을 관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관하는 바를 표방하는 것이고, 순신관(循身觀)이란 것은 그 관상(觀相)을 밝힌 것이니 순(循)은 순(順)과 같다. 그 신상(身相)을 살펴서 다 관찰하는 것을 순신관이라 이름한다.
정근(精懃)의 일심(一心)은 그 관의(觀儀)를 밝힌 것이다. 행하는 자가 이제 신상(身相)을 파괴하고자 한다면 부지런하지 않으면 판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정근해야 한다. 그러므로 용수(龍樹)는 “보통사람과 이별하긴 쉬워도 지식(知識)과 이별하긴 어려우며, 지식과 이별하긴 쉬워도 친척과 이별하긴 어려우며, 친척과 이별하긴 쉬워도 자신과 이별하긴 어렵다”고 한 것이다. 수행하는 자가 이제 자기 자신과 이별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근해야 한다. 정근은 뜻을 오로지 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일심(一心)이라고 말하니,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없애서 관(觀)하여 여읠 바를 밝힌 것이다.
어째서 이 중에선 용수가 설한 것처럼 탐욕과 걱정을 치우쳐 여의는가? 수행하는 자가 이 중에서 탐욕과 걱정을 많이 낳기[多生] 때문에 치우쳐 없앤 것이다. 무엇을 다생(多生)이라고 말하는가? 처음으로 5욕(欲)을 버리고서 본래의 애착하는 바를 염(念)하니, 이 때문에 탐욕을 낳는 것이며, 아직 도법(道法)을 얻지 못하기에 걱정을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없앤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다시 탐욕이라는 것은 범부가 많이 일으켜서 경계를 탐착해 버리기가 어려운 것이니, 생(生)을 받는 근본이요 3독의 시초이기 때문에 번뇌 중에서 탐욕 없애기를 치우쳐 설한 것이다. 걱정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제거해야 하는 것은 정(定)을 장애함을 일으키는 가장 중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禪) 속에서 먼저 여의기 때문에 5수(受) 중에선 걱정 없애기를 치우쳐 설한 것이다. 만약 탐욕 없애기를 설한다면 결과적으로 나머지 법도 따를 것이며, 만약 걱정 없애기를 설한다면 모든 수(受)도 따라서 버려지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대나무를 쪼갤 때 첫 마디가 어려운 것과 같으니, 만약 첫 마디를 쪼갠다면 나머지 마디는 따르기 마련이니 탐욕과 걱정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래에서 외신(外身)을 관하는 것과 아울러 내외를 관하는 것은 그 유(類)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념(受念) 중에 나아가서도 역시 처음은 안을 관하고, 다음은 밖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12입(入) 중에서 수(受)는 오직 그 외법에만 있으면서 섭수에 들어가니, 그러므로 이제 4념(念) 중에서 자수(自受)는 안이 되고 타수(他受)는 밖이 된다. 또 다시 뜻이 상응하는 수(受)를 설하여 안으로 삼고, 5식(識)이 상응함을 이름하여 밖이라 한다. 또한 정수(定受)를 얻어서 설하는 것이 안이 되고, 산수(散受)가 밖이 된다. 이 안에선 처음은 개별적이고 나중은 총체적인 것이다.
심념(心念) 중에 나아가서도 처음은 안을 관하는 것이고, 다음은 밖이고, 나중은 총합이다. 12입 중에서 마음은 오직 안일 뿐이니, 의근(意根)의 섭수이기 때문이다. 이제 4념(念) 중에서 자심(自心)은 안이라 이름하고, 타심(他心)은 밖이라 이름한다. 또 다시 의식은 안이라 이름하고, 5식(識)은 밖이라 이름한다. 또 정심(定心)의 설(說)을 얻는 것을 안으로 삼고, 산심(散心)은 밖으로 삼는다.
법념(法念) 중에 나아가서도 처음은 안을 관하는 것이고, 다음은 밖이고, 나중은 총합이다. 안은 이른바 심법(心法)이고, 밖은 이른바 비색비심(非色非心)의 불상응행과 아울러 3무위(無爲)이다.
둘째, 정근(正勤)의 뜻에서 처음의 둘은 악법을 끊어 없애는 것이고, 나중의 둘은 선(善)을 섭수하는 것이다. 전자의 악을 여읨 중에서 먼저는 미생(未生)을 끊는 것이고, 나중은 이생(已生)을 끊는 것이니, 이는 바로 때를 설한 것이지 행의 체(體)는 아니다. 또한 이생이 바로 먼저 무명주지(無明住地)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세(細)이기 때문에 나중에 끊는 것이며, 미생(未生)은 4주(住)의 현기(現起)이니, 추(麤)이기 때문에 먼저 끊는 것이다.
미생(未生)의 악은 그 끊을 바를 든 것이고, 불생(不生)이 되는 것은 근(勤)이 하는 바이며, 진보를 낳고자 하는 것은 근방편(勤方便)의 마음이며, 발심하여 끊는다는 것은 근의 체(體)를 올바로 밝힌 것이다. 이생(已生) 중에서 이를 유비(類比)하면 알 수 있으니, 이미 생긴 것이 과거로 물러가면서 어떻게 이를 없앨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이처럼 이생(已生)의 종류가 미래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끊은 것은 상속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일어났다 이미 소멸한 것을 일으켜서 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중의 선을 낳음 중에서 먼저는 미생을 일으킨 것이고, 나중은 이생을 자세히 한 것이다. 선(善)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익혀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먼저 미생을 일으키고 나중에 이생을 자세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생의 선이라는 것은 닦을 바를 든 것이며, ‘생(生)이 되기 때문에’라는 것은 근(勤)이 하는 바이고, 근을 낳고자 하는 것은 근방편의 마음이며, 발심의 행이란 근의 체(體)를 올바로 밝힌 것이다. 이생은 앞과 같으니, 이미 일어난 것이 과거로 물러가면서 어떻게 책려(策勵)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저 이생의 종류가 미래에 존재함을 반드시 책려해서 지속하여 일어나도록 한 것이지, 저 일어났다 이미 소멸한 것에 대해 책려함을 말한 것이 아니다.
셋째, 여의(如意)의 뜻이다. 이 경문 중에 나아가면 처음은 총체적으로 표방해서 든 것이며, 나중은 개별적인 해석이다. 욕정(欲定)이라 말한 것은 곧바로 행의 체(體)를 든 것이다. 욕망이 능히 정(定)을 낳아서 인(因)을 과(果)로부터 칭하기 때문에 욕정(欲定)이라 이름한다. 또한 정심(定心)은 욕망을 말미암아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인을 들어서 과에 이름 붙이기 때문에 욕정이라 말한다.
단행(斷行)의 성취라는 것은 그 공능을 변별한 것이니, 이 정행(定行)으로써 능히 온갖 결박을 끊는 것을 단행의 성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저 열반이라 이름 붙인 것을 단(斷)이라 이름 붙일 수 있으니, 단가행(斷家行)의 성취를 단행의 성취라 이름한다.
수여의(修如意)라는 것은 앞의 욕정(欲定)에 나아가서 그 닦음을 밝힌 것이다. ‘지염(止厭)에 의거해서’ 이하는 제2 단행의 성취를 향함을 밝힌 것이다. 모든 번뇌에 대해 처음의 방편도(方便道)로 허물을 관해서 싫어하여 등지는 것을 이름하여 염(厭)이라 하며, 무애(無碍)는 올바로 끊음이니 이를 설하여 여읨이라 하고, 해탈은 없앰을 증명하는 것이니 이를 설하여 멸(滅)이라 하며, 열반에 취향하는 것을 이름하여 사(捨)를 향함이라 한다. 만약 지위에 따른 분(分)이라면, 견도(見道) 이전에 설한 것은 염(厭)이라 이름하고, 견제(見諦)의 미혹을 없애는 것을 설함으로써 여읨으로 삼고, 수도(修道)의 결박을 끊는 것을 설함으로써 멸(滅)로 삼고, 열반의 과(果)를 얻는 것을 이름하여 사(捨)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모든 행이 결박을 다스리는 차례이지, 반드시 염처행(念處行) 등을 따로 대한 것은 아니다. 나머지 행의 유(類)도 마찬가지이다. 어째서 염근(念勤)이 이를 밝히지 못한 것인가? 정(定)의 성취를 얻어야 비로소 이런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앞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정진은 이해할 수 있다.
심정(心定)이란 것은 나머지 경론에서는 염정(念定)이라 이름한다. 뜻을 묶어서 연(緣)에 머물기 때문에 염(念)이라 칭하는 것이고, 마음을 오로지해서 경계를 지키기 때문에 마음이라 설하는 것이다.
사유정(思惟定)이라는 것은 나머지 경론 속에서는 혜정(慧定)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슬기로운 마음이 꾀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유라고 말한다. 나머지 자세한 것은 논과 같다.
둘째,11) 소승을 수호함 중에 있는 5행 안의 경문에서는 제3구가 빠져 있다. 저 과(果)의 뛰어남 중에서 처음은 행과(行果)를 밝힌 것이고, 다음은 지과(地果)를 구별한 것이다. 행과에는 여섯이 있는데 맨 처음 번뇌를 여읨에서부터 제6 본심계(本心界)의 원만을 다함까지이다. 경 속에선 제2의 업염(業染)이 생략되어 없는데 나머지 뜻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번뇌를 여읨 중에서 경문이 비록 다르고 배치되더라도 그 뜻은 역시 만족함을 얻고 있다.
또 논(論) 중에서 업염이란 것에 두 가지 뜻의 부작(不作)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이 곧 부작이며, 둘째는 악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타(利他)를 잃음이고 번뇌를 낳음은 자리(自利)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부작이다. 증상욕(增上欲) 중에서 제3의 허물을 여의는 별구(別句)의 내용에는 제1구가 빠져 있다. 부지런함을 발하여 정진함 중에서 경론에서는 흡사 차(次)가 아닌 듯하나, 다만 논문에 의거하면 차제소식(次第消息)이니, 그 뜻도 역시 잃어버림이 없다.
본심계(本心界) 중에서도 역시 이와 같다. 지과(地果)의 경문 내용에서 3과(果)는 앞과 같다.
조유과 중에서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조유행(調柔行)이다. 둘째 ‘마니주’ 이하는 교지(敎智)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니, 이 지(地)에서 청정한 증득을 성취해서 체(體)로부터 용(用)을 일으키기 때문에 교지(敎智)가 있는 것이라서 앞의 지(地)와는 동일치 않다. 셋째 ‘4섭(攝)’ 이하는 개별적인 지(地)의 행을 밝힌 것이다. 경본(經本)에서는 이 구(句)가 생략되어 없다. 넷째 ‘이 명칭’ 이하는 설상(說相)을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전자 중에서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고, 나중은 합(合)이다. 법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부처님을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 되는 것이고, 둘째 ‘공경하다’ 이하는 능련(能練)의 행을 변별한 것이며, 셋째 ‘이 보살의 낙심(樂心)’ 이하는 소련(所練)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다. 나머지 뜻은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셋째,12) 게송을 거듭함 중에서 처음은 설한 뜻을 변별하는 것이고, 다음은 올바른 게송이다. 게송에는 29게송이 있으니, 처음의 두 게송은 증장의 인(因)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세 게송은 청정분(淸淨分)이며, 다음의 일곱 게송은 대치해서 수행하는 증장분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아홉 게송은 증장의 과(果)이며, 다음의 일곱 게송은 조유(調柔)나 섭보(攝報) 등의 3과(果)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찬탄함을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 제3권 하
지엄 지음
박서연 번역
22) 십지품 ②
제5지(地) 안의 여섯 문은 앞과 같다.
첫째는 명칭을 해석한 것이다. 출세간 지혜의 방편선교(方便善巧)를 얻어서 제도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제도하기 때문에 난승지(難勝地)라고 이름한다.
둘째, 여의는 바라는 것은 만약 『지론』에 의거하면 신정(身淨)이라는 아만(我慢)의 장애를 여의는 것이며, 만약 『섭론』에 의거하면 아래 승(乘)의 반열반이다. 무명에 또한 두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는 생사와 열반이니, 한결같이 사유를 취함을 등지는 것이다. 둘째는 방편의 섭수하는 바로서 도품(道品)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또한 2업의 장애와 1보(報)의 인연 생사를 다스리는 것이다.
셋째, 나타난 바를 밝히는 것은 상속하여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넷째, 성취한 바를 밝히는 것은 선(禪)바라밀과 아울러 4제를 배움을 이루는 것이다.
다섯째, 얻은 바의 과(果)를 밝히는 것은 법계에서 상속하는 차이 없는 공덕을 통달해서 삼세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차별 없는 법신의 과를 얻는 것이며 아울러 5지(地)의 지위를 성취하는 것이니, 전체적인 과(果)는 앞과 같다.
여섯째, 경문을 해석함 중에선 크게 세 가지로 판별한다. 처음은 게송이 나중을 낳는 것이며, 둘째는 지(地)의 체(體)를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게송으로 앞의 것을 매듭 지은 것이다.
처음의 15게송에서 첫째에 있는 두 게송은 보살이 공양을 수순해 닦음으로써 3업이 경희(慶喜)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천왕이 불보살의 오염 없는 공덕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열 게송은 천녀가 인(因)과 과(果)의 대자비로써 두 지위가 원만히 갖춰짐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해탈의 청함이 나중의 증명에 들어감을 나타낸 것이다.
천녀의 경문에 나아가면 처음의 일곱 게송은 인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과를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행이 성취되어 증득과 같음을 나타낸 것이다.
지(地)의 체(體)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승만(勝慢)의 대치(對治)이고, 둘째는 도행(道行)의 뛰어남에 머물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저 과(果)의 뛰어남이다. 전자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만(慢)의 두 종류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첫째는 자지(自地)의 만(慢)이고, 둘째는 타지(他地)의 만이다. 타지(他地)라는 것은 앞의 4지(地) 중에서 출세간의 지(智)를 얻는 것이니, 그것의 뛰어난 상(相)을 취하는 것을 만이라 이름한다. 아래에선 열 가지 청정한 마음으로써 다스림[治]을 삼는다. 둘째, 자지(自地)의 만은 이 열 가지 중에서 뛰어난 상(相)을 희구하는 것을 다시 만으로 삼는다. 아래에선 여도(如道)를 수순함으로써 다스림으로 삼는다. 이 두 가지 경문 중에서 통틀은 명칭이 승만이니, 만치(慢治)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을 거듭 들어 나중을 낳음으로써 닦아 향해 들어가기를 권유하는 것이며, 둘째는 열 가지 마음을 변별하는 것이며, 셋째 ‘보살이 이로써’ 이하는 이익을 성취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또 불퇴전의 마음을 똑같이 염(念)한다는 것은 방편의 청정한 마음과 물러나지 않는 증심(證心)이 똑같이 정리(正理)를 반연해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경문 속의 7정(淨)이란, 첫째는 계(戒)이고, 둘째는 정(定)이며, 셋째는 견(見)이며, 넷째는 의심을 제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도와 비도(非道)이니, 이 다섯 가지는 대승이든 소승이든 명칭이 동일하며, 나중의 두 가지는 명칭이 소승과 다르다.
나중의 두 가지라는 것은, 첫째는 행의 청정함이고, 둘째는 행단(行斷)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저 종취(宗趣)로써 멸하기 때문이다. 대승의 명칭이란 것은, 첫째는 그 명칭이 행단(行斷)이며, 둘째는 그 명칭이 사량보리분법상상정(思量菩提分法上上淨)이니, 이 종지가 행단에 의거해서 뛰어난 추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행은 비록 일곱 가지가 있더라도 경문은 여섯 구(句)가 있다. 제3구 중에서 두 종류의 청정이 있으니, 이른바 견정(見淨)1)과 도의정(度疑淨)이다. 나머지 상(相)은 알 수 있다.
위(位)라는 것은, 만약 소승에 의거하면 계(戒)와 정(定)은 견도(見道) 이전이고, 다음의 셋은 견도이고, 다음의 하나는 수도(修道)이고, 다음의 하나는 무학도(無學道)이다. 대승의 3위(位)로 논한다면 행단(行斷)과 행은 수도 가운데 있으며, 나머지는 다 앞과 같다. 그 이유는 대소(大疏)와 같다.
둘째, 여도행(如道行)을 따르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앞을 들어서 나중을 일으키는 것은 총체적으로 여행(如行)을 나타낸 것이며, 둘째 ‘대원(大願)을 얻는다’ 이하는 여도행의 상(相)을 수순함을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며, 셋째 ‘정(定)을 생기해서 물러나지 않는다’ 이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처음의 총체적인 것 중에 나아가면 법체는 세 가지가 있고 구(句)는 따로 네 가지가 있다. 법체의 세 가지는, 첫째는 이 4지(地)가 닦을 바의 도품이고, 둘째는 이 지(地) 이전의 열 가지 청정한 마음이며, 셋째는 이 지 중에서 여도행을 수순하는 것인데 경문의 네 가지는 알 수 있다.
부주도(不住道) 중의 경문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4제(諦)의 실다운 법의 분별을 열거한 것이니, 이는 번뇌를 수호하는 자리(自利)의 행이고, 둘째는 교화받는 중생의 분별이니, 이는 소승을 수호하는 이타의 행이다. 전자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4제의 실다운 법의 분별을 열거한 것이며, 나중의 이 4제에 나아감은 10관문(觀門)을 밝힌 것이니, 곧 중생을 교화하는 분별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열 가지 명칭을 열거한 것이고, 두 번째는 차례로 해석한 것이다.
또 4제문(諦門) 중의 뜻은 법계를 포함하고 보살은 그 중에서 남김 없이 궁극까지 비추니, 지(知)를 따른 이론(異論)은 헛된 구별로서 궁구하기가 어렵다. 지금 여기선 1수(數)의 원만함에 나아가면 간략히 10문(門)이 되지만, 그러나 이 10문의 보살은 지상(知相)의 밝히기 어려움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중생을 교화함에 의탁함으로써 그 차이를 나타내니, 이는 곧 교화를 기준으로 해서 스스로 앎을 나타낸 것이다. 이를 통틀어 소지법(所知法) 가운데 지(智)의 청정이라 이름하니, 그러므로 개합(開合)이라 말한 것은 이 10문이 총체적으로는 오직 하나뿐으로서 중생을 교화하는 분별이다.
만약 교화받는 바를 따른다면 대승과 소승은 둘로 나누니, 앞의 아홉은 소승을 교화하고 나중의 하나는 대승을 교화한다. 일으키는 바에 따라서 세 가지로 나누니, 앞의 다섯은 중생을 교화해서 그 이해를 낳도록 하는 것이고, 다음의 넷은 중생을 교화해서 그 행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며, 나중의 하나는 중생을 교화해서 그 증득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동일하지 않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여읨은 일곱 가지가 된다. 처음은 제(諦)가 근기가 미숙한 자를 교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근기가 이미 성숙한 자를 교화하는 것이며, 셋째는 심오한 법을 의심하는 자를 교화하는 것이고, 넷째는 법을 잘못 이해한 자를 교화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정념(正念)을 여읜 자를 교화하는 것이고, 여섯ㆍ일곱ㆍ여덟ㆍ아홉 번째는 정견(正見)인 자를 교화하는 것이고, 열째는 대승을 교화하는 것인데 교화는 법의 동일치 않음을 따라서 열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만약 자세히 분별한다면 수(數)의 구별은 한량없다.
실다운 법을 대해서 통(通)과 별(別)을 변별한다고 말한 것은 이 10문이 앞의 4제(諦)를 조망하면 하나하나가 다 통(通)이니 처음의 세제(世諦)라는 것은 4제 법상(法相)의 차별을 통틀어 관하는 것이고, 제일의(第一義)라는 것은 4제의 체성(體性)이 공적함을 통틀어 관하는 것이다. 상제(相諦)라고 말한 것은 4제의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님을 통틀어 관한 것이고, 차별이라 말한 것은 4제의 유와 무가 각기 다름을 통틀어 관한 것이며, 성제(成諦)라고 말한 것은 4제의 연기집성(緣起集成)하는 상상(相狀)의 사(事)를 통틀어 관한 것이며, 사제(事諦)라고 말한 것은 4제를 미혹해서 고(苦) 등의 사(事)를 이룸을 통틀어 관한 것이고, 생제(生諦)라고 말한 것은 4제를 통틀어 미혹해서 작집(作集)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생(無生)을 다한다는 것은 4제를 통틀어 이해해서 증멸(證滅)을 얻는 것이며, 도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은 4제를 통틀어 이해해서 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며, 보살의 여래지(如來地)가 제(諦)를 성취하는 것은 4제의 연기실성(緣起實性)의 청정계를 통틀어 궁구해서 대승도의 인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또 차제(此諦)라는 것은 앞의 4제가 곧바로 법계의 체성(體性)을 밝혀서 4제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하 사(事) 등의 4제는 4제 아님이 있는 것이다. 중간의 5제(諦)는 방편의 닦는 상(相)으로서 차제를 이해하여 관하는 것이다. 나중의 1제는 법계에 올바로 칭합하여 두루한 것이 자체인과(自體因果) 원통묘도(圓通妙道)의 장애 없는 덕의 갖춤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교연(敎緣)의 법상을 차별하는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처음의 4제는 곧바로 법체를 밝힌 것이고, 다음의 세제와 제일의제는 상(相)에 대해 밝힌 것이며, 다음의 상제(相諦)라는 것은 하나의 실다운 제상(諦相)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차별이라는 것은 법계의 법상을 밝힌 것이며, 성제(成諦)라는 것은 이 같은 법계의 상(相)을 범부는 미혹해서 전도되기 때문에 보리가 번뇌가 되고 삼계가 무성히 흥기하여 세간에 치연(熾然)해서 온갖 상(相)이 집성(集成)함을 밝힌 것이다.
다음 사(事) 등의 4제를 밝힌 것은 올바른 수행이 대치(對治)하는 방편행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4제 아님도 있으니, 곧 보살이 방편법을 올바로 수행하는 데도 다만 법은 전체적인 것이고 국한된 것이 없기 때문에 이승도 그 가운데서 수행해 나아가게 되고, 아래에 있는 인천(人天)의 착한 업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 중에서 행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만 이 보살이 올바른 수행으로 대치해서 방편의 도가 원만한 것이니, 그러므로 능히 법계에 칭합하여 두루한 것이 자체 원극(圓極)의 장애 없는 도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보살의 지(地)에서 차례로 여래 지혜의 제(諦)에 들어감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관(觀)의 뜻은 논과 같다.
신해지(信解智)의 지(知)는 무진지(無盡智)의 지(知)가 아니라는 것은 앞에 있는 여래제(如來諦)의 경문을 해석한 것이니, 이른바 인지(因智)의 지(知)는 과무진지(果無盡智)의 지(知)가 아니다. 또는 문자의 아함을 설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신지(信智)의 지(知)는 뜻을 설할 수 없는 무진지의 지(知)가 아니다. 이 경문은 해석을 기준으로 해서 간추렸을 뿐이며, 아래의 「이세간품」에서 거듭 다시 경문을 간추린 것은 행을 기준으로 해서 간추린 것이다. 해석에서 경상지(鏡像智)라고 말한 것은 삼승의 견도(見道) 이전에서 정(定)에 의거해 사(事)를 성취한 것이니, 마치 거울 속의 상(像)이 사(事)를 이룸에 자재한 것과 같다.
그 위(位)는 정해지지 않았으니, 혹은 견도(見道)인 난(煖) 등의 네 가지 착한 마음이고, 혹은 광명을 얻는 등의 네 가지 정(定)이고, 혹은 지(地) 이전의 40심(心)이고, 혹은 10행과 10회향 등이고, 혹은 세간의 수혜(修慧)이며, 나아가 정(定)을 얻은 이후가 바로 그 위(位)이다.
둘째, 소승을 수호하는 근방편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유위(有爲)의 허망함과 속임[誑詐]이 중생을 괴롭힘을 관해서 자비의 염(念)을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 ‘이 같은 지혜를 얻는다’ 이하는 자비를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타자를 교화하는 원(願)을 밝힌 것이며, 둘째 ‘일체의 유위를 실답게 관한다’ 이하는 타자를 교화하는 마음을 밝힌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비(悲)이고, 나중의 ‘이 같은 고뇌 등’ 이하는 자(慈)를 변별한 것이다.
비(悲)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비(悲)의 방편을 일으킨 것이며, 다음의 ‘중생을 알아서’ 이하는 비관(悲觀)을 올바로 밝힌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실다운 고(苦)를 관해서 고의 체성(體性)을 아는 것이며, 둘째 ‘또 이렇게 생각한다’ 이하는 깊고 무거운 고(苦)를 관한 것이다. 사람에 나아가서 허물을 나타냄은 그 비(悲)할 만한 것을 밝힌 것이다.
깊고 무거운 고(苦)의 내용에 나아가면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을 관하는 것이니, 중생이 고(苦)를 받으면서도 싫어하여 여읠[厭離] 줄 모르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다. 둘째 ‘무명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하는 모든 중생이 괴이하게 여길 만한 까닭을 밝힌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깊은 고(苦)를 밝힌 것이며, 두 번째 ‘이 같은 생사(生死)’ 이하는 그 무거운 고(苦)를 밝힌 것이다.
둘째, 자(慈)를 해석한 경문은 크게 두 가지로 판별한다. 첫째는 중생을 위해 착한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며, 둘째 ‘이같이 사유하다’ 이하는 그 닦는 바를 따라서 요익(饒益)을 발원하는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중생에게 악의 비롯함 없음을 염(念)한 것인데, 이 경문에선 제3구ㆍ제5구ㆍ제6구가 빠져 있다. 두 번째는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착한 법을 모으게 되는 것이다.
둘째, 요익을 발원함 중에서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중의 아홉은 개별적인 것이다. 이 중의 경문에도 역시 차례가 아닌 것이 있으니, 차례에 의거해서 경문을 소거하면 뜻도 잃지 않는다.
과분(果分)을 해석한 경문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공덕의 뛰어남을 섭수한 것이며, 둘째는 수행의 뛰어남이며, 셋째는 중생 교화의 뛰어남이며, 넷째는 세간의 지(智)에 수순하는 뛰어남을 일으키는 것이다. 전자의 둘은 자행(自行)이니, 이는 위에서 아는 바 지(智)의 청정과(淸淨果)이다. 공덕을 섭수하는 것은 자분(自分)으로 성취하는 것이며, 수행의 뛰어남이란 것은 승진의 성취한 바이다. 나중의 둘은 이타(利他)이니, 이는 앞에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근방편의 과(果)이다. 중생 교화의 뛰어남이란 것은 타자를 교화하는 행이며, 세간의 지(智)를 수순한다는 것은 타자를 교화하는 지혜이니,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다.
네 번째인 세간의 지(智)를 따름 중에서 처음은 총체적으로 뜻을 변별한 것이며, 둘째 ‘세간의 모든 것을 안다[知世所有]’ 이하는 교화의 지(智)를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개별적인 것 속에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경서[書] 등을 아는 것이며, 둘째는 금석의 성질[石性] 등을 아는 것이며, 셋째는 병을 다스리는 방법이며, 넷째는 논(論) 등을 짓는 것이며, 다섯째는 일월(日月) 등이며, 여섯째는 지계(持戒) 등이며, 일곱째는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일이며, 여덟째는 중생을 안락하게 하는 일이며, 아홉째는 연민 때문에 이런 법을 내는[憐愍故出] 것이며, 열째는 점차로 믿게 해서 위없는 불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경문의 제3 중에선 두 구가 빠져 있고, 제4의 뜻 중에선 한 구가 없으며,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또 논(論) 중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길ㆍ흉ㆍ입(入) 등이 때에 따라 상(相)이 변하는 것이다. 변신상(遍身相)이란 과보가 정해진 상(相)이니, 때에 따라서 상(相)이 변하는 것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해[日]가 첫째이고, 달[月]이 둘째이며, 별[星]이 셋째이다. 별은 이른바 5성(星)이니, 동방의 세성(歲星)과 남방의 형혹(熒或), 서방의 태백성(太白星)과 북방의 진성(辰星)과 중앙에 있는 진성(鎭星)이니, 이상을 5성으로 삼는다. 넷째의 수(宿)란 것은 28수(宿)이다. 이른바 각항(角亢) 등의 5성인데, 그 중에서 정지해 머물기 때문에 이름하여 수(宿)라고 한다. 대지의 진동이 다섯째가 되고, 꿈은 여섯째요, 상(想)은 일곱째이고, 길흉이 여덟째가 된다. 여우 울음소리 등은 모두 길흉에 섭수된다. 또 7요(曜)라는 것은 일월과 5성이 이에 해당된다. 입(入)이라는 것은 수순하는 것이다. 과거세의 8상(相)의 업을 수순하고 또한 미래의 8상에서 표현된 과(果)를 수순하는 것이다. 또 변신(遍身)의 모든 상(相)이란 것은 정해진 과보의 애(愛)와 비애(非愛)의 과상(果相)이다.
또 5행(行)을 5염(染)에 상대한 것은 지계로 파계(破戒)를 다스린 것이며, 4선(禪)은 탐욕을 다스린 것이며, 신통은 사귀(邪歸)를 다스린 것이며, 4무량(無量)은 함부로 살생을 행하고 사당에 제사를 지내 복을 구하는 등의 망령된 행을 다스린 것이며, 4공(空)은 망령되게 해탈을 닦는 외도의 삿된 수행 등을 다스린 것이다.
지과(地果)의 경문에 나아감 중에서 3과(果)는 앞과 같다. 조유(調柔)는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조유의 상(相)이며, 둘째 ‘또한 일월과 같다’ 이하는 교지(敎智)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개별적인 지(地)의 행이며, 넷째는 설상(說相)을 매듭 지은 것이다. 경에는 제3구가 빠져 있으니, 처음의 경문은 법을 설함이고, 다음은 비유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처음은 부처님을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 됨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능련(能練)의 행이며, 나중은 소련(所練)의 청정함이다. 능련의 행 중에서 처음은 공양이고, 다음은 회향을 닦는 것이며, 나중은 법행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경문은 다분히 불충분하다. 또 4지와 5지 중에서 출가의 과(果)는 조유 중에 있으니, 이유는 4지 이후에 출세간의 무루행(無漏行)을 얻어서 출가의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나머지 뜻은 논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셋째는 게송을 거듭한 경문인데 처음은 설한 뜻을 변별한 것이다. 다음은 게사(偈辭)를 밝힌 것인데 39게송이 있다. 처음의 11게송은 승만(勝慢)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13게송은 부주도(不住道)의 뛰어남을 읊은 것이며, 다음에 있는 일곱 게송은 부주과(不住果)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일곱 게송은 조유 등의 3과(果)의 경문을 읊은 것이며, 나중의 한 게송은 매듭 지은 것이다.
처음 승만(勝慢)의 내용에서 처음의 두 게송은 평등을 읊은 것이고, 다음의 아홉 게송은 여실한 도의 행을 수순함을 읊은 것이다.
부주도(不住道) 안에서 처음의 넷은 지혜의 청정함을 읊은 것이고, 다음의 아홉은 근방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함을 읊은 경문이다.
제6지의 내용에서 여섯 문은 앞과 같다.
첫째는 명칭을 해석한 것이다. 반야바라밀행은 어느 사이에 대지(大智)가 현전하기 때문에 현전지(現前地)라고 이름한다.
둘째, 여의는 바라는 것은 『지론』의 경본에 의거하면 미세한 번뇌 습기의 장애이고, 『섭론』에 의거하면 미세한 상(相)이 행하는 무명인데, 이 경문에서는 7지에 의탁해 있으니, 다시 두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는 모든 법이 생기하여 상속함을 증득하는 것이 곧 세속을 미혹하는 것이다. 둘째, 상상(相想)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곧 진(眞)을 미혹하는 것이다. 또는 2업의 장애와 아울러 1보(報)의 인연 생사를 다스리는 것이다.
셋째, 나타난 바는 오염과 청정이 없는 뜻이다.
넷째, 성취한 바를 변별하면 반야바라밀을 성취한 것과 아울러 연기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다섯째, 얻은 바의 과(果)라는 것은 12연생(緣生)의 진여와 오염이나 청정이 없는 공덕을 통달해서 상속의 청정과 아울러 일체 중생의 오염되고 혼탁한 과(果)를 능히 청정히 하는 것과 6지의 지위를 얻는 것이니, 전체적인 과는 앞과 같다.
여섯째는 경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게송으로 나중을 낳는 것이고, 둘째는 지(地)의 체(體)를 변별하는 것이며, 셋째는 게송으로 앞을 매듭 짓는 것이다.
처음에는 18게송이 있는데 앞의 두 게송은 보살이 찬탄하는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모든 천(天)이 3업(業)으로 공양하는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천왕이 그 권속과 함께 지(地)의 의의를 찬탄하는 것이고, 다음에 있는 11게송은 천녀가 지(地)의 체(體)와 모든 개별적인 행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해탈이 청해서 나중의 증득에 들어가는 것이다.
천녀의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한 게송은 기악(妓樂)의 공양이고, 다음의 아홉 게송은 과덕(果德)과 인(因)을 올바로 찬탄한 것이며, 나중의 한 게송은 묵묵히 부처님을 관(觀)하는 것이다. 앞의 아홉 게송의 경문에 나아가면 처음의 네 게송은 과(果)를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다섯 게송은 인(因)을 찬탄한 것이다. 인(因)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한 게송은 대비행(大悲行)이고, 다음의 세 게송은 6도(度:6바라밀)의 행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덕용(德用)을 맺어 이룬 것이다.
지체(地體)의 경문은 크게 세 가지로 판별한다. 첫째는 승만(勝慢)의 대치이고, 둘째는 부주도행(不住道行)의 뛰어남이며, 셋째는 저 과(果)의 뛰어남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앞을 거듭 들어서 나중을 낳음으로써 닦아 향해 들어가기를 권유한 것이고, 둘째는 상(相)을 변별한 것이며, 셋째는 행의 성취를 매듭 지은 것이다.
처음 승만의 대치를 밝힌 것은 10평등법을 밝힌 것인데,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해경(解境)이고, 둘째는 행경(行境)이다. 해경이라 말한 것은 이 10문에 즉하는 것을 궤칙이 되는 법으로 삼는 것이니, ‘부주도(不住道)’ 이하는 의거하는 바 행관문(行觀門)의 방편을 밝힌 것이다. 행경이라 말한 것은 10평등에 즉하는 것이 바로 관해(觀解)이니, 처음 ‘부주도’ 이하는 성상(成相)을 관함을 밝힌 것이다. 또 논(論)에 의거해서 그 경문을 개별적으로 정한 것도 좋다.
10평등에 나아가서 상(相)을 해석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의 아홉은 개별적인 것이다. 아홉의 내용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일곱은 무(無)로써 유(有)를 타파한 것이고, 다음의 하나는 유로써 무를 타파한 것이며, 다음의 하나는 유무를 쌍으로 타파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하나는 공해탈문(空解脫門)이니 곧 무상관(無相觀)이며, 다음의 다섯은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이니 곧 무생관(無生觀)이며, 다음의 하나는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이니 곧 무성관(無性觀)이다.
행의 차례라는 것은 해(解)를 들어서 행을 성취한 것이다. 외도가 “만약 모든 법이 없다면 어떻게 주지(住持)해서 오래 서[立] 결정되는가?”라고 의심하니, 이런 의심에 답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무성이라고 말한 것은 실다운 성품이 없는 것이다. 또 “만약 모든 법이 없다면 현재 보는 실유(實有)는 무엇을 말함인가?”라고 말했는데,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일체법이 무상(無相)으로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또 “만약 법이 무상(無相)이라면 어느 처소에서 법이 생겼다가 어느 처소에서 법이 소멸하는가? 마음이 보는 데 따라서 취하여 스스로의 뜻을 말미암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상이 없다 하겠는가?”라고 의심하니,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일체법은 무생(無生)으로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이 이하의 자체공(自體空)은 무상 등과 같지 않기 때문에 앞과 다른 것이다. 무생(無生)이라 말한 것은 일체의 모든 법이 염(念)을 좇아서 생기할 뿐 스스로 섬[自立]이 없는 것이다. ‘유(有)라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한 것은 논(論)에서 말한 염(念)의 전전(展轉)과 같기 때문이다.
또 말하길 “만약 법이 염(念)을 좇아서 생기하는 것이라면 곧 인연이 하나가 아니라서 염 등의 모든 연(緣)을 내가 끝까지 보지 못하여 오직 성취하여 안립한 바의 법을 볼 뿐 염 등은 보지 못하니, 스스로는 무(無)라고 할 수 있으나 성취된 법은 마땅히 유(有)라고 설해야 한다”라고 하니,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무성(無成)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무성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법이 타자로부터 생기하는데도 그대가 그것이 연(緣)으로부터 발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이미 법이 타자로부터 생기함을 인정하고 그대가 이 상(相)을 보지 못한다면 보는 바가 곧 자(自)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실다운 경계를 얻지 못하고 망견(妄見)으로 이룬 것이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무성(無成)의 평등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둘은 고제(苦諦)를 미혹한 것이다.
또 만약 모든 법이 타자로부터 생기하면 스스로 생기하는 성품이 없는 것이니, 나는 비유(非有)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능히 성취하는 인(因)이 이미 타자를 이루게 되니, 이것은 역능(力能)이 있는 것이라서 마땅히 유(有)라고 설해야 한다. 이런 의심에 답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일체를 여의기 때문에 일체법이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경에 의거하면 제8구에 있다. 여읜다고 말한 것은 다만 집착하는 바 경계이니, 정(情)을 이른바 실(實)이라 일컫는 것이다. 저 보는 바를 논하면 곧 좇는 바가 없으니, 첫째는 선유(先有)가 아니고, 둘째는 실다운 이(理)가 없는 것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만약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면 곧 실(實)이 아닌 것 같기 때문에 보는 바가 곧 상(相)의 비유(非有)임을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논에서는 “염상(染相)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곧 집제(集諦)를 계교한 것이다.
【문】만약 이 집제가 곧 마음 덩어리의 섭수라면 해(解)가 이미 경계에 있는 것인데, 어째서 집(集)에 응한다 하는가?
【답】능히 체(體)를 취함을 논한 것이 바로 연(緣)의 유사함에 응한 것이다. 번뇌의 업용(業用)이 계교하는 것을 이른바 경계 가운데 경계라 하니, 곧 이는 무(無)이고 뜻은 돌아가 상(想)을 취하기 때문에 이 집(集)을 설한 것이다.
또 말하길 “모든 법의 인연에 대해 그 본말(本末)을 찾지만 모두 취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뜻을 궁구하면 염법(染法)은 실(實)에 의거해 진(眞)을 미혹해서 생기는 것이라서 염(染)은 무(無)를 설할 수 있지만, 미혹한 바의 진속(眞俗)과 멸(滅)ㆍ도(道)의 2제(諦)는 이(理)를 수순해서 유(有)에 응하는 것이다.
【답】그대는 진속(眞俗)이 이(理)를 수순하는 것을 실(實)이라 일컫는데, 이 뜻은 그렇지가 않다. 멸도(滅道)와 진속은 바로 범행(梵行)과 지(智)의 경계이다.
여(如)를 이른바 실(實)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본래 청정한 평등’이라고 했다. 만약 여(如)를 이른바 실(實)이라 한다면 곧 잡염심(雜染心)이 생겨서 본래 청정함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논에서는 “정상(淨相)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멸(滅)과 도(道)의 2제를 미혹한 것이다,
또 말하길 “만약 법이 여(如)가 아니어서 보는 바가 실유(實有)라면 마땅히 세간의 언설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현재에 있는 명칭이 가지가지로 동일치 않은 것은 곧 소목(所目)의 뜻이 없지 않음을 증험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답】말한 대로 집착한 바의 명칭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세간에서 이른바 시설한 것이 실유(實有)를 앞세움이 아닌 것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다만 세간에서 뜻은 얻어도 명칭은 얻지 못하고 명칭은 얻어도 뜻은 얻지 못함을 보기 때문에 모든 명칭이 따르는 뜻이 일정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그대가 말한 뜻의 실다움이 명칭을 일으키는 등은 희론일 뿐이지 실유(實有)가 아니다.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희론이 없기 때문에 명칭은 실유가 아니라 뜻에 의거해서 생기하고, 뜻은 스스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명칭에 의거해서 나타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증험으로서 희론의 인연이다. 또 뜻의 인(因)을 관해도 명칭의 과(果)를 보지 못하고, 또 명칭의 과를 관해도 뜻의 인을 보지 못하니, 이것은 희론도 또한 없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에 논에서는 “분별상(分別相)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오직 분별만을 설한 까닭은 상(相)에 즉한 공(空)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4제의 명칭을 미혹한 것이니, 이상으로 무생관을 설해 마친다.
또 말하길 “나는 이미 상(相)이 무(無)임을 알았고 생(生)이 유(有)가 아님을 요달했으니, 곧 여실함을 증험해서 결정코 취향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답】그대가 이른바 스스로 봄을 망령되게 유가 아니라 하고, 개별적으로 보아서 염(念)을 여의는 것을 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또한 분별이기 때문에 경에서는 “취하고 버림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취하고 버림이 없다는 것은 본래 정(情)으로 일컬은 것이니, 이는 보는 바를 취한 것이라서 모두 다 진(眞)이 아니다. 이제 또한 염을 여의는 것을 보는 것이 취향하는 바가 되는 것은 곧 앞의 망령됨과 같기 때문에 논에서는 “출몰(出沒)의 상(相)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오직 출몰만을 말한 까닭은 출몰이 곧 공(空)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은 무(無)로써 유(有)를 버리는 것이다.
또 말하길 “내가 상생(相生)을 찾는 것은 무(無)이며, 또 염을 여의는 것을 아는 것은 유가 아니니, 염정(染淨)과 진속(眞俗) 등의 법이 모두 그 체(體)가 없어서 진취(進趣)할 수 없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답】그대는 염정의 진취할 수 없음을 본 것을 무법(無法)이라 말했는데 이 뜻은 그렇지가 않다.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요술[幻]이나 꿈[夢] 등과 같다”고 말했다. 만약 법이 모두 무라면 어떻게 어느 처소에선 꿈을 꾸고 어느 처소에선 꿈을 꾸지 않는가? 이를 증험하면 곧 일체 모든 법이 결정코 무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나는 유상(有相)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나의 없음을 타파하기 위하여 오직 무아라고만 말한 까닭은 이것이 나를 여의면서 무아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연(緣)으로 이루어진 환사(幻事)이니, 이는 위의 견해와 동일하지 않다. 이는 곧 유로써 무를 타파한 것이다.
또 말하길 “내가 앞에서 여덟 가지 견(見)을 일으킴으로써 이(理)를 다하지 않는 것으로 삼은 것은 무로써 유를 타파한 것이며, 다시 하나의 견(見)을 일으켜서 또 이(理)를 다하지 않는 것은 이미 유로 무를 타파한 것이다. 내가 지금 체(體)를 찾는 것은 유나 무에 치우쳐서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두 뜻을 갖추어 성취하니, 이는 이(理)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답】밖에서 보는 바처럼 정(情)을 초월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으니, 그러함을 아는 이유는 보는 바의 경계와 같아서 무(無)의 뜻은 유(有)의 뜻이 아니고 유의 뜻은 무의 뜻이 아님을 그 이(理)에 근거한 것이다. 무에 즉함이 유라서 유와 무가 하나이니, 이런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서 경에서는 “유와 무가 둘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둘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법이 스스로 머물지 않고 연(緣)에 응해서 이루어져 일어나는 것이니, 다시 이 연이 아니기 때문에 과법(果法)을 성취한 것이다. 그 모든 법을 찾아도 자타(自他)를 넘지 않으며, 자타에 머물지 않음은 사(事)에 즉해서 공(空)을 변별한 것이다. 만약 여실히 유무를 본다면 이것은 자타의 양제(兩際)를 넘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논에서는 “성괴(成壞)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다만 성괴라고 말한 까닭은 이른바 성괴가 곧 공(空)이기 때문에 따로 구하지 않은 것이니, 둘이 아닌 평등의 법이 유무를 없애서 불이(不二)라 설한 것이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곧 여실(如實)함 그대로 증험이라서 이른바 유무의 명칭이 희론이 되는 것이니, 또한 유와 무의 두 법 중에 따로 한 법을 세우는 것으로 불이(不二)를 삼은 것이 아니다. 다 취하지 않는 것은 위와 똑같이 인연법의 유무동체(有無同體)가 각기 자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무법(無法)을 설하는 것으로 유(有)를 삼기 때문에 유는 곧 유가 아니며, 또한 저 유법(有法)을 설하는 것으로 무(無)를 삼기 때문에 무는 곧 무가 아니다. 유는 유가 아니기 때문에 무 밖에 다시 따로 유가 있어서 둘이 되는 것이 아니며, 무는 무가 아니기 때문에 유 밖에 다시 무의 법으로 둘이 됨이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유와 무는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다시 저 유무의 법을 설하는 것으로 불이(不二)를 삼기 때문에 또한 불이의 자성은 취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유무를 쌍으로 계교함을 타파한 것이다.
제3의 매듭 짓는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알 수 있다. 의상(義相)은 논과 같을 뿐이다. 위는 12입(入)을 기준으로 해서 궤칙이 되는 법을 밝힌 것이며, 아래는 12연생(緣生)을 기준으로 해서 의거하는 관문(觀門)을 변별한 것이다.
【문】위에서 법을 밝힌 것은 오직 12입을 기준한 것인데 아래의 모든 관문은 어째서 연생(緣生)에 치우쳐 있는 것인가?
【답】법을 섭수함이 관대함을 취하기 때문에 12입을 기준해서 의(依)와 정(正)을 통틀은 것이다. 지금은 관문을 기준으로 해서 밖을 섭수해 안을 좇기 때문에 연생에 국한된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초주(初住)에 나아가서 머물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곧 총체적으로 종지를 수립한 것이다. 둘째 ‘이렇게 생각한다’ 이하는 저 올바로 머묾[正住]을 기준으로 해서 관문을 연 것이니, 곧 개별적인 해석이다. 이전 지(地)는 열등하기 때문에 올바로 지 중에 머무는 것을 바야흐로 머물지 않음[不住]이라 이름 붙인 것이며, 이 지는 뛰어나기 때문에 처음 지 중에 머무는 것을 머물지 않음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법상(法相)을 관찰하는 등은 앞을 거듭 들어서 나중을 낳은 것이며, 법상을 말한 것은 앞의 경문 중 10평등법을 거듭 든 것이니, 앞을 거듭 든 것을 수순해서 6지(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논(論)과 경(經)에 의거해서 준거할 수 있다. 둘째 ‘다시 뛰어난 대비(大悲)로써’ 이하는 머물지 않음을 올바로 나타낸 것이다.
그 중에서 아래를 통틀면 되는데 여섯 구로 분별된다. 첫째는 그 명칭을 해석한 것이다. 앞의 관(觀)을 대하기 때문에 이를 설함이 되풀이된 것이다. 대비수(大悲首)라는 것은 중생을 염(念)하는 마음인데 고통을 뽑는 것이 비(悲)가 되고, 비(悲)가 늘어나는 것을 대(大)라 한다. 대비증(大悲增)이란 것은 구하려는 마음의 연민이 지극해지는 것인데 증상(增上)이라고 칭한다. 또한 증상과(增上果)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름하여 증상이라 하며, 부처님 지혜를 추구함이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대비라 이름한다.
만족이라 말한 것은 유위(有爲)를 여의는 것이다. 마음이 유위를 싫어하기 때문에 연기를 관찰하는데 그 관찰을 궁극까지 다하는 것을 만족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경과 논의 두 곳에서 동일하지 않다. 만약 논문에 의거하면 네 구가 있게 되니, 즉 제4 생멸의 한 구가 앞의 세 문에 의거함으로써 행상(行相)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경본에 의거한다면 제3이 곧 생멸이니, 즉 생멸을 쓰는 것이 만족관(滿足觀)이 된다.
경과 논의 두 곳에 의거하면 곧 두 가지 뜻으로 생멸문을 해석한다. 첫째 논에 의거한 것이니, 이른바 중생과 보리와 인연이 모두 유위인데, 지금은 지(智)로써 알기 때문에 ‘생멸을 관함’이라 한 것이다. 둘째 경에 의거한 것이니, 인연의 법이 생(生)을 수순하고 멸(滅)을 거역하는 것인데 본래의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대비라고 말한다. 또한 만약 경에 의거하면 네 구를 성취하는데 역시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3심(心) 차례의 뜻을 밝힌 것이다. 앞의 공법(空法)을 관함을 타고서 문득 중생의 허망함에 얽힌 바를 염(念)하기 때문에 먼저 비(悲)를 일으키고, 비(悲)로써 염(念)하기 때문에 부처님 지혜를 구하고, 부처님 지혜로써 이익을 주고자 하기 때문에 제2를 일으키고, 부처님 지혜는 반드시 허물을 여의어야 이루어지는 바이기 때문에 제3을 일으킨다.
셋째는 자리이타(自利利他)에 나아가서 분별하는 것인데 앞의 하나는 이타이고, 나중의 둘은 자리이다.
넷째는 번뇌를 수호하고 소승을 수호하는 분별인데 앞의 둘은 소승을 수호하는 것이고, 나중의 하나는 번뇌를 수호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인과에 나아가는 것이니, 처음과 나중은 인(因)을 섭수하는 것이고, 제2는 과(果)를 구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머물지 않음의 분별인데 처음의 하나는 이타(利他)가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이며, 나중의 둘은 자리(自利)가 세간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둘째 정주(正住)에 나아가서 개별적으로 관문을 변별한 것인데, 처음은 경론을 통틀어서 관문을 간추려 조목별로 나눈 것이며, 두 번째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처음의 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경에 나아가서 조목별로 나눈 것이며, 둘째는 논에 나아가서 조목별로 나눈 것이며, 셋째는 경과 논을 서로 대비해서 경문을 나눈 것이다. 경에 나아가서 조목별로 나눈 것 중에서 처음은 10관(觀)을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며, 둘째는 거듭 매듭 지은 것이다.
10관이 무엇인가?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의 차례이며, 둘째 ‘삼계가 허망하다’ 이하는 일심의 섭수하는 바를 밝힌 것이며, 셋째 ‘무명 인연에 두 종류가 있다’ 이하는 스스로의 업이 도와서 성취함을 밝힌 것이며, 넷째 ‘무명이 행을 끊어지지 않게 한다’ 이하는 서로 버리어 여의지[捨離] 않는 것이며, 다섯째 ‘무명ㆍ애(愛)ㆍ취(取)’ 이하는 3도(道)의 행이고, 여섯째 ‘무명과 행은 과거이다’ 이하는 먼저와 나중의 제(際)를 관함을 밝힌 것이며, 일곱째 ‘무명ㆍ행 나아가 6입(入)에 이르기까지’ 이하는 3고집(苦集)을 밝힌 것이며, 여덟째 ‘무명의 인연으로 행이 생긴다’ 이하는 인연이 일어남을 변별한 것이며, 아홉째 ‘무명의 인연은 생(生)의 속박이다’ 이하는 인연의 생멸하는 속박을 변별한 것이며, 열째 ‘무명의 인연이 수순해서’ 이하는 무소유진관(無所有盡觀)을 수순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모두 각기 순(順)과 역(逆)의 관(觀)이 있으니, 곧 둘이 되는 것이다. 경문은 이와 같다.
둘째는 다음으로 논에 나아가서 조목별로 나눈 것이다. 논가(論家)가 이 10번의 관[十番觀] 가운데 나아가 3문으로 분별하니, 첫째는 유위를 염리(厭離)하는 마음에 나아가서 12연(緣)을 관하는 것인데, 이것은 곧 앞의 만족생멸문(滿足生滅門)이다. 둘째는 중생을 깊이 염(念)하는 마음에 나아가서 12연을 관하는 것인데, 아래에서 설한 비(悲)가 관(觀)을 수순하는 것이다. 수순이라 말한 것은 이것이 곧 비(悲)를 일으켜서 연생(緣生)을 수순하는 것이니, 바로 앞의 비(悲)를 첫머리[首]로 삼는 것이다. 셋째는 불심을 추구해서 12연을 관한 것인데, 논문의 명칭은 일체상지분별관(一切相智分別觀)이라 한다. 이것은 바로 앞의 비증상관(悲增上觀)이다.
【문】앞의 초주(初住)에선 먼저 비(悲)가 첫머리임을 밝혔고, 다음은 증상을 설하였으며, 나중은 비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선 어째서 먼저가 원만이고, 다음이 비(悲)이며, 나중이 증상을 설한 것인가?
【답】앞의 초주에선 마음의 차례를 낳기 때문에 먼저가 비(悲)의 첫머리이고, 나중에 비(悲)의 원만을 논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선 그 정행(正行)의 차례이기 때문에 먼저가 비(悲)의 원만이고, 나중이 증상을 설한 것이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앞의 초주에선 위의 10법을 타고서 법의 공적(空寂)을 관한 것인데 문득 중생의 망유(妄有)가 법의 얽히는 바가 됨을 염(念)하기 때문에 먼저 비(悲)를 일으켜서 바로 고통을 뽑아내어 부처님 지혜를 얻게 하고자 한 것이다.
다음은 증상을 일으킨 것이니, 부처님은 반드시 유(有)를 여읨으로써 성취됨을 말미암기 때문에 만족생멸 등의 관(觀)을 밝힌 것이다. 지금은 정행(正行) 중에서 허물을 여의는 것이 시초가 되니, 먼저 유위를 싫어하고 그로 인해 저절로 허물을 여의어 문득 중생이 이에 처해도 나오지 않음을 염(念)한 것이다.
다음은 수순을 변별함인데, 앞의 둘은 인(因)을 섭수한 것이라서 이(理)는 반드시 앞에 있다. 일체상지(一切相智)는 과행(果行)을 구하는 것이라서 이(理)는 반드시 나중에 있다.
이 3【문】속에 각각 열 가지 관(觀)의 인연이 있으니, 모으면 곧 30이 된다. 하나하나의 문 속에 각기 역(逆)과 순(順)이 있으니, 곧 60을 이룬다. 이상의 분별은 다만 주지(住地)에 의거해서 60번을 밝힌 것이며, 아래의 과분(果分)에 대해서는 180인연관문(因緣觀門)이 있어서 그러한 줄 아는 것이다. 과분의 경문에 나아가선 3공문(空門)으로써 연집(緣集)을 분별하고, 이 문 이하에 의거해서는 각각의 섭수가 동일치 않기 때문에 경에서는 “공해탈(空解脫)에 의거해서 10공삼매(空三昧)를 얻으니, 무생(無生)과 무원(無願)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한 것이다.
이 3공(空)에 의거하면 다시 세 가지 뜻이 있다. 만약 공삼매로써 12연을 관하면 곧 12연이 모두 공(空)이니, 이를 알고 나서 논주(論主)는 장차 무상을 분별하여 공삼매에 짝지웠다. 만약 무상문(無相門)으로써 12연을 관하면 12가 곧 사(似)이고, 만약 무원문(無願門)으로써 12연을 관하면 연생(緣生)이 곧 실(實)이다. 논 중에서 또 무상관문이 진실의 성품이 됨을 설했으니, 진실로 말미암아 상(相)을 여의기 때문에 그로써 짝지운 것이다. 무원으로 무생(無生)에 짝지운 것은 의타(依他)의 무생은 원하고 구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로써 짝지운 것이다. 이 같은 인연의 동이법문(同異法門)은 아래의 10공삼매에 준거해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제3은 논으로써 경을 대한 것이다. 경문을 나눈 분제라는 것은 다시 개별적인 뜻이 있으니, 앞서 경본(經本)의 10번에 의거함이 곧 유위의 인연 등을 염리(厭離)하는 관(觀)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전후의 경본에 의거해서 10번이 180문(門)을 이룬다.
【문】만약 경론에 의거하면 60문의 관상(觀相)이 없는데 어째서 180문을 이룬다고 말하는가?
【답】경의 처음에 3관문을 여는 것을 말미암아서 나중에 논주(論主)가 경본의 20번을 인정하고 다시 개별적으로 3문ㆍ4문ㆍ9【문】등을 변별한 것이다. 지금은 앞의 3관문을 여는 것으로써 증험한 것이며, 나중의 경 속에선 관체(觀體)가 곧 결정코 60문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지금은 논으로 경을 대함으로써 10문을 섭수하여 3번으로 삼으니, 뜻인즉 한 관(觀)을 좇아서 유위(有爲)를 싫증내 여의는 것인데 이 뜻은 아래에서 다시 분별하였다.
그러나 논이 경의 분제를 섭수한 것에서 유위를 싫증내 여의는 관(觀)에 나아가면 저 경 안의 10번관문을 섭수하여 그것으로 30을 삼는 가운데 초문(初門)을 곧 하나로 삼아 답상(答相)을 이룬다고 이름하고, 다음에 있는 반문(半門)을 다시 하나로 삼아 제일의(第一義)라 이름하며, 나중의 8【문】반(半)을 합쳐서 하나로 삼아 세제(世諦)의 차별이라 이름한다.
제2의 대비수순관(大悲隨順觀)에선 열을 섭수해서 넷이 되니, 초문을 하나로 삼아 중생의 우치전도(愚癡顚倒)를 관함이라 이름하고, 다음의 하나를 하나로 삼아 나머지 처소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이라 이름하며, 다음의 넷을 하나로 삼아 다른 길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이라 이름하고, 나중의 넷을 하나로 삼아 다른 해탈을 구하는 것이라 이름한다.
일체상지분별관(一切相智分別觀)에선 열을 섭수하여 아홉이 된다. 처음에 있는 반문(半門)을 설함이 하나가 되니 염정관(染淨觀)이라 이름하고, 다음의 1【문】반이 다시 하나가 되니 염의지관(染依止觀)이라 이름하며, 다음에 있는 5문이 각기 개별적으로 하나가 되고, 다음에 있는 두 문이 다시 합쳐져 하나가 되니 무시관(無始觀)이라 이름하며, 다음의 하나가 하나가 되니 종종관(種種觀)이라 이름한다. 앞을 통틀면 아홉이 된다.
이 3【문】중에서 경문의 앞은 물리친 것이고, 나중은 나누어 해석한 것에 해당한다.
둘째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대경본(大經本)에 의거하면 법계연기는 온갖 다양함이 있지만, 이제 요문(要門)으로 간략히 섭수하면 두 가지가 된다. 첫째는 범부의 염법(染法)을 기준으로 해서 연기를 변별한 것이며, 둘째는 보리의 정분(淨分)을 기준으로 해서 연기를 밝힌 것이다.
정문(淨門)을 기준으로 한 것은 요체를 섭수하면 네 가지가 된다. 첫째는 본유(本有)이고, 둘째는 본유의 수생(修生)이며, 셋째는 수생에 이름 붙인 것이며, 넷째는 수생의 본유이다.
본유라 말한 것은 연기의 근본 실체가 정(情)의 운위(云謂)를 여읜 것이다. 법계에 현연(顯然)해서 삼세에 부동(不動)이기 때문에 「성기품(性起品)」에서는 “중생의 마음속에 미진(微塵)의 경권(經卷)이 있고, 보리의 대수(大樹)가 있다”고 한 것이다. 많은 성인이 함께 증득하고 사람의 증득은 먼저와 나중으로 동일치 않지만 그 나무는 별이(別異)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본유임을 아는 것이다. 또 이 연생(緣生)의 경문에서 12인연은 곧 제일의이다.
본유의 수생이라 말한 것은 그러한 모든 정품(淨品)이 본래 다른 성품이 없는 것이다. 이제 모든 연(緣)이 새로운 선(善)을 발생함을 기준으로 해서 저 모든 연에 의거한 것은 바로 망법(妄法)이 발한 진지(眞智)로서 곧 보현에 합치한 것이다. 성품의 체(體)가 본래 분별이 없고, 수행의 지(智)도 역시 분별이 없기 때문에 지(智)는 이(理)를 따를 뿐 모든 연(緣)을 따르지 않으니, 이 때문에 수생(修生)이 그대로 본유를 따르고 동일한 성품에서 발함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기품」에서는 “보리심을 이름하여 성기(性起)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문】본유의 수생은 이미 새롭게 뜻을 발한 것이라서 구(舊)가 아닌데 어째서 그 본성을 따른다고 설하는가?
【답】이것은 다만 신생(新生)의 뜻이 되는데, 이 수생을 설한 것이 근본 뜻과 더불어 친하기 때문에 성기를 따르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계박이 겁초(劫初)를 구별하지 않고 근본 계박을 수순해서 친하지만, 지금의 연(緣)을 대해서는 소원하기 때문에 새로 얻음을 설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셋째의 수생이란 것은 신(信) 등의 선근이 미리 현전(現前)하지는 않지만 이제 청정한 가르침을 대해서는 연(緣)에 의지해 처음으로 발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신생(新生)을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저 무분별지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넷째의 수생의 본유라는 것은 그 여래장의 성품은 모든 얽힘에 은폐되어 있으니, 범부는 미혹됨에 처해서도 자각하지 못한다. 만약 미혹의 때를 대한다면 유(有)라 이름하지 못하니, 그러므로 『무상론(無相論)』에서는 “만약 유라면 마땅히 보아야 한다”고 했으며, 또 『섭론』에 의거하면 “얻어도 얻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등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제 무분별지를 얻어서 처음으로 법신이 얽매임에서 벗어나 청정함을 이룸을 나타내는데 미리 힘이 있지 않은 것은 저 무법(無法)과 동일하다. 이제 용(用)을 이루게 되는 것이 본래의 선무(先無)와 다르기 때문에 그 명칭이 본유가 됨을 설할 수 없고 수정(修淨)이 됨을 설하는 것이다.
【문】만약 처음으로 나타냄을 수기(修起)라 한다면 그 명칭을 수생(修生)이라 말할텐데 어째서 나타냄이라 말했는가?
【답】단지 이 수생문(修生門) 속의 뜻이 본유를 성취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먼저 미혹된 마음에 있을 때는 체용을 설하지 않다가 금시(今時)에야 비로소 저 법신이 있음을 설하기 때문에 저 신생(新生)과 함께 친함을 아는 것이다. 먼저라면 뜻의 소원함이 있으니, 마치 논에서 “여읨과 여의지 않음이 무상(無常)하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미 무상을 말했다면 본유를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뜻은 이 연생(緣生)에서 이치로는 실로 유(有)에 통하는 것이다. 만약 경을 대해서 경문을 나눈다면 이 10번의 연생은 오직 두 가지 문이 있을 뿐이다. 첫째는 수생이고, 둘째는 수생의 본유이며, 나머지 둘은 「성기품」에 있다.
둘째, 염법(染法) 분별의 연생이란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연기의 일심문(一心門)이고, 둘째는 의지(依持)의 일심문이다.
연기문이란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진망연집문(眞妄緣集門)이고, 두 번째는 섭본종말문(攝本從末門)이며, 세 번째는 섭말종본문(攝末從本門)이다.
연집(緣集)이라 말한 것은 총상(總相)에서 논한 12인연과 하나의 근본 식(識)의 지음인데 진(眞)과 망(妄)의 구별이 없는 것은 논(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일심법에 의거하면 두 종류의 문이 있으니, 이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또 이 경에서 ‘오직 마음의 굴러감’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또 논에서 설한 것처럼 진망의 화합을 아리야(阿梨耶)라고 이름한다. 오직 진(眞)만으론 생기하지 못하고 망(妄) 단독으론 이루질 못하니, 진망이 화합해야 바야흐로 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마치 꿈속의 일과 같으니, 아는 것과 자는 것이 합해져야 바야흐로 집기(集起)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망연집의 문이다.
두 번째의 섭본종말(攝本從末)이란 것은 오직 망심으로 짓기 때문이니, 논(論)에서는 “종자식(種子識)과 과보식(果報識)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도(道)를 대치할 때에 본식(本識)이 모두 소멸하고 법신이 5도에 유전하는 것을 이름하여 중생이라 하니, 그 유전하는 처소에 따라서 그 별미(別味)를 성취한다. 법이 온갖 고통을 심는 것이 이처럼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근본을 섭수해서 그 지말을 따름을 아는 것이다.
【문】염(染)을 따를 때를 당하면 그대로 염이 되는가, 정(淨)을 말미암음이 되는가?
【답】체(體)는 청정한 근본이라서 다시 정(淨)이라는 명칭을 수반할 수 없기 때문에 염(染)일 때는 정(淨)이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래장에 의거해서 생멸심이 있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마땅히 단지 단독적인 생멸이라고 해야 한다. 지금은 서로 의지하여 말한 것인데 이같이 설한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염(染)과 정(淨)을 다함께 증득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지, 염문(染門)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세 번째의 섭말종본(攝末從本)이란 12인연이 오직 진심(眞心)의 지음이라는 것이니, 마치 파도와 물의 지음과 같고, 또한 꿈의 일이 오직 보심(報心)의 지음뿐인 것과 같다. 진(眞)으로 짓기 때문에 경에서는 “5음(陰)과 12인연과 무명 등의 법이 다 불성(佛性)이다”라고 한 것이며, 또 이 경에서 “삼계는 허망하니 오직 일심의 지음일 뿐이다”라고 했으며, 논석(論釋)에서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문】섭말종본은 마땅히 정품(淨品)인데 어째서 염문(染門)에서 분별하는가?
【답】이 섭말종본은 이(理)로는 정품의 연생(緣生)에 있지만 지금은 염(染)을 대해서 염(染)의 환(幻) 같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염문에 있는 것이다.
【문】이처럼 일체의 청정한 법이 모두 염(染)을 대해서 망(妄)을 나타낸 것이 그 뜻이라면 어째서 유독 섭말종본을 변별한 것만이 염(染)의 연생에 있는 것인가?
【답】일반적으로 정품(淨品)의 연기를 논하는 데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염(染)을 대함으로써 망법(妄法)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 때문에 경에서는 “모든 제(諦)의 제일의를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다만 정품의 연기를 나타낸 것이 곧 이(理)를 나타낸 문이니, 곧 저 보현의 「성기품」 등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나머지 뜻은 이에 준거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 섭말종본이 곧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며, 이 중에도 공(空)의 뜻이 있어서 자체공(自體空)이 되니, 나중에 해당되는 곳에서 분별하겠다.
둘째, 의지(依持)의 일심문에서 6식이나 7식은 이야(梨耶:아뢰야)에 의거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12연생은 이야식에 의거한다”고 했으니, 이야식으로써 통인(通因)을 삼기 때문이다.
【문】위에 나온 연기의 일심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답】위에 나온 연기의 일심은 염정(染淨)이 곧 체(體)로서 별이(別異)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의지문(依持門)에서는 능소(能所)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둘로 나눈다.
【문】위에서 나왔듯이 모든 뜻은 다 하나하나의 문으로 구별되는데 어떻게 한 증득의 경계[一證境界]를 이루게 된다고 하는 것인가?
【답】위에서 변별한 것은 모두 연(緣)을 기준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나타낸 것이니, 바로 증경(證境)의 방편도연(方便道緣)이다. 욕락(欲樂)이 이미 구별됨은 바로 지금 의거하는 관문이 동일치 않은 것이니, 만약 증경(證經)을 찾는다면 위에서 나온 10평등의 설(說)과 같다.
이상으로 둘째의 뜻을 해석하는 문을 마친다.
다음은 경문을 대해서 관문의 개별적인 상(相)을 해석하는 것이다. 경본(經本)의 10관(觀) 속에 나아가면 처음은 순관(順觀)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역관(逆觀)을 변별한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와 동일하다. 그 역관의 상(相)은 나중에 해석하겠다.
처음, 인연분의 차례라는 것은 세 종류로 분별한다. 첫째는 다스리는 바의 장애를 밝힌 것이고, 둘째는 관(觀)의 체(體)를 변별한 것이며, 셋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니, 나머지는 모두 이와 같다. 장애를 다스린다고 말한 것은 아견(我見)의 집착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른바 12분(分)이 나의 지음이라 말한 것은 곧 신견(身見)과 사견(邪見)에 두루 통하는 것이다. 만약 경문을 나누어서 구별한다면 단지 인견(人見)만을 다스린 것이지만, 이 미혹은 저 3공(空)의 다스리는 바를 통틀은 것이다. 다스리는 상[治相]은 어떠한가? 실제로는 인상(人相)이 있지 않은데도 인상을 실답게 보는 것은 곧 공문(空門)의 다스리는 바이며, 연기는 아생(我生)과 흡사하나 생(生)을 취하는 바와는 같지 않아서 계교하여 사상(似相)이 되는 것이니 곧 무생(無生)의 다스리는 바이다. 그리하여 저[彼]가 나와 흡사함을 알게 되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자타의 차별식이 아견(我見)의 훈습으로부터 생긴다”고 한 것이니, 이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다.
사생(似生)과 실다운 법상(法相)을 성취함은 곧 무원문(無願門)으로서 앞의 두 가지 집착을 통틀어 다스리며, 또한 저 무아의 공(空)을 다스리고 여덟 가지 자재한 견상(見相)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앎을 얻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자체공(自體空)이란 것은 유(有)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성품 없음[無性]의 성품을 이룬 것이니, 곧 미혹의 문을 다스린 것이다.
둘째, 체(體)를 관하는 것은 곧 인연의 이(理)와 차례로 생기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니, 공과 사실(似實) 등의 3성(性)으로 순관(順觀)의 체(體)를 삼은 것이며, 역관(逆觀)은 곧 하나의 연기공(緣起空)의 성품 없는 성품의 관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는 곧 연기 차례의 이(理)로써 이 관의 체를 삼은 것이니, 바로 경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만약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다면 다만 준거하여 생각해 섭수하라.
셋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인연분에 나아간 것은 곧 인분(因分)이며, 차례라는 것은 점차(漸次)이다. 관(觀)이란 비추어 통달하는 뜻이니, 이에 나아감으로써 장(章)의 제목을 정한 것이다. 이 경문에 네 가지가 있는데 서로 따르면 셋이 되고, 간추리면 둘이 되며, 총체적으로 섭수하면 하나가 된다.
문(門)은 네 가지로 구별하는데 첫 번째는 저 해혹(解惑)을 들어서 무아를 성취함을 나타내는 문이며, 두 번째 논에 의거한 ‘우치(愚癡)’ 이하와 경에 의거한 ‘일체 범부’ 이하는 정(情)을 따져서 이(理)를 나타낸 문이며, 세 번째 논에 의거한 ‘무지(無智)’ 이하와 경에 의거한 ‘항상 사념(邪念)에 따른다’ 이하는 상(相)을 변별해서 실(實)을 나타낸 문이며, 네 번째 ‘모든 제(諦)의 제일의제를 알지 못한다’ 이하는 실(實)에 의거해서 상(相)을 변별한 문이다.
서로 따르면 세 가지라는 것은 4【문】중에서 처음의 하나는 성취함을 이름 붙인 것이고, 무아를 해석해 이룬 것 중에서 둘은 답을 이름 붙인 것인데 답은 무아를 나타낸 것이고, 나중의 하나는 상(相)을 이름 붙인 것이니, 이른바 2제(諦)에 의거해서 인연의 상(相)을 수립한 것이다.
간추려 섭수하면 두 가지란 것에서 앞의 3문(門)은 종지가 무아임을 나타낸 것이니 곧 인연의 성품이며, 나중의 하나는 인연의 상(相)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총체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제1 인연분의 차례가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인 상(相)을 변별하여 실(實)을 나타냄에 나아가면 단지 치애(癡愛)를 말미암아서 모든 업행(業行)을 일으킨 것이고, 나아가 노사(老死)는 나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서 처음은 순(順)이고, 다음은 역(逆)이며, 나중은 매듭 지음이다. 순(順) 중에서 처음은 무지(無智)의 유무를 말한다. 경에서 ‘항상 사념(邪念)을 따른다’고 말한 것은 무명지(無明支)이고, 무지는 치(癡)이며, 구함은 애(愛)이고, 상(常)을 구하는 것은 유(有)라 이름하며, 단(斷)을 구하는 것은 무(無)라 말한다. 과거는 오직 치(癡)뿐이니, 실(實)은 곧 과거로서 모든 번뇌를 갖추어 치애(癡愛)가 강력하기 때문에 치우쳐 드는 것이다.
‘항상 따른다’ 이하는 행이다. 행에는 여섯 구가 있으니, 앞의 세 행은 허물이고 나중의 세 행은 체(體)이다. 경에 의거하면 행의 허물의 세 구도 역시 무명지이며, 논 속에서는 무명지를 빠트리고 있기 때문에 ‘이 행으로써’ 이하는 식지(識支)이다. 처음에 이 행으로써 마음의 종자를 일으킨 것은 앞을 타고서 나중을 일으킨 것이니, 행이 마음을 훈습함을 말미암아서 마음으로 하여금 나중을 낳게 하기 때문에 종자라 설한 것이다. 마음이란 것은 이야(梨耶)이다.
둘째, 유루(有漏) 이하는 나중의 생사를 대해서 앞 종자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유루는 애(愛)이고, 상(想)을 취하는 것은 견(見)이다. 경에 의거하여 마음을 취하면 마음은 곧 상(想)에 통한다. 이른바 ‘업이 지(地)가 된다’ 이하는 다시 후유(後有)를 낳는 것이니, 이것이 명색지(名色支)이다. 명색 등을 낳는 것에 일곱 구가 있다. 첫째는 업이 지(地)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식(識)이 종자가 되는 것이며, 셋째는 무명이 덮는 것이며, 넷째는 애수(愛水)가 적시는 것이며, 다섯째는 나의 마음이 물을 대는 것이며, 여섯째는 갖가지 견(見)의 그물이며, 일곱째는 명색의 싹이 생기는 것이다.
【문】훈습의 뜻처럼 마땅히 업이 종자가 되고 식(識)이 의지하는 지(地)가 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지금은 식이 종자가 되는가?
【답】일반적으로 업의 종자를 논하면 두 가지로 분별된다. 첫째는 훈습이 종자를 이룰 때이며, 둘째는 생(生)을 이끌어서 과(果)에 감응할 때이다. 만약 훈습이 종자를 이룰 때라면 업이 종자가 되고 식이 지가 되며, 식이 아직 훈습을 받지 못할 때는 종자가 있음을 변별하지 못한다. 이제 훈습이 처음으로 종자를 낳음을 설하게 된 것은 곧 위의 마음과 더불어서 능훈(能熏)의 뜻은 친하고 식과 함께 하는 뜻은 소원하기 때문에 식이 지가 되고 종자가 능의(能依)가 되는 것이니, 곧 업에 속하는 것이다.
둘째의 ‘생(生)을 이끌어서 과(果)에 감응한다’는 것은 식(識)으로써 종자를 삼고 업으로써 지(地)를 삼는 것이다. 지금 업이라 말한 것은 생(生)에 임한 때이다. 중음(中陰)으로서 생을 구하는 업심(業心)이 정업(正業)의 종자가 되지만 오히려 본식(本識)에서는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 위의 마음으로서 생(生)을 구하는 중음이 바로 종자의 용상(用相)이다. 이 용상은 이미 업의 체(體)가 아니며 다만 능히 이끄는 업이 식지(識支)를 감득(感得)한 것이니, 마치 지(地)가 종자를 이끌어서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것과 같다. 업을 설함이 지(地)가 되고 종자는 식(識) 안에 있으니, 저 본식과 더불어서 동일한 무기(無記)의 성품이다. 먼저 업식을 이루어 위의 마음은 이미 물러간 것이다. 이제 종자의 현현과 본식이 모두 이루어졌지만 식의 뜻과는 친하고 능훈(能熏)과는 소원하기 때문에 식을 따름이 합쳐져서 종자가 된다고 판별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즉체(卽體)이고, 둘째는 이체(異體)이다. 이 뜻은 위의 『요간(料簡)』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문】업력의 무명과 모든 견(見) 등은 현금(現今)에서 생(生)을 구하고 식으로써 의거함을 삼으니, 마땅히 식을 따르는 것이 종자가 되야 한다. 그렇다면 분별함이 의거하는 지(地)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답】이(理)는 식(識)에 의거함과 동일한데 다만 뜻의 구별이 있어서 종자와는 같지 않다. 종자의 현현과 식의 무기성(無記性)이 동일하기 때문에 첫째의 체(體)와 둘째의 상(相)은 모두 하나로서 나누지 못한다. 생(生)을 구하는 무명이 비록 식과 더불어 똑같이 나타나더라도 그 색심(色心) 등의 차별이 변해서 이루어진 것은 본식의 체와 상의 두 뜻과는 같지 않아서 식을 따름이 종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니,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다.
둘째, 의지(依止)의 일심관(一心觀)이란 것은 곧 12연(緣) 등의 능의(能依)이다. 마음이란 곧 이야심(梨耶心)이니, 이에 나아가서 장(章)의 제목을 삼은 것이며, 이야의 연기로써 이 관(觀)의 체(體)를 삼은 것이다. 3문은 위와 같다. 처음의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저 외부 경계를 자성이 집착함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른바 일체의 경계이다. 개별적인 다스림은 단지 자성과 차별과 적취(積聚) 등의 셋을 미혹하기 때문이니, 통틀어 다스림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체(觀體)를 능히 다스리는 것은 도리어 3공(空)의 공이 흡사 실(實) 같은 무생(無生)의 성품과 상(相)으로 이 순관(順觀)을 삼기 때문에 논에서는 “아리야식이 대공(大空)이 된다”고 한 것이니, 그러므로 무생이 흡사 실 같은 것이다. 무원(無願)은 논한 바와 같음을 생각해서 알아야 한다.
역(逆)으로 1관(觀)을 성취함은 처음의 문과 같다. 유식(唯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야유식이 모든 법을 유지하고 낳는 것인데 식(識)을 여의면 곧 무(無)이다. 둘째는 의식(意識)유식을 밝힌 것이니, 생사와 열반, 염(染)과 정(淨) 등의 법이 의지(意地)에 나타나 있는데 식(識)을 여의면 곧 무(無)이다. 이야유식이 비롯함은 해(解)의 경계이지 행이 의거하는 바가 아니며, 의식유식은 그 종결이 곧 정해(正解)가 의거하는 바이니, 마음이 종결하고 뜻이 시작함은 앞과 반대임을 알 수 있다.
관상(觀相)은 무엇인가? 행하는 마음이 법을 보는 것이 경계가 되는 것과 같다. 만약 관심(觀心)이 경계를 깨달음이 없다면 염정(染淨) 등의 법은 제멋대로 현전할 것이다. 이제 의언(意言)이 지은 바를 아는 것은 일컬음을 취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식(識)의 지음을 아는 때는 이름하여 의타(依他)로써 분별의 경계를 버리는 것이라 한다.
【문】의타와 식은 어떻게 구별을 취하는가?
【답】의타는 상(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의 체(體)의 공상(空相)이 능히 식을 일으키고, 그 식이 연(緣)을 따르면서 자성을 지키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공을 성취함에 응한 것이 곧 사상(似相)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상(相)을 기준으로 했음을 아는 것이다. 둘째, 유식은 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삼계는 유심(唯心)이고, 전현(轉顯)2)의 분별은 곧 공(空)이기 때문에 앎을 얻는 것이다. 식(識)이 성품 없음을 조망한 것이 곧 실답지 않음과 흡사해서 체상(體相)이 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통틀어 설했을 뿐이다.
【문】가령 경계가 마음에 의거함은 곧 과법으로서 흡사하지만 무(無)는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식(識)을 대해서 경계가 곧 공임을 변별하는가?
【답】단지 마음을 좇아서 생기하는 것은 분별의 경계가 아니고, 능연심(能緣心)에 속한 것은 의타성(依他性)의 섭수이니,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경계를 보는 때를 당해서는 단지 실(實)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주(論主)는 “2제(諦) 등의 경문으로 한결같이 의거하는 지관(止觀)을 짓는다”고 말한 것이다.
【문】나중에 유식을 아는 것은 도리어 소지(所知)이다. 앞에서 일컬은 경계와 더불어 어떤 뜻의 구별이 있기에 나중의 경계를 판별한 것이 의타성에 속하는가?
【답】앞에서 경계를 볼 때는 연집(緣集)을 알지 못하고 뒤에 식의 지음[識作]이라 설한 것이다. 뜻을 지음은 성품이 아니라 식의 지음을 본 것이며, 시분(時分)은 염(染)이라 일컬은 것을 여읜 것이니, 연집이 이(理)를 지음은 분별의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에 구별됨을 아는 것이다. 실다운 경계를 멸하게 할 때 곧 1분(分)의 공무상성(空無相性)을 얻으니, 무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식의 상(想)과 경계가 나란히 생기지 않는 것을 성품 없는 성품을 얻는다고 이름한다. 이것이 바로 행문(行門)의 유식관법이다. 만약 생해(生解)를 기준으로 한다면 3성(性)은 나중에 성품 없는 성품을 변별한 것이다.
【문】유식의 상(想)이 멸함은 무상의 경계를 알아서 유식의 상(想)으로 하여금 식상(識相)이 스스로 멸하도록 하기 때문인가?
【답】다시 따로 무상(無相)을 알아서 마음을 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유식의 상(想)이 성품 없음을 겸하여 아는 것이니, 상을 취한다면 스스로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앞의 세력에 의거해서 나중 마음의 불생(不生)을 얻는 것이다.
지금 이 경문 안에선 두 가지 유식을 통틀은 것이다. 삼계유심의 지음은 곧 본식의 유식이며, 경 아래의 게송이 다만 탐심으로부터 있는 것과 같은 것은 곧 의식의 유식이다. 이것은 순관(順觀)이니, 이는 경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경본(經本)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구(句)는 종지를 세운 것이고, 둘째 12연분(緣分) 이하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이끌어서 증명한 것이며, 셋째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하는 따지는 것이며, 넷째 ‘사(事)를 따라서 욕심을 낳는다’ 이하는 답이다. 수(隨)라는 것은 온갖 많음의 뜻이며, 사(事)라는 것은 위의 마음이 업을 지은 것이며, 욕심을 낳는다는 것에서 마음은 이야심(梨耶心)이다.
【문】이미 욕심이 바로 의식이라 말했는데 어째서 본심이라 말하는가?
【답】욕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식(識)이 작용의 분별을 나타내서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는 이 식에 즉한 인연이 작용을 발기한 것이다. 의변(義邊)은 곧 그 사(事)에 속하고, 능견취(能見取)의 변(邊)은 곧 의식에 속하며, 인연의 발기는 곧 이야에 속하는데 일어나는 때가 동일한 처소라서 분별할 수 없다. 마치 광심(誑心)을 행하는 것을 무명이라 이름하고, 욕심이 경계를 취하는 것을 곧 요달치 못함이라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욕심의 뒤에서 요달치 못함을 따로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욕심에 즉함을 요달치 못함이라 이름함을 아는 것인데, 다만 문장을 이루기 때문에 말에 먼저와 나중이 있는 것이다.
사(事)가 행이란 것은 위의 마음이 분별한 사가 곧 업행인 것이며, 광심(誑心)을 행함을 무명이라 이름하는 것은 그 행이 분별의 실상을 현성(現成)하는 것이다. 이제 이야식이 변성해서 요달치 못하는 것을 의식이라 이름하고, 그 실사(實事)를 취하기 때문에 무명이라 이름하니,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문】이것과 경본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답】경은 통틀은 것이고 논은 국한된 것이다.
셋째, 자인(自因)의 관(觀)이라는 것에서 자(自)라는 것은 타와 다름을 가려내는 명칭이니, 오직 사인(邪因)만을 가려낼 뿐 정인(正因)을 가려내지는 않는다. 이제 이 관(觀)안에선 네 종류의 인(因)을 섭수하니, 인연(因緣)과 증상연(增上緣)과 연연(緣緣)과 차제연(次第緣)이다. 이 네 가지 연(緣)의 이(理)를 이 관(觀)의 체(體)로 삼으니, 이 이하로부터 인연관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3성(性)의 상(相)으로써 순관의 체(體)를 삼고, 3공문(空門)으로써 역관의 체(體)를 삼는다. 다만 뜻을 구별해서 나누기 때문에 이런 모든 관(觀)이 있는 것이다.
분별의 성품 안에서 다른 망령된 계교를 가려내는데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다스리는 바라고 말한 것은 달리 계교한 인연의 집착을 다스리는 것이니, 마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수도하는 것이 실제로 업을 발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인연을 갖춤이 능히 업을 발생한다고 계교하는 것은 곧 계취견(戒取見)이니, 마치 자성이 인(因)이 아니면서 인(因)과 마음의 번뇌가 되는 것과 같은데, 그 구분은 이 다스림과 동일하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이란 것은 이 자인(自因)이 네 가지 연(緣) 등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법을 생기함을 밝힌 것이다. 이같이 인연의 친함과 소원함의 두 가지 이(理)를 갖추는 것을 속제관(俗諦觀)이라 이름한다. 망령된 계교를 낳지 않는 것은 1분(分)의 진(眞)을 이루는 것이니, 이 경문은 이를 변별한 것이다.
셋째, 경문을 해석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제 무명에 두 종류의 지음 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첫째는 친인연(親因緣)이며, 둘째는 소연(疎緣)이다. 첫째의 연(緣) 중에서 어리석음[癡]은 친인(親因)이고, 둘째의 행과 더불어 인(因)을 짓는 것은 곧 소연(疎緣)이다. 이 가운데서 3연(緣)을 섭수하니, 나머지 경문의 종류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단지 소인(疎因)만을 취한 것은 논(論)을 기준으로 해서 변별한 것이다.
넷째, 서로 버리어 여의지[捨離] 않는 관(觀)이란 것에서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서로 사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자와 구별할 때 서로 생(生)함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3성(性)의 구분은 위의 자인(自因)의 관(觀)과 동일하다.
처음에 다스리는 바를 밝힌다는 것은 인(因)과 과(果)를 이시(異時)로 계교하는 것이니, 이른바 인이 멸하고서 과는 후에 생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이 과를 낳지 않는 잘못이 있으며, 다시 나머지 잘못도 있으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계취견(戒取見)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이란 동시에 과(果)를 낳는 이(理)로써 이 관의 체(體)를 삼은 것이다. 이것의 친함과 소원함의 두 인(因)은 모두 동시이니, 이것은 경문을 기준으로 해서 변별한 것이다.
관상(觀相)이란 무엇인가? 무명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시(子時)이고, 둘째는 과시(果時)이다. 저 두 종류의 시(時)는 전후가 아니니, 자(子)에 의거해서 시(時)를 취하는 것을 자시라 이름하고, 과(果)에 의거해서 시(時)를 취하는 것을 과시라 이름한다. 그 뜻은 무엇인가? 자(子)라는 것은 행을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이고, 과(果)라는 것은 이 자시 속에서 성취한 행과(行果)이니, 이것에 의거해서 시(時)를 취하는 것을 과시라고 이름한다.
【문】인과가 동시인 것은 곧 별체(別體)의 허물이다. 만약 전후가 생기한다면 인이 과를 낳지 않음의 허물이다.
【답】내가 인과를 세운 것은 저 두 가지 잘못과는 다른 것이니, 동시를 말미암은 것은 제2의 잘못과 다른 것이며, 인과가 되는 것은 제1의 잘못과 다른 것이다. 이것은 역관(逆觀)이 아니라 정(情)을 떠나서 설한 것이다. 단지 속제(俗諦)의 이(理)를 나타냈을 뿐 제일의가 아니라서 동시를 아는 것이니, 이 때문에 논에서는 ‘두 종류의 뜻이 있기 때문에 사(事)를 반연해서 나타내 보인다’고 한 것이다. 무엇을 두 가지 뜻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인(因)의 뜻이고, 둘째는 과(果)의 뜻이다. 사(事)를 반연해서 나타내 보이는 것은 두 종류의 뜻을 반연함에 의거해서 두 종류의 때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처럼 나머지 인연도 자생인(自生因)의 두 종류 뜻으로 나누는 것이 사(事)를 반연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논주(論主)가 『중론』의 게송을 인용하길 “온갖 연(緣)으로 생기한 법은 인(因)에 즉하면서도 즉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다시 인과 다르지 않아서 단(斷)도 아니고 상(常)도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과의 두 뜻이 각기 단과 상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행(行)은 무명의 과(果)이니 무명의 인(因)에 즉하지 않지만 이 과를 말미암기 때문에 무명의 인과 다르지 않으며, 인의 뜻은 앞과 반대임을 알 수 있다. 단도 아니고 상도 아니니 행이 과를 말미암은 것은 단이 아니며, 과(果)가 힘이 없으니 상(常)이 아니다. 즉 이 때[時] 속에서 무명은 인이라서 단이 아니며, 과의 인이기 때문에 상이 아니다. 이 뜻은 논주(論主)가 외정(外情)을 제거해서 역관(逆觀)의 설을 지은 것이지, 연생(緣生)을 수순하는 속제문이 아니니, 이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다. 논주는 나중에 스스로 해당되는 경에 귀속하면서 “자생인연(自生因緣)을 관하는 뜻은 앞의 설과 같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논(論)을 기준으로 해서 변별한 것이다.
다섯째, 3도관(道觀)이란 것에서 3이란 것은 수(數)이고, 도(道)라는 것은 통틀어 생기하는 뜻이니, 번뇌의 업보와 통틀어 생기하는 뜻을 이 관(觀)의 체(體)로 삼는 것이다.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처음의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인연이 사(事)를 폐하고 이(理)를 계교하는 집착을 대치하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법의 전체적인 인연의 이(理)를 계교하는 것이 곧 사(事)를 폐하고 이(理)를 집착하는 잘못이다. 그러므로 논(論)에서는 “만약 인연이 생한다면 일체의 법이 함께 생기한다”고 말했으니, 이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다.
【문】논문에서 말했듯이 이 말은 나중의 3제(際)에 속하는데 어째서 앞을 따라서 다스리는 바로 삼는 것인가?
【답】논주는 따로 다른 뜻이 있다. 나중의 8【문】반관(半觀)을 과목으로 나눈 것을 속제로 삼은 것은 집착이 허물임을 밝힌 것이니, 그러므로 나중을 좇아서 설한 것이다. 그러나 논주가 3도로써 허물을 섭수하는 관(觀)을 삼은 것은 곧 체(體)가 허물이라서 따로 다스리는 바가 있을 수 없다. 이제 경본에 의거하면 3도는 덕이기 때문에 다스리는 바가 있는 것이니, 장차도 앞에 있으면서 논할 것이다. 논주가 따로 다른 뜻이 있음을 아는 것은 앞의 의지일심관(依止一心觀)이 두 문으로 나뉘는 것과 같으니, 어찌 10번(番)의 뜻이겠는가? 또한 어떤 풀이하는 이는 외인(外人)과 논주가 잘못을 이루었음을 지으니, 만약 이런 해석을 지으면 뜻이 전이되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의심하기를 “만약 인연이 생한다면 일체법이 함께 생기한다”고 함을 알 수 있다. 논에서 답하여 말하기를 “과거의 업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아직 업을 짓지 않은 것이며, 둘째는 이미 업을 지은 것이다. 단지 아직 짓지 못한 것은 일체생(一切生)이 아니며, 이미 지은 것은 마땅히 일체생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렇기 때문에 지금은 논주와 외인이 잘못을 이룬 것이 앞의 다스림에 속함을 성취한 것이다.
또 첫째, 인(因)이 모든 법을 낳는 것은 마치 숙작(宿作)과 자성 등을 계교한 것과 같으니, 그 구분은 이 다스림과 동일하다. 이는 계취(戒取)일 뿐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이란 것은 3성을 대해서 구분한 것인데 위와 같다. 자인관(自因觀)의 인연의 도가 모든 유(有)를 통틀어 낳고, 번뇌도에 의거해서 모든 유(有)를 낳기 때문에 똑같이 유류(有流)에 존재하는 것이다. 업에 의거해 모든 유를 낳으니 6도가 동일치 않고 선악도 차이가 있으며, 과보에 의거해 모든 법을 낳으니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3유(有)가 그 사업(事業)을 성취하게 되면서 모든 상(相)이 동일치 않은 것이다. 이것의 이(理)와 사(事)는 이(理)에 상응하기 때문에 법이 가지런히 생기하고, 사의 격리를 말미암기 때문에 서로 생기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인연의 이(理)만이 사(事)를 빌려서 생기하지 않는 것이라면 3유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것은 경본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 경문을 해석함은 알 수 있으며, 논에 의거해 변별한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여섯째, 3제관(際觀)이란 것에서 3이란 것은 수(數)이고 제(際)는 무시(無始)의 분제를 나타낸 것이니, 곧 3시(時)의 인과와 이사(理事)로써 이 관의 체(體)를 삼는다.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첫째,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무인(無因)의 집착을 다스린 것이다. 곧 상견(常見)이니, 이른바 모든 법이 인(因)으로부터 생기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다시 미래에 나고 늙고 죽음이 없다고 말하니, 곧 단견(斷見)이다.
둘째, 능히 다스림이 의거하는 바의 관문(觀門)이란 것은 무명ㆍ행 등은 과거세이고, 현재세에선 몸이 항상하다고 보는 집착을 다스리는 것이며, 애(愛)ㆍ취(取)ㆍ유(有) 등은 미래세이니 외적으로 집착하는 단견(斷見)의 허물을 대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삼세의 전(轉)이 있는 것은 이른바 전전(展轉)하여 모든 후유(後有)를 낳는 것이니, 이는 허물과 근심을 밝혔을 뿐이다.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며, 이상은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일곱째, 3고관(苦觀)이라는 것에서 3은 수(數)이고 고(苦)는 뜻이니,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첫째,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이른바 낙정(樂淨)의 집착이다. 이 인연의 몸은 3고(苦)를 갖추고 있는데 미혹된 자가 이를 요달치 못하고 낙정이 있다고 일컫는 것이니, 곧 견취(見取)의 섭수이다. 구분하면 계견(戒見)이 있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을 밝힌 것인데 3성(性)은 위와 같다. 이(理)의 실다움은 모든 인연을 통틀어서 논하고, 구분하면 3고(苦)에 통한다. 지금은 상(相)을 기준으로 해서 나누는데, 무명ㆍ행 등을 행고(行苦)로 삼고, 촉(觸)과 수(受)의 2지(支)를 고고(苦苦)라 이름하며, 애(愛)ㆍ취(取)ㆍ유(有) 등을 괴고(壞苦)로 삼는다. 행고의 점차적인 증가는 몸이 항상 머물면서 낙정이 있다고 계교하는 것을 다스리고, 고고는 몸이 자재로워서 낙정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다스리며, 괴고는 몸의 구경(究竟)에는 낙정이 있다고 계교하는 것을 다스리니, 이것을 세속을 수순하는 관[順俗觀]이라 이름한다.
【문】3고(苦)와 고를 아는 지혜를 이 관의 체(體)로 삼는데, 이 고가 어째서 3성에 통하게 되는 것인가?
【답】경에서 설했듯이 불생불멸이 무상(無常)의 뜻 등이다. 또 “이는 고(苦)이고, 이는 제(諦)이며, 이는 실(實)이다”라고 한 것이다. 또 자세히는 『중변론(中邊論)』과 같으니, 준거해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경문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경문을 해석한 것에서 5지(支)의 명칭으로써 행을 삼은 것은 모든 분(分)의 점증(漸增)이 아직 고구(苦具)를 대하지 못하고 다만 행상(行相)이 증가한 것이며, 촉(觸)과 수(受)로써 고고(苦苦)를 삼는 것은 이 2지(支)가 외적인 고구(苦具)를 대해서 증가하기 때문이며, 애(愛) 등을 괴고(壞苦)라 이름하는 것은 미래세에 인연을 낳기 때문에 현재의 몸을 어기는 것이며, 그 현재도 오래 세간에 머물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애(愛)와 취(取)가 체(體)가 있는 것은 괴상(壞相)이 아니니, 타괴(他壞)의 증대를 괴고라 이름함을 나타낸 것이다.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여덟째, 인연관이란 것에서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첫째,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이른바 단인(單因)의 유력(有力)이 과(果)를 낳음을 계교한 것이다. 마치 자성의 인(因)이 능히 25제(諦)를 낳음을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 몸의 업은 인연의 소생인데 미혹된 자가 이를 요달치 못하고 자성의 지음이라 일컬으니, 즉 계취견(戒取見)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觀門)이란 것에서 세 가지 성품은 위와 같다. 인연은 이(理)를 낳으니, 인(因)은 결정의 용(用)이 있고 연(緣)은 과(果)를 발하는 능(能)이 있어서 바야흐로 법이 생함을 얻는 것이다. 만약 인력(因力)이 과(果)를 발하는 능(能)을 반연하는 것이 없다면 그 인(因)의 여섯 가지 뜻은 현전하지 못한다. 무엇을 여섯 가지 뜻이라 하는가? 첫째는 염념멸(念念滅)이니, 이 멸(滅)은 공유력부대외연(空有力不待外緣)이다. 그 까닭은 유력이어서 연(緣)을 기다리지 않음을 인체(因體)로 삼아 연사(緣事)를 대(對)하지 못하고 스스로 옮겨 움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구유(俱有)이니, 공유력대연(空有力待緣)이다. 그 까닭은 외연(外緣)을 얻는 것이 오직 체공(體空)을 나타냄으로써 함께 역용(力用)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쫓음을 따라서 치제(治際)에 이르는 것이니, 이는 유무력대연(有無力待緣)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타자를 따르게 되므로 무(無)가 능히 연을 어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무력인 것이다. 넷째는 결정(決定)이니, 이는 유유력부대연(有有力不待緣)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외연이 아직 이르지 못해서 성품이 스스로의 성취를 고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관인연(觀因緣)이니, 이는 공무력대연(空無力待緣)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외연이 오직 친인(親因)의 유(有)가 아님과 무력이 능히 과(果)를 낳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가령 자과(自果)를 이끌어서 나타내는 것이니, 이는 유유력대연(有有力待緣)이다.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외연을 얻을 때 오직 자인(自因)만을 나타내서 자과(自果)를 얻기 때문이다.
【문】이 인연의 여섯 가지 뜻의 분제는 무엇인가?
【답】이제 연에 의지한다고 말한 것은 단지 인사(因事)의 밖에서 증상(增上) 등의 3연(緣)을 취한 것이지, 자인(自因)의 여섯 가지 뜻이 서로 발기함을 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여섯 가지 뜻이란 것은 똑같이 이법(理法)이니, 인사(因事)를 대해서 나타냈기 때문이다. 인사를 폐기하면 여섯 가지 뜻이 스스로 서로간에 성취를 능히 발하지 못하는데, 다만 외부의 3연이 각기 이사(理事)가 있기 때문에 인과의 뜻을 대해서 나타내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섯 가지 뜻은 마땅히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을 이루어선 안 된다.
여섯 가지 뜻과 6상(相)을 공통으로 이룬다고 답한 것에서 6상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이(理)를 수순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事)를 수순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뜻 중에서 이(理)를 수순하는 뜻은 드러남[顯]이고, 사(事)를 수순하는 뜻은 은미함[微]이다. 그 4연(緣)의 사는 두 가지 뜻이 위와 같다. 다만 사를 수순하는 뜻은 증대하고 이(理)를 수순하는 뜻은 은미하니, 그러함을 아는 까닭은 인연이 과(果)를 낳고 법이 미혹을 일으키는 뜻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논주가 따로 6상(相)을 가지고 이(理)에 들어가도록 비추었기 때문에 4연이 사를 수순해서 증대함을 아는 것이다.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 이(理)를 수순하는 뜻이 증대함을 아는 까닭은 6상을 변별해서 마음을 보게 하여 이(理)에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문】다만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여섯 가지 뜻은 이(理)를 수순해서 증대하는 것이지, 사(事)에서 취하지 않은 것임을 어떻게 아는가?
【답】논주는 사(事)가 6상을 갖추지 못함을 가려낸 것이니, 오직 뜻을 기준으로 해서 변별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이상 두 가지 미(微)의 뜻은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인연 안에는 각기 여섯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따로 뛰어난 용(用)이 있어서 능히 과(果)에 감응함을 설한 것이다.
【문】논에서 설했듯이 타작(他作)이 아닌 자인(自因)의 생(生)이고, 자작(自作)이 아닌 연생(緣生)이기 때문에 이미 비타(非他)라고 말한 것인데 어째서 다만 뛰어난 힘이 과(果)를 낳는 것만 취한 것인가?
【답】이것은 불생(不生)을 든 것인데 그 형상이 뛰어난 힘을 취한 것이다. 만약 형상을 빼앗지 못한다면 뛰어난 힘은 이루어지지 못하니, 이 빼앗음 중에서 한 변(邊)의 뛰어난 힘만 편벽되게 취하는 것으로 하여금 위에 나온 논주의 자인관(自因觀)에 속하게 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두 힘을 통틀어 취하고, 능히 생(生)하지 않는 뜻은 그 속에 분재(分在)되어 있으니, 위의 여섯 가지 뜻에 준거해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문】하나의 개별적인 공(空)이 나중의 관문에 들어가서 해당되는 분별에 이르니, 이는 곧 앞의 독인(獨因)이 과(果)에 감응하는 집착을 다스린 것이고, 업이 연(緣)을 빙자해 이루어져서 나중에 과에 감응할 때는 연에 의지해 발하지 않는데 이런 집착은 어떤 잘못이 있는가?
【답】만약 연(緣)에서 폐기한다면 자인(自因)의 뛰어난 힘은 모두 다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는 곧 속제관이니, 연생(緣生)의 이사(理事)와 지혜를 관체(觀體)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경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인(因)이 곧 친함과 소원함의 네 가지 연(緣)을 통틀은 것이니, 그러므로 논에서 “인연이 능히 행을 낳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명칭을 해석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또 소승에 의거하면 6인(因)과 4연(緣)이고, 만약 삼승에 의거하면 곧 10인(因)ㆍ20인 등이며, 만약 일승에 의거하면 곧 법에 따라서 인(因)을 변별한 것이니, 하나하나의 인연과 이사(理事)가 각기 개별적으로 법계와 더불어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제 6인(因)의 뜻은 오직 일승만이 능히 궁구할 수 있으니, 이것은 별교(別敎)를 기준으로 해서 설한 것이다.
아홉째, 인연생멸박관(因緣生滅縛觀)이란 것에서 인연은 속제의 의거하는 바를 거듭 들어 이룬 것이고, 생(生)이란 생기한 바의 과법(果法)이고, 멸(滅)이란 곧 인연으로 생하는 힘을 여읜 것이며, 박(縛)이란 것은 곧 속박에 수순해서 속제를 좇는 것이다. 경본에 의거하면 인연 두 글자가 빠져 있다.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첫째,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이 이하의 2관(觀)이 단지 마음의 미혹을 다스린 것이며, 전체적인 뜻은 이해할 수 있으니, 이른바 인연의 공력(共力)이 능히 과(果)의 집착에 감응하는 것이다. 또 인연법을 말한 것은 각기 약간의 힘이 있어서 공통으로 하나의 과를 이룬 것이니, 그 연기의 이(理)는 모든 뜻을 통틀은 것이다. 만약 인연의 유력(有力)이 공통으로 생기함을 본다면 곧 이사(理事)를 미혹하는 분별의 집착이라 이름하니, 곧 법아(法我)의 소견(所見)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이란 것에서 이것은 3공문(空門)으로써 관체(觀體)를 수순함으로 삼으며, 역으로는 일생박무분별관(一生縛無分別觀)을 이루니, 나머지 뜻은 아래에서 다시 분별하겠다. 모든 연생법은 속제상(俗諦相)을 성취하는 것이라서 하나의 연(緣)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 생긴 법은 하나의 연을 따라 없어지므로 과를 세우지 못하는 것이니, 친함과 소원함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無知者故]”라고 하고, “지을 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作時不住故]”라고 하였다. 만약 인연이 능히 생기한다면 머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만약 인연이 생기하지 않는데도 법이 있는 것이라면 앞의 인(因)이 모이지 않았어도 마땅히 과(果)를 낳아야 하고, 또 이 박과법(縛果法)의 인연도 과(果)를 낳으니, 두 상(相)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답】인연생의 내용에 두 종류의 뜻이 있다. 첫째는 자생(自生)이 없는 뜻이기 때문에 공(空)이고, 둘째는 인연이 유력하기 때문에 과법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 연박(緣縛)의 내용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속제의 연기이고, 둘째는 연생(緣生)의 힘을 여의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인연생의 법에서 만약 생력(生力)이 없다면 과(果)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 연박관(緣縛觀)에서 만약 공(空)의 뜻이 없다면 과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무엇을 공상(空相)이라 하는가?
【답】인(因) 안에선 소원함을 구해도 얻을 수 없고, 또 생력(生力)을 구해도 얻을 수 없다. 앞의 인연생과 과생(果生)의 뜻은 공(空)을 증대하는 뜻이니, 이 미(微)함은 인연법이 생의 미혹을 수순해서 증대되기 때문이다. 지금 연박법의 공의(空義)는 생력(生力)을 증대하는 뜻이니, 미(微)는 연기법이 생의 무분별지를 수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 경에서는 “연기의 법은 유(有)와 무(無)를 여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비록 생력이 없더라도 공력(空力)으로써 성취하기 때문에 자성의 생(生)함을 여읜 것이니, 경에서는 “머묾 없음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만약 연생이 미혹을 수순해서 증대하는 것이라면 이 뜻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연박(緣縛)이 공(空)을 수순해서 증대하는 것은 마땅히 진제(眞諦)의 섭수에 해당해야 한다.
【답】공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공이 되기 때문에 속(俗)의 성취가 있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공이 무분별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속을 성취하는 공을 취하기 때문에 진제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문】만약 생박(生縛)을 관하는 것이 마땅히 법을 보는 때라면 능히 속박하는 인(因)의 힘으로써 하는 것이 아닌가?
【답】능히 속박함이 없는 것이다. 만약 능히 속박함이 있다면 이는 곧 타의(他義)라서 박(縛)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뜻은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속제의 무분별의 이사(理事)로써 이 관의 체(體)를 삼으니, 이 생박관(生縛觀)은 인과를 나누지 않는다. 이것은 경문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무명의 인연으로 모든 행이 생하니 생박(生縛)으로써 설한다는 것에서 무명의 인연은 세속의 의거한 바를 거듭 든 것이고, 생박으로써 설한 것은 관의 체(體)를 올바로 지적한 것인데 생박은 앞의 해석과 같다. 언설한 까닭은 말에 의거해서 평등한 세속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박(縛)이란 글자로써 생과 불생을 통틀어 지목해 박으로 삼기 때문이며, 친생(親生)을 박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며, 속제가 없으면 두 상(相)으로써 이 두 가지 뜻을 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박(縛)자의 인(印)으로써 그 뜻을 정하니, 만약 그 설(說)을 폐기한다면 두 가지 뜻을 따로 취할까 두렵기 때문에 의거한 설을 관함으로써 뜻을 취한 것이며, 이(理)는 설함 중에 있다. 나머지 경문은 이해할 수 있다. 또 경은 공력(空力)의 많음과 유력(有力)의 적음을 통틀어 취한 것이며, 논은 곧 인(因)을 설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논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열째, 무소유진관(無所有眞觀)은 논에 의거해서 명명한 것으로서 유진관(有盡觀)을 수순한다. 세 가지 문은 위와 같다.
첫째, 다스리는 바라는 것은 마음의 미혹에 국한된 것이며, 또한 모든 사(使)를 통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속제를 통틀어 섭수하기 때문에 집(執)의 인연이 되는데 다만 세속에 응하는 상(相)은 자체공(自體空)의 뜻으로서 앞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장애이다. 왜 그런가? 다만 인연생의 법은 곧 자체공의 이(理)로서 스스로 머물지 않고 속제를 수순하여 성취하는데 속제의 과(果)를 성취할 때는 동일치 않은 인연으로써 하니, 이 뜻으로 치우치지 않는 증대를 구하는 것이다. 만약 미혹이 오직 속자(俗者)에게만 있다고 일컫는다면 그 때문에 잘못이 있는 것이니, 곧 법아(法我)와 아(我)의 소견이다.
둘째, 의거하는 바의 관문이란 것에서 세 가지 뜻은 위와 같다. 생박(生縛)의 의취는 차이가 있으나, 나중에 스스로 분별한다. 모든 연생법은 생기하지 않음이 이미 생기함이니, 곧 쌍으로 나타난다. 마치 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볼 때 물의 건조함과 습함이 모두 나타나는 것과 같으며, 또 거울의 상(像)에 오염과 청정이 쌍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올바른 이(理)이다.
【문】그 나타난 바의 공(空)은 진제이기도 하고 속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관법과 앞의 연생과 아울러 생박을 쓰는 것을 어째서 구별하는가?
【답】인연과 박(縛)은 오직 유(有)를 수순함을 성취한다. 이제 제10의 공(空)과 유(有)를 관함은 둘 다 수순이고, 또 이 공과 유는 모두 속제이다. 일반적으로 진(眞)과 속(俗)을 밝히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뜻이 있다. 첫째는 체(體)와 상(相)의 상대이고, 둘째는 공과 유의 상대이니, 이처럼 진과 속을 나누기 때문에 그 뜻이 동일치가 않다. 만약 공과 유로 진과 속을 나눈다면 유(有)라면 속(俗)이 되고 공(空)은 곧 진(眞)이 되니, 증지(證智)로 아는 바이다. 만약 체(體)와 상(相)이 상대한다면, 공과 유가 서로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속제는 공과 유를 통틀은 것인데 이 공은 자체공이지 사공(事空)이 아니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이 심진여(心眞如)의 상(相)은 능히 마하연의 체(體)를 보인다”고 한 것이니, 이 때문에 비록 진여가 명칭을 얻었더라도 속상(俗相)은 체(體)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이는 곧 공과 유가 동일하게 하나의 상(相)이 되어서 연(緣)으로써 성품을 수순하는 것이니, 이(理)와 사(事)를 이 관의 체(體)로 삼기 때문이다. 위의 경문에서 “12연생은 무위(無爲)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경에 의거해서 변별한 것이다.
셋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수순(隨順)은 곧 공(空)이고, 유(有)의 다함을 수순하는 것은 공의 수순이 되니 곧 유(有)의 진멸(盡滅)이다. 이는 논주의 나중 해석을 수순한 것이지 경문을 수순한 것은 아니다. 만약 경의 무소유진관(無所有盡觀)에 의거한 것이라면 무소유는 수순하는 바이고, 진(盡)은 능히 수순하는 것이며, 속상(俗相)이 곧 공임은 멸리(滅理)에 수순하는 것이며, 속상으로써 법을 구함은 곧 그 성품을 다하는 것이니, 이는 두루 다함의 다함이다. 또한 어떤 해석자는 진(盡)이란 글자로써 역관(逆觀)을 삼으니, 이는 경문에 응한 것이 아니라 경문 속에 개별적으로 있는 역상(逆相)을 위한 것이다. 또 ‘만약 이 진(盡)이 곧 역(逆)이라면’은 모든 관(觀)이 다 마땅히 그 진(盡)자를 놓아야 하는 것이다. 경문에서 ‘무명의 인연이 모든 행을 낳음은 무소유진관을 수순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인연의 성품 없음이 상(相)에 즉해서 공을 변별하는 것이니, 공이기 때문에 무소유의 이(理)를 수순해서 그 성품을 다하는 것이다.
10관(觀)도 역시 서로 생하는 차례가 있다. 모든 허망의 잘못을 알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제1이 있는 것이다. 이미 식(識)이 망령되고 나서는 망법(妄法)이 무엇을 의거해서 생기하는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2가 있는 것이다. 식이 의거하는 바를 알아도 어떤 이(理)가 있는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3이 있는 것이다. 이미 생기의 이(理)를 알아도 어느 때를 의거하는지는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4가 있는 것이다. 식이 때를 알고 나서는 어느 뜻을 기준으로 할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5를 밝힌 것이다. 그 뜻을 알고 난 다음엔 어떤 본말(本末)이 있으니, 이 때문에 제6이 있는 것이다. 본말을 알고 난 다음엔 어떤 허물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7이 있는 것이다. 그 허물을 알고 난 다음엔 어떻게 사(事)를 대하여 이룰 것인가? 이 때문에 제8이 있는 것이다. 성취를 알고 난 다음엔 어떤 상(相)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9가 있는 것이다. 상(相)을 알고 난 다음엔 이(理)에 어긋날까 의심하니, 이 때문에 제10이 있는 것이다. 경에 의거한 10번(番)을 마친다.
둘째, 논에 의거해서 분별한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위(有爲)를 염리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비(大悲)를 수순하는 것이며, 셋째는 일체상(一切相)의 지(智)이다.
첫째, 유위를 염리한다는 것은 해(解)이면 순(順)이 되고, 행이면 역(逆)이 되는 것이다. 해(解) 중에선 3공의 상(相)으로써 순(順)을 삼는데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답을 성취하는 상(相)이며, 두 번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며, 세 번째는 세제(世諦)의 차별이 앎이 되는 것이다. 세간에는 사람의 성취가 없고 세간의 유위는 허물이니, 이 때문에 모름지기 제1이 있는 것이다. 이미 허물을 알고 난 다음엔 어느 이(理)에 취향할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제2가 있는 것이다. 비록 들어가는 바의 법을 알더라도 무엇을 의거해서 얻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속제를 들어서 의거하는 바의 관문을 변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세제를 관함을 수순하여 곧 제일의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처음의 해석한 경문은 앞과 같다.
【문】이 상(相)은 곧 속제인데 어째서 제3이 다시 속제를 밝히는가?
【답】이것은 속제가 잘못을 취하게 됨을 변별한 것이다. 둘째, 제일의제는 소이(所以)를 벗어나게 됨을 해석한 것이니, 저 인연에 나아가서는 제일의를 관하는 것이 인연을 벗어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의지관(依止觀) 가운데 상반문(上半門)을 취한 것이다.
세제관(世諦觀)이란 것에서 세(世)는 곧 시(時)이고, 제(諦)는 시(時) 가운데 법의 실다움[法實]이다. 이 합친 경 속에서 나중의 8문(門) 반은 6문관(門觀)이 된다. 처음의 반은 하나가 둘을 취한 것이 하나가 되며, 다음의 셋은 각기 하나이며, 나중의 셋은 하나가 된다. 처음은 염염의지관(染染依止觀)인데, 염이란 것은 능히 의거하는 것이고, 의지(依止)라는 것은 의거하는 바이다. 이 6【문】중에서 처음의 1문은 염의 의지를 밝힌 것이며, 다음의 2문은 염상(染相)을 건립하는 것이며, 다음의 1문은 염에 나아가서 허물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2문은 정관(正觀)이 잘못을 막는 것이며, 나중의 1문은 관(觀)의 분제를 변별한 것이다. 또 어째서 염이기 때문에 염상(染相)을 밝힌다고 하는가? 염은 어째서 의거하는 바가 제일의를 의거하는가? 어째서 망법(妄法)에 의거함이 진(眞)에 의거함이라고 설하는가? 이는 염에 나아가서 진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둘째, 인관(因觀)을 말한 것은 염의 소인(所因)을 관한 것이다.
【문】논주의 합본(合本)은 두 관(觀)을 하나의 인관으로 삼는다. 경본은 처음이 자인(自因)이 되는데 논주는 타인(他因)이라 말하며, 경본은 서로 사리(捨離)하지 않는데 논주는 자인이라고 말한다. 이 뜻이 무엇을 말하는가?
【답】경주(經主)가 자(自)라고 말한 것은 다른 외도를 가려내는 것이고, 논에서 타(他)를 말한 것은 4연(緣) 속에 나아가 증상연을 가려내 취함으로써 12인연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니, 논주의 뜻에 준거해서 저 경문을 해소하라. 이는 곧 친함을 들어서 소원함을 구별하는 것이니, 그 소원한 연을 취하고 친함을 취하지 않는 것은 12인연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수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12지(支) 중에서 다만 행(行)과 유(有)의 2지(支)만이 인(因)의 뜻을 보답해서 나타내고 나머지는 생략하고 갖추지 않으며, 또 증상연을 따로 취하기 때문이다. 이를 가려낸 소이(所以)를 소연(疎緣)이라 이름한다. 타인(他因)을 짓는 것은 증상연이 되는데 친인(親因)을 대하면 소원함이 되고, 증상(增上)을 조망하면 자과(自果)가 친함이 된다. 이제 친인을 대해서 저 증상을 설하기 때문에 타인을 설하는 것도 역시 가능하며, 이를 반(反)하면 그 타(他)를 취하는 것이다.
경에서 서로 사리(捨離)하지 않는다고 이름 붙인 것은 앞 관(觀)의 해석과 같으며, 또한 친함과 소원함을 통틀은 것이다. 논에서 자인(自因)이라고 말한 것은 증상연 속에서 친(親)의 인연을 취함이 곧 서로 인(因)이 되는 것이니, 동등하게 서로를 말미암아 인(因)이 됨으로써 모든 지(支)를 통틀기 때문이다.
셋째, 허물을 섭수하는 관(觀)이란 것은 12인연을 섭수하는 것으로써 3도(道)의 관찰을 삼는 것이니, 오직 고(苦)와 집(集)의 허물일 뿐이다.
넷째, 허물을 수호하는 것은 저 범부의 사견(邪見)의 허물을 수호하는 것이다.
다섯째, 불염염(不厭厭)이란 것은 이승의 만심(慢心)의 허물을 막아서 여의는 것이다. 미세한 고(苦)는 이승은 싫어하지 못하고 보살은 능히 싫어하므로 불염염이라 이름한다.
여섯째, 심관(深觀)이란 것은 관행(觀行)이 궁극적이고 깊은 것이니, 인연의 이(理)의 묘함이 정(情)의 취향을 지나치기 때문에 이름하여 심관이라 한다. 상(相)은 무엇을 말하는가? 논주는 근본의 3관(觀)을 나눔으로써 4법이 그 깊은 이(理)에 취향하는 것으로 삼는다. 첫째는 타작(他作)이 아니고 자인(自因)의 생함이기 때문에 곧 자인을 성취하는 것이니, 뛰어난 힘을 갖춤으로써 무인(無因)의 계교를 여읜다. 둘째는 자작(自作)이 아니고 연생이기 때문에 곧 소연(疎緣)을 나타낸 것이니, 뛰어난 힘을 갖춤으로써 단인(單因)이 과(果)를 낳으며 연(緣)을 빙자하지 않는 잘못을 여읜다. 이 두 가지 뜻은 자성의 집착을 여의는 것이니, 속제의 견해를 수순함으로써 마음이 쉬지 못함을 말미암는다.
【문】어째서 저마다 적은 힘이 있어도 공통으로 많은 힘을 성취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답】만약 적음과 많음이라면 성취하질 못한다.
셋째는 둘이 아닌 지음이 단지 생(生)을 수순하는 것이니, 이것은 앞의 견해를 버리는 것이다. 인연의 상(相)이 생을 수순하는 것은 유(有)와 무(無)로 취할 수 없는 것이 유를 수순함이 되기 때문이다. 유를 수순함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자유(自有)가 다시 유를 수순하지 않으며, 정(定)이 인(因)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와 무로 취할 수 없음을 여의는 것이다. 넷째는 무인(無因)의 지음이 유를 수순함이 아니기 때문에 곧 의지(意地)를 여의는 것이니, 이른바 무분별이다. 그 법은 위와 같은 10평등의 섭수이니, 이는 곧 심관(深觀)의 미묘한 취향이다.
【문】이 관은 역관이 되는가, 순관이 되는가?
【답】이것은 역관과 순관을 통틀은 것이다. 세제를 관함을 수순하는 것이 곧 순(順)이며, 제일의제에 즉입(卽入)하기 때문에 역(逆)이다. 이 관(觀)은 모든 미혹을 통틀어 다스린 것이지 다스리는 바를 개별적으로 밝힌 것이 아니니, 하나의 연기로서 생함이 없는 유식(唯識)을 이 관의 체(體)로 삼는다.
【문】위와 같은 모든 뜻은 다 순관인데 역관은 무엇인가?
【답】진(眞)과 속(俗)의 2제(諦)는 분별지가 아닌데 다만 견정(見情)을 대하기 때문에 2상(相)을 나눈 것이다. 역순(逆順)을 알고자 하는 것은 오직 견정(見情)을 초월하는 것이 곧 역(逆)과 순(順)이 상응하는 것이다. 어떻게 방편을 짓는다고 하는가? 가령 모든 관문(觀門)이 상호간에 형탈(形奪)하는 것이니, 곧 그 이(理)를 본받아서 모든 견(見)을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 뜻은 알 수 있다.
둘째, 대비(大悲)의 수순이란 것은 대비가 인연을 수순하는 것이니, 또한 인연이 대비를 수순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논주는 열을 합쳐서 넷으로 삼았으니, 첫째는 제1로써 어리석음의 전도(顚倒)를 삼은 것이며, 둘째는 1문(門)으로써 나머지 처소에서 해탈을 구함을 삼은 것이며, 셋째는 4문으로써 이도(異道)가 해탈을 구하는 것으로 삼은 것이며, 넷째는 4문으로써 다른 해탈을 구함으로 삼은 것이다. 제1은 허물을 변별해서 여의는 바로 삼은 것이며, 제2는 구하는 바의 이(理)이며, 셋째는 의거하는 바의 도를 삼은 것이며, 넷째는 구하는 바 과(果)로 삼은 것이다. 이 네 가지 문 중에서 하나하나의 대가 되는 짝은 삿됨을 다스리는 바로 삼고 올바름을 능히 다스림으로 삼는 것이다.
첫째의 어리석음의 전도라는 것은 집착하는 바의 처소에 따라서 어리석고 전도되는 것이니, 이는 사(事)를 관하기 때문이며, 아(我)를 집착하기 때문이다. 일체 처소에 생(生)을 받아서 아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곧 생(生)이 있지 않은 것이니, 곧 전도로 법과 아의 상용(相用)을 다스림으로써 과심(過心)이 아를 집착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안다. 나머지 처소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은 범부의 어리석음의 전도가 항상 이야식(梨耶識)과 타나식(陀那識)에서 해탈을 구해야 하고, 아울러 나머지 처소인 아(我)와 아소(我所)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마땅히 이야의 연기법 중에서 구해야 하고, 아울러 망아(妄我)의 경계 중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은 곧 식(識)의 경계로써 아(我)의 경계를 다스리고 유식의 지혜로써 아지(我智)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도(異道)가 해탈을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도된 인(因) 중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마땅히 인연의 이(理) 중에서 도의 의거하는 바를 구해야 하는데, 망인(妄因)의 자성 등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이다. 도(道)라면 자인(自因)의 이(理)로써 다스리고, 자성은 인생(因生)이 된다.
25제(諦)의 이법(理法)은 자성의 인(因)이 되는데,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다스려야 한다. 무엇이 25제가 되는가? 5지근(知根)은 곧 눈 등의 5근이고, 5작근(作根)은 곧 손ㆍ발과 입, 대변ㆍ소변의 근(根)이며, 아울러 심평등(心平等)의 근이니 11근이 되고, 5대(大)는 곧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이며, 5유량(唯量)은 곧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인데 앞의 11을 더하면 21이 된다. 걱정과 기쁨의 어둠 또한 염(染)이라 이름하고, 추흑(麤黑)은 곧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합쳐서 염(染)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이는 심제(心諦)로서 22가 된다. 만제(慢諦) 또한 아(我)라 이름하니, 이 마음이 23이 된다. 각(覺) 또한 지(智)라 이름하니 24가 되고, 자성은 25가 된다.
사람이 죽고자 할 때는 능히 업을 짓지 못한다. 그러므로 먼저 5작근(作根)이 괴변(壞變)해서 5지근(知根)이 되니, 육안(肉眼)이 괴변해서 화대(火大)가 되고, 귀가 변해서 공(空)이 되며, 코가 변해서 지(地)가 되고, 혀가 변해서 수(水)가 되고, 신근(身根)이 변괴해서 풍(風)이 된다. 5대(大)가 변괴해서 5유량(唯量)이 되니, 지(地)가 변해서 향(香)이 되고, 수(水)가 변해서 미(味)가 되며, 화(火)가 변해서 색(色)이 되고, 공(空)이 변해서 성(聲)이 되며, 풍(風)이 변해서 촉(觸)이 된다. 유량(唯量)이 변해서 걱정과 기쁨의 어둠이 되니, 걱정과 기쁨이 변해서 만(慢)이 되고, 만이 변해서 지(智)가 되며, 지가 변해서 자성(自性)을 이룬다.
이제 괴(壞)라는 것은 멸괴가 아니니, 다만 현용(現用)을 없애서 도리어 근본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괴(壞)라 이름한 것이다. 성취는 앞과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서로 사리(捨離)하지 않는 것은 범작(梵作)을 다스림으로써 범천과 중생이 서로 여의는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3도(道)는 고행(苦行)의 인(因)을 다스리니 고행이 즐거움의 인(因)이 아니기 때문이며, 3제(際)는 무인(無因)을 다스리니 전(前)ㆍ중(中)ㆍ후(後)라는 제(際)의 인(因)이 생기기 때문이다.
4지(智)의 마음을 써서 삿된 지혜[邪智]를 다스리니,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연기를 올바른 도의 체(體)로 삼는 것이며, 닦아서 성취한 지혜를 조도(助道)의 체(體)로 삼는 것이며, 자인(自因) 등을 올바른 도의 체(體)로 삼는 것이다. 둘째는 무분별지로써 올바른 도를 삼으며, 모든 도품(道品)을 조도(助道)로 삼는 것이니, 법을 들어 능관(能觀)의 지혜를 취하는 것으로 도의 체(體)를 삼는다.
다른 해탈을 구한다는 것에서 일반적으로 해탈을 해석하는 데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연기를 나타낸 것이며, 둘째는 지(智)를 낳는 것이며, 셋째는 미혹을 멸하는 것이다. 이제 아(我)와 아소(我所) 중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은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망령되이 계교하는 것이니, 세 가지 뜻이 모두 이루어지지 못한다.
논(論)은 네 가지 뜻으로써 이를 나타냈다. 첫째, 3고(苦)로써 저 즐거움의 전도를 다스리는 것이 연기의 이(理)가 진실하고 즐거운 덕을 나타내는 것이니, 행고(行苦) 등의 변천이동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인연으로 저 아(我)의 전도를 다스리는 것이 곧 아(我)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니, 유위가 자재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생박(生縛)의 관(觀)으로 저 정(淨)의 전도를 다스리는 것이 정(淨)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니, 박(縛)이 자재롭지 않은 정(淨)이기 때문이다. 넷째, 유(有)를 수순함으로써 저 상(常)의 전도를 다스리는 것이 곧 상덕(常德)을 나타낸 것이니, 3유(有)를 수순함이 상(常)이 아니라서 아직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 상(常)ㆍ낙(樂) 등으로써 차례로 배당한 것이니, 나머지 뜻은 논과 같다.
셋째, 일체상지관(一切相智觀)이란 것에서 일체는 곧 관하는 바의 경계이고, 지(智)라는 것은 능히 관하는 마음이다. 첫째, 유분관(有分觀) 안의 반문(半門)을 취하여 염정(染淨)의 분별관으로 삼는데, 염(染)이란 아만(我慢)의 번뇌로 물드는 것이고, 정(淨)이란 아만이 없는 청정함이며, 분별이란 차별하여 아는 것이다. 이에 의지관(依支觀)은 10번 안의 1문(門) 반의 관(觀)을 취하여 의지관을 삼는다. 앞 차례의 반문(半門)은 진속(眞俗)의 두 법과 미혹된 마음으로 의지를 삼고, 나중의 일심관(一心觀)은 속제와 더불어 의지를 삼는다. 둘째는 의거함의 뜻이 가지런하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依止)와 일심의 의지에 통하고, 생(生)의 의지와 경계의 의지에 통하는 것이다. 앞의 반문의 내용은 오직 경계의 의지뿐이다. 셋째는 1문(門)으로 방편관을 삼는 것이니, 방편이란 것은 인(因)과 연(緣)의 두 힘이 방편으로 과(果)를 발하는 것이다. 넷째는 1문으로써 연상관(緣相觀)을 삼는 것이니, 연상이란 것은 인연이 과(果)를 낳는 상상(狀相)의 뜻이며, 또한 증상연의 상상(狀相)의 뜻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이 1문(門)과 위의 방편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전자는 인연의 힘을 취한 것이며, 후자는 사(事)를 성취한 상상(狀相)을 취한 것이다. 또 전자는 지위이고, 후자는 유지(有支)의 작위 없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니, 오직 연상(緣相)의 뜻이 있을 뿐이다.
다섯째는 1문으로써 입제관(入諦觀)을 삼은 것이니, 입(入)이란 것은 관하는 마음이며, 제(諦)라는 것은 아는 바 고(苦)와 집(集)의 제(諦)이다. 여섯째는 1문으로써 역(力)과 무력(無力)으로 믿어 들어가는 관(觀)을 삼는 것이다. 가령 무명과 행이 식(識) 등의 과(果)를 낳는 것을 이름하여 유력(有力)이라 하고, 식(識) 등이 나중의 과(果)에 감응치 않는 것을 무력이라 이름하니, 이 인과의 분제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신입관(信入觀)이라 이름한다. 일곱째는 1문으로써 증상만 등을 삼는 것이니, 성문인이 행고(行苦)를 아직 끊지 못한 것을 이른바 구경(究竟)이라 하기 때문에 증상이라 이름하고, 이미 거친 미혹을 끊은 것을 증상이 아님이라 이름하니, 이 깊은 고(苦)를 들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2문으로써 무시관(無始觀)을 삼는 것이다. 무시라 말한 것은 저 무시(無始)가 없는 것이니, 인생(因生)을 성취하기 때문에 연(緣)의 지음이 아니고, 연생(緣生)을 성취하기 때문에 인(因)의 지음이 아니다. 이 두 처소에서 무작(無作)을 구하는 것은 시(始)가 다시 2작(作)을 구하는 것이며, 스스로 성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성이 없는 시(始)이니 무시관이라 이름한다.
【문】2관(觀)으로써 무시를 삼는 까닭은 무엇인가?
【답】인연의 형상은 시(始)를 설할 수 없으니, 생박(生縛)의 관(觀)으로써 법에 종결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법에 종결이 없다면 단지 무시관이라고 설할 수 없는 것이다.
【문】박(縛)은 무엇의 종결을 말하는가?
【답】만약 박이 과(果)라면 종결이 있는 것을 박이 된다고 설할 수 없으며, 과의 1상(相)을 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결을 설한 것이다.
아홉째는 종종관(種種觀)이니, 다만 세속이 인연을 수순하는 것이 동일치 않기 때문에 종종(種種)이라 말한다.
이상의 아홉 관문은 종지(種智)의 경계이니, 무지(無智)의 장애를 다스려서 능히 법체(法體)를 관하는 것이 곧 능치(能治)가 된다. 이(理)와 관(觀)의 지혜 경계가 아니라서 또한 역순(逆順)이 있으니, 역(逆)이란 번뇌의 소멸이고 순(順)이란 법체를 얻는 것이다.
셋째, 저 과(果)의 뛰어남이란 경문을 다섯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 대치멸장승(對治滅障勝)이란 앞에서 나온 승만대치가(勝慢對治家)의 과(果)이니, 앞에서 닦은 10법으로 대치를 삼는 것이다. 이 지(地)의 원만함 가운데 다시 매우 깊은 3탈(脫)로써 다스림을 삼으니, 대치승(對治勝)이라 이름한다. 앞에서는 5지(地)의 염정만(染淨慢)의 장애를 다스린 것이며, 지금 여기서는 다시 미세한 아심(我心)과 유무(有無) 등을 다스린 것이니, 멸장승(滅障勝)이라 이름한다. 이 중의 경문에도 또한 향하고 등짐이 있는데, 소식(消息)은 어김이 없다. 두 번째, 수행승(修行勝)이란 앞에서 나온 부주도행가(不住道行家)의 과(果)이다. 앞의 부주(不住)에 의거해서 다시 뛰어난 수행을 일으킨 것이니, 수행승이라 이름한다. 세 번째, 삼매승(三昧勝)이란 것은 앞의 치승(治勝)을 조망해서 과(果)를 설한 것이다. 앞에서 닦은 3탈(脫)을 대치로 삼는 것이니, 저 치(治)가 더욱 증대함을 이름하여 삼매승이라 한다. 이 중의 경문을 논(論)과 비교하면 이해할 수 있다. 네 번째, 불괴심(不壞心)이란 것은 앞의 멸장(滅障)을 조망해서 과(果)를 설한 것이다. 장애를 멸하기 때문에 삼매의 마음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 자재력(自在力)이란 것은 앞의 수행을 조망해서 과(果)를 설한 것이다. 앞의 수행에 의거해서 위로 무애(無礙)로 나아가는 것을 자재력이라 이름한다.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두 번째의 수행승 중에서 처음은 수행하는 마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 ‘보살이 이렇게 생각한다’ 이하는 수행승을 밝힌 것인데,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수행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곧 무장애를 얻는다’ 이하는 수행승을 밝힌 것이다.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다. 삼매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공을 변별한 문이며, 둘째 ‘무상(無相)’ 이하는 나머지 2공(空)과 동등하다. 나머지 뜻은 논과 같다.
나중의 2과(果) 중에서 각기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중의 구(句)는 개별적인 것이다. 지과(地果)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3과는 앞과 같고, 조유과(調柔果)는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조유의 행상(行相)이며, 둘째 ‘월광유(月光喩)’ 이하는 교지(敎智)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개별적인 지(地)의 행이며, 넷째는 설상(說相)을 매듭 지은 것이다. 전자 중에서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며, 나중은 합(合)이다. 법을 설함에 나아가면 모든 부처님을 많이 보는 것이 행을 일으키는 연(緣)이 되고, 다음은 능련(能練)의 행이며, 나중은 소련(所練)의 청정함이다. 나머지 경문은 논과 같다.
셋째, 게송을 거듭함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게송의 뜻을 밝힌 것이고, 다음은 올바른 게송이다. 게송에는 39게송이 있는데, 처음 셋의 한 구는 10평등을 읊은 것이고, 다음 10과 9의 세 구는 부주도(不住道)의 행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부주과(不住果)를 읊은 것이며, 다음에 있는 아홉 게송은 조유의 3과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분제를 나타내서 설함을 찬탄한 것이다.
부주(不住)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 10과 7의 한 구는 열 가지 관(觀)을 읊은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 반은 매듭 짓는 경문을 읊은 것이다. 부주과의 경문 중에서 처음의 세 게송은 3탈(脫)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 반은 수행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삼매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불괴심(不壞心)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자재한 힘을 읊은 것이다. - 047_0032_a_01L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卷第三之上終南山至相寺沙門 智儼 述第六他化天會十地品二十二此會初四門分別同前。一辨名者,他化自在天會從處得名也。十地品者,數義以彰名也。二來意者有二。初會來意,前是阿含,次入證故來也。二品來意者,前方便迴行,向於菩提。今行相增明轉入十地,義次第故也。第三宗者有二。一會,二品會者有四。一明所治,謂正使、煩惱、業報及性三障上,心種子。二能治,謂正無分別智及普賢性起智。三所成德,謂有二。所謂人法,人有二種,謂正化及助化。各有體、相、用,竝通性起等。法者,謂理教行果,竝通性起。及修生等也。准以思攝可知。四明所成位,謂十地位及普賢性。起無漏法門等也。若論品宗四義,准上唯取修生,爲異耳。又此品以不說,爲說義,卽證普賢德位,以說爲說三乘宗。第四釋文者。問:‘此會共上二、三、四、五會,何異者?’荅:‘且有四異。一漏、無漏別,二本、末別,三共、不共別,十地人、天、聲聞等,共採故。’地論云:‘亦能生成人天道,行餘則不然。可准之。四位別如是一切。’問:‘何故此會獨不顯別處及彼體、用二融放光往來,集衆嚴具者何也?’荅:‘欲顯此會是證了法無,二體、用遠近,竝無別異故,不須表顯別處等也。’又此會等是證法不可以事,別標玄趣,但得摠相顯耳。准上思之。此會有十一品,大分有二。初有九品,辨緣成德用。次有二品,明性起、體用,以爲諸會所學法也。初九品內,大分有二。初有六品,辨因行滿足。次不思議品下,有三品經,辨因成所得果。問:‘何故果不別處說?’荅:‘此經上下,顯法盡理,推高佛地,不可說爲正也。此中說者,爲彰同證,略爲擧果,顯因故說也。’就初六品內有二。初一辨行位體,次五品辨德用。就體門有三,或復爲六,或分爲九,或判爲十,或復離爲四十八。又此中所辨,通解論中難文。所以然者,爲此釋,共論合成一疏故也。三者所謂序正流通。就此三中,所辨之法要唯證教,證教旣殊三分亦異。就教三者,初至起分,是其由序,以此起發正說故也。本分已去,是其正宗於中。雖復有廣有略,同說地法,判爲正宗。地利益下,勸信傳持,津及末代,判爲流通,亦可分四。後分重頌偈,就證三者。初一序分判,爲由序,入三昧,是證正宗。因入三昧,正顯實證故。地論言此三昧,是法體也。流通之義釋有二種。一以已德,流被信地,說爲流通。若從是義,加分已去,皆是流通。以說自得,令信菩薩,證入地故。二流末代,名曰流通。若從是義,地利益分,名曰流通。言爲六者,隨所行以分。初至起分,起化之由爲生物信。第二本分略說地法,歎其殊勝,起衆樂欲。第三請分彰地出言,令生正解。第四說分廣明修相,令物起行。第五影像分寄喩顯德。第六地利益明德旣成契證地法故。地論言以得法力,大地動等。言爲九者,始從序分,乃至請分,則以爲六。說分已去,判爲第七,地影像分說爲第八。地利益分,是其第九。亦可分十,增其重頌,就此十中。所辨有三。一就化相,通爲起說。二就化意通,爲顯證。三隨宗要,證教雙辨。言起說者,如來將說,先託時處,現相集衆,發起所說,以之爲序。由序旣興,將爲衆說。時金剛藏嘿入三昧,顯己自證能爲衆說。又爲受加故。次第二明三昧分,由入三昧,十方諸佛讚歎與力故。次第三明其加分,旣得聖力,欲爲衆說。但定無言宜從寂起故。次第四明其起分,從定起已,略宣地相,起後廣說故。次第五明其本分。然彼本中,略說地名不廣分別。大衆渴仰聞名欲義,相與稽請故。次第六明其請分。衆旣請已,正爲廣陳故。次第七明其說分乃至十地通,亦是說法難解。宜以喩顯故。次第八明地影像分,爲說旣竟。宜顯勝益,勸信傳通故。次第九明地利益分,顯其法已,宜以偈述故。次第十偈讚結前。言顯證者,爲化之意,宗爲顯證,於中初分顯證由序,後九正顯,九中前三就相顯證。次有四分。就說顯證。次有一分,就所攝化,顯證利益。次有一分,重述證德。前三之中,初三昧分寄入顯證。第二加分因加,以顯得證之相故。地論言:‘以何故加?由得大乘光明法故。第三起分寄出顯寂,說必宜起,卽顯所入寂滅,離言故。’地論云定無言說,是故宜起。次四之中,初本分者,略說顯證。第二請分拂相顯寂,說及影像寄相表德,說分之中,寄修表德,地影像分借喩顯德。地利益分就所攝化,顯地利益故,下文言以得法力,動地雨花。偈頌同前。此等差別同爲顯證。言隨宗要,證教雙辨者,此品之要無出證教。九中初一,是其由序。後八正顯證教之相。八中初一入三昧分,顯示正證。後七次第明起言教,言次第義如初門。所言十者,隨地不同,分爲十也。已上三會竝同此,准可用思攝也。言四十八者,初地八分,二地兩分,乃至十地,八分差別。一品合有四十八分也。此經文與地論經本,多有增減,就不同文中,以四法簡之。後至文當知。一諸文內漏少者當增。左相安豎畫,腳中點少句數記之。諸文背而意順者,句中第一字間點之。諸十句中,與論前後者,當句左相齊等,點數記之。諸句多增者,左相上下,左相拘之。此竝約論,取定耳。若論不辨者,諸亦不論。又論中增者,依此知之。又此四十八段文者,但一地卽成四十八,餘地類然。如是准之。所以知者,其論主自分諸地,前後隱沒,廢興不同。以義推之理合俱有也。就初序分四。一明說時,二辨化主,三明說法所棲託處,四辨同聞,就住處有二。一明通處,二摩尼寶殿下,明其別處。四明同聞中有六。一簡定其人,二此諸菩薩下,歎其人德。三其名曰下列德者之名。四無量下,辨名者之數。五明來處,六標列上首。經脫第五句,前中有四。一簡大異小,二於阿耨下,簡終異始,三簡住異退,四從他方下,簡新異舊。前中先定所列之人。次明諸經辨人之意。人者汎釋有二。一聖化所被當機之衆如論所說,信地人等。二聖化所對影響之人,如此所列諸菩薩等。辨人意者,諸經列人,凡有四意。一彰化所益,如涅槃經辨列無常諸學人輩。二爲對人,顯說決定故。經說言雖於空地,多有所說,不得名爲眞師子吼。今於如是大智人中,有所宣說,方得名爲眞師子吼。三爲寄人彰別其法,如說十信,廣對諸首等。四擧同聞,證成可信。今此列衆義兼後三也。簡住異退者,汎論退有三。一者得退,謂先所得,後還退失。二未得退,謂於勝進,退住不入。三習行退,先習多行,同成在已,後一現時,餘,則不現。所不現處,名之爲退。今以此三,准約地位,非無斯義,解行已前分未堅,固隨其所得,容可退失。具有三退。初地已上,盡於六地,次第修道,不能頓起故,有習行及未得退。七地已上位分未窮,有未得退,退相如是。隨所離處,卽是不退。然彼三退廣分爲五。就初得退隨義分三。一是滅退,謂凡夫所有善根,爲彼邪見所斷滅故。二是失退善趣之人,信未成者,容可退失起二乘心。如舍利弗等。雖不退滅作一闡提,而菩提心不復能顯。三是廢退種性已上,或時蹔起煩惱業迹,廢其所習,不令現前,名爲廢退,以此三種,通餘二退。合說爲五。此之五種外凡具有,善趣信位,唯無滅退,得有餘四。以不斷善,作闡提故,種性已上無滅無失,得有餘三。初地已上,無前三種,得有餘二。七地已上,唯有未得,餘四悉無。第十地中,剋就因位,五退悉無。若望佛果,由有未得,退相如是。不退可知也。又若依此經,信行及解位已去,但有未得退,餘者竝無也。此約一相也。若約普賢自體,竝無諸退,准上思攝。地法深密,非麤智知。所以然者,爲地教法,託彼諸乘及世閒善事,以顯阿含法義分齊。雖託顯一乘理,仍三乘小乘當宗自住,不失自宗。如鹽成羹,鹽自住性,而羹義得成。下之文義應准此知之。菩提有三種。一入性地,名得菩提。二初地,三佛地故,涅盤中,說須陁洹八萬劫到,乃至辟支佛十千劫到,謂到性地。問:阿耨菩提在果,何故通因?荅:此亦不定故。大品經說五菩提,所謂發心、伏心與明出到無上菩提也。一乘有十菩提。如下離世閒說。生者有五種。一法性生,六入殊勝無始法爾。二實報生,謂從先來,修善所得。三者生滅變易法身,所謂緣照無漏所得。四分段身,謂彼凡時,三界業所得。五應化身隨物現受。此等竝約三乘,解非一乘也。何故此會首?多約三乘明者,爲地品通三乘,信向故,就歎德文,有二。一別,二摠。菩薩功德不可頓彰故。先別歎,非別能盡故,須摠結,別中復二。一者略歎,二善能化下,隨德廣歎。菩薩廣德非可頓彰故,先略歎,非略能具故,須廣歎,略中有二。一歎自分,二諸佛如來下歎其勝進。二廣歎文有二十句,前十二句廣上自分,二有八句,廣前勝進。廣自分中,攝以爲二。初六明其行修具足。次有六句,明德用圓備,行修具中,初三利他,後三自利。前文初句是摠,後二是別。依經二中,脫一句。二自利文中有三。初願,次修,後明成行。第二圓備文中,有六句。前三利他,後三自利。利他之中,初明身業,次明意業,後彰口業。第二自利中三。一行修殊勝,二諸德圓備,三諸所下,妙用自在。第二廣前勝進,文句別有八。前四明其殊勝三業,攝修所行,後四明其廣大三業備具諸德,前中初三明勝三業,後一明其攝修所行。後四亦爾。初三明其廣大三業,後一彰其備具諸德。初殊勝三業之中,初明身業,次口,後意。就後四句文,初有三句。明廣三業,其身普現,是廣身業。其音遍聞,是廣口業。其心通達,是廣意業。第四一句備具諸德。此處感果者,感是根,果是欲也。又下地人果決能成耳。餘如論辨。又明不共者,一外道不共,二二乘不共也。又二法喩金剛中,法前是能破,後是堅也。喩卽前樹,取心堅。孕子取子能破也。三昧分中,承力入定有三。一爲推化在於如來故,現承力。二雖自得,對佛勝人,不得自在,必須仰承。三於此定,雖分得證,窮滿在佛。今此欲爲佛之勝化故,須承力,科文可知。就加分中有三。一入三昧故,諸佛同加。二欲宣一切下,明加所爲。三金剛藏汝當說下,示現加相,初文有三。一諸佛爲欲加讚,同皆現身。二同聲讚下諸佛同讚,應前入定顯證能說。三如是十方下佛彰已加,應前入定,爲受佛力。又釋得加所以。又顯爾多佛故者,多佛同證此法也。餘文如論應知。二所爲文。一對地法,明加所爲。二所謂令入智慧,下對所化人,明加所爲。又見智得證者,前二觀解,後二行解,見始智終,得始證終也。又信樂得證者,亦同前,但爲未得向得故,安信樂名也。對人明所爲,中有二十句,前之十入,是自利行。後十始終,是利他行。‘何故自利名之爲入,利他之行說爲始終?’荅:‘但入始終義一無別,語入其必從始至終,論其始終,必有所入,爲分兩行,各隨一義,就入及始終二十句內,各初一摠餘句別。’第七中,復有善根,能爲出世閒因者,地中加行善根等也。又始終內經,脫第二句。又論言阿含者,有九種。一行教相對,音聲言教,名爲阿含。一切功德說以爲證,猶下說中字義,兩藏是也。二位地相對,解行已前,依教修行名爲阿含。初地已上,說之爲證,猶下解脫第二請中歎衆是也。地前所起,聞、思、修等,名阿含淨。初地已上,一切行德通名證淨。三修成相對,一切地中,聞、思、修慧報生識智,此等四心緣照之解,名曰阿含。眞智出言說,以爲證故,下論言聞思修等,是則可說。以可說故,名爲阿含。地智離文,名之爲證。四眞僞相對,一切地眞僞合修,名曰阿含。捨僞契實,名之爲證。猶下所明義說二大,說大阿含方便修也。義大是證行成就也。五相實相對,世閒修中,得彼證相,名阿含,契本實相,名之爲證。猶下所說增上妙法光明法門。增上是證,光明是教也。六體德相對,就彼離相所成行中,無始法性本隱今顯,名之爲證,依本所成,方便行德。依教修生,名爲阿含。猶下文中,鍊金所況,金體喩證,環釧嚴具,喩於阿含。七體用相對,前體及德相,從爲證,依此所起,隨順世閒,教智之用,名爲阿含。猶下文中,珠光明等,所況法是。珠輪等淨喩於證體,光焰等喩於阿含。八自分勝進相對,自分所成體德及用,皆名爲證,能受佛教,稱曰阿含。猶下文中,歎金剛藏二力是也。妙智及辯名,爲證力,於佛教法,念堅淨慧,名阿含力。九約詮就實相對,眞智之體說,以爲證,卽此證體約言分十。名爲阿含。猶下文中,虛空迹處所況法是。虛空平等,喩地證智故,下論言。字身住處,證智所攝,空中之迹,喩地阿含。故下論言非無地智,名句字身,名句,卽是阿含法也。此之阿含及證通上及下,可准思攝,餘相知之。第三加相文內,謂口、意、身。口則勸說,以增、力,意則冥被以加威,身則摩頂而令覺。何故先口次意後身?乘前諸佛顯加所爲,因則勸說,故先明口身摩則起。理宜在後,意無此義,據中而說。口加中有二。初摠、次別。又身淨中,經脫佛盡一句,第二意加文有二十句。初之十句正明意加,後十解釋偏加所以。何故就意解釋偏加,餘不如是?意是加本故,就釋之。又前口加有其自他二力辯才,意加亦爾。前十正加明其他力,後十釋加顯其自力,故此釋之。就前文內,初無畏身,亦摠亦別。通攝十句,爲無畏身,所以通是摠別。於中別分。初之一句顯色身勝,是故名別。餘之九句一向是別。又此中論法成者,依相續解脫經中,有四種成。一以有成,因緣名相言說諸法得成。二所作成,一切所作,各有成辯。三者法成,一切諸法性相成立。四者助成以智言說,助成諸法。今言緣者,是彼以有成也。有因緣,諸法得成故,名爲緣。法者,卽是彼中法,成作者,是彼所作成也。成者,卽是彼中助成也。又三種同相智者,釋不一種,依金剛仙論,知一切法,皆無常、苦及與無我也。依別翻論,知一切法自相、同相、不二相,謂世諦、眞諦一實諦也。又知空、無相願也。又六正見,是能知智,依金剛仙論,一眞實智正見,能知理、法二行正見,能知行法。此二教旨。三教正見,能知教法。四離二邊正見,知前理法,不同情取。五不思議正見,知前行法,成德出情。六根欲性正見,知前教法,說隨物心也。第二釋所爲中,初何以故責?次荅文有二。初一摠,後九別。又佛法欲壞時,假餘尊法,誦持者,隨壞時,何尊教也?第三身加文,有四句。一不離本,二以神力,三申右手,四摩頂。經闕初二句,就釋本分。文內有二。初告、次述。第二文有三。初明願善,以爲地體。二列十名,顯其地相。三擧佛同讚,顯地要勝。此三之中,皆各有二。初地體內,初一句摠,二無有過下別。餘如論辨。第二相中,文別有二。初問,次荅荅文有三。初立有二,次列有二,三結。第三段文別二者,初我不見者,擧佛同歎,顯地要勝。二何以故,下彰地要勝釋,顯諸佛同歎所由?此文有二。初問、次荅。荅文有四句。初句擧此證行,釋佛同歎。第二句非但,是彼出世所證,亦是世閒方便所行。三所謂一句顯前第二光明法門。四諸佛子下顯前第一增上妙法,此約論中,經本科也。餘文可知。又論云決定者,依地持,有三種。一種性決定爲定佛種。二解行決定定發心三。證決定定得法故。此卽第三也。又善決定者,初辨善,決定隨來。次決定者,辨決定義,善字隨來,就善釋決定義也。三勝善決定中,依論合有四義釋。初一摠,後三別,三中,謂證助不住也。又解初理,次智,第三位及教法。四約相卽無漏亦卽助道,准思攝也。依大品經論,有三乘、十地名。一乾慧地,二性地,三八人地,四見地,五薄地,六離欲地,七已作地,八辟支佛地,九菩薩地,十佛地。此十地,是一乘所用,是三乘所入也。此中本分依自義阿含說也。就請分文中,大判有二。一金剛藏說已嘿住,菩薩及佛咸皆共請。二觀察下,示說分齊,令衆正知,前中隨人分請爲三。一解脫月請,二大衆請,三佛加請。就此三中,初解脫月請內文別三對。皆初說者,嘿違不說。後明啓請,第一對中,初金剛藏說已嘿住後解脫月知衆心疑爲之問請:‘仁者堪說。大衆能聞,何故不說?’第二對中,初金剛藏乘前請問,顯已嘿意,以爲酬荅。以法難說,證信難得故,我不說。解脫乘此歎衆重請,我謂仁者更有何意?乃云證信難得不說。今此菩薩善淨衆集有證有信。仁者宜說。此第二對上來兩對,歎人以請。第三對中,初金剛藏乘前請言,擧損以違。雖此衆淨,餘樂小者聞生疑惑,長受衰惱。有斯兩損故,我不說。解脫月乘此,歎法重請。仁者但說,莫慮衆疑。諸佛護念令人易解。有說多益。勿懼衰惱。然解脫月請義有餘。彼金剛藏違請,理盡於斯絕言,但爲重法,嘿待餘請。初對經中,初金剛藏說已嘿住。是時,一切已下明衆心欲解脫爲請。前中兩句初金剛藏說地名已,牒前起後,二嘿不說。正待後請。下衆對此,生欲生疑,就下請中。初明大衆聞名,欲義睹嘿生疑。時大菩薩下明解脫月知疑爲請,復就前中。初對說名聞已欲義,各作是念:下對不分別,睹嘿生疑。何因者,對彼說人,以生疑念。言何緣者,對其聽衆,以生疑念。第二解脫知疑,請中句別有三。一標請主解脫菩薩,二知衆疑,爲之啓請。三擧請辭,請辭偈中,文分有五。兩門分別,徵請分別。徵者徵嘿拂遣衆疑,請者請說遂衆心欲。偈中初二徵問嘿意。第三一偈請其宣說。後之兩偈略無徵請,理應齊有。二就所歎,說聽分別。初偈歎彼說者堪說。爲遣大衆何因之疑。後之四偈歎衆堪聞,爲遣大衆何緣之疑。就聽者四偈中,初之兩偈歎同法衆。次有一偈,歎異法衆,後之一偈摠歎二衆。然此亦名同生、異生。又論云:有非現前,決定無現前等者,證、教二決定非現欲決定也。又第一行慧字,當論中覺也。第四行中,瑕字卽論不欲也。穢字卽論中,威儀濁也。實者卽除論中,異想也。餘准可知耳。就第二請,內有二。初金剛藏乘前啓請,顯已嘿意。後解脫月乘言重請,前文有二。初長行生後說意。第二偈釋,偈有六偈。初之二偈明法難說。次有二偈,彰法難聞。次有一偈,喩難說聞。後之一偈擧難結嘿。又喩中文意者,空喩證地體風畫喩字句言說。風畫住處,喩所說差別十地。問:‘此與下喩何別?’荅:‘下取鳥迹處爲喩,況之以證。此中宣說動筆之畫飄忽之風,以爲喩故,況之以說。有此左右耳。’又此畫及鳥足幷下悉曇章喩,及下普賢品摠爲一類。是言顯證十地下鳥迹處等,以不言顯證十地,爲己許說十地名故,此亦可准解之。何以故,十地摠名,亦可是三乘?熟教名故,前二偈中,法有四重。一摠擧法難,二第一等顯其難相,三菩薩行出難法體,四微難見下彰難所以。此依論經,可准取思攝也。第二解脫乘請文中有二。初長行,次偈頌。長行有三。一解脫月聞違重請。二是大菩薩衆直心淸淨下廣歎衆淨。三是故下結請令說。二廣歎衆淨文中,初摠次別。阿含淨內別經文中,第二句在論第四句。經中第五句在論第二句。亦可依文定,仍須思准。二重頌文,內有二初長行生起,第二偈頌。偈中初一頌上結請,次有一偈,頌上請文。第三請內,初金剛藏擧損以違,後解脫月歎益重請。初文分二。初長行,次偈頌。初文有二。初領前所歎,擧得兼失。二其餘樂小下簡所不歎,擧損以違。此文有三。一敗善之損,二是人下長受衰惱失樂之損。三我愍下結嘿所以,二重頌文,初明說意,二正頌。此文有二。初一行半結牒前文,次一偈半結上彰失。第二解脫請中,初長行,次偈頌。長行有三。一自宣己心,彰欲重請。二願承佛力下正請令說。三是故下結請令說。就初段中可知。二正請文有二。初立宗請說不思議法。二佛所護念下辨諸佛法應護念。此文有四。初護念,有三可知。二何以故?下辨要勝。三譬如下喩況。四如是佛子下法合,第二重頌文有五。初一半明頌請說文。二一偈頌前第一護。次一頌第二要勝。次半頌喩,次半頌第四合喩,第二大衆請文。上來解脫爲衆先請請,雖言堪,未知虛實。大衆宜須自彰己能,成前請辭。又爲起說顯法尊重故。下共請,請文有二。初同聲生起。二正偈諸偈文有五行半,初四行半歎人以請,後一歎法。就初段中,初二歎其說者,後二半歎衆堪聞。初有五句,歎金剛藏自成證力及阿含力。下之三句歎金剛藏,能令聽者,入證及阿含。初文有二。一有四句,歎成證力。次有一句,歎成阿含。就歎聽者中,初一偈半,大衆自歎具智斷德,及先有根。次有一偈,歎堪思持。第三佛加請內。上來雖復菩薩衆請,率感由微顯法未極。故次佛請。又菩薩請顯法未勝故,須佛加請。此文有二。初明身加。後明口加,身加經中有五。一釋迦放光,普照十方。二十方佛放光照此。三此大衆尋光見彼。四彼大衆尋光見此。五光臺說偈,光臺說偈,應屬口加。何故在此,然所出聲口,加所攝?今此正取能發聲業,判屬身矣,若依經本,無此見彼及彼見此,此二俱無。又經脫第五降伏業也。又此光爲顯佛力分齊及加說者,不爲集衆等。餘文如論。就第二口加文有二。初長行生起,第二偈頌。偈中有七偈半,於中有二。一教請分別,前六偈,是其請說。後之一偈半,是其教說,請彰法勝,令人重敬,教顯說眞使衆深信。二加請分別,就此偈,前六偈內有三。初一偈半正加,二有一偈,加所爲。三有三偈半,彰得益,此文三。初一聞益,次半修時益,次二轉生益。又此轉生文中,偈迮難解,文意趣者,其經法勝力,加其聞者,乃至若火劫盡時,由得聞經。論言等者,等餘二災,竝得聞也。問:‘彼云何聞?’荅:‘彼天先從佛聞,今爲說也。此在極爲言,非局此時也。龍中先有經故,引之耳。’又三漸次者,卽加行正體後,得三智也。此可準思攝之。亦可教證不住耳。第二爾時,金剛藏菩薩下示說分齊,令衆正知,就此經中,初集經者,明金剛藏將說之相,幷顯說意。後正明所說偈辭,就前文中,初示說相,觀察表說。內心照察名之爲觀。亦可目眄說之爲觀。顯已無偏故,觀十方。下明說意可知。金剛藏有二意故說偈。一自顯有智堪說,拂遣大衆何因之疑。二彰已不畏大衆不堪聽聞,拂去大衆何緣之疑。問:‘衆有何益?’荅:‘有二義故益。一義大益,彰實出言,唯深是樂所以獲益。二說教大得聞在今,是以歡悅深生正信。’就偈文內,有十三偈半。初七偈半明其義大,後有六偈,明其說大。就義大文中,分爲二。初三偈半,顯其佛法,次四行偈擧彼佛法,顯地出言。今爲明地,何須顯彼佛法微妙,以地在因,辨深義隱?佛法在果,彰深義顯故,明佛法顯地深微。因之與果高下天殊,云何相顯?然此雖復隨人高下,法體不別,其猶虛空約尺分異,異卽是空。地法像此。就初文內,初一偈半直彰法微,後之兩偈出微體相,謂二涅槃,初文有二初摠辨微,二唯智者下釋相也。初文有四。一者是微,二難知之道,三非思量論,名非分別。四名無垢濁,經無此句,下三句有。又無垢濁下有四義亦可,難得屬上無垢向下。又二向竝屬,可思准之。初觀解淸淨,二智者下行證契眞。三自性等下體性淸淨。四不滅等下德用自在,此依論辨,經亦同然也。又有世間智慧,隨聞明了知,下擧世智隨文,顯眞智不隨聞也。又論結云觀解甚微,結不濁。二依止結智者等,理與智爲依耳。三淸淨甚微結自性滅等,功德等結不滅不生等。又第一出世故,不同世間定也。第二實成故,不同外道;第三本淨故,不同始淨尊者;第四卽靜恒用故,不同聲聞等也。餘義可知。就下兩偈出微體相,文分有二。初有兩句,是其同相;後一偈半是不同相。不同相有二。一何處脫?謂離諸趣。二有五句是云何脫?五句卽分爲五。一觀解入如,所謂等同涅槃相也。二對治離障。三明體德圓備。四是其法身常故出矣。五有一句,是其解脫自體無㝵。又論云非唯初中後,前中後取故者,此約智義,非約智事,義言智起惑次滅耶,又智生惑滅同時耶?此名中耳。又惑滅次智成耶,此悉不可。竝有恒生,恒不生,恒滅恒不滅等過故。初中後如緣起性取也。又如是觀智等者,次第結前不同相方便壞涅槃。五義可知。二擧前佛法,顯地離言內,於中有四偈。初一偈半擧前二種涅槃,以類地法。次一偈半正明地體難說難聞。次有一偈,喩難說難聞。前中三句牒前佛法寂滅出言。下有三句,顯地難說。又復難聞。又論云地者、境界觀者,或名分齊,或是所緣耳。第二說大中有六行偈,義分有五。初之一偈三句彰說分齊。次之三句彰已無過,勸衆除失。次一偈半顯其說相略而非廣。次有一偈,勸衆敬聽,彰已善說,生衆敬愛,次有一偈,顯已得力,結說分齊。又論云但說一分者,謂因分也。地有二分。一因、二果,因謂世間方便行修,卽加行智分齊也。果謂出世離相眞證,卽正證分齊,眞證出言,因相可論。今唯說因故,說一分。又亦可約位也。因漸成者,謂聞思等非頓漸成故云也。又約資成之義,此有二義。一資成其因,二資成其證。教說修中有二者。一眞心究竟,成德滿足故云也。二者觀修者,眞心離妄內照法界故名也。此二與後得正說,相應故名教說也。不相應義屬義大耳餘文可知。就說分文內,六門分別。一釋名,二明所除障,三辨所顯理,四明所成行,五所得果,六釋文諸地同此。一釋名者,初名歡喜,成就無上自利利他行。初證聖處多生歡喜故,名歡喜地。二所除障者,依地論,名凡夫我相障,依攝論,名凡夫性無明,又分二障。一法我分別,二惡道業。又治二種業及一種報,謂方便生死也。云何治?如虛空等。廣如論釋。三明所顯者,謂顯法界遍滿義。四明所成者,成檀度及十願等。五明所得果者,若局取果,唯通達障空義,得一切障滅果及地位等。若通判果,則得唯識三無性理。及得奢摩他、毘鉢舍那等。六釋文者有二。初長行,後偈頌。長行有二。初結前生後。二若衆生下辨地體相。此文相二。初辨說分。二菩薩如是安住下校量勝分,說分文有一百句。初四十句,名爲住分。次三十句,名釋名分。後三十句,說爲安住,前四十句,如論應知。又初十句中經脫淨心集,就釋名三十句中,初十多喜。此中經脫慶喜文,依論中云心喜者,心體非喜,攝喜從心也。體喜亦如是。根喜者,以體成後爲根,非喜根也。次十念當得,後十念現得。就念現中有二。第一正明所念現得。二何以故?下廣釋遠,離五種怖畏,亦可就第十中分之。就釋怖畏,文內有二。初責,次荅。荅內有三,初明所離果,二何以故?下釋成離相,三如是菩薩下,摠以結之。又論云前說,身畏後,異身畏者,前摠明,後別辨故,云異身也。非身外耳。就安住分文有三。一摠明安住。二所謂信心下有三十句,別明安住。三菩薩成就如是下摠結安住,就廣辨三十句中,初十信,次十修行,次十迴向。餘文如論。第二願校量文有三。一願校量勝,二行校量勝,三果校量勝。言十願者,一供養佛願,二護正法願,三攝法上首願,四知衆生心,五名化衆生,六名知世界,七是淨土,八同心行,九三業不空,十成菩提。依攝論,有十願。一供養願。願供養勝緣福田師法主。二受持願,願受持勝妙正法。三轉法輪願。願於大集輪中,轉未曾有法輪。四修行願。願如說修行一切菩薩正行。五成就願,願成就此器世界衆生三乘善根。六承事願。願往諸佛土,常見諸佛,恒得敬事,聽受正法。七淨土願願。淸淨自土,安住正法,及能修行衆生。八不離願。願於一切衆生處,恒不離一切諸佛菩薩,得同意行。九利益願。願於一切時,恒作利益衆生事,無有空過。十正覺願,願與一切衆生,同得無上菩提,恒作佛事。又此十願與前十願義,同不別也。就經文內有四。初結前生後。二正明願體。又初願脫二句。第九願中,脫如意寶身也。三諸佛子乃至大願等,明修願方便,四以十不可下摠以結之。若依論本,別明十無盡成前大願。若依經本,卽是第四結願無盡。就此文中有四。初擧法及願立宗。二何等爲十下列十盡法,有二可知。三若衆生盡下將法對願,逆顯成盡。四而衆生下順結無盡。又第六願中論云:辨麤細中,竝云隨何意識身色心麤細故,土亦麤細也。餘相如論。又三種三轉者,就十盡句別中,衆生界、世界空界及心緣界等四,是世閒轉。法界、涅槃界、佛智入界,此三名法轉。佛出世界、如來智界此二爲智轉。就第二行校量勝文,有三。初牒前起後,二正釋行體,三諸佛子悉知已下摠以結之。二釋行文內有三,一大願熏心,成利安等益。二如是則成下人成信者。三樂以信分別下廣明信相。此文十行,卽爲十段,初信文有三。一摠立宗,次別釋,三擧要言之。下摠以結之。第二釋慈悲文有二。初擧三門,爲所觀。二對起慈,前文有三。如論應知。又論云辨遠離第一義樂中。三空離三障者,謂分別相取捨等,卽三性障也。餘行如論可解。第三果校量勝文有四。果如論應知。初調柔果內,初法次喩後合法中有四。一見多佛,起行之緣。二心大歡喜下明能練行。三多以二攝下乘前練行,明別地德。四是菩薩下明所練淨。二發趣果內文分爲二。初釋後結,前文有四。一法,二喩,三合,四結。法喩合中,皆有四句。一問地法,二是菩薩善知下明知解法,三諸佛子下明能行行。四得諸地智下明其能到,喩合四句同此。三攝報果文有二。一在家果,二出家果,在家有二。一上勝果,二能以大施下謂依王報,起勝行也。願智果如論應知。第二偈頌中,四十五半,初二十二頌上說分。次菩薩如是下二十一半頌校量勝分。次二摠結歎,初文之內,初十一偈頌地方便及住地文。次是菩薩下五行偈半,頌彼釋名及五怖畏。次常行下五偈半,頌安住文。次二十一半偈文內,初五偈半頌十願結及無盡文。次六行偈頌信等十行文。次智者於日夜下十行偈頌果校量,於中初一頌調柔果,次三頌發趣,次五偈半頌攝報果,次若以願力半行偈頌願智果。第二地內,六門同前。言釋名者,離能起誤心犯戒,煩惱垢等。淸淨戒具足故,名離垢地。二明所離者,依地論邪行於衆生身等障。依攝論,依身業等,於諸衆生,起邪行。無明又治二障。一微細犯過,二種種相業行。又治二業障及一報方便生死。三所顯者,顯最勝義。四所成者,成戒度。五所得果者,若通達法界最勝功德,得於一切衆生最勝無等菩提果,通果同初地。六釋文者有三。初偈生起,二長行正釋,三偈頌結前。初偈有二。初三偈文大衆獲益。三業供養卽爲三也。次有二偈,解脫月請生後地文。第二正釋文內,有二段經。一發起淨,二自體淨。發起者趣地,方便生後地中,三聚淨戒,名發起淨。三聚淨戒地中正行故,名自體淨。就初文內有三。初金剛菩薩結前生後。二何等爲十下正釋發起。三菩薩以是下結成利益。二自體文,大分有二。一明行體,二辨地果。初行體文有三。先解律儀,次釋攝善,後辨攝生。此十地內科文不定。初及第十同分爲八。此地爲二。三、四、九地爲四。五、六同三。第七地爲五。八地爲七。各隨一法耳。此爲地法甚深故,方便影顯,非唯一地有斯一門也。就律儀中,大判有二。第一明其性戒成就頓離諸過。第二菩薩如是下畢竟護持。就初文內,復分有二。初明自性成就,二遠離一切下頓離諸過。又論云:此二種朋者,憶二家語,往其二家詐爲親朋也。又經云:此聞不向彼說此壞故等者,此辨持意,恐彼此相壞故,不說也。又第十邪見中,七種邪見異相者,一異乘邪見依別出世行。次二依似法起,仍記、無記分二也。次一依無中妄計。次二依隱伏法生,仍一用內,一用外,分二也。次一依世閒法生也。經脫第一、第三句等文。又決定深信是異乘,罪福因緣,是覆藏見。如文應知。宜須思準也。餘文如論,第二攝善法戒文,文別有五。義別有四。要攝爲二。言文五者,如下文中,五處擧經,論別解釋。義別四者;一智,二願,三觀,四行。初思衆生,隨一切惡,皆由十不善道,是其智也。我當自住等,是其願也。此文有三可知也。又深思惟下乃至如來是其觀也。是故我應下是其行也。要爲二者。初二、一對智,爲方便,後起正願。後二、一對觀爲方便,後起正行。餘文如論。第三攝衆生戒文,大分有二。一廣明攝生,二諸佛子,是菩薩如是下摠結攝生。餘義如論。又問:‘殺生等,得二種人中果何也?’荅:‘此之習者,非是氣習,此名殘習。順人道業者,在人中,別報受。正報隨斷等者,仍是人中,不定報也。宜可準之。’若以名言,求之二報,亦有優劣。有無不定,此可思之,經歷三道義,亦不定。廣如大論說也。又二倒惡意專念行者伺緣名意,常樂二倒緣中,現起故,名意也。違理名惡,是起煩惱,作意而生,名專念行。二倒惡心非專念者,根本集起,是其心義。我淨二倒,望前常樂,根本集起故,說爲心。我是常本,淨是樂源,此二性成,非作意生,名非專念也。又追後報,中經脫障中,第八句失中,第一句也。又界差別內,第二別句內經中,第一句是論中第三句也。第二地果文內,三果同前,調柔中有三。一調柔相。二菩薩爾時,下別地行相。三佛子,是名下結說果相。前中有三。初法,次喩,後合,法中有三。一見諸佛起行之緣,二能練行,三所練淨行。中有三。初明供養,次明迴向,後受十善法行。依經略無迴向,攝報同初地。依攝論中,二地已去,有八種淸淨。此見多佛,卽彼見佛淨。此中衣被,乃至恭敬心,卽彼信淨。此中淨戒,卽彼波羅蜜。此中作王,卽彼第六成熟衆生。此中念佛,卽彼心淨。此中爲首等,卽彼慈悲。此住千劫等,卽彼生淨。此動地等,卽彼威德。餘地準此。三重頌文有二。初明說意,第二正頌,頌有二十六,文分有四。初二頌發起,次十六偈頌自體淨,次有七偈,頌果利益。次一結歎,自體文中,初有四偈,頌離戒淨。次有四偈,頌攝善法。次有八偈,頌攝利生。利生文內,初有三偈,頌願行集等。次有五偈,頌集果文。果利益中,初二頌調柔。次四頌攝報,次一頌願智。第三地內,六門同前。一釋名者,隨聞、思、修等,照法顯現,故名明地。二所離者,依地論,闇相於聞、思、修等諸法忘障。依攝論,心遲苦無明,聞、思、修忘失無明。復有二無明。一欲愛無明,二具足聞持陁羅尼無明。有二業障及一報方便生死。三明所顯者,顯勝流義。四明所成卽成忍行及四定也。五明所得果,通達法界勝流文句功德,得無邊法音,及能滿一切衆生意欲果及三地位,通果如初地。六釋文者有三。一偈頌發起,第二正明住地體,三偈重頌。初偈文中有二。初有六偈,大衆三業敬讚前說。此中有三初。一喜,次一雨花,次四歎德。二四偈生起後請。此中初三偈,是大衆請。次一解脫月請,就第二地體文,差別有四。一起厭行分,二厭行分,三明厭分,四厭果分。初文有三。一結前生後,勸修趣入。二何等爲十?下正辨起厭。三菩薩以是下結行能,入就厭行中有三。一修行護煩惱,二修行護小乘,三修行方便攝行。初文有二。初十辨無常,次十無救者,就護小乘中,有三十句。初有十句,明求佛智護彼小心。後二十句念益衆生,護彼狹心。前文有二。初摠,次別。二護狹心中,初十起悲,後十救度,度是悲益,亦可初十是其悲心。後十是慈心,於前中,初摠,次別。於後救度十心中,初牒前,起後,摠明度心。第二別明度心,別中九句。初三度處,次二度行。次三辨前,後一度果。三方便攝中,此內有五。一起觀方便,牒上三心,起後觀求。二卽時欲具下標趣方便,標其佛慧,彰其所趣。三作是思惟:下觀求方便,觀察推求度衆生法。四卽時知住下正知方便。五菩薩如是知已下轉修方便,修聞法行,攝取正法。第四正知方便者,前念衆生墮在煩惱業苦之中,以何方便,而拔濟之?令得涅槃畢竟之樂,卽知不離無障㝵智者,是如來智。智由何生?卽知不離八地已上如實覺起,覺由何生?卽知不離四地已上無生行慧。慧由何得?卽知不離三地禪定,定由何生?不離聞法。是故菩薩先求正法,旣聞法已,靜處思惟。思已修習,入禪無色,依此禪定,觀法無生,起出世慧。依無生慧,如實覺。依彼實覺?得無㝵智。旣得智已,便來救生。智相如是。第五攝生方便文中有二。初明求法,生難遭想,能捨外財。此文有二。初生難想。二但於說法者,下重人輕寶中有五句。此卽爲一句,爲求法故,是第二句,爲法捨施。又爲求法下爲法走使,爲第三句。破除憍慢,無苦不受爲第四句。於上不恭,爲憍。於下執我,名爲我慢,於等自大,名爲大慢。若得一句已下得勝財,心卽爲第五句。此中入校量,摠成有三句。此初成一句,得聞一偈下第二校量。是菩薩若有人來下是第三校量。餘文可知。第二又如所聞下隨文能行,釋厭分中,文分有三。一牒前聞法,靜處思量,以起後說。二明厭體,三明入意,爲順法行,而不樂著。第二文內,初禪中,卽離欲惡不善法者,是離障也。釋有四種。一摠相釋除欲界惡、不善故,名離欲惡不善法也。二依龍樹,遠離五欲,名爲離欲,斷除五蓋,名離不善故,龍樹、云、趣向初禪,遠離五法,斷五法矣。三依毘曇,五欲離故,名爲離欲。斷十惡故,名爲離惡,除五蓋故,名爲離不善。四依成實,斷貪欲心,名爲離欲。亦捨殺等,名爲離惡不善法也。有覺、有觀者,是對治也。麤思名覺,細思名觀故,龍樹言譬如振鈴。麤聲喩覺,細聲喩觀,離生喜樂,是其利益廢背欲惡。是故生喜,離過倚息故,名爲樂。入禪行者,是其定體一心支也。何故獨此名爲禪行。一‘心禪體故,名禪行。就二禪中,滅覺觀者,是其滅障滅,障之中,覺觀有三。一卽定心,二出定時,三識身中,麤動覺。此三竝是動亂之心。二禪勝靜同,皆滅之,言內淨者,是對治支。若有覺觀,濁亂不靜,此禪勝靜離彼外亂故,云內淨。言一處者,彰其治相,彼內淨心住於一境,更不餘緣故,云一處。故彼舍利阿毘曇言:欲界地中心行六處,以六識身取六塵故。初禪地中,心行四境,以四識身行四境故,以初禪上無鼻舌識故,但云四耳。二禪已上心行一處,唯意識身緣法塵故。又復相續無閒不斷,亦名一處,下論釋中具此兩義。無覺觀者,顯其能治,能治覺觀,前滅覺觀,直彰離過。如說滅諦,以爲無漏。今就能治,彰無覺觀。如說道諦,以爲無漏,定生喜樂是其利益。前初禪中,創背欲惡,慶離故喜。今此禪中,法從內生,慶得故喜。樂同前釋。入二禪行,是禪體一心支也。就三禪中,言離喜者,是滅障也。二禪喜心分別相生動亂多過,此禪定心轉寂故滅,行捨念慧,是其對治。言行捨者,是其捨支,行心調停,捨彼喜過故,名爲捨。此是捨數簡異捨受故,彰行也。言憶念者,是其念支,念前喜過,守心一境故,稱爲念念。與憶俱通伴而說故,云憶念。憶能發悟助念力强,所以通擧,亦可卽說念,以爲憶。如四念處,體性是慧,而名爲念。此亦同然。言安慧者,是安慧支,分別喜過說慧慧靜,名安。身受樂者,是利益也。釋悅名樂,言身受者,受有二種。謂身與心分別有二。一約根分別。五識中受依色根生故,名身受。意識中受從意根生故,名心受。二約所益,分別身心,下品之受釋暢在心,名爲心。受上品之受釋遍身心,就所遍處,從末爲名。故,曰身受。今從後義,樂處心法,此處增上遍滿身心故,說身受。顯樂增上,樂是心法,心中受之義不待言論,言諸賢聖能說者,此樂深勝唯有賢聖能說爲過,堪能捨離,非凡所能,彰此樂深,言念受樂入三禪者,是其禪體一心支也。謂念自地受樂之過,以入一心,就四禪中,斷苦斷樂,滅憂喜者,是滅障也。革絕四受,明禪不動,言斷苦者,苦實在於二禪中滅。爲欲彰此是不動禪免絕四受故,此說斷。亦可指彼三禪之樂,以爲苦故,斷三禪樂,卽名斷苦。何故如是彼三禪樂望麤心人,說之爲樂望後靜心,卽是大苦?如似世間拍手打木,於彼寤者,說之爲樂睡眠之人用爲大苦。此亦如是故,說斷樂。斷樂,者斷三禪樂,彼樂麤動故,此斷之。先滅憂者,初禪滅也。先滅喜者,三禪滅也。竝在前滅,是故言先,旣非此滅。何故論之?亦爲顯此不動禪故。若使憂喜前地斷故,彰先滅者,苦亦先滅,何不說先?釋言彰先,理亦無傷,但此爲明苦雖先斷,對苦之樂,此中斷故,對樂之苦,不得言先。若當說言先斷苦者,人謂彼樂,亦是先斷。故不彰先、憂之與喜能對所對,竝是先斷故,云先滅。不苦樂者,是其利益,餘禪之中,皆先明治。今此何故,先說利益?乘前所明,斷苦斷樂,對之卽明不苦不樂,彰益義便故,先論之。行實在後,此乃捨受不同苦樂。是故名爲不苦不樂。何故不名不憂不喜?釋有三義。一以此禪正斷樂受,而復無苦翻,對彼二。是故名爲不苦不樂。二前文中,先斷苦樂故,此偏對之明不苦樂。三五受中,憂喜名別,三受分別,憂喜二名攝入苦樂。苦樂寬故,捨受對之,名不苦不樂。捨念淨者,是其對治,捨是捨支,念是念支,前三禪中,有樂故,捨念不淨。今此無故,捨念淨也。入四禪行,是其禪體一心支也。四空定義廣如別章,此應論之。四定文如論分別,順法行者,爲依禪定順起,無量神通等故,入諸禪定,非愛著也。餘文如論。釋厭果中,分文有三。一明無量,二明神通,三摠結自在。餘義如論應知。又四無量中,經脫不二,及淸淨幷無念中,二句也。又身通中,經脫第六注水句,他心中,經脫第七妄行正行句,就釋地果,文分有三。三果同前。調柔果中,大判有四。一調柔行,二忍辱行德,三明別地行,四結說相。前中初法,次喩,後合。法中有四。初見多佛,起行之緣。二供養下明能練行。三於百千劫下明垢障薄。四不復積集下明所練淨。餘文如論。第三重頌文有二。初生起,第二正頌,頌有三十五偈。初二頌十深心。次二十四頌厭行文。次二頌厭分及以果分。次六頌調柔三果經文。次一摠結就厭二十四。初四頌護惱,次六頌護小,次十四偈頌方便攝也。第四地中,六門同前。言釋名者,不忘煩惱薪智火能燒故,名焰地。二所離者,依地論,離解法慢障,依攝論,微細煩惱行。共生身見等無明復有二種。一三摩跋提愛,二行法愛,又滅二業障及一種方便生死。三所顯者無攝義。四明所成者,精進行及解道品等。五所得果者,若通達法界無攝功德,得如所應一切衆生利益事果及四地位,通果同初地。六釋文者,文內有三。初偈頌生後。二正辨地體。三以偈結前。初有八偈。一有兩偈,菩薩供養。次天女供養,次三天王慶遇,以興供養。次一大衆請,次一解脫請,所以此有王及女請彰。此地正體智及外用俱成故也。就體文中,大判有四。一淸淨對治修行增長因分,二淸淨分,三對治修行增長分,四彼果分。初文有三。初牒前生後,勸修趣入。二明行體,三菩薩以此下結行利益。又論云二處順行者,地前方便思量正地,而未證得。正在地中,名曰已證。此二處行,同依所說故,名順行也。餘文如論。淸淨分有三。初摠,次別,後結。摠中有三。一明佛家轉,有勢力。二得內法,三謂十智教化成就。又論云:如來自身所有諸法以是諸法,顯示如來者,人法互顯佛證得法,還以勝法,顯示如來也。修行增長文有二。一護煩惱,是自利行。二護小乘,是利他行。此二各有二初摠,次別。又護煩惱中,就身念中,先觀內身,次觀外身,後二合觀。何者內身而復云外。若當就彼十二入中,分內外者,若自若他,六根爲內,六塵爲外,今四念中,自身名內,他身爲外。何故初別而後摠乎?釋有兩義。一破病不同,有人著內情多,著外情少。如人爲身棄行妻子及諸財物,著內多故,須教觀內。有人著外情多,著內情少。如人爲財喪身,爲欲沒命,著外多故,須教觀外。有人內外俱著故,須合觀二隨觀始終行者,本來於自身中,取有淨相故,先觀內,內求不得,謂外有之故,須觀外。向者觀內不及其外,觀外之時,復不及內。是故第三內外合觀,觀內身者,標別所觀。循身觀者,明其觀相,循猶順矣。其身相審,悉觀察,名循身觀。精懃一心明其觀儀。行者今欲破壞身相,非懃不辨故,須精懃。故龍樹云:離別常人易;離別知識難。離別知識易;離別親戚難。離別親戚易;離別自身難。行者今欲離別己身,必須精懃,懃由專意故,曰一心。除世貪憂,彰觀所離。何故此中偏離貪憂。如龍樹說。行者此中多生貪憂故,偏除之。云何多生?始棄五欲,念本所愛,是故生貪。未得道法,所以生憂。是故但言除世貪憂。又復貪者,凡夫多起。著境難捨,受生之本,三毒之初故。煩惱中偏說除貪,憂心一向除者起。障定最重,禪中先離。故五受中偏說除憂。若說除貪結,餘法隨之。若說除憂,諸受隨遣,譬如破竹,初節爲難,若破初節,餘節皆隨。貪憂亦爾。下觀外身,及觀內外,類亦同然。就受念中,亦初觀內,次外後合。十二入中,受唯在其外法,入攝故,今四念中,自受爲內,他受爲外。又復意相應之受,說以爲內。五識相應,名之爲外。亦得定受說之爲內,散受爲外,於此內,初別後摠。就心念中,亦初觀內,次外後摠,十二入中心唯是內,意根攝故,今四念中,自心名內,他心名外。又復意識名內,五識名外。又得定心說以爲內散,心爲外,就法念中,亦初觀內,次外,後摠。內謂心法,外謂非色、非心不相應行及三無爲。第二正勤義者,初二斷除惡法,後二攝善,前離惡中,先斷未生,後斷已生。斯乃說時,非是行體,亦可已生,是其先成無明住地。細故後斷未生,是其四住現起。麤故先斷,未生惡者,擧其所斷。爲不生者,勤之所爲,欲生進者,勤方便心。發心斷者,正明勤體,已生之中,類此可知。已生謝往云何可除。此乃斷於已生種類在未來者,令不相續,非謂斷於起已滅者,後生善中,先起未生,後廣已生,善非本有,習之方起。是以要須先起未生,後廣已生。未生善者,擧所修也。爲生故者,勤之所爲,欲生勤者,勤方便心。發心行者,正明勤體,已生同前,已起謝往。云何可策?此必策彼已生種類,在未來者,令其續起,非謂策彼起已滅者,第三如意義。就此文中,初摠標擧,後別解釋。言欲定者,直擧行體,欲能生,定因從果稱故,名欲定。亦可定心由欲而生。擧因名果故,云欲定,斷行成者,辨其功能,以此定行,能斷衆結,名斷行成。亦可名彼涅槃名斷,斷家行成,名斷行成。修如意者,就前欲定,明其修也。依止厭下明向第二斷行成也,於諸煩惱,初方便道觀過厭背,名之爲厭。無㝵正斷,說之爲離。解脫證除,說之爲滅。趣向涅槃,名爲向捨。若隨位分,見道已前,說名爲厭。除見諦惑,說以爲離,斷修道結,說以爲滅。得涅槃果,名之爲捨,此乃諸行治結次第,不須別對念處行等。餘行類爾。何故念勤不明此者?得定成就方有此能故,前不說。精進可解。言心定者,餘經論中,名爲念定。繫意住緣故,稱爲念,專心守境故,說爲心。思惟定者,餘經論中,名爲慧定,慧心籌慮故,曰思惟。餘廣如論耳。二護小中,五行內經脫第三句,彼果勝中,初明行果,次別地果,行果有六。始從離惱,終盡第六本心界滿。經中略無第二業染,餘義可知。又離惱中文雖背異,意亦得足耳。又論中業染者,有二義。不作一敬佛故,佛所呵,卽不作。二畏惡名,失利他,生煩惱,失自利故,不作也。增上欲中,第三離過別句內脫第一句,發勤精進中,經論似有不次,但依論文,次第消息。意亦無失也。本心界中,亦如是。地果文內三果同前。調柔果中,文分有四。一調柔行,二摩尼珠下明教智淨,以此地,成就淨證,從體起用。故有教智,不同前地,三四攝下明別地行。經本略無此句。四是名下摠結說相,前中初法,次喩,後合。法中有三。一見諸佛,爲起行緣。二恭敬下辨能練行。三是菩薩樂心下明所練淨,餘義如論應知。第三重頌中,初辨說意,次正偈頌有二十九。初二頌增長因,次三淸淨分,次七頌對治修行增長分。次九增長果。次七頌調柔攝報等三果。次一摠結歎也。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卷第三之上 乙巳歲分司大藏都監彫造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卷第三下終南山至相寺沙門 智儼 述第五地內,六門同前。一釋名者,得出世智方便善巧,能度難度故,名難勝地。二所離者,若依地論,離身淨我慢障。若依攝論,下乘般涅槃無明又有二障。一生死、涅槃,一向背取思惟。二方便所攝修習道品。又治二業障及一報因緣生死。三明所顯,相續不異義。四明所成,成禪波羅蜜及學四諦,五明所得果,通達法界相續不異,功德得與三世諸佛,無,差別法身果及成五地位,通果同前。六釋文中,大判有三。初偈頌生後,二釋地體,三偈結前。初十五偈一有二偈,菩薩順修供養,三業慶喜。次二天王讚佛菩薩無染功德。次十天女讚因及果大慈悲用二位圓備。次一解脫請顯入後證,就天女文,初七歎因。次二讚果。次一顯行成同證矣。地體有三。一勝慢對治,二不住道行勝,三彼果勝。前文有二。約慢二種。一自地慢,二他地慢,他地者前四地中,得出世智,取彼勝相,名之爲慢。下以十種淨心爲治。二自地慢於此十中,悕求勝相,復以爲慢。下以隨順如道爲治。此二文中,通名勝慢。慢治同故。初文有三。初牒前生,後勸修趣入。二辨十心。三菩薩以是下結成利益。又同念不退轉心者,方便淨心與不退證心,同緣正理,不異也。又文中七淨者;一戒,二定,三見,四度疑,五道非道。此五大小名同。後二名異小乘。後二者:一行淨,二名行斷,以彼宗趣滅故。大乘名者,一名行斷,二名思量菩提分法上上淨,以此宗依行斷,起勝求故。行雖有七文,有六句,第三句中,有二種淨。謂見淨及度疑淨,餘相可知。位者若依小乘,戒及定見道前。次三見道,次一修道,次一無學道。大乘三位論之。行斷及行在修道中,餘悉同前。所由如大疏也。二隨如道行有三。一擧前起後,摠顯如行。二得大願下別明隨順如道行相。三生定不退下摠以結之。就初摠中,法體有三句別有四。法體三者:一是四地所修道品,二此地前十種淨心,三此地中順如道行文四可知。不住道中,經文有二。初列四諦實法分別,是護煩惱自利行也。第二化衆生分別,是護小乘利他行也。前經有二。初列四諦實法分別,後就此四,諦明十觀門。卽化生分別。此文有二。初列十名,二次第解。又四諦門中,義含法界。菩薩於中窮照無遺。隨知異論曠別難窮。今此且就一數之圓,略爲十門。然此十門菩薩自知。知相難明故,寄化生,以顯其異,斯乃約化顯自知耳。以此通名所知法中智淸淨故,言開合者,此之十門摠唯是一化生分別,若隨所化,大小分二。前九化小,後一化大。隨所起,分以爲三。前五化生,令其生解。次四化生,令其起行。後一化生,令其入證。約人不同,離以爲七。初諦化於根未熟者,第二化於根已熟者,第三化於疑深法者,第四化於謬解法者,第五化於離正念者,第六、第七、第八、第九化正見者,第十化於大乘,可化隨法不同,分以爲十。若廣分別數別無量,言對實法,辨通別者,此之十門望前四諦,一、一皆通。初世諦者,通觀四諦法相差別。第一義者,通觀四諦體性空寂,言相諦者,通觀四諦非有、非無。言差別者,通觀四諦有無各異。說成諦者,通觀四諦緣起集成相狀事也。言事諦者,通觀迷四諦,成苦等事也。言生諦者,通迷四諦,起作集也。盡無生者,通解四諦,得證滅也。言入道者,通解四諦,得成道也。菩薩如來地成諦者,通窮四諦緣起實性淸淨界,成大乘道之因果也。又此諦者,前四諦直明法界體性,無非四諦也。下事等四諦,是有非四諦也。中閒五諦,是方便修相解觀次第,後之一諦明正稱周法界,自體因果圓通,妙道無障㝵德備也。若約教緣法相差別時,初四諦直明法體。次世諦第一義諦明於相。次相諦者,明一實諦相。次差別者,明法界、法相,成諦者明如此法界相,以凡夫迷倒故,菩提爲煩惱。三界繁興熾然於世,衆相集成也。次明事等四諦,顯正修對治方便行也。然此有非四諦,乃是菩薩正修方便法,而但以法通無局故。二乘亦得於中修進,下至人、天善業,亦於中行也。今但此菩薩正修對治方便道滿故,能顯發稱周法界,自體圓極無障㝵道故。欲明於菩薩地,次第入如來智諦故也。此觀意如論。信解智知非無盡智知者,釋前如來諦文,謂因智知,非果無盡智知也。又可說文字阿含,信智知非不可說義無盡智知也。此文約解簡耳。下離世閒品中重更簡文者,約行簡也。釋云鏡像智者,三乘見道前,依定成事。如鏡中像成事自在也。其位不定,或見道前煖等四善心,或光得等四定,或地前四十心,或十行、十迴向等,或世閒修慧,乃至得定已去,卽是其位也。二護小乘懃方便中,文分有二。一觀有爲虛妄誑詐,惱於衆生,起悲慈念。二得如是智慧下別明悲慈,此文有二。初明化他願。二如實觀一切有爲下明化他心。此文有二。先悲,後如是苦惱等下辨慈。悲文有二。初起悲方便,二知衆生下正明悲觀。於中有二。一觀如實苦,知苦體性。二又作是念下觀深重苦,就人顯過,明其可悲。就深重苦內經文有二。一觀衆生,怪生受苦,不知厭離。二無明癡故下,明諸衆生可怪所以。於中有二。初明深苦,二如是生死下,明其重苦。二釋慈文中,大判有二。一爲衆生,修習善法。二如是思惟:下,隨其所修,發願饒益。初文有二。一於衆生,念惡無始。此經文脫第三句、第五、第六句也。二唯我一人爲集善法。二發願饒益中,初一摠後九別。此中經文亦有不次。依次消文義,亦無失。釋果分文大判有四。一攝功德勝,二修行勝,三教化衆生勝,四起隨順世閒智勝,前二自行,是上所知智淸淨果。攝功德者,自分所成,修行勝者,勝進所成。後二利他,是前利生懃方便果,化生勝者,化他之行。隨順世智者,化他之智,餘文可知。四隨世智中,初摠辨意。二知世所有下,別釋化智。別中有十。一知書等,二知石性等,三治病方,四作論等,五日月等,六持戒等,七不惱生事,八安樂生事,九憐愍故出,十漸令信入無上佛法。經第三中,闕二句。第四義中,無一句,餘文如論。又論中難解,吉凶入等,隨時變相。遍身相者,是報定相,隨時變相有八。日一月二星三。星謂五星,東方歲星,南方熒,或西方太白,北方辰星中,有鎭星,以爲五。四宿者,二十八宿。謂角亢等五星,於中止宿故,名爲宿也。地動爲五,夢六,想七,吉凶爲八。狐鳴等竝吉凶攝也。又七曜者,日月五星是也。入者順也。順過去世八相之業,又順未來八相所表之果也。又遍身諸相者,定報愛、非愛果相也。又五行對五染者,持戒治破戒,四禪治貪欲,神通治邪歸,四無量治妄行殺生,祭祠求福等。四空治妄修解脫外道邪修等。就地果文中,三果同前。調柔分四。一調柔相,二又如日月下,明教智淨。三別地行,四結說相。經闕第三句,初文法說次喩後合,初明見佛爲起行緣。次能練行,後所練淨,能練行中,初供養,次修迴向,後受法行。經多不足,又四五地中出家果,在調柔中。所以者四地已去,得出世無漏行,出家義顯故,餘義如論應知。三重頌文,初辨說意,次明偈辭,有三十九。初十一偈頌勝慢文,次十三偈頌不住道勝,次有七偈,頌不住果,次七頌調柔等三果文,後一結之。初勝慢內,初二頌平等,次九頌順如道行。不住道內,初四頌智淨。次九頌勤方便利生文。第六地內,六門同前。一釋名者,般若波羅蜜行,有閒大智現前,故名現前地。二所離者,依地論本,微煩惱習障,若依攝論,微細相行無明。此文寄在七地。復有二障。一證諸法生起相續,卽迷俗也。二相想數起,卽迷眞也。又治二業障及一報因緣生死。三所顯無染淨義。四辨所成,成般若波羅蜜及解得緣起。五所得果者,通達十二緣生眞如無染淨功德得相續淸淨及能淸淨一切衆生染濁果,及六地位。通果同前。六釋文者,此文有三。初偈頌生後,二辨地體,三偈頌結前。初有十八偈,前有二偈。菩薩讚歎。次二諸天三業供養,次二天王及以眷屬讚歎地義。次有十一天女讚地體及諸別行。次一解脫請入後證,女文分三。初一妓樂供養,次九正歎果德及因,後一嘿念觀佛。就前九文中,初四歎果。次五歎因因,文有三。初一大悲行,次三六度行,次一結成德用。地體文中大判有三。一勝慢對治,二不住道行勝,三明彼果勝。初文有三。一牒前生,後勸修趣入。二辨相,三結行成。初明勝慢對治者,明十平等法,有二種意。一解境,二行境。言解境者,卽此十門爲所軌法,不住道下,明所依行觀門方便。言行境者,卽十平等,是觀解初不住道下,明觀成相。又依論別定其文,亦好也。就十平等,釋相有二。初一摠,次九別。九內有三。初七以無破有。次一以有破無。次一有無雙破。初文有三。初一空解脫門,卽無相觀。次五無相解脫門,卽無生觀。次一無願解脫門,卽無性觀。行次第者,此擧解成行外。疑云:若諸法無,云何住持夂,立決定?爲荅此疑故,經云:無性故。言無性者,無實性也。又云若諸法無,云何現見實有?爲破此疑故,經云一切法無相平等。又疑云:若法無相者,有處法生,有處法滅。取心隨見不由自意,云何無相?爲破此疑故,經云一切法無生平等。此下自體空不如無相等故,異前也。言無生者,一切諸法竝從念生,無有自立。云何云有?如論念展轉故,又云若法從念生,卽因緣非一?念等諸緣,我盡不見。唯見所成安立之法,念等不見。自可是無。所成之法應說是有。爲破此疑故,經言無成故。言無成者,旣法從他生,汝不見彼從緣而發?旣許法從他生,汝不見此相。當知所見,卽是自,謂不得實境妄。見所成故,論云無成平等。此二迷苦諦,又云若諸法從他生,無自生性,我許非。有能成之因旣得成他,此有力能,應說是有。爲荅此疑故,經云:一切離故,一切法平等。依經在第八句,言離者,但所執境,情謂是實。論彼所見,卽無所從。一非先有,二無實理。所以知若從緣生,卽似非實。故知所見,卽相非有故,論云染相故。此卽計集諦。問:‘若是集諦,卽心聚攝,解旣在境。云何應集?’荅:‘論能取體,乃應緣似。煩惱業用計,謂境中,境卽是無,義歸取想。故說是集。’又云:‘諸法因緣尋彼本末,俱不可取。’究其此意,染法依實迷眞,而生。染可說無,所迷眞俗,滅、道二諦順理應有。荅:汝謂眞俗順理,是實,此義不然。滅道,眞、俗乃是梵行智境界。云何乃云如謂是實?爲破此疑故,經云本淨平等。若如謂是實,卽雜染心生,不可言本淨。故論云:‘淨相故。此迷滅、道二,諦。又云:若法不如所見,是實有者,卽不應起世間言說。現見有名種種不同,卽驗所目之義非無。’荅:‘如言所執名非一者,是世謂施設,非先實有所以知。但見世閒得義不得,名得名不得義,故知諸名不定從義。汝謂義實起名等,此卽戲論非實有也。’爲破此疑故,經云無戲論故。名不實有,賴義而生,義不自彰,依名而顯。此卽驗,是戲論因緣。又觀義因,不見名果。又觀名果,不見義因。此似戲論,亦無故,論云:‘分別相故。所以唯說分別者,爲顯則相空也。’此迷四諦名,上已無生觀訖。又云我已知相是無,了生非有,卽驗如實,決定可趣。荅:‘汝謂自見爲妄非有,別見離念,爲可取者,還是分別故,’經云:‘無取捨故。無取捨者,本爲情謂。是取所見,竝皆不眞,今還見離念爲所趣,卽同前妄。’故論云出沒相故。所以唯言出沒,爲出沒卽空。上來以無遣有,又云:我尋相生,是無。又知離念非有,當知染淨、眞俗等法,竝無其體,不可進趣。荅汝見染淨不可進趣,謂無法者,此義不然。爲破此疑故,經云如幻夢等。若法竝無者,云何有處夢有處不夢?驗此卽知一切諸法不定是無。故論云:‘我非有相。所以爲破我無,唯言無我者,此爲離我,不住無我故,緣成幻事,此不同上見。此卽以有破無。’又云:‘所以我前起八種見,爲不盡理以無破有。復起一見,又不盡理已有破無。我今體尋不可偏有無取,今具成二義,此可當理。’荅如外所見,由不越情,所以知,如所見境,無義非有義。有義、非無義,據其理也。卽無是有,有無是一。爲破此疑故,經云:‘有無不二。言不二者,法不自住。應緣成起,復不是緣故,成果法,尋其諸法,不越自他。自他不住,卽事辨空。若如見有無,此由不越自他兩際’故,論云:‘成壞故。所以但言成壞者,謂成壞卽空故,不別求。當知不二平等之法非除滅有無,說爲不二。’此卽如實卽驗,所謂有無,名爲戲論。亦非有無二法之中,別立一法,以爲不二。不俱取同上以因緣法,有無同體,各非自性。說彼無法,以爲有故,有卽非有,還卽說彼有法,爲無。無則非無有非有故,無外更無別有爲二。無非無故,有外更無無法爲二。故曰有、無不二。又復說彼有、無之法爲不二故,亦無不二自性可取。此破有、無雙計,第三結文有二可知。義相如論耳。上約十二入,明所軌法,下約十二緣生,辨所依觀門。問:‘上明法唯約十二入,下諸觀門,何爲偏在緣生?’荅:‘攝法取寬故。約十二入以通依正,今約觀門,攝外從內故,局緣生。’此文有二。一就初住,以明不住,卽摠立宗。二作是念:下,約彼正住,以開觀門,卽別釋也。前地劣故,正住地中,方名不住。此地勝故,初住地中,卽名不住。初文有二:一觀法相等,牒前起後。言法相者,牒前文中,十平等法。隨順牒前,得入六地。此依論經,可準之。二復以勝大悲下,正顯不住,於中通下,六句分別。一釋其名,對前觀故,說此爲復。大悲首者,念衆生心,拔苦爲悲,悲增曰大。大悲增者,求心愍至稱曰增上。亦可求於增上果故,名爲增上。爲求佛智,利衆生故,名曰大悲。言滿足者,離有爲心,厭有爲故,觀察緣起。觀之窮盡,名爲滿足。此卽經論二處不同。若依論文,爲有四句,卽以第四生滅一句,依前三門,以成行相。若依經本,第三卽生滅,卽用生滅,爲滿足觀,據經論二處,卽有二意,釋生滅門。一依論者,所謂衆生菩提因緣竝是有爲,今以智知故,云觀生滅。二依經者,因緣之法順生逆滅,本爲救生故,云大悲。又若依經,成四句,亦得可知也。二明三心次第之義,乘前觀空法,便念衆生虛妄所纏。故先起悲,以悲念故,求佛智,慧欲以利益。故起第二。佛智必由離過所成故,起第三。三就自利、利他分別。前一利他,後二自利。四護煩惱,護小分別,前二護小,後一護煩惱。五就因果,初後攝因,第二求果,六不住分別。初一利他不住涅槃,後二自利,不住世閒。二就正住,別辨觀門,初通經論,料簡觀門。第二釋義。初門有三。一就經科,二就論科,三將經論,相對分文。就經科中。初別明十觀,二重結之。十觀是何?一因緣分次第,二三界虛妄下,明一心所攝。三無明因緣,有二種。下明自業助成,四無明令行不斷下,不相捨離。五無明愛取下,三道行。六無明行,是過去下,明觀先後際。七無明行,乃至六入下,明三苦集。八無明因緣行生下,辨因緣起。九無明因緣,是生縛下,辨因緣生滅縛。十無明因緣,是隨順有下,是隨順無所有盡觀。於中竝各有順、逆觀,卽爲二也。經文如此。二次就論科,論家就此十番觀中,三門分別。一就厭離有爲心中,觀十二緣,此卽是前滿足生滅門。二就深念衆生心中,觀十二緣,下說爲悲隨順觀。言隨順者,此卽起悲,隨順緣生,卽是前悲爲首。三求佛心觀十二緣,論文名爲一切相智分別觀。此卽是前悲增上觀。問:‘前初住先明悲首,次說增上。後彰悲滿,今此何故,先滿次悲後說增。上前初住中,生心次第故。先悲首後論悲滿,今此是其正行次第故,先悲滿後說增上。是義云何?前初住中,乘上十法,觀法空寂,便念衆生妄有爲法之所纏故。故先起悲悲,欲拔苦,須得佛智。次起增上,佛必由離有,而成故,明滿足生滅等觀。今正行中,離過爲始,先厭有爲,因自離過,便念衆生處之不出。次辨隨順,前二攝因,理必在前。一切相智,是求果行。理須在後,此三門中,各有十種觀因緣集,卽爲三十。一、一門中,各有逆順,卽成六十。上來分別,但依住地,明六十番,對下果分,有一百八十因緣觀門。所以知然,尋果分文,以三空門,分別緣集。據此門下,各攝不同故,經云依空解脫,得十空三昧。無生、無願亦復如是。據此三空,便有三義,若以空三昧,觀十二緣,卽十二緣皆空。所以知已論主,將分別無相,配空三昧。若以無相門,觀十二緣,十二卽似。若以無願門,觀十二緣,緣生卽實。論中又說無相觀門,爲眞實性。由眞實離相故,以配之。以無願,配無生,爲依他無生、無所願求故,用配之。此等因緣同異法門,準下十空三昧,思之可解。第三以論對經。分文分齊者,更有別意,前依經本十番,卽成厭離有爲因緣等觀。故據前後經本,十番成一百八十門。’又問:‘若依經論,無有六十門觀相,云何得成一百八十門?’荅:‘由經初,開三觀門,後論主仍許經本二十番,而更別辨三門、四門、九門等。今以前開三觀門驗。後經中觀體,卽知定有六十門也。’今以論對經,攝十門爲三番。意從一觀厭離有爲,此意下,更分別,然論攝經分齊者,就厭離有爲觀中,攝彼經內十番觀門,以之爲三十中初門。卽以爲一,名成荅相。次有半門,復以爲一。名第一義,後八門半合之爲一。名世諦差別。第二大悲隨順觀中攝十爲四。初門爲一,名觀衆生愚癡顚倒。次一爲一,名餘處求解脫。次四爲一,名異道求解脫。後四爲一,名求異解脫。一切相智分別觀中,攝十爲九。初有半門,說之爲一,名染淨觀。次一門半,復以爲一,名染依止觀。次有五門,各別爲一。次有兩門,復合爲一,名無始觀。次一爲一,名種種觀,通前爲九。此三門中,文之前卻,後當分釋。二釋義者,依大經本,法界緣起,乃有衆多。今以要門,略攝爲二。一約凡夫染法,以辨緣起。二約菩提淨分,以明緣起,約淨門者,要攝爲四。一本有,二本有修生,三名修生,第四修生本有。言本有者,緣起本實體,離謂情。法界顯然三世不動故,性起云衆生心中,有微塵經卷。有菩提大樹,衆聖共證。人證前後不同,其樹不分別異故,知本有又。此緣生文十二因緣,卽第一義。言本有修生者,然諸淨品本無異性。今約諸緣,發生新善,據彼諸緣,乃是妄法所發眞智,乃合普賢。性體本無分別,修智亦無分別。故智順理不順諸緣故,知修生,卽從本有。同性而發,故性起品云名菩提心,爲性起故。問:‘本有修生,旣是新發義,非是舊,云何乃說從其本性?’荅:‘此只爲是新生之義,說是修生。與本義親故,從性起。如今穀不別劫初,順本穀親,對今緣疏故,不說新得。此思可解。三修生者,信等善根,先未現前。今對淨教,賴緣始發。故說新生。’故論云:‘彼無無分別智故。四修生本有者,其如來藏性隱在諸纏,凡夫卽迷處而不覺。若對迷時,不名爲有故,無相論云:若有應見。’又依攝論云:‘有得、不得、見、不見等故也。今得無分別智,始顯法身出纏成淨,先無有力,同彼無法。今時成用,異本先無故,不可說,名爲本有,說爲修淨。問:‘若說始顯爲修起者,名曰修生。云何說顯?’荅:‘只爲是顯修生門中義,成本有,先在迷心,不說體用。今時始說有彼法身故,知與彼新生是親。先有義疏。’如論云,離不離無常。旣言無常,不可從本有,上來四義,於此緣生。理實通有。若對經分文,此十番緣生,唯有二門。一修生,二修生本有。餘二在性起品,第二染法分別緣生者,有二義。一緣起一心門,二依持一心門。緣起門者,大分有三。初眞妄緣集門,二攝本從末門,三攝末從本門。言緣集者,摠相論十二因緣一本識作,無眞妄別。如論說。依一心法,有二種門,以此二門,不相離故。又此經云:唯心轉故。又如論說,眞妄和合,名阿梨耶。唯眞不生,單妄不成。眞妄和合,方有所爲。如夢中事,知與睡合,方得集起,此是眞妄緣集之門。二攝本從末者,唯妄心作故,論云名種子識及果報識。對治道時,本識都盡,法身流轉五道。名爲衆生。隨其流處,成其別味。法種衆苦,如此非一。故知攝本從其末也。問:‘當隨染時,爲卽染也。爲由是淨。’荅:‘體是淨本,復是淨,不可名隨。故知染時,不可爲淨。若爾者,不應說言依如來藏,有生滅心。應但是單生滅。今言相依,如此說者,是有智人,染淨雙證故,作是說非局染門。三攝末從本者,十二因緣,唯眞心作。如波水作,亦如夢事,唯報心作。以眞作故。’經云:‘五陰、十二因緣、無明等法,悉是佛性。’又此經云:‘三界虛妄,唯一心作。論釋云第一義諦故也。’問:‘攝末從本,應是淨品。云何乃在染門分別?’荅:‘此攝末從本理在淨品緣生。今爲對染顯染,如幻故,在染門。’問:‘義若如此一切淨法,竝對染顯妄。云何獨辨攝末,從本在染緣生?’荅:‘凡論淨品緣起,有其二種。一爲對染,以顯妄法故。’經云:‘不如實知,諸諦第一義故也。二但顯淨品緣起,卽是顯理之門。卽如普賢性起品等是也。’餘義準此可解。此攝末從本,卽是不空如來之藏。此中亦有空義,爲自體空,後當分別。二依持一心門者,六、七等識依梨耶成,故論云十二緣生依梨耶識,以梨耶識爲通因故。問:‘與上緣起一心,云何取別?’荅:‘上緣起一心,染淨卽體,不分別異。此依持門能、所不同故,分二也。’問:‘如上諸義,竝一、一門別,云何得成一證境界?’荅:‘上來所辨,竝約緣別顯,卽是證境方便道緣。欲樂旣別,卽今所依觀門非一。若尋證境,如上十平等說。’上來第二釋義門訖。次對文釋觀門別相。就經本十觀內,初明順觀,次辨逆觀,餘皆同此。其逆觀相後當釋也。初因緣分次第者,三種分別。一明所治障,二辨觀體,三釋經文。餘皆同此。言治障者,治我見執,謂言十二分,是我作也。卽是身見、邪見遍通。若分文別,但治人見,此惑通彼三,空所治。治相云何?實無有人相。見有實人相,卽空門所治。緣起似我生,不如所取生,計爲似相,卽無生所治。所以得知有彼似我,故論云:‘自他差別識,從我見熏習生。故得知也。成似生及實法相,卽無願門。通治前二執,亦可治彼無我空及成八自在見相。所以得知故。’論云:‘自體空者有故,此成無性性也。卽治惑門。二觀體者,卽顯因緣理次第生義,以空及似實等三性,爲順觀體,逆卽成一緣起空、無性性觀。卽用緣起次第,理爲此觀體,卽依經辨也。若依論,辨但準以思攝。三釋文者,就因緣分者,卽因分也。次第者漸次也。觀者照達義,就此以題章也。此文有四。相從爲三。要則爲二。㧾攝爲一。門別四者一擧彼解惑,顯成無我門。二依論,愚癡下,依經一切凡夫下。責情顯理門。三依論,無智下,依經常隨邪念下。辨相顯實門。四不知諸諦第一義諦下,依實辨相門。相從三者,四門中初一名成,釋成無我中二名荅。荅顯無我,後一名相,謂依二諦,立因緣相。要攝二者前之三門,宗顯無我,卽因緣性。後一摠顯因緣之相,摠爲一者,摠爲第一因緣分次第,就第三辨相顯實中,只由癡愛,起諸業行,乃至老死,非由於我。於中初順。次逆,後結。順中初言無智有無。經云常隨邪念,是無明支,無智是癡,求是愛,求常名有。求斷曰無也。過去唯癡,實卽過去備諸煩惱。癡愛力强,所以偏擧,恒隨下是行。行有六句。前三行過,後三行體,依經行過三句,亦是無明支。以闕論中無明支故。以是行下,是其識支。初以是行,起心種子,乘前起後。由行熏心,令心生後。故說爲種。心者是梨耶。二有漏下,對後生死,顯前種義。有漏是愛,取想是見,依經取心心卽通想。所謂業爲地下,復生後有,是名色支。生名色等,有七句。一業爲地,二識爲種,三無明覆。四愛水潤,五我心漑灌,六種種見網,七名色牙生。問:‘如熏習義,應業爲種,識爲依地。云何今識爲種子?’荅:‘凡論業種分別有二。一熏習成種時。二引生,感果時,若熏習成種時,業爲種子,以識爲地。爲識未被熏時,未辨有種。今爲熏習始說種生,卽與上心,能熏義親。與識義疏故,識爲地。種爲能依,卽屬業也。二引生感果者,以識爲種,用業爲地。今言業者,是臨生。時中陰求生業心,爲正業種。猶在本識未發。今此上心求生中陰。是種子用相。此用相旣非業體,但能引業,感得識支。如地引種,令得成果。說業爲地,種在識內,與彼本識,同無記性。先造業識上心已謝。今種現與本識俱成,與識義親,與能熏疏故,判從識合爲種子。此有二義。一是卽體,二是異體。’此義如上科簡中說。問:‘業力無明及諸見等,現今求生,用識爲依。應從識爲種,云何別分爲所依地?’荅:理同依識,但有別義,不如種子。以種現同識無記性。一體,二相,俱一不分。求生無明,雖與識同現變成其色心等別。不如本識體、相二義。不可從識爲種子也。餘文可知。’二依止一心觀者,卽十二緣等能依也。心者卽梨耶心。就此以題章,以梨耶緣起,爲此觀體。三門同上。初所治者,治彼外境自性執,謂一切境,別治但以惑自性差別積聚等三。通治可知。二能治所依觀體者,還以三空空,似實無生性相,爲此順觀。故論云阿梨耶識爲大空故。無生似無願,實如論思之應知。逆成一觀,同初門,唯識者有二種。一梨耶唯識持生諸法,離識卽無。二明意識唯識,生死、涅槃、染淨等法,現在意地,離識卽無。梨耶唯識,始是解境,非行所依。意識唯識此終卽是正解所依,心終意始,反前可知。觀相云何?如行心見法爲境,若無觀心覺境,染淨等法縱任現前。今知意言所作,取謂之心不起。知識作時,名用依他,遣分別境。問:‘依他與識,云何取別?’荅:‘依他約相,所以知,分別體空相能起識。其識隨緣不守自性,此應成空,乃現似相故,知約相。二唯識約體,三界唯心。轉顯分別卽空故,得知也。識望無性,卽似非實,體相相成故,通說耳。’問:‘如境依心,卽是果法,似而非無,云何對識,辨境卽空?’荅:‘但從心,生非分別境,屬能緣心,依他性攝。所以知當見境時,但見實故。故論主以二諦等文,作一依止觀也。’問:‘後知唯識,還是所知。與前謂境,有何義別?仍判後境,屬依他性。’荅:‘前見境時,不知緣集後說識作。作義非性見識作。時分離謂染,緣集作理違分別性故,知別也。遣實境,滅時卽得一分空無相性。無相現故,唯識想境竝則不生,名得無性性。此是行門唯識觀法。若約生解,則三性後,辨無性性。’問:‘唯識想滅爲知無相境,遣唯識想。爲識想自滅。’荅:‘更無別知無相觀心,但唯識想兼知無性,取想則自不現在前。又亦依前勢,而得後心不生也。’今此文內通二唯識,三界唯心作卽本識唯識。如經下偈,但從貪心,有卽意識唯識。此是順觀。此依經辨。三釋文者,經本有四。初句立宗,二十二緣分下,引聖教證。三所以者何?下責。四隨事生欲心下荅。隨者衆多義,事者上心作業。生欲心者,心是梨耶心。問:‘旣言欲心,卽是意識。云何言本心?’荅:‘欲心有二義。一識現起作用分別。二卽此識因緣發起作用義邊,卽屬其事。能見取邊,卽屬意識,因緣發起,卽屬梨耶。爲起時,同處不可分別。如行誑心,名爲無明。欲心取境,卽是不了。豈可欲心之後,別辨不了故知卽欲名爲不了。但成文故,語有前後,事是行者,上心分別。事卽是業行,行誑心,名無明者,其行現成分別實相。今梨耶識變成不了,名爲意識。取其實事故,名無明。’餘文可知。此依論辨。問:‘此與經本何別?’荅:‘經通論局也。三自因觀者,自者揀他之異名,唯揀邪因,不揀正因。今此觀內攝四種因,因緣增上緣、緣緣、次第緣,以四緣理,爲此觀體。’自此已下,至因緣觀,竝用三性相爲順觀體,用三空門,爲逆觀體。但義別分,有此諸觀。於分別性內,揀異妄計。三門同上。言所治者,治異計因緣執。如修道貪、嗔、癡,實非發業,計具因緣,能發生業,卽戒取見。如自性非因爲因及心煩惱,分同此治。二所依觀門,者明此自因具四緣等,能生諸法。此具因緣親疏二理,名俗諦觀。妄計不生成一分眞也。此經文辨之。三釋文者,今言無明,有二種作等者。一親因緣,二是疏緣,一緣中癡,是親因也。二與行作因,卽疏緣也。此中攝三緣,餘文類可知。又但取疏因,此約論辨。第四不相捨離觀者,三門同上。不相捨離者,無他別時,相離生也。三性分同上自因觀,初明所治者,因果異時計,謂因滅果後生。此卽因不生果失,更有餘失,思之可解,是戒取見。二所依觀門者,以同時生果理,爲此觀體。此親、疏二因俱同時。此約經文辨,觀相云何?無明有二種。一子時,二果時。彼二種時,非是前後。依子取時,名曰子時。依果取時,名曰果時,其義云何?子者令行不斷,果者此子時中,所成行果。依此取時,名曰果時。問:‘果因同時,卽別體過,若前後生因,不生果過?’荅:‘我立因果,異彼二失,由是同時,異第二失。爲是因果,異第一失。此非逆觀,去情說也。但顯俗諦理,非第一義。所以知同時。’故論云:‘有二種義。故緣事示現,云何二義?一是因義,二是果義。緣事示現者,依緣二種義,示現二種時。如是餘因緣分自生因二種義,緣事應知。又論主引中論偈,云衆緣所生法,是卽不卽因。亦復不異因,非斷亦非常者,明因果兩義,各非斷常行,是無明,果不卽無明因,由是果故,不異無明因。因義反前可知。非斷亦非常,行由是果非斷,是果無力非常,卽此時中,無明是因非斷。是果因故非常。此義論主剩去外情,作逆觀說,非順緣生,俗諦門。所以得知。論主後自屬當。’經云:‘自生因緣觀義,如前說故知也。’此約論辨。五三道觀者,三者數,道者通生義,以煩惱業報及通生義,爲此觀體。三門同上。初所治者,對治因緣,廢事計理執,謂計諸法通因緣理。卽廢事執理失故,論云:‘若因緣生者,一切法俱生,故得知也。’問:‘如論文此語,屬後三際,云何從前以爲所治?’荅:‘論主別有異意,科後八門半觀,以爲俗諦,明執是過。故從後說。’論主用三道,爲攝過觀,卽體是過,不可別有所治。今依經本,三道是德故,有所治。將在前論,所以知論主別有異意。如前依止一心觀,分爲兩門,豈是十番意也?亦有解者,作外人與論主,成失。若作此釋,義轉難解。所以得知。疑云:‘若因緣生者,一切法俱生。’論荅云:‘過去業有二種。一未作業,二已作業。只可未作者,非一切生,已作者應一切生。爲如是故,今成論主與外,成失屬前治也。又一因生諸法,如計宿作及自性等,分同此治。是戒取耳。二所依觀門者,對三性分,同上。自因觀因緣之道通生諸有,依煩惱道,生諸有故,同在有流也。依業生諸有,六道不同。善惡有異,依報生諸法,相續,不斷。故得三有成其事業,諸相不同,此理、事相應理故,法齊生。由事隔故,不互相生。若但因緣理不藉事生者,卽三有不成。此依經本辨。三釋文可知。依論辨之可知。第六三際觀者,三者數,際者顯無始分齊,卽以三時因果理事,爲此觀體。三門同上。一所治者,治無因執,卽常見也。謂執諸法不從因生,復言未來無生老死,卽斷見也。二能治所依觀門者,無明行等,是過去世,治現在世,執身常見。愛取有等,是未來世,對治外執斷見過也。此依經辨,三釋文者,於是有三世轉者,謂展轉生諸後有也。’此明過患,耳,餘文可知。此依論辨,七三苦觀者,三者數,苦是義。三門同上。初所治者,謂樂淨執,是因緣身具有三苦。迷者不了謂有樂淨,卽見取攝,分有戒見。二明所依觀門者,三性同上理實通論諸因緣,分竝通三苦。今約相分,無明行等,以爲行苦。觸、受二支,名爲苦苦。愛取有等,以爲壞苦,行苦漸增治,身常住計,有樂淨。苦苦治身自在,有樂淨執,壞苦治身究竟,計有樂淨。此名順俗觀,但以三苦及知苦智,爲此觀體。‘此苦何得通三性?’荅:‘如經說不生不滅,是無常義等。’又云:‘是苦是諦是實。又廣如中邊論,準此思之可解。此依經文,辨釋文者,所以五支名爲行者,諸分漸增未對苦具,但行相增。所以觸受爲苦苦者,爲此二支,對外苦具增。所以愛等,名壞苦者,是未來世生因緣故,違現在身,顯其現在非夂住世。愛取有體,非是壞相。顯他壞增,名爲壞苦,餘文可知。此依論辨,八因緣觀者,三門同上。初所治者,謂計單因有力生果。如執自性因能生,二十五諦。此身業因緣生,迷者不了謂自性作,卽戒取見。二所依觀門者,三性同上,因緣生理,因有決定用,緣有發果能。方得法生,若但因力無緣發果能者,其因六義不現在前。何者爲六義,一念念滅,此滅是空。有力不待外緣,所以有力不待緣,爲因體未對緣事,自遷動故。二俱有,是空有力待緣,所以者,爲得外緣,唯顯體空,俱成力用也。三隨逐至治際,是有無力待緣,所以知爲隨他故,不可無不能違緣故,無力也。四決定,是有有力不待緣,所以知以外緣,未至性不改自成故。五觀因緣,是空無力待緣,所以知爲得外緣,唯顯親因非有無力,能生果也。六如引顯自果,是有有力待緣,所以知得外緣時,唯顯自因,得自果故。問:‘此因緣六義分齊云何?’荅:‘今言賴緣者,但取因事之外,增上等三緣,不取自因六義互相發,起。所以者其六義同是理法,對因事顯。廢去因事,六義不能自互發成。但外三緣各有理事故,得對顯因果之義。若爾六義不應摠別相成。荅六義六相共成者,六相有二義。一順理,二順事。此二義中,順理義顯,順事義微。其四緣事二義同上,但順事義增,順理義微,所以知因緣生果,法起迷義顯,爲此經主別將六相,照令入理故,知四緣順事增也。所以知摠別順理義增者,爲辨六相,令見心入理。’問:‘何以得知但摠別六義得順理增,不取於事?’荅:‘論主簡事不具六相,唯約義辨。故知也。’上二微義思之可解。今因緣內,各有六義故,說別有勝用,能感於果。問:‘如論說,非他作自因生,非自作緣生故,旣言非他,云何但取勝力生果?’荅:‘此擧不生,形取勝力。若不形奪勝力不成,令此奪中偏取一邊勝力,屬上論主自因觀。今此通取二力,不能生義分在其中,準上六義,思之可解。有一別空。入後觀門,至當分別。此卽治前獨因感果執。業藉緣造,後感果時,不賴緣發,此執何失?’荅:‘若廢於緣,自因勝力竝皆不成。此卽俗諦觀,卽以緣生理事及智,爲觀體。此依經辨。三釋文者,因卽通親疏四種緣也。’故論云:‘因緣能生行故知也。’釋名可解,此依論辨。又依小乘,六因四緣,若依三乘,卽十因、二十因等。若依一乘,卽隨法辨因。爲一、一因緣理事,各別與法界等。今六因義唯一乘能窮,此約別教說也。第九因緣生滅縛觀者,因緣牒成俗諦所依,生者所生果法。滅者卽離因緣生力,縛者卽順縛,從俗諦,依經本,闕無。因緣二字,三門同上。初所治者,此下二觀,但治心惑,通義可解,謂因緣共力能感果執。又言因緣法,各有少力,共成一果。其緣起理通有諸義。若見因緣有力共生,卽名迷理事分別執,卽法我所見。二所依觀門者,此用三空門,爲順觀體,逆成一生縛無分別觀。餘意下更分別,諸緣生法成俗諦相,不屬一緣,但諸已生法隨去。一緣果不得立,不簡親疏故。論云:‘無知者故,作時不住故,若因緣能生不可不住。’問:‘若因緣不生,而有法者,先因未集,亦應生果。又此縛果法因緣生果,二相何別?’荅:‘因緣生,內有二種義。一無自生義故空,二因緣有力故生得果法。此緣縛內,亦有二義。一是俗諦緣起,二離緣生力故空。因緣生法,若無生力,果卽不成。此緣縛觀,若無空義,果卽不成。云何是空相?荅:因內求疏不可得。又求生力,不可得。前因緣生果生義,是增空義,是微爲因緣法順生迷增故。今緣縛法空義,是增生力義,微爲緣起法順生無分別智故。’故下經云:‘緣起之法離有無也。此雖無生力,以空力成故,離自性生。’經云:‘無住爲本故。’問:‘若緣生順迷增者,此義可爾。緣縛順空增。應當眞諦攝。’荅:‘空有二種。一爲空故,得有俗成。二爲空成無分別。今取成俗空故,不入眞諦。’問:‘若觀生縛,當見法時,爲有能縛因力,以不?’荅:‘無能縛者,若有能縛,卽是他義。縛義不成,此義思之可解。’今以俗諦無分別理事,爲此觀體。此生縛觀不分因果,此依經文辨。三釋文者,無明因緣諸行生以生縛,說者無明因緣牒俗所依,以生縛說者,正斥觀體,生縛同前釋。所以言說者,爲欲依言得平等俗故。何者以此縛字,通目生不生爲縛故。非親生爲縛故,非無俗諦,不可以二相,取此二義、故以一說縛字印,定其義。若廢其說,恐別取二義故,觀依說以取義也。理在說中,餘文可解。又經通取空力多,有力少論卽不說因也。此依論辨,十無所有盡觀依論名,隨順有盡觀三門同上。初所治者,此局心惑,亦可通諸使,俗諦通攝故。爲執因緣,但有應俗相,自體空義,不現在前故,是障也。何者但因緣生法,卽自體空理,不自住。順成俗諦,成俗諦果時,仍以不同因緣,以此義,求有不偏增。若迷謂唯有俗者故,是過失,卽法我、我所見。二所依觀門者,三義同上。生縛意趣有異。後自分別,諸緣生法,不起卽已起卽雙現。如彼渴鹿見陽焰,水乾濕竝彰。又如鏡像染淨雙現,此是正理。問:‘其所現空,爲是眞諦,爲是俗諦。又此觀法與前緣生及以生縛,云何取別?’荅:‘因緣及縛唯成順有。今第十觀空有俱順。又此空有竝是俗諦,汎明眞俗,此有多義。一體相相對,二空有相對。如此分眞俗,其義非一。若空有分眞俗,有則爲俗,空卽爲眞,卽證智所知。若體相相對,空有可以相論故,若約此義,俗諦通空有。此空是自體空,非事空也。’故論云:‘是心眞如相,能示摩訶衍體。故知雖是眞如得名,俗相不是體也。此卽空有同爲一相,以緣順性,理事爲此觀體故。’上文云十二緣生,是無爲也。此依經辨。三釋文者,隨順卽空,隨順於有盡者,爲空隨順,卽有盡滅也。此順論主後釋,不順經文。若依經無所有盡觀者,無所有者所順,盡者能順。俗相卽空順於滅理,以俗相求法,卽盡其性。此是周盡之盡,亦有解者以盡字爲逆觀,此不應經文。爲文中別有逆相。又若此盡,卽是逆者,諸觀竝應置其盡字。文云:‘無明因緣諸行生,是隨順無所有盡觀者。因緣無性,卽相辨空,空故隨順無所有理,盡其性也。十觀亦有相生次第,爲知諸虛妄過故。故有第一,旣識妄已未知妄法,依何得生?故有第二。識知所依未知有何理?故有第三。已知生理未知依何時故,有第四。識知時,已未知約何義?故明第五。知其義已有何本末?故有第六。知本末已未知有何過?故有第七。知其過已,云何對事成?故有第八。知成已未知有何相?故有第九。知相已疑謂乖理。故有第十。依經十番訖。二依論分別者有三。一厭離有爲,二大悲隨順,三一切相智。初厭離有爲者,解則爲順,行則爲逆,解中以三空相爲順。大分爲三。一成荅相,二第一義諦,三世諦差別爲知。世無人成,世有爲過。故須第一。旣知過已,未知趣何理故,有第二。雖知所入法,未知依何而得故,擧俗諦辨所依觀門。’故論云:‘隨順觀世諦,卽入第一義。’初釋文如前。問:‘此相卽俗諦,何須第三?更明俗諦。’荅:‘此辨俗諦爲取過失二。第一義諦釋得脫所以,就彼因緣,觀第一義,得脫因緣。此取依止觀中上半門也。世諦觀者,世卽時也。諦者時中法實,此合經中,後八門半爲六門觀,初半爲一,取二爲一。次三各一,後三爲一,初名是染染依止觀。染者能依也。依止者,所依也。此六門中,初一門明染依止。次二建立染相,次一就染彰過,次二正觀防非。後一辨觀分齊。又云何染故明染相,染何所依,依第一義,何故說依妄法依眞?爲欲就之求眞故也。二言因觀者,觀染所因。’問:‘論主合本二觀爲一因觀?經本初爲自因。論主云他因,經本不相捨離。論主云自因,此義云何?’荅:‘經主言自簡異外道,論言他者,就四緣內,簡取增上緣。成十二因緣義,準論主意,消彼經文,卽擧親別疏,取其疏緣。不取親者,爲不順十二因緣故也。云何不順?十二支中,但行有二支,報因義顯。餘者略而不具。又別取增上緣故,簡之所以名疏緣。作他因者,爲增上緣,對親因爲疏。望增上,自果爲親。今對親因,說彼增上故,說他因亦。可反之取其他也。經名不相捨離,如前觀釋,亦通親疏。論言自因者,增上緣中,取親因緣,卽互爲因。等由互爲因,通諸支故。三攝過觀者,攝十二緣,以爲三道觀察,唯是苦集過也。四護過者,護彼凡夫邪見過也。五不厭厭者,防離二乘慢心過也。微細之苦,二乘不厭,菩薩能厭,名不厭厭。六深觀者,觀行窮深,因緣之理妙過情趣故,名爲深觀。相云何?論主分本三觀,以爲四法趣其深理。一非他作自因生故,卽成自因。具有勝力,離無因計。二非自作緣生故。卽顯疏緣,具有勝力,卽離單因生果不藉緣失。此二種義離自性執,由順俗諦見,心不息。’問:‘何故不言各有少力,共成多力?’荅:‘若少多則不成。三非二作但隨順生。此則去前見,因緣相隨順生者,有無不可取,爲隨有故。不可無隨順有故,非自有復隨順有,非定從因生故,離有無,不可取也。四非無因作隨順有故,卽離意地,謂無分別。其法如上,十平等攝。此卽深觀之妙趣也。’問:‘此觀爲是逆觀,爲是順觀?’荅:‘此通逆順,隨順觀,世諦卽順也。卽入第一義諦故逆也。此觀通治諸惑,不別明所治,以一緣起,無生唯識,爲此觀體。’問:‘如上諸義竝是順觀、逆觀云何?’荅:‘眞、俗二諦非分別知,但對見情故,分二相。欲知逆順者,唯越見情,卽逆順相應。云何作方便?如諸觀門,互相形奪,卽體其理,得滅諸見,餘義可知。二大悲隨順者,大悲隨順因緣,亦可因緣隨順大悲。論主合十爲四。一以第一,爲愚癡顚倒,二以一門,爲餘處求解脫。三以四門,爲異道求解脫。四以四門,爲求異解脫。第一辨過爲所離,第二所求理,三爲所依道,四爲所求果。此四門中,一、一對番,邪爲所治,正爲能治。初愚癡顚側者,隨所著處,愚癡及顚倒,此事觀故,以著我故,一切處受生遠離我故,卽無有生。卽以顚倒,治法我相用,知過心治執我心。餘處求解脫者,凡夫愚癡顚倒,常應於梨耶識中及陁那識中,求解脫。乃於餘處我、我所中,求解脫。此義云何?應於梨耶緣起法中求,乃於妄我境中,求解脫,卽用識境,以治我境,以唯識智,治我智矣。云何異道求解脫?於顚倒因中,求解脫,此義云何?應因緣理,中求道所依,乃於妄因自性等中,求解脫。道則以自因理治,自性爲因生。二十五諦理法爲自性因,不平等故須治也。何者爲二十五諦,五知根卽眼等五根。五作根,卽手腳及口大便、小便根,幷心平等根爲十一根,五大卽地水火風空。五唯量,卽色聲香味觸。加前十一,爲二十一。憂喜闇亦名染。麤黑卽是貪嗔癡合名染。心諦爲二十二,慢諦亦名我。心爲二十三,覺亦名智,爲二十四。自性爲二十五,人欲死時,不能作業故。先五作根壞變爲五知根,肉眼壞變,爲火大。耳變爲空,鼻變爲地,舌變爲水,身根壞變爲風。五大壞變五唯量,地變爲香,水變爲味,火變爲色,空變爲聲,風變爲觸。唯量變爲憂喜闇,憂喜變爲慢,慢變爲智,智變成自性。今壞者,非滅壞,但無現用。還歸於本故,名壞也。成反前可知。不相捨離,以治梵作,爲梵天。與衆生相離故。三道治苦行因,爲苦行非樂因故。三際治無因,前中後際因生故。用四智心,治邪智,此有二義。一以緣起,爲正道體,以修成智,爲助道體。自因等爲正道體,二以無分別智,爲正道,諸道品爲助道,卽擧法取能觀智,爲道體也。求異解脫者,汎釋解脫,有三種。一顯緣起,第二生智,第三滅惑。今於我、我所中,求解脫,妄計常樂我淨。三義卽俱不成。論以四義顯之。一用三苦,治彼樂倒,顯緣起理眞實樂德。行苦等遷動無故。二用因緣,治彼我倒,卽顯我德,有爲不自在故。三用生縛觀,治彼淨倒,卽顯淨德。縛非自在淨故。四用隨順有,治彼常倒,卽顯常德,爲隨順三有,不常未出故。又用常樂等,次第配之。餘義如論。三一切相智觀者,一切卽所觀境,智者能觀心,一取有分觀內半門,爲染淨分別觀。染者我慢煩惱染,淨者無我慢淨。分別者,差別而知。仍依止觀取十番內一門半觀,爲依止觀,前次第半門眞俗二法與迷心爲依。後一心觀與俗諦爲依。二依義齊故,通一依止、一心依止,通生依止及境界依。前半門內,唯境界依。三以一門,爲方便觀。方便者,因緣二力方便發果。四以一門,爲緣相觀,緣相者,因緣生果之狀相義也。亦可增上緣狀相義也問此一門與上方便何別荅前取因緣力,後取成事狀相。又前位後欲明有支無作,唯有緣相義也。五以一門,爲入諦觀。入者觀心,諦者所知苦集諦也。六以一門爲力、無力信入觀者,如無明行生識等果,名爲有力。識等不感後果,名爲無力,以此因果分齊,令人信入故,名信入觀。七以一門,爲增上慢等者,聲聞人未斷行苦,謂爲究竟故,名增上。已斷麤惑,名非增上,擧此深苦,令人信入。八以二門,爲無始觀。言無始者,無彼無始也。爲成因生故,非緣作,爲成緣生故,非因作。此二處求無作者,始復求二作,非自成故,無自性,始名無始觀。所以二觀爲無始者。荅:因緣相形不可說始,以生縛觀,表法有終。若法無終,不可但說言無始觀。’問:‘縛云何終?’荅:‘若縛是果不可說,有終爲縛,不定果一相故說終。九種種觀者,但俗隨順因緣非一故,云種種。此九觀門,是種智境,治無智障,能觀法體,卽爲能治,非理觀智境,亦有逆順,逆者煩惱滅,順者得法體。三彼果勝者,文分有五。一對治滅障勝者,是前勝慢對治家果,前修十法,而爲對治。此地滿中,更以甚深三脫爲治。名對治勝,前治五地染淨慢障。今此更治微細我心及有無等,名滅障勝。此中文亦有背向,消息無違也。二修行勝者,是前不住道行家果,依前不住,更起勝修,名修行勝。三三昧勝者,望前治勝,以說果也。前修三脫,而爲對治。彼治轉增,名三昧勝。此中文用論,比之可解耳。四不壞心,者望前滅障,以說果也。以滅障故,三昧之心不可破壞。五自在力者,望前修行,以說果也。依前修行,上進無㝵,名自在力,餘文如論。二修行勝中,初明修行之心。二菩薩作如是、念下,明修行勝,此文有二。初明修行,二卽得無障㝵下,明修行勝。餘文可知。’就三昧有二。初辨空門,二無相下,等餘二空。餘義如論。後二果中,各初一摠,後句是別,就地果文內。三果如前,調柔分四。一調柔行相,二月光喩下,明教智淨。三別地行,四結說相。前中初法次喩後合,就法說中,多見諸佛爲起行緣。次能練行,後所練淨,餘文如論。三重頌有二。初明頌意,次正偈頌。偈有三十九。初三一句頌十平等,次十九三句頌不住道行,三次六偈頌不住果,次有九偈頌調柔三果。次一歎顯說分齊,不住有二。初十七一句頌十種觀,次二半頌結文,不住果文,中初三頌三脫,次一半頌修行,次半頌三昧,次半頌不壞心次半頌自在力。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卷第三之下乙巳歲大藏都監開板 柱
- 1)가분(加分)의 세 가지 가운데 세 번째이다.
- 2)청문의 경문을 크게 둘로 나눈 가운데 첫 번째를 다시 사람에 따라 셋으로 나누는데 그 세 번째이다.
- 3)게송의 경문 가운데 의대[義]를 밝힌 것을 말한다.
- 4)게송의 경문을 둘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이다.
- 5)행의 체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두 번째이다.
- 6)행의 체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세 번째이다.
- 7)여섯째 경문을 해석함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세 번째이다.
- 8)경문에 의하면 선법(善法)이 아닌 것을 여읜다는 의미이다.
- 9)염행의 세 가지 가운데 세 번째이다.
- 10)제3지 안의 여섯 문 가운데 여섯 번째 경문을 해석함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세 번째이다.
- 11)수행이 증장하는 경문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두 번째이다.
- 12)여섯째 경문을 해석함 가운데 셋이 있는데, 그 세 번째이다.
- 1)신수대장경에는 ‘견행정(見行淨)’이라 되어 있다.
- 2)신수대장경에는 ‘전도(顚倒)’로 되어 있다. 『대정장』 35, p.64하 참조.